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2년 10월 1일 수밤
김동민2025-10-03조회 15추천 1
2052년 10월 1일 수밤
찬송: 137장, 138장
본문: 이사야 53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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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동행, 신인양성일행입니다. 원래 신인양성일행하다가 신인양성일행이 맞지않다고 해서 신인친합일행이라고 하시다가 신인양성일행이 맞다 그래서 그렇게 배우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을 그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상대했는가 대했는가 안 믿었다 그 말이지요. 신잉양성일위로 오신 주님이 어떤 모습이었던가.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르게 될 수 있는 겁니다. 달리 보이는 겁니다. 무엇에 본을 따라 다른 것이고 앞에서 보는 것과 뒤에서 보는 것이 다릅니다. 이것을 시각이라고 합니다. 보는 각도.
복음이란 그 중심에 항상 예수가 들어가야 복음이 됩니다. 예수는 구원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시대시대 자기 맡은 위치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전한 것을 전하면 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듣는 사람이 있겠죠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구원을 이루어가는 모든 길이 되는 말씀을 사람을 통해서 구약에게 전하셨고 신약에는 친히 직접 오셔서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이후에도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시대 시대를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한 복음을 글로 적어서 성경으로 기록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무엇에 했다고요, 복음에 전했습니다. 예수가 중심이고 예수는 다른 말로 구원입니다. 예수 복음 예수 복음을 전했는데 누가 믿었느뇨, 참 기묘하게도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들이 이미 죽은 선지자들의 비석을 꾸미면서 말하기를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을 왜 죽였을까.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라도 그렇습니다. 진짜 충신들은 대개 나라 안에서 죽습니다. 내전으로 죽고 그렇습니다. 그정도 되면 되는건데 내부에서 안에서 시기하고 질투해서 하는 것이 특히 우리나라 충신들은 다 죽었습니다. 내부에서. 그런 면이 있는거지요. 안에서 유대인들이 다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를 죽인 사람도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도 유대인들이었고 나봇을 죽인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장로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정통 교파들입니다.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거 참 조심해야합니다. 주님 당시에 예수님은 정통이었습니까 이단이었습니까. 예수님 당시 예수교는 나사렛 이단이었습니다. 전통은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 정통이 구주 메시아를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사야 때 예레미야 때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왜 죽였을까. 우리가 그 때 있었으면 말 잘 들었을건데. 자기 조상들에게 죽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말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누구 죽인다고요, 그렇게 외쳐되었던 대선제가 왔는데 그건 저거 손으로 반대하고 죽입니다. 너거들이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 아니냐 그런 것이지요. 지금 시대도 그런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게 보이시지요. 멀리 안 가도 총공회 안에서 그런 거 하고 있는데 모두 시계를 돌려서 과거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급 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같은 것이지요. 우리는 아 말씀을 믿고 있는가 그게 문제입니다. 그 시대만 안 믿은 게 아니고 주님도 안 믿었고 초대 교회 때도 많이 있었지만 안 믿은 사람 많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합니다. 나는 성경을 얼마나 믿는가.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성경이 기록한대로 믿고 하는가. 참 설교하는 저나 모두가 삐죽삐죽해야하고 겁이나서 공포에 질려야하는데 그래야 참 믿음이 없으니까 설교하는 것이고 그런 것이지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전하면 듣습니다. 들으면 알게됩니다. 알면 행하면 됩니다. 행하면 실상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전하는 종들이 있어서 성경이 있는데 성경이 어려워서 성경을 알 수 있도록 풀어서 말으로 전하는 종들이 있으면 알게 됩니다. 그러면 행해야할 책임이 따라갑니다.
행하면 실상이 이루어지고 실상이라는 말은 실제라는 말입니다. 실제 실상이라는 말은 그 자체란 말이지요. 하나님 말씀은 실상이다. 그렇게 살면 될까 안될까. 그렇게 살았으면 믿음으로 살았으면 된 겁니다. 말씀은 실상이기 때문에, 그게 이 세상 복으로 나타나느냐. 지금 나타나느냐 그 차이지 말씀으로 살았으면 이미 구원은 그만큼 된 겁니다. 건설적으로. 그걸 실상이라고 합니다. 그게 실상이 되면은 여호와의 팔이 육에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역사가 나타나면 표시가 날 건데 안 믿으니까 믿는대로 된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아는 것을 실행하는 만큼 하나님의 역사를 말합니다. 얼마만큼 되어졌느냐. 여호와의 말이 육에 나타났느뇨. 우리가 돌아봐야합니다. 첫 번째입니다. 주님 오셨을 때 그런 모습이었고 반복되고 있는데 주님 오셨을 때 요셉과 마리아 동방의 박사들이 있었지만 흠이 있었지만 시몬과 안나 세례 요한 이런 5대 성도들은 주님을 믿었습니다. 제자들은 도망쳤지만은 뒤에 회개하고 가롯 유다 빼고 다 믿었습니다. 시대 전체로 보면 교계로 보면 그릇도 작고 받은 분량이 적어서 교계를 향해 외칠 것이 안될지라도 봐야합니다.
이 시대 믿는 시대는 없는 시대입니다. 그 중에도 엘리야는 남았고 칠천명을 남겨두셨고 그렇습니다. 지금도 곳곳에 믿는 사람 있는데 우리도 믿는 사람이 되어야겠고 주신 분량에 따라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게 되어야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자라기를 연한 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옵니다. 뭐란 말이지요. 연한 솜 같다 마른 땅에 나온 줄기 같다. 그런 것이 아니고 비슷하다 그 뜻입니다. 연한 순으로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로 비유를 한 것입니다. 모습을 비유한 겁니다. 그래서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풍채도 없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습니다. 곱다는 말은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포근합니다. 말도 얼굴 표정도 대하는 태도도 포근하고 따뜻합니다. 포근하니까 좋지요.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불교가 좀 곱습니까. 불교에서 가르치는 저는 잘 모르는데 사람마다 차이는 있는데 중들을 보면 오래 전부터 외식자들 가짜배기들 바보들 이런 게 들어오거든요. 그래서인지 모르겠는데 불교에서 곱다 부드럽다 이런 느낌이 안 듭니다. 유교도 조상들 섬기는 그런 것도 가르치는 것도 도덕을 가르치는데 천주교에 들어가보면 고운게 보입니다. 수녀들 신부들 이런 사람은. 속에 들어가면 모르겠지만.
인품, 외모, 이런 게 말하자면 고운거지요. 보기 참 좋습니다. 오늘 새벽에 말씀드렸던가요. 부잣집에서 태어난 그런 부잣집 아들 딸들은 돈이 많고 힘도 있으니까 먹는 것도 고운 걸 먹습니다. 힘을 쓰고 강하려면 육식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목축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험합니다. 사냥해서 잡아먹으니까. 농사짓는 사람들은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채식 동물은 양, 소는 온화하지요. 육식 동물은 호랑이, 사자. 맹수들입니다. 고운 걸 깨끗하게 먹으면 말도 좋은 스승들 두고 좋게 배웁니다. 그래서 양반들은 보면은 저 같은 사람도 틀립니다. 걸음 걷는 것도 팔자걸음처럼 얼굴 표정도 다르고 말도 차분하고 모든 게 다 곱습니다. 그리고 풍채라는 것은 고운데 믿을만한 의탁할만한 그런 외모 그런 실력을 가진 것이 풍채가 되겠지요. 그런데 주님보니까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는 줄기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런데 주님이 가신 것은 고운 모양과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아름다움 그런 것들이 필요하고 좋으면 안 기록할 게 없는데 주님이 이런 모습을 안 가졌다는 거지요.
주님은 이런 모습을 가꿔야하는데 안 가꾼다. 가져야하는데 일부러 안 가진거냐, 가져야하는데 필요한데 못가진거냐. 어떻습니까. 고운 모양과 흠모할만한 사람들 풍채가 못가진 겁니까 안가진 겁니까. 못가진 겁니까 안 가진 겁니까. 안 가진 거지요. 그러면 왜 안 가졌느냐. 둘 다 가질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고운 모양의 반대는 무엇이지요. 고운 모양의 반대, 면도칼입니다. 주님은 그런 모습입니다. 면도칼같은. 상극이지요. 까끌까끌 가시 방석 같은데 고슴도치가 작아도 맹수가 함부로 못 건든답니다. 코브라도 먹으면 죽는 답니다. 뭐 때문에 전신에 가시라서. 그렇게 면도칼 같은 가시가 널려있는데 고운 모양이 될 수 있습니까. 세례 요한도 독사의 자식들아, 예수님도 화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저주만 퍼부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지요.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합니다. 고운 모양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얼굴도 곱고 그러면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데 왜 안 가지겠습니까. 신앙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들이 그리고 목회자들이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 말을 하면 좋은데 하나님은 안 보이고 목사도 목회자도 전부 다 사람들을 상대하는데 그 사람들을 좋아하는 고운 모양 풍채를 왜 안가지고 싶겠습니까.
그럼에 말씀을 가지고 날카롭게 한단 말이지요. 생활도 그렇고 부드럽게 온화하게 그렇게 할 줄 몰라서 안하시는 건 아닌데 거의 대다수 사람들은 고운 모양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고운 모양과 흠모할만한 풍채를 가지면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사람들이 다 좋아하니까. 주님은 그것을 왜 안가졌습니까. 고운 모양을 가지려고 하면 하나님을 말하자면은 뒤로 보내야합니다. 사람보다. 사람을 좋게하고 사람을 기쁘게하고 사람을 만족시키고 사람을 끌려면 고운 모양을 해야하는데 하나님을 모실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냐 인간이냐,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랴. 바울이 그랬지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요. 그건 못 가진 겁니다. 주님은 하나님은 왜 종들이 이 세상에서 고운 모양으로 사람들을 품고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하기를 하면 좋겠는데 왜 안되게 하셨습니까. 이 세상에서 고운 모양으로 그렇게 하면 좋겠는데 왜 안되는 겁니까. 하나님도 모시고 사람도 붙들고 천국도 잡고, 세상을 잡으면 좋겠는데 왜 안되는거지요.
겉으로 보면 어느정도 될 거 같은데 마지막 끝에 가면 안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죄악세상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 세상은 죄악 세상이고 하나님과 반대되는 자기 중심 악이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악은 다른 말로 뭐라고 하지요. 그냥 흔한 거 말고 자기 중심 다 알죠. 다른 말로 뭐라고 합니까. 악이란,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둘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머리가 둘이 되는데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당연한거죠. 하나님은 99점은 안하시는 분입니다. 100점만 하시는 분입니다. 0.1만 되어도 안된다고 하시는 분입니다. 온전하게 다 바쳐야합니다. 그래서 세상 자체가 안되는 것이고 그 인간을 만족시키게 하는 것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그 모양을 못 가졌습니다. 풍채가 없습니다. 가질 수가 없고.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이 보기에도 흠모할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멸시를 받았습니다. 멸시를 받았다. 주님이 멸시를 받았던가, 받았습니까.
받았지요. 언제 받았지요. 주님이 멸시를 안 받으셨는데 땅에 기어다니는 곤충이 있습니다. 뱀도 파충류도 기어다닙니다. 땅에 붙어사는 그런 곤충들 네 발로 걷는 이런 짐승들은 땅에 기는 것이 그들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땅에 붙어 사는 짐승보다는 곤충보다는 네 발로 걷는 짐승이 좀 거리가 멉니다. 땅에 배를 탁 붙이고 기계로 만들면 멸시하게 되는 게 됩니다. 그런데 두 발로 걷는 사람을 땅에 기계로 만들면 멸시가 되는 겁니다. 차원도 못하게. 누가 그랬다던가요. 종은 원래 깁니다. 그런데 양반이 기면은 그건 욕이 됩니다. 옛날에 양반은 종을 뚜드려패도 종이 안되고 상놈이 양반을 때렸다 그러면 죽습니다. 그런데 왕이 병자호란 때 그때 청나라입니까. 왕이 머리를 갔다가 황제 앉아있고 머리를 조아렸다던가요. 비참한 것 중에 비참한 거지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었으나 하나님인데 인간들에게 멸시를 받는 겁니다.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잃어버린 바 되었으며 멸시를 받아서 하나님인데 사람이 되어가지고 사람에게 그렇게 되었다. 장사를 할려면 어떤 장사를 한다고 했습니까. 배짱 장사를 해야합니다. 사기 싫으면 말아라. 백 목사님께서 가르치신 건 그겁니다. 비싸게 사니까 물건이 다 옵니다. 없으면 귀해집니다. 올라가면 그때 값을 싸게 팝니다. 그래도 올랐으니까 서로 살려는거지요. 팔 때 싸게 파니까 서로 살려고 그러겠지요. 교인들이 발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장사도 그런 겁니다. 직장 생활도 그런 겁니다. 나를 쓰는 고용주가 그렇게 해 버리면 됩니다.
버림받았다는 말이 참 묘합니다. 누가 누구를 버립니까. 미국이 북한을 버립니까 북한이 미국이 버립니까. 말이 안됩니다. 북한같은 나라에서 아프리카 빈국에서 버린다 하면 안되는거지요. 사람들이 주님을 버렸습니다. 찬송가 29장에 저 무지한 사람들 메시아죽였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셨는데 싫어서 다 도망쳐버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고 다 비슷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보화가 가득가득 들어있는데 우리는 그 보화를 발로 차버리고 있습니다. 우리 현실에 주님이 성탄 때 하는 찬송 중에 좋은 게 있는데 만왕의 왕이 구유 위에 누워 우리와 친구되려하시네. 그런 가사 있지요. 하나님이 우리와 친구되려하는데 우리가 도망가려고 한다 이건 미쳤거나 바보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3절까지 해봤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그랬고 주님 오셨을 때 주님 가신 그 길. 천국만 소망하고 말씀만 영감의 길만가는 그 길은 징그럽다고 싫어합니다. 그게 그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니 도망가지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거죠. 영원토록 그런 풍채 없으면 우리도 하나지요. 이 세상 죄악세상이고 죄악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그런 길이 되는 거인데. 그래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영광이 되는데 이런 눈을 가지는 우리가 되어야합니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
찬송: 137장, 138장
본문: 이사야 53장 3절
오류 발생 시 첨부 파일 참조 바랍니다.
제목이 동행, 신인양성일행입니다. 원래 신인양성일행하다가 신인양성일행이 맞지않다고 해서 신인친합일행이라고 하시다가 신인양성일행이 맞다 그래서 그렇게 배우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을 그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상대했는가 대했는가 안 믿었다 그 말이지요. 신잉양성일위로 오신 주님이 어떤 모습이었던가.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르게 될 수 있는 겁니다. 달리 보이는 겁니다. 무엇에 본을 따라 다른 것이고 앞에서 보는 것과 뒤에서 보는 것이 다릅니다. 이것을 시각이라고 합니다. 보는 각도.
복음이란 그 중심에 항상 예수가 들어가야 복음이 됩니다. 예수는 구원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시대시대 자기 맡은 위치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전한 것을 전하면 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듣는 사람이 있겠죠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구원을 이루어가는 모든 길이 되는 말씀을 사람을 통해서 구약에게 전하셨고 신약에는 친히 직접 오셔서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이후에도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시대 시대를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한 복음을 글로 적어서 성경으로 기록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무엇에 했다고요, 복음에 전했습니다. 예수가 중심이고 예수는 다른 말로 구원입니다. 예수 복음 예수 복음을 전했는데 누가 믿었느뇨, 참 기묘하게도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들이 이미 죽은 선지자들의 비석을 꾸미면서 말하기를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을 왜 죽였을까.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라도 그렇습니다. 진짜 충신들은 대개 나라 안에서 죽습니다. 내전으로 죽고 그렇습니다. 그정도 되면 되는건데 내부에서 안에서 시기하고 질투해서 하는 것이 특히 우리나라 충신들은 다 죽었습니다. 내부에서. 그런 면이 있는거지요. 안에서 유대인들이 다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를 죽인 사람도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도 유대인들이었고 나봇을 죽인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장로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정통 교파들입니다.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거 참 조심해야합니다. 주님 당시에 예수님은 정통이었습니까 이단이었습니까. 예수님 당시 예수교는 나사렛 이단이었습니다. 전통은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 정통이 구주 메시아를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사야 때 예레미야 때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왜 죽였을까. 우리가 그 때 있었으면 말 잘 들었을건데. 자기 조상들에게 죽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말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누구 죽인다고요, 그렇게 외쳐되었던 대선제가 왔는데 그건 저거 손으로 반대하고 죽입니다. 너거들이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 아니냐 그런 것이지요. 지금 시대도 그런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게 보이시지요. 멀리 안 가도 총공회 안에서 그런 거 하고 있는데 모두 시계를 돌려서 과거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급 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같은 것이지요. 우리는 아 말씀을 믿고 있는가 그게 문제입니다. 그 시대만 안 믿은 게 아니고 주님도 안 믿었고 초대 교회 때도 많이 있었지만 안 믿은 사람 많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합니다. 나는 성경을 얼마나 믿는가.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성경이 기록한대로 믿고 하는가. 참 설교하는 저나 모두가 삐죽삐죽해야하고 겁이나서 공포에 질려야하는데 그래야 참 믿음이 없으니까 설교하는 것이고 그런 것이지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전하면 듣습니다. 들으면 알게됩니다. 알면 행하면 됩니다. 행하면 실상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전하는 종들이 있어서 성경이 있는데 성경이 어려워서 성경을 알 수 있도록 풀어서 말으로 전하는 종들이 있으면 알게 됩니다. 그러면 행해야할 책임이 따라갑니다.
행하면 실상이 이루어지고 실상이라는 말은 실제라는 말입니다. 실제 실상이라는 말은 그 자체란 말이지요. 하나님 말씀은 실상이다. 그렇게 살면 될까 안될까. 그렇게 살았으면 믿음으로 살았으면 된 겁니다. 말씀은 실상이기 때문에, 그게 이 세상 복으로 나타나느냐. 지금 나타나느냐 그 차이지 말씀으로 살았으면 이미 구원은 그만큼 된 겁니다. 건설적으로. 그걸 실상이라고 합니다. 그게 실상이 되면은 여호와의 팔이 육에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역사가 나타나면 표시가 날 건데 안 믿으니까 믿는대로 된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아는 것을 실행하는 만큼 하나님의 역사를 말합니다. 얼마만큼 되어졌느냐. 여호와의 말이 육에 나타났느뇨. 우리가 돌아봐야합니다. 첫 번째입니다. 주님 오셨을 때 그런 모습이었고 반복되고 있는데 주님 오셨을 때 요셉과 마리아 동방의 박사들이 있었지만 흠이 있었지만 시몬과 안나 세례 요한 이런 5대 성도들은 주님을 믿었습니다. 제자들은 도망쳤지만은 뒤에 회개하고 가롯 유다 빼고 다 믿었습니다. 시대 전체로 보면 교계로 보면 그릇도 작고 받은 분량이 적어서 교계를 향해 외칠 것이 안될지라도 봐야합니다.
이 시대 믿는 시대는 없는 시대입니다. 그 중에도 엘리야는 남았고 칠천명을 남겨두셨고 그렇습니다. 지금도 곳곳에 믿는 사람 있는데 우리도 믿는 사람이 되어야겠고 주신 분량에 따라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게 되어야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자라기를 연한 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옵니다. 뭐란 말이지요. 연한 솜 같다 마른 땅에 나온 줄기 같다. 그런 것이 아니고 비슷하다 그 뜻입니다. 연한 순으로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로 비유를 한 것입니다. 모습을 비유한 겁니다. 그래서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풍채도 없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습니다. 곱다는 말은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포근합니다. 말도 얼굴 표정도 대하는 태도도 포근하고 따뜻합니다. 포근하니까 좋지요.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불교가 좀 곱습니까. 불교에서 가르치는 저는 잘 모르는데 사람마다 차이는 있는데 중들을 보면 오래 전부터 외식자들 가짜배기들 바보들 이런 게 들어오거든요. 그래서인지 모르겠는데 불교에서 곱다 부드럽다 이런 느낌이 안 듭니다. 유교도 조상들 섬기는 그런 것도 가르치는 것도 도덕을 가르치는데 천주교에 들어가보면 고운게 보입니다. 수녀들 신부들 이런 사람은. 속에 들어가면 모르겠지만.
인품, 외모, 이런 게 말하자면 고운거지요. 보기 참 좋습니다. 오늘 새벽에 말씀드렸던가요. 부잣집에서 태어난 그런 부잣집 아들 딸들은 돈이 많고 힘도 있으니까 먹는 것도 고운 걸 먹습니다. 힘을 쓰고 강하려면 육식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목축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험합니다. 사냥해서 잡아먹으니까. 농사짓는 사람들은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채식 동물은 양, 소는 온화하지요. 육식 동물은 호랑이, 사자. 맹수들입니다. 고운 걸 깨끗하게 먹으면 말도 좋은 스승들 두고 좋게 배웁니다. 그래서 양반들은 보면은 저 같은 사람도 틀립니다. 걸음 걷는 것도 팔자걸음처럼 얼굴 표정도 다르고 말도 차분하고 모든 게 다 곱습니다. 그리고 풍채라는 것은 고운데 믿을만한 의탁할만한 그런 외모 그런 실력을 가진 것이 풍채가 되겠지요. 그런데 주님보니까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는 줄기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런데 주님이 가신 것은 고운 모양과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아름다움 그런 것들이 필요하고 좋으면 안 기록할 게 없는데 주님이 이런 모습을 안 가졌다는 거지요.
주님은 이런 모습을 가꿔야하는데 안 가꾼다. 가져야하는데 일부러 안 가진거냐, 가져야하는데 필요한데 못가진거냐. 어떻습니까. 고운 모양과 흠모할만한 사람들 풍채가 못가진 겁니까 안가진 겁니까. 못가진 겁니까 안 가진 겁니까. 안 가진 거지요. 그러면 왜 안 가졌느냐. 둘 다 가질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고운 모양의 반대는 무엇이지요. 고운 모양의 반대, 면도칼입니다. 주님은 그런 모습입니다. 면도칼같은. 상극이지요. 까끌까끌 가시 방석 같은데 고슴도치가 작아도 맹수가 함부로 못 건든답니다. 코브라도 먹으면 죽는 답니다. 뭐 때문에 전신에 가시라서. 그렇게 면도칼 같은 가시가 널려있는데 고운 모양이 될 수 있습니까. 세례 요한도 독사의 자식들아, 예수님도 화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저주만 퍼부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지요.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합니다. 고운 모양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얼굴도 곱고 그러면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데 왜 안 가지겠습니까. 신앙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들이 그리고 목회자들이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 말을 하면 좋은데 하나님은 안 보이고 목사도 목회자도 전부 다 사람들을 상대하는데 그 사람들을 좋아하는 고운 모양 풍채를 왜 안가지고 싶겠습니까.
그럼에 말씀을 가지고 날카롭게 한단 말이지요. 생활도 그렇고 부드럽게 온화하게 그렇게 할 줄 몰라서 안하시는 건 아닌데 거의 대다수 사람들은 고운 모양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고운 모양과 흠모할만한 풍채를 가지면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사람들이 다 좋아하니까. 주님은 그것을 왜 안가졌습니까. 고운 모양을 가지려고 하면 하나님을 말하자면은 뒤로 보내야합니다. 사람보다. 사람을 좋게하고 사람을 기쁘게하고 사람을 만족시키고 사람을 끌려면 고운 모양을 해야하는데 하나님을 모실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냐 인간이냐,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랴. 바울이 그랬지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요. 그건 못 가진 겁니다. 주님은 하나님은 왜 종들이 이 세상에서 고운 모양으로 사람들을 품고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하기를 하면 좋겠는데 왜 안되게 하셨습니까. 이 세상에서 고운 모양으로 그렇게 하면 좋겠는데 왜 안되는 겁니까. 하나님도 모시고 사람도 붙들고 천국도 잡고, 세상을 잡으면 좋겠는데 왜 안되는거지요.
겉으로 보면 어느정도 될 거 같은데 마지막 끝에 가면 안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죄악세상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 세상은 죄악 세상이고 하나님과 반대되는 자기 중심 악이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악은 다른 말로 뭐라고 하지요. 그냥 흔한 거 말고 자기 중심 다 알죠. 다른 말로 뭐라고 합니까. 악이란,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둘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머리가 둘이 되는데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당연한거죠. 하나님은 99점은 안하시는 분입니다. 100점만 하시는 분입니다. 0.1만 되어도 안된다고 하시는 분입니다. 온전하게 다 바쳐야합니다. 그래서 세상 자체가 안되는 것이고 그 인간을 만족시키게 하는 것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그 모양을 못 가졌습니다. 풍채가 없습니다. 가질 수가 없고.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이 보기에도 흠모할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멸시를 받았습니다. 멸시를 받았다. 주님이 멸시를 받았던가, 받았습니까.
받았지요. 언제 받았지요. 주님이 멸시를 안 받으셨는데 땅에 기어다니는 곤충이 있습니다. 뱀도 파충류도 기어다닙니다. 땅에 붙어사는 그런 곤충들 네 발로 걷는 이런 짐승들은 땅에 기는 것이 그들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땅에 붙어 사는 짐승보다는 곤충보다는 네 발로 걷는 짐승이 좀 거리가 멉니다. 땅에 배를 탁 붙이고 기계로 만들면 멸시하게 되는 게 됩니다. 그런데 두 발로 걷는 사람을 땅에 기계로 만들면 멸시가 되는 겁니다. 차원도 못하게. 누가 그랬다던가요. 종은 원래 깁니다. 그런데 양반이 기면은 그건 욕이 됩니다. 옛날에 양반은 종을 뚜드려패도 종이 안되고 상놈이 양반을 때렸다 그러면 죽습니다. 그런데 왕이 병자호란 때 그때 청나라입니까. 왕이 머리를 갔다가 황제 앉아있고 머리를 조아렸다던가요. 비참한 것 중에 비참한 거지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었으나 하나님인데 인간들에게 멸시를 받는 겁니다.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잃어버린 바 되었으며 멸시를 받아서 하나님인데 사람이 되어가지고 사람에게 그렇게 되었다. 장사를 할려면 어떤 장사를 한다고 했습니까. 배짱 장사를 해야합니다. 사기 싫으면 말아라. 백 목사님께서 가르치신 건 그겁니다. 비싸게 사니까 물건이 다 옵니다. 없으면 귀해집니다. 올라가면 그때 값을 싸게 팝니다. 그래도 올랐으니까 서로 살려는거지요. 팔 때 싸게 파니까 서로 살려고 그러겠지요. 교인들이 발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장사도 그런 겁니다. 직장 생활도 그런 겁니다. 나를 쓰는 고용주가 그렇게 해 버리면 됩니다.
버림받았다는 말이 참 묘합니다. 누가 누구를 버립니까. 미국이 북한을 버립니까 북한이 미국이 버립니까. 말이 안됩니다. 북한같은 나라에서 아프리카 빈국에서 버린다 하면 안되는거지요. 사람들이 주님을 버렸습니다. 찬송가 29장에 저 무지한 사람들 메시아죽였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셨는데 싫어서 다 도망쳐버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고 다 비슷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보화가 가득가득 들어있는데 우리는 그 보화를 발로 차버리고 있습니다. 우리 현실에 주님이 성탄 때 하는 찬송 중에 좋은 게 있는데 만왕의 왕이 구유 위에 누워 우리와 친구되려하시네. 그런 가사 있지요. 하나님이 우리와 친구되려하는데 우리가 도망가려고 한다 이건 미쳤거나 바보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3절까지 해봤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그랬고 주님 오셨을 때 주님 가신 그 길. 천국만 소망하고 말씀만 영감의 길만가는 그 길은 징그럽다고 싫어합니다. 그게 그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니 도망가지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거죠. 영원토록 그런 풍채 없으면 우리도 하나지요. 이 세상 죄악세상이고 죄악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그런 길이 되는 거인데. 그래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영광이 되는데 이런 눈을 가지는 우리가 되어야합니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