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2일 주일 오후 -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
김동민2019-09-22조회 364추천 30
2019년 9월 22일 주일 오후
찬송 : 102장, 117장
본문 : 창세기 25장 27절 ~ 34절
제목 :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
감성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이성보다 뒤에 따라와야하고 보조적으로 되어야하지, 감성이 주가 되면 일이 안됩니다.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치적인 성향으로 보면, 보수측은 이성적이고, 진보측은 감성적입니다.
먹고 살만큼 배가 부르니까 사람의 본성과 국민성이 나옵니다. 원래 정인 많은 민족, 정은 감정이지요. 오리온 초코파이가 ‘정’자를 써서 돈을 엄청나게 벌었습니다.
먹고 살만하니까, 왼쪽에서 주장하는 데로 가서 사회주의로 치우치고 있고, 사회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있으면 감성도 필요하다면서 꽃도 꽂아놓고 애완동물도 길러보는데, 그거 괜찮지만, 그쪽으로 치우치면, 판단력이 흐려져 버립니다. 이게 더 크게 작용하면 문제가 생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과 출신이 돈을 잘 버는 세상이 되고, 세계 흐름이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경제도 그렇고,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고, 항상 우리는 논리를 따져나가는, 냉정하게, 이성적, 합리적인 것으로 노력을 하고, 감성 감정이라는 것을 보조화 되어야합니다.
말씀의 원본은 성경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출발할 때 어떤 사람은 찬송으로 출발하는 사람, 기도로 출발하는 사람, 성경으로 출발하는 사람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찬송으로 신앙 출발하는 사람은 감성적으로 되기 싶고, 깊은 세계로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기도로 신앙 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빠질 수 있습니다. 성경으로 시작하면 열정적인 것만 조금 빼면 대단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계속 우리 속에 받아들이고, 우리 아이들도 성경을 자꾸 읽게 해야합니다. 성경 공부하고, 성경 읽고, 말씀을 듣고 그래야합니다. 태어나서 안 보고 안 듣고 말을 안 하면,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그렇게 되면 시력 읽고, 귀머거리 되고, 벙어리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데로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어야하고, 말씀을 많이 들어야합니다. 이것도 예지만, 과거 서부교회에 직원들 중에 두 부류로 나누면, 심방 전도에 주류하는 분이 계셨고, 편집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반 반사들은 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그 분들의 열심은 아주 대단해서, 새벽부터 출발해서 일찍 학교 가기 전에 가서 아이들 만나서 심방을 하고 와서 보고서 다 적고 회의하고, 그렇게 학교 끝나서 심방하고 늘 심방하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대접이 특별했고, 목회 바로 나갈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편집실 직원들은 허름한 방 한 두칸에서 하루종일 말씀만 듣고 앉아있습니다. 그러면 반사들이 보고 비웃습니다. 중간반 반사들은 목회를 합니다. 그런데 끝에서 보면 중간반 반사들에서 목회는 한 두 명을 제외하고 고만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편집실의 직원들은 대개 보면은 지금도 나름대로 잘하고 있습니다. 우리 공회 안에 있는 연구소 출신에 신풍 목사님, 조례 조사님 등이 다 편집부 출신입니다. 그 외에도 나름대로 잘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의 단점이겠지만은 우리는 항상 마음을 담고 있어야합니다. 성경을 해석하고, 우리가 전파하면 찾아서 읽으면 됩니다. 전하지는 못하나 찾아보면 많이 있으니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어쨌든, 말씀을 자꾸 듣고 읽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신사적인 사람이 되어야하지, 감성적인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서 많이 졸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아이들도 계속 말씀을 가르쳐서, 계속 말씀을 가르쳐서 해야합니다.
말씀의 사람이 됩시다. 일반적으로는 이성적인, 합리적인 그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이치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말씀 속에 인간의 감성이 아닌 성경의 역사가 되어야합니다. 이 말씀으로 따지고 회개도 하고, 결심도 하고, 다지기도 하고, 자기들 살피기도 합니다.
성경의 역사가 있으니까..
위로 올라가서, 에서와 야곱의 아버지 이름이 뭐라고요? 이삭, 어머니는 리브가입니다. 또, 야곱의 할아버지가 누구죠?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두 명인데 이삭과 이스마엘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이 났는데, 아버지가 같은데 어머니가 다릅니다. 그래서 이걸 이복 형제라고 합니다. 서로 다른 배에서 났다. 이삭의 어머니는 사라고, 이스마엘의 어머니는 하갈입니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아내고, 하갈은 사라의 종입니다. 옛날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경우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문란하지는 않았지만, 본부인에게 아이를 가진 것이 자랑이었던게 모습이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이 있는데, 어머니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이스마엘은 믿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그런 사람들의 조상이었습니다.
이삭의 아들은 에서와 야곱인데, 에서와 야곱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같습니다. 동태 형제라고 합니다. 친형제라고 합니다. 거기다가,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입니다. 바로 이어났습니다. 형이 났는데, 온 몸이 붉어서 갑옷같아서 에서라고 했고, 동생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와서 야곱이라고 지었습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날 때부터 두 아이의 성향이 나타나 있습니다. 형은 용감하고 활동적입니다. 야곱은 형 발꿈치를 잡고 나온 걸 봐서 꾀 많고, 소심하고, 욕심은 많고 그런 사람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습니다. 그런데 둘이 완전히 다른 길로 가버립니다. 뱃속에 있을 때 기도를 했는데, 태에 있는 아이들이 두 족을 나뉘겠다고 했고, 동생이 더 뛰어나다고 예정을 해놓았습니다. 예정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사실을 리브가만 알았고, 이삭은 알았겠지만 야곱과 에서에게 말했을까요? 25장 23절에 두 민족에 네 자식으로부터 나뉘니라,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긴다고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겠습니까? 안했겠지요. 예를 드는 겁니다. 에서가 만약 가치를 깨닫고 욕심을 내고 야곱처럼 살았다면, 반대로 야곱이 에서처럼 살았다면 바뀌었겠습니까? 에서가 살기를 에서로 살았고, 야곱은 야곱으로 산 것입니다.
내 현실이 내 생활,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사람에게 주지 아니한 것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공위의 심판이고, 자유성의 심판입니다. 주지 않은 것은 받지 않으시기에, 적게 받은 사람에게는 적게 걷고,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이 걷습니다.
에서는 어떻게 했는가? 장자의 명분 그게 뭐야? 장자의 명분이 있다고 실제로 바뀌지 않습니다. 에사와 야곱에게 있어서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은 이름이니까, 야곱이 원하는 건 형하고 나하고 서로 바꾸자는 그런 약속입니다. 둘의 간 약속인데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장난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야곱은 심각합니다. 명분이라도 가지고 싶은 것입니다.
가진자는 갈급한이 없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겁니다. 배가 고프면 반찬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으면 키 큰 사람이 부럽습니다. 움츠러 들고, 위축이 되어집니다. 공부를 못한 사람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보고 움츠려집니다. 유학도, 외국여행도 별 거 아닌데, 박사 학위고 20~30년 전에는 귀했는데, 요즘은 흔합니다.
에서는 그런 면에서 볼 때 에서는 장자의 명분에서 감각을 장자의 그 위치, 아버지의 모든 것이 다 상속이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축복, 조상의 믿음의 계통, 그건 엄청나게 높은 겁니다. 그런데 자기는 동생이니까 없는 겁니다.
과거에, 날이면 날마다 듣는 말씀이 그거니까, 백목사님 말씀이 귀한 건 알아도, 귀한 건 줄 모릅니다. 그 말씀을 깨달은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귀한 줄을 모릅니다.
에서라는 사람은 자기가 장자니까, 장자의 명분이 귀한 줄 몰랐습니다. 보배를 보배로 알지 못하면 뺏깁니다. 듣기는 듣고 읽기는 읽어도 모르는 게 문제지요.
주님 대속을 입은 사람, 천국이 영원토록 된 것.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야하고 소망. 기본구원 받은 내가, 소망의 실체를 깨닫고 나면 상급 차원이 아니라 나의 변화가, 나라는 사람의 자체의 변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면 팔 수가 없는 건데, 그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게 되었으니까, 죽습니까? 어서 뛰어가서 뭐라도 먹고 마시면 되겠습니까? 내가 배고파서 죽겠는데 장자의 명분이 뭐가 중요해 이러면서.. 나중에 깨닫기를 아버지 앞에서 장자의 축복을 받으러 갔을 때 알았습니다. 야곱에게 이미 가버렸습니다. 거기서는 에서는 아버지여, 내게도 이러하소서. 나한테도 복을 빌어주면 되잖습니까? 야곱에게 이삭이 내린 그 축복을 에서에게 주면 안되는 겁니까? 그런데 안되니까 안되는 겁니다. 이삭의 말은 실제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실상을 야곱에게 줬는데, 에서에게 줄 게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다 주었기 때문에 너에게 줄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너는 산에서 뜨고, 들에서 날 것이고 험하게 살 것을 말씀하셨죠. 뒤에 가서 보면은 참 그렇습니다.
야곱에 받은 복에 비해서, 에서는 손가락 빨고 있었습니까? 에서는 큰 부자가 되어있었습니다. 에서는 그런데 그게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가서 말하기를, 눈물을 흘리면서 간과를 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가 장자의 명분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막강한 그런 권리와 권세와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들, 전부 백성, 형상. 소리가 너무너무 크면은 귀에 안 들린다고 하지요. 이 소망이 너무 크니까 안 되는 거지요. 깨닫지 못하면 안되는 거지요.
욕을 얻어먹으니까 화가 나 죽겠는데 건설 구원이 뭐가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이게 바로 에서가 팥죽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이유입니다. 그때 생겨지는 그 상황, 거기에 피동이 되어서 내가 끌려가서 움직여 버리면, 그걸 이치로 말씀으로 따지지 못하고 감성적으로 움직여버리면 에서가 되는 것입니다. 건설구원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때에 에서가 말한 그 슬픔과 아픔, 괴로움, 피곤함, 근심걱정, 누리고 싶은 그 욕심 이런 것들을 꺾지 못하면 에서처럼 되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아담 하와가 선악과 따먹은 것도 비슷합니다. 먹고 싶으니까 따먹어 버리는 겁니다.
아무리 급해도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괴로워도 아무리 불안해도 지금 이런 상황 이렇게 하면 나중에 어떻게 되겠냐, 이걸 따져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 되는데, 지금 이러니까.. 숙제를 해야하는데, 생각하면 아무리 피곤해도 앉아서 울면서도 숙제를 해야합니다. 울면서 숙제하고 울면서 공부를 해야합니다. 그 아이가 나중에 그렇게 되면 큰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그런 것이 있었고, 에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버렸습니다.
이게, 앞날 생각지 아니하고.. 에서의 길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지금 보다는 나중이 더 중요하고, 지금 세상 보다는 내세가 더 중요합니다.
에서는 반대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 자신도 이렇습니다. 나의 실력을 가꾸는 것도, 부모님들, 아이를 길러가는 것도, 항상 있는 게 아닙니다. 지나가면 다시는 없습니다. 오늘이 바로 한번이 전부다라고 하는 겁니다. 한 번이 전부인겁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순간 순간을 가르쳐야하고, 습성을 알려줘야합니다. 한 번 잘못하는데, 다음에 또 고치지.. 한 번 잘못된 버릇을 눈감아 주는 게 바늘도둑을 소도둑을 만들어 주는 겁니다.
나 자신도 그렇고 우리 아이들도 그렇고, 지금이 바로 내일이고 지금이 바로 영원이고 전부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신앙은 회개의 신앙인데, 회개할 거리를 알아야합니다.
과거는 회개하고, 현재는 회개할 거리를 만들지 않아야합니다. 조심을 해야합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초타 : 김동민
찬송 : 102장, 117장
본문 : 창세기 25장 27절 ~ 34절
제목 :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
감성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이성보다 뒤에 따라와야하고 보조적으로 되어야하지, 감성이 주가 되면 일이 안됩니다.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치적인 성향으로 보면, 보수측은 이성적이고, 진보측은 감성적입니다.
먹고 살만큼 배가 부르니까 사람의 본성과 국민성이 나옵니다. 원래 정인 많은 민족, 정은 감정이지요. 오리온 초코파이가 ‘정’자를 써서 돈을 엄청나게 벌었습니다.
먹고 살만하니까, 왼쪽에서 주장하는 데로 가서 사회주의로 치우치고 있고, 사회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있으면 감성도 필요하다면서 꽃도 꽂아놓고 애완동물도 길러보는데, 그거 괜찮지만, 그쪽으로 치우치면, 판단력이 흐려져 버립니다. 이게 더 크게 작용하면 문제가 생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과 출신이 돈을 잘 버는 세상이 되고, 세계 흐름이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경제도 그렇고,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고, 항상 우리는 논리를 따져나가는, 냉정하게, 이성적, 합리적인 것으로 노력을 하고, 감성 감정이라는 것을 보조화 되어야합니다.
말씀의 원본은 성경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출발할 때 어떤 사람은 찬송으로 출발하는 사람, 기도로 출발하는 사람, 성경으로 출발하는 사람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찬송으로 신앙 출발하는 사람은 감성적으로 되기 싶고, 깊은 세계로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기도로 신앙 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빠질 수 있습니다. 성경으로 시작하면 열정적인 것만 조금 빼면 대단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계속 우리 속에 받아들이고, 우리 아이들도 성경을 자꾸 읽게 해야합니다. 성경 공부하고, 성경 읽고, 말씀을 듣고 그래야합니다. 태어나서 안 보고 안 듣고 말을 안 하면,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그렇게 되면 시력 읽고, 귀머거리 되고, 벙어리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데로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어야하고, 말씀을 많이 들어야합니다. 이것도 예지만, 과거 서부교회에 직원들 중에 두 부류로 나누면, 심방 전도에 주류하는 분이 계셨고, 편집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반 반사들은 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그 분들의 열심은 아주 대단해서, 새벽부터 출발해서 일찍 학교 가기 전에 가서 아이들 만나서 심방을 하고 와서 보고서 다 적고 회의하고, 그렇게 학교 끝나서 심방하고 늘 심방하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대접이 특별했고, 목회 바로 나갈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편집실 직원들은 허름한 방 한 두칸에서 하루종일 말씀만 듣고 앉아있습니다. 그러면 반사들이 보고 비웃습니다. 중간반 반사들은 목회를 합니다. 그런데 끝에서 보면 중간반 반사들에서 목회는 한 두 명을 제외하고 고만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편집실의 직원들은 대개 보면은 지금도 나름대로 잘하고 있습니다. 우리 공회 안에 있는 연구소 출신에 신풍 목사님, 조례 조사님 등이 다 편집부 출신입니다. 그 외에도 나름대로 잘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의 단점이겠지만은 우리는 항상 마음을 담고 있어야합니다. 성경을 해석하고, 우리가 전파하면 찾아서 읽으면 됩니다. 전하지는 못하나 찾아보면 많이 있으니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어쨌든, 말씀을 자꾸 듣고 읽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신사적인 사람이 되어야하지, 감성적인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서 많이 졸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아이들도 계속 말씀을 가르쳐서, 계속 말씀을 가르쳐서 해야합니다.
말씀의 사람이 됩시다. 일반적으로는 이성적인, 합리적인 그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이치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말씀 속에 인간의 감성이 아닌 성경의 역사가 되어야합니다. 이 말씀으로 따지고 회개도 하고, 결심도 하고, 다지기도 하고, 자기들 살피기도 합니다.
성경의 역사가 있으니까..
위로 올라가서, 에서와 야곱의 아버지 이름이 뭐라고요? 이삭, 어머니는 리브가입니다. 또, 야곱의 할아버지가 누구죠?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두 명인데 이삭과 이스마엘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이 났는데, 아버지가 같은데 어머니가 다릅니다. 그래서 이걸 이복 형제라고 합니다. 서로 다른 배에서 났다. 이삭의 어머니는 사라고, 이스마엘의 어머니는 하갈입니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아내고, 하갈은 사라의 종입니다. 옛날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경우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문란하지는 않았지만, 본부인에게 아이를 가진 것이 자랑이었던게 모습이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이 있는데, 어머니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이스마엘은 믿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그런 사람들의 조상이었습니다.
이삭의 아들은 에서와 야곱인데, 에서와 야곱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같습니다. 동태 형제라고 합니다. 친형제라고 합니다. 거기다가,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입니다. 바로 이어났습니다. 형이 났는데, 온 몸이 붉어서 갑옷같아서 에서라고 했고, 동생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와서 야곱이라고 지었습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날 때부터 두 아이의 성향이 나타나 있습니다. 형은 용감하고 활동적입니다. 야곱은 형 발꿈치를 잡고 나온 걸 봐서 꾀 많고, 소심하고, 욕심은 많고 그런 사람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습니다. 그런데 둘이 완전히 다른 길로 가버립니다. 뱃속에 있을 때 기도를 했는데, 태에 있는 아이들이 두 족을 나뉘겠다고 했고, 동생이 더 뛰어나다고 예정을 해놓았습니다. 예정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 사실을 리브가만 알았고, 이삭은 알았겠지만 야곱과 에서에게 말했을까요? 25장 23절에 두 민족에 네 자식으로부터 나뉘니라,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긴다고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겠습니까? 안했겠지요. 예를 드는 겁니다. 에서가 만약 가치를 깨닫고 욕심을 내고 야곱처럼 살았다면, 반대로 야곱이 에서처럼 살았다면 바뀌었겠습니까? 에서가 살기를 에서로 살았고, 야곱은 야곱으로 산 것입니다.
내 현실이 내 생활,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사람에게 주지 아니한 것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공위의 심판이고, 자유성의 심판입니다. 주지 않은 것은 받지 않으시기에, 적게 받은 사람에게는 적게 걷고,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이 걷습니다.
에서는 어떻게 했는가? 장자의 명분 그게 뭐야? 장자의 명분이 있다고 실제로 바뀌지 않습니다. 에사와 야곱에게 있어서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은 이름이니까, 야곱이 원하는 건 형하고 나하고 서로 바꾸자는 그런 약속입니다. 둘의 간 약속인데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장난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야곱은 심각합니다. 명분이라도 가지고 싶은 것입니다.
가진자는 갈급한이 없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겁니다. 배가 고프면 반찬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으면 키 큰 사람이 부럽습니다. 움츠러 들고, 위축이 되어집니다. 공부를 못한 사람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보고 움츠려집니다. 유학도, 외국여행도 별 거 아닌데, 박사 학위고 20~30년 전에는 귀했는데, 요즘은 흔합니다.
에서는 그런 면에서 볼 때 에서는 장자의 명분에서 감각을 장자의 그 위치, 아버지의 모든 것이 다 상속이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축복, 조상의 믿음의 계통, 그건 엄청나게 높은 겁니다. 그런데 자기는 동생이니까 없는 겁니다.
과거에, 날이면 날마다 듣는 말씀이 그거니까, 백목사님 말씀이 귀한 건 알아도, 귀한 건 줄 모릅니다. 그 말씀을 깨달은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귀한 줄을 모릅니다.
에서라는 사람은 자기가 장자니까, 장자의 명분이 귀한 줄 몰랐습니다. 보배를 보배로 알지 못하면 뺏깁니다. 듣기는 듣고 읽기는 읽어도 모르는 게 문제지요.
주님 대속을 입은 사람, 천국이 영원토록 된 것.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야하고 소망. 기본구원 받은 내가, 소망의 실체를 깨닫고 나면 상급 차원이 아니라 나의 변화가, 나라는 사람의 자체의 변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면 팔 수가 없는 건데, 그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게 되었으니까, 죽습니까? 어서 뛰어가서 뭐라도 먹고 마시면 되겠습니까? 내가 배고파서 죽겠는데 장자의 명분이 뭐가 중요해 이러면서.. 나중에 깨닫기를 아버지 앞에서 장자의 축복을 받으러 갔을 때 알았습니다. 야곱에게 이미 가버렸습니다. 거기서는 에서는 아버지여, 내게도 이러하소서. 나한테도 복을 빌어주면 되잖습니까? 야곱에게 이삭이 내린 그 축복을 에서에게 주면 안되는 겁니까? 그런데 안되니까 안되는 겁니다. 이삭의 말은 실제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실상을 야곱에게 줬는데, 에서에게 줄 게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다 주었기 때문에 너에게 줄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너는 산에서 뜨고, 들에서 날 것이고 험하게 살 것을 말씀하셨죠. 뒤에 가서 보면은 참 그렇습니다.
야곱에 받은 복에 비해서, 에서는 손가락 빨고 있었습니까? 에서는 큰 부자가 되어있었습니다. 에서는 그런데 그게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가서 말하기를, 눈물을 흘리면서 간과를 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가 장자의 명분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막강한 그런 권리와 권세와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들, 전부 백성, 형상. 소리가 너무너무 크면은 귀에 안 들린다고 하지요. 이 소망이 너무 크니까 안 되는 거지요. 깨닫지 못하면 안되는 거지요.
욕을 얻어먹으니까 화가 나 죽겠는데 건설 구원이 뭐가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이게 바로 에서가 팥죽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이유입니다. 그때 생겨지는 그 상황, 거기에 피동이 되어서 내가 끌려가서 움직여 버리면, 그걸 이치로 말씀으로 따지지 못하고 감성적으로 움직여버리면 에서가 되는 것입니다. 건설구원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때에 에서가 말한 그 슬픔과 아픔, 괴로움, 피곤함, 근심걱정, 누리고 싶은 그 욕심 이런 것들을 꺾지 못하면 에서처럼 되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아담 하와가 선악과 따먹은 것도 비슷합니다. 먹고 싶으니까 따먹어 버리는 겁니다.
아무리 급해도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괴로워도 아무리 불안해도 지금 이런 상황 이렇게 하면 나중에 어떻게 되겠냐, 이걸 따져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 되는데, 지금 이러니까.. 숙제를 해야하는데, 생각하면 아무리 피곤해도 앉아서 울면서도 숙제를 해야합니다. 울면서 숙제하고 울면서 공부를 해야합니다. 그 아이가 나중에 그렇게 되면 큰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그런 것이 있었고, 에서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버렸습니다.
이게, 앞날 생각지 아니하고.. 에서의 길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지금 보다는 나중이 더 중요하고, 지금 세상 보다는 내세가 더 중요합니다.
에서는 반대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 자신도 이렇습니다. 나의 실력을 가꾸는 것도, 부모님들, 아이를 길러가는 것도, 항상 있는 게 아닙니다. 지나가면 다시는 없습니다. 오늘이 바로 한번이 전부다라고 하는 겁니다. 한 번이 전부인겁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순간 순간을 가르쳐야하고, 습성을 알려줘야합니다. 한 번 잘못하는데, 다음에 또 고치지.. 한 번 잘못된 버릇을 눈감아 주는 게 바늘도둑을 소도둑을 만들어 주는 겁니다.
나 자신도 그렇고 우리 아이들도 그렇고, 지금이 바로 내일이고 지금이 바로 영원이고 전부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신앙은 회개의 신앙인데, 회개할 거리를 알아야합니다.
과거는 회개하고, 현재는 회개할 거리를 만들지 않아야합니다. 조심을 해야합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초타 : 김동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