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18-주전(말씀으로 나를 고쳐 오늘의 선지자로 바로 살자)
정초연2021-07-18조회 203추천 25
찬송가 117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121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61장 이세상 험하고
[마태복음7장15절 – 20절]
지난 주일에 7장 7절부터 12절 말씀을 생각해봤고 오일밤에 13절부터 14절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7절부터 12절까지는 기도에 대한 말씀인데 믿음 없이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말이 되지 않을 듯한 그런 말씀이기 때문에 주의할 말씀이고 말씀은 보편성을 가졌다는 것을 생각해봤습니다. 이런 것은 평생을 통하여 신앙생활, 일반 가정생활, 직장생활 경제생활,인간관계에서도 기억해야할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을 많이 삽니다. 복권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인데 정상적인 경제생활은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은 열심히 노력해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고.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그 죄를 면하는 방법은, 죄값은 형벌을 받는 겁니다 형벌받지 아니하고 죄를 면한다는 것은 없는 겁니다. 범죄한 인간이 육체노동을 하든지 머리를 쓰든지 열심히 일을 해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좋은 건데 땀흘리지 않고 수고하지 아니하고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모든 사람의 신앙생활은 보편성이다 특별한 것이 없다, 상식입니다.
영어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영어에는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지름길을 그 지름길을 찾는 시간에 차라리 공부하는 나을 텐데. 일을 하는데 가장 빠른 방법은 “원칙대로” 하는 겁니다. 원칙대로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바르고 빠른 것입니다.
성경은 보편성.상식입니다. 7절부터 12절가지 말씀도 상식입니다. 별스러운 것이 아니고 허영과 허욕을 충족시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세상 자체를 지으신 분, 세상 속에 있는 뭐든 크고 작은, 넓고 좁은, 복잡하고 단순한 수많은 것들을 지으신 분이 하늘의 하나님이고 그분은 주인입니다. 그분이 지으신 것을 가지고 직접 그분이 주관을 하십니다. 이를 주권이라 그리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 나와 관련된 직접이든 간접이든 영육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주권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모든 것의 주권은 하나님 한분에게 있습니다.
본문에서 7절~12절, 첫째는 구하는 사람이 되라. 구한다는 말은 뭐든지 한다는 것입니다. 하려고 하니 필연적으로 구할 것이 생기는 것이고 구원을 위해서 뭐든지 구하는 사람이 되라 그것이 첫번째이고 두 번째는 구하되 자기사욕을 위해서, 썩어질 세상을 위해서 구하지 말고 하나님 뜻에 맞는 구원에 필요한 것을 구하라. 주인의 뜻에 맞는 것을 구하면서 세번째는 최선을 다하면서 구하라. 자기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구하고 네 번째는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섯 번째는 기도하면 구하면 구한만큼의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13절 14절에서 좁은 문, 좁은길, 넓은 문 넓은 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독교는 고행주의가 아닙니다. 고행주의라는 말은 고생을 많이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여 일부러 고생길을 찾아서 다닙니다. 음식도 아주 박한 걸 먹고 옷도 다 떨어진 옷을 입고 환경도 험하게 만들어서 굴속에 살고 나무 위에 살고 바위에 살고 자기 몸을 쳐서 아주 학대를 시킵니다. 고생만 하면 구원이 된다. 불교의 금욕주의 같은 것입니다.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 이고 십자가는 고생입니다. 십자가는 고생이니까 고생만 많이 하면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길인데 길이 좁고 길이 험하니까 찾는 사람도 거기 가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너희들은 생멸길 좁은 길을 가라. 넓은 문은 잘 보이고 찾기 쉽고 알기 쉽고 어렵지 않고 가기도 편하고 넓은 길은 편하고 안전합니다. 수월하고 좋은 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넓은 문으로 가는 겁니다. 고속도로는 넓은 길이 좋습니다.
인생길은 꽃길은 없는 겁니다. 인생 자체가 고해(고난의 바다)라고 그럽니다. 인생길은 굳이 고생스런 길을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몽주를 때려잡은 이방원이라는 인물은 세상적으로 보면 그 사람이 인물입니다. 정몽주는 꽉 막힌 사람입니다. 그러나 멀리 보고 길게 보고 신앙적으로 보면 정몽주 같은 사람은 충신입니다. 그리고 이방원 같은 사람도 알고 보면 또 보면 충신을 좋아합니다.
세상은 넓은 겁니다. 신앙의 길은 그럴 수 없는 겁니다. 좁은 길은 고생스러운 길이 아닙니다. 고난의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이라는 말은 좁아서 알기가 어렵다라는 말입니다. 찾아도 찾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알아도 걸어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좁은문, 좁은 길은 첫째, 찾기 어렵고 가기 어려운 것. 둘째는 그 때, 그 시간의 거기에, 그 사건에, 그 시간에 해당되는 하나밖에 없는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좁은 문입니다. 그리고 그 찾은 것을 어떤 경우에도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아니하고 빼앗기지 아니하고 기어코 고집스럽게 소처럼 그 길을 가는 것이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양보할 때도 있는 것이고 타협도 하는 것이고 또 돌아도 가는 것인데, 다니엘의 경우를 보면 다니엘은 자기를 위하는 왕이 기도하는 건 좋은데 모르게 하면 되지 않냐,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나의 생명을 구하라고 사정할 때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거 아닌가? 사실 이것은 죽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인데. 사자 굴에 들어간 것보다 더 어려운 겁니다. 좁은 길을 가다 보면은 고집스럽게,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면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데는 안 그런데, 이해심이 있고 배려심이 있고 하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그 말씀에 대해서는 도무지 양보와 타협이 없습니다. 이것이 빛이고 착한행실입니다.
넓은 문, 넓은 길은 참 좋습니다. 성경에서 에서 같은, 롯 같은, 가인 같은 사람. 보통 넓은 길을 가면 많은 사람들이 따라오고 인정해주고 대우해 줍니다. 딱 한 분 하나님 만 싫어하십니다. 이 세상의 가장 좋아하는, 추구하는 사상은 인본주의입니다. 사람이 먼저다. 인본주의는 기독교의 가장 큰 일대의 적입니다. 공산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도 인본주의입니다. (독재주의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의 모든 처신, 인간관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15절. 거짓선지자를 삼가라. 선지자란(먼저선, 알지) 먼저 아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깨달은 사람,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속에 담아두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대한, 이 세상을 운영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운영하신다는 말은 사람을 운영하신다는 말. 사람과 관련된, 사람이 살아갈 자연환경, 마음, 지능, 상호작용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니까. 전부 다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겁니다. 그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시니까. 천지를 창조하시고 육천년 세월 속에 수 많은 나라의 건설, 흥망성쇠. 어떤 과정을 거칠까 믿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천국을 건설하고 자기성화 자기구원 이루어가는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느 장소에서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이런 과정을 거쳐가지고 그런 모든 것들을 개인 개인과 가정 가정과 나라 전부 다가 연결되어 하나님의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겁니다.
나라의 정권을 잡으면 나라의 정권자가 이런 것 들을 어느 장관에게 어느걸 맡기고, 구멍가게 운영에도 그런 것들을 다 머리 속에 담아놓고 하지 않습니까? 내일 공사가 되는데 이런 이런 일을 해야 하고 전기, 배관, 도배 등등 어느 기술자에게 이걸 맡기고 등등을 미리 예정하고 계획하지요.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머리에 담아두셨는데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세상 원형의 비밀을 뜻을 미리 알려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선지자”라고 그럽니다. 하나님의 이 세상의 운영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주는 역할. 각 사람에게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시대, 민족, 가정, 개인을 향해 하나님의 뜻 비밀을 말씀이라는 그릇에 담아가지고 시대를 향하여 사회를 향하여 때론 민족을 향하여 때론 가정을 향하여 때론 개인을 향하여 때로는 예배시간에.. 이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선지자라 그럽니다. 이 선지자는 나타나지 않은 하나님의 비밀을 가르쳐 주는 역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 그 일하는 사람을 선지자라 그리 말합니다.
구약시대는 따로 선지자와 왕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레위 족속만. 기름부음 받은 자만.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다 선지자입니다.(만인제사장설) 모두가 다 제사장이고 모두가 다 선지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고 그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작은 그리스도, 새끼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 전부다가 선지자입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다. 신약 시대에는 개인마다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는 영이 있고 그 영을 통해, 마음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거짓선지자를 삼가라. 선지자는 선지자인데 거짓 선지자. 거짓은 아닌 것을 그렇다고 속이는 것이고 성경의 거짓말은 구원의 해가 되는말. 거짓 선지자는 선지자는 선지자인데 구원의 유익이 되지 않고 구원의 해를 끼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진 선지자가 그 말씀가지고 그 역할 가지고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뜻을 알리는 그 일을 하지 않고 그 선지자라는 직책가지고 그에게 주시는 말씀의 깨달음을 가지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 교권, 또는 자기 명예, 세상 무언가를 또는 자기 가족을 자기 가정을, 자기를 위해서 선지자라는 직책과 말씀을 악용해 먹는자.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거짓 선지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거짓 선지자는 발람입니다. 뇌물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 복받은 백성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알면서도 저주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여호수아의 손에 죽는데 그 발람을 이름 붙이기를 술사라고 했습니다. 술사 발람. 거짓선지자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검이라고 그럽니다. 칼입니다. 말씀은 검이고 검이란 것은 지르고 쪼개고 잘라내는겁니다. 수술용 칼이라 그런 겁니다. 나를 찌르고 내 속에 옛사람을 죽이는 것. 자기를 고치고 만드는 것입니다. 그 말씀 가지고 자기를 먼저 만드는 겁니다. 그게 선지잡니다. 오늘날 신약시대 우리 전부다가 선지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구원의 대한 책임은 자기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에게 물을 책임은 따로 물으십니다. 그러나 자기 구원에 대한 책임은 자기가 져야 하는 것이지 내가 목자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탓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있고 세월이 지나면 보면 다 아는데. 내가 잘못 배운 것이든, 잘 배우고 실행을 하지 못한 것이든 다 내 책임. 자기 책임입니다. 목사 핑계 못댑니다. 우리 공회 특징이 그렇습니다.
목사, 선생, 선배, 집사, 구역장 믿지 마라. 자기 구원은 자기가 책임지고 하나님과 개인이 연결 되는 것이고 공회는 개교회 주의입니다. 그러나 개교회라고 다른 사람, 공회 간섭을 안받겠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도신경에 보면 “거룩한 공회와 죄를 사해주시는 것과 ...” 거룩한 공회가 먼저 나옵니다. 개교회이기 때문에 공회간섭하지 마라? 무식한 소리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고치지 않고 자기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 하는 것이 거짓선지잡니다. 거짓목사도 있고 거짓장로도 있고 거짓집사도 있고 거짓 반사도 있고 거직 교인도 거짓선지자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삼가라는 말은 “조심하라”. 선지자라고 무조건 믿지 말라. 무조건 따라 가지 말고 구별해라. 따져봐라. 듣고 틀린 것은 지적하고, 말해서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백목사님 생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백목사도 믿지마라.
거짓선지자의 정체는 양의 옷을 입고 오는 것입니다. 양은 믿는 사람입니다. 구속받은 성도 믿는 우리들이 양입니다. 양은 순진하고 순수합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는 그래서 교인은 순진합니다 순수합니다. 진실한 목사가 되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교인입니다. 교인 중에서도 목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믿는 아내를 둔 믿지 않는 남편이 가장 두렵고 그럽니다. 그 아내는 자기 남편 전도하려고 불철주야 조심하고 기도하고 그러는데 목사가 혹 말 한번 잘못해서 아내가 그렇게 수고하는데 구원에 손해 끼칠까 싶어서.
여기보니까 거짓선지자가 오는데 양한테 오는데 교인한테 오는데 양의 옷을 입고 온다. 양의 옷이라 기록되어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양의 탈이죠. 순수한척, 순진한척, 착한 척, 자기도 양인척 오는 것입니다. 사기꾼이 사기 칠 때는 사기꾼처럼 오지 않고 정말 정직한 사람처럼 믿을 수 있는 사람처럼, 신용이 철저한 것처럼 오는것이 사기꾼이지요. 그래서 말을 지나치게 잘하는 사람은 조심을 하라고 합니다.
처녀가 남자를 만날 때 보통 여자들을 많이 상대해보고 많이 겪어보고 꼬셔본 남자는 말을 청산유수처럼 잘하고 평생 여자를 만나보지 못한 순수하고 깨긋한 남자들은 여자 만나면 주눅이 들어서 말도 못합니다. 그런데 대개 99% 여자들은 제비족같은 남자들을 좋아합니다. 그냥 쑥맥같은 그런 남자는 99명 다 싫어합니다. 겪어보면 아는데, 안 겪어보면 모르고. 백목사님 설교하실 때 하도 말씀이 안 들어가니까 답답하니까 혼잣말로 탄식하는 것이 “죽어보면 알겠지!” 죽어봐야 아는 게 신앙생활인데 성경은 죽어보기 전에 미리 알라고 기록하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양에게 가까이 친근히 온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와가지고 양을 먹으려고.
양과 이리는 천적입니다. 양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이리이고 이리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가 양입니다. 이리는 양의 옷을 입고 탈을 쓰고 오지만 속에 실제,정체는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떼를 지어 다니며 물건을 뺏는 것이 노략질입니다. 떼를 지어다닙니다.
거짓선지자를 아는 방법은 그들의 열매로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것은 어릴 때는 모릅니다. 특히 뱃속에서는 더 모르고 잘 모릅니다. 세월 속에 사람은 말, 행동 환경에 따라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태어나면 아이가 다윗이 될지 사울이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전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아브라함처럼 이삭,야곱,요셉,모세처럼 되기 원하고 소망합니다. 여자는 전부 다 사라같은 또는 한나같은 이런 사람되기 원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 그 세월속에 사람이 만들어 집니다.
소는 음메하고 웁니다. 그리고 미련하게 일을 하고 고양이는 야옹하고 웁니다. 꾀 많고 약삭빠르게 움직입니다. 간악합니다. 돼지는 꿀꿀하고 웁니다. 아무거나 구별없이 먹고. 별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 사람이면 그리 말하는 것이고. 행동도 판단도 그리 하는 것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따겠느냐, 그 인간에게 옳은 판단이 나오겠느냐... 그래서 사람을 볼줄 모르면 당하는 것입니다.
거짓선지자, 목사라는 이름 거기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우리 전부다가 선지자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이 말씀 속에 자기 인생 길과 뜻이 담겨 있습니다. 목사로부터, 예배 시간에 이 말씀을 배우기도 하지만 자기가 현실에 적용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나를 고치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나를 고친 것처럼 만들면 참 선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선지자의 상이 제일 큽니다. 그리 될 수도 있고 거짓 선지자 되어서 심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어떠한가 자기를 돌아보십시다.
121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61장 이세상 험하고
[마태복음7장15절 – 20절]
지난 주일에 7장 7절부터 12절 말씀을 생각해봤고 오일밤에 13절부터 14절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7절부터 12절까지는 기도에 대한 말씀인데 믿음 없이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말이 되지 않을 듯한 그런 말씀이기 때문에 주의할 말씀이고 말씀은 보편성을 가졌다는 것을 생각해봤습니다. 이런 것은 평생을 통하여 신앙생활, 일반 가정생활, 직장생활 경제생활,인간관계에서도 기억해야할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을 많이 삽니다. 복권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인데 정상적인 경제생활은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은 열심히 노력해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고.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그 죄를 면하는 방법은, 죄값은 형벌을 받는 겁니다 형벌받지 아니하고 죄를 면한다는 것은 없는 겁니다. 범죄한 인간이 육체노동을 하든지 머리를 쓰든지 열심히 일을 해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좋은 건데 땀흘리지 않고 수고하지 아니하고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모든 사람의 신앙생활은 보편성이다 특별한 것이 없다, 상식입니다.
영어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영어에는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지름길을 그 지름길을 찾는 시간에 차라리 공부하는 나을 텐데. 일을 하는데 가장 빠른 방법은 “원칙대로” 하는 겁니다. 원칙대로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바르고 빠른 것입니다.
성경은 보편성.상식입니다. 7절부터 12절가지 말씀도 상식입니다. 별스러운 것이 아니고 허영과 허욕을 충족시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세상 자체를 지으신 분, 세상 속에 있는 뭐든 크고 작은, 넓고 좁은, 복잡하고 단순한 수많은 것들을 지으신 분이 하늘의 하나님이고 그분은 주인입니다. 그분이 지으신 것을 가지고 직접 그분이 주관을 하십니다. 이를 주권이라 그리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 나와 관련된 직접이든 간접이든 영육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주권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모든 것의 주권은 하나님 한분에게 있습니다.
본문에서 7절~12절, 첫째는 구하는 사람이 되라. 구한다는 말은 뭐든지 한다는 것입니다. 하려고 하니 필연적으로 구할 것이 생기는 것이고 구원을 위해서 뭐든지 구하는 사람이 되라 그것이 첫번째이고 두 번째는 구하되 자기사욕을 위해서, 썩어질 세상을 위해서 구하지 말고 하나님 뜻에 맞는 구원에 필요한 것을 구하라. 주인의 뜻에 맞는 것을 구하면서 세번째는 최선을 다하면서 구하라. 자기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구하고 네 번째는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섯 번째는 기도하면 구하면 구한만큼의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13절 14절에서 좁은 문, 좁은길, 넓은 문 넓은 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독교는 고행주의가 아닙니다. 고행주의라는 말은 고생을 많이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여 일부러 고생길을 찾아서 다닙니다. 음식도 아주 박한 걸 먹고 옷도 다 떨어진 옷을 입고 환경도 험하게 만들어서 굴속에 살고 나무 위에 살고 바위에 살고 자기 몸을 쳐서 아주 학대를 시킵니다. 고생만 하면 구원이 된다. 불교의 금욕주의 같은 것입니다.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 이고 십자가는 고생입니다. 십자가는 고생이니까 고생만 많이 하면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길인데 길이 좁고 길이 험하니까 찾는 사람도 거기 가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너희들은 생멸길 좁은 길을 가라. 넓은 문은 잘 보이고 찾기 쉽고 알기 쉽고 어렵지 않고 가기도 편하고 넓은 길은 편하고 안전합니다. 수월하고 좋은 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넓은 문으로 가는 겁니다. 고속도로는 넓은 길이 좋습니다.
인생길은 꽃길은 없는 겁니다. 인생 자체가 고해(고난의 바다)라고 그럽니다. 인생길은 굳이 고생스런 길을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몽주를 때려잡은 이방원이라는 인물은 세상적으로 보면 그 사람이 인물입니다. 정몽주는 꽉 막힌 사람입니다. 그러나 멀리 보고 길게 보고 신앙적으로 보면 정몽주 같은 사람은 충신입니다. 그리고 이방원 같은 사람도 알고 보면 또 보면 충신을 좋아합니다.
세상은 넓은 겁니다. 신앙의 길은 그럴 수 없는 겁니다. 좁은 길은 고생스러운 길이 아닙니다. 고난의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이라는 말은 좁아서 알기가 어렵다라는 말입니다. 찾아도 찾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알아도 걸어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좁은문, 좁은 길은 첫째, 찾기 어렵고 가기 어려운 것. 둘째는 그 때, 그 시간의 거기에, 그 사건에, 그 시간에 해당되는 하나밖에 없는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좁은 문입니다. 그리고 그 찾은 것을 어떤 경우에도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아니하고 빼앗기지 아니하고 기어코 고집스럽게 소처럼 그 길을 가는 것이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양보할 때도 있는 것이고 타협도 하는 것이고 또 돌아도 가는 것인데, 다니엘의 경우를 보면 다니엘은 자기를 위하는 왕이 기도하는 건 좋은데 모르게 하면 되지 않냐,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나의 생명을 구하라고 사정할 때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거 아닌가? 사실 이것은 죽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인데. 사자 굴에 들어간 것보다 더 어려운 겁니다. 좁은 길을 가다 보면은 고집스럽게,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면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데는 안 그런데, 이해심이 있고 배려심이 있고 하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그 말씀에 대해서는 도무지 양보와 타협이 없습니다. 이것이 빛이고 착한행실입니다.
넓은 문, 넓은 길은 참 좋습니다. 성경에서 에서 같은, 롯 같은, 가인 같은 사람. 보통 넓은 길을 가면 많은 사람들이 따라오고 인정해주고 대우해 줍니다. 딱 한 분 하나님 만 싫어하십니다. 이 세상의 가장 좋아하는, 추구하는 사상은 인본주의입니다. 사람이 먼저다. 인본주의는 기독교의 가장 큰 일대의 적입니다. 공산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도 인본주의입니다. (독재주의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의 모든 처신, 인간관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15절. 거짓선지자를 삼가라. 선지자란(먼저선, 알지) 먼저 아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깨달은 사람,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속에 담아두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대한, 이 세상을 운영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운영하신다는 말은 사람을 운영하신다는 말. 사람과 관련된, 사람이 살아갈 자연환경, 마음, 지능, 상호작용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니까. 전부 다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겁니다. 그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시니까. 천지를 창조하시고 육천년 세월 속에 수 많은 나라의 건설, 흥망성쇠. 어떤 과정을 거칠까 믿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천국을 건설하고 자기성화 자기구원 이루어가는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느 장소에서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이런 과정을 거쳐가지고 그런 모든 것들을 개인 개인과 가정 가정과 나라 전부 다가 연결되어 하나님의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겁니다.
나라의 정권을 잡으면 나라의 정권자가 이런 것 들을 어느 장관에게 어느걸 맡기고, 구멍가게 운영에도 그런 것들을 다 머리 속에 담아놓고 하지 않습니까? 내일 공사가 되는데 이런 이런 일을 해야 하고 전기, 배관, 도배 등등 어느 기술자에게 이걸 맡기고 등등을 미리 예정하고 계획하지요.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머리에 담아두셨는데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세상 원형의 비밀을 뜻을 미리 알려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선지자”라고 그럽니다. 하나님의 이 세상의 운영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주는 역할. 각 사람에게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시대, 민족, 가정, 개인을 향해 하나님의 뜻 비밀을 말씀이라는 그릇에 담아가지고 시대를 향하여 사회를 향하여 때론 민족을 향하여 때론 가정을 향하여 때론 개인을 향하여 때로는 예배시간에.. 이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선지자라 그럽니다. 이 선지자는 나타나지 않은 하나님의 비밀을 가르쳐 주는 역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 그 일하는 사람을 선지자라 그리 말합니다.
구약시대는 따로 선지자와 왕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레위 족속만. 기름부음 받은 자만.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다 선지자입니다.(만인제사장설) 모두가 다 제사장이고 모두가 다 선지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고 그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작은 그리스도, 새끼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 전부다가 선지자입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았다. 신약 시대에는 개인마다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는 영이 있고 그 영을 통해, 마음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거짓선지자를 삼가라. 선지자는 선지자인데 거짓 선지자. 거짓은 아닌 것을 그렇다고 속이는 것이고 성경의 거짓말은 구원의 해가 되는말. 거짓 선지자는 선지자는 선지자인데 구원의 유익이 되지 않고 구원의 해를 끼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진 선지자가 그 말씀가지고 그 역할 가지고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뜻을 알리는 그 일을 하지 않고 그 선지자라는 직책가지고 그에게 주시는 말씀의 깨달음을 가지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 교권, 또는 자기 명예, 세상 무언가를 또는 자기 가족을 자기 가정을, 자기를 위해서 선지자라는 직책과 말씀을 악용해 먹는자.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거짓 선지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거짓 선지자는 발람입니다. 뇌물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 복받은 백성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알면서도 저주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여호수아의 손에 죽는데 그 발람을 이름 붙이기를 술사라고 했습니다. 술사 발람. 거짓선지자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검이라고 그럽니다. 칼입니다. 말씀은 검이고 검이란 것은 지르고 쪼개고 잘라내는겁니다. 수술용 칼이라 그런 겁니다. 나를 찌르고 내 속에 옛사람을 죽이는 것. 자기를 고치고 만드는 것입니다. 그 말씀 가지고 자기를 먼저 만드는 겁니다. 그게 선지잡니다. 오늘날 신약시대 우리 전부다가 선지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구원의 대한 책임은 자기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에게 물을 책임은 따로 물으십니다. 그러나 자기 구원에 대한 책임은 자기가 져야 하는 것이지 내가 목자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탓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있고 세월이 지나면 보면 다 아는데. 내가 잘못 배운 것이든, 잘 배우고 실행을 하지 못한 것이든 다 내 책임. 자기 책임입니다. 목사 핑계 못댑니다. 우리 공회 특징이 그렇습니다.
목사, 선생, 선배, 집사, 구역장 믿지 마라. 자기 구원은 자기가 책임지고 하나님과 개인이 연결 되는 것이고 공회는 개교회 주의입니다. 그러나 개교회라고 다른 사람, 공회 간섭을 안받겠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도신경에 보면 “거룩한 공회와 죄를 사해주시는 것과 ...” 거룩한 공회가 먼저 나옵니다. 개교회이기 때문에 공회간섭하지 마라? 무식한 소리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고치지 않고 자기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 하는 것이 거짓선지잡니다. 거짓목사도 있고 거짓장로도 있고 거짓집사도 있고 거짓 반사도 있고 거직 교인도 거짓선지자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삼가라는 말은 “조심하라”. 선지자라고 무조건 믿지 말라. 무조건 따라 가지 말고 구별해라. 따져봐라. 듣고 틀린 것은 지적하고, 말해서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백목사님 생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백목사도 믿지마라.
거짓선지자의 정체는 양의 옷을 입고 오는 것입니다. 양은 믿는 사람입니다. 구속받은 성도 믿는 우리들이 양입니다. 양은 순진하고 순수합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는 그래서 교인은 순진합니다 순수합니다. 진실한 목사가 되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교인입니다. 교인 중에서도 목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믿는 아내를 둔 믿지 않는 남편이 가장 두렵고 그럽니다. 그 아내는 자기 남편 전도하려고 불철주야 조심하고 기도하고 그러는데 목사가 혹 말 한번 잘못해서 아내가 그렇게 수고하는데 구원에 손해 끼칠까 싶어서.
여기보니까 거짓선지자가 오는데 양한테 오는데 교인한테 오는데 양의 옷을 입고 온다. 양의 옷이라 기록되어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양의 탈이죠. 순수한척, 순진한척, 착한 척, 자기도 양인척 오는 것입니다. 사기꾼이 사기 칠 때는 사기꾼처럼 오지 않고 정말 정직한 사람처럼 믿을 수 있는 사람처럼, 신용이 철저한 것처럼 오는것이 사기꾼이지요. 그래서 말을 지나치게 잘하는 사람은 조심을 하라고 합니다.
처녀가 남자를 만날 때 보통 여자들을 많이 상대해보고 많이 겪어보고 꼬셔본 남자는 말을 청산유수처럼 잘하고 평생 여자를 만나보지 못한 순수하고 깨긋한 남자들은 여자 만나면 주눅이 들어서 말도 못합니다. 그런데 대개 99% 여자들은 제비족같은 남자들을 좋아합니다. 그냥 쑥맥같은 그런 남자는 99명 다 싫어합니다. 겪어보면 아는데, 안 겪어보면 모르고. 백목사님 설교하실 때 하도 말씀이 안 들어가니까 답답하니까 혼잣말로 탄식하는 것이 “죽어보면 알겠지!” 죽어봐야 아는 게 신앙생활인데 성경은 죽어보기 전에 미리 알라고 기록하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양에게 가까이 친근히 온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와가지고 양을 먹으려고.
양과 이리는 천적입니다. 양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이리이고 이리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가 양입니다. 이리는 양의 옷을 입고 탈을 쓰고 오지만 속에 실제,정체는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떼를 지어 다니며 물건을 뺏는 것이 노략질입니다. 떼를 지어다닙니다.
거짓선지자를 아는 방법은 그들의 열매로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것은 어릴 때는 모릅니다. 특히 뱃속에서는 더 모르고 잘 모릅니다. 세월 속에 사람은 말, 행동 환경에 따라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태어나면 아이가 다윗이 될지 사울이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전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아브라함처럼 이삭,야곱,요셉,모세처럼 되기 원하고 소망합니다. 여자는 전부 다 사라같은 또는 한나같은 이런 사람되기 원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 그 세월속에 사람이 만들어 집니다.
소는 음메하고 웁니다. 그리고 미련하게 일을 하고 고양이는 야옹하고 웁니다. 꾀 많고 약삭빠르게 움직입니다. 간악합니다. 돼지는 꿀꿀하고 웁니다. 아무거나 구별없이 먹고. 별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 사람이면 그리 말하는 것이고. 행동도 판단도 그리 하는 것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따겠느냐, 그 인간에게 옳은 판단이 나오겠느냐... 그래서 사람을 볼줄 모르면 당하는 것입니다.
거짓선지자, 목사라는 이름 거기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우리 전부다가 선지자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이 말씀 속에 자기 인생 길과 뜻이 담겨 있습니다. 목사로부터, 예배 시간에 이 말씀을 배우기도 하지만 자기가 현실에 적용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나를 고치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나를 고친 것처럼 만들면 참 선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선지자의 상이 제일 큽니다. 그리 될 수도 있고 거짓 선지자 되어서 심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어떠한가 자기를 돌아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