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5일 주일 오전
김동민2025-10-05조회 14
2025년 10월 5일 주일 오전
찬송: 50장, 56장
본문:이사야 53장 7절
오류 발생 시 첨부 파일 참조 바랍니다.
하나님은 80억 인구 얼굴이 다 다릅니다. 사람은 다 다르다는 것이고 얼굴이 다른 만큼 성격도 성향도 다 다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비판하거나 흉보거나 그러면 안됩니다. 나는 못하는데 너는 왜 못하냐 참 나쁜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고 분량대로 각자의 입장이 다 있습니다. 주님은 2000년 전에 오셔서 걸어가셨습니다. 그 걸음은 각자 자기 형편 처지 입장 사정 분량 따라 자기 현실에서 걸어가는 겁니다. 주님은 세상 오셔서 걸어가실 때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어서 걸어가셨습니다. 시기가 다르고 분위기가 다르고 겉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겁니다. 주님 가신 길은 우리 길입니다. 우리 구원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길입니다 내가 들어갈 나의 신앙의 길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어떤 과정으로 우리의 길이다, 가는 방법은 겉은 다르나 속은 같습니다.
원형을 닮아가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믿음으로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믿음이 무엇이 믿음이냐, 세상 사람의 믿음은 주관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 믿음이란 객관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리실 때 받아들이는 게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는 게 믿음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건 알려주지 않으면 못 믿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렇겠다 싶은 것도 있으나 사람의 기준 지식과 상식과 이치와 역사를 기반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세상 지식이 있는 것이고 내 속에 받아들인 게 믿음입니다.
믿을 때 나타난다 그 말은 여러 면이 있고 각도가 있습니다.주님 가신 길에 효력이 나타납니다. 그런 뜻입니다. 이해하실 분들은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주님가신 그 길은 시각이고 인식으로 볼 때, 이건 사람들이 아는 상식입니다. 달리 보이면 사람이 보이는대로 생각이 되고 계산이 되고 판단이 되고 사람의 시각 각도라는 겁니다. 사람의 각도 사람의 시각 이 세상과 사람이라는 걸 왜 자꾸 말하냐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사람이라는 것은 초월해야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보복당하고 한국 사업가들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려울겁니다. 믿는 사람의 세상 관계는 어떻게 되지요, 배와 바다의 관계입니다.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서로 섞이면 안되는 겁니다. 요즘 정치판에 종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단 탄압은 우리들의 앞날입니다. 정치가가 이단 없앤다고 탄압하면 우리에게 올 겁니다. 예수님은 계실 때 정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정통이 아니었습니다. 시대마다 다 그랬습니다. 마지막 가면 그 화살이 우리에게 오게 되는 것입니다. 끊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 가신 그 오신 그 모습 걸어가신 그 모습이 사람들이 볼 때 세상이 볼 때는 고운 모양과 풍채가 없는 길이었습니다. 고운 모양이란 아름다운겁니다. 고운 겁니다. 말하자면 평안한 겁니다. 개인이 평안하고 가정이 평안하고 안정된 겁니다. 고요한 겁니다. 요즘 세상 소소한 행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건강해야하고 사건사정이 되는 겁니다.
가정의 경제 문제 건강문제 아이들 문제 일들이 생기면 그게 고운모양 없는 게 되는 겁니다. 주님 오신 그 모습에는 그게 없었습니다. 풍채라는 것은 사람들이 따를만한 돈입니다. 좋은 인물 배경 다 동경하는 가지고 싶어하는 이런 것을 풍채라고 합니다. 주님 가신 길은 풍채가 없었습니다. 신앙의 길은 항상 험하기만 한 것인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부자였고 요셉은 총리였습니다. 헛된 길이 아니다.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고 목석이 아니고 살아계시는데 그 길을 말씀대로 따라가면 이 세상에서 고운 모양도 주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삭도 요셉도 다윗도 풍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착점이 어디냐. 십자가의 것이고 본인이 그렇게하지 않아도 외부로 나타나지 않아도 그런 고운 풍채를 가졌던 믿음의 존재는 십자가 지고 살았습니다.
네 번째. 이 주님 가신 그 길은 자기를 위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자기 위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 오실 때부터 많은 사람에게 오신 분입니다. 그분의 뜻을 대해서 인간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 인간이 백성들인데 그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당사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려면 건지려고 하면 헤엄 잘치는 힘있는 사람이 들어가서 빠진 사람을 기절시켜야한답니다. 발버둥치면 그 사람이 얼마나 센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멀리서 줄을 던지거나 그래야한다지요. 이랬든 저랬든 물에 빠졌던 무엇에 빠졌던 그게 희생이 되어야합니다. 안 들어가면 안되는 것이지요. 이걸 가르켜서 대속의 법이라고합니다. 주님 가신 생애를 가르켜서 대속의 생애라고 합니다. 그 주님 가신 그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대속의 생애는 될 수가 없었습니다. 죄 지어서 죽었기 때문에 대신 죽으신 것은 우리가 참 나오는데 우주적인 고난이라고 합니다. 영혼을 드렸다는 말이 나오거든요. 마음이 나오는 거거든요. 비교 못하게 다른 사람이 나오는 것이거든요.
앞으로 어디까지 모르겠으나 지옥의 고통이라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대속을 하셨습니다. 주님 따라가는 우리의 길은 대속의 사람이란 양면이 다 있지요. 위 아래가 있는 겁니다. 아무리 낮은 사람도 있는 것이고 우리 믿는 사람은 우리들은 한 말로 대속의 생애를 살아야하는데 누군가 내가 죄의 짐을 대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보다 어린 사람 약한 사람 모르는 사람의 죄를 내가 그 죄를 없애기 위해서 대신 짓는 게 대속의 생애입니다. 주님은 구주로 가셨고 자기 전도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부부가 있습니다. 부부가 부부인데 아무리 비슷해도 장단점이 있을겁니다. 대게 살펴보면 남편의 장점은 아내의 단점이고 아내의 장점은 남편의 단점인 게 일반적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모르는 거 서로 채워주고 반대로 남편의 모르는 것은 약한 것은 아내가 하고 함께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부족함을 채워주고 함께 가는 것이 중심이 되는 것인데 대속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채워주고 이러면 서로 부부가 대속의 생애를 살아가는 게 됩니다. 세상 소식을 들어보면 우리들의 인식과는 다른 세상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뇌 구조는 자체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진화론에서 그러잖습니까. 환경에 따라서 구조 자체가 변하는게 진화론입니다. 진화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자연 변화 과정이었습니다. 모든 과학은 성경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와 과학은 양립이 아니고 종교 안에 과학이 있는게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과학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가 그런 시대인데 뇌 구조가 달라지는데 부부가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우리 공회에서 제대로 사는 모습과 제가 아는 그런 모습과 일반 보편적인 부부 모습은 세계자체가 다릅니다. 명절이 되니까 가장 큰 갈등이 뭐라던가요. 어느 쪽을 먼저 가느냐. 시댁에 먼저 가야하냐 친가 먼저 가야하냐. 이거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이혼까지 간답니다. 이해는 되지요. 우리도 그런 거 있습니까. 우리 공회 부부는 그런 것이 있으면 인식 바꿔야합니다. 그런 거 때문에 부부가 싸운다 갈라진다. 차원이 다른 거지요. 대속의 생애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대속이라는 것은 값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향해서 다 바쳤으니까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속의 기본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두고 지금은 어렵지만은 반사 선생님들이 전도할 대상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들을 전도합니다.
그래서 교회갈래 하고 남남입니다. 그 모르는 학생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기도합니다. 왜 기도합니까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 그래서 밥도 사주고 과자도 사주고 다 챙겨줍니다. 왜 그래야합니까. 그런 것을 가르켜서 뭐라고 합니까. 대속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왜 너를 위해서 죽어야하냐. 피흘려야하냐. 그렇게 주님이 따지는 거지요. 내 너를 위하여, 우리도 하는데 피한방울 안 섞인 것에 대해서 그러는데 한 밥 같이 먹는 부부가 어느 쪽으로 먼저가는 것인가. 유치원 아이보다 못한 거지요. 어느쪽을 먼저 좋은 쪽으로 가야합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거지요. 대속의 길입니다. 낮아지셨고 가난해지셨고 그 가난한 길이 대속의 길입니다.
다섯 번째 주님 가신 길은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말이 필요가 없으니까. 대화 될 사람이 없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무언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이신 역사에 대속하는 겁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주인을 위해서 죽어야하는 어린 양이 자기 먹고 마심으로 만든 털을 다 줍니다. 그래서 그 양과 같이 주님 모습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무언의 길입니다. 무언으로 가는 길. 무언은 무언인데 무언 속에 많은 것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겁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제사장들의 부하들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주님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대화가 되는 사람이 있고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격 있는 사람들은 안되는 거지요. 무언으로 가는 길입니다. 자기 사명에만 집중한다는 겁니다. 끌려갔으니 그가 산자에 땅에서 마땅이 형벌을 받는 것이고 주님 가신 길은 세상이 이해를 못하는 길입니다. 죄 지은 생활 구원은 대속의 법칙이라는 것은 모르는 겁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다 하셨으나 대속의 길을 걸어갈 때 내가 희생하면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리라. 그렇게 되면 속는 겁니다. 9절입니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없었는데 학생들 질문 예수님 죽으실 때 어떻게 죽으셨나요. 십자가에 메달아서 돌아가셨죠. 원래 십자가는 유대 나라에서 반역자들 살인자들 강도들 도둑놈들 흉악한 죄인들 집행하는 게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 가신 것이라도 언젠가는 알아듣겠지 그런 생각 자체를 버려야합니다. 제목만 말씀드립니다. 그 결과가 뭐냐, 그 결과는 영원히 이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게 됩니다.
씨를 보면 이거진다는 뜻인데 11절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합니다. 자기를 제물로 바치면 의롭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분깃을 받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오전에 이사야 전체에서 주님이 가신 길 일곱가지 생각해봤습니다. 오후에 계속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찬송: 50장, 56장
본문:이사야 53장 7절
오류 발생 시 첨부 파일 참조 바랍니다.
하나님은 80억 인구 얼굴이 다 다릅니다. 사람은 다 다르다는 것이고 얼굴이 다른 만큼 성격도 성향도 다 다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비판하거나 흉보거나 그러면 안됩니다. 나는 못하는데 너는 왜 못하냐 참 나쁜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고 분량대로 각자의 입장이 다 있습니다. 주님은 2000년 전에 오셔서 걸어가셨습니다. 그 걸음은 각자 자기 형편 처지 입장 사정 분량 따라 자기 현실에서 걸어가는 겁니다. 주님은 세상 오셔서 걸어가실 때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어서 걸어가셨습니다. 시기가 다르고 분위기가 다르고 겉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겁니다. 주님 가신 길은 우리 길입니다. 우리 구원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길입니다 내가 들어갈 나의 신앙의 길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어떤 과정으로 우리의 길이다, 가는 방법은 겉은 다르나 속은 같습니다.
원형을 닮아가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믿음으로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믿음이 무엇이 믿음이냐, 세상 사람의 믿음은 주관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 믿음이란 객관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리실 때 받아들이는 게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는 게 믿음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건 알려주지 않으면 못 믿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렇겠다 싶은 것도 있으나 사람의 기준 지식과 상식과 이치와 역사를 기반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세상 지식이 있는 것이고 내 속에 받아들인 게 믿음입니다.
믿을 때 나타난다 그 말은 여러 면이 있고 각도가 있습니다.주님 가신 길에 효력이 나타납니다. 그런 뜻입니다. 이해하실 분들은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주님가신 그 길은 시각이고 인식으로 볼 때, 이건 사람들이 아는 상식입니다. 달리 보이면 사람이 보이는대로 생각이 되고 계산이 되고 판단이 되고 사람의 시각 각도라는 겁니다. 사람의 각도 사람의 시각 이 세상과 사람이라는 걸 왜 자꾸 말하냐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사람이라는 것은 초월해야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보복당하고 한국 사업가들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려울겁니다. 믿는 사람의 세상 관계는 어떻게 되지요, 배와 바다의 관계입니다.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서로 섞이면 안되는 겁니다. 요즘 정치판에 종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단 탄압은 우리들의 앞날입니다. 정치가가 이단 없앤다고 탄압하면 우리에게 올 겁니다. 예수님은 계실 때 정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정통이 아니었습니다. 시대마다 다 그랬습니다. 마지막 가면 그 화살이 우리에게 오게 되는 것입니다. 끊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 가신 그 오신 그 모습 걸어가신 그 모습이 사람들이 볼 때 세상이 볼 때는 고운 모양과 풍채가 없는 길이었습니다. 고운 모양이란 아름다운겁니다. 고운 겁니다. 말하자면 평안한 겁니다. 개인이 평안하고 가정이 평안하고 안정된 겁니다. 고요한 겁니다. 요즘 세상 소소한 행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건강해야하고 사건사정이 되는 겁니다.
가정의 경제 문제 건강문제 아이들 문제 일들이 생기면 그게 고운모양 없는 게 되는 겁니다. 주님 오신 그 모습에는 그게 없었습니다. 풍채라는 것은 사람들이 따를만한 돈입니다. 좋은 인물 배경 다 동경하는 가지고 싶어하는 이런 것을 풍채라고 합니다. 주님 가신 길은 풍채가 없었습니다. 신앙의 길은 항상 험하기만 한 것인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부자였고 요셉은 총리였습니다. 헛된 길이 아니다.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고 목석이 아니고 살아계시는데 그 길을 말씀대로 따라가면 이 세상에서 고운 모양도 주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삭도 요셉도 다윗도 풍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착점이 어디냐. 십자가의 것이고 본인이 그렇게하지 않아도 외부로 나타나지 않아도 그런 고운 풍채를 가졌던 믿음의 존재는 십자가 지고 살았습니다.
네 번째. 이 주님 가신 그 길은 자기를 위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자기 위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 오실 때부터 많은 사람에게 오신 분입니다. 그분의 뜻을 대해서 인간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 인간이 백성들인데 그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당사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려면 건지려고 하면 헤엄 잘치는 힘있는 사람이 들어가서 빠진 사람을 기절시켜야한답니다. 발버둥치면 그 사람이 얼마나 센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멀리서 줄을 던지거나 그래야한다지요. 이랬든 저랬든 물에 빠졌던 무엇에 빠졌던 그게 희생이 되어야합니다. 안 들어가면 안되는 것이지요. 이걸 가르켜서 대속의 법이라고합니다. 주님 가신 생애를 가르켜서 대속의 생애라고 합니다. 그 주님 가신 그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대속의 생애는 될 수가 없었습니다. 죄 지어서 죽었기 때문에 대신 죽으신 것은 우리가 참 나오는데 우주적인 고난이라고 합니다. 영혼을 드렸다는 말이 나오거든요. 마음이 나오는 거거든요. 비교 못하게 다른 사람이 나오는 것이거든요.
앞으로 어디까지 모르겠으나 지옥의 고통이라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대속을 하셨습니다. 주님 따라가는 우리의 길은 대속의 사람이란 양면이 다 있지요. 위 아래가 있는 겁니다. 아무리 낮은 사람도 있는 것이고 우리 믿는 사람은 우리들은 한 말로 대속의 생애를 살아야하는데 누군가 내가 죄의 짐을 대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보다 어린 사람 약한 사람 모르는 사람의 죄를 내가 그 죄를 없애기 위해서 대신 짓는 게 대속의 생애입니다. 주님은 구주로 가셨고 자기 전도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부부가 있습니다. 부부가 부부인데 아무리 비슷해도 장단점이 있을겁니다. 대게 살펴보면 남편의 장점은 아내의 단점이고 아내의 장점은 남편의 단점인 게 일반적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모르는 거 서로 채워주고 반대로 남편의 모르는 것은 약한 것은 아내가 하고 함께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부족함을 채워주고 함께 가는 것이 중심이 되는 것인데 대속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채워주고 이러면 서로 부부가 대속의 생애를 살아가는 게 됩니다. 세상 소식을 들어보면 우리들의 인식과는 다른 세상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뇌 구조는 자체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진화론에서 그러잖습니까. 환경에 따라서 구조 자체가 변하는게 진화론입니다. 진화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자연 변화 과정이었습니다. 모든 과학은 성경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와 과학은 양립이 아니고 종교 안에 과학이 있는게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과학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가 그런 시대인데 뇌 구조가 달라지는데 부부가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우리 공회에서 제대로 사는 모습과 제가 아는 그런 모습과 일반 보편적인 부부 모습은 세계자체가 다릅니다. 명절이 되니까 가장 큰 갈등이 뭐라던가요. 어느 쪽을 먼저 가느냐. 시댁에 먼저 가야하냐 친가 먼저 가야하냐. 이거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이혼까지 간답니다. 이해는 되지요. 우리도 그런 거 있습니까. 우리 공회 부부는 그런 것이 있으면 인식 바꿔야합니다. 그런 거 때문에 부부가 싸운다 갈라진다. 차원이 다른 거지요. 대속의 생애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대속이라는 것은 값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향해서 다 바쳤으니까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속의 기본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두고 지금은 어렵지만은 반사 선생님들이 전도할 대상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들을 전도합니다.
그래서 교회갈래 하고 남남입니다. 그 모르는 학생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기도합니다. 왜 기도합니까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 그래서 밥도 사주고 과자도 사주고 다 챙겨줍니다. 왜 그래야합니까. 그런 것을 가르켜서 뭐라고 합니까. 대속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왜 너를 위해서 죽어야하냐. 피흘려야하냐. 그렇게 주님이 따지는 거지요. 내 너를 위하여, 우리도 하는데 피한방울 안 섞인 것에 대해서 그러는데 한 밥 같이 먹는 부부가 어느 쪽으로 먼저가는 것인가. 유치원 아이보다 못한 거지요. 어느쪽을 먼저 좋은 쪽으로 가야합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거지요. 대속의 길입니다. 낮아지셨고 가난해지셨고 그 가난한 길이 대속의 길입니다.
다섯 번째 주님 가신 길은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말이 필요가 없으니까. 대화 될 사람이 없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무언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이신 역사에 대속하는 겁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주인을 위해서 죽어야하는 어린 양이 자기 먹고 마심으로 만든 털을 다 줍니다. 그래서 그 양과 같이 주님 모습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무언의 길입니다. 무언으로 가는 길. 무언은 무언인데 무언 속에 많은 것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겁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제사장들의 부하들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주님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대화가 되는 사람이 있고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격 있는 사람들은 안되는 거지요. 무언으로 가는 길입니다. 자기 사명에만 집중한다는 겁니다. 끌려갔으니 그가 산자에 땅에서 마땅이 형벌을 받는 것이고 주님 가신 길은 세상이 이해를 못하는 길입니다. 죄 지은 생활 구원은 대속의 법칙이라는 것은 모르는 겁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다 하셨으나 대속의 길을 걸어갈 때 내가 희생하면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리라. 그렇게 되면 속는 겁니다. 9절입니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없었는데 학생들 질문 예수님 죽으실 때 어떻게 죽으셨나요. 십자가에 메달아서 돌아가셨죠. 원래 십자가는 유대 나라에서 반역자들 살인자들 강도들 도둑놈들 흉악한 죄인들 집행하는 게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 가신 것이라도 언젠가는 알아듣겠지 그런 생각 자체를 버려야합니다. 제목만 말씀드립니다. 그 결과가 뭐냐, 그 결과는 영원히 이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게 됩니다.
씨를 보면 이거진다는 뜻인데 11절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합니다. 자기를 제물로 바치면 의롭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분깃을 받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오전에 이사야 전체에서 주님이 가신 길 일곱가지 생각해봤습니다. 오후에 계속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