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7일 수밤
김동민2025-12-17조회 13추천 1
2025년 12월 17일 수밤
찬송: 135장
본문: 시편 62편 1절 ~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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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자, 1절이 제목이고 5절이 제목입니다. 나의 영원히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며,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만 잠잠히 바라보는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믿음이 있으니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모르면 믿는 게 다 헛된 것이고 알지 못하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참된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믿는 건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믿는다는 것은 허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살아있으시기 때문에 모르고 믿어도 믿음이 되고, 살피시기 때문에 어릴 때는 모르고 믿어도 하나님께서 용납을 하시고 필요한 은혜도 주시고 세월이 가면 자라야하고 신앙이 자라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게 자라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믿는 게 믿음입니다. 돈을 빌리러 왔는데, 돈 많은 사람에게 몇 백 억되는 사람에 몇 억을 빌리러 왔습니다. 뭘 믿고 빌려주겠냐. 담보도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 사람을 보고 평소에 신용도 그리고 하는 말과 실제 설명, 그러면 빌려줄 수 없는 게 맞는 것이고 빌려줘야하는 상황이 된다면 그 사람의 말을 설명을 들어보고 어디에 쓸건지, 어떻게 돈을 투자해서 무슨 사업을 할건지 이걸 잘 들어보고 판단해서 될만해야 빌려주고 투자하는 거지 근거가 없는데 뭘 믿고 빌려주냐는 거지요.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병원에 있으니까 믿고 내 몸을 맡깁니다. 그런데 잘 모르는 사람이면 내 몸을 맡길 수 없다고 하지요. 손양원 목사님 주기도문 보면 멀리 일부러 장기간 몇 달 동안 집을 비워서 타지로 출장을 가게 되는데 아이를 맡기게 됐습니다. 아이 옷하고 먹을 쌀하고 생활비를 맡겼습니다. 몇 달 집을 비우니까 맡아달라고, 지인이고 하니까 맡겼겠지요. 그런데 그 아이를 맡은 사람이 며칠 있다 보니까 한 달 즈음 있다보니까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한 달 즈음 있었으니까 두 달 즈음 맡겼는데 먹을 양식도 있고 생활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이는 없지만 양식도 옷도 있으니까 괜찮겠지. 아버지 와서 애 어딨습니까. 모르겠는데 다 있습니다. 그러더랍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거지요. 맡긴 것도 문제가 있지만.
세상에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과응보는 불교에서 쓰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세상 속에 담아두신 인과응보, 심는대로 거둔다, 뿌린대로 거둔다, 행한대로 받는다 그게 이 세상의 자연 심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며, 믿을 수 있고, 받아볼 수 있습니다. 내게 의지할 대상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역사를 하게 되는 겁니다. 상대해주시는 믿어갈수록, 믿기는 믿는데 그 믿음이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아니고 주관적인 믿음 이런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인격 대 인격으로 하지 않습니다. 모두 주관적이고 오판적이고 자기 체면적인 신앙이 됩니다. 신앙이란 주관적인 면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날때부터 사람은 태어날 때 만들어질 때 자존자가 아닙니다. 하나님만 자존자고 모든 피조물 만물의 영장의 사람도 하나님을 인해서 생겼습니다. 실제 형성되는 것도 부모님의 유전자로 생겼습니다. 태생적으로 객관에 의해서 내 주관이 만들어졌고 생겨진 거지요.
그 객관으로 인해서 형성되는 것도 객관에 의해서 나라는 주관, 자아가 형성이 되고 생겨지게 되는 겁니다. 만들어지게 되는 겁니다. 자녀는 부모님을 닮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 되신 부모님으로부터 성향도 인격도 정신력도 형상대로 자라가게 되는 겁니다. 객관에 대해서 생겨진 주관이 자라가는 주관이 된다는 겁니다. 주관이란 객관을 말하는 거고 자아라는 인격, 그 자아가 객관에 의해서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 생활이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게 신앙 생활이기 때문에 목적이 하나님을 닮는 것이고 객관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겁니다. 근본이 하나님으로 시작 됐고 과정도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지게 되는 겁니다. 객관으로 인해서 내 주관이 형성되어진다는 거지요. 그런데 객관의 모든 것들은 태어날 때는 객관으로 세워집니다. 객관이 거의 100프로 주관을 집하고 만듭니다. 그래서 세 살 때가지는 아이의 잘못은 법적으로도 부모 책임입니다.
부모의 절대적이라는 만큼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세 살 즈음 지나면 자아가 그렇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형성이 되면 주관적으로 되는 겁니다. 그때부터 주관이 객관을 받아들일 때 역사를 하는 겁니다. 못 들어오는 겁니다. 볼 때 보면은 계속 바뀌지만은 바꾸면 되는 것이고 세상 공부도 그렇고 선생님이 가르쳐도 귀막고 만화나 보고 그러면 안 들어옵니다. 성경은 객관입니다. 내가 읽어야 내 것이 됩니다. 주관이 되고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믿어야 내 것이 됩니다. 살아계신다는 그 분을 봤습니까. 믿음은 언제라고 했습니까. 믿음은 어떻게 해야 생깁니까. 궁극적으로 은혜인데, 내가 믿어야 생겨지는 겁니다. 믿는다는 건 내 주관적인 겁니다.
고기를 잔뜩 집어넣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밑에 다 갈아앉았고 국물만 떠먹습니다. 맛은 나겠지요. 그러니까 저어서 드십시오, 믿에 건더기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종교의 명상과 기독교의 차이입니다. 실체가 없는게 이종교입니다. 그래서 그런 줄 알고 속고 속이는 겁니다. 기독교는 그게 아닙니다. 실존을 하는 겁니다. 내 주관이 찾아들어가는 겁니다. 찾으면 찾아집니다. 안 찾으면 나와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관이다 체면이다 이러는 겁니다. 5절에는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라. 이게 최면입니다. 최면을 스스로 거는 겁니다. 기도할 때 주여 하나님 아버지 그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범위를 벗어나면 됩니다. 명성을 많이하고 주관적인 체면적인 신앙이 진리라는 아궁이를 벗어나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가 됩니다. 탈선이 되어버립니다.
진리라는 아궁이 관에서 생각하면 성령의 역사입니다. 불이 탑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성경 말씀을 근거해서 하나님의 구원과 성경과 진리를 깨달으면 깨달아지고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되는 겁니다. 이 다윗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어떤 분이신지, 지식적으로 알고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일차적으로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연이라는 것도 많고 그럴 듯하다 싶으면 이론을 만들고 실제 실험을 해서 완성시켜 나가는 게 과학의 모든 것들입니다. 겪어봐야 압니다. 물건도 써봐야 아는 겁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압니다. 믿음으로 알고 그런데 실제로 아는 것은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압니다. 어떻게 알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십니까. 과거에 많이 배웠죠. 하나님이 많이 나타나는 그 일차적인 모습을 가르쳐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것을 가르쳐서 영감이라고 합니다. 진리라 그럽니다. 진리가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체계가 되었을 때 체화가 된다고 합니다. 그걸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 나의 언생심사와 관계인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역사가 내 현실 생활에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매끄럽게 나타나고 죄짓고 잘못 살면 하나님의 징계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고 깨끗하게 살면서 사람을 상대하면 그게 복된 마음이 되고 표정이 되고 부드러운 말투가 되고 좋게 됩니다. 탈선의 길을 걷고 그러면 말투가 험해지고 이상하게 흐트거지게 됩니다. 문제는 경험하면서도 미련하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만 바라며 구원이란 좋게 만들어주는 것이고 가난하면 하나님을 바라고 그러면 가난함에서 건짐이 되는 겁니다. 병이 있으면 병에서 건지는 것도 그들에게 있을 겁니다. 그분이 만병통치인가 모릅니다. 환경이든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든, 환경이 있다든지 마지막에 구원이 되는 건짐이 되는 영육에 복이 되는 결과가 오게 됩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만들어가는 구원되어가는 과정을 가르켜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윗은 깨달아서 요동치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 한 분 바라보니까 비유도 했었지요. 몸무게 체중이 100키로 나가는 사람은 어지간한 바람 불어도 안 날아갑니다. 저같은 사람은 휘청입니다. 안 날아가는 방법은 뭐라고 했던가요, 뭔가 꼭 붙들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안 날아갑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있으면 안 날아갑니다. 그게 그겁니다. 이걸 기억하면서 간단하게 공과 살펴보면 사람이라는 것은 세월을 살아갑니다. 세월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세월을 살아가고 있고 살아갑니다. 세월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어떻게든 세월을 살고 살아가기 때문에 흔적이 남게됩니다. 밟아가면 남는 것처럼 사람에게 흔적이 남습니다. 우리 각자 자기의 현실입니다. 궁극적으로, 현실을 살아서 과거라는 현실을 살아서 현재까지 왔습니다. 과거를 열심히 살아서 직장 다니고 알뜰살뜰 돈을 모으고 사업하면 돈을 모아서 10년 살면 10년 즈음 직장 생활 바로 알면 적어도 1억 가까이 모을 걸요.
속에 보면 하나님 대응 역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세월을 만들고 사람의 지식을 만들고 기능을 만들고 인격을 만들고 환경을 만들고 천국을 만듭니다. 세월이라는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를 만든 사람을 만들고 세월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세월을 허비하는 것은 제가 이 표현을 참 겁이 나서 쓸까말까하다가 쓰긴 쓰는데 세월을 허비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저도 참 두렵지만은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렸다. 그 세월 속에 얼마나 귀한 게 들어있는데, 거기 천국이 들어있는데 세상적으로 인격이 들어있고 실력이 들어있는데 그 세월 속에, 그 귀한 세월 찬송가 95장을 2절이죠. 그 귀한 세월 보내고 그걸 예사로 생각했는데 이 말씀 생각하면서 얼마나 귀한지. 세월은 귀한 겁니다. 세월은 시간이고 귀한 겁니다. 그 세월 속에 자기 앞날의 오만 게 다 있습니다. 자기 미래를 던져버리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귀한지 모르는데.
내가 과거에 잘못 살아서 몸도 병이들고 괴롭고 피투성이고 그러더라도 현재는 복입니다. 모든 새로운 시작은 처음부터 하는 겁니다. 모든 출발은 지금부터, 지금부터 하면 되는 것이고 세례를 두고 어떤 분에게 세례받으십시오 20대 제대하고 나서죠. 30대 때였던가. 10년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년에 받겠습니다. 내년에, 그렇게 안 받았는데 20년만에 만나 물어보니까 세례 받았다고 합니다. 미루면 어떤 죄는 끊는 게 좋고 미루는 게 좋습니다. 끊는 게 좋습니다. 의는, 무조건 하는 게 좋습니다. 미루면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출발은 현재입니다. 현재 자기 현실이 어떤 모습이 되어있던간에 상관없습니다. 박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씨, 사형 당했습니다. 그때 비서실장 그런데 장로랍니다. 그러면 길이 생깁니다. 얼마 안 지나서 석방 됐습니다. 감옥에 가도 현재에 대해서 소망 가지면 되는 겁니다. 낙망이라는 게 없고 그런 겁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것에서나 복된 것입니다. 시궁창 같은 곳이라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신앙자유 교회자유 양심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현실은 어려워도 어려울 게 없는 거지요. 어느정도 있겠지만은 이만하면 천국이고 복인지 일상의 복을 감사하고 복인줄 모르고 다른 것을 찾으면 한눈파는 순간, 신풍교회 목사님 설교를 들었는데 천사가 하늘에 있으니까 천사입니다. 그게 하나 떨어져버렸습니다. 땅에, 하늘에 있는 별로 있을 때 천사였는데 땅에 떨어지면 이건 타락한 천사가 되고 사탄 마귀가 됩니다. 그게 뭘 가졌느냐, 열쇠를 가졌습니다. 천국 열쇠.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는 무저갱 열쇠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무저갱을 열어줍니다. 말 한 마디로, 보여줌으로, 그 열어준 무저갱이 욕심의 문을 열어준 겁니다. 별별 욕심이 다 있으면 끝도 없이 커져버립니다. 일상의 행복 현재 우리의 고요한 법을 주지 못하고 다른 걸 바라고 새로운 걸 바라고 호기심은 원죄입니다. 새로운 걸 찾아보면 타락입니다.
현재 우리에게 주신 환경, 기도, 마음껏 신앙 자유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하고, 고요하게 바라보고 현재 우리 생활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충성하는 우리가 되어야겠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자. 몸에 병이 들어도 빛에 쪼들린 가운데에서도 우리들이 나아갈 길입니다. 그럴 때 우리 소망이 다 이루어지고 그런 겁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
찬송: 135장
본문: 시편 62편 1절 ~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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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자, 1절이 제목이고 5절이 제목입니다. 나의 영원히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며,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만 잠잠히 바라보는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믿음이 있으니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모르면 믿는 게 다 헛된 것이고 알지 못하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참된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믿는 건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믿는다는 것은 허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살아있으시기 때문에 모르고 믿어도 믿음이 되고, 살피시기 때문에 어릴 때는 모르고 믿어도 하나님께서 용납을 하시고 필요한 은혜도 주시고 세월이 가면 자라야하고 신앙이 자라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게 자라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믿는 게 믿음입니다. 돈을 빌리러 왔는데, 돈 많은 사람에게 몇 백 억되는 사람에 몇 억을 빌리러 왔습니다. 뭘 믿고 빌려주겠냐. 담보도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 사람을 보고 평소에 신용도 그리고 하는 말과 실제 설명, 그러면 빌려줄 수 없는 게 맞는 것이고 빌려줘야하는 상황이 된다면 그 사람의 말을 설명을 들어보고 어디에 쓸건지, 어떻게 돈을 투자해서 무슨 사업을 할건지 이걸 잘 들어보고 판단해서 될만해야 빌려주고 투자하는 거지 근거가 없는데 뭘 믿고 빌려주냐는 거지요.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병원에 있으니까 믿고 내 몸을 맡깁니다. 그런데 잘 모르는 사람이면 내 몸을 맡길 수 없다고 하지요. 손양원 목사님 주기도문 보면 멀리 일부러 장기간 몇 달 동안 집을 비워서 타지로 출장을 가게 되는데 아이를 맡기게 됐습니다. 아이 옷하고 먹을 쌀하고 생활비를 맡겼습니다. 몇 달 집을 비우니까 맡아달라고, 지인이고 하니까 맡겼겠지요. 그런데 그 아이를 맡은 사람이 며칠 있다 보니까 한 달 즈음 있다보니까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한 달 즈음 있었으니까 두 달 즈음 맡겼는데 먹을 양식도 있고 생활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이는 없지만 양식도 옷도 있으니까 괜찮겠지. 아버지 와서 애 어딨습니까. 모르겠는데 다 있습니다. 그러더랍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거지요. 맡긴 것도 문제가 있지만.
세상에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과응보는 불교에서 쓰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세상 속에 담아두신 인과응보, 심는대로 거둔다, 뿌린대로 거둔다, 행한대로 받는다 그게 이 세상의 자연 심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며, 믿을 수 있고, 받아볼 수 있습니다. 내게 의지할 대상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역사를 하게 되는 겁니다. 상대해주시는 믿어갈수록, 믿기는 믿는데 그 믿음이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아니고 주관적인 믿음 이런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인격 대 인격으로 하지 않습니다. 모두 주관적이고 오판적이고 자기 체면적인 신앙이 됩니다. 신앙이란 주관적인 면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날때부터 사람은 태어날 때 만들어질 때 자존자가 아닙니다. 하나님만 자존자고 모든 피조물 만물의 영장의 사람도 하나님을 인해서 생겼습니다. 실제 형성되는 것도 부모님의 유전자로 생겼습니다. 태생적으로 객관에 의해서 내 주관이 만들어졌고 생겨진 거지요.
그 객관으로 인해서 형성되는 것도 객관에 의해서 나라는 주관, 자아가 형성이 되고 생겨지게 되는 겁니다. 만들어지게 되는 겁니다. 자녀는 부모님을 닮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 되신 부모님으로부터 성향도 인격도 정신력도 형상대로 자라가게 되는 겁니다. 객관에 대해서 생겨진 주관이 자라가는 주관이 된다는 겁니다. 주관이란 객관을 말하는 거고 자아라는 인격, 그 자아가 객관에 의해서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 생활이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게 신앙 생활이기 때문에 목적이 하나님을 닮는 것이고 객관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겁니다. 근본이 하나님으로 시작 됐고 과정도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지게 되는 겁니다. 객관으로 인해서 내 주관이 형성되어진다는 거지요. 그런데 객관의 모든 것들은 태어날 때는 객관으로 세워집니다. 객관이 거의 100프로 주관을 집하고 만듭니다. 그래서 세 살 때가지는 아이의 잘못은 법적으로도 부모 책임입니다.
부모의 절대적이라는 만큼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세 살 즈음 지나면 자아가 그렇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형성이 되면 주관적으로 되는 겁니다. 그때부터 주관이 객관을 받아들일 때 역사를 하는 겁니다. 못 들어오는 겁니다. 볼 때 보면은 계속 바뀌지만은 바꾸면 되는 것이고 세상 공부도 그렇고 선생님이 가르쳐도 귀막고 만화나 보고 그러면 안 들어옵니다. 성경은 객관입니다. 내가 읽어야 내 것이 됩니다. 주관이 되고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믿어야 내 것이 됩니다. 살아계신다는 그 분을 봤습니까. 믿음은 언제라고 했습니까. 믿음은 어떻게 해야 생깁니까. 궁극적으로 은혜인데, 내가 믿어야 생겨지는 겁니다. 믿는다는 건 내 주관적인 겁니다.
고기를 잔뜩 집어넣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밑에 다 갈아앉았고 국물만 떠먹습니다. 맛은 나겠지요. 그러니까 저어서 드십시오, 믿에 건더기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종교의 명상과 기독교의 차이입니다. 실체가 없는게 이종교입니다. 그래서 그런 줄 알고 속고 속이는 겁니다. 기독교는 그게 아닙니다. 실존을 하는 겁니다. 내 주관이 찾아들어가는 겁니다. 찾으면 찾아집니다. 안 찾으면 나와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관이다 체면이다 이러는 겁니다. 5절에는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라. 이게 최면입니다. 최면을 스스로 거는 겁니다. 기도할 때 주여 하나님 아버지 그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범위를 벗어나면 됩니다. 명성을 많이하고 주관적인 체면적인 신앙이 진리라는 아궁이를 벗어나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가 됩니다. 탈선이 되어버립니다.
진리라는 아궁이 관에서 생각하면 성령의 역사입니다. 불이 탑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성경 말씀을 근거해서 하나님의 구원과 성경과 진리를 깨달으면 깨달아지고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되는 겁니다. 이 다윗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어떤 분이신지, 지식적으로 알고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일차적으로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연이라는 것도 많고 그럴 듯하다 싶으면 이론을 만들고 실제 실험을 해서 완성시켜 나가는 게 과학의 모든 것들입니다. 겪어봐야 압니다. 물건도 써봐야 아는 겁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압니다. 믿음으로 알고 그런데 실제로 아는 것은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압니다. 어떻게 알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십니까. 과거에 많이 배웠죠. 하나님이 많이 나타나는 그 일차적인 모습을 가르쳐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것을 가르쳐서 영감이라고 합니다. 진리라 그럽니다. 진리가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체계가 되었을 때 체화가 된다고 합니다. 그걸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 나의 언생심사와 관계인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역사가 내 현실 생활에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매끄럽게 나타나고 죄짓고 잘못 살면 하나님의 징계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고 깨끗하게 살면서 사람을 상대하면 그게 복된 마음이 되고 표정이 되고 부드러운 말투가 되고 좋게 됩니다. 탈선의 길을 걷고 그러면 말투가 험해지고 이상하게 흐트거지게 됩니다. 문제는 경험하면서도 미련하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만 바라며 구원이란 좋게 만들어주는 것이고 가난하면 하나님을 바라고 그러면 가난함에서 건짐이 되는 겁니다. 병이 있으면 병에서 건지는 것도 그들에게 있을 겁니다. 그분이 만병통치인가 모릅니다. 환경이든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든, 환경이 있다든지 마지막에 구원이 되는 건짐이 되는 영육에 복이 되는 결과가 오게 됩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만들어가는 구원되어가는 과정을 가르켜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윗은 깨달아서 요동치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 한 분 바라보니까 비유도 했었지요. 몸무게 체중이 100키로 나가는 사람은 어지간한 바람 불어도 안 날아갑니다. 저같은 사람은 휘청입니다. 안 날아가는 방법은 뭐라고 했던가요, 뭔가 꼭 붙들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안 날아갑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있으면 안 날아갑니다. 그게 그겁니다. 이걸 기억하면서 간단하게 공과 살펴보면 사람이라는 것은 세월을 살아갑니다. 세월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세월을 살아가고 있고 살아갑니다. 세월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어떻게든 세월을 살고 살아가기 때문에 흔적이 남게됩니다. 밟아가면 남는 것처럼 사람에게 흔적이 남습니다. 우리 각자 자기의 현실입니다. 궁극적으로, 현실을 살아서 과거라는 현실을 살아서 현재까지 왔습니다. 과거를 열심히 살아서 직장 다니고 알뜰살뜰 돈을 모으고 사업하면 돈을 모아서 10년 살면 10년 즈음 직장 생활 바로 알면 적어도 1억 가까이 모을 걸요.
속에 보면 하나님 대응 역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세월을 만들고 사람의 지식을 만들고 기능을 만들고 인격을 만들고 환경을 만들고 천국을 만듭니다. 세월이라는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를 만든 사람을 만들고 세월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세월을 허비하는 것은 제가 이 표현을 참 겁이 나서 쓸까말까하다가 쓰긴 쓰는데 세월을 허비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저도 참 두렵지만은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렸다. 그 세월 속에 얼마나 귀한 게 들어있는데, 거기 천국이 들어있는데 세상적으로 인격이 들어있고 실력이 들어있는데 그 세월 속에, 그 귀한 세월 찬송가 95장을 2절이죠. 그 귀한 세월 보내고 그걸 예사로 생각했는데 이 말씀 생각하면서 얼마나 귀한지. 세월은 귀한 겁니다. 세월은 시간이고 귀한 겁니다. 그 세월 속에 자기 앞날의 오만 게 다 있습니다. 자기 미래를 던져버리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귀한지 모르는데.
내가 과거에 잘못 살아서 몸도 병이들고 괴롭고 피투성이고 그러더라도 현재는 복입니다. 모든 새로운 시작은 처음부터 하는 겁니다. 모든 출발은 지금부터, 지금부터 하면 되는 것이고 세례를 두고 어떤 분에게 세례받으십시오 20대 제대하고 나서죠. 30대 때였던가. 10년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년에 받겠습니다. 내년에, 그렇게 안 받았는데 20년만에 만나 물어보니까 세례 받았다고 합니다. 미루면 어떤 죄는 끊는 게 좋고 미루는 게 좋습니다. 끊는 게 좋습니다. 의는, 무조건 하는 게 좋습니다. 미루면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출발은 현재입니다. 현재 자기 현실이 어떤 모습이 되어있던간에 상관없습니다. 박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씨, 사형 당했습니다. 그때 비서실장 그런데 장로랍니다. 그러면 길이 생깁니다. 얼마 안 지나서 석방 됐습니다. 감옥에 가도 현재에 대해서 소망 가지면 되는 겁니다. 낙망이라는 게 없고 그런 겁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것에서나 복된 것입니다. 시궁창 같은 곳이라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신앙자유 교회자유 양심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현실은 어려워도 어려울 게 없는 거지요. 어느정도 있겠지만은 이만하면 천국이고 복인지 일상의 복을 감사하고 복인줄 모르고 다른 것을 찾으면 한눈파는 순간, 신풍교회 목사님 설교를 들었는데 천사가 하늘에 있으니까 천사입니다. 그게 하나 떨어져버렸습니다. 땅에, 하늘에 있는 별로 있을 때 천사였는데 땅에 떨어지면 이건 타락한 천사가 되고 사탄 마귀가 됩니다. 그게 뭘 가졌느냐, 열쇠를 가졌습니다. 천국 열쇠.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는 무저갱 열쇠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무저갱을 열어줍니다. 말 한 마디로, 보여줌으로, 그 열어준 무저갱이 욕심의 문을 열어준 겁니다. 별별 욕심이 다 있으면 끝도 없이 커져버립니다. 일상의 행복 현재 우리의 고요한 법을 주지 못하고 다른 걸 바라고 새로운 걸 바라고 호기심은 원죄입니다. 새로운 걸 찾아보면 타락입니다.
현재 우리에게 주신 환경, 기도, 마음껏 신앙 자유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하고, 고요하게 바라보고 현재 우리 생활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충성하는 우리가 되어야겠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자. 몸에 병이 들어도 빛에 쪼들린 가운데에서도 우리들이 나아갈 길입니다. 그럴 때 우리 소망이 다 이루어지고 그런 겁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