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17일 주일 오후
2026년 5월 17일 주일 오후
찬송: 197장
본문: 잠언 27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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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관은 절수가 1절 2절입니다. 왜 생명관이냐면 생명을 어떻게 보느냐. 생명을 보는 눈. 어떻게 1절 2절이냐, 3절 4절은 현실관입니다. 어떻게 이어지느냐, 5절 6절은 사랑관입니다. 말씀을 좀 드렸기 때문에 연결 시킬 수 있을 겁니다. 자라가면서 점점 온전해져 가는 겁니다 모든 생명은 저절로 자랍니다. 자라가면 온전함의 이름입니다. 생명이 고급일수록, 고차원의 생명일수록 자라가는 과정에 있어서 온전한 모습과 삐뚤어지게 자라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은 같은 사람이라도 위대한 사람도 있고 보통 사람도 대부분이고 도둑놈도 있고 사기꾼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걱정 끼치는 사람도 있고 온갖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여러 가지에 적용 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 생명을 가졌고 그 생명은 자라가는데 꼭 같은 사람이고 같은 생명이고 같이 자라가는데 왜 사람의 모습이 다를까.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별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자라가는 과정에서 관리가 이리되고 저리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불택자들은 살아가며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소망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 살 의욕이 없는 것이 세상 사람이고 그래서 심하게 표현하자면 그들은 부인할지라도 막살이 하는 겁니다.
안 그렇던데, 의지를 가지고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던데. 그런데 그게 전부 가다 보면 헛된 걸 알게 되고 마지막은 후회되게 되는 것이 사람이고 안 그런 사람들은 속아서 그렇게 되고 마는 겁니다. 목적이 소망이 없으니까. 믿는 사람은 목적과 소망이 있습니다. 무엇이니까. 믿는 사람의 목적은 하나님이 목적이고 소망이고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울을 가려면 가는 길이 정해져있습니다. 서쪽을 향해서 계속 나아가면 전라도가 나옵니다. 북쪽가면요, 서울 나옵니다. 목적이 있으면 가는 길은 바로 잡아야합니다. 그 소망을 향해 가는 길입니다. 3절 4절은 현실관입니다. 살아가는 과정 실제라는 뜻이지요. 현상세계 현실입니다. 현실은 시간적으로 사건입니다. 생명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끊이없이 날마다 고쳐가며 자라가는데 객관고 자라가는데 실제 그렇게 고쳐가려고 현실에서 노력을 하니까 가장 힘들고 애먹이는 놈이 누구냐, 다른 사람 아니고 자신이더라. 그래서 돌은 무겁다. 그게 좋은 돌이 되면 참 귀한데, 독약도 귀하게 쓰면 약이 되고 약도 귀하게 쓰면 독약이 됩니다.
나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참 귀한 사람인데 끊어져버리면 하나님과 끊어지면 모든 게 다 끊어집니다. 지능의 근원, 실력의 근원, 영광의 근원, 그런데 이 전부 다가 다 끊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분과 끊어지면 왜 끊어지느냐,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쉽게 풀이하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먹으면 안되는데, 해로운데 하거나 말거나 먹고싶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되는 악입니다. 하기 싫은데 청소도 이불도 해야하고 안하면 그게 바로 악입니다. 그거 하나하나가 모래입니다. 그게 뭉처지면 돌이됩니다. 그래서 큰 돌 오래된 돌 단단하게 자리 잡은 돈은 포크레인으로라면 몰라도 사람 힘으로는 안됩니다. 습성 속에 자리 잡은 그 무거운 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다 일생을 망치는겁니다. 그런데 쌓이고 쌓이고 더해지면 점점 더해지면 미련이 되어버립니다. 분노를 바라면 더해서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사람 사람 대화해보다가 귀를 막고 자기 말만 하면 하다가 말아야하지 미련한 자와 지혜로운 자가 서로 이야기를 하면 이기나 마나 미련한 자가 계속 말합니다. 거기서 시기가 되고 질투가 시기 질투 투기라는 것은 하나님의 몸을 쪼개는 죄가 되는 겁니다. 시기 질투 투기가 있어야하는데 하나님의 시기 하나님의 질투 하나님의 투기를 가지면 되는데 그런 사람들은 거의 없어서, 우리가 역사에 모세가 몇 명입니까. 비느하스는 한 명 밖에 없습니다. 그런 분노를 가지기 어렵습니다. 거의 대다수가 자기 중심적이어서 사람의 성내는 것이 이루지 못한다. 이걸 다스리는 게 중요한 겁니다. 사랑관인데 숨은 사랑이 있고 면책이 있는데 면책은 나타난 사랑이라는 뜻이 되지요. 면책이 다 사랑입니까. 얼굴 보면서 꾸짖는 게 면책입니다. 유대인을 넘어섰는데 유대인들이 오니까 면책을 했습니다. 뭐든지 필요한 것은 다 전했다고 하는 게 바울입니다. 면책은 대놓고 상대방을 꾸짖는 게 면책이다.
사람은 신앙도 성격을 많이 따라갑니다. 치우치면 안되는데 면책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조심해야하는 겁니다. 나보다 윗사람이 지적할 때 듣는 정도지 달게 받으면 신앙의 사람이고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상황에 따라 필요합니다. 시간이 없을 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꾸 잊어버리니까. 그 상황 지나가면 어쩔 수가 없는 거지요. 면책을 못하는 거지요. 양떼 위해서 눈물로 기억하며 어지간한 사람들은 않고 할 수 있으나 시험드는 사람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사랑해서 구원하고 싶어서 온전하게 하고 싶어서, 그런 마음과 심정과 소원을 가지고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이런 것들을 쌓이고 쌓이고 쌓였을 때 면책하면 약효가 그렇게 되는데 면책은 참 어려운 겁니다. 숨은 사랑보다 낫다. 무조건 나은 게 아닙니다. 숨은 사랑은 사랑입니다. 면책이 있기 전에 숨은 사랑이 많고 우리와 무관한 말씀이 아닌 겁니다. 세 번째 큰 제목이 뭐라고 했죠. 생명관, 3절 4절은 현실관 사랑관입니다. 무엇이 사랑은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하는 겁니다. 그 말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해서 고치고 고침 받는 내가 연결 시키면 그렇습니다. 너 자신을 끊없이 고쳐 나가라. 너를 뽑아라. 너를 뽑아 고치고 나면 너만 고칠 것이 아니라 형제도 함께 고쳐라. 사랑이 뭐냐,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만 가졌고 하나님만 가질 수 있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전지 전능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게 모형이고 참사람의 그게 많습니다. 사랑이 뭐냐,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이란, 사랑하는 상대방을 자기 실력껏 지혜껏 능력껏 가장 좋게 가장 복되게 아름답게 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정말 사랑하면 그 능력껏을 모든 것을 다 쏟아 붓습니다.
그래서 머리 좋은 사람의 사랑과 머리 나쁜 사람의 사랑은, 사랑의 본질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릅니다. 부자의 사랑과 거지의 사랑은 본질은 같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다릅니다. 부자의 사랑은 부자니까, 이건희 회장의 사랑은 이재용 회장을 만듭니다. 유식학 대학 교수 박사 아버지와 막노동 하는 아버지는 본질은 같으나 결과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그렇게 복되게 아름답게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전부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람 중에 본질 본성은 같습니다만,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을 망하게 하고 실패하게 만들고 지옥을 보내고 실패하게 만드는 부모가 수도 없이 많은 겁니다. 실력이 없으니까 그렇게 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끝에 가보면 마지막에 전부 후회고 탄식이고 가슴 치는 것이고 그게 모든 인간 사랑입니다.
세상 노래에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하는데 그건 껍데기만 말하는 것이고 사랑은 전지전능자만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면 우리 지능으로 수명으로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영존하신 수명으로 가기 때문에 결과가 맺어지게 되는 게 사랑입니다. 부부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 되어야합니까. 주님이 되어야합니다. 자녀 사랑의 원동은 누가 되어야합니까. 부부 사랑의 원동은 누가 되어야, 주님 되고 자녀 사랑의 원동은 부부가 되어야합니다. 주님 빼놓은 부부사랑은 시기하실 것이고, 일반적인 부부 없는 사랑은 기러기 아빠도 만들고 온갖게 다 나오는 겁니다. 사랑은 하나님만 가진 건데, 나타날 때 어떻게 나타났느냐,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에 속성 자체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는 전부 다가 사랑 밖에 없습니다 사랑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움직이면 전부 다 사랑입니다.
순금 덩어리에서 떨어지는 건 순금인 것처럼 노아 홍수에 수억만명을 죽인 것도 사랑이고 지옥을 만든 것도 마귀를 만드신 것도 인간을 범죄케 하신 것도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 닮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닮은 형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천국을 기업으로 주는 것도 크고 천국을 다스릴 수 있는 실력으로 준 것도 큰데 자체가 하나님화 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백 목사님이라는 분의 의미는 세계 제일의 주일 학교, 껍데기입니다. 총공회라는 교단, 180건의 목회 설교록 더욱 알맹이입니다. 그렇게 목회 설교가 나오게 하신 생애, 그게 가장 큰 의미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의 구원의 방향이라는 것은 탈선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목회자들의 탈선이 거기서 나옵니다. 살다보면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런 자체를 만들어가는, 반사든 구역장이든 주일 지키는 거든 전부 소망으로 목적으로 삼으면 이게 사랑이고 목적인데 부족해도 바로 가게 되는 것이고 여기서 벗어나면 다 탈선되고 마는 겁니다. 여기서 탈선되면 지옥갑니까. 천국 가지만 거리는 멀어지게 되는 겁니다.
믿는 사람의 세상 생활이고 하나님의 세상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면책은 숨은 사람보다 나으니라, 면책은 자기를 끊임없이 고쳐나가고 하나님을 원형으로 삼아서 온전하게 자라게 만들고 객관에서 고쳐나가고 자기 가장 어려운 돌 고쳐나가는데 한 번 고쳤다고 다른 사람을 선생 입장에서 면책하는 건 아닙니다. 면책이라는 것은 서로서로 하는 겁니다. 면책은 서로가 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다 아버지는 하나님이고 주님 외 우리는 전부 다 같기 때문에 아무리 성화 되고 존경되었다고 했을 지라도 스스로가 오만해지면 넘어져버립니다. 그래서 바울도 백목사님도 특징이 그래서 면책을 받는 자세를 받았지 하는 자세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고쳐주기 위해서 지적할 때 자기 입으로는 잘 모르면서 근본으로 하면 잘 아는 게 자신인데 그래서 자기는 잘 모르는데 사람이 보면 모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잘 모입니다. 그래서 고칠 걸 알아서 고치고, 다른 사람은 내가 고치는 걸 보고, 서로 고쳐주는 게 됩니다. 이렇게 면책이 필요한 건데, 드러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를 면책하던지 필요할 때 형제가 서로 면책하든지, 대놓고 그 자리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고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사람을 위한 사랑이 들어가야하는 겁니다. 그 심정이 들어가면서 상대방을 지적해야하는데 많은 부모님들이 감정으로 면책을 합니다. 이놈, 말을 그렇게 하고 해버립니다. 자식 자랑 기본으로 깔려 있더라도, 자식을 위해서 애를 태웠으며 자식이 삐뚤어질까 싶어서 기도했으며 조심을 했으며, 참된 부모는, 옛날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애들 보는 앞에서는 찬물도 쉽게 못 마신다고. 그런데 부모는 자식의 바로가 됩니다. 얼마만큼 그렇게 조심하면서 책망하면 그렇게 듣습니다. 자기 친자식도 어렵습니다. 먼 사람에게 면책하는 것은 지나가는 사람의 귀를 잡아당기는 거지요. 그만큼 나만큼 가깝기 때문에 책임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 주변에 맡기신 사람은 고쳐가야할 책임을 함께 지워주는 겁니다. 느끼기 어렵고 실제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내 주변 사람, 많은 걸 가지고 나서 면책해야 부작용이 적지 그게 면책입니다. 숨은 사람이 많이 들어가고 그게 면책입니다.
친구란 오래 친한, 오래된 친한 사람. 그래서 친구인데 성경으로 친구를 말하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 너희가 내 명령대로 하면 내 친구다. 주님이 우리를 친구로 삼으셨는데 어떻게 해야한다고요, 주님 말씀대로 순종을 하면 건설적으로 내 것이 된다. 우리가 주님의 친구가 되고 주님은 우리 친구 되셔서, 제가 좋아하는 찬송 중 하나인데 만왕의 왕이 구유 위에 누워서 친구되려 하시네. 그런 게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주님이 버리셨습니다. 주님 명령대로 순종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너희를 종이라고 하지 않고 친구라고 하는 것인데 통책도 서로서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모든 말씀은 친구이신 주님이 통책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친구되신 주님이 하는 말씀입니다. 친구의 통책은 쓰임새는 용도는 군신 관계, 주종관계에 쓰이는 게 충성입니다. 그런데 친구인데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그 충성이라는 말 자체가 자기 마음과 몸 정성 전부 다 바치는 걸 충성이라고 합니다. 친구끼리 자기 전부를 바쳐서 충성한다면 상대방을 고쳐서 상대방의 잘못된 것을 고치길 원하는, 참사람이 되기 원하는 그 마음 그 자세 자기를 다 드려서라도 고치고 싶은 그 사랑 그게 바로 통책이라고 합니다. 더 깊고 더 강하고 그런 게 통책입니다. 이런 통책, 그래서 친구의 통책은 우리의 서로서로가 나를 기준해서 가족끼리 부부끼리 교인들끼리 위치가 어떠하든지간에 나아가서 통책할 수 있는 관계로 맺어져 있어야 복된 사랑의 관계가 되어있어야겠다는 겁니다. 이정도 합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고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 있는데 원수가 있는데 원수가 멀리있지 않고 진짜 원수는 내 안에 있고 입맞춤, 맞장구입니다. 그게 듣기 좋은데 원수일 가능성이 많다는 겁니다. 그게 거짓이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던 밖에 있든 나 구원에, 고치는데 방해가 되면 그 모든 것은 원수가 되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런데 면책은 싫어하고 통책은 싫어하고 원수의 입맞춤은 아주 좋아하고 우리들이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겁니다. 사랑이 뭐냐, 그래서 자기를 고치는 자기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고쳐서 참 사람 만들고 싶은 그런 사람을 가지는 게 형제 가족 교인끼리 주의 몸된 형제끼리 같은 것이다 바로된 것이다 그런 거지요. 듣기 좋은 말하고 오만 거 다 갖다줘야봐야 참사랑 고치기 위해서 많이 해야하니까 수술하려고 치유하려고 사탕도 주고 아이들 치약은 달콤하지요, 마취제를 놔주고 수술하듯이 참사람이 되게하는 이것이 없는 모든 관계 말은 거짓된 거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억을 하고 우리는 이런 면책을 할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사랑의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