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3일 수밤
김동민2024-03-13조회 152추천 22
2024년 3월 13일 수밤
찬송: 100장(예수 앞에 나오면), 101장
본문: 전도서 7장 1절
오류 발생 시 첨부파일 참고 바랍니다.
이름은 단순히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이름이라는 것은 존재의 특성을 담고 있는 것이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으라 하실 때에 아담이 지은 이름은 그냥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고 돌멩이를 보고는 돌멩이의 특성과 존재의 의미까지 해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물은 용기에 따라 바뀌고 특성이 있으니 물이라 그렇습니다. 무생물 뿐만 아니라 모든 짐승과 존재의 이름이 이렇게 지어지셨는데 사람이라는 이름만큼은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지으셨습니다. 그런 아담이 만물의 이름을 지을 때 마음대로 지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보이도록 꼭 맞도록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들여다보면 이름 속에는 존재의 특성이 담겼고 의미와 소망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아담이 지은 것을 보고 하나님이 지어도 그렇게 짓겠다고 그렇게 지었습니다. 관점이 같았기에 그랬습니다. 하나님에게 연결되어 있는 정상적인 상태의 연결입니다. 믿는 사람의 관점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세상을 보든 어떤 선택을 하든 예수님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시각에서 구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모아야하는 것이 믿는 사람의 기본 자세입니다.
이것이 틀어지면 믿는 사람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두고 결정을 할 때 굉장히 신중해야합니다. 각자의 현실 각자의 위치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학생의 입장에 있다보면 만사를 학생의 관점으로 보게 되어있고 선생님의 입장으로만 보면 선생님의 입장으로 보게 되어있습니다. 각자가 그 위치를 보면 만사를 바라보고 생각하게 되어지고 입장만 되어버리게 되고 입장에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할 지라도 믿는 사람만큼은 그리 되어선 안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의 영장. 아담의 위치와 입장이 만물의 영장으로 계시고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관점으로 한 것과 같이 오늘도 오늘의 자기 현실에서 만큼은 아담과 같은 입장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남편으로 아내로 있더라도 우리가 가지는 관점은 아담이 이름을 지을 때 가졌던 관점과 같이 관점으로 만사를 볼 줄 알아야합니다.
회사 사장이 직원을 출장을 보냈는데 사장의 입장에서 처리를 해주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아들에게 일을 시켜서 아버지의 심정으로 처리했다면 더 많은 것을 맡기고 싶지 않겠습니까. 동시에 자기에게 주신 현실의 입장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잘 지킬줄도 알아야합니다. 아담이 지은 이름을 기뻐하셨던 이유는 이 두가지를 잘 고려했기에 그렇습니다.
구원 관점 성경관점으로 모든 것을 본다고 해서 가정도 자녀도 직장도 다 팽겨치고 다니면 문제 국방부 장관이 믿는 사람인데 전쟁이 주일에 나면 어떤가. 과거 80년대에 주일 시험이 많을 때였는데 한 번만 치면 평생 직장 해결이 되겠는데 나머지를 애매하게 노동생활 하는 것과 어느 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맞겠는가. 각자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지적하는 방법이 있고 죄짓는 상대방을 바꾸기 위하여 잘 지키고 상대방을 위하여 수고를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양쪽 다 구원이라는 이름은 내세웁니다. 그러나 형편에 따라 다르게 해야합니다.
그런데 의문을 가져야하는 순간에 인내로 기다리면 죄를 외면한 자기 중심의 죄가 됩니다. 반대로 인내로 참아야하는 순간애 분을 내게 되면 자기 중심의 성질을 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구원의 관점으로 신앙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말은 쉬운데 살펴야하는 것이 많아서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나가서는 아니됩니다.
베드로는 죄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가슴에 죄를 평생 묻고 살아 베드로가 베드로가 된겁니다. 두 세 살 아이는 궁금한게 많습니다. 많은 것을 대화해서 집어넣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힘있게 치고난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 아내가 학생이 자녀가 부모가 각자의 입장과 위치를 하는 건데 아무리해도 자타의 구원을 하는 거 같고 이렇게 해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늘 머리 속에 염두해 두고 언행심사를 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목석이 아닌 살아있는 하나님으로 상대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사람이 봐도 아름답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월 속에 옳고 바르게 가다보면 그렇게 되는건데 기뻐하시는 사람을 두고는 표시판을 세워주시길 마련입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믿는 사람의 시각이고 관점입니다. 신앙의 완성이 아니라 최소한의 정체성 기본이 만들어진겁니다. 기본이 되어있는 성도가 생명있는 성도이고 생명이 되어 온 세상과 맏서는 성도가 되어집니다.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자기 현실 자기 입장 위치에서 자기 속에 죄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온 세상과 벌이는 전쟁입니다. 이렇게 핍박하는 온 세상의 이름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그 어떤 모습도 일곱머리 열 뿔의 짐승과 같습니다. 이런 지식 저런 사상 어떤 모습이 되었든지 결국 하나입니다. 마지막에는 어린 양을 대적합니다. 옳고 바른 신앙을 잡아먹기 위해 하는 것이 세상의 본질입니다. 세상의 실체가 이렇다는 것을 알고 상대해야 당하지 않습니다.
룻은 이방여인입니다. 그런데 그 행동이 빛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돌아봐야합니다. 나의 이름은 어떤 이름인가. 남이 해주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해야합니다. 각자 사람에게 그 이름이 빛나도록 각자에게 가장 필요한 위치를 주셨는데 자기 행동으로 자기 위치를 낮게 만드는 거야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세월이 들어가야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어떤 모습이 보여지느냐 그건 객관이 합니다. 내 이름이 어떻게 보여지느냐. 그래서 주변에서 중복해서 자기에게 어떤 소리가 들린다면 내가 그런 사람인가 보구나 조심해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내가 언제 했다고 펄쩍 뛰게 되면 그 사람이 발전이 없게 됩니다.
어린 아이조차도 사람이면 본능적으로 아는데 짐승도 그러한데 하나님을 중시하고 소망하고 자타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외면을 하실까. 하나님이 지공과 지성의 법에 외면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광된 이름이란 대가와 교환이 됩니다. 항상 함께 갑니다. 그 희생이 지옥에서 건져 크신 사랑이고 우리는 원하고 원함으로 깨닫고 나면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까. 요즘 시대의 불행 중에 하나가 희생과 영광이라는 것은 귀한 것인데도 이런 희생을 두고 손해라는 인식이 어디든지 강한 불행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비교를 해서 그렇습니다. 감사를 할 수 있는 방편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자기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데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의 행복 중에 하나가 자신을 바칠 대상이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반대로 불신자들 조차도 가장 큰 불행 중에 하나가 바칠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10대 20대들은 그게 뭐가 행복이냐 그 생각조차도 사람인지라 만들어놓기를 만들어놓으셨는지라 사람의 몸을 만들어두셨기 때문에 그에 따라 되게 되어졌습니다.
어떤 선생님이 심방하러 가서 안 믿는 가정 학생인데 노는 거 좋아하고 방황을 하다가 청년이 되어서 20대 중후반 즈음 이런 학생들을 만나면 하나를 물어본답니다. 나름대로 놀아봤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봤고 해 보니까 별 거 없더라. 자기 발전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해나가는 것도 좋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불변에 속한 것을 하나님께서 넣어두셨는데 그게 희생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해 희생이 들어갑니다. 복잡한 연구가 없습니다.
아담이 만물의 이름을 지은 것 같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현실의 기준은 하나님의 보실 때 기뻐하실 판단. 언행심사로 직장 생활을 해도 남들이 보고 있지 않아도 하는 것이고 교회에서도 인인관계를 하다보면 나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희생을 함으로 지식의 변화 인식의 변화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보기 이전과 이후의 세계라는 것은 같은 것임에도 다른 세상을 경험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세월 속에 쌓여가는 흔적 하나님 중심 인간 중심의 관점으로 하는 흔적의 발자취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사람이 볼 때야 사람이 볼 때는 왜그리 힘들게 사느냐 할지 몰라도 길게는 하나님이 보실 때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귀하게 표시판으로 세우기 마련입니다. 그게 성경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로 가시겠습니다.
찬송: 100장(예수 앞에 나오면), 101장
본문: 전도서 7장 1절
오류 발생 시 첨부파일 참고 바랍니다.
이름은 단순히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이름이라는 것은 존재의 특성을 담고 있는 것이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으라 하실 때에 아담이 지은 이름은 그냥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고 돌멩이를 보고는 돌멩이의 특성과 존재의 의미까지 해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물은 용기에 따라 바뀌고 특성이 있으니 물이라 그렇습니다. 무생물 뿐만 아니라 모든 짐승과 존재의 이름이 이렇게 지어지셨는데 사람이라는 이름만큼은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지으셨습니다. 그런 아담이 만물의 이름을 지을 때 마음대로 지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보이도록 꼭 맞도록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들여다보면 이름 속에는 존재의 특성이 담겼고 의미와 소망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아담이 지은 것을 보고 하나님이 지어도 그렇게 짓겠다고 그렇게 지었습니다. 관점이 같았기에 그랬습니다. 하나님에게 연결되어 있는 정상적인 상태의 연결입니다. 믿는 사람의 관점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세상을 보든 어떤 선택을 하든 예수님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시각에서 구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모아야하는 것이 믿는 사람의 기본 자세입니다.
이것이 틀어지면 믿는 사람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을 두고 결정을 할 때 굉장히 신중해야합니다. 각자의 현실 각자의 위치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학생의 입장에 있다보면 만사를 학생의 관점으로 보게 되어있고 선생님의 입장으로만 보면 선생님의 입장으로 보게 되어있습니다. 각자가 그 위치를 보면 만사를 바라보고 생각하게 되어지고 입장만 되어버리게 되고 입장에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할 지라도 믿는 사람만큼은 그리 되어선 안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의 영장. 아담의 위치와 입장이 만물의 영장으로 계시고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관점으로 한 것과 같이 오늘도 오늘의 자기 현실에서 만큼은 아담과 같은 입장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남편으로 아내로 있더라도 우리가 가지는 관점은 아담이 이름을 지을 때 가졌던 관점과 같이 관점으로 만사를 볼 줄 알아야합니다.
회사 사장이 직원을 출장을 보냈는데 사장의 입장에서 처리를 해주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아들에게 일을 시켜서 아버지의 심정으로 처리했다면 더 많은 것을 맡기고 싶지 않겠습니까. 동시에 자기에게 주신 현실의 입장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잘 지킬줄도 알아야합니다. 아담이 지은 이름을 기뻐하셨던 이유는 이 두가지를 잘 고려했기에 그렇습니다.
구원 관점 성경관점으로 모든 것을 본다고 해서 가정도 자녀도 직장도 다 팽겨치고 다니면 문제 국방부 장관이 믿는 사람인데 전쟁이 주일에 나면 어떤가. 과거 80년대에 주일 시험이 많을 때였는데 한 번만 치면 평생 직장 해결이 되겠는데 나머지를 애매하게 노동생활 하는 것과 어느 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맞겠는가. 각자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지적하는 방법이 있고 죄짓는 상대방을 바꾸기 위하여 잘 지키고 상대방을 위하여 수고를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양쪽 다 구원이라는 이름은 내세웁니다. 그러나 형편에 따라 다르게 해야합니다.
그런데 의문을 가져야하는 순간에 인내로 기다리면 죄를 외면한 자기 중심의 죄가 됩니다. 반대로 인내로 참아야하는 순간애 분을 내게 되면 자기 중심의 성질을 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구원의 관점으로 신앙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말은 쉬운데 살펴야하는 것이 많아서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나가서는 아니됩니다.
베드로는 죄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가슴에 죄를 평생 묻고 살아 베드로가 베드로가 된겁니다. 두 세 살 아이는 궁금한게 많습니다. 많은 것을 대화해서 집어넣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힘있게 치고난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 아내가 학생이 자녀가 부모가 각자의 입장과 위치를 하는 건데 아무리해도 자타의 구원을 하는 거 같고 이렇게 해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늘 머리 속에 염두해 두고 언행심사를 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목석이 아닌 살아있는 하나님으로 상대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사람이 봐도 아름답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월 속에 옳고 바르게 가다보면 그렇게 되는건데 기뻐하시는 사람을 두고는 표시판을 세워주시길 마련입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믿는 사람의 시각이고 관점입니다. 신앙의 완성이 아니라 최소한의 정체성 기본이 만들어진겁니다. 기본이 되어있는 성도가 생명있는 성도이고 생명이 되어 온 세상과 맏서는 성도가 되어집니다.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자기 현실 자기 입장 위치에서 자기 속에 죄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온 세상과 벌이는 전쟁입니다. 이렇게 핍박하는 온 세상의 이름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그 어떤 모습도 일곱머리 열 뿔의 짐승과 같습니다. 이런 지식 저런 사상 어떤 모습이 되었든지 결국 하나입니다. 마지막에는 어린 양을 대적합니다. 옳고 바른 신앙을 잡아먹기 위해 하는 것이 세상의 본질입니다. 세상의 실체가 이렇다는 것을 알고 상대해야 당하지 않습니다.
룻은 이방여인입니다. 그런데 그 행동이 빛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돌아봐야합니다. 나의 이름은 어떤 이름인가. 남이 해주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해야합니다. 각자 사람에게 그 이름이 빛나도록 각자에게 가장 필요한 위치를 주셨는데 자기 행동으로 자기 위치를 낮게 만드는 거야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세월이 들어가야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어떤 모습이 보여지느냐 그건 객관이 합니다. 내 이름이 어떻게 보여지느냐. 그래서 주변에서 중복해서 자기에게 어떤 소리가 들린다면 내가 그런 사람인가 보구나 조심해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내가 언제 했다고 펄쩍 뛰게 되면 그 사람이 발전이 없게 됩니다.
어린 아이조차도 사람이면 본능적으로 아는데 짐승도 그러한데 하나님을 중시하고 소망하고 자타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외면을 하실까. 하나님이 지공과 지성의 법에 외면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광된 이름이란 대가와 교환이 됩니다. 항상 함께 갑니다. 그 희생이 지옥에서 건져 크신 사랑이고 우리는 원하고 원함으로 깨닫고 나면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까. 요즘 시대의 불행 중에 하나가 희생과 영광이라는 것은 귀한 것인데도 이런 희생을 두고 손해라는 인식이 어디든지 강한 불행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비교를 해서 그렇습니다. 감사를 할 수 있는 방편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자기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데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의 행복 중에 하나가 자신을 바칠 대상이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반대로 불신자들 조차도 가장 큰 불행 중에 하나가 바칠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10대 20대들은 그게 뭐가 행복이냐 그 생각조차도 사람인지라 만들어놓기를 만들어놓으셨는지라 사람의 몸을 만들어두셨기 때문에 그에 따라 되게 되어졌습니다.
어떤 선생님이 심방하러 가서 안 믿는 가정 학생인데 노는 거 좋아하고 방황을 하다가 청년이 되어서 20대 중후반 즈음 이런 학생들을 만나면 하나를 물어본답니다. 나름대로 놀아봤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봤고 해 보니까 별 거 없더라. 자기 발전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해나가는 것도 좋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불변에 속한 것을 하나님께서 넣어두셨는데 그게 희생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해 희생이 들어갑니다. 복잡한 연구가 없습니다.
아담이 만물의 이름을 지은 것 같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현실의 기준은 하나님의 보실 때 기뻐하실 판단. 언행심사로 직장 생활을 해도 남들이 보고 있지 않아도 하는 것이고 교회에서도 인인관계를 하다보면 나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희생을 함으로 지식의 변화 인식의 변화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보기 이전과 이후의 세계라는 것은 같은 것임에도 다른 세상을 경험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세월 속에 쌓여가는 흔적 하나님 중심 인간 중심의 관점으로 하는 흔적의 발자취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사람이 볼 때야 사람이 볼 때는 왜그리 힘들게 사느냐 할지 몰라도 길게는 하나님이 보실 때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귀하게 표시판으로 세우기 마련입니다. 그게 성경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로 가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