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29일 주일 오후
김동민2025-06-29조회 53추천 8
2025년 6월 29일 주일 오후
찬송: 120장, 121장
본문: 민수기 3장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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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만 읽다보면 표가 안나는데 한자성경 보면 표가 나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언어가 중요하다 이렇게 되니 문제입니다. 이면도 중요하고 저면도 중요한 겁니다. 성경으로 답을 찾아야 정확한 것이지 백목사님께서 고신에 계실 때 원어 중에서 소마라는 글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소마, 하나는 뭐인데 그 글자가 백목사님 해석은 사람 대신으로 해석하셨는데 육신이 되어, 맞습니까 그랬는데 원어학자들은 부패성이라는 말이다. 사위 중에서 어떤 목사님께서 그분에게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게 소마라고 해야합니까. 삭스 두 개인데 같은 뜻으로 해석하셨는데 육신의 말은 둘 다 말씀으로 해석했는데 요한복음 1장의 말은 부패성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맞냐, 제가 설명을 잘못하고 있지요. 그때부터 맞습니까. 그런데 그 말이 사라졌다고. 원어로 해석을 하면 말씀이 부패성이 되어왔다 그게 원어 해석입니다. 원어에 치중하다오면 위험하고 한국말도 평생 통해서 모르는 게 많을텐데, 영어 공부라는 것은 몇 십년 되어도 쉽지도 않은데 히브리어 그거 연구해서 성경해석을 한다,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치적으로 말이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사람들이 받아내야하니까 큰 교회 목사님은 그런 말 못합니다. 그래서 원어라는 것은 참고만 하시는 것이지, 신풍목사님도 구경만 하고 와라, 그래서 구경만 하고 왔습니다. 미국에 보낸 신학자가 여러 사람입니다. 여러 사람 열 명을 유학을 보냈는데 구경하라고 오라니까 이 깨달음이 이질적인지 살펴보고 오라고 하는데 보내는 사람이 미국이라는 이름에 빠져서 죽었습니다. 미국가서 미국 사람 안 된 목사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양성원의 히브리어 교수라는 말이 이 히브리어 성경을 사면 학점을 주겠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사면 학점을 주겠습니다.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있는 거라고 하고 구속받는 성도들이고 이런 입장을 가져야하고 우리들이 받은 복음은 자타가 부인하는 아는 사람들은 다 하는 천하의 복음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 못해도 꿀먹은 벙어리처럼 설명을 해야합니다.
꿀을 먹어본 겁니까 못 먹어본겁니까. 꿀을 먹었단 말입니까 안 먹었다는 말입니까. 먹었는데 표현을 못하는 겁니다. 왜 귀한지 어떻게 귀한지 체계적으로 설명을 하고 아는 것입니다. 주관이라고 하는 것이든 말든 어지간히 지나서 그랬는데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고 예배 모습들 다 답이 나오는 거지요. 최고의 교회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아리랑을 틀어놓으면 한국 교회의 모습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참고하시면 되겠고, 오전 말씀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인이 원어가 아니고 의사, 마음의 생각을 발표하는 게 말이기 때문에 지식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게 말이고 책이 되는 것이고 이걸 지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지식은 사람의 무엇을 만든다고 하던가요.
이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성이라는 것은 이치를 따지는 겁니다. 이게 좋으냐 저게 좋으냐 이래야하냐 저래야하냐 이치를 따지는 것이 이성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성은 따지게 되는데 그 이치를 따지는 것은 자본이 지성입니다. 짐승들은 사람의 지식을 따지지 못함으로 또 사람 이성을 가져도 지식을 배우지 못하고 다니지 못하는 겁니다. 평가를 못하는 거지요. 10가지 지식을 가졌으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여기 의사는 아무도 안 계시지요. 의사들은 인체에 대한 지식을 가졌을 겁니다. 잘 못합니다 인체를 다 모르니까 이목구비 이런 거 대충하는 거지요. 아는만큼 인체를 가지고 하는 겁니다. 우주선 쏘아올리는 로켓, 미국에서 이란에 핵 시설 파괴한 것이 모두 뭐라고 하던가요. 그걸 싣고간 비행기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그렇죠. 그 비행기를 만든 게 사람입니다. 지하 80m를 뚫고 들어가서 터지는 그런 게 인간의 기술입니다. 아는 사람이 원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컴퓨터 자판 가지고 쓸 줄 아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지식이 사람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가치관의 사람의 인생을 만드는 것이고 지식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 설교록에 아주 가끔 나오는 말씀으로 불교 서적을 계속 보다 보면은 중이 됩니다. 불교를 부인하기 위해서 불교를 파면 중이됩니다. 공산주의가 틀렸다는 걸 연구하기 위해서 공부하면 공산주의자가 되게 됩니다. 70년 80년대에 그런 책 가지고 있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읽으면 그리 되기 때문에. 그래서 책을 조심해야하고 믿는 사람들이 설교를 읽고 이런 것도 조심하고 위인전도 살펴야하고 지식은 결론적으로 조심해야합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만든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성경의 사람이 되어야지 내가 그래서 천하 모든 지식은 믿는 사람이 주인이 되어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없다고 보면 됩니다. 지식의 종이 되고 사람이 되는 거지, 어떤 종을 위해 종교든 과학이든 전문 서적이든 지식이든 천하 모든 지식을 접하게 된다면 주인이 되어야합니다. 종이 되면 안되는 겁니다. 다른 것도 그렇습니다. 물질의 주인이 되어야하고 어떤 명예를 가질 기회가 되면 명예를 가질 기회가 되어야하고 그것의 사람이 되어야하니까 그게 이해가 되는지요. 하나님의 지식은 내가 주인이 되면 안되는 겁니다. 모든 세상 지식은 내 이용물로 써먹으면 되는데 하나님의 지식만큼은 그 지식의 종이 되어야하는 겁니다. 이게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는 겁니다.
레위인은 공부하면서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제사장이 공부하면 내가 바로 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을 공부하면 내가 대제사장이고 왕 공부하면 내가 왕이다. 레위인에 대해서는 구별을 해서 어떻게 상대하시는 거냐. 어떻게 하시는 거냐, 레위인의 신분은 어떤 것이냐, 이스라엘 전체 지파와 레위인의 관계는 어떤 관계냐, 그 모든 관계 접목시키면 맞아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레위인에 대한 관계까지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아가서에 보면 연애서처럼 써놨는데 그걸 백목사님께서 그걸 가르치면서 제목이 성도에 대한 주님의 요구다. 솔로몬이 여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기록해놓으신거다. 레위인의 정체성은 우리의 정체성이고 위치는 우리 위치고 역할은 우리 역할이고 그렇게 되고 있는 겁니다. 본문에서 단어 의미를 생각해봤습니다. 개수, 1개월 이상을 개수하라 초태생을 개수하라 숫자를 세는 건데 단순히 숫자를 세는 게 아니라 목적이 있고 뜻이 있다는 뜻입니다.
레위인 중에서 1개월 이상을 개수하라, 그리고 종족과 가족을 생각해봤습니다. 넓고 큰 범위고 가족은 종족 밑에 하던 단위이다. 종족이 되겠지요 그렇게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좀 작은 좁은 범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단어 의미 개수라는 글자, 연령적인 의미로 1개월 이상이란 무슨 뜻이냐, 사람이 태어났는데 사람이 태어나서 살지못하고 죽게 되니까 애굽에서 바로가 이스라엘에서 남자를 다 죽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모세 부모가 몇 달을 길렀던가요. 석 달을 길렀습니다. 1개월은 태어나긴 했는데 지켜보자, 그 말은 믿는 사람이 뭔가 마음의 생각이 날 때는 떠오르는대로 즉흥적으로 그렇게 감정적으로 쉽게 하지말고 쉽게 판단하지 말아라, 살펴봐라 이걸 가지고 최소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을 들고 쉽게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건드리는 것도 조심해야합니다.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라.
25세는 세월 속에 살았으니까 많은 걸 봤고 그랬으니까 넘어지기도, 실패도, 다치기도 했습니다. 짧다면 짧고 긴 세월인데 쌓여진 게 있습니다. 어느정도 쌓여지고 나면 초등학교 학생이 180이되고 80키로가 되고 그렇다고 뭘 맡길 수 있겠습니까. 150정도 되고 4-50키로 되고 키가 180에 80된 13살하고 150에 50키로 되는 25살하고 중요한 거 있으면 뭐 맡기면 되겠습니까. 생각 연구가 필요한 것은 갈 수가 없는 거지요. 양심이라는 것은 자라가는 거다. 지능이 자라가듯이 양심의 방향으로 깨끗하게 자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30세도 그런 능력이 있겠고 50세가 되면 쉬어야한다. 현실에서 나이가 80이 되고 그러면 건강도 살피고 그의 마음 자세도 살피고 나타나는 하나님 역사도 살피고 결정하는 거고 그 세월 동안에 갈수록 점점 더 하는 것이 보면은 그 동안에 평생을 살면서 쌓아온 지식과 경험과 수 많은 것을 가지고 길러봐라. 너와 같이 만들고 길러가라. 선배는 요즘은 졸업실 때 노래 안 부르지요.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분들. 선배들 조상들입니다. 이게 50세된 위치에 된 사람들이 한 일들입니다.
평생 살아오면서 이럴 때는 쉽다. 자라가는 것을 보고 에배시간에 졸면 안되는데 빠지면 안되는데 조심하고 기도도해주면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드는 것 이게 50세라는 말씀의 의의라는 겁니다. 정상적으로 응용이 되면 보면은 점점 좋아질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정상적으로 하는 단체라면 거꾸로 되면 점점 쇠퇴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참 중요한 겁니다. 본문에서 단어 위치 생각해봤습니다. 레위라는 사람은 열 두 아들 중에서 세 번째 아들, 별 볼일 없는 레위를 뽑아서 그렇게 되었는데 레위인의 아들이 몇 명입니까. 게르손, 고앗, 므라리입니다.
여기서 복습을, 살려놓자 양심을 이걸 복습하면서 소망하자 양심이 이걸 응용하는 겁니다. 정체성 다시 말하면 나는 누구냐, 이걸 복습하는 겁니다. 레위인은 열 두 지파인데 열 두 지파의 계수에서 빠져 구별된 거룩하게 구별한 두 글자로 성별, 거룩할 성자. 그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열 두 지파는 열 두 지파인데 그거에 속하지 않은 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구별해놨다. 하나님만 상대하고 그 지파가 바로 레위 지파입니다. 이게 오늘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 중에서 자라가야한다는 것은 레위 지파는 위치가 전체로 말하면 어떤 거지요. 레위 지파 위치는 어떤 겁니까. 전체 가나안을 향해서 그 여정에 성막이 중심이고 증거궤 법궤인데 성막을 중심으로 동남서북이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되어있는데 가운데 레위지파가 있습니다.
가운데 성막이 있고 게르손 고앗 므라리 가족과 고앗가족이 그렇게 되면 고앗 가족은 두 곳이 되겠지요. 사람은 심장있고 위에는 갈비뼈가 있고 살이 있고 제일 안에 성막이 있고 레위인 가족이 있고 바깥에는 열두 지파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앙에 있다. 믿는 사람들은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가정의 중심은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 믿는 사람에게는 자타가 아닌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레위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이겁니다. 가정 중심 공회 중심 한국 교회 중심. 그래서 우리들이 바로 레위인이기 때문에 항상 눈초리 관심 역사는 믿는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가정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막을 맡았습니다. 열 두 지파가 성막을 가지고 있는데 외부적이고 직접 하는 레위인 가족들은 게르손 가족을 하는 내면의 구별이라고 해왔습니다. 덮개 같은거, 게르손 가족이 있고 고앗은 떡상 이런 거고 므라리는 받침같은 거 이런 거 맡은 게 므라리 쪽입니다. 레위인으로써 내가 사람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을 게르손 역할, 고앗 역할 므라리 역할이 되는 것이고 게르손 가족이 되는 것이고 고앗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달라지는 게 되는 것이고 그리 되는 겁니다.
레위인의 신분과 위치와 역할을 가지고 응용을 하는 겁니다. 열 두 지파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께 받쳐져서 하나님만 상대하고 그러지 않는 그 사람이 레위 지파입니다. 이 세상을 살지만은 하나님만이 나를 가르칠 수 있지 어떤 누구도 안되는 겁니다. 타락하는 겁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하나님만 상대하고 주인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을 좌지 우지할 수는 없는 겁니다. 개인 요소 들어가면 이게 뭐라고요 우리들의 양심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다가 보면 주인이 되면 안된다. 하나님만 내 주인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안되는 것이다. 손을 대면 안되는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사람 별별 개 다 있고 손해보고만 그래도 공회보니까 장문으로 수십개 올려놨는데 서부교회 출신이라는 사람들이 아무짝에도 못쓰겠더라. 탈선시키니까 그게 무슨 꼴입니까.
그런데 맞는 말일지라도 자기가 교인이라고 그러던데 어느정도 심정을 돌아가면 괜찮은데 마지막까지 그러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이 됩니다. 믿는 사람 교회 다니다가 서부교회가 다르겠지만은 그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손대는 게 아닙니다. 장로가 천국입니까. 목사가 하나님입니까. 그런 사람 시험들게 하는 그 목사 그 집사 죄가 크겠지만은 예배당인가 그런 요소지요. 응용해서 말하자면 어떤 경우도 함부로 안되는 것. 그렇게 까지 되면 안되는 겁니다. 예사지요. 동물학대는 범죄입니다. 범죄라는 나쁜 거지요. 고양이 높은 데에서 떨어트려서 죽이면 안됩니다. 염소를 잡아먹기 위해서 삶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 어미의 젖으로 그 새끼를. 잔인성을 키우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가 제사를 진행하면서 죄를 사함받고 레위 지파가 사함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의 제사를 짓던 레위 지파를 제사장이라고 하는 거지요. 제물을 바치는 역할이 제사장이지요. 죄값으로 짐승이고 그 죄물은 말하면 무엇을 상징하는 겁니까. 예수님을 상징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건데 직접 말하면 그걸 가르켜서 대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넓은 범위로 말하면 표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예수님을 표시한다고 되지 않을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는 게 레위인입니다. 레위 지파는 일은 안됩니다. 열 두 지파에게 하나하나 다 해서 열두지파마다 되는 겁니다. 목사는 세상 돈벌이 안합니다. 껍데기고 속에 들어가면 레위지파는 특별한 지파기 때문에 전체를 먹여살리는데 그게 심장이고 두뇌라는 거지요. 그래서 레위 지파를 하는 건데 밥도 안 먹고 말도 못하고 그렇게 되어버리는 거지요. 말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열 두 지파와 같은 전체가 우리들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해서 하는 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그래서 양심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양심을 통해 하나님 만날 수 있고 그게 소망입니다. 양심을 살리면 다 죽는 겁니다. 믿는 사람의 정체성 떼 놓으면 안되듯이. 인간 사랑이 본질을 내려가면 안되듯이. 양심을 하나님에게만 붙들어놔야합니다.
양심은 가장 깊은 자리에 있는 것이 양심이고 양심이라는 것은 이 세상적인 도둑놈적인 양심도 있고 이 세상에서 하는 양심은 법적 양심이 되는 겁니다. 법적 양심은 도덕적인 양심입니다. 그걸 넘어서는 게 도덕적인 양심, 이 양심에는 그렇듯이 사람의 지식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양심이 지식으로 하니까 사람은 지식의 사람이 되고 마는 거지요. 양심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레위인을 통해서 우리와 양심을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그 역사. 이걸 자신과 양심으로 살펴야합니다. 우리들이 이 시대에 하는 것이고 소망입니다.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찬송: 120장, 121장
본문: 민수기 3장 24절
오류 발생 시 첨부 파일 참조 바랍니다.
한글만 읽다보면 표가 안나는데 한자성경 보면 표가 나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언어가 중요하다 이렇게 되니 문제입니다. 이면도 중요하고 저면도 중요한 겁니다. 성경으로 답을 찾아야 정확한 것이지 백목사님께서 고신에 계실 때 원어 중에서 소마라는 글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소마, 하나는 뭐인데 그 글자가 백목사님 해석은 사람 대신으로 해석하셨는데 육신이 되어, 맞습니까 그랬는데 원어학자들은 부패성이라는 말이다. 사위 중에서 어떤 목사님께서 그분에게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게 소마라고 해야합니까. 삭스 두 개인데 같은 뜻으로 해석하셨는데 육신의 말은 둘 다 말씀으로 해석했는데 요한복음 1장의 말은 부패성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맞냐, 제가 설명을 잘못하고 있지요. 그때부터 맞습니까. 그런데 그 말이 사라졌다고. 원어로 해석을 하면 말씀이 부패성이 되어왔다 그게 원어 해석입니다. 원어에 치중하다오면 위험하고 한국말도 평생 통해서 모르는 게 많을텐데, 영어 공부라는 것은 몇 십년 되어도 쉽지도 않은데 히브리어 그거 연구해서 성경해석을 한다,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치적으로 말이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사람들이 받아내야하니까 큰 교회 목사님은 그런 말 못합니다. 그래서 원어라는 것은 참고만 하시는 것이지, 신풍목사님도 구경만 하고 와라, 그래서 구경만 하고 왔습니다. 미국에 보낸 신학자가 여러 사람입니다. 여러 사람 열 명을 유학을 보냈는데 구경하라고 오라니까 이 깨달음이 이질적인지 살펴보고 오라고 하는데 보내는 사람이 미국이라는 이름에 빠져서 죽었습니다. 미국가서 미국 사람 안 된 목사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양성원의 히브리어 교수라는 말이 이 히브리어 성경을 사면 학점을 주겠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사면 학점을 주겠습니다.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있는 거라고 하고 구속받는 성도들이고 이런 입장을 가져야하고 우리들이 받은 복음은 자타가 부인하는 아는 사람들은 다 하는 천하의 복음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 못해도 꿀먹은 벙어리처럼 설명을 해야합니다.
꿀을 먹어본 겁니까 못 먹어본겁니까. 꿀을 먹었단 말입니까 안 먹었다는 말입니까. 먹었는데 표현을 못하는 겁니다. 왜 귀한지 어떻게 귀한지 체계적으로 설명을 하고 아는 것입니다. 주관이라고 하는 것이든 말든 어지간히 지나서 그랬는데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고 예배 모습들 다 답이 나오는 거지요. 최고의 교회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아리랑을 틀어놓으면 한국 교회의 모습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참고하시면 되겠고, 오전 말씀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인이 원어가 아니고 의사, 마음의 생각을 발표하는 게 말이기 때문에 지식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게 말이고 책이 되는 것이고 이걸 지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지식은 사람의 무엇을 만든다고 하던가요.
이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성이라는 것은 이치를 따지는 겁니다. 이게 좋으냐 저게 좋으냐 이래야하냐 저래야하냐 이치를 따지는 것이 이성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성은 따지게 되는데 그 이치를 따지는 것은 자본이 지성입니다. 짐승들은 사람의 지식을 따지지 못함으로 또 사람 이성을 가져도 지식을 배우지 못하고 다니지 못하는 겁니다. 평가를 못하는 거지요. 10가지 지식을 가졌으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여기 의사는 아무도 안 계시지요. 의사들은 인체에 대한 지식을 가졌을 겁니다. 잘 못합니다 인체를 다 모르니까 이목구비 이런 거 대충하는 거지요. 아는만큼 인체를 가지고 하는 겁니다. 우주선 쏘아올리는 로켓, 미국에서 이란에 핵 시설 파괴한 것이 모두 뭐라고 하던가요. 그걸 싣고간 비행기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그렇죠. 그 비행기를 만든 게 사람입니다. 지하 80m를 뚫고 들어가서 터지는 그런 게 인간의 기술입니다. 아는 사람이 원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컴퓨터 자판 가지고 쓸 줄 아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지식이 사람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가치관의 사람의 인생을 만드는 것이고 지식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 설교록에 아주 가끔 나오는 말씀으로 불교 서적을 계속 보다 보면은 중이 됩니다. 불교를 부인하기 위해서 불교를 파면 중이됩니다. 공산주의가 틀렸다는 걸 연구하기 위해서 공부하면 공산주의자가 되게 됩니다. 70년 80년대에 그런 책 가지고 있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읽으면 그리 되기 때문에. 그래서 책을 조심해야하고 믿는 사람들이 설교를 읽고 이런 것도 조심하고 위인전도 살펴야하고 지식은 결론적으로 조심해야합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만든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성경의 사람이 되어야지 내가 그래서 천하 모든 지식은 믿는 사람이 주인이 되어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없다고 보면 됩니다. 지식의 종이 되고 사람이 되는 거지, 어떤 종을 위해 종교든 과학이든 전문 서적이든 지식이든 천하 모든 지식을 접하게 된다면 주인이 되어야합니다. 종이 되면 안되는 겁니다. 다른 것도 그렇습니다. 물질의 주인이 되어야하고 어떤 명예를 가질 기회가 되면 명예를 가질 기회가 되어야하고 그것의 사람이 되어야하니까 그게 이해가 되는지요. 하나님의 지식은 내가 주인이 되면 안되는 겁니다. 모든 세상 지식은 내 이용물로 써먹으면 되는데 하나님의 지식만큼은 그 지식의 종이 되어야하는 겁니다. 이게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는 겁니다.
레위인은 공부하면서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제사장이 공부하면 내가 바로 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을 공부하면 내가 대제사장이고 왕 공부하면 내가 왕이다. 레위인에 대해서는 구별을 해서 어떻게 상대하시는 거냐. 어떻게 하시는 거냐, 레위인의 신분은 어떤 것이냐, 이스라엘 전체 지파와 레위인의 관계는 어떤 관계냐, 그 모든 관계 접목시키면 맞아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레위인에 대한 관계까지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아가서에 보면 연애서처럼 써놨는데 그걸 백목사님께서 그걸 가르치면서 제목이 성도에 대한 주님의 요구다. 솔로몬이 여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기록해놓으신거다. 레위인의 정체성은 우리의 정체성이고 위치는 우리 위치고 역할은 우리 역할이고 그렇게 되고 있는 겁니다. 본문에서 단어 의미를 생각해봤습니다. 개수, 1개월 이상을 개수하라 초태생을 개수하라 숫자를 세는 건데 단순히 숫자를 세는 게 아니라 목적이 있고 뜻이 있다는 뜻입니다.
레위인 중에서 1개월 이상을 개수하라, 그리고 종족과 가족을 생각해봤습니다. 넓고 큰 범위고 가족은 종족 밑에 하던 단위이다. 종족이 되겠지요 그렇게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좀 작은 좁은 범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단어 의미 개수라는 글자, 연령적인 의미로 1개월 이상이란 무슨 뜻이냐, 사람이 태어났는데 사람이 태어나서 살지못하고 죽게 되니까 애굽에서 바로가 이스라엘에서 남자를 다 죽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모세 부모가 몇 달을 길렀던가요. 석 달을 길렀습니다. 1개월은 태어나긴 했는데 지켜보자, 그 말은 믿는 사람이 뭔가 마음의 생각이 날 때는 떠오르는대로 즉흥적으로 그렇게 감정적으로 쉽게 하지말고 쉽게 판단하지 말아라, 살펴봐라 이걸 가지고 최소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을 들고 쉽게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건드리는 것도 조심해야합니다.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라.
25세는 세월 속에 살았으니까 많은 걸 봤고 그랬으니까 넘어지기도, 실패도, 다치기도 했습니다. 짧다면 짧고 긴 세월인데 쌓여진 게 있습니다. 어느정도 쌓여지고 나면 초등학교 학생이 180이되고 80키로가 되고 그렇다고 뭘 맡길 수 있겠습니까. 150정도 되고 4-50키로 되고 키가 180에 80된 13살하고 150에 50키로 되는 25살하고 중요한 거 있으면 뭐 맡기면 되겠습니까. 생각 연구가 필요한 것은 갈 수가 없는 거지요. 양심이라는 것은 자라가는 거다. 지능이 자라가듯이 양심의 방향으로 깨끗하게 자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30세도 그런 능력이 있겠고 50세가 되면 쉬어야한다. 현실에서 나이가 80이 되고 그러면 건강도 살피고 그의 마음 자세도 살피고 나타나는 하나님 역사도 살피고 결정하는 거고 그 세월 동안에 갈수록 점점 더 하는 것이 보면은 그 동안에 평생을 살면서 쌓아온 지식과 경험과 수 많은 것을 가지고 길러봐라. 너와 같이 만들고 길러가라. 선배는 요즘은 졸업실 때 노래 안 부르지요.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분들. 선배들 조상들입니다. 이게 50세된 위치에 된 사람들이 한 일들입니다.
평생 살아오면서 이럴 때는 쉽다. 자라가는 것을 보고 에배시간에 졸면 안되는데 빠지면 안되는데 조심하고 기도도해주면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드는 것 이게 50세라는 말씀의 의의라는 겁니다. 정상적으로 응용이 되면 보면은 점점 좋아질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정상적으로 하는 단체라면 거꾸로 되면 점점 쇠퇴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참 중요한 겁니다. 본문에서 단어 위치 생각해봤습니다. 레위라는 사람은 열 두 아들 중에서 세 번째 아들, 별 볼일 없는 레위를 뽑아서 그렇게 되었는데 레위인의 아들이 몇 명입니까. 게르손, 고앗, 므라리입니다.
여기서 복습을, 살려놓자 양심을 이걸 복습하면서 소망하자 양심이 이걸 응용하는 겁니다. 정체성 다시 말하면 나는 누구냐, 이걸 복습하는 겁니다. 레위인은 열 두 지파인데 열 두 지파의 계수에서 빠져 구별된 거룩하게 구별한 두 글자로 성별, 거룩할 성자. 그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열 두 지파는 열 두 지파인데 그거에 속하지 않은 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구별해놨다. 하나님만 상대하고 그 지파가 바로 레위 지파입니다. 이게 오늘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 중에서 자라가야한다는 것은 레위 지파는 위치가 전체로 말하면 어떤 거지요. 레위 지파 위치는 어떤 겁니까. 전체 가나안을 향해서 그 여정에 성막이 중심이고 증거궤 법궤인데 성막을 중심으로 동남서북이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되어있는데 가운데 레위지파가 있습니다.
가운데 성막이 있고 게르손 고앗 므라리 가족과 고앗가족이 그렇게 되면 고앗 가족은 두 곳이 되겠지요. 사람은 심장있고 위에는 갈비뼈가 있고 살이 있고 제일 안에 성막이 있고 레위인 가족이 있고 바깥에는 열두 지파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앙에 있다. 믿는 사람들은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가정의 중심은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 믿는 사람에게는 자타가 아닌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레위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이겁니다. 가정 중심 공회 중심 한국 교회 중심. 그래서 우리들이 바로 레위인이기 때문에 항상 눈초리 관심 역사는 믿는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가정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막을 맡았습니다. 열 두 지파가 성막을 가지고 있는데 외부적이고 직접 하는 레위인 가족들은 게르손 가족을 하는 내면의 구별이라고 해왔습니다. 덮개 같은거, 게르손 가족이 있고 고앗은 떡상 이런 거고 므라리는 받침같은 거 이런 거 맡은 게 므라리 쪽입니다. 레위인으로써 내가 사람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을 게르손 역할, 고앗 역할 므라리 역할이 되는 것이고 게르손 가족이 되는 것이고 고앗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달라지는 게 되는 것이고 그리 되는 겁니다.
레위인의 신분과 위치와 역할을 가지고 응용을 하는 겁니다. 열 두 지파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께 받쳐져서 하나님만 상대하고 그러지 않는 그 사람이 레위 지파입니다. 이 세상을 살지만은 하나님만이 나를 가르칠 수 있지 어떤 누구도 안되는 겁니다. 타락하는 겁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하나님만 상대하고 주인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을 좌지 우지할 수는 없는 겁니다. 개인 요소 들어가면 이게 뭐라고요 우리들의 양심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다가 보면 주인이 되면 안된다. 하나님만 내 주인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안되는 것이다. 손을 대면 안되는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사람 별별 개 다 있고 손해보고만 그래도 공회보니까 장문으로 수십개 올려놨는데 서부교회 출신이라는 사람들이 아무짝에도 못쓰겠더라. 탈선시키니까 그게 무슨 꼴입니까.
그런데 맞는 말일지라도 자기가 교인이라고 그러던데 어느정도 심정을 돌아가면 괜찮은데 마지막까지 그러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이 됩니다. 믿는 사람 교회 다니다가 서부교회가 다르겠지만은 그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손대는 게 아닙니다. 장로가 천국입니까. 목사가 하나님입니까. 그런 사람 시험들게 하는 그 목사 그 집사 죄가 크겠지만은 예배당인가 그런 요소지요. 응용해서 말하자면 어떤 경우도 함부로 안되는 것. 그렇게 까지 되면 안되는 겁니다. 예사지요. 동물학대는 범죄입니다. 범죄라는 나쁜 거지요. 고양이 높은 데에서 떨어트려서 죽이면 안됩니다. 염소를 잡아먹기 위해서 삶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 어미의 젖으로 그 새끼를. 잔인성을 키우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가 제사를 진행하면서 죄를 사함받고 레위 지파가 사함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의 제사를 짓던 레위 지파를 제사장이라고 하는 거지요. 제물을 바치는 역할이 제사장이지요. 죄값으로 짐승이고 그 죄물은 말하면 무엇을 상징하는 겁니까. 예수님을 상징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건데 직접 말하면 그걸 가르켜서 대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넓은 범위로 말하면 표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예수님을 표시한다고 되지 않을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는 게 레위인입니다. 레위 지파는 일은 안됩니다. 열 두 지파에게 하나하나 다 해서 열두지파마다 되는 겁니다. 목사는 세상 돈벌이 안합니다. 껍데기고 속에 들어가면 레위지파는 특별한 지파기 때문에 전체를 먹여살리는데 그게 심장이고 두뇌라는 거지요. 그래서 레위 지파를 하는 건데 밥도 안 먹고 말도 못하고 그렇게 되어버리는 거지요. 말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열 두 지파와 같은 전체가 우리들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해서 하는 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그래서 양심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양심을 통해 하나님 만날 수 있고 그게 소망입니다. 양심을 살리면 다 죽는 겁니다. 믿는 사람의 정체성 떼 놓으면 안되듯이. 인간 사랑이 본질을 내려가면 안되듯이. 양심을 하나님에게만 붙들어놔야합니다.
양심은 가장 깊은 자리에 있는 것이 양심이고 양심이라는 것은 이 세상적인 도둑놈적인 양심도 있고 이 세상에서 하는 양심은 법적 양심이 되는 겁니다. 법적 양심은 도덕적인 양심입니다. 그걸 넘어서는 게 도덕적인 양심, 이 양심에는 그렇듯이 사람의 지식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양심이 지식으로 하니까 사람은 지식의 사람이 되고 마는 거지요. 양심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레위인을 통해서 우리와 양심을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그 역사. 이걸 자신과 양심으로 살펴야합니다. 우리들이 이 시대에 하는 것이고 소망입니다.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