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5일 수밤
김동민2024-06-05조회 167추천 21
2024년 6월 5일 수밤
찬송: 63장, 64장
본문: 야고보서 2장 14절
오류 발생 시 첨부파일 참조 바랍니다.
에스겔 성전을 살폈고 살펴볼건데 몇 가지 이유 때문에 한 주간 쉬어가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단일성을 가지고 있어서 에스겔 말씀이나 야고보서 말씀이나 연결이 되어져있고 그렇게 되어야 정상입니다. 지난 주일에 에스겔 말씀을 실행하는 접착제 역할로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배운 말씀을 현실에 접목시키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과 제목이 믿음과 행함이었고 본문에도 14절부터 26절까지 믿음을 말씀하되 행함없는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재를 붙인다면 행함없는 믿음이라는 것을 붙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도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도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고 찾아가고 만날 수 있는 그런 방편 길로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믿음의 도라는 말은 믿음으로 성공한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연결될 수 있고 은혜와 복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라 이 말입니다. 접목시키는 통로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통로 방법이 믿음이다. 이게 이해가 되셔야합니다. 하나님과 기본적으로 끊어진 사람이 연결이 되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다시 연결되는 것은 무엇으로 되는 것입니까. 사활의 대속은 했는데 이 대속의 믿음도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건설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믿음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이고 진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건설적으로 실질적으로 그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많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말씀은 나누면이랄까 첫째는 행해라는 것, 하지말라는 것 둘로 나뉘어진다고 합니다.
해야할 것은 해라 하지 말 것은 하지마라 이게 성경인데 십계명에 말아라, 하라. 전체적으로 성경은 하나님 말씀인데 하라는 걸 하면 되어지고 안하면 복을 주시고 하지 말라는 것은 화가 오는 것이고 하라는 것을 안하면 하는 것이고 이게 뭐냐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해라, 하지 말아라, 복을 주신다 그걸 안하면 화를 면한다. 이렇게 기록해주신 것을 계약이라고 하고 계약의 내용을 전부 믿음이다 그 말입니다. 믿음의 방법으로 주신 것이 계약입니다. 단순정의로 말하면 알고 인정하고 행하는 것인데 성경 전부가 믿음으로 되어진다. 믿음의 도라고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께서 믿는 자는 능치못할 것이 없느니라 라는 말씀을 엄청 하셨습니다. 믿사옵나이다. 강조해서 그렇게 말로 믿는 믿음 마음으로 믿는 믿음 이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행함이 없는 믿음이 되는 겁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도다, 행함을 말하는 겁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도다. 믿음 모르면 성공한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통로가 될 수 있다. 기독교는 믿음의 도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믿음으로 모든 게 다 되어지고 사람과 더불어 사람과 하신 걸 가르켜서 하나님이 사람과 더불어맺은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지식 인정 실행입니다. 아는 거 받아들이는 거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해가지고 무엇을 아는 것이며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행하느냐. 무엇을 아는 겁니까. 믿음은 첫째 아는 겁니다. 영어를, 수학을, 과학을 성경 말씀을 성경 말씀 속에 성경을 한다 말씀을 한다. 성경 같은 성경입니다. 성경을 천주교식으로 알면 천주교가 되는 겁니다. 감리교식으로 하면 감리교가 되는 겁니다. 알되 신천지식으로 알면 신천지가 되는 겁니다. 성경 말씀을 알되 어떻게 알 것인가 어떻게 지식하느냐인데 한문 글자로 말하면 뭐라고 합니까. 보는 걸 관, 그래서 관점, 각도, 시각 그렇게 보는 겁니다.
성경을 읽고 생각하는거지요. 성경을 읽으면서 모릅니다. 성경읽는데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이고 읽고 지나가는 것이고 그러면 모릅니다. 그런 실험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동영상을 틀어놓고 지나가지요 자기 관심에 따라 방금 본 그림 중에서 새가 날아갔는데 본 분 계십니까 하면 대부분 모른다고 합니다. 거기 집중하다보니까 뒤로 뭐가 날아가도 안 보인다는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성경을 눈으로 읽어도 성경 읽을 때는 마음으로 읽어나가야합니다. 그냥 줄줄 읽어나가면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 읽는데 알라고 하면 생각을 해야합니다. 문제는 그때부터 주체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누가 생각하느냐, 어떤 관점에서 생각하느냐 그 말입니다. 자주 인용을하는데 서울의 유명한 대학교 기독교를 비판하는 인물인데 전부 부정하게 읽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읽으니까 알아도 엉터리로 하는 거지요. 성경 말씀을 아는 건데 어떻게 아느냐가 중요합니다. 인간관점에서 하면 인본주의가 됩니다. 세상 관점에서는 세상 준비가 됩니다. 신비 관점에서 보면 신비주의자가 되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성경을 읽어야합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잣대로 측량을 한다고 해석을 해봤습니다. 하나님의 구원도리로 알아야 알아지지 다른 각도로 알면 틀려집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이 못나고 무식하고 그러면 못나게 보고 무식하게 보고 가치낮게 봅니다. 그런데 똑같은 한 영혼입니다. 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바로 사람 차별하지 않는 분은 딱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차별합니다. 한 분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대로 그렇습니다. 다르게 다르게 하는 겁니다. 어떤 관점에서 어린 아이들이 오니까 사람들이 혼을 냈는데 어린 아이들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다. 관점이 다른 겁니다. 어떤 각도 어떤 관점에서 봅니까.
어떤 경우라도 포기는 금물입니다. 또 반대로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사람은 사람이지 자기가 잘났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인데 기죽을 것은 없는 겁니다.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원의 돌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유익하게 하는 게 성겨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주셨습니다. 이 관점에서 아는 것이라 그러고 믿음의 출발입니다. 믿음의 지식, 무조건 아는 거 백날 알아놔야 모르는 겁니다. 어디에 뭐가 있다 어디에 뭐가 있다 알지만 구원과 연관시키면 안보입니다.
역사로 읽으면 교양서적으로 읽으면 구원이 알겠습니까. 이게 믿음으로 믿음을 아는 거지요. 성경 지식으로 아는 겁니다. 받아들이는 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신령한 존재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에 속한 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다 더 가치있고 보다 더 중요하다고 되는 것을 차지하는 거지요. 그러면 근심 걱정되는 것이 생겼으면 마음이 어디로 갑니까. 하루종일 그렇게 다 기울어집니다. 새롭게 된거면 마음이 다 가는 겁니다. 아무것이나 다 하는 것이 아니고 경 중에 있는거지요. 그래서 믿음이란 인정이란 내 속에 자기 주관 인간 지식으로 된 자기 주관, 고급스럽게 자아라고 하는가요.
인간 지식이란 글도 지식이고 보고 듣고 하는 게 전부 지식입니다. 물을 받다가 정수에 물을 받다가 뜨거운 물을 받아버렸습니다. 그런 걸 가져서 체험이라고 합니다. 아 이거 잘못하면 데이겠구나 그러고 나면 마음 속에 지식이 생겨집니다. 정수기 누를 때 더운 물 누르면 다친다. 매는 사람 몸에 깊이 박힙니다. 감정으로 폭력이 아니고 사랑의 매라는 것은 필요한 겁니다. 체험이고 거기서 뭐가 생긴다고요 지식이 생기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인정이라는 것은 세상 지식 인본 이런 거 부인하고 성경에 기록하신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믿음의 인정이라는 것은 잡것이 섞여있으면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속화된 것입니다. 인간 지식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다 그렇게 되고 마는 겁니다.
알고 믿고 그대로 하면 됩니다. 이게 믿음의 정의고 알게 되는 겁니다. 단어의 정의를 앵무새처럼 달달 외우면 신풍에는 다람쥐 챗바퀴를 만든다고 하던데 어릴 때 학교나 가면 챗바퀴에서 도는 게 보입니다. 항상 그대로 하나님을 향한 지식 외우는 게 일차로 중요한데 발전은 없는 겁니다. 성경도 마찬가지고 지식과 인정과 실행이 있으면 이게 정의입니다. 믿음의 종류로 들어가면 교리적으로 믿음이란 기본 믿음과 건설 믿음이 있습니다. 일반 교계에서는 모를 겁니다. 기본 구원 건설 구원이 나오려면 뭐가 나와야한다고 사람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눠놔야합니다. 몸과 마음과 영으로, 마음은 육이다. 이러면 구원론이 바로 되고 그때부터 성경 해석에서 사람의 평생 달려갈 수도 없는 말씀이 나옵니다. 건설구원에 대해서 설교록 180권해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것은 그렇게 연결될 수 밖에 없는거지요. 기본 믿음이 있고 건설구원이 있다.
건설 믿음은 건설 구원에 속한 것입니다. 기본 구원과 건설 구원인데 우리에게 가져와서 전체 큰 것으로 하고 그걸 이뤄가는 실제 생활을 하는 것이고 기본 믿음이란 저절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어느날 중생시켜서 자기도 모르게 믿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거 같다. 이건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전적 은혜고. 주신 자유성으로 하나씩 깨닫고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종류 믿음 중에서 본문에 야고보 중에서 믿음의 종류가 둘이 나오는데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고 없는 믿음이 있다. 그러면 기본 구원을 떼놓고 건설 구원에서 다시 나누어지는 겁니다. 다시 가지가 둘러 나뉘어서 행함이 있는 믿음과 없는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냐 공과에서 일곱가지로 행함이 없다 그 말은 알았고 인정했는데도 몸이 따라가지 않는 걸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익이 없다 남는 게 없다. 14절에 있습니다.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이익이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믿음은 구원이 없습니다. 믿음은 믿음인데 구원 없는 믿음이라, 건설 믿음이겠지요.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건설구원을 말합니다. 믿어도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이 말을 다시 반복하지만 삼분론 알지 못하면 믿어도 의미가 없다. 해석을 못할 것이고 주관적으로 엉터리 해석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자체가 죽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귀신들도 믿는 믿음이니까 귀신 믿음이 됩니다. 그래서 20절에 돼서 헛된 것이다 헛된 믿음이다. 이무것도 효력이 없는 믿음이다. 성경에서 나누고 있고 실제 생활에서 이번 주 공과의 핵심이고 중심인데 실제 생활에서 한 일곱가지는 성경이 있다던지 이런 게 아닙니다. 경험ㅁ해서 생각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각자 자신 생각해봐야합니다.
희생 믿음입니다. 나를 희생하는 겁니다. 나와 하나님을 위해서 순종을 위해서 구원을 위해서 내 물질과 내 시간과 내 노력을 나 자신을 희생하는 겁니다. 구원의 희생, 그 희생이 없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과 믿음은 다른 겁니다. 교회를 다녀도 믿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충성이 있는 믿음입니다. 자기 전도의 마찬가지고 자기 충성을 말하는 겁니다. 1단계 충성 2단계 충성 3단계 충성, 한 규빗은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가락 너비를 더한 것. 모세의 팔과 아론의 팔이 정확하게 재면 다를 겁니다. 여호수아는 다를 겁니다. 어른의 팔과 아이의 팔이 다릅니다. 그래서 한 규빗을 그래놨기 때문에 정확하게 수치를 말할수록 가짜가 되는 겁니다. 우리 이영윤 선생님 한 규빗하고 김백인 한 규빗은 다른 겁니다. 목사의 충성과 반사의 충성이 다른 거겠지요. 목사는 더 해야겠지요. 반사는 목사보다는 덜해야겠지요. 그런데 상황에 따라서 목사가 더 충성하는 경우도 있을겁니다. 희생이 없는 믿음 충성이 없는 믿음은 크게 느낀 세 가지가 뭐가 없는 믿음입니까. 승리가 없는 믿음입니다. 싸웠는데 승리가 없다. 천국은 승리자들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패자들이 모인 곳을 이름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승리자만 데려가지십니다. 패자는 지옥에 던지십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던 시험을 치던 패전하면 안하느니만 못한 겁니다. 시험쳤는데 점수가 낮은 것입니다.
승리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계속 없는 믿음도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절제 계속 끈기가 있어야하고 절제 끈기 인내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못 시켜도 절제력, 인내심, 끈기를 해 주는 것입니다. 그거 있으면 전부 다 합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 현재 갖는 믿음은 눈물도 있습니다 금식도 했습니다. 그런데 눈 뜨면 사라져버립니다. 현재가 없는 믿음, 과거 있어야하는데 현재 없는 과거는 다 죽은 겁니다. 현재 없는 미래는 다 허상입니다. 그래야 쓸모가 있습니다. 바로된 과거는 현재가 되어야합니다. 현재 없는 과거는 아무것도 아니고 현재 없는 믿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음 뿐이고 말 뿐인거 이건 믿음이 아닌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표현이 애매해서 이웃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포함해서 그러는데 자기만 좋은 믿음. 이거 굉장히 많습니다. 이렇게 일곱가지가 굉장히 좋은 믿음이고 헛된 믿음 귀신 믿음 이런 믿음이 되고 마는 겁니다. 내 믿음이 내 생활이 사리 판단이 모든 생활이 일곱가지 속에 들어있지 않은지 돌아보고 행함이 있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
찬송: 63장, 64장
본문: 야고보서 2장 14절
오류 발생 시 첨부파일 참조 바랍니다.
에스겔 성전을 살폈고 살펴볼건데 몇 가지 이유 때문에 한 주간 쉬어가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단일성을 가지고 있어서 에스겔 말씀이나 야고보서 말씀이나 연결이 되어져있고 그렇게 되어야 정상입니다. 지난 주일에 에스겔 말씀을 실행하는 접착제 역할로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배운 말씀을 현실에 접목시키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과 제목이 믿음과 행함이었고 본문에도 14절부터 26절까지 믿음을 말씀하되 행함없는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재를 붙인다면 행함없는 믿음이라는 것을 붙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도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도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고 찾아가고 만날 수 있는 그런 방편 길로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믿음의 도라는 말은 믿음으로 성공한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연결될 수 있고 은혜와 복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라 이 말입니다. 접목시키는 통로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통로 방법이 믿음이다. 이게 이해가 되셔야합니다. 하나님과 기본적으로 끊어진 사람이 연결이 되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다시 연결되는 것은 무엇으로 되는 것입니까. 사활의 대속은 했는데 이 대속의 믿음도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건설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믿음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이고 진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건설적으로 실질적으로 그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많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말씀은 나누면이랄까 첫째는 행해라는 것, 하지말라는 것 둘로 나뉘어진다고 합니다.
해야할 것은 해라 하지 말 것은 하지마라 이게 성경인데 십계명에 말아라, 하라. 전체적으로 성경은 하나님 말씀인데 하라는 걸 하면 되어지고 안하면 복을 주시고 하지 말라는 것은 화가 오는 것이고 하라는 것을 안하면 하는 것이고 이게 뭐냐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해라, 하지 말아라, 복을 주신다 그걸 안하면 화를 면한다. 이렇게 기록해주신 것을 계약이라고 하고 계약의 내용을 전부 믿음이다 그 말입니다. 믿음의 방법으로 주신 것이 계약입니다. 단순정의로 말하면 알고 인정하고 행하는 것인데 성경 전부가 믿음으로 되어진다. 믿음의 도라고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께서 믿는 자는 능치못할 것이 없느니라 라는 말씀을 엄청 하셨습니다. 믿사옵나이다. 강조해서 그렇게 말로 믿는 믿음 마음으로 믿는 믿음 이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행함이 없는 믿음이 되는 겁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도다, 행함을 말하는 겁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도다. 믿음 모르면 성공한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통로가 될 수 있다. 기독교는 믿음의 도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믿음으로 모든 게 다 되어지고 사람과 더불어 사람과 하신 걸 가르켜서 하나님이 사람과 더불어맺은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지식 인정 실행입니다. 아는 거 받아들이는 거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해가지고 무엇을 아는 것이며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행하느냐. 무엇을 아는 겁니까. 믿음은 첫째 아는 겁니다. 영어를, 수학을, 과학을 성경 말씀을 성경 말씀 속에 성경을 한다 말씀을 한다. 성경 같은 성경입니다. 성경을 천주교식으로 알면 천주교가 되는 겁니다. 감리교식으로 하면 감리교가 되는 겁니다. 알되 신천지식으로 알면 신천지가 되는 겁니다. 성경 말씀을 알되 어떻게 알 것인가 어떻게 지식하느냐인데 한문 글자로 말하면 뭐라고 합니까. 보는 걸 관, 그래서 관점, 각도, 시각 그렇게 보는 겁니다.
성경을 읽고 생각하는거지요. 성경을 읽으면서 모릅니다. 성경읽는데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이고 읽고 지나가는 것이고 그러면 모릅니다. 그런 실험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동영상을 틀어놓고 지나가지요 자기 관심에 따라 방금 본 그림 중에서 새가 날아갔는데 본 분 계십니까 하면 대부분 모른다고 합니다. 거기 집중하다보니까 뒤로 뭐가 날아가도 안 보인다는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성경을 눈으로 읽어도 성경 읽을 때는 마음으로 읽어나가야합니다. 그냥 줄줄 읽어나가면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 읽는데 알라고 하면 생각을 해야합니다. 문제는 그때부터 주체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누가 생각하느냐, 어떤 관점에서 생각하느냐 그 말입니다. 자주 인용을하는데 서울의 유명한 대학교 기독교를 비판하는 인물인데 전부 부정하게 읽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읽으니까 알아도 엉터리로 하는 거지요. 성경 말씀을 아는 건데 어떻게 아느냐가 중요합니다. 인간관점에서 하면 인본주의가 됩니다. 세상 관점에서는 세상 준비가 됩니다. 신비 관점에서 보면 신비주의자가 되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성경을 읽어야합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잣대로 측량을 한다고 해석을 해봤습니다. 하나님의 구원도리로 알아야 알아지지 다른 각도로 알면 틀려집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이 못나고 무식하고 그러면 못나게 보고 무식하게 보고 가치낮게 봅니다. 그런데 똑같은 한 영혼입니다. 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바로 사람 차별하지 않는 분은 딱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차별합니다. 한 분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대로 그렇습니다. 다르게 다르게 하는 겁니다. 어떤 관점에서 어린 아이들이 오니까 사람들이 혼을 냈는데 어린 아이들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다. 관점이 다른 겁니다. 어떤 각도 어떤 관점에서 봅니까.
어떤 경우라도 포기는 금물입니다. 또 반대로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사람은 사람이지 자기가 잘났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인데 기죽을 것은 없는 겁니다.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원의 돌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유익하게 하는 게 성겨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주셨습니다. 이 관점에서 아는 것이라 그러고 믿음의 출발입니다. 믿음의 지식, 무조건 아는 거 백날 알아놔야 모르는 겁니다. 어디에 뭐가 있다 어디에 뭐가 있다 알지만 구원과 연관시키면 안보입니다.
역사로 읽으면 교양서적으로 읽으면 구원이 알겠습니까. 이게 믿음으로 믿음을 아는 거지요. 성경 지식으로 아는 겁니다. 받아들이는 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신령한 존재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에 속한 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다 더 가치있고 보다 더 중요하다고 되는 것을 차지하는 거지요. 그러면 근심 걱정되는 것이 생겼으면 마음이 어디로 갑니까. 하루종일 그렇게 다 기울어집니다. 새롭게 된거면 마음이 다 가는 겁니다. 아무것이나 다 하는 것이 아니고 경 중에 있는거지요. 그래서 믿음이란 인정이란 내 속에 자기 주관 인간 지식으로 된 자기 주관, 고급스럽게 자아라고 하는가요.
인간 지식이란 글도 지식이고 보고 듣고 하는 게 전부 지식입니다. 물을 받다가 정수에 물을 받다가 뜨거운 물을 받아버렸습니다. 그런 걸 가져서 체험이라고 합니다. 아 이거 잘못하면 데이겠구나 그러고 나면 마음 속에 지식이 생겨집니다. 정수기 누를 때 더운 물 누르면 다친다. 매는 사람 몸에 깊이 박힙니다. 감정으로 폭력이 아니고 사랑의 매라는 것은 필요한 겁니다. 체험이고 거기서 뭐가 생긴다고요 지식이 생기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인정이라는 것은 세상 지식 인본 이런 거 부인하고 성경에 기록하신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믿음의 인정이라는 것은 잡것이 섞여있으면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속화된 것입니다. 인간 지식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다 그렇게 되고 마는 겁니다.
알고 믿고 그대로 하면 됩니다. 이게 믿음의 정의고 알게 되는 겁니다. 단어의 정의를 앵무새처럼 달달 외우면 신풍에는 다람쥐 챗바퀴를 만든다고 하던데 어릴 때 학교나 가면 챗바퀴에서 도는 게 보입니다. 항상 그대로 하나님을 향한 지식 외우는 게 일차로 중요한데 발전은 없는 겁니다. 성경도 마찬가지고 지식과 인정과 실행이 있으면 이게 정의입니다. 믿음의 종류로 들어가면 교리적으로 믿음이란 기본 믿음과 건설 믿음이 있습니다. 일반 교계에서는 모를 겁니다. 기본 구원 건설 구원이 나오려면 뭐가 나와야한다고 사람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눠놔야합니다. 몸과 마음과 영으로, 마음은 육이다. 이러면 구원론이 바로 되고 그때부터 성경 해석에서 사람의 평생 달려갈 수도 없는 말씀이 나옵니다. 건설구원에 대해서 설교록 180권해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것은 그렇게 연결될 수 밖에 없는거지요. 기본 믿음이 있고 건설구원이 있다.
건설 믿음은 건설 구원에 속한 것입니다. 기본 구원과 건설 구원인데 우리에게 가져와서 전체 큰 것으로 하고 그걸 이뤄가는 실제 생활을 하는 것이고 기본 믿음이란 저절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어느날 중생시켜서 자기도 모르게 믿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거 같다. 이건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전적 은혜고. 주신 자유성으로 하나씩 깨닫고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종류 믿음 중에서 본문에 야고보 중에서 믿음의 종류가 둘이 나오는데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고 없는 믿음이 있다. 그러면 기본 구원을 떼놓고 건설 구원에서 다시 나누어지는 겁니다. 다시 가지가 둘러 나뉘어서 행함이 있는 믿음과 없는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냐 공과에서 일곱가지로 행함이 없다 그 말은 알았고 인정했는데도 몸이 따라가지 않는 걸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익이 없다 남는 게 없다. 14절에 있습니다.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이익이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믿음은 구원이 없습니다. 믿음은 믿음인데 구원 없는 믿음이라, 건설 믿음이겠지요.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건설구원을 말합니다. 믿어도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이 말을 다시 반복하지만 삼분론 알지 못하면 믿어도 의미가 없다. 해석을 못할 것이고 주관적으로 엉터리 해석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자체가 죽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귀신들도 믿는 믿음이니까 귀신 믿음이 됩니다. 그래서 20절에 돼서 헛된 것이다 헛된 믿음이다. 이무것도 효력이 없는 믿음이다. 성경에서 나누고 있고 실제 생활에서 이번 주 공과의 핵심이고 중심인데 실제 생활에서 한 일곱가지는 성경이 있다던지 이런 게 아닙니다. 경험ㅁ해서 생각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각자 자신 생각해봐야합니다.
희생 믿음입니다. 나를 희생하는 겁니다. 나와 하나님을 위해서 순종을 위해서 구원을 위해서 내 물질과 내 시간과 내 노력을 나 자신을 희생하는 겁니다. 구원의 희생, 그 희생이 없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과 믿음은 다른 겁니다. 교회를 다녀도 믿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충성이 있는 믿음입니다. 자기 전도의 마찬가지고 자기 충성을 말하는 겁니다. 1단계 충성 2단계 충성 3단계 충성, 한 규빗은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가락 너비를 더한 것. 모세의 팔과 아론의 팔이 정확하게 재면 다를 겁니다. 여호수아는 다를 겁니다. 어른의 팔과 아이의 팔이 다릅니다. 그래서 한 규빗을 그래놨기 때문에 정확하게 수치를 말할수록 가짜가 되는 겁니다. 우리 이영윤 선생님 한 규빗하고 김백인 한 규빗은 다른 겁니다. 목사의 충성과 반사의 충성이 다른 거겠지요. 목사는 더 해야겠지요. 반사는 목사보다는 덜해야겠지요. 그런데 상황에 따라서 목사가 더 충성하는 경우도 있을겁니다. 희생이 없는 믿음 충성이 없는 믿음은 크게 느낀 세 가지가 뭐가 없는 믿음입니까. 승리가 없는 믿음입니다. 싸웠는데 승리가 없다. 천국은 승리자들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패자들이 모인 곳을 이름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승리자만 데려가지십니다. 패자는 지옥에 던지십니다. 그래서 전쟁을 하던 시험을 치던 패전하면 안하느니만 못한 겁니다. 시험쳤는데 점수가 낮은 것입니다.
승리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계속 없는 믿음도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절제 계속 끈기가 있어야하고 절제 끈기 인내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못 시켜도 절제력, 인내심, 끈기를 해 주는 것입니다. 그거 있으면 전부 다 합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 현재 갖는 믿음은 눈물도 있습니다 금식도 했습니다. 그런데 눈 뜨면 사라져버립니다. 현재가 없는 믿음, 과거 있어야하는데 현재 없는 과거는 다 죽은 겁니다. 현재 없는 미래는 다 허상입니다. 그래야 쓸모가 있습니다. 바로된 과거는 현재가 되어야합니다. 현재 없는 과거는 아무것도 아니고 현재 없는 믿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음 뿐이고 말 뿐인거 이건 믿음이 아닌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표현이 애매해서 이웃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포함해서 그러는데 자기만 좋은 믿음. 이거 굉장히 많습니다. 이렇게 일곱가지가 굉장히 좋은 믿음이고 헛된 믿음 귀신 믿음 이런 믿음이 되고 마는 겁니다. 내 믿음이 내 생활이 사리 판단이 모든 생활이 일곱가지 속에 들어있지 않은지 돌아보고 행함이 있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