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7일 금밤
김동민2025-03-07조회 81추천 11
2025년 3월 7일 금밤
찬송: 16장
본문: 레위기 31장 3절
오류 발생 시 첨부 파일 참조 바랍니다.
지난 삼일밤 예배 때 이어서 교독을 베드로전서 3장을 부탁하는 것은 설교와 다르지만 우리들의 신앙 생활의 기본 자세를 돌아보자하자는 뜻이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신앙 생활은 사람은 누구나 세월을 타고 가는 것입니다. 가는 그 세월 속에 사는 것이고 세월 속에 멈추지 않고 뒤로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흘러만 가는 겁니다. 인생도 세월 따라서 늙어만 늙어만 가는 겁니다. 태어나서부터 늙음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인생의 생애라 볼 수 있고 마지막은 종점이고 그 마지막은 하나님의 심판 세계이고 무궁 생애입니다. 이 땅에 살아간 심신의 모든 움직임 활동이 하나님의 행동록에 기록 되어서 사람이 별별 재주로 방법으로 가리고 그래서 안 보이고 모르지만은 자기의 생애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알게되고 자기가 살아올 때 같이 등용된 만물이 자기를 다 알게되고 하나님께서 숨김없이 남김없기 되게 되니까 말씀을 거역해서 죄 지은 것을 추려서 기능을 지옥에 다 보내게 될 것이고 지옥 간 것이 없으니까 수치스러운 것 그런 것이 나만 봐온 게 되어지는 거겠습니다.
목재를 베어다가 집을 지을 기둥으로 썼는데 흠이 있어서 파내고 파내고 나니까 젓가락같은 얇은 것만 남게 되면 버리지 않으지라도 그 큰 나무였는데 다 깎아내버리고 나니까 모든 게 사람들 앞에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천국의 수치가 그런 수치가 되는 겁니다. 아무도 멸시하지 않고 조롱하지 않는데 스스로 자기를 아니까 스스로 자기를 알기 때문에 스스로 부끄럽고 낯이 참 뜨거운 지옥에 던져질 요소는 다 없애버리고 하지말고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겠다 오늘을 살되 내일을 보고 세상을 살되 내세를 바라본다고 합니다. 우리 평생을 그리 살아야겠는데 믿음이 부족하고 어리석기도 하고 망령되어서 잘 안되지만 끝없는 노력으로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합니다. 다시 소망 가운데 일어서는 터가 되게 되는 겁니다. 이번 주 말씀은 진실한 신앙에서 진충의 신앙으로 나가면서 이번 지난 주 말씀에 했던 요지는 자원하는 신앙이라고 해야겠다 했는데 설교 내용이 잘 연결이 되지 않아서 무궁한 사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취지는 원하고 원하는 것이 되어야겠다. 이것이 우리의 취지입니다. 결과가 자원하는 것으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비교해보고 천국과 세상을 비교해보니까 이건 보나마나 하나님 피조물 다 뒤로하고 삼아야겠고 세상 다 뒤로하고 살아야하는 것은 환하게 보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믿음이 부족해서 어리석기도 하고 강팍도 하고 이런 우리들이 되어있다보니까 뻔히 알면서도 목전의 이익에 망령을 부리는 장자 명분을 팥죽에 팔아먹은 에서와 같은 것이 많아왔고 지금도 우리가 사는 생활이 많은 겁니다. 탄식도 하다하다 탄식으로 끝나버리면 다른 겁니다. 탄식이 줄어들어야겠고 탄식이 없는 후회가 많았지만은 죽기 전 얼마는 잘 살았다 하나님 앞에 나름대로 그렇게 바로 살았다 이 정도는 되어야할텐데 그래야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은 다 평가적인 신앙 생활이어야합니다. 지성이라는 게 있지요. 지성이란 뭔가를 알고자하는 성품입니다. 아는 것을 가지고 그런 것이 이성입니다. 모든 걸 다 살펴보고 만사 모든 것이 다 현재 모든 생활도 전부 다 살피고 비교하고 따지고 평가해서 어느 게 더 나은 것이가가 생각해서 계산해보면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홈페이지 올라간 그 조사님. 공무원이었다고 하지요. 출장을 가다가 집회 참석을 출장가는 도중에 참석들어서 은혜받고 사표내고 목회하시고 순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공회에 백 목사님 같은 많은 분들이 세상에서 충성하다가 뒤에 한 50 60되어서 목회로 나서려고 했던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살아보니까 마지막에 답이 나오거든요. 인생에 사람이 바로 살아나가면 신앙생활 외에는 가치가 있다는 게 없는 겁니다. 문제는 그렇더라도 젊었을 때 한창 때 좋았을텐데 젊은 것이 다 기울이고 늦게 나서는 게 안타깝긴 안타까워도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배우길 반사는 주업이고 세상 직장은 부업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사탕발림으로 하나의 그런 게 아니라 실제 그런 거지요. 예수믿는 사람이라면 신앙생활은 주가 되어야하고 세상 생활은 주를 위한 보조나 자본이나 이런게 되어야합니다. 이게 거꾸로 되면은 신앙 자체를 다시 돌아봐야하는거지요. 학교 생활 직장생활 보조입니다. 신앙생활할 수 있고 그런 것이고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직장은 아닌 것이 인식입니다. 아무리 좋은 학업이라도 세상 조건이라도 신앙 세상에 나오는 것은 거부하는 겁니다. 그게 기본 자세, 반사는 주업이고 직업은 부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율을 잘 해야하겠지만 예배를 빼고 학교를 간다. 무슨 학원에 가야해요. 학원이 뭐라고 안 믿는 가정이 그러겠지만 태권도 학원을 주일 빠지고 가. 납득이 안되지만 모르니까 그렇지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공회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셨기 때문에 물질을 많이 안 주시는 편입니다만은 일반적으로 예수믿는 사람들 중에서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십일조 생활이지요 제대로 지키는 사람들은 물질 복을 엄청나게 받습니다. 우리 공회 외에 다른 교단 사람들 많습니다. 연보가 엄청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바보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바치니까 주시더라. 평가적으로 하는 겁니다. 이런 거처럼 말하자면 우리 모두 신앙 생활은 평가적으로, 기도도 평가적으로, 전도도 연보 생활도 전부 평가적으로 하는 겁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갈 수 없는 것처럼 다 생각하되 원리는 그런 겁니다. 말씀 순종해서 계명 지키면 이건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도 그렇습니다. 참고해드리고 하늘 문을 열고 말라기 보면 발악했습니다. 물질을 두고는 시험해둔다고 했습니다. 마지 못해서 하는 신앙생활은 아직 어린겁니다. 초등학교 때는 그럴지라도 중학교 때는 공부를 알아서 합니다. 공부할 아이들은 중학생 즈음 되면 하지말라고 해도 하려고 기를 씁니다.
따져보고 답이 나오기 때문에 같지 않으니까 말은 못해도 원리는 그런 겁니다. 평가적인 신앙이 되도록해야겠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완전 사랑으로 하셨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본문에 보니까 옛적에 예레미야에 출입이 지나갔고 멸망한 상태이기 때문에 옛날 옛적이라는 말이 광야 생활이라던지 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삼으신 거,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거, 언제부터라고요. 아브라함 때부터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인물입니까. 별 볼일 없는 집안입니다. 그냥 아람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아람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가나안을 중심으로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이 되었고 전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노아 자손이라고 샘 자손이라고 안합니다. 이스라엘을 에녹 자손이라고 합니까. 아벨 자손이라고 그러지 않잖습니까.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겁니다.
아브라함이 잘나서 특정이 있어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겁니다. 내가 너를 택했다. 택함의 원동이 아브라함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겁니다. 이걸 깨달은 데에서 칼빈의 교리가 나온 겁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탈선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는 건데 잘못하면 기어코 천국에 끌어다 놓는다. 하나님이 택함이 걸려있기 때문에 얼마나 큰지 모르는 겁니다. 우리 공회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것 중에 하나입니다. 거기서 개인의 신앙 가정의 신앙 다 걸려져있습니다. 그 시를 바로 깨닫고 가면 평생을 남을 원망할 일이 없습니다. 그 시 들어가면 모든 것의 원인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문제라는 겁니다. 나만 바로 되면 천하가 암흑이 되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온 세상이 다 어찌되도 대해는 상관없는 겁니다. 내가 흔들릴 사람이 있으니까 흔드는 거지요.
마귀는 건들어놓고 안 흔듭니다. 힘껏 건드려보고 미동을 하면 정신을 못차립니다. 내 믿음이 요동치 않으면 범접을 못하게 됩니다. 원동이 하나님이면 원동이 어떻지 않기 때문에 우리 택함이 자존 사랑. 완전 사랑, 무궁 사랑으로 영원토록 이어진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동기며 이유며 근거며 배경이며 그런 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실질적으로 사랑하신 그것을 보면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존재적으로 지능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같은 자가 될 수는 없는건데, 집채만한 금덩어리가 있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금이 얼마라고 하던가. 금입니다. 새끼 손가락 만한 금이 있습니다. 차이가 뭡니까. 집채만한 금덩어리가 있습니다. 손가락만한 금이 있습니다. 어떤 차이지요.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은 차이지요. 큰건 금이고 작은 건 금이 아닙니까. 작아도 금은 금인겁니다. 단 크기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는 겁니다.
하나님같은 전지전능자는 자존자를 하신 게 아니고 우리 속성을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야 통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을 내어주신 겁니다. 전체적으로는 자유성을 주셨고 선 사랑 거룩 의 진실 주권을 넣어주신 건은 그 속성 자체가 우리를 만드시는 겁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강아지라도 제대로 대화가 안됩니다. 왜 안되지요, 사람과 강아지는 존재가 다르고 속성이 다릅니다. 우리는 피조물인데 창조주를 만들 수 없을지라도 그래야 대화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아주 사랑의 속성으로 넣어주신 겁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있는 사랑은 같은 게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 속에는 본질적으로 들어가보면 진짜 사랑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질 본성적으로.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같은 사랑의 사람을 만들어야 사랑의 대상이 되는 거지요. 말하자면 사랑이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고 쌍방적인 사랑이 되는 겁니다.
여러 면이 있는데 우리를 영원한 대상자로 삼으신 겁니다. 부부가 결혼하면 서로의 사랑의 이런 것들이 고차원적으로 하나가 되어져 가는 겁니다. 지혜가 하나 되고 중심이되고 그런 겁니다. 그렇게 만드시려고 인격의 교제, 신인 교제의 될지라도 해야하는 겁니다. 사랑으로 만든 것이라.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이런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존 사랑으로 완전 사랑으로 무궁토록 사랑하시는데 이 사랑이 승리했고 이 사랑이 대속에 두셨고 지금 기도 듣고 보고 계시고 전부를 다 쏟아부으셨으니까. 남편이면 아내를 위해서 자기를 다 쏟아부어야 정상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 세상에 이런 사랑의 부부의 관계라는 것은 전부 자연 계시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 뭘 말씀하셨지요. 뭘 말한다고요,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끝에 말하기를 인간 부부를 가르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인간 부부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연계시입니다. 이건 전부 양쪽이다. 서로가 다 같은 처음에는 몰랐지만은 쪽사랑이 되어버리면 많은 문제가 되는 겁니다. 비극이 되는 거지요, 설교록에 나오는 그 말씀. 남자가 잘났고 직장좋고 아내가 고만고만하는데 어찌 결혼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결혼했으면 남편이 잘났든 몰랐든 죽는 날까지 같이가는 겁니다. 너무너무 안심을 했는지 모르지요. 너무 잘해주니까 기사하고 택시기사하고 눈이 맞아서 그 좋은 남편 버리고 가다가 병들어 죽었다 그런 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존 사랑 무궁한 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전부를 다 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래야 쌍방 사랑이 되게 하는 겁니다. 이런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말씀으로 가르치고 넘어지면 또 일어세우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마지못해서 되면은 그런 것이고 의무감에서도 그러는 것도 그런 것이고 좋아서 주님 날 위해 다 바쳤으니까 주기철 목사님의 시가 그렇다고 할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부부 사이를 벌어뜨린다, 나쁜 놈입니다. 어쨌든 부부는 붙어야합니다. 붙여놓고 그래야하는 것이지 이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 이간질 시키면 그건 뱀입니다. 그게 뱀이 한 짓입니다. 그 사이를 벌어뜨리는 놈이 있으니 그 이름을 가르켜 뭐라고 그럽니까. 그게 음녀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게 세상이고 물질이고 명예고 권력이고 취미고 낙이고 더 깊이 들어가면 악성 악습입니다. 고치지 못하는 악습이 들어서 되풀이되고 반복이 되고 점점 더 켜지고 아주 수준 높은 간부고 음녀고 우상이 되는 것이지요. 나는 멀어집니다. 이런 걸 하나씩 고치면서 주님 날 위해서 다 바쳤으니 주를 위해서 충성으로 살아야겠다. 백 목사님처럼 밤낮 쉬지 않고 감사와 충성으로 그리 되었습니다.
우리도 잘 돌아보십시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
찬송: 16장
본문: 레위기 31장 3절
오류 발생 시 첨부 파일 참조 바랍니다.
지난 삼일밤 예배 때 이어서 교독을 베드로전서 3장을 부탁하는 것은 설교와 다르지만 우리들의 신앙 생활의 기본 자세를 돌아보자하자는 뜻이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신앙 생활은 사람은 누구나 세월을 타고 가는 것입니다. 가는 그 세월 속에 사는 것이고 세월 속에 멈추지 않고 뒤로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흘러만 가는 겁니다. 인생도 세월 따라서 늙어만 늙어만 가는 겁니다. 태어나서부터 늙음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인생의 생애라 볼 수 있고 마지막은 종점이고 그 마지막은 하나님의 심판 세계이고 무궁 생애입니다. 이 땅에 살아간 심신의 모든 움직임 활동이 하나님의 행동록에 기록 되어서 사람이 별별 재주로 방법으로 가리고 그래서 안 보이고 모르지만은 자기의 생애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알게되고 자기가 살아올 때 같이 등용된 만물이 자기를 다 알게되고 하나님께서 숨김없이 남김없기 되게 되니까 말씀을 거역해서 죄 지은 것을 추려서 기능을 지옥에 다 보내게 될 것이고 지옥 간 것이 없으니까 수치스러운 것 그런 것이 나만 봐온 게 되어지는 거겠습니다.
목재를 베어다가 집을 지을 기둥으로 썼는데 흠이 있어서 파내고 파내고 나니까 젓가락같은 얇은 것만 남게 되면 버리지 않으지라도 그 큰 나무였는데 다 깎아내버리고 나니까 모든 게 사람들 앞에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천국의 수치가 그런 수치가 되는 겁니다. 아무도 멸시하지 않고 조롱하지 않는데 스스로 자기를 아니까 스스로 자기를 알기 때문에 스스로 부끄럽고 낯이 참 뜨거운 지옥에 던져질 요소는 다 없애버리고 하지말고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겠다 오늘을 살되 내일을 보고 세상을 살되 내세를 바라본다고 합니다. 우리 평생을 그리 살아야겠는데 믿음이 부족하고 어리석기도 하고 망령되어서 잘 안되지만 끝없는 노력으로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합니다. 다시 소망 가운데 일어서는 터가 되게 되는 겁니다. 이번 주 말씀은 진실한 신앙에서 진충의 신앙으로 나가면서 이번 지난 주 말씀에 했던 요지는 자원하는 신앙이라고 해야겠다 했는데 설교 내용이 잘 연결이 되지 않아서 무궁한 사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취지는 원하고 원하는 것이 되어야겠다. 이것이 우리의 취지입니다. 결과가 자원하는 것으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비교해보고 천국과 세상을 비교해보니까 이건 보나마나 하나님 피조물 다 뒤로하고 삼아야겠고 세상 다 뒤로하고 살아야하는 것은 환하게 보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믿음이 부족해서 어리석기도 하고 강팍도 하고 이런 우리들이 되어있다보니까 뻔히 알면서도 목전의 이익에 망령을 부리는 장자 명분을 팥죽에 팔아먹은 에서와 같은 것이 많아왔고 지금도 우리가 사는 생활이 많은 겁니다. 탄식도 하다하다 탄식으로 끝나버리면 다른 겁니다. 탄식이 줄어들어야겠고 탄식이 없는 후회가 많았지만은 죽기 전 얼마는 잘 살았다 하나님 앞에 나름대로 그렇게 바로 살았다 이 정도는 되어야할텐데 그래야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은 다 평가적인 신앙 생활이어야합니다. 지성이라는 게 있지요. 지성이란 뭔가를 알고자하는 성품입니다. 아는 것을 가지고 그런 것이 이성입니다. 모든 걸 다 살펴보고 만사 모든 것이 다 현재 모든 생활도 전부 다 살피고 비교하고 따지고 평가해서 어느 게 더 나은 것이가가 생각해서 계산해보면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홈페이지 올라간 그 조사님. 공무원이었다고 하지요. 출장을 가다가 집회 참석을 출장가는 도중에 참석들어서 은혜받고 사표내고 목회하시고 순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공회에 백 목사님 같은 많은 분들이 세상에서 충성하다가 뒤에 한 50 60되어서 목회로 나서려고 했던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살아보니까 마지막에 답이 나오거든요. 인생에 사람이 바로 살아나가면 신앙생활 외에는 가치가 있다는 게 없는 겁니다. 문제는 그렇더라도 젊었을 때 한창 때 좋았을텐데 젊은 것이 다 기울이고 늦게 나서는 게 안타깝긴 안타까워도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배우길 반사는 주업이고 세상 직장은 부업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사탕발림으로 하나의 그런 게 아니라 실제 그런 거지요. 예수믿는 사람이라면 신앙생활은 주가 되어야하고 세상 생활은 주를 위한 보조나 자본이나 이런게 되어야합니다. 이게 거꾸로 되면은 신앙 자체를 다시 돌아봐야하는거지요. 학교 생활 직장생활 보조입니다. 신앙생활할 수 있고 그런 것이고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직장은 아닌 것이 인식입니다. 아무리 좋은 학업이라도 세상 조건이라도 신앙 세상에 나오는 것은 거부하는 겁니다. 그게 기본 자세, 반사는 주업이고 직업은 부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율을 잘 해야하겠지만 예배를 빼고 학교를 간다. 무슨 학원에 가야해요. 학원이 뭐라고 안 믿는 가정이 그러겠지만 태권도 학원을 주일 빠지고 가. 납득이 안되지만 모르니까 그렇지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공회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셨기 때문에 물질을 많이 안 주시는 편입니다만은 일반적으로 예수믿는 사람들 중에서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십일조 생활이지요 제대로 지키는 사람들은 물질 복을 엄청나게 받습니다. 우리 공회 외에 다른 교단 사람들 많습니다. 연보가 엄청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바보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바치니까 주시더라. 평가적으로 하는 겁니다. 이런 거처럼 말하자면 우리 모두 신앙 생활은 평가적으로, 기도도 평가적으로, 전도도 연보 생활도 전부 평가적으로 하는 겁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갈 수 없는 것처럼 다 생각하되 원리는 그런 겁니다. 말씀 순종해서 계명 지키면 이건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도 그렇습니다. 참고해드리고 하늘 문을 열고 말라기 보면 발악했습니다. 물질을 두고는 시험해둔다고 했습니다. 마지 못해서 하는 신앙생활은 아직 어린겁니다. 초등학교 때는 그럴지라도 중학교 때는 공부를 알아서 합니다. 공부할 아이들은 중학생 즈음 되면 하지말라고 해도 하려고 기를 씁니다.
따져보고 답이 나오기 때문에 같지 않으니까 말은 못해도 원리는 그런 겁니다. 평가적인 신앙이 되도록해야겠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완전 사랑으로 하셨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본문에 보니까 옛적에 예레미야에 출입이 지나갔고 멸망한 상태이기 때문에 옛날 옛적이라는 말이 광야 생활이라던지 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삼으신 거,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거, 언제부터라고요. 아브라함 때부터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인물입니까. 별 볼일 없는 집안입니다. 그냥 아람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아람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가나안을 중심으로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이 되었고 전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노아 자손이라고 샘 자손이라고 안합니다. 이스라엘을 에녹 자손이라고 합니까. 아벨 자손이라고 그러지 않잖습니까.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겁니다.
아브라함이 잘나서 특정이 있어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겁니다. 내가 너를 택했다. 택함의 원동이 아브라함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겁니다. 이걸 깨달은 데에서 칼빈의 교리가 나온 겁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탈선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는 건데 잘못하면 기어코 천국에 끌어다 놓는다. 하나님이 택함이 걸려있기 때문에 얼마나 큰지 모르는 겁니다. 우리 공회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것 중에 하나입니다. 거기서 개인의 신앙 가정의 신앙 다 걸려져있습니다. 그 시를 바로 깨닫고 가면 평생을 남을 원망할 일이 없습니다. 그 시 들어가면 모든 것의 원인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문제라는 겁니다. 나만 바로 되면 천하가 암흑이 되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온 세상이 다 어찌되도 대해는 상관없는 겁니다. 내가 흔들릴 사람이 있으니까 흔드는 거지요.
마귀는 건들어놓고 안 흔듭니다. 힘껏 건드려보고 미동을 하면 정신을 못차립니다. 내 믿음이 요동치 않으면 범접을 못하게 됩니다. 원동이 하나님이면 원동이 어떻지 않기 때문에 우리 택함이 자존 사랑. 완전 사랑, 무궁 사랑으로 영원토록 이어진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동기며 이유며 근거며 배경이며 그런 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실질적으로 사랑하신 그것을 보면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존재적으로 지능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같은 자가 될 수는 없는건데, 집채만한 금덩어리가 있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금이 얼마라고 하던가. 금입니다. 새끼 손가락 만한 금이 있습니다. 차이가 뭡니까. 집채만한 금덩어리가 있습니다. 손가락만한 금이 있습니다. 어떤 차이지요.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은 차이지요. 큰건 금이고 작은 건 금이 아닙니까. 작아도 금은 금인겁니다. 단 크기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는 겁니다.
하나님같은 전지전능자는 자존자를 하신 게 아니고 우리 속성을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야 통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을 내어주신 겁니다. 전체적으로는 자유성을 주셨고 선 사랑 거룩 의 진실 주권을 넣어주신 건은 그 속성 자체가 우리를 만드시는 겁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강아지라도 제대로 대화가 안됩니다. 왜 안되지요, 사람과 강아지는 존재가 다르고 속성이 다릅니다. 우리는 피조물인데 창조주를 만들 수 없을지라도 그래야 대화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아주 사랑의 속성으로 넣어주신 겁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있는 사랑은 같은 게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 속에는 본질적으로 들어가보면 진짜 사랑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질 본성적으로.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같은 사랑의 사람을 만들어야 사랑의 대상이 되는 거지요. 말하자면 사랑이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고 쌍방적인 사랑이 되는 겁니다.
여러 면이 있는데 우리를 영원한 대상자로 삼으신 겁니다. 부부가 결혼하면 서로의 사랑의 이런 것들이 고차원적으로 하나가 되어져 가는 겁니다. 지혜가 하나 되고 중심이되고 그런 겁니다. 그렇게 만드시려고 인격의 교제, 신인 교제의 될지라도 해야하는 겁니다. 사랑으로 만든 것이라.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이런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존 사랑으로 완전 사랑으로 무궁토록 사랑하시는데 이 사랑이 승리했고 이 사랑이 대속에 두셨고 지금 기도 듣고 보고 계시고 전부를 다 쏟아부으셨으니까. 남편이면 아내를 위해서 자기를 다 쏟아부어야 정상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 세상에 이런 사랑의 부부의 관계라는 것은 전부 자연 계시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 뭘 말씀하셨지요. 뭘 말한다고요,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끝에 말하기를 인간 부부를 가르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인간 부부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연계시입니다. 이건 전부 양쪽이다. 서로가 다 같은 처음에는 몰랐지만은 쪽사랑이 되어버리면 많은 문제가 되는 겁니다. 비극이 되는 거지요, 설교록에 나오는 그 말씀. 남자가 잘났고 직장좋고 아내가 고만고만하는데 어찌 결혼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결혼했으면 남편이 잘났든 몰랐든 죽는 날까지 같이가는 겁니다. 너무너무 안심을 했는지 모르지요. 너무 잘해주니까 기사하고 택시기사하고 눈이 맞아서 그 좋은 남편 버리고 가다가 병들어 죽었다 그런 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존 사랑 무궁한 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전부를 다 하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래야 쌍방 사랑이 되게 하는 겁니다. 이런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말씀으로 가르치고 넘어지면 또 일어세우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마지못해서 되면은 그런 것이고 의무감에서도 그러는 것도 그런 것이고 좋아서 주님 날 위해 다 바쳤으니까 주기철 목사님의 시가 그렇다고 할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부부 사이를 벌어뜨린다, 나쁜 놈입니다. 어쨌든 부부는 붙어야합니다. 붙여놓고 그래야하는 것이지 이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 이간질 시키면 그건 뱀입니다. 그게 뱀이 한 짓입니다. 그 사이를 벌어뜨리는 놈이 있으니 그 이름을 가르켜 뭐라고 그럽니까. 그게 음녀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게 세상이고 물질이고 명예고 권력이고 취미고 낙이고 더 깊이 들어가면 악성 악습입니다. 고치지 못하는 악습이 들어서 되풀이되고 반복이 되고 점점 더 켜지고 아주 수준 높은 간부고 음녀고 우상이 되는 것이지요. 나는 멀어집니다. 이런 걸 하나씩 고치면서 주님 날 위해서 다 바쳤으니 주를 위해서 충성으로 살아야겠다. 백 목사님처럼 밤낮 쉬지 않고 감사와 충성으로 그리 되었습니다.
우리도 잘 돌아보십시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