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밤
김동민2024-05-17조회 150추천 24
2024년 5월 17일 금밤
찬송: 61장, 60장
본문: 에스겔 40장 1절
오류 발생 시 첨부파일 참조 바랍니다.
공과가 바뀌었습니다. 공과 한 번 읽겠습니다. 본문 에스겔 40장 1절로 4절 말씀입니다. 제목은 에스겔 성전, 절망 중에 주신 소망입니다. 에스겔 성전은 보이는 물질 재료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상 세계를 보여줍니다. 바벨론의 포로, 바벨론은 우리의 좋은 세상 강한 세상을 뜻합니다. 사로잡혔다는 말은 마귀의 포로가 되어 산다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출애굽의 소망이 시작된 날에, 절망의 상황에서도 양심을 써서 회개하는 에스겔에게 포로생활에서도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믿는 사람의 법칙도 세상 것만 소망하는 사람은 정체성을 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주인으로 삼으면 허영과 허욕의 무저갱으로 빠져갑니다. 나를 끌고가는 것이 무엇인지 붙들려 있는지 살피고 돌아봐야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새 출발의 날 1월 10일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양심의 말을 써서 돌아보고 자각합시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소망을 주십니다.
에스겔 성전은 하나님을 모신 우리 신앙의 이상을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좋아질 것 없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목적지와 같은 신앙의 형태가 될 때에 신앙의 이상이라고 합니다. 눈은 이렇게 높이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현실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는 신앙의 이상과 신앙의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주신 현실을 잘 고려해야합니다. 이 삼각형이 어느 쪽으로든 치우치지 않을 때 온전한 신앙이 되어지고 온전한 신앙이 세월 속에 자라날 때에 실제에 이루어지는 그 사람의 소망이 되어집니다. 현실과 자기 역량만을 생각하면 세상과 하나 되는 신앙이 되고 맙니다. 이상적인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힘이 좀 들어가야할텐데 자기 역량만 보호하면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이 됩니다. 신앙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중요합니다. 목표가 제시되어야합니다.
처음에 볼 때는 굉장한 신앙이 있지만 스스로 내려앉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솔로몬 성전을 짓자고 하면 현실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자기도 200만명의 백성도 다 주저앉고 맙니다. 이상과 현실은 있는데 자기 역량을 고려하지 않으면 넘치던지 아니면 모자라든지 하게 됩니다. 안할 고생 하게 됩니다. 그릇에다가 쌀을 한 말을 올려놔버리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집이 성전이며 성막인데 변동이 있을찌라도 성전의 핵심인 법궤는 변동이 없습니다. 신앙의 이상을 제시합니다. 성막이든 성전이든 가장 안쪽 지성소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변동 없어야할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출애굽한 역량과 광야라는 현실에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광야의 성막이었습니다. 성막으로 자라가야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갓난 아이가 좀 자라서 분유먹는 것만 해결을 해도 부모님은 일이 엄청 줄어듭니다. 귀저기까지 떼어버리면 더 줄어듭니다. 그리고 세 네 살 아이가 칭찬받는 때도 있습니다. 많은 면과 이동과 그런 게 있는 겁니다. 성막 생활처럼 변동이 많고 그 과정에 어려움이 있고 차렸다가 거뒀다가 얼마나 일이 많겠습니까. 그 사막에 성막을 걷었다가 차렸다가 할려면 얼마나 걸렸겠습니까. 현실에 대한 고려입니다.
재료가 실과 조각목입니다. 구하기 쉬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성막으로 출발해서 그걸로 성전으로 자라기 마련입니다. 변동도 없고 신앙의 역량이 실제로 되었습니다. 성전 건축에 협조할 사람들도 있고 아버지 다윗의 수고로 국력이 강해졌고. 그렇게 불변의 신앙을 만들어보자는 것이 솔로몬 신앙입니다. 그대로 유지하면 되겠는데 잊지 아니하고 애굽종생활을 잊지 아니했다면 성전 생활에 빈틈이 없을텐데 히스기야가 깜빡 잊음으로 에스겔 성전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에스겔 성전은 이상이라 실제로 건설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건설을 한다고 해도 솔로몬 성전보다 낫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솔로몬보다 약할 거 같은데 솔로몬 성전이 비교할 수 없이 하는 것이 있으니 솔로몬 성전보다 확실히 나은 것, 에스겔 성전은 훼파를 겪어본 성전입니다. 타락을 겪어본 아담과 그러지 않은 아담은 구원에 대한 접근이 아예 달라집니다. 느끼는 것은 죄라는 세계를 알지못하는 것입니다. 천하없는 이론가라 할지라도 알아지는 세계라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그렇게 말해도 되는데 이렇게 경험과 체험을 하는 하나님입니다. 성전이 훼파되고 바벨론 성전을 해보니 얼마나 좋은 것이고 귀한 것인줄 체험을 하는 겁니다.
훼파를 겪어보지 않고도 그렇게 산다면 얼마나 귀하겠냐만은 평소에 좋을 때 가지기 어려운 게 사람입니다. 좋으면 넉넉해질지언정 하나님께서 인생에다 대고 많은 풍파와 어려움을 섞어주십니다. 겪으며 신앙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공과 이번에 시대상황은 사로잡힌지 25년이요 사로잡혔습니다.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사로잡혔다고 그러니 우리는 그런 줄 알고 돌아보아야합니다. 나는 무엇에 사로잡현던가 사로잡았으면 주인이고 사로잡혔으면 종입니다. 세상을 중단해보면 압니다. 포기를 해보면 압니다. 포기가 안되는 걸 보니 노예였구나 그렇게 됩니다. 그렇다고 다 포기하게 되면 게으르게 됩니다. 가장 낮은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끊을 수 있는 겁니다. 커피, 티비, 게임 한 눈에 봐도 보이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끊을 줄 아는 것은 가장 낮은 단계입니다. 좀 높아지면 건설과 포기가 함께 가야합니다. 평소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주일에는 중단합니다. 중단이 함께있습니다. 주일이니까 공부를 포기합니다. 이 학생 공부에 종된 거 같은데 게으름의 종 된 사람입니다. 자기를 포기해야하는 단계도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동쪽이 맞는 거 같은데 믿음이 서쪽으로 가라고합니다. 그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부인한다면 이 사람은 자기라는 것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이 사람은 자기에게 붙들린 종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외부에는 죄와 마귀와 사망이 우리를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고 옛사람 자기가 자기 바깥에 하나가 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끝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렇게 전투가 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사로잡힌지 25년이요 25년이라는 말은 100년의 절반의 절반을 말합니다. 100은 성경에서 기회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5년이면 되었지 더 이상 이렇게 살았으면 되겠는가 그 마음에 자유하고 싶은 마음에 절박함이 있고 소망이 있어야합니다. 25년 잡혔으니 지금이라도 새 출발해야하지 않겠느냐. 그때는 타협이 있고 더 나아가 25년이라는 세월에서 종 생활에 적응해버렸다면 100년 400년 종생활로 이어질 사람입니다. 400년만 종생활하겠습니까. 바뀌지 않는 순간 자유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자기 속에 악성 악습을 고치기 위해 전투를 해왔고 악성과 악습을 고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면 이 사람의 25년은 가치가 있는 겁니다. 이 땅 위에 우리에게 주신 기회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우리의 구원은 이 땅 위에서 마련하고 마련한 것으로 영원히 자라가야하는 것인데 25년이라고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아직 고칠 수 있을 때, 돌이킬 수 있으면 25년입니다. 내일 하나님 앞에 서게 될찌라도 25년입니다.
자기 속에 몰랐던 죄를 오늘 깨닫게 되었다면 25년에 포로가 된 게 안 사람입니다. 가능성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속에 깨달아 알지못한다면 종된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알아야 종된 줄 알지 않겠습니까. 포로된 기간은 25년 성이 함락된 기간은 14년입니다. 성이 함락이 되었습니다. 국경에 가까운 곳에 됩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의지할 여지조차 없던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신앙이 약하면 포로될 수도 있지만 자기 주변에 환경이고 주변에 도움이나 역할이 있다면 가정으로 보자면 자라나는 아이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 가정에 부모가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다면 아이에게 부모님의 신앙은 든든한 성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선 사람은 교회의 성입니다. 평안을 누립니다. 새 생명도 자랍니다. 총공회에 백목사님이라는 성이 없으니 혼란이 찾아왔던 것처럼 든든한 성이었습니다. 200만명은 흔들려도 모세가 든든하니 물러날 곳이 있었습니다. 신앙에 뒷받침을 해주는 것이 배경이 있으면 그 신앙은 전진만 하면 됩니다. 시간 쏟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흔히들 학업과 경제생활을 함께한다고 하는데 힘듭니다. 신앙의 뒷받침으로 해주는 배경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백목사님 계실 때는 충성을 다하도록 그럴 것입니다. 그냥 앞으로만 달려가면 되니까 그렇습니다. 백목사님 사후에는 성이 없으니 연구와 판단이 중요해졌습니다. 어디로 달려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판단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자기와 자기 주변에게 맞겨주신 성이 있다면 아껴야합니다. 공회의 노선에 곳곳에 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락 시켜버립니다. 이걸로 끝이 아니라 새생명이 자랄 것이니 누군가의 성이 되어질 수 있도록 바로 세워야합니다. 백목사님이나 모세는 의지할 성이 없는가. 완전한 하나님을 성으로 삼고 이것이 자기 속에 흔들리지 아니한다면 우리도 누군가의 성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 하나가 하나님을 성으로 삼으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방패가 되어주셨습니다. 예루살렘성은 이스라엘 수도의 성인데 물러날 곳 없는 것으로 무너졌습니다. 이렇게 되고 14년이 되었다면 해볼만큼 다 해보았다는 뜻입니다. 그게 굳어졌다면 14년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구나 더 이상 기회를 주시지 않는구나. 그게 바로 그 상황인데 스스로 생각해도 이렇게 생각이 들만큼 14년입니다. 포로생활 25년이고 기댈 곳을 해보니 14년이라.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절망이 되어질 만한 상황 아니겠습니다. 에스겔 성전을 새롭게 출발시켜주실 수 있는 소망의 때입니다.
사람을 살려보려고 하면은 인간적으로 애타는 노력을 많이해야합니다. 가장 많이해보는 것이 지금이라도 살려고 애타는 입장에서 이 말을 살려보려고 얼마나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희망을 안 보여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만둬야할지라도 우리가 놓지말아야할 것은 절망 중에 애타는 마음으로 놓지 말아야합니다.
이렇게까지 절망 가운데 우리를 밀어넣으시고 꼭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셔야되겠는가. 좋을 때 좋게 해주시면 안되겠나. 구원받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인데 불행한 사람은 절망에 넣을 것도 없이 좋게 해주시지 불행한 사람은 꼭 이렇게 말을 붙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좋게 순종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는 다 허비하고 하나님이 거두어가시니 그때 후회합니다. 좋을 때는 히스기야가 했던 행동을 다 하지 않습니까.
어느 날 아마 북한의 신앙에 자유가 찾아온다면 아마 굉장할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오늘의 그 사람의 전체와 뒷날을 단정지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뒷날이 어떻게 쓰실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을 두고 자기를 두고 마음을 두고도 나머지는 하나님에게 맡길 뿐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 우리는 우리를 돌아봐야합니다. 무엇에 사로잡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러기 때문에 사로잡힌 것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해야할일을 하지 아니하는 것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포로된 우리들인데 우리는 어떤 것에 사로잡혔던가 이것을 생각해보자는 말씀이 이번 말씀이었습니다. 이 바벨론에서 자유하기 위해서 발버둥쳐야 유월절의 은혜가 찾아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찾는 게 작은 일인데 하나님의 권능은 스스로 찾고 애타는 마음으로 크신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합니다. 이 말씀이 에스겔 성전에 첫 번째로 하신 말씀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로 돌아가시겠습니다.
찬송: 61장, 60장
본문: 에스겔 40장 1절
오류 발생 시 첨부파일 참조 바랍니다.
공과가 바뀌었습니다. 공과 한 번 읽겠습니다. 본문 에스겔 40장 1절로 4절 말씀입니다. 제목은 에스겔 성전, 절망 중에 주신 소망입니다. 에스겔 성전은 보이는 물질 재료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상 세계를 보여줍니다. 바벨론의 포로, 바벨론은 우리의 좋은 세상 강한 세상을 뜻합니다. 사로잡혔다는 말은 마귀의 포로가 되어 산다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출애굽의 소망이 시작된 날에, 절망의 상황에서도 양심을 써서 회개하는 에스겔에게 포로생활에서도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믿는 사람의 법칙도 세상 것만 소망하는 사람은 정체성을 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주인으로 삼으면 허영과 허욕의 무저갱으로 빠져갑니다. 나를 끌고가는 것이 무엇인지 붙들려 있는지 살피고 돌아봐야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새 출발의 날 1월 10일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양심의 말을 써서 돌아보고 자각합시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소망을 주십니다.
에스겔 성전은 하나님을 모신 우리 신앙의 이상을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좋아질 것 없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목적지와 같은 신앙의 형태가 될 때에 신앙의 이상이라고 합니다. 눈은 이렇게 높이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현실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는 신앙의 이상과 신앙의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주신 현실을 잘 고려해야합니다. 이 삼각형이 어느 쪽으로든 치우치지 않을 때 온전한 신앙이 되어지고 온전한 신앙이 세월 속에 자라날 때에 실제에 이루어지는 그 사람의 소망이 되어집니다. 현실과 자기 역량만을 생각하면 세상과 하나 되는 신앙이 되고 맙니다. 이상적인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힘이 좀 들어가야할텐데 자기 역량만 보호하면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이 됩니다. 신앙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중요합니다. 목표가 제시되어야합니다.
처음에 볼 때는 굉장한 신앙이 있지만 스스로 내려앉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솔로몬 성전을 짓자고 하면 현실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자기도 200만명의 백성도 다 주저앉고 맙니다. 이상과 현실은 있는데 자기 역량을 고려하지 않으면 넘치던지 아니면 모자라든지 하게 됩니다. 안할 고생 하게 됩니다. 그릇에다가 쌀을 한 말을 올려놔버리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집이 성전이며 성막인데 변동이 있을찌라도 성전의 핵심인 법궤는 변동이 없습니다. 신앙의 이상을 제시합니다. 성막이든 성전이든 가장 안쪽 지성소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변동 없어야할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출애굽한 역량과 광야라는 현실에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광야의 성막이었습니다. 성막으로 자라가야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갓난 아이가 좀 자라서 분유먹는 것만 해결을 해도 부모님은 일이 엄청 줄어듭니다. 귀저기까지 떼어버리면 더 줄어듭니다. 그리고 세 네 살 아이가 칭찬받는 때도 있습니다. 많은 면과 이동과 그런 게 있는 겁니다. 성막 생활처럼 변동이 많고 그 과정에 어려움이 있고 차렸다가 거뒀다가 얼마나 일이 많겠습니까. 그 사막에 성막을 걷었다가 차렸다가 할려면 얼마나 걸렸겠습니까. 현실에 대한 고려입니다.
재료가 실과 조각목입니다. 구하기 쉬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성막으로 출발해서 그걸로 성전으로 자라기 마련입니다. 변동도 없고 신앙의 역량이 실제로 되었습니다. 성전 건축에 협조할 사람들도 있고 아버지 다윗의 수고로 국력이 강해졌고. 그렇게 불변의 신앙을 만들어보자는 것이 솔로몬 신앙입니다. 그대로 유지하면 되겠는데 잊지 아니하고 애굽종생활을 잊지 아니했다면 성전 생활에 빈틈이 없을텐데 히스기야가 깜빡 잊음으로 에스겔 성전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에스겔 성전은 이상이라 실제로 건설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건설을 한다고 해도 솔로몬 성전보다 낫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솔로몬보다 약할 거 같은데 솔로몬 성전이 비교할 수 없이 하는 것이 있으니 솔로몬 성전보다 확실히 나은 것, 에스겔 성전은 훼파를 겪어본 성전입니다. 타락을 겪어본 아담과 그러지 않은 아담은 구원에 대한 접근이 아예 달라집니다. 느끼는 것은 죄라는 세계를 알지못하는 것입니다. 천하없는 이론가라 할지라도 알아지는 세계라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그렇게 말해도 되는데 이렇게 경험과 체험을 하는 하나님입니다. 성전이 훼파되고 바벨론 성전을 해보니 얼마나 좋은 것이고 귀한 것인줄 체험을 하는 겁니다.
훼파를 겪어보지 않고도 그렇게 산다면 얼마나 귀하겠냐만은 평소에 좋을 때 가지기 어려운 게 사람입니다. 좋으면 넉넉해질지언정 하나님께서 인생에다 대고 많은 풍파와 어려움을 섞어주십니다. 겪으며 신앙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공과 이번에 시대상황은 사로잡힌지 25년이요 사로잡혔습니다.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사로잡혔다고 그러니 우리는 그런 줄 알고 돌아보아야합니다. 나는 무엇에 사로잡현던가 사로잡았으면 주인이고 사로잡혔으면 종입니다. 세상을 중단해보면 압니다. 포기를 해보면 압니다. 포기가 안되는 걸 보니 노예였구나 그렇게 됩니다. 그렇다고 다 포기하게 되면 게으르게 됩니다. 가장 낮은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끊을 수 있는 겁니다. 커피, 티비, 게임 한 눈에 봐도 보이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끊을 줄 아는 것은 가장 낮은 단계입니다. 좀 높아지면 건설과 포기가 함께 가야합니다. 평소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주일에는 중단합니다. 중단이 함께있습니다. 주일이니까 공부를 포기합니다. 이 학생 공부에 종된 거 같은데 게으름의 종 된 사람입니다. 자기를 포기해야하는 단계도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동쪽이 맞는 거 같은데 믿음이 서쪽으로 가라고합니다. 그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부인한다면 이 사람은 자기라는 것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이 사람은 자기에게 붙들린 종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외부에는 죄와 마귀와 사망이 우리를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고 옛사람 자기가 자기 바깥에 하나가 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끝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렇게 전투가 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사로잡힌지 25년이요 25년이라는 말은 100년의 절반의 절반을 말합니다. 100은 성경에서 기회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5년이면 되었지 더 이상 이렇게 살았으면 되겠는가 그 마음에 자유하고 싶은 마음에 절박함이 있고 소망이 있어야합니다. 25년 잡혔으니 지금이라도 새 출발해야하지 않겠느냐. 그때는 타협이 있고 더 나아가 25년이라는 세월에서 종 생활에 적응해버렸다면 100년 400년 종생활로 이어질 사람입니다. 400년만 종생활하겠습니까. 바뀌지 않는 순간 자유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자기 속에 악성 악습을 고치기 위해 전투를 해왔고 악성과 악습을 고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면 이 사람의 25년은 가치가 있는 겁니다. 이 땅 위에 우리에게 주신 기회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우리의 구원은 이 땅 위에서 마련하고 마련한 것으로 영원히 자라가야하는 것인데 25년이라고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아직 고칠 수 있을 때, 돌이킬 수 있으면 25년입니다. 내일 하나님 앞에 서게 될찌라도 25년입니다.
자기 속에 몰랐던 죄를 오늘 깨닫게 되었다면 25년에 포로가 된 게 안 사람입니다. 가능성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속에 깨달아 알지못한다면 종된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알아야 종된 줄 알지 않겠습니까. 포로된 기간은 25년 성이 함락된 기간은 14년입니다. 성이 함락이 되었습니다. 국경에 가까운 곳에 됩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의지할 여지조차 없던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신앙이 약하면 포로될 수도 있지만 자기 주변에 환경이고 주변에 도움이나 역할이 있다면 가정으로 보자면 자라나는 아이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 가정에 부모가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다면 아이에게 부모님의 신앙은 든든한 성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선 사람은 교회의 성입니다. 평안을 누립니다. 새 생명도 자랍니다. 총공회에 백목사님이라는 성이 없으니 혼란이 찾아왔던 것처럼 든든한 성이었습니다. 200만명은 흔들려도 모세가 든든하니 물러날 곳이 있었습니다. 신앙에 뒷받침을 해주는 것이 배경이 있으면 그 신앙은 전진만 하면 됩니다. 시간 쏟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흔히들 학업과 경제생활을 함께한다고 하는데 힘듭니다. 신앙의 뒷받침으로 해주는 배경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백목사님 계실 때는 충성을 다하도록 그럴 것입니다. 그냥 앞으로만 달려가면 되니까 그렇습니다. 백목사님 사후에는 성이 없으니 연구와 판단이 중요해졌습니다. 어디로 달려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판단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자기와 자기 주변에게 맞겨주신 성이 있다면 아껴야합니다. 공회의 노선에 곳곳에 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락 시켜버립니다. 이걸로 끝이 아니라 새생명이 자랄 것이니 누군가의 성이 되어질 수 있도록 바로 세워야합니다. 백목사님이나 모세는 의지할 성이 없는가. 완전한 하나님을 성으로 삼고 이것이 자기 속에 흔들리지 아니한다면 우리도 누군가의 성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 하나가 하나님을 성으로 삼으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방패가 되어주셨습니다. 예루살렘성은 이스라엘 수도의 성인데 물러날 곳 없는 것으로 무너졌습니다. 이렇게 되고 14년이 되었다면 해볼만큼 다 해보았다는 뜻입니다. 그게 굳어졌다면 14년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구나 더 이상 기회를 주시지 않는구나. 그게 바로 그 상황인데 스스로 생각해도 이렇게 생각이 들만큼 14년입니다. 포로생활 25년이고 기댈 곳을 해보니 14년이라.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절망이 되어질 만한 상황 아니겠습니다. 에스겔 성전을 새롭게 출발시켜주실 수 있는 소망의 때입니다.
사람을 살려보려고 하면은 인간적으로 애타는 노력을 많이해야합니다. 가장 많이해보는 것이 지금이라도 살려고 애타는 입장에서 이 말을 살려보려고 얼마나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희망을 안 보여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만둬야할지라도 우리가 놓지말아야할 것은 절망 중에 애타는 마음으로 놓지 말아야합니다.
이렇게까지 절망 가운데 우리를 밀어넣으시고 꼭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셔야되겠는가. 좋을 때 좋게 해주시면 안되겠나. 구원받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인데 불행한 사람은 절망에 넣을 것도 없이 좋게 해주시지 불행한 사람은 꼭 이렇게 말을 붙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좋게 순종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는 다 허비하고 하나님이 거두어가시니 그때 후회합니다. 좋을 때는 히스기야가 했던 행동을 다 하지 않습니까.
어느 날 아마 북한의 신앙에 자유가 찾아온다면 아마 굉장할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오늘의 그 사람의 전체와 뒷날을 단정지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뒷날이 어떻게 쓰실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을 두고 자기를 두고 마음을 두고도 나머지는 하나님에게 맡길 뿐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 우리는 우리를 돌아봐야합니다. 무엇에 사로잡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러기 때문에 사로잡힌 것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해야할일을 하지 아니하는 것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포로된 우리들인데 우리는 어떤 것에 사로잡혔던가 이것을 생각해보자는 말씀이 이번 말씀이었습니다. 이 바벨론에서 자유하기 위해서 발버둥쳐야 유월절의 은혜가 찾아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찾는 게 작은 일인데 하나님의 권능은 스스로 찾고 애타는 마음으로 크신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합니다. 이 말씀이 에스겔 성전에 첫 번째로 하신 말씀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로 돌아가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