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2-주후(마13:53-58)
사람의 자기 주관2013-06-02조회 555추천 50
본문: 마13:53-58
제목: 사람의 자기 주관
요점:
1. 고향이라는 지역의 의미
- 고향으로 가신 이유는 구원 도리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
- 고향은 예수님에 대해서 외부적으로 가장 잘 아는 곳
- 예수님에 대한 선입적 관념 주관이 강할 수밖에 없는 곳
- 고향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주관으로 예수님을 배척
2. 오전 복습
- 고향 사람들이 놀란 것은 말씀과 말씀의 지혜와 능력에
- 예수님 말씀에 놀랐으니 하나님의 역사이며 은혜
- 잘 놀랐고 바로 놀란 것
- 놀란 것을 강직해서 계속하면 자라가는데
- 놀란 것을 빼앗아 가는 도적놈 원수가 있으니 그들의 자기 주관
-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예수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
- 예수님이 말씀은 전지 전능 완전의 말씀
- 이 말씀이 들려지고 깨달아지고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요 은혜
- ...............
3. 오후 말씀(사람의 자기 주관)
1)모든 것은 모든 것은 하나에게서 나온 것(롬11:
- 하나님 한 분에게서 나온 모든 것
- 하나님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
- 무에서 유가 아니고 유에서 유가 된 것
- 보이는 원인 근원은 많으나(물은 땅을 파면, 기름은 유전에서, 소금은 바다에서,
종이는 나무로, 설탕은 사탕수수로, 밥은 쌀로, 석유화학제품들...)
- 궁극은 하나님 한 분에게서( 그 어떤 것도 결국 하나님 한 분에게서 다 나온 것들)
2. 하나에게서 나온 둘로 된 세상 모든 것
하늘과 땅, 땅과 바다, 해와 달, 우주와 영계
동물과 식물, 사람과 짐승,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물과 불, 물과 기름,
뜨거운 것 차운 것, 여름과 겨울, 흰 것과 검은 것,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소망과 절망, 사랑과 미움
삶과 죽음, 생명과 사망, 강한 것과 약한 것, 큰 것과 작은 것, 많은 것과 적은 것
승리와 패전
3. 둘로 된 또 다른 것
하나님과 피조물, 천국과 지옥, 구원과 멸망,
하나님 지식과 인간 지식,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 믿음과 불신
4. 둘로 만드신 목적은 하나를 향하게 하는 것
5. 둘로 된 세상에서 만들어지는 사람
1) 둘로 된 세상에서 하나로만 된 사람
2) 둘로 된 세상에서 한 사람의 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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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2 주후
본문: 마태복음 13:53-58
예수님께서 고향교회에 가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같이 한 번 해보실까요. “고향”. 고향이란 ‘고’자가 무슨 ‘고’자 입니까? 고향이란 ‘고’자가 옛고(古)잡니다. 옛고자. 옛날할 때 아주 고대할 때 그 ‘고’자. 고향이라 하는 이 말씀에서 여기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구원도리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곳에 많은 곳에 다니시다가 고향에 가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과 한 분이지요. 예수님 자체가 신인양성일위니까 하나님과 사람이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성만 두고 말해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순전히 말하자면 완전 백퍼센트 동거 동행입니다. 말 한마디, 생각 하나 신경세포 움직임 하나까지 하나님과 끊어짐이 없는 완전한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완전 동행의 예수님의 마음이나 생각이나 활동이 사람들처럼 고향을 떠나서 객지를 많이 다니다보니까 고향 생각이 나서 그래서 고향으로 가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인도를 따라 발걸음이, 마음이 고향으로 가셨고 발걸음이 고향으로 가서 고향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이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리 하신 겁니다. 고향이라는 말의 의미는 정든 곳이고 또 모든 것이 낯익은 곳이고 정든 곳이고 동시에 모든 곳이 낯익고 정든 곳이라 그 말은 나도 고향을 알고 고향도 나를 안다 그런 뜻입니다. 고향이 날 안다 그 말은 고향에 있는 모든 사람들, 집안도 있고, 식구도 있을 수 있고, 일가 친척도 있을 수 있고, 이웃도 있을 수 있고 고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안다 그 말입니다. 다른 곳보다 더 정확하게 세밀하게 많이 안다 그 뜻이 되겠지요.
예수님은 고향에 가셨는데 주로 객지로 많이 다니셨지요. 예수님 고향이 어디지요? 학생들? 예수님 고향이 어딥니까? 하늘나라는 맞지요. 본향이고.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나신 예수님의 고향이 어딥니까? 예수님이 나신 곳이 어딥니까? 마굿간. 어디 있는 마굿간? 동네 이름을 말하는 겁니다. 그건 안 배웠지? 오늘 배워서 알면 되요. 예수님이 태어나신 고향 장소 지역이 어딥니까? 아는 분은 크게 씩씩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어딥니까? 어디라고요? 베들레헴이지요 베들레헴. 예수님을 가리켜 어디 사람이라 그럽니까 주로? 어디 사람이요? 나사렛 갈릴리 사람이라 그러지요. 갈릴리 사람. 주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많이 사셨고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찾아가신 여기 고향에 가셨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가셨다 그 말이겠지요. 고향에 가셨습니다. 그 고향은 예수님이 나신 곳이고 자란 곳이라서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 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잘 압니다. 많이 알고 잘 압니다.
요런 면을 가르쳐서 고향으로 가셨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고향 사람들이니까 타지역 사람들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세밀하게 알고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들이 많은 그 곳에 가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니까 그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는, 그 말씀에 이치와, 이치는 지혜입니다. 그 말씀의 이치와 그 말씀의 능력에 다 놀랐습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그 말씀이, 이치가, 하늘의 복음이고 권세있는 새 교훈이었고 자기들 마음이 완전히 변화되어지는 그런 아주 능력있는 그런 말씀으로 들려졌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놀란 것은 어디에 놀랐다고요? 말씀에 놀랐고 말씀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습니다. 잘 놀랐습니까 잘못 놀랐습니까? 잘 놀랐습니다. 바로 놀랐습니까 안 놀랄 것 놀랐습니까? 바로 놀랐습니다. 바로 놀랐고 잘 놀랐습니다. 그 놀란 것은 그들이 놀랐지만은 말씀을 듣고 놀라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아니합니다. 이들이 놀란 것은 말씀을 듣고 놀랐고 말씀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으므로 그 놀람은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신 놀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니까 마음이 열려지고 귀가 열려서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듣고 보니까 놀랍고 깨닫고 보니까 놀랍고 그래서 깜짝 놀랐습니다.
놀랐으니까 그 놀란 것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 놀란 것을 꼭 붙들고 쥐고 놓지 말아야 됩니다. 과거에 종종 한 번씩 말씀 드렸는지는 모르겠는데, 서부교회 시절에 어떤 여반사 선생님이 있습니다. 대학생이었는데, 일등 반사 학생들 육십 명, 칠십 명씩 데려오고 물 불 안 가리고 여반사인데 그런 분들이 많았습니다. 막 뛰어다니면서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미아가 생기면 울면서 잠도 못자고 찾으러 다니고 기도하고 그 신앙이 목사님 보시기에 그렇게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반사 선생님이 고등학교 시절까지 그랬는데 대학교 들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더니 얼굴이 잘 안보이고 얼굴이 잘 안 보인다는 말은 주일날 예배를 빠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얼굴이 일주일에 몇 번 보여야 됩니까? 예배시간에? 일주일에 우리는 주일 새벽이 없으니까 열 번 보여야지요 열 번.
일주일에 열 번 보이던 반사가 일주일에, 한 일곱 번 여덟 번 보이다가 다섯 번 보이다가 이래 자꾸 줄어드니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 고등학교 때 죽도록 충성하던 반사 생활이 틀렸는가 그때 받은 그 은혜가 틀렸는가 그 때는 최면술에 걸려서 그렇게 열심히 울고 불고 기도하고 죽도록 뛰어다니며 반사를 했는가 그때는 철이 없어 그랬는가 최면술에 걸렸던가 그래서 대학교 학생이 되고 보니까 지성인이 되어서 이제는 반사 생활은 가치가 없고 시시하게 보여졌는가 어느 것인가 그러면서 아주 책망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 선생님 이름도 지금 제 머릿 속에 기억을 합니다. 아주 좋은 분입니다. 그래 책망을 한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고등학교 때까지 그랬으면 그 받은 그 은혜, 그 간절, 그 열심, 그 충성을 꼭 쥐고 대학교 가도 변치 않고 2학년 3학년이 되어도 변치 않고, 사회 직장 들어가도 변치 않고, 결혼해서 아내가 되어도 변치 않고 남편이 되어도 변치 아니하고, 엄마가 되어도 아빠도 되어도 변치를 아니하고 그게 계속 붙들고 붙들고 계속 나가면 신앙이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자라서 점점 자라게 되어지는데 이 고향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귀를 열고 마음을 여니까 말씀이 들려졌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예수님 얼굴 보고 아이구 오랜만에 보니까 훤칠한 미남이 됐구만. 잘 생겼구만. 그거 보고 놀라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따라다니는구만. 그거 보고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놀란 것은 말씀을 듣고 말씀에 놀랐습니다. 그 말씀 속에 역사하는 지혜와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 잘 놀랐고 바로 놀랐습니다. 하나님이 놀라게 하신 겁니다. 그걸 가르켜서 은혜를 받은 것이라 그리 말하지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어떡해야 되겠습니까? 꼬옥 붙들고 강직을 해야 됩니다. 강하게 붙들고 놓지 않고 지켜야 되는데 그걸 보수라 그러지요. 받은 은혜를 보수하고 놓지를 않아야 되는데, 그걸 은혜를 받고 났는데 그 받은 은혜를 간직하지 아니하고 조금 지나서 보니까, 눈을 뜨고 한 번 더 쳐다보니까 ‘어 저 사람이 누구지? 예수 아니야? 목수 아들 아니야? 그 아버지는 목수고 어머니는 마리아고 형제들은 우리랑 함께 지내는 내나 그 사람의 형 아닌가 오라버니 아닌가? 하고 옛날 자기들이 알던 예수님, 자기들 가진 기존 지식과 예수님에 대한 선입적인 관념과 자기들 주관으로 알던 그 지식과 그 관념가지고 예수님을 쳐다보니까 예수님이 별 사람이 아니었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옛날로 돌아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선지자가 어디 어디서 존경 받지 못한다고요? 본문에 보니까 선지자가 어디 어디서요? 첫째는 자기 넓게는 고향 좁게는 자기 집. 왜 그렇습니까? 왜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받지를 못합니까? 그 선지자의 면면을 그 사람들은 너무 잘 아니까 그런겁니다.
그런데 거기 양면이 있어서 그 선지자의 면면을 잘 아는 것이 정확하게 바로 알면 그 선지자의 어떠함에 따라서 그리 될 수 있는데 백목사님 고향은 계명입니다. 그런데 백목사님을 아는 사람들 계명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더 백목사님을 존경을 더 합니다. 그분에게 목숨 걸고 충성을 합니다. 고향 사람들 계명 교회 사람들은 더 했습니다. 왜 그럴까? 어느 지역사람들보다 백목사님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다 존경받는데 고향과 집에서는 존경 받지 못한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그 선지자가 예수님이 틀려서 그런가 겉만 그렇고 속은 아니라서 그런가. 그런 선지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지자가 말하자면은, 말은 청산유수고 아주 설교할때는 성자같은데 집에만 들어가면 마귀가 되어버리니까 집안에 아내고 자식들은 목사 아버지 알기를 우습게 알고, “말은 잘하지. 강단에만 서면 천사지. 집에만 들어오면 골치덩어린데. 죽겠구만.” 그래가지고 그만 교인들 보면은 자기들 볼 때 “저런. 우리 아버지 이중인데 다 속는다.” “우리 남편 저런 데 다 속는다.” 그러니까 그 사모는, 그 목사 자녀들은 전부 대 마귀가 되는 겁니다 속으로. 그런데 만약에 그 선지자 그 목사가 겉과 속이 다 표리부동이 아니고 일치가 되어서 설교할때나 집에서나 말씀대로 다 살지는 못해도 진실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는 그런 것 같으면 가족들부터 존경이 되겠지요. 가족들부터.
그런데 그 고향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들이라 할지라도 그 자기 남편 아버지의 그 선지자의 깊은 내면을 알지 못한다면 존경해도 더 깊은 속까지는 들어가지 못 할 겁니다. 예수님을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도 이 고향 사람들은 가장 잘 압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요셉이라는 사람이고 직업은 목수다. 또, 어머니는 마리아다. 그 형제는 몇남매인데 이름은 누구 누구 누구고 지금 어디 있고 뭐 하고 있고. 다 그 집안 혈통을 꿰뚫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예수님의 내면, 하나님이 사람 되신 구주인 그 면, 또 인성을 입고 있어도 하나님과 완전 동행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면. 이 면은 이 사람들이 눈이 어두워서 보지를 못하고. 자기들 수준에서 자기들 범위에서 자기 정도에서 아는 고것만 보고 예수님을 아는 그걸 가리켜서 뭐라 했다고요? 그런 걸 가리켜서 자기 주관이라 그럽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에 대한 기존 지식이고, 선입적인 관념입니다.
타 지역 사람들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아 저 훌륭한 분. 위대한 분. 말씀을 들어보니까 성자네. 메시야네. 인간적인 그런 게 아닌 아마 하늘에서 내려왔나보다. 저 분은 태어날 때 특별한 뭐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은혜가 더 되는데. 고향 사람들은 알고 보니까 그 깊은 내면은 모르고 저거 주관대로 자기들 수준 정도에서 아는 그것만 보고 아니까 그리 알고 나니까 예수님이 전하신 그 말씀까지도 깎아내려서 그리 알고 그래서 결국은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원래 그의 신분이 그의 정체가 목수 아들이고 우리와 함께 지내던 사람인데 저렇게 탁월한 것이 별 것 있겠는가 어쩌다 저리 된 것이겠지 하고 자기들 주관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배척하고 믿지를 않았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구주 메시얍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하나님과 동거동행이므로 숨소리 한번까지도 완전입니다. 흠과 점이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가 하나님의 막 바로 말씀이고 완전한 생명의 영생의 말씀이고 전지전능의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그들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란 것은 바로 놀랐습니다. 바로 놀랐고 잘 놀랐고 그랬는데 그것을 붙들고 계속 가야되겠는데 그만 하나님에 하늘에 주신 이 놀람 이거는 그만 던져버렸는데 그걸 던져버리게 된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 이유가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기들 인간 기존 지식, 자기 주관들 그것 때문에 하늘에서 알려주시는 그 놀람을 빼앗겨 버렸고 도적 맞아 버렸다 그 말입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니까 주님 말씀의 생각이 났고 능력이 생각이 나서 믿음이 솟아났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들이라 바다 위로 걸어오실 수 있는 분이라. 뿐만 아니고 나도 주님이 명하시면 바다 위로 걸어갈 수가 있다 확정을 하고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하소서’ ‘오라’ 하니까 그 말씀 듣고 바다 위로 푹 뛰어서 걸어갔습니다. 이걸 사람들이 이제 생각할 때, 사람이 바다 위로 걸어가다니. 요런 생각 가리켜서 그런 생각을 인간 주관이라 그럽니다. 사람이 바다 위로 걸어갈 수 있습니까? 사람은, 바다는 출렁출렁한 액체고, 사람은 고체니까 물보다 사람이 무거우니까 푹 뛰면 푹 빠지고 물 속에 빠져버리는 것이 이게 육천년 인간 세계의 이 세상의 이치며, 과학이며, 상식이며, 역사며, 통계며, 다 그리 알고 있는데 그런데 바다 위를 푹 뛰어내리니까 바다가 돌처럼 땅바닥처럼 딱 받아가지고 베드로가 바다 위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러니까 그 사실이 안 믿어지는 걸 가리켜 왜 안 믿어지느냐. 안 믿어지는 것이 사람이 바다 위로 걸어가다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과학이 아니지 않는가. 인간 역사에 통계에 있지 않는, 이치에 맞지 않지 않느냐. 그래 가지고 부인하고 부정을 하는 겁니다. 고걸 인간이 사람이 바다 위를 걸어갈 수 없지 않는가 하는 고게 기존 지식이고 고게 주관이고 선입적 관념인데 그놈을 뽑아 버리기 전에는 사람이 바다 위로 걸어갔다는 그 사실이 자기에게 믿어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바다 위로 걸어가다가, 베드로가 걸어가다가, 갔습니다 실제. 갔는데, 바람을 보니까 무서웠습니다. 바람을 보니까 무서운데, 왜 바람 보니까 무섭습니까? 여기 아이, 아기들이 없는데, 우리 저 000이가 바람 불면 무서운 줄 알까요? 00이 아빠 어디 갔노? 000샘 어때요? 00이가 바람이 불면 무서운 줄 알까요? 바다에 사람이 들어가면 빠지는 줄 압니까? 모릅니다. 그러면 만약에 00이 있는데 바람이 불면 00이가 무서워서 무서운 생각 들겠습니까? 안 들겠지요.
베드로는 바람이 부니까 무서웠습니다. 왜 무서웠습니까?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가다 바람 부니까 무서웠습니다. 왜 무서웠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람에 대해서 너무 너무 잘 아니까. 바람에 대해서 너무 아니까. 갈릴리 바다 바람이 불면 이정도 풍속으로 바람이 불면 파도가 얼마만큼 높이 일고 그러면 배가 어떻게 뒤집어 지는데 내가 지금 바다 위로 걸어간다 이래 생각되니까 끔찍하게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심히 두려웠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바람을 보니까 주관이 나왔고, 그 주관은 바람에 대한 기존 지식입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갈 때는 바람이 안 불었습니까? 바람이 불었는데 물길이 출렁였는데 바다 위인데 걸어가던 베드로가 왜 바람을 보니까, 그 성경에 그래 놨지요. 바람을 보고 무서웠다, 빠져갔다. 바람을 보니까 주님 말씀, 능력의 말씀, 바다 위를 걸어가게 하는 그 말씀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없어지고 바람에 대한 기존 지식, 바다에 대한 기존 지식 고게 튀어나와 버리니까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의심이 들어서 두려워서 빠져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정확하게 진단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의심은 자기 주관을 가리켜서 의심이라 객관은 믿음입니다. 주님 말씀을 주님 말씀은 객관이지 않습니까? 자 객관이 무슨 뜻입니까? 객이라 말은 손님이라 그 뜻이지요? 객실 손님 승객, 객이라 말은 내가 아니고 손님이라 그 뜻이지요? 나 아니라 그 말입니다. 객관이라 그러니까 주님 말씀은 내가 아닙니다. 그 말씀을 내가 받아들일 때 주님 말씀을 내가 받아들여서 그대로 살면 그때를 믿음이라 그러고 그 말씀을 내가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의문을 딱 가지면 그것을 가리켜서 의심이라 그러는데 그 의문 가진 것은 내 주관입니다. 아닙니까? 논리적으로 맞는가요? 주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걸어갈 때는 순전한 믿음입니다. 거기 자기 주관은 없습니다. 주관이 있으면 바다 위로 못 걸어갑니다. 완전히 부인하고 말씀 그대로만 믿고 걸어갔는데 가다가 바람을 보니까 빠져 들어갔습니다. 믿음이 적어졌습니다. 요런 걸 가리켜서 자기 주관이라 그리 말을 하는 겁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을 때 놀랐습니다. 말씀에 놀랐습니다. 말씀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습니다. 객관의 역사이고 은혜이고 능력입니다. 그대로 놀란 생활을 붙들고 계속하면 자꾸 자라게 됩니다. 그런데 그 놀란 것 가지고 있는 거기에 한쪽 구석에 있던 자기 주관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존 지식. 자기 주관. 선입적 관념. 그게 나와 가지고 예수님을 다시 보니까 말씀이 다 그만 없어져버리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배척해 버렸다 그 말이지요.
오늘의 우리가 듣는 내가 읽는 성경, 우리가 예배시간에 듣는 말씀, 예배 시간에 듣는 말씀은 시간마다 다를 수 있고 설교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들어보고 구별해 봐야 됩니다. 성경은 틀림 없으니까 성경은 틀림 없고, 이 성경 가지고 설교해도 그 말씀을 들어보고 이 말씀이 과연 하늘의 말씀이냐 성경에 맞는 말씀이냐. 성경에 맞는 말씀이고 복음의 말씀이면 이거는 하나님이 주시는 오늘의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성경. 알기 쉽게 성경. 혹은 백목사님 집회 재독이나 설교. 이런 걸 들을 때는 그거는 막바로 주님 오늘의 예수님이 전하시는 우리에게 전하시는 말씀.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준 하나님의 말씀이면 이 말씀은 완전에 전지전능에 무한의 그 말씀이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알려주시기 위해서 오전에 역사하는 일꾼이 몇 이라고요? 이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역사하는 일꾼이? 첫째는 성부 하나님. 이 구원에 모든 걸 총 책임지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간절하게 원하시고 노력하시고. 두 번째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되어 오셔서 그리 하셨고. 전하셨고. 또 세 번째는 성령이 지금도 우리 양심을 통해서 쉬지 않고 우리 양심의 문을 두드리면서 이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하려고, 깨닫게 하려고 쉬지 않고 애를 쓰고 계시고. 네 번째는 이 말씀 속에 참된 이치 진리가 독자적인 권위 능력으로 우리에게 이 말씀이 들려지고 깨달아지도록 애를 쓰고 계시고. 다섯 번째는 우리보다 먼저 앞선, 깨달은, 성화된 성도들. 주일 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주일 학생들에게, 구역장 집사님들은 구역 식구들에게, 교역자는 교인들에게. 참된 종들. 앞선 성도들이 쉬지 않고 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연구하고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있고. 여섯 번째는 우리 중생된 영이 우리 심신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고. 마지막으론 만물들 까지도 탄식하면서 고대하면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고, 깨닫게 하려고, 이 말씀대로 살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성경 읽을 때나 집회서나 예배서나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려서 들리고 이 말씀이 이해가 되고 깨달아지고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혭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서, 감정이 북받쳐서 울고 불고 눈물 한 바가지를 흘러도 그 자리에서 붕붕 뛰어서 어디 까지 뛰어도 그 속에 말씀의 이치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거는 순간적인, 분위기적인 은혜지. 말하자면은 정적인 은혜지 감정적인 은혜지 이거는 참된 은혜는 아닙니다.
은혜라는 것은 말씀의 이치가 내 귀에 들려져야 되고 그 들리는 말씀이 깨달아져야 됩니다. ‘아 이치가 그러하구나’ ‘이 구원 도리가 그러하구나’ 이것이 자기에게 들려지면서 깨달아져서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이거는 인간의 요소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은, 오전에 인간의 말을 하나 예를 들었는데, 세 번만 예언해서 맞추면 역사에 이름이 남을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언을, 한달 뒤 일을 예언을 세 번했는데 세 번만 정확하게 딱 맞추면 그 사람은 역사에 이름이 길이 남아서 아주 위대한 선지자가 되어지고 대예언자가 되어져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세 번은 커녕 한번도 정확하게 예언할 수 없고, 예언한다하나 추측, 추론이고. 물론, 물리적인 과학으로는 예측을 할 수 있겠지요. 그거는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그러나 인간의 앞날, 인간적인 것에 있어서는 절대 아무도 단정을 못하고 예상, 예측, 추측, 추론, 그러기 때문에 참된 기독교를 제외한 종교가들, 종교 창설가들의 그들의 모든 교훈과 가르침은 그들이 들으면 펄펄 뛰고, 나중에는 고소할런지 모르겠지만은, 성경을 따지고 바로 들어가면 그 모든 종교 창설가들, 종교가들의 모든 경전, 그들 교훈은 전부 다 말하자면은 궁극을 두고 말하면 전부 사람을 속이는 말들, 거짓말들입니다. 다 추측이고 추론이지 참된 진실의 말은 하나도 없고 그러므로 그들 스스로 양심을 딱 갖다 대고 정말 이 사실을 그대로 믿느냐 하면 자신있게 말 할 사람은, 양심이 있으면 아무도 그 말을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지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는 다 모르는데, 이 말씀이 가장 염려되는게. 설교하면서. 우리 교회 설교가 너무 구름 잡는듯한 그런 말씀이 아닌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그런 말씀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실제 생활에서 적용되어지는 이런 걸 쫌 설교를 해야되겠는데. 오래전부터 그랬는데. 제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이게 잘 안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모르고는 또 되지 않으니까. 한번 실제로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것. 듣고 깨달아 지는 것. 믿어지는 것. 그러면 그 말씀은 그거는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고 능력이지 인적요소로 되는게 아니라 그 말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모든 것을 다 계산하고 범위에 다 넣어가지고 그 말씀의 이치대로 살 때에 전부 영생이고 빈틈없고 치우침이 없고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우리 귀에 들려지는 것은, 이 말씀이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이것은 인간의 소원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역사다. 능력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말씀은 들려지지를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을 때에 고향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었는데 듣고 놀란 이 말씀을 왜 빼앗겨 버렸느냐? 그 빼앗긴 것이 바로 자기 주관이다. 자기 주관이 뭐냐? 다른 말로 말하면 자기다. 여기서 말하는 주관이라는 것은, 자기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반대되는 자기인데, 그 자기라는 것은 자기 마음의 모든 요소와 몸에 익어진 모든 습성, 이런 걸 가리켜 자기라 그리 말하는데, 시간이 갔으니까 오후에 잠깐 이걸 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자기라는 것이 무엇인가? 말하자면은 자기 주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라는 사람.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현재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 나라는 사람이 되어졌는가? 그 말이지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전부 다 어떤 것이든 전부 하나님 한분에게서 나온겁니다. 로마서 11장에 보니까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다. 또 모든 움직임도 주로 말미암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단 하나도 하나님으로 인해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하나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은 무에서 유가 나왔다 이리 말합니다. 진화론자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에서 유가 나왔다 이리 말하나, 성경은 그게 아니고 유에서 유가 나왔다. 하나님이 계셨고, 그 다음 그분에게서 모든 존재가 나왔다 이게 성경입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 한 분 에게서 나왔습니다.
보이는 원인은 많습니다. 종이는 뭘로 만드는가. 종이는 나무로 만듭니다. 물은 땅을 파면 물을 나옵니다. 기름은 유전에서 나오지요. 소금은 바다에서 만들어냅니다. 또 설탕은 사탕수수 이런 걸로 만들어냅니다. 밥은 쌀로 만듭니다. 플라스틱은 석유화학 제품으로 석유로 만듭니다. 그 만든, 세상에 만든 것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많이 있는데, 속에 궁극을 파고 들어가면 모든 것은 전부 하나님 한분에게서 천가지 만가지 모든 존재가 전부 다 나왔습니다.
나왔는데,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존재가 한분에게 나왔는데, 나온 그 모든 것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은 둘로 되어있습니다. 나온 것이 다 둘로 되어있다. 어떻게 둘로 되어있는것인가 말하자면은 하늘이 있고 땅이 있지요.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우주와 영계. 동물과 식물. 사람과 짐승. 해와 달. 물과 불. 사람도,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젊은이와 늙은이. 이런 존재, 모든 존재는 둘로 되어 있고, 또, 형체를 가진 가견적인 형체 가진 존재 뿐이 아니고, 좀 추상적인, 행위적인 그런 것들도 보면은 다 둘로 되어져 있어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전쟁과 평화, 기쁨과 슬픔, 소망과 절망, 사랑과 미움, 사는 것과 죽는것. 생명과 사망, 약한 것 강한 것, 큰 것 작은 것, 높은 것 낮은 것. 이렇게 모든게 다 둘로 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기에 이렇게 둘로 되어져 있는 그 속에 좀 더 깊은 속에도 둘로 되어있는데 보니까 좀 더 깊은 속에 되어진 그 둘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이 계시고 피조물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천국과 지옥. 구원과 멸망. 선과 악. 죄와 의. 또,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 지식. 믿음과 불신. 이런 것도 또 둘로 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외부적으로 나타나 보이는 모든 것도 둘로. 조금 더 깊은 속에 있는 것도 둘로, 요래 만드신 것은, 둘로 만드신 것은, 둘로 만든 속에서 하나를 찾아서 하나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둘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거를 지난 지난주 타락 예정과도 연결시켜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하나님 한분만 믿고 바라보고 선으로만 의로만 순종으로만, 하나로만 가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순종 아닌 거역을 만들고, 생명 아닌 사망을 만들고, 왜 하나님께서 의뿐이 아닌 죄를 만들고, 왜 타락을 왜 만들어서 하나만 있는 그 곳에서 하나를 더 만들어서 둘을 왜 만들었느냐?
만드신 그 이유는 하나이신 하나님 한 분 만을 찾고, 그 분만을 믿고, 그 분에게로 향하는 이런 하나인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온전한 하나. 온전한 하나를 향한 하나인 우리들 모습. 그 하나가 강제적이 아니고 억지적이 아닌 자의적이고 유기적인 그런 온전한 하나를 향해 나아가는 그런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둘로 만들어 두셨다 그 말입니다.
둘로 만드신 이 세상에서, 되어진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살고 있고, 둘로 되어진 그 세상에서, 물론 세분하면 다 있지만은 크게 나누면, 둘로 되어진 이 세상에서 환경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고, 둘로 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사람은 만들어진 모습이 있는데, 두 모습이 있어서, 둘로 된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둘로 되어져 있는데, 둘로 되어진 그 세상에서 두 모습을 가지지 아니하고, 환경이 둘이니까 사람이 만들어지면 두 모습으로 만들어지는게 정상입니다. 추운 곳과 더운 곳이 같이 있으면, 추운데 적응하고 더운데 적응하는 이런 사람으로 자라가면서 그리 되는 그게 정상인데. 넓은 것도 알고 좁은 것도 알면 두 지식을 아는 게 정상인데.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는, 두 모습, 두 환경, 두 지식, 두 인도. 둘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러므로 요래 둘로 만들어지니까,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에 두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이게 정상적인, 타락 후의 정상적인 사람인데, 그러나 궁극은 목적은 하나로 놓아지는게 목적이고. 그런데 둘로 되어진 세상에서 두 모습으로 자라지 아니하고 한 모습으로만 만들어지는 사람들이 있으니, 둘로 된 세상, 둘로 된 환경, 둘로 된 지식, 둘로 된 인도자, 둘로 되어진 그 환경 속에 살면서 그 사람들이 둘로 만들어 지지 아니하고 하나로만 만들어진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 그 이름을 가리켜 뭐라 그럽니까? 그 이름을 가리켜 뭐라 그럽니까? 하나로만 만들어진 사람들, 그 이름을 가리켜서 불택자. 불신자. 그들입니다. 그들은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는데 그들은 안타깝게도 지옥이라 그러면 좀 화를 낼랑가요. 세상을 말할까요. 세상은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이 세상에는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습니다. 둘이 있는데 불택자들 불신자들은 천국과 지옥이 있는 세상에서 천국은 보지도 못하고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구경도 못하고 자기 천국 만들지도 못하고 오로지 지옥만 받아들이고 지옥만 자기 것 삼는 그게 불택자들, 불신자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상이지만 하나님이 세상에 계시고 피조물이 있는데 하나님은 구경도 못하고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만나보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고 오로지 피조물로만 전부 삼는 사람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형성되어진 그래서 그들 머리 속에, 천국? 그게 뭔데? 하나님? 만들어낸 것이지? 요래 되어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 굉장히 많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세상에서 천국도 만들어놨고, 이 세상 지옥도 만들어놨는데, 둘로 되었으니까 둘을 봐야되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버려야되는데, 이 사람들은 둘로 된 걸 보지 못하고, 천국은 못보고 이 세상만 보니까, 지옥만 보는 겁니다. 피조물뿐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은 모르고 피조물만 아는 겁니다. 지식은 둘이 있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지식이 있고, 인간 지식이 있는데. 이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식은 부정합니다.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어디있느냐? 인간 지식이 전부지. 그들은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은 모릅니다. 인간 사랑이 그들에게는 전부입니다. 구원도 모릅니다. 그들이 말하는 구원은 사망 속에 든 모든 구원입니다. 믿음도 모릅니다. 믿음이란 것이 전부 인간의 믿음이고 불신입니다.
둘로 만들어서 둘로 되어진 이 세상 환경, 이 속에 사는 사람이 두 모습으로 만들어져야 되고 자라가야 되고, 두 지식과 두 개가 그 속에 들어가서 여기 피동 저기 피동되어서 두 모습으로 만들어지는게 참 바른 사람인데. 타락 후의 바른 사람인데. 그 한 종류는 전부 둘이 아니고 하나로만 되어진 사람들. 그래서 그들의 주관, 그들의 지식, 그들의 생각, 그들의 견해, 그들의 비판 평가 가치관 주장은 전부다 하나님 없는 세상, 천국 없는 세상, 구원 없는 세상, 믿음 없는 세상. 이것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요것뿐인 한 사람이 있고.
한 종류의 사람은, 하나님이 둘로 만들어놨으니까 두 모습이 자기 속에 만들어져서 그 머릿속에 보니까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고, 하나님도 계시고 피조물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도 있고 인간 말도 있고, 믿음도 있고 불신도 있고, 선도 있고 악도 있고, 죄도 있고 의도 있고. 요래가지고 만들어진 사람들이 여기에 있는 우리 대부분입니다. 그리되어있는데 그런데 그 양쪽에 비중은 사람마다 달라서 어떤 사람은 둘인데, 하나님이 구십이 되고 피조물은 열이 된 사람, 어떤 사람은 천국이 99고 이 세상 지옥은 하나 밖에 없는 사람, 하나님의 지식은 99고 인간지식은 하나밖에 없는 사람. 둘은 둘인데 인간 지식이 99고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밖에 없는 사람, 그래가지고 자기가 인식도, 지식도, 그리 생활하는 것도, 하나님으로 천국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 이것이 많고, 피조물로, 세상으로, 인간지식으로, 인간사랑으로 이래 산 그 부분은 적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둘은 둘인데 하나님 모시고 산 생활은 극히 적고 피조물로 살고 이 세상으로 살고 인간지식으로 살고 세상 가치 두고 산 그것이 많아서 그래 만들어진 사람도 있고. 요래 크게 말하면 둘인데 그 속에 정도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 말이지요.
그래 만들어진 사람들을 가리켜 다 각각 자기의 주관이다. 자기라는 사람이라. 그 모습이 다 그러하다 그 뜻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그 비중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들려지는 것이 달라지고 그 말씀을 들을 때 받아들여지는 것이 다른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래 되어진 말씀을 들을 때,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을 때, 그 들을 때 그 때는 하나님의 하늘의 은혜로 들려졌고 밝아져서 그 말씀이 들려졌고 놀랐는데, 그거는 그 때 뿐이고, 그 전까지 그들 속에 자라고 있는, 자리 잡고 있는, 많은 부분은 전부 주님을 모르는 하나님을 섬기되, 종교 의식적으로, 의례적으로 습성적으로 율법적으로 섬긴 그것으로만 가득차니까 주님 말씀 들을 때 그때는 놀랐지만은 그 놀란 것은 잠깐이고 그때뿐이고 그 전까지 그들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또 한 속에 자리 잡고 있던 하나님 없는 피조물, 천국 아닌 세상, 하나님 지식 아닌 인간 지식으로 가득 찬, 그 주관이 들어가지고 놀랐던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을 다 쫓아내버리고 옛날로 돌아갔으니 그 돌아간 것이 뭐냐? 그게 바로 자기 주관이다. 기존 지식이다. 그 주관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라는 말입니다. 그때까지 만들어진 자기 모습입니다. 그 자기 모습을 말하자면은 하나는 마음의 모습이고 하나는 몸의 습성이다. 그 생활로 익어진 것이 인간이고 모든 사람입니다.
여기 우리가 이해가 되든 안되는 우리는 전부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사람의 모습이, 그 사람의 주관이고. 그 사람의 모습이 바로 그날 까지 살아온 그의 생애가 그를, 자기를 만든 것이고, 그 생애를 둘로 나눠보면은, 하나는 하나님이고 피조물이고, 또 천국이고 지옥이고, 하나님 지식과 인간지식 이리 둘로 뚜렷이 나눠질 수가 있는 것이고, 어느 것이 더 비중이 크냐에 따라서 이 말씀을 들을 때 쉽게 받아들여지느냐 인정이 되지 않느냐가 판가름이 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 믿는 우리들, 그러니까 요 둘로 되지 아니하고 하나로만 만들어진 불택자, 불신자 그들 속에는 이 생명의 씨앗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그들은 들려지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고, 우리는 이해가 되는데 이 말씀이 이해가 되려고 하면 자기 속에 있는 이 말씀과 배치된 오늘까지 살아온 이 말씀과 대립되는 마음의 수많은 요소와 작용들, 몸에 익어진 그 습성들을 완전히 부인하지 않으면은 꺽지않으면 이 말씀은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고 인정되어지지 아니하고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은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만들어진 자기가 오랜 세월 속에 차각 차각 세월 속에서 하나하나 쌓아서 만들어지고 형성되어지고 익어진 자기로 그렇게 되어진 자기기 때문에 그 자기를 뽑아버리는 것도 바로 이번 공과에 말씀하신 일호 명령과 일호 금령을 준행하는 그 생활을 계속하는 거기서만 하나님이 알려주실 때, 들려주실 때 듣고, 놀라게 해주실 때 놀라는 그 놀람, 하늘의 은혜 역사그것을 보수해서 차각 차각 쌓아나가고 지켜나가는 거기서만 자기 속의 주관이 뽑혀 나가고 자기가 꺾여지는 것이지 그래서 자기 꺾는 그 생활이 한번 하고 두 번하고 계속되어 나가면 꺾여나가는 것이고 참된 자기는 자라나가는 것이고 이래되는 것이지 요거 없이는 결단코 되는 수가 없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오후에는 오전 말씀에 이어서 주관이 무엇이냐 자기가 무엇이냐 요걸 생각해봤습니다. 자기를 바로 알지 못하면 이걸 깨닫지 못하고 이게 어려운 것 같으나 이것이 뼈대고 중심인데, 뼈대고 근본인데, 이걸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 구원과는 참 거리가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는 멉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어야 되고, 느껴져야 되는데, 이해가 되려면은, 한번 들어 모르면 자꾸 들어 생각해보고 연구해 봐야 됩니다.
말씀을 들어보고 안되면 또 들어보고 또 살펴보고 자꾸 연구해서 이것이 이해가 되어져야, 자기를 알아야, 나라는 사람이 내가 검은색이냐 푸른색이냐 옷을 입어도 내 얼굴이 길쭉하냐 그러면 옷을 어떻게 입을까, 내 얼굴이 네모졌다 어떻게 입을까, 내 피부는 검다 어떻게 입을까 자기 겉모습에 따라 옷도 그래 입고 자기 신체에 따라 음식도 그래 입는데 신앙이라는 것을 우리 신앙생활을 영생을 향한 그 생활에 나라는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져있는 사람인지, 나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겠는가 그 말이지요.
우리 주관 나 자신을 생각해보고 그 주관이 둘 중에 하나인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과 천국아닌 세상, 하나님의 지식 아닌 인간지식, 믿음 아닌 불신으로 살아서 형성되어지고 만들어진 그 자기 기존 지식과 선입적 관념. 그 주관을 뽑아버리기 전에는 하나님 말씀은 들려지지를 아니하고 깨달아지지 아니하고 실행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의 원수는 이래도 신앙의 대적은 자기 악. 저래도 악. 어디서 말씀이 들어가도 결국 들어가보면 우리 원수는 딴 데 있지 아니하고 내 속에 삐뚫어진 나 자신이 전부 다 대적이고 원수다 하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제목: 사람의 자기 주관
요점:
1. 고향이라는 지역의 의미
- 고향으로 가신 이유는 구원 도리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
- 고향은 예수님에 대해서 외부적으로 가장 잘 아는 곳
- 예수님에 대한 선입적 관념 주관이 강할 수밖에 없는 곳
- 고향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주관으로 예수님을 배척
2. 오전 복습
- 고향 사람들이 놀란 것은 말씀과 말씀의 지혜와 능력에
- 예수님 말씀에 놀랐으니 하나님의 역사이며 은혜
- 잘 놀랐고 바로 놀란 것
- 놀란 것을 강직해서 계속하면 자라가는데
- 놀란 것을 빼앗아 가는 도적놈 원수가 있으니 그들의 자기 주관
-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예수님 말씀은 하나님 말씀
- 예수님이 말씀은 전지 전능 완전의 말씀
- 이 말씀이 들려지고 깨달아지고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요 은혜
- ...............
3. 오후 말씀(사람의 자기 주관)
1)모든 것은 모든 것은 하나에게서 나온 것(롬11:
- 하나님 한 분에게서 나온 모든 것
- 하나님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
- 무에서 유가 아니고 유에서 유가 된 것
- 보이는 원인 근원은 많으나(물은 땅을 파면, 기름은 유전에서, 소금은 바다에서,
종이는 나무로, 설탕은 사탕수수로, 밥은 쌀로, 석유화학제품들...)
- 궁극은 하나님 한 분에게서( 그 어떤 것도 결국 하나님 한 분에게서 다 나온 것들)
2. 하나에게서 나온 둘로 된 세상 모든 것
하늘과 땅, 땅과 바다, 해와 달, 우주와 영계
동물과 식물, 사람과 짐승,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물과 불, 물과 기름,
뜨거운 것 차운 것, 여름과 겨울, 흰 것과 검은 것,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소망과 절망, 사랑과 미움
삶과 죽음, 생명과 사망, 강한 것과 약한 것, 큰 것과 작은 것, 많은 것과 적은 것
승리와 패전
3. 둘로 된 또 다른 것
하나님과 피조물, 천국과 지옥, 구원과 멸망,
하나님 지식과 인간 지식,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 믿음과 불신
4. 둘로 만드신 목적은 하나를 향하게 하는 것
5. 둘로 된 세상에서 만들어지는 사람
1) 둘로 된 세상에서 하나로만 된 사람
2) 둘로 된 세상에서 한 사람의 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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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2 주후
본문: 마태복음 13:53-58
예수님께서 고향교회에 가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같이 한 번 해보실까요. “고향”. 고향이란 ‘고’자가 무슨 ‘고’자 입니까? 고향이란 ‘고’자가 옛고(古)잡니다. 옛고자. 옛날할 때 아주 고대할 때 그 ‘고’자. 고향이라 하는 이 말씀에서 여기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구원도리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곳에 많은 곳에 다니시다가 고향에 가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과 한 분이지요. 예수님 자체가 신인양성일위니까 하나님과 사람이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성만 두고 말해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순전히 말하자면 완전 백퍼센트 동거 동행입니다. 말 한마디, 생각 하나 신경세포 움직임 하나까지 하나님과 끊어짐이 없는 완전한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완전 동행의 예수님의 마음이나 생각이나 활동이 사람들처럼 고향을 떠나서 객지를 많이 다니다보니까 고향 생각이 나서 그래서 고향으로 가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인도를 따라 발걸음이, 마음이 고향으로 가셨고 발걸음이 고향으로 가서 고향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이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리 하신 겁니다. 고향이라는 말의 의미는 정든 곳이고 또 모든 것이 낯익은 곳이고 정든 곳이고 동시에 모든 곳이 낯익고 정든 곳이라 그 말은 나도 고향을 알고 고향도 나를 안다 그런 뜻입니다. 고향이 날 안다 그 말은 고향에 있는 모든 사람들, 집안도 있고, 식구도 있을 수 있고, 일가 친척도 있을 수 있고, 이웃도 있을 수 있고 고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안다 그 말입니다. 다른 곳보다 더 정확하게 세밀하게 많이 안다 그 뜻이 되겠지요.
예수님은 고향에 가셨는데 주로 객지로 많이 다니셨지요. 예수님 고향이 어디지요? 학생들? 예수님 고향이 어딥니까? 하늘나라는 맞지요. 본향이고.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나신 예수님의 고향이 어딥니까? 예수님이 나신 곳이 어딥니까? 마굿간. 어디 있는 마굿간? 동네 이름을 말하는 겁니다. 그건 안 배웠지? 오늘 배워서 알면 되요. 예수님이 태어나신 고향 장소 지역이 어딥니까? 아는 분은 크게 씩씩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어딥니까? 어디라고요? 베들레헴이지요 베들레헴. 예수님을 가리켜 어디 사람이라 그럽니까 주로? 어디 사람이요? 나사렛 갈릴리 사람이라 그러지요. 갈릴리 사람. 주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많이 사셨고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찾아가신 여기 고향에 가셨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가셨다 그 말이겠지요. 고향에 가셨습니다. 그 고향은 예수님이 나신 곳이고 자란 곳이라서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 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잘 압니다. 많이 알고 잘 압니다.
요런 면을 가르쳐서 고향으로 가셨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고향 사람들이니까 타지역 사람들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세밀하게 알고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들이 많은 그 곳에 가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니까 그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는, 그 말씀에 이치와, 이치는 지혜입니다. 그 말씀의 이치와 그 말씀의 능력에 다 놀랐습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그 말씀이, 이치가, 하늘의 복음이고 권세있는 새 교훈이었고 자기들 마음이 완전히 변화되어지는 그런 아주 능력있는 그런 말씀으로 들려졌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놀란 것은 어디에 놀랐다고요? 말씀에 놀랐고 말씀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습니다. 잘 놀랐습니까 잘못 놀랐습니까? 잘 놀랐습니다. 바로 놀랐습니까 안 놀랄 것 놀랐습니까? 바로 놀랐습니다. 바로 놀랐고 잘 놀랐습니다. 그 놀란 것은 그들이 놀랐지만은 말씀을 듣고 놀라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아니합니다. 이들이 놀란 것은 말씀을 듣고 놀랐고 말씀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으므로 그 놀람은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신 놀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니까 마음이 열려지고 귀가 열려서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듣고 보니까 놀랍고 깨닫고 보니까 놀랍고 그래서 깜짝 놀랐습니다.
놀랐으니까 그 놀란 것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 놀란 것을 꼭 붙들고 쥐고 놓지 말아야 됩니다. 과거에 종종 한 번씩 말씀 드렸는지는 모르겠는데, 서부교회 시절에 어떤 여반사 선생님이 있습니다. 대학생이었는데, 일등 반사 학생들 육십 명, 칠십 명씩 데려오고 물 불 안 가리고 여반사인데 그런 분들이 많았습니다. 막 뛰어다니면서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미아가 생기면 울면서 잠도 못자고 찾으러 다니고 기도하고 그 신앙이 목사님 보시기에 그렇게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반사 선생님이 고등학교 시절까지 그랬는데 대학교 들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더니 얼굴이 잘 안보이고 얼굴이 잘 안 보인다는 말은 주일날 예배를 빠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얼굴이 일주일에 몇 번 보여야 됩니까? 예배시간에? 일주일에 우리는 주일 새벽이 없으니까 열 번 보여야지요 열 번.
일주일에 열 번 보이던 반사가 일주일에, 한 일곱 번 여덟 번 보이다가 다섯 번 보이다가 이래 자꾸 줄어드니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 고등학교 때 죽도록 충성하던 반사 생활이 틀렸는가 그때 받은 그 은혜가 틀렸는가 그 때는 최면술에 걸려서 그렇게 열심히 울고 불고 기도하고 죽도록 뛰어다니며 반사를 했는가 그때는 철이 없어 그랬는가 최면술에 걸렸던가 그래서 대학교 학생이 되고 보니까 지성인이 되어서 이제는 반사 생활은 가치가 없고 시시하게 보여졌는가 어느 것인가 그러면서 아주 책망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 선생님 이름도 지금 제 머릿 속에 기억을 합니다. 아주 좋은 분입니다. 그래 책망을 한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고등학교 때까지 그랬으면 그 받은 그 은혜, 그 간절, 그 열심, 그 충성을 꼭 쥐고 대학교 가도 변치 않고 2학년 3학년이 되어도 변치 않고, 사회 직장 들어가도 변치 않고, 결혼해서 아내가 되어도 변치 않고 남편이 되어도 변치 아니하고, 엄마가 되어도 아빠도 되어도 변치를 아니하고 그게 계속 붙들고 붙들고 계속 나가면 신앙이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자라서 점점 자라게 되어지는데 이 고향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귀를 열고 마음을 여니까 말씀이 들려졌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예수님 얼굴 보고 아이구 오랜만에 보니까 훤칠한 미남이 됐구만. 잘 생겼구만. 그거 보고 놀라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따라다니는구만. 그거 보고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놀란 것은 말씀을 듣고 말씀에 놀랐습니다. 그 말씀 속에 역사하는 지혜와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 잘 놀랐고 바로 놀랐습니다. 하나님이 놀라게 하신 겁니다. 그걸 가르켜서 은혜를 받은 것이라 그리 말하지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어떡해야 되겠습니까? 꼬옥 붙들고 강직을 해야 됩니다. 강하게 붙들고 놓지 않고 지켜야 되는데 그걸 보수라 그러지요. 받은 은혜를 보수하고 놓지를 않아야 되는데, 그걸 은혜를 받고 났는데 그 받은 은혜를 간직하지 아니하고 조금 지나서 보니까, 눈을 뜨고 한 번 더 쳐다보니까 ‘어 저 사람이 누구지? 예수 아니야? 목수 아들 아니야? 그 아버지는 목수고 어머니는 마리아고 형제들은 우리랑 함께 지내는 내나 그 사람의 형 아닌가 오라버니 아닌가? 하고 옛날 자기들이 알던 예수님, 자기들 가진 기존 지식과 예수님에 대한 선입적인 관념과 자기들 주관으로 알던 그 지식과 그 관념가지고 예수님을 쳐다보니까 예수님이 별 사람이 아니었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옛날로 돌아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선지자가 어디 어디서 존경 받지 못한다고요? 본문에 보니까 선지자가 어디 어디서요? 첫째는 자기 넓게는 고향 좁게는 자기 집. 왜 그렇습니까? 왜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받지를 못합니까? 그 선지자의 면면을 그 사람들은 너무 잘 아니까 그런겁니다.
그런데 거기 양면이 있어서 그 선지자의 면면을 잘 아는 것이 정확하게 바로 알면 그 선지자의 어떠함에 따라서 그리 될 수 있는데 백목사님 고향은 계명입니다. 그런데 백목사님을 아는 사람들 계명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더 백목사님을 존경을 더 합니다. 그분에게 목숨 걸고 충성을 합니다. 고향 사람들 계명 교회 사람들은 더 했습니다. 왜 그럴까? 어느 지역사람들보다 백목사님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다 존경받는데 고향과 집에서는 존경 받지 못한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그 선지자가 예수님이 틀려서 그런가 겉만 그렇고 속은 아니라서 그런가. 그런 선지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지자가 말하자면은, 말은 청산유수고 아주 설교할때는 성자같은데 집에만 들어가면 마귀가 되어버리니까 집안에 아내고 자식들은 목사 아버지 알기를 우습게 알고, “말은 잘하지. 강단에만 서면 천사지. 집에만 들어오면 골치덩어린데. 죽겠구만.” 그래가지고 그만 교인들 보면은 자기들 볼 때 “저런. 우리 아버지 이중인데 다 속는다.” “우리 남편 저런 데 다 속는다.” 그러니까 그 사모는, 그 목사 자녀들은 전부 대 마귀가 되는 겁니다 속으로. 그런데 만약에 그 선지자 그 목사가 겉과 속이 다 표리부동이 아니고 일치가 되어서 설교할때나 집에서나 말씀대로 다 살지는 못해도 진실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는 그런 것 같으면 가족들부터 존경이 되겠지요. 가족들부터.
그런데 그 고향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들이라 할지라도 그 자기 남편 아버지의 그 선지자의 깊은 내면을 알지 못한다면 존경해도 더 깊은 속까지는 들어가지 못 할 겁니다. 예수님을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도 이 고향 사람들은 가장 잘 압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요셉이라는 사람이고 직업은 목수다. 또, 어머니는 마리아다. 그 형제는 몇남매인데 이름은 누구 누구 누구고 지금 어디 있고 뭐 하고 있고. 다 그 집안 혈통을 꿰뚫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예수님의 내면, 하나님이 사람 되신 구주인 그 면, 또 인성을 입고 있어도 하나님과 완전 동행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면. 이 면은 이 사람들이 눈이 어두워서 보지를 못하고. 자기들 수준에서 자기들 범위에서 자기 정도에서 아는 고것만 보고 예수님을 아는 그걸 가리켜서 뭐라 했다고요? 그런 걸 가리켜서 자기 주관이라 그럽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에 대한 기존 지식이고, 선입적인 관념입니다.
타 지역 사람들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아 저 훌륭한 분. 위대한 분. 말씀을 들어보니까 성자네. 메시야네. 인간적인 그런 게 아닌 아마 하늘에서 내려왔나보다. 저 분은 태어날 때 특별한 뭐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은혜가 더 되는데. 고향 사람들은 알고 보니까 그 깊은 내면은 모르고 저거 주관대로 자기들 수준 정도에서 아는 그것만 보고 아니까 그리 알고 나니까 예수님이 전하신 그 말씀까지도 깎아내려서 그리 알고 그래서 결국은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원래 그의 신분이 그의 정체가 목수 아들이고 우리와 함께 지내던 사람인데 저렇게 탁월한 것이 별 것 있겠는가 어쩌다 저리 된 것이겠지 하고 자기들 주관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배척하고 믿지를 않았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구주 메시얍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하나님과 동거동행이므로 숨소리 한번까지도 완전입니다. 흠과 점이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가 하나님의 막 바로 말씀이고 완전한 생명의 영생의 말씀이고 전지전능의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그들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란 것은 바로 놀랐습니다. 바로 놀랐고 잘 놀랐고 그랬는데 그것을 붙들고 계속 가야되겠는데 그만 하나님에 하늘에 주신 이 놀람 이거는 그만 던져버렸는데 그걸 던져버리게 된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 이유가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기들 인간 기존 지식, 자기 주관들 그것 때문에 하늘에서 알려주시는 그 놀람을 빼앗겨 버렸고 도적 맞아 버렸다 그 말입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니까 주님 말씀의 생각이 났고 능력이 생각이 나서 믿음이 솟아났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들이라 바다 위로 걸어오실 수 있는 분이라. 뿐만 아니고 나도 주님이 명하시면 바다 위로 걸어갈 수가 있다 확정을 하고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하소서’ ‘오라’ 하니까 그 말씀 듣고 바다 위로 푹 뛰어서 걸어갔습니다. 이걸 사람들이 이제 생각할 때, 사람이 바다 위로 걸어가다니. 요런 생각 가리켜서 그런 생각을 인간 주관이라 그럽니다. 사람이 바다 위로 걸어갈 수 있습니까? 사람은, 바다는 출렁출렁한 액체고, 사람은 고체니까 물보다 사람이 무거우니까 푹 뛰면 푹 빠지고 물 속에 빠져버리는 것이 이게 육천년 인간 세계의 이 세상의 이치며, 과학이며, 상식이며, 역사며, 통계며, 다 그리 알고 있는데 그런데 바다 위를 푹 뛰어내리니까 바다가 돌처럼 땅바닥처럼 딱 받아가지고 베드로가 바다 위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러니까 그 사실이 안 믿어지는 걸 가리켜 왜 안 믿어지느냐. 안 믿어지는 것이 사람이 바다 위로 걸어가다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과학이 아니지 않는가. 인간 역사에 통계에 있지 않는, 이치에 맞지 않지 않느냐. 그래 가지고 부인하고 부정을 하는 겁니다. 고걸 인간이 사람이 바다 위를 걸어갈 수 없지 않는가 하는 고게 기존 지식이고 고게 주관이고 선입적 관념인데 그놈을 뽑아 버리기 전에는 사람이 바다 위로 걸어갔다는 그 사실이 자기에게 믿어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바다 위로 걸어가다가, 베드로가 걸어가다가, 갔습니다 실제. 갔는데, 바람을 보니까 무서웠습니다. 바람을 보니까 무서운데, 왜 바람 보니까 무섭습니까? 여기 아이, 아기들이 없는데, 우리 저 000이가 바람 불면 무서운 줄 알까요? 00이 아빠 어디 갔노? 000샘 어때요? 00이가 바람이 불면 무서운 줄 알까요? 바다에 사람이 들어가면 빠지는 줄 압니까? 모릅니다. 그러면 만약에 00이 있는데 바람이 불면 00이가 무서워서 무서운 생각 들겠습니까? 안 들겠지요.
베드로는 바람이 부니까 무서웠습니다. 왜 무서웠습니까?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가다 바람 부니까 무서웠습니다. 왜 무서웠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람에 대해서 너무 너무 잘 아니까. 바람에 대해서 너무 아니까. 갈릴리 바다 바람이 불면 이정도 풍속으로 바람이 불면 파도가 얼마만큼 높이 일고 그러면 배가 어떻게 뒤집어 지는데 내가 지금 바다 위로 걸어간다 이래 생각되니까 끔찍하게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심히 두려웠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바람을 보니까 주관이 나왔고, 그 주관은 바람에 대한 기존 지식입니다.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갈 때는 바람이 안 불었습니까? 바람이 불었는데 물길이 출렁였는데 바다 위인데 걸어가던 베드로가 왜 바람을 보니까, 그 성경에 그래 놨지요. 바람을 보고 무서웠다, 빠져갔다. 바람을 보니까 주님 말씀, 능력의 말씀, 바다 위를 걸어가게 하는 그 말씀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없어지고 바람에 대한 기존 지식, 바다에 대한 기존 지식 고게 튀어나와 버리니까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의심이 들어서 두려워서 빠져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정확하게 진단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의심은 자기 주관을 가리켜서 의심이라 객관은 믿음입니다. 주님 말씀을 주님 말씀은 객관이지 않습니까? 자 객관이 무슨 뜻입니까? 객이라 말은 손님이라 그 뜻이지요? 객실 손님 승객, 객이라 말은 내가 아니고 손님이라 그 뜻이지요? 나 아니라 그 말입니다. 객관이라 그러니까 주님 말씀은 내가 아닙니다. 그 말씀을 내가 받아들일 때 주님 말씀을 내가 받아들여서 그대로 살면 그때를 믿음이라 그러고 그 말씀을 내가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의문을 딱 가지면 그것을 가리켜서 의심이라 그러는데 그 의문 가진 것은 내 주관입니다. 아닙니까? 논리적으로 맞는가요? 주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걸어갈 때는 순전한 믿음입니다. 거기 자기 주관은 없습니다. 주관이 있으면 바다 위로 못 걸어갑니다. 완전히 부인하고 말씀 그대로만 믿고 걸어갔는데 가다가 바람을 보니까 빠져 들어갔습니다. 믿음이 적어졌습니다. 요런 걸 가리켜서 자기 주관이라 그리 말을 하는 겁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을 때 놀랐습니다. 말씀에 놀랐습니다. 말씀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습니다. 객관의 역사이고 은혜이고 능력입니다. 그대로 놀란 생활을 붙들고 계속하면 자꾸 자라게 됩니다. 그런데 그 놀란 것 가지고 있는 거기에 한쪽 구석에 있던 자기 주관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존 지식. 자기 주관. 선입적 관념. 그게 나와 가지고 예수님을 다시 보니까 말씀이 다 그만 없어져버리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배척해 버렸다 그 말이지요.
오늘의 우리가 듣는 내가 읽는 성경, 우리가 예배시간에 듣는 말씀, 예배 시간에 듣는 말씀은 시간마다 다를 수 있고 설교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들어보고 구별해 봐야 됩니다. 성경은 틀림 없으니까 성경은 틀림 없고, 이 성경 가지고 설교해도 그 말씀을 들어보고 이 말씀이 과연 하늘의 말씀이냐 성경에 맞는 말씀이냐. 성경에 맞는 말씀이고 복음의 말씀이면 이거는 하나님이 주시는 오늘의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성경. 알기 쉽게 성경. 혹은 백목사님 집회 재독이나 설교. 이런 걸 들을 때는 그거는 막바로 주님 오늘의 예수님이 전하시는 우리에게 전하시는 말씀.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준 하나님의 말씀이면 이 말씀은 완전에 전지전능에 무한의 그 말씀이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알려주시기 위해서 오전에 역사하는 일꾼이 몇 이라고요? 이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역사하는 일꾼이? 첫째는 성부 하나님. 이 구원에 모든 걸 총 책임지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간절하게 원하시고 노력하시고. 두 번째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되어 오셔서 그리 하셨고. 전하셨고. 또 세 번째는 성령이 지금도 우리 양심을 통해서 쉬지 않고 우리 양심의 문을 두드리면서 이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하려고, 깨닫게 하려고 쉬지 않고 애를 쓰고 계시고. 네 번째는 이 말씀 속에 참된 이치 진리가 독자적인 권위 능력으로 우리에게 이 말씀이 들려지고 깨달아지도록 애를 쓰고 계시고. 다섯 번째는 우리보다 먼저 앞선, 깨달은, 성화된 성도들. 주일 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주일 학생들에게, 구역장 집사님들은 구역 식구들에게, 교역자는 교인들에게. 참된 종들. 앞선 성도들이 쉬지 않고 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연구하고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있고. 여섯 번째는 우리 중생된 영이 우리 심신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고. 마지막으론 만물들 까지도 탄식하면서 고대하면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고, 깨닫게 하려고, 이 말씀대로 살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성경 읽을 때나 집회서나 예배서나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려서 들리고 이 말씀이 이해가 되고 깨달아지고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혭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서, 감정이 북받쳐서 울고 불고 눈물 한 바가지를 흘러도 그 자리에서 붕붕 뛰어서 어디 까지 뛰어도 그 속에 말씀의 이치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거는 순간적인, 분위기적인 은혜지. 말하자면은 정적인 은혜지 감정적인 은혜지 이거는 참된 은혜는 아닙니다.
은혜라는 것은 말씀의 이치가 내 귀에 들려져야 되고 그 들리는 말씀이 깨달아져야 됩니다. ‘아 이치가 그러하구나’ ‘이 구원 도리가 그러하구나’ 이것이 자기에게 들려지면서 깨달아져서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이거는 인간의 요소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은, 오전에 인간의 말을 하나 예를 들었는데, 세 번만 예언해서 맞추면 역사에 이름이 남을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언을, 한달 뒤 일을 예언을 세 번했는데 세 번만 정확하게 딱 맞추면 그 사람은 역사에 이름이 길이 남아서 아주 위대한 선지자가 되어지고 대예언자가 되어져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세 번은 커녕 한번도 정확하게 예언할 수 없고, 예언한다하나 추측, 추론이고. 물론, 물리적인 과학으로는 예측을 할 수 있겠지요. 그거는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그러나 인간의 앞날, 인간적인 것에 있어서는 절대 아무도 단정을 못하고 예상, 예측, 추측, 추론, 그러기 때문에 참된 기독교를 제외한 종교가들, 종교 창설가들의 그들의 모든 교훈과 가르침은 그들이 들으면 펄펄 뛰고, 나중에는 고소할런지 모르겠지만은, 성경을 따지고 바로 들어가면 그 모든 종교 창설가들, 종교가들의 모든 경전, 그들 교훈은 전부 다 말하자면은 궁극을 두고 말하면 전부 사람을 속이는 말들, 거짓말들입니다. 다 추측이고 추론이지 참된 진실의 말은 하나도 없고 그러므로 그들 스스로 양심을 딱 갖다 대고 정말 이 사실을 그대로 믿느냐 하면 자신있게 말 할 사람은, 양심이 있으면 아무도 그 말을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지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는 다 모르는데, 이 말씀이 가장 염려되는게. 설교하면서. 우리 교회 설교가 너무 구름 잡는듯한 그런 말씀이 아닌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그런 말씀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실제 생활에서 적용되어지는 이런 걸 쫌 설교를 해야되겠는데. 오래전부터 그랬는데. 제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이게 잘 안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모르고는 또 되지 않으니까. 한번 실제로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것. 듣고 깨달아 지는 것. 믿어지는 것. 그러면 그 말씀은 그거는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고 능력이지 인적요소로 되는게 아니라 그 말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모든 것을 다 계산하고 범위에 다 넣어가지고 그 말씀의 이치대로 살 때에 전부 영생이고 빈틈없고 치우침이 없고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우리 귀에 들려지는 것은, 이 말씀이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이것은 인간의 소원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역사다. 능력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말씀은 들려지지를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을 때에 고향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었는데 듣고 놀란 이 말씀을 왜 빼앗겨 버렸느냐? 그 빼앗긴 것이 바로 자기 주관이다. 자기 주관이 뭐냐? 다른 말로 말하면 자기다. 여기서 말하는 주관이라는 것은, 자기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반대되는 자기인데, 그 자기라는 것은 자기 마음의 모든 요소와 몸에 익어진 모든 습성, 이런 걸 가리켜 자기라 그리 말하는데, 시간이 갔으니까 오후에 잠깐 이걸 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자기라는 것이 무엇인가? 말하자면은 자기 주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라는 사람.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현재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 나라는 사람이 되어졌는가? 그 말이지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전부 다 어떤 것이든 전부 하나님 한분에게서 나온겁니다. 로마서 11장에 보니까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다. 또 모든 움직임도 주로 말미암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단 하나도 하나님으로 인해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하나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은 무에서 유가 나왔다 이리 말합니다. 진화론자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에서 유가 나왔다 이리 말하나, 성경은 그게 아니고 유에서 유가 나왔다. 하나님이 계셨고, 그 다음 그분에게서 모든 존재가 나왔다 이게 성경입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 한 분 에게서 나왔습니다.
보이는 원인은 많습니다. 종이는 뭘로 만드는가. 종이는 나무로 만듭니다. 물은 땅을 파면 물을 나옵니다. 기름은 유전에서 나오지요. 소금은 바다에서 만들어냅니다. 또 설탕은 사탕수수 이런 걸로 만들어냅니다. 밥은 쌀로 만듭니다. 플라스틱은 석유화학 제품으로 석유로 만듭니다. 그 만든, 세상에 만든 것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많이 있는데, 속에 궁극을 파고 들어가면 모든 것은 전부 하나님 한분에게서 천가지 만가지 모든 존재가 전부 다 나왔습니다.
나왔는데,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존재가 한분에게 나왔는데, 나온 그 모든 것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은 둘로 되어있습니다. 나온 것이 다 둘로 되어있다. 어떻게 둘로 되어있는것인가 말하자면은 하늘이 있고 땅이 있지요.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우주와 영계. 동물과 식물. 사람과 짐승. 해와 달. 물과 불. 사람도,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젊은이와 늙은이. 이런 존재, 모든 존재는 둘로 되어 있고, 또, 형체를 가진 가견적인 형체 가진 존재 뿐이 아니고, 좀 추상적인, 행위적인 그런 것들도 보면은 다 둘로 되어져 있어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전쟁과 평화, 기쁨과 슬픔, 소망과 절망, 사랑과 미움, 사는 것과 죽는것. 생명과 사망, 약한 것 강한 것, 큰 것 작은 것, 높은 것 낮은 것. 이렇게 모든게 다 둘로 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기에 이렇게 둘로 되어져 있는 그 속에 좀 더 깊은 속에도 둘로 되어있는데 보니까 좀 더 깊은 속에 되어진 그 둘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이 계시고 피조물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천국과 지옥. 구원과 멸망. 선과 악. 죄와 의. 또,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 지식. 믿음과 불신. 이런 것도 또 둘로 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외부적으로 나타나 보이는 모든 것도 둘로. 조금 더 깊은 속에 있는 것도 둘로, 요래 만드신 것은, 둘로 만드신 것은, 둘로 만든 속에서 하나를 찾아서 하나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둘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거를 지난 지난주 타락 예정과도 연결시켜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하나님 한분만 믿고 바라보고 선으로만 의로만 순종으로만, 하나로만 가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순종 아닌 거역을 만들고, 생명 아닌 사망을 만들고, 왜 하나님께서 의뿐이 아닌 죄를 만들고, 왜 타락을 왜 만들어서 하나만 있는 그 곳에서 하나를 더 만들어서 둘을 왜 만들었느냐?
만드신 그 이유는 하나이신 하나님 한 분 만을 찾고, 그 분만을 믿고, 그 분에게로 향하는 이런 하나인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온전한 하나. 온전한 하나를 향한 하나인 우리들 모습. 그 하나가 강제적이 아니고 억지적이 아닌 자의적이고 유기적인 그런 온전한 하나를 향해 나아가는 그런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둘로 만들어 두셨다 그 말입니다.
둘로 만드신 이 세상에서, 되어진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살고 있고, 둘로 되어진 그 세상에서, 물론 세분하면 다 있지만은 크게 나누면, 둘로 되어진 이 세상에서 환경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고, 둘로 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사람은 만들어진 모습이 있는데, 두 모습이 있어서, 둘로 된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둘로 되어져 있는데, 둘로 되어진 그 세상에서 두 모습을 가지지 아니하고, 환경이 둘이니까 사람이 만들어지면 두 모습으로 만들어지는게 정상입니다. 추운 곳과 더운 곳이 같이 있으면, 추운데 적응하고 더운데 적응하는 이런 사람으로 자라가면서 그리 되는 그게 정상인데. 넓은 것도 알고 좁은 것도 알면 두 지식을 아는 게 정상인데.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는, 두 모습, 두 환경, 두 지식, 두 인도. 둘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러므로 요래 둘로 만들어지니까, 사람이 사람이기 때문에 두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이게 정상적인, 타락 후의 정상적인 사람인데, 그러나 궁극은 목적은 하나로 놓아지는게 목적이고. 그런데 둘로 되어진 세상에서 두 모습으로 자라지 아니하고 한 모습으로만 만들어지는 사람들이 있으니, 둘로 된 세상, 둘로 된 환경, 둘로 된 지식, 둘로 된 인도자, 둘로 되어진 그 환경 속에 살면서 그 사람들이 둘로 만들어 지지 아니하고 하나로만 만들어진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 그 이름을 가리켜 뭐라 그럽니까? 그 이름을 가리켜 뭐라 그럽니까? 하나로만 만들어진 사람들, 그 이름을 가리켜서 불택자. 불신자. 그들입니다. 그들은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는데 그들은 안타깝게도 지옥이라 그러면 좀 화를 낼랑가요. 세상을 말할까요. 세상은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이 세상에는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습니다. 둘이 있는데 불택자들 불신자들은 천국과 지옥이 있는 세상에서 천국은 보지도 못하고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구경도 못하고 자기 천국 만들지도 못하고 오로지 지옥만 받아들이고 지옥만 자기 것 삼는 그게 불택자들, 불신자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상이지만 하나님이 세상에 계시고 피조물이 있는데 하나님은 구경도 못하고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만나보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고 오로지 피조물로만 전부 삼는 사람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형성되어진 그래서 그들 머리 속에, 천국? 그게 뭔데? 하나님? 만들어낸 것이지? 요래 되어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 굉장히 많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세상에서 천국도 만들어놨고, 이 세상 지옥도 만들어놨는데, 둘로 되었으니까 둘을 봐야되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버려야되는데, 이 사람들은 둘로 된 걸 보지 못하고, 천국은 못보고 이 세상만 보니까, 지옥만 보는 겁니다. 피조물뿐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은 모르고 피조물만 아는 겁니다. 지식은 둘이 있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지식이 있고, 인간 지식이 있는데. 이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식은 부정합니다.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어디있느냐? 인간 지식이 전부지. 그들은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은 모릅니다. 인간 사랑이 그들에게는 전부입니다. 구원도 모릅니다. 그들이 말하는 구원은 사망 속에 든 모든 구원입니다. 믿음도 모릅니다. 믿음이란 것이 전부 인간의 믿음이고 불신입니다.
둘로 만들어서 둘로 되어진 이 세상 환경, 이 속에 사는 사람이 두 모습으로 만들어져야 되고 자라가야 되고, 두 지식과 두 개가 그 속에 들어가서 여기 피동 저기 피동되어서 두 모습으로 만들어지는게 참 바른 사람인데. 타락 후의 바른 사람인데. 그 한 종류는 전부 둘이 아니고 하나로만 되어진 사람들. 그래서 그들의 주관, 그들의 지식, 그들의 생각, 그들의 견해, 그들의 비판 평가 가치관 주장은 전부다 하나님 없는 세상, 천국 없는 세상, 구원 없는 세상, 믿음 없는 세상. 이것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요것뿐인 한 사람이 있고.
한 종류의 사람은, 하나님이 둘로 만들어놨으니까 두 모습이 자기 속에 만들어져서 그 머릿속에 보니까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고, 하나님도 계시고 피조물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도 있고 인간 말도 있고, 믿음도 있고 불신도 있고, 선도 있고 악도 있고, 죄도 있고 의도 있고. 요래가지고 만들어진 사람들이 여기에 있는 우리 대부분입니다. 그리되어있는데 그런데 그 양쪽에 비중은 사람마다 달라서 어떤 사람은 둘인데, 하나님이 구십이 되고 피조물은 열이 된 사람, 어떤 사람은 천국이 99고 이 세상 지옥은 하나 밖에 없는 사람, 하나님의 지식은 99고 인간지식은 하나밖에 없는 사람. 둘은 둘인데 인간 지식이 99고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밖에 없는 사람, 그래가지고 자기가 인식도, 지식도, 그리 생활하는 것도, 하나님으로 천국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 이것이 많고, 피조물로, 세상으로, 인간지식으로, 인간사랑으로 이래 산 그 부분은 적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둘은 둘인데 하나님 모시고 산 생활은 극히 적고 피조물로 살고 이 세상으로 살고 인간지식으로 살고 세상 가치 두고 산 그것이 많아서 그래 만들어진 사람도 있고. 요래 크게 말하면 둘인데 그 속에 정도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 말이지요.
그래 만들어진 사람들을 가리켜 다 각각 자기의 주관이다. 자기라는 사람이라. 그 모습이 다 그러하다 그 뜻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그 비중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들려지는 것이 달라지고 그 말씀을 들을 때 받아들여지는 것이 다른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래 되어진 말씀을 들을 때,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을 때, 그 들을 때 그 때는 하나님의 하늘의 은혜로 들려졌고 밝아져서 그 말씀이 들려졌고 놀랐는데, 그거는 그 때 뿐이고, 그 전까지 그들 속에 자라고 있는, 자리 잡고 있는, 많은 부분은 전부 주님을 모르는 하나님을 섬기되, 종교 의식적으로, 의례적으로 습성적으로 율법적으로 섬긴 그것으로만 가득차니까 주님 말씀 들을 때 그때는 놀랐지만은 그 놀란 것은 잠깐이고 그때뿐이고 그 전까지 그들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또 한 속에 자리 잡고 있던 하나님 없는 피조물, 천국 아닌 세상, 하나님 지식 아닌 인간 지식으로 가득 찬, 그 주관이 들어가지고 놀랐던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을 다 쫓아내버리고 옛날로 돌아갔으니 그 돌아간 것이 뭐냐? 그게 바로 자기 주관이다. 기존 지식이다. 그 주관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라는 말입니다. 그때까지 만들어진 자기 모습입니다. 그 자기 모습을 말하자면은 하나는 마음의 모습이고 하나는 몸의 습성이다. 그 생활로 익어진 것이 인간이고 모든 사람입니다.
여기 우리가 이해가 되든 안되는 우리는 전부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사람의 모습이, 그 사람의 주관이고. 그 사람의 모습이 바로 그날 까지 살아온 그의 생애가 그를, 자기를 만든 것이고, 그 생애를 둘로 나눠보면은, 하나는 하나님이고 피조물이고, 또 천국이고 지옥이고, 하나님 지식과 인간지식 이리 둘로 뚜렷이 나눠질 수가 있는 것이고, 어느 것이 더 비중이 크냐에 따라서 이 말씀을 들을 때 쉽게 받아들여지느냐 인정이 되지 않느냐가 판가름이 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 믿는 우리들, 그러니까 요 둘로 되지 아니하고 하나로만 만들어진 불택자, 불신자 그들 속에는 이 생명의 씨앗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그들은 들려지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고, 우리는 이해가 되는데 이 말씀이 이해가 되려고 하면 자기 속에 있는 이 말씀과 배치된 오늘까지 살아온 이 말씀과 대립되는 마음의 수많은 요소와 작용들, 몸에 익어진 그 습성들을 완전히 부인하지 않으면은 꺽지않으면 이 말씀은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고 인정되어지지 아니하고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은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만들어진 자기가 오랜 세월 속에 차각 차각 세월 속에서 하나하나 쌓아서 만들어지고 형성되어지고 익어진 자기로 그렇게 되어진 자기기 때문에 그 자기를 뽑아버리는 것도 바로 이번 공과에 말씀하신 일호 명령과 일호 금령을 준행하는 그 생활을 계속하는 거기서만 하나님이 알려주실 때, 들려주실 때 듣고, 놀라게 해주실 때 놀라는 그 놀람, 하늘의 은혜 역사그것을 보수해서 차각 차각 쌓아나가고 지켜나가는 거기서만 자기 속의 주관이 뽑혀 나가고 자기가 꺾여지는 것이지 그래서 자기 꺾는 그 생활이 한번 하고 두 번하고 계속되어 나가면 꺾여나가는 것이고 참된 자기는 자라나가는 것이고 이래되는 것이지 요거 없이는 결단코 되는 수가 없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오후에는 오전 말씀에 이어서 주관이 무엇이냐 자기가 무엇이냐 요걸 생각해봤습니다. 자기를 바로 알지 못하면 이걸 깨닫지 못하고 이게 어려운 것 같으나 이것이 뼈대고 중심인데, 뼈대고 근본인데, 이걸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 구원과는 참 거리가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는 멉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어야 되고, 느껴져야 되는데, 이해가 되려면은, 한번 들어 모르면 자꾸 들어 생각해보고 연구해 봐야 됩니다.
말씀을 들어보고 안되면 또 들어보고 또 살펴보고 자꾸 연구해서 이것이 이해가 되어져야, 자기를 알아야, 나라는 사람이 내가 검은색이냐 푸른색이냐 옷을 입어도 내 얼굴이 길쭉하냐 그러면 옷을 어떻게 입을까, 내 얼굴이 네모졌다 어떻게 입을까, 내 피부는 검다 어떻게 입을까 자기 겉모습에 따라 옷도 그래 입고 자기 신체에 따라 음식도 그래 입는데 신앙이라는 것을 우리 신앙생활을 영생을 향한 그 생활에 나라는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져있는 사람인지, 나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겠는가 그 말이지요.
우리 주관 나 자신을 생각해보고 그 주관이 둘 중에 하나인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과 천국아닌 세상, 하나님의 지식 아닌 인간지식, 믿음 아닌 불신으로 살아서 형성되어지고 만들어진 그 자기 기존 지식과 선입적 관념. 그 주관을 뽑아버리기 전에는 하나님 말씀은 들려지지를 아니하고 깨달아지지 아니하고 실행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의 원수는 이래도 신앙의 대적은 자기 악. 저래도 악. 어디서 말씀이 들어가도 결국 들어가보면 우리 원수는 딴 데 있지 아니하고 내 속에 삐뚫어진 나 자신이 전부 다 대적이고 원수다 하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