2019년 4월 21이 주일 오전 - 부활의 산 소망
김동민2019-04-21조회 227추천 29
2019년 4월 21일 주일 오전
찬송가 : 28장, 32장, 185장
본문 : 베드로전서 1장 3절 ~ 1장 절
제목 : 부활의 산 소망
요즘은 모두 소식들이 다 다르고 모든 것들이 환하게 알려지는 시대가 되어서 무슨 날이 있으면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그 때입니다. 오늘이 부활절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무엇 뒤에 절을 붙이면 곤란해집니다.
날 중에 가장 귀한 날은 뭡니까? 주일입니다. 모든 날 중에 가장 귀한 날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부활주일 감사주일 이러면 성경적으로는 옳지 않습니다. 주일보다 귀한 날은 없습니다. 주일인데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 부활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그렇게 성경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지키라고 그렇게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탄절이 성탄절인 것은 명확하진 않습니다. 사람들이 짐작해서 한 것이 성탄절인 듯이 부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절을 통해서, 이제 주님 부활을 새겨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 부활을 말하는 걸로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부활은 죽음이 전제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람은 죽으면 끝입니다. 그러면서 영과 혼은 낙원에 있고 육은 땅에 뭍혀서 주님 재림하시면 영원한 세계로 택자의 몸은 천국가고 불택자의 것은 지옥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은 사람의 것이 살아나는 것은 별로 없는데 있기는 있습니다. 구약에 에녹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심신이 죽음이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에녹의 육도 죽었습니다. 엘리야의 육도 죽었습니다. 다만 몸과 마음은 죽지 않고 승천해서 그리 되었는데 이 세상에 있을 때 그 몸 그대로 천국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이 없을 뿐이지 통과는 해야합니다. 일반인들은,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사람이 죽으면 택자는 낙원에 있고 몸은 물질계에서 흩어져있습니다. 불택자의 영과 혼은 음부에 가서 있습니다. 그리하나 주님 재림하시면 각각 자기 몸을 되찾아 입고 택자는 천국가고 불택자는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올라간 사람이 에녹과 엘리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경우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 중에서 살아나고 다시는 죽지 않는 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 부활은 역사에서 주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절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 외에도 신앙 생활 하다 보면은 우리는 능력이 없어서 안 되는데 참 종들이 하는 복음 운동회에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 때도 그런 적이 있지요. 그런데 죽은 사람들은 살아났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런 것은 부활이라고 하진 않습니다. 다시는 죽지 않는 부활.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입고 있던 몸과는 다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우리의 이 몸은 시공의 제한을 받습니다. 혈육이라고도 합니다. 영원한 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 겁니다. 공간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과 같이 시공을 초월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시간의 개념이 없지만 우주를 1초에 천 바퀴 만 바퀴 돌 수 있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 마치, 과학 소설 같은 이야기인데, 이게 사실입니다. 이런 말은 하면 안 믿는데 과학이 발달되어져 가면 100년 전에 말이 안 된다는 소리가 현상 세계에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 인간이 현재 알고 있는 것이 초월해버리면 성경을 부정하는 사람이 입이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기 때문에,
이런 것은 아무리 과학에 말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 어떤 논리로 사람이 살아나는 이론을 밝혀내라고 하면 논리적인 뒷받침은 어려우나 되긴 합니다. 때가 되면 그런 논리적인 뒷받침도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에게 자동차가 동력 장치로 달려가는 것을 말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공고만 졸업해도 알아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어리기 때문에 설명해도 모르는 것입니다. 부활의 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가 어리기 때문에 모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밝혀주시고 우리가 장성하면 알게 됩니다. 어릴 때는 모르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뜨는 논리 여기에서 머리가 좀 좋은 분들은 아실겁니다. 그런데 원자력으로 들어가면 아는 경우가 별로 없지요.
예수님 부활하신 것은 인간 세계에서는 모르지요. 인간의 범위를 초월한 역사이니까.
인간 지식 수준에서 말이 안되는 것이지, 인간의 범위를 벗어나면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수 많은 의문이 해결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몇 천 년이 지나도 해결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성경의 부활은 예수님 부활을 말하고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부활이 있어야하는 이유, 왜 있어야하는지
그래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의 믿음이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유대인들의 무덤은 동굴을 파서 돌로 막아 놨는데, 예수님을 죽여 놓고 평소에 죽은 지 3일 만에 살아나신다는 말을 하셨으니까 긴장을 하고 봉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와서 돌을 굴러서 빼고 부활을 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보고를 했는데 존 사이에 제자들이 빼갔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예수님 부활한 것은 사실입니다. 본 사람들이 많고 다 봤는데, 사실이고, 그 뒤에서 수 백명이 봤습니다. 그러면서도 돈을 주면서 믿었습니다. 그래서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스스로 복 없는 자리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방법이 없는 겁니다. 사람은 자유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보고 이 때도 지금 우리나라에 뻔한 사실을 일으킨다는 것을 보고, 100년, 200년 전에 것을 거짓말을 만드니까 그것을 믿고 넘어가버립니다. 하물며 주님 거짓말은 2천년이 지났으니까 더하겠지요. 그래서 하고 하고 해도 안 되면 치워버리고 말아버리고 포기합니까? 인간 구원에는 포기가 없습니다. 그냥 때를 기다려야합니다. 안타깝지만은 아직은 내가 부족한 것 같다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고 조심하고 더 덕을 끼치고 감동을 주고 때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인간 구원의 말입니다
이 부활이라는 것은 죽어야 전제가 되어있습니다. 안 죽은 사람은 부활이 필요가 없지요.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예수님 근본, 예수님이 누구시지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안 죽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기 위해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죽는 겁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일단 태어나면 생명이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의미고 가치고 목적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은 어릴 때는 그냥 살지면 자라고 나면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은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참 어렵죠. 잘 죽기 위해 사는 것이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남을 해롭게 하고 남을 해치고 남의 것을 훔치고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내 불만 해소하자고, 남을 해치는 그런 방법으로 사는 나쁜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남을 해치지는 않으나 남이 잘 살든 못 살든 너는 너 대로 살고 나는 나 대로 사는 그런 사람들도 있지요. 사람과 사람이라는 것은 서로 무관하게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가르켜서 더불어 살아갈 수 없는 것을 인류라고 합니다. 사람은 다 같이 더불어 살아야하는데, 너는 너 대로 나는 나 대로 사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일지라고 내 것을 손해가봐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게 주신 나의 인생을 위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옆으로 아래로는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생활입니다. 남을 위한 것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분의 생각에 따라 남을 위해서 살았는데 그게 나를 위해서 산 것이 되도록 되었습니다. 당신이 세상에 오셨으니까 잘 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값을 대신 짊어지고 사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몸을 입었으나 죄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나 안 죽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죽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입니다.
죄를 지어서 죽어야하는데, 내가 죄를 지어서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내 목숨 값을 주님이 대신 내주셨죠.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대신 우리를 죄 값을 대신 내시고 그런 예수님의 생애를 대속이라고 하지요. 대신해서 속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없어졌습니다. 죄를 지으면 어찌됩니까? 어지간하면 감옥에 안 보내는데 감옥에 가든지 벌금을 내든지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는 무조건 사망입니다. 죄 지어서 죽은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공로를 믿으면 그 나 대신 죽으신 것이 내 것이 되어서 믿음이 내 것이 되어서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고, 우리는 천국가고 지옥을 면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여기 계시는 저와 한 분 한 분 모두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생애의 인생은 성경적으로 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셔서 나는 주님의 것이고 지옥을 면했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대신 죽으심으로 그리하신 것입니다. 죽음은 끝났는데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가 죽었습니다. 그렇게 끝났는데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식인데 너무 너무 좋은 일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죽었다는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은 우리를 대신해 주신 주님이 우리의 죄를 지시고 돌아가신 것인데 그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었다가 죽었다가 사람의 몸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몸을 다시 입었으니까 좋은데..
그러니까 예를 들면 사람이 사정이 있어서 사람이 소가 되었습니다. 소가 되었으니까 괴롭겠죠. 그런데 그랬다가 사람이 다시 되었으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다시 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이게 바뀌지 않는다고 하면 어쩌겠습니까? 평생을 소로 살아라 하면 기쁘겠습니까? 고통스럽겠습니까? 고통스러워서 죽을 맛이지요.
하나님은 그것을 영원토록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부활은 죽으심과 버금과는 희생이라고 배웠습니다. 우리는 기쁨입니다만 주님에게는 한 없는 희생입니다.
죽으셨으면 우리의 죄가 없으졌으면 되었지 다시 왜 사람의 몸을 입었습니까?
공로가 있고 은혜가 있고 다시 부활하셔서 주신 공로와 은혜는 뭐가 있냐 이 말입니다.
부활하신 것으로 주신 것은 뭐냐 이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찬송은 영광입니다.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부르는 것이 찬송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이 근거되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우리를 거듭나게 했다라는 것은 중생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했다는 것은 죽은 영을 살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사람은 어려워서.. 사람은 몸이 있고 마음이 있고 영이 있습니다. 영이 선악과 따먹고 죽었지요. 사람이 죽은 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이 죽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다시 산 것을 중생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고 하나님만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영입니다. 하나님만이 영을 손대는데, 하나님만 쓰실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영입니다. 하나님만 상기하는 것이 사람의 영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영 때문이지요.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었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찾지 못합니다.
살아있어야 그런 역사 작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찾는 천국과 지옥을 생각하는 예수를 믿어볼까 이러는 것은 영이 산 것을 거듭났다고, 중생이라고 합니다. 이게 어떻게 되어졌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우리의 영이 살아났습니까? 살아나지 못했습니까? 중생이 됩니까 안됩니까? 사활의 대속, 사활의 대속입니다. 사죄, 칭의, 화친..
그러면 죽은 영이 산 것은 예수님이 죽으신 것에 산 것입니까 죽은 것에 산 것 입니까?
우리는 다 지옥에서 건짐 받아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거듭났습니다. 거듭나게 하사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바라보는 겁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소망이 없으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소망을 향하여, 희망이라고 말하죠. 오늘보다 더 나은 더 좋은 것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소망입니다. 살아있는 소망. 계속 살아있는 소망. 산 소망을 있게 하시고 썩지 않고. 썩지 않습니다.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신령한 것입니다. 순전합니다. 때가 묻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 이어간다는 뜻입니다. 영원토록.
그래서 오늘 오전에는 부활에 대해서 어떤 것인가. 부활 이전에 죽으심이 있습니다. 대속의 죽으심. 대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죽으심으로 죄에서 지옥에서 건져 천국에 가고 예수님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 사람의 탈을 쓰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소망을 생각해봅시다. 그렇게 오늘은 살아있는 소망을 이야기하시고, 썩지 않는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영원한 이런 기억을 이어가게 하셨다. 곧 하늘에 간직하게 하신 것이라.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초타 : 김동민
찬송가 : 28장, 32장, 185장
본문 : 베드로전서 1장 3절 ~ 1장 절
제목 : 부활의 산 소망
요즘은 모두 소식들이 다 다르고 모든 것들이 환하게 알려지는 시대가 되어서 무슨 날이 있으면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그 때입니다. 오늘이 부활절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무엇 뒤에 절을 붙이면 곤란해집니다.
날 중에 가장 귀한 날은 뭡니까? 주일입니다. 모든 날 중에 가장 귀한 날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부활주일 감사주일 이러면 성경적으로는 옳지 않습니다. 주일보다 귀한 날은 없습니다. 주일인데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 부활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그렇게 성경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지키라고 그렇게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탄절이 성탄절인 것은 명확하진 않습니다. 사람들이 짐작해서 한 것이 성탄절인 듯이 부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절을 통해서, 이제 주님 부활을 새겨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 부활을 말하는 걸로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부활은 죽음이 전제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람은 죽으면 끝입니다. 그러면서 영과 혼은 낙원에 있고 육은 땅에 뭍혀서 주님 재림하시면 영원한 세계로 택자의 몸은 천국가고 불택자의 것은 지옥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은 사람의 것이 살아나는 것은 별로 없는데 있기는 있습니다. 구약에 에녹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심신이 죽음이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에녹의 육도 죽었습니다. 엘리야의 육도 죽었습니다. 다만 몸과 마음은 죽지 않고 승천해서 그리 되었는데 이 세상에 있을 때 그 몸 그대로 천국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이 없을 뿐이지 통과는 해야합니다. 일반인들은,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사람이 죽으면 택자는 낙원에 있고 몸은 물질계에서 흩어져있습니다. 불택자의 영과 혼은 음부에 가서 있습니다. 그리하나 주님 재림하시면 각각 자기 몸을 되찾아 입고 택자는 천국가고 불택자는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올라간 사람이 에녹과 엘리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경우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 중에서 살아나고 다시는 죽지 않는 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 부활은 역사에서 주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절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 외에도 신앙 생활 하다 보면은 우리는 능력이 없어서 안 되는데 참 종들이 하는 복음 운동회에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 때도 그런 적이 있지요. 그런데 죽은 사람들은 살아났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런 것은 부활이라고 하진 않습니다. 다시는 죽지 않는 부활.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입고 있던 몸과는 다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우리의 이 몸은 시공의 제한을 받습니다. 혈육이라고도 합니다. 영원한 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 겁니다. 공간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과 같이 시공을 초월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시간의 개념이 없지만 우주를 1초에 천 바퀴 만 바퀴 돌 수 있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 마치, 과학 소설 같은 이야기인데, 이게 사실입니다. 이런 말은 하면 안 믿는데 과학이 발달되어져 가면 100년 전에 말이 안 된다는 소리가 현상 세계에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 인간이 현재 알고 있는 것이 초월해버리면 성경을 부정하는 사람이 입이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기 때문에,
이런 것은 아무리 과학에 말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 어떤 논리로 사람이 살아나는 이론을 밝혀내라고 하면 논리적인 뒷받침은 어려우나 되긴 합니다. 때가 되면 그런 논리적인 뒷받침도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에게 자동차가 동력 장치로 달려가는 것을 말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공고만 졸업해도 알아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어리기 때문에 설명해도 모르는 것입니다. 부활의 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가 어리기 때문에 모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밝혀주시고 우리가 장성하면 알게 됩니다. 어릴 때는 모르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뜨는 논리 여기에서 머리가 좀 좋은 분들은 아실겁니다. 그런데 원자력으로 들어가면 아는 경우가 별로 없지요.
예수님 부활하신 것은 인간 세계에서는 모르지요. 인간의 범위를 초월한 역사이니까.
인간 지식 수준에서 말이 안되는 것이지, 인간의 범위를 벗어나면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수 많은 의문이 해결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몇 천 년이 지나도 해결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성경의 부활은 예수님 부활을 말하고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부활이 있어야하는 이유, 왜 있어야하는지
그래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의 믿음이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유대인들의 무덤은 동굴을 파서 돌로 막아 놨는데, 예수님을 죽여 놓고 평소에 죽은 지 3일 만에 살아나신다는 말을 하셨으니까 긴장을 하고 봉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와서 돌을 굴러서 빼고 부활을 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보고를 했는데 존 사이에 제자들이 빼갔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예수님 부활한 것은 사실입니다. 본 사람들이 많고 다 봤는데, 사실이고, 그 뒤에서 수 백명이 봤습니다. 그러면서도 돈을 주면서 믿었습니다. 그래서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스스로 복 없는 자리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방법이 없는 겁니다. 사람은 자유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보고 이 때도 지금 우리나라에 뻔한 사실을 일으킨다는 것을 보고, 100년, 200년 전에 것을 거짓말을 만드니까 그것을 믿고 넘어가버립니다. 하물며 주님 거짓말은 2천년이 지났으니까 더하겠지요. 그래서 하고 하고 해도 안 되면 치워버리고 말아버리고 포기합니까? 인간 구원에는 포기가 없습니다. 그냥 때를 기다려야합니다. 안타깝지만은 아직은 내가 부족한 것 같다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고 조심하고 더 덕을 끼치고 감동을 주고 때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인간 구원의 말입니다
이 부활이라는 것은 죽어야 전제가 되어있습니다. 안 죽은 사람은 부활이 필요가 없지요.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예수님 근본, 예수님이 누구시지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안 죽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기 위해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죽는 겁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일단 태어나면 생명이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의미고 가치고 목적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은 어릴 때는 그냥 살지면 자라고 나면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은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참 어렵죠. 잘 죽기 위해 사는 것이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남을 해롭게 하고 남을 해치고 남의 것을 훔치고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내 불만 해소하자고, 남을 해치는 그런 방법으로 사는 나쁜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남을 해치지는 않으나 남이 잘 살든 못 살든 너는 너 대로 살고 나는 나 대로 사는 그런 사람들도 있지요. 사람과 사람이라는 것은 서로 무관하게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가르켜서 더불어 살아갈 수 없는 것을 인류라고 합니다. 사람은 다 같이 더불어 살아야하는데, 너는 너 대로 나는 나 대로 사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일지라고 내 것을 손해가봐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게 주신 나의 인생을 위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옆으로 아래로는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생활입니다. 남을 위한 것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분의 생각에 따라 남을 위해서 살았는데 그게 나를 위해서 산 것이 되도록 되었습니다. 당신이 세상에 오셨으니까 잘 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값을 대신 짊어지고 사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몸을 입었으나 죄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나 안 죽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죽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입니다.
죄를 지어서 죽어야하는데, 내가 죄를 지어서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내 목숨 값을 주님이 대신 내주셨죠.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대신 우리를 죄 값을 대신 내시고 그런 예수님의 생애를 대속이라고 하지요. 대신해서 속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없어졌습니다. 죄를 지으면 어찌됩니까? 어지간하면 감옥에 안 보내는데 감옥에 가든지 벌금을 내든지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는 무조건 사망입니다. 죄 지어서 죽은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공로를 믿으면 그 나 대신 죽으신 것이 내 것이 되어서 믿음이 내 것이 되어서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고, 우리는 천국가고 지옥을 면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여기 계시는 저와 한 분 한 분 모두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생애의 인생은 성경적으로 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셔서 나는 주님의 것이고 지옥을 면했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대신 죽으심으로 그리하신 것입니다. 죽음은 끝났는데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가 죽었습니다. 그렇게 끝났는데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식인데 너무 너무 좋은 일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죽었다는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은 우리를 대신해 주신 주님이 우리의 죄를 지시고 돌아가신 것인데 그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었다가 죽었다가 사람의 몸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몸을 다시 입었으니까 좋은데..
그러니까 예를 들면 사람이 사정이 있어서 사람이 소가 되었습니다. 소가 되었으니까 괴롭겠죠. 그런데 그랬다가 사람이 다시 되었으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다시 소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이게 바뀌지 않는다고 하면 어쩌겠습니까? 평생을 소로 살아라 하면 기쁘겠습니까? 고통스럽겠습니까? 고통스러워서 죽을 맛이지요.
하나님은 그것을 영원토록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부활은 죽으심과 버금과는 희생이라고 배웠습니다. 우리는 기쁨입니다만 주님에게는 한 없는 희생입니다.
죽으셨으면 우리의 죄가 없으졌으면 되었지 다시 왜 사람의 몸을 입었습니까?
공로가 있고 은혜가 있고 다시 부활하셔서 주신 공로와 은혜는 뭐가 있냐 이 말입니다.
부활하신 것으로 주신 것은 뭐냐 이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찬송은 영광입니다.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부르는 것이 찬송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이 근거되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우리를 거듭나게 했다라는 것은 중생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했다는 것은 죽은 영을 살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사람은 어려워서.. 사람은 몸이 있고 마음이 있고 영이 있습니다. 영이 선악과 따먹고 죽었지요. 사람이 죽은 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이 죽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다시 산 것을 중생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고 하나님만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영입니다. 하나님만이 영을 손대는데, 하나님만 쓰실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영입니다. 하나님만 상기하는 것이 사람의 영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영 때문이지요.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었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찾지 못합니다.
살아있어야 그런 역사 작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찾는 천국과 지옥을 생각하는 예수를 믿어볼까 이러는 것은 영이 산 것을 거듭났다고, 중생이라고 합니다. 이게 어떻게 되어졌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우리의 영이 살아났습니까? 살아나지 못했습니까? 중생이 됩니까 안됩니까? 사활의 대속, 사활의 대속입니다. 사죄, 칭의, 화친..
그러면 죽은 영이 산 것은 예수님이 죽으신 것에 산 것입니까 죽은 것에 산 것 입니까?
우리는 다 지옥에서 건짐 받아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거듭났습니다. 거듭나게 하사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바라보는 겁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소망이 없으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소망을 향하여, 희망이라고 말하죠. 오늘보다 더 나은 더 좋은 것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소망입니다. 살아있는 소망. 계속 살아있는 소망. 산 소망을 있게 하시고 썩지 않고. 썩지 않습니다.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신령한 것입니다. 순전합니다. 때가 묻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 이어간다는 뜻입니다. 영원토록.
그래서 오늘 오전에는 부활에 대해서 어떤 것인가. 부활 이전에 죽으심이 있습니다. 대속의 죽으심. 대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죽으심으로 죄에서 지옥에서 건져 천국에 가고 예수님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 사람의 탈을 쓰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소망을 생각해봅시다. 그렇게 오늘은 살아있는 소망을 이야기하시고, 썩지 않는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영원한 이런 기억을 이어가게 하셨다. 곧 하늘에 간직하게 하신 것이라.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초타 : 김동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