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3-주후(마9:9-13)
작성중2014-08-09조회 297추천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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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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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원문
20140803 주후
마태복음 9:9-13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은 각각 사는 모습이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 형태로 또 여러 계층으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생활에 만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고, 또 긍정적인 사고방식 가지는 것도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인생에 사람으로 났으면 사람의 근본을 아는 것이 가장 기본이고 우선이고 또 인생의 마지막을 아는 것도 가장 중요한 그런 일이 되겠고, 그러므로 인생으로 나서 어떻게 인생살이를 해야되느냐 하는 것도 바로 알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 것을 알고 그다음 하나님이 주시는 각자 자기 현실과 자기 형편 처지에 따라서 그리 사는 것이지 인생이 사람 인생의 근본도 모르고 마지막 결과도 모르고 또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가치있게 사는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 되는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고 사람으로서 참 낮은 차원의 생활이라 그리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오전에 백목사님을 예를 들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존경하는 분인데, 그분은 열일곱살인가 그때 일본에 가서 3년동안 일본생활하고 그당시 일본은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치를만큼 그렇게 모든 면에 문화가 아주 발달된 그런 선진국이었고 우리나라는 쇄국정책을 써서 나라문을 꼭꼭 걸어잠궈가지고 외국에서 무역하자고 오는 배를 침몰시키고 그래가지고 선진문물이 들어오지 못하니까 아주 우물안에 개구리처럼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목사님 가실때쯤은 개화가 되기 시작한 그런 때지요. 그런데 이미 늦었고, 일본은 최첨단을 달리고 있을 그때인데 3년을 다니면서 할 수 있는 거는 다 해봤다 그럽니다. 돈 버는게 목적이 아니고 가서 ‘이 나라의 문물을 배워오자’ 그 목적으로 가서 돈도 돈이지만은 많은 기술을 익히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하는 그걸 목적으로 가서 3년동안 다니다 보니까 어지간히 볼만큼 보고 배울만큼 배웠다 싶어서 돌아왔고, 그다음 결혼하고 경제생활하는데 그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의 속국이 되어졌었고, 나라 주권을 잃었고 식민지 되어있었는데 그래서 그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돈되는 그런 사업권은 다 가지고 있고 조선 사람에게는 돈 안되는 그런 것만 주는 겁니다. 그중에서 가장 한국 사람 조선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돈 많이 버는 업종이 바로 술 제조업, 술을 만들어파는 그걸 허가를 받아서 그래한 것이 소위 그때 저희들 어릴때도 술도가라 그랬는데, 술도가 그걸 허가를 얻어서 그래서 돈을 굉장히 많이 벌어서 벌써 20대 중반되기전에, 20대 초중반 그 사이 스물 한두살 두세살 그때 돈을 엄청나게 벌어서 그 지방에서 백목사님의 돈을 다 걷어가버리면 금융조합이 운영이 안될만큼, 요즘으로 말하면 은행인데, 운영이 안될만큼 그렇게 되어있었다 그러지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돈을 모으고, 돈이 많으니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오만 것 다 해봤지만은 마음속에는 늘 허전한 구석이 있는데 그 허전한 구석을 매꾸어보려고 채워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더라는 거지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게 인생의 근본 문제고 궁극의 문제인데, 그래서 산에 가서 나무를 쳐다보면 나무도 나보다 수명이 길고, 바위를 쳐다보면 바위도 나보다 수명이 길고 그런데 인생이란 것이 이게 참 죽으면 그만이라 그러니까 너무 허무하게 그래 되니까 도무지 너무 허무해서 견딜 수 없는, 뭔가 인생의 근본과 뭐가 있을 것 같은데 암만 찾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 그런 갈급함을 가지고 겉으로 보기에는 돈 많이 벌고 술에 빠져 사는데 속에는 그런 갈급이 있어서 끊임없는 전투가 계속 되어지고 그런데 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 지역에 도평 계면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 보면, 지금은 두매 산골 시골이라서 사람이 적은데 오전에 말씀드렸지만은 저희들 어릴때만 해도 시골에 사람이 많이 살았습니다. 위천이라는 거기도 지금은 교인이 4-50명 이런데, 목사님 목회하실 때 잘하기도 했겠지만은 4백명씩 모이고 그랬다거든요. 또 봉산 산골짝에도 많이 모이고. 거기 사람들이 옛날에는 도시도 많지만은 시골 생활 많이 했기 때문에 농사가 생활에 중심이니까 사람이 많았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 생활 모습을 보면 그냥 때가 그런 때고 경제가 그런 경제니까 하루 세끼 밥 먹고 살면 만족하는 그런 정도의 사람들이니까 백목사님의 그 인간의 근본을 두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그 갈급을 대화할만한 상대가 없는 겁니다. 그 동네 전부를 다 통틀어도. 마음을 터놓고 말해봐야 대화가 안되니까.
사람이란 것이 꼭 같은 이목구비 수족을 가지고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이 살아도 내면적으로는 굉장한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마찬가지로 한 교회안에서 신앙생활해도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보다 그 속의 내면의 차이는 사람마다 굉장히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큰 오판되기 쉬운 것이고, 우리는 우리 자신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사람이 그냥 하루 세끼 밥 먹고 살고 그날 그날 하루하루를 아무 사고 없이 무사하게 지나가고 특별한 그런 사건없이 등 따스하고 배부르고 가정 평안하고 큰 걱정없이 그날그날 살아가면 그게 인생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살면 큰 세월 허비하는 그런 과오, 누를 범하게 될 것이다 그말입니다.
사람이란 것은 마음에 근심 걱정 혹은 갈급이, 그것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갈급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권력에 권세에 갈급도 있고 명예 갈급도 있고 배움에 갈급도 있고 사람에 대한 갈급도 있고 좋은 직장에 대한 갈급도 있고 오만 종류의 갈급 배고픔을 가지고 세상의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그런데 한사람 한사람 다 안만나봐서 모르겠습니다만은 일반적으로 생각해볼때 그럴 것 같습니다. 무엇을 잡아도, 어떤 것을 잡고 풍족하게 만족할만큼 얻어도 이 세상것을 가지고 사람이 근본적으로 만족하다 할 수가 없지 않을까. 하나님을 일반 사람들이 모르니까 자기도 모르고 형제도 모르고 아버지도 몰랐고 할아버지도 몰랐고 다 모르니까, 왜 모르는가. 아는 사람은 아는데. 하나님께서 안 알려주시면 하나님은 알 길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거기 폭 빠진 그 세계에 사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알고 싶어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고 도무지 모르니까, 그러니 아예 깜깜하게 모르는 어둠 속에 살고 있으니까 하나님 알지 못하지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좀 돈 가지고 권세 가지고 명예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욕망하는 그런 것 가지고 근본적인 인생의 완전한 해결을 찾지는 못할 것 아닌가. 그들이 모르니까 답은 못 찾는데, 뭔가 허전한 그런 것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말이지요. 그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입니다. 아마, 모르겠습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그런 사람들하고 대화를 해볼 기회도 없고 많이 안해봤지만은, 주변에 혹시 그런 사람 있으면 깊은 대화를 해본다면 ‘저 사람은 세상적으로 성공을 했는데 저 사람은 과연 만족할까?’ 하고 대화해보면, 근본으로 접근을 아예 그거는 금기사항처럼 건드리면 안되는 그런 것들처럼 그쪽으로 모두 들어가지 아니하고 그것 건들면 아프고 또 건드려봐야 모르고 하니까 거기는 건드리지 않고 안 들어가서 몰라서 그러하지 그것까지를 파고 들어가서 인생에 만족을 물어본다면, 과연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 만족하고 살 수 있을까. 한평생 참 잘 살았다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그래도 그 사람들도 표현은 그래해도 아마 세상 떠날때가 되면은 좀 뭔가 보여지게 되면 참 후회나 이런게 대단히 많지 않을까. 예수 믿는 사람은 더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이 됐는데, 해결이 다 됐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직까지도 믿는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아직까지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현실 현상 생활을 돌아보면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고 때때로는 감사도 기쁨도 소망도 넘치지만은 많은 부분들을 보면은 그만 빈들에 마른 풀 같이 그렇게 시들은, 예배 시간에 꾸벅 꾸벅 조는 사람들이 그러지 않은가요. 대개 보면 여름철 장마철 이때가 되면 그런걸 더 많이 느낍니다. 새벽기도 보면은, 새벽에 오면은 새벽기도 오기는 와야 되고 오면 예배 마치고 나면 그만 피곤하니까 노곤한 몸이, 몸이 육신이 피곤한 거는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주일도 그런 경우가 있고. 그러니까, 그거는 단편적인데, 전체적으로 보면 신앙의 모습에서 신앙생활에서 마음속에 뜨거움이 없고 간절함이 없고 또 감사와 기쁨과 충만한 그런 것이 없이 뭔가 좀 시들시들하고 힘이 없고 좀 활기가 없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보니까 나무들을 물을 줬는데도 시들시들한 그래서 이게 때가 다되서 죽어가는가 싶었는데 보니까 어제 비가 쏟아지고 나니까 나뭇이파리가 새파랗게 빳빳하게 돋아올라오는데 아 참, 그동안에 보니까 물을 너무 좀 적게 줬나보다. 날이 너무 뜨겁고 그랬는가보다 그런 느낌을 또 한번 받아봤습니다. 그전에는 매일 물을 줬는데도 시들시들하더니 어제 하루종일 비 맞고 저녁엔가 보니까 아주 새파랗게 돋아난 것 보니까 이게 그런 게 아니로구나. 시냇가에 심은 나무들은 잎사귀가 항상 청청하고 푸르고 때가 되면 과실을 쫙쫙 맺고 그래하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정상으로 하면 언제나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한, 입에는 찬송이 끊어지지 않고 소망이 넘치는 이런 생활 하는 그게 정상인데, 설교하는 저부터 보면은 그것이 잘 되지 않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가? 시들은 우리들의 영혼. 왜 그리 되어졌는가를 찾아보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지만은 한 말로 간단하게 정곡을 찔러 말한다면 주님을 떠나서,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 그러하다. 결혼한 부부가 색시가 신랑하고 떨어져서 오래 있으면 처음에는 괜찮다가도 좀 시간 지나고 나면 병이 난다 그러지요. 보고싶어 상사병이 들어서 병이 난답니다. 시들시들하게 말라가고. 그것처럼 주님을 우리가 떠나버리니까 우리 신앙이 시들어져있다 그말이지요. 그런데 그 주님 만나는 방법, 지름길을 본문에서 우리가 공부한건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은 이 지름길입니다.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을 것을 주님이 보시고 지나가다 주님이 마태를 불렀습니다. ‘나를 쫓으라’ 그러니까 마태가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생각해볼때 그 속에 대화도 있었겠고 뭐 있었겠지만은 그 많은 시간 걸리지 않은 것 같은데,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를때 엘리사가 즉시 따라갔던 것처럼, 주님이 마태를 부르시니까 마태가 주저하지 아니하고 즉시 직장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백목사님 밑에서 평소도 그랬는가 모르겠는데, 그분 성함이 배추달 아니고, 전도사님, 순교하신 전도사님 설교록에 많이 나오는 분 누굽니까, 0샘? 박? 박기천 조사님. 그분이 면직원이었다 그러지요, 아마? 면직원이었는데, 공무원이지요. 면직원 공무원이었는데 백목사님 집회 한번 딱 참석하고 그날론가 즉시 그 직장 그만두고 전도사로 나섰다 그러지요. 그것처럼 마태가 주님이 부르시니까 즉시 직장 사면하고 주님을 바로 따라갔는데 그 따라간 내면을 설교록 해석이 되있기를 그리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리 될 수 있는가를 사람의 심리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그 마태라는 사람의 직업이 세리고, 세리라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죄인 중에서도 아주 악랄한 나쁜 그런 직업이고 그런 사람들로 인식이 되어있고, 그 사실을 마태도 아는 것이고, 그런데 결과적으로 마태가 주님을 따라간 그 심리를 연결시켜 보면 마태라는 사람이 그렇게 동족들의 피를 빨아먹는 악랄한 그런 짓은 안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그게 자기 직업이니까 ‘나는 세리다. 죄인이다.’ 그게 늘 마음속에 눌려있다 그말이지요. 죄인임을 아니까 자기가 죄인임을 아니까 고개 못 들고 어깨 못 펴고 가책 받고 늘 움츠려 들어서 숨어야 되고 떳떳하지 못한 그런 것이 겉으로야 뭐 달리했겠지만은 속에는 그런게 들어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죄인이라는 그 사실을 스스로 강하게 느끼니까 반동으로, 한편으로는 거기서 벗어나고싶은 그런 욕망 또한 강하게 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한 거지요, 그거는.
그러니까 그것이 하루이틀 아마 제법 장기간 계속 됐겠지요. 적어도 몇 달, 몇 년 됐는지. 그리 계속 돼서 한편으로는 죄인됨으로 인한 눌리고 가책되는 그 마음이 굉장히 크고 강하고 한편으로는 그러므로 거기서 벗어나서 자기도 떳떳하게 사람답게 당당하게 더해서 의인으로 살고싶은 그런 욕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 차, 그러니까 주님이 부르실때쯤에는 그게 절정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두 양극의 절정이 되어졌을때 주님이 부르시니까 주저함 없이 즉시 주님을 따라서 나설 수가 있지 않았겠는가? 이게 우리에게 가르치는 구원의 도리라 그말입니다.
여기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무형의 주님으로 계시는데, 오늘 말씀에 오전에 그거는 빠졌는데,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방법이 있는데, 주님이 당신을 나타내실 때 제일 처음에 어떻게 나타내십니까? 주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 제일 처음에 방법이 무엇입니까? 말씀으로 나타내시고, 두 번째는요? 영감 역사 감화감동으로 나타내시고, 세 번째는요? 섭리역사로, 실제 그렇던가요? 이거는 배워가지고 실제 살펴보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때는 말씀 속에 당신의 모습을 알려놨고, 읽으면 압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나타내신 그 말씀을 가지고 읽고 믿고 그분을 모시고 그분을 찾아들어가보면 양심 통해서 성령이 감화 감동 영감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알려주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객관 역사입니다. 이게 있고, 그다음 세 번째는 여러 가지 섭리로 내 주변에 사람을 변화시킨다든지 환경을 바꾼다든지 일을 되게 하고 안되게 하는 징계라던지 이런 섭리역사로 하나님 살아계심, 어떤 분인 것을 알리시는 이 새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새역사 있는데, 이게 전부 하나님의 역사지요. 하나님의 역사인데, 이런 과정들 혹은 이런 방편들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알고 주님을 만나는데 그런데 이런 말씀과 영감과 섭리 역사를 통해서 주님을 찾고 만나되 우리들이 상대하는 주님은 말씀이 아니고 영감이 아니고 섭리역사가 아니고 인격체, 사람으로 말하면 격위를 가지신 인격의 원형이신 살아계신 그 하나님, 그러나 무형이지만은 완전자기 때문에 형체에 갇힐 수 없어 무형이나, 그러나 무형인데 그분은 지정리를 가지신 인격 격위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가 찾아서 만나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궁극의 목적이고 나아가는 방향이다 그말입니다. 사람을 상대할 때 높은 사람이던지 좋아하는 사람이던지 상대할 때 그 사람이 전해오는 말도 들을 수 있고 그 사람이 이런 이런 말 합니다,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을 알 수 있고 사귈 수 있고, 또 그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도 사귈 수 있고, 그가 보내주는 선물을 통해서도 사귈 수 있고 사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라든지 그가 하는 일이라던지 보내주는 선물은 이거는 전부 그분이, 그 사람이 나에게 주는 하나의 그가 살아있고 나와의 관계 되어있다는 표시고 증거지 그분 자체는 아니다 그말입니다.
정말 진정한 사귀는 인간 대 인간은 그분을 만나서 직접 만나 얼굴 대면을 하고, 혹은 대면 안해도 목소리 듣든 그래가지고 인격 대 인격으로 사귀는 그것이 진정한 사귐이지 말을 듣고, 물론 관계 따라 그러나, 말을 듣고 말로 서로 대화하고 사귀고 선물 주고 받고 일을 주고 받고 하는 그것하고 인격 대 인격으로 사귀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너무 제가 추상적입니까, 이 말씀이. 우리가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게 너무 어려울지 모르겠는데, 지금 설교하면서 저도 그렇게까지는 지금 도달해보지를 못하는데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나 깊은 교제한 영교의 그런 사람들, 아가서에 보면 그런게 많이 있고, 그런 분들은 하나님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을 말씀으로도 만나고 영감으로도 만나고 섭리 역사로도 만나지만은 그러나 살아계신 그분을 인격 대 인격이 만나는 것처럼 그런 주님으로 그렇게 만나는 상대하는 그런 상대가 있다 그말입니다. 이것이, 그래서 영감 역사가 그분이 역사하시니까 그리 되는데, 이게 좀 어찌보면 또 위험할 수 있을란가. 영감 이상에 뭐라하면은 어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분의 실체를 우리가 늘 생각을 하고 형체 없는 무형의 완전자이신 그분을 늘 사모하며 찾아나가는, 만나려고 애를 쓰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방법은, 여기 본문에 말씀하신대로 마태가 주님을 만나게 된 그 원인이 뭐냐, 근거나 뭐냐. 오다가다 우연히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중풍병자를 고치고 가는 길이라서 그리 가다 보니까 마태가 있어서 마태를 불렀고 한 것이 겉보기에는 그리 되어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영원전부터 예정된 일이고 이때가 되어서 마태의 마음속에는 죄인됨과 거기서 벗어나 의인되고픈 그 양극단에 갈급과 죄인됨과 그 갈급, 이것이 절정에 이른 그때가 되어있었고, 그때 주님은 그리 찾아가서 마태를 만나서 불렀고, 마태는 즉시 주님을 따라갔고, 이게 바로 구원의 도리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 예배시간에 은혜 받기를 원하십니까? 은혜를 받고싶으면. 집회가서 은혜 받기를 원하십니까? 은혜라는 것은 주님 만나는 것보다 더 큰 은혜가 있겠습니까? 말씀의 은혜받고 말씀의 은혜 받는 이유는 말씀 속에 영감 만나기 위해서 은혜 받는 것이고, 그 영감은 주님을 만나는 것이니까 그 속에서. 그러니까 예배 시간이던지 또 개인적으로 성경 읽고 신앙생활 할때던지, 집회를 참석하던지 어디서든지 은혜 받기를 원한다면 마태가 가졌던 두 가지를 가져야 된다 그말입니다. 하나는 무엇인가? 하나는 뭡니까? 하나는 뭐지요? 자기의 죄인된 죄된 요소부분을 발견하는 겁니다. 찾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더 위로 올라가면 하나님. 하나님을 표준하고 원형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잣대로 삼아서 하나님과 다른 것, 말씀과 다른 자기 자신의 모습부터 자기 속에 있는 심신의 기능 요소와 활동 작용의 과거와 현재 여러 가지 면이 있지 않습니까? 그 모든 것에서 주님과 다른 것을 찾고 말씀과 달라서 죄되는 그 죄되어있는 그 부분들 그 요소들 그 활동들 그리 되어진 그 결과들 이런 것들을 자기가 찾아서 알고 그것에 대한 갈급이 그것에 대한 가책이 그것에 대한 눌림이 있는만큼 그것을 벗어버리고 싶은 그런 욕망이 생길 수 있고, 그래서 죄되어있는 죄된 부분을 찾아서 거기 눌리고 가책 받는 그것하고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그 욕망이 자기 속에 강한만큼 그 사람은 예배시간에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을 수 있고 성경 읽으면 은혜 받을 수 있고 집회를 가면 은혜를 받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말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찾아가시니까. 마태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을 찾아갔고 또 마태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을 찾은 죄인이 누굽니까, 성경에? 마태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을 찾아간 죄인은 삭개오는 더 적극적으로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삭개오는 마태보다 더 큰 죄인입니다. 그는 세리장이니까. 더 큰 죄인인데 주님 만나고 싶어서 뽕나무까지 올라갔습니다. 주님을 적극적으로 찾으니까 더 만나게 되어졌고. 38년된 병자는 주님이 찾아가신 중에서 가장 오래된 병자되니까 주님이 다른 사람 놔두고 그 사람을 가장 먼저 찾아갔습니다. 가장 오래된 병자를 주님이 가장 먼저 찾아갔다. 이걸 도덕적으로 그 사람이 병이 너무 중하니까 주님이 찾아갔다 이렇게도 볼 수 있으나 그보다는, 병이 가장 중하다 그말은 죄가 가장 많다 그뜻이고 죄가 많다는 그말은 그 죄가 많으니까 자기의 죄인됨을 아니까 그 죄에서 해방시켜줄 구주가 그만큼 더 간절하게 갈급하게 필요하다. 갈망하고 갈구를 하고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찾아가신 겁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있어야 되지 이게 없으면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다,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다. 주님은 의원으로 오셨고 죄인의 구주로 오셨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에게는 주님은 필요없고 자기가 죄인됨이 없는 사람에게는 구주이신 주님은 해당되지를 않는 겁니다. 나는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러 왔다 이것이니까.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방법, 첫째, 주님이 당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은 말씀이 있고 그 말씀 속에 영감이 있고 섭리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적극적으로 주님을 찾아가는 것은, 지름길로 주님을 찾아가서 만나는 방법은 말씀을 알고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인데 이 말씀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병든 자를 찾아오신 주님이고 죄인을 찾아오신 구주기 때문에 우리는 내 속에 마음에 병든 것 몸에 병든 것 생활에 병든 것 인간의 모든 병든 부분을 찾아야 되고 그것을 고쳐 치료 받기를 원하는 이것이 있어야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찾아오신다 하는 이것을 하나 꼭 기억을 하십시다. 실질적으로 한번 그래봐야 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 갈급함이 없고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그런 우리 신앙 모습이 되는 것은 바로 오랜 신앙생활속에 그 신앙생활이 의식적이고 습성적이고 의례적인 이스라엘 종교 말년에 바리새인들처럼 그런 생활로 점점 젖어들어가다보니까 나의 죄인됨을 깨닫지 못하고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그런 욕망이 식어져있기 때문에 주님이 나와 멀어지고 떠나있으니까 우리는 신앙이 시들시들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거는 필연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 있어야 되겠고.
그다음 두 번째 기억할 것은, 죄인에 대한 자세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어두워지고 타락을 했으면 사람 자체를 아예 분리를 해놓고 ‘너희하고 우리하고는 사람이 틀린다.’ 이렇게 했습니다. ‘나는 저 세리들과도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그러니까 어찌 선생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느냐. 사람 자체를 아예 차별을 하고, 그들을 가까이 하다가 그들에게 감염되서 자기들도 죄인될까 염려되서 그래서 멀리한 것이 아니고 아예 자기들은 의인이고 저 사람들은 죄인이니까 상종 자체를 아예 그런 각도에서 안한 것이니까 이거는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진노거리가 되어진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비난하니까 주님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한데, 나는 의사고 의원이고 이들은 병자니까 내가 필요하고, 반대로 너희들은 건강하다 자처하는 사람들이니까 내가 필요없고, 너희들은 의인이니까 구주가 필요없고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참 무서운 말씀이지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제사라는 것은 기독교에 신앙생활에 가장 중심되는게 제사입니다. 구약시대든 지금이든. 구약시대에도 제사는 하나님 백성들 생활에 가장 중심이고 그들의 모든 생활에 목적이 중심이 바로 제사였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생활은 전부가 제사에 다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활의 환경은 성전이었고 성전의 중심은 제사였고, 그랬는데 주님이 오셔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까 그게 무슨 뜻인가? 제사라는 것은 제물이 중심이고, 제물은 피가 중심이고 그것은 주님 오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 대속 이걸 말씀하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중심이고 근본이고 전부인데 이걸 원치 않는다 긍휼을 원한다 그말은 무슨 뜻인가? 제사란 것은 긍휼 없는 제사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만약에 주님 대속이 사랑이 아닌 우리를 구원해서 사랑이 아닌 대속이면 그 대속을 어디 쓰겠습니까? 대속의 목적은 사랑입니다. 대속이 구원이고 사랑인데 말하자면은 그런 것인데, 제사의 목적은 긍휼입니다. 긍휼이 뭐냐? 사랑이고 사랑이 뭐냐? 구원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그게 긍휼이고 사랑이고 그게 제사의 목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 대속은 전부인데 그 대속은 어떤 각도에서 보면은 그 대속은 하나의 방편이라 이래 말하면 됩니까? 교리를 좀 아시는 분들이 생각해보시지요. 대속은 하나의 방편이라 그래 말하면 됩니까? 이런 교리를 알고 연결시켜서 이게 생각이 좀 되고 그래 되야 되는데, 그래서 주님 대속은 하나의 방편이다. 그런데 그게 실제인데, 그러면 목적은 뭐냐?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그말이지요, 인간구원. 인간을 하나님하고 연결시키는 것, 이걸 제가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너무 예민한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여기 본문에 말씀보면은 그렇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그리 말씀하셨으니까 주님이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말씀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라, 배워라. 제사라는 것은 구약시대 모든 제사도 그렇고 제사라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긍휼 이것이 최종의 목적이다 그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죄인된 사람을 볼때 저 사람은 죄인이니까 나는 죄가 없으니까 그래서 죄인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나는 죄 없으니까 깨끗하고, 그래서 죄인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그래 취급하면 하나님 앞에 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죄인을 볼때는 저나 나나 꼭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는 은혜를 덜 주셔서 죄인 된 것이고 나는 은혜를 더 주셔서 내가 의인되었으니까 내 의를 저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으면 나눠 주십시오. 차라리 저 사람이 죄인 되어서 멸망 받고 나는 의인 되어서 구원받는데, 저는 죄인이니까 멸망 받아 마땅하고 나는 의인이니까 구원받아 마땅하다는 그런 마음보를 가지면 하나님 앞에 기뻐하는 마음이 안된다는 겁니다. 저 사람은 죄인인데 멸망 받고 나는 의인이라서 구원받는데, 주님이여 할수만 있으면 내 의를 저 사람에게 나눠줘서 같이 구원 받게 하시던지 아니면 차라리 나도 함께 내가 죄를 안 지었어도 저 사람하고 같이 멸망까지는 말을 못해도 벌을 받게 하던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마음은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긍휼의 마음이지 나는 의를 행해서 의인 됐으니까 구원 받아 마땅하고 저 사람은 죄 지어서 멸망 받으니까 멸망 받아 마땅하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 앞에 심히 근심거리가 되고 기뻐하심을 받지 못하는 마음 자세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그 범위가 어떠한지, 방향이 어떤지를 우리는 심각하게 바로 깨달아 알아야 됩니다. 어떤 경우도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이 아무리 어떤 죄악 속에 빠져도 우리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을 정죄하고 멸망받아 마땅하다는 그런 방법으로 이런 저런 말, 순간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 속 깊이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이 같이 지음받은 우리들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완전히 타락하고 어두워져서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인간구원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긍휼이라는 것, 하나님의 뜻이란 것은 바리새인들에게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완전한 외식이었고 그렇게 어두워지니까 예수님을 못 박았고 그렇게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거지요.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러니까, 오늘 말씀에서 두가지를 기억하십시다. 하나는 은혜 받기를 원하면 주님을 만나야 되고 주님을 만나려면 두가지가 있어야 됩니다. 내 속에 죄인된 요소 부분들을 찾아봐야 됩니다. 하나님을 주님을 목표로 하고 원형으로 삼고 주님 말씀을 기준 잣대로 삼아가지고 주님과 다른 내 마음, 주님과 다른 내 생각, 주님과 다른 내 욕심, 주님과 다른 내 모든 생활, 언행, 모든 대인관계 이걸 찾아보면 수도 없이 많을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걸 알려면 원형을 알아야 모형을 알지요. 자를 가져야, 잣대가 있어야 잣대에 맞는지 틀렸는지 알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알아야 되고 말씀 속에 주님을 알아야 되고 말씀 속에 담겨있는 주님의 뜻을 알아야 되지요. 그래서 거기다 대고 자기 자신과 모든 것을 얹어놓고 보면은 ‘나는 이것도 틀렸고 저것도 틀렸고 죄인 된 것이 굉장히 많은데’ 이걸 자기가 생각을 하고 거기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갈급이 있을때 주님은 그를 찾아오시고 그러면 은혜가 되는 겁니다. 신앙에 힘이 나고. 그런데 우리가 다 바쁘다 보니까, 또 이게 그냥 일반화 되다 보니까 그만 이런 것 자체를 안하니까, 죄인된 것도 찾지 아니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원하는 소원도 없고 그러니 주님을 멀어지고 신앙생활은 하나의 의식적인 그런 습성적인 생활적인 그런 모습이 되어지고 새로운 것은 없어지고 그리 되있는 것이 많은 오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라. 여기서 보면 그렇습니다. 예배 드릴때 보면은, 찬송할 때 보면은 어떤 분들 찬송하고 예배 보는 모습 보면 제가 설교하면서도 은혜를 받습니다. ‘참 저분은 살아있다. 신앙이 팽팽하구나. 살아있구나’ 찬송하는 모습보고 설교 듣는 모습 보고 제가 힘이 나고, 어떤 분들 앉아 있는 것 보면은 쳐다보면 저도 힘이 떨어져버립니다. 설교하면서도 힘이 쏙쏙 빠집니다. 우리가 다 약하니까 이런 모습 저런 모습 있을 수 있겠지만은 어쨌든 힘을 써서 우리는 살아나야 되고 힘을 써야 됩니다. 신앙이 살아나려면 주님을 만나야 되겠고 주님 만나려면 나에게 있는, 우리가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들은 죄가 없습니까? 저는 죄가 너무너무 많아서 나열할 수도 없을만큼 많은 죄를 지어가지고 어찌할바를 모르는데, 그런데 그걸 생각을 하면은 늘 마음이 눌려가지고 있습니다. 눌려가지고 있고 가책을 받고 있고 그러고 있는데, 그게 계속되면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그 욕망이 강하게 일어나야 펄펄 좀 살아날건데. 이게 계속되니까 이것도 식어져버리고 안되고 그러니 참 문제지요. 이걸 찾아야 되고, 이 두가지를 가지고,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볼때, 죄인된 사람을 볼때 우리의 마음은 주님같은 그런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되지, 여기 본문에 바리새인 같은 이런 마음을 가지면 주님 앞에 복 받을 수 없고 주님과도 멀어지고 참 크게 근심거리 진노거리가 되고 만다는 것을 기억을 하고 오늘 오전에 두 가지 좀 생각해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신앙생활은 말씀이 중심이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야되고 우리 갈 길을 찾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인생은 가고 세월은 가고 인생은 넓고 모든 것은 다 두고 떠나갈 세상입니다. 헛된 것에 마음을 다 쏟지 말고 안 믿는 사람들 늙을때 대비해서 보험도 들어두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래라도 좀 믿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조차도 안한다면 맘지막에 어떻게 될런지. 깊이 좀 생각해봅시다.
제목:
요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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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원문
20140803 주후
마태복음 9:9-13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은 각각 사는 모습이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 형태로 또 여러 계층으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생활에 만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고, 또 긍정적인 사고방식 가지는 것도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인생에 사람으로 났으면 사람의 근본을 아는 것이 가장 기본이고 우선이고 또 인생의 마지막을 아는 것도 가장 중요한 그런 일이 되겠고, 그러므로 인생으로 나서 어떻게 인생살이를 해야되느냐 하는 것도 바로 알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 것을 알고 그다음 하나님이 주시는 각자 자기 현실과 자기 형편 처지에 따라서 그리 사는 것이지 인생이 사람 인생의 근본도 모르고 마지막 결과도 모르고 또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가치있게 사는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 되는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고 사람으로서 참 낮은 차원의 생활이라 그리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오전에 백목사님을 예를 들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존경하는 분인데, 그분은 열일곱살인가 그때 일본에 가서 3년동안 일본생활하고 그당시 일본은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치를만큼 그렇게 모든 면에 문화가 아주 발달된 그런 선진국이었고 우리나라는 쇄국정책을 써서 나라문을 꼭꼭 걸어잠궈가지고 외국에서 무역하자고 오는 배를 침몰시키고 그래가지고 선진문물이 들어오지 못하니까 아주 우물안에 개구리처럼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목사님 가실때쯤은 개화가 되기 시작한 그런 때지요. 그런데 이미 늦었고, 일본은 최첨단을 달리고 있을 그때인데 3년을 다니면서 할 수 있는 거는 다 해봤다 그럽니다. 돈 버는게 목적이 아니고 가서 ‘이 나라의 문물을 배워오자’ 그 목적으로 가서 돈도 돈이지만은 많은 기술을 익히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하는 그걸 목적으로 가서 3년동안 다니다 보니까 어지간히 볼만큼 보고 배울만큼 배웠다 싶어서 돌아왔고, 그다음 결혼하고 경제생활하는데 그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의 속국이 되어졌었고, 나라 주권을 잃었고 식민지 되어있었는데 그래서 그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돈되는 그런 사업권은 다 가지고 있고 조선 사람에게는 돈 안되는 그런 것만 주는 겁니다. 그중에서 가장 한국 사람 조선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돈 많이 버는 업종이 바로 술 제조업, 술을 만들어파는 그걸 허가를 받아서 그래한 것이 소위 그때 저희들 어릴때도 술도가라 그랬는데, 술도가 그걸 허가를 얻어서 그래서 돈을 굉장히 많이 벌어서 벌써 20대 중반되기전에, 20대 초중반 그 사이 스물 한두살 두세살 그때 돈을 엄청나게 벌어서 그 지방에서 백목사님의 돈을 다 걷어가버리면 금융조합이 운영이 안될만큼, 요즘으로 말하면 은행인데, 운영이 안될만큼 그렇게 되어있었다 그러지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돈을 모으고, 돈이 많으니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오만 것 다 해봤지만은 마음속에는 늘 허전한 구석이 있는데 그 허전한 구석을 매꾸어보려고 채워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더라는 거지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게 인생의 근본 문제고 궁극의 문제인데, 그래서 산에 가서 나무를 쳐다보면 나무도 나보다 수명이 길고, 바위를 쳐다보면 바위도 나보다 수명이 길고 그런데 인생이란 것이 이게 참 죽으면 그만이라 그러니까 너무 허무하게 그래 되니까 도무지 너무 허무해서 견딜 수 없는, 뭔가 인생의 근본과 뭐가 있을 것 같은데 암만 찾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 그런 갈급함을 가지고 겉으로 보기에는 돈 많이 벌고 술에 빠져 사는데 속에는 그런 갈급이 있어서 끊임없는 전투가 계속 되어지고 그런데 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 지역에 도평 계면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 보면, 지금은 두매 산골 시골이라서 사람이 적은데 오전에 말씀드렸지만은 저희들 어릴때만 해도 시골에 사람이 많이 살았습니다. 위천이라는 거기도 지금은 교인이 4-50명 이런데, 목사님 목회하실 때 잘하기도 했겠지만은 4백명씩 모이고 그랬다거든요. 또 봉산 산골짝에도 많이 모이고. 거기 사람들이 옛날에는 도시도 많지만은 시골 생활 많이 했기 때문에 농사가 생활에 중심이니까 사람이 많았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 생활 모습을 보면 그냥 때가 그런 때고 경제가 그런 경제니까 하루 세끼 밥 먹고 살면 만족하는 그런 정도의 사람들이니까 백목사님의 그 인간의 근본을 두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그 갈급을 대화할만한 상대가 없는 겁니다. 그 동네 전부를 다 통틀어도. 마음을 터놓고 말해봐야 대화가 안되니까.
사람이란 것이 꼭 같은 이목구비 수족을 가지고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이 살아도 내면적으로는 굉장한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마찬가지로 한 교회안에서 신앙생활해도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보다 그 속의 내면의 차이는 사람마다 굉장히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큰 오판되기 쉬운 것이고, 우리는 우리 자신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사람이 그냥 하루 세끼 밥 먹고 살고 그날 그날 하루하루를 아무 사고 없이 무사하게 지나가고 특별한 그런 사건없이 등 따스하고 배부르고 가정 평안하고 큰 걱정없이 그날그날 살아가면 그게 인생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살면 큰 세월 허비하는 그런 과오, 누를 범하게 될 것이다 그말입니다.
사람이란 것은 마음에 근심 걱정 혹은 갈급이, 그것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갈급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권력에 권세에 갈급도 있고 명예 갈급도 있고 배움에 갈급도 있고 사람에 대한 갈급도 있고 좋은 직장에 대한 갈급도 있고 오만 종류의 갈급 배고픔을 가지고 세상의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그런데 한사람 한사람 다 안만나봐서 모르겠습니다만은 일반적으로 생각해볼때 그럴 것 같습니다. 무엇을 잡아도, 어떤 것을 잡고 풍족하게 만족할만큼 얻어도 이 세상것을 가지고 사람이 근본적으로 만족하다 할 수가 없지 않을까. 하나님을 일반 사람들이 모르니까 자기도 모르고 형제도 모르고 아버지도 몰랐고 할아버지도 몰랐고 다 모르니까, 왜 모르는가. 아는 사람은 아는데. 하나님께서 안 알려주시면 하나님은 알 길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거기 폭 빠진 그 세계에 사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알고 싶어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고 도무지 모르니까, 그러니 아예 깜깜하게 모르는 어둠 속에 살고 있으니까 하나님 알지 못하지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좀 돈 가지고 권세 가지고 명예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욕망하는 그런 것 가지고 근본적인 인생의 완전한 해결을 찾지는 못할 것 아닌가. 그들이 모르니까 답은 못 찾는데, 뭔가 허전한 그런 것이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말이지요. 그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입니다. 아마, 모르겠습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그런 사람들하고 대화를 해볼 기회도 없고 많이 안해봤지만은, 주변에 혹시 그런 사람 있으면 깊은 대화를 해본다면 ‘저 사람은 세상적으로 성공을 했는데 저 사람은 과연 만족할까?’ 하고 대화해보면, 근본으로 접근을 아예 그거는 금기사항처럼 건드리면 안되는 그런 것들처럼 그쪽으로 모두 들어가지 아니하고 그것 건들면 아프고 또 건드려봐야 모르고 하니까 거기는 건드리지 않고 안 들어가서 몰라서 그러하지 그것까지를 파고 들어가서 인생에 만족을 물어본다면, 과연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 만족하고 살 수 있을까. 한평생 참 잘 살았다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그래도 그 사람들도 표현은 그래해도 아마 세상 떠날때가 되면은 좀 뭔가 보여지게 되면 참 후회나 이런게 대단히 많지 않을까. 예수 믿는 사람은 더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이 됐는데, 해결이 다 됐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직까지도 믿는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아직까지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현실 현상 생활을 돌아보면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고 때때로는 감사도 기쁨도 소망도 넘치지만은 많은 부분들을 보면은 그만 빈들에 마른 풀 같이 그렇게 시들은, 예배 시간에 꾸벅 꾸벅 조는 사람들이 그러지 않은가요. 대개 보면 여름철 장마철 이때가 되면 그런걸 더 많이 느낍니다. 새벽기도 보면은, 새벽에 오면은 새벽기도 오기는 와야 되고 오면 예배 마치고 나면 그만 피곤하니까 노곤한 몸이, 몸이 육신이 피곤한 거는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주일도 그런 경우가 있고. 그러니까, 그거는 단편적인데, 전체적으로 보면 신앙의 모습에서 신앙생활에서 마음속에 뜨거움이 없고 간절함이 없고 또 감사와 기쁨과 충만한 그런 것이 없이 뭔가 좀 시들시들하고 힘이 없고 좀 활기가 없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보니까 나무들을 물을 줬는데도 시들시들한 그래서 이게 때가 다되서 죽어가는가 싶었는데 보니까 어제 비가 쏟아지고 나니까 나뭇이파리가 새파랗게 빳빳하게 돋아올라오는데 아 참, 그동안에 보니까 물을 너무 좀 적게 줬나보다. 날이 너무 뜨겁고 그랬는가보다 그런 느낌을 또 한번 받아봤습니다. 그전에는 매일 물을 줬는데도 시들시들하더니 어제 하루종일 비 맞고 저녁엔가 보니까 아주 새파랗게 돋아난 것 보니까 이게 그런 게 아니로구나. 시냇가에 심은 나무들은 잎사귀가 항상 청청하고 푸르고 때가 되면 과실을 쫙쫙 맺고 그래하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정상으로 하면 언제나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한, 입에는 찬송이 끊어지지 않고 소망이 넘치는 이런 생활 하는 그게 정상인데, 설교하는 저부터 보면은 그것이 잘 되지 않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가? 시들은 우리들의 영혼. 왜 그리 되어졌는가를 찾아보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지만은 한 말로 간단하게 정곡을 찔러 말한다면 주님을 떠나서,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 그러하다. 결혼한 부부가 색시가 신랑하고 떨어져서 오래 있으면 처음에는 괜찮다가도 좀 시간 지나고 나면 병이 난다 그러지요. 보고싶어 상사병이 들어서 병이 난답니다. 시들시들하게 말라가고. 그것처럼 주님을 우리가 떠나버리니까 우리 신앙이 시들어져있다 그말이지요. 그런데 그 주님 만나는 방법, 지름길을 본문에서 우리가 공부한건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은 이 지름길입니다.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을 것을 주님이 보시고 지나가다 주님이 마태를 불렀습니다. ‘나를 쫓으라’ 그러니까 마태가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생각해볼때 그 속에 대화도 있었겠고 뭐 있었겠지만은 그 많은 시간 걸리지 않은 것 같은데,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를때 엘리사가 즉시 따라갔던 것처럼, 주님이 마태를 부르시니까 마태가 주저하지 아니하고 즉시 직장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백목사님 밑에서 평소도 그랬는가 모르겠는데, 그분 성함이 배추달 아니고, 전도사님, 순교하신 전도사님 설교록에 많이 나오는 분 누굽니까, 0샘? 박? 박기천 조사님. 그분이 면직원이었다 그러지요, 아마? 면직원이었는데, 공무원이지요. 면직원 공무원이었는데 백목사님 집회 한번 딱 참석하고 그날론가 즉시 그 직장 그만두고 전도사로 나섰다 그러지요. 그것처럼 마태가 주님이 부르시니까 즉시 직장 사면하고 주님을 바로 따라갔는데 그 따라간 내면을 설교록 해석이 되있기를 그리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리 될 수 있는가를 사람의 심리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그 마태라는 사람의 직업이 세리고, 세리라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죄인 중에서도 아주 악랄한 나쁜 그런 직업이고 그런 사람들로 인식이 되어있고, 그 사실을 마태도 아는 것이고, 그런데 결과적으로 마태가 주님을 따라간 그 심리를 연결시켜 보면 마태라는 사람이 그렇게 동족들의 피를 빨아먹는 악랄한 그런 짓은 안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그게 자기 직업이니까 ‘나는 세리다. 죄인이다.’ 그게 늘 마음속에 눌려있다 그말이지요. 죄인임을 아니까 자기가 죄인임을 아니까 고개 못 들고 어깨 못 펴고 가책 받고 늘 움츠려 들어서 숨어야 되고 떳떳하지 못한 그런 것이 겉으로야 뭐 달리했겠지만은 속에는 그런게 들어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죄인이라는 그 사실을 스스로 강하게 느끼니까 반동으로, 한편으로는 거기서 벗어나고싶은 그런 욕망 또한 강하게 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한 거지요, 그거는.
그러니까 그것이 하루이틀 아마 제법 장기간 계속 됐겠지요. 적어도 몇 달, 몇 년 됐는지. 그리 계속 돼서 한편으로는 죄인됨으로 인한 눌리고 가책되는 그 마음이 굉장히 크고 강하고 한편으로는 그러므로 거기서 벗어나서 자기도 떳떳하게 사람답게 당당하게 더해서 의인으로 살고싶은 그런 욕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 차, 그러니까 주님이 부르실때쯤에는 그게 절정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두 양극의 절정이 되어졌을때 주님이 부르시니까 주저함 없이 즉시 주님을 따라서 나설 수가 있지 않았겠는가? 이게 우리에게 가르치는 구원의 도리라 그말입니다.
여기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무형의 주님으로 계시는데, 오늘 말씀에 오전에 그거는 빠졌는데,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방법이 있는데, 주님이 당신을 나타내실 때 제일 처음에 어떻게 나타내십니까? 주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 제일 처음에 방법이 무엇입니까? 말씀으로 나타내시고, 두 번째는요? 영감 역사 감화감동으로 나타내시고, 세 번째는요? 섭리역사로, 실제 그렇던가요? 이거는 배워가지고 실제 살펴보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실때는 말씀 속에 당신의 모습을 알려놨고, 읽으면 압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나타내신 그 말씀을 가지고 읽고 믿고 그분을 모시고 그분을 찾아들어가보면 양심 통해서 성령이 감화 감동 영감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알려주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객관 역사입니다. 이게 있고, 그다음 세 번째는 여러 가지 섭리로 내 주변에 사람을 변화시킨다든지 환경을 바꾼다든지 일을 되게 하고 안되게 하는 징계라던지 이런 섭리역사로 하나님 살아계심, 어떤 분인 것을 알리시는 이 새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새역사 있는데, 이게 전부 하나님의 역사지요. 하나님의 역사인데, 이런 과정들 혹은 이런 방편들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알고 주님을 만나는데 그런데 이런 말씀과 영감과 섭리 역사를 통해서 주님을 찾고 만나되 우리들이 상대하는 주님은 말씀이 아니고 영감이 아니고 섭리역사가 아니고 인격체, 사람으로 말하면 격위를 가지신 인격의 원형이신 살아계신 그 하나님, 그러나 무형이지만은 완전자기 때문에 형체에 갇힐 수 없어 무형이나, 그러나 무형인데 그분은 지정리를 가지신 인격 격위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가 찾아서 만나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궁극의 목적이고 나아가는 방향이다 그말입니다. 사람을 상대할 때 높은 사람이던지 좋아하는 사람이던지 상대할 때 그 사람이 전해오는 말도 들을 수 있고 그 사람이 이런 이런 말 합니다,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을 알 수 있고 사귈 수 있고, 또 그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도 사귈 수 있고, 그가 보내주는 선물을 통해서도 사귈 수 있고 사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라든지 그가 하는 일이라던지 보내주는 선물은 이거는 전부 그분이, 그 사람이 나에게 주는 하나의 그가 살아있고 나와의 관계 되어있다는 표시고 증거지 그분 자체는 아니다 그말입니다.
정말 진정한 사귀는 인간 대 인간은 그분을 만나서 직접 만나 얼굴 대면을 하고, 혹은 대면 안해도 목소리 듣든 그래가지고 인격 대 인격으로 사귀는 그것이 진정한 사귐이지 말을 듣고, 물론 관계 따라 그러나, 말을 듣고 말로 서로 대화하고 사귀고 선물 주고 받고 일을 주고 받고 하는 그것하고 인격 대 인격으로 사귀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너무 제가 추상적입니까, 이 말씀이. 우리가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게 너무 어려울지 모르겠는데, 지금 설교하면서 저도 그렇게까지는 지금 도달해보지를 못하는데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나 깊은 교제한 영교의 그런 사람들, 아가서에 보면 그런게 많이 있고, 그런 분들은 하나님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을 말씀으로도 만나고 영감으로도 만나고 섭리 역사로도 만나지만은 그러나 살아계신 그분을 인격 대 인격이 만나는 것처럼 그런 주님으로 그렇게 만나는 상대하는 그런 상대가 있다 그말입니다. 이것이, 그래서 영감 역사가 그분이 역사하시니까 그리 되는데, 이게 좀 어찌보면 또 위험할 수 있을란가. 영감 이상에 뭐라하면은 어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분의 실체를 우리가 늘 생각을 하고 형체 없는 무형의 완전자이신 그분을 늘 사모하며 찾아나가는, 만나려고 애를 쓰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방법은, 여기 본문에 말씀하신대로 마태가 주님을 만나게 된 그 원인이 뭐냐, 근거나 뭐냐. 오다가다 우연히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중풍병자를 고치고 가는 길이라서 그리 가다 보니까 마태가 있어서 마태를 불렀고 한 것이 겉보기에는 그리 되어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영원전부터 예정된 일이고 이때가 되어서 마태의 마음속에는 죄인됨과 거기서 벗어나 의인되고픈 그 양극단에 갈급과 죄인됨과 그 갈급, 이것이 절정에 이른 그때가 되어있었고, 그때 주님은 그리 찾아가서 마태를 만나서 불렀고, 마태는 즉시 주님을 따라갔고, 이게 바로 구원의 도리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 예배시간에 은혜 받기를 원하십니까? 은혜를 받고싶으면. 집회가서 은혜 받기를 원하십니까? 은혜라는 것은 주님 만나는 것보다 더 큰 은혜가 있겠습니까? 말씀의 은혜받고 말씀의 은혜 받는 이유는 말씀 속에 영감 만나기 위해서 은혜 받는 것이고, 그 영감은 주님을 만나는 것이니까 그 속에서. 그러니까 예배 시간이던지 또 개인적으로 성경 읽고 신앙생활 할때던지, 집회를 참석하던지 어디서든지 은혜 받기를 원한다면 마태가 가졌던 두 가지를 가져야 된다 그말입니다. 하나는 무엇인가? 하나는 뭡니까? 하나는 뭐지요? 자기의 죄인된 죄된 요소부분을 발견하는 겁니다. 찾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더 위로 올라가면 하나님. 하나님을 표준하고 원형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잣대로 삼아서 하나님과 다른 것, 말씀과 다른 자기 자신의 모습부터 자기 속에 있는 심신의 기능 요소와 활동 작용의 과거와 현재 여러 가지 면이 있지 않습니까? 그 모든 것에서 주님과 다른 것을 찾고 말씀과 달라서 죄되는 그 죄되어있는 그 부분들 그 요소들 그 활동들 그리 되어진 그 결과들 이런 것들을 자기가 찾아서 알고 그것에 대한 갈급이 그것에 대한 가책이 그것에 대한 눌림이 있는만큼 그것을 벗어버리고 싶은 그런 욕망이 생길 수 있고, 그래서 죄되어있는 죄된 부분을 찾아서 거기 눌리고 가책 받는 그것하고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그 욕망이 자기 속에 강한만큼 그 사람은 예배시간에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을 수 있고 성경 읽으면 은혜 받을 수 있고 집회를 가면 은혜를 받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말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찾아가시니까. 마태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을 찾아갔고 또 마태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을 찾은 죄인이 누굽니까, 성경에? 마태보다 더 적극적으로 주님을 찾아간 죄인은 삭개오는 더 적극적으로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삭개오는 마태보다 더 큰 죄인입니다. 그는 세리장이니까. 더 큰 죄인인데 주님 만나고 싶어서 뽕나무까지 올라갔습니다. 주님을 적극적으로 찾으니까 더 만나게 되어졌고. 38년된 병자는 주님이 찾아가신 중에서 가장 오래된 병자되니까 주님이 다른 사람 놔두고 그 사람을 가장 먼저 찾아갔습니다. 가장 오래된 병자를 주님이 가장 먼저 찾아갔다. 이걸 도덕적으로 그 사람이 병이 너무 중하니까 주님이 찾아갔다 이렇게도 볼 수 있으나 그보다는, 병이 가장 중하다 그말은 죄가 가장 많다 그뜻이고 죄가 많다는 그말은 그 죄가 많으니까 자기의 죄인됨을 아니까 그 죄에서 해방시켜줄 구주가 그만큼 더 간절하게 갈급하게 필요하다. 갈망하고 갈구를 하고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찾아가신 겁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있어야 되지 이게 없으면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다,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다. 주님은 의원으로 오셨고 죄인의 구주로 오셨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에게는 주님은 필요없고 자기가 죄인됨이 없는 사람에게는 구주이신 주님은 해당되지를 않는 겁니다. 나는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러 왔다 이것이니까.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방법, 첫째, 주님이 당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은 말씀이 있고 그 말씀 속에 영감이 있고 섭리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적극적으로 주님을 찾아가는 것은, 지름길로 주님을 찾아가서 만나는 방법은 말씀을 알고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인데 이 말씀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병든 자를 찾아오신 주님이고 죄인을 찾아오신 구주기 때문에 우리는 내 속에 마음에 병든 것 몸에 병든 것 생활에 병든 것 인간의 모든 병든 부분을 찾아야 되고 그것을 고쳐 치료 받기를 원하는 이것이 있어야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찾아오신다 하는 이것을 하나 꼭 기억을 하십시다. 실질적으로 한번 그래봐야 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 갈급함이 없고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그런 우리 신앙 모습이 되는 것은 바로 오랜 신앙생활속에 그 신앙생활이 의식적이고 습성적이고 의례적인 이스라엘 종교 말년에 바리새인들처럼 그런 생활로 점점 젖어들어가다보니까 나의 죄인됨을 깨닫지 못하고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그런 욕망이 식어져있기 때문에 주님이 나와 멀어지고 떠나있으니까 우리는 신앙이 시들시들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거는 필연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 있어야 되겠고.
그다음 두 번째 기억할 것은, 죄인에 대한 자세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어두워지고 타락을 했으면 사람 자체를 아예 분리를 해놓고 ‘너희하고 우리하고는 사람이 틀린다.’ 이렇게 했습니다. ‘나는 저 세리들과도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그러니까 어찌 선생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느냐. 사람 자체를 아예 차별을 하고, 그들을 가까이 하다가 그들에게 감염되서 자기들도 죄인될까 염려되서 그래서 멀리한 것이 아니고 아예 자기들은 의인이고 저 사람들은 죄인이니까 상종 자체를 아예 그런 각도에서 안한 것이니까 이거는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진노거리가 되어진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비난하니까 주님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한데, 나는 의사고 의원이고 이들은 병자니까 내가 필요하고, 반대로 너희들은 건강하다 자처하는 사람들이니까 내가 필요없고, 너희들은 의인이니까 구주가 필요없고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참 무서운 말씀이지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제사라는 것은 기독교에 신앙생활에 가장 중심되는게 제사입니다. 구약시대든 지금이든. 구약시대에도 제사는 하나님 백성들 생활에 가장 중심이고 그들의 모든 생활에 목적이 중심이 바로 제사였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생활은 전부가 제사에 다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활의 환경은 성전이었고 성전의 중심은 제사였고, 그랬는데 주님이 오셔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니까 그게 무슨 뜻인가? 제사라는 것은 제물이 중심이고, 제물은 피가 중심이고 그것은 주님 오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 대속 이걸 말씀하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중심이고 근본이고 전부인데 이걸 원치 않는다 긍휼을 원한다 그말은 무슨 뜻인가? 제사란 것은 긍휼 없는 제사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만약에 주님 대속이 사랑이 아닌 우리를 구원해서 사랑이 아닌 대속이면 그 대속을 어디 쓰겠습니까? 대속의 목적은 사랑입니다. 대속이 구원이고 사랑인데 말하자면은 그런 것인데, 제사의 목적은 긍휼입니다. 긍휼이 뭐냐? 사랑이고 사랑이 뭐냐? 구원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그게 긍휼이고 사랑이고 그게 제사의 목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 대속은 전부인데 그 대속은 어떤 각도에서 보면은 그 대속은 하나의 방편이라 이래 말하면 됩니까? 교리를 좀 아시는 분들이 생각해보시지요. 대속은 하나의 방편이라 그래 말하면 됩니까? 이런 교리를 알고 연결시켜서 이게 생각이 좀 되고 그래 되야 되는데, 그래서 주님 대속은 하나의 방편이다. 그런데 그게 실제인데, 그러면 목적은 뭐냐?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그말이지요, 인간구원. 인간을 하나님하고 연결시키는 것, 이걸 제가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너무 예민한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여기 본문에 말씀보면은 그렇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그리 말씀하셨으니까 주님이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말씀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라, 배워라. 제사라는 것은 구약시대 모든 제사도 그렇고 제사라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긍휼 이것이 최종의 목적이다 그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죄인된 사람을 볼때 저 사람은 죄인이니까 나는 죄가 없으니까 그래서 죄인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나는 죄 없으니까 깨끗하고, 그래서 죄인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그래 취급하면 하나님 앞에 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죄인을 볼때는 저나 나나 꼭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는 은혜를 덜 주셔서 죄인 된 것이고 나는 은혜를 더 주셔서 내가 의인되었으니까 내 의를 저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으면 나눠 주십시오. 차라리 저 사람이 죄인 되어서 멸망 받고 나는 의인 되어서 구원받는데, 저는 죄인이니까 멸망 받아 마땅하고 나는 의인이니까 구원받아 마땅하다는 그런 마음보를 가지면 하나님 앞에 기뻐하는 마음이 안된다는 겁니다. 저 사람은 죄인인데 멸망 받고 나는 의인이라서 구원받는데, 주님이여 할수만 있으면 내 의를 저 사람에게 나눠줘서 같이 구원 받게 하시던지 아니면 차라리 나도 함께 내가 죄를 안 지었어도 저 사람하고 같이 멸망까지는 말을 못해도 벌을 받게 하던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마음은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긍휼의 마음이지 나는 의를 행해서 의인 됐으니까 구원 받아 마땅하고 저 사람은 죄 지어서 멸망 받으니까 멸망 받아 마땅하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 앞에 심히 근심거리가 되고 기뻐하심을 받지 못하는 마음 자세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그 범위가 어떠한지, 방향이 어떤지를 우리는 심각하게 바로 깨달아 알아야 됩니다. 어떤 경우도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이 아무리 어떤 죄악 속에 빠져도 우리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을 정죄하고 멸망받아 마땅하다는 그런 방법으로 이런 저런 말, 순간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 속 깊이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이 같이 지음받은 우리들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완전히 타락하고 어두워져서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인간구원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긍휼이라는 것, 하나님의 뜻이란 것은 바리새인들에게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완전한 외식이었고 그렇게 어두워지니까 예수님을 못 박았고 그렇게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거지요.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러니까, 오늘 말씀에서 두가지를 기억하십시다. 하나는 은혜 받기를 원하면 주님을 만나야 되고 주님을 만나려면 두가지가 있어야 됩니다. 내 속에 죄인된 요소 부분들을 찾아봐야 됩니다. 하나님을 주님을 목표로 하고 원형으로 삼고 주님 말씀을 기준 잣대로 삼아가지고 주님과 다른 내 마음, 주님과 다른 내 생각, 주님과 다른 내 욕심, 주님과 다른 내 모든 생활, 언행, 모든 대인관계 이걸 찾아보면 수도 없이 많을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걸 알려면 원형을 알아야 모형을 알지요. 자를 가져야, 잣대가 있어야 잣대에 맞는지 틀렸는지 알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알아야 되고 말씀 속에 주님을 알아야 되고 말씀 속에 담겨있는 주님의 뜻을 알아야 되지요. 그래서 거기다 대고 자기 자신과 모든 것을 얹어놓고 보면은 ‘나는 이것도 틀렸고 저것도 틀렸고 죄인 된 것이 굉장히 많은데’ 이걸 자기가 생각을 하고 거기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갈급이 있을때 주님은 그를 찾아오시고 그러면 은혜가 되는 겁니다. 신앙에 힘이 나고. 그런데 우리가 다 바쁘다 보니까, 또 이게 그냥 일반화 되다 보니까 그만 이런 것 자체를 안하니까, 죄인된 것도 찾지 아니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원하는 소원도 없고 그러니 주님을 멀어지고 신앙생활은 하나의 의식적인 그런 습성적인 생활적인 그런 모습이 되어지고 새로운 것은 없어지고 그리 되있는 것이 많은 오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라. 여기서 보면 그렇습니다. 예배 드릴때 보면은, 찬송할 때 보면은 어떤 분들 찬송하고 예배 보는 모습 보면 제가 설교하면서도 은혜를 받습니다. ‘참 저분은 살아있다. 신앙이 팽팽하구나. 살아있구나’ 찬송하는 모습보고 설교 듣는 모습 보고 제가 힘이 나고, 어떤 분들 앉아 있는 것 보면은 쳐다보면 저도 힘이 떨어져버립니다. 설교하면서도 힘이 쏙쏙 빠집니다. 우리가 다 약하니까 이런 모습 저런 모습 있을 수 있겠지만은 어쨌든 힘을 써서 우리는 살아나야 되고 힘을 써야 됩니다. 신앙이 살아나려면 주님을 만나야 되겠고 주님 만나려면 나에게 있는, 우리가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들은 죄가 없습니까? 저는 죄가 너무너무 많아서 나열할 수도 없을만큼 많은 죄를 지어가지고 어찌할바를 모르는데, 그런데 그걸 생각을 하면은 늘 마음이 눌려가지고 있습니다. 눌려가지고 있고 가책을 받고 있고 그러고 있는데, 그게 계속되면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그 욕망이 강하게 일어나야 펄펄 좀 살아날건데. 이게 계속되니까 이것도 식어져버리고 안되고 그러니 참 문제지요. 이걸 찾아야 되고, 이 두가지를 가지고,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볼때, 죄인된 사람을 볼때 우리의 마음은 주님같은 그런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되지, 여기 본문에 바리새인 같은 이런 마음을 가지면 주님 앞에 복 받을 수 없고 주님과도 멀어지고 참 크게 근심거리 진노거리가 되고 만다는 것을 기억을 하고 오늘 오전에 두 가지 좀 생각해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신앙생활은 말씀이 중심이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야되고 우리 갈 길을 찾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인생은 가고 세월은 가고 인생은 넓고 모든 것은 다 두고 떠나갈 세상입니다. 헛된 것에 마음을 다 쏟지 말고 안 믿는 사람들 늙을때 대비해서 보험도 들어두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래라도 좀 믿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조차도 안한다면 맘지막에 어떻게 될런지. 깊이 좀 생각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