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2일 수밤
김동민2024-06-12조회 650추천 30
2024년 6월 12일 수밤
찬송: 66장, 60장
본문: 출애굽기 23장 18절
오류 발생 시 첨부파일 참조 바랍니다.
3대 절기에 대한 말씀 중 유월절에 대한 말씀을 살펴볼까합니다. 유월절은 양의 피를 바른 집을 천사들이 넘어간 것이 유월절입니다. 양의 피를 안 바른 집은 천사가 들어가서 그 집의 맏아들을 다 죽였습니다.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을 넘어간 것이고 재앙을 넘어갔습니다. 그 때 모든 집집마다 죽음이 있었는데 양의 피를 바른 곳만 봐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도 바르지 않았으면 넘어갈 수 없고 애굽 백성이라도 애굽 백성은 양의 피를 바른 집은 넘어가 주십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믿는 이스라엘 백성이 믿지 애굽 백성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애굽에 곡소리가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조건은 양의 피를 바른 집입니다. 목축하는 이스라엘에게 아주 어려운 집이 아닙니다. 조금만 신경쓰면 알 수 있고 구할 수 있는 것이 양의 피였습니다. 유월절 환란, 유월절이 정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저 알려주셨으니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얼른 따라가서 양의 피를 발라서 넘어가면 합니다. 세상은 주체성이 없다 사대주의라고 말을 하지만 이런 말은 신앙 세계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다 큰 분이 없고 완전한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그분을 따르겠지만 하나님보다 완전하며 영원불변한 분이 없으시기 때문에 한 분만 따릅니다. 알고보니 이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전멸재앙이 넘어간답니다. 이스라엘 백성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스라엘이 믿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순종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집에 부모님이 어린 아이들에게 차도로 나가면 위험하다 이야기를 하면은 그런가보다 하고 들으면 지혜로운건데, 굳이 나가서 체험해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도 애굽에게도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한 번이니 처음이니 그래서 몰랐느니 깜빡했느니 하는 이유가 통하지 않습니다. 양의 피를 발라야 유월절은 넘어가집니다. 사람이 실수하고 잘못하더라도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있고 때에 따라서는 순간 판단 한 번 잘못하면 평생 아닌 영원토록 후회할 수 있는 일도 가끔 있습니다. 수능 시험이란 한번의 시험이지만 그 시험을 치는 한 명의 학생에게는 평생을 결정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잘 통과하면 애굽 400년 생활 청산하는 것이고 잘못하면 환란이 됩니다. 이 유월절 환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유월절 환란을 두고 잘못 판단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겨버리기 때문에 아홉가지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에 먼저 눈으로 보게끔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실제 양의 피를 발라 구원을 받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사활의 피로 대속을 받았습니다. 이래서 유월절 환란이 환란인데 환란되어지지 아니하고 그것이 거꾸로 능력이 되어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오순절입니다. 길이 없는 곳에 인도하신 은혜가 오순절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길, 하나님의 택함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오순절의 은혜입니다. 사람이 어디에 집중해서 살아야하는지 모르게 되면은 살고 싶으서 사는 것이 아니라 모르니까. 좋아보였으니까. 그렇게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 사람인데 유월절의 핏공로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이 은혜의 인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법이 있습니다. 법은 법이며 동시에 길입니다. 새는 공중 나는 새의 법이 있고 물고기는 물고기의 길과 법이 있습니다. 생애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사는 법이 있습니다. 오순절의 인도의 은혜가 넘어가는 절기의 은혜보다 덜할까. 사람이 태어나면 사람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 아니겠습니다. 부모님이 아이를 낳으면 설명하고 하는 이 수고는 작습니다. 이게 먹이고 손해끼치고 걱정끼치고 그러면 말도 못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의 인도의 은혜라는 것은 유월절의 은혜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오순절의 은혜입니다. 오순절의 은혜란 필수로 뒤따라 와야합니다. 기른 정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특별함이란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625와 신사참배같은 탄압만 신앙인가. 온 세상이 썩어서 해야하지 못하도록 하는 시대에 맞서서 자기 신앙을 지키는 것이 신사참배 못지 않은 신앙입니다. 부모님의 수고를 낳아주신 은혜, 모범을 보여주신 은혜, 그래서 믿는 사람의 감사라는 것은 막연한 감사가 아니라 체계역이여야하고 세밀한 감사라고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들여다볼 때에 가야할 오순절의 인도의 길이 보여집니다. 그들을 인도하지 않아서 마지막에 애굽으로 가는 길로 인도를 하셨다면 헛일이 되는 건데 그래서 올바른 길에 있어야 헛일 되지 않습니다. 인생길은 고해라 얼마나 많습니까. 헛일이라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어디로 가느냐, 오순절의 인도의 은혜가 중요합니다. 장막절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신 은혜입니다. 광야 40년을 지켜주신 은헤입니다. 생각하면 장막절입니다. 오순절 인도의 은혜와 장막절 은헤는 무엇이 다른가. 한 가정의 부부가 자녀를 기르면, 아이들은 어머니를 많이 자라게 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은 시간을 어머니와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자라게 되면은 어머니의 수고 뒤에 있는 아버지의 수고를 보게 됩니다. 짐승을 잡는 제사와 성결 운동이 마구 일어납니다. 지성소에서는 하나님을 만나뵙니다. 담이 있지 않습니까. 공중에 권세잡은 마귀가 하는 거 같은데 하나님이 마지막에는 통제하십니다. 그리고 마귀로써만 활동하지 못하도록 배경이 되어서 통제를 해주십니다. 우리 눈에는 안 보입니다. 이런 마귀조차도 이용해서 천국 건설을 하는 우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어머니는 어머니의 역할을 하며 한 가정의 생명이 자랍니다. 아이들이 철이 없으면 아버지의 수고를 모르지만 세월을 지나면 알게 되는 것처럼, 아는 면이 있습니다. 학생으로 치자면 내가 수능 잘 봐서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대학을 간 거 같은데 그 모든 것, 그 환경 이 모든 것이 아버지는 집안을 지키고 지원을 해줬고 어머니는 뒷바라지 해주셨구나. 그리고 이게 감사가 되어야 학생다운 학생인데 오순절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앞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열렸는데 그 길을 마음껏 달려갈 수 있도록 안보의 은혜로 처들어오는 외적 막아주셨고 메추라기 주셨고 물 주셨고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지켜주셨으니 안보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 보여주심과 같이 소리 없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노선의 환경이 가만히 보면 우리만 열심히하면 모든 여권과 배경이 뒷받침을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것이 말이 쉽지 굉장히 어렵습니다. 80년대에 백목사님이 사람을 쓰실 때 다 갖춰놓고 그리고 현장에 사람을 밀어넣으십니다. 실적 좋은 사람에게 파격 인사를 해버립니다. 주일학교 8000명이 최고 책임자를 다 뒤로하고 학생 가장 많이 챙기는 젊은 선생님을 총무로 세워버립니다. 서부교회가 주일학교가 신문에도 나오고 했는데 최고의 열심을 가진 사람과 알아주는 사람과 그 사람이 열심히 하도록 해주는 기가 막히는 일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알아봐주는 사람과 그렇게 봐주는 조성을 해주는 사람은 사람이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소속된 자기 장막을 아낄 때에 이 장막절의 은혜라는 것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이 은혜에 대한 것을 가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감사를 가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아쉬운 것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장막절의 은혜가 없으니 이렇게까지 추워지는구나 열심히 되는 게 아니구나 없어봐야 느끼니 어떠겠습니까. 이렇게까지 무너지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장막절의 은혜를 두고 아끼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자기의 배경 이것이 자기 한 사람 열심히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겁니다. 백목사님 한 명 안 계시니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던 것처럼 있을 때 잘해야 그 사람에게 이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고 그 은혜가 찾아올 때는 사건을 통해 찾아옵니다. 물질이나 사람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장막절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보이는 것을 아끼고 조심해서 사는 것을 합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의 은혜는 무엇 빠질 것 없이 중요한 은혜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가 중요히 할 것이 있으니 본문에 유월절에 은혜대한 말씀이지만 오순절과 장막절에 연결이 되는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너는 내 희생의 피도 하였고 너는 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너는 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와 아무것도 아닌 피조물 우리와 1대 1의 관계로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계와 계약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니라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리 되었습니다.
양의 피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양의 피가 상징하는 바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양을 잡아 하는 것은 우리의 물질, 하나님 앞에 감격되어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피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바쳐 우리가 와도 사활의 공로로부터 발언이 되어졌고 감격이 되어져 우리를 바치게 되는 것이니 이 또한 주님의 것입니다. 이게 돈 버는게 힘든지 아는 자녀는 함부로 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것이고 대해서도 안되는 것인데 예수님의 희생에 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 피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이 공로에 감격을 해서 사활의 대속에 전부를 바쳐도 못하는 것인데 다른 때는 몰라도 유월절 환란을 앞두고 서는 피의 가치를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 불목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과 우리가 밀접하게 해야하고 한 몸된 우리가 맡겨주신 자기 식구들과 함께 되는 겁니다.
누룩이란 신본주의로 하나되는 것을 인본주의에 속한 모든 것이 누룩입니다. 무교병의 반대쪽이 유교병인데 무교병은 딱딱한 것이라 잘못 해석하면 사람이 뭉치는 것이 되는데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로 뭉치는 것이고 그러면 인본주의가 들어가면 유교병입니다. 이렇게 화목을 이루는데에 있어서 참 많습니다. 명예욕 권력욕 물욕 감정 죄 욕심 많은 종류가 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인본입니다. 그리고 그걸 자기 중심이라고 합니다. 양의 피 안에 있는 사람끼리의 일입니다. 양의 피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니 똑같은 입장, 애굽의 종된 입장들이고 유월절 환란되 똑같이 당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헤쳐나가야하는 그런 형제인데 이럴 때 누룩이 들어오면 틈이 벌어지게 됩니다.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이 될 때는 멀어집니다. 실무적으로 가까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믿는 사람끼리 참 많이 방해하는 요소가 서운함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벌어졌는데 보이기는 사람끼리 문제인데 손해는 하나님이 보시고 양떼가 손해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누룩에 속한 일입니다. 서운하다고 해서 해야겠습니까. 서운해서 서운한 것이고 손이 서운하다고 운전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서운함이라는 귀신은 이 서운함이라는 죄를 조심해야합니다. 사람인지라 인간적인 감정은 그럴 수 있지만 주의 일을 하는 화목의 방해를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에 그런 일이 많습니다. 무너지지 않을 거 같은 강국들이 망할 때는 외적이 아니라 내부가 둘로 나뉘고 좌우로 나뉘고 싸우다가 졌으니 전체를 위해 양보하겠다가 아니라 외적을 불러서 쪼개진 나라가 망한 경우가 참 많습니다. 나라가 두쪽나고 공멸인데 망하지 않고 버티겠습니까. 원수에게 넘겨주겠다. 이런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것이 사람이고 이러는 것이 굉장한 것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사소한 마음에서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형편 저런 이유 저런 서운함 다 뒤로하고 뜻을 이룰 때에 무교병입니다. 하나의 일을 해야할 때는 감정적인 판단보다 실무적인 판단이 낫습니다.
이렇게 실무적인 판단을 하는데 모두가 가져야하는 것이 있으니 무교병을 먹는 사람이라면 가져야하는 것이 있으니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가 자기 십자가를 질 때에 그 여지조차 차단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찌니라. 양에게는 기름이고 우리에게 가져오면 우리에게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말합니다. 찾아보면 다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었을 겁니다. 미루지 말라는 뜻입니다. 적어도 지금이 유월절이기 때문에 유월절만큼은 그렇게 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일만큼은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이 시간 만큼은 양보가 없지 않습니까. 웬만하면 애를 쓰지 않습니까. 주일은 무슨 일이라도 지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렇게 주일 하나를 지키기 위해 양보없이 타협없이 가장 좋은 자기의 기름을 태우고 첫날 첫 시간을 태우고 인간구원위해 수고하느라 태우고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 그날까지 이루어질 때에 남겨두지 않는 겁니다. 동편에서 떠오릅니다. 주님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우리의 충성은 계속 되어야하고 그러는 순간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기름을 태우는 생활입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의 말씀을 살폈고 네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사활의 대속의 은혜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살펴야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지막은 사활의 대속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활의 대속의 공로를 배워야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로 돌아가시겠습니다.
찬송: 66장, 60장
본문: 출애굽기 23장 18절
오류 발생 시 첨부파일 참조 바랍니다.
3대 절기에 대한 말씀 중 유월절에 대한 말씀을 살펴볼까합니다. 유월절은 양의 피를 바른 집을 천사들이 넘어간 것이 유월절입니다. 양의 피를 안 바른 집은 천사가 들어가서 그 집의 맏아들을 다 죽였습니다.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을 넘어간 것이고 재앙을 넘어갔습니다. 그 때 모든 집집마다 죽음이 있었는데 양의 피를 바른 곳만 봐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도 바르지 않았으면 넘어갈 수 없고 애굽 백성이라도 애굽 백성은 양의 피를 바른 집은 넘어가 주십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믿는 이스라엘 백성이 믿지 애굽 백성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애굽에 곡소리가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조건은 양의 피를 바른 집입니다. 목축하는 이스라엘에게 아주 어려운 집이 아닙니다. 조금만 신경쓰면 알 수 있고 구할 수 있는 것이 양의 피였습니다. 유월절 환란, 유월절이 정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저 알려주셨으니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얼른 따라가서 양의 피를 발라서 넘어가면 합니다. 세상은 주체성이 없다 사대주의라고 말을 하지만 이런 말은 신앙 세계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다 큰 분이 없고 완전한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그분을 따르겠지만 하나님보다 완전하며 영원불변한 분이 없으시기 때문에 한 분만 따릅니다. 알고보니 이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전멸재앙이 넘어간답니다. 이스라엘 백성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스라엘이 믿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순종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집에 부모님이 어린 아이들에게 차도로 나가면 위험하다 이야기를 하면은 그런가보다 하고 들으면 지혜로운건데, 굳이 나가서 체험해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도 애굽에게도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한 번이니 처음이니 그래서 몰랐느니 깜빡했느니 하는 이유가 통하지 않습니다. 양의 피를 발라야 유월절은 넘어가집니다. 사람이 실수하고 잘못하더라도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있고 때에 따라서는 순간 판단 한 번 잘못하면 평생 아닌 영원토록 후회할 수 있는 일도 가끔 있습니다. 수능 시험이란 한번의 시험이지만 그 시험을 치는 한 명의 학생에게는 평생을 결정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잘 통과하면 애굽 400년 생활 청산하는 것이고 잘못하면 환란이 됩니다. 이 유월절 환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유월절 환란을 두고 잘못 판단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겨버리기 때문에 아홉가지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에 먼저 눈으로 보게끔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실제 양의 피를 발라 구원을 받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사활의 피로 대속을 받았습니다. 이래서 유월절 환란이 환란인데 환란되어지지 아니하고 그것이 거꾸로 능력이 되어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오순절입니다. 길이 없는 곳에 인도하신 은혜가 오순절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길, 하나님의 택함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오순절의 은혜입니다. 사람이 어디에 집중해서 살아야하는지 모르게 되면은 살고 싶으서 사는 것이 아니라 모르니까. 좋아보였으니까. 그렇게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 사람인데 유월절의 핏공로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이 은혜의 인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법이 있습니다. 법은 법이며 동시에 길입니다. 새는 공중 나는 새의 법이 있고 물고기는 물고기의 길과 법이 있습니다. 생애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사는 법이 있습니다. 오순절의 인도의 은혜가 넘어가는 절기의 은혜보다 덜할까. 사람이 태어나면 사람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 아니겠습니다. 부모님이 아이를 낳으면 설명하고 하는 이 수고는 작습니다. 이게 먹이고 손해끼치고 걱정끼치고 그러면 말도 못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의 인도의 은혜라는 것은 유월절의 은혜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오순절의 은혜입니다. 오순절의 은혜란 필수로 뒤따라 와야합니다. 기른 정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특별함이란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625와 신사참배같은 탄압만 신앙인가. 온 세상이 썩어서 해야하지 못하도록 하는 시대에 맞서서 자기 신앙을 지키는 것이 신사참배 못지 않은 신앙입니다. 부모님의 수고를 낳아주신 은혜, 모범을 보여주신 은혜, 그래서 믿는 사람의 감사라는 것은 막연한 감사가 아니라 체계역이여야하고 세밀한 감사라고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들여다볼 때에 가야할 오순절의 인도의 길이 보여집니다. 그들을 인도하지 않아서 마지막에 애굽으로 가는 길로 인도를 하셨다면 헛일이 되는 건데 그래서 올바른 길에 있어야 헛일 되지 않습니다. 인생길은 고해라 얼마나 많습니까. 헛일이라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어디로 가느냐, 오순절의 인도의 은혜가 중요합니다. 장막절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신 은혜입니다. 광야 40년을 지켜주신 은헤입니다. 생각하면 장막절입니다. 오순절 인도의 은혜와 장막절 은헤는 무엇이 다른가. 한 가정의 부부가 자녀를 기르면, 아이들은 어머니를 많이 자라게 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은 시간을 어머니와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자라게 되면은 어머니의 수고 뒤에 있는 아버지의 수고를 보게 됩니다. 짐승을 잡는 제사와 성결 운동이 마구 일어납니다. 지성소에서는 하나님을 만나뵙니다. 담이 있지 않습니까. 공중에 권세잡은 마귀가 하는 거 같은데 하나님이 마지막에는 통제하십니다. 그리고 마귀로써만 활동하지 못하도록 배경이 되어서 통제를 해주십니다. 우리 눈에는 안 보입니다. 이런 마귀조차도 이용해서 천국 건설을 하는 우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어머니는 어머니의 역할을 하며 한 가정의 생명이 자랍니다. 아이들이 철이 없으면 아버지의 수고를 모르지만 세월을 지나면 알게 되는 것처럼, 아는 면이 있습니다. 학생으로 치자면 내가 수능 잘 봐서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대학을 간 거 같은데 그 모든 것, 그 환경 이 모든 것이 아버지는 집안을 지키고 지원을 해줬고 어머니는 뒷바라지 해주셨구나. 그리고 이게 감사가 되어야 학생다운 학생인데 오순절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앞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열렸는데 그 길을 마음껏 달려갈 수 있도록 안보의 은혜로 처들어오는 외적 막아주셨고 메추라기 주셨고 물 주셨고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지켜주셨으니 안보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 보여주심과 같이 소리 없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노선의 환경이 가만히 보면 우리만 열심히하면 모든 여권과 배경이 뒷받침을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것이 말이 쉽지 굉장히 어렵습니다. 80년대에 백목사님이 사람을 쓰실 때 다 갖춰놓고 그리고 현장에 사람을 밀어넣으십니다. 실적 좋은 사람에게 파격 인사를 해버립니다. 주일학교 8000명이 최고 책임자를 다 뒤로하고 학생 가장 많이 챙기는 젊은 선생님을 총무로 세워버립니다. 서부교회가 주일학교가 신문에도 나오고 했는데 최고의 열심을 가진 사람과 알아주는 사람과 그 사람이 열심히 하도록 해주는 기가 막히는 일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알아봐주는 사람과 그렇게 봐주는 조성을 해주는 사람은 사람이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소속된 자기 장막을 아낄 때에 이 장막절의 은혜라는 것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이 은혜에 대한 것을 가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감사를 가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아쉬운 것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장막절의 은혜가 없으니 이렇게까지 추워지는구나 열심히 되는 게 아니구나 없어봐야 느끼니 어떠겠습니까. 이렇게까지 무너지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장막절의 은혜를 두고 아끼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자기의 배경 이것이 자기 한 사람 열심히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겁니다. 백목사님 한 명 안 계시니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던 것처럼 있을 때 잘해야 그 사람에게 이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고 그 은혜가 찾아올 때는 사건을 통해 찾아옵니다. 물질이나 사람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장막절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보이는 것을 아끼고 조심해서 사는 것을 합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의 은혜는 무엇 빠질 것 없이 중요한 은혜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가 중요히 할 것이 있으니 본문에 유월절에 은혜대한 말씀이지만 오순절과 장막절에 연결이 되는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너는 내 희생의 피도 하였고 너는 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너는 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와 아무것도 아닌 피조물 우리와 1대 1의 관계로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계와 계약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니라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리 되었습니다.
양의 피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양의 피가 상징하는 바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양을 잡아 하는 것은 우리의 물질, 하나님 앞에 감격되어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피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바쳐 우리가 와도 사활의 공로로부터 발언이 되어졌고 감격이 되어져 우리를 바치게 되는 것이니 이 또한 주님의 것입니다. 이게 돈 버는게 힘든지 아는 자녀는 함부로 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것이고 대해서도 안되는 것인데 예수님의 희생에 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 피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이 공로에 감격을 해서 사활의 대속에 전부를 바쳐도 못하는 것인데 다른 때는 몰라도 유월절 환란을 앞두고 서는 피의 가치를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 불목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과 우리가 밀접하게 해야하고 한 몸된 우리가 맡겨주신 자기 식구들과 함께 되는 겁니다.
누룩이란 신본주의로 하나되는 것을 인본주의에 속한 모든 것이 누룩입니다. 무교병의 반대쪽이 유교병인데 무교병은 딱딱한 것이라 잘못 해석하면 사람이 뭉치는 것이 되는데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로 뭉치는 것이고 그러면 인본주의가 들어가면 유교병입니다. 이렇게 화목을 이루는데에 있어서 참 많습니다. 명예욕 권력욕 물욕 감정 죄 욕심 많은 종류가 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인본입니다. 그리고 그걸 자기 중심이라고 합니다. 양의 피 안에 있는 사람끼리의 일입니다. 양의 피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니 똑같은 입장, 애굽의 종된 입장들이고 유월절 환란되 똑같이 당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헤쳐나가야하는 그런 형제인데 이럴 때 누룩이 들어오면 틈이 벌어지게 됩니다.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이 될 때는 멀어집니다. 실무적으로 가까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믿는 사람끼리 참 많이 방해하는 요소가 서운함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벌어졌는데 보이기는 사람끼리 문제인데 손해는 하나님이 보시고 양떼가 손해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누룩에 속한 일입니다. 서운하다고 해서 해야겠습니까. 서운해서 서운한 것이고 손이 서운하다고 운전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서운함이라는 귀신은 이 서운함이라는 죄를 조심해야합니다. 사람인지라 인간적인 감정은 그럴 수 있지만 주의 일을 하는 화목의 방해를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에 그런 일이 많습니다. 무너지지 않을 거 같은 강국들이 망할 때는 외적이 아니라 내부가 둘로 나뉘고 좌우로 나뉘고 싸우다가 졌으니 전체를 위해 양보하겠다가 아니라 외적을 불러서 쪼개진 나라가 망한 경우가 참 많습니다. 나라가 두쪽나고 공멸인데 망하지 않고 버티겠습니까. 원수에게 넘겨주겠다. 이런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것이 사람이고 이러는 것이 굉장한 것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사소한 마음에서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형편 저런 이유 저런 서운함 다 뒤로하고 뜻을 이룰 때에 무교병입니다. 하나의 일을 해야할 때는 감정적인 판단보다 실무적인 판단이 낫습니다.
이렇게 실무적인 판단을 하는데 모두가 가져야하는 것이 있으니 무교병을 먹는 사람이라면 가져야하는 것이 있으니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가 자기 십자가를 질 때에 그 여지조차 차단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찌니라. 양에게는 기름이고 우리에게 가져오면 우리에게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말합니다. 찾아보면 다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었을 겁니다. 미루지 말라는 뜻입니다. 적어도 지금이 유월절이기 때문에 유월절만큼은 그렇게 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일만큼은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이 시간 만큼은 양보가 없지 않습니까. 웬만하면 애를 쓰지 않습니까. 주일은 무슨 일이라도 지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렇게 주일 하나를 지키기 위해 양보없이 타협없이 가장 좋은 자기의 기름을 태우고 첫날 첫 시간을 태우고 인간구원위해 수고하느라 태우고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 그날까지 이루어질 때에 남겨두지 않는 겁니다. 동편에서 떠오릅니다. 주님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우리의 충성은 계속 되어야하고 그러는 순간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기름을 태우는 생활입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의 말씀을 살폈고 네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사활의 대속의 은혜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살펴야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지막은 사활의 대속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활의 대속의 공로를 배워야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로 돌아가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