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4일 수밤
김동민2024-07-24조회 135추천 21
2024년 7월 24일 수밤
찬송: 145장, 170장
본문: 시편 61편 1절
오류 발생 시 첨부파일 참조 바랍니다.
시편 150편 중에서 다윗의 시가 절반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73편 정도 된다고 하는데 세밀하게 보면 좀 넘지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시라는 것은 여러번 말씀드리는대로 시인이 사람에 대해서도 사물에 대해서도 자연 만물이든지 살아오면서 자기의 여러 가지 남다르게 느낀 말하자면 사람의 행동이라든지 인품이라든지 활동이라든지 언행이라든지 또 어떤 사물을 보고 자기가 깨달은 그런 것들을 캐내서 밝히는 것, 이걸 시라고 합니다. 시라는 속에는 시인의 사상과 정신과 지식과 깨달음과 느낌과 이성과 이런 거 때문에 들어있는 게 시입니다. 그림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책도 글도 그러하고 글 쓴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글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사람이란 읽는 것에 피동되고 영향받는 것이 사람입니다. 시도 그런 면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고 영향이 되어집니다. 욥기 시편 잡언 전도서 아가서까지가 시가서로 분류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게 시편입니다. 시편은 시를 모아놓은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백 목사님도 시를 몇 개 지으셨습니다. 공회 찬송가에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부르면 그럴 수 있고 찬송가에 있는 그런 것들을 시를 붙인게 찬송가고 요즘 유행가는 시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갖다붙인 거라서 그럴 수 있고 옛날 노래들은 시에다가 곡을 붙인 게 옛날 노래들입니다.
그런데 시를 다른 세상적인 시 말고 성경의 시편이라든지 욥기 잠언 전도서나 아가서나 그런 거 신앙생활 하면서 백 목사님이 지은 그런 시를 그에 대한 여러 시가 많이 있는데 시를 지을 때는 시를 지어보면 아시겠지만 동시짓기 해봤을 건데 시에 보면 쉽지 않습니다. 상당히 어렵거든요. 깊이 들어가서 시를 짓는 것은 매우 어렵고 신앙적인 시들은 짓고 싶다고 쓰고 싶다고 써지는 게 아닙니다. 신앙적인 시를 기록한 그런 분들은 성령에 붙들려서 쓴 겁니다. 찬송가도 시인데 제 2의 성경이라고 할 만큼 경험과 많은 것들이 들어있는 게 찬송 가사입니다. 억지로 할 건 없고 한 때는 저는 시를 지어보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신앙적인 시를 느낌으로 적어보자 그럴 때는 신앙이 깨어있는 때입니다. 신앙시는 자기가 깊이 신앙 생활을 하지 않으면 느낌이 없으면 안되기 때문에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 시를 쓸 수 있을 정도는 깊은 신앙에 들어가야하고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해야하는 겁니다. 다윗이 많은 시편을 기록한 건 깊은 건데 좋은 교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적인 시를 쓰면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뒤에 가서 보면은 과거에 지은 그 시가 뒤에가서 보면 유치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신앙의 정도가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참고하시는 거고 다윗이 많은 시를 지은 것처럼 우리 믿는 사람도 이런 신앙적인 고백 경험 깨달음을 많이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공과 본문을 가지고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다윗의 시고 여두둔, 여두둔은 사람의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찬송가 작곡가, 선견자라고 합니다. 아주 음악을 상당히 잘한, 다윗의 시대에 문지기가 상당히 많았고 여두둔은 대표되는 사람으로 지휘자도 되고 그런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법칙에 따라서 노래를 해라.
마음의 깊은 부분, 공간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깊이로 표현할 수 없으나 아주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그런 골방이라고 하면 옛날부터 깊이 있는 방입니다. 에스겔 성전에도 이게 있는데 솔로몬 성전과 비슷하게 있는데 이건 3층으로 올라가는데 일반적으로 골방이라고 하면 숨어있는 것이라서 깊이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피조물 다 단절하고. 영혼이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그런 가사, 이런 걸 의미합니다. 깊은 곳에서 마음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잠잠하게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깊은 물속에 들어간 것을 말합니다. 물 속에 바다 물속에 들어가면 잠잠한게 있지 않습니까. 잠잠하고 고요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 고요한,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요. 빈 깡통은 요란하고 빈 수레는 요랑합니다. 깡통이라도 그 안에 물을 가득 채어놓으면 때리면 소리가 안 납니다. 모래로 채워 넣으면 땡하는 소리가 안 나옵니다. 수레가 묵직하면 벌컥거리지 않습니다. 트럭도 그렇습니다. 안에 뭐가 들었기 때문에. 사람이 마음 속에 든 게 없고 그렇게 지식이라는 것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지식이 무슨 뜻입니까. 알 지자 알 식자입니다. 모든 사물을 아는 걸 지식이라고 합니다. 알려면 뭘 해야합니까. 배워야합니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합니다. 한자 공부도 영어 공부도 필요합니다. 이게 많이 들어가면 무형의 것인데 뇌가 무거워진다 머리가 좋다고 합니다. 지식이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에 생각을 많이하고 담아놓은 사람은 무형이지만은 무거운 거지요.
많이 읽고 듣고 그런 지성인들은 말을 함부로 안합니다. 행동을 함부로 안합니다. 한문 글자로 뭐라고 합니까. 조심스렇게 따져보고 계산해보고 받아들인 것인가 돌리는 거지요. 386컴퓨터 압니까. 586컴퓨터는 압니까. 386 586컴퓨터가 있었습니다. 그 386 486이 용량이 적은거지요. 느리고 빨리 못 돌립니다. 요즘 컴퓨터는 어마어마하게 발전이 빨리 된 거지요. 그 대신에 돌리기 때문에 행동은 굉장히 더딥니다. 그래서 이걸 다 계산해서 하는 것 가지고 신중하다고 합니다. 진중하다라고 하고 또 살펴보고 그렇게 움직이는 게 실수가 적은 겁니다. 마음인데 어떤 마음이라고요, 영과 가까이 있다는 말은 그런 겁니다. 바다 속 깊이 들어갈수록 나의 영혼이 하나님만 바라며 고요하게 바랍니다. 그에게서 나는도다. 의사는 구원과 의원 의사는 통합니다. 구원이라는 말과 건진다는 말과 살린다는 말은 서로 다 같은 맥락이 있는 거지요. 물에 빠진 사람을 살려내야합니다. 환란당한 사람도 건져내야합니다. 병든 사람은 치료해야합니다. 구원을 말한 거 보니까 필요한 겁니다. 이 시인이 구원을 말한 거 보니까 구원할 자가 누구냐, 날 구원하신 예수를 하나님만 나의 구원이다. 이걸 깨달았고 단순히 지식으로 깨달은 게 아니고 구원이 주님에게 있고 하나님께 있는 거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느껴지지 않으면 와닿지 않는 것이고 직접 신앙이라는 것은 아이들의 공부라는 것은 필기 시험 수능 시험 가는데 부모님이 대학교 교수라도 그 시험치르는 건 부모님이 대신 가 줄 수 없는 겁니다. 설사 대리시험 쳤다고 해도 부모님의 실력이지 제 실력은 아닌겁니다. 그래서 건설구원은 필수적입니다. 내가 안하면 안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가르치고 우리에게 하여금 만드시기 위해서 이게 가장 큰 중요한 게 타락이 필요하고 죄가 필요하고 어마어마한 희생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며 내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사실을 안 겪어보면 안 믿어지는 겁니다. 지금의 음식이 많으니까 고급 음식 상어 지느러미 들어보셨습니까. 그런 음식 있지요. 제비집, 제가 아는 제비는 하늘 날아다니는 집이고 그것도 음식 이름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오니까 새벽에 소리나는데 고기 파는 소리가 나는데 무슨 고기 사라고 합니까. 고래고기 파소 합니다. 그때 아주머니들 많이 팔았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래고기 맛은 모릅니다. 내가 먹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고 섣불리 찾을 수 없는 거지요. 하나님의 구원을 내가 안 받아보면 그런 겁니다. 다윗은 어릴 때부터 그런 겁니다. 공을 집고 아무리 힘세도 사람이 곰을 이기는 건 불가능한데.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은 경험에서 쌓이는 것이고 사람마다 다른 건데 첫째 말씀대로 자기 현실에 순종해야하고 자기 주관에 자기 계산이 들어가면 안되는 겁니다. 순종을 한 다음에 그 다음 역사를 살펴봐야합니다. 단 시간에 되는 게 아니고 다 따져보는 겁니다. 우연이냐 그런 것이냐 다 따져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다. 나올 때 그래서 따져보고 따져봐서 하나님이 하지 않으면 이렇게 될 수 없는거다 할 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태산이 높아도 올라가보지도 않고 산만 높다고 하는 것처럼.
다윗은 실제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환란 당해도. 30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에게 쫓길 때는 20대 초중반이라는 말입니다. 장신형 선생님 20대 초반입니까. 좀 더 많았을지 몰라도 그때 즈음 사울에게 쫓겨 다녔습니다. 그럴 때 사울에 대한 복수의 기회가 있어도 하나님께 맡겨놨죠, 환란이 닥쳤을 때 잔잔하게 하나님만 바라보는 거지요. 어려움 닥쳤을 때 할 일 하고 마지막에 하나님게 맡겨 놓는 겁니다. 그럴 때 믿는 사람은 마음이 잠잠할 수 있고 믿음이 경험치만큼 쌓일 때 구원이 난다는게 체험적으로 쌓이게 되고 환란 구원 만날 때 영원히 잠잠할 수 있는 겁니다. 안에 뭐가 들어있어야 고요하게 되는 거지. 안에 꽉 들어있어야 비바람 몰아쳐도 잠잠한 영혼입니다. 2절, 이어집니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하나님만 주님만 다른 존재는 없다. 구원은 주님에게 없고 반석과 구원은 하나님 뿐이다. 오직 하나님만 나의 반석이시오. 사람도 믿어보고 보니까 성경 전체의 위인 중에서 오래 산 사람은 아닌데 세월 속에 우리도 겪어보잖습니까. 이런 걸 살펴보는 게 중요하고 신앙생활 하면서 자기가 신앙생활하고 자기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살피면서 자기 사람들도 살피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사람이라던지 정치를 잘해서 말하는 게 아니고 정치가 눈에 보이는 겁니다. 세상과 시대가 보이는 겁니다. 그런 걸 두고 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도 살펴보니 사람 어떤 사람 재주있는 사람 건강한 사람 배경 좋은 사람 다 부질없는 짓이고 허무한 거다. 믿을 수 없다. 재물 있다가 없어지는거다. 건강 하루 아침에 가는 거다. 그런 걸 따져보니까 오직 하나님만 눈에 안 보이는데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기 때문에 그분이 어떤 분인지 따져보는 거지요. 자존자인데 창조주다. 입에 그냥 붙은 말 하고 자기대로 그 말의 뜻을 하는 거하고 생각만해도 차원이 틀립니다. 자기가 그분에 대한 걸 생각해보는 건 다른 차이입니다.
주권자, 자존자가 무슨 뜻이지. 그런데 안 배웠습니다. 그 말의 뜻을 가지고 제가 생각해봤습니다. 자존자에 대한 성경은 제가 깨닫고 하는 겁니다. 설교록을 바탕으로 해서 배웠지만. 스스스로 자자 있을 존자. 하나하나 다 그래서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따져보면 그렇습니다. 권력도 배경도 다 흥한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분만 다 반석이다. 기초, 터, 근본, 뿌리 원인과 원동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겁니다. 그분만이 나의 배경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울에게 두 번이나 완벽하게 원수 갚을 기회가 있겠지만 내가 하지 않겠다. 그 분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옆에서는 기회입니다. 이러는데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백 목사님께서 믿을 때 안 믿는 사람들이 백 목사님한테 그 동네가 그랬답니다. 예수 믿으면 다 망했답니다. 멀쩡한 가정이 다 망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망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좋은 청년 망하겠네 그렇게 했는데 속으로 좋았답니다. 예수믿으면 망한다고 계속 말해라, 그러면 하나님 들으실 거니까 그거 두고보면 알겠지. 그러니까 그 마을에 예수 믿어 망한 사람은 왜 망했습니까. 예수를 믿어도 더럽게 잘못 믿은겁니다. 바로 믿어봐라 망하는가.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 되지요. 백 목사님이 고향 마을 가면 받들어 모십니다. 어떤 분인지 아니까. 이런 것이 말하자면 하나님 듣도록, 그분이 계신다. 내가 받는 고난이 나 때문이다. 그러면 회개하면 됩니다. 내가 특별한 죄가 없는데 당신이 보고 계시겠지. 이게 반석입니다. 반석으로 삼는거지요. 다른 존재는 이럴 수가 없는 거지요. 저는 나의 반석이시오, 주님 뿐입니다. 건질 뿐입니다. 누가 건지겠습니까. 중국의 화타라는 의사가 있었다는데 아무리 명의라도 다 고칠 수 없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고난 사건 사고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만 초월해서 그렇습니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라. 안 믿어져도 이렇게 생각하면 종교는 가지는 게 좋지 손해볼 건 없습니다. 그분만 나의 구원입니다. 그분은 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하지 못하는 곳이 없고 그분만 나의 산성이시고 피난처고 안식처입니다. 이분을 믿으면 나의 반석과 구원과 산성이 되어주시는 것이고 아무리 계셔도 나하고 상관이 없는 겁니다. 진수성찬 차려도 안 먹으면 내 배가 불러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하나님의 되는 겁니다.
3절 4절은 원수입니다. 대적,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고 약한 사람을 보면 돕고싶어야하고 이게 믿는 사람의 기본 자세입니다.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죽게 되었는데 제사장이 먼저갔습니까. 두 사람이 지나갔지요. 가다보고 여리고로 가는 길 급히가는 나그네.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인하고 제사장은 도망가버리고 사마리아인 하나가 도와줍니다. 그래서 주님이 누가 그 이웃이 되겠냐. 너도 그리해라.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그런 사람이 되어야한다. 기어코 죽이겠다고 일제히 달려가서 어찌하겠느냐 하나님과 떨어트리는 거 떨어트리기만 하고 축복이요 저주로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석입니다. 시를 말씀드렸습니다. 고요하게 시 한 번 신앙의 시 써보는 거 좋습니다. 그러면 자기의 실제로 한 번 깊이가 이 정도구나 알게 됩니다. 뭐든지 직접 적어보고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반석, 하나님만 반석입니다. 그런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기도하시다가 자유되시겠습니다.
찬송: 145장, 170장
본문: 시편 61편 1절
오류 발생 시 첨부파일 참조 바랍니다.
시편 150편 중에서 다윗의 시가 절반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73편 정도 된다고 하는데 세밀하게 보면 좀 넘지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시라는 것은 여러번 말씀드리는대로 시인이 사람에 대해서도 사물에 대해서도 자연 만물이든지 살아오면서 자기의 여러 가지 남다르게 느낀 말하자면 사람의 행동이라든지 인품이라든지 활동이라든지 언행이라든지 또 어떤 사물을 보고 자기가 깨달은 그런 것들을 캐내서 밝히는 것, 이걸 시라고 합니다. 시라는 속에는 시인의 사상과 정신과 지식과 깨달음과 느낌과 이성과 이런 거 때문에 들어있는 게 시입니다. 그림도 그렇고 음악도 그렇고 책도 글도 그러하고 글 쓴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글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사람이란 읽는 것에 피동되고 영향받는 것이 사람입니다. 시도 그런 면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고 영향이 되어집니다. 욥기 시편 잡언 전도서 아가서까지가 시가서로 분류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게 시편입니다. 시편은 시를 모아놓은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백 목사님도 시를 몇 개 지으셨습니다. 공회 찬송가에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부르면 그럴 수 있고 찬송가에 있는 그런 것들을 시를 붙인게 찬송가고 요즘 유행가는 시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갖다붙인 거라서 그럴 수 있고 옛날 노래들은 시에다가 곡을 붙인 게 옛날 노래들입니다.
그런데 시를 다른 세상적인 시 말고 성경의 시편이라든지 욥기 잠언 전도서나 아가서나 그런 거 신앙생활 하면서 백 목사님이 지은 그런 시를 그에 대한 여러 시가 많이 있는데 시를 지을 때는 시를 지어보면 아시겠지만 동시짓기 해봤을 건데 시에 보면 쉽지 않습니다. 상당히 어렵거든요. 깊이 들어가서 시를 짓는 것은 매우 어렵고 신앙적인 시들은 짓고 싶다고 쓰고 싶다고 써지는 게 아닙니다. 신앙적인 시를 기록한 그런 분들은 성령에 붙들려서 쓴 겁니다. 찬송가도 시인데 제 2의 성경이라고 할 만큼 경험과 많은 것들이 들어있는 게 찬송 가사입니다. 억지로 할 건 없고 한 때는 저는 시를 지어보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신앙적인 시를 느낌으로 적어보자 그럴 때는 신앙이 깨어있는 때입니다. 신앙시는 자기가 깊이 신앙 생활을 하지 않으면 느낌이 없으면 안되기 때문에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 시를 쓸 수 있을 정도는 깊은 신앙에 들어가야하고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해야하는 겁니다. 다윗이 많은 시편을 기록한 건 깊은 건데 좋은 교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적인 시를 쓰면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뒤에 가서 보면은 과거에 지은 그 시가 뒤에가서 보면 유치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신앙의 정도가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참고하시는 거고 다윗이 많은 시를 지은 것처럼 우리 믿는 사람도 이런 신앙적인 고백 경험 깨달음을 많이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공과 본문을 가지고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다윗의 시고 여두둔, 여두둔은 사람의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찬송가 작곡가, 선견자라고 합니다. 아주 음악을 상당히 잘한, 다윗의 시대에 문지기가 상당히 많았고 여두둔은 대표되는 사람으로 지휘자도 되고 그런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법칙에 따라서 노래를 해라.
마음의 깊은 부분, 공간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깊이로 표현할 수 없으나 아주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그런 골방이라고 하면 옛날부터 깊이 있는 방입니다. 에스겔 성전에도 이게 있는데 솔로몬 성전과 비슷하게 있는데 이건 3층으로 올라가는데 일반적으로 골방이라고 하면 숨어있는 것이라서 깊이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피조물 다 단절하고. 영혼이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그런 가사, 이런 걸 의미합니다. 깊은 곳에서 마음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잠잠하게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깊은 물속에 들어간 것을 말합니다. 물 속에 바다 물속에 들어가면 잠잠한게 있지 않습니까. 잠잠하고 고요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 고요한,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요. 빈 깡통은 요란하고 빈 수레는 요랑합니다. 깡통이라도 그 안에 물을 가득 채어놓으면 때리면 소리가 안 납니다. 모래로 채워 넣으면 땡하는 소리가 안 나옵니다. 수레가 묵직하면 벌컥거리지 않습니다. 트럭도 그렇습니다. 안에 뭐가 들었기 때문에. 사람이 마음 속에 든 게 없고 그렇게 지식이라는 것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지식이 무슨 뜻입니까. 알 지자 알 식자입니다. 모든 사물을 아는 걸 지식이라고 합니다. 알려면 뭘 해야합니까. 배워야합니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합니다. 한자 공부도 영어 공부도 필요합니다. 이게 많이 들어가면 무형의 것인데 뇌가 무거워진다 머리가 좋다고 합니다. 지식이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에 생각을 많이하고 담아놓은 사람은 무형이지만은 무거운 거지요.
많이 읽고 듣고 그런 지성인들은 말을 함부로 안합니다. 행동을 함부로 안합니다. 한문 글자로 뭐라고 합니까. 조심스렇게 따져보고 계산해보고 받아들인 것인가 돌리는 거지요. 386컴퓨터 압니까. 586컴퓨터는 압니까. 386 586컴퓨터가 있었습니다. 그 386 486이 용량이 적은거지요. 느리고 빨리 못 돌립니다. 요즘 컴퓨터는 어마어마하게 발전이 빨리 된 거지요. 그 대신에 돌리기 때문에 행동은 굉장히 더딥니다. 그래서 이걸 다 계산해서 하는 것 가지고 신중하다고 합니다. 진중하다라고 하고 또 살펴보고 그렇게 움직이는 게 실수가 적은 겁니다. 마음인데 어떤 마음이라고요, 영과 가까이 있다는 말은 그런 겁니다. 바다 속 깊이 들어갈수록 나의 영혼이 하나님만 바라며 고요하게 바랍니다. 그에게서 나는도다. 의사는 구원과 의원 의사는 통합니다. 구원이라는 말과 건진다는 말과 살린다는 말은 서로 다 같은 맥락이 있는 거지요. 물에 빠진 사람을 살려내야합니다. 환란당한 사람도 건져내야합니다. 병든 사람은 치료해야합니다. 구원을 말한 거 보니까 필요한 겁니다. 이 시인이 구원을 말한 거 보니까 구원할 자가 누구냐, 날 구원하신 예수를 하나님만 나의 구원이다. 이걸 깨달았고 단순히 지식으로 깨달은 게 아니고 구원이 주님에게 있고 하나님께 있는 거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느껴지지 않으면 와닿지 않는 것이고 직접 신앙이라는 것은 아이들의 공부라는 것은 필기 시험 수능 시험 가는데 부모님이 대학교 교수라도 그 시험치르는 건 부모님이 대신 가 줄 수 없는 겁니다. 설사 대리시험 쳤다고 해도 부모님의 실력이지 제 실력은 아닌겁니다. 그래서 건설구원은 필수적입니다. 내가 안하면 안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가르치고 우리에게 하여금 만드시기 위해서 이게 가장 큰 중요한 게 타락이 필요하고 죄가 필요하고 어마어마한 희생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며 내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사실을 안 겪어보면 안 믿어지는 겁니다. 지금의 음식이 많으니까 고급 음식 상어 지느러미 들어보셨습니까. 그런 음식 있지요. 제비집, 제가 아는 제비는 하늘 날아다니는 집이고 그것도 음식 이름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오니까 새벽에 소리나는데 고기 파는 소리가 나는데 무슨 고기 사라고 합니까. 고래고기 파소 합니다. 그때 아주머니들 많이 팔았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래고기 맛은 모릅니다. 내가 먹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고 섣불리 찾을 수 없는 거지요. 하나님의 구원을 내가 안 받아보면 그런 겁니다. 다윗은 어릴 때부터 그런 겁니다. 공을 집고 아무리 힘세도 사람이 곰을 이기는 건 불가능한데.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은 경험에서 쌓이는 것이고 사람마다 다른 건데 첫째 말씀대로 자기 현실에 순종해야하고 자기 주관에 자기 계산이 들어가면 안되는 겁니다. 순종을 한 다음에 그 다음 역사를 살펴봐야합니다. 단 시간에 되는 게 아니고 다 따져보는 겁니다. 우연이냐 그런 것이냐 다 따져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다. 나올 때 그래서 따져보고 따져봐서 하나님이 하지 않으면 이렇게 될 수 없는거다 할 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태산이 높아도 올라가보지도 않고 산만 높다고 하는 것처럼.
다윗은 실제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환란 당해도. 30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에게 쫓길 때는 20대 초중반이라는 말입니다. 장신형 선생님 20대 초반입니까. 좀 더 많았을지 몰라도 그때 즈음 사울에게 쫓겨 다녔습니다. 그럴 때 사울에 대한 복수의 기회가 있어도 하나님께 맡겨놨죠, 환란이 닥쳤을 때 잔잔하게 하나님만 바라보는 거지요. 어려움 닥쳤을 때 할 일 하고 마지막에 하나님게 맡겨 놓는 겁니다. 그럴 때 믿는 사람은 마음이 잠잠할 수 있고 믿음이 경험치만큼 쌓일 때 구원이 난다는게 체험적으로 쌓이게 되고 환란 구원 만날 때 영원히 잠잠할 수 있는 겁니다. 안에 뭐가 들어있어야 고요하게 되는 거지. 안에 꽉 들어있어야 비바람 몰아쳐도 잠잠한 영혼입니다. 2절, 이어집니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하나님만 주님만 다른 존재는 없다. 구원은 주님에게 없고 반석과 구원은 하나님 뿐이다. 오직 하나님만 나의 반석이시오. 사람도 믿어보고 보니까 성경 전체의 위인 중에서 오래 산 사람은 아닌데 세월 속에 우리도 겪어보잖습니까. 이런 걸 살펴보는 게 중요하고 신앙생활 하면서 자기가 신앙생활하고 자기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살피면서 자기 사람들도 살피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사람이라던지 정치를 잘해서 말하는 게 아니고 정치가 눈에 보이는 겁니다. 세상과 시대가 보이는 겁니다. 그런 걸 두고 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도 살펴보니 사람 어떤 사람 재주있는 사람 건강한 사람 배경 좋은 사람 다 부질없는 짓이고 허무한 거다. 믿을 수 없다. 재물 있다가 없어지는거다. 건강 하루 아침에 가는 거다. 그런 걸 따져보니까 오직 하나님만 눈에 안 보이는데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기 때문에 그분이 어떤 분인지 따져보는 거지요. 자존자인데 창조주다. 입에 그냥 붙은 말 하고 자기대로 그 말의 뜻을 하는 거하고 생각만해도 차원이 틀립니다. 자기가 그분에 대한 걸 생각해보는 건 다른 차이입니다.
주권자, 자존자가 무슨 뜻이지. 그런데 안 배웠습니다. 그 말의 뜻을 가지고 제가 생각해봤습니다. 자존자에 대한 성경은 제가 깨닫고 하는 겁니다. 설교록을 바탕으로 해서 배웠지만. 스스스로 자자 있을 존자. 하나하나 다 그래서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따져보면 그렇습니다. 권력도 배경도 다 흥한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분만 다 반석이다. 기초, 터, 근본, 뿌리 원인과 원동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겁니다. 그분만이 나의 배경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울에게 두 번이나 완벽하게 원수 갚을 기회가 있겠지만 내가 하지 않겠다. 그 분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옆에서는 기회입니다. 이러는데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백 목사님께서 믿을 때 안 믿는 사람들이 백 목사님한테 그 동네가 그랬답니다. 예수 믿으면 다 망했답니다. 멀쩡한 가정이 다 망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망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좋은 청년 망하겠네 그렇게 했는데 속으로 좋았답니다. 예수믿으면 망한다고 계속 말해라, 그러면 하나님 들으실 거니까 그거 두고보면 알겠지. 그러니까 그 마을에 예수 믿어 망한 사람은 왜 망했습니까. 예수를 믿어도 더럽게 잘못 믿은겁니다. 바로 믿어봐라 망하는가.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 되지요. 백 목사님이 고향 마을 가면 받들어 모십니다. 어떤 분인지 아니까. 이런 것이 말하자면 하나님 듣도록, 그분이 계신다. 내가 받는 고난이 나 때문이다. 그러면 회개하면 됩니다. 내가 특별한 죄가 없는데 당신이 보고 계시겠지. 이게 반석입니다. 반석으로 삼는거지요. 다른 존재는 이럴 수가 없는 거지요. 저는 나의 반석이시오, 주님 뿐입니다. 건질 뿐입니다. 누가 건지겠습니까. 중국의 화타라는 의사가 있었다는데 아무리 명의라도 다 고칠 수 없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고난 사건 사고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만 초월해서 그렇습니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라. 안 믿어져도 이렇게 생각하면 종교는 가지는 게 좋지 손해볼 건 없습니다. 그분만 나의 구원입니다. 그분은 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하지 못하는 곳이 없고 그분만 나의 산성이시고 피난처고 안식처입니다. 이분을 믿으면 나의 반석과 구원과 산성이 되어주시는 것이고 아무리 계셔도 나하고 상관이 없는 겁니다. 진수성찬 차려도 안 먹으면 내 배가 불러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의 하나님의 되는 겁니다.
3절 4절은 원수입니다. 대적,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고 약한 사람을 보면 돕고싶어야하고 이게 믿는 사람의 기본 자세입니다.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죽게 되었는데 제사장이 먼저갔습니까. 두 사람이 지나갔지요. 가다보고 여리고로 가는 길 급히가는 나그네.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인하고 제사장은 도망가버리고 사마리아인 하나가 도와줍니다. 그래서 주님이 누가 그 이웃이 되겠냐. 너도 그리해라.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그런 사람이 되어야한다. 기어코 죽이겠다고 일제히 달려가서 어찌하겠느냐 하나님과 떨어트리는 거 떨어트리기만 하고 축복이요 저주로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석입니다. 시를 말씀드렸습니다. 고요하게 시 한 번 신앙의 시 써보는 거 좋습니다. 그러면 자기의 실제로 한 번 깊이가 이 정도구나 알게 됩니다. 뭐든지 직접 적어보고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반석, 하나님만 반석입니다. 그런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기도하시다가 자유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