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1208-주후(마16:13-24)
여론신앙과 주관신앙의 실패2013-12-09조회 516추천 42
본문: 마16:13-24
제목: 여론 신앙, 주관 신앙의 실패
요점:
1. 5일예배 2가지 복습
1)자기 구원
- 우리 구원은 자기 성화
- 자기 성화에 중요하게 기억할 것은 현실 지배
- 현실의 주인 되어 지배하고 현실에 피동, 영향 받지 말 것
2)형제 구원
- 형제 구원은 자기 구원 된 만큼
- 형제 구원 위한 일반적 수고 위에 더할 것은
- 자기 범위를 넓혀 주변을 세밀하게 살필 것
2. 여론 신앙의 실패
-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사람 중에 위대한 분으로 모두 인식
-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상대
- 결과는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고 동참
- 여론신앙은 사람들 말 듣고 영향 받고 피동되는 것
- 사람에게 피동은 현실에 피동되는 것
- 사람 따라, 현실 따라가는 여론 신앙 아닌지 자신을 살필 것
- 내가 세상에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신 말씀 기억할 것
3. 주관 신앙의 실패
- 주관이란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
-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사랑하되
- 자기대로 알고 자기대로 섬기고 자기대로 사랑하는 것
- 베드로의 주님 사랑은 진심이지만 순전히 주관적인 것
- 하나님도 알고 사랑도 하고 섬기기도 하지만 자기대로 하는 것이 주관 신앙
- 자기 성격대로, 성향대로 하는 것이 주관 신앙
- 결과는 주님의 길 반대하고 배반하고 도망
4. 영감 신앙만이 성공
-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 혈육이 아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것
- 사람들의 가르침이나 주관이 아닌 말씀에 입각한
- 말씀 -> 신앙양심 -> 영감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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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문)
마태복음 16:13-24
찬송가는 가사에 중점이 있습니다. 오늘 예배 첫 곡을 몇 장 했습니까? 오늘 오후 예배 첫 곡을 찬송가 몇 장 했지요? 135장. 그 찬송의 내용에서 말씀하시는 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그래놓고 후렴에 보면 ‘평화 평화로다’ 어디서 내려온다고요? 하늘 위에서 내려온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1절에 가사 첫 소절에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난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는데 그 평화가 어디서 오느냐? 하늘 위에서 내려온다고 그럽니다. 그러면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그 평화가 어디서 나온다고요?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그 평화가 어디서 나옵니까?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나온다 그 말입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영혼은 영입니까 마음입니까? 영과 밀접한 마음을 말합니다. 내 마음 속에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납니다. 맑은 가락이 뭡니까? 노래고 찬송이지요. 내 영혼의 그 깊은데서 찬송이 나옵니다. 이 찬송을 힘 있게 불렀던 성경인물이 누굴까요? 자기 마음속 깊은데서 터져 나오는 찬송을 견디지 못해서 불렀던 빌립보 감옥에 있던 사도바울, 또 돌에 맞아 죽으면서 원수들 위해서 기도했던 스데반 그들의 마음속 깊은데서 이런 찬송이 울려나왔습니다.
그 찬송은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내 마음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힌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어디 있으랴 안심일세. 이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이게 우리 신앙이고. 구원이란 것은 요렇게 만들어지는 게 구원입니다. 백 목사님 시를 종종 인용을 하지요. ‘폭풍아 불어라’ 그 다음요? ‘노암은 웃는다’ ‘덮은 눈 속에 봄이 오고’ 덮은 눈이라 그 말은 온 대지가 전부 겨울이 됐다 그 말이고 겨울이 되었으니까 북서풍이 불고 얼음이 얼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추운 겨울입니다. 그런데 그 깊은 속에는 봄이 오고 있다 그 말입니다. 아무리 태풍이 몰아쳐도 집채만한 수천 년 된 노암 바위는 태풍 몰아치는 것을 웃으면서 ‘내 얼굴을 씻겨주는구나, 깝깝한데 바람을 불러서 시원하게 좀 만들어주는구나.’ 그러고 있지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게 신앙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신앙 걸음을 걸어가 보지 못해도 여기 소원을 두고 노력하고 소원하다보면 백 목사님의 그 깊은 신앙세계를 흉내는 낼 수 있고 짐작은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분의 신앙세계가 어떠한지를.
이것하고,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는 것 하고 내 마음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라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자 어디 있으랴 안심일세. 내 마음속에 숨어있는 이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가 딱 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누구겠습니까? 내 마음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힌 보배라,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가 없는데 가져갈 자가 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자기 속에 있는 보화를 가져갈자 누구지요? 이거는 바로 답이 탁 나와야 됩니다. 천하에 내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만 이 보화를 없앨 수 있습니까? 자기 스스로 없애는 겁니다. 내가 없애기 전에는 내 보화를, 내 마음속에 있는 걸 누가 가져간단 말입니까? 내 속에 있는데. 신앙이라는 겁니다.
지난 5일밤 예배 말씀 오늘 말씀이 다 이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지난 5오일밤 예배 때 두 가지를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의 모든 역사, 성경 모든 기록은 그 줄기가 둘로 흐르고 그 둘을 결국 하나입니다. 그 둘이 어디로 향하느냐.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 마태복음 22장 37절 이하의 말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첫째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와 같으니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 구약 성경, 선지자, 신약 성경 이것의 전부니라. 선지자니라. 그러니까 구약 성경 신약 성경에 가르친 전부는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인간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전부 이 두 줄기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정했고 모든 존재 다 지었고 하나님이 지금도 주권 섭리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 중에서 첫째, 하나님 사랑은 내 구원입니다. 내 구원이 뭐냐? 내 구원은 자기 구원이고 자기 구원은 자신의 변화입니다. 자기를 고쳐서 온전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자기 구원이다. 예배당에 열심히 쫓아다니는 게 구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거는 구원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지 과정이지 그 자체가 구원이 아닙니다. 열심히 교회 다니면 구원 이룰 바에야 열심 있는 사람이 다 이룹니다. 성경 많이 읽는다고 구원 아닙니다. 그것이 구원 이루어가는 하나의 필요한 그런 양식이지 그 자체가 구원 아닙니다. 구원이 되어져서 읽는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몰라도.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 이루어진 만큼 기도하겠지만은 그러나 기도하는 그 자체가 구원이 아닙니다. 주일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무엇이 구원이냐? 구원은 자기를 고쳐서 자기 자신을 참 사람 만드는 게 구원이다. 그런데 이 참사람 만드는데 참사람을 만드는 중요한 하나의 과정이며 모습이 되어지는 게 그게 뭐냐? 그 사람이 구원이 이루어졌느냐 덜 이루어졌느냐를 알 수 있는 표시판, 구원의 모습, 이루어진 모습, 동시에 구원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 그게 뭐냐? 그것이 현실의 주인이 되어서 현실을 지배하지 현실에 피동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하고 오늘 말씀 어느 말씀하고 연결됩니까? 오늘 오전에 세 가지 신앙을 말씀드렸지요. 첫째는 여론 신앙, 두 번째는 주관 신앙, 세 번째는 영감 신앙인데 현실을 다스려 지배하는 요거하고 세 가지 신앙 중에서 무엇하고 연결됩니까? 여론신앙하고 연결이 되겠지요.
현실은 내 환경인데 내 환경에 가장 나에게 크게 부딪히는 것 직접 부딪히는 것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입니다. 사건이란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겨지는 게 모든 사건이고 물질은 사람에게 속한 겁니다. 그러므로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들에게 영향 받지 아니하고 피동되지 아니하고 그들을 내가 다스리는데 그 현실을 다스린다 말은, 내 품안에 자식도 좀 자라고 나면 마음대로 못합니다. 자식은 품안에 자식이지 내 품을 떠나고 나면 이미 부모의 영향권에서 벗어난다. 세 살만 되도 부모 마음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다섯 살이 되고 나면 고집이 더 셉니다. 그래서 세 살 때까지 버릇 잡지 못하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 살 네 살 짜리 아이도 내 몸에서 난 내 자식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내 현실 환경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내가 무슨 수로 다스립니까? 그 다스릴 때 그 다스리는 것은 그 대상이 누구라 그랬습니까? 현실을 다스려라 그 말은 내 현실에 다른 사람을 다스리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그 현실에 주인이 돼서 나 자신이 그 현실에 피동되지 말라는 겁니다. 그 현실을 내가 주인이 돼서 내 신앙에 유익되도록 현실을 이끌어나가는 거지 현실을 따라서 울고 웃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모든 희로애락이 현실에 따라 움직이면 그 사람은 현실에 종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노암은 안 움직입니다. 바람이 불거나 말거나 너는 바람 불고 나는 가만히 앉아있고. 바람 부니까 시원하고 아무리 비가 때려 부어도 노암은 끄떡도 안 합니다. 나는 시원하고. 대해는 굶었다. 아무리 퍼부어도 ‘비가 오는가?’ 그렇고. 그게 자기 자신이 환경에 요동하지 않는다 그 뜻입니다. 135장 찬송이 그걸 말씀하는 것이고, 162장 찬송도 그걸 말씀하는 겁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마음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내 마음에 솟는 영생수 한없이 흐르니’ 그거 가사 가사 절절이 살펴보면 전부 말씀이고 구원의 도리입니다. 그 신앙 걸음을 걸어갔던 분들의 찬송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것은 그 사람이 자기 현실을 얼마만큼 능동적으로 대처하느냐가 구원의 모습이고 동시에 구원 이루어지는 한 과정들입니다. 또 하나는 형제 구원인데 형제 구원은 전도하고 심방하고 관리하고 위해서 기도하고 이것도 다 중요한데 이거는 직접적인 것이고, 좀 더 간접이면서 중요한 것은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 형제들은, 손가락이 보면 엄지 검지 중지 네 번째는 무슨 손가락입니까? 무슨 지 약지 그렇지요. 그런데 이 다섯 손가락 내 몸에 붙어있는 다섯 손가락의 길이가 다 각각 다릅니다. 하는 역할이 다 다릅니다. 한 모태에서 한 어머니 뱃속에서 난 형제의 얼굴이 다 다르고 성격이 다 다르고 성향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내게 속한 내 주일학교 반 학생들, 중간반 학생들, 내 구역 식구들 그들의 성향은 다 다릅니다. 성격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 차이가 많이 납니다.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그 다른 것을 전부다 내가 일일이 다 살피지 못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대로는 그 모든 면면들을 다 생각을 하고 내가 그들에 대해서 상대해야 된다 그 말입니다.
우리 내 형제 내 식구 중에서, 우리 교인들 중에서 보자, 키가 작은 분이 있다. 그러면 그 앞에서는 키 큰 이야기를 하면은 그분이 좀 서운하겠구나. 말조심을 해야 됩니다. 우리 교인 중에 가정 경제가 어려운 분이 있다. 그분 생각을 하고 경제 부요에 대해서는 삼가 조심을 해야 되겠구나. 말조심을 해야 됩니다. 우리 교회에 자녀가 애를 먹이는 그런 가정이 있다, 그러면 그분 앞에서는 우리 자식이 잘나서 신앙도 좋고 똑똑하고 모범일지라도 그 앞에서 내 자식 자랑은 엄금 해야 되겠구나. 얼굴이 좀 악박악박 얽은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러면 그 앞에서 미인 자랑은 하지 않아야 되겠구나. 자기 아는 대로 그런 것이 다, 그런 걸 생각하는 게 양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런 것 다 생각해서 끼니가 어려운 식구가 있구나 그러면 내가 밥을 먹어도 좀 나눠먹도록 조심을 하고, 그런데 그분이 자존심이 강하니까 나눠줄 때도 자존심 안상하게 나눠줘야 되겠구나. 그런 걸 다 생각하는 것이 자기를 범위 넓히는 것이고 범위 넓혀서 자기 주변을 살피는 거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오일밤 예배 때 요래 두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은 성경 전체로 말하고 하나님의 섭리 전체로 말하면 모든 하나님 역사는 전부 이걸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존하심을 믿는 사람들이고 그 자존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믿는 사람들이고 그 목적을 위한 절대 예정을 믿는 사람들이고 목적을 위한 모든 창조를 믿고 하나님의 개미 한 마리 수염까지 하나님이 홀로 섭리하신다는 절대 주권 섭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걸 안 믿으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따져보면은. 그렇다면은 하나님의 모든 주권 섭리가 그 예정이 방향이 어디로 가느냐? 첫째는 내 구원위해 향하는 겁니다. 나를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오직 그가 아시리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나를 금보다 더 귀한 보배로운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 모든 존재 다 만드셨고 모든 섭리하시는 분이 하나님의 역사다. 이거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영원히 가도 이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내가 이렇게 된 나와 같이 다른 사람도 이처럼 나와 같은 길을 걷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고 이게 천국의 성질입니다. 그래야 천국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요 두 가지가 성경이 가르치는 전부고 하나님 역사에 전부다 이걸 5일밤 예배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만약에 내가 식물을 먹어서 내 형제가 손해 본다면, 내가 고기 먹는 것 보고 내 형제가 손해 본다면 나는 평생 영원히 고기를 안 먹겠다. 그래서 내 형제를 손해 보지 않게 하겠다. 성령의 사람 사도바울의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바로 이루어지고 신앙이 바로 된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펴서 다른 사람 구원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발 안 믿는 사람들 있는 식당 가든지 모인 곳에 가면 예수 이야기 하지 말고 교회 이야기 좀 하지 말고 들리는데 목사 집사 이야기 좀 하지 말아라고 사정을 합니다. 혹시 한번 가게 되면은 그만 마음속에 간이 콩닥콩닥 합니다. 이분이 또 여기서 집사님 어떻고 장로님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그 말 하면은 옆에 전부 안 믿는 사람 다 들을 판인데. 그들이 듣기에 좋을 리 없을 것이고 다 손가락질하고 욕을 하는데. 복음에 저절로 그게 복음운동에 인간구원에 손해된 그런 것을 본능적으로 그게 알아져야 됩니다. 그게 성화의 정도라 거기까지 생각해볼 수 가 있는 겁니다. 기억을 하시고 본문에 또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금 사람들이 나보고 나를 어떻게 알고 있고 어떻게 보고 있고 어떻게 알고 있느냐를 물으셨습니다. 그럴 때 모든 사람은 대답이 예수님을 위대한 사람 중에 한분이라 그렇게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은 세례요한이거나 엘리야거나,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인으로 난 자 중에서 세례요한보다 더 큰 이가 없다 그랬습니다. 위대한 분입니다. 구약시대 엘리야는 이스라엘 전부 다가 이세벨과 아합에게 꼼짝도 못하고 신앙 다 팔아먹고 하나님 다 배반했을 때 엘리야 혼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그 위대한 선지자가 엘리야지 않습니까? 예레미야도 마지막에 참 눈물의 그 선지 예레미야, 그리고 많은 선지자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이겠다 그랬으니까 일반적인 평판으로는 대단히 좋은 평판이고 아주 후하게 그렇게 좋게 봐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을 사람으로 낮춰서 아무리 높여봐야 하나님에게는 흉이고 욕이 되는 것이지 바로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기를 위대한 사람 중에 한분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리 알고 예수님을 그렇게 상대를 한 겁니다. 그 결과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데 동참을 하고 말았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예나 지금이나 이거는 크게 변하지 않는데 세상일도 그러하고 신앙은 더 그러하고 하나님을 섬겨 나갈 때 우리가 사람들의 말은 충분히 들어 참고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계시가 몇 가지 있습니까? 첫째는 일반계시 자연계시, 두 번째는 특별계시입니다. 자연계시 속에 무엇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자연계시 속에는 모든 자연 만물 또 하나는요? 사람들의 심리 상태, 심리 역사 이게 전부 자연계시고 오늘까지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인간 역사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연계시입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보고 깨달아야 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의 가르침이라든지 또 교육이라든지 교훈들 그중에서 많은 훌륭한 종들의 그런 가르침은 우리가 배워야 되고 배워서 성경과 같은 것은 내 지식으로 삼고 내 진리로 삼아야 됩니다.
동시에 그것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것을 참고 삼아서 내가 직접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향해 나아가야 되는 것이지, 내 자의사는 없고, 나 자신의 생각이나 비판 평가 판단 이거는 없고 목사님이 그래 말씀하시니까 따라 갑니다. 그 신앙은 어릴 적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모르니까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리 해야 됩니다. 그래야 자라니까. 그런데 믿는 도리를 어느 정도 알고 나면은 어릴 때도 처음부터도 자세는 그게 좋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분 말씀을 들어보고 하나님 말씀 성경과 대조해 봐야 되겠는데 성경 말씀을 내가 잘 모르니까 나보다 더 앞선 이분이 깨달은 것을 가지고 성경과 대조해보고 배워나가는 겁니다. 배워나가면서 그 성경과 맞는 말씀을 자기가 지식하는 동시에 자기가 실행을 해 보는 겁니다. 해 보면 가르쳐주는 그 목사님 설교가 맞는지 틀렸는지 자기가 살아보면 압니다.
저기 가면은, 목마른데 우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치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우물이 있는지 없는지, 성경에 보니까 예를 들면 거기 우물이 있다 그러고 그분도 그 우물이 있다 그러는데 성경에 맞으니까 맞기는 맞겠는데 그걸 가장 정확하게 아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우물 있는 곳에 가보면 되는 겁니다. 그 우물에 물은 아침에 먹으면 달고 저녁에 먹으면 씁니다, 그래 가르칩니다. 성경에는 잘 안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잘 모르겠습니다. 우물이 있는 거는 맞는데 아침에 먹으면 달고 저녁에 먹으면 쓰다 그러는데 그거는 잘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말씀이지만은, 신학 박사 말씀이지만은 모르겠습니다. 아는 방법은요? 가서 먹어보면 됩니다. 먹어보니까 아침에 먹어보니까 아침에 물이 쓰고 저녁에 물이 답니다. 틀렸네요. 내가 가서 먹어보니까 아침 물은 쓰고 저녁 물은 달던데 목사님 가르친 것 틀렸습니다. 그리 나가는 겁니다. 그게 자기 주관에 붙들리면 문제지만은 성경이 맞으면 바로 나가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하 모든 사람은 그 누구의 말이라도 참고만 하는 것이지 사람의 말을 절대 진리로 믿고 따라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게 맹종입니다. 맹종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 구원은 자신의 구원이고 자신의 구원에 가장 중요한 것은, 늘 말씀드리지요, 우리 사람에게 있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형상 요소가 뭡니까? 사람에게 있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형상 요소가 뭐지요? 자유성입니다 자유의지. 자유의지라 말은 자의사라 그 뜻입니다. 내 판단 내 생각이라 그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자유사가 성경을 찾아가야 되고 하나님을 찾아가야 그게 맞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거기 참고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너무 너무 수많은 사람들이 설마 어젠가 언제도 설교록 읽어보니 그 말씀이 나오던데, 요즘은 설마 그럴 리가 있나, 설마를 열 번하고 그래도 설마 하는데 그 설마가 또 그 설마 또 넘어서는 그런 게 꽉 찬 세상이다, 천하 예수 믿는 사람이 수천만 명이 넘을 겁니다. 이 시대에 수억 명도 넘을 겁니다. 믿는 사람 세계 다 모으면. 온갖 종파, 교파 다 쳐서. 그런데 그 중에서 수억 명도 넘을 그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을 이 시대를 두고 2천년 전 예수님 말씀은 내가 세상에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믿는 자를 보겠느냐? 예수님이 그때는 그랬을지 모르겠지만은 2천년 후 세대는 잘 모르셨겠구나, 만약에 예수님 그 예언이 틀렸으면 예수님은 우리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대속은 다 깨지는 겁니다. 죄를 지은 거니까. 예수님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수억 명도 넘는 믿는 사람이 다 무엇인가? 거기서 거의 대부분은 뭐라 말입니까? 가짜라 말이지요. 믿기는 믿는데 믿는 흉내만 내고 있지 참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뜻입니다. 놀랄 일 아닙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 나는,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여기 있는 우리는, 남은 그렇다 치고 여기 있는 우리는, 나는, 나는 정말 믿는가? 따져봐야 됩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속에 내가 안 들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런 줄 알고 자신을 살펴서 우리는 참 믿는 사람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의 말을 따라가는 것, 사람의 이목을 보고 믿는 것, 사람들 눈치 살피는 것, 사람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피동이 되어지는 것 이거는 그 형태는 수도 없이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말 한마디 들으니까 서운하고, 나한테 좀 성글게 해주니까 또 서운하고, 나 좋아하던 사람이 나 싫어하니까 서운하고, 내 주변에 가까운 사람 먼 사람, 별의 별 종류의 사람들이 그게 전부 다 주변 환경 사람들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겁니다. 좋을 때는 좋고 감사하고 찬송이 나오다가 힘들고 괴로우니까 마음이 괴롭다가 힘이 빠졌다가 시험에 들어버렸다가, 그게 전부 말하자면 여론 신앙이고 환경에 피동되는 겁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에게 다른 말씀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죄가 많지 않아서 많은 말씀이 필요 없습니다. 에덴동산에 말씀하신 네 가지 말씀 속에 신구약 성경이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다 몰라도. 들어가 보면 그렇습니다.
동산을 다스리고 지켜라. 허락하신 실과는 네 마음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악과는 절대 먹지 마라. 자기 현실을 능동이 되고 지배자가 돼서 현실을 지배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는 그 사람은 언젠가는 현실에 영향받고 피동이 되어지고 그러면 그 신앙은 마지막 가면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동참하는 큰 죄를 짓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여론 신앙이고, 여론 신앙은 사람보고 믿는 것, 사람 따라 가는 것, 사람 이목 보는 것, 사람에게 피동 되는 것, 환경에 피동 되는 것, 이것이 여론신앙이다. 그 신앙의 결과는 실패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는 데 함께 동참하는 큰 죄를 범하게 되어진다. 성경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실패는 주관 신앙이지요. 주관이라 말이 뭐냐? 주관이라 말은 쉽게 말하면 자기라 그 뜻입니다, 자기. 앞에 여론 신앙하고 어찌 보면 반대가 될 수 있는데 잘 봐야 됩니다. 잘 생각해야 됩니다. 여론 신앙은 말하자면은 자의사가 없이 다른 사람의 말 듣고 보고 피동되어 따라가는 게 여론신앙인데 그 자기 자의사, 자기 주관이 없이 그냥 따라가는 게 여론신앙인데 주관신앙이란 것은 여론신앙과 반대로 자기 주관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기 주관이 그 자기 주관 자기뿐이지 거기에 다른 게 또 없는 겁니다. 말하자면은 모든 것은 전부 다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겁니다. 자기 생각. 그러니까, 그 자기 생각은 자기 지식의 범위대로 나오는 겁니다. 자기가 알고, 자기가 듣고 읽고 배우고 생각하고 경험하고 체험해서 아는 그 지식의 범위인데 그것이 바로만 되면 순교적인 신앙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순교자들 중에서 여론신앙에 속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순교자들 중에서. 순교자들의 많은 분들이 보면은 주관신앙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주관신앙은 객관이 부족해서 고집불통입니다. 내가 옳다 하면 죽어도 그냥 가는 겁니다. 옆을 보지 아니하고. 이게 주관신앙인데 굉장히 좋은 장점이 있습니다. 주로 성격이 외골수들입니다. 아주 외골수들, 앞만 보고 가는 사람들. 옆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 고집불통들. 이런 사람들이 의지도 강하고 절제도 있고 아주 잘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에게만 모든 걸 맞추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전지자 같으면 전능자 같으면 그게 당연히 좋지요. 인간의 수명이 정해져 있고 인간의 배울 수 있는 지식이 한계되어 있고 인간의 경험 체험이 한계되어 있는데 자기가 읽고 듣고 본 그 범위 밖의 것은 없는가 그 말이지요. 내가 경험하고 체험해본 그 외에 것은 이 세상에 없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며 내가 본 것이 전부며 내가 경험 체험한 것이 전부인가? 아니지요. 인간은 완전자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면 그렇다면 이 세상 다른 사람들 이걸 다 살펴봐야 되는가? 천하 모든 인간에게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처럼 다. 그들도 배운 것이, 경험 체험 한 것이, 아는 것이 한계가 있을 거니까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주관신앙이란 것은 자기 생각, 자기 판단, 자기 주장, 자기 경험 체험, 자기 아는 그게 전부로 아는 이게 문제인데 그게 자기가 전부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거기서 자기 아닌 객관으로 넓혀 나가서 나가는데 그 넓혀야 될 그 방향이 무엇이냐? 그게 바로 옳은 걸 찾는 것이고 옳은 것은 말씀 안에 들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속으로 자기가 들어가고 그 말씀으로 자기를 만들어 말씀의 자기를 만들어야 되는데 주관이 되면은 그 말씀 안에 자기를 만들어도 그 말씀 역시 자기가 아는 말씀이 전부가 아니니까 객관을 살펴서 같이 따져봐야 되고 살펴봐야 되는데 내가 아는 게 전부입니다. 주관신앙은.
베드로가 주님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도망도 쳤고 주님 오는 게 싫기도 했다가 요때는 주님 사랑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그때 비로소 많은 고난 받고 십자가 못 박혀 죽었다가 3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비로소 가르치니까 베드로 마음이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사랑하는 선생님이 사랑받는 수제자가, 수제자라 표현이 좀 그렇지만은, 성경에 베드로가 수제자라는 말은 없지요? 가장 열심 있는 그런 제자는 맞지만은. 사랑을 듬뿍 받은 그 제자가 사랑하시는 선생님이 억울하게 고난 받고 누명쓰고 죽는다는데 좋을 리가 있습니까? 마음이 너무 슬퍼서 주님을 사랑해서 진정 사랑해서 섞임 없는 사랑으로 ‘선생님 그리 마옵소서 왜 그렇게 해야 됩니까? 뭐 때문에 선생님이 억울하게 매를 맞으며 선생님 같은 분이 왜 매를 맞아야 됩니까? 세상에 말이 되는 소립니까? 왜 죽어야 됩니까?’ 베드로가 틀린 말이 있습니까? 베드로의 예수님을 향한 그 중심, 그 심정, 간곡한 소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요 마음이 틀림이 있습니까?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 옳았습니다. 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전부 범위가 어딥니까?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 충정, 아끼는 것, 간절한 소원한 것, 간청한 것, 그 모든 것의 범위가 어디 범위입니까? 자기 범위 안입니다. 자기 생각에. 자기 판단에. 아무리 살펴봐도 내가 아무리 살펴봐도 우리 선생님 같은 분이, 베드로가 아무리 살펴봐도 예수님 같은 분이, 세상에 이렇게 선한 분이 거룩한 분이 이런 하나님의 아들이 매를 맞다니 억울하게, 죽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왜 그래야 되는가? 베드로의 지식의 범위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젊어서는 내가 스스로 띠 띄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베드로 아직 젊습니다. 이래 주님 향해서 그렇게 간곡히 이런 사랑 가지고 뜨거운 열정 가지고 주님을 향해서 그리 간절히 간청한 베드로였지만은 그 범위가 좁았습니다. 주관적입니다. 범위가 좁았다 주관적이다 그 말은 베드로의 지식이 주관적이다 그 말이지요. 한계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것은, 이거 다 아시는데 한번 기억해보실까요. 같이 한번 해보실까요? 정저지와(井底之蛙)! 세상 말이지만은 우물 속에 개구리, 우물바닥 개구리라 그 뜻 아닙니까? 우물 속에 개구리입니다. 베드로 신앙은 요때까지만 해도 우물 속에 개구리 신앙입니다. 그 신앙의 범위가. 천하에 베드로 같은 사람이 없지만은 요때는 아직까지 베드로 신앙은 어렸고 좁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베드로가 아끼는 제자지만은 그때 그걸 밝혀놓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베드로의 중심도 알고 사랑도 아시지만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를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정곡을 찔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생각했습니다. 자기하고 주님의 인간의 정리만 생각했고 사제지간의 정리 사제지간의 사랑만 생각을 했지 그 위에 계신 광대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섭리 역사, 주님의 십자가 대속이, 매 맞고 고난 받고 죽으시는 그 역사가 어떤 구원을 이루며 어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며 광대한 역사가 이루어지며 영광이 되어지는 것을 베드로는 그때까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마음이 아파도 이해가, 안 되도 혀를 깨물고 말을 안 했겠지요. 참고 말지. 그래도 이것이 아버지 뜻이니까, 이것이 영광의 부활을 향한 것이니까 그랬을 건데 베드로는 그때까지 몰랐습니다. 모르니까 자기 지식의 한계 내에서, 베드로의 성격은 활동성이고 알고 나면 즉시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베드로 신앙의 장점입니다, 동시에 단점이고. 그러기 때문에, 자기 아는 대로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서 그래했지만은 그 사랑이 주관적이었다, 자기 범위 안이었다 그 말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살펴서 늘 우리는 그래서 교회 안에서 집안에 회의를 하면 사람들이 그렇지요. 모든 회의에서 사람들의 모임에서 토론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그러니까 선진국들 문화인들은 그래 안 하지요. 내 말을 하면 내 생각도 있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있다. 나는 이래 판단하지만은 다른 사람은 저래 판단할 수 있다. 그게 문화인들의 생각이랍니다. 그래서 미국 같은 나라는 그게 좋은 장점이면서 한편으로 문제가 뭐냐면, 교회 설교자 목사님들이 설교하면 이거는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 하고 설교해서 딱 판단해서 설교하면 교인들이 그런답니다. 목사님 그냥 설교만 하십시오. 판단은 누가 한다고요? 우리가 할 겁니다. 목사님은 그래 생각하지만은 나는 생각이 다릅니다. 왜 그렇게 우리를 그렇게 끌고 가려고 하십니까? 그게 장단점이 다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자기라는 사람, 자기라는 그 신앙, 자기 주관, 그 넘어서 있는 게 사람들인데 앞에 여론신앙과 연결시켜 보면 사람들의 모든 말은 참고만 할 것이고 자기 주관도 참고만 할 것이고 그러면 참 신앙은 뭔가? 참 신앙은 출발이 첫째가 어디 속으로 들어갑니까? 오로지 말씀 속에 들어가야 되지 말씀 없는 주관은 마지막에 마귀 되고 맙니다. 말씀 없는 여론은 나중에 인본주의 되고 맙니다.
그래서, 여론신앙에는 하나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론 신앙에 하나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론신앙에 하나님이 없지 않습니다. 있습니다. 주관신앙에 하나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거기도 있습니다. 인본주의 신앙도 신앙입니다. 인본주의도 신앙이고 세본주의도 신앙입니다. 그런데 순서가 틀리지요. 인본주의는 하나님보다 인간이 우선입니다. 세본주의는 천국보다 세상이 우선입니다. 신본주의는 신본주의에 사람이 없습니까? 신본주의에 세상이 없습니까? 신본주의는 하나님이 첫째고 중심이고 전부고 세상은 그를 향해서 맞춰 나가는 게 신본이고, 인본은 인간이 중심이고 하나님이 인간 위해서 있는 것이고 이게 인본입니다.
여론신앙도 하나님이 있지만은 여론신앙은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을 알고 섬기되 사람들을 따라가고 사람들의 이목을 보고 사람들에게 영향받고 피동되어 가는 것이 여론신앙이고, 사람들의 영향받는다 그 말은 결국 자기 환경에 영향받는다 그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바로 되어 있으면 그 사람은 어디 가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환경이 상관이 없습니다. 금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금이기 때문에 금은 오물 속에 묻혀도 건져서 씻어내면 금입니다. 땅 속에 묻혀도 캐내서 흙 파내고 나면 금입니다. 이 금은 불에 녹혀도 다시 뭉치고 나면 여전히 금입니다. 금이란 것은 깨도 금이고 반지를 만들어도 금이고 목걸이 만들어도 금이고 금이란 것은 그 자체가 변하지 않는 겁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참사람이 되어서 정금 같은 사람이 되고 현실에 영향받지 않고 피동되지 않는 현실에 주인이 되는 그 사람이 되면 가난이 오든지 부가 오든지, 슬픔이 오든지 기쁨이 오든지, 대형사고가 생기든지 무슨 일이 생겨도 그 속에는 요동하지 아니합니다. 왜? 그 모든 건 전부 다 하나님 만들어주신 현실 환경에 지나지 않으니까. 주인공은 나니까. 이게 여론신앙을 벗어나는 요게 참 자기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에 피동이 되는 사람, 사람에 피동되는 그 사람은 좋은 데 가면 좋아서 피동되고 슬픈 데 가면 슬픈데 피동되고 또 기쁜 데 가면 기쁜 데 피동되고 가난하면 가난해서 문제고 부하면 부해서 문제고, 게으른 자는, 잠언 26장에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일하기 싫고 게으르니까 온갖 핑계 다 대는 겁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도는 것 같이,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압니까, 학생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돈다. 지금 문짝은 모두 다른 기술된데 옛날 문짝은 요래 고리가 있고 들어가는 요래 되어 있습니다. 요래 뱅뱅 도는 겁니다. 요래 가지고 문이. 문에 달려서. 그래 뱅뱅 도는 겁니다. 문짝이 돌쩌귀 따라 요래 도는 겁니다, 따라서. 그래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대위에서 뱅뱅 돈다 그럽니다. 성경에 그래 나와 있지요.
나가기 싫으니까 일하기 싫으니까 공부하기 싫으니까. 그러니까 일하기 싫은 자는 일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핑계 다 댑니다. 허리가 아픕니다, 오늘은 머리가 아픕니다, 오늘은 발가락이 아픕니다, 오늘은 감기가 걸렸습니다, 또 오늘은 뒷골이 땡깁니다, 오늘은 허리가 아픕니다. 굶어 죽어라! 공부하기 싫은 인간은 온갖 핑계 다 댑니다. 맨 땅에 그냥 발가벗겨서 사막 한가운데 던져놔도 사람이 바로 된 사람 거기서 나중에 재벌되어서 나옵니다 그 사람.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희씨 정주영씨 이런 사람들은 길거리에 돈이 다 보인다 그러지요. 김우중씨 이런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세계 어느 구석에 던져놔도 얼마 지나고 다 재벌되는 사람들입니다. 까먹는 사람들은 억만금을 안겨놔도 또 까먹습니다. 사람이 문제다 그 말이지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 그래서 우리라는 사람은 원래 그래 강하지 못한데 하나님의 말씀이 이래 우리를 가르치고 구원이란 것은 이런 것이다, 신앙은 이런 것이다 말씀하시고 그러기 때문에 내가 온갖 환경에 다 영향받고 피동되던 연약한 인간이었는데 연약한 인간 내가 말씀을 배워 가지고 ‘아 말씀이란, 신앙이란 구원이란 이렇게 나가는 것이구나.’ 배워서 하나하나 고치고 생각을 하고 연구하고 또 경험하고 자기를 만들어가다 보니까 옛날에는 열 가지 현실 오면 거기다 피동되서 어쩔 줄 몰랐는데 1년 지나고 나니까 이번에는 한 한 가지는, 아홉 가지 피동되는데 한 가지는 피동이 잘 안됩니다. 2년 지나고 나니까 이번에는 여덟 가지 피동이 되는데 두 가지는 피동이 안 됩니다. 3년 지나고 나니까 일곱 가지 피동되고 세 가지는 아무래도 피동이 안 됩니다. 영향 받지 않습니다. 10년 지나고 나니까 이제는 신앙이 장성해서 한 가지 말고는 어떤 환경으로도 피동되지 않습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는 온 천하가 어떻게 해도 하나님 향한 내 신앙은 요동하지 않는 이런 사람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게 천국에 맞는 사람이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나이 40이면 불혹이라 그러지요. 불혹이라 말은 미혹을 잘 받지 않는다 그런 뜻이지요, 아마? 사람들의 말에 영향받지 말아야 됩니다. 피동되지 말아야 되고. 또 자기 환경에 대해서 영향받고 피동되지 않아야 됩니다. 제10계명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무릇 내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다른 사람의 환경은 남의 것입니다. 그걸 부러워하고 탐하면 십계명 어기는 죄입니다. 현실에 피동되는 죄입니다. 내 옆에서 억만금 가진 사람이 진수성찬해도 그거는 그 사람 일이고, 나는 하루에 한 끼밖에 못 먹어도 하나님이 한 끼만 먹으라 주셨으니까 한 끼 먹고, 나는 두 끼 먹으면 안 되는가? 따져보고 두 끼 먹을 수 있는 노력해서 먹으면 먹고 안 주시면 못 먹고.
이 세상은 지나가는 과정 아닙니까? 잘 먹으면 오래 삽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너무 잘 먹어서 수명이 단축되지 좀 굶어가며 사는 것이 오히려 오래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이어트 모두 한다고 난리지 않습니까? 살찌면 다 병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옷은요? 온갖 것이 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나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서 자기 환경 다 변할 수 있고, 또 그 사람이 하나님 닮은 그런 사람이 되면 그 사람 가는 곳은 전부 천국을 만듭니다. 요 여론신앙.
하나는 주관신앙입니다. 자기 아는 게 전부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아는 게 좋습니다. 신앙은 경험 체험이라야 되니까. 그런데 그 자기 아는 것이 말씀에 맞춰야 됩니다. 내가 먹어보니까 세상에서 저도 한번씩, 설교 시간에 지난번 언제 말씀드렸지요? 제가 먹어본 나물 중에는 고구마나물이 제일 맛있더라. 그거는 제 주관입니다. 교인들 중에서 참 목사님 아직까지 입맛이 잘 모르시구만. 내가 먹어보니까 그보다 맛있는 나물 꽉 찼던데. 그럴 수 있는 겁니다. 내가 먹어보니까 이게 제일 맛있더라. 그거는 내 주관입니다. 나는 이렇지만은, 가정주부들이 그런 경우 있지요? 밥상을 차려놓고, 자기가 맛있는 음식을 차려놨습니다. 맛있는 국을 차려놓고 ‘이거 드십시오. 맛있습니다.’ 남편은, 예를 들면은 콩나물국 끓여놓고 ‘이 콩나물국 시원하게 맛있습니다. 드십시오.’ 아내가 그럽니다. 남편은 콩나물국보다 된장국 좋아합니다. 그런데 된장국 먹고 싶고 콩나물국은 싫어하는데 아내가 기어코 ‘이거 건강에 좋습니다, 시원합니다, 맛있습니다, 속이 다 풀립니다’ 하고 억지로 떠먹이면 남편은 몇 번 듣다가 안되면 밥상을 엎어버리는 겁니다. 그거는 니 입맛이고 나는 된장국이 좋은데. 그런 아내 만나면 안 바뀌면 골치가 아픈 겁니다. 자기 주관대로 남편, 입맛이 다 다른 것인데 자기 입맛에 콩나물국 맛있다고 남편도 거기 꼭 맞춰야 됩니까? 아들도 다 맞춰야 됩니까? 건강에 필요해서 조절할 필요 있겠지만은, 예를 들자면 그렇다 그 말입니다.
이런 주관적인 것이 강하니까 가정이고 교회고 사회고 온갖 문제들이 다 생기는데 믿는 사람들은 요걸 깨달아 가지고 그 주관을 말씀으로 넓혀 나가야 됩니다. 내 생각이, 내 판단이,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이것이 과연 말씀에 옳으냐 그르냐. 말씀에 맞춰나가야 되지 말씀은 뒤로 두고 내가 우선이다 그래 나가면 마지막에 예수님 배반하고 도망칩니다. 결과가 그렇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의 말 따라가고 사람들의 눈치보고 사람들에게 피동이 되고 현실에 영향받고 피동되고 종 되는 여론신앙을 버리자. 자기를 전부인 줄 아는 주관신앙도 버리자.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으로 자기를 살피고 말씀으로 구별하고 말씀으로 따져보고 말씀이 내 지식과 이성 비판과 내 양심을 지배하고 그래서 말씀이 점점 나를 지배해서 양심까지 말씀이 지배해서 말씀이 지배하는 그 양심, 신앙양심이 되고 그 신앙양심대로 사는 그 생활이 되면 그 양심을 통해서 빛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영감 역사가 그 양심 통해서 들어오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영감신앙이라, 샛별이라 그리 말씀을 하는 겁니다. 이거는 좀 어려우니까 다음에 하고,
오늘은 신앙의 길, 실패의 길 2가지입니다. 사람의 말 따라가고 사람 이목 보고 사람 눈치 보고 사람에게 영향받고 피동되고 현실에 그리되는 이런 여론신앙을 우리에게서 찾아서 다 뽑아내야 되겠습니다. 말씀이 요동치 아니하면 요동치 않는 우리가 되어야 됩니다. 자기 주관이 전부인 줄 아는 이런 우물 안에 개구리 같은 이런 신앙을 버려야 됩니다. 말씀으로 자기를 다 만들어 나가고 말씀이 나를 지배하는, 그래서 말씀이 내 전부를 지배하고 신앙양심도 지배하고 그리고 나중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깊은 은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여기까지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되겠다, 어렵지만은 좀 생각해 보십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주관이란 것은 자기 성격도 지대하게 영향 미칩니다. 자기 성격, 자기 성향. 그러기 때문에 신앙 출발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성격을 바꿔라. 성질도 고쳐라. 바탕도 바꿔라. 말씀으로 그 모든 것 다 갈아서 말씀에 맞추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바로 나가기 어렵습니다.
제목: 여론 신앙, 주관 신앙의 실패
요점:
1. 5일예배 2가지 복습
1)자기 구원
- 우리 구원은 자기 성화
- 자기 성화에 중요하게 기억할 것은 현실 지배
- 현실의 주인 되어 지배하고 현실에 피동, 영향 받지 말 것
2)형제 구원
- 형제 구원은 자기 구원 된 만큼
- 형제 구원 위한 일반적 수고 위에 더할 것은
- 자기 범위를 넓혀 주변을 세밀하게 살필 것
2. 여론 신앙의 실패
-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사람 중에 위대한 분으로 모두 인식
-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상대
- 결과는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고 동참
- 여론신앙은 사람들 말 듣고 영향 받고 피동되는 것
- 사람에게 피동은 현실에 피동되는 것
- 사람 따라, 현실 따라가는 여론 신앙 아닌지 자신을 살필 것
- 내가 세상에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하신 말씀 기억할 것
3. 주관 신앙의 실패
- 주관이란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
-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사랑하되
- 자기대로 알고 자기대로 섬기고 자기대로 사랑하는 것
- 베드로의 주님 사랑은 진심이지만 순전히 주관적인 것
- 하나님도 알고 사랑도 하고 섬기기도 하지만 자기대로 하는 것이 주관 신앙
- 자기 성격대로, 성향대로 하는 것이 주관 신앙
- 결과는 주님의 길 반대하고 배반하고 도망
4. 영감 신앙만이 성공
-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 혈육이 아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것
- 사람들의 가르침이나 주관이 아닌 말씀에 입각한
- 말씀 -> 신앙양심 -> 영감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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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문)
마태복음 16:13-24
찬송가는 가사에 중점이 있습니다. 오늘 예배 첫 곡을 몇 장 했습니까? 오늘 오후 예배 첫 곡을 찬송가 몇 장 했지요? 135장. 그 찬송의 내용에서 말씀하시는 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그래놓고 후렴에 보면 ‘평화 평화로다’ 어디서 내려온다고요? 하늘 위에서 내려온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1절에 가사 첫 소절에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난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는데 그 평화가 어디서 오느냐? 하늘 위에서 내려온다고 그럽니다. 그러면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그 평화가 어디서 나온다고요?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그 평화가 어디서 나옵니까?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나온다 그 말입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영혼은 영입니까 마음입니까? 영과 밀접한 마음을 말합니다. 내 마음 속에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납니다. 맑은 가락이 뭡니까? 노래고 찬송이지요. 내 영혼의 그 깊은데서 찬송이 나옵니다. 이 찬송을 힘 있게 불렀던 성경인물이 누굴까요? 자기 마음속 깊은데서 터져 나오는 찬송을 견디지 못해서 불렀던 빌립보 감옥에 있던 사도바울, 또 돌에 맞아 죽으면서 원수들 위해서 기도했던 스데반 그들의 마음속 깊은데서 이런 찬송이 울려나왔습니다.
그 찬송은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내 마음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힌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어디 있으랴 안심일세. 이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이게 우리 신앙이고. 구원이란 것은 요렇게 만들어지는 게 구원입니다. 백 목사님 시를 종종 인용을 하지요. ‘폭풍아 불어라’ 그 다음요? ‘노암은 웃는다’ ‘덮은 눈 속에 봄이 오고’ 덮은 눈이라 그 말은 온 대지가 전부 겨울이 됐다 그 말이고 겨울이 되었으니까 북서풍이 불고 얼음이 얼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추운 겨울입니다. 그런데 그 깊은 속에는 봄이 오고 있다 그 말입니다. 아무리 태풍이 몰아쳐도 집채만한 수천 년 된 노암 바위는 태풍 몰아치는 것을 웃으면서 ‘내 얼굴을 씻겨주는구나, 깝깝한데 바람을 불러서 시원하게 좀 만들어주는구나.’ 그러고 있지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게 신앙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신앙 걸음을 걸어가 보지 못해도 여기 소원을 두고 노력하고 소원하다보면 백 목사님의 그 깊은 신앙세계를 흉내는 낼 수 있고 짐작은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분의 신앙세계가 어떠한지를.
이것하고,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는 것 하고 내 마음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라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자 어디 있으랴 안심일세. 내 마음속에 숨어있는 이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가 딱 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누구겠습니까? 내 마음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힌 보배라,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가 없는데 가져갈 자가 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자기 속에 있는 보화를 가져갈자 누구지요? 이거는 바로 답이 탁 나와야 됩니다. 천하에 내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만 이 보화를 없앨 수 있습니까? 자기 스스로 없애는 겁니다. 내가 없애기 전에는 내 보화를, 내 마음속에 있는 걸 누가 가져간단 말입니까? 내 속에 있는데. 신앙이라는 겁니다.
지난 5일밤 예배 말씀 오늘 말씀이 다 이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지난 5오일밤 예배 때 두 가지를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의 모든 역사, 성경 모든 기록은 그 줄기가 둘로 흐르고 그 둘을 결국 하나입니다. 그 둘이 어디로 향하느냐.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 마태복음 22장 37절 이하의 말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첫째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와 같으니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 구약 성경, 선지자, 신약 성경 이것의 전부니라. 선지자니라. 그러니까 구약 성경 신약 성경에 가르친 전부는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인간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전부 이 두 줄기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정했고 모든 존재 다 지었고 하나님이 지금도 주권 섭리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 중에서 첫째, 하나님 사랑은 내 구원입니다. 내 구원이 뭐냐? 내 구원은 자기 구원이고 자기 구원은 자신의 변화입니다. 자기를 고쳐서 온전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자기 구원이다. 예배당에 열심히 쫓아다니는 게 구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거는 구원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지 과정이지 그 자체가 구원이 아닙니다. 열심히 교회 다니면 구원 이룰 바에야 열심 있는 사람이 다 이룹니다. 성경 많이 읽는다고 구원 아닙니다. 그것이 구원 이루어가는 하나의 필요한 그런 양식이지 그 자체가 구원 아닙니다. 구원이 되어져서 읽는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몰라도.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 이루어진 만큼 기도하겠지만은 그러나 기도하는 그 자체가 구원이 아닙니다. 주일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무엇이 구원이냐? 구원은 자기를 고쳐서 자기 자신을 참 사람 만드는 게 구원이다. 그런데 이 참사람 만드는데 참사람을 만드는 중요한 하나의 과정이며 모습이 되어지는 게 그게 뭐냐? 그 사람이 구원이 이루어졌느냐 덜 이루어졌느냐를 알 수 있는 표시판, 구원의 모습, 이루어진 모습, 동시에 구원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 그게 뭐냐? 그것이 현실의 주인이 되어서 현실을 지배하지 현실에 피동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하고 오늘 말씀 어느 말씀하고 연결됩니까? 오늘 오전에 세 가지 신앙을 말씀드렸지요. 첫째는 여론 신앙, 두 번째는 주관 신앙, 세 번째는 영감 신앙인데 현실을 다스려 지배하는 요거하고 세 가지 신앙 중에서 무엇하고 연결됩니까? 여론신앙하고 연결이 되겠지요.
현실은 내 환경인데 내 환경에 가장 나에게 크게 부딪히는 것 직접 부딪히는 것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입니다. 사건이란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겨지는 게 모든 사건이고 물질은 사람에게 속한 겁니다. 그러므로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들에게 영향 받지 아니하고 피동되지 아니하고 그들을 내가 다스리는데 그 현실을 다스린다 말은, 내 품안에 자식도 좀 자라고 나면 마음대로 못합니다. 자식은 품안에 자식이지 내 품을 떠나고 나면 이미 부모의 영향권에서 벗어난다. 세 살만 되도 부모 마음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다섯 살이 되고 나면 고집이 더 셉니다. 그래서 세 살 때까지 버릇 잡지 못하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 살 네 살 짜리 아이도 내 몸에서 난 내 자식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내 현실 환경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내가 무슨 수로 다스립니까? 그 다스릴 때 그 다스리는 것은 그 대상이 누구라 그랬습니까? 현실을 다스려라 그 말은 내 현실에 다른 사람을 다스리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그 현실에 주인이 돼서 나 자신이 그 현실에 피동되지 말라는 겁니다. 그 현실을 내가 주인이 돼서 내 신앙에 유익되도록 현실을 이끌어나가는 거지 현실을 따라서 울고 웃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모든 희로애락이 현실에 따라 움직이면 그 사람은 현실에 종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노암은 안 움직입니다. 바람이 불거나 말거나 너는 바람 불고 나는 가만히 앉아있고. 바람 부니까 시원하고 아무리 비가 때려 부어도 노암은 끄떡도 안 합니다. 나는 시원하고. 대해는 굶었다. 아무리 퍼부어도 ‘비가 오는가?’ 그렇고. 그게 자기 자신이 환경에 요동하지 않는다 그 뜻입니다. 135장 찬송이 그걸 말씀하는 것이고, 162장 찬송도 그걸 말씀하는 겁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마음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내 마음에 솟는 영생수 한없이 흐르니’ 그거 가사 가사 절절이 살펴보면 전부 말씀이고 구원의 도리입니다. 그 신앙 걸음을 걸어갔던 분들의 찬송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것은 그 사람이 자기 현실을 얼마만큼 능동적으로 대처하느냐가 구원의 모습이고 동시에 구원 이루어지는 한 과정들입니다. 또 하나는 형제 구원인데 형제 구원은 전도하고 심방하고 관리하고 위해서 기도하고 이것도 다 중요한데 이거는 직접적인 것이고, 좀 더 간접이면서 중요한 것은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 형제들은, 손가락이 보면 엄지 검지 중지 네 번째는 무슨 손가락입니까? 무슨 지 약지 그렇지요. 그런데 이 다섯 손가락 내 몸에 붙어있는 다섯 손가락의 길이가 다 각각 다릅니다. 하는 역할이 다 다릅니다. 한 모태에서 한 어머니 뱃속에서 난 형제의 얼굴이 다 다르고 성격이 다 다르고 성향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내게 속한 내 주일학교 반 학생들, 중간반 학생들, 내 구역 식구들 그들의 성향은 다 다릅니다. 성격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 차이가 많이 납니다.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그 다른 것을 전부다 내가 일일이 다 살피지 못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대로는 그 모든 면면들을 다 생각을 하고 내가 그들에 대해서 상대해야 된다 그 말입니다.
우리 내 형제 내 식구 중에서, 우리 교인들 중에서 보자, 키가 작은 분이 있다. 그러면 그 앞에서는 키 큰 이야기를 하면은 그분이 좀 서운하겠구나. 말조심을 해야 됩니다. 우리 교인 중에 가정 경제가 어려운 분이 있다. 그분 생각을 하고 경제 부요에 대해서는 삼가 조심을 해야 되겠구나. 말조심을 해야 됩니다. 우리 교회에 자녀가 애를 먹이는 그런 가정이 있다, 그러면 그분 앞에서는 우리 자식이 잘나서 신앙도 좋고 똑똑하고 모범일지라도 그 앞에서 내 자식 자랑은 엄금 해야 되겠구나. 얼굴이 좀 악박악박 얽은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러면 그 앞에서 미인 자랑은 하지 않아야 되겠구나. 자기 아는 대로 그런 것이 다, 그런 걸 생각하는 게 양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런 것 다 생각해서 끼니가 어려운 식구가 있구나 그러면 내가 밥을 먹어도 좀 나눠먹도록 조심을 하고, 그런데 그분이 자존심이 강하니까 나눠줄 때도 자존심 안상하게 나눠줘야 되겠구나. 그런 걸 다 생각하는 것이 자기를 범위 넓히는 것이고 범위 넓혀서 자기 주변을 살피는 거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오일밤 예배 때 요래 두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은 성경 전체로 말하고 하나님의 섭리 전체로 말하면 모든 하나님 역사는 전부 이걸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존하심을 믿는 사람들이고 그 자존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믿는 사람들이고 그 목적을 위한 절대 예정을 믿는 사람들이고 목적을 위한 모든 창조를 믿고 하나님의 개미 한 마리 수염까지 하나님이 홀로 섭리하신다는 절대 주권 섭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걸 안 믿으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따져보면은. 그렇다면은 하나님의 모든 주권 섭리가 그 예정이 방향이 어디로 가느냐? 첫째는 내 구원위해 향하는 겁니다. 나를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오직 그가 아시리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나를 금보다 더 귀한 보배로운 사람을 만드시기 위해서 모든 존재 다 만드셨고 모든 섭리하시는 분이 하나님의 역사다. 이거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영원히 가도 이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내가 이렇게 된 나와 같이 다른 사람도 이처럼 나와 같은 길을 걷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고 이게 천국의 성질입니다. 그래야 천국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요 두 가지가 성경이 가르치는 전부고 하나님 역사에 전부다 이걸 5일밤 예배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만약에 내가 식물을 먹어서 내 형제가 손해 본다면, 내가 고기 먹는 것 보고 내 형제가 손해 본다면 나는 평생 영원히 고기를 안 먹겠다. 그래서 내 형제를 손해 보지 않게 하겠다. 성령의 사람 사도바울의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바로 이루어지고 신앙이 바로 된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펴서 다른 사람 구원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발 안 믿는 사람들 있는 식당 가든지 모인 곳에 가면 예수 이야기 하지 말고 교회 이야기 좀 하지 말고 들리는데 목사 집사 이야기 좀 하지 말아라고 사정을 합니다. 혹시 한번 가게 되면은 그만 마음속에 간이 콩닥콩닥 합니다. 이분이 또 여기서 집사님 어떻고 장로님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그 말 하면은 옆에 전부 안 믿는 사람 다 들을 판인데. 그들이 듣기에 좋을 리 없을 것이고 다 손가락질하고 욕을 하는데. 복음에 저절로 그게 복음운동에 인간구원에 손해된 그런 것을 본능적으로 그게 알아져야 됩니다. 그게 성화의 정도라 거기까지 생각해볼 수 가 있는 겁니다. 기억을 하시고 본문에 또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금 사람들이 나보고 나를 어떻게 알고 있고 어떻게 보고 있고 어떻게 알고 있느냐를 물으셨습니다. 그럴 때 모든 사람은 대답이 예수님을 위대한 사람 중에 한분이라 그렇게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은 세례요한이거나 엘리야거나,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인으로 난 자 중에서 세례요한보다 더 큰 이가 없다 그랬습니다. 위대한 분입니다. 구약시대 엘리야는 이스라엘 전부 다가 이세벨과 아합에게 꼼짝도 못하고 신앙 다 팔아먹고 하나님 다 배반했을 때 엘리야 혼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그 위대한 선지자가 엘리야지 않습니까? 예레미야도 마지막에 참 눈물의 그 선지 예레미야, 그리고 많은 선지자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이겠다 그랬으니까 일반적인 평판으로는 대단히 좋은 평판이고 아주 후하게 그렇게 좋게 봐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을 사람으로 낮춰서 아무리 높여봐야 하나님에게는 흉이고 욕이 되는 것이지 바로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기를 위대한 사람 중에 한분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리 알고 예수님을 그렇게 상대를 한 겁니다. 그 결과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데 동참을 하고 말았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예나 지금이나 이거는 크게 변하지 않는데 세상일도 그러하고 신앙은 더 그러하고 하나님을 섬겨 나갈 때 우리가 사람들의 말은 충분히 들어 참고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계시가 몇 가지 있습니까? 첫째는 일반계시 자연계시, 두 번째는 특별계시입니다. 자연계시 속에 무엇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자연계시 속에는 모든 자연 만물 또 하나는요? 사람들의 심리 상태, 심리 역사 이게 전부 자연계시고 오늘까지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인간 역사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연계시입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보고 깨달아야 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의 가르침이라든지 또 교육이라든지 교훈들 그중에서 많은 훌륭한 종들의 그런 가르침은 우리가 배워야 되고 배워서 성경과 같은 것은 내 지식으로 삼고 내 진리로 삼아야 됩니다.
동시에 그것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것을 참고 삼아서 내가 직접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향해 나아가야 되는 것이지, 내 자의사는 없고, 나 자신의 생각이나 비판 평가 판단 이거는 없고 목사님이 그래 말씀하시니까 따라 갑니다. 그 신앙은 어릴 적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모르니까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리 해야 됩니다. 그래야 자라니까. 그런데 믿는 도리를 어느 정도 알고 나면은 어릴 때도 처음부터도 자세는 그게 좋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분 말씀을 들어보고 하나님 말씀 성경과 대조해 봐야 되겠는데 성경 말씀을 내가 잘 모르니까 나보다 더 앞선 이분이 깨달은 것을 가지고 성경과 대조해보고 배워나가는 겁니다. 배워나가면서 그 성경과 맞는 말씀을 자기가 지식하는 동시에 자기가 실행을 해 보는 겁니다. 해 보면 가르쳐주는 그 목사님 설교가 맞는지 틀렸는지 자기가 살아보면 압니다.
저기 가면은, 목마른데 우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치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우물이 있는지 없는지, 성경에 보니까 예를 들면 거기 우물이 있다 그러고 그분도 그 우물이 있다 그러는데 성경에 맞으니까 맞기는 맞겠는데 그걸 가장 정확하게 아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우물 있는 곳에 가보면 되는 겁니다. 그 우물에 물은 아침에 먹으면 달고 저녁에 먹으면 씁니다, 그래 가르칩니다. 성경에는 잘 안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잘 모르겠습니다. 우물이 있는 거는 맞는데 아침에 먹으면 달고 저녁에 먹으면 쓰다 그러는데 그거는 잘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말씀이지만은, 신학 박사 말씀이지만은 모르겠습니다. 아는 방법은요? 가서 먹어보면 됩니다. 먹어보니까 아침에 먹어보니까 아침에 물이 쓰고 저녁에 물이 답니다. 틀렸네요. 내가 가서 먹어보니까 아침 물은 쓰고 저녁 물은 달던데 목사님 가르친 것 틀렸습니다. 그리 나가는 겁니다. 그게 자기 주관에 붙들리면 문제지만은 성경이 맞으면 바로 나가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하 모든 사람은 그 누구의 말이라도 참고만 하는 것이지 사람의 말을 절대 진리로 믿고 따라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게 맹종입니다. 맹종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 구원은 자신의 구원이고 자신의 구원에 가장 중요한 것은, 늘 말씀드리지요, 우리 사람에게 있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형상 요소가 뭡니까? 사람에게 있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형상 요소가 뭐지요? 자유성입니다 자유의지. 자유의지라 말은 자의사라 그 뜻입니다. 내 판단 내 생각이라 그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자유사가 성경을 찾아가야 되고 하나님을 찾아가야 그게 맞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거기 참고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너무 너무 수많은 사람들이 설마 어젠가 언제도 설교록 읽어보니 그 말씀이 나오던데, 요즘은 설마 그럴 리가 있나, 설마를 열 번하고 그래도 설마 하는데 그 설마가 또 그 설마 또 넘어서는 그런 게 꽉 찬 세상이다, 천하 예수 믿는 사람이 수천만 명이 넘을 겁니다. 이 시대에 수억 명도 넘을 겁니다. 믿는 사람 세계 다 모으면. 온갖 종파, 교파 다 쳐서. 그런데 그 중에서 수억 명도 넘을 그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을 이 시대를 두고 2천년 전 예수님 말씀은 내가 세상에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믿는 자를 보겠느냐? 예수님이 그때는 그랬을지 모르겠지만은 2천년 후 세대는 잘 모르셨겠구나, 만약에 예수님 그 예언이 틀렸으면 예수님은 우리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대속은 다 깨지는 겁니다. 죄를 지은 거니까. 예수님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수억 명도 넘는 믿는 사람이 다 무엇인가? 거기서 거의 대부분은 뭐라 말입니까? 가짜라 말이지요. 믿기는 믿는데 믿는 흉내만 내고 있지 참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뜻입니다. 놀랄 일 아닙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 나는,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여기 있는 우리는, 남은 그렇다 치고 여기 있는 우리는, 나는, 나는 정말 믿는가? 따져봐야 됩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속에 내가 안 들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런 줄 알고 자신을 살펴서 우리는 참 믿는 사람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의 말을 따라가는 것, 사람의 이목을 보고 믿는 것, 사람들 눈치 살피는 것, 사람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피동이 되어지는 것 이거는 그 형태는 수도 없이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말 한마디 들으니까 서운하고, 나한테 좀 성글게 해주니까 또 서운하고, 나 좋아하던 사람이 나 싫어하니까 서운하고, 내 주변에 가까운 사람 먼 사람, 별의 별 종류의 사람들이 그게 전부 다 주변 환경 사람들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겁니다. 좋을 때는 좋고 감사하고 찬송이 나오다가 힘들고 괴로우니까 마음이 괴롭다가 힘이 빠졌다가 시험에 들어버렸다가, 그게 전부 말하자면 여론 신앙이고 환경에 피동되는 겁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에게 다른 말씀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죄가 많지 않아서 많은 말씀이 필요 없습니다. 에덴동산에 말씀하신 네 가지 말씀 속에 신구약 성경이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다 몰라도. 들어가 보면 그렇습니다.
동산을 다스리고 지켜라. 허락하신 실과는 네 마음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악과는 절대 먹지 마라. 자기 현실을 능동이 되고 지배자가 돼서 현실을 지배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는 그 사람은 언젠가는 현실에 영향받고 피동이 되어지고 그러면 그 신앙은 마지막 가면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동참하는 큰 죄를 짓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여론 신앙이고, 여론 신앙은 사람보고 믿는 것, 사람 따라 가는 것, 사람 이목 보는 것, 사람에게 피동 되는 것, 환경에 피동 되는 것, 이것이 여론신앙이다. 그 신앙의 결과는 실패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는 데 함께 동참하는 큰 죄를 범하게 되어진다. 성경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실패는 주관 신앙이지요. 주관이라 말이 뭐냐? 주관이라 말은 쉽게 말하면 자기라 그 뜻입니다, 자기. 앞에 여론 신앙하고 어찌 보면 반대가 될 수 있는데 잘 봐야 됩니다. 잘 생각해야 됩니다. 여론 신앙은 말하자면은 자의사가 없이 다른 사람의 말 듣고 보고 피동되어 따라가는 게 여론신앙인데 그 자기 자의사, 자기 주관이 없이 그냥 따라가는 게 여론신앙인데 주관신앙이란 것은 여론신앙과 반대로 자기 주관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기 주관이 그 자기 주관 자기뿐이지 거기에 다른 게 또 없는 겁니다. 말하자면은 모든 것은 전부 다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겁니다. 자기 생각. 그러니까, 그 자기 생각은 자기 지식의 범위대로 나오는 겁니다. 자기가 알고, 자기가 듣고 읽고 배우고 생각하고 경험하고 체험해서 아는 그 지식의 범위인데 그것이 바로만 되면 순교적인 신앙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순교자들 중에서 여론신앙에 속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순교자들 중에서. 순교자들의 많은 분들이 보면은 주관신앙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주관신앙은 객관이 부족해서 고집불통입니다. 내가 옳다 하면 죽어도 그냥 가는 겁니다. 옆을 보지 아니하고. 이게 주관신앙인데 굉장히 좋은 장점이 있습니다. 주로 성격이 외골수들입니다. 아주 외골수들, 앞만 보고 가는 사람들. 옆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 고집불통들. 이런 사람들이 의지도 강하고 절제도 있고 아주 잘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에게만 모든 걸 맞추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전지자 같으면 전능자 같으면 그게 당연히 좋지요. 인간의 수명이 정해져 있고 인간의 배울 수 있는 지식이 한계되어 있고 인간의 경험 체험이 한계되어 있는데 자기가 읽고 듣고 본 그 범위 밖의 것은 없는가 그 말이지요. 내가 경험하고 체험해본 그 외에 것은 이 세상에 없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며 내가 본 것이 전부며 내가 경험 체험한 것이 전부인가? 아니지요. 인간은 완전자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면 그렇다면 이 세상 다른 사람들 이걸 다 살펴봐야 되는가? 천하 모든 인간에게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처럼 다. 그들도 배운 것이, 경험 체험 한 것이, 아는 것이 한계가 있을 거니까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주관신앙이란 것은 자기 생각, 자기 판단, 자기 주장, 자기 경험 체험, 자기 아는 그게 전부로 아는 이게 문제인데 그게 자기가 전부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거기서 자기 아닌 객관으로 넓혀 나가서 나가는데 그 넓혀야 될 그 방향이 무엇이냐? 그게 바로 옳은 걸 찾는 것이고 옳은 것은 말씀 안에 들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속으로 자기가 들어가고 그 말씀으로 자기를 만들어 말씀의 자기를 만들어야 되는데 주관이 되면은 그 말씀 안에 자기를 만들어도 그 말씀 역시 자기가 아는 말씀이 전부가 아니니까 객관을 살펴서 같이 따져봐야 되고 살펴봐야 되는데 내가 아는 게 전부입니다. 주관신앙은.
베드로가 주님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도망도 쳤고 주님 오는 게 싫기도 했다가 요때는 주님 사랑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그때 비로소 많은 고난 받고 십자가 못 박혀 죽었다가 3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비로소 가르치니까 베드로 마음이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사랑하는 선생님이 사랑받는 수제자가, 수제자라 표현이 좀 그렇지만은, 성경에 베드로가 수제자라는 말은 없지요? 가장 열심 있는 그런 제자는 맞지만은. 사랑을 듬뿍 받은 그 제자가 사랑하시는 선생님이 억울하게 고난 받고 누명쓰고 죽는다는데 좋을 리가 있습니까? 마음이 너무 슬퍼서 주님을 사랑해서 진정 사랑해서 섞임 없는 사랑으로 ‘선생님 그리 마옵소서 왜 그렇게 해야 됩니까? 뭐 때문에 선생님이 억울하게 매를 맞으며 선생님 같은 분이 왜 매를 맞아야 됩니까? 세상에 말이 되는 소립니까? 왜 죽어야 됩니까?’ 베드로가 틀린 말이 있습니까? 베드로의 예수님을 향한 그 중심, 그 심정, 간곡한 소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요 마음이 틀림이 있습니까?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 옳았습니다. 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전부 범위가 어딥니까?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 충정, 아끼는 것, 간절한 소원한 것, 간청한 것, 그 모든 것의 범위가 어디 범위입니까? 자기 범위 안입니다. 자기 생각에. 자기 판단에. 아무리 살펴봐도 내가 아무리 살펴봐도 우리 선생님 같은 분이, 베드로가 아무리 살펴봐도 예수님 같은 분이, 세상에 이렇게 선한 분이 거룩한 분이 이런 하나님의 아들이 매를 맞다니 억울하게, 죽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왜 그래야 되는가? 베드로의 지식의 범위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젊어서는 내가 스스로 띠 띄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베드로 아직 젊습니다. 이래 주님 향해서 그렇게 간곡히 이런 사랑 가지고 뜨거운 열정 가지고 주님을 향해서 그리 간절히 간청한 베드로였지만은 그 범위가 좁았습니다. 주관적입니다. 범위가 좁았다 주관적이다 그 말은 베드로의 지식이 주관적이다 그 말이지요. 한계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것은, 이거 다 아시는데 한번 기억해보실까요. 같이 한번 해보실까요? 정저지와(井底之蛙)! 세상 말이지만은 우물 속에 개구리, 우물바닥 개구리라 그 뜻 아닙니까? 우물 속에 개구리입니다. 베드로 신앙은 요때까지만 해도 우물 속에 개구리 신앙입니다. 그 신앙의 범위가. 천하에 베드로 같은 사람이 없지만은 요때는 아직까지 베드로 신앙은 어렸고 좁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베드로가 아끼는 제자지만은 그때 그걸 밝혀놓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베드로의 중심도 알고 사랑도 아시지만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를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정곡을 찔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생각했습니다. 자기하고 주님의 인간의 정리만 생각했고 사제지간의 정리 사제지간의 사랑만 생각을 했지 그 위에 계신 광대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섭리 역사, 주님의 십자가 대속이, 매 맞고 고난 받고 죽으시는 그 역사가 어떤 구원을 이루며 어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며 광대한 역사가 이루어지며 영광이 되어지는 것을 베드로는 그때까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마음이 아파도 이해가, 안 되도 혀를 깨물고 말을 안 했겠지요. 참고 말지. 그래도 이것이 아버지 뜻이니까, 이것이 영광의 부활을 향한 것이니까 그랬을 건데 베드로는 그때까지 몰랐습니다. 모르니까 자기 지식의 한계 내에서, 베드로의 성격은 활동성이고 알고 나면 즉시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베드로 신앙의 장점입니다, 동시에 단점이고. 그러기 때문에, 자기 아는 대로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서 그래했지만은 그 사랑이 주관적이었다, 자기 범위 안이었다 그 말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살펴서 늘 우리는 그래서 교회 안에서 집안에 회의를 하면 사람들이 그렇지요. 모든 회의에서 사람들의 모임에서 토론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그러니까 선진국들 문화인들은 그래 안 하지요. 내 말을 하면 내 생각도 있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있다. 나는 이래 판단하지만은 다른 사람은 저래 판단할 수 있다. 그게 문화인들의 생각이랍니다. 그래서 미국 같은 나라는 그게 좋은 장점이면서 한편으로 문제가 뭐냐면, 교회 설교자 목사님들이 설교하면 이거는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 하고 설교해서 딱 판단해서 설교하면 교인들이 그런답니다. 목사님 그냥 설교만 하십시오. 판단은 누가 한다고요? 우리가 할 겁니다. 목사님은 그래 생각하지만은 나는 생각이 다릅니다. 왜 그렇게 우리를 그렇게 끌고 가려고 하십니까? 그게 장단점이 다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자기라는 사람, 자기라는 그 신앙, 자기 주관, 그 넘어서 있는 게 사람들인데 앞에 여론신앙과 연결시켜 보면 사람들의 모든 말은 참고만 할 것이고 자기 주관도 참고만 할 것이고 그러면 참 신앙은 뭔가? 참 신앙은 출발이 첫째가 어디 속으로 들어갑니까? 오로지 말씀 속에 들어가야 되지 말씀 없는 주관은 마지막에 마귀 되고 맙니다. 말씀 없는 여론은 나중에 인본주의 되고 맙니다.
그래서, 여론신앙에는 하나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론 신앙에 하나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론신앙에 하나님이 없지 않습니다. 있습니다. 주관신앙에 하나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거기도 있습니다. 인본주의 신앙도 신앙입니다. 인본주의도 신앙이고 세본주의도 신앙입니다. 그런데 순서가 틀리지요. 인본주의는 하나님보다 인간이 우선입니다. 세본주의는 천국보다 세상이 우선입니다. 신본주의는 신본주의에 사람이 없습니까? 신본주의에 세상이 없습니까? 신본주의는 하나님이 첫째고 중심이고 전부고 세상은 그를 향해서 맞춰 나가는 게 신본이고, 인본은 인간이 중심이고 하나님이 인간 위해서 있는 것이고 이게 인본입니다.
여론신앙도 하나님이 있지만은 여론신앙은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을 알고 섬기되 사람들을 따라가고 사람들의 이목을 보고 사람들에게 영향받고 피동되어 가는 것이 여론신앙이고, 사람들의 영향받는다 그 말은 결국 자기 환경에 영향받는다 그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바로 되어 있으면 그 사람은 어디 가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환경이 상관이 없습니다. 금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금이기 때문에 금은 오물 속에 묻혀도 건져서 씻어내면 금입니다. 땅 속에 묻혀도 캐내서 흙 파내고 나면 금입니다. 이 금은 불에 녹혀도 다시 뭉치고 나면 여전히 금입니다. 금이란 것은 깨도 금이고 반지를 만들어도 금이고 목걸이 만들어도 금이고 금이란 것은 그 자체가 변하지 않는 겁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참사람이 되어서 정금 같은 사람이 되고 현실에 영향받지 않고 피동되지 않는 현실에 주인이 되는 그 사람이 되면 가난이 오든지 부가 오든지, 슬픔이 오든지 기쁨이 오든지, 대형사고가 생기든지 무슨 일이 생겨도 그 속에는 요동하지 아니합니다. 왜? 그 모든 건 전부 다 하나님 만들어주신 현실 환경에 지나지 않으니까. 주인공은 나니까. 이게 여론신앙을 벗어나는 요게 참 자기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에 피동이 되는 사람, 사람에 피동되는 그 사람은 좋은 데 가면 좋아서 피동되고 슬픈 데 가면 슬픈데 피동되고 또 기쁜 데 가면 기쁜 데 피동되고 가난하면 가난해서 문제고 부하면 부해서 문제고, 게으른 자는, 잠언 26장에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일하기 싫고 게으르니까 온갖 핑계 다 대는 겁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도는 것 같이,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압니까, 학생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돈다. 지금 문짝은 모두 다른 기술된데 옛날 문짝은 요래 고리가 있고 들어가는 요래 되어 있습니다. 요래 뱅뱅 도는 겁니다. 요래 가지고 문이. 문에 달려서. 그래 뱅뱅 도는 겁니다. 문짝이 돌쩌귀 따라 요래 도는 겁니다, 따라서. 그래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대위에서 뱅뱅 돈다 그럽니다. 성경에 그래 나와 있지요.
나가기 싫으니까 일하기 싫으니까 공부하기 싫으니까. 그러니까 일하기 싫은 자는 일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핑계 다 댑니다. 허리가 아픕니다, 오늘은 머리가 아픕니다, 오늘은 발가락이 아픕니다, 오늘은 감기가 걸렸습니다, 또 오늘은 뒷골이 땡깁니다, 오늘은 허리가 아픕니다. 굶어 죽어라! 공부하기 싫은 인간은 온갖 핑계 다 댑니다. 맨 땅에 그냥 발가벗겨서 사막 한가운데 던져놔도 사람이 바로 된 사람 거기서 나중에 재벌되어서 나옵니다 그 사람.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희씨 정주영씨 이런 사람들은 길거리에 돈이 다 보인다 그러지요. 김우중씨 이런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세계 어느 구석에 던져놔도 얼마 지나고 다 재벌되는 사람들입니다. 까먹는 사람들은 억만금을 안겨놔도 또 까먹습니다. 사람이 문제다 그 말이지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 그래서 우리라는 사람은 원래 그래 강하지 못한데 하나님의 말씀이 이래 우리를 가르치고 구원이란 것은 이런 것이다, 신앙은 이런 것이다 말씀하시고 그러기 때문에 내가 온갖 환경에 다 영향받고 피동되던 연약한 인간이었는데 연약한 인간 내가 말씀을 배워 가지고 ‘아 말씀이란, 신앙이란 구원이란 이렇게 나가는 것이구나.’ 배워서 하나하나 고치고 생각을 하고 연구하고 또 경험하고 자기를 만들어가다 보니까 옛날에는 열 가지 현실 오면 거기다 피동되서 어쩔 줄 몰랐는데 1년 지나고 나니까 이번에는 한 한 가지는, 아홉 가지 피동되는데 한 가지는 피동이 잘 안됩니다. 2년 지나고 나니까 이번에는 여덟 가지 피동이 되는데 두 가지는 피동이 안 됩니다. 3년 지나고 나니까 일곱 가지 피동되고 세 가지는 아무래도 피동이 안 됩니다. 영향 받지 않습니다. 10년 지나고 나니까 이제는 신앙이 장성해서 한 가지 말고는 어떤 환경으로도 피동되지 않습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는 온 천하가 어떻게 해도 하나님 향한 내 신앙은 요동하지 않는 이런 사람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게 천국에 맞는 사람이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나이 40이면 불혹이라 그러지요. 불혹이라 말은 미혹을 잘 받지 않는다 그런 뜻이지요, 아마? 사람들의 말에 영향받지 말아야 됩니다. 피동되지 말아야 되고. 또 자기 환경에 대해서 영향받고 피동되지 않아야 됩니다. 제10계명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무릇 내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다른 사람의 환경은 남의 것입니다. 그걸 부러워하고 탐하면 십계명 어기는 죄입니다. 현실에 피동되는 죄입니다. 내 옆에서 억만금 가진 사람이 진수성찬해도 그거는 그 사람 일이고, 나는 하루에 한 끼밖에 못 먹어도 하나님이 한 끼만 먹으라 주셨으니까 한 끼 먹고, 나는 두 끼 먹으면 안 되는가? 따져보고 두 끼 먹을 수 있는 노력해서 먹으면 먹고 안 주시면 못 먹고.
이 세상은 지나가는 과정 아닙니까? 잘 먹으면 오래 삽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너무 잘 먹어서 수명이 단축되지 좀 굶어가며 사는 것이 오히려 오래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이어트 모두 한다고 난리지 않습니까? 살찌면 다 병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옷은요? 온갖 것이 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나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서 자기 환경 다 변할 수 있고, 또 그 사람이 하나님 닮은 그런 사람이 되면 그 사람 가는 곳은 전부 천국을 만듭니다. 요 여론신앙.
하나는 주관신앙입니다. 자기 아는 게 전부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아는 게 좋습니다. 신앙은 경험 체험이라야 되니까. 그런데 그 자기 아는 것이 말씀에 맞춰야 됩니다. 내가 먹어보니까 세상에서 저도 한번씩, 설교 시간에 지난번 언제 말씀드렸지요? 제가 먹어본 나물 중에는 고구마나물이 제일 맛있더라. 그거는 제 주관입니다. 교인들 중에서 참 목사님 아직까지 입맛이 잘 모르시구만. 내가 먹어보니까 그보다 맛있는 나물 꽉 찼던데. 그럴 수 있는 겁니다. 내가 먹어보니까 이게 제일 맛있더라. 그거는 내 주관입니다. 나는 이렇지만은, 가정주부들이 그런 경우 있지요? 밥상을 차려놓고, 자기가 맛있는 음식을 차려놨습니다. 맛있는 국을 차려놓고 ‘이거 드십시오. 맛있습니다.’ 남편은, 예를 들면은 콩나물국 끓여놓고 ‘이 콩나물국 시원하게 맛있습니다. 드십시오.’ 아내가 그럽니다. 남편은 콩나물국보다 된장국 좋아합니다. 그런데 된장국 먹고 싶고 콩나물국은 싫어하는데 아내가 기어코 ‘이거 건강에 좋습니다, 시원합니다, 맛있습니다, 속이 다 풀립니다’ 하고 억지로 떠먹이면 남편은 몇 번 듣다가 안되면 밥상을 엎어버리는 겁니다. 그거는 니 입맛이고 나는 된장국이 좋은데. 그런 아내 만나면 안 바뀌면 골치가 아픈 겁니다. 자기 주관대로 남편, 입맛이 다 다른 것인데 자기 입맛에 콩나물국 맛있다고 남편도 거기 꼭 맞춰야 됩니까? 아들도 다 맞춰야 됩니까? 건강에 필요해서 조절할 필요 있겠지만은, 예를 들자면 그렇다 그 말입니다.
이런 주관적인 것이 강하니까 가정이고 교회고 사회고 온갖 문제들이 다 생기는데 믿는 사람들은 요걸 깨달아 가지고 그 주관을 말씀으로 넓혀 나가야 됩니다. 내 생각이, 내 판단이,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이것이 과연 말씀에 옳으냐 그르냐. 말씀에 맞춰나가야 되지 말씀은 뒤로 두고 내가 우선이다 그래 나가면 마지막에 예수님 배반하고 도망칩니다. 결과가 그렇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의 말 따라가고 사람들의 눈치보고 사람들에게 피동이 되고 현실에 영향받고 피동되고 종 되는 여론신앙을 버리자. 자기를 전부인 줄 아는 주관신앙도 버리자.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으로 자기를 살피고 말씀으로 구별하고 말씀으로 따져보고 말씀이 내 지식과 이성 비판과 내 양심을 지배하고 그래서 말씀이 점점 나를 지배해서 양심까지 말씀이 지배해서 말씀이 지배하는 그 양심, 신앙양심이 되고 그 신앙양심대로 사는 그 생활이 되면 그 양심을 통해서 빛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영감 역사가 그 양심 통해서 들어오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영감신앙이라, 샛별이라 그리 말씀을 하는 겁니다. 이거는 좀 어려우니까 다음에 하고,
오늘은 신앙의 길, 실패의 길 2가지입니다. 사람의 말 따라가고 사람 이목 보고 사람 눈치 보고 사람에게 영향받고 피동되고 현실에 그리되는 이런 여론신앙을 우리에게서 찾아서 다 뽑아내야 되겠습니다. 말씀이 요동치 아니하면 요동치 않는 우리가 되어야 됩니다. 자기 주관이 전부인 줄 아는 이런 우물 안에 개구리 같은 이런 신앙을 버려야 됩니다. 말씀으로 자기를 다 만들어 나가고 말씀이 나를 지배하는, 그래서 말씀이 내 전부를 지배하고 신앙양심도 지배하고 그리고 나중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깊은 은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여기까지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되겠다, 어렵지만은 좀 생각해 보십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주관이란 것은 자기 성격도 지대하게 영향 미칩니다. 자기 성격, 자기 성향. 그러기 때문에 신앙 출발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성격을 바꿔라. 성질도 고쳐라. 바탕도 바꿔라. 말씀으로 그 모든 것 다 갈아서 말씀에 맞추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바로 나가기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