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1109-주후(출3:15)
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2014-11-13조회 390추천 56
20141109 주후
출애굽기 3:15-15
사울이 하나님 앞에 교만해서 잘 몰랐던 존재 셋이 있으니, 첫째는 하나님을 몰랐고 두 번째는 자기를 몰랐고 세 번째는 사람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나면 사물도 바로 알 수가 없게 되어집니다. 과학이란 것은 물리기 때문에 물질자체를 연구하는 것이 과학이지만은 정확한 의미의 과학이란 것은 그 물리를 연구해서 사람이 사는 인간생활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도록 연구하고 하는 것이 과학이지, 인간생활에 적용되지 않는 과학은 아무 소용이 없는 죽은 연구라 그리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자기를 바로 알 수가 없고 하나님과 자기를 바로 모르면 사람이란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에 모시고 살고 또 객관적으로 많은 존재들 중에서 중심되는 사람들 속에 사는 것이 사람인데, 자기를 모르게 되면 그 사람들도 바로 알 수가 없게 되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자기와 사람을 모르면 그들에게 속한 모든 세상의 사물들에 대해서도 그 자체는 바로 알아도 그것의 적용은 바로 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오늘날 지식이 아주 최고로 깊이 넓게 세밀하게 또 정확하게 발달된 그런 21세기 넘치는 지식이 있는 그런 시대지만은 그 모든 수많은 세밀하고 많고 다양한 그런 모든 지식들을 사람들이 잘못 써먹기 때문에 세상에는 온갖 인간에게 해로운 그런 폐단들이 다 일어나게 되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걸 바로 알아야 되는데, 그중에 첫째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 자신의 관계라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라’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하실 때 굳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을 붙여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것을 자랑스럽게 말씀하셨고,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라. 표호란 것은 하나님을 밖으로 나타내는 또 다른 이름이라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이고 여호와가 있는데 그 하나님 여호와를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나타낼때 어떻게 나타내느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였는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상대한 그 상대, 그 관계 그걸 보면 알 수 있고,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그 하나님은 이삭이 하나님을 상대하고 섬긴 그 행적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고, 야곱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름이라 말씀하셨으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가장 중요하게 우선순위로 두고 가장 가치로 두고 중요하게 알고 힘을 써야 될 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이게 가장 중요하면서 동시에 이것이 우리의 전부다 그리 말 할 수 있습니다.
오전에 비유한대로, 포도나무 씨앗 또 혹은 꽃꽂이를 해도 포도나무 가지 잘라서 땅 속에 심은 것, 포도나무 가지는 그 가지있는 맛있는 것을 잘라가지고 땅 속에 꽂아두면 싹이 납니다. 자랍니다 뿌리를 내리고. 씨앗의 발아율이 10프로밖에 안된답니다. 그래서 주로 꽃꽂이 산목으로 그렇게 번식시킨다 그리 말하는데, 그리할 때 그러면 씨앗이든지 그 포도나무 가지든지 그것을 땅 속에 심을때 그게 바짝 말라서 안에 물기도 아무것도 없고 그 포도나무가 살아날 수 있는 그런 생명력이 없는 것은 암만 트럭으로 갖다 꼽아봐야 그냥 말라버리고 썩고 말지, 나지를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씨앗 속에 그 가지 속에 꼽으면 살아날 수 있는 그 안에 생명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병아리를 부화를 시키려면 그 달걀 안에 병아리가 될 수 있는 생명이 있는 달걀을 가지고 품어야 그게 부화가 되는 것이지, 무정란 그런 것을 갖다가 암만 품어봐야 병아리가 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 신앙이기 때문에 자존하신 하나님이 계셨고, 그 하나님이 당신의 뜻으로 정하신 것이 목적이고, 그 목적 안에 우리들이 들어있었고 그 목적에서 목적을 위한 예정이 나왔고, 그 목적에서 그 목적을 위한 예정 순서를 따라서 많은 존재가 지음 받았고, 그 지음받은 존재를 가지고 그 목적을 위해서 거기서 뻗어 나온 것이 하나님의 모든 주권 섭리로 도성인신도 대속 역사도 전부다 그런 것이고,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모든 주권 섭리가 다 거기서 뻗어나와가지고 외부로 나온 것이지 밖에 것이 들어가서 되어진 것이 아니다는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란 것은 늘 자기 속에 들어가서 내 속에 있는 자기 속에 중생된 새사람을 찾아야 되고, 자기 속에 그 영 속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서 그분과 자기 관계를 바로 가지고 자기 속에 중생된 영 새사람을 실력있게 강하게 길러나가는 그것이 우리 신앙이고 우리 구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라 그럴때, 사람은 영을 말하는 것이지 마음과 몸을 사람이라 그러지 않잖습니까, 우리가 배워 아는대로. 마음과 몸이란 것은 짐승들도 가지고 있는 마음과 몸입니다. 그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속에 영이 있을때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사람의 구원은 내 속에 중생된 영을 찾고, 그 영을 실력있는 그런 영으로 강하게 길러가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 신앙생활이라, 그게 자기 내면속에 들어있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자라갈 때 외부의 모든 환경들을 모두 접촉하면서 환경들의 도움을 받아가지고 자라가도록, 마치 씨앗을 심으면 땅 속에 심어야 되고 또 그 안에 습기도 있어야 되고 온도도 필요하고 또 싹이 나고 나면 햇볓도 들어와야 되고 공기도 통해야 되고 이런 여러 가지들이 서로 도와가지고 그 씨앗에 싹을 틔우고 자라가게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길러가실때도 하나님이 내 속에 계시고, 내 속에 계신 그 하나님의 중생된 영을 통해서 당신을 나타내고 그 중생된 영을 점점 우리가 길러가되, 그 중생된 영이 내 마음을 통해서 나오고 또 내 몸을 통해서 밖으로 나와가지고 내 마음과 몸을 통해서 내 밖에 있는 사람도 만나고 사물도 접촉을 하고 이래가지고 거기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또 접촉을 하고 생각을 하고 판단하는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자라는 것은 자기 속에 중생된 새사람이 점점 자라게되는, 그래서 외부의 환경, 외부 현실 환경들, 객관의 모든 협조와 도움을 받아가지고 자라는 것은 내 속에 새사람이 자라가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만들지 아니하고 자기를 찾지 아니하고 자기를 만들지 아니하고 외부에 아무리 큰 일을 하고 많은 일을 하고 훌륭한 그런 일을 했다할지라도 그거는 자기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모든 역사는 자기 속에 가장 깊이 계시는 하나님을 찾아서 만나고 그분과 자기 관계가 바로 되어졌을때 비로소 이런 모든 역사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면 이 모든 건 다 허사가 되고, 그런데 하나님만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그분은 워낙 고차원에 참 표현하기가 어렵지만은 그런 존재기 때문에 무형의 완전자라서 우리 피조물이 그분을 알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려서 나타내신 것이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진리 말씀으로 성경에 담아 주셨으니까 우리가 성경 읽으면서 깨달아 아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그 분을 알아가고 그분과 자기 관계를 바로 맺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또 그분은 완전자고 완전자니까 그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 분이고 또 지공과 지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가리지를 아니하고 누구에게나 다 공평되게 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 그래서 이런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겁니다. 자기가 믿고 따르는 자기 지도자가, 혹은 자기 회사의 사장이나 스승이나 그런 사람이 사람을 차별해서 돈 봉투 갖다주면 성적 잘 내주고 이뻐해주고 잘 가르쳐주고, 가난한 그런 학생들은 돌려놓고 왕따시키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스승을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내가 믿고 따르는 지도자가 실력있는 사람 등용해 대우하고 실력없는 사람은 무시하고 또 유식한 사람은 잘 대우하고 무식한 사람은 천대하고 이런 것이 보여진다면 사람이란 것이 그 사람을 진정 존경하고 따르기가 어렵다 그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바깥 세상이나 특히나 더욱 더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을 인도하고 이끌어가는 그런 입장에 있는 그런 몇 사람이라도 지도 입장에 있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이 공평입니다, 공평. 그 공평은 자기 기준에 공평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공평은 위로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하나님 편에서 봐야 공평이 되어야 되고, 그 다음으로는 자기를 믿고 따르는 그들이 볼때 공평이 인정이 되야 그게 되는 것이지, 자기가 아무리 공평이라 해봐야 그거는 맞지를 않습니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맞는 그런 공평이 되야 되지, 그래야 거기 존경이 되어지고, 존경이 있을때 권위란 것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공평 없는 존경은 있을 수 없고, 공평과 존경이 없는 권위는 생겨질 수가 없는 겁니다. 권위란 것은 억지로 만든다고 되는게 아닌 겁니다. 때로는 바로 하는데 따르는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잘 몰라서 오해하고, 또 지도하는 사람은 백가지를 알고 다 지도하는데 따르는 사람은 열 가지만 알고 보니까, 내가 아는 열 가지로 계산해보니까 틀렸다 그래서 공평 아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는데, 그럴때는 부득이하게 설득을 하며 설명하며 기다리면서 그렇게 천천히 가르쳐가며 데려가면서 그렇게 하더라도 어쨌든 최종적으로 하나님 법에서 볼 때 공평된 그게 있어야 그 따르는 사람들이 진정 마음속에 존경이 되어지고, 그런 존경이 마음 속에 있으면 권위란 것은 저절로 생겨지는 것이 권위입니다. 하나님은 그러기 때문에 완전자고, 지공과 지성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서 차별을 하지 않는 분이다.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상대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신데, 그런데 하나님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굉장히 많이 각각 다르게 대하셨으니, 그 다르게 대하신 것은 하나님이 변하거나 하나님이 달라서 차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있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 뜨거운 태양을 대할 때 진흙은 햇볕을 만나면 단단하게 굳어지고, 양초는 햇볕을 만나면 누글누글하게 녹아버리는 것처럼 햇볕은 똑같이 내리쬐는데 내리쬠을 받는 그 물질이 서로 다르니까 형태가 전혀 달라지게 되는 것처럼, 그럴때 그것을 두고 햇볕이 틀렸다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거는 단단한 것이 필요하면 거기 양초를 갖다놓을 것이 아니고 진흙이나 햇볕 받을때 단단하게 되는 그걸 갖다놔야 되지, 물렁물렁하게 되는 것을 갖다놓고 햇볕 내리쬔다고 탓하면 그건 잘못인 것이고, 식물이란 것은 햇볕을 받아야 이게 자라게 되고 특히 가을에 곡식 여물때는 아주 뜨거운 그런 볕을 받아야 곡식이 크고 익어지고 단단하게 여물어 맛도 있고 그렇게 되게 되는건데, 그런데 뿌리도 얕고 습도도 없고 영양분도 없는 그런 곳에 뿌리를 박아놓고 햇볕이 내리쬐니까 더워서 못 살겠다고 말라죽어버리면 말하자면 예를 들자면 돌밭에 뿌리박은 너가 잘못이고, 습기를 머금지 못한 니 잘못이고 영양분 마련하지 못한 식물 네 잘못이지, 저쪽에 봐라 땅 깊은 속에 뿌리 박고 습기 머금고 영양분 받은 저 식물 보니까 햇볕을 받을수록 쑥쑥 자라고 저렇게 잘 자라는데 너와 저게 왜 다르냐? 꼭 같이 내리쬐는데도 받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꼭 같은 분이고 변하지 않는 분인데 그분을 상대하는 사람들이 다르기 때문에 그분의 대응역사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심는대로 거둔다,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스스로 속이지 말아라 이런 말씀들은 행한대로 갚으신다 그런 말씀들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에 따라서 달리 변해서 된다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그리 되니까 거기 대응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필연적으로 그리 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벨처럼 그렇게 사니까 하나님께서 아벨에게는 그리 대하셨고, 가인처럼 사니까 가인에게는 그렇게 대하신 겁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해서 자기 돌아보지 아니하고 가정 돌아보지 아니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천대를 상관하지 아니하고 120년 세월을 오로지 방주만 말씀에 따라 만든 그 생활을 했기 때문에 노아는 말씀에 따라서 구원을 받은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 말씀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멸망을 자취하게 된 것이지, 아무도 그 사람들을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 물론, 궁극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절대 예정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지옥 가기 싫어도 가야 되는 것이고, (자 모두 좁니다, 보니까. 말씀은 어렵고 피곤은 하고 잠은 오겠지요. 그런데 실타래를 가지고 실을 가지고 솔솔솔 풀어나가면, 얼키지 않은 실을 살살살 풀어나가며 졸졸졸 따라나가면 잘 풀어나오는 것처럼 말씀을 붙들고 살살 따라나가면 재미가 있고 따라나와지는데, 그만 중간에 딴 생각을 하고 졸고 한 눈 팔아버리면 중간에 들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씀하신 어떻게 어떻게 하면 복을 받는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화를 받는다는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선포해놨기 때문에 그 선포는 바로 하나님 말씀은 진리고, 진리는 독자적인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포하신 그 말씀을 하나님도 변경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면 니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첫째 삼가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내가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따라서 그대로 순종해서 나가면 그 사람은 그대로 되는 것이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여 말씀을 거역하면 어떻게 비참하게 되어진다는 그대로 걸어가면 그대로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두 길이 있는데, ‘어느 길로 가야 됩니까?’ 누가 물어서 안내자가 길을 가르쳐 줍니다. ‘네. 길이 두 개 있지요. 오른쪽 길로 가면 요리 살살 가다보면은 돌도 있고 산도 있고 내도 있고 그래서 좀 어렵기는 하지만은 당신이 원하는 그런 좋은 곳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왼쪽길로 가면은 보기엔 넓고 수월하고 재미도 있는 것 같은데 가다보면은 천길 낭떠러지가 있어서 거기는 아무도 안 빠지는 사람이 없고 그리 가면 반드시 빠져 죽습니다. 그러니까 왼쪽길 미혹 받지 마시고 오른쪽 길로 걸어가십시오.’ 이렇게 안내를 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가 안내자 말 안듣고 왼쪽길로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빠져 죽었다 말이지요. 원망할 수 있습니까? 원망이 됩니까? ‘내가 당신한테 가르쳐주지 않았느냐. 왼쪽길로 가면 보기 재미도 있고 넓은 길도 가기 좋은 것 같아도 마지막 가면은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다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당신이 그리 갔으니까 빠져 죽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가시밭으로 가면은 가시에 찔리는 것은 필연인 것이고, 또 물에 들어가면 물에 젖는 것은 필연인 것이고, 멸망길로 걸어가면 멸망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거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말이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화있을진저’ 하고 많이 화를 말씀하신 것이 저주가 아니라 그랬지요. 저주가 아니고 그리 가면은 안된다는 것을 바른 길을 가르쳐주고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잘못된 틀린 길을 지금 알려주는데도 그들이 기어코 그 말씀을 안 듣고 안 믿고 귀를 막고 자기들 고집대로 그 길을 가니까, 그리가면 낭떠러지로 가는 것이라고 말을 했는데 기어코 그 길을 가니까 안 떨어지고 베깁니까. 떨어지는게 정상이지요. 안 떨어지는게 이상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살면 복이 된다는 그 길로 가면, 그거는 필연적으로 반드시 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다 그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때, 내가 하나님에게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라 그랬잖습니까.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 받지 아니하시고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 그말은,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해롭게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을 실패하게 하지 않고, 사람에게 손해되게 하지 않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시기를, 성경에 그래 나오지 않습니까?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는 긍휼의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해서 우리를 어쨌든 구원받고 복 받고 영원히 잘되기를 원하시는게 하나님의 사람의 심정이고 뜻이지, 망하기를 원치를 않는데, 사람들이 뚜렷하게 밝혀놨지만은 눈 앞에 보이는 거기에 미혹되가지고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바로 몇 걸음 밖에도 보지 못하고 당장 눈 앞에 펼쳐진 거기 미혹되가지고 그것 좋은대로만 따라가다보니까 마지막 결국은 멸망길로 가고 마는 겁니다. 세상에서도 고진감래라고 고생은 성공의 어머니라 그런 것인데, 고생 끝에 낙이 있다 그리 말하는 것인데, 눈 앞에 있는 그런 자기 등 따시고 배 부르고 편안한 것, 오는 잠을 눈꺼풀이 가장 무겁다고 그러는데, 잠을 이기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자고 싶은 잠 전부 다 자고 나서 무슨 성공을 하며, 자기 마음에 하고 싶은 그런 게임이든지 놀이든지 또 연애든지 친구들과 노는 것이든지 자기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나면 무슨 거기서 얻는 유익이 건설적인 것이 자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있을 것인가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성공한 사람들 보면 끊임없는 쉬지않는 자기 전투가 안 믿는 사람들도 없는 사람은 없고,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사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자기 절제, 의지, 자기와 싸움 이런 게 없는 그대로 세상 세월 보내는 사람하고 그래가지고 믿는 둥 마는 둥 한 2,30년 믿은 사람하고,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인데 철저한 의지와 절제와 인내심 가지고 자기와 싸워서 뭔가 세상에 이룬 그런 사람이 1년 믿은 것하고, 마지막 결실에 보면 30년 믿은 사람보다 1년 믿은 그 사람이 결실은 더 크고 많을수가 있는 것이 신앙의 걸음입니다. 실제라는 겁니다, 실제. 마음의 중심이 중요하고 소원이 중요하지만은, 실제가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중심이란 것은, 방향이란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게 틀리면 아무리 외부로 그게 잘되봐야 헛일인 것이고, 그게 바르다 할지라도 그게 걸어가지 않으면 방향이 옳다 그래도 옳은 방향두고 걸어가야만 그 한길이라도 가까이 가는 것이지, 옳은 방향을 잡아놓고 안 걸어가면 거기 도착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늘 양면을 다 가지는 우리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응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을 해야 되고, 그분은 지공과 지성의 하나님이고 하우하박이 없는 분이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가리지 않는데, 그분의 계약해놓으신 그 계약에 따라서 사람들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분의 대응의 역사가 어느 범위안에서 달라진다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을 해야 되고.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하자면 그걸 표현하면, 사람에 따라서 피동되는 것처럼 그런 역사를 왜 하시게 되는가? 말하자면은 믿음 생활 잘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스럽게 하고 기쁘시게 하고 신앙생활 잘하는 그런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고, 그걸 못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안주시는 그게 왜 그러냐? 당신이 높임을 받고 싶어서, 어느 정도에 위치나 권위나 명예나 이런 것이 있는 사람은 자기 명예라는 것, 자기 이름에 대해서,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이름 있는 명예로운 명망있는 그런 사람인데, 그 사람을 높인다고 해서, 예를 들면 도적이라든지 사기꾼들이 그 사람 이름을 칭하고 그 사람을 칭송을 하고 높이면 그 사람에게 욕이 되고 수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사람다운 그런 사람들이 높이면 더 영광이 되고 명예가 더 되겠지만은, 하나님이란 분은, 그 분은 피조물 무엇에게, 인간을 포함해서 당신은 받을 수 있는 분이 아닌데, 그 받을 수 있는 분이 아니란 것은 뭐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람이 하나님을 높인다고 해도 영광스럽게 한다, 영광의 구원이라 그리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실제로 엄밀히 따지고 보면은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데, 그 영광이란 것이 하나님이 받으신 그 영광인데, 여기까지 가면은 너무 좀 그런가요. 물질만 당신이 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높임을 당신이 받을 수 있을까?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높여도 그 높이시는 높임을 하나님이 받으실 수가 있는 것인가?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높여도 그거는 그분에 대해서 그게 도달하지를 않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나타내고 드러낸다 하더라도, 그거는 참 때묻은 손을 가지고 흙탕물에다가 빨래를 하면, 흙탕물에 빨래하면 빨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빨래를 다 버려놓지 않습니까. 아무리 빨아봐야 그 빨래 속에 흙탕물이 들어가고 다 베리지 빨래가 안되는 것처럼, 때가 가득 들어있는 땟물에다가 빨래하면 빨래가 제대로 안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높일 수가 없고 찬양할 수가 없는데, 뭔가 드릴 수가 없는 것인데 우리들이 하는 그 자체에서 그리 함으로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고 원하시고 그런 방법을 써놓으신 것은 당신이 받기 위해서 높아지기 위해서 영광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나 구원의 영광 위한 것인데 그것도 결국 따지고 들어가보면 우리들을 그런 사람 만드는 것이 되어야 되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을 쓰고 계신다 그말입니다. 이거는 조금 구별해서 좀 더 생각해봐야 되겠고. 그래서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영원토록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피동되시는 그런 대응의 역사를 예정의 범위 안에서 그렇게 해놓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있는 중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말씀하셨고, 또 다른 곳에 다윗도 말씀하셨고, 또 직접 그리 말씀하지 않아도 역사하신 걸 보면 몇 사람이 있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였으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하나님이였는가를 전체로 두고 보면 각도에 따라 달리 생각해 볼 수 있지만은 한말로 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이라 그랬으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믿음의 하나님이다 그리 말할 수 있고, 믿음의 하나님이라 그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믿은대로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되어주셨다 그리 볼 수 있겠지요. 아브라함이 믿은대로의 하나님. 그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릴때도 아브라함이 믿기를 불에 태워서 사람 죽이면 하나님의 말씀 약속이 이삭을 통한 자손이 난다 그랬으니까, 불에 태워서 죽이면 죽은 제가 된 이삭의 몸에서 자손이 나든지 죽은 이삭이 살아나든지 성경을 통해보면 죽은 이삭이 살아나겠다는 그 부활의 지식을 아브라함이 깨달았는데 그대로 된 겁니다. 그래서 부활의 지식을 인류에서 제일 처음 깨달은 사람이 아브라함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믿은대로 하나님께서 해주신 겁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가라 그럴때, 아브라함은 계산대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계산의 도인데, 거기 대해서 계산 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관계에서는 계산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가라하니까 그냥 간 겁니다. 모든 것 다 하나님께 맡겨놓고, 믿으니까 맡겼고 믿으니까 의지했고 믿으니까 바라봤고, 그럴때 어려움이 와서 실수도 있었지만은 전체적으로 보면은 안심했고 담대했고 또 떳떳했고 순종했고, 또 깨끗했고 어쨌든 자기가 믿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아는대로 믿었고 알고 믿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자기 모든 언행심사 모든 대외 접촉의 생활을 하니까, 말씀대로 따라나가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은대로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인도도 하시고 가르쳐도 주시고 승리하게도 하시고 책임도 져주시고 복도 주시고 온갖 걸 다 해주셨다 그말이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으니까 믿음의 하나님이 되어가지고 아브라함의 전부가 되신 분이 하나님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은 섭리의 하나님이라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삭의 생애는 성경에 그리 많지 않은데 그 기록된 걸 보면은 블레셋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들이 이삭의 파놓은 우물을 시기해서 메워버리고, 파면 뺏어가고 파면 뺏어가고 그리될 때 이삭이 그렇게 될 때 조급하게 그들과 시비하지 않고 따지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다 맡겨놓은 겁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고, 이것도 하나님의 역사고 이것도 하나님의 역사고 하나님의 섭리에 다 맡겨놓은 이게 이삭의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다 맡겨놓으니까, 하나님의 이삭에 대한 섭리는 이삭에게 손해되도록 할 수가 없는, 이삭에게 백배나 복을 주시고 이삭이 유익되도록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방향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결국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리 볼 수 있겠고, 또 야곱에 대해서는 야곱은 보면 야곱은 이삭은 그래도 신사적인 그런게 있는데,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달리 야곱은 사람이 어찌보면 가벼운 사람이고 무게가 없는 사람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꾀쟁이라 그러고, 형의 뒷발꿈치를 잡고 나온 그런 야곱이였고, 술수도 많이 부렸고 그랬는데, 그 야곱속에 그 모든 것들의 중심은 오로지 하나님이 아니면 안되겠다는 어디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 한분만으로 전부 삼는 그래서 하나님의 것이라면 무조건하고 다 받아들이는 이것이 야곱이였기 때문에 야곱에게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보면은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그러니까 야곱에게는 하나님께서 능치 못함이 없는 그런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형제들 자기 아들들 사이에 요셉과 베냐민을 편애도 하고 그래서 많은 문제도 발생을 하고 그런 인간적인 실수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어떤 면에서 보면 이삭보다 더 기뻐하신 그런 면을 볼 수가 있다 말이지요. 그래서 이런 걸 볼때는, 기독교 신앙의 알맹이가 무엇인지, 신앙이란 것은 도덕 중심이 아니란 것도 봐야 됩니다. 인간 윤리가 신앙이 아닙니다. 도덕이 신앙이 아니고, 인간의 허물 그런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가 신앙생활에 있는 것이고, 그 속에 중심이 무엇이냐 방향이 어떤 것이냐 그걸 보는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윗은 보면은, 여러 가지가 있는 중에서 다윗에게도 하나님께서 보호도 하셨고 승리하게도 하셨고 두려운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동행도 하셨고 또 높이기도 하셨고 긍휼이 여기기도 하셨고 여러 가지 했는데, 다윗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전체로 가만히 정리해보면 다윗에게 하나님은 왕 되신 하나님, 다윗은 대왕이였는데 그 대왕인 다윗의 왕은 하나님이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왕이였지만은 하나님의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 것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뜻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래서 다윗은 대왕이였지만은 그의 왕은 하나님이였고, 그래서 다윗에게 하나님은 왕 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 역사하셨고 다윗은 그 하나님의 순전한 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래 하시니까 당신을 왕으로 삼으니까 하나님께서 그 다윗을 왕권 계통으로 세워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 뒤에 보면은 요셉이라는 사람은 열일곱살 그때 꿈으로 계시해서 계시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또 계속 동행하셨고 형통케 하셨고 여러 가지 있지만은 요셉에게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열일곱살에 보여주신 그 꿈, 그 꿈 꾼 계시가 마지막 서른살에 그대로 이루어졌는데, 열 일곱 살에 알려주신 그 계시가 서른살에 이루어지기까지 13년동안 많은 과정과 우여곡절을 요셉이 겪었지만은, 그 모든 과정 과정을 요셉은 한번도 의심하거나 낙망하거나 원망, 불평, 불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인도나 약속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그 인도를 따라서 감사로 기쁨으로 하나님 인도를 따라서 종으로 팔려가도, 핍박을 받아도, 팔려가도, 감옥에 들어가도, 누명을 써도 어디까지든지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이게 요셉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다. 다니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였는가? 다니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였겠습니까?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서 특수학원에서 왕의 진미 포도주 사건 생겼을때, 인간 세계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는. 주권의 하나님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다니엘에게는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그렇게 믿으니까 인간의 생사, 흥망, 인간의 지능여부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렸지 인간의 노력과 음식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다니엘이 믿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십배나 나은 지능의 지혜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지능을 주셨고 또 나라를 다스릴때도 전무후무할만큼 바벨론이라는 그 큰 나라를 다니엘이 잘 다스려 통치했고, 그 모든 것이 다니엘이 하나님을 알고 믿기를 ‘하나님은 주권자라. 인간의 모든 주권이 그분에게 매였고, 그분은 구원의 하나님이라’. 그러기 때문에 사자굴 속에도 담대히 들어갔고. 이런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있었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믿음의 조상들의 하나님과 관계는 다 이런 관계였는데,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였고 하나님의 은혜였고 역사였지만은, 그 받은 그 은혜 범위 그 안에서 각자 자기들이 아는대로 하나님을 알고 믿는 그 믿음에 따라 어떻게 믿고, 하나님을 상대하고 대접하고 그분을 모셔 섬기고 그 앞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에 맞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응을 하셔서 지혜도 주시고 복도 주시고 형통케도 하시고 승리하게도 하시고 또 긍휼도 베푸시고 보호도 하시고 온갖 역사를 다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 그런데 사울에게는 하나님께서 정반대로 근심 걱정의 하나님, 또 내가 사울로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라, 후회하시는 하나님. 또 진노하신 하나님, 그리고 복수하신 하나님 이런 하나님으로 사울에게는 나타났으니 하나님이 다른 것이 아니고 사울이 그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으로 그에게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음지가 있고, 양지가 있을때 양지로 가면 그에게는 햇볕이 내려쬡니다. 따뜻합니다. 음지로 들어가면 햇볕은 없습니다. 추워지는 겁니다. 자기가 선택을 해서 내가 추우면 양지로 가면 됩니다. 그런데 춥다 그러면서 음지로 가면서 춥다 그러니까, 그러면 양지로 가면 될 것 아니냐? 왜 음지로 가면서 햇빛을 원망을 하고 그 햇빝이 왜 나한테는 안 오느냐고 원망을 하는가 그 말이지요. 자기가 양지로 가면 될 건데. 사울이 그리 된 것은 사울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근심되게 사울이 했고, 하나님을 후회하도록 (후회는 인간적인 표현입니다.) 그리 만들었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후회하게 사울이 만들었고 진노하게 만들었고 멸망시키도록 그렇게 사울이 만들었고 그렇게 걸어갔습니다. 소돔 고모라 성은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도록 그 도시는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하나님께서 소멸하시는 불의 하나님으로 소돔 고모라 성에는 역사하셨고, 노아 시대때는 전인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이런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러면 오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 중에서도, 나의 하나님은, 내가 섬기는, 내가 모시는, 내가 찾는, 내가 기도하고 있는,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자복도 하고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그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얼굴 표정을 짓고 계실 것인가? 그분이 나에게 말씀을 하시면 그 음성이 부드러울 것인가? 근심 어린 음성으로 나타날 것인가? 아니면 심히 분노하기 직전으로 그렇게 나타날 것인가? 그분의 앞면이 내게 대해서 어떤 모습으로 나를 상대하시는 그런 앞면으로 보일 것인가? 이거는 다른 사람이 봐도 알 수 있지만은, 자기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자기입니다. 자기 속에 자기가 들어가서 자기 모든 현재 자기 모습과 자기 생활과 자기 양심으로 들어가보면 하나님은 내 밖에 계시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십니다. 내 안에 어디 계십니까? 내 속에 중생된 영안에 계시고, 그 안에 계시니까 내가, 그래서 골방으로 들어가야 주님을 만납니다. 내가 자기 속에, 말씀 속으로 생각 속으로 자기를 살펴 들어가보면 그 속에 계신 하나님을 알 수가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 대한 하나님을 보면서 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이걸 살펴가지고 얼른 만약에 근심, 걱정, 염려하시는 하나님 같으면 내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근심하시는 하나님으로 나를 보고 계시는가를 살펴서 기도해봐야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어떤 면 때문에 근심하십니까? 그런 하나님으로 그렇게 보여졌으면 그것도 알겠지요. 내 이런 면 때문에 주님이 근심을 하고 계시는구나. 이것 고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대를 하시겠지요. 기대의 하나님으로, ‘그러냐. 내가 좀 살펴보겠다.’ 하나 고치고 나면 하나님께서 안심하시고 흐믓한 표정으로 기쁨의 하나님으로 날 보고 계시고. ‘그런데 이번에는 했지만은 다음에 또 봐야 되지 않겠냐. 다음에 또 한번 더 승리해서 이겨 나가면 그때 하나님께서 참 다행이다. 좀 더 기쁘다. 내가 복을 주겠다’. 이런 하나님과의 그 관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런 유기적인 관계로 신앙생활 해나가는 이게 살아있는 신앙이고, 이게 생명있는 신앙이고 유기적인 신앙이고 이것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바른 모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찾고 자기를 찾아서 이 관계를 바로 맺어가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다. 그래서 남을 보지 말고, 멀리 보지 말고, 지금 이순간 자기 속에 들어가서 어제까지 내 생활, 나의 말, 행동, 내 모든 생활, 인간 관계, 물질 관계, 자기 맡은 책임과 의무 신앙생활 이런 걸 가지고 양심으로 생각해보면 잠깐 답이 나옵니다. ‘아, 나한테는 하나님께서 근심하시겠다, 염려하시겠다, 또 좀 섭섭하시겠다, 조금만 더 나가면 진노하시겠다, 화를 내시겠다, 나한테 하나님께서 그정도는 아니겠고, 좀 잘하면 복도 주시겠다’. 자기 스스로 판단해야 됩니다. 이런 것을 판단하지 못하면 신앙생활과 아직까지 거리가 좀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이런걸 판단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양심도 알아야 되고, 신앙양심도 알아야 되고 말씀 이치를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겁니다.
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재물이 많아도, 또 지식이 많아도, 배경이 좋아도, 건강해도, 집안이 튼튼해도, 인물이 잘나도, 인간은 별 수 없는 피조물 중에 하나, 보잘 것 없는 피조물입니다. 코에 호흡이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하나님 한분만이 우리의 전부고, 그분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우리라는 것을 늘 기억을 하고 그분 앞에 두려움으로 살아야 됩니다.
출애굽기 3:15-15
사울이 하나님 앞에 교만해서 잘 몰랐던 존재 셋이 있으니, 첫째는 하나님을 몰랐고 두 번째는 자기를 몰랐고 세 번째는 사람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나면 사물도 바로 알 수가 없게 되어집니다. 과학이란 것은 물리기 때문에 물질자체를 연구하는 것이 과학이지만은 정확한 의미의 과학이란 것은 그 물리를 연구해서 사람이 사는 인간생활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도록 연구하고 하는 것이 과학이지, 인간생활에 적용되지 않는 과학은 아무 소용이 없는 죽은 연구라 그리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자기를 바로 알 수가 없고 하나님과 자기를 바로 모르면 사람이란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에 모시고 살고 또 객관적으로 많은 존재들 중에서 중심되는 사람들 속에 사는 것이 사람인데, 자기를 모르게 되면 그 사람들도 바로 알 수가 없게 되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자기와 사람을 모르면 그들에게 속한 모든 세상의 사물들에 대해서도 그 자체는 바로 알아도 그것의 적용은 바로 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오늘날 지식이 아주 최고로 깊이 넓게 세밀하게 또 정확하게 발달된 그런 21세기 넘치는 지식이 있는 그런 시대지만은 그 모든 수많은 세밀하고 많고 다양한 그런 모든 지식들을 사람들이 잘못 써먹기 때문에 세상에는 온갖 인간에게 해로운 그런 폐단들이 다 일어나게 되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걸 바로 알아야 되는데, 그중에 첫째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 자신의 관계라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라’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하실 때 굳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을 붙여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것을 자랑스럽게 말씀하셨고,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라. 표호란 것은 하나님을 밖으로 나타내는 또 다른 이름이라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이고 여호와가 있는데 그 하나님 여호와를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나타낼때 어떻게 나타내느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였는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상대한 그 상대, 그 관계 그걸 보면 알 수 있고,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그 하나님은 이삭이 하나님을 상대하고 섬긴 그 행적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고, 야곱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름이라 말씀하셨으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가장 중요하게 우선순위로 두고 가장 가치로 두고 중요하게 알고 힘을 써야 될 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이게 가장 중요하면서 동시에 이것이 우리의 전부다 그리 말 할 수 있습니다.
오전에 비유한대로, 포도나무 씨앗 또 혹은 꽃꽂이를 해도 포도나무 가지 잘라서 땅 속에 심은 것, 포도나무 가지는 그 가지있는 맛있는 것을 잘라가지고 땅 속에 꽂아두면 싹이 납니다. 자랍니다 뿌리를 내리고. 씨앗의 발아율이 10프로밖에 안된답니다. 그래서 주로 꽃꽂이 산목으로 그렇게 번식시킨다 그리 말하는데, 그리할 때 그러면 씨앗이든지 그 포도나무 가지든지 그것을 땅 속에 심을때 그게 바짝 말라서 안에 물기도 아무것도 없고 그 포도나무가 살아날 수 있는 그런 생명력이 없는 것은 암만 트럭으로 갖다 꼽아봐야 그냥 말라버리고 썩고 말지, 나지를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씨앗 속에 그 가지 속에 꼽으면 살아날 수 있는 그 안에 생명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병아리를 부화를 시키려면 그 달걀 안에 병아리가 될 수 있는 생명이 있는 달걀을 가지고 품어야 그게 부화가 되는 것이지, 무정란 그런 것을 갖다가 암만 품어봐야 병아리가 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 신앙이기 때문에 자존하신 하나님이 계셨고, 그 하나님이 당신의 뜻으로 정하신 것이 목적이고, 그 목적 안에 우리들이 들어있었고 그 목적에서 목적을 위한 예정이 나왔고, 그 목적에서 그 목적을 위한 예정 순서를 따라서 많은 존재가 지음 받았고, 그 지음받은 존재를 가지고 그 목적을 위해서 거기서 뻗어 나온 것이 하나님의 모든 주권 섭리로 도성인신도 대속 역사도 전부다 그런 것이고,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모든 주권 섭리가 다 거기서 뻗어나와가지고 외부로 나온 것이지 밖에 것이 들어가서 되어진 것이 아니다는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란 것은 늘 자기 속에 들어가서 내 속에 있는 자기 속에 중생된 새사람을 찾아야 되고, 자기 속에 그 영 속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서 그분과 자기 관계를 바로 가지고 자기 속에 중생된 영 새사람을 실력있게 강하게 길러나가는 그것이 우리 신앙이고 우리 구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라 그럴때, 사람은 영을 말하는 것이지 마음과 몸을 사람이라 그러지 않잖습니까, 우리가 배워 아는대로. 마음과 몸이란 것은 짐승들도 가지고 있는 마음과 몸입니다. 그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속에 영이 있을때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사람의 구원은 내 속에 중생된 영을 찾고, 그 영을 실력있는 그런 영으로 강하게 길러가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 신앙생활이라, 그게 자기 내면속에 들어있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자라갈 때 외부의 모든 환경들을 모두 접촉하면서 환경들의 도움을 받아가지고 자라가도록, 마치 씨앗을 심으면 땅 속에 심어야 되고 또 그 안에 습기도 있어야 되고 온도도 필요하고 또 싹이 나고 나면 햇볓도 들어와야 되고 공기도 통해야 되고 이런 여러 가지들이 서로 도와가지고 그 씨앗에 싹을 틔우고 자라가게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길러가실때도 하나님이 내 속에 계시고, 내 속에 계신 그 하나님의 중생된 영을 통해서 당신을 나타내고 그 중생된 영을 점점 우리가 길러가되, 그 중생된 영이 내 마음을 통해서 나오고 또 내 몸을 통해서 밖으로 나와가지고 내 마음과 몸을 통해서 내 밖에 있는 사람도 만나고 사물도 접촉을 하고 이래가지고 거기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또 접촉을 하고 생각을 하고 판단하는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자라는 것은 자기 속에 중생된 새사람이 점점 자라게되는, 그래서 외부의 환경, 외부 현실 환경들, 객관의 모든 협조와 도움을 받아가지고 자라는 것은 내 속에 새사람이 자라가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만들지 아니하고 자기를 찾지 아니하고 자기를 만들지 아니하고 외부에 아무리 큰 일을 하고 많은 일을 하고 훌륭한 그런 일을 했다할지라도 그거는 자기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모든 역사는 자기 속에 가장 깊이 계시는 하나님을 찾아서 만나고 그분과 자기 관계가 바로 되어졌을때 비로소 이런 모든 역사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면 이 모든 건 다 허사가 되고, 그런데 하나님만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그분은 워낙 고차원에 참 표현하기가 어렵지만은 그런 존재기 때문에 무형의 완전자라서 우리 피조물이 그분을 알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려서 나타내신 것이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진리 말씀으로 성경에 담아 주셨으니까 우리가 성경 읽으면서 깨달아 아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그 분을 알아가고 그분과 자기 관계를 바로 맺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또 그분은 완전자고 완전자니까 그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 분이고 또 지공과 지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가리지를 아니하고 누구에게나 다 공평되게 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 그래서 이런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겁니다. 자기가 믿고 따르는 자기 지도자가, 혹은 자기 회사의 사장이나 스승이나 그런 사람이 사람을 차별해서 돈 봉투 갖다주면 성적 잘 내주고 이뻐해주고 잘 가르쳐주고, 가난한 그런 학생들은 돌려놓고 왕따시키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스승을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내가 믿고 따르는 지도자가 실력있는 사람 등용해 대우하고 실력없는 사람은 무시하고 또 유식한 사람은 잘 대우하고 무식한 사람은 천대하고 이런 것이 보여진다면 사람이란 것이 그 사람을 진정 존경하고 따르기가 어렵다 그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바깥 세상이나 특히나 더욱 더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을 인도하고 이끌어가는 그런 입장에 있는 그런 몇 사람이라도 지도 입장에 있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이 공평입니다, 공평. 그 공평은 자기 기준에 공평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공평은 위로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하나님 편에서 봐야 공평이 되어야 되고, 그 다음으로는 자기를 믿고 따르는 그들이 볼때 공평이 인정이 되야 그게 되는 것이지, 자기가 아무리 공평이라 해봐야 그거는 맞지를 않습니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맞는 그런 공평이 되야 되지, 그래야 거기 존경이 되어지고, 존경이 있을때 권위란 것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공평 없는 존경은 있을 수 없고, 공평과 존경이 없는 권위는 생겨질 수가 없는 겁니다. 권위란 것은 억지로 만든다고 되는게 아닌 겁니다. 때로는 바로 하는데 따르는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잘 몰라서 오해하고, 또 지도하는 사람은 백가지를 알고 다 지도하는데 따르는 사람은 열 가지만 알고 보니까, 내가 아는 열 가지로 계산해보니까 틀렸다 그래서 공평 아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는데, 그럴때는 부득이하게 설득을 하며 설명하며 기다리면서 그렇게 천천히 가르쳐가며 데려가면서 그렇게 하더라도 어쨌든 최종적으로 하나님 법에서 볼 때 공평된 그게 있어야 그 따르는 사람들이 진정 마음속에 존경이 되어지고, 그런 존경이 마음 속에 있으면 권위란 것은 저절로 생겨지는 것이 권위입니다. 하나님은 그러기 때문에 완전자고, 지공과 지성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서 차별을 하지 않는 분이다.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상대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신데, 그런데 하나님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굉장히 많이 각각 다르게 대하셨으니, 그 다르게 대하신 것은 하나님이 변하거나 하나님이 달라서 차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있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 뜨거운 태양을 대할 때 진흙은 햇볕을 만나면 단단하게 굳어지고, 양초는 햇볕을 만나면 누글누글하게 녹아버리는 것처럼 햇볕은 똑같이 내리쬐는데 내리쬠을 받는 그 물질이 서로 다르니까 형태가 전혀 달라지게 되는 것처럼, 그럴때 그것을 두고 햇볕이 틀렸다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거는 단단한 것이 필요하면 거기 양초를 갖다놓을 것이 아니고 진흙이나 햇볕 받을때 단단하게 되는 그걸 갖다놔야 되지, 물렁물렁하게 되는 것을 갖다놓고 햇볕 내리쬔다고 탓하면 그건 잘못인 것이고, 식물이란 것은 햇볕을 받아야 이게 자라게 되고 특히 가을에 곡식 여물때는 아주 뜨거운 그런 볕을 받아야 곡식이 크고 익어지고 단단하게 여물어 맛도 있고 그렇게 되게 되는건데, 그런데 뿌리도 얕고 습도도 없고 영양분도 없는 그런 곳에 뿌리를 박아놓고 햇볕이 내리쬐니까 더워서 못 살겠다고 말라죽어버리면 말하자면 예를 들자면 돌밭에 뿌리박은 너가 잘못이고, 습기를 머금지 못한 니 잘못이고 영양분 마련하지 못한 식물 네 잘못이지, 저쪽에 봐라 땅 깊은 속에 뿌리 박고 습기 머금고 영양분 받은 저 식물 보니까 햇볕을 받을수록 쑥쑥 자라고 저렇게 잘 자라는데 너와 저게 왜 다르냐? 꼭 같이 내리쬐는데도 받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꼭 같은 분이고 변하지 않는 분인데 그분을 상대하는 사람들이 다르기 때문에 그분의 대응역사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심는대로 거둔다,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스스로 속이지 말아라 이런 말씀들은 행한대로 갚으신다 그런 말씀들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에 따라서 달리 변해서 된다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그리 되니까 거기 대응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필연적으로 그리 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벨처럼 그렇게 사니까 하나님께서 아벨에게는 그리 대하셨고, 가인처럼 사니까 가인에게는 그렇게 대하신 겁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해서 자기 돌아보지 아니하고 가정 돌아보지 아니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천대를 상관하지 아니하고 120년 세월을 오로지 방주만 말씀에 따라 만든 그 생활을 했기 때문에 노아는 말씀에 따라서 구원을 받은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 말씀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멸망을 자취하게 된 것이지, 아무도 그 사람들을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 물론, 궁극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절대 예정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택함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지옥 가기 싫어도 가야 되는 것이고, (자 모두 좁니다, 보니까. 말씀은 어렵고 피곤은 하고 잠은 오겠지요. 그런데 실타래를 가지고 실을 가지고 솔솔솔 풀어나가면, 얼키지 않은 실을 살살살 풀어나가며 졸졸졸 따라나가면 잘 풀어나오는 것처럼 말씀을 붙들고 살살 따라나가면 재미가 있고 따라나와지는데, 그만 중간에 딴 생각을 하고 졸고 한 눈 팔아버리면 중간에 들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씀하신 어떻게 어떻게 하면 복을 받는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화를 받는다는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선포해놨기 때문에 그 선포는 바로 하나님 말씀은 진리고, 진리는 독자적인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포하신 그 말씀을 하나님도 변경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면 니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첫째 삼가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내가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따라서 그대로 순종해서 나가면 그 사람은 그대로 되는 것이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여 말씀을 거역하면 어떻게 비참하게 되어진다는 그대로 걸어가면 그대로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두 길이 있는데, ‘어느 길로 가야 됩니까?’ 누가 물어서 안내자가 길을 가르쳐 줍니다. ‘네. 길이 두 개 있지요. 오른쪽 길로 가면 요리 살살 가다보면은 돌도 있고 산도 있고 내도 있고 그래서 좀 어렵기는 하지만은 당신이 원하는 그런 좋은 곳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왼쪽길로 가면은 보기엔 넓고 수월하고 재미도 있는 것 같은데 가다보면은 천길 낭떠러지가 있어서 거기는 아무도 안 빠지는 사람이 없고 그리 가면 반드시 빠져 죽습니다. 그러니까 왼쪽길 미혹 받지 마시고 오른쪽 길로 걸어가십시오.’ 이렇게 안내를 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가 안내자 말 안듣고 왼쪽길로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빠져 죽었다 말이지요. 원망할 수 있습니까? 원망이 됩니까? ‘내가 당신한테 가르쳐주지 않았느냐. 왼쪽길로 가면 보기 재미도 있고 넓은 길도 가기 좋은 것 같아도 마지막 가면은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다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당신이 그리 갔으니까 빠져 죽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가시밭으로 가면은 가시에 찔리는 것은 필연인 것이고, 또 물에 들어가면 물에 젖는 것은 필연인 것이고, 멸망길로 걸어가면 멸망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거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말이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화있을진저’ 하고 많이 화를 말씀하신 것이 저주가 아니라 그랬지요. 저주가 아니고 그리 가면은 안된다는 것을 바른 길을 가르쳐주고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잘못된 틀린 길을 지금 알려주는데도 그들이 기어코 그 말씀을 안 듣고 안 믿고 귀를 막고 자기들 고집대로 그 길을 가니까, 그리가면 낭떠러지로 가는 것이라고 말을 했는데 기어코 그 길을 가니까 안 떨어지고 베깁니까. 떨어지는게 정상이지요. 안 떨어지는게 이상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살면 복이 된다는 그 길로 가면, 그거는 필연적으로 반드시 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다 그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때, 내가 하나님에게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라 그랬잖습니까.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 받지 아니하시고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 그말은,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해롭게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을 실패하게 하지 않고, 사람에게 손해되게 하지 않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시기를, 성경에 그래 나오지 않습니까?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는 긍휼의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해서 우리를 어쨌든 구원받고 복 받고 영원히 잘되기를 원하시는게 하나님의 사람의 심정이고 뜻이지, 망하기를 원치를 않는데, 사람들이 뚜렷하게 밝혀놨지만은 눈 앞에 보이는 거기에 미혹되가지고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바로 몇 걸음 밖에도 보지 못하고 당장 눈 앞에 펼쳐진 거기 미혹되가지고 그것 좋은대로만 따라가다보니까 마지막 결국은 멸망길로 가고 마는 겁니다. 세상에서도 고진감래라고 고생은 성공의 어머니라 그런 것인데, 고생 끝에 낙이 있다 그리 말하는 것인데, 눈 앞에 있는 그런 자기 등 따시고 배 부르고 편안한 것, 오는 잠을 눈꺼풀이 가장 무겁다고 그러는데, 잠을 이기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자고 싶은 잠 전부 다 자고 나서 무슨 성공을 하며, 자기 마음에 하고 싶은 그런 게임이든지 놀이든지 또 연애든지 친구들과 노는 것이든지 자기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나면 무슨 거기서 얻는 유익이 건설적인 것이 자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있을 것인가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성공한 사람들 보면 끊임없는 쉬지않는 자기 전투가 안 믿는 사람들도 없는 사람은 없고,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사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자기 절제, 의지, 자기와 싸움 이런 게 없는 그대로 세상 세월 보내는 사람하고 그래가지고 믿는 둥 마는 둥 한 2,30년 믿은 사람하고,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인데 철저한 의지와 절제와 인내심 가지고 자기와 싸워서 뭔가 세상에 이룬 그런 사람이 1년 믿은 것하고, 마지막 결실에 보면 30년 믿은 사람보다 1년 믿은 그 사람이 결실은 더 크고 많을수가 있는 것이 신앙의 걸음입니다. 실제라는 겁니다, 실제. 마음의 중심이 중요하고 소원이 중요하지만은, 실제가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중심이란 것은, 방향이란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게 틀리면 아무리 외부로 그게 잘되봐야 헛일인 것이고, 그게 바르다 할지라도 그게 걸어가지 않으면 방향이 옳다 그래도 옳은 방향두고 걸어가야만 그 한길이라도 가까이 가는 것이지, 옳은 방향을 잡아놓고 안 걸어가면 거기 도착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늘 양면을 다 가지는 우리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응의 역사를 우리가 기억을 해야 되고, 그분은 지공과 지성의 하나님이고 하우하박이 없는 분이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가리지 않는데, 그분의 계약해놓으신 그 계약에 따라서 사람들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분의 대응의 역사가 어느 범위안에서 달라진다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을 해야 되고.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하자면 그걸 표현하면, 사람에 따라서 피동되는 것처럼 그런 역사를 왜 하시게 되는가? 말하자면은 믿음 생활 잘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스럽게 하고 기쁘시게 하고 신앙생활 잘하는 그런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고, 그걸 못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안주시는 그게 왜 그러냐? 당신이 높임을 받고 싶어서, 어느 정도에 위치나 권위나 명예나 이런 것이 있는 사람은 자기 명예라는 것, 자기 이름에 대해서,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이름 있는 명예로운 명망있는 그런 사람인데, 그 사람을 높인다고 해서, 예를 들면 도적이라든지 사기꾼들이 그 사람 이름을 칭하고 그 사람을 칭송을 하고 높이면 그 사람에게 욕이 되고 수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사람다운 그런 사람들이 높이면 더 영광이 되고 명예가 더 되겠지만은, 하나님이란 분은, 그 분은 피조물 무엇에게, 인간을 포함해서 당신은 받을 수 있는 분이 아닌데, 그 받을 수 있는 분이 아니란 것은 뭐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람이 하나님을 높인다고 해도 영광스럽게 한다, 영광의 구원이라 그리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실제로 엄밀히 따지고 보면은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데, 그 영광이란 것이 하나님이 받으신 그 영광인데, 여기까지 가면은 너무 좀 그런가요. 물질만 당신이 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높임을 당신이 받을 수 있을까?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높여도 그 높이시는 높임을 하나님이 받으실 수가 있는 것인가?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높여도 그거는 그분에 대해서 그게 도달하지를 않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나타내고 드러낸다 하더라도, 그거는 참 때묻은 손을 가지고 흙탕물에다가 빨래를 하면, 흙탕물에 빨래하면 빨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빨래를 다 버려놓지 않습니까. 아무리 빨아봐야 그 빨래 속에 흙탕물이 들어가고 다 베리지 빨래가 안되는 것처럼, 때가 가득 들어있는 땟물에다가 빨래하면 빨래가 제대로 안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높일 수가 없고 찬양할 수가 없는데, 뭔가 드릴 수가 없는 것인데 우리들이 하는 그 자체에서 그리 함으로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고 원하시고 그런 방법을 써놓으신 것은 당신이 받기 위해서 높아지기 위해서 영광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나 구원의 영광 위한 것인데 그것도 결국 따지고 들어가보면 우리들을 그런 사람 만드는 것이 되어야 되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을 쓰고 계신다 그말입니다. 이거는 조금 구별해서 좀 더 생각해봐야 되겠고. 그래서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영원토록 우리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피동되시는 그런 대응의 역사를 예정의 범위 안에서 그렇게 해놓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있는 중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말씀하셨고, 또 다른 곳에 다윗도 말씀하셨고, 또 직접 그리 말씀하지 않아도 역사하신 걸 보면 몇 사람이 있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였으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하나님이였는가를 전체로 두고 보면 각도에 따라 달리 생각해 볼 수 있지만은 한말로 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이라 그랬으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믿음의 하나님이다 그리 말할 수 있고, 믿음의 하나님이라 그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믿은대로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되어주셨다 그리 볼 수 있겠지요. 아브라함이 믿은대로의 하나님. 그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릴때도 아브라함이 믿기를 불에 태워서 사람 죽이면 하나님의 말씀 약속이 이삭을 통한 자손이 난다 그랬으니까, 불에 태워서 죽이면 죽은 제가 된 이삭의 몸에서 자손이 나든지 죽은 이삭이 살아나든지 성경을 통해보면 죽은 이삭이 살아나겠다는 그 부활의 지식을 아브라함이 깨달았는데 그대로 된 겁니다. 그래서 부활의 지식을 인류에서 제일 처음 깨달은 사람이 아브라함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믿은대로 하나님께서 해주신 겁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가라 그럴때, 아브라함은 계산대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계산의 도인데, 거기 대해서 계산 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관계에서는 계산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가라하니까 그냥 간 겁니다. 모든 것 다 하나님께 맡겨놓고, 믿으니까 맡겼고 믿으니까 의지했고 믿으니까 바라봤고, 그럴때 어려움이 와서 실수도 있었지만은 전체적으로 보면은 안심했고 담대했고 또 떳떳했고 순종했고, 또 깨끗했고 어쨌든 자기가 믿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아는대로 믿었고 알고 믿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자기 모든 언행심사 모든 대외 접촉의 생활을 하니까, 말씀대로 따라나가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은대로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인도도 하시고 가르쳐도 주시고 승리하게도 하시고 책임도 져주시고 복도 주시고 온갖 걸 다 해주셨다 그말이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으니까 믿음의 하나님이 되어가지고 아브라함의 전부가 되신 분이 하나님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은 섭리의 하나님이라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삭의 생애는 성경에 그리 많지 않은데 그 기록된 걸 보면은 블레셋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들이 이삭의 파놓은 우물을 시기해서 메워버리고, 파면 뺏어가고 파면 뺏어가고 그리될 때 이삭이 그렇게 될 때 조급하게 그들과 시비하지 않고 따지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다 맡겨놓은 겁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고, 이것도 하나님의 역사고 이것도 하나님의 역사고 하나님의 섭리에 다 맡겨놓은 이게 이삭의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다 맡겨놓으니까, 하나님의 이삭에 대한 섭리는 이삭에게 손해되도록 할 수가 없는, 이삭에게 백배나 복을 주시고 이삭이 유익되도록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방향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결국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리 볼 수 있겠고, 또 야곱에 대해서는 야곱은 보면 야곱은 이삭은 그래도 신사적인 그런게 있는데,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달리 야곱은 사람이 어찌보면 가벼운 사람이고 무게가 없는 사람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꾀쟁이라 그러고, 형의 뒷발꿈치를 잡고 나온 그런 야곱이였고, 술수도 많이 부렸고 그랬는데, 그 야곱속에 그 모든 것들의 중심은 오로지 하나님이 아니면 안되겠다는 어디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 한분만으로 전부 삼는 그래서 하나님의 것이라면 무조건하고 다 받아들이는 이것이 야곱이였기 때문에 야곱에게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보면은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그러니까 야곱에게는 하나님께서 능치 못함이 없는 그런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형제들 자기 아들들 사이에 요셉과 베냐민을 편애도 하고 그래서 많은 문제도 발생을 하고 그런 인간적인 실수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어떤 면에서 보면 이삭보다 더 기뻐하신 그런 면을 볼 수가 있다 말이지요. 그래서 이런 걸 볼때는, 기독교 신앙의 알맹이가 무엇인지, 신앙이란 것은 도덕 중심이 아니란 것도 봐야 됩니다. 인간 윤리가 신앙이 아닙니다. 도덕이 신앙이 아니고, 인간의 허물 그런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가 신앙생활에 있는 것이고, 그 속에 중심이 무엇이냐 방향이 어떤 것이냐 그걸 보는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윗은 보면은, 여러 가지가 있는 중에서 다윗에게도 하나님께서 보호도 하셨고 승리하게도 하셨고 두려운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동행도 하셨고 또 높이기도 하셨고 긍휼이 여기기도 하셨고 여러 가지 했는데, 다윗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전체로 가만히 정리해보면 다윗에게 하나님은 왕 되신 하나님, 다윗은 대왕이였는데 그 대왕인 다윗의 왕은 하나님이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왕이였지만은 하나님의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 것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뜻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래서 다윗은 대왕이였지만은 그의 왕은 하나님이였고, 그래서 다윗에게 하나님은 왕 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 역사하셨고 다윗은 그 하나님의 순전한 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래 하시니까 당신을 왕으로 삼으니까 하나님께서 그 다윗을 왕권 계통으로 세워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 뒤에 보면은 요셉이라는 사람은 열일곱살 그때 꿈으로 계시해서 계시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또 계속 동행하셨고 형통케 하셨고 여러 가지 있지만은 요셉에게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열일곱살에 보여주신 그 꿈, 그 꿈 꾼 계시가 마지막 서른살에 그대로 이루어졌는데, 열 일곱 살에 알려주신 그 계시가 서른살에 이루어지기까지 13년동안 많은 과정과 우여곡절을 요셉이 겪었지만은, 그 모든 과정 과정을 요셉은 한번도 의심하거나 낙망하거나 원망, 불평, 불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인도나 약속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그 인도를 따라서 감사로 기쁨으로 하나님 인도를 따라서 종으로 팔려가도, 핍박을 받아도, 팔려가도, 감옥에 들어가도, 누명을 써도 어디까지든지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이게 요셉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다. 다니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였는가? 다니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였겠습니까?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서 특수학원에서 왕의 진미 포도주 사건 생겼을때, 인간 세계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는. 주권의 하나님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다니엘에게는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그렇게 믿으니까 인간의 생사, 흥망, 인간의 지능여부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렸지 인간의 노력과 음식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다니엘이 믿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십배나 나은 지능의 지혜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지능을 주셨고 또 나라를 다스릴때도 전무후무할만큼 바벨론이라는 그 큰 나라를 다니엘이 잘 다스려 통치했고, 그 모든 것이 다니엘이 하나님을 알고 믿기를 ‘하나님은 주권자라. 인간의 모든 주권이 그분에게 매였고, 그분은 구원의 하나님이라’. 그러기 때문에 사자굴 속에도 담대히 들어갔고. 이런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있었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믿음의 조상들의 하나님과 관계는 다 이런 관계였는데,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였고 하나님의 은혜였고 역사였지만은, 그 받은 그 은혜 범위 그 안에서 각자 자기들이 아는대로 하나님을 알고 믿는 그 믿음에 따라 어떻게 믿고, 하나님을 상대하고 대접하고 그분을 모셔 섬기고 그 앞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에 맞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응을 하셔서 지혜도 주시고 복도 주시고 형통케도 하시고 승리하게도 하시고 또 긍휼도 베푸시고 보호도 하시고 온갖 역사를 다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 그런데 사울에게는 하나님께서 정반대로 근심 걱정의 하나님, 또 내가 사울로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라, 후회하시는 하나님. 또 진노하신 하나님, 그리고 복수하신 하나님 이런 하나님으로 사울에게는 나타났으니 하나님이 다른 것이 아니고 사울이 그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으로 그에게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음지가 있고, 양지가 있을때 양지로 가면 그에게는 햇볕이 내려쬡니다. 따뜻합니다. 음지로 들어가면 햇볕은 없습니다. 추워지는 겁니다. 자기가 선택을 해서 내가 추우면 양지로 가면 됩니다. 그런데 춥다 그러면서 음지로 가면서 춥다 그러니까, 그러면 양지로 가면 될 것 아니냐? 왜 음지로 가면서 햇빛을 원망을 하고 그 햇빝이 왜 나한테는 안 오느냐고 원망을 하는가 그 말이지요. 자기가 양지로 가면 될 건데. 사울이 그리 된 것은 사울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근심되게 사울이 했고, 하나님을 후회하도록 (후회는 인간적인 표현입니다.) 그리 만들었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후회하게 사울이 만들었고 진노하게 만들었고 멸망시키도록 그렇게 사울이 만들었고 그렇게 걸어갔습니다. 소돔 고모라 성은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도록 그 도시는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하나님께서 소멸하시는 불의 하나님으로 소돔 고모라 성에는 역사하셨고, 노아 시대때는 전인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
이런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러면 오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 중에서도, 나의 하나님은, 내가 섬기는, 내가 모시는, 내가 찾는, 내가 기도하고 있는,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자복도 하고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그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얼굴 표정을 짓고 계실 것인가? 그분이 나에게 말씀을 하시면 그 음성이 부드러울 것인가? 근심 어린 음성으로 나타날 것인가? 아니면 심히 분노하기 직전으로 그렇게 나타날 것인가? 그분의 앞면이 내게 대해서 어떤 모습으로 나를 상대하시는 그런 앞면으로 보일 것인가? 이거는 다른 사람이 봐도 알 수 있지만은, 자기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자기입니다. 자기 속에 자기가 들어가서 자기 모든 현재 자기 모습과 자기 생활과 자기 양심으로 들어가보면 하나님은 내 밖에 계시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십니다. 내 안에 어디 계십니까? 내 속에 중생된 영안에 계시고, 그 안에 계시니까 내가, 그래서 골방으로 들어가야 주님을 만납니다. 내가 자기 속에, 말씀 속으로 생각 속으로 자기를 살펴 들어가보면 그 속에 계신 하나님을 알 수가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 대한 하나님을 보면서 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이걸 살펴가지고 얼른 만약에 근심, 걱정, 염려하시는 하나님 같으면 내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근심하시는 하나님으로 나를 보고 계시는가를 살펴서 기도해봐야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어떤 면 때문에 근심하십니까? 그런 하나님으로 그렇게 보여졌으면 그것도 알겠지요. 내 이런 면 때문에 주님이 근심을 하고 계시는구나. 이것 고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대를 하시겠지요. 기대의 하나님으로, ‘그러냐. 내가 좀 살펴보겠다.’ 하나 고치고 나면 하나님께서 안심하시고 흐믓한 표정으로 기쁨의 하나님으로 날 보고 계시고. ‘그런데 이번에는 했지만은 다음에 또 봐야 되지 않겠냐. 다음에 또 한번 더 승리해서 이겨 나가면 그때 하나님께서 참 다행이다. 좀 더 기쁘다. 내가 복을 주겠다’. 이런 하나님과의 그 관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런 유기적인 관계로 신앙생활 해나가는 이게 살아있는 신앙이고, 이게 생명있는 신앙이고 유기적인 신앙이고 이것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바른 모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찾고 자기를 찾아서 이 관계를 바로 맺어가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되겠다. 그래서 남을 보지 말고, 멀리 보지 말고, 지금 이순간 자기 속에 들어가서 어제까지 내 생활, 나의 말, 행동, 내 모든 생활, 인간 관계, 물질 관계, 자기 맡은 책임과 의무 신앙생활 이런 걸 가지고 양심으로 생각해보면 잠깐 답이 나옵니다. ‘아, 나한테는 하나님께서 근심하시겠다, 염려하시겠다, 또 좀 섭섭하시겠다, 조금만 더 나가면 진노하시겠다, 화를 내시겠다, 나한테 하나님께서 그정도는 아니겠고, 좀 잘하면 복도 주시겠다’. 자기 스스로 판단해야 됩니다. 이런 것을 판단하지 못하면 신앙생활과 아직까지 거리가 좀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이런걸 판단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양심도 알아야 되고, 신앙양심도 알아야 되고 말씀 이치를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겁니다.
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재물이 많아도, 또 지식이 많아도, 배경이 좋아도, 건강해도, 집안이 튼튼해도, 인물이 잘나도, 인간은 별 수 없는 피조물 중에 하나, 보잘 것 없는 피조물입니다. 코에 호흡이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하나님 한분만이 우리의 전부고, 그분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우리라는 것을 늘 기억을 하고 그분 앞에 두려움으로 살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