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4일 주일오후 - 마태복음 7장 1절 ~ 6절
김동민2021-07-04조회 193추천 30
2021년 7월 4일 주일 오후
찬송: 117장, 131장
본문: 마태복음 7장 1절 ~ 6절
성경은 함축성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있습니다. 함축성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요약해서 담아놨다는 것입니다. 한 문장 속에 많은 이치가 든 것이 성경입니다.
일반적으로 시를 쓰는 분들은 그 시구 속에 여러 가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알기로는 글 쓰는 것 중에 시를 쓰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성경의 시편은 시를 모아놨는데, 그 시들은 특히나 어렵습니다. 성경은 모두 다 함축성이 있어서 여러 의미를 담고 있어서 해석을 해야합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필요한 것은 성경 말씀은 구원의 도리입니다.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생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게 구원입니다. 그 길은 모든 사람들이 다 걸어가는데, 어떻게 걸어가느냐에 따라서 구원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기가 성화되어지고, 하늘 나라에 자기의 실력에 따라서 무대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런 자격과 실력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 구원입니다.
실상의 반대말은 허상입니다. 허상은 그림자라는 뜻입니다. 그림자만 있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실제가 되어야 구원이 되기 때문에 기독교 생활에서 현실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현실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생활이 현실이고 그 현실이 끊어지면 구원도 멈추고 마는 것입니다.
작은 아이 하나라도 그 아이가 자라가는 데에는 세상은 넓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굉장히 크고 많기 때문에 현실을 접하니까 그때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물리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사람의 세포가 수십조개가 되는데, 하루에도 수도 없이 나고 죽고 생기고 그러는 건데, 죽는 것은 세월을 살아가면서 죽게 되어있습니다. 인체 유기적인 조직체라서 하나가 전부 생명체입니다. 우리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요소가 세포고, 그것들이 모두 생명체들입니다. 그래서 없어질 때 죽는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참된 성도들, 말 한 마디를 함부로하지 않고,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욥은 고통스러워서 호소할 때 하나님께서 침 삼킬 때도 나를 놓치지 않으시기를, 그건 욥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보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침 한 번 삼키는 것도 함부로 안하고, 눈동자 돌리는 것도 함부로 안합니다.
성경 말씀은 윤곽적이고 희미한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현실에서 그때 그때 그 시간 하나님의 뜻, 한 가운데 만점짜리 그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 윤곽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과녁에 맞으면 무조건 10점인가요 아니면 6점도 있습니까. 무조건 만점이 아니지요. 그런데 과녁 밖에 나가면 점수가 없지요. 명중은 성경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성경 말씀을 벗어나서,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 기도에 심취하고 감성적인 신앙은 감성적입니다. 자아도취입니다. 성경과 어긋나는데, 마귀입니다. 사울이 기도해서 응답이 없고 하니까 점쟁이를 찾아가지요. 사무엘이 올라왔는데 그건 악령의 역사입니다. 사무엘을 평소 미혹시키는 그 악령이 사무엘의 모습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면 기도도하고 하다보니까 거기에 도취가 되다보면 말씀을 벗어나는 신앙들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성경 안에 있지 성경 밖에 있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백 목사님이 성경에 틀린 것을 주장했다하면 그건 설교록이 틀렸지,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가장 건전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하시는 분들은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실 때 무형의 완전자라 어떻게 나타나셨나, 여러 속성으로 나타나시는데 구원. 구원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완전자를 두고, 전부 구원에 맞춰야하기 때문에 구원 중심으로 해석해야합니다. 성경의 말씀은 구원 중심입니다.
모든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대하고 일을 헤쳐나갈 때 하나님 중심, 구원 중심으로 헤쳐나가면 되고, 그 밖으로 가면 힘들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죽어도 입어도 먹어도 주의 것으로 행동해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것인 동시에 주님은 구원입니다. 믿는 사람의 생활 전부는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대속이라는 구원 역사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남지를 아니합니다. 소금에서 짠 맛이 나는데, 짠 맛을 뺀 소금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거든 비판을 하지 말라. 비판을 받는 것이 나쁜 것인가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백 목사님 생전, 서부교회에서 별 볼일 없는 그런 분들이 그 분 덕분에 목사가 되어서 대접받고 그런 경우가 많고 그런데, 그런데 그런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그 분에게 지적받으면 섭섭합니다. 어떤 경우는 까마득한 교육자에게도 조심하십니다. 섭섭할까 싶어서.
잠깐 정리를 해 보면, 비판은 잘잘못을 따지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아주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판은 좋은 것이 될 수 있는데, 왜 금지했느냐, 자기 중심을 상대방을 그냥 훼방하는 이런 비판은 하지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할 것입니다. 헤아림이라는 것은 세밀한 계산입니다. 조금 더 세밀하게 계산하는 것을 헤아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이라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 보니까 알게 되는데, 보고 알고 잘못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잘못은 정답 기준에서 보면 사소한 것입니다. 어떤 관계로든 있는 사람들, 보면 알게 되고 알면 행하게 되는데 그 언행과 생활과 관계와 이런 것에서 오류가 생겨졌는데, 그게 작은 것,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을 티눈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보고 알고 앎으로 살아가는데 오류가 있는데 자기 오류는 내가 잘못할고 하는 것인데, 대들보. 대들보는 저 천장에 튀어나와서 받치는 게 있습니다. 지붕을 받치는 것을 대들보라고 합니다. 그게 전부인데, 그 대들보가 없으면 집이 무너집니다. 자기 눈에나 대들보는 굉장히 크고 중요한 것인데, 말하자면 주일을 어기는 것은 큰 죄입니다. 탐내는 것도 죄고 도둑질도 죄입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남을 비판하는데 그 면이 자기 중심이 되어서 자기 중심이 사람이 되어있으면 그것은 정말로 큰 죄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거짓말하는 거, 큰일났다 하면서 자기 속에 사람들을 비판하는 그런 것은 들보같은 표현인데, 그걸 깨닫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 중심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 중심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살리려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자녀를 뭘 해도 전부 예쁘다, 사랑스럽다 그것은 자식을 죽이는 잔인한 것이죠. 그런데 진정 아이를 참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사랑 혈육사랑은 눈을 밝게 만듭니다. 자기가 중심인데, 자기 중심은 마지막에 지옥입니다. 자기가 중심이라는 그 안경을 끼고..
백 목사님 말씀 중에서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산에 하늘까지 막혀있는데, 사람들이 가야합니다. 그런데 사람 하나 들어갈만한 구멍을 뚫었습니다. 그 길 이름을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은 좁은 생명길이라고 합니다.
전부 자기 중심으로 성경읽고, 자기 중심으로 기도하고, 자기 중심으로 전도하고, 연보하고, 찬송하고 그러는데 마지막에 가 보니까 다 자기 때문입니다. 홍포입은 부자가 악인처럼 묘사되어있는데, 자색 옷은 좋은 것이고,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베풀었습니다. 형제 간의 우애가 너무 좋아서 음부에서는 자기 형제를 걱정했습니다. 훌륭하고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살아생전 홍포입은 부자는 굉장히 잘 산 사람인데, 알고보니 자기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기라는 것을 꺾기 전에는 신앙 생활은 안됩니다.
저건 상대방의 약점, 단점도 보이고 그래서 이해도 되고 충분히 동기도 되고 그렇습니다.
6절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거룩한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만 거룩하고 천국이 거룩합니다. 거룩한 것이라는 말은 구별하고 구별해서 하나님 형상 닮은 사람 만들고 참 사람 만들어가는, 말하자면 말씀이라고,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것을 사람을 구별하고 구별하는 말씀, 참 사람 만드는 진주. 극 말씀이고 이치고 그런 것인데, 성경 속에 담아주신 사람을 깨끗하게 담아주는 말씀. 같은 사람은 그것으로 몹쓸 사람을 만듭니다. 그 말씀 그 복음으로 개에게 주지 말아라. 돼지에게 던지지 말아라. 돼지는 먹을 때에 새김질을 하지 않습니다. 쪽갈리고 새김질하면 먹을 수 있는데, 돼지는 그러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이익되는 것은 전부 취합니다. 성경말씀은 진주입니다. 집회를 통해서 양성원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나를 깨끗하게 만드는 말씀을 배웁니다. 배운 그 말씀을 가지고, 그 거룩한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살펴서 내 속에 있는 남을 해치는, 개와 같은 남을 물어뜯는 인격성. 그런 것을 거룩한 말씀으로 고치지 아니하면 나중에는 성경 말씀이 자기에게 돼지 앞의 진주처럼 되어버립니다. 자신을 고치지 못하면 말씀은 개 앞에 거룩한 것이고, 돼지 앞의 진주입니다. 개라는 것은 짖고 물어뜯는 것입니다. 남을 해치고, 때리면 맞아 봐야합니다. 그게 구약의 법입니다. 그래야 고쳐집니다. 개와 같은, 좋다고 하면 다 취하는 우리 같은 속성. 이런 것을 고치는 게 진주입니다. 그게 복음의 말씀. 여기까지만 하고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찬송: 117장, 131장
본문: 마태복음 7장 1절 ~ 6절
성경은 함축성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있습니다. 함축성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요약해서 담아놨다는 것입니다. 한 문장 속에 많은 이치가 든 것이 성경입니다.
일반적으로 시를 쓰는 분들은 그 시구 속에 여러 가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알기로는 글 쓰는 것 중에 시를 쓰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성경의 시편은 시를 모아놨는데, 그 시들은 특히나 어렵습니다. 성경은 모두 다 함축성이 있어서 여러 의미를 담고 있어서 해석을 해야합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필요한 것은 성경 말씀은 구원의 도리입니다.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생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게 구원입니다. 그 길은 모든 사람들이 다 걸어가는데, 어떻게 걸어가느냐에 따라서 구원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기가 성화되어지고, 하늘 나라에 자기의 실력에 따라서 무대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런 자격과 실력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 구원입니다.
실상의 반대말은 허상입니다. 허상은 그림자라는 뜻입니다. 그림자만 있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실제가 되어야 구원이 되기 때문에 기독교 생활에서 현실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현실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생활이 현실이고 그 현실이 끊어지면 구원도 멈추고 마는 것입니다.
작은 아이 하나라도 그 아이가 자라가는 데에는 세상은 넓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굉장히 크고 많기 때문에 현실을 접하니까 그때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물리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사람의 세포가 수십조개가 되는데, 하루에도 수도 없이 나고 죽고 생기고 그러는 건데, 죽는 것은 세월을 살아가면서 죽게 되어있습니다. 인체 유기적인 조직체라서 하나가 전부 생명체입니다. 우리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요소가 세포고, 그것들이 모두 생명체들입니다. 그래서 없어질 때 죽는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참된 성도들, 말 한 마디를 함부로하지 않고,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욥은 고통스러워서 호소할 때 하나님께서 침 삼킬 때도 나를 놓치지 않으시기를, 그건 욥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보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침 한 번 삼키는 것도 함부로 안하고, 눈동자 돌리는 것도 함부로 안합니다.
성경 말씀은 윤곽적이고 희미한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현실에서 그때 그때 그 시간 하나님의 뜻, 한 가운데 만점짜리 그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 윤곽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과녁에 맞으면 무조건 10점인가요 아니면 6점도 있습니까. 무조건 만점이 아니지요. 그런데 과녁 밖에 나가면 점수가 없지요. 명중은 성경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성경 말씀을 벗어나서,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 기도에 심취하고 감성적인 신앙은 감성적입니다. 자아도취입니다. 성경과 어긋나는데, 마귀입니다. 사울이 기도해서 응답이 없고 하니까 점쟁이를 찾아가지요. 사무엘이 올라왔는데 그건 악령의 역사입니다. 사무엘을 평소 미혹시키는 그 악령이 사무엘의 모습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면 기도도하고 하다보니까 거기에 도취가 되다보면 말씀을 벗어나는 신앙들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성경 안에 있지 성경 밖에 있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백 목사님이 성경에 틀린 것을 주장했다하면 그건 설교록이 틀렸지,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가장 건전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하시는 분들은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실 때 무형의 완전자라 어떻게 나타나셨나, 여러 속성으로 나타나시는데 구원. 구원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완전자를 두고, 전부 구원에 맞춰야하기 때문에 구원 중심으로 해석해야합니다. 성경의 말씀은 구원 중심입니다.
모든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대하고 일을 헤쳐나갈 때 하나님 중심, 구원 중심으로 헤쳐나가면 되고, 그 밖으로 가면 힘들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죽어도 입어도 먹어도 주의 것으로 행동해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것인 동시에 주님은 구원입니다. 믿는 사람의 생활 전부는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대속이라는 구원 역사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남지를 아니합니다. 소금에서 짠 맛이 나는데, 짠 맛을 뺀 소금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거든 비판을 하지 말라. 비판을 받는 것이 나쁜 것인가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백 목사님 생전, 서부교회에서 별 볼일 없는 그런 분들이 그 분 덕분에 목사가 되어서 대접받고 그런 경우가 많고 그런데, 그런데 그런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그 분에게 지적받으면 섭섭합니다. 어떤 경우는 까마득한 교육자에게도 조심하십니다. 섭섭할까 싶어서.
잠깐 정리를 해 보면, 비판은 잘잘못을 따지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아주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판은 좋은 것이 될 수 있는데, 왜 금지했느냐, 자기 중심을 상대방을 그냥 훼방하는 이런 비판은 하지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할 것입니다. 헤아림이라는 것은 세밀한 계산입니다. 조금 더 세밀하게 계산하는 것을 헤아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이라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 보니까 알게 되는데, 보고 알고 잘못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잘못은 정답 기준에서 보면 사소한 것입니다. 어떤 관계로든 있는 사람들, 보면 알게 되고 알면 행하게 되는데 그 언행과 생활과 관계와 이런 것에서 오류가 생겨졌는데, 그게 작은 것,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을 티눈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보고 알고 앎으로 살아가는데 오류가 있는데 자기 오류는 내가 잘못할고 하는 것인데, 대들보. 대들보는 저 천장에 튀어나와서 받치는 게 있습니다. 지붕을 받치는 것을 대들보라고 합니다. 그게 전부인데, 그 대들보가 없으면 집이 무너집니다. 자기 눈에나 대들보는 굉장히 크고 중요한 것인데, 말하자면 주일을 어기는 것은 큰 죄입니다. 탐내는 것도 죄고 도둑질도 죄입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남을 비판하는데 그 면이 자기 중심이 되어서 자기 중심이 사람이 되어있으면 그것은 정말로 큰 죄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거짓말하는 거, 큰일났다 하면서 자기 속에 사람들을 비판하는 그런 것은 들보같은 표현인데, 그걸 깨닫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 중심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 중심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살리려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자녀를 뭘 해도 전부 예쁘다, 사랑스럽다 그것은 자식을 죽이는 잔인한 것이죠. 그런데 진정 아이를 참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사랑 혈육사랑은 눈을 밝게 만듭니다. 자기가 중심인데, 자기 중심은 마지막에 지옥입니다. 자기가 중심이라는 그 안경을 끼고..
백 목사님 말씀 중에서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산에 하늘까지 막혀있는데, 사람들이 가야합니다. 그런데 사람 하나 들어갈만한 구멍을 뚫었습니다. 그 길 이름을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은 좁은 생명길이라고 합니다.
전부 자기 중심으로 성경읽고, 자기 중심으로 기도하고, 자기 중심으로 전도하고, 연보하고, 찬송하고 그러는데 마지막에 가 보니까 다 자기 때문입니다. 홍포입은 부자가 악인처럼 묘사되어있는데, 자색 옷은 좋은 것이고,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베풀었습니다. 형제 간의 우애가 너무 좋아서 음부에서는 자기 형제를 걱정했습니다. 훌륭하고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살아생전 홍포입은 부자는 굉장히 잘 산 사람인데, 알고보니 자기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기라는 것을 꺾기 전에는 신앙 생활은 안됩니다.
저건 상대방의 약점, 단점도 보이고 그래서 이해도 되고 충분히 동기도 되고 그렇습니다.
6절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거룩한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만 거룩하고 천국이 거룩합니다. 거룩한 것이라는 말은 구별하고 구별해서 하나님 형상 닮은 사람 만들고 참 사람 만들어가는, 말하자면 말씀이라고,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것을 사람을 구별하고 구별하는 말씀, 참 사람 만드는 진주. 극 말씀이고 이치고 그런 것인데, 성경 속에 담아주신 사람을 깨끗하게 담아주는 말씀. 같은 사람은 그것으로 몹쓸 사람을 만듭니다. 그 말씀 그 복음으로 개에게 주지 말아라. 돼지에게 던지지 말아라. 돼지는 먹을 때에 새김질을 하지 않습니다. 쪽갈리고 새김질하면 먹을 수 있는데, 돼지는 그러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이익되는 것은 전부 취합니다. 성경말씀은 진주입니다. 집회를 통해서 양성원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나를 깨끗하게 만드는 말씀을 배웁니다. 배운 그 말씀을 가지고, 그 거룩한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살펴서 내 속에 있는 남을 해치는, 개와 같은 남을 물어뜯는 인격성. 그런 것을 거룩한 말씀으로 고치지 아니하면 나중에는 성경 말씀이 자기에게 돼지 앞의 진주처럼 되어버립니다. 자신을 고치지 못하면 말씀은 개 앞에 거룩한 것이고, 돼지 앞의 진주입니다. 개라는 것은 짖고 물어뜯는 것입니다. 남을 해치고, 때리면 맞아 봐야합니다. 그게 구약의 법입니다. 그래야 고쳐집니다. 개와 같은, 좋다고 하면 다 취하는 우리 같은 속성. 이런 것을 고치는 게 진주입니다. 그게 복음의 말씀. 여기까지만 하고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