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26일 금밤
김동민2024-01-26조회 411추천 71
2024년 1월 26일 금밤
찬송: 90장, 92장
본문: 사무엘상 6장 12절
지난 주일 날 생각해봤던 것입니다. 과거로부터 우리 공회로부터 목사님들 안수 받기 전에 설교 시험치는 그런 과목이 있는데 그때 이 본문을 주로 하는 분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가는 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전부다가 양의 입장을 가진 시대이기 때문에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은 아니고 자신을 돌아보는 게 좋습니다. 벧스메스로 돌아가는 암소가 중심인데, 첫째가 한 사람의 영향력이었습니다. 전쟁과 관련된 일인데 성경에 전쟁은 많이 있고 시대 역사에 시대마다 나라마다 전쟁은 굉장히 일어나고 있고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쟁은 참 비참한 겁니다. 내부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역사는 원인 없는 역사가 없습니다. 모든 건 다 원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도 내부로 들어가면 곳곳에 전쟁이 나야하는 것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에 붙였다고 하는 것이고 그 표면적으로는 엘리 제사장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백성 전부의 책임진 사람이 엘리 제사장이기 때문에 백성이 잘못했다 해서 나라를 전쟁으로 몰아넣지는 않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자식들에 대한 정이 강했다. 예배와 신앙에 대해 반발심은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이기 때문에 치료약이 없습니다. 그래서 혼을 낼 때도 아이를 감동시켜야하고 어릴 때 이걸 실패했으면 그런데 나이가 들면 화를 내겠습니까 뭘 하겠습니까. 기도하고 방법을 보실 때 애쓴다, 자식에 대한 정이 예배를 멸시하는 그런 걸 하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사장, 사사인데 용서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을 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죽고 법궤도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 사람의 위치, 역할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죄를 지었다고 나라가 전쟁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사입니다. 책임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납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영향력은 지대하게 미친다고 생각하십니다. 다윗도 그렇지만 나같은 사람 즈음이야 그게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고 지나치게 악인이 되고 우매자가 되는 겁니다. 얼마든지 키울 수도 있는데, 다윗이 목동 시절에 만왕의 왕이 될 줄이야 몰랐습니다. 이순신이 커서 장군이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선생님들이 나는 백목사님같이 될 수 없어 그렇습니까? 아닌겁니다. 그렇게 되면 죄가 되는 겁니다. 나무가 자랄 때 영어 이름이 있다던데 높이가 엄청 큽니다. 손톱만한 묘목이 수십미터 백미터까지 올라가버립니다. 그러면 나중에 차가 돌아다니는 그런 사람이 되어럽니다. 나이가 70이 된 사람은 나는 이미 늙었다. 그것도 죄입니다.
나이가 어리든 젊든 많든 내일 죽을지라도 나 한사람에게 다 쏟아지는 그래서 단일성이 중요한건데,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나눠지지 않습니다. 피조물은 그리 못하는데 하나님은 단일성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소망두고 기대했던 하나님의 기대가 요셉을 기대했던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이 사무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이 우리에게 똑같이 쏟아집니다. 다윗에게 다르고 사무엘에게 다르고 우리에게 다르지 않습니다.
반도체 만들 때 물을 엄청나게 쓴다고 합니다. 물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간다고 합니다. 반도체 뿐이겠습니까. 저희들 어릴 때 우리나라는 물이 온 나라 가득차고 넘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엄청나게 댐도 많았는데도 물이 모자란다고 했습니다. 암만 비 쏟아져도 흘러가버립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나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면 남아있질 않는 겁니다. 내가 다 담으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나도 아브라함처럼 되겠다 나도 요셉처럼 되겠다 나도 다윗처럼 되겠다. 그러면 손해봅니까. 우리 개척 초기에 집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영어를 쓰다보니까 소년이며 야망을 가져라. 나쁜 말입니까. 좋은 말입니다. 예배 시간에 주일학생들이 영어를 써서 표를 되니까 잘못된 것이지 믿는 사람이 소망을 가지는 것은 기독교는 소망의 도입니다. 요셉처럼 되어야겠다 사무엘 다윗처럼 되어야겠다. 안나처럼 되어야겠다. 혼자 된지 84년 동안에 하나님을 섬기다가 주님을 만남 시므온과 안나처럼, 모두 노인들입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입니다. 일파 만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도 교회도 안 믿는 곳까지도 사람 하나가 들어서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게 되고 가정과 교회와 어떤 때는 교단까지 말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누룩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은 지대하고, 그 영향력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바로 그 한 사람입니다.
내가 엘리냐, 사무엘이냐. 악한 왕들이나 보고 선악역을 끼친 사람들을 보고 나는 사울이냐 다윗이냐 사무엘이냐. 나는 요시아냐 아합이냐. 나는 룻이냐 이세벨이냐. 자기를 돌아볼 수 있겠죠. 한 사람의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하나님의 단일성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다 쏟아붓습니다. 그런데 내가 안 받으면 나한테 오질 않습니다. 내가 믿고 받을 때 하나님의 전부는 내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믿음의 도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불신을 위해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가 끝나고 예레미아 시대 때는 계속 하신 말씀이 바벨론 왕국에 항복을 해라, 그래서 요시아 왕 때도 늦어서 요시아 왕은 참 잘했는데 위에서 죄를 지어서, 요시아이기 때문에 너는 선한 왕이라서 너의 후 시대에 너의 눈으로 나라 절단 날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잡혀갈 때, 히스기야왕은 요시아왕의 손자입니까 아들입니까. 요시아의 손자인지 아들인지 그렇거든요. 그 히스기야가 바벨에 잡혀갈 때 눈이 빠진 상태로 잡혀갑니다. 내 자손이 그렇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 견디겠습니까. 제 나이가 되면 실감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는 것이 오래 사는 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겠구나. 90 아버지가 70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날까 싶어서 잠을 못잔다고.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밤낮으로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 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 어떻게 살아갈까, 요시아는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큰 복이었습니다. 좀 더 살았으면 어미가 자식을 삶아먹는 꼴을 봐야합니다. 그런 걸 안 보이고 선한 왕이라서 적당히 데려가셨습니다. 그게 요시아는 자손이 번창해서 사는 걸 보면 좋은데 이미 다 기울어졌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겁니다.
다윗도 그랬지만 자식들끼리 그랬지요. 자식이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댔지요.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나이가 들어서 자식들이 커서 겪어보면 그 말씀이라고 느낄 겁니다. 그래서 10살 짜리에게는 30살짜리의 지능과 지능을 안 주십니다. 30 40대 청년에게도 60대의 지능을 주지 않습니다. 못 살아갑니다. 나이 많은 노인들의 그런 걸 안 넣어주셨습니다. 때가 되면 점점 느끼게 되고 이스라엘 블레셋을 붙였기 때문에 이길 수 밖에 없는데 회개하고 돌이켜야하는데 예를 들자면 안 믿는 사람하고 거래하다보면 100만원 빌렸습니다. 100만원 빌렸는데 못 갚으면 죄송해야하는데 나 집사야 이러면 교회를 세상에 갖다대는 겁니다.
성경책 팔아서 장사하는 사람이 옛날에는 복음 전파가 됐는데 요즘에는 위험합니다. 장사할 때 성구 적어놓고 성경 걸어놓고 하는데 법궤같은 짓입니다.
이스라엘이 세상 상대로 하나님을 갖다댔습니다. 그래서 빼앗겨버렸지요. 블레셋도 가져가서 둘 다 깨져버렸지요. 개인 속에도 가정 속에도 둘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활동 속에는 언제나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의고 하나는 불의인데 불의가 의를 이겨버리면 나는 깨지는 겁니다. 구원이 다 절단나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간단히 기억을 하면서, 그래서 재앙을 당해서 가는 곳마다 절단나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누구를 떠올렸다고요. 역사를 배워서 애굽을 떠올렸습니다. 애굽나라가 이스라엘 붙들고 있다가 그렇게 됐다. 그럴 때 돌이키면서 되는 것입니다. 남을 보고 타산 지석이라고 합니까. 이런 블레셋이 잘못해서 돌이킬 때 재앙을 멈춰줬습니다. 암소, 이거 블레셋이 한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게 아니고 블레셋, 안 믿는 사람들이 한 겁니다. 이걸 성경을 기록해서 우리의 구원 도리로 기록했습니다. 새 수레를 만들어서 멍에 메어보지 아니한 소를 준비해서 새 거니까 무엇이 새 것인가 이 세상 때가 묻지 않았고 이 세상을 향한 욕심이 없다. 짐을 실는 것이고 멍에를 메는 게 소입니다.
이 세상이 물욕이든지 명예욕이든지 자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멍에 메어보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메어보지 못한다. 새끼를 낳으면 젖이 납니다. 어머니가 음식을 먼저 먹어야 나오는 게 젖입니다. 옛날에는 심청전 이야기 아시나요. 심청이 아버지가 봉사죠 심봉사, 어머니가 일찍 떠났습니다. 그래서 젖 좀 달라고 돌아다닙니다. 잘 사는 집에 엄마가 아이 젖먹이기 힘드니까 대신 먹여주는 엄마를 뭐라고 합니까. 유모라고 합니다. 젖 유자. 모세의 유모가 누구던가요. 모세의 유모가 친어머니입니다. 요게벳. 아이를 기르는 양식입니다. 먼저 먹어야 나옵니다. 내가 말씀으로 살아서 변화시키고 넘쳐나는 이것이 젖나는 소입니다. 내 말 속에서 내 행동 속에서 내 인간 관계 속에서 일처리 속에서 다른 사람이 볼 때 말씀이 나와야합니다. 그게 젖나는 소입니다. 그게 빛이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이 되는 겁니다. 말씀으로 살아나가면 저절로 이런 건 되어야합니다.
그렇게 보냈는데 소가 가면서 어떻게 갑니까. 울면서 갑니다. 이것도 생각해볼건데 가둬놓았습니다. 송아지를 떼놓고 어미소의 울음소리는 비통한 겁니다. 너무너무 슬픈 겁니다.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겁니다. 그게 길입니다. 참된 신앙이 표를 내지 않아도 이런 걸음이고 주님이 가신 걸음이고 우리가 걸어야하는 걸음인데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참된 종들은 걸어갔습니다. 나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혈육의 정실을 끊어버렸다든지 말씀 때문에 나보다 다른 사람을, 남의 자식을 먼저 생각하라고 합니다. 신앙 생활으로. 다른 사람 구원 때문에 나와 내 가족들을 손해보이는데 돈 몇 푼이야 뭐 그렇겠지요. 때로는 위신을, 사람이라는 감정의 동물입니다.
암소는 울면서 갔습니다. 왜 울면서 갔습니까. 새끼를 울면서 가니까 왜 떼어놨습니까. 새끼를 데리고 있으면 못갑니다. 비슷한 그런 게 있습니다. 이렇게 새끼를 떼놓고 가는데 멈추지 않습니다.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짐승이면 본능적으로 멈추고 돌아가야 정상입니다. 말씀을 모시고 가니까 돌아가지도 않고 치우치지도 않고 우직하게 미련하게 말씀에 붙들려서 이게 암소입니다. 치우치지 않고, 마지막에 가니까 멈춰섰습니다. 그 다음에는 뭘 합니까. 잡아서 번제로 바쳐버립니다. 이게 주님이 가신 길이고 참된 종들이 가신 길이고 우리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이걸 기억을 하고 말씀을 전할 때도 적어도 자신을 돌아봐야합니다. 하나하나. 한 사람의 영향력 나는 어떤가, 불의를 이길 때 나의 악습이 내 속의 신앙을 이길 때 어찌되는가. 내가 갈 걸음인데 나는 지금까지 걸어왔는가. 십자가를 두려워하면 신앙의 걸음은 걸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
찬송: 90장, 92장
본문: 사무엘상 6장 12절
지난 주일 날 생각해봤던 것입니다. 과거로부터 우리 공회로부터 목사님들 안수 받기 전에 설교 시험치는 그런 과목이 있는데 그때 이 본문을 주로 하는 분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가는 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전부다가 양의 입장을 가진 시대이기 때문에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은 아니고 자신을 돌아보는 게 좋습니다. 벧스메스로 돌아가는 암소가 중심인데, 첫째가 한 사람의 영향력이었습니다. 전쟁과 관련된 일인데 성경에 전쟁은 많이 있고 시대 역사에 시대마다 나라마다 전쟁은 굉장히 일어나고 있고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쟁은 참 비참한 겁니다. 내부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역사는 원인 없는 역사가 없습니다. 모든 건 다 원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도 내부로 들어가면 곳곳에 전쟁이 나야하는 것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에 붙였다고 하는 것이고 그 표면적으로는 엘리 제사장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백성 전부의 책임진 사람이 엘리 제사장이기 때문에 백성이 잘못했다 해서 나라를 전쟁으로 몰아넣지는 않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자식들에 대한 정이 강했다. 예배와 신앙에 대해 반발심은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이기 때문에 치료약이 없습니다. 그래서 혼을 낼 때도 아이를 감동시켜야하고 어릴 때 이걸 실패했으면 그런데 나이가 들면 화를 내겠습니까 뭘 하겠습니까. 기도하고 방법을 보실 때 애쓴다, 자식에 대한 정이 예배를 멸시하는 그런 걸 하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사장, 사사인데 용서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을 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죽고 법궤도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 사람의 위치, 역할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죄를 지었다고 나라가 전쟁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사입니다. 책임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납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영향력은 지대하게 미친다고 생각하십니다. 다윗도 그렇지만 나같은 사람 즈음이야 그게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고 지나치게 악인이 되고 우매자가 되는 겁니다. 얼마든지 키울 수도 있는데, 다윗이 목동 시절에 만왕의 왕이 될 줄이야 몰랐습니다. 이순신이 커서 장군이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선생님들이 나는 백목사님같이 될 수 없어 그렇습니까? 아닌겁니다. 그렇게 되면 죄가 되는 겁니다. 나무가 자랄 때 영어 이름이 있다던데 높이가 엄청 큽니다. 손톱만한 묘목이 수십미터 백미터까지 올라가버립니다. 그러면 나중에 차가 돌아다니는 그런 사람이 되어럽니다. 나이가 70이 된 사람은 나는 이미 늙었다. 그것도 죄입니다.
나이가 어리든 젊든 많든 내일 죽을지라도 나 한사람에게 다 쏟아지는 그래서 단일성이 중요한건데,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나눠지지 않습니다. 피조물은 그리 못하는데 하나님은 단일성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소망두고 기대했던 하나님의 기대가 요셉을 기대했던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이 사무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이 우리에게 똑같이 쏟아집니다. 다윗에게 다르고 사무엘에게 다르고 우리에게 다르지 않습니다.
반도체 만들 때 물을 엄청나게 쓴다고 합니다. 물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간다고 합니다. 반도체 뿐이겠습니까. 저희들 어릴 때 우리나라는 물이 온 나라 가득차고 넘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엄청나게 댐도 많았는데도 물이 모자란다고 했습니다. 암만 비 쏟아져도 흘러가버립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나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면 남아있질 않는 겁니다. 내가 다 담으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나도 아브라함처럼 되겠다 나도 요셉처럼 되겠다 나도 다윗처럼 되겠다. 그러면 손해봅니까. 우리 개척 초기에 집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영어를 쓰다보니까 소년이며 야망을 가져라. 나쁜 말입니까. 좋은 말입니다. 예배 시간에 주일학생들이 영어를 써서 표를 되니까 잘못된 것이지 믿는 사람이 소망을 가지는 것은 기독교는 소망의 도입니다. 요셉처럼 되어야겠다 사무엘 다윗처럼 되어야겠다. 안나처럼 되어야겠다. 혼자 된지 84년 동안에 하나님을 섬기다가 주님을 만남 시므온과 안나처럼, 모두 노인들입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입니다. 일파 만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도 교회도 안 믿는 곳까지도 사람 하나가 들어서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게 되고 가정과 교회와 어떤 때는 교단까지 말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누룩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은 지대하고, 그 영향력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바로 그 한 사람입니다.
내가 엘리냐, 사무엘이냐. 악한 왕들이나 보고 선악역을 끼친 사람들을 보고 나는 사울이냐 다윗이냐 사무엘이냐. 나는 요시아냐 아합이냐. 나는 룻이냐 이세벨이냐. 자기를 돌아볼 수 있겠죠. 한 사람의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하나님의 단일성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다 쏟아붓습니다. 그런데 내가 안 받으면 나한테 오질 않습니다. 내가 믿고 받을 때 하나님의 전부는 내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믿음의 도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불신을 위해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가 끝나고 예레미아 시대 때는 계속 하신 말씀이 바벨론 왕국에 항복을 해라, 그래서 요시아 왕 때도 늦어서 요시아 왕은 참 잘했는데 위에서 죄를 지어서, 요시아이기 때문에 너는 선한 왕이라서 너의 후 시대에 너의 눈으로 나라 절단 날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잡혀갈 때, 히스기야왕은 요시아왕의 손자입니까 아들입니까. 요시아의 손자인지 아들인지 그렇거든요. 그 히스기야가 바벨에 잡혀갈 때 눈이 빠진 상태로 잡혀갑니다. 내 자손이 그렇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 견디겠습니까. 제 나이가 되면 실감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는 것이 오래 사는 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겠구나. 90 아버지가 70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날까 싶어서 잠을 못잔다고.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밤낮으로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 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 어떻게 살아갈까, 요시아는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큰 복이었습니다. 좀 더 살았으면 어미가 자식을 삶아먹는 꼴을 봐야합니다. 그런 걸 안 보이고 선한 왕이라서 적당히 데려가셨습니다. 그게 요시아는 자손이 번창해서 사는 걸 보면 좋은데 이미 다 기울어졌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겁니다.
다윗도 그랬지만 자식들끼리 그랬지요. 자식이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댔지요.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나이가 들어서 자식들이 커서 겪어보면 그 말씀이라고 느낄 겁니다. 그래서 10살 짜리에게는 30살짜리의 지능과 지능을 안 주십니다. 30 40대 청년에게도 60대의 지능을 주지 않습니다. 못 살아갑니다. 나이 많은 노인들의 그런 걸 안 넣어주셨습니다. 때가 되면 점점 느끼게 되고 이스라엘 블레셋을 붙였기 때문에 이길 수 밖에 없는데 회개하고 돌이켜야하는데 예를 들자면 안 믿는 사람하고 거래하다보면 100만원 빌렸습니다. 100만원 빌렸는데 못 갚으면 죄송해야하는데 나 집사야 이러면 교회를 세상에 갖다대는 겁니다.
성경책 팔아서 장사하는 사람이 옛날에는 복음 전파가 됐는데 요즘에는 위험합니다. 장사할 때 성구 적어놓고 성경 걸어놓고 하는데 법궤같은 짓입니다.
이스라엘이 세상 상대로 하나님을 갖다댔습니다. 그래서 빼앗겨버렸지요. 블레셋도 가져가서 둘 다 깨져버렸지요. 개인 속에도 가정 속에도 둘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활동 속에는 언제나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의고 하나는 불의인데 불의가 의를 이겨버리면 나는 깨지는 겁니다. 구원이 다 절단나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간단히 기억을 하면서, 그래서 재앙을 당해서 가는 곳마다 절단나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누구를 떠올렸다고요. 역사를 배워서 애굽을 떠올렸습니다. 애굽나라가 이스라엘 붙들고 있다가 그렇게 됐다. 그럴 때 돌이키면서 되는 것입니다. 남을 보고 타산 지석이라고 합니까. 이런 블레셋이 잘못해서 돌이킬 때 재앙을 멈춰줬습니다. 암소, 이거 블레셋이 한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게 아니고 블레셋, 안 믿는 사람들이 한 겁니다. 이걸 성경을 기록해서 우리의 구원 도리로 기록했습니다. 새 수레를 만들어서 멍에 메어보지 아니한 소를 준비해서 새 거니까 무엇이 새 것인가 이 세상 때가 묻지 않았고 이 세상을 향한 욕심이 없다. 짐을 실는 것이고 멍에를 메는 게 소입니다.
이 세상이 물욕이든지 명예욕이든지 자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멍에 메어보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메어보지 못한다. 새끼를 낳으면 젖이 납니다. 어머니가 음식을 먼저 먹어야 나오는 게 젖입니다. 옛날에는 심청전 이야기 아시나요. 심청이 아버지가 봉사죠 심봉사, 어머니가 일찍 떠났습니다. 그래서 젖 좀 달라고 돌아다닙니다. 잘 사는 집에 엄마가 아이 젖먹이기 힘드니까 대신 먹여주는 엄마를 뭐라고 합니까. 유모라고 합니다. 젖 유자. 모세의 유모가 누구던가요. 모세의 유모가 친어머니입니다. 요게벳. 아이를 기르는 양식입니다. 먼저 먹어야 나옵니다. 내가 말씀으로 살아서 변화시키고 넘쳐나는 이것이 젖나는 소입니다. 내 말 속에서 내 행동 속에서 내 인간 관계 속에서 일처리 속에서 다른 사람이 볼 때 말씀이 나와야합니다. 그게 젖나는 소입니다. 그게 빛이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이 되는 겁니다. 말씀으로 살아나가면 저절로 이런 건 되어야합니다.
그렇게 보냈는데 소가 가면서 어떻게 갑니까. 울면서 갑니다. 이것도 생각해볼건데 가둬놓았습니다. 송아지를 떼놓고 어미소의 울음소리는 비통한 겁니다. 너무너무 슬픈 겁니다.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겁니다. 그게 길입니다. 참된 신앙이 표를 내지 않아도 이런 걸음이고 주님이 가신 걸음이고 우리가 걸어야하는 걸음인데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참된 종들은 걸어갔습니다. 나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혈육의 정실을 끊어버렸다든지 말씀 때문에 나보다 다른 사람을, 남의 자식을 먼저 생각하라고 합니다. 신앙 생활으로. 다른 사람 구원 때문에 나와 내 가족들을 손해보이는데 돈 몇 푼이야 뭐 그렇겠지요. 때로는 위신을, 사람이라는 감정의 동물입니다.
암소는 울면서 갔습니다. 왜 울면서 갔습니까. 새끼를 울면서 가니까 왜 떼어놨습니까. 새끼를 데리고 있으면 못갑니다. 비슷한 그런 게 있습니다. 이렇게 새끼를 떼놓고 가는데 멈추지 않습니다.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짐승이면 본능적으로 멈추고 돌아가야 정상입니다. 말씀을 모시고 가니까 돌아가지도 않고 치우치지도 않고 우직하게 미련하게 말씀에 붙들려서 이게 암소입니다. 치우치지 않고, 마지막에 가니까 멈춰섰습니다. 그 다음에는 뭘 합니까. 잡아서 번제로 바쳐버립니다. 이게 주님이 가신 길이고 참된 종들이 가신 길이고 우리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이걸 기억을 하고 말씀을 전할 때도 적어도 자신을 돌아봐야합니다. 하나하나. 한 사람의 영향력 나는 어떤가, 불의를 이길 때 나의 악습이 내 속의 신앙을 이길 때 어찌되는가. 내가 갈 걸음인데 나는 지금까지 걸어왔는가. 십자가를 두려워하면 신앙의 걸음은 걸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