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06 주후 - 환란의 궁극적 목적
김동민2019-01-07조회 269추천 46
2019년 1월 6일 주일 오후
찬송가 : 91장, 117장, 108장
본문 : 사도행전 14장 19절 ~ 14장 28절
제목 : 환란의 궁극적 목적
환란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것입니다. 당하고 싶지 않은 게 환란입니다. 환란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피하고 싶은 겁니다. 원래 에덴 동산에는 이런 환란이 없었지요. 죄를 지은 후에 이런 것들이 생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이 환란을 많이 당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바울이 자기 당한 환란을 기록을 많이 해놨습니다. 자랑이 아니고 믿지 않는 사람 때문에 자신이 당한 고난을 기록해 놨는데 바울이 당한 환란은 모두 바울의 실수라든지 바울의 욕심이라든지 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부 예수 복음, 구주 메시아 믿으라고 전하는 복음 때문에 당하는 환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환란을 당했으니까 너희들도 환란을 당해야 할 것이다. 주님이 환란 당했는데 왜 우리도 환란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 주님의 제자와 주님의 길이 다르면 다른 사람이 고난을 안 당해도 됩니다. 뜻이 같고 길이 같으니까 같은 길 가는 제자들도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필연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인 그 무리들이,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을 좋아하고, 은을 좋아하고, 보석을 좋아하고, 구경을 좋아하고, 입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마다 좋아하는 게 다릅니다. 그런데 이 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저 면을 보면 이해를 못하지요. 금이 전부인 사람은 왜 금을 싫어할까, 옷을 좋아하는 사람은 옷을 아무렇게나 입는 사람들 보고 이해를 못합니다. 집을 좋아하는 사람은 집 꾸미는데 재미가 10년간다고 하죠. 말 타는 재미는 30년 간답니다. 옛날 말이 요즘 뭡니까? 요즘은 자동차겠지요. 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요즘 젊은 사람들 말로 눈에 탁 꽂히면 한 번 마음에 들면 밥을 굶어도 옷을 안 입어도 가족을 굶겨도 차는 꼭 삽니다. 욕심나는 거, 그런 사람도 있지요. 그런 사람들을 보고 이해를 잘 못합니다. 권세를 원하는 사람은 집안이 망해도 권세를 잡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리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뻔히 그러면 망하는 것을 압니다. 처음에는 모르고 덤벼드렸다가 안 되는 거 알고 더 하면 망하겠다 싶은데 알고도 습성이 되니까 안하고는 안되는 거지요. 술 먹는 사람이 좋아서 먹습니까. 술 먹어서 몸 다 망쳐도 먹고 약도 마찬가지고, 담배 피는 사람도 끊고 싶은데 못 끊는 거지요. 이미 중독이 되었으니까. 예수님을 죽인 그 무리들이 왜 죽였는가, 우리 봤을 때는 별 거 아닙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입니다. 세상에 나가면 권세고, 교회 안의 권세를 뭐라 합니까? 교권이라고 하죠. 지금 우리 공회는 교권이 별로 없지요. 백 목사님도 교권 잡는다 그런 사람이 제 맘 짚어 남을 평가한다고 저것들이 교권 욕망이 있으니까 백 목사님도 그런가하고 탈선해서 탈퇴해 나간 사람들의 마음 구조가 다 그렇습니다. 저것들이 그러니까 백 목사님도 그런가 하고. 그런데 아브라함을 알고 이삭을 알고 야곱을 알고 다윗을 알고 나면 그것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공회는 목사가 되어봐야 돈을 많이줍니까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릅니까. 못하지요. 그런데 우리 공회만큼 목회자의 그 재량권이 큰 곳도 없지요. 목회자들이 마음대로 하잖습니까. 그 마음이 제 맘대로 하면 교인들이 그대로 안 놔두지요. 공인들이 바보가 아닌데,
우리 공회의 교인들만큼 겉으로는 말 없고 속으로는 다 따지는 그런 교인들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서부교회를 우습게보고 그랬지만은 그 분 가시고 나니까 난리가 났잖습니까. 그러니까 어쨌든 교권이 우리가 볼 때는 그런 것이 없는데 그 당시 유대 나라의 교권은 로마의 식민지로 속해 있지만은 유대교가 국교니까, 지금 이슬람교처럼 지금도 이란 같은 나라는 공화국처럼 할라 그려다가 안 맞으니까 종교 국가로 돌아가니까 미국하고 등이 지는 거지요. 그 지도자가 국민들을 지지하고, 그 나라는 말하면 나라의 지도자가 종교 지도자처럼 그 나라 가장 강했던 사람이 호메이니, 아주 막강한 종교와 나라를 쥐고 흔든 그것이 교권이고 세상 나라인데, 유대 나라는 교권이 그 나라의 권세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무리들을 잡고 있는데 예수님이 세상 말로 혜성처럼 등장해서 말씀을 전하는데, 자기들과는 비교 못 할 만큼 깊고 넓고 세밀하고 정확하고 능력 있고 사람을 뒤집어 놓고 그러니까 그냥 뒀다가 자신들이 다 무너지니까 기어코 찍고 찍고 찍어서 결국에 못을 박아서 죽였습니다. 기득권 때문에, 그런데 죽인 분위기가 몇 년 이어지는 거지요. 그 때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그 무리들이 바람을 타고 믿는 사람들을 다 가두고 죽이고 그랬을 텐데, 베드로 부인하고 도망가고 아무도 없습니다. 도망가도 들은 말씀이 있고 그러니까 양심이 괴롭고 그러니까 숨어서 기도하고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오순절에 성령 강림하고 그래서 옛날에 한 때 죽도록 반사에 열심히 했던 사람의 지금 돌아보면 그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겁니다. 백 목사님은 연세 80세 될 때 까지 먼 데 까지 산에 계시면서 그걸 매일 같이 했는데, 지금 보니까 그거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건 전적 초인간적인 능력이지, 사람이 하고 싶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객관적인 성령의 능력을 받아버리니까 자기 인간의 지식과 능력을 초월한 그런 것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사도들은 새로운 사람들이 다 되어버렸죠. 그래서 예수 사활의 대속의 복음을 외치고 다니는데 그 때문에 제 기둥이 흔들린 기득권 세력들이 그걸 다 뚜드려 잡아서 잠잠한가 싶었는데, 들고 일어나서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고 따르지요. 온 나라가 흔들 기세가 되니까 그냥 놔두면 안되겠으니까 가두고 죽이고 그랬지요. 스테반도 휩쓸리고 사울도 무리에 휩쓸려가지고 그 때 사울은 젊을 때겠지요. 젊은 사람이니까 위에 있는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권세 잡아가지고 죽이고 스테반 때려잡고, 그 다음은 가다가 주님 만나고 비로소 스테반을 죽일 때 그 모습이 결정적으로 바울을 흔들어 놓은거지요. 때려죽인 사람은, 사울이 때려 죽었는데, 스테반은 죽었을 뿐인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때려죽인 그 사람이 흔들렸다는 거지요. 사울이 양심이 있고, 근본은 길을 잘못 들어 그렇지, 바른 사람이니까 하나님 은혜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3년 동안 회개하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파한, 이게 자세히 안 나와 있어도 기록상으로 보면은 본격적으로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그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가시고 나서 몇 년 지나고 나서 안디옥에서 보냄을 받고 안디옥에서 여러 사도들의 보냄을 받고 안디옥, 이고니온 이런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가서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주로 대인들은 안 믿고 이방인들이 많이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비웃고, 조롱하고, 핍박하고 이러니까 바울이 말하기를 이 복음을 너희가 받는 것이 순서가 맞는데 너희가 받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 이방인에게 갈 수 밖에 없다. 이러니까 이방인들은 구원 받으니까 좋아하고 유대인들은 시기하고.. 그런 상황에서 이고니온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까 유대인들이 무리를 동원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려고 하니까 피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기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이 사람을 일으키니까 사람들이 이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섬기는 신 인줄 알고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 하고 바나바와 사울하고 바울하고를 제사를 지내려고 하니까 이런 짓 못하게 이런 무지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하고 말렸습니다. 그러니까 사울과 바나바가 신이 됐지요. 신이 되니까 유대인들이 눈이 뒤집혀져서 보지 못하고, 안디옥 이고니온에서 무리를 끌고 와서, 기어코 사울을 돌로 쳐서 완전히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집어 던져놓고 갔지요. 이거 보니까 뭐가 기억납니까. 저는 읽을 때 마다 백 목사님께서 김녕에 계실 때 공산주의자의 인민 공화국의 그.. 면회 반대를 하니까 좌익들이 앙심을 품고 있다가 공비토벌대를 끌고 몰려와서 백 조사님을 몽둥이로 때려 패서 완전히 죽였습니다. 몇 시간을 맞았다고 그러죠. 6~7명에서 그랬다고 하지요 아마, 그러면 사람이 삽니까 죽지, 그래서 죽은 줄 알고 던져왔는데, 그 다음에 바로 일어나서 경찰서 갔다고 그러죠. 여기도 보니까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걸어 내쳤는데,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바울이 일어나서 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정하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란을 겪어야 한다고 그랬습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그 말이죠. 왜 하나님이 전능자고 그러신데, 그냥 들여보내 주시기 왜 환란을 겪어야하느냐,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수는 있겠지만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분의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많이 주고 영원히 주기 위해서 이건 어찌보면 조금 더 감성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따져보면은 필연적인겁니다. 기독교는 필연의 교입니다. 안해도 되는데 가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자기를 단속하고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고생을 안 당해도 되는데 당하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이보다 더 낮아진 희생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피조물의 세계에서는 형용할 수 없고 비유할 수 없는 그런 과정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안 되도 되는데 왔느냐, 아닙니다.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셨고, 가능한 낮게 낮아지셨고, 안 받으면 안되는데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고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굳이 가장 무서운 형벌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겁니다. 필연적으로, 만약에 그 길이 아니고도 될 길이 있었다면 그래셨겠죠. 고난을 안 받아도 되는 길이 있었다면 안 그러셨겠죠. 그런데 안 그러고는 안되니까 그러신 겁니다. 그 분은 여기서 전지자 전능자 아닙니까? 뭐든지 다 할 수 있는게 전능자입니다. 사람 안 되고도 하면 되고 안 죽고도 하면 되죠. 그런데 전능자기 때문에, 완전자기 때문에 그리 된 겁니다. 그래서 요술 방망이 같은 그런 전능의 개념은 타락한 인간의 개념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의 전능은 전능자니 못 하는 게 없으니까 안 그래도 되지,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뭐냐 이게 타락한 인간의..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 만드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성이지요. 하나님과 같이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 이런 사람을 만들고 이런 사람을 만들려고 하니까, 그 자유 의지가 이치적으로 이론적으로 다 깨달아서 이해가 되어야하니까, 하나님의 법을 어긴 세계를 봐야하지, 안 보고는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보여주신 거지요. 그 때부터 시작된 겁니다. 죄라는 것은 인간을 멸망시키는 게 죄인데, 핵심이 죄지요. 마귀가 없으면 하나님 구원 역사는 없지요. 죄가 없으면 하나님 구원 역사는 애초에 없지요. 죄가 없으면 왜 안되느냐? 죄라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겁니다. 죄가 없으면 구원 역사가 없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인간을 건져내는 겁니다. 거기에 가장 핵심적인 일꾼이 마귀고 요소가 죕니다. 왜 죄가 없으면 안되는 거지요? 인간의 자유성 때문에,
자유성이 없이 만들면 이건 하나의 기계라던지 이런 게 되는 거니까 자유성을 살려서 인간을 하나님 형상을 만들어야겠고, 그러다보니까 죄의 세계를 경험해야겠고, 그 다음에 왜 기어코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이건 왜 이렇습니까? 이건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인간이 범죄했고 타락했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인간의 원죄성에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원죄성이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어서 잉태되자마자 되고 죽고, 종자가 뿌리 되어서 점점 자라가면서 원죄로 자라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있는 어머니가, 현모, 그런 어머니가 아이를 기르면은 아이가 원죄성 그런 것을 어릴 때 하나씩 때려주고 건드려 주고 잡아주면 되는데, 어릴 때는 자라가면서 어떨 때는 너무 연약하고 애처롭고, 그런 것이 사랑스럽고 예뻐서 넘어가는데 넘어가는 속에 원죄성을 같이 넘겨버리는게 대부분이지요. 그래서 속에 따지고 들어가 보면 원죄성의 요소인데, 웃고 재롱피고 그런 것이 우리가 발견하기 어렵고 그러니까 다 넘어가는데, 그 세월 속에 자라가면 점점 자라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신앙의 현모의 아니는 덜하고 아니면 안 그렇고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주관이 강해지고 트집잡고, 그런 또래가 그 나이 또래가 그것도 작용하겠지만 원죄성이 제재받지 않고 그대로 많이 자란 만큼 그 작용이 크게 삐뚤어지게 나타난다 이 말이지요. 그렇게 자라 가가지고 배우고 익히고 연단시켜 나가면 사람의 본능이라는 것은 뭐든지 말씀하고 반대가 되고 이걸 제멋대로 길러 놓으면 제멋대로 가는 거고 신앙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란을 당해야 하는데, 이건 세상적인 환란이 아닙니다. 환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으로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하면은 환란을 많이 겪어야 한다 이겁니다. 자기가 자기 욕망, 자기 실수 ,자기 잘못, 이런 것 때문에 당하는 환란은 그것도 그렇지만은 성격이 다른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으로 당하는 고난, 복음을 전함으로 당하는 환란 그것은 환란이라는 그게 그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우리 속에 환란 당할 요소가 있기 때문에 당하는 거지요. 진흙같은 몸에 햇빛이 내려쬐면 어찌 됩니까, 단단해지지요. 내 몸이 양초같은데 햇빛이 내리쬐면 흐물해 지겠지요. 우리가 환란이 되는 것은 내게 오는 어려운이라는 것이고 옛날에 없이 산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누워 산 사람들은, 어지간히 가도 어려움을 못 느낍니다. 고생을 하고 겪은 사람들은 먹는거 입는거 자는 거 때문에 고생은 안 합니다. 그래서 힘들다 그러면 고생을 안 해봐서 그렇지, 그래서 아이 낳는 것도 그렇고 어른들이 정부의 책임있는 사람들이 책임이 큽니다. 저거들 인기 위주로만 하고 사람들의 인식을 삐뚤어진 인식을 바로 잡지 않고 시대 따라가는 그들에 따라서 따라가는 겁니다. 이 나라는 그게 유독 심합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무슨 산포 세대? 그 말 듣고 여론화를 삼고 그런 여론들, 신문 방송들, 그 사람들도 문제입니다. 그런 거 다 이해를 하면서도 인식을 바꿔주면 되는데, 왜 똑같은 사람이 그런겁니까. 50년 전에 먹고 살기 쉬운데, 어릴 때 고생을 안 해 봤으니까..
그래서 환란이라는 것을 바꾸면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 5장인가요? 3절, 다만 이 뿐 아니라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인내를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환란은 연단입니다. 그래서 연단은 단단하게 다진다는 것이지요. 환란 없는 연단 있습니까? 성막에 휘장을 받치는 기구는 뭡니까? 이 세상과 교회를 구분짓는 휘장의 받침 이게 다 놋이죠 놋. 연단입니다. 환란 없는 연단되 있습니까? 고생은 성공의 어머니. 고진감래라 그러지요. 그러니까 쇠를 단단하게 다지려면 불에 벌겋게 달궈야합니다. 그 다음에 망치로 뚜드려 패야합니다. 이게 없으면 연단은 없는 거지요. 환란이 있어야 연단이 되는 것인데, 궁극적으로는 깊은 내면의 세계는 사랑의 작으로 인해 되어진 것,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야 하는 자유성을 살려서 필수적으로 이런 과정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상의 환란의 실질적인 환란은 뭡니까? 죄 때문이지요. 죄를 지어서. 죄를 짓게 한 그게 필연적으로 죄를 지어 봐야하는 거니까 환란은 필연적으로 오는 겁니다. 내 마음이 몸이 환란으로 느끼는 환란이 되는 것이고, 이것을 넘가 버리면 그리 되지 않는.. 먹을 게 없는 거 하고 끼니 조차 없는 그런 거 하고 먹을 거 많은데 입맛에 안 맞아서 못 먹는 것 하고 다른 차원이지요. 그래서 먹을 게 없는 사람은 요즘 시대에는 먹을 게 없다고 하지는 않지요. 요즘 사람들 보면은 고생을 안해 봐서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을 교육을 제대로 시켜서 먹을 거 많고 입을 것 많고, 이만하면 행복하지 그런데 이 곳에 내가 가고 싶은데 못하니까 고통스럽죠. 더 좋은 것을 하고 싶은데 못하니까 고통스럽죠. 고통 때문에 그렇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능력 껏 살면 되지 꼭 사치스런 생활을 해야하느냐 논리로 따져가야 하지요. 사람 삶이 다 거기서 거긴다. 옛날 인구가 줄어들 때 어느 나라에서 독신 생활을 할려면 돈을 내야한다. 이걸 인식을 시켜주면 바뀌는 겁니다. 교육 뜻이 뭡니까? 가르쳐서 기르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선생이라는 것들이 그렇지 않고 정치권에서 바로 된 선생은 감옥가고 그렇게 되니까. 그래서 환란이라는 것이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서 환란이 될 수 있고 안 될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들어가려면 환란을 겪는 다는 것은.. 환란은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이 돌로 죽도록 맞았을 때는 전혀 아프지 않았습니다. 환란이 되지 않았고. 백 목사님도 그랬지요. 우리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지만, 환란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필수적인 그런 과정, 죄를 지었으니 죄 값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 값은 인간이 감당을 못합니다. 그 값은 영원한 지옥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 심신에는 그 죄로 인한 것이 남아있는 겁니다. 내 심신 속에 죄로 인한 요소가 다 떨어지고 나면 믿는 사람은 없는 겁니다. 환란을 없애는 과정, 그게 이용물들이고 그런 겁니다. 우리는 새해 첫 주일에 우리들이 걸어가는 길에도 근데 대개 보면 우리가 받는 환란은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 받는 환란이지요. 경제 문제, 꼬였든지, 건강 문제, 관계 문제 이런 몇 가지 따지고 들어가면 마음이 근심, 걱정 그런 것들이 다 환란인데 자기 잘못으로 인한 것은 별 가치가 없습니다. 말씀으로 살아감으로 얻는 그 환란, 그것이 환란이 되는 것은 내가 아직까지 내 속에 말씀으로 삶으로 당하는 그 어려움이 그 요소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어려운 겁니다. 다 뽑아내고 나면 그렇지 않은데.. 참 어려운 거지요. 그래서 우리 앞날에 만나지는 많은 환란이 있을지라도 그 원인과 궁극의 목적을 생각하고 우리는 환란을 만날 때 환란이 되지 않을 때까지 우리를 고쳐야겠다고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초타 : 김동민
찬송가 : 91장, 117장, 108장
본문 : 사도행전 14장 19절 ~ 14장 28절
제목 : 환란의 궁극적 목적
환란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것입니다. 당하고 싶지 않은 게 환란입니다. 환란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피하고 싶은 겁니다. 원래 에덴 동산에는 이런 환란이 없었지요. 죄를 지은 후에 이런 것들이 생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이 환란을 많이 당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바울이 자기 당한 환란을 기록을 많이 해놨습니다. 자랑이 아니고 믿지 않는 사람 때문에 자신이 당한 고난을 기록해 놨는데 바울이 당한 환란은 모두 바울의 실수라든지 바울의 욕심이라든지 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부 예수 복음, 구주 메시아 믿으라고 전하는 복음 때문에 당하는 환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환란을 당했으니까 너희들도 환란을 당해야 할 것이다. 주님이 환란 당했는데 왜 우리도 환란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 주님의 제자와 주님의 길이 다르면 다른 사람이 고난을 안 당해도 됩니다. 뜻이 같고 길이 같으니까 같은 길 가는 제자들도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필연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인 그 무리들이,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을 좋아하고, 은을 좋아하고, 보석을 좋아하고, 구경을 좋아하고, 입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마다 좋아하는 게 다릅니다. 그런데 이 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저 면을 보면 이해를 못하지요. 금이 전부인 사람은 왜 금을 싫어할까, 옷을 좋아하는 사람은 옷을 아무렇게나 입는 사람들 보고 이해를 못합니다. 집을 좋아하는 사람은 집 꾸미는데 재미가 10년간다고 하죠. 말 타는 재미는 30년 간답니다. 옛날 말이 요즘 뭡니까? 요즘은 자동차겠지요. 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요즘 젊은 사람들 말로 눈에 탁 꽂히면 한 번 마음에 들면 밥을 굶어도 옷을 안 입어도 가족을 굶겨도 차는 꼭 삽니다. 욕심나는 거, 그런 사람도 있지요. 그런 사람들을 보고 이해를 잘 못합니다. 권세를 원하는 사람은 집안이 망해도 권세를 잡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리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뻔히 그러면 망하는 것을 압니다. 처음에는 모르고 덤벼드렸다가 안 되는 거 알고 더 하면 망하겠다 싶은데 알고도 습성이 되니까 안하고는 안되는 거지요. 술 먹는 사람이 좋아서 먹습니까. 술 먹어서 몸 다 망쳐도 먹고 약도 마찬가지고, 담배 피는 사람도 끊고 싶은데 못 끊는 거지요. 이미 중독이 되었으니까. 예수님을 죽인 그 무리들이 왜 죽였는가, 우리 봤을 때는 별 거 아닙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입니다. 세상에 나가면 권세고, 교회 안의 권세를 뭐라 합니까? 교권이라고 하죠. 지금 우리 공회는 교권이 별로 없지요. 백 목사님도 교권 잡는다 그런 사람이 제 맘 짚어 남을 평가한다고 저것들이 교권 욕망이 있으니까 백 목사님도 그런가하고 탈선해서 탈퇴해 나간 사람들의 마음 구조가 다 그렇습니다. 저것들이 그러니까 백 목사님도 그런가 하고. 그런데 아브라함을 알고 이삭을 알고 야곱을 알고 다윗을 알고 나면 그것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공회는 목사가 되어봐야 돈을 많이줍니까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릅니까. 못하지요. 그런데 우리 공회만큼 목회자의 그 재량권이 큰 곳도 없지요. 목회자들이 마음대로 하잖습니까. 그 마음이 제 맘대로 하면 교인들이 그대로 안 놔두지요. 공인들이 바보가 아닌데,
우리 공회의 교인들만큼 겉으로는 말 없고 속으로는 다 따지는 그런 교인들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서부교회를 우습게보고 그랬지만은 그 분 가시고 나니까 난리가 났잖습니까. 그러니까 어쨌든 교권이 우리가 볼 때는 그런 것이 없는데 그 당시 유대 나라의 교권은 로마의 식민지로 속해 있지만은 유대교가 국교니까, 지금 이슬람교처럼 지금도 이란 같은 나라는 공화국처럼 할라 그려다가 안 맞으니까 종교 국가로 돌아가니까 미국하고 등이 지는 거지요. 그 지도자가 국민들을 지지하고, 그 나라는 말하면 나라의 지도자가 종교 지도자처럼 그 나라 가장 강했던 사람이 호메이니, 아주 막강한 종교와 나라를 쥐고 흔든 그것이 교권이고 세상 나라인데, 유대 나라는 교권이 그 나라의 권세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무리들을 잡고 있는데 예수님이 세상 말로 혜성처럼 등장해서 말씀을 전하는데, 자기들과는 비교 못 할 만큼 깊고 넓고 세밀하고 정확하고 능력 있고 사람을 뒤집어 놓고 그러니까 그냥 뒀다가 자신들이 다 무너지니까 기어코 찍고 찍고 찍어서 결국에 못을 박아서 죽였습니다. 기득권 때문에, 그런데 죽인 분위기가 몇 년 이어지는 거지요. 그 때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그 무리들이 바람을 타고 믿는 사람들을 다 가두고 죽이고 그랬을 텐데, 베드로 부인하고 도망가고 아무도 없습니다. 도망가도 들은 말씀이 있고 그러니까 양심이 괴롭고 그러니까 숨어서 기도하고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오순절에 성령 강림하고 그래서 옛날에 한 때 죽도록 반사에 열심히 했던 사람의 지금 돌아보면 그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겁니다. 백 목사님은 연세 80세 될 때 까지 먼 데 까지 산에 계시면서 그걸 매일 같이 했는데, 지금 보니까 그거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건 전적 초인간적인 능력이지, 사람이 하고 싶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객관적인 성령의 능력을 받아버리니까 자기 인간의 지식과 능력을 초월한 그런 것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사도들은 새로운 사람들이 다 되어버렸죠. 그래서 예수 사활의 대속의 복음을 외치고 다니는데 그 때문에 제 기둥이 흔들린 기득권 세력들이 그걸 다 뚜드려 잡아서 잠잠한가 싶었는데, 들고 일어나서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고 따르지요. 온 나라가 흔들 기세가 되니까 그냥 놔두면 안되겠으니까 가두고 죽이고 그랬지요. 스테반도 휩쓸리고 사울도 무리에 휩쓸려가지고 그 때 사울은 젊을 때겠지요. 젊은 사람이니까 위에 있는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권세 잡아가지고 죽이고 스테반 때려잡고, 그 다음은 가다가 주님 만나고 비로소 스테반을 죽일 때 그 모습이 결정적으로 바울을 흔들어 놓은거지요. 때려죽인 사람은, 사울이 때려 죽었는데, 스테반은 죽었을 뿐인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때려죽인 그 사람이 흔들렸다는 거지요. 사울이 양심이 있고, 근본은 길을 잘못 들어 그렇지, 바른 사람이니까 하나님 은혜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3년 동안 회개하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파한, 이게 자세히 안 나와 있어도 기록상으로 보면은 본격적으로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그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가시고 나서 몇 년 지나고 나서 안디옥에서 보냄을 받고 안디옥에서 여러 사도들의 보냄을 받고 안디옥, 이고니온 이런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가서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주로 대인들은 안 믿고 이방인들이 많이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비웃고, 조롱하고, 핍박하고 이러니까 바울이 말하기를 이 복음을 너희가 받는 것이 순서가 맞는데 너희가 받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 이방인에게 갈 수 밖에 없다. 이러니까 이방인들은 구원 받으니까 좋아하고 유대인들은 시기하고.. 그런 상황에서 이고니온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까 유대인들이 무리를 동원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려고 하니까 피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기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이 사람을 일으키니까 사람들이 이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섬기는 신 인줄 알고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 하고 바나바와 사울하고 바울하고를 제사를 지내려고 하니까 이런 짓 못하게 이런 무지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고 하나님을 섬기라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하고 말렸습니다. 그러니까 사울과 바나바가 신이 됐지요. 신이 되니까 유대인들이 눈이 뒤집혀져서 보지 못하고, 안디옥 이고니온에서 무리를 끌고 와서, 기어코 사울을 돌로 쳐서 완전히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집어 던져놓고 갔지요. 이거 보니까 뭐가 기억납니까. 저는 읽을 때 마다 백 목사님께서 김녕에 계실 때 공산주의자의 인민 공화국의 그.. 면회 반대를 하니까 좌익들이 앙심을 품고 있다가 공비토벌대를 끌고 몰려와서 백 조사님을 몽둥이로 때려 패서 완전히 죽였습니다. 몇 시간을 맞았다고 그러죠. 6~7명에서 그랬다고 하지요 아마, 그러면 사람이 삽니까 죽지, 그래서 죽은 줄 알고 던져왔는데, 그 다음에 바로 일어나서 경찰서 갔다고 그러죠. 여기도 보니까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걸어 내쳤는데,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바울이 일어나서 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정하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란을 겪어야 한다고 그랬습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그 말이죠. 왜 하나님이 전능자고 그러신데, 그냥 들여보내 주시기 왜 환란을 겪어야하느냐,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수는 있겠지만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분의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많이 주고 영원히 주기 위해서 이건 어찌보면 조금 더 감성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따져보면은 필연적인겁니다. 기독교는 필연의 교입니다. 안해도 되는데 가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자기를 단속하고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고생을 안 당해도 되는데 당하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이보다 더 낮아진 희생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피조물의 세계에서는 형용할 수 없고 비유할 수 없는 그런 과정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안 되도 되는데 왔느냐, 아닙니다.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셨고, 가능한 낮게 낮아지셨고, 안 받으면 안되는데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고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굳이 가장 무서운 형벌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겁니다. 필연적으로, 만약에 그 길이 아니고도 될 길이 있었다면 그래셨겠죠. 고난을 안 받아도 되는 길이 있었다면 안 그러셨겠죠. 그런데 안 그러고는 안되니까 그러신 겁니다. 그 분은 여기서 전지자 전능자 아닙니까? 뭐든지 다 할 수 있는게 전능자입니다. 사람 안 되고도 하면 되고 안 죽고도 하면 되죠. 그런데 전능자기 때문에, 완전자기 때문에 그리 된 겁니다. 그래서 요술 방망이 같은 그런 전능의 개념은 타락한 인간의 개념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의 전능은 전능자니 못 하는 게 없으니까 안 그래도 되지,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뭐냐 이게 타락한 인간의..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 만드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성이지요. 하나님과 같이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 이런 사람을 만들고 이런 사람을 만들려고 하니까, 그 자유 의지가 이치적으로 이론적으로 다 깨달아서 이해가 되어야하니까, 하나님의 법을 어긴 세계를 봐야하지, 안 보고는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보여주신 거지요. 그 때부터 시작된 겁니다. 죄라는 것은 인간을 멸망시키는 게 죄인데, 핵심이 죄지요. 마귀가 없으면 하나님 구원 역사는 없지요. 죄가 없으면 하나님 구원 역사는 애초에 없지요. 죄가 없으면 왜 안되느냐? 죄라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겁니다. 죄가 없으면 구원 역사가 없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인간을 건져내는 겁니다. 거기에 가장 핵심적인 일꾼이 마귀고 요소가 죕니다. 왜 죄가 없으면 안되는 거지요? 인간의 자유성 때문에,
자유성이 없이 만들면 이건 하나의 기계라던지 이런 게 되는 거니까 자유성을 살려서 인간을 하나님 형상을 만들어야겠고, 그러다보니까 죄의 세계를 경험해야겠고, 그 다음에 왜 기어코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이건 왜 이렇습니까? 이건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인간이 범죄했고 타락했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인간의 원죄성에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원죄성이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어서 잉태되자마자 되고 죽고, 종자가 뿌리 되어서 점점 자라가면서 원죄로 자라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있는 어머니가, 현모, 그런 어머니가 아이를 기르면은 아이가 원죄성 그런 것을 어릴 때 하나씩 때려주고 건드려 주고 잡아주면 되는데, 어릴 때는 자라가면서 어떨 때는 너무 연약하고 애처롭고, 그런 것이 사랑스럽고 예뻐서 넘어가는데 넘어가는 속에 원죄성을 같이 넘겨버리는게 대부분이지요. 그래서 속에 따지고 들어가 보면 원죄성의 요소인데, 웃고 재롱피고 그런 것이 우리가 발견하기 어렵고 그러니까 다 넘어가는데, 그 세월 속에 자라가면 점점 자라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신앙의 현모의 아니는 덜하고 아니면 안 그렇고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주관이 강해지고 트집잡고, 그런 또래가 그 나이 또래가 그것도 작용하겠지만 원죄성이 제재받지 않고 그대로 많이 자란 만큼 그 작용이 크게 삐뚤어지게 나타난다 이 말이지요. 그렇게 자라 가가지고 배우고 익히고 연단시켜 나가면 사람의 본능이라는 것은 뭐든지 말씀하고 반대가 되고 이걸 제멋대로 길러 놓으면 제멋대로 가는 거고 신앙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란을 당해야 하는데, 이건 세상적인 환란이 아닙니다. 환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으로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하면은 환란을 많이 겪어야 한다 이겁니다. 자기가 자기 욕망, 자기 실수 ,자기 잘못, 이런 것 때문에 당하는 환란은 그것도 그렇지만은 성격이 다른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으로 당하는 고난, 복음을 전함으로 당하는 환란 그것은 환란이라는 그게 그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우리 속에 환란 당할 요소가 있기 때문에 당하는 거지요. 진흙같은 몸에 햇빛이 내려쬐면 어찌 됩니까, 단단해지지요. 내 몸이 양초같은데 햇빛이 내리쬐면 흐물해 지겠지요. 우리가 환란이 되는 것은 내게 오는 어려운이라는 것이고 옛날에 없이 산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누워 산 사람들은, 어지간히 가도 어려움을 못 느낍니다. 고생을 하고 겪은 사람들은 먹는거 입는거 자는 거 때문에 고생은 안 합니다. 그래서 힘들다 그러면 고생을 안 해봐서 그렇지, 그래서 아이 낳는 것도 그렇고 어른들이 정부의 책임있는 사람들이 책임이 큽니다. 저거들 인기 위주로만 하고 사람들의 인식을 삐뚤어진 인식을 바로 잡지 않고 시대 따라가는 그들에 따라서 따라가는 겁니다. 이 나라는 그게 유독 심합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무슨 산포 세대? 그 말 듣고 여론화를 삼고 그런 여론들, 신문 방송들, 그 사람들도 문제입니다. 그런 거 다 이해를 하면서도 인식을 바꿔주면 되는데, 왜 똑같은 사람이 그런겁니까. 50년 전에 먹고 살기 쉬운데, 어릴 때 고생을 안 해 봤으니까..
그래서 환란이라는 것을 바꾸면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 5장인가요? 3절, 다만 이 뿐 아니라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인내를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환란은 연단입니다. 그래서 연단은 단단하게 다진다는 것이지요. 환란 없는 연단 있습니까? 성막에 휘장을 받치는 기구는 뭡니까? 이 세상과 교회를 구분짓는 휘장의 받침 이게 다 놋이죠 놋. 연단입니다. 환란 없는 연단되 있습니까? 고생은 성공의 어머니. 고진감래라 그러지요. 그러니까 쇠를 단단하게 다지려면 불에 벌겋게 달궈야합니다. 그 다음에 망치로 뚜드려 패야합니다. 이게 없으면 연단은 없는 거지요. 환란이 있어야 연단이 되는 것인데, 궁극적으로는 깊은 내면의 세계는 사랑의 작으로 인해 되어진 것,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야 하는 자유성을 살려서 필수적으로 이런 과정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상의 환란의 실질적인 환란은 뭡니까? 죄 때문이지요. 죄를 지어서. 죄를 짓게 한 그게 필연적으로 죄를 지어 봐야하는 거니까 환란은 필연적으로 오는 겁니다. 내 마음이 몸이 환란으로 느끼는 환란이 되는 것이고, 이것을 넘가 버리면 그리 되지 않는.. 먹을 게 없는 거 하고 끼니 조차 없는 그런 거 하고 먹을 거 많은데 입맛에 안 맞아서 못 먹는 것 하고 다른 차원이지요. 그래서 먹을 게 없는 사람은 요즘 시대에는 먹을 게 없다고 하지는 않지요. 요즘 사람들 보면은 고생을 안해 봐서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을 교육을 제대로 시켜서 먹을 거 많고 입을 것 많고, 이만하면 행복하지 그런데 이 곳에 내가 가고 싶은데 못하니까 고통스럽죠. 더 좋은 것을 하고 싶은데 못하니까 고통스럽죠. 고통 때문에 그렇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능력 껏 살면 되지 꼭 사치스런 생활을 해야하느냐 논리로 따져가야 하지요. 사람 삶이 다 거기서 거긴다. 옛날 인구가 줄어들 때 어느 나라에서 독신 생활을 할려면 돈을 내야한다. 이걸 인식을 시켜주면 바뀌는 겁니다. 교육 뜻이 뭡니까? 가르쳐서 기르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선생이라는 것들이 그렇지 않고 정치권에서 바로 된 선생은 감옥가고 그렇게 되니까. 그래서 환란이라는 것이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서 환란이 될 수 있고 안 될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들어가려면 환란을 겪는 다는 것은.. 환란은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이 돌로 죽도록 맞았을 때는 전혀 아프지 않았습니다. 환란이 되지 않았고. 백 목사님도 그랬지요. 우리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지만, 환란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필수적인 그런 과정, 죄를 지었으니 죄 값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 값은 인간이 감당을 못합니다. 그 값은 영원한 지옥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 심신에는 그 죄로 인한 것이 남아있는 겁니다. 내 심신 속에 죄로 인한 요소가 다 떨어지고 나면 믿는 사람은 없는 겁니다. 환란을 없애는 과정, 그게 이용물들이고 그런 겁니다. 우리는 새해 첫 주일에 우리들이 걸어가는 길에도 근데 대개 보면 우리가 받는 환란은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 받는 환란이지요. 경제 문제, 꼬였든지, 건강 문제, 관계 문제 이런 몇 가지 따지고 들어가면 마음이 근심, 걱정 그런 것들이 다 환란인데 자기 잘못으로 인한 것은 별 가치가 없습니다. 말씀으로 살아감으로 얻는 그 환란, 그것이 환란이 되는 것은 내가 아직까지 내 속에 말씀으로 삶으로 당하는 그 어려움이 그 요소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어려운 겁니다. 다 뽑아내고 나면 그렇지 않은데.. 참 어려운 거지요. 그래서 우리 앞날에 만나지는 많은 환란이 있을지라도 그 원인과 궁극의 목적을 생각하고 우리는 환란을 만날 때 환란이 되지 않을 때까지 우리를 고쳐야겠다고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초타 : 김동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