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6일 금밤
김동민2024-12-06조회 94추천 14
2024년 12월 6일 금밤
찬송: 117장, 116장
본문: 열왕기하 2장 1절
오류 발생 시 첨부 파일 참조 바랍니다.
지난 주간에는 우리의 그릇을 키우자, 신앙의 그릇 사람의 그릇, 신앙의 그릇인데 그 그릇이 신앙을 담는 그릇이었습니다. 아내가 두 아들과 함께 했었고 빚을 담보로해서 종으로 삼고자 할 때 엘리야에게 와서 고했는데 그릇을 빌려라, 최대한 많이, 있는대로 빌려라. 안에 들어가서 그릇을 담고 그랬습니다. 그릇을 가져오거라, 그릇이 없나이다. 기름이 그쳤더라. 성경의 기름은 같은 단어라든지 또 기록된 물질이라도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구약에 제사지낼 때 기름은 내장 속에 좋은 것들을 의미하고 전체적으로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기름을 다 치우고 나서 엘리사에게 구하고 나니까 남은 것으로 생활을 하라, 믿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기본구원으로 하는 죄는 다 해결이 되어졌고 계속되어 살아갈 때 타락한 세상이고 예수님께서 아담이 마귀에게 패전한 것을 예수님의 대속으로 택자들에게는 마귀가 왕 노릇을 못하고 왕권을 가지지 못하나, 전체적으로 이 세상의 왕은 마귀가 임금입니다.
마귀는 거짓말 하는 자고 거짓말하는 자의 애비가 마귀입니다.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대속 입은 사람이 살아갈 때는 끊임없이 죄를 짓게 합니다. 왜 그러게 할까요.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수입이 무엇입니가.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귀가 얻는 수입이 무엇입니까. 마귀 부하가 되는 것입니다. 뺏어서 제 것 삼으려고 마귀도 666이고 하나님 다음으로 계산도 철저하고 영리를 따지는 놈이라서 헛된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어야 죄의 부하가 되니까. 마귀는 계산에 철저합니다. 굉장히 잘 압니다. 때려서 죄 지을 사람은 때리고 기다려서 죄 지을 사람은 기다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믿는 성도들 죄를 짓게 하는 겁니다. 그런 마귀의 역사가 가득차서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의를 행하고. 그러나 그 진리 위에 영감이 있어야 죄를 이기지 말아야, 대속을 입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영감에 성령에 대해 말씀을 한 것이고 이번 주간에 영감을 향해 가는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의 최종, 신앙의 성공, 신앙의 절정은 영감이라고 말할 수 있고 감화감동, 성령의 감화, 성령의 감동, 붙이면 성령의 감화감동, 일곱글자를 두 글자로 줄이면 감화감동이라고 합니다. 감자가 느낄 감자입니다. 마음의 작용입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역사할 때 영감 역사가 되는 겁니다. 엘리야도 엘리사도 꼭 같은 사람입니다. 사람인데 우리와 다른 사람입니다. 엘리야도 사람인데 엘리사가 볼 때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지켰습니다. 꼭 같은 사람은데 엘리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도 나중에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으로, 사람을 초월한 그런 깨달음 그런 믿음을 걸어간 사람들이 엘리사고 엘리야고 사도 바울입니다.
이걸 가르쳐 마태복음 보면 겨자씨를 심어놨는데 나물이 점점 자라니까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 공중에 새들이 이 가지에 깃들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뭘 가르치느냐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영감이 붙들리면 초인간적인 사람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같은 사람일지라도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이 되는 거 지식적으로도 초월하고 깨달음도 초월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신 분량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이고 제안하면 안되는 것이고 우리들은 어디까지든지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보고 따라가듯이 앞선 종들을 보면서 따라가는 우리가 되어야되겠다는 겁니다. 엘리야의 신앙 생애는 걸음과 엘리사의 걸음과 엘리야의 신앙과 그런 것이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였는데 엘리사를 따라가서 영감에 붙들렸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누구를 상징한다고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엘리사인데 목표는 엘리야를 따라간 엘리사가 뒤에 보니까 엘리야가 됐습니다.
그것처럼 주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방향이고 성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과정, 앞서간 엘리야의 걸음 지능들 통해서 가르치는데 옛날 지도에 보면 길갈과 베델과 여리고와 요단은 요단강이 제일 앞에 있습니다. 요단강 건너서 들어갔는데 가나안 첫 땅이 길갈입니다. 베델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습니다. 길갈 다음에 여리고를 점령하니까 베델보다 더 가까이 되어있습니다. 기록은 길갈에서 출발해서 거리적으로 가까운 것을 간 게 아니고 신앙적으로 걸어갔다. 길갈에서 가깝기는 여리고를 가까운데 그 다음 간 곳이 베델입니다. 이리 가서 이리 가는 겁니다. 이리 와서 이리 와서 이리 건너갑니다. 지도상의 구조는 위치는 그리되어있는데 거리나 위치 따라서 간 것이 아니고 신앙의 발점으로 가는 것이다.
성전지은 산 이름, 모리아산입니다. 뭐하는 곳입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곳입니다. 그곳에 성전을 짓습니다. 아브라함은 전혀 몰랐고 이삭은 몰랐고 뒤에 가보니까 성전 짓는 장소였습니다. 성전은 모리아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제사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거 갈 때 베델에 이르러서 베델에 가서 제사를 지나라고 합니다. 그 베델입니다. 거기는 들어가있는데 거기서 여리고로 갑니다. 여리고에서 요단강 건너서 갑니다. 지역을 가지고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지 위치적인 것입니다. 참고로 기억하면 됩니다.
이세벨에게 쫓겨서 광야로 간 곳이 어디로 갔느냐, 산이 있습니다. 이세벨이 바알 선지 엘리야가 450명 죽였다는 소리 듣고 내가 너를 반듯이 죽인다 하니까 엘리야가 도망을 치는데 혼자서 외롭게 도망을 칩니다. 자고 일어나니까 떡과 고기가 있고 능력으로 도망쳐서 무슨 산까지 도망칩니까. 성경을 알아야 말씀을 통하죠. 공부한 학생들이 교과서를 모르면 0점입니다. 성경을 안 읽는 사람들, 신앙생활을 포기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 공회는 목회자는 성경 100독이 첫째 조건입니다. 하루에 세 장씩 읽으면 1년에 한 독 되지요. 하루에 60장 읽으면 1년에 10독이 되겠지요. 매일 그것도 읽을 수 있을 때 일어야 합니다. 아니면 못 읽습니다. 교과서 모르면 안되는 것이고 법을 가지는 사람들이 법을 모르면 안되는거지요. 원리가 그런 겁니다. 성경 믿는 사람에게 성경이 가장 중요합니다. 실행을 하고 안하고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엘리야가 이세벨 피해서 도망간 곳이 뭐하는 곳이라고요. 다른 이름으로는요. 굴해서 희미한 음성을 듣고 사명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도 계명받은 모세가 지내서 받은 신앙의 산.
거기서 세밀한 음성을 들었고 우리는 멀리 아무리봐도 혜안이 있고 그래도 사람의 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영원토록 예정 속에 지내시는 건데 자기로써 자기 현실에게서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된 길로 인도되신다는 것이 약속입니다. 여기서 이런 꾀를 파고 저런 꾀를 파고 그래서 어떻게 되셨다고요.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되셨다고요. 사람은 많은 꾀를 냈는데. 꾀는 잘되려고 성공하려고 그러는데 그게 제 꾀에 제가 빠지는 그 꾀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를 두고 서로 싸우니까 리브가가 싸웁니다 하니까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늦게 나오지만 장자가 될 거라고. 제 꾀에 제가 빠져서 그런 겁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아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 그래서 늘 말씀드리는대로 하나님은 어떻게 해야한다고요 진실로 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진실해야합니다. 말씀대로 이중 삼중 많이 파야 빠지고 마는 겁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길갈입니다. 베델인데 베델은 거리적으로 여리고보다 훨씬 더 멀고 신앙적으로 베델이고 요단입니다. 첫 번째 밟은 가나안인데 말하자면 본부를 차립니다. 길갈이 가나안 점령의 전초 기지입니다. 그래서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 여호수아가. 사령관 본부같은 곳입니다. 신앙의 출발점이고 신앙의 출발점이란 건설구원 신앙점이고 자기로써 실질적인 경험과 첫 은혜입니다. 부르심 받아 믿었는데 믿고 난 다음에 살아봄으로 받게 되는 역사, 길갈 신앙입니다. 그 체험 역사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임했다는 것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언제든지 이런 것을 하고 말을 하자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자기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게 있습니다. 신앙의 종자고 이게 없으면 힘이 없는 겁니다. 이게 신앙 생활도 그렇고 노선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볼 때 이게 확실히 옳아서 그런 걸 잡아야 견딜 수 있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뿌리가 약하고 비오고 바람불면 그러고 맙니다. 길갈이라는 곳은 신앙의 말하는 척 은혜고 달려갈 수 있는 터가 되는 길갈 신앙입니다. 자기 자신을 실제로 돌아봐야합니다.
이거는 영감도 그렇지만은 주일학생은 알기가 어려운 거지요. 주간이 뚜렷하게 의식 될 때 되는 겁니다. 정신을 잃은 사람은 의식이 없으니까 아파도 모르고 때려도 모르는 거지요. 자기 주관적인 주체성 자의사 이게 아직 어리기 때문에 빈약한겁니다. 자기의 주관적인 주체가 약하기 때문에 객관에 흔들리니까 그 속에 역사에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길갈 신앙 베델 신앙이 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게 그거구나 깨닫게 됩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니까 있더라, 자기 주관이 느끼는 겁니다. 그 받은 은혜를 붙들고 그 생활을 진실하게 해나가면 그게 바로 베델 신앙으로 되게 되는 겁니다. 말씀지켜서 하는 거 보니까 믿음으로 힘써서 애를 써보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뭔가를 받게되고 힘을쓰다보면 베델 신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점진적으로. 베델 오지만은 생활입니다. 베델 생활입니다. 성경 역사도 교회 역사도 세상 역사도 단칼에 무 자르듯이 우리나라 말하면 옛날에 역사로 국사로 고조선 삼국 후삼국 고려 조선 이렇게 자르지만 그게 그렇게 되어지나 어디부터가 고조선 시대고 삼국시대고 그거는 그 사이에 공간이 기간이 다 있는 겁니다. 딱 자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신앙생활이라는 것도 경계가 있습니다.
지역 경계는 생활이기 때문에 길갈 생활과 베델 생활은 자르는 게 아니라 길갈 생활을 진실하게 나가면 베델 신앙이 되는 겁니다. 베델 신앙은 바쳐서 하는 생활이고 믿는 사람의 생활은 중심 예배시간인데 언제가 예배생활입니까.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려라. 그게 예배 생활입니다. 새벽기도 나오고 그런 것으로 예배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베델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같은 베델 생활이라도 사람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개인도 같은 사람이 주일을 지켜도 지난 주에 주일 지키는 것과 이번 주에 지키는 것과 다릅니다. 은혜도 준비도 다릅니다. 생활에도 같은 사람의 생활에도 다릅니다. 말씀으로 진실하게 있는 일 말해서 베델 생활이 서서히 여리고 생활이 되어져 가는 겁니다.
여리고 생활은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능력은 외부적으로 내부적으로 나타나는 게 있는데 그 능력의 절정이 표적입니다. 하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사람을 통해 나타나고 그게 표적인데 뜻을 담아서 하는 게 표적인데 그게 오늘 새벽에 말씀드렸을까요.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무슨 표적, 요나의 표적. 피노키오, 거짓말하면 코가 자랍니다. 피노키오가 어디 갑니까. 고래 뱃속에 들어가지요. 피노키오는 목재 인간이라서 안 녹았는지 모르겠으나 사람이든 짐승이든 산이 나와가지고 얼마나 독하든지.
그게 표적의 마지막 최종 절정이고 기적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길갈을 출발해서 베델 신앙으로 올라가고 여리고 신앙으로 올라가면 능력이 나타나는데 그 절정이 뭐냐 대속의 사랑으로 되는 겁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면 지키는 줄 아는데 그런 줄 아는 겁니다. 죄악의 악습에 메여있던 사람이 희안하게 죄를 이겨냅니다. 그게 능력입니다. 영감의 능력, 그게 목표입니다. 광야 40년 살면서 40년 동안 뭐먹고 살았습니까. 40년동안 이스라엘이 뭐 먹고 살았죠 만나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 어디서 나온겁니까. 누가 만들어준거지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실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런 거 다 보고도 예수님 못박아 죽였습니다. 만나 메추라기 먹고도 들어가라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게 표적 기적입니다. 백날 봐봐야 헛일입니다. 그런데 그 목표는 나를 고치는 겁니다. 이게 표적 능력의 절정입니다. 그래서 여리고의 능력이 바로 이런 겁니다. 거기 머물면 안되고 그때그때 매 현실마다 사건마다 목숨 지키는 생활, 그게 될 때 완전히 변화시키는, 우리 신앙의 최종 목적도 전부 영감을 향해 가는 신앙이 진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께서 내가 가면 보혜를 보낸다. 그게 성령이고 역사가 바로 영감입니다. 이게 우리 구원의 전부가 되는 겁니다. 좀 생각해보십시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
찬송: 117장, 116장
본문: 열왕기하 2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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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는 우리의 그릇을 키우자, 신앙의 그릇 사람의 그릇, 신앙의 그릇인데 그 그릇이 신앙을 담는 그릇이었습니다. 아내가 두 아들과 함께 했었고 빚을 담보로해서 종으로 삼고자 할 때 엘리야에게 와서 고했는데 그릇을 빌려라, 최대한 많이, 있는대로 빌려라. 안에 들어가서 그릇을 담고 그랬습니다. 그릇을 가져오거라, 그릇이 없나이다. 기름이 그쳤더라. 성경의 기름은 같은 단어라든지 또 기록된 물질이라도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구약에 제사지낼 때 기름은 내장 속에 좋은 것들을 의미하고 전체적으로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기름을 다 치우고 나서 엘리사에게 구하고 나니까 남은 것으로 생활을 하라, 믿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기본구원으로 하는 죄는 다 해결이 되어졌고 계속되어 살아갈 때 타락한 세상이고 예수님께서 아담이 마귀에게 패전한 것을 예수님의 대속으로 택자들에게는 마귀가 왕 노릇을 못하고 왕권을 가지지 못하나, 전체적으로 이 세상의 왕은 마귀가 임금입니다.
마귀는 거짓말 하는 자고 거짓말하는 자의 애비가 마귀입니다.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대속 입은 사람이 살아갈 때는 끊임없이 죄를 짓게 합니다. 왜 그러게 할까요.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수입이 무엇입니가. 믿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귀가 얻는 수입이 무엇입니까. 마귀 부하가 되는 것입니다. 뺏어서 제 것 삼으려고 마귀도 666이고 하나님 다음으로 계산도 철저하고 영리를 따지는 놈이라서 헛된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지어야 죄의 부하가 되니까. 마귀는 계산에 철저합니다. 굉장히 잘 압니다. 때려서 죄 지을 사람은 때리고 기다려서 죄 지을 사람은 기다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믿는 성도들 죄를 짓게 하는 겁니다. 그런 마귀의 역사가 가득차서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의를 행하고. 그러나 그 진리 위에 영감이 있어야 죄를 이기지 말아야, 대속을 입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영감에 성령에 대해 말씀을 한 것이고 이번 주간에 영감을 향해 가는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의 최종, 신앙의 성공, 신앙의 절정은 영감이라고 말할 수 있고 감화감동, 성령의 감화, 성령의 감동, 붙이면 성령의 감화감동, 일곱글자를 두 글자로 줄이면 감화감동이라고 합니다. 감자가 느낄 감자입니다. 마음의 작용입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역사할 때 영감 역사가 되는 겁니다. 엘리야도 엘리사도 꼭 같은 사람입니다. 사람인데 우리와 다른 사람입니다. 엘리야도 사람인데 엘리사가 볼 때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지켰습니다. 꼭 같은 사람은데 엘리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도 나중에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으로, 사람을 초월한 그런 깨달음 그런 믿음을 걸어간 사람들이 엘리사고 엘리야고 사도 바울입니다.
이걸 가르쳐 마태복음 보면 겨자씨를 심어놨는데 나물이 점점 자라니까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 공중에 새들이 이 가지에 깃들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뭘 가르치느냐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영감이 붙들리면 초인간적인 사람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같은 사람일지라도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이 되는 거 지식적으로도 초월하고 깨달음도 초월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신 분량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이고 제안하면 안되는 것이고 우리들은 어디까지든지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보고 따라가듯이 앞선 종들을 보면서 따라가는 우리가 되어야되겠다는 겁니다. 엘리야의 신앙 생애는 걸음과 엘리사의 걸음과 엘리야의 신앙과 그런 것이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였는데 엘리사를 따라가서 영감에 붙들렸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누구를 상징한다고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엘리사인데 목표는 엘리야를 따라간 엘리사가 뒤에 보니까 엘리야가 됐습니다.
그것처럼 주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방향이고 성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과정, 앞서간 엘리야의 걸음 지능들 통해서 가르치는데 옛날 지도에 보면 길갈과 베델과 여리고와 요단은 요단강이 제일 앞에 있습니다. 요단강 건너서 들어갔는데 가나안 첫 땅이 길갈입니다. 베델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습니다. 길갈 다음에 여리고를 점령하니까 베델보다 더 가까이 되어있습니다. 기록은 길갈에서 출발해서 거리적으로 가까운 것을 간 게 아니고 신앙적으로 걸어갔다. 길갈에서 가깝기는 여리고를 가까운데 그 다음 간 곳이 베델입니다. 이리 가서 이리 가는 겁니다. 이리 와서 이리 와서 이리 건너갑니다. 지도상의 구조는 위치는 그리되어있는데 거리나 위치 따라서 간 것이 아니고 신앙의 발점으로 가는 것이다.
성전지은 산 이름, 모리아산입니다. 뭐하는 곳입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곳입니다. 그곳에 성전을 짓습니다. 아브라함은 전혀 몰랐고 이삭은 몰랐고 뒤에 가보니까 성전 짓는 장소였습니다. 성전은 모리아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제사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거 갈 때 베델에 이르러서 베델에 가서 제사를 지나라고 합니다. 그 베델입니다. 거기는 들어가있는데 거기서 여리고로 갑니다. 여리고에서 요단강 건너서 갑니다. 지역을 가지고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지 위치적인 것입니다. 참고로 기억하면 됩니다.
이세벨에게 쫓겨서 광야로 간 곳이 어디로 갔느냐, 산이 있습니다. 이세벨이 바알 선지 엘리야가 450명 죽였다는 소리 듣고 내가 너를 반듯이 죽인다 하니까 엘리야가 도망을 치는데 혼자서 외롭게 도망을 칩니다. 자고 일어나니까 떡과 고기가 있고 능력으로 도망쳐서 무슨 산까지 도망칩니까. 성경을 알아야 말씀을 통하죠. 공부한 학생들이 교과서를 모르면 0점입니다. 성경을 안 읽는 사람들, 신앙생활을 포기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 공회는 목회자는 성경 100독이 첫째 조건입니다. 하루에 세 장씩 읽으면 1년에 한 독 되지요. 하루에 60장 읽으면 1년에 10독이 되겠지요. 매일 그것도 읽을 수 있을 때 일어야 합니다. 아니면 못 읽습니다. 교과서 모르면 안되는 것이고 법을 가지는 사람들이 법을 모르면 안되는거지요. 원리가 그런 겁니다. 성경 믿는 사람에게 성경이 가장 중요합니다. 실행을 하고 안하고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엘리야가 이세벨 피해서 도망간 곳이 뭐하는 곳이라고요. 다른 이름으로는요. 굴해서 희미한 음성을 듣고 사명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도 계명받은 모세가 지내서 받은 신앙의 산.
거기서 세밀한 음성을 들었고 우리는 멀리 아무리봐도 혜안이 있고 그래도 사람의 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영원토록 예정 속에 지내시는 건데 자기로써 자기 현실에게서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된 길로 인도되신다는 것이 약속입니다. 여기서 이런 꾀를 파고 저런 꾀를 파고 그래서 어떻게 되셨다고요.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되셨다고요. 사람은 많은 꾀를 냈는데. 꾀는 잘되려고 성공하려고 그러는데 그게 제 꾀에 제가 빠지는 그 꾀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를 두고 서로 싸우니까 리브가가 싸웁니다 하니까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늦게 나오지만 장자가 될 거라고. 제 꾀에 제가 빠져서 그런 겁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아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 그래서 늘 말씀드리는대로 하나님은 어떻게 해야한다고요 진실로 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진실해야합니다. 말씀대로 이중 삼중 많이 파야 빠지고 마는 겁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길갈입니다. 베델인데 베델은 거리적으로 여리고보다 훨씬 더 멀고 신앙적으로 베델이고 요단입니다. 첫 번째 밟은 가나안인데 말하자면 본부를 차립니다. 길갈이 가나안 점령의 전초 기지입니다. 그래서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 여호수아가. 사령관 본부같은 곳입니다. 신앙의 출발점이고 신앙의 출발점이란 건설구원 신앙점이고 자기로써 실질적인 경험과 첫 은혜입니다. 부르심 받아 믿었는데 믿고 난 다음에 살아봄으로 받게 되는 역사, 길갈 신앙입니다. 그 체험 역사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임했다는 것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언제든지 이런 것을 하고 말을 하자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자기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게 있습니다. 신앙의 종자고 이게 없으면 힘이 없는 겁니다. 이게 신앙 생활도 그렇고 노선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볼 때 이게 확실히 옳아서 그런 걸 잡아야 견딜 수 있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뿌리가 약하고 비오고 바람불면 그러고 맙니다. 길갈이라는 곳은 신앙의 말하는 척 은혜고 달려갈 수 있는 터가 되는 길갈 신앙입니다. 자기 자신을 실제로 돌아봐야합니다.
이거는 영감도 그렇지만은 주일학생은 알기가 어려운 거지요. 주간이 뚜렷하게 의식 될 때 되는 겁니다. 정신을 잃은 사람은 의식이 없으니까 아파도 모르고 때려도 모르는 거지요. 자기 주관적인 주체성 자의사 이게 아직 어리기 때문에 빈약한겁니다. 자기의 주관적인 주체가 약하기 때문에 객관에 흔들리니까 그 속에 역사에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길갈 신앙 베델 신앙이 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게 그거구나 깨닫게 됩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니까 있더라, 자기 주관이 느끼는 겁니다. 그 받은 은혜를 붙들고 그 생활을 진실하게 해나가면 그게 바로 베델 신앙으로 되게 되는 겁니다. 말씀지켜서 하는 거 보니까 믿음으로 힘써서 애를 써보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뭔가를 받게되고 힘을쓰다보면 베델 신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점진적으로. 베델 오지만은 생활입니다. 베델 생활입니다. 성경 역사도 교회 역사도 세상 역사도 단칼에 무 자르듯이 우리나라 말하면 옛날에 역사로 국사로 고조선 삼국 후삼국 고려 조선 이렇게 자르지만 그게 그렇게 되어지나 어디부터가 고조선 시대고 삼국시대고 그거는 그 사이에 공간이 기간이 다 있는 겁니다. 딱 자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신앙생활이라는 것도 경계가 있습니다.
지역 경계는 생활이기 때문에 길갈 생활과 베델 생활은 자르는 게 아니라 길갈 생활을 진실하게 나가면 베델 신앙이 되는 겁니다. 베델 신앙은 바쳐서 하는 생활이고 믿는 사람의 생활은 중심 예배시간인데 언제가 예배생활입니까.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려라. 그게 예배 생활입니다. 새벽기도 나오고 그런 것으로 예배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베델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같은 베델 생활이라도 사람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개인도 같은 사람이 주일을 지켜도 지난 주에 주일 지키는 것과 이번 주에 지키는 것과 다릅니다. 은혜도 준비도 다릅니다. 생활에도 같은 사람의 생활에도 다릅니다. 말씀으로 진실하게 있는 일 말해서 베델 생활이 서서히 여리고 생활이 되어져 가는 겁니다.
여리고 생활은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능력은 외부적으로 내부적으로 나타나는 게 있는데 그 능력의 절정이 표적입니다. 하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사람을 통해 나타나고 그게 표적인데 뜻을 담아서 하는 게 표적인데 그게 오늘 새벽에 말씀드렸을까요.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무슨 표적, 요나의 표적. 피노키오, 거짓말하면 코가 자랍니다. 피노키오가 어디 갑니까. 고래 뱃속에 들어가지요. 피노키오는 목재 인간이라서 안 녹았는지 모르겠으나 사람이든 짐승이든 산이 나와가지고 얼마나 독하든지.
그게 표적의 마지막 최종 절정이고 기적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길갈을 출발해서 베델 신앙으로 올라가고 여리고 신앙으로 올라가면 능력이 나타나는데 그 절정이 뭐냐 대속의 사랑으로 되는 겁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면 지키는 줄 아는데 그런 줄 아는 겁니다. 죄악의 악습에 메여있던 사람이 희안하게 죄를 이겨냅니다. 그게 능력입니다. 영감의 능력, 그게 목표입니다. 광야 40년 살면서 40년 동안 뭐먹고 살았습니까. 40년동안 이스라엘이 뭐 먹고 살았죠 만나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 어디서 나온겁니까. 누가 만들어준거지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실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런 거 다 보고도 예수님 못박아 죽였습니다. 만나 메추라기 먹고도 들어가라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게 표적 기적입니다. 백날 봐봐야 헛일입니다. 그런데 그 목표는 나를 고치는 겁니다. 이게 표적 능력의 절정입니다. 그래서 여리고의 능력이 바로 이런 겁니다. 거기 머물면 안되고 그때그때 매 현실마다 사건마다 목숨 지키는 생활, 그게 될 때 완전히 변화시키는, 우리 신앙의 최종 목적도 전부 영감을 향해 가는 신앙이 진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께서 내가 가면 보혜를 보낸다. 그게 성령이고 역사가 바로 영감입니다. 이게 우리 구원의 전부가 되는 겁니다. 좀 생각해보십시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