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5일 수밤
김동민2024-09-25조회 106추천 8
2024년 9월 25일 수밤
찬송: 138장, 136장
본문: 열왕기하 5장 2절
오류 발생 시 첨부파일 참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모세와 여호수아의 신정시대를 거쳐 사사시대로 접어들고 사사시대를 거쳐 왕정시대로 넘어가게 되고 왕이 통치하는 왕정시대에 첫 번째 왕이 사울이고 그 다음이 다윗이고 그 다음 왕이 솔로몬인데 솔로몬 때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이 주변의 모든 나라를 압도하는 강대국이 되기까지 이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잘나서 그들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반 국가의 흥망성쇠의 과정과 비슷해보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간섭이 있는 곳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 솔로몬 때의 전성기를 보면 이는 도저히 무너질 수 없는 강대국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이 솔로몬에 대해서 다윗을 기억해서 그냥 두시지만 그들의 자손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무너질 때 보면 나라가 쪼개지고 전쟁 한 번 하고나면 순식간에 약소국이 되고 맙니다. 세상은 영원한 것이 없고 절대라는 것이 없는 것이 역사입니다. 솔로몬이 죽고 아들 르호보암이 통치하는데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켜서 남북으로 나뉘게 됩니다. 로호보암은 유다 계통이고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지파 계통입니다. 요셉 계통입니다. 남북이 나뉘는 순간을 보면 에브라임이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열 지파가 나섰습니다. 남쪽을 따랐던 것은 베냐민 정도였습니다.
남쪽 유다에서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왕이 드문드문 나왔고 그 덕분에 명백을 이었는데 북쪽은 망할 징조를 많이 보이다가 아합 왕 때가 이르니까 하나님을 떠나 가장 어두운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에 왕 중에 가장 타락한 왕이 아합왕이고 왕이 그 정도로 타락했으면 충신은 없고 나라는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없고 빛이 없는 그 다음 시대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그런 어두운 시대와 이스라엘의 흥망이라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개인의 모습이 이러하며 한 가정의 모습과 흥망이 이러하며 한 교회와 흥망이 이러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할 때와 망할 때의 것은 역사가 아니라 가정의 모습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왕 한 명에 좌우되는 것이 좌우 국가인데 왕이 엉망이니 국방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침략을 쉽게 당하는 것이고 5장 2절에 보면 작은 계집 아이를 하나 사로잡았다고 했습니다. 아람나라에 군대가 동원되어 이스라엘을 쳤고 다 무너뜨리고 그 계집아이 하나 잡아간 것을 생각한 것일 수 있습니다.
계집종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큰 울타리가 되어야하는 국가가 희망없는 상태입니다. 국가가 이러든 저러든 자기를 둘러싼 가정이라도 든든하면 괜찮을 것인데 부모님의 생사 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자기를 지켜주는 가정의 울타리도 없습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차라리 그 시대에 남자였다면 세월을 기다리고 때를 기다려서 무언가를 일으켜서 힘이라도 길러볼 것인데 그것조차 할 수 없으니 계집 종입니다. 작은 계집 종입니다. 희망도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 주변 환경을 살펴보니 나아만 대장의 종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 확실하게 자기 눈에 없어보였을 겁니다. 인간적으로 절망이 되어질 수 밖에 없고 소망이 없어보이는데 인간적으로 한 환경인데 이 환경 속에서 이 여종이 믿음 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지키니 다섯 사람이 움직입니다.
오늘은 여종과 다섯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볼까 합니다. 주모가 나옵니다. 나아만 대장의 아내입니다. 두 번째로 아람 나라의 구국의 영웅인 나아만 장군이 나옵니다. 아람 나라의 왕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종 엘리사가 등장합니다. 이 주모라는 사람을 한 마디로 요약을 해보면 여종으로 알아봐주는 사람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아내입니다. 아람 나라를 구한 우리나라로 치면 이순신같은 그런 사람의 아내입니다. 열왕기하 5절과 3절을 보면 주모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나아만에게 고한 것이 되었습니다.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아내의 말을 듣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계집종은 주모에게 붙은 사람이라 나아만이 자세히 알지 못했을겁니다. 그런데 주모가 계집 종의 보증인이 되어줬습니다.
바로 보고를 했습니다. 주모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봤다는 것도 보통 사람은 아닙니다. 믿음의 식구를 챙겨보면 가장 고마운 사람 하나가 교회에 나오는 것을 잘 협조해주는 불신가족들이 가장 고맙습니다. 불신 가정에 학생을 챙기는데 불신 부모님이 옆에서 애야 선생님 왔으니 따라가거라 안 믿는 사람이라도 할 찌라도 이렇게 협조를 해주는 사람이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 선생님의 언행심사가 어찌되어야 그렇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지만 주모와 같은 역할을 해 주는 사람입니다. 나쁜 습관이 한번씩 나옵니다. 그 회사 동료가 그 사람은 불신자인데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해서 되겠느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교회에 구역장님이 들었습니다. 직장 동료를 듣고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 식구에게 그런 말 한 마디 했으니 말하기가 어려운데, 믿음 생활을 해나갈 때에 여종과 같이 한 것 같으나 이런 주모와 같은 사람들은 주권으로 잘 뿌려서 같이 둔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런 주모와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나아만입니다. 이 사건의 전체를 두고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입니다. 나아만을 요약하자면 이 사람은 인간병을 고친 사람, 양심은 있으나 신앙에 한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계집 종이라는 사람은 겪어보지 않았으니 모르지만 아내는 헛말할 사람이 아닙니다. 집에 아내가 이 말을 했으니 아내의 말이 아니라 자기의 판단으로 결정한 겁니다. 우리 집의 계집 종이 이런 보고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잘 따랐고 나아만이 이스라엘까지 갔고 하나님의 종이 엘리사를 만났고 옳은 말에 순종했고 실제 마지막에는 인간병을 고치기까지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 주인인 아람 나라 왕에 부득이하게 몸을 굽힐 때가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이해해달라고, 엘리사가 보고있겠습니까. 자기 입으로 약속을 뱉었고 아무리 봐도 지키지 못할 거 같으니 엘리사가 보고 있는 것처럼 미리 나의 신앙은 이 이상은 넘어가기 힘듭니다 하고 양해를 구합니다. 엘리사가 그런 나아만을 두고 믿는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라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평안히 가라. 괜찮아서가 아니라 옳아서가 아니라 나아만의 신앙이 그 정도이니 그 정도를 인정해주는 겁니다. 그의 신앙에서는 그게 한계라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배우는 말씀은 무한히 자라야한다고 합니다. 자라다보면은 수 없이 자기 신앙에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한계인 줄을 알면서 타협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되는 거지만, 백 목사님이 젊은 시절에 빈틈없이 믿어가시니까 면도칼이니까 양심없이 비판을 하시는 분도 있었지만 양심이 있는 분 중에서는 그 노선이 옳기는 옳습니다만은 함께 가지 못할 거 같습니다. 이런 분들도 간혹 있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끝까지 가야한다고 못합니다. 언젠간은 돌아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런 사례뜰이 주변에도 찾아보면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양심이 살아있어야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언젠가 그 양심으로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 양심을 만드는 지식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의외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진실되어 보이고 자기에게 좋은 일인데 자기에게 져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뻔히 옳고 그른 것이 뭔지 알면서 자기 입장 때문에 위신 때문에 양심을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부족하니 자기 부족을 인정하고 주변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가책을 받을지언정 양심을 져버리는 일 까지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셋째로 불신자이지만 아람 왕은 상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왕이 나아만에게 가지는 신뢰가 어느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문둥병을 더럽다고 하지 않고 옳긴다고 뭐라하지 아니하고 가까이 둔 사람입니다. 18절에 보면 나아만의 손을 의지합니다. 여종이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분이 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아만이 말는 것보니 뭔가 있기는 있나보다. 그리고 고쳐지지 않으니까 생각했습니다. 값을 치르려 했습니다. 나아만이 아무리 뛰어난 용사라고 할찌라도 왕이 이 나아만을 등용하지 않았으면 문제가 없었는데 문둥병이라는 제약이 있었음에도 등용을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해가는 많은 현실들은 불신 세상과 접해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잡하기 해야겠지만 믿음 생활에 유리한 방향으로 우리의 자세로써는 맞습니다.
집회를 좋은 마음으로 가라고 허락을 해줍니다. 차비까지 줍니다. 회사에 하나님이 볼 때 불신 세상이지만 하나라도 더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우리는 불신 세상을 이용해 천국 건설을 하지만 구원에 이용된다면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노력은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알 수 없으니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고 애를 쓰는 것은 우리의 할 일입니다.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협조는 해주시는데 교회를 안나오시는 분이 가끔 있습니다. 믿음 생활하다 보면 아람 왕같은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람입니다. 여호람은 믿음없는 사람, 양심없는 사람이라고 요약을 해봤습니다. 아람왕이 나아만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편지를 써줬습니다. 그 말은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우리가 아람 나라를 이겨보겠구나 이렇게 생각해야하는데 그 말을 듣고 옷을 찢었습니다. 자기 나라 쳐들어오는 명분으로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를 찾아가면 문둥병을 고쳐질거라는 한 마디가 빛이었고 희망이었고 나아만에게도 빛이었고 힘이었는데 이스라엘 왕에게는 나아만의 방문이 얼마나 큰 고통이 되었던지 이 나라가 아람 나라에 먹히겠구나 옷을 찢었습니다. 아람 나라의 침공을 받아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 이것을 두고 마음에 찢어지는 마음을 두고 이것을 찢어야 왕인데 그래도 미안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호람의 행동을 보면 어린 여종의 말을 듣고 어린 여종을 원망합니다. 저 아람 왕이 어린 여종의 말을 듣고 했을 리가, 아람나라가 여종을 핑계로 침공하려고 틈을 찾는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나라의 왕인데 이렇게까지 믿음이 없었던 여호람 왕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이 생기는 법인데, 순종함으로 믿음으로 자기를 작게나마 바쳐볼 때 믿음이 자라는 것인데 이스라엘의 왕부터 그 믿음이 그 정도가 어린 여종의 믿음만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 나라에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믿음을 할 수 있는 외부의 조건으로 보자면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일 번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는데 여종보다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믿는 사람에게는 환경이 중요하나 환경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것과 상관없이 우리가 하는 믿음생활을 여종과 같이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환경이 어려울수록 하나님이 개입하실 여지가 많아질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만 아는 세계 아니겠습니까. 믿음생활을 놓지 않고 하는 이유는 믿음 생활을 위해 힘을 쓰다보면은 언젠가는 하나님이 개입할 수 있다는 여지를 해봅니다.
될만한 것을 될만하게 된 게 아닙니다. 학생들 챙길 때 태풍이 오면은 심방 가봐야 아이 못 만날 줄 압니다. 오늘 가봐야 아이들 없겠구나. 하나도 못 만나고 돌아옵니다. 그렇게 될찌라도 그 시대의 그 반사 선생님은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일 주님 때문에 했습니다. 주일 학교 역사를 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백목사님이 가르쳤습니다. 나 하나 믿어보자 거기서 출발했습니다. 자기 환경 조성한다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 계집 종은 자기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이 하나를 붙들고 하나님은 쓰신 겁니다. 이스라엘 왕은 가장 좋은 이스라엘 왕궁에 앉아 이스라엘 전체의 믿음을 주저앉혔습니다. 우리가 여호람 왕처럼 살 때가 많습니까. 계집 종처럼 살 때가 많습니까. 한 교회 한 가정 한 개인의 속에도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 여호람 같은 요소로 살 때도 있고 여종과 같은 모습으로 살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달려있는 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시간이 그렇지 다시 이런 역사를 이끌어내는 사람입니다. 여호람 왕은 솔로몬 시대에 가져다놔도 망쳐놓을 사람입니다. 사람이 문제입니까 환경이 문제입니까. 우리는 매 현실마다 선택을 해야합니다. 여종으로 살 것인가 여호람으로 살 것인가. 여호람 왕과 같은 존재는 되지 않아야합니다. 좋고 따뜻한 환경에서 마치 북문을 만난 사람처럼 그렇게 좋은 환경 속에서 자기 현실 속에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이런 이상적인 믿음을 가지지 못해도 믿음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을 내부에서 주저앉히는 그런 사람을 뽑아야합니다.
다섯 번째가 엘리사입니다. 믿음의 사람과 뜻이 통했던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엘리사와 여종은 손발이 척척 맞았습니다. 엘리사와 여종의 거리가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인터넷이 있었겠습니까 여종은 여종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게 여종의 일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사의 일을 했습니다. 멀리 떨어져있었으나 그랬습니다. 영광이 되었습니다. 우리 믿음 생활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는 전해주시는 이 노선으로 이끌어주시는 앞선 선지자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형제가 손발이 맞으면 두 배, 부부가 맞으면 열 배 즈음 할겁니다.
믿는 사람이 절에 찾아가서 전도를 할 수는 없는겁니다. 그런데 중이 찾아온다면 최선을 다해서 전도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구역장님이나 어른이 대화로 해결해버렸다면 그 신앙의 문턱을 넘어서게 된겁니다. 한 사람은 여종, 한 사람은 엘리사가 된 겁니다. 이건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자기 속의 지식 속의 여종입니다. 이 둘이 만나 일을 하면 옳고 바른 일이 되어집니다. 속으로는 여종이 일을 다했습니다. 자기 일이 작다 여기면 정말 작은 일이 되고 맙니다. 여종은 자기의 일이 작다고 여겼으면 이런 큰 구원의 역사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일을 작다 여기지 아니하고 여종은 여종의 자리에서 엘리사는 엘리사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줄 수 있다면 교회라고 합니다. 손 발을 맞추다보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있는 자기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다섯 종류의 사람을 생각해봤습니다. 사건은 하나인데 다섯 명의 속마음과 준비가 나왔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습이 꼭 이러합니다. 우리는 어디 즈음에 있는지 어떤 사람으로 있을 때가 많은지 고요하게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로 돌아가시겠습니다.
찬송: 138장, 136장
본문: 열왕기하 5장 2절
오류 발생 시 첨부파일 참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모세와 여호수아의 신정시대를 거쳐 사사시대로 접어들고 사사시대를 거쳐 왕정시대로 넘어가게 되고 왕이 통치하는 왕정시대에 첫 번째 왕이 사울이고 그 다음이 다윗이고 그 다음 왕이 솔로몬인데 솔로몬 때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이 주변의 모든 나라를 압도하는 강대국이 되기까지 이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잘나서 그들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반 국가의 흥망성쇠의 과정과 비슷해보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간섭이 있는 곳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 솔로몬 때의 전성기를 보면 이는 도저히 무너질 수 없는 강대국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이 솔로몬에 대해서 다윗을 기억해서 그냥 두시지만 그들의 자손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무너질 때 보면 나라가 쪼개지고 전쟁 한 번 하고나면 순식간에 약소국이 되고 맙니다. 세상은 영원한 것이 없고 절대라는 것이 없는 것이 역사입니다. 솔로몬이 죽고 아들 르호보암이 통치하는데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켜서 남북으로 나뉘게 됩니다. 로호보암은 유다 계통이고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지파 계통입니다. 요셉 계통입니다. 남북이 나뉘는 순간을 보면 에브라임이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열 지파가 나섰습니다. 남쪽을 따랐던 것은 베냐민 정도였습니다.
남쪽 유다에서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왕이 드문드문 나왔고 그 덕분에 명백을 이었는데 북쪽은 망할 징조를 많이 보이다가 아합 왕 때가 이르니까 하나님을 떠나 가장 어두운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에 왕 중에 가장 타락한 왕이 아합왕이고 왕이 그 정도로 타락했으면 충신은 없고 나라는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없고 빛이 없는 그 다음 시대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그런 어두운 시대와 이스라엘의 흥망이라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개인의 모습이 이러하며 한 가정의 모습과 흥망이 이러하며 한 교회와 흥망이 이러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할 때와 망할 때의 것은 역사가 아니라 가정의 모습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왕 한 명에 좌우되는 것이 좌우 국가인데 왕이 엉망이니 국방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침략을 쉽게 당하는 것이고 5장 2절에 보면 작은 계집 아이를 하나 사로잡았다고 했습니다. 아람나라에 군대가 동원되어 이스라엘을 쳤고 다 무너뜨리고 그 계집아이 하나 잡아간 것을 생각한 것일 수 있습니다.
계집종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큰 울타리가 되어야하는 국가가 희망없는 상태입니다. 국가가 이러든 저러든 자기를 둘러싼 가정이라도 든든하면 괜찮을 것인데 부모님의 생사 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자기를 지켜주는 가정의 울타리도 없습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차라리 그 시대에 남자였다면 세월을 기다리고 때를 기다려서 무언가를 일으켜서 힘이라도 길러볼 것인데 그것조차 할 수 없으니 계집 종입니다. 작은 계집 종입니다. 희망도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 주변 환경을 살펴보니 나아만 대장의 종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 확실하게 자기 눈에 없어보였을 겁니다. 인간적으로 절망이 되어질 수 밖에 없고 소망이 없어보이는데 인간적으로 한 환경인데 이 환경 속에서 이 여종이 믿음 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지키니 다섯 사람이 움직입니다.
오늘은 여종과 다섯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볼까 합니다. 주모가 나옵니다. 나아만 대장의 아내입니다. 두 번째로 아람 나라의 구국의 영웅인 나아만 장군이 나옵니다. 아람 나라의 왕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종 엘리사가 등장합니다. 이 주모라는 사람을 한 마디로 요약을 해보면 여종으로 알아봐주는 사람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아내입니다. 아람 나라를 구한 우리나라로 치면 이순신같은 그런 사람의 아내입니다. 열왕기하 5절과 3절을 보면 주모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나아만에게 고한 것이 되었습니다.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아내의 말을 듣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계집종은 주모에게 붙은 사람이라 나아만이 자세히 알지 못했을겁니다. 그런데 주모가 계집 종의 보증인이 되어줬습니다.
바로 보고를 했습니다. 주모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봤다는 것도 보통 사람은 아닙니다. 믿음의 식구를 챙겨보면 가장 고마운 사람 하나가 교회에 나오는 것을 잘 협조해주는 불신가족들이 가장 고맙습니다. 불신 가정에 학생을 챙기는데 불신 부모님이 옆에서 애야 선생님 왔으니 따라가거라 안 믿는 사람이라도 할 찌라도 이렇게 협조를 해주는 사람이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 선생님의 언행심사가 어찌되어야 그렇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지만 주모와 같은 역할을 해 주는 사람입니다. 나쁜 습관이 한번씩 나옵니다. 그 회사 동료가 그 사람은 불신자인데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해서 되겠느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교회에 구역장님이 들었습니다. 직장 동료를 듣고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 식구에게 그런 말 한 마디 했으니 말하기가 어려운데, 믿음 생활을 해나갈 때에 여종과 같이 한 것 같으나 이런 주모와 같은 사람들은 주권으로 잘 뿌려서 같이 둔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런 주모와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나아만입니다. 이 사건의 전체를 두고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입니다. 나아만을 요약하자면 이 사람은 인간병을 고친 사람, 양심은 있으나 신앙에 한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계집 종이라는 사람은 겪어보지 않았으니 모르지만 아내는 헛말할 사람이 아닙니다. 집에 아내가 이 말을 했으니 아내의 말이 아니라 자기의 판단으로 결정한 겁니다. 우리 집의 계집 종이 이런 보고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잘 따랐고 나아만이 이스라엘까지 갔고 하나님의 종이 엘리사를 만났고 옳은 말에 순종했고 실제 마지막에는 인간병을 고치기까지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 주인인 아람 나라 왕에 부득이하게 몸을 굽힐 때가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이해해달라고, 엘리사가 보고있겠습니까. 자기 입으로 약속을 뱉었고 아무리 봐도 지키지 못할 거 같으니 엘리사가 보고 있는 것처럼 미리 나의 신앙은 이 이상은 넘어가기 힘듭니다 하고 양해를 구합니다. 엘리사가 그런 나아만을 두고 믿는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라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평안히 가라. 괜찮아서가 아니라 옳아서가 아니라 나아만의 신앙이 그 정도이니 그 정도를 인정해주는 겁니다. 그의 신앙에서는 그게 한계라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배우는 말씀은 무한히 자라야한다고 합니다. 자라다보면은 수 없이 자기 신앙에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한계인 줄을 알면서 타협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되는 거지만, 백 목사님이 젊은 시절에 빈틈없이 믿어가시니까 면도칼이니까 양심없이 비판을 하시는 분도 있었지만 양심이 있는 분 중에서는 그 노선이 옳기는 옳습니다만은 함께 가지 못할 거 같습니다. 이런 분들도 간혹 있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끝까지 가야한다고 못합니다. 언젠간은 돌아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런 사례뜰이 주변에도 찾아보면 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양심이 살아있어야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언젠가 그 양심으로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 양심을 만드는 지식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의외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진실되어 보이고 자기에게 좋은 일인데 자기에게 져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뻔히 옳고 그른 것이 뭔지 알면서 자기 입장 때문에 위신 때문에 양심을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부족하니 자기 부족을 인정하고 주변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가책을 받을지언정 양심을 져버리는 일 까지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셋째로 불신자이지만 아람 왕은 상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왕이 나아만에게 가지는 신뢰가 어느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문둥병을 더럽다고 하지 않고 옳긴다고 뭐라하지 아니하고 가까이 둔 사람입니다. 18절에 보면 나아만의 손을 의지합니다. 여종이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분이 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아만이 말는 것보니 뭔가 있기는 있나보다. 그리고 고쳐지지 않으니까 생각했습니다. 값을 치르려 했습니다. 나아만이 아무리 뛰어난 용사라고 할찌라도 왕이 이 나아만을 등용하지 않았으면 문제가 없었는데 문둥병이라는 제약이 있었음에도 등용을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해가는 많은 현실들은 불신 세상과 접해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잡하기 해야겠지만 믿음 생활에 유리한 방향으로 우리의 자세로써는 맞습니다.
집회를 좋은 마음으로 가라고 허락을 해줍니다. 차비까지 줍니다. 회사에 하나님이 볼 때 불신 세상이지만 하나라도 더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우리는 불신 세상을 이용해 천국 건설을 하지만 구원에 이용된다면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노력은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알 수 없으니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고 애를 쓰는 것은 우리의 할 일입니다.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협조는 해주시는데 교회를 안나오시는 분이 가끔 있습니다. 믿음 생활하다 보면 아람 왕같은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람입니다. 여호람은 믿음없는 사람, 양심없는 사람이라고 요약을 해봤습니다. 아람왕이 나아만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편지를 써줬습니다. 그 말은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우리가 아람 나라를 이겨보겠구나 이렇게 생각해야하는데 그 말을 듣고 옷을 찢었습니다. 자기 나라 쳐들어오는 명분으로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를 찾아가면 문둥병을 고쳐질거라는 한 마디가 빛이었고 희망이었고 나아만에게도 빛이었고 힘이었는데 이스라엘 왕에게는 나아만의 방문이 얼마나 큰 고통이 되었던지 이 나라가 아람 나라에 먹히겠구나 옷을 찢었습니다. 아람 나라의 침공을 받아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 이것을 두고 마음에 찢어지는 마음을 두고 이것을 찢어야 왕인데 그래도 미안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호람의 행동을 보면 어린 여종의 말을 듣고 어린 여종을 원망합니다. 저 아람 왕이 어린 여종의 말을 듣고 했을 리가, 아람나라가 여종을 핑계로 침공하려고 틈을 찾는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나라의 왕인데 이렇게까지 믿음이 없었던 여호람 왕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이 생기는 법인데, 순종함으로 믿음으로 자기를 작게나마 바쳐볼 때 믿음이 자라는 것인데 이스라엘의 왕부터 그 믿음이 그 정도가 어린 여종의 믿음만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 나라에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믿음을 할 수 있는 외부의 조건으로 보자면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일 번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는데 여종보다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믿는 사람에게는 환경이 중요하나 환경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것과 상관없이 우리가 하는 믿음생활을 여종과 같이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환경이 어려울수록 하나님이 개입하실 여지가 많아질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만 아는 세계 아니겠습니까. 믿음생활을 놓지 않고 하는 이유는 믿음 생활을 위해 힘을 쓰다보면은 언젠가는 하나님이 개입할 수 있다는 여지를 해봅니다.
될만한 것을 될만하게 된 게 아닙니다. 학생들 챙길 때 태풍이 오면은 심방 가봐야 아이 못 만날 줄 압니다. 오늘 가봐야 아이들 없겠구나. 하나도 못 만나고 돌아옵니다. 그렇게 될찌라도 그 시대의 그 반사 선생님은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일 주님 때문에 했습니다. 주일 학교 역사를 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백목사님이 가르쳤습니다. 나 하나 믿어보자 거기서 출발했습니다. 자기 환경 조성한다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 계집 종은 자기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이 하나를 붙들고 하나님은 쓰신 겁니다. 이스라엘 왕은 가장 좋은 이스라엘 왕궁에 앉아 이스라엘 전체의 믿음을 주저앉혔습니다. 우리가 여호람 왕처럼 살 때가 많습니까. 계집 종처럼 살 때가 많습니까. 한 교회 한 가정 한 개인의 속에도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 여호람 같은 요소로 살 때도 있고 여종과 같은 모습으로 살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달려있는 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시간이 그렇지 다시 이런 역사를 이끌어내는 사람입니다. 여호람 왕은 솔로몬 시대에 가져다놔도 망쳐놓을 사람입니다. 사람이 문제입니까 환경이 문제입니까. 우리는 매 현실마다 선택을 해야합니다. 여종으로 살 것인가 여호람으로 살 것인가. 여호람 왕과 같은 존재는 되지 않아야합니다. 좋고 따뜻한 환경에서 마치 북문을 만난 사람처럼 그렇게 좋은 환경 속에서 자기 현실 속에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이런 이상적인 믿음을 가지지 못해도 믿음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을 내부에서 주저앉히는 그런 사람을 뽑아야합니다.
다섯 번째가 엘리사입니다. 믿음의 사람과 뜻이 통했던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엘리사와 여종은 손발이 척척 맞았습니다. 엘리사와 여종의 거리가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인터넷이 있었겠습니까 여종은 여종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게 여종의 일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사의 일을 했습니다. 멀리 떨어져있었으나 그랬습니다. 영광이 되었습니다. 우리 믿음 생활도 도움이 많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는 전해주시는 이 노선으로 이끌어주시는 앞선 선지자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형제가 손발이 맞으면 두 배, 부부가 맞으면 열 배 즈음 할겁니다.
믿는 사람이 절에 찾아가서 전도를 할 수는 없는겁니다. 그런데 중이 찾아온다면 최선을 다해서 전도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구역장님이나 어른이 대화로 해결해버렸다면 그 신앙의 문턱을 넘어서게 된겁니다. 한 사람은 여종, 한 사람은 엘리사가 된 겁니다. 이건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자기 속의 지식 속의 여종입니다. 이 둘이 만나 일을 하면 옳고 바른 일이 되어집니다. 속으로는 여종이 일을 다했습니다. 자기 일이 작다 여기면 정말 작은 일이 되고 맙니다. 여종은 자기의 일이 작다고 여겼으면 이런 큰 구원의 역사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일을 작다 여기지 아니하고 여종은 여종의 자리에서 엘리사는 엘리사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줄 수 있다면 교회라고 합니다. 손 발을 맞추다보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있는 자기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다섯 종류의 사람을 생각해봤습니다. 사건은 하나인데 다섯 명의 속마음과 준비가 나왔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습이 꼭 이러합니다. 우리는 어디 즈음에 있는지 어떤 사람으로 있을 때가 많은지 고요하게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로 돌아가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