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0일 주일 오후
김동민2023-12-10조회 296추천 26
2023년 12월 10일 주일 오후
찬송: 77장, 171장
본문: 전도서 7장 1절
지혜자와 우매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이름보다 낫다. 이름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 호칭으로 붙이는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의 특성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으라하실 때 아담이 본 이름을 그냥 붙인 게 아니고 특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게 모든 존재의 이름입니다. 사람도 그렇고 사람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지었습니다. 사람을 사람이라고 한 것은 성경에 나오지요. 그런데 사람을 지어 놓고 여자라는 이름을 지을 때는 아담이 지었습니다. 남자에게서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뭐라고 해도 여자는 남자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놓고 모두 만족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던 거처럼 다 승인을 하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 뜻대로 되었다 그 말입니다. 믿는 사람은 귀도 눈도 입도 성경적인 것을 가져야합니다. 믿는 사람의 관점, 어ᄄᅠᆫ 각도에서 보느냐 사람을 보든 세상을 보든 선택을 하든 믿는 사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시각에서 구원 관점에서 모든 걸 보는 게 기본 자세입니다. 이게 틀어지면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의 정체성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정체성이 없으면 안되는 겁니다. 우리나라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고 합니다 기계라 그 뜻이고 종이란 뜻입니다.
믿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출발이 뭐냐 하나님을 중심하고 천국을 소망하고 그게 믿는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그게 시각이고 관점입니다. 그게 정체성의 기본이 되는 겁니다. 생명이고 죽은 세상인데 따라믿는 세상 가면 죽은 사람이 되는거지요. 세계 최고의 믿는 사람이 역사 이래로 가장 부흥한 오늘날도 그럴까 교회다운 교회가 많았을까 성경을 가지고 따져봐야합니다. 성전을 솔로몬이 만들어놓고 내부 전체를 뭘로 장식을 했던가요. 금으로 다 발랐습니다. 금은 불변입니다. 신앙은 변하는 게 아닙니다. 온 세상이 뭐라 그래도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마지막에 보면 하나가 됩니다.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일곱머리 열 뿔입니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이종교 전부다 다 하나가 됩니다. 뭘로 하나가 됩니까. 인본주의로 하나됩니다. 인본주의란 사람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최고의 사상입니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인본주의를 실현한 사상이나 철학이나 종교는 인본주의입니다. 그 속에는 세본주의입니다. 인간이 중심이고 전부다. 세상이 전부다. 이게 인본주의입니다. 기독교는 신본주의입니다. 안 보이는 하나님을, 이 세상과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못 이기고 온 세상이 하나되어서 대립할 때 어린 양에 속한 사람 중에서 누가 이긴다하빈까. 진실된 사람은 이긴다고 합니다. 말씀으로 사는 사람을 진실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이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는 눈이 없으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게 되는 겁니다. 처음에 아기가 태어나면 부모님이 이름을 붙입니다. 옛날에는 양반 상놈 있을 때 아이 이름은 개똥이 대충 붙입니다. 생각 있는 사람은 소망을 담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런데 이름은 그렇게 붙였는데 같이 되는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이 하는 그 속에 실질적인 뭐가 됩니까. 이름이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이름은 아름답게 지었다 하십시다. 그런데 보니까 뭐 같습니다. 저만 알고 아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10년 지나고 나서 그 사람이 이름을 부르면 제멋대로사는 그 인간 딱 떠오르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데 10년 지나서 그 사람 아는 사람 그 참 수고하는 분 고생하는 분 이름을 딱 떠오릅니다. 그게 이름입니다. 아름다운 인생 걸음이나 흔적이고 발다툼입니다.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죠. 자기 희생 걸음을 아름답게 지어놔도 추한 이름이 되는 겁니다. 어찌할 수가 없는 겁니다. 사람의 자기 인생 과거는 막년에 이름이 참 안 좋은 이름입니다. 다 잊어버리자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좋은 이름이든 추한 이름이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세월 속에서 이름을 달고 다니게 되어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아름다운 이름은 천천금은과 바꿀 수도 없습니다. 첫 번째 세월이 흐릅니다. 세울이 들어가지 않는 이름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걸어간 걸음이 어떻게 걸어갔는지 과정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름이 만들어 지는 것이고 그 이름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는지는 주체는 자신이 아닙니다. 객관입니다. 오전에 고슴도치 독사 이야기를 해드렸는데 고슴도치 어미가 고슴도치 새끼는 아름답습니다. 독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혈육이라는 것은 신앙보다 앞설 때 나쁜 것이지, 백목사님이 정에 끌려서 다 탈선하는데 그러니까 문제지, 굉장히 귀한 겁니다. 어머니가 엄마가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모성애를 사람이든 짐승이든 하는 것은 종족 보전과 전파에 있는 것입니다. 짐승이든 곤충이든 애미가 자식을 보호는 건 필수입니다. 퍼지게 되는 겁니다. 어쨌든 이름이라는 것은 객관이 있을 때 아름다워야하지 해당이 없는 겁니다.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이름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세월은 누구에게나 다 주신 겁니다. 과정은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인데 하나님을 중심하고 하늘을 소망하고 자타 구원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세 가지가 있어야합니다. 구원을 위한 수고 희생이 필연적으로 아름답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가장 아름다운 이름은 예수입니다. 손양원 이름은 그만큼 따라간 이름입니다. 백영희 이름도 그런 이름입니다. 아름답게 전파되어져 있는 겁니다. 세월이 필요합니다.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참된 교회에는 아름다운 이름을 남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국민들이 민족적으로 말하자면 아름답게 부르는 이름이 있죠. 세종대왕, 이순신이라든지 이런 이름들은 우리나라에서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안중근은 아름다운 이름이고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입니다. 나라를 위해 자기를 바친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회사를 위가 바친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가정 위해서 바친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여기 아름다운 이름은 하나님 중심입니다. 아름다운 이름이란 어떤 게 보배로운 기름보다 나으냐. 구원의 이름. 그게 보배로운 이름보다 낫다고 합니다. 하나님 중심, 하늘 소망. 자타 구원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죽는 날과 출생하는 날이 있습니다. 죽는 날은 성경 관점에서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죽는 날은 고생이 끝나는 날입니다. 고생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천리를 가야하는데 마지막 걸음 다 가는 것이고 예를 들어 죽는 날은 수능 시험을 쳐서 자기 원하는 점수가 나오는 날입니다. 출생하는 날은 고1 입학하는 날 같은 겁니다. 믿는 사람이 천국가는 날이고 태어난 사람은 고생스럽게 살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출생하는 날보다 죽는 날이 나은 거지요. 죽는 날은 잘 살았든 못 살았든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 살아서 그런 게 있습니다. 의로운 길을 걸어서 영광입니다. 55년을 예수 믿어서 백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이름을 20대 건강하게 젊은 청년과 바꾸겠는가. 택도 없지요. 그래서 인생을 바로 산 사람은 늙은과 젊음을 안 바꾸려고 합니다.
1등하는 방법은 다 아는데 1등은 하나 밖에 없다. 아는데도 못하는 거죠. 세월이 귀한 줄 알고 돌아가지 못하는줄 아는데 탄식이지요. 야곱은 147세에 죽었는데 130에 철이 들었습니다. 그 깨달음이란 말하는 깨달음이랑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바꾸어지는 건 과정입니다. 구원의 모습이란 사람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바꾸어지면은 속이 바꾸어지면 전혀 다른 게 나옵니다. 세월 속의 이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죽는 날은 고생이 끝나는 날. 법을 아는 분들은 글자를 쓸 때 하나하나를 조심합니다. 그에 의해 전혀 달라지기 때문에. 글자 한 가지에 따라서 법이 달라집니다. 다 이루었다. 그 속에 대속의 권한이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장로님이 젊을 때 160키로 들고 다녔습니다. 저는 40키로도 겨우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80키로 등에 지면 몇 미터나 갈 수 있을까요. 1km 가겠습니까. 부산에서 서울까지 400kg을 지고 가겠습니까. 주님의 집은 과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4톤의 짐을 질 수 있으면 지고... 불가능합니다. 그보다 불가능한게 주님의 고난의 생애입니다. 전혀 비교를 하지 못합니다. 그게 어마어마한거죠. 눌리는 힘이. 사람이 물 밑으로 너무 밑으로 가면 짜부러지요. 그런데 계속 들어가면 터져버립니다. 그 압을 요즘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주님의 그 압이라는 것은 스트레스로 느끼면 주님은 실패입니다. 원하고 원하는 마음이 되어야합니다. 불택자는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게 죽어서 지옥가는 거 보다 훨씬 낫습니다. 지옥가는 게 죽어서 지옥가는 것보다 낫고 불택자들은 죽는 거보다 사는 게 나은데 예수님께서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그러기 때문에 백목사님 설교에 그런 게 나옵니다. 상대적으로 택자가 된 것이 은혜인데 그게 얼마나 큰지 깊게 생각해봐야합니다. 예수믿는 그 하나 가지고도 감사해야합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고 받아들이기를 얼마나 귀한지를 모릅니다. 삼대 절기 중에서는 오순절입니다. 귀한 겁니다. 참 얼마나 귀한건지. 불택자는 지옥에 가야합니다. 세세토록 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스러운 지옥을 만드셨으니까 잘못하면 문제가 되는데 영원토록 지옥에 두시고 하나님이니까 무자비한 분이 아니거든요. 지옥이 영원토록 이어지는데 연구해 봐야겠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도 하늘나라보다 못한 것이지요. 초상집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생애를 정리해서 마무리하는 게 초상집이지요. 생각해보고 돌아보고 살펴보고 앞서간 사람을 두고 초상집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알게 모르게 환경이 영향받는 것입니다. 멘탈이 강한 어떤 정신력이 강한 사람도 환경의 피동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초상집 잔치집은 마음이 틀립니다. 자기 사람도 돌아보고, 마음이 갈아앉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맑아집니다. 맑아지면 밝아집니다. 우리가 잔치집가면 시끄럽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추고 흙탕물을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상집에는 다 갈아앉는겁니다. 맑고 밝은 겁니다. 죄를 지을 때는 좋습니다. 죄를 짓는 게 즐겁고 좋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이건 힘들고 뭐든지 다 그런거죠. 초상집은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잔치집에 있는 것입니다. 안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지혜롭습니다. 현재는 잔치집도 초상집이 되는겁니다. 초상집이기 때문에 마지막을 생각하는 사람이 지혜롭다는 것이지요. 유심하리로다. 유자가 머무를 유자입니다. 마음을 거기 둔다는 것입니다. 이게 마음을 둔다는 것입니다. 가야할 목적지에 둬야하는 것이지 자기 목표 목적지를 두지 않고 현재만 두면 좋은 겁니다. 종착점을 두고 지혜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수능생활 준비하는 학생이 3년을 살면 성공하고 잊어버리면 실패하게 되는겁니다. 죽음과 부활과 실패와 생각을 하고 오늘을 살면 지혜롭게 되는 것이고 현재만 보고 살면 우매자가 되는 것입니다. 3절에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을 좋게 하니라. 웃음이라는 것은 얼굴이 웃는 것입니다. 마음이 즐겁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슬픈데 슬픔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웃음은 마음이 좋은 것입니다. 그 마음이 좋고 즐거운 것보다도 마음이 슬픈게 낫다 그 말이지요. 얼굴에 근심함으로, 웃으면 좋은 겁니다. 얼굴에 근심이 있으면 마음에 근심이 있는겁니다. 고린도후서 7장으로 가서 약간 다를 수도 있는데 고린도전서 7장 10절.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얼굴이 근심하는 겁니다. 마음이 근심하는 게 세상 근심이 아니고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게 아닌데 사람을 좋게 합니다. 얼굴이 근심함으로 마음이 깨끗하게 됩니다. 그래서 슬픈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잔치집에 있는 것입니다. 눈에 당장 보이는 거 손에 잡히는 거 이걸 좋게 여기면 우매자입니다. 내 마음이 힘들과 괴롭고 슬프지만 초상집에 가 있으면 지혜자입니다. 그쪽으로 기울어지면 우매자입니다. 또 내 마음이 죽는 날을 생각하고 가치를 두고 낫다 싶으면 지혜자가 되고 출생을 생각하는 사람은 우매자가 됩니다. 이게 본문에 말씀하신 네 가지 비유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름을 소망하고 하늘에 소망하고 구원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그런 생애를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가야겠고 우리는 죽는 날은 쉽지 않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초상집 같은 걸 생각하고 인간적인 육체를 두는 게 아닙니다. 지혜롭게 사는 우리가 되야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찬송: 77장, 171장
본문: 전도서 7장 1절
지혜자와 우매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이름보다 낫다. 이름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 호칭으로 붙이는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의 특성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으라하실 때 아담이 본 이름을 그냥 붙인 게 아니고 특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게 모든 존재의 이름입니다. 사람도 그렇고 사람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지었습니다. 사람을 사람이라고 한 것은 성경에 나오지요. 그런데 사람을 지어 놓고 여자라는 이름을 지을 때는 아담이 지었습니다. 남자에게서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뭐라고 해도 여자는 남자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놓고 모두 만족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던 거처럼 다 승인을 하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 뜻대로 되었다 그 말입니다. 믿는 사람은 귀도 눈도 입도 성경적인 것을 가져야합니다. 믿는 사람의 관점, 어ᄄᅠᆫ 각도에서 보느냐 사람을 보든 세상을 보든 선택을 하든 믿는 사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시각에서 구원 관점에서 모든 걸 보는 게 기본 자세입니다. 이게 틀어지면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의 정체성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정체성이 없으면 안되는 겁니다. 우리나라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고 합니다 기계라 그 뜻이고 종이란 뜻입니다.
믿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출발이 뭐냐 하나님을 중심하고 천국을 소망하고 그게 믿는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그게 시각이고 관점입니다. 그게 정체성의 기본이 되는 겁니다. 생명이고 죽은 세상인데 따라믿는 세상 가면 죽은 사람이 되는거지요. 세계 최고의 믿는 사람이 역사 이래로 가장 부흥한 오늘날도 그럴까 교회다운 교회가 많았을까 성경을 가지고 따져봐야합니다. 성전을 솔로몬이 만들어놓고 내부 전체를 뭘로 장식을 했던가요. 금으로 다 발랐습니다. 금은 불변입니다. 신앙은 변하는 게 아닙니다. 온 세상이 뭐라 그래도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마지막에 보면 하나가 됩니다.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일곱머리 열 뿔입니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이종교 전부다 다 하나가 됩니다. 뭘로 하나가 됩니까. 인본주의로 하나됩니다. 인본주의란 사람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최고의 사상입니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인본주의를 실현한 사상이나 철학이나 종교는 인본주의입니다. 그 속에는 세본주의입니다. 인간이 중심이고 전부다. 세상이 전부다. 이게 인본주의입니다. 기독교는 신본주의입니다. 안 보이는 하나님을, 이 세상과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못 이기고 온 세상이 하나되어서 대립할 때 어린 양에 속한 사람 중에서 누가 이긴다하빈까. 진실된 사람은 이긴다고 합니다. 말씀으로 사는 사람을 진실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이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는 눈이 없으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게 되는 겁니다. 처음에 아기가 태어나면 부모님이 이름을 붙입니다. 옛날에는 양반 상놈 있을 때 아이 이름은 개똥이 대충 붙입니다. 생각 있는 사람은 소망을 담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런데 이름은 그렇게 붙였는데 같이 되는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이 하는 그 속에 실질적인 뭐가 됩니까. 이름이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이름은 아름답게 지었다 하십시다. 그런데 보니까 뭐 같습니다. 저만 알고 아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10년 지나고 나서 그 사람이 이름을 부르면 제멋대로사는 그 인간 딱 떠오르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데 10년 지나서 그 사람 아는 사람 그 참 수고하는 분 고생하는 분 이름을 딱 떠오릅니다. 그게 이름입니다. 아름다운 인생 걸음이나 흔적이고 발다툼입니다.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죠. 자기 희생 걸음을 아름답게 지어놔도 추한 이름이 되는 겁니다. 어찌할 수가 없는 겁니다. 사람의 자기 인생 과거는 막년에 이름이 참 안 좋은 이름입니다. 다 잊어버리자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좋은 이름이든 추한 이름이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세월 속에서 이름을 달고 다니게 되어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아름다운 이름은 천천금은과 바꿀 수도 없습니다. 첫 번째 세월이 흐릅니다. 세울이 들어가지 않는 이름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걸어간 걸음이 어떻게 걸어갔는지 과정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름이 만들어 지는 것이고 그 이름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는지는 주체는 자신이 아닙니다. 객관입니다. 오전에 고슴도치 독사 이야기를 해드렸는데 고슴도치 어미가 고슴도치 새끼는 아름답습니다. 독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혈육이라는 것은 신앙보다 앞설 때 나쁜 것이지, 백목사님이 정에 끌려서 다 탈선하는데 그러니까 문제지, 굉장히 귀한 겁니다. 어머니가 엄마가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모성애를 사람이든 짐승이든 하는 것은 종족 보전과 전파에 있는 것입니다. 짐승이든 곤충이든 애미가 자식을 보호는 건 필수입니다. 퍼지게 되는 겁니다. 어쨌든 이름이라는 것은 객관이 있을 때 아름다워야하지 해당이 없는 겁니다.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이름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세월은 누구에게나 다 주신 겁니다. 과정은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인데 하나님을 중심하고 하늘을 소망하고 자타 구원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세 가지가 있어야합니다. 구원을 위한 수고 희생이 필연적으로 아름답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천지에 있는 이름 중 가장 아름다운 이름은 예수입니다. 손양원 이름은 그만큼 따라간 이름입니다. 백영희 이름도 그런 이름입니다. 아름답게 전파되어져 있는 겁니다. 세월이 필요합니다.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참된 교회에는 아름다운 이름을 남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국민들이 민족적으로 말하자면 아름답게 부르는 이름이 있죠. 세종대왕, 이순신이라든지 이런 이름들은 우리나라에서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안중근은 아름다운 이름이고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입니다. 나라를 위해 자기를 바친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회사를 위가 바친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가정 위해서 바친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여기 아름다운 이름은 하나님 중심입니다. 아름다운 이름이란 어떤 게 보배로운 기름보다 나으냐. 구원의 이름. 그게 보배로운 이름보다 낫다고 합니다. 하나님 중심, 하늘 소망. 자타 구원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죽는 날과 출생하는 날이 있습니다. 죽는 날은 성경 관점에서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죽는 날은 고생이 끝나는 날입니다. 고생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천리를 가야하는데 마지막 걸음 다 가는 것이고 예를 들어 죽는 날은 수능 시험을 쳐서 자기 원하는 점수가 나오는 날입니다. 출생하는 날은 고1 입학하는 날 같은 겁니다. 믿는 사람이 천국가는 날이고 태어난 사람은 고생스럽게 살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출생하는 날보다 죽는 날이 나은 거지요. 죽는 날은 잘 살았든 못 살았든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 살아서 그런 게 있습니다. 의로운 길을 걸어서 영광입니다. 55년을 예수 믿어서 백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이름을 20대 건강하게 젊은 청년과 바꾸겠는가. 택도 없지요. 그래서 인생을 바로 산 사람은 늙은과 젊음을 안 바꾸려고 합니다.
1등하는 방법은 다 아는데 1등은 하나 밖에 없다. 아는데도 못하는 거죠. 세월이 귀한 줄 알고 돌아가지 못하는줄 아는데 탄식이지요. 야곱은 147세에 죽었는데 130에 철이 들었습니다. 그 깨달음이란 말하는 깨달음이랑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바꾸어지는 건 과정입니다. 구원의 모습이란 사람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바꾸어지면은 속이 바꾸어지면 전혀 다른 게 나옵니다. 세월 속의 이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죽는 날은 고생이 끝나는 날. 법을 아는 분들은 글자를 쓸 때 하나하나를 조심합니다. 그에 의해 전혀 달라지기 때문에. 글자 한 가지에 따라서 법이 달라집니다. 다 이루었다. 그 속에 대속의 권한이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장로님이 젊을 때 160키로 들고 다녔습니다. 저는 40키로도 겨우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80키로 등에 지면 몇 미터나 갈 수 있을까요. 1km 가겠습니까. 부산에서 서울까지 400kg을 지고 가겠습니까. 주님의 집은 과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4톤의 짐을 질 수 있으면 지고... 불가능합니다. 그보다 불가능한게 주님의 고난의 생애입니다. 전혀 비교를 하지 못합니다. 그게 어마어마한거죠. 눌리는 힘이. 사람이 물 밑으로 너무 밑으로 가면 짜부러지요. 그런데 계속 들어가면 터져버립니다. 그 압을 요즘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주님의 그 압이라는 것은 스트레스로 느끼면 주님은 실패입니다. 원하고 원하는 마음이 되어야합니다. 불택자는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게 죽어서 지옥가는 거 보다 훨씬 낫습니다. 지옥가는 게 죽어서 지옥가는 것보다 낫고 불택자들은 죽는 거보다 사는 게 나은데 예수님께서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그러기 때문에 백목사님 설교에 그런 게 나옵니다. 상대적으로 택자가 된 것이 은혜인데 그게 얼마나 큰지 깊게 생각해봐야합니다. 예수믿는 그 하나 가지고도 감사해야합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고 받아들이기를 얼마나 귀한지를 모릅니다. 삼대 절기 중에서는 오순절입니다. 귀한 겁니다. 참 얼마나 귀한건지. 불택자는 지옥에 가야합니다. 세세토록 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스러운 지옥을 만드셨으니까 잘못하면 문제가 되는데 영원토록 지옥에 두시고 하나님이니까 무자비한 분이 아니거든요. 지옥이 영원토록 이어지는데 연구해 봐야겠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도 하늘나라보다 못한 것이지요. 초상집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생애를 정리해서 마무리하는 게 초상집이지요. 생각해보고 돌아보고 살펴보고 앞서간 사람을 두고 초상집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알게 모르게 환경이 영향받는 것입니다. 멘탈이 강한 어떤 정신력이 강한 사람도 환경의 피동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초상집 잔치집은 마음이 틀립니다. 자기 사람도 돌아보고, 마음이 갈아앉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맑아집니다. 맑아지면 밝아집니다. 우리가 잔치집가면 시끄럽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추고 흙탕물을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상집에는 다 갈아앉는겁니다. 맑고 밝은 겁니다. 죄를 지을 때는 좋습니다. 죄를 짓는 게 즐겁고 좋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이건 힘들고 뭐든지 다 그런거죠. 초상집은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잔치집에 있는 것입니다. 안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지혜롭습니다. 현재는 잔치집도 초상집이 되는겁니다. 초상집이기 때문에 마지막을 생각하는 사람이 지혜롭다는 것이지요. 유심하리로다. 유자가 머무를 유자입니다. 마음을 거기 둔다는 것입니다. 이게 마음을 둔다는 것입니다. 가야할 목적지에 둬야하는 것이지 자기 목표 목적지를 두지 않고 현재만 두면 좋은 겁니다. 종착점을 두고 지혜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수능생활 준비하는 학생이 3년을 살면 성공하고 잊어버리면 실패하게 되는겁니다. 죽음과 부활과 실패와 생각을 하고 오늘을 살면 지혜롭게 되는 것이고 현재만 보고 살면 우매자가 되는 것입니다. 3절에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을 좋게 하니라. 웃음이라는 것은 얼굴이 웃는 것입니다. 마음이 즐겁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슬픈데 슬픔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웃음은 마음이 좋은 것입니다. 그 마음이 좋고 즐거운 것보다도 마음이 슬픈게 낫다 그 말이지요. 얼굴에 근심함으로, 웃으면 좋은 겁니다. 얼굴에 근심이 있으면 마음에 근심이 있는겁니다. 고린도후서 7장으로 가서 약간 다를 수도 있는데 고린도전서 7장 10절.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얼굴이 근심하는 겁니다. 마음이 근심하는 게 세상 근심이 아니고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게 아닌데 사람을 좋게 합니다. 얼굴이 근심함으로 마음이 깨끗하게 됩니다. 그래서 슬픈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잔치집에 있는 것입니다. 눈에 당장 보이는 거 손에 잡히는 거 이걸 좋게 여기면 우매자입니다. 내 마음이 힘들과 괴롭고 슬프지만 초상집에 가 있으면 지혜자입니다. 그쪽으로 기울어지면 우매자입니다. 또 내 마음이 죽는 날을 생각하고 가치를 두고 낫다 싶으면 지혜자가 되고 출생을 생각하는 사람은 우매자가 됩니다. 이게 본문에 말씀하신 네 가지 비유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름을 소망하고 하늘에 소망하고 구원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그런 생애를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가야겠고 우리는 죽는 날은 쉽지 않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초상집 같은 걸 생각하고 인간적인 육체를 두는 게 아닙니다. 지혜롭게 사는 우리가 되야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