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0-주후(마4:1-3)
작성중2014-08-11조회 354추천 26
설교원문
20140810 주후
마태복음 4:1-3
사람의 제일 눈에 보이는 요소는 사람의 몸이고 그 몸안에는 사람의 마음이 있고 마음 안에는 사람이 알기 심히 어려운 영이라는 사람의 주격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물질계 세상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물질만을 알 수 있고 물질을 초월한 영의 존재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알려주지 않는 사람은 아는 것이 불가능하고,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중생된 사람의 주격인 영이 살아 역사하는 사람들조차도 영의 존재를 알기가 어렵고 실감하기는 더욱 더 어렵습니다. 사람은 어쨌든 속에는 영이 있고 그 영이 마음을 통해서 역사하는 마음이 있고 그다음 제일 외부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보기 쉽고 알기 쉽게 역사하는 나타나는 존재 요소는 사람의 몸입니다. 몸이라는 것은 외부로 다 드러난 것이고 그래서 예를 들면, 몸은 전쟁터로 말하면 가장 최전선에 있는 것이 몸이다, 최일선에 있는 것이 몸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고 몸이란 것은 나라는 사람 밖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모든 활동들을 직접 부딪히는 것이 사람의 몸이고 그 몸은 여러 가지 그런 지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몸이 부딪히는 그 환경을 우리가 현실이라 그리 말하고 물론 그 몸이란 것이 움직일때 몸 속에 마음에 작용을 따라서 몸은 움직이지만은 그러나 마음이 아무리 있어도 몸이 없는 마음은 활동을 못하고, 영이 아무리 중요하고 사람의 주격이고 가장 존귀한 것이 사람의 영이지만은 영이 살아 중생되어 있어도 마음없는 영은 활동할 수가 없고 물질계에서, 또 몸 없는 마음도 활동할 수 없고 그래서 사람의 죽음이란 것은 영혼이 돌아간다, 영혼이 떠난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걸 사람의 죽음이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가장 최일선에서 사람의 모든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든 생애고 그 몸이 가장 일선에 있는 몸이 부딪히는 그 모든 환경을 현실이라 그렇게 말하고, 모든 사람의 생애는 여기는 예외가 없습니다. 세상에 살아있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누구라도 예나 지금이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어느 지역에 있는 사람이나 세상에 호흡이 있어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생활은 전부 모든 사람의 전생활은 전부 현실에서 하는 것이고 현실 없는 사람의 생애는 없는 것이고, 사람이 현실을 벗어나는 것은 현실을 떠나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서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이고 그 전에는 그 사람이 집에 있던지 학교에 있던지 직장에 있던지 고요한 곳에 있던지 복잡한 곳에 있던지 좋은 환경에 있던지 험한 환경에 있던지 건강하던지 병이 들었든 어쨌든 그 사람의 현실입니다.
이건희씨가 의식을 잃고 병원에 누워있는데 의식이 없으니까 자의사가 없다 할 수 있겠고 그러면 자의사가 없을지라도 일단 그 사람의 목숨이 붙어있다면 현재 그 사람의 모습은 그의 모습은 그의 현실이고 안타깝게도 그리 된 그 현실을 자의사가 의식을 못하니까 이거는 뭐 참 대단히 답답한 노릇이라 그리 볼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그게 현실입니다. 좋아도 현실, 나빠도 현실, 원해도 현실, 원치 않아도 현실, 아무리 싫어도 내 앞에 닥친 현실을 현실이고, 나는 거기서 살고 있고, 내게 부딪힌 그 환경입니다. 사람이 공부하는 것은 어디서 하는가? 공부는 어디서 합니까? 학교에서 하지요. 공부는 어디서 합니까? 책상 앞에서 하지요. 공부는 어디서 하는 겁니까? 공부는 어디서 합니까? 공부를 뭘로 하지요? 머리로 생각을 하는데 머리로 암만 생각해도 눈이 봐야되고 손을 써야되고 연습해야 되고 몸이 해야 되는데 그 몸은 현실에 있고 공부는 어디서 하는가? 현실에서 하는 겁니다. 또 돈벌이는 어디서 하는가? 돈벌이는 직장 가서 하지요. 또, 시장바닥에 가서 장사하면서 하지요. 사람을 상대하면서 하지요. 그 직장이 현실이고 시장이 현실이고 사람을 상대하는 거기가 현실입니다. 몸이 아파서 휴양을 갑니다. 휴양은 어디가서 하는가? 병원에 입원해서 하지요. 또, 고요한 산에 가서 하지요. 경치 좋고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 가서 하지요. 공기 좋고 물 맑은 곳도 현실입니다. 어쨌든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전생애는 현실 생애고 모든 것을 마련하는 것은 현실에서 마련하고 모든 것을 잃는 것도 현실에서 잃고 모든 변화나 전부는 다 자기 살고 있는 현실에서 모든 것은 되어지는 것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에게 있어서 현실은 바로 전부라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현실을 잃으면 전부 잃는 것이고 현실 얻으면 전부다 얻는 것이라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데 어디서 믿는가? 신앙생활은 어디서 하는가? 예배당에서 하는게 아닙니다. 예배당에서도 하지만은 신앙생활은 어디서 합니까? 기도는 어디서 합니까? 현실에서 합니다. 성경은 어디서 읽습니까? 현실에서 읽습니다. 전도는 어디서 합니까? 현실에서 합니다. 주일은 어디서 지킵니까? 현실에서 지킵니다. 심방하는 것도 현실에서 합니다. 우리들이 하는 신앙생활 전부는 현실입니다. 집회는 어디서 합니까? 거창 내계골에서 하지요. 그런데 내 몸이 내계골을 떠나서 돌아왔습니다. 지금 집회 합니까? 지금은 뭐하지요? 예배를 봅니다. 예배를 어디서 봅니까? 예배당에서 보지요. 예배당에 지금 무엇이 있습니까? 예배를 예배장소인 예배당에서 드리는데, 왜 예배를 예배장소에서 드립니까? 예배 드리는 예배 장소에 무엇이 있습니까? 내 몸이 여기 있으니까 현실에서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모든 생활은 전부 현실에서 한다. 사람이 모든 마련하는 것은 전부 현실에서 마련한다. 사람의 모든 노력은 전부 현실에 다 있다. 현실 떠난 사람의 생애는 단 하나도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이 필연적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현실생활이고, 현실만이 자기것이고 현실만이 자기 실제고 실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이번에도 그 말씀이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시간에 나왔지요.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집회때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듣고 마음에 느껴지고 사무치는 게 있어서 마음에 다짐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어제 보니까 몇일전에 보니까 작년까지 보니까 오늘 이전까지 내 생활 돌아보니까 말씀을 돌아보니 너무도 엉망진창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저런 지은 죄가 너무 많습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아니하겠습니다.’ 하고 울고 불고 이를 갈고 주먹을 불끈 쥐고 통성기도를 하고 다짐을 하면, 주님이 ‘오 그래 장하다.’ 그러신다 그랬습니까? 뭐라 그런다 했습니까? 우리 많이 배웠지요, 뭐라 한다고요? ‘두고보자.’ 어디 가서 두고보자고요? ‘현실에 가서 두고보자.’ 참 어떻게 그렇게 절감이 되도록 그리 표현하시는지. 여러분들은 안 그렇습니까? 현실에 가서 두고보자. 마음에 작정하면 다 이루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정월 초하루가 되고 일년 계획표를 세우고 ‘금년에는’ 하고 다짐을 했는데 그걸 다 이루셨습니까? 작심 삼일을 수도없이, 아마 50년 사신 분들은 작심삼일을 50번은 적어도 했을 것이고, 수도없이 했을 겁니다. ‘현실에 가서 두고보자.’ 현실 없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말입니다.
그 현실이 바로 뭐냐? 현실은 말하자면은 몸이 부딪히는 곳인데, 그러기 때문에 현실은 전쟁하는 것으로 말하면 최전방이고 전선에 최전방이고 최일선입니다. 전방은 어떤 곳을 전방이라 그럽니까? 최전방은 어떤 곳을 최전방이라 그럽니까? 적군하고 가장 마주대고 있는 거기를 최전방, 최일선, 최전선이라 그리 말하지요. 막바로 적군하고 부딪혀 대치하고 있는 거기가 바로 최전방이고 일선이고 최전선인데, 우리들의 모든 현실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최일선이고 전선에 최전방입니다. 여기서 싸우는 우리의 요소가 뭐라고요? 최전방 최일선에서 싸우는 우리의 전투에 용감한 군사가 무엇입니까? 내 몸이고, 그다음에는 마음이고, 내 심신이 바로 최전선에서 신앙전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생활로 평생을 예수 믿는 사람은 계속을 하고, 어떤 사람은 최전방 현실에서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어떤 사람은 돈벌이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어떤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없이 육체의 낙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여러 형태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전부 현실을 살아가는 세상의 사람들의 모습이고 그 현실은 전쟁으로 말하면 최전방이고 최일선이고 최전선이다. 신앙이란 것은 최전방, 최일선에서 싸우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이고 그래서 신앙은 전투고 교회는 전투교회라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왜 이것을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고 하니, 그러면 최전방에서 싸우니까 전방에서만 열심히 싸우면 모든게 다 되지요. 그런데 전방에서 열심히 싸우는데, 그 전방에 싸우는데 적군과 싸울때 육체전으로 말하면 총싸움을 합니다. 총싸움을 하면은 뭐가 필요합니까? 총이 필요하고, 총알이 필요하고 수류탄도 필요하고 대포도 필요하고 대포알도 필요하고, 또 그것만 있으면 됩니까? 먹을 것도 필요하고 약도 필요하고 이런게 있지요. 그런 것을 싸우는 최전방에 재어놓으면 적군이 알고 그것부터 다 깨어버리거든요. 보급창고부터 다 깨어버리니까 그래서 전쟁할 수 있는 모든 보급품들은 가능하면 적군의 공격이 미치지 않는 후방에다가 놓고, 그래서 보급로를 확보해놓고, 후방에서 전방에서 싸우는 용사들이 안심하고 전쟁을 할 수 있도록, 지금 이거 전쟁이야기 하는 거 아닙니다, 싸울 수 있도록 보급로를 확보해놓고 후방에서 보급품을 제때 제때 차근 차근 공급을 해줘야 된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전쟁할때는 전선에서 싸우는 그 야전 사령관의 두뇌하고 후방에서 보급품을 제때제때 공급하는 그 보급 책임자의 두뇌하고 맞아야 되고, 실력이 거의 비슷해야 된다 그럽니다. 아무리 전방에서 전쟁을 잘해도 후방에서 보급품 책임진 그 책임자가 빼먹고 제때 공급 안하면 전방에 용사들 전부 다 죽어버립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최전방과 후방은 긴밀하게 연락이 되고 연결되어 있어야 되고 통로가 바로 되어 있어야 되고, 동시에 후방에 보급품들 또 보급하는 그런 공급자들 이게 든든하게 되어 있어야 전쟁을 바로 합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하려고 하는 사람, 전쟁 준비하는 사람들의, 요즘도 그러겠지요, 제 1차 준비가 뭡니까? 무기도 하지만은 전쟁통에 먹을 식량, 그걸 뭐라 그러지요? 전투 식량을 비축하는게 가장 중요하다 그럽니다. 그것 없으면 전쟁을 못하거든요. 이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보급품을, 전쟁 할 수 있는 준비를 충분히 해놓고 그다음에 해야되지, 그것 없으면 전쟁은 해보나 안해보나 지고 마는 겁니다. 시간만 끌면 지는 거니까.
이스라엘 군들이 로마군하고 싸울때, 맛사다 전투 모두 아시지요? 맛사다 전투라고 로마군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 잡아 죽인 그 죗값으로 로마군에게 점령당해서 다 죽는데, 맛사다라는 그 요새에 올라가서, 정확한 거는 모르겠는데, 약 천명정도, 3년을 거기서 버텼다 그러지요, 3년을. 세계 최강정예군 로마군을 상대로 그 요새에서 3년을 버텼는데 3년 지나고 난다음에 함락이 돼서 올라가보니까 먹을게 없어서 죽고, 마지막에 죽을때는 남은 사람이 다 서로서로 그만 로마군 원수들에게 잡혀 치욕 당하느니 우리가 죽자 그래가지고 차근차근 죽여내려가서 서로서로 다 죽이고 마지막에 겁이나서 숨은 사람 몇사람? 다섯사람인가 숨어있다가 그 사람들에 의해서 다 알려졌다는 유대인들의 맛사다 전투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훈련 군대가면 거기를 보여주고 다 그리한다 그렇게 말하지요. 아무리 용맹해도 보급품 없으면 못 싸우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그래서 든든한 후방에 뒷받침이 되어 있어야 최전방에서 싸움을 제대로 할 수 있고, 바로 할 수 있다 그말입니다.
우리 신앙전투라는 것은 현실 전투고 현실은 어디라 그랬습니까? 현실이 어디라고요? 전쟁으로 말하면 후방입니까, 전방입니까? 현실은 후방입니까, 전방입니까? 최전방입니다, 현실은. 최전방이고 그 최전방에서 싸우는 그 용사가 내 몸이고 그 안에 마음인데, 그런데 이 싸움, 현실에서 싸우는 우리의 신앙전투 이 싸움에 최전방 현실에서 싸우는 이 신앙 전투에 싸움에서 그 싸움을 할 수 있는 말하자면 이거는 보급품이라 하면은 급이 좀 낮은 것인데, 그 싸움을 해야되는 그런 정신력, 사상, 이유, 이런 것을 이제 말하자면은 설명한 것이 이번 집회 말씀에 첫시간 둘째 시간 셋째 시간이고 오늘 오전 말씀입니다.
우리 나라 독립군들이 독립운동을 할때, 우리나라 안에서 수모한 사람도 있고, 저 중국이라던지 외국에 망명다니면서 도망 다니면서 일본 사람 상대로 독립 전쟁한 사람도 많이 있고, 그런데 그들은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아주 뭐 죽음을 무릅쓰고 굶고 추위 더위를 무릅쓰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일본군과 더불어 싸웠습니다. 그런데 싸우는데 왜 일본군하고 싸워야 되는가? 우리가 왜 이렇게 타국에 쫓겨와서 저 일본군하고 왜 싸워야 되는가? 그 싸워야 되는 원인을 모르면, 이유를 모르고 싸움의 전투의 이유와 목적을 모르면 그 전투는 싸울 힘이 나지를 않는 겁니다. 세계가 다 열방들이 다 식민지 전쟁이 벌어져서 미국도 소련도 저 영국도 큰나라 또 거기서 일본도 세계 강대국이 되어서 전부다 식민지를 하나씩 다 잡아먹는데, 일본도 우리나라를 잡아먹고 그 사이에 미국 소련 저거들끼리 강대국들이 야합해서 작은 나라를 집어삼키고, 거기에 아마 미국은 필리핀을 저거 잡아먹는 대가로 일본이 조선 잡아먹는 걸 용납했다 그리 말하지요. 그런 내막을 아니까 독립군들은 미국에 대해서 요구도 하고 큰소리도 치고 ‘너희들이 이래놓지 않았냐. 도와달라.’ 그런 싸움도 할 수 있고, 일본이란 적국 이웃나라가 우리나라를 야만스럽게 침범해서 우리 주권을 빼앗고 우리 나라를 침탈하고 민족을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우리 민족을 찾아야 된다. 우리 시대에 우리가 싸운 피를 흘려서 그래야 나라를 찾아놔야 우리 가족들 우리 후손들이 독립된 나라안에서 살 수 있다. 이런 전쟁에 이유 목적 동기 이런 사상 이런걸 바로 가지고 있어야 전쟁을 해도 제대로 할 수 있고 힘있게 할 수 있고 정말 목숨 바쳐 싸울 수가 있는 것이 된다 그말입니다. 6.25 전쟁을 할때 좀 지식층에 있는 사람 아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죽어나가는 것이고, 아는 사람들은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왜 이 전쟁을 해야되나?' 아마 6.25 전쟁뿐이 아니고 세계 1차, 2차 대전에 좀 아는 사람들은 그 전쟁에 죽어나가는 목숨이 허무하기 짝이 없었을 겁니다. 세계가 둘로 갈라지고, 독일 같은 경우 히틀러 한 사람의 민족주의적인 욕심 때문에 자국 병사들 국민들 수도없이 죽고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일본도 그러했고. 남북 전쟁도 공산주의 민주주의 이념 때문에 사상 때문에 갈라져서 얼마나 많은 사람 죽었는가? 그 사상이 뭔데? 북한에 김일성 그런 사람들은 그 사상을 가지고 소련을 등에 업고 남침해가지고 사백만명 죽고 이런 전투 이런 것들을 생각할때에 참, 허무하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 그 전쟁에 근본 원인을 아는 사람들은 원인을 파고 들어가서 그 전쟁을 일으키게 된 거기다 중점을 두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그리하고. 지금도 보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매일 폭격을 해재끼지요, 지금. 이거는 뭐 어른과 아이싸움 상대가 안될만큼 그런 싸움인데, 우리 나라 국민들 세계 사람들이 거의 대다수가 유대인들을 욕을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그리 안하고는 안되는 그 사람들의 과거가 있고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로써는 세계가 뭐라고 떠들어도 눈도 깜짝 안합니다. 그들은 기어코 자기들 나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리 하고야 마는 것이고, 그런 그 사람들의 그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를 점령을 하는 겁니다. 미국나라 국민들은 거의 대다수가 유대인들 지지합니다. 그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다 세력을 잡고 있기 때문도 있겠지만은 역사를 아니까.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니까 아마 인터넷 이런데 읽어보면 전부 유대인 이스라엘을 욕 다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이거는. 그게 몰라서 그런 것이고 감성적인 것이지, 그러기 때문에 당할 수 있다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철저한 사람들이고 한번 당한 것은 안 잊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그리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고 배경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세계가 욕을 하던지 말던지 수천억을 마구 도와주지 않습니까? 그런게 있으니까.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 하나에 일선에서 싸우는 그 전쟁에 배경지식이고 근거고 동기고 이런 것이 없으면 현장 일선 전투가 제대로 되지를 않는다 그말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현실 전투고 그 현실 싸움에 주체는 내 심신이고, 또 내 심신이 부딪히는 현실 환경에 많은 것들을 부딪혀 싸우는데 그 싸움이 바로 전쟁터로 말하면 최전방 최일선에 싸우는 싸움인데, 그 최전방 일선에 그 싸움에 그 싸움을 싸워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며, 배경이 무엇이며 근거가 무엇이며 그렇게 싸움할 때 나를 도와주는 뒷받침이 무엇이 있으며, 이런 든든한 후방에 또 그 바탕에 깔린 이런 논리적인 그런 무형의 지식과 사상과 정신력 이런 것이 되어있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현실 일선 전투가 제대로 되지를 않는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전에 말씀드린 그런 성경 근거한 교리적인 그런 논리가 우리 머릿속에 신앙생활속에 바탕으로 사상으로 정신 속에 깔려 있어야 논리가 들어있어야 현실을 싸울때 싸울 힘도 나고 어려움 만날 때 왜 이 싸움을 싸워야 되는지를 알게 되고 내가 약할 때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지 알게되는 것이지, 그런 것이 없이 그냥 현실에서 신앙생활하는 그것은 너무도 허무도 신앙생활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에 뒷받침이 없는 신앙, 교리적인 논리의 뒷받침이 없는 신앙은 앞에서 보면은 굉장히 뜨겁고 활활 타오르고 열정적이고 아주 좋은 장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만 어려움이 닥친다던지 논리적으로 설명하면은 대번에 한꺼번에 탁 꺽어버리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텅 비어있는 신앙.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란 것은 반드시 철저한 논리가 근거되고 바탕된 그 위에서 건설된 그 신앙이라야 되고, 현실 전투도 이런 논리적인 뒷받침을 가진 현실전투라야 그 전투가 넘어져도 일어서게 되고 또 각오 결심도 생겨지고 용기도 생겨지고 기도도 하게 되고 도움도 구하고 여러 가지 이런 작용이 있게 되는 것이지, 후방없는 후방의 보급품 뒷받침없는 현실 전방에 전투는, 그래서 후방하고 끊어진 전방은 고립이 되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이 6.25 판도를 바꾼 작전이 뭡니까? 인천상륙작전이지요. 그게 허리를 끊어버린 겁니다. 공산군들이 남쪽에 다 내려와있는데 중간에 인천에다가 허리를 딱 잘라버리니까 위에 본부하고 완전히 끊어져버렸거든요. 고립이 되어버렸거든요. 그러니까 전쟁은 뭐 끝나버린거지요, 그걸로. 그거 하나로 전쟁은 완전히 뒤집어졌고, 끝난거나 마찬가지지요. 후방하고 전방이 끊어져버리면 그 전방은 시간문제지 다 죽고야 마는 겁니다.
신앙전투가 현실전투가 이런 논리적인 뒷받침이 없는 현실 심신의 전투는 그거는 하나마나 시간문제지 전투도 되지아니하고 다 죽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씀들은 후방에서 말하자면은 여러 가지로 뒷받침을 해주는 그런 말씀이라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왜 이런, 사탄의 존재가 무엇이며 첫재 아담의 패전이 어떠하며 또 그 패전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 오신 것은 어떠하고 예수님 전쟁은 어떠하고 이런 것을 왜 알아야 되는가? 그게 전부 현실의 심신 우리 전투에 논리적인 전부 후방에 말하자면은 뒷받침이고 근거가 되는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이런 것이 없으면 다 끊어진 것이니까 참 기초없는 그 위에 집 지은 것처럼 그리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도 설명이 또 필요하겠지요. 중생된 영을 설명한 것도 그러하고 양심을 설명한 것도 그런 취지에서 다 그게 연결이 되어져 나오는 겁니다. 사람이란 것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든지 관계가 있는 것이고 보이는 것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보이는 것만 볼 것만 아니고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보고 모든 것을 대응을 하고 준비하고 싸워야 되지, 보이는 가견적인 것을 전부로 알고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지 못하는 그 사람은 언제나 큰 낭패를 당하고 말고 싸움에서 언제나 지고 마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배경이 확실하게 있는 걸 알아야 됩니다. 이걸 참고로 이런 것들을 기억을 하시고, 그다음 또 분문에서 한번 더 오전 말씀을 복습을 해봅니다.
오전 말씀에서 크게 첫째 말씀 드린 것은, 예수님의 시험을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서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셋으로 나눌 수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첫 번째, 성령에게 이끌리어. 두 번째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세 번째는, 광야로 가셨다. 그런데 본문을 크게 나누면 예수님 시험과 승리인데, 그 과정들을 설명을 드린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받으신 그 시험에 대해서 몇가지 생각해보면 시험에 첫째 성격이 뭐냐? 예수님이 시험, 시험이라 말은 전투인데, 예수님 시험에 성격, 예수님이 하신 그 전투의 성격은 대속입니다, 대속. 대속의 성격 가진.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전투할 필요가 없는 분인데, 그분은 원죄도 없고 원죄가 없으니까 욕심도 없고 전투할 필요가 없는데 우리를 대신하는 대속의 전투를 예수님께서 하고 계신다. 그 대속의 전투를 하게 된 그 원인 이유는 무엇이냐? 그거는 첫째 아담의 패전 때문이다. 첫째 아담이 왜, 무슨 패전했느냐? 누구에게 패했느냐? 첫째 아담이 누구에게 패했습니까? 마귀 사탄에게 패했습니다. 그 사탄이 누구냐? 그 사탄이 하늘에서 천사 중에 높은 존재인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가 하나님이 되려하다가 쫓겨난 것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난 것이 사탄 마귀고 그 마귀 사탄이 제 세력을 넓히려고, 제 부하를 만드려고 존재를 찾아온 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 세계고, 인간세계에 들어와서 아담 하와 있는 에덴 동산에 들어오되 뱀을 입고 들어와가지고, 그러니까 말하자면은 뱀은 만물인데, 마귀가 먼저 뱀을 입고 그 뱀을 통해서 인간인 하와에게 접근했고, 그리고 연약한 하와의 허영과 허욕과 미혹에 약한 그 하와의 심리를 이용해서 하와를 집어삼키고 그다음 여인에게 미혹 잘 받고 여인에게 약한 남자를 여인 하와를 통해서 아담을 집어삼키고, 이렇게 차례 차례 집어삼켜서 첫째 아담에 마귀와의 전투 패전에서 그러니까 아담은 말하자면은 아담은 전쟁하는 줄도 모르게 진 줄도 모르게 져버린 것이고, 삼켜진 줄도 모르게 말하자면은 이거는 뭐 꼼짝없이 일방적으로 아담은 당해버리고 만 겁니다. 마귀가 그만큼 막강하고, 또 실제 이 전투가 아담 하와뿐 아니고 인간으로서는 1차 마귀와의 전투는 무제한적이고 하나님의 공심판 앞에 싸우는 전투라서 이 전투는 인간이 결코 이길수가 없는, 원래부터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전투입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뜻이 있어 그렇지만은. 순서 논리적으로 어쨌든 하나님의 그 예정의 범위 안에서 마귀가 그래서 차근차근 순서적으로 뱀을 입고 뱀을 이용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그다음 뭡니까?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마귀가 뱀을 입은 것도 이유가 있겠지요. 뱀을 입고, 그다음 여인을 먼저 미혹해서 넘어뜨리고 그다음 여인을 통해서 아담을 집어 삼키고, 그러니까 아담은 눈뜨고 당한 겁니다. 꼼짝없이 그냥 이거는 뭐 전투라 할 것 없고 한순간에 대번에 그냥 당해버린 건데, 그 당해버린 이유가 뭡니까? 그 동안에 많이 배운 말씀대로 말하면, 아담 하와가 이거는 뭐 손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6.25 전쟁때 수도 서울이 몇일만에 정복됐던가요? 3일만에 수도 서울이 집어삼켜졌고, 임진왜란때 몇일만에? 불과 몇일만에 한양이 점령이 된 것처럼 손도 써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당해버린 겁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형편 없이 당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기 때문인가요? 준비가 없기 때문이고, 유비무환 아닙니까? 그런데 준비가 없으니까, 무슨 준비가 없었습니까? 왜 준비가 없습니까? 임진왜란때 이율곡 선생같은 그런 사람이 십만명을 양성하자 하고, 이순신 같은 사람은 미리 내다보고 철저하게 준비를 다 했다 그러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다 유명하고 큰 공을 다 세우고 그랬잖습니까. 왜 준비 못했느냐? 신앙에 잠을 자니까. 아담 하와가. 신앙에 잠은 잔 그말은 주님 잊어버리고 말씀을 잊어버리니까 신앙이 잠을 잔 것이고, 그러니까 눈 뜨고 속수무책으로 그냥 그렇게 당해버리고 만 겁니다. 이래가지고 아담이 당했는데 그 아담이 아담 자기는 몰랐겠지요. 우리가 지금, 요즘 자손을 많이 안 낳아서 그렇지만은, 여기 계시는 분들의 자손들이 앞으로 백년이 지나면 내 아이들이 아이를 낳고 내 손자가 아이를 낳고 증손자가 아이 낳고 고손자가 아이 낳고 또 5대손 6대손이 아이 낳으면은 한집안에 사람이 수백명이 될지 수천명이 될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가지고 자꾸 늘어나는 것인데. 그러면 나라는 사람의 내 허리에 있는 내 자손들은 앞으로 주님 재림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은, 수없이 많이 날 수 있습니다. 그들 전부다가 좀 다른 경우지만은, 나한테 달렸을수도 있는데. 전인류 전부가 다 아담의 허리에 있고 아담은 전인류의 시조면서 대표인데, 그 대표되는 아담이 너무도 싱겁게 무책임하게 여인의 말한마디 뱀의 그 미혹에 순신간에 선악과 따먹고 죽었는데 그 한번의 미혹과 그 한번의 패전이 얼마나 큰 패전이였는지 우리는 상상을 할 수 없고 아담 자기도 상상을 못 할 일이겠지요. 그 한번의 패전이. 이런 것도 연결시켜 보면 오늘에 한순간에 판단 착오가, 한순간에 방심이 얼마나 큰 과오를 낳게 될지 우리는 그런 일들이 세상에도 많이 있습니다. 일본 임진왜란때도, 아무래도 외국이 조짐이 이상하니까 그런 말들이 들리니까 나라에서 장님이 바보가 아니잖습니까. 사신을 보냈는데, 당파 싸움이 워낙 심하니까 양당을 다 보냈지요. 요즘으로 말하면 여당 야당처럼. 양당을 보냈습니다. 양당 두 사람 보내가지고 가서 살피고 와라. 그랬는데, 가서 보니까 보일 것 아닙니까? 눈앞에 보면은 군대가 양성되고 있고, 이거는 뭐 도무지 보이는데 불구하고 그들이 돌아와가지고는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입장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 당의 입장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 판단에 이걸 사실대로 알려놨다가는 나라에 난리가 날거니까 나라 안정 때문에, 어떤 이유때문에든지간에 거짓보고를 했다말이지요. 거짓 보고에 넘어가니까 선조라는 사람이 넘어가버리니까 판단착오니까 ‘괜찮다’는 그 판단하나가 나라를 몽땅 집어삼켜서 7년동안 수없는 사람이 죽었고 그렇게 됐잖습니까. 한번의 판단 착오가. 모든게 다 그렇습니다. 아담의 순간의 방심이 전인류를 다 죽였고, 참 얼마나 많은 그런 지옥을 만들었고 그리 될만큼 그리 되었습니다. 이거는 우리가 느끼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쨌든 그래가지고 아담의 패전으로 전인류의 패전이 되어졌고, 전인류의 패전 때문에 이제는 모든 인류는 마귀의 종이 되었고 마귀의 것이 되었고 세상은 마귀에게 빼앗겼고 마귀는 인간의 주인이 되고 이 세상에 주인이 되어졌고, 그대로 두면은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패전하여 빼앗긴 종된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해서 나신 예수라. 그래서 그 예수님은 첫째 아담의, 이것도 교리적으로 알아야 됩니다. 세상은 온갖 종류의 미혹을 가지고 믿는 사람을 미혹을 합니다. 예수라는 그 사람도 사람 아니냐? 오만말 다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그분은, 구주 예수는 첫째 아담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에 부정모혈의 법칙으로 인간 생육의 법칙으로 나지를 않았다. 그분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왔다 그럴때 안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말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말하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없는 가운데 만드신 분인데, 다른 방법으로 못 만드시겠는가? 그분이 자존자인데. 그렇게 갖다대면 한도 없는데. 어쨌든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해서 원죄없이 전혀 다른 종자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아담에게 패전하지 아니한 또 다른 사람으로 와서 아담에게 도전할 때 그 사람이 내가 너한테 패전한 아담의 자손이 아닌 나는 다른 사람으로 왔는데 내가 이들을 대표해서 너하고 싸우겠다 할때, 마귀는 그 싸움을 거부할 명분이 없는 겁니다, 논리적으로. 맞습니까? 세상 자연 계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상 자연 계시에 그렇게 다 만들어놓은 겁니다. 명분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예수님의 그 도전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예수님은 도전자 입장에서 전투를 하는 것이고, 그럴때 마귀가 말하자면은 챔피언 입장에서 도전을 받아주는 입장이니까 장소하고 시간 이런 것은 마귀가 정하면 도전자인 주님은 마귀가 원하는대로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마귀가 산에 데려가면 산으로 따라가야 되고 성전 꼭대기에 따라가면 성전 꼭대기에 따라가야 되고 하는 그 전투방법. 돌들로 떡덩이 되게하라니까 거기 대해서 대응을 하고. 그래서 우리는 깊이 연구하지 않으니까 의문이 안 생겼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떻게 마귀한테 순종을 합니까? 마귀가 산에 데려가니까 따라가고 피동이며 순종 아닌가?’ 성전 꼭대기에, 성경에 그리 나오지요? 5절에 보니까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또 그다음, 8절에 보니까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그러니까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다녔는데 예수님은 거기에 피동적으로 따라다녔다 그말이지요. 예수님이 마귀를 따라다니니까 이것 잘못된 거 아닙니까? 이 해석이 난해설이라. 우리가 이런 걸 안 배우면 우리도 모르겠지요. 의문 조차 안 가지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도전자 입장이니까 승자인 마귀가 원하는 장소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말이지요. 여기 뭐 반론의 여지가 있습니까? 그래가지고 응전을 예수님께서 그래 싸움을 했고.
그래서 이런 이유 때문에 이제 말씀드린 첫째 아담의 패전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를 구출하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마귀하고 더불어 싸우는데 마귀와의 싸움은 죄와의 싸움이고 사망과의 싸움이고 다시 말하면 세상과의 싸움이다. 그런데 그 싸움은 첫째 아담의 패전과 마찬가지로 그 싸움은 하나님의 공심판 앞에 싸우는 싸움이고 무제한적인 싸움이라. 이거는 뭐 제한없는 끝없는 그런 영원한 그런 싸움이라. 이 싸움이 예수님의 싸움이라. 그러기 때문에 그 싸움은 이거는 첫째 아담은 이와 같은 말하자면은 대상이 달랐지만은 마귀와 첫째 아담의 싸움과의 전투의 성격하고 범위하고 예수님과 마귀와의 전투의 그 범위가 같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첫째 아담은 패전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예수님은 패전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님도 논리적으로는 패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번만 실수하면 예수님 패전하는 겁니다. 그런 싸움인데 예수님은 끝까지 패전하지 않고 완전한 승리를 했다. 예수님의 시험에서. 이렇게해가지고 시험을 전투했는데, 이 전투에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에서 완전한 승리를 했는데, 이 마태복음 4장의 승리는 그 자체적으로 완전하고 완벽한 승리지만은 영원한 승리지만은 이 승리가 마귀와의 전투에 전부가 아니고 따라서 승리의 전부는 아니며 최종 승리는 아니라. 예수님의 전투는 세상 떠나는 날까지 계속 되고 따라서 그 모든 전투에서 예수님은 세상 끝나는 날까지 다 승리를 해야 완전한 승리가 되는 것이지 한번만이라도 패전하면 예수님 패전되고 마는 것이고, 그러면 우리 대속은 완전히 다 실패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좀 재미가 없지요. 지루하고. 같은말 자꾸 또 하고 또 하니까. 그런데 이렇게 해가지고 저도 생각해보면 또 어렵고 어려운데, 물어보면 모르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뒷받침 되어있지 않으면 지금은 괜찮을지 모르는데 막상 이런 것을 이런 이치를 논리 근거를 알고 전투하는 전투하고 모르고 전투하는 전투는 전혀 틀립니다. 자루 안에 콩이 들어있는데 보니까, 콩이 나오는데 보니까 안에 푹 깊이 찔러보니까 겉은 콩인데 속에는 겨 딩게만 잔뜩 들어있다 말이지요. 그거는 그럼 진짜배기 아니지 않습니까. 푹 꺼지고 마는 것처럼.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그 기쁘게 여긴다는 그 말씀이 바로 이런 논리적인 근거 위에서 기뻐하는 그 기쁨이 되어야 비로소 온전한 기쁨이 되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완전한 승리하신 그 승리의 결과는 보면은 다섯가지로 정리해보면, 첫째 완전하고 영원한 승리였고, 두 번째는 마귀 사탄에게서 우리를 구출하신 것이고 세 번째는 마귀 사탄의 왕노릇을 제한 시켜놓은 것이고, 네 번째는 마귀 죄 사망을 종으로 삼은 것이고 다섯 번째는 하나님의 공심판을 완전히 면제해주신 것이 예수님의 전투로 승리로 주어진 결과다. 그렇게 말씀할 수 있고, 이 예수님의 전투 승리를 근거바탕으로해서 그다음 우리의 전투가 있는데, 우리의 전투의 자격이 어디서 생겨졌느냐. 믿는 사람의 신앙 전투는 어떻게 해서 생겨지게 되었느냐? (지금 실내가 온도가 괜찮습니까, 앞에? 괜찮습니까? 더우면, 이게 켜도 더운 겁니까? 그래도 더운 겁니까. 더우면 온도를 조금 낮춰도 될 것 같은데. 제가 더워서 그런데. 다른 분들, 저는 옷을 이렇게 입고 있으니까 당연히 더운건데 혹시나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더우면 좀 조절하시고. 백목사님 생전에 에어콘도 없이 이보다 더 더운데 앉아도 은혜가 됐는데, 지금은 그게 안되니까) 우리의 신앙전투 기독자들의 모든 생활은 전투 생활이고, 그 전투할 수 있는 자격이 어디서 나왔느냐? 예수님의 대속의 전투의 승리가 우리 신앙 전투에 근거고 자격이다 그말이지요, 승리가. 그래서 예수 죽음 내 죽음 그 승리 내 승리 그 부활 내 부활 그리 되는 겁니다. 그다음 두 번째, 우리 신앙 전투의 범위는 어떠냐? 범위는 공심판이 면제된 제한적인 전투입니다. 예수님의 전투의 범위는 하나님의 공심판 앞에서 싸우는 무제한적인 전투고 우리 신앙의 전투는 공심판을 통과한 면제된 제한적인 전투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 전투의 성격은 승리하신 주님이 우리를 연습시켜서 기르시기 위한 하나의 연습 훈련이고 우리와 싸우는 마귀는 전투에 이용되는 주님의 심부름꾼일 뿐이고 따라서 우리 모든 시험 전투는 패할 길까지 다 내어주신 이길 수 밖에 없는 전투입니다. 우리가 지는 것은 내 전부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는 것이고 믿지 않기 때문에 지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은 전투 신앙이고 교회는 전투 교회고 기독자의 평생의 생활은 전부 전투 생활이고, 전투의 승리로 우리는 자라가고 우리 신앙도 자라가는 겁니다. 이걸 간단하게 시험 배경과 내용을 해보면, 그 자세한 시간 없겠고, 우리 시험 전투를 안내하는 분은 누구냐? 지금 이것도 기억하셔야 됩니다. 현실에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몸이 아프다든지 가정에 우환이 생겼다든지 갑자기 사고가 났다든지 돈을 떼었다든지 신앙생활하다가 직장에서 어려움을 만났다든지 여러 형태로 어려움을 만난 그게 전부 시험인데, 믿는 사람의 신앙 시험, 그런 시험을 만날 때 그 시험을 있게 만든 안내자, 시험의 주관자, 시험 문제를 출제하는 그 주관자 안내자가 누구냐, 성령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 받으러 가신 것처럼, 우리들의 모든 시험에 출제자 주관자 안내자도 시험인데 그 시험관은 바로 우리편입니다, 우리편. 시험관은 성령님이니까 우리 편입니다. 안내자는 성령, 우리가 시험 치르는 시험 장소는 어디냐? 시험 장소는 광야인데, 광야는 현실이고, 따라서 우리에게 오는 시험 현실에 모든 현실의 모습은 광야라는 곳이고, 광야라는 곳은 외롭고 쓸쓸한 곳이 광야입니다. 시험 치는 장소는 현실인데 그 현실은 광야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현실. 시험 목적은 뭐냐? 시험 목적은 전투를 통해서 우리를 우리 실력을 성장시키는게 시험의 목적입니다. 그다음 네 번째, 시험 문제는 뭐냐? 시험 문제는 하나님의 계약의 말씀을 준수하는 겁니다. 계약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말씀에 순종하느냐 안 순종하느냐 그게 시험 문제고, 다섯 번째, 그 시험 치는 우리들 배경, 우리 뒤에서 돕는 배경자는 역시 성령님이고, 또 시험의 승리의 방법은 기도와 말씀이고 그 시험 전체의 배경은, 최후 배후는 섭리 고개턱 너머 숨어 엿보시는 마중의 주님이 우리 현실 전투의 최후의 배후라 그말이고, 따라서 믿는 사람의 신앙생활해나가다가 만나지는 온갖 종류의 어떤 형태 시험이든지 모든 어려움 모든 시험은 전부 최후의 섭리 고개턱 너머 숨어 엿보시는 마중의 주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성도를 실력을 길러서 원하시는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 펼쳐놓은, 씨름판 위에 펼쳐놓고 일꾼인 마귀를 보내가지고 우리를 연습시키고 연단시키는 그 하나의 과정이 우리가 만나는 현실의 모든 시험이다, 어려움이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바로 알고나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어려움에 결코 낙심하고 낙담할 수 없는 것이고, 질 수가 없는 것인데, 문제는 이 시험 전부다가 우리 전투인데 그 전투가 전부 자유성을 초월한 전투가 아닌 자유성 범위 안에서 우리 자유 의지에 의한 전투기 때문에 이 전투할 수 있는 근거와 배경,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 만들어놓고 전부다 준비해놓고 싸움을 붙이는데 씨름을 붙이고 있는데 문제는 그 씨름에서 내가 그것을 준비하지 않고 내가 힘쓰지 않고 내가 믿지 않고 내 자유의지가 거기서 넘어져버리면 그 전투에 하나님께서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일차적으로 완전히 패전해서 죽어있는 우리를 살려놓고 다시 재전투할 수 있는 거기까지는, 모든 완벽하게 이길 수 있도록까지 모든 것 다 완전히 구비시켜놓고 배후에서 응원하고 협조하고 다 기다리고 계시지만은 그러나 직접 싸우는 그 싸움의 주체자는 내 심신이기 때문에 내 심신이 싸우는 이 신앙 전투가 자유성 범위 안에서, 자유성을 초월한 전투가 아니고 자유 의지에 의한 싸움이기 때문에 나와 마귀와의 싸움, 2차 전투 현실 전투의 그 싸움에 하나님은 전혀 개입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조성해놓은 그 위에서 조성해놓은 그 모든 것을 내가 힘 입어서 내가 도움 받아가지고 내가 스스로 싸워야 되지, 그래서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응원하고 협조하고 돕고 하지만은 싸우는 그 싸움에 직접 당신이 나서가지고 내 심신을 대신해서 그래가지고 싸울 수는 없는 것이 우리의 싸움이고, 이게 현실 심신의 모든 전투고 이게 전부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그말입니다.
이게 뭐 설교하는 저도 벙벙하고 듣는 분도 벙벙한데 어쨌든 집회 첫날 말씀을 자꾸 좀 재독하시고 생각을 자꾸 해야 됩니다. 이런 것을 알아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바로 할 수가 있는데, 이런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 전체를 두고 단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신앙의 전부 밑바탕이 되고 기초가 되고 뼈대가 되는 것이고 이 뼈대가 튼튼해야만이 신앙생활은 정상적인 신앙으로 건설구원,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을 지을수가 있는 것이고 이런 것이 없는 그냥 신앙생활은 안타깝게도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라서 마지막에 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뭐냐? 신앙생활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이 무엇이 구원입니까? 한시간동안 내 듣고 있는 이런 지루한 말씀을 듣는 것이 구원을 이루기 위한 것인데, 구원이 무엇입니까? 같이 한번 해보실까요. ‘자기변화’. 나라는 사람이 바꾸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수천번도 더 말씀드렸지요. 나라는 사람이 바꾸어지는게 변화입니다. 구원입니다. 어떻게 바꾸어집니까?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내가 변화가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변화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 현실의 전투입니다. 옛사람으로 찌들고 세상으로 찌들고 자기 사리사욕 주관으로 찌들어있는 우리를 그런 심신에 찌들어있는 악령 악성 악습 세상 자기주관 중심 이런걸 다 빼내고 하나님을 닮은 거룩하고 깨끗한 귀하고 아름다운 그런 사람으로 흠과 점이 없는 사람으로 나를 조금씩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변화되는 것이 구원이고 여기 필요한 모든 말씀들이고 이것을 위한 첫째 아담의 패전이고, 도성인신이고 주님의 전투고 그 배경 전부다가 우리를 이런 판을 만들어놓고 그 판에서 승리하므로 하나씩 하나씩 내 심신이 변화되도록 하기 위한 이것이 최일선의 전투를 위해서 그 배경 전부를 다 만들어놨는데, 아무리 해도 나라는 사람이 변화가 되지 않으면 이거는 헛일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구원이고, 구원은 자기 변화 자기 성화가 구원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어제보다 오늘 달라야 되고 오늘보다 내일 달라야 되고 하나님의 형상 닮은 사람으로 바꾸어져 나가야 됩니다. 생각이 바뀌고 인식이 바뀌고 중심이 바꾸어지고 언행심사가 바꾸어지고 사상과 정신이 바꾸어지고 이런 사람으로 자꾸 바꾸어져 나가야 되는데, 이번 집회 갔다와서 얼마만큼 무엇을 느끼셨는지. 뭘 고쳤는지, 무엇이 변화가 됐는지 이걸 생각도 못하고 기준도 모르고 방향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면 무슨 신앙생활하며, 그렇게 신앙생활 해가지고 평생 신앙생활하면 박수를 천번 만번치고 예배 주일마다 박수치고 방언을 매일 같이 하고, 이번에도 보니까 우리 공회 집회온 분 중에서 아마 딴데서 오신 분이 계셨는가, 막 방언을 하고 막 찬송을 하고 그랬다고요? 방언을 죽는 날까지 방언을 하면 그 방언한 것이 어떻다 말입니까? 남는 결과가 뭡니까? 찬송을 아무리 하면 남는게 뭡니까? 자기라는 사람이 고쳐지지 않으면 구원은 아닙니다. 평생 믿어도 구원 아닙니다. 성경에 말씀하신 구원은 나를 바꾸어 변화시키는 겁니다. 이걸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것이고, 이런 모든 과정들을 다 만들어 두신 겁니다. 이게 현실 전투, 그러기 때문에 내 변화는 심신의 변화고, 심신의 변화는 그 요소가 수억 수십억 수백억도 넘고, 세포 조직 마음의 요소가, 그 모든 것들이 변화되는 현실 현실마다 전부 거기서 하나하나마다 전부 내가 바꾸어지고 변화되는, 그래서 한꺼번에 안되기 때문에 평생의 세월에 수많은 시간 수많은 세월을 주셔서 그때마다 그것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섭리역사다 그말입니다. 이걸 깨달아 알아야 신앙생활 할 것 아니겠습니까. 알아도 힘드는데, 알고 다짐을 하고 후회하고 탄식하고 기도하고 해도 안되는데 이걸 모르면 무슨 수로 신앙생활하며 구원을 이루어 가겠나 그말이고, 인생이 신앙생활 없고 구원 이루지 않는 신앙생활은 헛일, 신앙생활 없는 인생살이는 참 아무것도 아닌, 알맹이 없는 껍데기 뿐인 것, 마지막에 빈 손 들고 다 주님 앞에 가는 영원히 부끄러운 사람 되고 마는 것, 이런 것이 인생살이고 신앙 생활인데 이런 걸 좀 내막을 알고, 알고 논리를 바탕에 깔고 그다음 현실에서 각자 현실에 좀 힘을 써보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야 되겠다 그말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안타까워서 드렸지만은 다 지엽적인 가지적인 것이고 결국 성경 바탕은 성경 해석과 교리적인 근거, 그 말씀을 기억하시고 현실 심신의 일선 전투가 궁극의 우리, 거기서 승리하는게 최종의 목적이고 그 승리가 바로 우리 변화가 되는 방법이고, 말씀으로 되어지는 것, 기억을 하고 힘을 쓰십시다.
20140810 주후
마태복음 4:1-3
사람의 제일 눈에 보이는 요소는 사람의 몸이고 그 몸안에는 사람의 마음이 있고 마음 안에는 사람이 알기 심히 어려운 영이라는 사람의 주격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물질계 세상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물질만을 알 수 있고 물질을 초월한 영의 존재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알려주지 않는 사람은 아는 것이 불가능하고,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중생된 사람의 주격인 영이 살아 역사하는 사람들조차도 영의 존재를 알기가 어렵고 실감하기는 더욱 더 어렵습니다. 사람은 어쨌든 속에는 영이 있고 그 영이 마음을 통해서 역사하는 마음이 있고 그다음 제일 외부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보기 쉽고 알기 쉽게 역사하는 나타나는 존재 요소는 사람의 몸입니다. 몸이라는 것은 외부로 다 드러난 것이고 그래서 예를 들면, 몸은 전쟁터로 말하면 가장 최전선에 있는 것이 몸이다, 최일선에 있는 것이 몸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고 몸이란 것은 나라는 사람 밖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모든 활동들을 직접 부딪히는 것이 사람의 몸이고 그 몸은 여러 가지 그런 지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몸이 부딪히는 그 환경을 우리가 현실이라 그리 말하고 물론 그 몸이란 것이 움직일때 몸 속에 마음에 작용을 따라서 몸은 움직이지만은 그러나 마음이 아무리 있어도 몸이 없는 마음은 활동을 못하고, 영이 아무리 중요하고 사람의 주격이고 가장 존귀한 것이 사람의 영이지만은 영이 살아 중생되어 있어도 마음없는 영은 활동할 수가 없고 물질계에서, 또 몸 없는 마음도 활동할 수 없고 그래서 사람의 죽음이란 것은 영혼이 돌아간다, 영혼이 떠난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걸 사람의 죽음이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가장 최일선에서 사람의 모든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든 생애고 그 몸이 가장 일선에 있는 몸이 부딪히는 그 모든 환경을 현실이라 그렇게 말하고, 모든 사람의 생애는 여기는 예외가 없습니다. 세상에 살아있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누구라도 예나 지금이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어느 지역에 있는 사람이나 세상에 호흡이 있어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생활은 전부 모든 사람의 전생활은 전부 현실에서 하는 것이고 현실 없는 사람의 생애는 없는 것이고, 사람이 현실을 벗어나는 것은 현실을 떠나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서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이고 그 전에는 그 사람이 집에 있던지 학교에 있던지 직장에 있던지 고요한 곳에 있던지 복잡한 곳에 있던지 좋은 환경에 있던지 험한 환경에 있던지 건강하던지 병이 들었든 어쨌든 그 사람의 현실입니다.
이건희씨가 의식을 잃고 병원에 누워있는데 의식이 없으니까 자의사가 없다 할 수 있겠고 그러면 자의사가 없을지라도 일단 그 사람의 목숨이 붙어있다면 현재 그 사람의 모습은 그의 모습은 그의 현실이고 안타깝게도 그리 된 그 현실을 자의사가 의식을 못하니까 이거는 뭐 참 대단히 답답한 노릇이라 그리 볼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그게 현실입니다. 좋아도 현실, 나빠도 현실, 원해도 현실, 원치 않아도 현실, 아무리 싫어도 내 앞에 닥친 현실을 현실이고, 나는 거기서 살고 있고, 내게 부딪힌 그 환경입니다. 사람이 공부하는 것은 어디서 하는가? 공부는 어디서 합니까? 학교에서 하지요. 공부는 어디서 합니까? 책상 앞에서 하지요. 공부는 어디서 하는 겁니까? 공부는 어디서 합니까? 공부를 뭘로 하지요? 머리로 생각을 하는데 머리로 암만 생각해도 눈이 봐야되고 손을 써야되고 연습해야 되고 몸이 해야 되는데 그 몸은 현실에 있고 공부는 어디서 하는가? 현실에서 하는 겁니다. 또 돈벌이는 어디서 하는가? 돈벌이는 직장 가서 하지요. 또, 시장바닥에 가서 장사하면서 하지요. 사람을 상대하면서 하지요. 그 직장이 현실이고 시장이 현실이고 사람을 상대하는 거기가 현실입니다. 몸이 아파서 휴양을 갑니다. 휴양은 어디가서 하는가? 병원에 입원해서 하지요. 또, 고요한 산에 가서 하지요. 경치 좋고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 가서 하지요. 공기 좋고 물 맑은 곳도 현실입니다. 어쨌든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전생애는 현실 생애고 모든 것을 마련하는 것은 현실에서 마련하고 모든 것을 잃는 것도 현실에서 잃고 모든 변화나 전부는 다 자기 살고 있는 현실에서 모든 것은 되어지는 것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에게 있어서 현실은 바로 전부라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현실을 잃으면 전부 잃는 것이고 현실 얻으면 전부다 얻는 것이라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데 어디서 믿는가? 신앙생활은 어디서 하는가? 예배당에서 하는게 아닙니다. 예배당에서도 하지만은 신앙생활은 어디서 합니까? 기도는 어디서 합니까? 현실에서 합니다. 성경은 어디서 읽습니까? 현실에서 읽습니다. 전도는 어디서 합니까? 현실에서 합니다. 주일은 어디서 지킵니까? 현실에서 지킵니다. 심방하는 것도 현실에서 합니다. 우리들이 하는 신앙생활 전부는 현실입니다. 집회는 어디서 합니까? 거창 내계골에서 하지요. 그런데 내 몸이 내계골을 떠나서 돌아왔습니다. 지금 집회 합니까? 지금은 뭐하지요? 예배를 봅니다. 예배를 어디서 봅니까? 예배당에서 보지요. 예배당에 지금 무엇이 있습니까? 예배를 예배장소인 예배당에서 드리는데, 왜 예배를 예배장소에서 드립니까? 예배 드리는 예배 장소에 무엇이 있습니까? 내 몸이 여기 있으니까 현실에서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모든 생활은 전부 현실에서 한다. 사람이 모든 마련하는 것은 전부 현실에서 마련한다. 사람의 모든 노력은 전부 현실에 다 있다. 현실 떠난 사람의 생애는 단 하나도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이 필연적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도 현실생활이고, 현실만이 자기것이고 현실만이 자기 실제고 실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이번에도 그 말씀이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시간에 나왔지요.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집회때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듣고 마음에 느껴지고 사무치는 게 있어서 마음에 다짐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어제 보니까 몇일전에 보니까 작년까지 보니까 오늘 이전까지 내 생활 돌아보니까 말씀을 돌아보니 너무도 엉망진창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저런 지은 죄가 너무 많습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아니하겠습니다.’ 하고 울고 불고 이를 갈고 주먹을 불끈 쥐고 통성기도를 하고 다짐을 하면, 주님이 ‘오 그래 장하다.’ 그러신다 그랬습니까? 뭐라 그런다 했습니까? 우리 많이 배웠지요, 뭐라 한다고요? ‘두고보자.’ 어디 가서 두고보자고요? ‘현실에 가서 두고보자.’ 참 어떻게 그렇게 절감이 되도록 그리 표현하시는지. 여러분들은 안 그렇습니까? 현실에 가서 두고보자. 마음에 작정하면 다 이루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정월 초하루가 되고 일년 계획표를 세우고 ‘금년에는’ 하고 다짐을 했는데 그걸 다 이루셨습니까? 작심 삼일을 수도없이, 아마 50년 사신 분들은 작심삼일을 50번은 적어도 했을 것이고, 수도없이 했을 겁니다. ‘현실에 가서 두고보자.’ 현실 없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말입니다.
그 현실이 바로 뭐냐? 현실은 말하자면은 몸이 부딪히는 곳인데, 그러기 때문에 현실은 전쟁하는 것으로 말하면 최전방이고 전선에 최전방이고 최일선입니다. 전방은 어떤 곳을 전방이라 그럽니까? 최전방은 어떤 곳을 최전방이라 그럽니까? 적군하고 가장 마주대고 있는 거기를 최전방, 최일선, 최전선이라 그리 말하지요. 막바로 적군하고 부딪혀 대치하고 있는 거기가 바로 최전방이고 일선이고 최전선인데, 우리들의 모든 현실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최일선이고 전선에 최전방입니다. 여기서 싸우는 우리의 요소가 뭐라고요? 최전방 최일선에서 싸우는 우리의 전투에 용감한 군사가 무엇입니까? 내 몸이고, 그다음에는 마음이고, 내 심신이 바로 최전선에서 신앙전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생활로 평생을 예수 믿는 사람은 계속을 하고, 어떤 사람은 최전방 현실에서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어떤 사람은 돈벌이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어떤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없이 육체의 낙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여러 형태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전부 현실을 살아가는 세상의 사람들의 모습이고 그 현실은 전쟁으로 말하면 최전방이고 최일선이고 최전선이다. 신앙이란 것은 최전방, 최일선에서 싸우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이고 그래서 신앙은 전투고 교회는 전투교회라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왜 이것을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고 하니, 그러면 최전방에서 싸우니까 전방에서만 열심히 싸우면 모든게 다 되지요. 그런데 전방에서 열심히 싸우는데, 그 전방에 싸우는데 적군과 싸울때 육체전으로 말하면 총싸움을 합니다. 총싸움을 하면은 뭐가 필요합니까? 총이 필요하고, 총알이 필요하고 수류탄도 필요하고 대포도 필요하고 대포알도 필요하고, 또 그것만 있으면 됩니까? 먹을 것도 필요하고 약도 필요하고 이런게 있지요. 그런 것을 싸우는 최전방에 재어놓으면 적군이 알고 그것부터 다 깨어버리거든요. 보급창고부터 다 깨어버리니까 그래서 전쟁할 수 있는 모든 보급품들은 가능하면 적군의 공격이 미치지 않는 후방에다가 놓고, 그래서 보급로를 확보해놓고, 후방에서 전방에서 싸우는 용사들이 안심하고 전쟁을 할 수 있도록, 지금 이거 전쟁이야기 하는 거 아닙니다, 싸울 수 있도록 보급로를 확보해놓고 후방에서 보급품을 제때 제때 차근 차근 공급을 해줘야 된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전쟁할때는 전선에서 싸우는 그 야전 사령관의 두뇌하고 후방에서 보급품을 제때제때 공급하는 그 보급 책임자의 두뇌하고 맞아야 되고, 실력이 거의 비슷해야 된다 그럽니다. 아무리 전방에서 전쟁을 잘해도 후방에서 보급품 책임진 그 책임자가 빼먹고 제때 공급 안하면 전방에 용사들 전부 다 죽어버립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최전방과 후방은 긴밀하게 연락이 되고 연결되어 있어야 되고 통로가 바로 되어 있어야 되고, 동시에 후방에 보급품들 또 보급하는 그런 공급자들 이게 든든하게 되어 있어야 전쟁을 바로 합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하려고 하는 사람, 전쟁 준비하는 사람들의, 요즘도 그러겠지요, 제 1차 준비가 뭡니까? 무기도 하지만은 전쟁통에 먹을 식량, 그걸 뭐라 그러지요? 전투 식량을 비축하는게 가장 중요하다 그럽니다. 그것 없으면 전쟁을 못하거든요. 이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보급품을, 전쟁 할 수 있는 준비를 충분히 해놓고 그다음에 해야되지, 그것 없으면 전쟁은 해보나 안해보나 지고 마는 겁니다. 시간만 끌면 지는 거니까.
이스라엘 군들이 로마군하고 싸울때, 맛사다 전투 모두 아시지요? 맛사다 전투라고 로마군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 잡아 죽인 그 죗값으로 로마군에게 점령당해서 다 죽는데, 맛사다라는 그 요새에 올라가서, 정확한 거는 모르겠는데, 약 천명정도, 3년을 거기서 버텼다 그러지요, 3년을. 세계 최강정예군 로마군을 상대로 그 요새에서 3년을 버텼는데 3년 지나고 난다음에 함락이 돼서 올라가보니까 먹을게 없어서 죽고, 마지막에 죽을때는 남은 사람이 다 서로서로 그만 로마군 원수들에게 잡혀 치욕 당하느니 우리가 죽자 그래가지고 차근차근 죽여내려가서 서로서로 다 죽이고 마지막에 겁이나서 숨은 사람 몇사람? 다섯사람인가 숨어있다가 그 사람들에 의해서 다 알려졌다는 유대인들의 맛사다 전투가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훈련 군대가면 거기를 보여주고 다 그리한다 그렇게 말하지요. 아무리 용맹해도 보급품 없으면 못 싸우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그래서 든든한 후방에 뒷받침이 되어 있어야 최전방에서 싸움을 제대로 할 수 있고, 바로 할 수 있다 그말입니다.
우리 신앙전투라는 것은 현실 전투고 현실은 어디라 그랬습니까? 현실이 어디라고요? 전쟁으로 말하면 후방입니까, 전방입니까? 현실은 후방입니까, 전방입니까? 최전방입니다, 현실은. 최전방이고 그 최전방에서 싸우는 그 용사가 내 몸이고 그 안에 마음인데, 그런데 이 싸움, 현실에서 싸우는 우리의 신앙전투 이 싸움에 최전방 현실에서 싸우는 이 신앙 전투에 싸움에서 그 싸움을 할 수 있는 말하자면 이거는 보급품이라 하면은 급이 좀 낮은 것인데, 그 싸움을 해야되는 그런 정신력, 사상, 이유, 이런 것을 이제 말하자면은 설명한 것이 이번 집회 말씀에 첫시간 둘째 시간 셋째 시간이고 오늘 오전 말씀입니다.
우리 나라 독립군들이 독립운동을 할때, 우리나라 안에서 수모한 사람도 있고, 저 중국이라던지 외국에 망명다니면서 도망 다니면서 일본 사람 상대로 독립 전쟁한 사람도 많이 있고, 그런데 그들은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아주 뭐 죽음을 무릅쓰고 굶고 추위 더위를 무릅쓰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일본군과 더불어 싸웠습니다. 그런데 싸우는데 왜 일본군하고 싸워야 되는가? 우리가 왜 이렇게 타국에 쫓겨와서 저 일본군하고 왜 싸워야 되는가? 그 싸워야 되는 원인을 모르면, 이유를 모르고 싸움의 전투의 이유와 목적을 모르면 그 전투는 싸울 힘이 나지를 않는 겁니다. 세계가 다 열방들이 다 식민지 전쟁이 벌어져서 미국도 소련도 저 영국도 큰나라 또 거기서 일본도 세계 강대국이 되어서 전부다 식민지를 하나씩 다 잡아먹는데, 일본도 우리나라를 잡아먹고 그 사이에 미국 소련 저거들끼리 강대국들이 야합해서 작은 나라를 집어삼키고, 거기에 아마 미국은 필리핀을 저거 잡아먹는 대가로 일본이 조선 잡아먹는 걸 용납했다 그리 말하지요. 그런 내막을 아니까 독립군들은 미국에 대해서 요구도 하고 큰소리도 치고 ‘너희들이 이래놓지 않았냐. 도와달라.’ 그런 싸움도 할 수 있고, 일본이란 적국 이웃나라가 우리나라를 야만스럽게 침범해서 우리 주권을 빼앗고 우리 나라를 침탈하고 민족을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우리 민족을 찾아야 된다. 우리 시대에 우리가 싸운 피를 흘려서 그래야 나라를 찾아놔야 우리 가족들 우리 후손들이 독립된 나라안에서 살 수 있다. 이런 전쟁에 이유 목적 동기 이런 사상 이런걸 바로 가지고 있어야 전쟁을 해도 제대로 할 수 있고 힘있게 할 수 있고 정말 목숨 바쳐 싸울 수가 있는 것이 된다 그말입니다. 6.25 전쟁을 할때 좀 지식층에 있는 사람 아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죽어나가는 것이고, 아는 사람들은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왜 이 전쟁을 해야되나?' 아마 6.25 전쟁뿐이 아니고 세계 1차, 2차 대전에 좀 아는 사람들은 그 전쟁에 죽어나가는 목숨이 허무하기 짝이 없었을 겁니다. 세계가 둘로 갈라지고, 독일 같은 경우 히틀러 한 사람의 민족주의적인 욕심 때문에 자국 병사들 국민들 수도없이 죽고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일본도 그러했고. 남북 전쟁도 공산주의 민주주의 이념 때문에 사상 때문에 갈라져서 얼마나 많은 사람 죽었는가? 그 사상이 뭔데? 북한에 김일성 그런 사람들은 그 사상을 가지고 소련을 등에 업고 남침해가지고 사백만명 죽고 이런 전투 이런 것들을 생각할때에 참, 허무하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 그 전쟁에 근본 원인을 아는 사람들은 원인을 파고 들어가서 그 전쟁을 일으키게 된 거기다 중점을 두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그리하고. 지금도 보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매일 폭격을 해재끼지요, 지금. 이거는 뭐 어른과 아이싸움 상대가 안될만큼 그런 싸움인데, 우리 나라 국민들 세계 사람들이 거의 대다수가 유대인들을 욕을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그리 안하고는 안되는 그 사람들의 과거가 있고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로써는 세계가 뭐라고 떠들어도 눈도 깜짝 안합니다. 그들은 기어코 자기들 나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리 하고야 마는 것이고, 그런 그 사람들의 그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를 점령을 하는 겁니다. 미국나라 국민들은 거의 대다수가 유대인들 지지합니다. 그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다 세력을 잡고 있기 때문도 있겠지만은 역사를 아니까.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니까 아마 인터넷 이런데 읽어보면 전부 유대인 이스라엘을 욕 다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이거는. 그게 몰라서 그런 것이고 감성적인 것이지, 그러기 때문에 당할 수 있다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철저한 사람들이고 한번 당한 것은 안 잊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 입장에서는 그리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고 배경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세계가 욕을 하던지 말던지 수천억을 마구 도와주지 않습니까? 그런게 있으니까.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 하나에 일선에서 싸우는 그 전쟁에 배경지식이고 근거고 동기고 이런 것이 없으면 현장 일선 전투가 제대로 되지를 않는다 그말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현실 전투고 그 현실 싸움에 주체는 내 심신이고, 또 내 심신이 부딪히는 현실 환경에 많은 것들을 부딪혀 싸우는데 그 싸움이 바로 전쟁터로 말하면 최전방 최일선에 싸우는 싸움인데, 그 최전방 일선에 그 싸움에 그 싸움을 싸워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며, 배경이 무엇이며 근거가 무엇이며 그렇게 싸움할 때 나를 도와주는 뒷받침이 무엇이 있으며, 이런 든든한 후방에 또 그 바탕에 깔린 이런 논리적인 그런 무형의 지식과 사상과 정신력 이런 것이 되어있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현실 일선 전투가 제대로 되지를 않는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전에 말씀드린 그런 성경 근거한 교리적인 그런 논리가 우리 머릿속에 신앙생활속에 바탕으로 사상으로 정신 속에 깔려 있어야 논리가 들어있어야 현실을 싸울때 싸울 힘도 나고 어려움 만날 때 왜 이 싸움을 싸워야 되는지를 알게 되고 내가 약할 때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지 알게되는 것이지, 그런 것이 없이 그냥 현실에서 신앙생활하는 그것은 너무도 허무도 신앙생활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에 뒷받침이 없는 신앙, 교리적인 논리의 뒷받침이 없는 신앙은 앞에서 보면은 굉장히 뜨겁고 활활 타오르고 열정적이고 아주 좋은 장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만 어려움이 닥친다던지 논리적으로 설명하면은 대번에 한꺼번에 탁 꺽어버리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텅 비어있는 신앙.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란 것은 반드시 철저한 논리가 근거되고 바탕된 그 위에서 건설된 그 신앙이라야 되고, 현실 전투도 이런 논리적인 뒷받침을 가진 현실전투라야 그 전투가 넘어져도 일어서게 되고 또 각오 결심도 생겨지고 용기도 생겨지고 기도도 하게 되고 도움도 구하고 여러 가지 이런 작용이 있게 되는 것이지, 후방없는 후방의 보급품 뒷받침없는 현실 전방에 전투는, 그래서 후방하고 끊어진 전방은 고립이 되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이 6.25 판도를 바꾼 작전이 뭡니까? 인천상륙작전이지요. 그게 허리를 끊어버린 겁니다. 공산군들이 남쪽에 다 내려와있는데 중간에 인천에다가 허리를 딱 잘라버리니까 위에 본부하고 완전히 끊어져버렸거든요. 고립이 되어버렸거든요. 그러니까 전쟁은 뭐 끝나버린거지요, 그걸로. 그거 하나로 전쟁은 완전히 뒤집어졌고, 끝난거나 마찬가지지요. 후방하고 전방이 끊어져버리면 그 전방은 시간문제지 다 죽고야 마는 겁니다.
신앙전투가 현실전투가 이런 논리적인 뒷받침이 없는 현실 심신의 전투는 그거는 하나마나 시간문제지 전투도 되지아니하고 다 죽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씀들은 후방에서 말하자면은 여러 가지로 뒷받침을 해주는 그런 말씀이라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왜 이런, 사탄의 존재가 무엇이며 첫재 아담의 패전이 어떠하며 또 그 패전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 오신 것은 어떠하고 예수님 전쟁은 어떠하고 이런 것을 왜 알아야 되는가? 그게 전부 현실의 심신 우리 전투에 논리적인 전부 후방에 말하자면은 뒷받침이고 근거가 되는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이런 것이 없으면 다 끊어진 것이니까 참 기초없는 그 위에 집 지은 것처럼 그리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도 설명이 또 필요하겠지요. 중생된 영을 설명한 것도 그러하고 양심을 설명한 것도 그런 취지에서 다 그게 연결이 되어져 나오는 겁니다. 사람이란 것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든지 관계가 있는 것이고 보이는 것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보이는 것만 볼 것만 아니고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보고 모든 것을 대응을 하고 준비하고 싸워야 되지, 보이는 가견적인 것을 전부로 알고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지 못하는 그 사람은 언제나 큰 낭패를 당하고 말고 싸움에서 언제나 지고 마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배경이 확실하게 있는 걸 알아야 됩니다. 이걸 참고로 이런 것들을 기억을 하시고, 그다음 또 분문에서 한번 더 오전 말씀을 복습을 해봅니다.
오전 말씀에서 크게 첫째 말씀 드린 것은, 예수님의 시험을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서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셋으로 나눌 수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첫 번째, 성령에게 이끌리어. 두 번째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세 번째는, 광야로 가셨다. 그런데 본문을 크게 나누면 예수님 시험과 승리인데, 그 과정들을 설명을 드린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받으신 그 시험에 대해서 몇가지 생각해보면 시험에 첫째 성격이 뭐냐? 예수님이 시험, 시험이라 말은 전투인데, 예수님 시험에 성격, 예수님이 하신 그 전투의 성격은 대속입니다, 대속. 대속의 성격 가진.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전투할 필요가 없는 분인데, 그분은 원죄도 없고 원죄가 없으니까 욕심도 없고 전투할 필요가 없는데 우리를 대신하는 대속의 전투를 예수님께서 하고 계신다. 그 대속의 전투를 하게 된 그 원인 이유는 무엇이냐? 그거는 첫째 아담의 패전 때문이다. 첫째 아담이 왜, 무슨 패전했느냐? 누구에게 패했느냐? 첫째 아담이 누구에게 패했습니까? 마귀 사탄에게 패했습니다. 그 사탄이 누구냐? 그 사탄이 하늘에서 천사 중에 높은 존재인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가 하나님이 되려하다가 쫓겨난 것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난 것이 사탄 마귀고 그 마귀 사탄이 제 세력을 넓히려고, 제 부하를 만드려고 존재를 찾아온 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 세계고, 인간세계에 들어와서 아담 하와 있는 에덴 동산에 들어오되 뱀을 입고 들어와가지고, 그러니까 말하자면은 뱀은 만물인데, 마귀가 먼저 뱀을 입고 그 뱀을 통해서 인간인 하와에게 접근했고, 그리고 연약한 하와의 허영과 허욕과 미혹에 약한 그 하와의 심리를 이용해서 하와를 집어삼키고 그다음 여인에게 미혹 잘 받고 여인에게 약한 남자를 여인 하와를 통해서 아담을 집어삼키고, 이렇게 차례 차례 집어삼켜서 첫째 아담에 마귀와의 전투 패전에서 그러니까 아담은 말하자면은 아담은 전쟁하는 줄도 모르게 진 줄도 모르게 져버린 것이고, 삼켜진 줄도 모르게 말하자면은 이거는 뭐 꼼짝없이 일방적으로 아담은 당해버리고 만 겁니다. 마귀가 그만큼 막강하고, 또 실제 이 전투가 아담 하와뿐 아니고 인간으로서는 1차 마귀와의 전투는 무제한적이고 하나님의 공심판 앞에 싸우는 전투라서 이 전투는 인간이 결코 이길수가 없는, 원래부터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전투입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뜻이 있어 그렇지만은. 순서 논리적으로 어쨌든 하나님의 그 예정의 범위 안에서 마귀가 그래서 차근차근 순서적으로 뱀을 입고 뱀을 이용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그다음 뭡니까?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마귀가 뱀을 입은 것도 이유가 있겠지요. 뱀을 입고, 그다음 여인을 먼저 미혹해서 넘어뜨리고 그다음 여인을 통해서 아담을 집어 삼키고, 그러니까 아담은 눈뜨고 당한 겁니다. 꼼짝없이 그냥 이거는 뭐 전투라 할 것 없고 한순간에 대번에 그냥 당해버린 건데, 그 당해버린 이유가 뭡니까? 그 동안에 많이 배운 말씀대로 말하면, 아담 하와가 이거는 뭐 손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6.25 전쟁때 수도 서울이 몇일만에 정복됐던가요? 3일만에 수도 서울이 집어삼켜졌고, 임진왜란때 몇일만에? 불과 몇일만에 한양이 점령이 된 것처럼 손도 써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당해버린 겁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형편 없이 당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기 때문인가요? 준비가 없기 때문이고, 유비무환 아닙니까? 그런데 준비가 없으니까, 무슨 준비가 없었습니까? 왜 준비가 없습니까? 임진왜란때 이율곡 선생같은 그런 사람이 십만명을 양성하자 하고, 이순신 같은 사람은 미리 내다보고 철저하게 준비를 다 했다 그러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다 유명하고 큰 공을 다 세우고 그랬잖습니까. 왜 준비 못했느냐? 신앙에 잠을 자니까. 아담 하와가. 신앙에 잠은 잔 그말은 주님 잊어버리고 말씀을 잊어버리니까 신앙이 잠을 잔 것이고, 그러니까 눈 뜨고 속수무책으로 그냥 그렇게 당해버리고 만 겁니다. 이래가지고 아담이 당했는데 그 아담이 아담 자기는 몰랐겠지요. 우리가 지금, 요즘 자손을 많이 안 낳아서 그렇지만은, 여기 계시는 분들의 자손들이 앞으로 백년이 지나면 내 아이들이 아이를 낳고 내 손자가 아이를 낳고 증손자가 아이 낳고 고손자가 아이 낳고 또 5대손 6대손이 아이 낳으면은 한집안에 사람이 수백명이 될지 수천명이 될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가지고 자꾸 늘어나는 것인데. 그러면 나라는 사람의 내 허리에 있는 내 자손들은 앞으로 주님 재림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은, 수없이 많이 날 수 있습니다. 그들 전부다가 좀 다른 경우지만은, 나한테 달렸을수도 있는데. 전인류 전부가 다 아담의 허리에 있고 아담은 전인류의 시조면서 대표인데, 그 대표되는 아담이 너무도 싱겁게 무책임하게 여인의 말한마디 뱀의 그 미혹에 순신간에 선악과 따먹고 죽었는데 그 한번의 미혹과 그 한번의 패전이 얼마나 큰 패전이였는지 우리는 상상을 할 수 없고 아담 자기도 상상을 못 할 일이겠지요. 그 한번의 패전이. 이런 것도 연결시켜 보면 오늘에 한순간에 판단 착오가, 한순간에 방심이 얼마나 큰 과오를 낳게 될지 우리는 그런 일들이 세상에도 많이 있습니다. 일본 임진왜란때도, 아무래도 외국이 조짐이 이상하니까 그런 말들이 들리니까 나라에서 장님이 바보가 아니잖습니까. 사신을 보냈는데, 당파 싸움이 워낙 심하니까 양당을 다 보냈지요. 요즘으로 말하면 여당 야당처럼. 양당을 보냈습니다. 양당 두 사람 보내가지고 가서 살피고 와라. 그랬는데, 가서 보니까 보일 것 아닙니까? 눈앞에 보면은 군대가 양성되고 있고, 이거는 뭐 도무지 보이는데 불구하고 그들이 돌아와가지고는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입장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 당의 입장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 판단에 이걸 사실대로 알려놨다가는 나라에 난리가 날거니까 나라 안정 때문에, 어떤 이유때문에든지간에 거짓보고를 했다말이지요. 거짓 보고에 넘어가니까 선조라는 사람이 넘어가버리니까 판단착오니까 ‘괜찮다’는 그 판단하나가 나라를 몽땅 집어삼켜서 7년동안 수없는 사람이 죽었고 그렇게 됐잖습니까. 한번의 판단 착오가. 모든게 다 그렇습니다. 아담의 순간의 방심이 전인류를 다 죽였고, 참 얼마나 많은 그런 지옥을 만들었고 그리 될만큼 그리 되었습니다. 이거는 우리가 느끼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쨌든 그래가지고 아담의 패전으로 전인류의 패전이 되어졌고, 전인류의 패전 때문에 이제는 모든 인류는 마귀의 종이 되었고 마귀의 것이 되었고 세상은 마귀에게 빼앗겼고 마귀는 인간의 주인이 되고 이 세상에 주인이 되어졌고, 그대로 두면은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패전하여 빼앗긴 종된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해서 나신 예수라. 그래서 그 예수님은 첫째 아담의, 이것도 교리적으로 알아야 됩니다. 세상은 온갖 종류의 미혹을 가지고 믿는 사람을 미혹을 합니다. 예수라는 그 사람도 사람 아니냐? 오만말 다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그분은, 구주 예수는 첫째 아담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에 부정모혈의 법칙으로 인간 생육의 법칙으로 나지를 않았다. 그분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왔다 그럴때 안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말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말하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없는 가운데 만드신 분인데, 다른 방법으로 못 만드시겠는가? 그분이 자존자인데. 그렇게 갖다대면 한도 없는데. 어쨌든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해서 원죄없이 전혀 다른 종자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아담에게 패전하지 아니한 또 다른 사람으로 와서 아담에게 도전할 때 그 사람이 내가 너한테 패전한 아담의 자손이 아닌 나는 다른 사람으로 왔는데 내가 이들을 대표해서 너하고 싸우겠다 할때, 마귀는 그 싸움을 거부할 명분이 없는 겁니다, 논리적으로. 맞습니까? 세상 자연 계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상 자연 계시에 그렇게 다 만들어놓은 겁니다. 명분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예수님의 그 도전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예수님은 도전자 입장에서 전투를 하는 것이고, 그럴때 마귀가 말하자면은 챔피언 입장에서 도전을 받아주는 입장이니까 장소하고 시간 이런 것은 마귀가 정하면 도전자인 주님은 마귀가 원하는대로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마귀가 산에 데려가면 산으로 따라가야 되고 성전 꼭대기에 따라가면 성전 꼭대기에 따라가야 되고 하는 그 전투방법. 돌들로 떡덩이 되게하라니까 거기 대해서 대응을 하고. 그래서 우리는 깊이 연구하지 않으니까 의문이 안 생겼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떻게 마귀한테 순종을 합니까? 마귀가 산에 데려가니까 따라가고 피동이며 순종 아닌가?’ 성전 꼭대기에, 성경에 그리 나오지요? 5절에 보니까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또 그다음, 8절에 보니까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그러니까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다녔는데 예수님은 거기에 피동적으로 따라다녔다 그말이지요. 예수님이 마귀를 따라다니니까 이것 잘못된 거 아닙니까? 이 해석이 난해설이라. 우리가 이런 걸 안 배우면 우리도 모르겠지요. 의문 조차 안 가지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도전자 입장이니까 승자인 마귀가 원하는 장소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말이지요. 여기 뭐 반론의 여지가 있습니까? 그래가지고 응전을 예수님께서 그래 싸움을 했고.
그래서 이런 이유 때문에 이제 말씀드린 첫째 아담의 패전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를 구출하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마귀하고 더불어 싸우는데 마귀와의 싸움은 죄와의 싸움이고 사망과의 싸움이고 다시 말하면 세상과의 싸움이다. 그런데 그 싸움은 첫째 아담의 패전과 마찬가지로 그 싸움은 하나님의 공심판 앞에 싸우는 싸움이고 무제한적인 싸움이라. 이거는 뭐 제한없는 끝없는 그런 영원한 그런 싸움이라. 이 싸움이 예수님의 싸움이라. 그러기 때문에 그 싸움은 이거는 첫째 아담은 이와 같은 말하자면은 대상이 달랐지만은 마귀와 첫째 아담의 싸움과의 전투의 성격하고 범위하고 예수님과 마귀와의 전투의 그 범위가 같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첫째 아담은 패전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예수님은 패전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님도 논리적으로는 패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번만 실수하면 예수님 패전하는 겁니다. 그런 싸움인데 예수님은 끝까지 패전하지 않고 완전한 승리를 했다. 예수님의 시험에서. 이렇게해가지고 시험을 전투했는데, 이 전투에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에서 완전한 승리를 했는데, 이 마태복음 4장의 승리는 그 자체적으로 완전하고 완벽한 승리지만은 영원한 승리지만은 이 승리가 마귀와의 전투에 전부가 아니고 따라서 승리의 전부는 아니며 최종 승리는 아니라. 예수님의 전투는 세상 떠나는 날까지 계속 되고 따라서 그 모든 전투에서 예수님은 세상 끝나는 날까지 다 승리를 해야 완전한 승리가 되는 것이지 한번만이라도 패전하면 예수님 패전되고 마는 것이고, 그러면 우리 대속은 완전히 다 실패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좀 재미가 없지요. 지루하고. 같은말 자꾸 또 하고 또 하니까. 그런데 이렇게 해가지고 저도 생각해보면 또 어렵고 어려운데, 물어보면 모르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뒷받침 되어있지 않으면 지금은 괜찮을지 모르는데 막상 이런 것을 이런 이치를 논리 근거를 알고 전투하는 전투하고 모르고 전투하는 전투는 전혀 틀립니다. 자루 안에 콩이 들어있는데 보니까, 콩이 나오는데 보니까 안에 푹 깊이 찔러보니까 겉은 콩인데 속에는 겨 딩게만 잔뜩 들어있다 말이지요. 그거는 그럼 진짜배기 아니지 않습니까. 푹 꺼지고 마는 것처럼.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그 기쁘게 여긴다는 그 말씀이 바로 이런 논리적인 근거 위에서 기뻐하는 그 기쁨이 되어야 비로소 온전한 기쁨이 되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완전한 승리하신 그 승리의 결과는 보면은 다섯가지로 정리해보면, 첫째 완전하고 영원한 승리였고, 두 번째는 마귀 사탄에게서 우리를 구출하신 것이고 세 번째는 마귀 사탄의 왕노릇을 제한 시켜놓은 것이고, 네 번째는 마귀 죄 사망을 종으로 삼은 것이고 다섯 번째는 하나님의 공심판을 완전히 면제해주신 것이 예수님의 전투로 승리로 주어진 결과다. 그렇게 말씀할 수 있고, 이 예수님의 전투 승리를 근거바탕으로해서 그다음 우리의 전투가 있는데, 우리의 전투의 자격이 어디서 생겨졌느냐. 믿는 사람의 신앙 전투는 어떻게 해서 생겨지게 되었느냐? (지금 실내가 온도가 괜찮습니까, 앞에? 괜찮습니까? 더우면, 이게 켜도 더운 겁니까? 그래도 더운 겁니까. 더우면 온도를 조금 낮춰도 될 것 같은데. 제가 더워서 그런데. 다른 분들, 저는 옷을 이렇게 입고 있으니까 당연히 더운건데 혹시나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더우면 좀 조절하시고. 백목사님 생전에 에어콘도 없이 이보다 더 더운데 앉아도 은혜가 됐는데, 지금은 그게 안되니까) 우리의 신앙전투 기독자들의 모든 생활은 전투 생활이고, 그 전투할 수 있는 자격이 어디서 나왔느냐? 예수님의 대속의 전투의 승리가 우리 신앙 전투에 근거고 자격이다 그말이지요, 승리가. 그래서 예수 죽음 내 죽음 그 승리 내 승리 그 부활 내 부활 그리 되는 겁니다. 그다음 두 번째, 우리 신앙 전투의 범위는 어떠냐? 범위는 공심판이 면제된 제한적인 전투입니다. 예수님의 전투의 범위는 하나님의 공심판 앞에서 싸우는 무제한적인 전투고 우리 신앙의 전투는 공심판을 통과한 면제된 제한적인 전투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 전투의 성격은 승리하신 주님이 우리를 연습시켜서 기르시기 위한 하나의 연습 훈련이고 우리와 싸우는 마귀는 전투에 이용되는 주님의 심부름꾼일 뿐이고 따라서 우리 모든 시험 전투는 패할 길까지 다 내어주신 이길 수 밖에 없는 전투입니다. 우리가 지는 것은 내 전부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는 것이고 믿지 않기 때문에 지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은 전투 신앙이고 교회는 전투 교회고 기독자의 평생의 생활은 전부 전투 생활이고, 전투의 승리로 우리는 자라가고 우리 신앙도 자라가는 겁니다. 이걸 간단하게 시험 배경과 내용을 해보면, 그 자세한 시간 없겠고, 우리 시험 전투를 안내하는 분은 누구냐? 지금 이것도 기억하셔야 됩니다. 현실에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몸이 아프다든지 가정에 우환이 생겼다든지 갑자기 사고가 났다든지 돈을 떼었다든지 신앙생활하다가 직장에서 어려움을 만났다든지 여러 형태로 어려움을 만난 그게 전부 시험인데, 믿는 사람의 신앙 시험, 그런 시험을 만날 때 그 시험을 있게 만든 안내자, 시험의 주관자, 시험 문제를 출제하는 그 주관자 안내자가 누구냐, 성령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 받으러 가신 것처럼, 우리들의 모든 시험에 출제자 주관자 안내자도 시험인데 그 시험관은 바로 우리편입니다, 우리편. 시험관은 성령님이니까 우리 편입니다. 안내자는 성령, 우리가 시험 치르는 시험 장소는 어디냐? 시험 장소는 광야인데, 광야는 현실이고, 따라서 우리에게 오는 시험 현실에 모든 현실의 모습은 광야라는 곳이고, 광야라는 곳은 외롭고 쓸쓸한 곳이 광야입니다. 시험 치는 장소는 현실인데 그 현실은 광야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현실. 시험 목적은 뭐냐? 시험 목적은 전투를 통해서 우리를 우리 실력을 성장시키는게 시험의 목적입니다. 그다음 네 번째, 시험 문제는 뭐냐? 시험 문제는 하나님의 계약의 말씀을 준수하는 겁니다. 계약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말씀에 순종하느냐 안 순종하느냐 그게 시험 문제고, 다섯 번째, 그 시험 치는 우리들 배경, 우리 뒤에서 돕는 배경자는 역시 성령님이고, 또 시험의 승리의 방법은 기도와 말씀이고 그 시험 전체의 배경은, 최후 배후는 섭리 고개턱 너머 숨어 엿보시는 마중의 주님이 우리 현실 전투의 최후의 배후라 그말이고, 따라서 믿는 사람의 신앙생활해나가다가 만나지는 온갖 종류의 어떤 형태 시험이든지 모든 어려움 모든 시험은 전부 최후의 섭리 고개턱 너머 숨어 엿보시는 마중의 주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성도를 실력을 길러서 원하시는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 펼쳐놓은, 씨름판 위에 펼쳐놓고 일꾼인 마귀를 보내가지고 우리를 연습시키고 연단시키는 그 하나의 과정이 우리가 만나는 현실의 모든 시험이다, 어려움이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바로 알고나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어려움에 결코 낙심하고 낙담할 수 없는 것이고, 질 수가 없는 것인데, 문제는 이 시험 전부다가 우리 전투인데 그 전투가 전부 자유성을 초월한 전투가 아닌 자유성 범위 안에서 우리 자유 의지에 의한 전투기 때문에 이 전투할 수 있는 근거와 배경,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 만들어놓고 전부다 준비해놓고 싸움을 붙이는데 씨름을 붙이고 있는데 문제는 그 씨름에서 내가 그것을 준비하지 않고 내가 힘쓰지 않고 내가 믿지 않고 내 자유의지가 거기서 넘어져버리면 그 전투에 하나님께서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일차적으로 완전히 패전해서 죽어있는 우리를 살려놓고 다시 재전투할 수 있는 거기까지는, 모든 완벽하게 이길 수 있도록까지 모든 것 다 완전히 구비시켜놓고 배후에서 응원하고 협조하고 다 기다리고 계시지만은 그러나 직접 싸우는 그 싸움의 주체자는 내 심신이기 때문에 내 심신이 싸우는 이 신앙 전투가 자유성 범위 안에서, 자유성을 초월한 전투가 아니고 자유 의지에 의한 싸움이기 때문에 나와 마귀와의 싸움, 2차 전투 현실 전투의 그 싸움에 하나님은 전혀 개입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조성해놓은 그 위에서 조성해놓은 그 모든 것을 내가 힘 입어서 내가 도움 받아가지고 내가 스스로 싸워야 되지, 그래서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응원하고 협조하고 돕고 하지만은 싸우는 그 싸움에 직접 당신이 나서가지고 내 심신을 대신해서 그래가지고 싸울 수는 없는 것이 우리의 싸움이고, 이게 현실 심신의 모든 전투고 이게 전부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그말입니다.
이게 뭐 설교하는 저도 벙벙하고 듣는 분도 벙벙한데 어쨌든 집회 첫날 말씀을 자꾸 좀 재독하시고 생각을 자꾸 해야 됩니다. 이런 것을 알아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바로 할 수가 있는데, 이런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 전체를 두고 단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신앙의 전부 밑바탕이 되고 기초가 되고 뼈대가 되는 것이고 이 뼈대가 튼튼해야만이 신앙생활은 정상적인 신앙으로 건설구원,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을 지을수가 있는 것이고 이런 것이 없는 그냥 신앙생활은 안타깝게도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라서 마지막에 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뭐냐? 신앙생활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이 무엇이 구원입니까? 한시간동안 내 듣고 있는 이런 지루한 말씀을 듣는 것이 구원을 이루기 위한 것인데, 구원이 무엇입니까? 같이 한번 해보실까요. ‘자기변화’. 나라는 사람이 바꾸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수천번도 더 말씀드렸지요. 나라는 사람이 바꾸어지는게 변화입니다. 구원입니다. 어떻게 바꾸어집니까?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내가 변화가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변화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 현실의 전투입니다. 옛사람으로 찌들고 세상으로 찌들고 자기 사리사욕 주관으로 찌들어있는 우리를 그런 심신에 찌들어있는 악령 악성 악습 세상 자기주관 중심 이런걸 다 빼내고 하나님을 닮은 거룩하고 깨끗한 귀하고 아름다운 그런 사람으로 흠과 점이 없는 사람으로 나를 조금씩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변화되는 것이 구원이고 여기 필요한 모든 말씀들이고 이것을 위한 첫째 아담의 패전이고, 도성인신이고 주님의 전투고 그 배경 전부다가 우리를 이런 판을 만들어놓고 그 판에서 승리하므로 하나씩 하나씩 내 심신이 변화되도록 하기 위한 이것이 최일선의 전투를 위해서 그 배경 전부를 다 만들어놨는데, 아무리 해도 나라는 사람이 변화가 되지 않으면 이거는 헛일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구원이고, 구원은 자기 변화 자기 성화가 구원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어제보다 오늘 달라야 되고 오늘보다 내일 달라야 되고 하나님의 형상 닮은 사람으로 바꾸어져 나가야 됩니다. 생각이 바뀌고 인식이 바뀌고 중심이 바꾸어지고 언행심사가 바꾸어지고 사상과 정신이 바꾸어지고 이런 사람으로 자꾸 바꾸어져 나가야 되는데, 이번 집회 갔다와서 얼마만큼 무엇을 느끼셨는지. 뭘 고쳤는지, 무엇이 변화가 됐는지 이걸 생각도 못하고 기준도 모르고 방향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면 무슨 신앙생활하며, 그렇게 신앙생활 해가지고 평생 신앙생활하면 박수를 천번 만번치고 예배 주일마다 박수치고 방언을 매일 같이 하고, 이번에도 보니까 우리 공회 집회온 분 중에서 아마 딴데서 오신 분이 계셨는가, 막 방언을 하고 막 찬송을 하고 그랬다고요? 방언을 죽는 날까지 방언을 하면 그 방언한 것이 어떻다 말입니까? 남는 결과가 뭡니까? 찬송을 아무리 하면 남는게 뭡니까? 자기라는 사람이 고쳐지지 않으면 구원은 아닙니다. 평생 믿어도 구원 아닙니다. 성경에 말씀하신 구원은 나를 바꾸어 변화시키는 겁니다. 이걸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것이고, 이런 모든 과정들을 다 만들어 두신 겁니다. 이게 현실 전투, 그러기 때문에 내 변화는 심신의 변화고, 심신의 변화는 그 요소가 수억 수십억 수백억도 넘고, 세포 조직 마음의 요소가, 그 모든 것들이 변화되는 현실 현실마다 전부 거기서 하나하나마다 전부 내가 바꾸어지고 변화되는, 그래서 한꺼번에 안되기 때문에 평생의 세월에 수많은 시간 수많은 세월을 주셔서 그때마다 그것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섭리역사다 그말입니다. 이걸 깨달아 알아야 신앙생활 할 것 아니겠습니까. 알아도 힘드는데, 알고 다짐을 하고 후회하고 탄식하고 기도하고 해도 안되는데 이걸 모르면 무슨 수로 신앙생활하며 구원을 이루어 가겠나 그말이고, 인생이 신앙생활 없고 구원 이루지 않는 신앙생활은 헛일, 신앙생활 없는 인생살이는 참 아무것도 아닌, 알맹이 없는 껍데기 뿐인 것, 마지막에 빈 손 들고 다 주님 앞에 가는 영원히 부끄러운 사람 되고 마는 것, 이런 것이 인생살이고 신앙 생활인데 이런 걸 좀 내막을 알고, 알고 논리를 바탕에 깔고 그다음 현실에서 각자 현실에 좀 힘을 써보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야 되겠다 그말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안타까워서 드렸지만은 다 지엽적인 가지적인 것이고 결국 성경 바탕은 성경 해석과 교리적인 근거, 그 말씀을 기억하시고 현실 심신의 일선 전투가 궁극의 우리, 거기서 승리하는게 최종의 목적이고 그 승리가 바로 우리 변화가 되는 방법이고, 말씀으로 되어지는 것, 기억을 하고 힘을 쓰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