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9일 주일 오전
김동민2026-04-19조회 7추천 1
2026년 4월 19일 주일 오전
찬송: 99장, 57장
본문: 빌립보서 1장 20절
그리스도를 위한 소망의 말씀을 생각해봤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그리스도가 사람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겁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 안에 인간 구원이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 인간 구원 목적하시고 구원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 그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실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입니다. 그분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다 하시고 이루신 역사가 사활의 대속 공로입니다. 그걸 알기 전에 바울은 사울이라는 이름이었고 바리새 교파였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 구약 성경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구약과 신약이 있지요. 예수님 오시기 전부터가 구약입니다. 오래된 약속 신약은 새약속인데 구약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것들, 오시기 후의 것입니다. 알맹이는 예수님을 닮고 있고 예수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많은 말씀이 있고 알맹이는 예수님입니다.
그 알맹이를 담아놓고 오시기까지 미리 오실 구원을 완성하시기 전까지 구원 얻는 방법으로 주신 게 구약의 모든 율법들 계명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계명들이고 지켜가야할 것입니다. 구원은 율법의 말씀을 어겼다고 지옥가는 건 아닙니다. 건설구원은 없게 되는 겁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그 파가 바리새파였고 그 바리새파는 정통 교파였습니다. 바리새파에서 열심히 가장 잘 믿었다고 할 만큼 믿은 사람이 사울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바리새파였고 율법을 지킴으로 이루어간다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고자하여 전신으로 율법을 지켜 행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구원을 이루어 다니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가능 과정에 요즘은 차를 타고 그러니까. 옛날에는 과자집도 있고 게임하는 곳도 있고 여기도 보고 저기도 보고 구경도 하고 그래서 학교 가는 길이 10분이면 가는데 30분이 걸리는 것은 여기 기웃거리고 저기 기웃거리고 목적지가 늦어지게 되는 것처럼, 믿는 사람들이 전부 깨닫고나면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이 세상은 많은 것이 있는 세상입니다.
수많은 사람, 그런 거 보고 들으면서 붙들고 놀면서 그렇게 하다 보니까 구원은 많이 지체가 되고 있는 게 대부분의 사람들인데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은 대동소이합니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아담은 인류 시조인데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하나 밖에 없는 그게 아담입니다. 그 아담이 아내에게 미혹받아서 선악과 따먹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을 평가할 때는 사람이 별 사람이 있나, 거기서 거기지. 누구는 밥 안 먹고 사냐, 누구는 똥 안 싸고 사냐, 누구는 바늘로 찔러도 안 아프냐. 예수믿는 사람은 이런 면을 가져야합니다. 틀린 말이 아니고 정상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율법을 준행해서 구원받겠다고 지켰습니다.
이름은 구원이라고 해놓고 실제는 세상 향해 달려가는데, 루터라는 사람이 계단을 무릎을 꿇고 스물 여덟 개인가 올라갔답니다. 그렇게 했는데 그게 진실한, 바른 구원 도리를 찾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죽도록 달렸습니다 사울은. 아닌 곳을 향해서 가다 보면 가면 갈수록 드러나게 되지요. 양파를 자꾸 까면은 뭐가 나오지요. 아무 것도 없지요. 양배추도 그렇습니다. 깔수록 없는 게 드러납니다. 물건 준비해놓고 그러면 찾는 게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들었다는 찾는데 양파나 양배추는 없는 줄 알고 깝니다. 가면 갈수록 아닌 것이 표가 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종교는 파고 들어갈수록 거짓된 것이 점점 드러납니다. 바울이 율법 주의인데 율법 주의라도 바로 실행을 하면 되는데 율법 안의 알맹이가 구주 메시아인데 완성을 했는데 껍데기 붙들고 달려가니까 아닌 게 자꾸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도 의문이었는데 율법의 알맹이를 나타나셔서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자기가 그동안에 알았던 것이 해가 됨을 깨달았고 그 속에 그리스도와 깨닫고 그때부터 바울은 그리스도만 수입을 하고 나머지는 전부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없어질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게 다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봤습니다. 없어질 것들을 사람이 있게 한다고 붙든다고 붙들리는 게 아닌 겁니다. 내가 좋게한다고 크거나 좋아지는 게 아닌 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없어져가는 것들이지 있게할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 겁니다. 이게 아니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 교인들에게 빌립보 교인들의 신앙을 감사하고 바울로 동참하는 거라고, 간절히 사모한 심정하고 그 교인들에 대한 소망과 이때 메였다 그랬으니까 갖혔을 때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이러나 저러나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니까 내가 기뻐한다. 그래놓고 오늘 본문입니다. 본믄 보시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간절하다는 게 무슨 뜻인가. 성경은 국어사전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간절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간절하다. 우리 기도할 때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한 번씩 하죠. 그런데 간절할 때도 있고 말로 할 수도 있습니다. 뭔가 좀 필요하고 해결이 되어야하고 이루어져야하는 바라보는 기다리는 그곳에 마음을 전부 다 한 곳으로 모이는 섞임이 없는 이런 상태를 간절하다고 합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많은 게 필요하나 그때 그 순간. 가장 중요한데, 거기에 마음도 소원도 뜻도 감정도 나의 간절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간절한 기대라는 것은 기다리는 거지요. 소망보다 가까이 있는 거, 소망을 위해서 힘쓰는 노력을 하고 해놓고 기다리는 게 기대입니다. 간절한 기대, 간절한 마음으로 많은 것이 있으나 오직 하나, 한 곳에 마음도 생각도 소원도 뜻도 전부 집중되고 섞임없는 상태로 모아서 기대합니다. 간절한 기대와 간절한 소망을 따라, 나의 간절한 기도와 소망을 따라. 이것은 뭘 갖춰주는겁니까. 이 따라가 앞에 뭐가 있지요.
간절함이 있고 기대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앞에 간절함은 기대와 소망을 수식하는 거죠. 보충해주는 거. 간절함이란 간절한 기대고 소망입니다. 이걸을 위해서 이것 때문에 이것이 원인되어서 원동되어서 그 말이지요. 간절한 그게 목적이고 전부인데 이걸 향해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자기로써 가장 중요한 이 세상의 많은 것이 있으나 사도 바울이 있을 때 생각 전부를 뜻 전부를 감정 전부를 한 곳으로 모아서 기대하는 게 있는데 그게 주체가 되어있고 원인 되어있고 동기가 되어있습니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이런 말 요즘은 안 쓰지만 나라 대통령 하면 국정을 정해놓고 이것을 통해서 이런 말을 따라. 그러면 그게 주관이 되는 겁니다. 주체가 됩니다. 목적이고 동기가 됩니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사람은 사람마다 종류나 범위는 다 다른데 모든 사람은 자기 정도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지식의 종류와 범위 높이와 이런 건 다 사람마다 다르죠. 아는 것을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에 나와있는 것이 지식인데 아는 겁니다. 사람은 다 뭔가 알고 있지요. 아는 종류도 양도 넓이도 깊이도 그걸 가지고 있습니다. 세 살 짜리가 하는 지식 열 살이 하는 지식 사람이 아는 게 다 있습니다. 사람이 지식에 따라서 아는 정도에 따라서 사람은 가치관이 형성이 됩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의 범위에 따라서 가치관이 생겨집니다. 학생들 물어봅니다. 그리고 가치관에 따라서 마음이 길어지는 소원이 되게 됩니다. 사람은 행동하게 되고 생활하게 되고 주력하는 방향이 바뀌게 되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지식이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마다 정도가 다 다릅니다. 양도 범위도 정도도, 거기서 뭐가 나온다고요. 가치관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에 따라서 무엇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느냐, 흙이 가치 있느냐 청동이 더 가치가 있다. 철이 더 강합니다. 철이 강하냐 전기가 세냐, 전기가 더 편리합니다. 전기도 편한데 전자가 더 중요하고 좋더라, 전자가 되는 겁니다. 전자도 좋은데 인공지능도 좋더라. 가치관을 따라서 모든 사람은 기울어지게 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지식이 있습니다. 지식은 세상 사람들 전부이기 때문에 많은 지식 가지려고 견문을 넓힙니다.
시대가 돈 세계가 되었지만, 세상 사람이면 무조건 배워야합니다. 무조건 공부 많이해야합니다. 알아야 뭘 하지 모르면 아무것도 안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걸 다른 각도로 하니까. 금을 모르는 사람은 금을 봐도 집어던집니다. 독약을 모르는 사람은 독약을 마실려고 합니다. 철공소에 가면 청산가리를 씁니다. 그거 마시면 죽습니다. 그걸로 철을 관리합니다. 냄새가 독합니다. 그런 냄새를 모르면 그런 청산가리를 빵 속에 넣어놓고 먹으면 죽는 겁니다. 모르면 죽는 겁니다. 금도 다이아몬드도 던지는 겁니다. 일단은 아는 거, 그래서 지식이 있고 일반적으로 말하면 많을수록 좋고 넓을수록 깊을수록 좋습니다. 일단 아는 게 좋습니다. 지식이 있고 거기서 두 번째 뭐가 생긴다고요. 가치관이 생깁니다. 세 번째 가치관에 따라서 뭐가 생깁니까.
소원이 생깁니다. 나는 무엇을 소원하느냐, 주력이 생기는데 자기가 주력하는 바가 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소원을 알 수 있고 가치관을 알 수 있고 지식의 범위를 알 수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이 가진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이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한 말로 말하면 바울에 지식에 의해서 생성된 소망입니다. 지식에서 가치관이 나고 가치관에서 소원이 나고 그대로 살게되는데, 지혜 있는 사람은 생각 있는 사람은 범위에서 가지 가진 가치와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비교를 해보고 분석을 해봅니다. 그래서 자기로서는 가장 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겁니다. 돼지는 무엇이 가치입니까. 돼지에게 가치는 뭡니까. 맛있게 먹는 게 돼지의 가치입니다. 맛있게 배부르게 먹으면 됩니다. 젖먹이 아이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엄마가 옆에 있고 배가 부르면 됩니다. 그것에 의해서 목적이, 소망이 전해집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전에 달려왔던 것처럼 전과 같이 변함없이, 온전히 담대하여 어떤 경우도 무슨 일을 만나도 요동치지 아니하고 담대하여 살던지 죽던지 생사존비귀천빈부에 상관없이 다 초월해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위해서 가는데 이것을 이루는 것이라면 얻는 것이라면 아무 일에도 부끄럽지 않다. 무슨 일 가지고도 상관이 없다. 오직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다. 살던지 죽던지 올라가던지 내려가던지 가난하게 되던지 부하게 되던지 상관이 없다. 목적하는 바가 있으니까.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을 가난하게 되면 절망이 됩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 쫓겨나면 절망이 되는 겁니다. 가정을 전부로 사는 사람은 가정 문제 생기면 못 삽니다. 바울은 무엇을 따라 살았느냐,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직 안 나아ᅟᅪᆺ찌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그것만 붙든다면 살든지 죽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내 몸에서 몸이 뭐냐 지금 하나씩 설명해나가는 겁니다. 몸이란 마음의 도구지요. 마음의 도구입니다. 마음의 모습이 외부로 나타나는 게 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눈 보고 얼굴보고 표정보면 마음을 미루어 짐작합니다. 외부로 나타나는 게 몸입니다. 그게 더 나타내는게 행동입니다. 그 행동이 만들어지는 것이 일입니다.
사람 안에는 영이 있지요. 사람의 영을 주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켜서, 좀 어렵습니까. 사람의 영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사람의 영을 주장하고 그 영은 자기 마음을 주장합니다. 마음을 움직입니다. 설득하고 호소합니다. 성령이 영에게 나타나시고 영이 마음에게 나타나고 그 마음은 몸에게 호소합니다. 그 몸은 행동을 합니다. 말을 하고 움직이고 일로 나타납니다. 성령, 영, 마음, 몸, 행동. 그 행동이 일로 나타나고 자기라는 사람을 만들게 되는 겁니다. 살든지 죽든지 여기서 몸이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령의 모든 역사가 영을 통해서 마음에게 전달되고 마음을 통해서 몸까지 나와야 비로소 완성이 되게 됩니다. 마음만 있는 것은 실상 미루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몸에서 바울은 그 몸은 어떻게 되게 하는가. 글씨를 자꾸 쓰면, 글씨는 뭐로 씁니까. 글씨를 자꾸 쓰면 글을 잘 쓰는 몸이 됩니다. 피아노를 잘 치면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 됩니다. 롤러스케이트입니까. 처음에는 넘어지고 하니까 처음에는 신고 일어서지 못하다가 한 발 딛어가면서 타기 시작하니까 지금은 다 타고 다니죠. 몸이 자꾸 타니까 되는 겁니다.
글을 자꾸 쓰면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됩니다. 피아노를 잘 쓰면은 피아노 잘 쓰는 사람이 됩니다. 나쁜 짓을 자꾸하면 나쁜 몸이 됩니다. 게임을 자꾸하면 게임이 나쁜 몸이 됩니다. 운동을 하고 기술을 익히고 의학을 하면 그런 사람이 됩니다. 이 시대 가장 뜨거운 뉴스가 인공지능인데 어렵습니다. 어려워도 하다보면 잘하는 사람이 되게 되는 겁니다. 내 몸에서 살든지 죽든지 다른 거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뭐했습니까. 그리스도가 존귀되게 했다. 그리스도가 존귀되게 했다. 그 말은 높고 귀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존귀 되게 했다. 돈을 가치로 두고 욕망하는 사람은 존귀하게 느낍니다. 명예와 위신을 가지고 삼은 사람은 그렇게 합니다. 권력을 좇는 사람은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보고 나는 지금 무엇을 좇아다니느냐, 귀하게 여기느냐 그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존귀학 여기는지 그게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돈을 존귀하게 여기면 그런 사람입니다. 자존심을 귀하게 여기면 그런 사람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존귀히 여기느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기대와 소망이었습니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되게 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로지 그리스도만 높이고 그리스도만 찾고 그리스만 쫓아다녔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았습니다. 살기는 사도 바울이 사는데 속을 들여다보니까 그리스도가 살고 있습니다. 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그리스도만 쫓아다니니까 살기는 사는데 그리스도가 살게 되고 21절 끝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 죽음이란 삶의 최종 마무리입니다. 올바른 죽음은 소망의 완성입니다. 성공한 죽음은 목적 달성입니다. 예수님 죽음은 바른 죽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부 삼았기 때문에 죽어도 완성이 되는 겁니다.
성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오늘 제목입니다. 무엇에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 생각해봅시다.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찬송: 99장, 57장
본문: 빌립보서 1장 20절
그리스도를 위한 소망의 말씀을 생각해봤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그리스도가 사람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겁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 안에 인간 구원이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 인간 구원 목적하시고 구원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 그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실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입니다. 그분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다 하시고 이루신 역사가 사활의 대속 공로입니다. 그걸 알기 전에 바울은 사울이라는 이름이었고 바리새 교파였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 구약 성경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구약과 신약이 있지요. 예수님 오시기 전부터가 구약입니다. 오래된 약속 신약은 새약속인데 구약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것들, 오시기 후의 것입니다. 알맹이는 예수님을 닮고 있고 예수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많은 말씀이 있고 알맹이는 예수님입니다.
그 알맹이를 담아놓고 오시기까지 미리 오실 구원을 완성하시기 전까지 구원 얻는 방법으로 주신 게 구약의 모든 율법들 계명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계명들이고 지켜가야할 것입니다. 구원은 율법의 말씀을 어겼다고 지옥가는 건 아닙니다. 건설구원은 없게 되는 겁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그 파가 바리새파였고 그 바리새파는 정통 교파였습니다. 바리새파에서 열심히 가장 잘 믿었다고 할 만큼 믿은 사람이 사울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바리새파였고 율법을 지킴으로 이루어간다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고자하여 전신으로 율법을 지켜 행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구원을 이루어 다니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가능 과정에 요즘은 차를 타고 그러니까. 옛날에는 과자집도 있고 게임하는 곳도 있고 여기도 보고 저기도 보고 구경도 하고 그래서 학교 가는 길이 10분이면 가는데 30분이 걸리는 것은 여기 기웃거리고 저기 기웃거리고 목적지가 늦어지게 되는 것처럼, 믿는 사람들이 전부 깨닫고나면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이 세상은 많은 것이 있는 세상입니다.
수많은 사람, 그런 거 보고 들으면서 붙들고 놀면서 그렇게 하다 보니까 구원은 많이 지체가 되고 있는 게 대부분의 사람들인데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은 대동소이합니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아담은 인류 시조인데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하나 밖에 없는 그게 아담입니다. 그 아담이 아내에게 미혹받아서 선악과 따먹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을 평가할 때는 사람이 별 사람이 있나, 거기서 거기지. 누구는 밥 안 먹고 사냐, 누구는 똥 안 싸고 사냐, 누구는 바늘로 찔러도 안 아프냐. 예수믿는 사람은 이런 면을 가져야합니다. 틀린 말이 아니고 정상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율법을 준행해서 구원받겠다고 지켰습니다.
이름은 구원이라고 해놓고 실제는 세상 향해 달려가는데, 루터라는 사람이 계단을 무릎을 꿇고 스물 여덟 개인가 올라갔답니다. 그렇게 했는데 그게 진실한, 바른 구원 도리를 찾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죽도록 달렸습니다 사울은. 아닌 곳을 향해서 가다 보면 가면 갈수록 드러나게 되지요. 양파를 자꾸 까면은 뭐가 나오지요. 아무 것도 없지요. 양배추도 그렇습니다. 깔수록 없는 게 드러납니다. 물건 준비해놓고 그러면 찾는 게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들었다는 찾는데 양파나 양배추는 없는 줄 알고 깝니다. 가면 갈수록 아닌 것이 표가 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종교는 파고 들어갈수록 거짓된 것이 점점 드러납니다. 바울이 율법 주의인데 율법 주의라도 바로 실행을 하면 되는데 율법 안의 알맹이가 구주 메시아인데 완성을 했는데 껍데기 붙들고 달려가니까 아닌 게 자꾸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도 의문이었는데 율법의 알맹이를 나타나셔서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자기가 그동안에 알았던 것이 해가 됨을 깨달았고 그 속에 그리스도와 깨닫고 그때부터 바울은 그리스도만 수입을 하고 나머지는 전부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없어질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게 다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봤습니다. 없어질 것들을 사람이 있게 한다고 붙든다고 붙들리는 게 아닌 겁니다. 내가 좋게한다고 크거나 좋아지는 게 아닌 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없어져가는 것들이지 있게할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 겁니다. 이게 아니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 교인들에게 빌립보 교인들의 신앙을 감사하고 바울로 동참하는 거라고, 간절히 사모한 심정하고 그 교인들에 대한 소망과 이때 메였다 그랬으니까 갖혔을 때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이러나 저러나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니까 내가 기뻐한다. 그래놓고 오늘 본문입니다. 본믄 보시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간절하다는 게 무슨 뜻인가. 성경은 국어사전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간절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간절하다. 우리 기도할 때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한 번씩 하죠. 그런데 간절할 때도 있고 말로 할 수도 있습니다. 뭔가 좀 필요하고 해결이 되어야하고 이루어져야하는 바라보는 기다리는 그곳에 마음을 전부 다 한 곳으로 모이는 섞임이 없는 이런 상태를 간절하다고 합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많은 게 필요하나 그때 그 순간. 가장 중요한데, 거기에 마음도 소원도 뜻도 감정도 나의 간절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간절한 기대라는 것은 기다리는 거지요. 소망보다 가까이 있는 거, 소망을 위해서 힘쓰는 노력을 하고 해놓고 기다리는 게 기대입니다. 간절한 기대, 간절한 마음으로 많은 것이 있으나 오직 하나, 한 곳에 마음도 생각도 소원도 뜻도 전부 집중되고 섞임없는 상태로 모아서 기대합니다. 간절한 기대와 간절한 소망을 따라, 나의 간절한 기도와 소망을 따라. 이것은 뭘 갖춰주는겁니까. 이 따라가 앞에 뭐가 있지요.
간절함이 있고 기대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앞에 간절함은 기대와 소망을 수식하는 거죠. 보충해주는 거. 간절함이란 간절한 기대고 소망입니다. 이걸을 위해서 이것 때문에 이것이 원인되어서 원동되어서 그 말이지요. 간절한 그게 목적이고 전부인데 이걸 향해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자기로써 가장 중요한 이 세상의 많은 것이 있으나 사도 바울이 있을 때 생각 전부를 뜻 전부를 감정 전부를 한 곳으로 모아서 기대하는 게 있는데 그게 주체가 되어있고 원인 되어있고 동기가 되어있습니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이런 말 요즘은 안 쓰지만 나라 대통령 하면 국정을 정해놓고 이것을 통해서 이런 말을 따라. 그러면 그게 주관이 되는 겁니다. 주체가 됩니다. 목적이고 동기가 됩니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사람은 사람마다 종류나 범위는 다 다른데 모든 사람은 자기 정도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지식의 종류와 범위 높이와 이런 건 다 사람마다 다르죠. 아는 것을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에 나와있는 것이 지식인데 아는 겁니다. 사람은 다 뭔가 알고 있지요. 아는 종류도 양도 넓이도 깊이도 그걸 가지고 있습니다. 세 살 짜리가 하는 지식 열 살이 하는 지식 사람이 아는 게 다 있습니다. 사람이 지식에 따라서 아는 정도에 따라서 사람은 가치관이 형성이 됩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의 범위에 따라서 가치관이 생겨집니다. 학생들 물어봅니다. 그리고 가치관에 따라서 마음이 길어지는 소원이 되게 됩니다. 사람은 행동하게 되고 생활하게 되고 주력하는 방향이 바뀌게 되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지식이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마다 정도가 다 다릅니다. 양도 범위도 정도도, 거기서 뭐가 나온다고요. 가치관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에 따라서 무엇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느냐, 흙이 가치 있느냐 청동이 더 가치가 있다. 철이 더 강합니다. 철이 강하냐 전기가 세냐, 전기가 더 편리합니다. 전기도 편한데 전자가 더 중요하고 좋더라, 전자가 되는 겁니다. 전자도 좋은데 인공지능도 좋더라. 가치관을 따라서 모든 사람은 기울어지게 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지식이 있습니다. 지식은 세상 사람들 전부이기 때문에 많은 지식 가지려고 견문을 넓힙니다.
시대가 돈 세계가 되었지만, 세상 사람이면 무조건 배워야합니다. 무조건 공부 많이해야합니다. 알아야 뭘 하지 모르면 아무것도 안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걸 다른 각도로 하니까. 금을 모르는 사람은 금을 봐도 집어던집니다. 독약을 모르는 사람은 독약을 마실려고 합니다. 철공소에 가면 청산가리를 씁니다. 그거 마시면 죽습니다. 그걸로 철을 관리합니다. 냄새가 독합니다. 그런 냄새를 모르면 그런 청산가리를 빵 속에 넣어놓고 먹으면 죽는 겁니다. 모르면 죽는 겁니다. 금도 다이아몬드도 던지는 겁니다. 일단은 아는 거, 그래서 지식이 있고 일반적으로 말하면 많을수록 좋고 넓을수록 깊을수록 좋습니다. 일단 아는 게 좋습니다. 지식이 있고 거기서 두 번째 뭐가 생긴다고요. 가치관이 생깁니다. 세 번째 가치관에 따라서 뭐가 생깁니까.
소원이 생깁니다. 나는 무엇을 소원하느냐, 주력이 생기는데 자기가 주력하는 바가 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소원을 알 수 있고 가치관을 알 수 있고 지식의 범위를 알 수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이 가진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이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한 말로 말하면 바울에 지식에 의해서 생성된 소망입니다. 지식에서 가치관이 나고 가치관에서 소원이 나고 그대로 살게되는데, 지혜 있는 사람은 생각 있는 사람은 범위에서 가지 가진 가치와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비교를 해보고 분석을 해봅니다. 그래서 자기로서는 가장 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겁니다. 돼지는 무엇이 가치입니까. 돼지에게 가치는 뭡니까. 맛있게 먹는 게 돼지의 가치입니다. 맛있게 배부르게 먹으면 됩니다. 젖먹이 아이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엄마가 옆에 있고 배가 부르면 됩니다. 그것에 의해서 목적이, 소망이 전해집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전에 달려왔던 것처럼 전과 같이 변함없이, 온전히 담대하여 어떤 경우도 무슨 일을 만나도 요동치지 아니하고 담대하여 살던지 죽던지 생사존비귀천빈부에 상관없이 다 초월해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위해서 가는데 이것을 이루는 것이라면 얻는 것이라면 아무 일에도 부끄럽지 않다. 무슨 일 가지고도 상관이 없다. 오직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다. 살던지 죽던지 올라가던지 내려가던지 가난하게 되던지 부하게 되던지 상관이 없다. 목적하는 바가 있으니까.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을 가난하게 되면 절망이 됩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 쫓겨나면 절망이 되는 겁니다. 가정을 전부로 사는 사람은 가정 문제 생기면 못 삽니다. 바울은 무엇을 따라 살았느냐,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직 안 나아ᅟᅪᆺ찌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그것만 붙든다면 살든지 죽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내 몸에서 몸이 뭐냐 지금 하나씩 설명해나가는 겁니다. 몸이란 마음의 도구지요. 마음의 도구입니다. 마음의 모습이 외부로 나타나는 게 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눈 보고 얼굴보고 표정보면 마음을 미루어 짐작합니다. 외부로 나타나는 게 몸입니다. 그게 더 나타내는게 행동입니다. 그 행동이 만들어지는 것이 일입니다.
사람 안에는 영이 있지요. 사람의 영을 주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켜서, 좀 어렵습니까. 사람의 영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사람의 영을 주장하고 그 영은 자기 마음을 주장합니다. 마음을 움직입니다. 설득하고 호소합니다. 성령이 영에게 나타나시고 영이 마음에게 나타나고 그 마음은 몸에게 호소합니다. 그 몸은 행동을 합니다. 말을 하고 움직이고 일로 나타납니다. 성령, 영, 마음, 몸, 행동. 그 행동이 일로 나타나고 자기라는 사람을 만들게 되는 겁니다. 살든지 죽든지 여기서 몸이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령의 모든 역사가 영을 통해서 마음에게 전달되고 마음을 통해서 몸까지 나와야 비로소 완성이 되게 됩니다. 마음만 있는 것은 실상 미루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몸에서 바울은 그 몸은 어떻게 되게 하는가. 글씨를 자꾸 쓰면, 글씨는 뭐로 씁니까. 글씨를 자꾸 쓰면 글을 잘 쓰는 몸이 됩니다. 피아노를 잘 치면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 됩니다. 롤러스케이트입니까. 처음에는 넘어지고 하니까 처음에는 신고 일어서지 못하다가 한 발 딛어가면서 타기 시작하니까 지금은 다 타고 다니죠. 몸이 자꾸 타니까 되는 겁니다.
글을 자꾸 쓰면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됩니다. 피아노를 잘 쓰면은 피아노 잘 쓰는 사람이 됩니다. 나쁜 짓을 자꾸하면 나쁜 몸이 됩니다. 게임을 자꾸하면 게임이 나쁜 몸이 됩니다. 운동을 하고 기술을 익히고 의학을 하면 그런 사람이 됩니다. 이 시대 가장 뜨거운 뉴스가 인공지능인데 어렵습니다. 어려워도 하다보면 잘하는 사람이 되게 되는 겁니다. 내 몸에서 살든지 죽든지 다른 거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뭐했습니까. 그리스도가 존귀되게 했다. 그리스도가 존귀되게 했다. 그 말은 높고 귀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존귀 되게 했다. 돈을 가치로 두고 욕망하는 사람은 존귀하게 느낍니다. 명예와 위신을 가지고 삼은 사람은 그렇게 합니다. 권력을 좇는 사람은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보고 나는 지금 무엇을 좇아다니느냐, 귀하게 여기느냐 그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존귀학 여기는지 그게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돈을 존귀하게 여기면 그런 사람입니다. 자존심을 귀하게 여기면 그런 사람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존귀히 여기느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기대와 소망이었습니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되게 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로지 그리스도만 높이고 그리스도만 찾고 그리스만 쫓아다녔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았습니다. 살기는 사도 바울이 사는데 속을 들여다보니까 그리스도가 살고 있습니다. 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그리스도만 쫓아다니니까 살기는 사는데 그리스도가 살게 되고 21절 끝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 죽음이란 삶의 최종 마무리입니다. 올바른 죽음은 소망의 완성입니다. 성공한 죽음은 목적 달성입니다. 예수님 죽음은 바른 죽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부 삼았기 때문에 죽어도 완성이 되는 겁니다.
성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오늘 제목입니다. 무엇에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 생각해봅시다.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