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양성일위와 삼위일체에 대한 고찰
정동진2021-12-25조회 240추천 39
최근 목사님께서 신인양성일위와 삼위일체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하셔서 글을 적어 봅니다.
1. 신인양성일위에 대한 일반신학적 표현
일반신학에서는 "신인양성일위"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습니다. 대신 "성육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육신"이라는 표현은 사실 "도성인신"에 더 가까운 의미인데, 일반신학에서는 "신인양성일위"와 "도성인신"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성육신"이라는 단어로 일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백목사님의 깨달음이 더 깊고, 구체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인양성일위"는 내면적 "인성"에 초점을 둔 부분입니다. "성육신"은 외향적 육체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둘은 다른 의미는 아니고 같은 뜻으로 쓰이며, "신인양성일위"와 "도성인신"이 더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표현이고, "성육신"은 그보다는 개괄적인 의미라고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성령도 신인양성일위이신가"라는 생각을 일반신학적 용어로 고쳐본다면, "성령도 성육신하셨는가"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영이시므로 "육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신학적 관점에서는 이런식의 사고방식이나 논쟁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실 오늘날까지 발견된 신학의 보편적인 견해에서는 성령론에 대하여 매우 취약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성령에 대한 건설적인 논쟁은 별로 없고, 많은 오해와 이단들이 만연할 뿐입니다.
2. 신성과 인성에 대하여
앞서 말씀드렸듯이 "신인양성일위"의 강조점은 "인성"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에 비에 "도성인신"은 "육체"에 강조점이 있고, 일반 신학에서 말하는 "성육신"도 "육체"와 "인성"을 다 포함하지만, 주된 강조점은 "육체"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도성인신" 혹은 "성육신"하셨다고 볼 수는 없으나, "신인양성일위"라고 보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인성"에 대해서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합니다.
보편적으로 "신성"을 설명하라고 하면,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런데 그 속성들 중에 인간에게 적용되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 면을 "인성"적 요소라고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요소가 "신성"에 속 할 때는 완전한 것이지만, "인성"에 속 할 때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살펴보자면, "사랑"이라는 속성은 "신성"에 속 할 때는 완전한 것이지만, "인성"에 속 할 때는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십니다. 인간에게도 사랑이 있습니다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신성=완전,온전 / 인성=불완전,부족함"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3. 성자께서 인성을 입으셨다는 것에 대하여
앞에서 살펴본 논거를 바탕으로 "성자께서 인성을 입으셨다."="성자께서 불완전을 입으셨다."라고 이해될 수 있는가. 그러나 성자께서는 완전하신 하나님시며 완전하신 인간이시므로 "불완전"이라는 단어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일반신학에서는 "불완전"이라는 표현을 쓰지않고 "연약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경에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므로"라는 표현이 있으므로 이것이 훨씬 나아보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성자께서 인성을 입으셨다."="성자께서 연약함을 입으셨다."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연약함에 대하여 신학적 관점으로 잠시 살펴보자면, 그것은 "불완전의 가능성"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고 지존하시며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연약함과 불완전이 없을 뿐 아니라 불완전할 가능성 조차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완전한 첫 사람 아담은 "불완전할 가능성"이 있었고, 결국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살펴볼 때, 성자께서 입으신 "인성"은 "불완전"이라기보다는 "불완전할 가능성" 곧 "연약함"으로 보는 것이 맞겠고, 주님께서는 연약함을 입으셨지만, 완전하신 둘째 아담이 되셨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4. 성자께서는 왜 신인양성일위가 되셨는가
삼위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성부께서는 예택(예정하시고 택하심)하시고, 성자께서는 성취(사활의 대속을 이루심), 성령께서는 적용(성도를 견인하심)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성자의 역할에는 반드시 신인양성일위가 필요합니다.
대속은 반드시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대신하려면 그것과 같은 것이 대신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대신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자께서는 인간이 되셨어야 했습니다.
또한 대속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흠이 있는 것은 자신의 흠으로 징계받아야하지, 다른 사람의 흠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자께서는 흠 없는 어린 양으로 오셔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흠 있는 모든 인간을 대신하셨습니다.
대속의 역사를 위하여 성자께서는 "인성이라는 연약함"을 입으셨습니다. 주님의 몸은 추위와 더위를 느낄 수 있고, 배고픔과 피곤함을 느낄 수 있는 우리와 똑같은 몸이셨습니다. 주님의 인성은 고민과 번민이 있고, 슬픔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우리와 똑같은 성품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완전하시고 흠없는 참 사람이셨습니다. 그래서 흠 있는 우리를 대신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삼위일체와 신인양성일위
성자의 신인양성일위는 대속역사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령은 어떤가? 대속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성부의 예택과 성령의 적용에는 신인양성일위가 있어서는 안될 것으로 보입니다. "인성=연약함"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성부의 예택에는 "연약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의 예택은 완전한 것이어야 하고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부께서는 인성을 취하실 필요도 없으시고 그 사역에는 인성적 연약함 곧, 불완전할 가능성은 배제되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사역도 같이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구원역사를 적용하실 때에 그 일에는 연약함이 없어야합니다. 또한 그 역사는 시공을 초월하시는 것이며 각 사람의 내면 속에 각사람에게 맞는 "자기진리"로 이루어집니다. 이 사역에는 인성적 요소가 필요치 않으며, 있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치 않은 일을 굳이 하시는 분이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계획과 뜻을 따라 행하시며 그분의 모든 역사하심에는 허투가 없으십니다. 인성을 취하시는 것은 구원역사에서 오직 성자에게만 필요한 일이였으므로 오직 성자께서만 신인양성일위가 되셨다라고 보는 것이 더 나아 보입니다.
6.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사역
삼위이시므로 한 위격이 신인양성일위가 되시면 다른 위격들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보편적이고 논리적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삼위"적 요소와 "일체"적 요소를 구분하여 생각할 필요는 있어보입니다. 창조의 사역은 보편적으로 성부의 사역으로 이야기됩니다. 그러나 창조시에 성자께서도 함께하셨고, 성령께서도 역사하셨습니다. 주로 드러나는 혹은 주격이되시는 위격이 성부이실 뿐입니다. 구원 사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는 "일체"적 요소를 생각할 때 적용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삼위"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일반신학에서는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고, 성령은 성부도 성자도 아니다."라고 명시합니다. 삼위는 분명히 다릅니다. 또 일반신학에서는 "성부는 나시지도 나오시지도 아니하시고, 성자께서는 성부로 부터 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셨다."라는 표현으로 삼위의 특성을 구분합니다. "일체"에 있어서는 "본체는 하나이시요, 신성과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동일하시다."고 표현합니다. 말장난 같은 일반신학의 복잡한 표현을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삼위는 세 분이신데, 일체로 한 분이시다."정도로 되겠습니다.
"삼위"를 구분하지 않는 것은 일신론, 양태론적 이단입니다. "일체"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삼신론, 다신론적 이단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단일신론이 아니라 유일신론이다."라고도 표현합니다.(삼위일체는 인간의 지성으로 다 이해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하자니 자꾸 복잡해집니다.)
제 견해를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신인양성일위"는 오직 제2위이신 성자에게만 속한 위격의 특성으로 이해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성육신이 오직 성자에게만 속한 위격의 특성으로 이해되는 것 처럼.) "삼위일체하나님이 신인양성일위가 되셨다."라는 표현은 "일체"라는 면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성부가 신인양성일위가 되셨다" 혹은 "성령이 신인양성일위가 되셨다."는 표현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앞서 살펴본것처럼 성자께서는 반드시 신인양성일위가 되실 필요가 있었지만, 성부와 성령께서는 굳이 연약함을 입으실 필요가 없으시며, 그 두 위격의 사역에는 연약함이 존재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7. 찬송가 50장의 "성부의 보좌에 큰 영광 떠나서"에 대햐여
이 가사가 표현하는 교리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성부의 보좌"라는 것과 "성부가 보좌"라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본 가사는 "성부가 보좌를 떠났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성부의 보좌에서 떠났다."로 보는 것이 더 맞아 보입니다. 즉, 그 보좌는 "성부의 것"이므로 "성부의 보좌"인데,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은 성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이라는 표현으로 짐작하여 보건데, "성부의 보좌"에 앉아 계시던 분은 성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찬송가 50장 2절의 가사는 성자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겠고, 가사 전체의 내용이 성자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8.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성도들
구약성경에 하나님을 대면한 몇몇 성도들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모세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대면하여보면 우리 인간은 필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면한 모든 성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면하였으므로 죽을 것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죽지 않았는가. (이하의 내용은 저의 개인적인 소견이 아니라 일반신학적 관점에서의 설명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자들이 죽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없이 나타내실 때에는 멸망이 다가옵니다.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감히 맞섰던 고라자손들은 땅이 갈라져 산채로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이 일에 하나님께서는 입을 여시지 않으셨고 땅을 열어 그들을 삼키셨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대면하였으나 죽지 않은 성도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친히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천사들이 인간을 만난 사건들이 종종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크게 구분되지 않으나, 영어 혹은 원어 성경에는 "천사들" 혹은 "한 천사"와 "그 천사"가 분명히 구분되어 표현됩니다. "천사들"은 여러 천사들을, "한 천사"는 숫자적으로 하나의 천사를 말하는 것인데, "그 천사"는 "특정하고 유일한 존재"를 명확히 지시하는 것입니다. 일반신학에서는 "그 천사"로 표현된 존재는 하나님으로 해석합니다. 구약의 인물들도 "천사들"이나 "한 천사"를 만난 사람은 천사를 지극히 대접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 천사"를 만난 사람은 "내가(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였으므로 죽으리라."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는 요한복음 1장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즉 구약의 성도들이 대면한 하나님은 말씀이신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으셔서 (죄는 없으시나)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으므로 그들이 대면하여도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하면 필멸하나, 말씀하시는 하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자는 그 낮아지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대면하여도 죽지 않을 수 있으며, 성경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모든 성도들은 성자 하나님을 대면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신학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구약시대는 말씀이 육신을 입기 전이 아닌가. 일반신학에서는 "말씀이 육신을 입은 시기"를 생각하기보다 "말씀이신 2위 하나님은 대면할 수 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천사도 본래 육체가 없으나 성경에서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난 부분이 여럿 있듯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외적인 모습을 나타내시는 것은 문제될 부분은 아니고, 다만 인간이 대면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만 생각해볼 때, 역사 속에 실제로 인간과 대면하셨고 대면하여도 우리가 죽지 않을 수 있는 분은 성육신(신인양성일위로 도성인신)하신 제2위격이신 성자이시지 않을까 생각해 본것입니다.
1. 신인양성일위에 대한 일반신학적 표현
일반신학에서는 "신인양성일위"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습니다. 대신 "성육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육신"이라는 표현은 사실 "도성인신"에 더 가까운 의미인데, 일반신학에서는 "신인양성일위"와 "도성인신"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성육신"이라는 단어로 일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백목사님의 깨달음이 더 깊고, 구체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인양성일위"는 내면적 "인성"에 초점을 둔 부분입니다. "성육신"은 외향적 육체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둘은 다른 의미는 아니고 같은 뜻으로 쓰이며, "신인양성일위"와 "도성인신"이 더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표현이고, "성육신"은 그보다는 개괄적인 의미라고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성령도 신인양성일위이신가"라는 생각을 일반신학적 용어로 고쳐본다면, "성령도 성육신하셨는가"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영이시므로 "육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신학적 관점에서는 이런식의 사고방식이나 논쟁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실 오늘날까지 발견된 신학의 보편적인 견해에서는 성령론에 대하여 매우 취약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성령에 대한 건설적인 논쟁은 별로 없고, 많은 오해와 이단들이 만연할 뿐입니다.
2. 신성과 인성에 대하여
앞서 말씀드렸듯이 "신인양성일위"의 강조점은 "인성"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에 비에 "도성인신"은 "육체"에 강조점이 있고, 일반 신학에서 말하는 "성육신"도 "육체"와 "인성"을 다 포함하지만, 주된 강조점은 "육체"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도성인신" 혹은 "성육신"하셨다고 볼 수는 없으나, "신인양성일위"라고 보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인성"에 대해서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합니다.
보편적으로 "신성"을 설명하라고 하면,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런데 그 속성들 중에 인간에게 적용되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 면을 "인성"적 요소라고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요소가 "신성"에 속 할 때는 완전한 것이지만, "인성"에 속 할 때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살펴보자면, "사랑"이라는 속성은 "신성"에 속 할 때는 완전한 것이지만, "인성"에 속 할 때는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십니다. 인간에게도 사랑이 있습니다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신성=완전,온전 / 인성=불완전,부족함"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3. 성자께서 인성을 입으셨다는 것에 대하여
앞에서 살펴본 논거를 바탕으로 "성자께서 인성을 입으셨다."="성자께서 불완전을 입으셨다."라고 이해될 수 있는가. 그러나 성자께서는 완전하신 하나님시며 완전하신 인간이시므로 "불완전"이라는 단어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일반신학에서는 "불완전"이라는 표현을 쓰지않고 "연약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경에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므로"라는 표현이 있으므로 이것이 훨씬 나아보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성자께서 인성을 입으셨다."="성자께서 연약함을 입으셨다."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연약함에 대하여 신학적 관점으로 잠시 살펴보자면, 그것은 "불완전의 가능성"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고 지존하시며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연약함과 불완전이 없을 뿐 아니라 불완전할 가능성 조차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완전한 첫 사람 아담은 "불완전할 가능성"이 있었고, 결국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살펴볼 때, 성자께서 입으신 "인성"은 "불완전"이라기보다는 "불완전할 가능성" 곧 "연약함"으로 보는 것이 맞겠고, 주님께서는 연약함을 입으셨지만, 완전하신 둘째 아담이 되셨다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4. 성자께서는 왜 신인양성일위가 되셨는가
삼위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성부께서는 예택(예정하시고 택하심)하시고, 성자께서는 성취(사활의 대속을 이루심), 성령께서는 적용(성도를 견인하심)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성자의 역할에는 반드시 신인양성일위가 필요합니다.
대속은 반드시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대신하려면 그것과 같은 것이 대신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대신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자께서는 인간이 되셨어야 했습니다.
또한 대속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흠이 있는 것은 자신의 흠으로 징계받아야하지, 다른 사람의 흠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자께서는 흠 없는 어린 양으로 오셔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흠 있는 모든 인간을 대신하셨습니다.
대속의 역사를 위하여 성자께서는 "인성이라는 연약함"을 입으셨습니다. 주님의 몸은 추위와 더위를 느낄 수 있고, 배고픔과 피곤함을 느낄 수 있는 우리와 똑같은 몸이셨습니다. 주님의 인성은 고민과 번민이 있고, 슬픔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우리와 똑같은 성품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완전하시고 흠없는 참 사람이셨습니다. 그래서 흠 있는 우리를 대신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삼위일체와 신인양성일위
성자의 신인양성일위는 대속역사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령은 어떤가? 대속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성부의 예택과 성령의 적용에는 신인양성일위가 있어서는 안될 것으로 보입니다. "인성=연약함"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성부의 예택에는 "연약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의 예택은 완전한 것이어야 하고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부께서는 인성을 취하실 필요도 없으시고 그 사역에는 인성적 연약함 곧, 불완전할 가능성은 배제되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사역도 같이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구원역사를 적용하실 때에 그 일에는 연약함이 없어야합니다. 또한 그 역사는 시공을 초월하시는 것이며 각 사람의 내면 속에 각사람에게 맞는 "자기진리"로 이루어집니다. 이 사역에는 인성적 요소가 필요치 않으며, 있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치 않은 일을 굳이 하시는 분이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계획과 뜻을 따라 행하시며 그분의 모든 역사하심에는 허투가 없으십니다. 인성을 취하시는 것은 구원역사에서 오직 성자에게만 필요한 일이였으므로 오직 성자께서만 신인양성일위가 되셨다라고 보는 것이 더 나아 보입니다.
6.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사역
삼위이시므로 한 위격이 신인양성일위가 되시면 다른 위격들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보편적이고 논리적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삼위"적 요소와 "일체"적 요소를 구분하여 생각할 필요는 있어보입니다. 창조의 사역은 보편적으로 성부의 사역으로 이야기됩니다. 그러나 창조시에 성자께서도 함께하셨고, 성령께서도 역사하셨습니다. 주로 드러나는 혹은 주격이되시는 위격이 성부이실 뿐입니다. 구원 사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는 "일체"적 요소를 생각할 때 적용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삼위"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일반신학에서는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고, 성령은 성부도 성자도 아니다."라고 명시합니다. 삼위는 분명히 다릅니다. 또 일반신학에서는 "성부는 나시지도 나오시지도 아니하시고, 성자께서는 성부로 부터 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셨다."라는 표현으로 삼위의 특성을 구분합니다. "일체"에 있어서는 "본체는 하나이시요, 신성과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동일하시다."고 표현합니다. 말장난 같은 일반신학의 복잡한 표현을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삼위는 세 분이신데, 일체로 한 분이시다."정도로 되겠습니다.
"삼위"를 구분하지 않는 것은 일신론, 양태론적 이단입니다. "일체"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삼신론, 다신론적 이단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단일신론이 아니라 유일신론이다."라고도 표현합니다.(삼위일체는 인간의 지성으로 다 이해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하자니 자꾸 복잡해집니다.)
제 견해를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신인양성일위"는 오직 제2위이신 성자에게만 속한 위격의 특성으로 이해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성육신이 오직 성자에게만 속한 위격의 특성으로 이해되는 것 처럼.) "삼위일체하나님이 신인양성일위가 되셨다."라는 표현은 "일체"라는 면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성부가 신인양성일위가 되셨다" 혹은 "성령이 신인양성일위가 되셨다."는 표현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앞서 살펴본것처럼 성자께서는 반드시 신인양성일위가 되실 필요가 있었지만, 성부와 성령께서는 굳이 연약함을 입으실 필요가 없으시며, 그 두 위격의 사역에는 연약함이 존재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7. 찬송가 50장의 "성부의 보좌에 큰 영광 떠나서"에 대햐여
이 가사가 표현하는 교리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성부의 보좌"라는 것과 "성부가 보좌"라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본 가사는 "성부가 보좌를 떠났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성부의 보좌에서 떠났다."로 보는 것이 더 맞아 보입니다. 즉, 그 보좌는 "성부의 것"이므로 "성부의 보좌"인데,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은 성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이라는 표현으로 짐작하여 보건데, "성부의 보좌"에 앉아 계시던 분은 성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찬송가 50장 2절의 가사는 성자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겠고, 가사 전체의 내용이 성자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8.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성도들
구약성경에 하나님을 대면한 몇몇 성도들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모세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대면하여보면 우리 인간은 필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면한 모든 성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면하였으므로 죽을 것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죽지 않았는가. (이하의 내용은 저의 개인적인 소견이 아니라 일반신학적 관점에서의 설명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자들이 죽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없이 나타내실 때에는 멸망이 다가옵니다.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감히 맞섰던 고라자손들은 땅이 갈라져 산채로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이 일에 하나님께서는 입을 여시지 않으셨고 땅을 열어 그들을 삼키셨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대면하였으나 죽지 않은 성도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친히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천사들이 인간을 만난 사건들이 종종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크게 구분되지 않으나, 영어 혹은 원어 성경에는 "천사들" 혹은 "한 천사"와 "그 천사"가 분명히 구분되어 표현됩니다. "천사들"은 여러 천사들을, "한 천사"는 숫자적으로 하나의 천사를 말하는 것인데, "그 천사"는 "특정하고 유일한 존재"를 명확히 지시하는 것입니다. 일반신학에서는 "그 천사"로 표현된 존재는 하나님으로 해석합니다. 구약의 인물들도 "천사들"이나 "한 천사"를 만난 사람은 천사를 지극히 대접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 천사"를 만난 사람은 "내가(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였으므로 죽으리라."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는 요한복음 1장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즉 구약의 성도들이 대면한 하나님은 말씀이신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으셔서 (죄는 없으시나)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으므로 그들이 대면하여도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하면 필멸하나, 말씀하시는 하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자는 그 낮아지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대면하여도 죽지 않을 수 있으며, 성경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모든 성도들은 성자 하나님을 대면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신학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구약시대는 말씀이 육신을 입기 전이 아닌가. 일반신학에서는 "말씀이 육신을 입은 시기"를 생각하기보다 "말씀이신 2위 하나님은 대면할 수 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천사도 본래 육체가 없으나 성경에서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난 부분이 여럿 있듯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외적인 모습을 나타내시는 것은 문제될 부분은 아니고, 다만 인간이 대면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만 생각해볼 때, 역사 속에 실제로 인간과 대면하셨고 대면하여도 우리가 죽지 않을 수 있는 분은 성육신(신인양성일위로 도성인신)하신 제2위격이신 성자이시지 않을까 생각해 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