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4-주후(마23:13-31)
외식생활을 회개하자2014-12-17조회 293추천 26
20141214 주후
마태복음 23:13-31
여기 본문에 일곱가지 외식을 종류별로 기록을 해놓으셨는데, 세상의 모든 외식을 다 정리해서 집어넣으면 이 일곱가지 안에 다 들어있다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외식이란 것은 말 그대로 바깥을 꾸민다, 밖을 꾸민다 그러면 밖을 꾸미는 걸 외식이라 그러는데 안도 꾸미면 외식이 아닌데 바깥만 꾸미고 안을 꾸미지 않으니까 외식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겉과 속이 다르고, 속을 꾸미지 않고 밖을 꾸미는 그 이유는 왜 그렇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다 외식을 하고, 알게 외식하고 모르게 외식하고 다시 말하면 겉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훌륭하게 아주 번지르르하게 꾸미고 속은 그냥 대충 대충 두거나 엉망이 되도 그냥 두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볼때 왜 그런가요? 겉은 드러나고 보이고 사람들이 알 수 있고, 속은 안 보이고 드러나지 않아서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보면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들려지고 사람들 볼때 좋게 보이는 그것은 잘 꾸며서 좋게 하려고 노력을 하고, 사람들 이목과 상관 없고 사람들의 생각이나 판단과 상관없는 그런 것 속에 들어간 것은 사람들이 잘 꾸미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 그런 것하고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알차게 진실하게 만들어가는 그런 사람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들어가면 그것도 또 다시 또 다른 외식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드러나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는 거는 좋게 하고 조심하고 잘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그냥 대충 대충 그냥 두고 그렇게 하는데 문제는 그것이 세월이 지나가도 언제까지든지 그대로 그냥 속은 속 그대로 숨겨져 있고 드러나는 것만 그대로 되어 있으면 일단은 문제가 좀 적겠는데, 언젠가는 그것이 다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어지는 겁니다. 사람은 한번은 다 죽어야 되고 죽으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고, 부활 너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그 심판에서는 내가 아는 것 모르는 것,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 도무지 낯을 들 수 없는 그런 수많은 것들조차도 하나님께서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다 활딱 뒤집어서 그대로 다 드러낸다 그말이지요. 다 드러내는 그 때가 있으니까 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 외식을 책망하신 것은 외식으로 그대로 계속 나가면 드러날 그때 어찌되는 걸 고치기 위해서 미리 하라 그 말씀이고 또 거기까지 가기 전까지라도 외식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종교말년에 되어진 그 외식의 모습을 보고 외식이 어떻게 되는가를 우리가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외식한 유대인들이 제일 처음에 그들이 받은 재앙이 무엇입니까? 외식한 종교 말년에 유대인들이 받은 첫째 재앙은 예수님께서 ‘화 있을찐저’ 하셨는데, 그들이 받은 첫째 재앙,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그때도 그들은 재앙을, 화를 받고 있었는데 그때 그들이 받고 있는 그 화가 무엇이었습니까? 예배 시간에 앉아서 조는 것도 외식입니다. 몸은 앉아 있는데 말씀은 안 들으면 외식이죠 그게. 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그때 유대인들이 받는 그 재앙이, 화가 무슨 홥니까? 무슨 화요? 000샘 좀 크게. 예수님을 핍박한 죄지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죕니다. 듣는데 안 들리고 구주 메시야가 눈 앞에 있는데 메시야가 안 보입니다.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보였지, 큰 문제 아닙니까?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예수님 제자들 조차도 그런 때가 있었지만은, 눈 앞에 구주 메시야가 와있는데 그 구주 메시야가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보입니다. 마귀 대장으로 보였다 그말이죠, 구주 메시야가. 그보다 더 큰 저주, 그보다 더 큰 재앙이 있습니까? 그 재앙을 그들이 외식하는 생활 속에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걸 보고 계시거든요? ‘너희들의 머리 위에 폭탄이 지금 떨어지고 있다. 얼른 안 피하면 거기 맞아 죽는다. 자손 대대로.’ 이걸 말씀하는데 그들에게는 안 들리고 안 보이는 겁니다. 안 믿어지고 안 느껴지고, 그게 재앙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몰랐고, 모르니 그분의 말씀이 안 들렸고 그분이 구주로 안 보여졌고 안 믿어졌고 실감이 도무지 안되고 그러니 결과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가 못을 야물게 박아서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니 구주를 죽여놨으니까 얼마나 큰 죕니까? 죽이면서 담대하게 오늘도 보면은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타락하고 탈선하고 그리 될 때, 이상하게도 굉장히 담대해집니다. 가라다인의 지방에 갔을때 무덤 사이에서 거하는 미치광이지요. 귀신 들린 자가 있는데 하도 힘이 쎄고 발광을 해서 사람들이 쇠사슬로 손과 발목을 꽁꽁 묶어놨는데 귀신이 얼마나 힘이 쎄던지 쇠사슬을 다 끊고 고랑을 끊고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자기 몸을 상하고 그리 했습니다. 사람이 귀신이 들어가면 굉장히 담대해집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용감하면, 저 용감 용맹이 성령의 용감이냐 귀신의 용감이냐를 살펴봐야 되고, 사람이 굉장히 지혜로울 때가 있습니다. 이상하게 귀신이 들어가면 굉장히 지혜로워 집니다. 그런데 저 지혜가 이상하게 지혜롭다,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인지 귀신의 지혜인지를 살펴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제 일을 이루기 위해서 제 일꾼으로 쓰면은 얼마나 제 마귀 일꾼에게 지혜를 집어 넣어주겠습니까. 그 지혜 정도가 얼마나 높습니까? 마귀의 지혜를 성경에 이름을 뭐라 그럽니까? 마귀의 지혜를 성경에는 뭐라고 말씀을 해놨습니까? 마귀 지혜의 정도를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666이라 그래놨습니다. 7 다음에, 하나님 다음으로 가장 지혜로운게 마귀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라고 하여 다 좋은게 아니고 용맹이라 하여 다 좋은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게 어디 속한 것인가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언제까지 그렇게 숨겨져 가릴 수 있으면 되는데 드러나게 되니까 외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고, 드러나게 되는 그게 하나님의 목적 위한 그 역사에 필수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드러나게 되니까 한편으로는 소망이 있게 되는 것이고 또 모든게 환하게 드러나니까 갚음이 있다는 뜻이 되고, 그러니 소망이 있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같이 있게 되고, 그런데 소망만 있고 두려움은 없으려고 하면 그 두려운 요소를 없애버리면 되지요.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 속에는 소망과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고, 이거는 다시 말하면 소망은 빛이고 두려움은 어두움이니까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 속에는 빛과 어두움이 함께 있는 것이 믿는 사람들의 속에 있는 요소라. 그 정도가 외식을 얼마만큼 했느냐 따라서 외식이 없는 사람일수록 빛은 많고 어두움은 적고 두려움은 적고 소망은 클 것이고, 외식이 많아서 드러나면 수치스럽고 부끄러울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어두움은 크고 두려움은 크니까 그 사람은 마지막이 두렵고 심판이 두렵고 죽는 것이 두렵고 그리 되어지겠지요.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니까 외식이 없어서 드러나도 뒤집어놔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울게 하나도 없으면 그 사람은 감사와 소망으로만 가득 차고 언제나 빛 가운데 거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질건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지요. 그러나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이고, 주님 대속을 힘 입고 어쨌든 최대한 살아생전에 어두움에 속한, 두려움에 속한, 외식에 속한 것들을 다 빼서 정리해서 없애버리는 것이 우리 할 일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면 성경에 기록된 것을 우리가 눈으로 읽을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아직까지 고칠 수 있는 때기 때문에 오늘도 이 말씀을 들려주신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인류 전체 시기를 세토막으로 나눠서, 이거는 우리가 생각해보면 상식이지요. 천지 창조에서부터 노아시대까지 이천년에 한 토막, 그다음 노아 이후부터 주님 오시는 그때까지 이천년에 한 토막, 주님 오신 그때부터 오늘까지 이천년에 한 토막, 세 토막으로 그렇게 크게 나눌 수 있고. 그러면 첫째 토막도 시작과 과정이 있었고 이천년 세월 속에 사람들의 모든 마음이나 정신이나 도덕 윤리나 모든 것이 다 나사가 풀어지듯이, 풀어지고 헤이해지고 나태해지고 그리 되어진 그 마지막때가 말하자면은 1차 첫째 토막에 말세가 노아 홍수시점이라 그말입니다. 120년 방주 예비하는 그 기간, 그때가 1차 첫째 토막에 말세였고 그 말세에 되어진 세상의 모습, 죄악에 한말로 말하면 패괴라. 패괴란 것은 모든 것이 부서지고 다 무너진 것이 패괴라 그말입니다. 신앙도 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도덕도 윤리도 모든 게 다 엉망이 되고 뒤죽박죽이 돼서 혼돈스럽고 혼란스러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다음 2절에 뭡니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그리 되어있지요. 혼돈하고, 혼돈이라 말은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 그말입니다. 정리가 안 되있고 정돈이 안 되있고 제자리에 있지 않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그런 모든 걸 다 만들어서 제자리에 딱딱 앉혀놓은게 창조다 그리 볼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패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다 무너진 겁니다. 조직도 질서도, 위아래도 사람들의 양심도, 가치관도 욕망도, 취미도 전부다 엉망진창이 되어지는 그런 때가 노아 시대때. 그래서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이것도 속에 들어가보면 외식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 되어졌고, 그러니까 하나님은 있는데 그들 속에 하나님은 없는, 자기들 좋아하는대로 그리 되었고.
또 사람들의 모든 행위가 다 강포해져서 매인 데가 없고 붙들린 데가 없고 조심 없는 두려움이 없는 자기들 마음대로 사는 그런 시대가 노아시대 때였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도무지 그냥 둘 수 없는 세상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홍수로 다 쓸어버렸고. 그때 그 이후로 다시 노아의 자손들 중에서 샘의 후손을 중심으로 한 아브람의 자손, 그 아브람의 자손이 주축이 되고 중심이 된 그 유대인들에게 주신 그 구원. 그래서 유대인들을 통한 그 구원역사가 이천년을 내려왔지만은 그 이천년 세월 속에 아브람의 자손된 유대인들의 구원 얻는 그들이 소수만 구원 얻고 마치 애굽에서 나온 이십세 이상의 그 사람 중에 여호수아 갈렙만 들어갔던 것처럼, 아주 극소수만 전체로 구원얻고 대개는 다 실패했기 때문에 구약 교회를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육의 자손으로 구원 받는 그 시기를 끝내고 다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전부에게 구원을 주는 그 시기로 새롭게 시작되는 그 전환기가 되어지는 그때가 바로 이스라엘 종교 말년, 그러니까 우리나라 조선이 끝나고 대한제국, 대한민국이 시작될 그때를 가리켜서 구한말이라 그렇게 말하는데, 말하자면 한 나라가 망하고 고려 5백년 왕씨 왕조가 끝나고 조선 이씨 왕조가 시작되는 그 시점 그런때, 그런때는 그게 하루 아침에 단칼에 무 자르듯이 딱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게 왕조가 들어서는데 망해가는 그 망조가 서서히 쇠퇴하는 그런 모습이 보여지고 그 가운데서 새롭게 시작되는 개혁운동이 서서히 속에서 불길이 살아나서 일어나고 어느 시점에 불이 붙으면 개혁을 해서 앞에 망해가는 집을 무너뜨리고 새집을 지어버린다 그말이지요. 그러면 그 망해가는 기간하고 새로 집을 짓는 기간에 기한이 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것처럼 예수님 오실 그때가 말하자면은 구약시대는 점점 망해가는 그때고 쇠퇴해가는 때고, 또 예수님으로 인해서 신약 교회는 점점 시작되고 일어서는 그때, 그때를 가리켜서 그때 중에서 구약시대 속한 그 쪽을 가리켜서, 그 표현을 강조하는 걸 가리켜서 이스라엘 종교 말년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리 말한다 그말이지요, 종교 말년에. 그때는, 그때도 말세기 때문에, 종교 말세기 때문에 그 때 모든 하나님 백성들, 그 전에 벌써 4백년 전부터 그 이전에부터 이스라엘은 다 망했지 않습니까. 앗수르에 망하고, 바벨론에 망하고 망한 상태로 또 그래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70년뒤에 돌아오고 또 재건됐지만은 또 다시 망해버리고 그래가지고 민족이 다 흩어져버리고 그리된 상태로 4백년동안 눈이 없는 시대, 빛이 없는 암흑의 시대 그런 시대로 됐다가 그리 됐으니까 뭐 엉망이 됐겠지요. 그런 시대에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오신 그 시대는 말년이기 때문에 말기 암 환자처럼 교회들의 모습은 전부 속으로 병이 들어가지고 외식으로 가득찬 그런 교회들, 그런 신앙들이 되어져 있었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노아 시대 말세의 죄는 패괴였고, 그런데 그 속에 들어가면 그것도 외식이였습니다. 드러나게 패괴였고, 이스라엘 종교 말년 그때 그들이 멸망받은 죄는 외식이였고. 또 오늘날, 그때부터 2천년이 지나서 말세지말이 된 오늘날 시대를 보면은, 성경에 보면은 오늘날에 가장 큰 대표적인 징조는 온 세상이 한덩어리 된다는 건데, 한덩어리 되는 것이 세상은 원래 한덩어리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어린양과 어린양에 속한 자들은 이 세상을 따라 한 덩어리 되면은 안되는데, 그래서 불교는 어차피 불교니 유교니 회교니 힌두교니 어떤 종교를 갖다대도 어떤 미신을 갖다대도 종교란 것은 원래부터 사후세계 내세를 지향하는 것이 종교지만은 그런 하나에 그들의 짐작이고 추측 추론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들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세상과 하나되고 세상을 따라서 변질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모든 종교라 그게 당연하나, 그러나 하나님이 근본된 기독교만큼은 그들과 하나되면은 안되는 것인데 말세가 되면은 온 세상이 다 똘똘 뭉쳐 하나가 되어질 그때 그 속에 수많은 기독교, 교파들, 교회들, 교단들이 믿는 사람들이 그들과 하나가 되어서, 그래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다시 올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믿는 자를 보겠느냐.’ 온 세상에 기독교가 전파되어있고 교회가 너무 많아 탈이고, 믿는 사람이 나라 숫자보다 더 많고. 우리나라 교회 교인들의 재적을 다 포함하면 대한민국 숫자보다 많다는 말인데, 기독교만 그런가요? 어쨌든 그만큼 믿는 사람이 많은 그런 시대가 되어졌는데, 그리 되어가는데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다시 올때 이 세상에서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으니까 그 믿는 자가 다 어디 갔는가? 그래서 마지막에 한 덩어리 될 그때에 거의 대부분의 교파들, 교단들, 교회들, 믿는 사람들 전부다가 어린 양을 대적하는 그 세상과 한덩어리 되는 그 속에 다 뭉쳐서 같이 한덩어리가 돼서 어린양을 대적하는데, 그 어린양은 세상은 대적이지만은 교회와 교단들은 자기 구주 메시야인데, 구주인데 구주를 대적하는 것이 종교 말년에 그들이 구주 메시야를 대적하는 것하고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 되고 있다 말이지요. 그리 된 그 원인이 뭐냐? 그 원인이 속에 들어가보면은 믿는 사람들이 전부다 믿음 생활, 신앙 생활을 외식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 겉과 속이 다른 그 생활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 종교 말년에 유대인들이 외식한 것은, 그들이 율법이 없지 않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지 않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고 하나님의 이름을 매일같이 불렀고 귀신들도 두려워 떤다는 말처럼 그들은 두려워 떨었고, 그리했지만은 하나님이 두려워 떤다 했으나 그 속에 깊이 들어가보면 하나님 노래를 부르고 하나님으로 온 사방 천지 도배를 해놨고 기도와 율법과 계명 지킴이 나라를 다 끌고 갈만큼 온 나라가 종교 국가가 된 그 나라인데, 속에 실제로 들어가보면 하나님은 없고 진짜 율법은 없고 전부 인간뿐이고 세상 뿐이었다 그말입니다. 그게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기도라는 것 함부로 말하는 것 아니고, 성경이라는 것 쉽게 말하는 것 아니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맹세한다 이런것도 쉽게 말하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노선을 이야기하지만은 노선이란 것도 섣불리 쉽게 말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그 외식은 그러했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만 보면 상당히 두께가 두꺼워서, 수박을 먹을때 보면 수박은 껍질이 두꺼울수록 맛있습니까, 얇을수록 맛있습니까? 제 경험으로 보면, 수박은 껍질이 얇을수록 더 맛있데요. 먹을게 많고. 두꺼울수록 맛이 별로고 먹을 것도 없습니다. 외식이 좀 덜하면 쉽게 드러나는데, 이스라엘 종교 말년에 유대인들은 외식이 얼마나, 껍데기가 얼마나 두꺼웠던지 상당히 깊이까지 두꺼워서 외식이 두꺼워서 철두철미하게 외식을 하니까 그 두꺼운 외식이 진짜인 줄 알고 껍데기는 껍데기 속에는 전부 비계덩어리 기름덩어리 먹을 수도 없는 그런 것들인데 그게 두꺼워놓으니까 그게 살덩어리 진짜배기인줄 알았는데 그걸 다 벗겨내고 나니까 알맹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다 외식밖에 없었다 그말이지요. 그만큼 그들은 율법이 많았고 달달 외웠고 생활화 되었고 하나님을 노래 불렀고 또 신앙생활한 그게 그들의 나라 전부가 다 그리되어져있었는데, 실제 속에 들어가보니까 자기들이 주인이었고 이 세상주의였지, 그러기 때문에 정작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하나님과의 교감, 영교, 하나님과 연결되서 통하는 것,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 바늘 구멍만큼이라도 연결의 통로가 있으면 이렇게 보면은 문풍지에 구멍 똑 뚫고 눈 갖다대면 보이지 않습니까, 바깥이. 하나님과 관계가 바늘구멍만큼이라도 통로가 있으면 희미하게라도 보일 것이고 숨소리라도 들려서 귀라도 볼 건데, 그런데 콱 막혀버리니까 단절이 되버리니까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분이 사람되어 오신 구주메시야가 그들 앞에 왔지만은 그들은 몰랐지요. 극소수만, 요셉과 마리아, 시므온과 안나, 들판에 양 먹이는 목동들, 저 이방에 있는 동방 박사들, 또 열 두 제자들 그런 극소수만 알았지, 큰 교단을 만들고 높은 자리 차지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대접받고 대우받는 그런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이 사람들은 도무지 몰랐다 그말입니다. 이것이 그때가 그랬듯이, 그래서 모르니까 안 보이니까 구주메시야가 이단의 괴수로 보이니까 배척하고 반대하고 핍박하다가 십자가에 못을 박았고, 그리고 박을 때 담대하게 박았고. 이방인 빌라도조차도 이 사람을 죄가 없다, 나는 책임 못 지겠다고 손을 씻었지만은, 그 죄는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라고 그렇게까지 담대하게, 귀신이 용기를 넣어주면 그렇게까지 담대하게 되는 겁니다. 확신합니다. 확정을 하고. 내가 목숨을 걸고 장담한다. 그런데 그 목숨 걸고 장담하는 확신이 성령의 확신이면 다행인데 마귀 확신이면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그러기 때문에 안 믿는 정치가들도 뭔가 일을 하면 항상 뭘 남겨 놓습니까? 뭔가 일을 할때면 안 믿는 정치가들, 나라에 정치 잘하는 사람 항상 보면은 말을 할때 뭘 남겨 둡니까? 빠져나갈 구멍을 항상 남겨놓습니다 정치가들은. 무슨 말 하든지 할때도 핑계 대면. 두 번 다시 안한다고, 내가 정계 은퇴해서 두 번 다시 정계 안나온다고 몇 번 은퇴하다가 세 번인가 네 번만에 대통령 한 분도 있지요. 기어코 하지요, 대통령. 지금도 그런 사람 얼마든지 있습니다. 전부다 그런 것.
그래서, 마귀가 담대함을 넣어주면 그렇게 담대한데, 외식함으로 캄캄하게 어두워지니까 그들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그 자체가 바로,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게 외식으로 인한 재앙이고, 화고. 그분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고 인정되지 않고 구주가 구주로 믿어지지 않은 것이 그들에게 외식으로 받은 큰 화고 재앙이고. 그것이 점점 더 심화되서 구주를 못 박아 죽였고 그 값으로 예루살렘이 완전히 망했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맛사다 전투가 그때 일어난 것 맞지요? 000샘, 맞지요? 그때 일어나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훼파 되어서 다 무너졌고, 그때 로마군을 피해서 한 천여명 가까운 숫자인지 모르겠습니다. 성을 쌓고 요새를 쌓아서 꼭대기 올라가서 거기서 2년인가 3년인가 결사 항전을 했는데, 마지막에는 안되니까 먹을 게 다 떨어지고 던질 돈도 없으니까 그만 스스로 다 죽이고 몇 사람만 겁이 나 남았다 그러는데, 그것을 이스라엘은 군에 입대하면 그 나라도 징병제지요, 입대하면 거기 다 데려간답니다. 그 맛사다,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결사항전 했다고 자랑스럽게. 안 믿는 사람들 각도에서는 자랑스럽겠지요. 그런데 신앙의 각도에서 보면 그것이 자랑할 것인가, 저주인가. 저주 아닙니까 그거? 그렇게 쫓겨 올라가서 비참하게 그렇게 하다가 집단 자살했으니 그게 복입니까? 저주지. 그렇게 비참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세계 역사에 자식들 삶아먹은 민족은 유대인들이 가장 많지 않을까.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을 삶아먹고, 그걸 삶아먹을때 남이 뺏어갈까 싶어서 조용히 삶아먹는, 그만큼 비참하게 산 것이 유대인들입니다. 그 조상들도 그랬고 후손들도 그랬고 이게 외식의 죗값이고, 오늘도 말세에 어린양을 대적하는 그 온 세상에 하나되는 그때에 교회들은 거기 하나되면 안되는데 거기 드러붙어가지고 하나되는, 모르면 차라리 모른다 하고 약하면 나는 약하다 그러고, 그래서 죄송하다 그러고 그게 낫지 한덩어리 돼서 어린양을 대적하고 어린양을 못 박아 죽이는 그런 죄를 짓는, 그 큰 엄청난 죄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가 외식입니다. 그러니까 외식을 하면은 눈이 어두워집니다. 안 보입니다. 외식을 하면은 귀가 어두워져버립니다. 안 들립니다. 심령이 둔탁해져서 믿어지지 아니하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꼭 같습니다, 종교말년때와 같이. 지금도 외식하면 눈이 안보여서 신앙 세계가 안 보입니다.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립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와 천국의 역사가 자기 속에 심령이 어둡고 둔탁해지니까 느껴지질 않는다 그말이지요. 그러니 세상으로 나가도 아무런 역사가 없으니까 그냥 막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과 한 덩어리 되고, 평소에 그리 살다보니까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오만 짓 다하지요. 천주교를 흉을 보고 욕을 합니까? 앞으로 두고 보지요, 개혁 교회가 천주교까지는 안갈지 모르겠지만은 얼마나 많이 달라지는지. 천주교가 원래부터 천주교였습니까? 천주교는 정통의 계통에 있습니다. 개혁교는 천주교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늘 우리보고 ‘너희들은 열교다. 쪼개져나간 교다.’ 그러지 않습니까. 자기들은 정통이라 그러고. 바울 사도 복음 전도에 내려온 계통에 천주교가 한 가운데 들어있습니다. 원래 천주교가 그리 타락한 것 아닙니다. 그런 정통 교파였던 그 교회가 타락이 되고 변질이 되니까 천주교가 됐습니다. 거기서 개혁해서 나온 교가 칼빈, 오늘날 개혁교 장로굔데, 이 장로교가 말세가 되어서 점점 타락해가면 천주교 꼴을 닮아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말이지요. 왜 그리 되는 겁니까? 그거는 전부다 외식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외식이라는 죄는 참 대단히 무서운 죄다 그리 볼 수 있는데, 그래서 지금 우리가 부족하고 모든 면에 모자랄지라도 이런 전체적인 방향을 보는 눈을 가져야 되고 이걸 보면서 내가 갈 길을 보고 눈 앞에 있는 현실을 싸워 나가야 되지, 아무리 눈 앞에 있는 방향을 고개 들어서 자기 길을 보지 아니하고 눈 앞에 있는 걸 아무리 세밀하게 열심히 닦아도, 그래서 길을 갈때는 눈을 들어 앞을 보지 않습니까. 눈을 들어 하늘 보라입니까, 복음 성가에. 눈을 들어 하늘 보라. 눈을 들어 앞을 보고 그리 가는 거지, 땅만 쳐다보면 앞으로 어디 가는지 모르잖습니까. 그게 바다로 가는지 산으로 가는지 구렁텅이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앞만 보고 아무리 세밀하게 살펴봐야 헛일이다 그말이지요. 전체 방향을 알고 그 방향 가는 그 안에서 세밀하게 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난 오일밤 예배때 말씀드린 대로 바울 사도가 내가 달음질 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지 아니하여, 달려가는데 신앙의 방향이 틀린 성결과 진실과 사랑과 거룩과 충성은 마지막에 가면은 옳은 방향에 큰 대적이 되지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차라리 도둑놈이 낫지요, 좀 강하게 말한다면. 차라리 도둑놈이 낫고 이단이 낫지, 그 이단들은 이단인 줄 다 드러나니까 아는데 외식자들은 방향은 틀렸는데 거룩하지요 진실하지요, 성결하지요 도덕적이지요, 양심적이지요 사랑이 충만하지요, 그러니 수많은 사람이 속습니다, 다. 그 이름을 성경에 뭐라 그럽니까, 요한계시록에? 그렇게 생긴 그 이름을 가리켜서 어린 양보다 더 어리게 보이는 새끼양이라 그럽니다. 그게 바로 거짓 기독교, 외식하는 기독교, 가짜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판을 치고 있지 않습니까. 전부다 거짓 기독교, 가짜 기독교, 외식하는 교회들이 판을 치고 거기에 수십만명 수백만명이 다 따라가지 않습니까. 압니까 그 사람들이?
우리는 복음을 들어서 아는데, 알고 있으면서도 이대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알고만 있지, 못 사니까 고차원의 또 다른 외식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화 있을찐저’. ‘화’라는 것은 그런 온갖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람들이 원치 않는, 하나님도 그들에게 화 내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자꾸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화가 있다 피해라. 너희들 머리 위에서 재앙이 떨어지고 있으니까 얼른 피해라. 너희들이 가는 길은 재앙으로 가는 길이니까 피해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가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다.’ 그런데 그리 아무리 말씀하셔도 안 가면 소용이 없고 안 피하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사랑으로 목이 터져라고 ‘화 있다 화 있다 피해라 돌아가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들이 기어코 안 듣고 고집 피우고 외식을 하다가 멸망받고 말았던 겁니다. ‘화 있을찐저’ 이 말씀 듣고 의미를 생각해야 됩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서기관 바리새인들, 교회에 머리되는 인도자들, 선지자들, 모든 교회 교인들의 신앙을 끌고 가는 사람들. 그러니까 그들로 인해서, 그래서 대개 보면은 교회는 그들로 인해서 서고 그들로 인해서 운영이 되고, 그들로 인해서 움직여 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보면은 아무리 큰 교회도 속에 들어가보면은 몇 사람에 의해서 교회가 다 이리저리 움직여지게 됩니다. 조직이 좀 큰데는 좀 많고 그렇지만은. 서부교회 같은, 옛날에 백목사님 생전에 알고보면 서부교회 백목사님 한분이고, 그분의 밑에 세운 그 일꾼, 서부교회 주일학교 숫자가 7천명, 8천명인데 그 조직이, 총책임자가 총무 한 사람, 그 밑에 상무 서기 두 사람, 그 세 사람이 주일학교 실제 운영을 다 했습니다. 백 목사님의 지도 아래서. 물론 백목사님 지도하시니까 그 지도에 따라서 다 되어졌지만은 실제 실무에는 장영목 목사님 총무 그분 한분이 주일학교 운영 다 했다 할만큼 그렇게 조직 그 분 한 분밖에 없었고, 상무 서기 두 사람은 그냥 글 쓰는 서기들이고 다른 서기들이지 일하는 것 아닙니다. 중간반은 좀 더 나이가 학생들이 크니까 조직이 좀 더 많았고. 알고보면 그 몇 몇 사람들 그들에 의해서 교회가 다 수천명이든 수만명이든 움직이는데 그들이 바로 서기관 대제사장들 그들이고 그중에 주축되는 잘 믿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고, 우리 공회 교인들 우리 교회도 바리새인처럼 잘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 숫자에 비해서. 그런데 그들에 의해서 교인들은 다 따라가는 겁니다. 주일날 오전에만 오는 그 교인들이 대개 보면은 집사님들 한 두분, 그분들에 의해서 다 움직이지 않습니까? 다 따라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서기관이고 대제사장들이고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교회안에서 위치가 무겁고 막중하고 책임이 그만큼 무겁고, 책임이 무거운만큼 잘하면 상도 크고 잘못하면 심판이 그만큼 크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 전체를 향해서 하신 것이 서기관들, 바리새인. 서기관들 말씀하신 것은, 서기관은 성경 연구니까 교훈을 책임진 것이고 모든 게 다 교훈에서 나온다 그말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목사들인데, 좀 더 다른 각도로 말하면 신학교 교수들, 신학자들. 그래서 시대마다 교계에 있어서는 신학자들, 교역자 양수원 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것이 잘못되면 전부다 잘못되고 말지요. 지금 시대 우리나라 교육계에 이상한 사상들이 많이 들어있는 것은 그 교사들이 모두 그런 사상에 많이 물든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학생들을 그리 가르치니까 그 학생들 그 물 먹으니까 그 사람 되지 별 수 있습니까? 그러니 전부 나라가 점점 그리되어지고, 시대 시대 따라서 이리저리 다 되고 세상이니까 뭐 별 것 없지만은. 그래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계속 말씀을 하시는데 전체를 다 향해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들에게 전체가 다 달렸으니까 오늘 바로 여기 있는 우리 대부분의 우리들 문제입니다. 외식이란 것은, 바깥 외 자, 꾸밀 식자. 장식하는 것, ‘외식’ 이건데 밖을 꾸민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겉은 번질 번질한데 속을 열어보니까 빈 껍데기. 맛있게 생긴 과일을 딱 잘라보니까 속에는 팍 쉬었습니다. 썩어버렸습니다. 수박을 먹으려고 겉이 아주 매꿈하게 잘 생겨서 딱 잘라보니까 팍 상했던지 하얗게 하나도 안 익었던지, 그게 일종에 말하자면 외식입니다. 아주 반들반들하게 잘 생긴 깡통인데 속을 두드려보니까 아무것도 없고. 껍데기는 잘 생겼고 미꿈하고 옷도 잘 입고 귀걸이도 하고 코걸이도 하고 반지도 끼고 오만 것 장식을 다 했는데 대화를 해보니까 먹통이고 깡통이고 무식쟁이입니다. 외식이죠 뭐 그게. 속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많이 배워 가지고 아는 것은 많은데 입은 똑똑하고 말은 잘하고 알기는 많이 아는데, 지식은 아는데 인간성을 살펴보니까 도덕도 없고 윤리도 없고 빵점입니다. 그 인간 어디 쓰겠습니까? 차라리 모르는게 낫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대개 보면은 유식하면 교만하기 쉽고, 제법 유식하면, 제가 좀 공부를 많이 못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제가 생각해볼때 그렇습니다. 아주 인류 대학에 들어가는 그런 젊은 학생들은 대개 보면은 교만한데 그 교만이 보통 사람들 앞에서는 굉장히 겸손한데 굉장히 겸손한 그게 바로 교만입니다. 말하자면은, 나는 이 정도의 엘리트기 때문에 자기보다 아랫사람들하고는 쉽게 자기 속을 드러내서 정상적인 상대, 대화를 안한다 그말이지요. 네, 네하고 고개 숙이고 하지만은 속에는 아주 깔아뭉개는 그런 것이 들어있는 것이 엘리트급의 학교 다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생각해보면은. 그들은 2등은 안해보고 전부 항상 1등만 해보고 최상급에만 놀아보니까. 그런 면이 다 그러지는 않아도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을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많이 배워서 유식하고 알아도 그런 인간성, 도덕성이 없으면 어디 쓰겠습니까, 외식이지. 그런데 그런 것까지 다 갖춰서 인물도 있고 유식하고 다 똑똑하고 다 잘나서 참 좋은데, 인간성까지 다 좋은데 더 깊이 들어가보니까 뭐가 없습니까? 인물도 좋고 지식도 있고 도덕성 인간성 다 갖춰 있는데 하나가 빠졌습니다. 외식입니다. 뭐가 빠졌습니까? 신앙이 없습니다. 어디 쓰겠습니까,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썩을데만 갖다쓰지. 그래서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그거는 썩어져가는 썩은 것 많은 세상에는 쓸지라도 생명 운동하는 교회는 쓸모가 없다 그말입니다. 무식해도 신앙에는 그게 가치가 있는 것이지. 이런 것들이 다 외식입니다, 말하자면은. 좀 더 밖으로 나가면 예수 믿는다는 이름은 있는데 신앙 생활을 안 하는 사람, 예수 믿는다면서 주일을 지킵니까? 성경을 읽습니까? 기도합니까? 여기는 그런 분들이 안 계시겠지요. 주일 오전만 오는 분들은 더러 있을 겁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름으로 교회를 다닌다 그러는데, 주일을 지킨다 하지만은 제대로 알고 지킵니까? 성경을 아마 1년 가도 주일날 와서나 읽을까 집에선 읽을까. 기도는 밥 먹을때나 기도하는진 모르지요. 몰라서 외식하는 겁니다. 전도를 합니까? 계명 지키는 생활 합니까? 그게 다 알게 모르게 외식이고. 주일날 예배당에 와서 앉았어도 말씀을 들어야지요. 앉았는데 머릿속으로는 집안일, 회사일, 사업일, 인간관계일, 그런게 머릿속에 뱅뱅 도는데. 그런 경험 안 해보셨습니까? 저는 기도할때마다 엉뚱한 생각이 많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애를 많이 먹습니다. 기도하면 엉뚱한 생각이 자꾸 들어옵니다. 기도한다고 앉았는데 머릿속으로는 엉뚱한 생각을 한창 하다가 정신 번뜩 차려보면,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기도시간에.’ 또 정신 차리고. 그런 것도 하나에 외식에 속한 겁니다. 기도한다고 앉았지만은 엉뚱한 생각 하는 것. 일 년 내도록 농사를 지었는데 가을에 추수하려고 보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매가. 농사 잘 지었습니까? 잘 못 지었습니까? 열심히 농사 짓는다고 지었는데, 농사 안 짓고 놀았구나. 엉뚱한 짓 했구나. 외식입니다 전부다. 책상에 공부한다고 앉아있는데, 항상 방을 열어보면 책상에 앉아있는데 시험 쳐보니까 시험 성적이 뚝 떨어져서 낙제를 맞았습니다. 공부 했습니까? 앉아있었는데 분명히. 공부했는데. 외식이지요, 안 했으니까. 된 줄 알았는데 되지 않은 것. 그래서 반사면 반사의 일에 충실하고, 집사라면 집사일에 충실하고. 우리 교회에, 백목사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집사 자격 13가지 입니까? 언제 한번 불러 드렸는가 모르겠습니다. 그 열세가지를 적용시키면 우리 교회 집사될 분이 몇 분이나 될지. 아마 집사 사면해야 될 분들이 상당히 많을 겁니다. 13가지 다 적용시키면. 집사라면 그 집사의 내면을 가지고 있어야 되고, 장로라면 더 가지고 있어야 되고 목사라면 더 해야 되는데, 이름이 목사지 목사 노릇을 해야지요. 목사 생활 해야지요. 목사다운 그런 인격을 만들어가야지요. 그게 안되어있으니까 사람들이 볼때는 목사님인데, 그래서 대접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렇게 알고 있는데 실제 자기 자신을 돌아보니까 내가 목사인가? 대단히 부끄럽고 죄송한 말이지만 제 속으로 제가 목사라고 생각해본 적 단 한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의 무책임한한 위안제입니다, 알고보면은. 목사니까 그런 줄 알고 힘을 써야 되지, ‘나는 원래 그러니까’,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역할이니까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그것도 외식입니다. 이런 걸 다 알아서 열심히 믿는데, 열심히 신앙생활하는데 그의 1년전하고 1년후하고 보니까 1년동안 열심히 믿었는데 1년 전이나 1년 후나 그의 말과 행동과 생활에 달라진게 하나도 없습니다. 고친 것이 없습니다. 외식입니다, 전부다. 주일도 잘 지키고 새벽기도 잘 나오고 예배시간도 안 졸고 잘 사는데 보니까 1년 전하고 1년 지나고 보니까 안 고칩니다. 고친게 없습니다. 외식입니다. 우리 다 외식자 아닙니까? 돌아보면 우리 전부 다 외식자입니다. 외식이 정도에 따라서 다르지 얼마나 외식이 많은지.
여기 본문에 일곱 가지 외식을 말씀했는데, 이걸 다 하는데는 시간이 없고 새벽에 하나씩 생각해보는데. 하나만 생각해보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막고.’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건데, 기본구원적으로는 천국에 이미 다 들어가있지 않습니까. 건설구원 면을 말하겠지요. 건설 구원적인 면으로 내가 천국 문을 막고 있습니다. 천국 문이 크기가 얼마나 됩니까? 천국 문은 몇 개나 되며 크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천국 문이 얼마나 작길래 내가 막는다고 막혀요? 내가 막는다고 천국문이 막힙니까? 그거는 나를 통해서 들어가는 그 천국문을 말하겠지요. 내가 들어가고, 나를 통해서 들어가야 될 그 천국 문을 내가 문 앞에 서서 들어가던지 나오던지 좀 비켜라. 들어가려면 들어가고 나오려면 나오고. 문 앞에 떡 서있으니까 들어가지도 않고 들어가는 사람도 막고 이 짓을 하고 있다 그말이지요. 내가 천국 문에 딱 서서 나도 안 들어가고 들어가고 싶은 사람도 못 들어가고. 나를 통해 들어가야 되는데 내가 막고 있으니까 내가 들어가야 따라 들어오는데 내가 막고 있으니까. 천국은 무엇이 천국인가? 하나님을 모신 곳이 천국이라. 하나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내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통치를 받는게 천국이다. 내가 그분을 모시고 그분을 내 주인으로 통치자로 내 능동자로 모셔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모실 사람들이 모실 수 있는데, 내가 그리 하지 않으니까 내게 속한 사람들은 다 그리 되지 못하는 겁니다. 천국문을 막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나 통해서 들어가야 될 사람들을 다 막고 있다 그말인데, 나 통해서 들어갈 사람들이 숫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생각보다 많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굉장히 많습니다. 때를 따라 양식 나눠 주지 못하고 동무들 때리는 것처럼, 나를 아는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 내 영향을 받는 사람들, 굉장히 많을 수 있습니다. 이런게 다 외식인데 그 뒤에 도 많이 있는데 돌아가셔서 제 기억에 이 외식 설교는 이렇게 살핀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은데, 여기 와서 늘 마음은 있었지만은. 마태복음 23장을 좀 세밀하게 읽어보시고 나는 어떤가? 우리 자신들, 각자 자기를 돌아보면서 어쨌든 외식을 회개해야 됩니다. 기독자의 평생의 생활은 알고보면 외식을 회개하는 생활이 기독자의 평생이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과 속을, 그런데 그렇다고하여 일부러 내 속에 있는걸 다 드러내서 나는 속에 숨길 것이 없이 다 드러내서 그게 그럴 필요가 있을때도 있지만은 드러내가지고 오히려 많이 손해 끼치는 것도 있기 때문에 구별을 잘 해야 됩니다.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속을 잘 만들라 그말입니다. 겉과 속을 같이 만들되, 겉을 꾸미는 것처럼 사람들이 보니까, 사람들이 보고 생각을 하고 판단하니까 사람들의 인정과 불인정과 사람들의 대우와 이런 모든게 보이는 것에 매여 있으니까 그런 것에는 관심을 두고 신경을 쓰고 잘 다듬고 꾸미고 포장을 하고 하는데, 자기 속에 신앙과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기 때문에 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자리 들고 걸어가라는 말이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이런 것들. 하루 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그런 말씀들이 여기 다 연결이 되어지는 겁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이게 진짜고 알맹이고 전부고 생명인데, 이거는 사람들 눈에 안 보이니까 관심을 아예 안가집니다. 안 가지고, 인간 관계나 겉을 꾸미는 것은 사람들이 보이니까 거기만 총력을 기울이는데, 아무리 그래봐야 하나님과 자기 관계 틀어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말입니다. 천국 문을 막고, 자기도 안 들어가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이것이 ‘외식’. 이런 외식을 다 살펴서 회개하는 그런 우리가 되도록 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회개의 길은 대속의 은혜로 주신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 대속은 한량 없는 은혜입니다. 영원한 멸망에서 건져 주셨고, 영원한 소망을 향한 회개의 한 없는 길을 주셨으니까 얼마나 참 큰 은혜인지, 대속을 힘 입고 끊임없는 회개, 외식을 고쳐 회개하는 남은 때가 되도록 하십시다.
마태복음 23:13-31
여기 본문에 일곱가지 외식을 종류별로 기록을 해놓으셨는데, 세상의 모든 외식을 다 정리해서 집어넣으면 이 일곱가지 안에 다 들어있다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외식이란 것은 말 그대로 바깥을 꾸민다, 밖을 꾸민다 그러면 밖을 꾸미는 걸 외식이라 그러는데 안도 꾸미면 외식이 아닌데 바깥만 꾸미고 안을 꾸미지 않으니까 외식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겉과 속이 다르고, 속을 꾸미지 않고 밖을 꾸미는 그 이유는 왜 그렇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다 외식을 하고, 알게 외식하고 모르게 외식하고 다시 말하면 겉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훌륭하게 아주 번지르르하게 꾸미고 속은 그냥 대충 대충 두거나 엉망이 되도 그냥 두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볼때 왜 그런가요? 겉은 드러나고 보이고 사람들이 알 수 있고, 속은 안 보이고 드러나지 않아서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보면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들려지고 사람들 볼때 좋게 보이는 그것은 잘 꾸며서 좋게 하려고 노력을 하고, 사람들 이목과 상관 없고 사람들의 생각이나 판단과 상관없는 그런 것 속에 들어간 것은 사람들이 잘 꾸미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 그런 것하고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알차게 진실하게 만들어가는 그런 사람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들어가면 그것도 또 다시 또 다른 외식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드러나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으니까 보이는 거는 좋게 하고 조심하고 잘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그냥 대충 대충 그냥 두고 그렇게 하는데 문제는 그것이 세월이 지나가도 언제까지든지 그대로 그냥 속은 속 그대로 숨겨져 있고 드러나는 것만 그대로 되어 있으면 일단은 문제가 좀 적겠는데, 언젠가는 그것이 다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어지는 겁니다. 사람은 한번은 다 죽어야 되고 죽으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고, 부활 너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그 심판에서는 내가 아는 것 모르는 것,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 도무지 낯을 들 수 없는 그런 수많은 것들조차도 하나님께서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다 활딱 뒤집어서 그대로 다 드러낸다 그말이지요. 다 드러내는 그 때가 있으니까 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 외식을 책망하신 것은 외식으로 그대로 계속 나가면 드러날 그때 어찌되는 걸 고치기 위해서 미리 하라 그 말씀이고 또 거기까지 가기 전까지라도 외식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종교말년에 되어진 그 외식의 모습을 보고 외식이 어떻게 되는가를 우리가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외식한 유대인들이 제일 처음에 그들이 받은 재앙이 무엇입니까? 외식한 종교 말년에 유대인들이 받은 첫째 재앙은 예수님께서 ‘화 있을찐저’ 하셨는데, 그들이 받은 첫째 재앙,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그때도 그들은 재앙을, 화를 받고 있었는데 그때 그들이 받고 있는 그 화가 무엇이었습니까? 예배 시간에 앉아서 조는 것도 외식입니다. 몸은 앉아 있는데 말씀은 안 들으면 외식이죠 그게. 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그때 유대인들이 받는 그 재앙이, 화가 무슨 홥니까? 무슨 화요? 000샘 좀 크게. 예수님을 핍박한 죄지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죕니다. 듣는데 안 들리고 구주 메시야가 눈 앞에 있는데 메시야가 안 보입니다.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보였지, 큰 문제 아닙니까?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예수님 제자들 조차도 그런 때가 있었지만은, 눈 앞에 구주 메시야가 와있는데 그 구주 메시야가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보입니다. 마귀 대장으로 보였다 그말이죠, 구주 메시야가. 그보다 더 큰 저주, 그보다 더 큰 재앙이 있습니까? 그 재앙을 그들이 외식하는 생활 속에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걸 보고 계시거든요? ‘너희들의 머리 위에 폭탄이 지금 떨어지고 있다. 얼른 안 피하면 거기 맞아 죽는다. 자손 대대로.’ 이걸 말씀하는데 그들에게는 안 들리고 안 보이는 겁니다. 안 믿어지고 안 느껴지고, 그게 재앙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몰랐고, 모르니 그분의 말씀이 안 들렸고 그분이 구주로 안 보여졌고 안 믿어졌고 실감이 도무지 안되고 그러니 결과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가 못을 야물게 박아서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니 구주를 죽여놨으니까 얼마나 큰 죕니까? 죽이면서 담대하게 오늘도 보면은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타락하고 탈선하고 그리 될 때, 이상하게도 굉장히 담대해집니다. 가라다인의 지방에 갔을때 무덤 사이에서 거하는 미치광이지요. 귀신 들린 자가 있는데 하도 힘이 쎄고 발광을 해서 사람들이 쇠사슬로 손과 발목을 꽁꽁 묶어놨는데 귀신이 얼마나 힘이 쎄던지 쇠사슬을 다 끊고 고랑을 끊고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자기 몸을 상하고 그리 했습니다. 사람이 귀신이 들어가면 굉장히 담대해집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용감하면, 저 용감 용맹이 성령의 용감이냐 귀신의 용감이냐를 살펴봐야 되고, 사람이 굉장히 지혜로울 때가 있습니다. 이상하게 귀신이 들어가면 굉장히 지혜로워 집니다. 그런데 저 지혜가 이상하게 지혜롭다,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인지 귀신의 지혜인지를 살펴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제 일을 이루기 위해서 제 일꾼으로 쓰면은 얼마나 제 마귀 일꾼에게 지혜를 집어 넣어주겠습니까. 그 지혜 정도가 얼마나 높습니까? 마귀의 지혜를 성경에 이름을 뭐라 그럽니까? 마귀의 지혜를 성경에는 뭐라고 말씀을 해놨습니까? 마귀 지혜의 정도를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666이라 그래놨습니다. 7 다음에, 하나님 다음으로 가장 지혜로운게 마귀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라고 하여 다 좋은게 아니고 용맹이라 하여 다 좋은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게 어디 속한 것인가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언제까지 그렇게 숨겨져 가릴 수 있으면 되는데 드러나게 되니까 외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고, 드러나게 되는 그게 하나님의 목적 위한 그 역사에 필수적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드러나게 되니까 한편으로는 소망이 있게 되는 것이고 또 모든게 환하게 드러나니까 갚음이 있다는 뜻이 되고, 그러니 소망이 있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같이 있게 되고, 그런데 소망만 있고 두려움은 없으려고 하면 그 두려운 요소를 없애버리면 되지요.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 속에는 소망과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고, 이거는 다시 말하면 소망은 빛이고 두려움은 어두움이니까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 속에는 빛과 어두움이 함께 있는 것이 믿는 사람들의 속에 있는 요소라. 그 정도가 외식을 얼마만큼 했느냐 따라서 외식이 없는 사람일수록 빛은 많고 어두움은 적고 두려움은 적고 소망은 클 것이고, 외식이 많아서 드러나면 수치스럽고 부끄러울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어두움은 크고 두려움은 크니까 그 사람은 마지막이 두렵고 심판이 두렵고 죽는 것이 두렵고 그리 되어지겠지요.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니까 외식이 없어서 드러나도 뒤집어놔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울게 하나도 없으면 그 사람은 감사와 소망으로만 가득 차고 언제나 빛 가운데 거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질건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지요. 그러나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이고, 주님 대속을 힘 입고 어쨌든 최대한 살아생전에 어두움에 속한, 두려움에 속한, 외식에 속한 것들을 다 빼서 정리해서 없애버리는 것이 우리 할 일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면 성경에 기록된 것을 우리가 눈으로 읽을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아직까지 고칠 수 있는 때기 때문에 오늘도 이 말씀을 들려주신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인류 전체 시기를 세토막으로 나눠서, 이거는 우리가 생각해보면 상식이지요. 천지 창조에서부터 노아시대까지 이천년에 한 토막, 그다음 노아 이후부터 주님 오시는 그때까지 이천년에 한 토막, 주님 오신 그때부터 오늘까지 이천년에 한 토막, 세 토막으로 그렇게 크게 나눌 수 있고. 그러면 첫째 토막도 시작과 과정이 있었고 이천년 세월 속에 사람들의 모든 마음이나 정신이나 도덕 윤리나 모든 것이 다 나사가 풀어지듯이, 풀어지고 헤이해지고 나태해지고 그리 되어진 그 마지막때가 말하자면은 1차 첫째 토막에 말세가 노아 홍수시점이라 그말입니다. 120년 방주 예비하는 그 기간, 그때가 1차 첫째 토막에 말세였고 그 말세에 되어진 세상의 모습, 죄악에 한말로 말하면 패괴라. 패괴란 것은 모든 것이 부서지고 다 무너진 것이 패괴라 그말입니다. 신앙도 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도덕도 윤리도 모든 게 다 엉망이 되고 뒤죽박죽이 돼서 혼돈스럽고 혼란스러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다음 2절에 뭡니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그리 되어있지요. 혼돈하고, 혼돈이라 말은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 그말입니다. 정리가 안 되있고 정돈이 안 되있고 제자리에 있지 않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그런 모든 걸 다 만들어서 제자리에 딱딱 앉혀놓은게 창조다 그리 볼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패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다 무너진 겁니다. 조직도 질서도, 위아래도 사람들의 양심도, 가치관도 욕망도, 취미도 전부다 엉망진창이 되어지는 그런 때가 노아 시대때. 그래서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이것도 속에 들어가보면 외식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 되어졌고, 그러니까 하나님은 있는데 그들 속에 하나님은 없는, 자기들 좋아하는대로 그리 되었고.
또 사람들의 모든 행위가 다 강포해져서 매인 데가 없고 붙들린 데가 없고 조심 없는 두려움이 없는 자기들 마음대로 사는 그런 시대가 노아시대 때였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도무지 그냥 둘 수 없는 세상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홍수로 다 쓸어버렸고. 그때 그 이후로 다시 노아의 자손들 중에서 샘의 후손을 중심으로 한 아브람의 자손, 그 아브람의 자손이 주축이 되고 중심이 된 그 유대인들에게 주신 그 구원. 그래서 유대인들을 통한 그 구원역사가 이천년을 내려왔지만은 그 이천년 세월 속에 아브람의 자손된 유대인들의 구원 얻는 그들이 소수만 구원 얻고 마치 애굽에서 나온 이십세 이상의 그 사람 중에 여호수아 갈렙만 들어갔던 것처럼, 아주 극소수만 전체로 구원얻고 대개는 다 실패했기 때문에 구약 교회를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육의 자손으로 구원 받는 그 시기를 끝내고 다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전부에게 구원을 주는 그 시기로 새롭게 시작되는 그 전환기가 되어지는 그때가 바로 이스라엘 종교 말년, 그러니까 우리나라 조선이 끝나고 대한제국, 대한민국이 시작될 그때를 가리켜서 구한말이라 그렇게 말하는데, 말하자면 한 나라가 망하고 고려 5백년 왕씨 왕조가 끝나고 조선 이씨 왕조가 시작되는 그 시점 그런때, 그런때는 그게 하루 아침에 단칼에 무 자르듯이 딱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게 왕조가 들어서는데 망해가는 그 망조가 서서히 쇠퇴하는 그런 모습이 보여지고 그 가운데서 새롭게 시작되는 개혁운동이 서서히 속에서 불길이 살아나서 일어나고 어느 시점에 불이 붙으면 개혁을 해서 앞에 망해가는 집을 무너뜨리고 새집을 지어버린다 그말이지요. 그러면 그 망해가는 기간하고 새로 집을 짓는 기간에 기한이 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것처럼 예수님 오실 그때가 말하자면은 구약시대는 점점 망해가는 그때고 쇠퇴해가는 때고, 또 예수님으로 인해서 신약 교회는 점점 시작되고 일어서는 그때, 그때를 가리켜서 그때 중에서 구약시대 속한 그 쪽을 가리켜서, 그 표현을 강조하는 걸 가리켜서 이스라엘 종교 말년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리 말한다 그말이지요, 종교 말년에. 그때는, 그때도 말세기 때문에, 종교 말세기 때문에 그 때 모든 하나님 백성들, 그 전에 벌써 4백년 전부터 그 이전에부터 이스라엘은 다 망했지 않습니까. 앗수르에 망하고, 바벨론에 망하고 망한 상태로 또 그래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70년뒤에 돌아오고 또 재건됐지만은 또 다시 망해버리고 그래가지고 민족이 다 흩어져버리고 그리된 상태로 4백년동안 눈이 없는 시대, 빛이 없는 암흑의 시대 그런 시대로 됐다가 그리 됐으니까 뭐 엉망이 됐겠지요. 그런 시대에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오신 그 시대는 말년이기 때문에 말기 암 환자처럼 교회들의 모습은 전부 속으로 병이 들어가지고 외식으로 가득찬 그런 교회들, 그런 신앙들이 되어져 있었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노아 시대 말세의 죄는 패괴였고, 그런데 그 속에 들어가면 그것도 외식이였습니다. 드러나게 패괴였고, 이스라엘 종교 말년 그때 그들이 멸망받은 죄는 외식이였고. 또 오늘날, 그때부터 2천년이 지나서 말세지말이 된 오늘날 시대를 보면은, 성경에 보면은 오늘날에 가장 큰 대표적인 징조는 온 세상이 한덩어리 된다는 건데, 한덩어리 되는 것이 세상은 원래 한덩어리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어린양과 어린양에 속한 자들은 이 세상을 따라 한 덩어리 되면은 안되는데, 그래서 불교는 어차피 불교니 유교니 회교니 힌두교니 어떤 종교를 갖다대도 어떤 미신을 갖다대도 종교란 것은 원래부터 사후세계 내세를 지향하는 것이 종교지만은 그런 하나에 그들의 짐작이고 추측 추론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들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세상과 하나되고 세상을 따라서 변질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모든 종교라 그게 당연하나, 그러나 하나님이 근본된 기독교만큼은 그들과 하나되면은 안되는 것인데 말세가 되면은 온 세상이 다 똘똘 뭉쳐 하나가 되어질 그때 그 속에 수많은 기독교, 교파들, 교회들, 교단들이 믿는 사람들이 그들과 하나가 되어서, 그래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다시 올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믿는 자를 보겠느냐.’ 온 세상에 기독교가 전파되어있고 교회가 너무 많아 탈이고, 믿는 사람이 나라 숫자보다 더 많고. 우리나라 교회 교인들의 재적을 다 포함하면 대한민국 숫자보다 많다는 말인데, 기독교만 그런가요? 어쨌든 그만큼 믿는 사람이 많은 그런 시대가 되어졌는데, 그리 되어가는데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다시 올때 이 세상에서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으니까 그 믿는 자가 다 어디 갔는가? 그래서 마지막에 한 덩어리 될 그때에 거의 대부분의 교파들, 교단들, 교회들, 믿는 사람들 전부다가 어린 양을 대적하는 그 세상과 한덩어리 되는 그 속에 다 뭉쳐서 같이 한덩어리가 돼서 어린양을 대적하는데, 그 어린양은 세상은 대적이지만은 교회와 교단들은 자기 구주 메시야인데, 구주인데 구주를 대적하는 것이 종교 말년에 그들이 구주 메시야를 대적하는 것하고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 되고 있다 말이지요. 그리 된 그 원인이 뭐냐? 그 원인이 속에 들어가보면은 믿는 사람들이 전부다 믿음 생활, 신앙 생활을 외식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 겉과 속이 다른 그 생활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 종교 말년에 유대인들이 외식한 것은, 그들이 율법이 없지 않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지 않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고 하나님의 이름을 매일같이 불렀고 귀신들도 두려워 떤다는 말처럼 그들은 두려워 떨었고, 그리했지만은 하나님이 두려워 떤다 했으나 그 속에 깊이 들어가보면 하나님 노래를 부르고 하나님으로 온 사방 천지 도배를 해놨고 기도와 율법과 계명 지킴이 나라를 다 끌고 갈만큼 온 나라가 종교 국가가 된 그 나라인데, 속에 실제로 들어가보면 하나님은 없고 진짜 율법은 없고 전부 인간뿐이고 세상 뿐이었다 그말입니다. 그게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기도라는 것 함부로 말하는 것 아니고, 성경이라는 것 쉽게 말하는 것 아니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맹세한다 이런것도 쉽게 말하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노선을 이야기하지만은 노선이란 것도 섣불리 쉽게 말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그 외식은 그러했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만 보면 상당히 두께가 두꺼워서, 수박을 먹을때 보면 수박은 껍질이 두꺼울수록 맛있습니까, 얇을수록 맛있습니까? 제 경험으로 보면, 수박은 껍질이 얇을수록 더 맛있데요. 먹을게 많고. 두꺼울수록 맛이 별로고 먹을 것도 없습니다. 외식이 좀 덜하면 쉽게 드러나는데, 이스라엘 종교 말년에 유대인들은 외식이 얼마나, 껍데기가 얼마나 두꺼웠던지 상당히 깊이까지 두꺼워서 외식이 두꺼워서 철두철미하게 외식을 하니까 그 두꺼운 외식이 진짜인 줄 알고 껍데기는 껍데기 속에는 전부 비계덩어리 기름덩어리 먹을 수도 없는 그런 것들인데 그게 두꺼워놓으니까 그게 살덩어리 진짜배기인줄 알았는데 그걸 다 벗겨내고 나니까 알맹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다 외식밖에 없었다 그말이지요. 그만큼 그들은 율법이 많았고 달달 외웠고 생활화 되었고 하나님을 노래 불렀고 또 신앙생활한 그게 그들의 나라 전부가 다 그리되어져있었는데, 실제 속에 들어가보니까 자기들이 주인이었고 이 세상주의였지, 그러기 때문에 정작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하나님과의 교감, 영교, 하나님과 연결되서 통하는 것,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 바늘 구멍만큼이라도 연결의 통로가 있으면 이렇게 보면은 문풍지에 구멍 똑 뚫고 눈 갖다대면 보이지 않습니까, 바깥이. 하나님과 관계가 바늘구멍만큼이라도 통로가 있으면 희미하게라도 보일 것이고 숨소리라도 들려서 귀라도 볼 건데, 그런데 콱 막혀버리니까 단절이 되버리니까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분이 사람되어 오신 구주메시야가 그들 앞에 왔지만은 그들은 몰랐지요. 극소수만, 요셉과 마리아, 시므온과 안나, 들판에 양 먹이는 목동들, 저 이방에 있는 동방 박사들, 또 열 두 제자들 그런 극소수만 알았지, 큰 교단을 만들고 높은 자리 차지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대접받고 대우받는 그런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이 사람들은 도무지 몰랐다 그말입니다. 이것이 그때가 그랬듯이, 그래서 모르니까 안 보이니까 구주메시야가 이단의 괴수로 보이니까 배척하고 반대하고 핍박하다가 십자가에 못을 박았고, 그리고 박을 때 담대하게 박았고. 이방인 빌라도조차도 이 사람을 죄가 없다, 나는 책임 못 지겠다고 손을 씻었지만은, 그 죄는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라고 그렇게까지 담대하게, 귀신이 용기를 넣어주면 그렇게까지 담대하게 되는 겁니다. 확신합니다. 확정을 하고. 내가 목숨을 걸고 장담한다. 그런데 그 목숨 걸고 장담하는 확신이 성령의 확신이면 다행인데 마귀 확신이면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그러기 때문에 안 믿는 정치가들도 뭔가 일을 하면 항상 뭘 남겨 놓습니까? 뭔가 일을 할때면 안 믿는 정치가들, 나라에 정치 잘하는 사람 항상 보면은 말을 할때 뭘 남겨 둡니까? 빠져나갈 구멍을 항상 남겨놓습니다 정치가들은. 무슨 말 하든지 할때도 핑계 대면. 두 번 다시 안한다고, 내가 정계 은퇴해서 두 번 다시 정계 안나온다고 몇 번 은퇴하다가 세 번인가 네 번만에 대통령 한 분도 있지요. 기어코 하지요, 대통령. 지금도 그런 사람 얼마든지 있습니다. 전부다 그런 것.
그래서, 마귀가 담대함을 넣어주면 그렇게 담대한데, 외식함으로 캄캄하게 어두워지니까 그들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그 자체가 바로,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게 외식으로 인한 재앙이고, 화고. 그분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고 인정되지 않고 구주가 구주로 믿어지지 않은 것이 그들에게 외식으로 받은 큰 화고 재앙이고. 그것이 점점 더 심화되서 구주를 못 박아 죽였고 그 값으로 예루살렘이 완전히 망했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맛사다 전투가 그때 일어난 것 맞지요? 000샘, 맞지요? 그때 일어나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훼파 되어서 다 무너졌고, 그때 로마군을 피해서 한 천여명 가까운 숫자인지 모르겠습니다. 성을 쌓고 요새를 쌓아서 꼭대기 올라가서 거기서 2년인가 3년인가 결사 항전을 했는데, 마지막에는 안되니까 먹을 게 다 떨어지고 던질 돈도 없으니까 그만 스스로 다 죽이고 몇 사람만 겁이 나 남았다 그러는데, 그것을 이스라엘은 군에 입대하면 그 나라도 징병제지요, 입대하면 거기 다 데려간답니다. 그 맛사다,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결사항전 했다고 자랑스럽게. 안 믿는 사람들 각도에서는 자랑스럽겠지요. 그런데 신앙의 각도에서 보면 그것이 자랑할 것인가, 저주인가. 저주 아닙니까 그거? 그렇게 쫓겨 올라가서 비참하게 그렇게 하다가 집단 자살했으니 그게 복입니까? 저주지. 그렇게 비참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세계 역사에 자식들 삶아먹은 민족은 유대인들이 가장 많지 않을까.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을 삶아먹고, 그걸 삶아먹을때 남이 뺏어갈까 싶어서 조용히 삶아먹는, 그만큼 비참하게 산 것이 유대인들입니다. 그 조상들도 그랬고 후손들도 그랬고 이게 외식의 죗값이고, 오늘도 말세에 어린양을 대적하는 그 온 세상에 하나되는 그때에 교회들은 거기 하나되면 안되는데 거기 드러붙어가지고 하나되는, 모르면 차라리 모른다 하고 약하면 나는 약하다 그러고, 그래서 죄송하다 그러고 그게 낫지 한덩어리 돼서 어린양을 대적하고 어린양을 못 박아 죽이는 그런 죄를 짓는, 그 큰 엄청난 죄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가 외식입니다. 그러니까 외식을 하면은 눈이 어두워집니다. 안 보입니다. 외식을 하면은 귀가 어두워져버립니다. 안 들립니다. 심령이 둔탁해져서 믿어지지 아니하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꼭 같습니다, 종교말년때와 같이. 지금도 외식하면 눈이 안보여서 신앙 세계가 안 보입니다.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립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와 천국의 역사가 자기 속에 심령이 어둡고 둔탁해지니까 느껴지질 않는다 그말이지요. 그러니 세상으로 나가도 아무런 역사가 없으니까 그냥 막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과 한 덩어리 되고, 평소에 그리 살다보니까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오만 짓 다하지요. 천주교를 흉을 보고 욕을 합니까? 앞으로 두고 보지요, 개혁 교회가 천주교까지는 안갈지 모르겠지만은 얼마나 많이 달라지는지. 천주교가 원래부터 천주교였습니까? 천주교는 정통의 계통에 있습니다. 개혁교는 천주교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늘 우리보고 ‘너희들은 열교다. 쪼개져나간 교다.’ 그러지 않습니까. 자기들은 정통이라 그러고. 바울 사도 복음 전도에 내려온 계통에 천주교가 한 가운데 들어있습니다. 원래 천주교가 그리 타락한 것 아닙니다. 그런 정통 교파였던 그 교회가 타락이 되고 변질이 되니까 천주교가 됐습니다. 거기서 개혁해서 나온 교가 칼빈, 오늘날 개혁교 장로굔데, 이 장로교가 말세가 되어서 점점 타락해가면 천주교 꼴을 닮아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말이지요. 왜 그리 되는 겁니까? 그거는 전부다 외식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외식이라는 죄는 참 대단히 무서운 죄다 그리 볼 수 있는데, 그래서 지금 우리가 부족하고 모든 면에 모자랄지라도 이런 전체적인 방향을 보는 눈을 가져야 되고 이걸 보면서 내가 갈 길을 보고 눈 앞에 있는 현실을 싸워 나가야 되지, 아무리 눈 앞에 있는 방향을 고개 들어서 자기 길을 보지 아니하고 눈 앞에 있는 걸 아무리 세밀하게 열심히 닦아도, 그래서 길을 갈때는 눈을 들어 앞을 보지 않습니까. 눈을 들어 하늘 보라입니까, 복음 성가에. 눈을 들어 하늘 보라. 눈을 들어 앞을 보고 그리 가는 거지, 땅만 쳐다보면 앞으로 어디 가는지 모르잖습니까. 그게 바다로 가는지 산으로 가는지 구렁텅이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앞만 보고 아무리 세밀하게 살펴봐야 헛일이다 그말이지요. 전체 방향을 알고 그 방향 가는 그 안에서 세밀하게 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난 오일밤 예배때 말씀드린 대로 바울 사도가 내가 달음질 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지 아니하여, 달려가는데 신앙의 방향이 틀린 성결과 진실과 사랑과 거룩과 충성은 마지막에 가면은 옳은 방향에 큰 대적이 되지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차라리 도둑놈이 낫지요, 좀 강하게 말한다면. 차라리 도둑놈이 낫고 이단이 낫지, 그 이단들은 이단인 줄 다 드러나니까 아는데 외식자들은 방향은 틀렸는데 거룩하지요 진실하지요, 성결하지요 도덕적이지요, 양심적이지요 사랑이 충만하지요, 그러니 수많은 사람이 속습니다, 다. 그 이름을 성경에 뭐라 그럽니까, 요한계시록에? 그렇게 생긴 그 이름을 가리켜서 어린 양보다 더 어리게 보이는 새끼양이라 그럽니다. 그게 바로 거짓 기독교, 외식하는 기독교, 가짜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판을 치고 있지 않습니까. 전부다 거짓 기독교, 가짜 기독교, 외식하는 교회들이 판을 치고 거기에 수십만명 수백만명이 다 따라가지 않습니까. 압니까 그 사람들이?
우리는 복음을 들어서 아는데, 알고 있으면서도 이대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알고만 있지, 못 사니까 고차원의 또 다른 외식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화 있을찐저’. ‘화’라는 것은 그런 온갖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람들이 원치 않는, 하나님도 그들에게 화 내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자꾸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화가 있다 피해라. 너희들 머리 위에서 재앙이 떨어지고 있으니까 얼른 피해라. 너희들이 가는 길은 재앙으로 가는 길이니까 피해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가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다.’ 그런데 그리 아무리 말씀하셔도 안 가면 소용이 없고 안 피하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사랑으로 목이 터져라고 ‘화 있다 화 있다 피해라 돌아가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들이 기어코 안 듣고 고집 피우고 외식을 하다가 멸망받고 말았던 겁니다. ‘화 있을찐저’ 이 말씀 듣고 의미를 생각해야 됩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서기관 바리새인들, 교회에 머리되는 인도자들, 선지자들, 모든 교회 교인들의 신앙을 끌고 가는 사람들. 그러니까 그들로 인해서, 그래서 대개 보면은 교회는 그들로 인해서 서고 그들로 인해서 운영이 되고, 그들로 인해서 움직여 집니다. 그래서 교회는 보면은 아무리 큰 교회도 속에 들어가보면은 몇 사람에 의해서 교회가 다 이리저리 움직여지게 됩니다. 조직이 좀 큰데는 좀 많고 그렇지만은. 서부교회 같은, 옛날에 백목사님 생전에 알고보면 서부교회 백목사님 한분이고, 그분의 밑에 세운 그 일꾼, 서부교회 주일학교 숫자가 7천명, 8천명인데 그 조직이, 총책임자가 총무 한 사람, 그 밑에 상무 서기 두 사람, 그 세 사람이 주일학교 실제 운영을 다 했습니다. 백 목사님의 지도 아래서. 물론 백목사님 지도하시니까 그 지도에 따라서 다 되어졌지만은 실제 실무에는 장영목 목사님 총무 그분 한분이 주일학교 운영 다 했다 할만큼 그렇게 조직 그 분 한 분밖에 없었고, 상무 서기 두 사람은 그냥 글 쓰는 서기들이고 다른 서기들이지 일하는 것 아닙니다. 중간반은 좀 더 나이가 학생들이 크니까 조직이 좀 더 많았고. 알고보면 그 몇 몇 사람들 그들에 의해서 교회가 다 수천명이든 수만명이든 움직이는데 그들이 바로 서기관 대제사장들 그들이고 그중에 주축되는 잘 믿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고, 우리 공회 교인들 우리 교회도 바리새인처럼 잘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 숫자에 비해서. 그런데 그들에 의해서 교인들은 다 따라가는 겁니다. 주일날 오전에만 오는 그 교인들이 대개 보면은 집사님들 한 두분, 그분들에 의해서 다 움직이지 않습니까? 다 따라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서기관이고 대제사장들이고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교회안에서 위치가 무겁고 막중하고 책임이 그만큼 무겁고, 책임이 무거운만큼 잘하면 상도 크고 잘못하면 심판이 그만큼 크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 전체를 향해서 하신 것이 서기관들, 바리새인. 서기관들 말씀하신 것은, 서기관은 성경 연구니까 교훈을 책임진 것이고 모든 게 다 교훈에서 나온다 그말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목사들인데, 좀 더 다른 각도로 말하면 신학교 교수들, 신학자들. 그래서 시대마다 교계에 있어서는 신학자들, 교역자 양수원 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것이 잘못되면 전부다 잘못되고 말지요. 지금 시대 우리나라 교육계에 이상한 사상들이 많이 들어있는 것은 그 교사들이 모두 그런 사상에 많이 물든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학생들을 그리 가르치니까 그 학생들 그 물 먹으니까 그 사람 되지 별 수 있습니까? 그러니 전부 나라가 점점 그리되어지고, 시대 시대 따라서 이리저리 다 되고 세상이니까 뭐 별 것 없지만은. 그래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계속 말씀을 하시는데 전체를 다 향해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들에게 전체가 다 달렸으니까 오늘 바로 여기 있는 우리 대부분의 우리들 문제입니다. 외식이란 것은, 바깥 외 자, 꾸밀 식자. 장식하는 것, ‘외식’ 이건데 밖을 꾸민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겉은 번질 번질한데 속을 열어보니까 빈 껍데기. 맛있게 생긴 과일을 딱 잘라보니까 속에는 팍 쉬었습니다. 썩어버렸습니다. 수박을 먹으려고 겉이 아주 매꿈하게 잘 생겨서 딱 잘라보니까 팍 상했던지 하얗게 하나도 안 익었던지, 그게 일종에 말하자면 외식입니다. 아주 반들반들하게 잘 생긴 깡통인데 속을 두드려보니까 아무것도 없고. 껍데기는 잘 생겼고 미꿈하고 옷도 잘 입고 귀걸이도 하고 코걸이도 하고 반지도 끼고 오만 것 장식을 다 했는데 대화를 해보니까 먹통이고 깡통이고 무식쟁이입니다. 외식이죠 뭐 그게. 속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많이 배워 가지고 아는 것은 많은데 입은 똑똑하고 말은 잘하고 알기는 많이 아는데, 지식은 아는데 인간성을 살펴보니까 도덕도 없고 윤리도 없고 빵점입니다. 그 인간 어디 쓰겠습니까? 차라리 모르는게 낫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대개 보면은 유식하면 교만하기 쉽고, 제법 유식하면, 제가 좀 공부를 많이 못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제가 생각해볼때 그렇습니다. 아주 인류 대학에 들어가는 그런 젊은 학생들은 대개 보면은 교만한데 그 교만이 보통 사람들 앞에서는 굉장히 겸손한데 굉장히 겸손한 그게 바로 교만입니다. 말하자면은, 나는 이 정도의 엘리트기 때문에 자기보다 아랫사람들하고는 쉽게 자기 속을 드러내서 정상적인 상대, 대화를 안한다 그말이지요. 네, 네하고 고개 숙이고 하지만은 속에는 아주 깔아뭉개는 그런 것이 들어있는 것이 엘리트급의 학교 다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생각해보면은. 그들은 2등은 안해보고 전부 항상 1등만 해보고 최상급에만 놀아보니까. 그런 면이 다 그러지는 않아도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을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많이 배워서 유식하고 알아도 그런 인간성, 도덕성이 없으면 어디 쓰겠습니까, 외식이지. 그런데 그런 것까지 다 갖춰서 인물도 있고 유식하고 다 똑똑하고 다 잘나서 참 좋은데, 인간성까지 다 좋은데 더 깊이 들어가보니까 뭐가 없습니까? 인물도 좋고 지식도 있고 도덕성 인간성 다 갖춰 있는데 하나가 빠졌습니다. 외식입니다. 뭐가 빠졌습니까? 신앙이 없습니다. 어디 쓰겠습니까,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썩을데만 갖다쓰지. 그래서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그거는 썩어져가는 썩은 것 많은 세상에는 쓸지라도 생명 운동하는 교회는 쓸모가 없다 그말입니다. 무식해도 신앙에는 그게 가치가 있는 것이지. 이런 것들이 다 외식입니다, 말하자면은. 좀 더 밖으로 나가면 예수 믿는다는 이름은 있는데 신앙 생활을 안 하는 사람, 예수 믿는다면서 주일을 지킵니까? 성경을 읽습니까? 기도합니까? 여기는 그런 분들이 안 계시겠지요. 주일 오전만 오는 분들은 더러 있을 겁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름으로 교회를 다닌다 그러는데, 주일을 지킨다 하지만은 제대로 알고 지킵니까? 성경을 아마 1년 가도 주일날 와서나 읽을까 집에선 읽을까. 기도는 밥 먹을때나 기도하는진 모르지요. 몰라서 외식하는 겁니다. 전도를 합니까? 계명 지키는 생활 합니까? 그게 다 알게 모르게 외식이고. 주일날 예배당에 와서 앉았어도 말씀을 들어야지요. 앉았는데 머릿속으로는 집안일, 회사일, 사업일, 인간관계일, 그런게 머릿속에 뱅뱅 도는데. 그런 경험 안 해보셨습니까? 저는 기도할때마다 엉뚱한 생각이 많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애를 많이 먹습니다. 기도하면 엉뚱한 생각이 자꾸 들어옵니다. 기도한다고 앉았는데 머릿속으로는 엉뚱한 생각을 한창 하다가 정신 번뜩 차려보면,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기도시간에.’ 또 정신 차리고. 그런 것도 하나에 외식에 속한 겁니다. 기도한다고 앉았지만은 엉뚱한 생각 하는 것. 일 년 내도록 농사를 지었는데 가을에 추수하려고 보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매가. 농사 잘 지었습니까? 잘 못 지었습니까? 열심히 농사 짓는다고 지었는데, 농사 안 짓고 놀았구나. 엉뚱한 짓 했구나. 외식입니다 전부다. 책상에 공부한다고 앉아있는데, 항상 방을 열어보면 책상에 앉아있는데 시험 쳐보니까 시험 성적이 뚝 떨어져서 낙제를 맞았습니다. 공부 했습니까? 앉아있었는데 분명히. 공부했는데. 외식이지요, 안 했으니까. 된 줄 알았는데 되지 않은 것. 그래서 반사면 반사의 일에 충실하고, 집사라면 집사일에 충실하고. 우리 교회에, 백목사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집사 자격 13가지 입니까? 언제 한번 불러 드렸는가 모르겠습니다. 그 열세가지를 적용시키면 우리 교회 집사될 분이 몇 분이나 될지. 아마 집사 사면해야 될 분들이 상당히 많을 겁니다. 13가지 다 적용시키면. 집사라면 그 집사의 내면을 가지고 있어야 되고, 장로라면 더 가지고 있어야 되고 목사라면 더 해야 되는데, 이름이 목사지 목사 노릇을 해야지요. 목사 생활 해야지요. 목사다운 그런 인격을 만들어가야지요. 그게 안되어있으니까 사람들이 볼때는 목사님인데, 그래서 대접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렇게 알고 있는데 실제 자기 자신을 돌아보니까 내가 목사인가? 대단히 부끄럽고 죄송한 말이지만 제 속으로 제가 목사라고 생각해본 적 단 한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의 무책임한한 위안제입니다, 알고보면은. 목사니까 그런 줄 알고 힘을 써야 되지, ‘나는 원래 그러니까’,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역할이니까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그것도 외식입니다. 이런 걸 다 알아서 열심히 믿는데, 열심히 신앙생활하는데 그의 1년전하고 1년후하고 보니까 1년동안 열심히 믿었는데 1년 전이나 1년 후나 그의 말과 행동과 생활에 달라진게 하나도 없습니다. 고친 것이 없습니다. 외식입니다, 전부다. 주일도 잘 지키고 새벽기도 잘 나오고 예배시간도 안 졸고 잘 사는데 보니까 1년 전하고 1년 지나고 보니까 안 고칩니다. 고친게 없습니다. 외식입니다. 우리 다 외식자 아닙니까? 돌아보면 우리 전부 다 외식자입니다. 외식이 정도에 따라서 다르지 얼마나 외식이 많은지.
여기 본문에 일곱 가지 외식을 말씀했는데, 이걸 다 하는데는 시간이 없고 새벽에 하나씩 생각해보는데. 하나만 생각해보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막고.’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건데, 기본구원적으로는 천국에 이미 다 들어가있지 않습니까. 건설구원 면을 말하겠지요. 건설 구원적인 면으로 내가 천국 문을 막고 있습니다. 천국 문이 크기가 얼마나 됩니까? 천국 문은 몇 개나 되며 크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천국 문이 얼마나 작길래 내가 막는다고 막혀요? 내가 막는다고 천국문이 막힙니까? 그거는 나를 통해서 들어가는 그 천국문을 말하겠지요. 내가 들어가고, 나를 통해서 들어가야 될 그 천국 문을 내가 문 앞에 서서 들어가던지 나오던지 좀 비켜라. 들어가려면 들어가고 나오려면 나오고. 문 앞에 떡 서있으니까 들어가지도 않고 들어가는 사람도 막고 이 짓을 하고 있다 그말이지요. 내가 천국 문에 딱 서서 나도 안 들어가고 들어가고 싶은 사람도 못 들어가고. 나를 통해 들어가야 되는데 내가 막고 있으니까 내가 들어가야 따라 들어오는데 내가 막고 있으니까. 천국은 무엇이 천국인가? 하나님을 모신 곳이 천국이라. 하나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내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통치를 받는게 천국이다. 내가 그분을 모시고 그분을 내 주인으로 통치자로 내 능동자로 모셔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모실 사람들이 모실 수 있는데, 내가 그리 하지 않으니까 내게 속한 사람들은 다 그리 되지 못하는 겁니다. 천국문을 막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나 통해서 들어가야 될 사람들을 다 막고 있다 그말인데, 나 통해서 들어갈 사람들이 숫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생각보다 많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굉장히 많습니다. 때를 따라 양식 나눠 주지 못하고 동무들 때리는 것처럼, 나를 아는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 내 영향을 받는 사람들, 굉장히 많을 수 있습니다. 이런게 다 외식인데 그 뒤에 도 많이 있는데 돌아가셔서 제 기억에 이 외식 설교는 이렇게 살핀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은데, 여기 와서 늘 마음은 있었지만은. 마태복음 23장을 좀 세밀하게 읽어보시고 나는 어떤가? 우리 자신들, 각자 자기를 돌아보면서 어쨌든 외식을 회개해야 됩니다. 기독자의 평생의 생활은 알고보면 외식을 회개하는 생활이 기독자의 평생이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과 속을, 그런데 그렇다고하여 일부러 내 속에 있는걸 다 드러내서 나는 속에 숨길 것이 없이 다 드러내서 그게 그럴 필요가 있을때도 있지만은 드러내가지고 오히려 많이 손해 끼치는 것도 있기 때문에 구별을 잘 해야 됩니다.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속을 잘 만들라 그말입니다. 겉과 속을 같이 만들되, 겉을 꾸미는 것처럼 사람들이 보니까, 사람들이 보고 생각을 하고 판단하니까 사람들의 인정과 불인정과 사람들의 대우와 이런 모든게 보이는 것에 매여 있으니까 그런 것에는 관심을 두고 신경을 쓰고 잘 다듬고 꾸미고 포장을 하고 하는데, 자기 속에 신앙과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전혀 상관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기 때문에 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자리 들고 걸어가라는 말이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이런 것들. 하루 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그런 말씀들이 여기 다 연결이 되어지는 겁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이게 진짜고 알맹이고 전부고 생명인데, 이거는 사람들 눈에 안 보이니까 관심을 아예 안가집니다. 안 가지고, 인간 관계나 겉을 꾸미는 것은 사람들이 보이니까 거기만 총력을 기울이는데, 아무리 그래봐야 하나님과 자기 관계 틀어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말입니다. 천국 문을 막고, 자기도 안 들어가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이것이 ‘외식’. 이런 외식을 다 살펴서 회개하는 그런 우리가 되도록 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회개의 길은 대속의 은혜로 주신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 대속은 한량 없는 은혜입니다. 영원한 멸망에서 건져 주셨고, 영원한 소망을 향한 회개의 한 없는 길을 주셨으니까 얼마나 참 큰 은혜인지, 대속을 힘 입고 끊임없는 회개, 외식을 고쳐 회개하는 남은 때가 되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