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1일 주일 오후
김동민2024-07-21조회 115추천 22
2024년 7월 21일 주일 오후
찬송: 16장, 18장
본문: 시편 62편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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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시를 성경으로 기록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구원의 도리를 담아주셨습니다. 다윗의 시인데 성경이 되었습니다. 시라는 것은 시를 쓴 사람이 다윗이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고 나의 구원이시고 깨달은 걸 기록하신 겁니다. 자기가 그것에 대해서 보고 듣고 접촉을 하면서 깨달은 바 느낀 바 또는 경험한 바 자기대로 그렇게 간단하게 고백하는 그게 시입니다. 아무렇게나 쓰면 되는 것이 아니고 짧은 글 속에 나름대로 의미를 깊게 넓게 담아놓은 게 시기 때문에. 그림도 그렇습니다. 화가의 시인가 화가의 느낌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볼 때 아무것도 아니고 뭔지도 모르겠는데 시대에 따라 그림도 그런 방향이 이상하게 되는 거지요. 시대에 따라서 무슨 화 무슨 화 따라서 방향이 달라지고 흐름을 방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시대를 앞서간다 그래서 미리 생각하고 그린 것도 있어서 그 사람이 그린 그 그림을 그때는 몰랐는데 시대가 지나면 깨달아서 올라가는 경우도 있고. 그림 속에는 화가의 생각이 화가의 느낌이 사상이 들어가고 글을 쓴 사상 속에 가치관이 들어가고 시 속에는 그 속에 그 사람이 느낌 감정 사상이 들어있습니다. 다윗의 시는 사상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신앙사상이란 그 자세 다윗의 시 솔로몬의 시 그 속에는 사람들의 신앙 사상이 있어서 예사로 볼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기록해서 주신 겁니다.
속에 들어가보면 하나님이 이 시를 쓰신 것이라고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신앙 행적이 있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는가. 욥의 많은 그 속에 신앙이 들어있고 친구들의 말 속에도 그들의 신앙이 들어있습니다. 마지막께서 판정하실 때 읽어보시면 욥은 자기 자랑 자기 변론만 잔뜩했고 세 친구는 하나님 편만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친구 말을 두고 너희들의 말은 욥의 말보다 의롭지가 못다고 했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만 한 겁니다. 욥에 대해서는 하나만 딱 책망했습니다. 네가 의로운데 그게 내 잘못이냐. 세 친구는 다 말씀하지 않아도 욥의 말보다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겁니다. 다윗의 시 속에서는 뭐가 들었다고요. 신앙 사상, 신앙 행적이 들어있습니다. 설교자의 설교 속에 설교자의 신앙 사상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의 신앙 사상을 들어보고 성경적이다. 성경적으로 그랬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다윗고 사도 바울과 칼빈과 백 목사님과 이런 사상과 맞는 사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신앙 사상이 다르다. 이걸 파악을 하고 잡을 줄 알아야합니다. 이런 걸 놓치면 큰 줄기를 놓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목회하지는 않으셔도 귀는 가져야합니다. 듣는 귀가 없으면 목회자를 탈선시키는 무언의 동조가 됩니다. 참 중요한 겁니다.
찬송가도 그 가사 속에 들어있습니다. 새 찬송가 604곡 중에서 200여곡만 추렸습니다. 그 중에도 200곡 중에도 찬송을 새로 만든게 있는데 뒤로 뺀 곡이 있습니다. 우리와는 맞지 않다. 하지만 필요는 해서 뒤로 뺐습니다. 다윗의 시는 그런 면이 있다는 걸 기록해야하고 같이 보는 게 그런 겁니다. 말로 듣지 않으면 뭐가 담겼는지 말이란 말의 경우가 뭐라고 말의 높임말은 말씀이고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의사 뜻 생각 마음 사상 이게 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생각 뜻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가치관 사고방식 들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과 대화하고 참 중요합니다. 장사를 하든지 사업을 하던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접해야하는데 사람 심리를 알 수 있고 바로 상대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람을 인간관계를 바로 맺을 수 있고 쓸데없는 오해를 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해를 많이 사게 됩니다. 쓸데없는 분란이 일어나서 허비가 되게 되는 거지요. 다윗의 시, 여두둔의 법칙을 한 노래.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도리를 생각해봅니다. 다윗은 하나님만 나의 반석이다. 그분이 나의 구원이시다. 반석과 구원과 산성이란 그런 것인데 반석을 생각해보는 겁니다. 나의 영혼이 다윗이 자기 마음을 살피는 겁니다. 마음을 말합니다. 성경에 영혼은 많이 나오는데 영혼을 영으로 오해해서 삼분론 구원론 오해한 분이 많았습니다. 영혼은 영과 가까운 마음. 영혼은 마음의 깊은 면,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잠자가 잠수할 때 잠자입니다. 물 속에 고요한 겁니다. 그러면 잠잠하다 잠잠하다는 표현을 쓴 것이지요.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는데 코로나로 일상이 다 무너질 때는 일상생활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반대로 일상생활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겁니다. 잠잠하다 고요하다 평안하다. 이런 단어가 있으면 환란이 있는가보다. 이런 게 들어있습니다. 다윗이 내 영혼이 잠잠하다 이 말은 환란 중에 있다는 말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많은 혼란을 겪었는데 고요하게 평안하게 마음이 말하자면 바람이여. 마음이 편안한 겁니다. 먹은 음식이 소화가 안됐던지 속이 거룩하면 자유롭지 못합니다. 속이 편안하면 그리 되는거지요. 마음이 편한해야 그리 되는 겁니다. 환란이 편안하면 고요함을 흔들지 못하는 거지요. 외부의 환란 풍파에 마음이 잠잠하고 평안함에 정도가 외부에 흔드는 게 이겨내면 평안한 게 되는 것이고 흔들려버리면 혼란스러운 겁니다. 가난 때문에 흔들리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가난이 와도 마음이 잠잠합니다. 가난에서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질병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병이 왔는데 마음이 잠잠합니다. 질병에서 건질 분이 계셔서 사람사람 관계에서 별의 별 종류를 다 불문하고 그거 때문에 고난 환란 풍파를 겪게 되는데 거기서 건져주실 분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이 구원의 각도라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각도, 관점, 시각 같은 말입니다. 어디서 보느냐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 옆에서 보느냐 위에서 보느냐 입체적으로 봐도 되는지 모세를 물에서 건졌습니다. 그래서 모세입니다. 질병에서 건지려면 질병을 치료해야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병이 생겼는데 병 때문에 고난하는 데 그걸 치료하는 것이다. 누가 구주가 되는 겁니까. 병을 치료하는 게 구원이다 그러면 의사가 구주가 됩니다. 대학 병원 수술이 구주가 되는 것이고. 나는 돈 때문에 고통받는데 그렇다는 것은 재벌가가 구주가 되겠습니다.
이 구원이 뭐냐 이래서 잘못하면 합리화를 시키는 게 되고 귀에 걸면 귀거리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 되는 그런 게 되고 반론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합리화는 그게 전부가 다른 게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있는 겁니다. 같은 일을 두고 객관으로 인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내 주관이 변하는 것은 이 세상 사람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역사가 실제 있는 겁니다. 인간의 말로 할 수 있는 역사를 해주시고 변화를 시켜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이어져오고 살아있는겁니다. 그런 걸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구원으로 삼을 때 해결도 됩니다. 인간관계도 해결이 됩니다. 하나님을 나의 구원을 삼아서 나와 관련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묘하게 됩니다. 환경이 변하는 거 보셨습니까. 환경이 변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고 태도가 변합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논리로 되는 게 아닌 겁니다. 대표적으로 반사를 해보면 압니다. 학생들이 대하는 태도. 설교 때마다 느끼는 겁니다.
예배 시간에 교인들 자세가 다 다릅니다. 앉아있는 자세, 한 주간의 생활이 2~3주간이라도 괜찮으면 새벽기도부터 출석은 완전 다릅니다.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찬송가 16장에 오직 주예수로 바뀌었는데 한문글자로 말하면 유일입니다. 창조주 주권자 하나님만 없는 겁니다. 넓고 평평한 바위들 집회장소에 가면 반석들이 있습니다. 넓고 평평한 돌, 동래 금정산에 바위같은거, 그 위에 기초가 되는 거지요. 반석, 반석이라는 말은 기초를 말합니다. 터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근본이라는 뜻이 되고 뿌리라는 말입니다. 나무가 자라려면 뿌리를 제대로 박아야합니다. 하나님만 나의 반석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베드로에게 나는 베드로라 베드로의 뜻은 반석,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하나님의 기초고 터다. 이게 무슨 말일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는다.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을 반석으로 사는 것은 어떤게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는 겁니까. 그분만이 나의 반석입니다. 반석이라는 말이 터라는 뜻이고 그 위에 뿌리내린다는 뜻이고 이게 무슨 말일까. 쉽게 말하면 이분이 백이다. 말이죠. 믿고 의지하고 바라볼 배경, 터가 되는 것이다. 그 말이지요.
다시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셔서 터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나의 터로 반석으로 다윗은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반석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그 분은 계시는데 하나님은 어떤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자의 하나님이신가요. 반석은 하나님이 반석입니다. 그 반석이든 하나님을 내 반석으로 삼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았습니다. 어떻게 삼았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자의 하나님인가요. 믿는 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믿음이 각각 다 달라서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반석으로 삼으신 하나님,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은 정도는 각각 다 다르니 하나님께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습니까.
다윗은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고 자기가 깨닫고 고백을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안 계시면 집을 못 짓습니다. 그 위에 건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의 반석으로 삼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주관 역사입니까. 객관 역사입니까. 말이 어렵습니까. 저는 무식해서 어려운 말 잘 쓸 줄 모릅니다. 주관 객관을 모르면 문제가 많은 거지요. 주관이 나고 객관은 다른 사람인거지요. 믿음의 출발은 객관 역사이지요. 이건 은혜이기 때문에 무조건 받는 것이고 내 주관역사입니다. 주관 뿐이면 인간놀음에 다 빠집니다. 예배도 신앙도 모두 그렇습니다. 객관이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내 주관이 객관에게 붙들려서 객관된게 믿음입니다. 이게 믿음이라 그 말이죠.
그리 되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겁니다. 나와 하나님의 생각이 같아지는 겁니다. 내가 보는 것과 하나님 보는 게 같아지는 겁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이게 많아질수록 성화구원의 실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고 종들의 모습이 전부 이런 것이고 신인양성일위이기 때문에 내 말은 아버지 말씀이다. 우리는 내 주관이 객관이 되는 게 믿음이다. 반석이라는 것은 만세 반석 줄여서 그렇지 만세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천년 만년 억만년가도 흔들리는 게 없다는 소리지요. 정치판에서 많이 도는 거지요. 이 사람이 대통령 될 거 같아서 줄을 섰는데 엉뚱한 줄입니다. 그 사람의 돈을 믿었는데 사업이 망해버렸습니다. 그 사람의 실력을 믿었는데 실력이 어느날 그만 병이 걸려서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건강을 믿었는데 건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권력을 잡아보고 많은 것을 가져봤는데 솔로몬은 더 있는데도 아버지보다 못했죠. 하나님 외에는 반석이 없습니다.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런 사람은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없다는 걸 깨달은거지요. 내 반석으로 삼는 것은 내가 삼는 믿음입니다. 그분이 나를 반석으로 삼았으니까 순종하는거지요. 저는 나의 반석이시오 오직 또 하나님만 원하시는 그겁니다. 제 얘기는 뭡니까. 너는 나 외에는, 참 욕심쟁이지요. 하나님은 하나님 뿐이라는 말이 많습니다. 내가 전부다. 이 분이 하나님입니다. 인간으로 치면 참 나쁘고 못됐는데 하나님이시에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따져봐도 그런 겁니다. 보이는 정도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내면을 명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줄을 잡고 깊이 들어가는 걸 명상이라고 합니다. 과연 하나님 외에 믿을 이가 시간이 가도 환경이 변해도 그래서 목사 서약할 때 결혼 서약할 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모든 경우에서 사랑하기로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느뇨. 그래서 믿는 사람의 믿음이란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그런데 자기 스스로 도망치는 것은 방법이 없는 겁니다. 어쨌든 붙어있으면 덕이 됩니다. 저만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구주라 그 말은 하나님만 나의 구주라는 뜻입니다. 외부의 환경 비바람 몰아칠지라도 풍파속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감당할 사람으로 만들어주실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대도 어느 날 할 것 없이 주로 좌파들, 기독교도 그런 사람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 게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겁니다. 영생의 구원을 하지 못하게 썩어질 두고 지날 세상 것을 하는 것이지요. 새끼 양이라 그랬습니다. 구원이란 환경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환경을 바꿔주는 걸 뭐라고 합니까. 표시판입니다. 그 사람이 바꾸어져야 진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을 알고나면 억만금을 물려줘도 바보가 되니까 그러니까 때리면 돈 나온다고 합니다. 아버지 돈 많고 그러니까 그런 팔푼이한테 억만금을 땡기면 날아갑니다. 세 살 아이한테 다이아몬드 반지끼면 큰일인겁니다. 과거에는 재산 물려주다가 다 되는 겁니다. 실력을 길러줍니다. 어쨌든 이겨야하고 하니까.
국제사회 돕는 것도 가르쳐줘야한다. 깊이 보면서 실상을 만들어 주는 것이지 나를 환란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을 주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변화되는 것도 변화시키는 것도 성령의 감화감동. 진리를 통한 성령의 역사라야 합니다. 나의 산성이시니. 반석이고 구원이고 산성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나의 반석으로 삼아서 그분만 믿고 바라보고 순종해나갈 때 그분이 나를 구원합니다. 내가 변화가 됩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산성이 됩니다. 피난처요 안식처라는 뜻입니다. 반석이 있을 때 구원이 되고 구원이 될 때 산성이 되는 겁니다.
3절은 원수를 말씀하십니다. 흔들린 울타리가 이리되면 안되는데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나라 잡종 개들은 약한 놈을 물어뜯는다고 합니다. 눈치 보고 있다가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런 게 있습니가. 그래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고 이런 게 있습니다. 설사 죄를 지었다고 할찌라도 일으켜주면 안됩니까. 운동선수면 떼같이 몰려들어 뜯지요. 못났고 비겁한 겁니다.
하나님을 반석으로 사는 우리가 되십시다. 그분은 믿을만합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얼마든지 건설해나갈 수 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찬송: 16장, 18장
본문: 시편 62편 1절
오류 발생 시 첨부파일 참조 바랍니다.
다윗의 시를 성경으로 기록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구원의 도리를 담아주셨습니다. 다윗의 시인데 성경이 되었습니다. 시라는 것은 시를 쓴 사람이 다윗이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고 나의 구원이시고 깨달은 걸 기록하신 겁니다. 자기가 그것에 대해서 보고 듣고 접촉을 하면서 깨달은 바 느낀 바 또는 경험한 바 자기대로 그렇게 간단하게 고백하는 그게 시입니다. 아무렇게나 쓰면 되는 것이 아니고 짧은 글 속에 나름대로 의미를 깊게 넓게 담아놓은 게 시기 때문에. 그림도 그렇습니다. 화가의 시인가 화가의 느낌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볼 때 아무것도 아니고 뭔지도 모르겠는데 시대에 따라 그림도 그런 방향이 이상하게 되는 거지요. 시대에 따라서 무슨 화 무슨 화 따라서 방향이 달라지고 흐름을 방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시대를 앞서간다 그래서 미리 생각하고 그린 것도 있어서 그 사람이 그린 그 그림을 그때는 몰랐는데 시대가 지나면 깨달아서 올라가는 경우도 있고. 그림 속에는 화가의 생각이 화가의 느낌이 사상이 들어가고 글을 쓴 사상 속에 가치관이 들어가고 시 속에는 그 속에 그 사람이 느낌 감정 사상이 들어있습니다. 다윗의 시는 사상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신앙사상이란 그 자세 다윗의 시 솔로몬의 시 그 속에는 사람들의 신앙 사상이 있어서 예사로 볼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기록해서 주신 겁니다.
속에 들어가보면 하나님이 이 시를 쓰신 것이라고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신앙 행적이 있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는가. 욥의 많은 그 속에 신앙이 들어있고 친구들의 말 속에도 그들의 신앙이 들어있습니다. 마지막께서 판정하실 때 읽어보시면 욥은 자기 자랑 자기 변론만 잔뜩했고 세 친구는 하나님 편만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친구 말을 두고 너희들의 말은 욥의 말보다 의롭지가 못다고 했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만 한 겁니다. 욥에 대해서는 하나만 딱 책망했습니다. 네가 의로운데 그게 내 잘못이냐. 세 친구는 다 말씀하지 않아도 욥의 말보다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겁니다. 다윗의 시 속에서는 뭐가 들었다고요. 신앙 사상, 신앙 행적이 들어있습니다. 설교자의 설교 속에 설교자의 신앙 사상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의 신앙 사상을 들어보고 성경적이다. 성경적으로 그랬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다윗고 사도 바울과 칼빈과 백 목사님과 이런 사상과 맞는 사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신앙 사상이 다르다. 이걸 파악을 하고 잡을 줄 알아야합니다. 이런 걸 놓치면 큰 줄기를 놓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목회하지는 않으셔도 귀는 가져야합니다. 듣는 귀가 없으면 목회자를 탈선시키는 무언의 동조가 됩니다. 참 중요한 겁니다.
찬송가도 그 가사 속에 들어있습니다. 새 찬송가 604곡 중에서 200여곡만 추렸습니다. 그 중에도 200곡 중에도 찬송을 새로 만든게 있는데 뒤로 뺀 곡이 있습니다. 우리와는 맞지 않다. 하지만 필요는 해서 뒤로 뺐습니다. 다윗의 시는 그런 면이 있다는 걸 기록해야하고 같이 보는 게 그런 겁니다. 말로 듣지 않으면 뭐가 담겼는지 말이란 말의 경우가 뭐라고 말의 높임말은 말씀이고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의사 뜻 생각 마음 사상 이게 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생각 뜻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가치관 사고방식 들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과 대화하고 참 중요합니다. 장사를 하든지 사업을 하던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접해야하는데 사람 심리를 알 수 있고 바로 상대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람을 인간관계를 바로 맺을 수 있고 쓸데없는 오해를 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해를 많이 사게 됩니다. 쓸데없는 분란이 일어나서 허비가 되게 되는 거지요. 다윗의 시, 여두둔의 법칙을 한 노래.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도리를 생각해봅니다. 다윗은 하나님만 나의 반석이다. 그분이 나의 구원이시다. 반석과 구원과 산성이란 그런 것인데 반석을 생각해보는 겁니다. 나의 영혼이 다윗이 자기 마음을 살피는 겁니다. 마음을 말합니다. 성경에 영혼은 많이 나오는데 영혼을 영으로 오해해서 삼분론 구원론 오해한 분이 많았습니다. 영혼은 영과 가까운 마음. 영혼은 마음의 깊은 면,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잠자가 잠수할 때 잠자입니다. 물 속에 고요한 겁니다. 그러면 잠잠하다 잠잠하다는 표현을 쓴 것이지요.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는데 코로나로 일상이 다 무너질 때는 일상생활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반대로 일상생활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겁니다. 잠잠하다 고요하다 평안하다. 이런 단어가 있으면 환란이 있는가보다. 이런 게 들어있습니다. 다윗이 내 영혼이 잠잠하다 이 말은 환란 중에 있다는 말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많은 혼란을 겪었는데 고요하게 평안하게 마음이 말하자면 바람이여. 마음이 편안한 겁니다. 먹은 음식이 소화가 안됐던지 속이 거룩하면 자유롭지 못합니다. 속이 편안하면 그리 되는거지요. 마음이 편한해야 그리 되는 겁니다. 환란이 편안하면 고요함을 흔들지 못하는 거지요. 외부의 환란 풍파에 마음이 잠잠하고 평안함에 정도가 외부에 흔드는 게 이겨내면 평안한 게 되는 것이고 흔들려버리면 혼란스러운 겁니다. 가난 때문에 흔들리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가난이 와도 마음이 잠잠합니다. 가난에서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질병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병이 왔는데 마음이 잠잠합니다. 질병에서 건질 분이 계셔서 사람사람 관계에서 별의 별 종류를 다 불문하고 그거 때문에 고난 환란 풍파를 겪게 되는데 거기서 건져주실 분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이 구원의 각도라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각도, 관점, 시각 같은 말입니다. 어디서 보느냐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 옆에서 보느냐 위에서 보느냐 입체적으로 봐도 되는지 모세를 물에서 건졌습니다. 그래서 모세입니다. 질병에서 건지려면 질병을 치료해야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병이 생겼는데 병 때문에 고난하는 데 그걸 치료하는 것이다. 누가 구주가 되는 겁니까. 병을 치료하는 게 구원이다 그러면 의사가 구주가 됩니다. 대학 병원 수술이 구주가 되는 것이고. 나는 돈 때문에 고통받는데 그렇다는 것은 재벌가가 구주가 되겠습니다.
이 구원이 뭐냐 이래서 잘못하면 합리화를 시키는 게 되고 귀에 걸면 귀거리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 되는 그런 게 되고 반론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합리화는 그게 전부가 다른 게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있는 겁니다. 같은 일을 두고 객관으로 인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내 주관이 변하는 것은 이 세상 사람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역사가 실제 있는 겁니다. 인간의 말로 할 수 있는 역사를 해주시고 변화를 시켜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이어져오고 살아있는겁니다. 그런 걸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구원으로 삼을 때 해결도 됩니다. 인간관계도 해결이 됩니다. 하나님을 나의 구원을 삼아서 나와 관련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묘하게 됩니다. 환경이 변하는 거 보셨습니까. 환경이 변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고 태도가 변합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논리로 되는 게 아닌 겁니다. 대표적으로 반사를 해보면 압니다. 학생들이 대하는 태도. 설교 때마다 느끼는 겁니다.
예배 시간에 교인들 자세가 다 다릅니다. 앉아있는 자세, 한 주간의 생활이 2~3주간이라도 괜찮으면 새벽기도부터 출석은 완전 다릅니다.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찬송가 16장에 오직 주예수로 바뀌었는데 한문글자로 말하면 유일입니다. 창조주 주권자 하나님만 없는 겁니다. 넓고 평평한 바위들 집회장소에 가면 반석들이 있습니다. 넓고 평평한 돌, 동래 금정산에 바위같은거, 그 위에 기초가 되는 거지요. 반석, 반석이라는 말은 기초를 말합니다. 터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근본이라는 뜻이 되고 뿌리라는 말입니다. 나무가 자라려면 뿌리를 제대로 박아야합니다. 하나님만 나의 반석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베드로에게 나는 베드로라 베드로의 뜻은 반석,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하나님의 기초고 터다. 이게 무슨 말일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는다.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을 반석으로 사는 것은 어떤게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는 겁니까. 그분만이 나의 반석입니다. 반석이라는 말이 터라는 뜻이고 그 위에 뿌리내린다는 뜻이고 이게 무슨 말일까. 쉽게 말하면 이분이 백이다. 말이죠. 믿고 의지하고 바라볼 배경, 터가 되는 것이다. 그 말이지요.
다시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셔서 터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나의 터로 반석으로 다윗은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반석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그 분은 계시는데 하나님은 어떤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자의 하나님이신가요. 반석은 하나님이 반석입니다. 그 반석이든 하나님을 내 반석으로 삼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았습니다. 어떻게 삼았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자의 하나님인가요. 믿는 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믿음이 각각 다 달라서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반석으로 삼으신 하나님,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은 정도는 각각 다 다르니 하나님께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습니까.
다윗은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고 자기가 깨닫고 고백을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안 계시면 집을 못 짓습니다. 그 위에 건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의 반석으로 삼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주관 역사입니까. 객관 역사입니까. 말이 어렵습니까. 저는 무식해서 어려운 말 잘 쓸 줄 모릅니다. 주관 객관을 모르면 문제가 많은 거지요. 주관이 나고 객관은 다른 사람인거지요. 믿음의 출발은 객관 역사이지요. 이건 은혜이기 때문에 무조건 받는 것이고 내 주관역사입니다. 주관 뿐이면 인간놀음에 다 빠집니다. 예배도 신앙도 모두 그렇습니다. 객관이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내 주관이 객관에게 붙들려서 객관된게 믿음입니다. 이게 믿음이라 그 말이죠.
그리 되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겁니다. 나와 하나님의 생각이 같아지는 겁니다. 내가 보는 것과 하나님 보는 게 같아지는 겁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이게 많아질수록 성화구원의 실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고 종들의 모습이 전부 이런 것이고 신인양성일위이기 때문에 내 말은 아버지 말씀이다. 우리는 내 주관이 객관이 되는 게 믿음이다. 반석이라는 것은 만세 반석 줄여서 그렇지 만세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천년 만년 억만년가도 흔들리는 게 없다는 소리지요. 정치판에서 많이 도는 거지요. 이 사람이 대통령 될 거 같아서 줄을 섰는데 엉뚱한 줄입니다. 그 사람의 돈을 믿었는데 사업이 망해버렸습니다. 그 사람의 실력을 믿었는데 실력이 어느날 그만 병이 걸려서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건강을 믿었는데 건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권력을 잡아보고 많은 것을 가져봤는데 솔로몬은 더 있는데도 아버지보다 못했죠. 하나님 외에는 반석이 없습니다.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런 사람은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없다는 걸 깨달은거지요. 내 반석으로 삼는 것은 내가 삼는 믿음입니다. 그분이 나를 반석으로 삼았으니까 순종하는거지요. 저는 나의 반석이시오 오직 또 하나님만 원하시는 그겁니다. 제 얘기는 뭡니까. 너는 나 외에는, 참 욕심쟁이지요. 하나님은 하나님 뿐이라는 말이 많습니다. 내가 전부다. 이 분이 하나님입니다. 인간으로 치면 참 나쁘고 못됐는데 하나님이시에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따져봐도 그런 겁니다. 보이는 정도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내면을 명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줄을 잡고 깊이 들어가는 걸 명상이라고 합니다. 과연 하나님 외에 믿을 이가 시간이 가도 환경이 변해도 그래서 목사 서약할 때 결혼 서약할 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모든 경우에서 사랑하기로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느뇨. 그래서 믿는 사람의 믿음이란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그런데 자기 스스로 도망치는 것은 방법이 없는 겁니다. 어쨌든 붙어있으면 덕이 됩니다. 저만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구주라 그 말은 하나님만 나의 구주라는 뜻입니다. 외부의 환경 비바람 몰아칠지라도 풍파속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감당할 사람으로 만들어주실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대도 어느 날 할 것 없이 주로 좌파들, 기독교도 그런 사람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 게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겁니다. 영생의 구원을 하지 못하게 썩어질 두고 지날 세상 것을 하는 것이지요. 새끼 양이라 그랬습니다. 구원이란 환경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환경을 바꿔주는 걸 뭐라고 합니까. 표시판입니다. 그 사람이 바꾸어져야 진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을 알고나면 억만금을 물려줘도 바보가 되니까 그러니까 때리면 돈 나온다고 합니다. 아버지 돈 많고 그러니까 그런 팔푼이한테 억만금을 땡기면 날아갑니다. 세 살 아이한테 다이아몬드 반지끼면 큰일인겁니다. 과거에는 재산 물려주다가 다 되는 겁니다. 실력을 길러줍니다. 어쨌든 이겨야하고 하니까.
국제사회 돕는 것도 가르쳐줘야한다. 깊이 보면서 실상을 만들어 주는 것이지 나를 환란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을 주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변화되는 것도 변화시키는 것도 성령의 감화감동. 진리를 통한 성령의 역사라야 합니다. 나의 산성이시니. 반석이고 구원이고 산성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나의 반석으로 삼아서 그분만 믿고 바라보고 순종해나갈 때 그분이 나를 구원합니다. 내가 변화가 됩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산성이 됩니다. 피난처요 안식처라는 뜻입니다. 반석이 있을 때 구원이 되고 구원이 될 때 산성이 되는 겁니다.
3절은 원수를 말씀하십니다. 흔들린 울타리가 이리되면 안되는데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나라 잡종 개들은 약한 놈을 물어뜯는다고 합니다. 눈치 보고 있다가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런 게 있습니가. 그래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고 이런 게 있습니다. 설사 죄를 지었다고 할찌라도 일으켜주면 안됩니까. 운동선수면 떼같이 몰려들어 뜯지요. 못났고 비겁한 겁니다.
하나님을 반석으로 사는 우리가 되십시다. 그분은 믿을만합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얼마든지 건설해나갈 수 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