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3주후 - 아는 것의 중요성
김동민2018-12-23조회 254추천 30
12.23 주일 오후
찬송가 : 22장, 23장
본문 : 이사야 53장 1절 ~ 이사야 53장 12절
제목 : 아는 것의 중요성
오전에 주님이 나셨을 때 부모님의 배경과 시대의 배경,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원형이고 우리의 목표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 목표는 주님 같이, 주님 처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 같이 되는 것은 곧 하나님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되는 건 무한한 소망입니다.
천년만년 지나도 우리는 하나님처럼 될 수 없기에 완성이 없는 소망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같이 닮아가는 것을 예수님이 제자라고 합니다.
스승에게 배워 스승을 닮아 스승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가신 그 걸음과 생애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야하는데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달콤하고 맛있는 열매는 좋아하지만 그 과정은 싫어합니다.
아름다운 꽃은 피려면 과정이 필요한데 그 과정은 피하고 꽃만 보고 싶습니다.
가을에 감을 보면 저절로 침이 고이고 흘리는 거 사람들은 1등의 영광, 열매 그런 것은 좋아하는데, 과정은 싫어하게 됩니다.
그렇게 도둑놈, 사기꾼, 강도, 탈취자들 그게 그런 류의 사람입니다.
남의 열매를 절취하는 아주 나쁜 놈들입니다.
하지만 사람 심리 속에 그런 요소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더 큰 손해를 보기 때문에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자제를 해 놓아서 그렇지 그런 요소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탄절이란 온 세계 교회가 기쁘다 구주가 오셨네를 외치고 주일마다 수억의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찬양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영광입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닮아가려고 하면 그 분이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우리도 걸어가야합니다. 그런 과정이 없으면 결과는 없는 것입니다.
서울에 갈려면 서울 가는 길로 걸어가야하고, 제주도로 가겠다는 사람이 남쪽으로 배로 타고 가야하지 안 그러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고난이 없이 주님의 모습이 되겠다는 것은 주님과 같이 되겠다는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나는 주님 따라가기 싫다 그게 자기 자유입니다.
기독교는 자유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행동에 따른 책임은 자신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대단한 존재가 아니고 본능적인 동물입니다.
세상은 겉모습은 발달되고 화려하고 풍요로운데 속에 들어가보면 귀신의 처소로 각종 더러운 것이 모여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다 보지 못하더라도 성경 말씀으로 그렇게 보면 그게 복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사람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인간관계적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주제파악을 할려고합니다.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습니다.
개가 자기가 개인 건 모른다면 삶아 먹히던지, 버리우게 되던지 그러겠지요. 똑똑한 개일수록 자기가 개인 것을 압니다.
그것은 곧 코에 호흡이 달린 우리, 그런 우리는 피조물임을 스스로 깨달아야합니다.
어디로 갈 지는 자기 선택이지만, 결과 역시 따라옵니다.
오전에 주님의 고난을 몇 가지 생각해 봤는데
첫째는 같은 말 같은데 신분과 지위는 비슷한 말이지요. 하나님은 자존자고 스스로 계신 자고 만 존재의 근본되시며 주인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 분이 목적을 정하셨고, 예정하셨고 창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뭘로 창조했다고요? 말씀이 창조하셨습니다.
도성인신의 도가 바로 이 말씀이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 만들어 주시고 선악과 따먹게 하시고 쫓아내시고 가죽 옷을 입히시고, 화염검으로 에덴 동산을 둘러 지키시는 그 분이 바로 그 분입니다.
4000년이 지나 때가 되니까 사람의 몸을 입고오신 하나님입니다. 말하자면 신분이라는 표현이 안 맞는데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신분이 낮아졌다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신이 사람이 된 것이지요. 사람이 짐승이 된거 구더기 된 거 바퀴벌레 된 것 보다 낮아지신 것이지요. 신분적으로 아주 낮아지되 너무너무 지극히 무한히 낮아지신겁니다.
두 번째는 낮아지니까 권세 권위적으로 존재, 그 분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으로 계실 때는 하나님의 세력을 다 가졌지요.
민주국가 임에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나라 덜덜 떨고, 이런 나라는 정상적인 민주국가는 아니라 군주적인 국가입니다. 미국은 검사나 판사가 대통령의 목에 칼을 들이대기도 합니다. 그렇지 못한 나라는 독재ㆍ공산 국가입니다. 소위 말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한국이나 현재의 중국, 한 때의 대만, 싱가포르고 북한은 진짜 독재입니다. 정상적인 민주국가는 지도자의 말에 온 나라가 떨지 않습니다.
그 자리 있을 때는 겁을 내는데 쫓겨나니까 임기가 끝나니까 거기에 줄섰던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갑니다. 필연입니다. 사대주의. 인간이 사대주의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대주의를 욕하면서도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그런거지. 하나님이 하나님이 실때는 권위, 권세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원하셔서 전부 다 내놓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속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지극히 낮아지셨고 권세 권위가 다 사라지셨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어 조롱받고 그렇게 낮아졌습니다.
세 번째는 그 분의 지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지전능자가 안 되는 겁니다.
네 번째는 영광적으로 영화로운, 큰 영화로신 주.. 천군천사에게 둘러싸이고 하늘나라의 임금이신 그 분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못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광 대신 멸시, 천대, 조롱 그런 것을 받았습니다.
다섯 번째는 소유의 희생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들을 다 잃었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분을 낮아지신 겁니다. 소유적으로 낮아졌습니다.
새도 쉴 곳이 있지만 인자는 가진 것이 없도다 하는 말씀이 있듯이 말입니다.
이런 낮아지심과 멸시 천대 조롱을 감당하신 이유는 대속의 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봅시다. 예를 들어 큰 것으로 그 분은 낮아지셨고 작아지셨고...
내가 만약에 대재벌의 회장으로 있다가 경비원으로 직분으로 내려앉았을 때
더 존귀한 그런 것으로 있다가 그 사람이 어느 날 소, 돼지, 바퀴벌레가 되었을 때...
옛 화장실 통시라고하는데, 그 통실의 재래식의 화장실의 구더기가 되었을 때 견디겠습니까?
주님이 사람이 된 것은 그보다 더 작아진 것이고 희생이시지요.
귀부인들 이런 사람들 노숙자들 틈에서, 산의 가난한 사람처럼 살겠다고 하면 살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그 어떤것과 비교할 수 없는 낮아짐입니다.
존귀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 사람끼리 도토리 키재기로, 하나님 앞에 왕이나 목수 아들이나 같습니다. 사람에게 강아지가 되거라 하면 되겠습니까?
멸시 천대 받아도 종으로 살아도 사람으로 살지 강아지 취급을 받으면 살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비교가 안 된 것이고 그렇게 낮아진 것이고 그 분의 권세, 권위, 능력 다 내려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권위와 권세가 없는 사람이라서 못 느끼지만..
봉건주의의 계급이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아직도 알아야합니다.
아는 사람들은 기를 쓰고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요구합니다.
가난한 집에서 자식하나 잘 낳아서 기르면 판사 되면 그걸로 가난은 끝이지요.
권세 권위를 다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있게 되어진 것입니다. 참 무한한 사랑 없이는 있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네 번째는 영광입니다. 혼자서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죠. 누군가가 감사하고 찬양해야 영광인데 사람이 오신 그 순간부터 영광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내놓고 소유도 다 내놓아서 아무것도 없는 그 분이십니다.
이렇게 고난을 당한 동기와 목적이 뭐냐? 동기는 사랑이시지요.
도성인신 그 자체가 그렇게 되신 것이 생애의 죽으심과 부활의 동기가 모두 다 사랑입니다.
사생활 30년 공생활 3년 4개월 물론 우리로는 이 역시 불가능에 가까우나 도성인신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랑이 몇 가입니까? 혈육 사랑, 동류 사랑, 이성 사랑. 그런데 이런 사랑은 수준이 낮은 사랑입니다. 혈육 사랑이 그나마 모성애, 주님 사람과 비슷하다고는 하나 우리가 이런 모성애의 사랑을 해 봐야 알지 안 하면 모릅니다. 해 봐야 알지.
동기는 사랑이고 목적은 인간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는데 왜 이렇게 하셨는가?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인데, 왜 당신이 쉽게 하지 않고 도성인신을 하시고 신분 존재적으로 몽땅 다 내놓고 이렇게 하셔야 하는 건가?
그게 바로 하나님의 공의의 법 때문입니다. 사랑인 동시에 공의기 때문에,
생명 가진 이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성입니다. 이것을 점령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사람을 얻으려면 기본적으로 공의 공평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 되신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의 법 때문에... 그 법을 어기는 순간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백목사님 설교 중 마귀가 송사를 걸 때 당신이나 나나 짝이 똥똥 아닌가 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 법을 어겼고 정죄받은 그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려니 방법이 있습니까?
내가 대신 죄를 짊어질게 하고 내가 죄를 대신 받겠다고 하고 사람이 되겠다고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자식들이 사람이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사람이 되셔사지고 사람이 진 죄를..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사람이 되셔가지고 우리 죄를 다 짊어지고 돌아가신 겁니다.
사람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한 사람은 한 사람의 죄밖에 사해주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신성이 같이 오시어 양성일위를 이룬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마귀는 송사치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이 원하고 원함으로 자유성으로 하신 일입니다.
성탄절 주일 날 성탄을 생각하면서 과정 배경 이유 동기 목적 그런 것을 생각하시고 오신 그 분을 위해서 다 좋은데 성탄을 맞으면서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모르는 감사, 모르는 찬송, 영광은 그것들이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알고 그 사실을 받아들임으로 실감하고 느끼고 필연적인 감사가 내 속에서 나와야하는 겁니다.
부모님의 희생을 참 안다면 자식들이 불효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부모님의 뜻을 거스릴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것에서 중요한 것은 아는 것입니다.
눈 먼 망아지 워낭 소리 듣고 따라감은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본문은 4토막 낼 수 있는데, 12절이 3절 씩 나누어집니다. 1절로 3절까지는 사람들이 주님을 보는 외부의 모습니었습니다. 본문 중 “누가 믿었느뇨” 이사야가 구주께서 오심을 예언한 말입니다. 오늘 날에도 구주를 전해도 안 듣는 사람은 안 듣습니다. 안 믿어진다 해서 강요를 하지 못합니다. 설득하고 가르치다가 안 되면 기도와 주님께서 맡기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감동입니다. 믿지 않는 것은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거짓말, 근거 없는 그런 말들은 참 잘 믿습니다. 그런데 정말 진실한 말은 신기한 만큼 안 믿습니다. 그 속에 악령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인정치 없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하는 구절을 통해 주님은 강제로 하시는 분이 아닌 기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마른 줄기와 연한 순을 통해 이 땅에 계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가난한 목수였고 어머니는 처녀로 아이를 벤 죄인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아들입니다. 또한 헤롯 왕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3절에 사람들에 싫어 버린바 되었음은 주님 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도망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만이 그런 것이 아닌 사도 요한과 베드로 또한 그리하였습니다. 다들 얼굴을 피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사참배 당시 백영희 조사님을 보면 사람들이 다 피했습니다. 염병 걸리면 다 피하듯이 자기도 고초를 겪을까봐 다 도망친 것입니다. 20만 공회의 공인과 수 많은 장로님 등이 저작권 고소 문제 당시 다 도망치셨습니다. 찍힐 까봐, 우리도 그렇게 고난을 당할 까 봐. 그러기에 자기 땅에 온 주인을 그들은 영접치 않았습니다
이 것이 바로 주님의 길, 주님을 따라가는 그 길의 모습입니다 필연적이고 우리 역시도 걸어가야 되는 길입니다
4절로 6절까지는 주님의 대속 고난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징계 받아 우리가 평안과 나음을 받았습니다.
대속의 희생과 고난의 고생의 이런 성격이 아니고는 인간 구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반사 선생님들의 사람 구하는 것 역시도 동일합니다. 말안듣는 학생을 달래고 타이르고 사정하더라도 그 아이에게 내가 죄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요 죄가 있다 하더라도 주님 앞에 대속입은 감사와 하나님 앞의 죄가 있기에 그리 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걸어가며 주님처럼 그를 위해 고난과 채찍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6절의 양같은 이들을 말하셨습니다 안 믿는 학생 전도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믿는 집안의 제사장 되는 사람은 이런 심정입니다. 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배우자, 부모, 자식을 아주 받들어 모시는 게 대속의 사랑 때문에 감당에 가능한 것이고,
설사 감당을 하더라도 중심이 대속이 아니라면 이거 다 허사입니다.
7절의 일언반구가 없으셨던 주님의 모습입니다. 억울한 누명과 고난의 희생에도 거룩, 고결한 고난을 당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죄인이며 주님의 큰 사랑을 받았으므로 나도 행해야 하니 항변하거나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8절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9절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10절로 12절까지는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나온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모습은 오늘도 꼭 같이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래야만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동기는 사랑과 구원이요 핵심 원인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깨달아서 주와 같은 사랑을 가지고 구원 목적을 가지고 알고 행하며 또한 내면의 공의의 법을 깨달아 알음으로 마지막까지 주님처럼 향하 재라가는 소망까지 가지고, 이를 또한 알고 이로서 죄송한 마음과 주님을 닮아가기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따라감의 길입니다. 이것이야 가장 가치 있는 영광의 길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따질 때 둘을 놓고 평가를 하여야 합니다. 붕어빵을 고를 때조차 팥이냐 크림이냐, 서로 기호를 따지고 고르고 500원 짜리 1000원짜리 놓고 무엇이 더 큰가를 따지어 보고, 직장도 앞으로 걸어갈 일생조차도 그렇게 구별과 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부 다 주시지를 아니하십니다
사람을 고를 때에 인물, 신장, 실력, 학벌,인격, 믿음을 따지곤 하는데 다 가지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70억 인구중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해보이더라도 무언가 한 부분 고장이 나있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다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안 주십니다. 그거 다 찾아봐야 다 잘난 사람 없습니다. 다 가진 사람은 반드시 하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좋은 장점... 99개의 장점, 다 보니까 마지막 하나가 모든 걸 다 까 먹는, 까 먹고도 남는 그런 단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99개의 단점이 있는데 1개의 장점으로 다 덮고도 남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욕심을 버리고 멀리 봐야합니다. 다 가지고 대하면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야죠. 그래서 제가 하나님 되려고 하다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게 되었고 오늘까지 이어집니다.
교리적으로 세상사람 70억 모두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하니 세상을 악한 세상이 되어지는 것이고 지옥같은 세상이 되어갑니다. 이것이 바벨론과 같고, 지옥과 같은 말세지말의 오늘날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느 것이 멀리까지,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지 따져보아야 됩니다
길을 다 나와 있으나, 선택은 개인의 자유인 것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초타 : 김동민
찬송가 : 22장, 23장
본문 : 이사야 53장 1절 ~ 이사야 53장 12절
제목 : 아는 것의 중요성
오전에 주님이 나셨을 때 부모님의 배경과 시대의 배경,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원형이고 우리의 목표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 목표는 주님 같이, 주님 처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 같이 되는 것은 곧 하나님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되는 건 무한한 소망입니다.
천년만년 지나도 우리는 하나님처럼 될 수 없기에 완성이 없는 소망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같이 닮아가는 것을 예수님이 제자라고 합니다.
스승에게 배워 스승을 닮아 스승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가신 그 걸음과 생애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야하는데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달콤하고 맛있는 열매는 좋아하지만 그 과정은 싫어합니다.
아름다운 꽃은 피려면 과정이 필요한데 그 과정은 피하고 꽃만 보고 싶습니다.
가을에 감을 보면 저절로 침이 고이고 흘리는 거 사람들은 1등의 영광, 열매 그런 것은 좋아하는데, 과정은 싫어하게 됩니다.
그렇게 도둑놈, 사기꾼, 강도, 탈취자들 그게 그런 류의 사람입니다.
남의 열매를 절취하는 아주 나쁜 놈들입니다.
하지만 사람 심리 속에 그런 요소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더 큰 손해를 보기 때문에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자제를 해 놓아서 그렇지 그런 요소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탄절이란 온 세계 교회가 기쁘다 구주가 오셨네를 외치고 주일마다 수억의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찬양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영광입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닮아가려고 하면 그 분이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우리도 걸어가야합니다. 그런 과정이 없으면 결과는 없는 것입니다.
서울에 갈려면 서울 가는 길로 걸어가야하고, 제주도로 가겠다는 사람이 남쪽으로 배로 타고 가야하지 안 그러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고난이 없이 주님의 모습이 되겠다는 것은 주님과 같이 되겠다는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나는 주님 따라가기 싫다 그게 자기 자유입니다.
기독교는 자유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행동에 따른 책임은 자신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대단한 존재가 아니고 본능적인 동물입니다.
세상은 겉모습은 발달되고 화려하고 풍요로운데 속에 들어가보면 귀신의 처소로 각종 더러운 것이 모여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다 보지 못하더라도 성경 말씀으로 그렇게 보면 그게 복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사람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인간관계적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주제파악을 할려고합니다.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습니다.
개가 자기가 개인 건 모른다면 삶아 먹히던지, 버리우게 되던지 그러겠지요. 똑똑한 개일수록 자기가 개인 것을 압니다.
그것은 곧 코에 호흡이 달린 우리, 그런 우리는 피조물임을 스스로 깨달아야합니다.
어디로 갈 지는 자기 선택이지만, 결과 역시 따라옵니다.
오전에 주님의 고난을 몇 가지 생각해 봤는데
첫째는 같은 말 같은데 신분과 지위는 비슷한 말이지요. 하나님은 자존자고 스스로 계신 자고 만 존재의 근본되시며 주인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 분이 목적을 정하셨고, 예정하셨고 창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뭘로 창조했다고요? 말씀이 창조하셨습니다.
도성인신의 도가 바로 이 말씀이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 만들어 주시고 선악과 따먹게 하시고 쫓아내시고 가죽 옷을 입히시고, 화염검으로 에덴 동산을 둘러 지키시는 그 분이 바로 그 분입니다.
4000년이 지나 때가 되니까 사람의 몸을 입고오신 하나님입니다. 말하자면 신분이라는 표현이 안 맞는데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신분이 낮아졌다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신이 사람이 된 것이지요. 사람이 짐승이 된거 구더기 된 거 바퀴벌레 된 것 보다 낮아지신 것이지요. 신분적으로 아주 낮아지되 너무너무 지극히 무한히 낮아지신겁니다.
두 번째는 낮아지니까 권세 권위적으로 존재, 그 분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으로 계실 때는 하나님의 세력을 다 가졌지요.
민주국가 임에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나라 덜덜 떨고, 이런 나라는 정상적인 민주국가는 아니라 군주적인 국가입니다. 미국은 검사나 판사가 대통령의 목에 칼을 들이대기도 합니다. 그렇지 못한 나라는 독재ㆍ공산 국가입니다. 소위 말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한국이나 현재의 중국, 한 때의 대만, 싱가포르고 북한은 진짜 독재입니다. 정상적인 민주국가는 지도자의 말에 온 나라가 떨지 않습니다.
그 자리 있을 때는 겁을 내는데 쫓겨나니까 임기가 끝나니까 거기에 줄섰던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갑니다. 필연입니다. 사대주의. 인간이 사대주의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대주의를 욕하면서도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그런거지. 하나님이 하나님이 실때는 권위, 권세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원하셔서 전부 다 내놓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속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지극히 낮아지셨고 권세 권위가 다 사라지셨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어 조롱받고 그렇게 낮아졌습니다.
세 번째는 그 분의 지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지전능자가 안 되는 겁니다.
네 번째는 영광적으로 영화로운, 큰 영화로신 주.. 천군천사에게 둘러싸이고 하늘나라의 임금이신 그 분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못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광 대신 멸시, 천대, 조롱 그런 것을 받았습니다.
다섯 번째는 소유의 희생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들을 다 잃었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분을 낮아지신 겁니다. 소유적으로 낮아졌습니다.
새도 쉴 곳이 있지만 인자는 가진 것이 없도다 하는 말씀이 있듯이 말입니다.
이런 낮아지심과 멸시 천대 조롱을 감당하신 이유는 대속의 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봅시다. 예를 들어 큰 것으로 그 분은 낮아지셨고 작아지셨고...
내가 만약에 대재벌의 회장으로 있다가 경비원으로 직분으로 내려앉았을 때
더 존귀한 그런 것으로 있다가 그 사람이 어느 날 소, 돼지, 바퀴벌레가 되었을 때...
옛 화장실 통시라고하는데, 그 통실의 재래식의 화장실의 구더기가 되었을 때 견디겠습니까?
주님이 사람이 된 것은 그보다 더 작아진 것이고 희생이시지요.
귀부인들 이런 사람들 노숙자들 틈에서, 산의 가난한 사람처럼 살겠다고 하면 살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그 어떤것과 비교할 수 없는 낮아짐입니다.
존귀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 사람끼리 도토리 키재기로, 하나님 앞에 왕이나 목수 아들이나 같습니다. 사람에게 강아지가 되거라 하면 되겠습니까?
멸시 천대 받아도 종으로 살아도 사람으로 살지 강아지 취급을 받으면 살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비교가 안 된 것이고 그렇게 낮아진 것이고 그 분의 권세, 권위, 능력 다 내려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권위와 권세가 없는 사람이라서 못 느끼지만..
봉건주의의 계급이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아직도 알아야합니다.
아는 사람들은 기를 쓰고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요구합니다.
가난한 집에서 자식하나 잘 낳아서 기르면 판사 되면 그걸로 가난은 끝이지요.
권세 권위를 다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있게 되어진 것입니다. 참 무한한 사랑 없이는 있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네 번째는 영광입니다. 혼자서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죠. 누군가가 감사하고 찬양해야 영광인데 사람이 오신 그 순간부터 영광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내놓고 소유도 다 내놓아서 아무것도 없는 그 분이십니다.
이렇게 고난을 당한 동기와 목적이 뭐냐? 동기는 사랑이시지요.
도성인신 그 자체가 그렇게 되신 것이 생애의 죽으심과 부활의 동기가 모두 다 사랑입니다.
사생활 30년 공생활 3년 4개월 물론 우리로는 이 역시 불가능에 가까우나 도성인신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랑이 몇 가입니까? 혈육 사랑, 동류 사랑, 이성 사랑. 그런데 이런 사랑은 수준이 낮은 사랑입니다. 혈육 사랑이 그나마 모성애, 주님 사람과 비슷하다고는 하나 우리가 이런 모성애의 사랑을 해 봐야 알지 안 하면 모릅니다. 해 봐야 알지.
동기는 사랑이고 목적은 인간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는데 왜 이렇게 하셨는가?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인데, 왜 당신이 쉽게 하지 않고 도성인신을 하시고 신분 존재적으로 몽땅 다 내놓고 이렇게 하셔야 하는 건가?
그게 바로 하나님의 공의의 법 때문입니다. 사랑인 동시에 공의기 때문에,
생명 가진 이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성입니다. 이것을 점령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사람을 얻으려면 기본적으로 공의 공평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 되신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의 법 때문에... 그 법을 어기는 순간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백목사님 설교 중 마귀가 송사를 걸 때 당신이나 나나 짝이 똥똥 아닌가 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 법을 어겼고 정죄받은 그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려니 방법이 있습니까?
내가 대신 죄를 짊어질게 하고 내가 죄를 대신 받겠다고 하고 사람이 되겠다고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자식들이 사람이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사람이 되셔사지고 사람이 진 죄를..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사람이 되셔가지고 우리 죄를 다 짊어지고 돌아가신 겁니다.
사람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한 사람은 한 사람의 죄밖에 사해주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신성이 같이 오시어 양성일위를 이룬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마귀는 송사치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이 원하고 원함으로 자유성으로 하신 일입니다.
성탄절 주일 날 성탄을 생각하면서 과정 배경 이유 동기 목적 그런 것을 생각하시고 오신 그 분을 위해서 다 좋은데 성탄을 맞으면서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모르는 감사, 모르는 찬송, 영광은 그것들이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알고 그 사실을 받아들임으로 실감하고 느끼고 필연적인 감사가 내 속에서 나와야하는 겁니다.
부모님의 희생을 참 안다면 자식들이 불효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부모님의 뜻을 거스릴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것에서 중요한 것은 아는 것입니다.
눈 먼 망아지 워낭 소리 듣고 따라감은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본문은 4토막 낼 수 있는데, 12절이 3절 씩 나누어집니다. 1절로 3절까지는 사람들이 주님을 보는 외부의 모습니었습니다. 본문 중 “누가 믿었느뇨” 이사야가 구주께서 오심을 예언한 말입니다. 오늘 날에도 구주를 전해도 안 듣는 사람은 안 듣습니다. 안 믿어진다 해서 강요를 하지 못합니다. 설득하고 가르치다가 안 되면 기도와 주님께서 맡기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감동입니다. 믿지 않는 것은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거짓말, 근거 없는 그런 말들은 참 잘 믿습니다. 그런데 정말 진실한 말은 신기한 만큼 안 믿습니다. 그 속에 악령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인정치 없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하는 구절을 통해 주님은 강제로 하시는 분이 아닌 기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마른 줄기와 연한 순을 통해 이 땅에 계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가난한 목수였고 어머니는 처녀로 아이를 벤 죄인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아들입니다. 또한 헤롯 왕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3절에 사람들에 싫어 버린바 되었음은 주님 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도망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만이 그런 것이 아닌 사도 요한과 베드로 또한 그리하였습니다. 다들 얼굴을 피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사참배 당시 백영희 조사님을 보면 사람들이 다 피했습니다. 염병 걸리면 다 피하듯이 자기도 고초를 겪을까봐 다 도망친 것입니다. 20만 공회의 공인과 수 많은 장로님 등이 저작권 고소 문제 당시 다 도망치셨습니다. 찍힐 까봐, 우리도 그렇게 고난을 당할 까 봐. 그러기에 자기 땅에 온 주인을 그들은 영접치 않았습니다
이 것이 바로 주님의 길, 주님을 따라가는 그 길의 모습입니다 필연적이고 우리 역시도 걸어가야 되는 길입니다
4절로 6절까지는 주님의 대속 고난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징계 받아 우리가 평안과 나음을 받았습니다.
대속의 희생과 고난의 고생의 이런 성격이 아니고는 인간 구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반사 선생님들의 사람 구하는 것 역시도 동일합니다. 말안듣는 학생을 달래고 타이르고 사정하더라도 그 아이에게 내가 죄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요 죄가 있다 하더라도 주님 앞에 대속입은 감사와 하나님 앞의 죄가 있기에 그리 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걸어가며 주님처럼 그를 위해 고난과 채찍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6절의 양같은 이들을 말하셨습니다 안 믿는 학생 전도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믿는 집안의 제사장 되는 사람은 이런 심정입니다. 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배우자, 부모, 자식을 아주 받들어 모시는 게 대속의 사랑 때문에 감당에 가능한 것이고,
설사 감당을 하더라도 중심이 대속이 아니라면 이거 다 허사입니다.
7절의 일언반구가 없으셨던 주님의 모습입니다. 억울한 누명과 고난의 희생에도 거룩, 고결한 고난을 당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죄인이며 주님의 큰 사랑을 받았으므로 나도 행해야 하니 항변하거나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8절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9절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10절로 12절까지는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나온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모습은 오늘도 꼭 같이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래야만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동기는 사랑과 구원이요 핵심 원인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깨달아서 주와 같은 사랑을 가지고 구원 목적을 가지고 알고 행하며 또한 내면의 공의의 법을 깨달아 알음으로 마지막까지 주님처럼 향하 재라가는 소망까지 가지고, 이를 또한 알고 이로서 죄송한 마음과 주님을 닮아가기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따라감의 길입니다. 이것이야 가장 가치 있는 영광의 길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따질 때 둘을 놓고 평가를 하여야 합니다. 붕어빵을 고를 때조차 팥이냐 크림이냐, 서로 기호를 따지고 고르고 500원 짜리 1000원짜리 놓고 무엇이 더 큰가를 따지어 보고, 직장도 앞으로 걸어갈 일생조차도 그렇게 구별과 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부 다 주시지를 아니하십니다
사람을 고를 때에 인물, 신장, 실력, 학벌,인격, 믿음을 따지곤 하는데 다 가지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70억 인구중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해보이더라도 무언가 한 부분 고장이 나있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다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안 주십니다. 그거 다 찾아봐야 다 잘난 사람 없습니다. 다 가진 사람은 반드시 하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좋은 장점... 99개의 장점, 다 보니까 마지막 하나가 모든 걸 다 까 먹는, 까 먹고도 남는 그런 단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99개의 단점이 있는데 1개의 장점으로 다 덮고도 남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욕심을 버리고 멀리 봐야합니다. 다 가지고 대하면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야죠. 그래서 제가 하나님 되려고 하다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게 되었고 오늘까지 이어집니다.
교리적으로 세상사람 70억 모두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하니 세상을 악한 세상이 되어지는 것이고 지옥같은 세상이 되어갑니다. 이것이 바벨론과 같고, 지옥과 같은 말세지말의 오늘날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느 것이 멀리까지,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지 따져보아야 됩니다
길을 다 나와 있으나, 선택은 개인의 자유인 것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초타 : 김동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