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일 수밤
김동민2025-01-01조회 125추천 8
2025년 1월 1일 수밤
찬송: 29장
본문: 이사야 53장 1절 ~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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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같이 해봅시다.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을 왜 우리가 알아야하는가 살펴야하는가. 예수님 당하신 고난은 우리 때문에 당하신 고난이고 우리들의 죄 때문에 당하신 고난입니다. 죄를 지어서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우리 조상 아담이 우리를 대표해서 전 인류인데 그가 따먹어서 죄를 지었고 그 죄가 가장 중하고, 그게 원인되어서 태어나서부터 살아오면서 지은 죄들, 그 모든 죄의 전부가 예수님을 못박은 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 계실 때 우리는 나지도 않았는데, 이 세상의 택자 전부를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에게 담당시켜서 지을 모든 죄를 담당시켜서 우리들이 죄를 지어도 지옥에 가지 않게 된 겁니다. 지옥이라는 것은 죄를 하나만 지어도 지옥에 갑니다.
알게 모르게 또 약해서 어쩔 수 없어서 수 많은 종류의 수 많은 죄를 짓게 되는데 그게 전부 지옥갈 죄들입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형벌을 받아야하는데 담당하셔서 믿는 사람은 지옥을 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건설구원적으로 지옥을 안 가지만 영원히 무능한 자가 되게 됩니다. 죄 하나만 지으면 영원한 지옥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아는 만큼 죄의 형벌의 무서움을 알게되고, 우리들의 죄를 지고 어려운 정도를 알게되고 그를 아는 만큼 깨닫게 되고 그만큼 죄송하고 한편으로 감사하며 기쁨을 가지게 되는 지식적인 체계적인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뭐든지 다 모르면 할 수 없는 것이고 아는 만큼 바로 상대할 수 있게 되고 바로 가질 수 있게 되고 모르는 만큼 삐뚤어지며 탈선되며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성탄도 성찬도 다 그런겁니다. 그래서 알아야하는 겁니다. 그 다음 예수님 고난을 생각할 때 고행주의를 벗어나야합니다. 고행주의란 뭐라고 해야합니까, 주일은 그것이 무엇을 해야하는 거 그게 주가 되는 것을 주의라고 합니다. 공산주의, 함께 생산하고 함께 나눠먹자, 자본주의로 실력껏 벌어먹어라 그게 자본주의입니다. 민주주의란 다수가 주원이 되는 것입니다. 독재주의는 혼자서 밀어붙이는 걸 독재주의라고 합니다. 고행주의는 고행을 해야 천국간다. 고난을 많이 겪어야 금식을 많이 하고 잠을 안 자서 비쩍 마르고 아주 높은 곳에 올라가서 비바람 맞으면서 가고 또 아주 추운 날에 밖에서 추위를 견뎌보고 아주 뾰족한 곳에 가서 앉아도 보고, 고통스럽게 많이 만들수록 천국간다 고행주의라고 합니다.
고행주의는 옳은 겁니까 틀린겁니까. 틀린겁니다. 암만 고생을 많이해도 말씀에 어긋나는 고생은 헛일입니다. 죽도록 고생해도 말씀에 어긋나는 고생입니다. 믿는 사람이 충성이라는 것은 말씀에 어긋나는 충성은 허사가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바로알려면 첫째 뭐부터 해야합니까. 성경을 많이 읽어야하고 예배시간에 우리 학생들처럼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잘 들어야합니다. 생각을 하고 복습을 하고.
예수님 고난을 알아야하는 이유를 말씀드렸고 예수님 고난을 두고 고행주의를 벗어나야합니다. 동시에 감성주의를 초월해야합니다. 감성이라는 것은 기쁘다 슬프다 좋다 나쁘다 이런 느낌을 감성주의라고 합니다. 겨울에 하얀 아침에 자고나니까 아침에 눈이 내렸습니다. 크리스마스날입니다. 그러면 온 세상이 너무 좋다고 난리가 납니다. 무슨 나라라고 합니까. 백설의 나라가 되었구나.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닙니다. 그런 걸 가르켜 감성이라고 합니다. 감성입니다. 비행기가 사고나서 179명이 안타깝게 떠났습니다. 어떤 시골 마을에 아이가 아나고 아홉 식구가 갔다가 비행기 사고로 변을 당해버렸습니다. 아이가 기르던 개가 한 마리 있습니다.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슬프지요. 너무너무 슬프다 안됐다 안타깝다. 이게 감성입니다. 그런 건 나쁜 게 아닙니다. 괜찮은 겁니다.
그런데 그 감성은 항상 앞에 무엇을 따라다녀야합니다. 무엇을 따라다녀야할까요. 이성. 이성이 뭔가요.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 이걸 이성이라고 합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이치 리 성품 성자이지요. 이게 어떻게 그렇게 되었느냐. 이걸 이치를 가지는 걸 이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요소를 이성이라고 합니다. 지성이라고도 합니다. 이성과 지성, 뒤에 따라가야하지 감성이 앞에 나가면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난리가 나버립니다. 그래서 모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형 살인 사건 이런 것들 대부분은 감성이 이성 앞에 설쳐서 생긴 사건입니다.
분노조절장애라는 것도, 조절하는 장치가 고장나니까 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모든 감성은 모두 이성 뒤에 따라가야하니 반드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찬송가보다, 뭐가 더 중요합니까. 성경이 중요합니다. 찬송은 감성이 따라갑니다. 찬성은 곡보다는 가사가 중요합니다. 가사는 이성입니다. 사람 마음 속에 양심이 있고 욕심이 있는데 그때부터 도둑놈도 되고 온갖 짓 다 하게 됩니다. 양심 뒤에 따라다닙니다. 양심 뒤에 따라다니는 욕심은 몸쓸 사람이 됩니다. 욕심없는 사람은 아무사람에게도 못 씁니다. 세상적으로 예술을 말하는 고차원이라고 하는 그 사람들이 욕심이 없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런 것은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첫째 고행주의를 조심하고 둘째 감성주의를 초월해야합니다. 예수님 고난을 두고 고행주의를 벗어나고 말하자면 감성주의를 예수님 고난을 사람의 주관과 사람의 선입관과 가지고 사람들이 자기 주관 자기 정도에서 예수님 고난에다가 포장을 하는 겁니다.
페인트칠하고 화장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그리고 감성에 흔들리기 때문에 예수님의 얼굴을 아주 미남으로 그리고 십자가를 그리고 대못을 그리고 가시면류관을 그려놓고 그럽니다. 전부 감성주의자들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볼 때 그런 거 보면 뭐라고 하느냐 유치원 수준이구먼, 그렇게 판단해버리면 됩니다. 초등학교도 아직 못 들어갔네 유치원 수준이구먼, 감성입니다. 동시에 그러면서 예수님 고난에 적당히 봐도 되느냐 그게 치우치는 겁니다. 고행주의와 감성주의를 벗어나되 알대로 알아야합니다. 성경을 근거해서 아무리 연구해도 아무리 이 세상에 일어나는 것을 다 살펴도 우리가 형언할 수 없고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 고난은 어떤 것이기에 생각해봐야합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예수님 고난, 우리 위해 당하신 고난을 기록해놨습니다. 선지자들의 것을 따라갑니다. 사람되신 주의 모습입니다. 무엇같습니까. 연한, 순을 우리말로 하면 새싹입니다. 연하다 아주 가냘프다.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보인 겁니다. 주님 모습이 연한 줄기 같아서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그래서 우리 보기에 흠모할만한 참 좋다 할만한 게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걸 가지고 생각해봅니다. 주님 모습이 사람의 모습을 입고 오신 예수님 모습을 묘사해놓은겁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해놨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모습이 어떻게 이렇게 표현이 되는가. 어느 각도에서 볼 때 이렇게 되느냐. 비유가 될지 모르겠는데 왕정시대 때 나라를 이어받을 세자가 있습니다. 태자. 세자가 아버지가 연세많고 돌아가실 때 다 됐는데 이 나라 다스리면 옷을 갈아입고 보통 사람 차림으로 궁밖에 나섰습니다. 궁궐이라고 그래서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궁에 들어가면 길을 잃어버릴 정도입니다. 그래서 왕자들 웬만한 사람들은 결혼하면 밖에 나가지만 평생을 궁 밖에 나가보지 못한 사람도 있을겁니다. 그런데 이 왕 세자가 궁 밖에 나와서 민간에서 돌아봅니다. 왕인 줄 알면 안되니까 아무도 모르게 변복을 합니다. 서민들이 먹는 음식도 사먹어보고 거지들 사는 데도 가보고 그럽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볼 때 거지 차림으로 거지촌에 가면 그 사람 뭘로 보지요. 거지로 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가서 바가지 들고 밥 주십시오 하면 뭐 취급합니까. 왕 취급합니까 거지취급합니까. 장사꾼 행세하면 장사꾼 취급 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취급을 당하는데 그 사람이 거지입니까 장사꾼입니까 왕세자입니까. 그 사람 신분은 왕세자입니다. 그걸 누가 잘 압니까. 자기는 알고, 신하들은 알겠지요. 아는 겁니다. 자기들 보는 각도로 보니까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거지 차림으로 얻어먹을 때 기가 죽겠습니까. 거지들의 형편 알기 위해서 동양하러 갈 때 겉으로는 거지처럼 가는데 속으로는 그렇게 비굴하거나 주눅이 들거나 그렇겠습니까. 속은 어떤가요. 그런게 조금도 없겠지요. 온갖 거 다 하는데 그렇게 장사하면 장사꾼이니까 물건 팔기 위해서 일하지만 이건 좀 다른 각도로 연극인데 그런 게 있을 거 아닌가요. 주님은 사람되어 오셨습니다. 사람되어 오셨는데 우리 구주입니다. 그분은 연한 순같지 않습니다. 마른 땅에 선 줄기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록해놨습니까. 이렇게 기록하는 각도가 뭡니까.
우리 총공회는 우리 부공 3공회는 이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들이 우리가 있고 좋아하는 사람 조금 있습니다. 다 합해봐야 1000명 될까요. 우리 공회를 좋아하고 알아주는 사람들이. 그런데 아무도 몰라줍니다. 더 땡겨서 백 목사님의 관련된 자료라든지 그분의 신앙의 교훈이라든지 이걸 정리하고 전하는 그 일에 대한 가치를 이걸 아는 사람이 제 눈에는 제대로 아는 사람 목사님 한 분입니다. 주변에 몇 사람 있을 것이고. 갸날프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작 본인은요. 이게 세계 최고다. 가치관이 다른 거지요. 가치관이 세상으로보니까 악령 마귀 시각 각도에서 보니까 연한 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대인들을 가르칠 때 나와 하나님은 하나다. 내가 하나님이다. 구주다. 당당히 외쳤습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알고나니까 사도들이 그렇게 주님을 알았지만 약해서 넘어졌다가 오순절 충만을 받고 난 다음에 주님을 구주로 메시아 그리스도로 하는데 일생을 다 바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고 구주다. 그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다. 정체를 바로 보는거지요.
그때 주님을 사람되어 오셨고 오늘 주님은 뭘로 되어오셨ㄷ고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명으로 바른 노선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때 주님을 어떻게 봤습니까. 잘 따라다녀봐야 얻어먹을 게 있을까. 돈 학벌 권세를 따라가고 다수 명예를 따라가야지 저러다가 죽을 건데 말씀 지켜서 뭐할려고, 학벌을 가져야지 권력을 가져야지. 말씀을 지키다가 계명 지키다가 옳은 길 가다가 무슨 길입니까. 좁은 길이죠. 좁은 길이니까 사람들이 찾지도 못하고 다 도망가버리지요. 넓은 길을 가야지. 다수를 따라가야지. 그래서 지금도 주님 닮은 교회 신앙의 노선 바로 걸어가면 세상 사람들은 연한 순처럼 봅니다. 마른 땅의 줄기처럼 봅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요 목 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담대함을 가지고 하는 겁니다.
바로 알아야합니다. 이것도 같이 기억하면서 이렇게 기록된 각도를 알아야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멸시를 받았는데 받았습니다. 주님 당하신 고난은 이것도 기억해야합니다. 주님이 고난을 받았습니까 안 받으셨습니까. 고난 받았지요. 멸시했고 천대했고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런데 주님은 그 멸시를 다 받았는데 먼지만큼도 영향과 피동되지 않았습니다. 초월이라는 말은 단계를 밟아서 넘어서는 걸 초월이라고 합니다. 단계를 밟아서 넘어가는 게 초월인데.
물이 끓으면 부글부글 끓어버립니다. 밑에서부터 차가운 물이 끓기까지 물의 온도가 차갑다가 0도 10도 20도 30도 40도 점점 뜨거워 마지막에 100도가 되면 폭발해버립니다. 이걸 가지고 초월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끓는 물은 초월과 같은 겁니다. 그래서 폭발이 달아올라가서 어느정도 한계에 올라가는 게 폭발입니다. 단계 과정을 거치지 않는 폭발은 없는 겁니다. 주님은 고난을 초월하셨기 때문에 고난을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주적인 고난을 가해졌는데 다 초월해서 아픈 고통 이게 없어져서 없어져버렸습니다. 물이 끓어서 폭발해버렸습니다. 주님 고난의 정도가 이해되어야하는데 가보진 못해도 이해가 되는 겁니다. 경제를 초월하는 사람 경제 초월하기 쉽지 않지요. 그냥 게흘러서 무능해서 잘못해서 없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실력있고 다 괜찮은데 돈에 대해서 피동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경제 때문에 영향받지 않는다. 그 사람을 아무리 긁어재껴도 아무리 긁어대도 그런 것에 영향받지 않고 피동되지 않으면 초월한 겁니다.
마음 속에 욕얻어먹는게 좋은 사람이 있습니까. 멸시를 하는데 멸시를 할 때 그 멸시를 당하면 피동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긁어재껴도 긁어지지 않으면 초월한 겁니다. 믿는 사람이 그래서 교회 안에서 장로님을 세울려면 교인들 두고 뺨도 때려보고 침도 뱉어보고 욕도 하고 그때 감정 없는 사람이 아닌데 어린 신앙들이 그런 것을 그냥 기쁨으로 감사로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장로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거지요. 우리 장로님 그렇게 되셨습니까. 목사는 더 해야겠지요. 그럴 때 목사가 내가 목사인데 하면 못하는 거지요. 주님이 고난 당하신 것은 아득하게 초월을 했습니다. 인성가진 주님인데 다 초월한 거지요. 그래서 그런 고난 속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찬송이 나오는 겁니다. 그 깨달음은 그런 것을 걸어가봤기 때문에 그런 것이 나오는 겁니다. 세계 역사에 이런 깨달음이 있을까. 백 목사님이 깨달았을 겁니다.
백 목사님은 나환자같이 살아보셨습니다. 우리같으면 냄새난다고 그럴 건데 초월할겁니다. 우리 고난은 3단계입니다. 가시적인 고난입니다. 문서에 기록된 가시적인 고난, 눈으로 볼 수 있는 고난. 사람이 알 수 있는 고난 사람들 수준에서 고난 외부적인 점에서 고난입니다. 피를 흘렸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게 가시적인 고난입니다. 외부 껍데기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 모든 죄를 다 대신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대화친의 고난. 부활의 고난까지. 모든 택자의 모든 것을 다 해내신 고난입니다. 이건 성령으로 깨달아 알아야합니다. 그 전부에 주관자가 조사자가 벌을 내리는 형벌자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법을 잘 아는 사람들 국회의원들 판사 검사들은 빠져나가는 구멍을 가장 잘 압니다. 정치판 치고 도둑질 안하는 사람들 어딨습니까. 빠져나가는 구멍은 아닙니다. 빠져나가는 구멍을 모르니까 걸리는거지요. 단 하나라도 한 순간이라도 있으면 대속이 됩니다. 인간의 언어로 형언 못하고 성령의 감동 아니면 못 느끼는 것이지요. 성찬식은 주님 죽으심에 동참하는 겁니다. 그 끝에 죽으심이 있습니다. 고난 끝에는 대개 바른 고난 끝에는 뭐가 있다고요. 고진감래라고 했습니까. 고진 게 다 가면 슬픈 게 옵니다. 전도서 7장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다. 이걸 병행한다는 겁니다. 고난이 통과하고 나면 기쁨이 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낙심하면 끝까지 갑니다. 스스로 주저앉아버렸으니까. 그러면 고난은 지납니다. 기쁨도 있다가 지나가버리면 알지. 주님 고난에 동참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고난으로 하는 겁니다. 고난 넘어 죽으심은 소망이 있습니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
찬송: 29장
본문: 이사야 53장 1절 ~ 3절
오류 발생 시 첨부 파일 참조 바랍니다.
제목이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같이 해봅시다.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고난을 왜 우리가 알아야하는가 살펴야하는가. 예수님 당하신 고난은 우리 때문에 당하신 고난이고 우리들의 죄 때문에 당하신 고난입니다. 죄를 지어서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우리 조상 아담이 우리를 대표해서 전 인류인데 그가 따먹어서 죄를 지었고 그 죄가 가장 중하고, 그게 원인되어서 태어나서부터 살아오면서 지은 죄들, 그 모든 죄의 전부가 예수님을 못박은 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 계실 때 우리는 나지도 않았는데, 이 세상의 택자 전부를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에게 담당시켜서 지을 모든 죄를 담당시켜서 우리들이 죄를 지어도 지옥에 가지 않게 된 겁니다. 지옥이라는 것은 죄를 하나만 지어도 지옥에 갑니다.
알게 모르게 또 약해서 어쩔 수 없어서 수 많은 종류의 수 많은 죄를 짓게 되는데 그게 전부 지옥갈 죄들입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형벌을 받아야하는데 담당하셔서 믿는 사람은 지옥을 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건설구원적으로 지옥을 안 가지만 영원히 무능한 자가 되게 됩니다. 죄 하나만 지으면 영원한 지옥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아는 만큼 죄의 형벌의 무서움을 알게되고, 우리들의 죄를 지고 어려운 정도를 알게되고 그를 아는 만큼 깨닫게 되고 그만큼 죄송하고 한편으로 감사하며 기쁨을 가지게 되는 지식적인 체계적인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뭐든지 다 모르면 할 수 없는 것이고 아는 만큼 바로 상대할 수 있게 되고 바로 가질 수 있게 되고 모르는 만큼 삐뚤어지며 탈선되며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성탄도 성찬도 다 그런겁니다. 그래서 알아야하는 겁니다. 그 다음 예수님 고난을 생각할 때 고행주의를 벗어나야합니다. 고행주의란 뭐라고 해야합니까, 주일은 그것이 무엇을 해야하는 거 그게 주가 되는 것을 주의라고 합니다. 공산주의, 함께 생산하고 함께 나눠먹자, 자본주의로 실력껏 벌어먹어라 그게 자본주의입니다. 민주주의란 다수가 주원이 되는 것입니다. 독재주의는 혼자서 밀어붙이는 걸 독재주의라고 합니다. 고행주의는 고행을 해야 천국간다. 고난을 많이 겪어야 금식을 많이 하고 잠을 안 자서 비쩍 마르고 아주 높은 곳에 올라가서 비바람 맞으면서 가고 또 아주 추운 날에 밖에서 추위를 견뎌보고 아주 뾰족한 곳에 가서 앉아도 보고, 고통스럽게 많이 만들수록 천국간다 고행주의라고 합니다.
고행주의는 옳은 겁니까 틀린겁니까. 틀린겁니다. 암만 고생을 많이해도 말씀에 어긋나는 고생은 헛일입니다. 죽도록 고생해도 말씀에 어긋나는 고생입니다. 믿는 사람이 충성이라는 것은 말씀에 어긋나는 충성은 허사가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바로알려면 첫째 뭐부터 해야합니까. 성경을 많이 읽어야하고 예배시간에 우리 학생들처럼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잘 들어야합니다. 생각을 하고 복습을 하고.
예수님 고난을 알아야하는 이유를 말씀드렸고 예수님 고난을 두고 고행주의를 벗어나야합니다. 동시에 감성주의를 초월해야합니다. 감성이라는 것은 기쁘다 슬프다 좋다 나쁘다 이런 느낌을 감성주의라고 합니다. 겨울에 하얀 아침에 자고나니까 아침에 눈이 내렸습니다. 크리스마스날입니다. 그러면 온 세상이 너무 좋다고 난리가 납니다. 무슨 나라라고 합니까. 백설의 나라가 되었구나.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닙니다. 그런 걸 가르켜 감성이라고 합니다. 감성입니다. 비행기가 사고나서 179명이 안타깝게 떠났습니다. 어떤 시골 마을에 아이가 아나고 아홉 식구가 갔다가 비행기 사고로 변을 당해버렸습니다. 아이가 기르던 개가 한 마리 있습니다.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슬프지요. 너무너무 슬프다 안됐다 안타깝다. 이게 감성입니다. 그런 건 나쁜 게 아닙니다. 괜찮은 겁니다.
그런데 그 감성은 항상 앞에 무엇을 따라다녀야합니다. 무엇을 따라다녀야할까요. 이성. 이성이 뭔가요.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 이걸 이성이라고 합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이치 리 성품 성자이지요. 이게 어떻게 그렇게 되었느냐. 이걸 이치를 가지는 걸 이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요소를 이성이라고 합니다. 지성이라고도 합니다. 이성과 지성, 뒤에 따라가야하지 감성이 앞에 나가면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난리가 나버립니다. 그래서 모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형 살인 사건 이런 것들 대부분은 감성이 이성 앞에 설쳐서 생긴 사건입니다.
분노조절장애라는 것도, 조절하는 장치가 고장나니까 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모든 감성은 모두 이성 뒤에 따라가야하니 반드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찬송가보다, 뭐가 더 중요합니까. 성경이 중요합니다. 찬송은 감성이 따라갑니다. 찬성은 곡보다는 가사가 중요합니다. 가사는 이성입니다. 사람 마음 속에 양심이 있고 욕심이 있는데 그때부터 도둑놈도 되고 온갖 짓 다 하게 됩니다. 양심 뒤에 따라다닙니다. 양심 뒤에 따라다니는 욕심은 몸쓸 사람이 됩니다. 욕심없는 사람은 아무사람에게도 못 씁니다. 세상적으로 예술을 말하는 고차원이라고 하는 그 사람들이 욕심이 없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런 것은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첫째 고행주의를 조심하고 둘째 감성주의를 초월해야합니다. 예수님 고난을 두고 고행주의를 벗어나고 말하자면 감성주의를 예수님 고난을 사람의 주관과 사람의 선입관과 가지고 사람들이 자기 주관 자기 정도에서 예수님 고난에다가 포장을 하는 겁니다.
페인트칠하고 화장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그리고 감성에 흔들리기 때문에 예수님의 얼굴을 아주 미남으로 그리고 십자가를 그리고 대못을 그리고 가시면류관을 그려놓고 그럽니다. 전부 감성주의자들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볼 때 그런 거 보면 뭐라고 하느냐 유치원 수준이구먼, 그렇게 판단해버리면 됩니다. 초등학교도 아직 못 들어갔네 유치원 수준이구먼, 감성입니다. 동시에 그러면서 예수님 고난에 적당히 봐도 되느냐 그게 치우치는 겁니다. 고행주의와 감성주의를 벗어나되 알대로 알아야합니다. 성경을 근거해서 아무리 연구해도 아무리 이 세상에 일어나는 것을 다 살펴도 우리가 형언할 수 없고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 고난은 어떤 것이기에 생각해봐야합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예수님 고난, 우리 위해 당하신 고난을 기록해놨습니다. 선지자들의 것을 따라갑니다. 사람되신 주의 모습입니다. 무엇같습니까. 연한, 순을 우리말로 하면 새싹입니다. 연하다 아주 가냘프다.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보인 겁니다. 주님 모습이 연한 줄기 같아서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그래서 우리 보기에 흠모할만한 참 좋다 할만한 게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걸 가지고 생각해봅니다. 주님 모습이 사람의 모습을 입고 오신 예수님 모습을 묘사해놓은겁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해놨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모습이 어떻게 이렇게 표현이 되는가. 어느 각도에서 볼 때 이렇게 되느냐. 비유가 될지 모르겠는데 왕정시대 때 나라를 이어받을 세자가 있습니다. 태자. 세자가 아버지가 연세많고 돌아가실 때 다 됐는데 이 나라 다스리면 옷을 갈아입고 보통 사람 차림으로 궁밖에 나섰습니다. 궁궐이라고 그래서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궁에 들어가면 길을 잃어버릴 정도입니다. 그래서 왕자들 웬만한 사람들은 결혼하면 밖에 나가지만 평생을 궁 밖에 나가보지 못한 사람도 있을겁니다. 그런데 이 왕 세자가 궁 밖에 나와서 민간에서 돌아봅니다. 왕인 줄 알면 안되니까 아무도 모르게 변복을 합니다. 서민들이 먹는 음식도 사먹어보고 거지들 사는 데도 가보고 그럽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볼 때 거지 차림으로 거지촌에 가면 그 사람 뭘로 보지요. 거지로 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가서 바가지 들고 밥 주십시오 하면 뭐 취급합니까. 왕 취급합니까 거지취급합니까. 장사꾼 행세하면 장사꾼 취급 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취급을 당하는데 그 사람이 거지입니까 장사꾼입니까 왕세자입니까. 그 사람 신분은 왕세자입니다. 그걸 누가 잘 압니까. 자기는 알고, 신하들은 알겠지요. 아는 겁니다. 자기들 보는 각도로 보니까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거지 차림으로 얻어먹을 때 기가 죽겠습니까. 거지들의 형편 알기 위해서 동양하러 갈 때 겉으로는 거지처럼 가는데 속으로는 그렇게 비굴하거나 주눅이 들거나 그렇겠습니까. 속은 어떤가요. 그런게 조금도 없겠지요. 온갖 거 다 하는데 그렇게 장사하면 장사꾼이니까 물건 팔기 위해서 일하지만 이건 좀 다른 각도로 연극인데 그런 게 있을 거 아닌가요. 주님은 사람되어 오셨습니다. 사람되어 오셨는데 우리 구주입니다. 그분은 연한 순같지 않습니다. 마른 땅에 선 줄기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록해놨습니까. 이렇게 기록하는 각도가 뭡니까.
우리 총공회는 우리 부공 3공회는 이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들이 우리가 있고 좋아하는 사람 조금 있습니다. 다 합해봐야 1000명 될까요. 우리 공회를 좋아하고 알아주는 사람들이. 그런데 아무도 몰라줍니다. 더 땡겨서 백 목사님의 관련된 자료라든지 그분의 신앙의 교훈이라든지 이걸 정리하고 전하는 그 일에 대한 가치를 이걸 아는 사람이 제 눈에는 제대로 아는 사람 목사님 한 분입니다. 주변에 몇 사람 있을 것이고. 갸날프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작 본인은요. 이게 세계 최고다. 가치관이 다른 거지요. 가치관이 세상으로보니까 악령 마귀 시각 각도에서 보니까 연한 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대인들을 가르칠 때 나와 하나님은 하나다. 내가 하나님이다. 구주다. 당당히 외쳤습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알고나니까 사도들이 그렇게 주님을 알았지만 약해서 넘어졌다가 오순절 충만을 받고 난 다음에 주님을 구주로 메시아 그리스도로 하는데 일생을 다 바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고 구주다. 그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다. 정체를 바로 보는거지요.
그때 주님을 사람되어 오셨고 오늘 주님은 뭘로 되어오셨ㄷ고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명으로 바른 노선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때 주님을 어떻게 봤습니까. 잘 따라다녀봐야 얻어먹을 게 있을까. 돈 학벌 권세를 따라가고 다수 명예를 따라가야지 저러다가 죽을 건데 말씀 지켜서 뭐할려고, 학벌을 가져야지 권력을 가져야지. 말씀을 지키다가 계명 지키다가 옳은 길 가다가 무슨 길입니까. 좁은 길이죠. 좁은 길이니까 사람들이 찾지도 못하고 다 도망가버리지요. 넓은 길을 가야지. 다수를 따라가야지. 그래서 지금도 주님 닮은 교회 신앙의 노선 바로 걸어가면 세상 사람들은 연한 순처럼 봅니다. 마른 땅의 줄기처럼 봅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요 목 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담대함을 가지고 하는 겁니다.
바로 알아야합니다. 이것도 같이 기억하면서 이렇게 기록된 각도를 알아야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멸시를 받았는데 받았습니다. 주님 당하신 고난은 이것도 기억해야합니다. 주님이 고난을 받았습니까 안 받으셨습니까. 고난 받았지요. 멸시했고 천대했고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런데 주님은 그 멸시를 다 받았는데 먼지만큼도 영향과 피동되지 않았습니다. 초월이라는 말은 단계를 밟아서 넘어서는 걸 초월이라고 합니다. 단계를 밟아서 넘어가는 게 초월인데.
물이 끓으면 부글부글 끓어버립니다. 밑에서부터 차가운 물이 끓기까지 물의 온도가 차갑다가 0도 10도 20도 30도 40도 점점 뜨거워 마지막에 100도가 되면 폭발해버립니다. 이걸 가지고 초월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끓는 물은 초월과 같은 겁니다. 그래서 폭발이 달아올라가서 어느정도 한계에 올라가는 게 폭발입니다. 단계 과정을 거치지 않는 폭발은 없는 겁니다. 주님은 고난을 초월하셨기 때문에 고난을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주적인 고난을 가해졌는데 다 초월해서 아픈 고통 이게 없어져서 없어져버렸습니다. 물이 끓어서 폭발해버렸습니다. 주님 고난의 정도가 이해되어야하는데 가보진 못해도 이해가 되는 겁니다. 경제를 초월하는 사람 경제 초월하기 쉽지 않지요. 그냥 게흘러서 무능해서 잘못해서 없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실력있고 다 괜찮은데 돈에 대해서 피동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경제 때문에 영향받지 않는다. 그 사람을 아무리 긁어재껴도 아무리 긁어대도 그런 것에 영향받지 않고 피동되지 않으면 초월한 겁니다.
마음 속에 욕얻어먹는게 좋은 사람이 있습니까. 멸시를 하는데 멸시를 할 때 그 멸시를 당하면 피동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긁어재껴도 긁어지지 않으면 초월한 겁니다. 믿는 사람이 그래서 교회 안에서 장로님을 세울려면 교인들 두고 뺨도 때려보고 침도 뱉어보고 욕도 하고 그때 감정 없는 사람이 아닌데 어린 신앙들이 그런 것을 그냥 기쁨으로 감사로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장로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거지요. 우리 장로님 그렇게 되셨습니까. 목사는 더 해야겠지요. 그럴 때 목사가 내가 목사인데 하면 못하는 거지요. 주님이 고난 당하신 것은 아득하게 초월을 했습니다. 인성가진 주님인데 다 초월한 거지요. 그래서 그런 고난 속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찬송이 나오는 겁니다. 그 깨달음은 그런 것을 걸어가봤기 때문에 그런 것이 나오는 겁니다. 세계 역사에 이런 깨달음이 있을까. 백 목사님이 깨달았을 겁니다.
백 목사님은 나환자같이 살아보셨습니다. 우리같으면 냄새난다고 그럴 건데 초월할겁니다. 우리 고난은 3단계입니다. 가시적인 고난입니다. 문서에 기록된 가시적인 고난, 눈으로 볼 수 있는 고난. 사람이 알 수 있는 고난 사람들 수준에서 고난 외부적인 점에서 고난입니다. 피를 흘렸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게 가시적인 고난입니다. 외부 껍데기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 모든 죄를 다 대신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대화친의 고난. 부활의 고난까지. 모든 택자의 모든 것을 다 해내신 고난입니다. 이건 성령으로 깨달아 알아야합니다. 그 전부에 주관자가 조사자가 벌을 내리는 형벌자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법을 잘 아는 사람들 국회의원들 판사 검사들은 빠져나가는 구멍을 가장 잘 압니다. 정치판 치고 도둑질 안하는 사람들 어딨습니까. 빠져나가는 구멍은 아닙니다. 빠져나가는 구멍을 모르니까 걸리는거지요. 단 하나라도 한 순간이라도 있으면 대속이 됩니다. 인간의 언어로 형언 못하고 성령의 감동 아니면 못 느끼는 것이지요. 성찬식은 주님 죽으심에 동참하는 겁니다. 그 끝에 죽으심이 있습니다. 고난 끝에는 대개 바른 고난 끝에는 뭐가 있다고요. 고진감래라고 했습니까. 고진 게 다 가면 슬픈 게 옵니다. 전도서 7장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다. 이걸 병행한다는 겁니다. 고난이 통과하고 나면 기쁨이 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낙심하면 끝까지 갑니다. 스스로 주저앉아버렸으니까. 그러면 고난은 지납니다. 기쁨도 있다가 지나가버리면 알지. 주님 고난에 동참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고난으로 하는 겁니다. 고난 넘어 죽으심은 소망이 있습니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