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5일 금밤
김동민2024-11-15조회 120추천 12
2024년 11월 15일 금밤
찬송: 157장, 159장
본문: 야고보서 1장 2절
오류 발생 시 첨부 파일 참조 바랍니다.
여기 야고보서는 야고보가 기록한 성경입니다. 열 두 사도 중에 야고보가 둘이 나옵니다. 그 두 사람 말고 야고보가 또 하나 있는데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있습니다. 열두사도 아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그 선생이 기록한 것이 야고보서입니다. 같은 아버지의 아들을 형제라고 합니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이때 당시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남성 중심으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자매라는 말도 나오긴 나오는데 형제라고 하면 자매도 다 포함이 되는 겁니다. 형제는 형과 동생이고 자매는 언니와 여동생을 말하지요. 형제라고 하면 이런 관계가 다 포함이 된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 딸들도 다 포함이 됩니다. 대속을 받은 성도들, 한 성령의 도우심을 받은 우리들. 구주도 한 분 하나님 아버지도 한 분 성부 성자 성령이 되겠네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우리 모두를 형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형제라고 할 때는 형과 아우로 위계 질서가 정해져있습니다. 먼저 난 사람을 형이라 하고 나중에 난 자를 아우라고 합니다. 에서가 형이고 야곱이 동생입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 형 발 뒤꿈치를 잡고나오지요. 에서가 형이고 야곱이 동생인데 그걸 아우 제 자를 씁니다. 형은 형이고. 형은 형이고 아우는 아우입니다. 먼저 났으면 형이고 늦게 났으면 아우입니다.
20년 만에 에서와 야곱이 만났을 때 야곱이 에서를 뭐라고 불렀습니까. 주라고 했습니다. 엄청 높은 말입니다. 동생들은 형님을 대우를 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여반도, 동생들은 형 언니를 그렇게 대하는 겁니다. 대신 형은 형 언니는 언니 노릇을 하는 겁니다. 먼저 믿었다고 형 되는 거 아닙니다. 믿음이 앞서가고 깨달음이 앞서가고 실행이 앞서가면 형이 됩니다. 먼저 믿어도 신앙이 못하면 아우가 되어서 배우는 겁니다.
바울은 가르칠 때는 스승입니다. 형제리면서 가르칩니다. 예수님 열 두 사도 중 가장 막내가 바울입니다. 예수님 생전에 부르심 받은 사도가 열 한 사도고, 예수님 사후에 부르심 받았습니다. 주님 나타나셔서 그래서 바울도 사도입니다. 그 바울이 신약시대 최대의 깨달음과 성화가 되어있습니다. 형제란 한 아버지 아래서 같은 하나님 아버지 아들들이고 같은 구원 받았고 한 성령이 같은 도우심을 받은 게 형제라고 합니다. 형제이기 때문에 먼저 나고 늦게 난 게 있습니다. 나이를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믿어도 신앙이 어리면 늦게 믿어 신앙이 앞선 사람을 형처럼 대우하는 게 우선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여러 가지라고 말했으니까 종류적으로 다양하게, 여러 종류의 시험, 시험 자체의 질적으로 여러 강도의 시험. 초등학교 쪽지 시험 받아쓰기 시험보다 중학생들의 수학이 어려울것이고 중학교 시험보다 고등학교 수학이 어려울 것이고 수능이 더 어려울 것이고 사법고시는 더 어려울 것이고. 어려운 난이도가 다 있는 겁니다. 어떤 종류의 어떤 정도의 실력을 만들찌라도 여러 가지 실력을 만나거든 쉽게 말하면 쉬움은 어려움인데 어떨 때 어려운가요. 평범하게 어려움을 만나면 언제 어렵습니까. 일상생활이 깨질 때 어려움이 되는 겁니다. 일상 고요한 바다에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고 새벽기도 나오고 함께 밥먹고 학교가고 학교보내고 밥먹고 함께 쉬다가 잠자고. 또 주일 되면 예배드리고 토요일 심방을 하고 집회드리고, 이런 일상생활이 고요할 때는 모르지만 참 고요한 때입니다. 이런 일상생활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깨질 때가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갑자기 사고가 생겼다든지 병이 났다든지 돈 문제가 생겼다든지, 여러 가지 종류로 일상 생활이 깨지고 어려움 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걸 가르쳐서 시험이라고 하고 정도가 심하면 시험이고 다 합해서 시험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무엇이라고요. 일상생활이 어렵고 닥칠 때. 어제 수능 시험을 쳤죠. 어쨌든 시험이란 여러 가지 시험이 있는데 종류와 난이도가 상관없이 고요한 일상에 금이가고 문제가 생기고 풍파가 생겨서 밥을 함께 못 먹게 됐다든지, 우리 두 가정의 아이들이 입원했는데 그리된다든지. 평소에 잔잔하게 평화롭던 것이 문제가 생겼을 때 그리 되는 겁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종류를 막론하고 여러 가지 어떤 종류의 시험이든 사랑문제든 병이 생겼든 어쨌든 어느 종류의 어려움이 왔던지간에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온전하고 구비하게 만든다는 뜻이 있습니다. 빠진 것이 없다 그 뜻입니다. 틈이 없는, 흠이 없는 그걸 온전이라고 합니다. 어느 구성 빈틈이 없는 게 온전입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아무리 따져보고 해도 기쁨 밖에 없는 것을 가르켜서 온전한 기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기뻐할 때는 어떤 일을 두고 기쁠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말씀을 이렇게 가르치니까 기뻐해야하는데 속속들이 기쁨이 되느냐, 내 마음 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힌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케어갈 가져갈 자 없으니까 내 마음 속에 있으니까 다른 사람은 못 캐가는 겁니다. 내 속에 깊이 묻힌 보배. 현실적으로 자기 개선적으로 닥치는 현실적으로도 아무리 따져봐도 기쁨밖에 나오지 않을 때 이것도 괜찮지만 오래 못 갑니다. 또 남 보는 눈이 있으니까 오래 못 갑니다. 아무런 근거라든지 배경이라든지 없이 기쁘다면 금방 깨져버립니다.
오늘 새벽에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했지요. 예를 들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돌아다니다가 초기에는 사울이 다른 데에 가니까 유다 땅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전국을 찾아다니니까 보니까 사울이 자기 찾는다고 죄짓고 그래서 하다하다 안돼서 다윗이 블레셋 나라로 피해버립니다. 망명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사울이 찾는 걸 포기합니다. 거기서 1년 4개월을 지내게 되는데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자기 부하처럼 된 다윗에게 이스라엘에게 싸워라 그럽니다. 난감하지요. 그럴 때 뭐라고 해야합니까. 동족과 어떻게 싸웁니까 그러는데 당연히 같이 싸워야하지요 그럽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영영토록 지키는 자로 만들 것이다. 그래서 전쟁터가 되고 오니까 왕은 환영을 하는데 밑에 장군들이 지금하고 다릅니다. 우리나라 고려시대 때가 그럴 겁니다. 지방 호족들 모아서 하는 거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방백들이 반대하면 안되는거지요. 그래서 다윗이 전쟁하러 오니까 방백들이 보고는 이 사람하고 어떻게 같이 전쟁합니까. 거기서 뒷통수치고 거기 왕에 붙으면 어떡합니까. 내가 너의 진심을 안다. 이 방백들이 반대하니까 돌아가야겠다. 내가 왕에게 뭘 잘못했길래 왜 전쟁에 못가게 합니까 하니까 네가 하나님의 사자처럼 정직한 줄 안다. 하지만 방백들이 그러니까 안되겠다. 그래서 아기스에게 다 할 도리를 전부 다 하고 동족과의 전쟁을 피하고 이런 걸 신비한 역사라고 하는 겁니다. 다윗이 그만큼 이스라엘을 사랑했고 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쁨 밖에 없는 겁니다. 월급을 못 받아도 기쁘고 일 거리가 없어도 기쁘고 병이 나도 기쁘고 사고라는 말을 해야겠는데 집사람이 사무실 정리를 하다가 의자위에 올라가서 정리하다가 넘어져서 머리 안 다치려고 팔을 딛었는데 팔이 손목 뼈가 깨졌답니다. 최소 6주간을 기브스하고 있어야하고 큰 병원 가서 정밀하게 하시고 수술해야하면 수술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오른손을 다쳤습니다. 그걸 보면서 생각이 많은 거지요. 본인은 그럽니다. 사람에 따라서 평소에는 막 그러다가 환란만나면 평소에는 간이 좀 이상한 거 같은데 여유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이쪽입니다. 차분하게 해결해나갑니다.
당장에 보니까 자기 부주의고 자기가 자기를 돌아봐야할 것이고 본인이 돌아봐야하고 그 다음에 죄가 너무 불편한 겁니다. 그래서 저를 돌아봐야하는거지요. 교회 사모가 다쳤으니까 교회 교인들도 불편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거 다 감안하고 감사거리 찾고 그러게 되는 거지요. 다쳐봐야 고생이니까 큰 건 아니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고생은 좀 할겁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두 아들 순교하고 나서 감사할 것을 아홉가지를 적었다고 하지요. 그게 믿음의 종들인 겁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이 그런가보다 그런 게 아니고 제가 아는대로 우리 교인들 대부분은 원망하는 분은 별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보통 어려움이 아니라고 하면 감사거리 찾고 참 마음이 기쁘고 좋았는데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지식을 누구나 다 가지는데 구 지식을 가지고 자기가 실제 말씀대로 경험을 해서 말하자면 성경에 기록된 말대로 이루어지는 걸 경험을 통해서 믿는 믿음이 생겨질 때 그런 기쁨은 진짜 기쁨이 되는 겁니다. 돈 천 만원 손해봐서 울적했는데 뜻이 있겠지 하는데 얼마 후에 천 만원이 이천만원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안 믿는 세상 사람도 이와 비슷한 말들이 있습니다. 그런게 있는데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의 말이나 이론들이 전부 주관이고 자기 체면입니다. 일방적인, 쌍방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역사지 살아 생존하는 생명체의 본인의 그런 지식과 지식대로의 행동과 생활에 대한 그런 것에 대해서 보험으로 보답으로 갚아주는 대형 역사가 없는 게 이 세상 사람들이고 이종교들의 역사입니다. 그런 것처럼 자기의 주관이고 체면이 되는 수 밖에 없는건데 주관신앙입니다. 그렇게 나갈 때 하나님의 말씀은 객관입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신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역사해야합니다. 내 마음을 기쁜 마음으로 만들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이다. 그렇게 실제로 기쁜 생활할 때 좋은 역사 환란을 통해 자기 성화 역사.
이런 객관 역사가 있을 때 시험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되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는지요. 이종교들의 이 세상과 이종교의 이와 같은 어려움 만날 때 그런 것은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고 수양을 해서 일방적인 겁니다. 자기 혼자고 박수라는 것은 양손이 있어야 박수가 납니다. 한쪽 손만 가지고 흔드는 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고 역사가 있는 거지요. 그러면서 걸어가는 게 신앙입니다. 어려움 만났을 때 하나님의 역사 보면서 사람인지라 약해서 이런 저런 죄를 짓지만은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겁이나고 벌벌 떠는 거지요.
믿음의 저력이 없으면 쉽게 그런 것이 없고 그렇게 되는 거지요. 왜 그렇게 해야하느냐. 그게 최종 목적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그러면 믿음의 시련과 같은 말을 찾으면 무엇입니까. 국어공부, 국어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종류를 막론하고 어떤 종류의 시험을 주시든 우리에게 연단하는 거니까. 믿음을 시험하고 연단하는 겁니다. 계속 반복이 되는 것이고 믿음의 시련이 되는 것이고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만드는 것이지요. 강제로 우리에게 인내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 인내가 안 만들어지니까 어려움을 통해서 강제로 인내가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이 시험이다 볼 수 있습니다. 자율성은 우리가 알아서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지요.
우리나라에도 있는 화교학교. 거기는 엄청 빡세게 공부를 시킨답니다. 그러고 나면 완전히 다를겁니다. 옛날에는 다 그리 시켰는데 지금은 안 그렇거든요. 그래서 엄청 비쌀 겁니다. 어느 학교든 학원이든 공부를 빡세게 시킵니다. 그리고 학비가 비쌉니다. 대게 시키면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느슨하게 하니까 안되는 거지요. 믿음을 연단 시키려고 강제로 주시는 것이고 그 시련이 감사하고 기쁨으로 다 통과해버리고 원망 낙심하면 믿음이 안 자라는 거지요. 시험을 치지 않으면 실력이 안 자라듯이 어려운 것을 만났을 때 신앙이 안 자랍니다. 통과해야지 신앙이 생기는 거지.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진다. 환란은 인내들 인내는 연단은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하는 건데 지금보니까 가정마다 보니까 다 아픈 사람입니다. 또 폐렴도 있고 어려움 많은데 다 과도기지만은 그래도 이런 작은 시험을 만날 때 마음이 실제로 지식적으로 알고 실제 그 속에서 지킴을 내 마음을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그런 걸 살펴보시면서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인격과 신격의 관계이기 때문에 나의 어떠함에 따라 면밀히 살피면서 현실을 판단하고 기쁨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
찬송: 157장, 159장
본문: 야고보서 1장 2절
오류 발생 시 첨부 파일 참조 바랍니다.
여기 야고보서는 야고보가 기록한 성경입니다. 열 두 사도 중에 야고보가 둘이 나옵니다. 그 두 사람 말고 야고보가 또 하나 있는데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있습니다. 열두사도 아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그 선생이 기록한 것이 야고보서입니다. 같은 아버지의 아들을 형제라고 합니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이때 당시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남성 중심으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자매라는 말도 나오긴 나오는데 형제라고 하면 자매도 다 포함이 되는 겁니다. 형제는 형과 동생이고 자매는 언니와 여동생을 말하지요. 형제라고 하면 이런 관계가 다 포함이 된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 딸들도 다 포함이 됩니다. 대속을 받은 성도들, 한 성령의 도우심을 받은 우리들. 구주도 한 분 하나님 아버지도 한 분 성부 성자 성령이 되겠네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우리 모두를 형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형제라고 할 때는 형과 아우로 위계 질서가 정해져있습니다. 먼저 난 사람을 형이라 하고 나중에 난 자를 아우라고 합니다. 에서가 형이고 야곱이 동생입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 형 발 뒤꿈치를 잡고나오지요. 에서가 형이고 야곱이 동생인데 그걸 아우 제 자를 씁니다. 형은 형이고. 형은 형이고 아우는 아우입니다. 먼저 났으면 형이고 늦게 났으면 아우입니다.
20년 만에 에서와 야곱이 만났을 때 야곱이 에서를 뭐라고 불렀습니까. 주라고 했습니다. 엄청 높은 말입니다. 동생들은 형님을 대우를 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여반도, 동생들은 형 언니를 그렇게 대하는 겁니다. 대신 형은 형 언니는 언니 노릇을 하는 겁니다. 먼저 믿었다고 형 되는 거 아닙니다. 믿음이 앞서가고 깨달음이 앞서가고 실행이 앞서가면 형이 됩니다. 먼저 믿어도 신앙이 못하면 아우가 되어서 배우는 겁니다.
바울은 가르칠 때는 스승입니다. 형제리면서 가르칩니다. 예수님 열 두 사도 중 가장 막내가 바울입니다. 예수님 생전에 부르심 받은 사도가 열 한 사도고, 예수님 사후에 부르심 받았습니다. 주님 나타나셔서 그래서 바울도 사도입니다. 그 바울이 신약시대 최대의 깨달음과 성화가 되어있습니다. 형제란 한 아버지 아래서 같은 하나님 아버지 아들들이고 같은 구원 받았고 한 성령이 같은 도우심을 받은 게 형제라고 합니다. 형제이기 때문에 먼저 나고 늦게 난 게 있습니다. 나이를 말하지 않습니다. 먼저 믿어도 신앙이 어리면 늦게 믿어 신앙이 앞선 사람을 형처럼 대우하는 게 우선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여러 가지라고 말했으니까 종류적으로 다양하게, 여러 종류의 시험, 시험 자체의 질적으로 여러 강도의 시험. 초등학교 쪽지 시험 받아쓰기 시험보다 중학생들의 수학이 어려울것이고 중학교 시험보다 고등학교 수학이 어려울 것이고 수능이 더 어려울 것이고 사법고시는 더 어려울 것이고. 어려운 난이도가 다 있는 겁니다. 어떤 종류의 어떤 정도의 실력을 만들찌라도 여러 가지 실력을 만나거든 쉽게 말하면 쉬움은 어려움인데 어떨 때 어려운가요. 평범하게 어려움을 만나면 언제 어렵습니까. 일상생활이 깨질 때 어려움이 되는 겁니다. 일상 고요한 바다에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고 새벽기도 나오고 함께 밥먹고 학교가고 학교보내고 밥먹고 함께 쉬다가 잠자고. 또 주일 되면 예배드리고 토요일 심방을 하고 집회드리고, 이런 일상생활이 고요할 때는 모르지만 참 고요한 때입니다. 이런 일상생활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깨질 때가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갑자기 사고가 생겼다든지 병이 났다든지 돈 문제가 생겼다든지, 여러 가지 종류로 일상 생활이 깨지고 어려움 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걸 가르쳐서 시험이라고 하고 정도가 심하면 시험이고 다 합해서 시험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무엇이라고요. 일상생활이 어렵고 닥칠 때. 어제 수능 시험을 쳤죠. 어쨌든 시험이란 여러 가지 시험이 있는데 종류와 난이도가 상관없이 고요한 일상에 금이가고 문제가 생기고 풍파가 생겨서 밥을 함께 못 먹게 됐다든지, 우리 두 가정의 아이들이 입원했는데 그리된다든지. 평소에 잔잔하게 평화롭던 것이 문제가 생겼을 때 그리 되는 겁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종류를 막론하고 여러 가지 어떤 종류의 시험이든 사랑문제든 병이 생겼든 어쨌든 어느 종류의 어려움이 왔던지간에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온전하고 구비하게 만든다는 뜻이 있습니다. 빠진 것이 없다 그 뜻입니다. 틈이 없는, 흠이 없는 그걸 온전이라고 합니다. 어느 구성 빈틈이 없는 게 온전입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아무리 따져보고 해도 기쁨 밖에 없는 것을 가르켜서 온전한 기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기뻐할 때는 어떤 일을 두고 기쁠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말씀을 이렇게 가르치니까 기뻐해야하는데 속속들이 기쁨이 되느냐, 내 마음 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힌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케어갈 가져갈 자 없으니까 내 마음 속에 있으니까 다른 사람은 못 캐가는 겁니다. 내 속에 깊이 묻힌 보배. 현실적으로 자기 개선적으로 닥치는 현실적으로도 아무리 따져봐도 기쁨밖에 나오지 않을 때 이것도 괜찮지만 오래 못 갑니다. 또 남 보는 눈이 있으니까 오래 못 갑니다. 아무런 근거라든지 배경이라든지 없이 기쁘다면 금방 깨져버립니다.
오늘 새벽에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했지요. 예를 들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돌아다니다가 초기에는 사울이 다른 데에 가니까 유다 땅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전국을 찾아다니니까 보니까 사울이 자기 찾는다고 죄짓고 그래서 하다하다 안돼서 다윗이 블레셋 나라로 피해버립니다. 망명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사울이 찾는 걸 포기합니다. 거기서 1년 4개월을 지내게 되는데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자기 부하처럼 된 다윗에게 이스라엘에게 싸워라 그럽니다. 난감하지요. 그럴 때 뭐라고 해야합니까. 동족과 어떻게 싸웁니까 그러는데 당연히 같이 싸워야하지요 그럽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영영토록 지키는 자로 만들 것이다. 그래서 전쟁터가 되고 오니까 왕은 환영을 하는데 밑에 장군들이 지금하고 다릅니다. 우리나라 고려시대 때가 그럴 겁니다. 지방 호족들 모아서 하는 거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방백들이 반대하면 안되는거지요. 그래서 다윗이 전쟁하러 오니까 방백들이 보고는 이 사람하고 어떻게 같이 전쟁합니까. 거기서 뒷통수치고 거기 왕에 붙으면 어떡합니까. 내가 너의 진심을 안다. 이 방백들이 반대하니까 돌아가야겠다. 내가 왕에게 뭘 잘못했길래 왜 전쟁에 못가게 합니까 하니까 네가 하나님의 사자처럼 정직한 줄 안다. 하지만 방백들이 그러니까 안되겠다. 그래서 아기스에게 다 할 도리를 전부 다 하고 동족과의 전쟁을 피하고 이런 걸 신비한 역사라고 하는 겁니다. 다윗이 그만큼 이스라엘을 사랑했고 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쁨 밖에 없는 겁니다. 월급을 못 받아도 기쁘고 일 거리가 없어도 기쁘고 병이 나도 기쁘고 사고라는 말을 해야겠는데 집사람이 사무실 정리를 하다가 의자위에 올라가서 정리하다가 넘어져서 머리 안 다치려고 팔을 딛었는데 팔이 손목 뼈가 깨졌답니다. 최소 6주간을 기브스하고 있어야하고 큰 병원 가서 정밀하게 하시고 수술해야하면 수술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오른손을 다쳤습니다. 그걸 보면서 생각이 많은 거지요. 본인은 그럽니다. 사람에 따라서 평소에는 막 그러다가 환란만나면 평소에는 간이 좀 이상한 거 같은데 여유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이쪽입니다. 차분하게 해결해나갑니다.
당장에 보니까 자기 부주의고 자기가 자기를 돌아봐야할 것이고 본인이 돌아봐야하고 그 다음에 죄가 너무 불편한 겁니다. 그래서 저를 돌아봐야하는거지요. 교회 사모가 다쳤으니까 교회 교인들도 불편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거 다 감안하고 감사거리 찾고 그러게 되는 거지요. 다쳐봐야 고생이니까 큰 건 아니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고생은 좀 할겁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두 아들 순교하고 나서 감사할 것을 아홉가지를 적었다고 하지요. 그게 믿음의 종들인 겁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이 그런가보다 그런 게 아니고 제가 아는대로 우리 교인들 대부분은 원망하는 분은 별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보통 어려움이 아니라고 하면 감사거리 찾고 참 마음이 기쁘고 좋았는데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지식을 누구나 다 가지는데 구 지식을 가지고 자기가 실제 말씀대로 경험을 해서 말하자면 성경에 기록된 말대로 이루어지는 걸 경험을 통해서 믿는 믿음이 생겨질 때 그런 기쁨은 진짜 기쁨이 되는 겁니다. 돈 천 만원 손해봐서 울적했는데 뜻이 있겠지 하는데 얼마 후에 천 만원이 이천만원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안 믿는 세상 사람도 이와 비슷한 말들이 있습니다. 그런게 있는데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의 말이나 이론들이 전부 주관이고 자기 체면입니다. 일방적인, 쌍방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역사지 살아 생존하는 생명체의 본인의 그런 지식과 지식대로의 행동과 생활에 대한 그런 것에 대해서 보험으로 보답으로 갚아주는 대형 역사가 없는 게 이 세상 사람들이고 이종교들의 역사입니다. 그런 것처럼 자기의 주관이고 체면이 되는 수 밖에 없는건데 주관신앙입니다. 그렇게 나갈 때 하나님의 말씀은 객관입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신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역사해야합니다. 내 마음을 기쁜 마음으로 만들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이다. 그렇게 실제로 기쁜 생활할 때 좋은 역사 환란을 통해 자기 성화 역사.
이런 객관 역사가 있을 때 시험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되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는지요. 이종교들의 이 세상과 이종교의 이와 같은 어려움 만날 때 그런 것은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고 수양을 해서 일방적인 겁니다. 자기 혼자고 박수라는 것은 양손이 있어야 박수가 납니다. 한쪽 손만 가지고 흔드는 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고 역사가 있는 거지요. 그러면서 걸어가는 게 신앙입니다. 어려움 만났을 때 하나님의 역사 보면서 사람인지라 약해서 이런 저런 죄를 짓지만은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겁이나고 벌벌 떠는 거지요.
믿음의 저력이 없으면 쉽게 그런 것이 없고 그렇게 되는 거지요. 왜 그렇게 해야하느냐. 그게 최종 목적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그러면 믿음의 시련과 같은 말을 찾으면 무엇입니까. 국어공부, 국어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종류를 막론하고 어떤 종류의 시험을 주시든 우리에게 연단하는 거니까. 믿음을 시험하고 연단하는 겁니다. 계속 반복이 되는 것이고 믿음의 시련이 되는 것이고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만드는 것이지요. 강제로 우리에게 인내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 인내가 안 만들어지니까 어려움을 통해서 강제로 인내가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이 시험이다 볼 수 있습니다. 자율성은 우리가 알아서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지요.
우리나라에도 있는 화교학교. 거기는 엄청 빡세게 공부를 시킨답니다. 그러고 나면 완전히 다를겁니다. 옛날에는 다 그리 시켰는데 지금은 안 그렇거든요. 그래서 엄청 비쌀 겁니다. 어느 학교든 학원이든 공부를 빡세게 시킵니다. 그리고 학비가 비쌉니다. 대게 시키면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느슨하게 하니까 안되는 거지요. 믿음을 연단 시키려고 강제로 주시는 것이고 그 시련이 감사하고 기쁨으로 다 통과해버리고 원망 낙심하면 믿음이 안 자라는 거지요. 시험을 치지 않으면 실력이 안 자라듯이 어려운 것을 만났을 때 신앙이 안 자랍니다. 통과해야지 신앙이 생기는 거지.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진다. 환란은 인내들 인내는 연단은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하는 건데 지금보니까 가정마다 보니까 다 아픈 사람입니다. 또 폐렴도 있고 어려움 많은데 다 과도기지만은 그래도 이런 작은 시험을 만날 때 마음이 실제로 지식적으로 알고 실제 그 속에서 지킴을 내 마음을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그런 걸 살펴보시면서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인격과 신격의 관계이기 때문에 나의 어떠함에 따라 면밀히 살피면서 현실을 판단하고 기쁨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