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8일 수밤
김동민2024-12-18조회 103추천 14
2024년 12월 18일 수밤
찬송: 116장, 77장
본문: 빌립보서 4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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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서도 변치 아니하고 계속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말씀은, 기쁨을 강조하면서도 그 기쁨이 점점 더 커지고 많아지는 기쁨의 크기가 자라는 면을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처음에는 기쁨이 생겨져야겠고 생겨진 기쁨이 계속되어져야겠고 갈수록 점점 많아져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종류의 기쁨이 세상에도 있을까. 세상 일은 아무리 기쁜 일을 만나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슬픔도 그렇습니다. 어떤 슬픔도, 어떤 기쁨도, 시간이 지나도 약해지는 게 희로애락입니다. 생각할수록 알아갈수록 실행을 해 볼수록 그 기쁨이 끝없이 커지고 충만해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주 안에 있는 기쁨, 이 기쁨만이 늘 새로우며 충만에 있는 기쁨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기쁨이 넘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관용이란 당연하고 너무 좋은 것입니다. 남으니까 좋고 더 많아지니 그러니 당연히 나누게 되는 것이고 기쁨의 세계를 알지못하는 사람이 올 때는 관용입니다. 처음에는 모르고 이러는 게 쫓아왔다가도 기쁨의 세계를 알게 되고 동참을 하게 되고 기쁨의 범위와 크기가 커지는 생활이 믿는 생활입니다. 자기에게 주는 것이 왜 쉬운가, 자기가 가진 것을 작다 여기기 때문에 나눠주기가 쉽게 됩니다. 사활의 대속의 기쁨보다 가치있는 것이 없으니, 싼 것을 주고 귀한 것을 취하는 겁니다. 자기 전재산일찌라도 작게 여기지 않습니까. 욕망도 품지 아니할 뿐 아니라 경거망동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 기쁨을 가지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우리의 행동에는 이 기쁨의 세계를 정하고 자기의 내면이 불타야 정상이고, 남을 향할 때는 조심스럽게 해야합니다.
관용을 베풀라 했으니 무조건 밀어버리는데 이것도 속지 말아야합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주어진 이 구원은 지극히 큰 구원이기 때문에 실행을 통해 자라가는 사람이 변화가 되고 자연스럽게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과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구별하게 되고 그것을 취하느라 하늘의 것을 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게 하고 분쟁하는 일은 없게됩니다. 소망의 차원이 다르고 기쁨을 느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분쟁생길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땅의 것이 전부니, 주 안에 기쁨에 있는 사람은 한 쪽은 받으니까 좋고 서로 좋은 겁니다.
선교 초기에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 믿으면 복받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배고픈 시절에 별로 먹지 못한 때에 어떤 아이 엄마가 예배를 드리는데 갈려고 발걸음을 올리니까 꼭 식사를 하고 가시라고 부탁을 하길래 눈 질끔감고 앉았는데 그 시절에 쌀밥이 나오니까 그거 보고 예수님 믿으면 쌀밥 먹는 복이라는 걸 받는 구나 그렇게 감동을 하고 그 다음에는 아이까지 데리고 갔는데 더 반기는 것을 보고 예수님 믿는 세계는 이런 복받는 세계구나. 그리고 그 가정이 뒤에 복 많이 받았다는 공회의 일화가 있습니다. 이 기쁨은 전진적이며 향상적이고 무한으로 자라가는 그 세계가 바로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돌아봐야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기쁨을 느끼는가.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돈벌이가 안되면 불행해질 사람입니다. 그 지식의 가치가 없어질 사람입니다. 건강에서 기쁨을 찾으면 불행하지지 않겠습니까. 그 기쁨이란 변하지 않고 계속 되어지는 사활의 기쁨입니다.
사죄 칭의 화친 소망 이걸로 사는 기쁨입니다. 땅의 것을 사용하지 않고 인인 관계에 메이는 게 아니라 완전자 하나님의 눈초리를 생각하고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고 그것만 생각하고 그게 정상적인 자세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 없어질 것이며 우리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합니다. 백 목사님이 안 믿으실 때 밝은 표정으로 지나가길래 물어봤다고 합니다. 좋은 데 다녀왔습니다. 기도하러 다녀왔습니다. 세상에 술 없는 재미라는 것도 있구나 그런 생각도 했다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한 두 번 어찌저찌 흉내내는 건 할 수 있지만 사활의 대속에 감격된 것에서 기쁨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자유성을 극한으로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맡은 공부를 두고 억지로 하는 것이 나을겁니다. 스스로 필요성을 의해서 하는 사람은 뛰어난 겁니다. 공부에 필요성은 느껴지는데 환경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으로 하게 되면 효율이 훨씬 나을겁니다. 이 공부가 기쁨으로 좋아서 하게 된다면 이때부터 다른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단순히 하나를 바꿔먹었다가 아니라 전부 다 바꿔버립니다. 잠을 안 자도 되고 밥을 안 먹어도 되고. 보통 공부든 기술이든 장사든 다 이러한 시간을 거치게 됩니다. 말씀 안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 안에서 기뻐하라입니다.
부산 시내 얼마나 넓습니까. 그 시내 전체에서 많은 학생들을 가득 데리고 다니면서도 수 많은 인파 속에서도 자기 학생 얼굴은 정확하게 알아본답니다. 학생이 200명이 되어도 누구는 빠졌고 누구는 무슨 사정있었고 다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건 하루 종일 안 먹어도 배도 안 고프고 잠도 안 옵니다. 이렇게 움직일 때는 새벽부터 이렇게 움직여도 시간이 얼마나 잘 가는지 짧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지금도 그럴 수 있을까.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쁨이 있다면 되는 겁니다. 이치를 통해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을 말씀으로 심었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다. 성경도 가까이 해야겠지만은 틈틈이 백목사님 설교를 자주 접해야하겠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점진적이고 점차적이며 향상적이고 성장적이며 이 성장이 무한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관용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관용이 아닙니다. 상대방 속에 심는 그것을 말합니다. 사죄의 세계를 알게하고 칭의의 세계를 알게 하고 화친의 세계를 알게하고 소망을 알게해 베푸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두고 잘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말로써, 간섭으로써, 상대방을 억지로 바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 하나의 것으로 베푸는 겁니다. 주일학생들이 반사생활을 접하게 되는 걸로는 참석하는 거 같은데 선생님의 언행심사를 봅니다. 그리고 행동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어떻게 믿는 것이라는 정의를 내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반사 선생님은 아무리 편해져도 조심해야합니다. 학생의 마음 속에 아 예수님은 저렇게 믿는 것이구나 라는 정의를 소리 없이 만드릭 때문에 그럽니다.
주일에 돈 쓰지 말라고 하는 것보다 안 쓰시더라. 그 학생의 말씀에는 믿음이 없을지라도 교회 선생님은 안 쓰시던데 움찔하게 되어집니다. 폼으로써 접함으로써 생기는 겁니다. 사람을 길러가는 법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각자 자기 입장에서 빚생활을 하기 위해서 애쓰고 보여주는데 처음에는 이해못하는 청년 겉으로는 이해를 못하는 양심을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안 되는 것은 주님이 계시니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이렇게 약속하신 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지켜보는 분이시니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애를 쓸 뿐입니다. 이렇게 걸어가는 걸음 걸음을 십자가의 도라고 합니다. 그 길을 먼저 걸어가신 주님만큼은 기쁨으로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래서 자기 속에 주안에서 기뻐하는 기쁨으로 가득차야 죄야 마귀와 사망에 피동되지 아니하고 이기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 속이 기쁨으로 가득차있어서야 그런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어떤 난제를 만나더라도 원인을 자기에서 찾아야합니다.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고 자기와 주님 관계에서 찾고 멀어진 이 요소는 없는지 그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만사와 만물과 만인을 상대할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무저항주의가 아닙니다. 상대방이 나를 때리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하기 때문에 최소한 방어를 하는 겁니다. 백 목사님을 찾아가서 교인들이 상담을 하면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답니다. 깔끔하게, 그 사람의 편을 들어주십니다. 이런 힘든 일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수고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가 있고 조금 갑갑하다 싶은 사람이 이런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죄를 지었답니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러면은 좋은 면도 있지 않을까. 뒤에 가면 좋을 수도 있겠는데 이런 방향으로 말씀하신답니다. 그 보고하는 심리와 평소가 어떤지를 보시고 그 사람 속에 악한 요소, 악한 심리에 피동되지 않으시는 겁니다. 당시 총공회 교인이 몇 만에서 몇 십만 될 때인데, 우리가 주일학생 몇 명만 챙겨모아도 개인의 성경 모집 얼마나 많습니까. 천하없이 악한 것을 보고도 뽑아내도 아무리 좋아보이는 것도 그 이면에 있을 수 있는 문제점을 보면서 가장 근접한 그 사람에게 필요한 지도를 하신답니다.
백 목사님도 이런 지도를 하시면서 자라나는 교인들이 백목사님보다 나은 사람이 되길 바라지 않으셨을까. 그 아들이 자기의 것을 흡수해서 더 나아지는 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욕을 하던지 말던지 미군들은 오늘의 이나라를 보면 참 자랑스럽습니다 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 보실 때 이런 우리가 되어졌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기쁨도 될 겁니다. 고차원의 우리이며 큰 소망을 가진 우리들이니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전투가 필연입니다. 승리의 영광과 전투의 치열함이라는 것은 함께 가는 겁니다. 영광의 크기를 바라면서 전투를 없길 바라는데 불신 세상에는 그런 거 없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생활이라는 것은 거창하거나 클 필요 없습니다. 그 속에 주님과 역사가 연결되는가. 가정의 출발도, 교회의 출발도 오히려 좀 불안합니다. 내려올 일이 생길까봐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 출발할 때 한 칸 방으로 출발하지 않습니까. 환경이 크고 작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우리 노선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시는 것도 작고 약하게 오셨습니다. 구원의 주님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다윗은 목동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사람입니다. 다 외롭고 혼자 출발했습니다. 여건은 작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작은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활의 대속에 감격된 우리의 경쟁력이며 힘의 근원인데 이 근원이 내 속에 있냐 없냐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싸움입니다. 작게 출발하는 사람의 약점은 스스로를 그렇게 여이고 위축해버립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주님까지도 위축해버린답니다.
한 가정이 출발하면 어떤 생활에 있는 게 아니라 맡은 일 주어진 일을 다하여 하는 것이겠다. 남편이 주님을 머리를 삼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 앞으로는 나를 지도할 수 있는 나의 머리로 만들겠다 하면 온전하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모인 가정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이 이 요구를 시작하고 나면은 되게 됩니다. 불행한 것은 지금 우리에게 해야할 자기 자신의 말은 시대적 환경에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한 없이 관대하면서 한 없이 엄한 그런 시대들인데 분주하게 흘러갈지라도 우리는 앞서가신 주님을 생각하니 우리는 지향점이 확실한 우리들이기 때문에 앞서가신 주님을 바라보며 자기를 기쁨을 가지는데 노력해야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이런 사람의 사는 것은 세상이 볼 때에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 되시고 천한 몸을 입고 말 구유까지 내려왔는데 그것은 비 이해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관용이며 사랑이며 실제 밝히면 우리 속에 가득한 기쁨으로 주님으로 걸어갈 때에 모든 사람에게 가라고 한 사람이 되어집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할 지라도 뭐라고 할지 압니다. 속으로는 그래, 예수님은 저렇게 믿어야지. 저렇게 믿어야 종교인이지. 그렇게 답을 하게 되어져있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해서 생색내라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현실을 살 때에는 많은 것을 해야겠지만은 제한적인 안드레의 신앙이 아니라 오병이어의 어린 아이의 믿음같이 내 현실 속 기쁨을 가지고 주신 현실 있는 것을 하겠습니다. 그러면 앞서가신 주님께서 주님의 모든 것또한 계산없이 제한없이 맡기시지 않겠습니까.
자기 실속 다 챙겨가면서 주님이 복을 부어주길 바라기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목석이면 몰라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닙니까. 이런 완전자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만큼은 미련해보이도록 힘을 쓰고 사활의 대속에 힘을 쓰도록 애를 쓸 때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어지면 주님은 나를 좋도록 하십니다. 이 기쁨은 감정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위치적으로 기쁨입니다. 이런 세계를 알아야 예수님 믿는데 힘이 납니다. 변치않을 수 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로 돌아가시겠습니다.
찬송: 116장, 77장
본문: 빌립보서 4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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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서도 변치 아니하고 계속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말씀은, 기쁨을 강조하면서도 그 기쁨이 점점 더 커지고 많아지는 기쁨의 크기가 자라는 면을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처음에는 기쁨이 생겨져야겠고 생겨진 기쁨이 계속되어져야겠고 갈수록 점점 많아져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종류의 기쁨이 세상에도 있을까. 세상 일은 아무리 기쁜 일을 만나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슬픔도 그렇습니다. 어떤 슬픔도, 어떤 기쁨도, 시간이 지나도 약해지는 게 희로애락입니다. 생각할수록 알아갈수록 실행을 해 볼수록 그 기쁨이 끝없이 커지고 충만해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주 안에 있는 기쁨, 이 기쁨만이 늘 새로우며 충만에 있는 기쁨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기쁨이 넘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관용이란 당연하고 너무 좋은 것입니다. 남으니까 좋고 더 많아지니 그러니 당연히 나누게 되는 것이고 기쁨의 세계를 알지못하는 사람이 올 때는 관용입니다. 처음에는 모르고 이러는 게 쫓아왔다가도 기쁨의 세계를 알게 되고 동참을 하게 되고 기쁨의 범위와 크기가 커지는 생활이 믿는 생활입니다. 자기에게 주는 것이 왜 쉬운가, 자기가 가진 것을 작다 여기기 때문에 나눠주기가 쉽게 됩니다. 사활의 대속의 기쁨보다 가치있는 것이 없으니, 싼 것을 주고 귀한 것을 취하는 겁니다. 자기 전재산일찌라도 작게 여기지 않습니까. 욕망도 품지 아니할 뿐 아니라 경거망동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 기쁨을 가지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우리의 행동에는 이 기쁨의 세계를 정하고 자기의 내면이 불타야 정상이고, 남을 향할 때는 조심스럽게 해야합니다.
관용을 베풀라 했으니 무조건 밀어버리는데 이것도 속지 말아야합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주어진 이 구원은 지극히 큰 구원이기 때문에 실행을 통해 자라가는 사람이 변화가 되고 자연스럽게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과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구별하게 되고 그것을 취하느라 하늘의 것을 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게 하고 분쟁하는 일은 없게됩니다. 소망의 차원이 다르고 기쁨을 느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분쟁생길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땅의 것이 전부니, 주 안에 기쁨에 있는 사람은 한 쪽은 받으니까 좋고 서로 좋은 겁니다.
선교 초기에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 믿으면 복받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배고픈 시절에 별로 먹지 못한 때에 어떤 아이 엄마가 예배를 드리는데 갈려고 발걸음을 올리니까 꼭 식사를 하고 가시라고 부탁을 하길래 눈 질끔감고 앉았는데 그 시절에 쌀밥이 나오니까 그거 보고 예수님 믿으면 쌀밥 먹는 복이라는 걸 받는 구나 그렇게 감동을 하고 그 다음에는 아이까지 데리고 갔는데 더 반기는 것을 보고 예수님 믿는 세계는 이런 복받는 세계구나. 그리고 그 가정이 뒤에 복 많이 받았다는 공회의 일화가 있습니다. 이 기쁨은 전진적이며 향상적이고 무한으로 자라가는 그 세계가 바로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돌아봐야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기쁨을 느끼는가.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돈벌이가 안되면 불행해질 사람입니다. 그 지식의 가치가 없어질 사람입니다. 건강에서 기쁨을 찾으면 불행하지지 않겠습니까. 그 기쁨이란 변하지 않고 계속 되어지는 사활의 기쁨입니다.
사죄 칭의 화친 소망 이걸로 사는 기쁨입니다. 땅의 것을 사용하지 않고 인인 관계에 메이는 게 아니라 완전자 하나님의 눈초리를 생각하고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고 그것만 생각하고 그게 정상적인 자세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 없어질 것이며 우리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합니다. 백 목사님이 안 믿으실 때 밝은 표정으로 지나가길래 물어봤다고 합니다. 좋은 데 다녀왔습니다. 기도하러 다녀왔습니다. 세상에 술 없는 재미라는 것도 있구나 그런 생각도 했다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한 두 번 어찌저찌 흉내내는 건 할 수 있지만 사활의 대속에 감격된 것에서 기쁨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자유성을 극한으로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맡은 공부를 두고 억지로 하는 것이 나을겁니다. 스스로 필요성을 의해서 하는 사람은 뛰어난 겁니다. 공부에 필요성은 느껴지는데 환경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으로 하게 되면 효율이 훨씬 나을겁니다. 이 공부가 기쁨으로 좋아서 하게 된다면 이때부터 다른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단순히 하나를 바꿔먹었다가 아니라 전부 다 바꿔버립니다. 잠을 안 자도 되고 밥을 안 먹어도 되고. 보통 공부든 기술이든 장사든 다 이러한 시간을 거치게 됩니다. 말씀 안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 안에서 기뻐하라입니다.
부산 시내 얼마나 넓습니까. 그 시내 전체에서 많은 학생들을 가득 데리고 다니면서도 수 많은 인파 속에서도 자기 학생 얼굴은 정확하게 알아본답니다. 학생이 200명이 되어도 누구는 빠졌고 누구는 무슨 사정있었고 다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건 하루 종일 안 먹어도 배도 안 고프고 잠도 안 옵니다. 이렇게 움직일 때는 새벽부터 이렇게 움직여도 시간이 얼마나 잘 가는지 짧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지금도 그럴 수 있을까.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쁨이 있다면 되는 겁니다. 이치를 통해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을 말씀으로 심었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다. 성경도 가까이 해야겠지만은 틈틈이 백목사님 설교를 자주 접해야하겠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점진적이고 점차적이며 향상적이고 성장적이며 이 성장이 무한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관용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관용이 아닙니다. 상대방 속에 심는 그것을 말합니다. 사죄의 세계를 알게하고 칭의의 세계를 알게 하고 화친의 세계를 알게하고 소망을 알게해 베푸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두고 잘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말로써, 간섭으로써, 상대방을 억지로 바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 하나의 것으로 베푸는 겁니다. 주일학생들이 반사생활을 접하게 되는 걸로는 참석하는 거 같은데 선생님의 언행심사를 봅니다. 그리고 행동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어떻게 믿는 것이라는 정의를 내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반사 선생님은 아무리 편해져도 조심해야합니다. 학생의 마음 속에 아 예수님은 저렇게 믿는 것이구나 라는 정의를 소리 없이 만드릭 때문에 그럽니다.
주일에 돈 쓰지 말라고 하는 것보다 안 쓰시더라. 그 학생의 말씀에는 믿음이 없을지라도 교회 선생님은 안 쓰시던데 움찔하게 되어집니다. 폼으로써 접함으로써 생기는 겁니다. 사람을 길러가는 법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각자 자기 입장에서 빚생활을 하기 위해서 애쓰고 보여주는데 처음에는 이해못하는 청년 겉으로는 이해를 못하는 양심을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안 되는 것은 주님이 계시니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이렇게 약속하신 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지켜보는 분이시니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애를 쓸 뿐입니다. 이렇게 걸어가는 걸음 걸음을 십자가의 도라고 합니다. 그 길을 먼저 걸어가신 주님만큼은 기쁨으로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래서 자기 속에 주안에서 기뻐하는 기쁨으로 가득차야 죄야 마귀와 사망에 피동되지 아니하고 이기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 속이 기쁨으로 가득차있어서야 그런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어떤 난제를 만나더라도 원인을 자기에서 찾아야합니다.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고 자기와 주님 관계에서 찾고 멀어진 이 요소는 없는지 그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만사와 만물과 만인을 상대할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무저항주의가 아닙니다. 상대방이 나를 때리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하기 때문에 최소한 방어를 하는 겁니다. 백 목사님을 찾아가서 교인들이 상담을 하면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답니다. 깔끔하게, 그 사람의 편을 들어주십니다. 이런 힘든 일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수고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가 있고 조금 갑갑하다 싶은 사람이 이런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죄를 지었답니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러면은 좋은 면도 있지 않을까. 뒤에 가면 좋을 수도 있겠는데 이런 방향으로 말씀하신답니다. 그 보고하는 심리와 평소가 어떤지를 보시고 그 사람 속에 악한 요소, 악한 심리에 피동되지 않으시는 겁니다. 당시 총공회 교인이 몇 만에서 몇 십만 될 때인데, 우리가 주일학생 몇 명만 챙겨모아도 개인의 성경 모집 얼마나 많습니까. 천하없이 악한 것을 보고도 뽑아내도 아무리 좋아보이는 것도 그 이면에 있을 수 있는 문제점을 보면서 가장 근접한 그 사람에게 필요한 지도를 하신답니다.
백 목사님도 이런 지도를 하시면서 자라나는 교인들이 백목사님보다 나은 사람이 되길 바라지 않으셨을까. 그 아들이 자기의 것을 흡수해서 더 나아지는 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욕을 하던지 말던지 미군들은 오늘의 이나라를 보면 참 자랑스럽습니다 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 보실 때 이런 우리가 되어졌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기쁨도 될 겁니다. 고차원의 우리이며 큰 소망을 가진 우리들이니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전투가 필연입니다. 승리의 영광과 전투의 치열함이라는 것은 함께 가는 겁니다. 영광의 크기를 바라면서 전투를 없길 바라는데 불신 세상에는 그런 거 없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생활이라는 것은 거창하거나 클 필요 없습니다. 그 속에 주님과 역사가 연결되는가. 가정의 출발도, 교회의 출발도 오히려 좀 불안합니다. 내려올 일이 생길까봐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 출발할 때 한 칸 방으로 출발하지 않습니까. 환경이 크고 작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우리 노선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시는 것도 작고 약하게 오셨습니다. 구원의 주님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다윗은 목동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사람입니다. 다 외롭고 혼자 출발했습니다. 여건은 작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작은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활의 대속에 감격된 우리의 경쟁력이며 힘의 근원인데 이 근원이 내 속에 있냐 없냐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싸움입니다. 작게 출발하는 사람의 약점은 스스로를 그렇게 여이고 위축해버립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주님까지도 위축해버린답니다.
한 가정이 출발하면 어떤 생활에 있는 게 아니라 맡은 일 주어진 일을 다하여 하는 것이겠다. 남편이 주님을 머리를 삼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 앞으로는 나를 지도할 수 있는 나의 머리로 만들겠다 하면 온전하게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모인 가정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이 이 요구를 시작하고 나면은 되게 됩니다. 불행한 것은 지금 우리에게 해야할 자기 자신의 말은 시대적 환경에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한 없이 관대하면서 한 없이 엄한 그런 시대들인데 분주하게 흘러갈지라도 우리는 앞서가신 주님을 생각하니 우리는 지향점이 확실한 우리들이기 때문에 앞서가신 주님을 바라보며 자기를 기쁨을 가지는데 노력해야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이런 사람의 사는 것은 세상이 볼 때에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 되시고 천한 몸을 입고 말 구유까지 내려왔는데 그것은 비 이해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관용이며 사랑이며 실제 밝히면 우리 속에 가득한 기쁨으로 주님으로 걸어갈 때에 모든 사람에게 가라고 한 사람이 되어집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할 지라도 뭐라고 할지 압니다. 속으로는 그래, 예수님은 저렇게 믿어야지. 저렇게 믿어야 종교인이지. 그렇게 답을 하게 되어져있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해서 생색내라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현실을 살 때에는 많은 것을 해야겠지만은 제한적인 안드레의 신앙이 아니라 오병이어의 어린 아이의 믿음같이 내 현실 속 기쁨을 가지고 주신 현실 있는 것을 하겠습니다. 그러면 앞서가신 주님께서 주님의 모든 것또한 계산없이 제한없이 맡기시지 않겠습니까.
자기 실속 다 챙겨가면서 주님이 복을 부어주길 바라기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목석이면 몰라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닙니까. 이런 완전자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만큼은 미련해보이도록 힘을 쓰고 사활의 대속에 힘을 쓰도록 애를 쓸 때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어지면 주님은 나를 좋도록 하십니다. 이 기쁨은 감정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위치적으로 기쁨입니다. 이런 세계를 알아야 예수님 믿는데 힘이 납니다. 변치않을 수 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로 돌아가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