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6일 금밤
김동민2025-12-26조회 20추천 1
2025년 12월 26일 금밤
찬송: 27장
본문: 요한복음 1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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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요단강 건너기 전 모세에게 다 보여주셔서 모세는 보고 안 것처럼, 다윗이 성전을 짓지 않았으나 설계도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셔서 성전의 모습을 보고 간 겁니다. 자기가 짓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지 않을까 하고 알려주셔서 솔로몬에게 줬으니까 준 것처럼 오시지 않은 주님을 오실 때 그 모습 오셨을 때 그 모습을 당하신 고난, 가실 거 그걸 이사야는 다 보고 알고 기록했다는 겁니다. 사도 요한의 기록도 그런 걸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주님이 말씀해주신 것을 사도 요한이 안 거지요. 성령이 하나님께 계셨다. 과거입니다. 하나님이시니라, 자기가 모시고 배우면서 따라다녔던 그 주님, 십자가에 돌아가셨던 그 주님이 근본이 어떤 분인지 알고 기록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 사도 요한이 요한 복음 기록할 때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누가가 기록했는데, 누가는 예수님 따라다녔지만, 주님이 직접 부름을 받은 게 사도고, 사도 바울과 함께 활동하는 게 나오고 그 당시에 아는 사람인데 기록한 사람은 뒤에 다 본 거겠지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은 주님 가시고 난 다음에 과거사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성경은 다른 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기록해도 어디까지는 알기 어려운데, 그 하기 어려운 것처럼 되었고, 노년에 요한계시록인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사도 요한은 야고보의 형제입니다. 두 형제 하나가 요한인데 노년에 요한계시록 기록할 때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으로, 그 주님을 본 요한과 자기가 본 주님과 요한계시록의 주님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아주 가까이 모셔서 주님 품에 의지하고 그랬습니다. 특히 많이 받은 제자가 사도 요한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도 요한인데 그렇게 모셨던 그 주님을 요한 계시록 기록할 때 대시 봤는데, 그 본 날이 언제지요. 사도 요한이 그때 어디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합니까. 언제 기록합니까. 주의 날에, 귀향살이 간 겁니다. 주일을 맞았는데 그 주님 모솝의 자기가 생전에 봤던 주님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 주님인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나님이다 말씀이 사람되어 오셨다. 같은 사람인데 그걸 따라서 다른 차원이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참고로 기억하시면 되겠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하나님이다.
함께라는 말을 쓸 때는 둘 이상입니다. 혼자있는 걸 함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말씀이 함께 계셨는데 그런 정체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인데 그래서 한 분인데 세 분인 성자 하나님, 말씀이라는 이름 가질 성자 하나님인데, 태초에 계셨다. 영원 전입니다. 그래서 사람되어 오신 주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고 영원 전 그분은 하나님이셨고 말씀은 성자 하나님이었다. 이 세상을 다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셨다. 그 창조주 하나님 영원 전 자존하신 이 세상을 말씀으로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굳이 하나님 이름은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은 말씀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걸 굳이 말씀이라고 하신 것은 말씀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새는 말이 짹짹하지요. 돼지는 꿀꿀하는 게 말입니다. 소는 음메하는 게 소의 말입니다. 강아지는 멍멍 짓는 것입니다. 물고기들도 언어가 있습니다. 식물도 언어가 있을지 모릅니다. 요즘에는 식물들도 감정이 있다고 하지요. 음악을 들려주고 하면 잘 자라고 좋아지는 그런 과학 실험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라는 이름 가진 이유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린 겁니다.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게 말씀 하나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말입니다 말, 말씀 하나님, 가르치고 전하고 알려주고 보여주는 게 말이고 말씀입니다. 그 역할 하시는 이름이 말씀 하나님 이름으로 하신 겁니다. 오신 그 주님이 다시 보니까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오신 모든 게 다 그분이 지으셨는데 하나님만의 생명이 있는데 그게 다시보니까 빛이다. 그러면 사람되신 주님 도성인신하신 주님, 그 안에 생명이 있는데 그 생명은 근원적인 생명이고 연결이고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은 연결시켜준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것이고 소망을 주시는 겁니다. 빛이란 희망이고 소망이고 그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되어오신 주님이 이 세상에서 빛으로 오신 겁니다. 빛으로 오신 것은 비유하자면 등불로 오셨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등불로 오셨으니까 등불이니까 태양으로 오셨다. 태양빛이 있으면 다 밝혀지는 거지요. 어디든지 등에 가면 어둠은 다 사그라지고 밝아지는 게 됩니다. 주님이 빛으로 오셨으니까 그 빛의 주님, 빛으로 오신 주님이 빛으로 오셨으니까 빛의 광도라고 합니까. 밝기가 어느 정도로 밝을까. 하나님 빛이 오셨으니까 측량할 수 없지요. 밝음으로 오셨다. 그 밝음의 내용이 뭐냐, 뭔가 보여주는건데 그래서 창세기 1장에 제일 먼저 빛을 지으신 목적이 뭐냐, 알게 하시려고 이런 것이 있다 빛의 개념.
우리가 수학이나 과학의 원리 어려운 것은 모르니까, 다른 것도 그렇고 옳은 게 있다 그런 게 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은 그게 뭔지 옳고 그름이 뭔지 그런 사람은 개념 자체가 없는 겁니다. 그 옳고 그름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무엇을 보여주시려는가. 무엇을 하시려고 빛을 지으셨는가. 그걸 말씀 드렸는데 말하자면 각도가 다르지만은 요즘 기억 니은 디귿 리을 배웁니까. 요즘 배워요, 배웁니까. 그 기억 니은 배우고 가나다라 배우는 것은 나중에 글자 배우고 단어 배우고 문장 배워서 글을 알게하고 알면 아는 만큼 세상을 알게 하는 겁니다. 국어를 모르면 수학도 과학도 역사도 다 모르는 겁니다. 그렇게 많은 걸 가르치는 것처럼 수학도 그런 것처럼 빛이라는 기초적인 개념을 만드신 것은 무엇을 하려고 하셨는가. 목적이고 그 목적은 사람을 빛의 사람 만드시는 것이고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가려면 전제가 뭐냐, 하나님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리시려고 보여주시려고 알게하시려고 첫날에 빛을 지우셨고, 예수님께서 빛으로 하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나타낸 분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사람같은 모습 이건 아니고 그분의 오신 그 자체, 예수님이 오신 것을 성탄이라고 합니다. 성탄을 네 글자로 하면 도성인신이라고 합니다. 그 속에는 한 없는 사랑이 들었고 희생이 들었습니다. 목적이 들었고 그게 오신 주님의 형상입니다. 성탄과 도성인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분의 희생이고 목적이다 그 말이지요.
사랑의 작용이었고 구원을 위한 그렇게 오신 겁니다. 빛으로 오셨다 그럽니다. 오신 그 자체가 빛이고, 낮아지신 거, 가난해지신 거, 이 속에 사랑이 든 이거 자체가 빛이 되는 겁니다. 주님 오셨을 때 대속의 생애를 포함한 찬송이지만은 두고 누가복음을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천사들의 찬송입니다. 그 속에 사랑이 들었고 희생이 들었고 그 구원의 소망 가지고 그게 빛으로 되신 모습입니다. 그게 밝음이고 보여주는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빛으로 오셨다는 말은 다른 면으로 소망으로 오셨다 구원으로 오셨다 다 포함이 다 됩니다.
모형을 보면 원형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봤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두 번째, 뭐하러 오셨느냐, 빛을 주시려고, 빛을 주신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빛이 뭐지요. 빛이 무엇입니까. 빛은 보는 겁니다. 보게 하는 것, 보는 게 뭐지요. 알게 하는 겁니다. 빛에 대한 말씀은 이건 핵심이 이겁니다. 빛이란 보게 하는 것이고 알게 하는 겁니다. 아는 것은 모든 것의 출발입니다. 지식은 출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도 신앙생활도 지식은 출발이니다. 지식 없는 세상 활동은 말이 안되고 지식 없는 신앙은 말이 안됩니다. 그게 빛입니다. 아는 것. 오셔서 하는 것은 알리셨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대속의 생애로, 하나는 복음을 전하심으로 알리신 겁니다. 그래서 사람되어오신 그 자체가 빛이고 오셔가지고 33년 4개월에 사생활 공생활로 살아가신 거 자체가 빛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거다. 이게 천국에 가는 길이고 걸어가신 그 구원의 생애 그게 보여주신 겁니다.
가장 좋은 교훈은 무엇입니까. 직접 행함으로 자기 자책을 살아감으로 보여준 앞서가지 않는 교훈은 산 교훈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앞서 가심으로 대속의 생애를 사셨고 많은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많은 진리를 하셨습니다. 그 복음을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인가요. 그게 전부 지식입니다. 지식이 전부 또 말하면 빛입니다. 마태복음 5장이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게 우리에게 빛을 주신 겁니다. 받아서 내 것 삼으면 빛을 가지는 게 되는 겁니다. 그 생애를 믿음으로 알고, 성탄과 성찬이 이어지는데 성탄은 출발이고 성찬은 결과입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주님 말씀을 주님의 대속의 생애를 성경을 통해서 보고 읽고 듣고 해서 주님이 이렇게 살아가셨구나 살아가신 동기와 목적과 과정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원에서 짊어지시고 살아가셨구나.
주님 대속의 생애는 그분의 말씀을 알아서 가지면 빛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일단 지식적으로 되는 겁니다. 이걸 주시려고 오신 겁니다. 사람을 인도하는 보여주는 이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내가 길이다, 내가 진리다, 내가 생명이다. 성찬식에는 요한복음 6장에는 떡이다 그랬습니다. 나를 먹어야 영생한다. 주님이 길입니까. 주님이 진리입니까. 생명이라, 생명이다. 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오신 그 자체 생애 가르친 말씀 이게 전부 길이며 진리며 생명입니다.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게 떡을 만드는 겁니다. 주님을 먹는 거지요. 이걸 우리에게 주시려고, 지식을 정해주시는 겁니다. 정해주심으로 듣고 깨달아서 알게 하시려고, 그러기 때문에 성경 읽고 주님 복음을 깨달아서 삼지 못하면 빛을 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이는 빛이라고 했습니다. 온 세상을 밝혀놨는데 그 중에서도 가롯 유다는 어둠으로 기어들어갔고 많은 사람은 밝아도 이 세상에 밝은 대낯입니다. 햇빛맨 들어가면 밝고 따뜻합니다. 그런데 환한 대낯인데 물질 세상은 어두운 곳에 있습니다. 그 어두운 곳만 찾아다니는 바퀴벌레가 있고 쥐가 있고 어둡고 습한 그런 곤충들이 있는 겁니다. 밝음을 좋아하는 것도 있고, 빛과 어두움의 생애가 있는 거지요. 빛이라는 것은 밝은 게 빛입니다.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밝은 게 빛이고 드러나는 것이고 드러나는 것은 거리낌이 없고 숨기는 게 없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제 거기서 착각을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 게 잇습니다. 나는 떳떳한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합니다. 여학생들 어릴 때부터 옷을 잘못 입혀놓으면 커서도 그렇게 입는게 당연해집니다. 치마도 짧게 입고 상의도 짧게 입히고 그러면 세상 노래 따라부르고 춤추는 거 따라가면은 그게 전혀 이상하지를 않습니다 커도.
그래서 안 믿는 가정의 아이들, 우리 공회 아이들하고 놔놓으면 안 접해놔도 종자가 다릅니다. 생각 사고 방식이 다릅니다. 이 세상에는 그게 전부 다가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게 왜 이상해 유치원 선생님들이 남학생 여학생을 같은 자리 앉히고 노래부르고 춤추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저런 짓을 하고 있어, 나쁜 짓 못된 짓하고 있어. 그분들은 왜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릴 때부터 원래부터 그랬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참 중요한거지요. 어둠 속에서 살다보면은 익숙해지고 자기 환경이 되는 겁니다. 밝은 데에 사는 사람이 어둠 속에 가면 못 견디는 겁니다. 그래서 빛이라는 것은 밝은 겁니다. 환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숨길 게 없다는 거지요. 자신만만한데, 그래서 뭐가 문제라고요,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는데 잘못알았씁니다.
주일날 텔레비전 보는 게 뭐가 이상해. 가족들과 함께 외식도 하고 예수믿는 사람 중에 그게 자연스러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린 그걸 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일반 교계는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왜 그런가요. 잘못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거리낌 없는 것이고 당당한 것입니다. 거리낌 없습니다, 그래서 밝음이란 아는 것 중에서도 바로 알아야 밝은 겁니다. 잘못 아는 것은 밝은 게 아닙니다. 잘못하는 것은 어둡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지식이 있습니다. 예수님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은 정통 교파고 율법을 알았습니다. 율법 박사 성경 박사들입니다. 제사장들은 머리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알았습니까. 알았으면 못박아 죽이지 않았지요. 예수님께서 보신 율법과 그 율법이 틀렸습니다. 그게 왜 예수님 못박아 죽였습니까.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이단이라고 죽인 게 예수님 못 박아 죽인 겁니다.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율법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둠에 속했고 그런 겁니다. 바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몰래하는 것 선생님 몰래 거리낌에 하는 것도 어두운 겁니다. 거짓말 말할 거 없고 자기 속에 잘못된 욕심 감정 삐뚤어진 거 어둠에 속하는 겁니다. 그런 어두움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은 빛에 속하는 겁니다. 자기를 꺾는 의지도 하는 겁니다. 열심히 충성하는 것도 빛에 속하는 겁니다. 빛과 어둠을 구분해서 빛으로 오셨고 빛을 주러 오셨습니다. 대속의 그 생애가 비추이고 깨달아 알면 빛을 받은 사람이고, 살아나가면 빛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빛으로 살면 빛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바로 알아서 빛의 사람이 되면 주님 닮아가는 사람이 되고 소망하는 구원이 되게 되는 겁니다.
첫
찬송: 27장
본문: 요한복음 1장 1절
오류 발생 시 첨부 파일 참조 바랍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요단강 건너기 전 모세에게 다 보여주셔서 모세는 보고 안 것처럼, 다윗이 성전을 짓지 않았으나 설계도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셔서 성전의 모습을 보고 간 겁니다. 자기가 짓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지 않을까 하고 알려주셔서 솔로몬에게 줬으니까 준 것처럼 오시지 않은 주님을 오실 때 그 모습 오셨을 때 그 모습을 당하신 고난, 가실 거 그걸 이사야는 다 보고 알고 기록했다는 겁니다. 사도 요한의 기록도 그런 걸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주님이 말씀해주신 것을 사도 요한이 안 거지요. 성령이 하나님께 계셨다. 과거입니다. 하나님이시니라, 자기가 모시고 배우면서 따라다녔던 그 주님, 십자가에 돌아가셨던 그 주님이 근본이 어떤 분인지 알고 기록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 사도 요한이 요한 복음 기록할 때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누가가 기록했는데, 누가는 예수님 따라다녔지만, 주님이 직접 부름을 받은 게 사도고, 사도 바울과 함께 활동하는 게 나오고 그 당시에 아는 사람인데 기록한 사람은 뒤에 다 본 거겠지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은 주님 가시고 난 다음에 과거사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성경은 다른 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기록해도 어디까지는 알기 어려운데, 그 하기 어려운 것처럼 되었고, 노년에 요한계시록인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사도 요한은 야고보의 형제입니다. 두 형제 하나가 요한인데 노년에 요한계시록 기록할 때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으로, 그 주님을 본 요한과 자기가 본 주님과 요한계시록의 주님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아주 가까이 모셔서 주님 품에 의지하고 그랬습니다. 특히 많이 받은 제자가 사도 요한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도 요한인데 그렇게 모셨던 그 주님을 요한 계시록 기록할 때 대시 봤는데, 그 본 날이 언제지요. 사도 요한이 그때 어디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합니까. 언제 기록합니까. 주의 날에, 귀향살이 간 겁니다. 주일을 맞았는데 그 주님 모솝의 자기가 생전에 봤던 주님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 주님인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나님이다 말씀이 사람되어 오셨다. 같은 사람인데 그걸 따라서 다른 차원이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참고로 기억하시면 되겠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하나님이다.
함께라는 말을 쓸 때는 둘 이상입니다. 혼자있는 걸 함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말씀이 함께 계셨는데 그런 정체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인데 그래서 한 분인데 세 분인 성자 하나님, 말씀이라는 이름 가질 성자 하나님인데, 태초에 계셨다. 영원 전입니다. 그래서 사람되어 오신 주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고 영원 전 그분은 하나님이셨고 말씀은 성자 하나님이었다. 이 세상을 다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셨다. 그 창조주 하나님 영원 전 자존하신 이 세상을 말씀으로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굳이 하나님 이름은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은 말씀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걸 굳이 말씀이라고 하신 것은 말씀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새는 말이 짹짹하지요. 돼지는 꿀꿀하는 게 말입니다. 소는 음메하는 게 소의 말입니다. 강아지는 멍멍 짓는 것입니다. 물고기들도 언어가 있습니다. 식물도 언어가 있을지 모릅니다. 요즘에는 식물들도 감정이 있다고 하지요. 음악을 들려주고 하면 잘 자라고 좋아지는 그런 과학 실험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라는 이름 가진 이유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린 겁니다.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게 말씀 하나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말입니다 말, 말씀 하나님, 가르치고 전하고 알려주고 보여주는 게 말이고 말씀입니다. 그 역할 하시는 이름이 말씀 하나님 이름으로 하신 겁니다. 오신 그 주님이 다시 보니까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오신 모든 게 다 그분이 지으셨는데 하나님만의 생명이 있는데 그게 다시보니까 빛이다. 그러면 사람되신 주님 도성인신하신 주님, 그 안에 생명이 있는데 그 생명은 근원적인 생명이고 연결이고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은 연결시켜준다는 말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것이고 소망을 주시는 겁니다. 빛이란 희망이고 소망이고 그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되어오신 주님이 이 세상에서 빛으로 오신 겁니다. 빛으로 오신 것은 비유하자면 등불로 오셨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등불로 오셨으니까 등불이니까 태양으로 오셨다. 태양빛이 있으면 다 밝혀지는 거지요. 어디든지 등에 가면 어둠은 다 사그라지고 밝아지는 게 됩니다. 주님이 빛으로 오셨으니까 그 빛의 주님, 빛으로 오신 주님이 빛으로 오셨으니까 빛의 광도라고 합니까. 밝기가 어느 정도로 밝을까. 하나님 빛이 오셨으니까 측량할 수 없지요. 밝음으로 오셨다. 그 밝음의 내용이 뭐냐, 뭔가 보여주는건데 그래서 창세기 1장에 제일 먼저 빛을 지으신 목적이 뭐냐, 알게 하시려고 이런 것이 있다 빛의 개념.
우리가 수학이나 과학의 원리 어려운 것은 모르니까, 다른 것도 그렇고 옳은 게 있다 그런 게 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은 그게 뭔지 옳고 그름이 뭔지 그런 사람은 개념 자체가 없는 겁니다. 그 옳고 그름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무엇을 보여주시려는가. 무엇을 하시려고 빛을 지으셨는가. 그걸 말씀 드렸는데 말하자면 각도가 다르지만은 요즘 기억 니은 디귿 리을 배웁니까. 요즘 배워요, 배웁니까. 그 기억 니은 배우고 가나다라 배우는 것은 나중에 글자 배우고 단어 배우고 문장 배워서 글을 알게하고 알면 아는 만큼 세상을 알게 하는 겁니다. 국어를 모르면 수학도 과학도 역사도 다 모르는 겁니다. 그렇게 많은 걸 가르치는 것처럼 수학도 그런 것처럼 빛이라는 기초적인 개념을 만드신 것은 무엇을 하려고 하셨는가. 목적이고 그 목적은 사람을 빛의 사람 만드시는 것이고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가려면 전제가 뭐냐, 하나님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리시려고 보여주시려고 알게하시려고 첫날에 빛을 지우셨고, 예수님께서 빛으로 하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나타낸 분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사람같은 모습 이건 아니고 그분의 오신 그 자체, 예수님이 오신 것을 성탄이라고 합니다. 성탄을 네 글자로 하면 도성인신이라고 합니다. 그 속에는 한 없는 사랑이 들었고 희생이 들었습니다. 목적이 들었고 그게 오신 주님의 형상입니다. 성탄과 도성인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분의 희생이고 목적이다 그 말이지요.
사랑의 작용이었고 구원을 위한 그렇게 오신 겁니다. 빛으로 오셨다 그럽니다. 오신 그 자체가 빛이고, 낮아지신 거, 가난해지신 거, 이 속에 사랑이 든 이거 자체가 빛이 되는 겁니다. 주님 오셨을 때 대속의 생애를 포함한 찬송이지만은 두고 누가복음을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천사들의 찬송입니다. 그 속에 사랑이 들었고 희생이 들었고 그 구원의 소망 가지고 그게 빛으로 되신 모습입니다. 그게 밝음이고 보여주는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빛으로 오셨다는 말은 다른 면으로 소망으로 오셨다 구원으로 오셨다 다 포함이 다 됩니다.
모형을 보면 원형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봤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두 번째, 뭐하러 오셨느냐, 빛을 주시려고, 빛을 주신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빛이 뭐지요. 빛이 무엇입니까. 빛은 보는 겁니다. 보게 하는 것, 보는 게 뭐지요. 알게 하는 겁니다. 빛에 대한 말씀은 이건 핵심이 이겁니다. 빛이란 보게 하는 것이고 알게 하는 겁니다. 아는 것은 모든 것의 출발입니다. 지식은 출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도 신앙생활도 지식은 출발이니다. 지식 없는 세상 활동은 말이 안되고 지식 없는 신앙은 말이 안됩니다. 그게 빛입니다. 아는 것. 오셔서 하는 것은 알리셨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대속의 생애로, 하나는 복음을 전하심으로 알리신 겁니다. 그래서 사람되어오신 그 자체가 빛이고 오셔가지고 33년 4개월에 사생활 공생활로 살아가신 거 자체가 빛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거다. 이게 천국에 가는 길이고 걸어가신 그 구원의 생애 그게 보여주신 겁니다.
가장 좋은 교훈은 무엇입니까. 직접 행함으로 자기 자책을 살아감으로 보여준 앞서가지 않는 교훈은 산 교훈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앞서 가심으로 대속의 생애를 사셨고 많은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많은 진리를 하셨습니다. 그 복음을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인가요. 그게 전부 지식입니다. 지식이 전부 또 말하면 빛입니다. 마태복음 5장이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게 우리에게 빛을 주신 겁니다. 받아서 내 것 삼으면 빛을 가지는 게 되는 겁니다. 그 생애를 믿음으로 알고, 성탄과 성찬이 이어지는데 성탄은 출발이고 성찬은 결과입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주님 말씀을 주님의 대속의 생애를 성경을 통해서 보고 읽고 듣고 해서 주님이 이렇게 살아가셨구나 살아가신 동기와 목적과 과정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원에서 짊어지시고 살아가셨구나.
주님 대속의 생애는 그분의 말씀을 알아서 가지면 빛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일단 지식적으로 되는 겁니다. 이걸 주시려고 오신 겁니다. 사람을 인도하는 보여주는 이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내가 길이다, 내가 진리다, 내가 생명이다. 성찬식에는 요한복음 6장에는 떡이다 그랬습니다. 나를 먹어야 영생한다. 주님이 길입니까. 주님이 진리입니까. 생명이라, 생명이다. 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오신 그 자체 생애 가르친 말씀 이게 전부 길이며 진리며 생명입니다.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게 떡을 만드는 겁니다. 주님을 먹는 거지요. 이걸 우리에게 주시려고, 지식을 정해주시는 겁니다. 정해주심으로 듣고 깨달아서 알게 하시려고, 그러기 때문에 성경 읽고 주님 복음을 깨달아서 삼지 못하면 빛을 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이는 빛이라고 했습니다. 온 세상을 밝혀놨는데 그 중에서도 가롯 유다는 어둠으로 기어들어갔고 많은 사람은 밝아도 이 세상에 밝은 대낯입니다. 햇빛맨 들어가면 밝고 따뜻합니다. 그런데 환한 대낯인데 물질 세상은 어두운 곳에 있습니다. 그 어두운 곳만 찾아다니는 바퀴벌레가 있고 쥐가 있고 어둡고 습한 그런 곤충들이 있는 겁니다. 밝음을 좋아하는 것도 있고, 빛과 어두움의 생애가 있는 거지요. 빛이라는 것은 밝은 게 빛입니다.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밝은 게 빛이고 드러나는 것이고 드러나는 것은 거리낌이 없고 숨기는 게 없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제 거기서 착각을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 게 잇습니다. 나는 떳떳한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합니다. 여학생들 어릴 때부터 옷을 잘못 입혀놓으면 커서도 그렇게 입는게 당연해집니다. 치마도 짧게 입고 상의도 짧게 입히고 그러면 세상 노래 따라부르고 춤추는 거 따라가면은 그게 전혀 이상하지를 않습니다 커도.
그래서 안 믿는 가정의 아이들, 우리 공회 아이들하고 놔놓으면 안 접해놔도 종자가 다릅니다. 생각 사고 방식이 다릅니다. 이 세상에는 그게 전부 다가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게 왜 이상해 유치원 선생님들이 남학생 여학생을 같은 자리 앉히고 노래부르고 춤추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저런 짓을 하고 있어, 나쁜 짓 못된 짓하고 있어. 그분들은 왜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릴 때부터 원래부터 그랬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참 중요한거지요. 어둠 속에서 살다보면은 익숙해지고 자기 환경이 되는 겁니다. 밝은 데에 사는 사람이 어둠 속에 가면 못 견디는 겁니다. 그래서 빛이라는 것은 밝은 겁니다. 환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숨길 게 없다는 거지요. 자신만만한데, 그래서 뭐가 문제라고요,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는데 잘못알았씁니다.
주일날 텔레비전 보는 게 뭐가 이상해. 가족들과 함께 외식도 하고 예수믿는 사람 중에 그게 자연스러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린 그걸 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일반 교계는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왜 그런가요. 잘못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거리낌 없는 것이고 당당한 것입니다. 거리낌 없습니다, 그래서 밝음이란 아는 것 중에서도 바로 알아야 밝은 겁니다. 잘못 아는 것은 밝은 게 아닙니다. 잘못하는 것은 어둡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지식이 있습니다. 예수님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은 정통 교파고 율법을 알았습니다. 율법 박사 성경 박사들입니다. 제사장들은 머리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알았습니까. 알았으면 못박아 죽이지 않았지요. 예수님께서 보신 율법과 그 율법이 틀렸습니다. 그게 왜 예수님 못박아 죽였습니까.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이단이라고 죽인 게 예수님 못 박아 죽인 겁니다.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율법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둠에 속했고 그런 겁니다. 바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몰래하는 것 선생님 몰래 거리낌에 하는 것도 어두운 겁니다. 거짓말 말할 거 없고 자기 속에 잘못된 욕심 감정 삐뚤어진 거 어둠에 속하는 겁니다. 그런 어두움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은 빛에 속하는 겁니다. 자기를 꺾는 의지도 하는 겁니다. 열심히 충성하는 것도 빛에 속하는 겁니다. 빛과 어둠을 구분해서 빛으로 오셨고 빛을 주러 오셨습니다. 대속의 그 생애가 비추이고 깨달아 알면 빛을 받은 사람이고, 살아나가면 빛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빛으로 살면 빛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바로 알아서 빛의 사람이 되면 주님 닮아가는 사람이 되고 소망하는 구원이 되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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