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주후(삼24:1-22)
사울의 시기, 다윗의 대처2014-11-03조회 358추천 33
20141102 주일오후예배
사무엘상 24:1-22
이 일이 있고 난 다음에 26장에 보면 또 다시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나섰다가 다윗과 그 부하들에 의해서 창과 물병을 말하자면은 빼앗기고, 빼앗겼다기보다는 가져감을 당하고 그런 일이 또 있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다윗이 이제 사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서 아예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그런 일이 있게 되어졌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이름을 구속받은 성도라 그렇게 이름을 합니다, 성도. 우리가 잘 아는대로 성도라는 말은 거룩한 무리, 구별된 무리라는 뜻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 전부를 가리켜 무리라 그리 말하는데 한사람 한사람이 다 성도라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받은 선민들이고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은 구별된 성도들이기때문에, 성도라는 것은 이름을 붙일때는 그에 걸맞는 우리들의 생활의 법칙이 따로 있게 되어집니다. 어느 단체에 들어가면 그 단체가 좀 일반적이지 아니하고 특별한 그런 목적이라든지 소망을 가진, 사람을 양육하는 그런 단체라면 그 단체에 소속된 사람이면 그 단체가 추구하는 그 단체의 법대로 모든 생활해야 되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말하자면은, 육군 사관학교 같은 그런 곳에는 우리나라 초급 장교를 훈련시키고 기르는 그런 군사 훈련 교육기관이기때문에 거기 소속된 생도들은 모든 옷을 입는 것이라든지 먹는것 이라든지 행동하는 것도 다 그 규칙에 맞도록 제재로 받게 되어있고 거기 어긋나면은 퇴교조치를 당하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 여러곳에 다 보면 다 그리 되어있습니다.
성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해서 뽑아낸 사람들이기때문에 그 성도에 속한 우리들의 모든 생활은 쉽게 말하면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도라 그럴때 그 속에 의미는 쉽게 말하면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자기 마음대로 살아선 안되고 자기 원하는대로 살아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되는대로 그렇게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모든 생활 하나하나를 아무렇게나 세상 흘러가는 그대로 물결 흘러가는대 따라서 죽은 물질들이 흘러내려가듯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삽니다. 말세가 되고 개인의 인권이 강화되고 존중이 되는 그런 시대가 되어서, 그때는 말하자면은 개성시대기때문에 사람들이 뭐라고 흉을 보고 욕을 하든지 자기 원하는대로 자기 좋은대로 자기 편한대로 좀 말하자면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나라의 법을 어기지 아니하고 그냥 좋을대로 살면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성경은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 행하는 그런 것을 말씀하고 있으나 말세가 되니까 ‘나는 남자로 더불어 결혼하는 그런 사람이다’고 신문에 떳떳하게 밝히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런 인간들이 아주 대문짝만하게 신문에 실리고 그런걸 옹호하는 시대가 지금 그런 시대고 그런 것을 반대하면 법으로 막는 것이 지금 시대고, 우리나라 법 통과 되었습니까? 아직 통과는 안됐습니까? 그럼 지금은 말해도 불법은 아니겠네요. 그런 나쁜 짓을 하는 그런 것도, 그게 그런 것을 나쁜짓이라 그러면 앞으로 잡아 간답니다 죄인이라고. 죄인이라고 잡아가거나 말거나 이제 법으로 정해지면 일부러 그럴 필요 없으니까 말이야 조심하겠지만은 성경에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그런 짓하면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말했으니까 성경을 그러면 바꾸든지, 우리나라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까 ‘나는 성경 따라서 종교적인 양심으로 말한다’ 그러면 뭐라 그럴런지 모르지요. 종교를 핍박하는 거는 나라 법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요, 그거는? 성경을 말하는데 그걸 뭐라 할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도 개성이라서 그렇게 주장을 하는 시대가 지금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는 사람들은 말하자면은 쉽게 말하면 뭣대로 살아라 그말입니다. 너희 마음대로 살아라. 원하는대로 보고 싶은것 마음껏 보고, 듣고 싶은 것은 귀가 더러워지거나 말거나 다 듣고 하고 싶은 짓은 무슨 짓이든지 다 해라 그말이지요. 다만 나라에서 법을 정해놓으면 그 법이란 것이 그게, 나라의 법이란 것이 온갖 악법이 꽉 찼고 인간들이 돈 받아 처먹고 만든 그런 법도 얼마나 많은데 그런 법도 다 지켜야 되는가요, 그것도? 그것도 법이라고? 그래도 악법도 법이라고 지키긴 지켜야 되겠지요. 그런데 알고보면 그런 법도 세상에는 많이 있다 그말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그런 무기를 마음껏 만들어내도 미국 나라에는 법이라서 아무 제재도 못하고 그런 법을 만든 국회의원들이 그 무기 만드는 무기상들에게 뒷돈을 얼마나 받아 먹는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술 만드는 회사, 담배 만드는 회사가 얼마나 돈을 많이 쓴다는 것은 안봐도 아는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정의라는게 없습니다. 이 세상은 타락한 세상이고 다 죄악세상이라서. 그런 세상을 따라서 사람들은 마음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안 믿는 사람들 생활은 쉽게 말하자면 너희 마음대로 살아라. 다만 많은 사람이 의논해서, 또 나라에서 다 마음에 안 들겠지만 세상이 어떻게 완전하냐? 사람이 어떻게 완전할 수 있냐 그러니까 이것도 법을 만들어놨으니까 이 법은 지키고 어기지 말고, 그 테두리 안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줘도 들키지만 말고, 아닙니까? 죄를 지어도 들키지만 말고 그게 세상의 법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줘도 잡히지만 말고 들키지만 말고. 드러나지만 말고 몰래 몰래 얼마든지 해먹어라, 그게 세상입니다 알고보면은. 그러니까 마음대로 살아라 이런 세상인데 성경에 우리를 묶어서 성도라 그래놓고 너희는 성도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고 성도가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 ’ 이게 성도라는 이름의 말씀하신 뜻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지 말라는 겁니다. 네 멋대로 살지말고 네 마음에, 네 중심에, 네 소원이 원하는대로 그렇게 살지말고,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뭐라고 말하든 너희들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이 정해놓은 그 법을 따라서 살아라. 그 법을 맞춰서 살아라. 그러면 손해를 많이 봐야 되고 희생을 당해야 되고 기를 못 펼 때가 많고 할 말 못할 때가 많고 온갖 핍박을 받을 때가 많은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라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생활입니다. 이걸 어기면 그때만큼은 적어도 성도가 아니다 그말이지요. 오늘 말씀도 이것하고 굉장히 깊은 관계가 있지요.
오늘 말씀에 이걸 간단하게 말하면, 본문에서 가르치는 말씀은 간단하게 말하면 이 세상에서 사람이 인인관계라는 것은 모든 관계 중에서 가장 중심되는 것이고, 가장 많은 관계가 인인관계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다가 자기가 가장 많이 상대하고 접촉하는 그 대상이 사람이다 그말이죠. 사람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윗사람도 있고 친구도 있고 아랫사람도 있고, 그 윗사람도 여러 종류가 있고 동등의 관계도 여러 종류 있고 수하도 여러 종류 있고 많은 관계가 있는데 어쨌든 그런 모든 인인관계 거기서 서로간에 살아가다보면은 원치 아니하게 자기 실수로 인해서, 때로는 상대방의 어떤 계획에 의해서 어찌어찌하다보니까 우연찮게 오해가 생겨져서 별에별 원인에 의해서 마찰이 생겨지고 부딪히는 그런 일이 생겨질 그때에 안 믿는 사람들과 관계가 다르고 믿는 사람들끼리 관계가 다른데,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상하관계지만은 이거는 성도끼리의 관계입니다. 이 성도끼리의 관계는 상하관계든 동등관계든 또 자기 아랫사람과의 관계든 보면은, 원론적으로 들어가보면 대개 다 비슷하게 대처할 수 밖에 없는 면이 있어서 말하자면은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사람과 관계를 맺어갈때 그 관계에서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 하나님과 관계된 일, 또 혹은 하나님의 복음과 관계된 그 일, 하나님의 일과 관계된 그 일, 또 하나님의 사람 인간구원과 관계된 그런 일, 그런 일이 관련되어질때 어떻게 대처를 할 것인가? 크게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되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대외관계에서 하나님 사람과의 관계, 인간구원과 관계된 그 일이 생겨질때 어디까지 내가 말을 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 대응을 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 어떻게 대처를 해야 될 것인가를 본문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가 있는 겁니다. 이런 것을 말씀을 가지고 따져서 구별해서 거기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을 하고 맞춰서 해야되는 것이기때문에 우리를 가리켜서 성도라고 이름을 하는 겁니다. 사울이란 이 사람은 처음부터 사울이 실패한 사람이 아니고 사울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말하자면 외모도 뛰어났고 인품도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가 더했으니까, 어깨 위니까 사람의 머리 하나 높이만큼 더 있단 말이니까 적어도 20센치 이상이니까 평균보다 20센치가 더 크니까 얼마나 훤칠하고 키가 큽니까? 거기다가 아주 용맹도 있고, 또 겸손해서 인품도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부을때 보면은 ‘온이스라엘에 사모하는 집이 바로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아니냐’ 그리 되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사모하는 대상이 바로 너고 너희 집이다. 그때 사울이 말하기를 ‘나는 우리 아비집에서 가장 작은 자고, 우리 지파는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인데, 어떻게 내가 이 나라에 왕이 됩니까?’ 굉장히 겸손하고 자기를 바로 아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럴때 하나님께서 높이 들어서 이스라엘에 왕으로 그렇게 세우셨는데, 그 사울이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실패하게 되어졌는가? 그 실패 원인은 대표적으로 말하면 사울이 왕이 되고 난 다음에 교만해졌기 때문인데, 교만이란 말의 정의는 하나님 앞에 자기를 잘 모르는 걸 교만이라 우리가 그러지 않습니까? 교만해졌는데 그말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잘 모르는 자가 되어졌는데, 어두워졌다 그말이죠. 자기 심령이 어두워져서 자기를 잘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자기를 바로 알았는데, 왕이 되고 나니까 교만하게 되어졌는데 그래서 사람이 환경에 의해서 영향받고 피동되는 그런 것이 될 수 있는데, 왜 사울이 교만하게 되어졌느냐? 사울이 교만하게 된 것은 모든 사람이 대개 다 그런데, 사람이란 것이 자기가 한 이력 중에서 자리에 등용되고 어떤 위치에 앉게 되고 거기서 그에 맞는 일을 하게 되는 그 자리에 앉으면 등용이 되면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됩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으니까 왕으로서 많은 일들을 필연적으로 하게 됩니다. 하다보면은 사람이 잘하는 것도 있고 잘못하는 것도 있고 일에 실수도 있고 실패도 있고 성취도 있고 또 큰 성공도 있고 여러가지 그런게 있게 되는데 그중에서 이거는 사울이나 우리나 꼭 같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살아온 과거 이력 생활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 앞에 생활 중에서 잘한 것이 있고 크게 말하면 잘 못한 것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잘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잘 못한 것만 기억을 하고 그것만 찾고 그것만 자꾸 생각을 해서 그것 고치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사람이란 것이 다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남에게 실수없이 남에게 잘한 것만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또 다른 사람이 나에게 피해만 끼친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따지고보면. 사람은 다 서로 서로 그리 되게 되있기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테두리를 만드신 것이고 사람의 지체도 다 그렇게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관계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남에게 잘해준 것, 남을 도와준거나 혹시나 뭐 은혜를 좀 끼친거나 협조한거나 잘해준 것 이런 것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고 기억에 전혀 없고, 남에게 대해서 자기가 본의아니게 실수한 것이라든지 또 혹은 약하다보니까 마음을 잘못먹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것이든지 이런 것은 철저하게 따지고 기억해서 용서도 구하고 회개도 하고 그것을 다시 그렇게 안하려고 하고 배상도 하고 그리 하는 사람이 있고, 잘한 것은 전혀 기억이 없는 이런 사람이 있고, 남에게 피해 당한 것은 기억에 나지 않고 물질적이든지 명예적이든지 위신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다른 사람에게 내가 피해 당한 것은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고 다 잊어버리고 자기가 남에게 본의아니게 혹은 실수로 피해를 끼친 것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늘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조심스럽고 죄송하고 겸손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남에게 자기가 피해 끼친 것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하나도 기억을 안 합니다. 안하고 오로지 남에게 피해 입은 것만 기억을 합니다. 내가 욕을 얻어 먹었다, 물질에 피해를 당했다, 명예를 침해 당했다, 위신이 깍였다 그런 것만 머릿속에 남아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거는 성경으로 따져볼때 대단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 교만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일도 그렇습니다. 일도 자기가 잘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잘못한 것만 기억을 하고 그것만 찾아서 고치고 바로 잡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결코 교만할 수가 없게 됩니다. 자기 잘한 것이 없으니까, 잘못한 것만 늘 생각하니까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족하고 그것만 남아있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기가 실수하거나 잘못하거나 낭패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자기 잘한 것, 장점한 것, 공 세운 것, 뭔가 이룩한 것 이런 것만 기억을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갈수록 자기 잘한 것만 늘 생각하니까 자기는 잘한 사람이고 실수 없는 사람이고 잘난 사람이고 그리 되다보니까 이 사람은 점점 교만한 사람이 된다 그말이지요. 사울이 왜 교만하게 되어졌느냐? 원래는 겸손한 사람이었는데 왕이 되고 난 다음에 사울은 자기의 잘못한 것은 찾지 않고 보지 아니하고 자기 잘한 것만 늘 기억을 하고 보고, 그러다보니까 사울은 교만한 사람이 됐고 교만한 사람이 되니까 필연적으로 거기서 나온 것은 자기가 잘났으니까 잘했으니까 자기의 그 공에 걸맞는 그런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겠고 그런 위신을 세워야 마땅하니까 자기의 위신, 자기의 권위, 자기 명예, 자기 영광을 높이는 이런 것이 늘 그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래서 아말렉을 전쟁에서 이기고 난 다음에 하나님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씀을 하시고 이미 버림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하나님은 버려버렸는데 사울은 그 사실을 기억지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 불순종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명령 순종한 그것만 붙들고 있으니까 이겼으니까 성전비를 세워서 자기한테 내가 이 전쟁에서 이겨 승리했다는 성전 기념비를 세우는 이런 일을 사울이 했고, 그리고 사무엘이 와서 잘못을 지적을 하고 책망을 하니까 사울이 뭐라 그랬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나이다’ 그래놓고 그다음엔요? ‘내가 범죄하였을찌라도 이 백성들과 백성들의 장로들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번제 지내러 가시지요.’ 그랬습니다. 사무엘이 사사니까 그 사무엘과 함께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려야 높은 자기 위신이 깍이지 않으니까 그런 사람이 그 위신을 깍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사무엘한테 간청을 했는데 사무엘이 그때 사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돌아가려니까 어떻게 했던가요? 사무엘의 옷을 잡아당겨서 옷이 찢어졌습니다. 그거는 협박입니다. 나와 함께 안가면 당신 죽일 수 있다는 협박입니다. 사무엘이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같이 가서 했지만은 이미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도 자기의 위신이 컸고 위신이 중요했고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모든 하시는 역사 이런 것보다도 자기가 우선되었고 자기가 큰, 자기 위신이 먼저 앞선 우선된 교만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였고 그다음 거기서 나온 것이 최종적으로 뭐가 나왔는가? 자기의 잘한 것만 보니까 교만한 사람이 되어졌고 교만한 사람이 되다보니까 필연적으로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앞세워서 하나님의 영광 제가 다 가로취하고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도 자기를 높여야 되겠고 위신을 세워야 되는 이 지경까지 갔고, 그 교만에서 또 마지막으로 나온 것이 시기가 나온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돌아올때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 그럴때 사울이 시기가 나와서 그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죽이는데 모든 걸 다 걸었다 할만큼, 사람이 어두워지면 그렇게까지 어두워지는 겁니다. 다윗이 표현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의 무엇을 쫓고 있나이까? 그 상황에서 사울과 다윗의 그 입장을 보면은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 받았어도 그 나라의 왕입니다. 모든 군사, 적어도 수만명은 넘을건데 그 수많은 군사들의 군권을 다 쥐고 있고 그 나라 백성이 전부다 적어도 껍데기로 왕이니까 그 왕의 명령을 안 따를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있고 다윗은 왕에게 버림 받아 피해서 도망다니는 도망자 신세기 때문에 다윗이 표현하기를 자기를 뭐와 같다 그랬던가요? 오늘 본문에서 둘로 표현했지요. 나는 한마리 쫓겨다니는 개와 같고, 쫓겨다니는 벼룩같은 자인데, 이스라엘 왕이 어떻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이런 개와 같은 벼룩 한마리 쫓는 것 같은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일에 모든 것 다 걸었습니다. 다윗을 잡아 죽이는 거기에 사울의 평생을 다 걸었다 할만큼. 제가 크게 찾아보니까 열번으로 기억을 해서 열개만 찾아봤는데, 설교록 찾아보니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이 스물두번 스물세번 그렇답니다. 스물두번 스물세번이나 다윗을 죽이려고 그렇게 사울이 애를 썻다 그말이지요. 사울의 남은 평생은 다윗 죽이는 거기에 모든 것 다 걸만큼 그런 사울이 되어졌으니 그게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게 바로 시기에서 나왔고, 그 시기가 교만의 결과였고 그것이 전부 잘한 것만 살펴보는데 그 가장 깊은 뿌리 속으로 들어가면 그게 전부 자기 중심, 자기 중심이라말은 자기가 하나님이 됐다 그말입니다. 자기가 왕이 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된 거기서 모든 것이 다 발생된 그런 연고라. 이게 사울의 실패의 원인인데, 이 사울은 오늘날 우리가 사울은 아니지만은 자칫 잘못하면 사울같은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사람은 참 별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자 성녀라도 한순간에 어두워지고 넘어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고 다윗도 그걸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리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울보다 나은 신앙이라 보기 어렵고, 사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 보기 어려운데 그러면 우리는 사울보다 넘어질 확률이 더 많은 우리들이기때문에 조심을 안하면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사울이 아무 죄도 없는 자기의 부하고 충신 중에 충신이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신복이고 나라의 일등 공로자고 자기 사위고 아들의 친구고, 어느 면을 보나 길르고 길러서 귀하게 쓰고 소중하게 쓰면은 보배 중에 보배가 다윗 아니겠습니까, 사울에게 있어서. 사울에게 있어 다윗은 그 나라에 둘도 없는 보배 중에 보배가 다윗입니다. 그런 보배를 사울이 교만, 시기 이런 것 때문에 기어코 죽이려고 그렇게 쫓아다녔습니다. 하나님이 안 붙였기에 죽지 않았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하셨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요. 그러면 이렇게 아무런 잘못도 없는 그냥 충성만 했고 자기 마음과 충성을 다 바쳤고, 주로 임금님을 모신 이런 공을 세운 다윗 입장에서 사울이 죽이려 그럴때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하기 그지없는 그런 입장이었지만은 거기 대해서 다윗은 어떻게 대처를 했던가, 사울에 대해서. 다윗이 대처한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울이 다윗의 마음 속에 그 사울은 어떤 사람이였느냐?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라는 겁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다. 지금 그 사울은 왕이지만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왕이고, 그 사울의 정치는 그때 이리 되고 난다음에는 별로 잘한 것이 없었고 특히나 다윗 자기에 있어서는 자기를 원수로 알고 죽이려 달려드는 그런 원수가 사울이었지만은, 자기를 도왔다고 하여 하나님의 제사장 85명을 한자리에서 칼로 다 죽인 사람이 사울인데, 아주 악행 아닙니까? 그런 악행을 저지른 사울이었지만은 다윗 속에는 이런 사울이지만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라.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내 주라. 그게 다윗 속에 늘 자리잡고 있으니까 사울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이라든지 원수 삼는 그런 마음이 다윗 속에 생길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게 근본적으로 가장 큰 원인이라 그말이지요. 그것이 사울로 말미암아 사울에 의해서 일방적인 손해와 희생과 목숨이 열 번도 더 끊어질만큼 그런 위험에 처한 그런 일방적인 그런 손해, 일방적인 박해, 일방적으로 죽이려는 살해 위협을 당하는 그 속에서도 사울에 대한 다윗의 마음은 변하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이 사울왕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이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다. 그것 때문에 다윗은 사울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이나 원수 삼는 마음을 결코 가지리를 못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사람이 수많은 인인관계와 모든 사건 처리에 있어서 이것을 자기 속에 담아놓고 이것이 자기 모든 생활과 대외관계에 원동이 되고 근본이 되고 뿌리가 되어있으면 그 사람은 어떤 환경이 와도 요동치를 아니하고, 그러기 때문에 늘 말씀드리는 것이 신앙이란 것은 무엇이 신앙이냐? 신앙은 뭐라고 제가 말씀드리던가요? 평소에 많이 말씀드린게 신앙은 무엇이 신앙입니까?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게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신앙은 무슨 말을 해도 신앙이 아닙니다, 그거는. 기독교 신앙이란 것은 뿌리가 하나님이고 근본이 하나님이고 그분에게 나와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 안에 사는 것이 믿는 사람들의 모든 생활이고 그러기때문에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으로 인하여 움직여지는 그게 신앙이고 그분의 법도대로 사는게 신앙이고 그 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신앙이지, 하나님을 모르는 신앙 하나님과 끊어진 신앙 하나님과 관계없는 신앙은 껍데기가 어떻게 화려하고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거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거는 다른 것이지. 근본이 다르고 종자가 다른 겁니다.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바로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에 대해서 미워하거나 원수 삼는 마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다윗이 나오는데 누른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다윗은 사울에 대해서 원한적인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아예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올라올 수가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기때문에. 저 사람은 나를 죽이는 원수지만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다. 다윗의 임금이였잖습니까, 그때로 말하면. 내 주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셔서 내 주로 내 위의 왕으로 세우신 분이다. 그 사람이 타락해서 나를 죽이려할지라도, 지금 사울의 행동이나 일처리 방향은 틀렸을지라도 하나님이 기름 부었다는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변하지 않았기때문에 다우시은 사울에 대해서 결코 다른 마음을 할 수 없었고, 대항할 수가 없었다 그말이지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게 뿌리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모든 생활에, 이것이 원동이 되었으면 그 사람은 인인관계에서 많은 오해도 받고 손해도 보고 희생도 당하고 그런게 있을지라도 마지막에 하나님께선 그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버릴 수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걸 생각지 못하니까 이리 대하지 못하지요. 그리 된 사울에 대한 다윗의 중심과 대처는 그리했고, 그리고 거기서 또 하나 있는 것은 그 자기에 대한 모든 것, 사울에 대한 모든 처리와 자기 앞날에 대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다 맡겨 버린 겁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다. 다윗이 사울에 대해서 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 피신을 했고, 피신했다가도 괜찮으니까 해치지 않을꺼니까 다시 와라 그러니까 또 갔고. 또 죽이려하니까 그때는 피해서 할 수 없이 나와서 피신했는데, 도망만 다녔고 피해다녔지 대항하지 않았고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또렷하게 있었지마는 옷자락 벰을 인해서 마음이 찔렸다 그랬습니다. 옷자락 벰을 인해서. 옆에 사람은 당신 원수니까 죽이십시오 하고 자꾸 옆에서 말하는데, 옷자락 벰을 인해서 마음이 찔렸다 그랬습니다. 내 주 하나님의 기름 부은 왕을 죽일 수 없다 그래서 죽이지 않았지요. 하나님께 다 맡겨 놓은 겁니다. 그 원수에 대한 처리도 하나님께 맡겼고, 자기 앞날에 대한 모든 것도 다 하나님께 맡겨둔 것이 다윗의 대처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식은 오늘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원론을 가르치는 것이고 도리를 가르치는 말씀이기때문에 이치를 가르치는 말씀이기때문에 이 이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주님 재림하실때까지 변함이 없는 이치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상대할때 이 이치를 가지고 상대하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되고, 이렇게 되어질때 사람들이 볼때는 심히 답답하고 안타깝고, 참 한편으로 보면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그런 것이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도 아마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이 심히 힘들었을 겁니다. 이렇게 연약하고, 보기에 사람은 보니까 하는 방법이나 하는 거는 보니까 그게 맞는 것 같은데 이런 사람 따라다니다가, 전에도 말씀드린 적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은 책에 그런게 있습니다. 지도자가, 통치자 왕이 되려면 왕이 되는 방법 중에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덕을 베푸는 그런 방법이 하나 있고, 하나는 강압적으로 하는 방법이 있는데 말하자면은 자기의 선의를 보여서 덕으로써 나라 다스리는 방법이 있고, 힘으로 다스리는 그런 방법이 있는데 두려움을 심어주는 방법이 있는데,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게 될때 덕을 베풀고 두려움 심어주는 두개를 같이 가면 좋은데 둘 중에 하나밖에 쓰지 못할 그런 입장이 될때는 그 사람이 말하기를 폭력을 쓰든 억압을 하든 두려움을 심어줘야 되지 두려움이 없는 덕은 결국 그 나라 백성들 사람들을 다 베리고 만다 그게 유명한 책에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똑똑하고 실력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아랫사람들에 대해서 그런 두려움 심어주는 역사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그런 사람이고 말하자면, 다윗은 보니까 사울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몰리고 아무리 죽이려해도 도망만 다니고 반격할 기회가 있어도 반격은 전혀 하지 않으니까 따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 사람 따라다니다가는 뭐 일이 되겠나? 우리 다같이 죽는 것 아닌가 싶은 그런 상황이 되어졌지만은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붙들고 쓰시니까 결국 다윗은 승리를 하고 사울은 실패하고 말았지요. 오늘도 이 이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 전제가 될 것이 뭐냐? 거기서 전제될 것이, 다윗과 사울의 관계. 사울에 대한 다윗의 대처. 하나님을 인해서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께 다 맡겨 놓는 이것이 있는데 거기서 가장 먼저 선제가 되고 전제 되어야 될 것은 하나님과 다윗 자기와의 관계가 전제되어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은 하나님 앞에 다윗의 개인 생활 모든 생활이 바로 되지 못한 상태는 이 모든 것이 전부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윗 자기의 모든 생활, 중심 모든 것부터 하나님과 자기 관계, 말하자면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 다윗의 모든 생활이 빈틈없는 하나님 말씀대로의 생활에 죄없는 깨끗한 생활이 되어진 그게 가장 우선이 되어지고 난 다음에 이 모든 것이 해당이 되어지는 것이지 이것이 안되고 나면 그다음것은 다 깨지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렇게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 다 안정되고 난다음에 우리아의 아내 사건 생겼을때 하나님과 다윗 사이가 깨져버렸지요. 죄를 짓고, 큰 죄를 짓고나니까 그때부터 다윗의 집안에 칼이 떠나지 않아서 아들들 사이에, 아버지가 아들 배반하고 형제간에 살인 사건이 나고 온갖 작용 생겨진 그게 하나님의 대응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가 어디서 생겨졌느냐? 다윗이 정치를 잘못해서, 대외관계 잘못해 그런 것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자기 관계가 틀어졌기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바로 살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순간 놔버리니까 다윗 집안이 엉망진창이 되서 수습을 못할만큼 되어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하나님 관계가 바로 되고 난 다음에는 그다음부터는 다윗은 걱정할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다 맡겨놓고 자기 할 일만 하고 자기 길만 가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다 처리하는 겁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신앙의 길인데, 이 신앙 걸음을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화하다가 이런 걸 말하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구름 잡는 소리로 압니다. 추상적인 그런 걸로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근본이고 뿌리인데, 이걸 모른다 그말이죠 사람들이. 모든 신앙의 방향은 그리 나가는 겁니다. 그게 신앙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면입니다.
그래서 아가서에 말씀하신게 전부다 그거죠. 나와 입 맞추기를 원하니 내 사랑이 포도주보다 진함이로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사랑하는 당신의 신부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고 그 신부는 둘이 없는 하나입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 틈이 없어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주님과 나와만 딱 드러붙는 이것이 신랑 신부의 관계고, 이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가장 핵심적인 그런 부분이고 요구다 그말이지요. 이것 없는 상태에서 어떤 충성을 하고 열심을 가지고 무엇을 해도 하나님께는 기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이 그렇게 했을때 그 사울에 대한 다윗의 중심과 자세, 대처방법, 그리고 모든 걸 하나님께 다 맡겨 놓은 것, 그 전에 먼저 가장 우선적으로 전제되고 선결되어야 될 것이 하나님 앞에 자기가 바로 서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해서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이 주일 학생을 중간반 학생을, 구역장님들이 식구들을 데리고 다닌다고 예배시간 늦는 것 한편으로 수고와 열정을 이해를 하는데 한편으로는 늘 마음속에 짐입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요. 백목사님께서 주일학교 반사 중간반 반사들이 학생들 데려온다고 예배시간 30분 지각을 하고, 데려다놓고 난 다음에 피곤하니까 새벽부터 돌아다니고 토요일 밤 늦게까지 심방하고 전도하고 기도한다고 늦게 자지요. 새벽에 새벽같이 일어나서 뛰지요 이러니까 몸이 한계가 있는 것인데, 피곤하고 예배시간 지각해서 꾸벅꾸벅 졸고 앉았으면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딱 한마디 입니다. ‘남 구원하고 저는 죽어? 남 구원하고 제가 죽어?’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것 하고 자기 구원은 전혀 방향이 틀립니다. 억만명을 구원해도 자기 구원 안되면 하나님께 버림 받습니다. 일꾼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진정한 다른 사람 구원은 내 구원이 먼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식구들때문에 예배시간 지각하는거는 안하는게 좋습니다, 할 수 있으면. 안 할 수 없어서 있습니다. 그런데 부득이하게 그렇게 하기는 하지만은 늘 마음속에 짐은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게 짐이고 일반화가 되버리면 마지막에 그게 일반화가 되고 아무 거기 대해서 감각이 없으면 그 예배시간에 보는 손해는 회복을 못합니다. 굉장히 큰 겁니다, 그거는.
그래서 인간 구원도 이런 모든 것도 하나님과 자기 관계가 우선이기때문에 그러니까 내 구원이 첫째입니다. 자기 중심이라 그리된 것 아닙니다. 내가 먼저 되어야, 메다 놓은 사람들, 구경꾼들 지난 오일밤 예배때지요. 우리가 배웠는데 메다 놓은 사람들, 앉은뱅이를 메다 놓은 희생 수고가 큽니다. 그런데 그거는 메다 놓은 것은 구걸만 시켰지 그 죽는 날까지 메다 놓아도 그 앉은뱅이 병을 못 고칩니다. 구경꾼들 그들에게 그 앉은뱅이 원하는 금과 은을 줬지만은 평생을 줘도 그때 그때 한끼 면하지 근본 해결은 안됩니다. 왜 메다 놓은 사람은 메다 놓을 수 밖에 없느냐? 그것 밖에 모르니까. 왜 구경꾼은 그것밖에 못주냐? 그것밖에 없으니까. 사도들은 뭘 줬느냐? 앉은뱅이 구하는 은과 금은 나한테는 없다. 나는 거기 가치두지 아니하고 그거는 내가 만들지 않았다. 나한테 그거는 없다. 은과 금은 사도들이 가치두지 않았고 그것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도들이 가진 것은 내가 가진 것을 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내가 가졌기때문에 가졌으니까 줄 수 있는 겁니다. 그걸 주니까 근본 해결이 다 되버렸습니다. 없는 것은 못 주는 겁니다. 자기가 가져야 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구원이 먼저 되어야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겁니다. 다윗이 사울에 대한 모든 태도도 그 중심과 처세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고 오늘 우리가 배우고 이렇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되어야 될 것이 하나님과 자기 관계가 바로 되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은 아무런 실효가 없는 거지요. 해당이 되질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으면 다윗이 쫓겨다니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쳐서 사울의 손에 밀어넣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끼는 다윗이 된 상태로 하나님이 보물처럼 아끼는 그런 다윗이 되어있는데 그 다윗을 사울이 헤치려 그러니까 아무리 쫓아다녀도 하나님께서 사울의 손에 붙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된 상태가 되니까 더욱이 다윗은 사울에 대해서 그 사울을 아꼈고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이기 때문에 아꼈고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그리 되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인관계에서 사울과 다윗 같은, 다윗에 대한 사울의 시기와 같은, 사울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몰림 당한 이 정도는 다르고 형태는 달라도 오늘날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많은 인인관계에 이런 일들은 오늘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걸 가만히 응용해서 찾아보면 일어나는데 그때 우리들의 대처방식이 어떻게 되어야 되는가? 바로 다윗처럼 이렇게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이면 내가 일대 일로 상대할 때 어떤 결과가 나겠는가? 내가 그 사람이 이런 말 할 때 내가 같은 말 하고 내가 이런 말 하면, 그가 이렇게 대할 때 내가 이렇게 대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를 생각을 해서 만약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지 않는 것, 인간구원에 손해되는 것이라면 아무리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야 될 그런 게 있어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그런 결과가 나오고 마는 겁니다. 그게 다윗의 대처방법이고 결론은 하나님께 전부다 맡겨놓는 것이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이것이 결론적으로 말하면,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그 답이고, 궁극의 답이고,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답인데 이걸 해결하는 거기 대해서 필연적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그 방법이면 방법이고 자본이면 자본인 그게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말하자면은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이기때문에 손을 쓸 수 없고 인간구원에 손해 끼치지 않아야 되기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자본이면 그게 무엇인가? 그 자본은 바로 방법은 방법인데, 그거는 자기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자기 손해, 자기 희생.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는 최종의 길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기 욕심이라는게 들어가면, 그래서 지난 주 말씀이 모든 시험에 원인은 욕심인데 자기라는 것이 들어가고 자기 속에서 발동된 욕심이란 것이 들어가는 순간 십자가는 질 수 없고 십자가를 져도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이고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사욕을 다 부인한 상태에서 개닫고 십자가를 지면 그 십자가는 주님의 십자가로 원하는 마음으로 단마음으로 지고 가는 기쁘고 즐거운 그런 십자가가 되게 되는 것이고 거기는 고통이라는 것은 없는 겁니다. 몸의 고통까지 마음이 다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주님 십자가가 될 수가 있다 그말이지요.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들이 모든 인인관계 이것이 비단 왕과 신하의 관계에만 해당되는게 아닙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이치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이 정도의 차이만 있고 관계 모습만 다르지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의, 나와 관계된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에 있어 나와 윗사람 관계도 있고 그 윗사람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나와 수평의 관계도 있고, 내 아랫사람 관계도 있고,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 또 세상 위치적으로 아래 있는 사람, 모든 면으로 아래 있는 그 사람이 나한테 대해서 그렇게 하는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때도 그럴수밖에 없는 면이 있습니다. 백목사님께서 서부교회에서 목회하는 중에서 다 지도자로 스승으로 따르는 그분의 교회에서도 한때는 핵심되는 그런 교인들이 백목사님을 배척을 하고 반대해서 사례도 끊어버린 그런 경우도 있다 그럽니다. 그럴 때 목사님께서 할 수 있는게 무엇이었겠는가? 신앙이란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고 만들어가는, 하나님같은 우리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깊은 그런 깊이가 있고 넓이가 있고 세밀하기가 말로 할 수 없는 그런게 얼마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할 수 있는대로 자꾸 연구하고 그래서 말하기 전에, 행동하기 전에, 얼마나 많이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게 전부 기도고 명상이고 참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이다, 우리 걸음이다. 이게 성도의 걸음. 그래서 성도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아무렇게나 살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까 그 법을 따라서 세밀하고 정확한 지성과 지공의 그 법, 하나님과 모든 만물 전부가 다 찬성하고 영광 돌릴 수 있는 그 법을 따라가려니까 얼마나 세밀한지 모르겠고, 거기 마지막에 들어가는 것은 결국 자기 십자가가 들어가지 않고는 안되는 것이 이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 되셔서 십자가를 지고 마지막에 걸어가신 것이 이 걸음입니다. 우리들이 걸어갈 걸음이고,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좀 깊이 넓게 생각해보십시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사욕에 들어가면 이 걸음은 결코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자기를 부인하고 특히 욕심을 다 버려야 되는,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걸어갈 수 있는 걸음입니다.
사무엘상 24:1-22
이 일이 있고 난 다음에 26장에 보면 또 다시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나섰다가 다윗과 그 부하들에 의해서 창과 물병을 말하자면은 빼앗기고, 빼앗겼다기보다는 가져감을 당하고 그런 일이 또 있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다윗이 이제 사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서 아예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그런 일이 있게 되어졌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이름을 구속받은 성도라 그렇게 이름을 합니다, 성도. 우리가 잘 아는대로 성도라는 말은 거룩한 무리, 구별된 무리라는 뜻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 전부를 가리켜 무리라 그리 말하는데 한사람 한사람이 다 성도라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받은 선민들이고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은 구별된 성도들이기때문에, 성도라는 것은 이름을 붙일때는 그에 걸맞는 우리들의 생활의 법칙이 따로 있게 되어집니다. 어느 단체에 들어가면 그 단체가 좀 일반적이지 아니하고 특별한 그런 목적이라든지 소망을 가진, 사람을 양육하는 그런 단체라면 그 단체에 소속된 사람이면 그 단체가 추구하는 그 단체의 법대로 모든 생활해야 되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말하자면은, 육군 사관학교 같은 그런 곳에는 우리나라 초급 장교를 훈련시키고 기르는 그런 군사 훈련 교육기관이기때문에 거기 소속된 생도들은 모든 옷을 입는 것이라든지 먹는것 이라든지 행동하는 것도 다 그 규칙에 맞도록 제재로 받게 되어있고 거기 어긋나면은 퇴교조치를 당하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 여러곳에 다 보면 다 그리 되어있습니다.
성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해서 뽑아낸 사람들이기때문에 그 성도에 속한 우리들의 모든 생활은 쉽게 말하면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도라 그럴때 그 속에 의미는 쉽게 말하면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자기 마음대로 살아선 안되고 자기 원하는대로 살아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되는대로 그렇게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모든 생활 하나하나를 아무렇게나 세상 흘러가는 그대로 물결 흘러가는대 따라서 죽은 물질들이 흘러내려가듯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삽니다. 말세가 되고 개인의 인권이 강화되고 존중이 되는 그런 시대가 되어서, 그때는 말하자면은 개성시대기때문에 사람들이 뭐라고 흉을 보고 욕을 하든지 자기 원하는대로 자기 좋은대로 자기 편한대로 좀 말하자면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나라의 법을 어기지 아니하고 그냥 좋을대로 살면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성경은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 행하는 그런 것을 말씀하고 있으나 말세가 되니까 ‘나는 남자로 더불어 결혼하는 그런 사람이다’고 신문에 떳떳하게 밝히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런 인간들이 아주 대문짝만하게 신문에 실리고 그런걸 옹호하는 시대가 지금 그런 시대고 그런 것을 반대하면 법으로 막는 것이 지금 시대고, 우리나라 법 통과 되었습니까? 아직 통과는 안됐습니까? 그럼 지금은 말해도 불법은 아니겠네요. 그런 나쁜 짓을 하는 그런 것도, 그게 그런 것을 나쁜짓이라 그러면 앞으로 잡아 간답니다 죄인이라고. 죄인이라고 잡아가거나 말거나 이제 법으로 정해지면 일부러 그럴 필요 없으니까 말이야 조심하겠지만은 성경에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그런 짓하면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말했으니까 성경을 그러면 바꾸든지, 우리나라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까 ‘나는 성경 따라서 종교적인 양심으로 말한다’ 그러면 뭐라 그럴런지 모르지요. 종교를 핍박하는 거는 나라 법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요, 그거는? 성경을 말하는데 그걸 뭐라 할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도 개성이라서 그렇게 주장을 하는 시대가 지금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는 사람들은 말하자면은 쉽게 말하면 뭣대로 살아라 그말입니다. 너희 마음대로 살아라. 원하는대로 보고 싶은것 마음껏 보고, 듣고 싶은 것은 귀가 더러워지거나 말거나 다 듣고 하고 싶은 짓은 무슨 짓이든지 다 해라 그말이지요. 다만 나라에서 법을 정해놓으면 그 법이란 것이 그게, 나라의 법이란 것이 온갖 악법이 꽉 찼고 인간들이 돈 받아 처먹고 만든 그런 법도 얼마나 많은데 그런 법도 다 지켜야 되는가요, 그것도? 그것도 법이라고? 그래도 악법도 법이라고 지키긴 지켜야 되겠지요. 그런데 알고보면 그런 법도 세상에는 많이 있다 그말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그런 무기를 마음껏 만들어내도 미국 나라에는 법이라서 아무 제재도 못하고 그런 법을 만든 국회의원들이 그 무기 만드는 무기상들에게 뒷돈을 얼마나 받아 먹는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술 만드는 회사, 담배 만드는 회사가 얼마나 돈을 많이 쓴다는 것은 안봐도 아는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정의라는게 없습니다. 이 세상은 타락한 세상이고 다 죄악세상이라서. 그런 세상을 따라서 사람들은 마음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안 믿는 사람들 생활은 쉽게 말하자면 너희 마음대로 살아라. 다만 많은 사람이 의논해서, 또 나라에서 다 마음에 안 들겠지만 세상이 어떻게 완전하냐? 사람이 어떻게 완전할 수 있냐 그러니까 이것도 법을 만들어놨으니까 이 법은 지키고 어기지 말고, 그 테두리 안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줘도 들키지만 말고, 아닙니까? 죄를 지어도 들키지만 말고 그게 세상의 법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줘도 잡히지만 말고 들키지만 말고. 드러나지만 말고 몰래 몰래 얼마든지 해먹어라, 그게 세상입니다 알고보면은. 그러니까 마음대로 살아라 이런 세상인데 성경에 우리를 묶어서 성도라 그래놓고 너희는 성도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고 성도가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 ’ 이게 성도라는 이름의 말씀하신 뜻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지 말라는 겁니다. 네 멋대로 살지말고 네 마음에, 네 중심에, 네 소원이 원하는대로 그렇게 살지말고,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뭐라고 말하든 너희들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이 정해놓은 그 법을 따라서 살아라. 그 법을 맞춰서 살아라. 그러면 손해를 많이 봐야 되고 희생을 당해야 되고 기를 못 펼 때가 많고 할 말 못할 때가 많고 온갖 핍박을 받을 때가 많은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라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생활입니다. 이걸 어기면 그때만큼은 적어도 성도가 아니다 그말이지요. 오늘 말씀도 이것하고 굉장히 깊은 관계가 있지요.
오늘 말씀에 이걸 간단하게 말하면, 본문에서 가르치는 말씀은 간단하게 말하면 이 세상에서 사람이 인인관계라는 것은 모든 관계 중에서 가장 중심되는 것이고, 가장 많은 관계가 인인관계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다가 자기가 가장 많이 상대하고 접촉하는 그 대상이 사람이다 그말이죠. 사람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윗사람도 있고 친구도 있고 아랫사람도 있고, 그 윗사람도 여러 종류가 있고 동등의 관계도 여러 종류 있고 수하도 여러 종류 있고 많은 관계가 있는데 어쨌든 그런 모든 인인관계 거기서 서로간에 살아가다보면은 원치 아니하게 자기 실수로 인해서, 때로는 상대방의 어떤 계획에 의해서 어찌어찌하다보니까 우연찮게 오해가 생겨져서 별에별 원인에 의해서 마찰이 생겨지고 부딪히는 그런 일이 생겨질 그때에 안 믿는 사람들과 관계가 다르고 믿는 사람들끼리 관계가 다른데,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상하관계지만은 이거는 성도끼리의 관계입니다. 이 성도끼리의 관계는 상하관계든 동등관계든 또 자기 아랫사람과의 관계든 보면은, 원론적으로 들어가보면 대개 다 비슷하게 대처할 수 밖에 없는 면이 있어서 말하자면은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사람과 관계를 맺어갈때 그 관계에서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 하나님과 관계된 일, 또 혹은 하나님의 복음과 관계된 그 일, 하나님의 일과 관계된 그 일, 또 하나님의 사람 인간구원과 관계된 그런 일, 그런 일이 관련되어질때 어떻게 대처를 할 것인가? 크게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되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대외관계에서 하나님 사람과의 관계, 인간구원과 관계된 그 일이 생겨질때 어디까지 내가 말을 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 대응을 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 어떻게 대처를 해야 될 것인가를 본문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가 있는 겁니다. 이런 것을 말씀을 가지고 따져서 구별해서 거기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을 하고 맞춰서 해야되는 것이기때문에 우리를 가리켜서 성도라고 이름을 하는 겁니다. 사울이란 이 사람은 처음부터 사울이 실패한 사람이 아니고 사울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말하자면 외모도 뛰어났고 인품도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가 더했으니까, 어깨 위니까 사람의 머리 하나 높이만큼 더 있단 말이니까 적어도 20센치 이상이니까 평균보다 20센치가 더 크니까 얼마나 훤칠하고 키가 큽니까? 거기다가 아주 용맹도 있고, 또 겸손해서 인품도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부을때 보면은 ‘온이스라엘에 사모하는 집이 바로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아니냐’ 그리 되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사모하는 대상이 바로 너고 너희 집이다. 그때 사울이 말하기를 ‘나는 우리 아비집에서 가장 작은 자고, 우리 지파는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인데, 어떻게 내가 이 나라에 왕이 됩니까?’ 굉장히 겸손하고 자기를 바로 아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럴때 하나님께서 높이 들어서 이스라엘에 왕으로 그렇게 세우셨는데, 그 사울이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실패하게 되어졌는가? 그 실패 원인은 대표적으로 말하면 사울이 왕이 되고 난 다음에 교만해졌기 때문인데, 교만이란 말의 정의는 하나님 앞에 자기를 잘 모르는 걸 교만이라 우리가 그러지 않습니까? 교만해졌는데 그말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잘 모르는 자가 되어졌는데, 어두워졌다 그말이죠. 자기 심령이 어두워져서 자기를 잘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자기를 바로 알았는데, 왕이 되고 나니까 교만하게 되어졌는데 그래서 사람이 환경에 의해서 영향받고 피동되는 그런 것이 될 수 있는데, 왜 사울이 교만하게 되어졌느냐? 사울이 교만하게 된 것은 모든 사람이 대개 다 그런데, 사람이란 것이 자기가 한 이력 중에서 자리에 등용되고 어떤 위치에 앉게 되고 거기서 그에 맞는 일을 하게 되는 그 자리에 앉으면 등용이 되면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됩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으니까 왕으로서 많은 일들을 필연적으로 하게 됩니다. 하다보면은 사람이 잘하는 것도 있고 잘못하는 것도 있고 일에 실수도 있고 실패도 있고 성취도 있고 또 큰 성공도 있고 여러가지 그런게 있게 되는데 그중에서 이거는 사울이나 우리나 꼭 같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살아온 과거 이력 생활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 앞에 생활 중에서 잘한 것이 있고 크게 말하면 잘 못한 것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잘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잘 못한 것만 기억을 하고 그것만 찾고 그것만 자꾸 생각을 해서 그것 고치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사람이란 것이 다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남에게 실수없이 남에게 잘한 것만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또 다른 사람이 나에게 피해만 끼친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따지고보면. 사람은 다 서로 서로 그리 되게 되있기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테두리를 만드신 것이고 사람의 지체도 다 그렇게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관계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남에게 잘해준 것, 남을 도와준거나 혹시나 뭐 은혜를 좀 끼친거나 협조한거나 잘해준 것 이런 것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고 기억에 전혀 없고, 남에게 대해서 자기가 본의아니게 실수한 것이라든지 또 혹은 약하다보니까 마음을 잘못먹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것이든지 이런 것은 철저하게 따지고 기억해서 용서도 구하고 회개도 하고 그것을 다시 그렇게 안하려고 하고 배상도 하고 그리 하는 사람이 있고, 잘한 것은 전혀 기억이 없는 이런 사람이 있고, 남에게 피해 당한 것은 기억에 나지 않고 물질적이든지 명예적이든지 위신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다른 사람에게 내가 피해 당한 것은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고 다 잊어버리고 자기가 남에게 본의아니게 혹은 실수로 피해를 끼친 것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늘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조심스럽고 죄송하고 겸손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남에게 자기가 피해 끼친 것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하나도 기억을 안 합니다. 안하고 오로지 남에게 피해 입은 것만 기억을 합니다. 내가 욕을 얻어 먹었다, 물질에 피해를 당했다, 명예를 침해 당했다, 위신이 깍였다 그런 것만 머릿속에 남아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거는 성경으로 따져볼때 대단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 교만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일도 그렇습니다. 일도 자기가 잘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잘못한 것만 기억을 하고 그것만 찾아서 고치고 바로 잡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결코 교만할 수가 없게 됩니다. 자기 잘한 것이 없으니까, 잘못한 것만 늘 생각하니까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족하고 그것만 남아있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자기가 실수하거나 잘못하거나 낭패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자기 잘한 것, 장점한 것, 공 세운 것, 뭔가 이룩한 것 이런 것만 기억을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갈수록 자기 잘한 것만 늘 생각하니까 자기는 잘한 사람이고 실수 없는 사람이고 잘난 사람이고 그리 되다보니까 이 사람은 점점 교만한 사람이 된다 그말이지요. 사울이 왜 교만하게 되어졌느냐? 원래는 겸손한 사람이었는데 왕이 되고 난 다음에 사울은 자기의 잘못한 것은 찾지 않고 보지 아니하고 자기 잘한 것만 늘 기억을 하고 보고, 그러다보니까 사울은 교만한 사람이 됐고 교만한 사람이 되니까 필연적으로 거기서 나온 것은 자기가 잘났으니까 잘했으니까 자기의 그 공에 걸맞는 그런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겠고 그런 위신을 세워야 마땅하니까 자기의 위신, 자기의 권위, 자기 명예, 자기 영광을 높이는 이런 것이 늘 그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래서 아말렉을 전쟁에서 이기고 난 다음에 하나님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한다고 말씀을 하시고 이미 버림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하나님은 버려버렸는데 사울은 그 사실을 기억지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 불순종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명령 순종한 그것만 붙들고 있으니까 이겼으니까 성전비를 세워서 자기한테 내가 이 전쟁에서 이겨 승리했다는 성전 기념비를 세우는 이런 일을 사울이 했고, 그리고 사무엘이 와서 잘못을 지적을 하고 책망을 하니까 사울이 뭐라 그랬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나이다’ 그래놓고 그다음엔요? ‘내가 범죄하였을찌라도 이 백성들과 백성들의 장로들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번제 지내러 가시지요.’ 그랬습니다. 사무엘이 사사니까 그 사무엘과 함께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려야 높은 자기 위신이 깍이지 않으니까 그런 사람이 그 위신을 깍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사무엘한테 간청을 했는데 사무엘이 그때 사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돌아가려니까 어떻게 했던가요? 사무엘의 옷을 잡아당겨서 옷이 찢어졌습니다. 그거는 협박입니다. 나와 함께 안가면 당신 죽일 수 있다는 협박입니다. 사무엘이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같이 가서 했지만은 이미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도 자기의 위신이 컸고 위신이 중요했고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모든 하시는 역사 이런 것보다도 자기가 우선되었고 자기가 큰, 자기 위신이 먼저 앞선 우선된 교만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였고 그다음 거기서 나온 것이 최종적으로 뭐가 나왔는가? 자기의 잘한 것만 보니까 교만한 사람이 되어졌고 교만한 사람이 되다보니까 필연적으로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앞세워서 하나님의 영광 제가 다 가로취하고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도 자기를 높여야 되겠고 위신을 세워야 되는 이 지경까지 갔고, 그 교만에서 또 마지막으로 나온 것이 시기가 나온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돌아올때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 그럴때 사울이 시기가 나와서 그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죽이는데 모든 걸 다 걸었다 할만큼, 사람이 어두워지면 그렇게까지 어두워지는 겁니다. 다윗이 표현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의 무엇을 쫓고 있나이까? 그 상황에서 사울과 다윗의 그 입장을 보면은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 받았어도 그 나라의 왕입니다. 모든 군사, 적어도 수만명은 넘을건데 그 수많은 군사들의 군권을 다 쥐고 있고 그 나라 백성이 전부다 적어도 껍데기로 왕이니까 그 왕의 명령을 안 따를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있고 다윗은 왕에게 버림 받아 피해서 도망다니는 도망자 신세기 때문에 다윗이 표현하기를 자기를 뭐와 같다 그랬던가요? 오늘 본문에서 둘로 표현했지요. 나는 한마리 쫓겨다니는 개와 같고, 쫓겨다니는 벼룩같은 자인데, 이스라엘 왕이 어떻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이런 개와 같은 벼룩 한마리 쫓는 것 같은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일에 모든 것 다 걸었습니다. 다윗을 잡아 죽이는 거기에 사울의 평생을 다 걸었다 할만큼. 제가 크게 찾아보니까 열번으로 기억을 해서 열개만 찾아봤는데, 설교록 찾아보니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이 스물두번 스물세번 그렇답니다. 스물두번 스물세번이나 다윗을 죽이려고 그렇게 사울이 애를 썻다 그말이지요. 사울의 남은 평생은 다윗 죽이는 거기에 모든 것 다 걸만큼 그런 사울이 되어졌으니 그게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게 바로 시기에서 나왔고, 그 시기가 교만의 결과였고 그것이 전부 잘한 것만 살펴보는데 그 가장 깊은 뿌리 속으로 들어가면 그게 전부 자기 중심, 자기 중심이라말은 자기가 하나님이 됐다 그말입니다. 자기가 왕이 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된 거기서 모든 것이 다 발생된 그런 연고라. 이게 사울의 실패의 원인인데, 이 사울은 오늘날 우리가 사울은 아니지만은 자칫 잘못하면 사울같은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사람은 참 별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자 성녀라도 한순간에 어두워지고 넘어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고 다윗도 그걸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리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울보다 나은 신앙이라 보기 어렵고, 사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라 보기 어려운데 그러면 우리는 사울보다 넘어질 확률이 더 많은 우리들이기때문에 조심을 안하면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사울이 아무 죄도 없는 자기의 부하고 충신 중에 충신이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신복이고 나라의 일등 공로자고 자기 사위고 아들의 친구고, 어느 면을 보나 길르고 길러서 귀하게 쓰고 소중하게 쓰면은 보배 중에 보배가 다윗 아니겠습니까, 사울에게 있어서. 사울에게 있어 다윗은 그 나라에 둘도 없는 보배 중에 보배가 다윗입니다. 그런 보배를 사울이 교만, 시기 이런 것 때문에 기어코 죽이려고 그렇게 쫓아다녔습니다. 하나님이 안 붙였기에 죽지 않았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하셨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요. 그러면 이렇게 아무런 잘못도 없는 그냥 충성만 했고 자기 마음과 충성을 다 바쳤고, 주로 임금님을 모신 이런 공을 세운 다윗 입장에서 사울이 죽이려 그럴때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하기 그지없는 그런 입장이었지만은 거기 대해서 다윗은 어떻게 대처를 했던가, 사울에 대해서. 다윗이 대처한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울이 다윗의 마음 속에 그 사울은 어떤 사람이였느냐?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라는 겁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다. 지금 그 사울은 왕이지만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왕이고, 그 사울의 정치는 그때 이리 되고 난다음에는 별로 잘한 것이 없었고 특히나 다윗 자기에 있어서는 자기를 원수로 알고 죽이려 달려드는 그런 원수가 사울이었지만은, 자기를 도왔다고 하여 하나님의 제사장 85명을 한자리에서 칼로 다 죽인 사람이 사울인데, 아주 악행 아닙니까? 그런 악행을 저지른 사울이었지만은 다윗 속에는 이런 사울이지만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라.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내 주라. 그게 다윗 속에 늘 자리잡고 있으니까 사울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이라든지 원수 삼는 그런 마음이 다윗 속에 생길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게 근본적으로 가장 큰 원인이라 그말이지요. 그것이 사울로 말미암아 사울에 의해서 일방적인 손해와 희생과 목숨이 열 번도 더 끊어질만큼 그런 위험에 처한 그런 일방적인 그런 손해, 일방적인 박해, 일방적으로 죽이려는 살해 위협을 당하는 그 속에서도 사울에 대한 다윗의 마음은 변하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이 사울왕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이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다. 그것 때문에 다윗은 사울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이나 원수 삼는 마음을 결코 가지리를 못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사람이 수많은 인인관계와 모든 사건 처리에 있어서 이것을 자기 속에 담아놓고 이것이 자기 모든 생활과 대외관계에 원동이 되고 근본이 되고 뿌리가 되어있으면 그 사람은 어떤 환경이 와도 요동치를 아니하고, 그러기 때문에 늘 말씀드리는 것이 신앙이란 것은 무엇이 신앙이냐? 신앙은 뭐라고 제가 말씀드리던가요? 평소에 많이 말씀드린게 신앙은 무엇이 신앙입니까?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게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신앙은 무슨 말을 해도 신앙이 아닙니다, 그거는. 기독교 신앙이란 것은 뿌리가 하나님이고 근본이 하나님이고 그분에게 나와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 안에 사는 것이 믿는 사람들의 모든 생활이고 그러기때문에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으로 인하여 움직여지는 그게 신앙이고 그분의 법도대로 사는게 신앙이고 그 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신앙이지, 하나님을 모르는 신앙 하나님과 끊어진 신앙 하나님과 관계없는 신앙은 껍데기가 어떻게 화려하고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거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거는 다른 것이지. 근본이 다르고 종자가 다른 겁니다.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바로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에 대해서 미워하거나 원수 삼는 마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다윗이 나오는데 누른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다윗은 사울에 대해서 원한적인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아예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올라올 수가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기때문에. 저 사람은 나를 죽이는 원수지만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다. 다윗의 임금이였잖습니까, 그때로 말하면. 내 주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셔서 내 주로 내 위의 왕으로 세우신 분이다. 그 사람이 타락해서 나를 죽이려할지라도, 지금 사울의 행동이나 일처리 방향은 틀렸을지라도 하나님이 기름 부었다는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변하지 않았기때문에 다우시은 사울에 대해서 결코 다른 마음을 할 수 없었고, 대항할 수가 없었다 그말이지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게 뿌리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모든 생활에, 이것이 원동이 되었으면 그 사람은 인인관계에서 많은 오해도 받고 손해도 보고 희생도 당하고 그런게 있을지라도 마지막에 하나님께선 그 사람을 버리지 않습니다. 버릴 수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걸 생각지 못하니까 이리 대하지 못하지요. 그리 된 사울에 대한 다윗의 중심과 대처는 그리했고, 그리고 거기서 또 하나 있는 것은 그 자기에 대한 모든 것, 사울에 대한 모든 처리와 자기 앞날에 대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다 맡겨 버린 겁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다. 다윗이 사울에 대해서 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 피신을 했고, 피신했다가도 괜찮으니까 해치지 않을꺼니까 다시 와라 그러니까 또 갔고. 또 죽이려하니까 그때는 피해서 할 수 없이 나와서 피신했는데, 도망만 다녔고 피해다녔지 대항하지 않았고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또렷하게 있었지마는 옷자락 벰을 인해서 마음이 찔렸다 그랬습니다. 옷자락 벰을 인해서. 옆에 사람은 당신 원수니까 죽이십시오 하고 자꾸 옆에서 말하는데, 옷자락 벰을 인해서 마음이 찔렸다 그랬습니다. 내 주 하나님의 기름 부은 왕을 죽일 수 없다 그래서 죽이지 않았지요. 하나님께 다 맡겨 놓은 겁니다. 그 원수에 대한 처리도 하나님께 맡겼고, 자기 앞날에 대한 모든 것도 다 하나님께 맡겨둔 것이 다윗의 대처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식은 오늘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원론을 가르치는 것이고 도리를 가르치는 말씀이기때문에 이치를 가르치는 말씀이기때문에 이 이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주님 재림하실때까지 변함이 없는 이치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상대할때 이 이치를 가지고 상대하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되고, 이렇게 되어질때 사람들이 볼때는 심히 답답하고 안타깝고, 참 한편으로 보면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그런 것이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도 아마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이 심히 힘들었을 겁니다. 이렇게 연약하고, 보기에 사람은 보니까 하는 방법이나 하는 거는 보니까 그게 맞는 것 같은데 이런 사람 따라다니다가, 전에도 말씀드린 적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은 책에 그런게 있습니다. 지도자가, 통치자 왕이 되려면 왕이 되는 방법 중에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덕을 베푸는 그런 방법이 하나 있고, 하나는 강압적으로 하는 방법이 있는데 말하자면은 자기의 선의를 보여서 덕으로써 나라 다스리는 방법이 있고, 힘으로 다스리는 그런 방법이 있는데 두려움을 심어주는 방법이 있는데,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게 될때 덕을 베풀고 두려움 심어주는 두개를 같이 가면 좋은데 둘 중에 하나밖에 쓰지 못할 그런 입장이 될때는 그 사람이 말하기를 폭력을 쓰든 억압을 하든 두려움을 심어줘야 되지 두려움이 없는 덕은 결국 그 나라 백성들 사람들을 다 베리고 만다 그게 유명한 책에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똑똑하고 실력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아랫사람들에 대해서 그런 두려움 심어주는 역사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그런 사람이고 말하자면, 다윗은 보니까 사울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몰리고 아무리 죽이려해도 도망만 다니고 반격할 기회가 있어도 반격은 전혀 하지 않으니까 따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 사람 따라다니다가는 뭐 일이 되겠나? 우리 다같이 죽는 것 아닌가 싶은 그런 상황이 되어졌지만은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붙들고 쓰시니까 결국 다윗은 승리를 하고 사울은 실패하고 말았지요. 오늘도 이 이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 전제가 될 것이 뭐냐? 거기서 전제될 것이, 다윗과 사울의 관계. 사울에 대한 다윗의 대처. 하나님을 인해서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께 다 맡겨 놓는 이것이 있는데 거기서 가장 먼저 선제가 되고 전제 되어야 될 것은 하나님과 다윗 자기와의 관계가 전제되어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은 하나님 앞에 다윗의 개인 생활 모든 생활이 바로 되지 못한 상태는 이 모든 것이 전부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윗 자기의 모든 생활, 중심 모든 것부터 하나님과 자기 관계, 말하자면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 다윗의 모든 생활이 빈틈없는 하나님 말씀대로의 생활에 죄없는 깨끗한 생활이 되어진 그게 가장 우선이 되어지고 난 다음에 이 모든 것이 해당이 되어지는 것이지 이것이 안되고 나면 그다음것은 다 깨지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렇게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 다 안정되고 난다음에 우리아의 아내 사건 생겼을때 하나님과 다윗 사이가 깨져버렸지요. 죄를 짓고, 큰 죄를 짓고나니까 그때부터 다윗의 집안에 칼이 떠나지 않아서 아들들 사이에, 아버지가 아들 배반하고 형제간에 살인 사건이 나고 온갖 작용 생겨진 그게 하나님의 대응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가 어디서 생겨졌느냐? 다윗이 정치를 잘못해서, 대외관계 잘못해 그런 것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자기 관계가 틀어졌기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바로 살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순간 놔버리니까 다윗 집안이 엉망진창이 되서 수습을 못할만큼 되어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하나님 관계가 바로 되고 난 다음에는 그다음부터는 다윗은 걱정할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다 맡겨놓고 자기 할 일만 하고 자기 길만 가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다 처리하는 겁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신앙의 길인데, 이 신앙 걸음을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화하다가 이런 걸 말하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구름 잡는 소리로 압니다. 추상적인 그런 걸로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근본이고 뿌리인데, 이걸 모른다 그말이죠 사람들이. 모든 신앙의 방향은 그리 나가는 겁니다. 그게 신앙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면입니다.
그래서 아가서에 말씀하신게 전부다 그거죠. 나와 입 맞추기를 원하니 내 사랑이 포도주보다 진함이로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사랑하는 당신의 신부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고 그 신부는 둘이 없는 하나입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 틈이 없어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주님과 나와만 딱 드러붙는 이것이 신랑 신부의 관계고, 이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가장 핵심적인 그런 부분이고 요구다 그말이지요. 이것 없는 상태에서 어떤 충성을 하고 열심을 가지고 무엇을 해도 하나님께는 기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이 그렇게 했을때 그 사울에 대한 다윗의 중심과 자세, 대처방법, 그리고 모든 걸 하나님께 다 맡겨 놓은 것, 그 전에 먼저 가장 우선적으로 전제되고 선결되어야 될 것이 하나님 앞에 자기가 바로 서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해서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이 주일 학생을 중간반 학생을, 구역장님들이 식구들을 데리고 다닌다고 예배시간 늦는 것 한편으로 수고와 열정을 이해를 하는데 한편으로는 늘 마음속에 짐입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요. 백목사님께서 주일학교 반사 중간반 반사들이 학생들 데려온다고 예배시간 30분 지각을 하고, 데려다놓고 난 다음에 피곤하니까 새벽부터 돌아다니고 토요일 밤 늦게까지 심방하고 전도하고 기도한다고 늦게 자지요. 새벽에 새벽같이 일어나서 뛰지요 이러니까 몸이 한계가 있는 것인데, 피곤하고 예배시간 지각해서 꾸벅꾸벅 졸고 앉았으면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딱 한마디 입니다. ‘남 구원하고 저는 죽어? 남 구원하고 제가 죽어?’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것 하고 자기 구원은 전혀 방향이 틀립니다. 억만명을 구원해도 자기 구원 안되면 하나님께 버림 받습니다. 일꾼입니다. 그러기때문에 진정한 다른 사람 구원은 내 구원이 먼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식구들때문에 예배시간 지각하는거는 안하는게 좋습니다, 할 수 있으면. 안 할 수 없어서 있습니다. 그런데 부득이하게 그렇게 하기는 하지만은 늘 마음속에 짐은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게 짐이고 일반화가 되버리면 마지막에 그게 일반화가 되고 아무 거기 대해서 감각이 없으면 그 예배시간에 보는 손해는 회복을 못합니다. 굉장히 큰 겁니다, 그거는.
그래서 인간 구원도 이런 모든 것도 하나님과 자기 관계가 우선이기때문에 그러니까 내 구원이 첫째입니다. 자기 중심이라 그리된 것 아닙니다. 내가 먼저 되어야, 메다 놓은 사람들, 구경꾼들 지난 오일밤 예배때지요. 우리가 배웠는데 메다 놓은 사람들, 앉은뱅이를 메다 놓은 희생 수고가 큽니다. 그런데 그거는 메다 놓은 것은 구걸만 시켰지 그 죽는 날까지 메다 놓아도 그 앉은뱅이 병을 못 고칩니다. 구경꾼들 그들에게 그 앉은뱅이 원하는 금과 은을 줬지만은 평생을 줘도 그때 그때 한끼 면하지 근본 해결은 안됩니다. 왜 메다 놓은 사람은 메다 놓을 수 밖에 없느냐? 그것 밖에 모르니까. 왜 구경꾼은 그것밖에 못주냐? 그것밖에 없으니까. 사도들은 뭘 줬느냐? 앉은뱅이 구하는 은과 금은 나한테는 없다. 나는 거기 가치두지 아니하고 그거는 내가 만들지 않았다. 나한테 그거는 없다. 은과 금은 사도들이 가치두지 않았고 그것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도들이 가진 것은 내가 가진 것을 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내가 가졌기때문에 가졌으니까 줄 수 있는 겁니다. 그걸 주니까 근본 해결이 다 되버렸습니다. 없는 것은 못 주는 겁니다. 자기가 가져야 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구원이 먼저 되어야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겁니다. 다윗이 사울에 대한 모든 태도도 그 중심과 처세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고 오늘 우리가 배우고 이렇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되어야 될 것이 하나님과 자기 관계가 바로 되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은 아무런 실효가 없는 거지요. 해당이 되질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으면 다윗이 쫓겨다니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쳐서 사울의 손에 밀어넣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끼는 다윗이 된 상태로 하나님이 보물처럼 아끼는 그런 다윗이 되어있는데 그 다윗을 사울이 헤치려 그러니까 아무리 쫓아다녀도 하나님께서 사울의 손에 붙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된 상태가 되니까 더욱이 다윗은 사울에 대해서 그 사울을 아꼈고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이기 때문에 아꼈고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그리 되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인관계에서 사울과 다윗 같은, 다윗에 대한 사울의 시기와 같은, 사울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몰림 당한 이 정도는 다르고 형태는 달라도 오늘날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많은 인인관계에 이런 일들은 오늘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걸 가만히 응용해서 찾아보면 일어나는데 그때 우리들의 대처방식이 어떻게 되어야 되는가? 바로 다윗처럼 이렇게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이면 내가 일대 일로 상대할 때 어떤 결과가 나겠는가? 내가 그 사람이 이런 말 할 때 내가 같은 말 하고 내가 이런 말 하면, 그가 이렇게 대할 때 내가 이렇게 대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를 생각을 해서 만약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지 않는 것, 인간구원에 손해되는 것이라면 아무리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야 될 그런 게 있어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그런 결과가 나오고 마는 겁니다. 그게 다윗의 대처방법이고 결론은 하나님께 전부다 맡겨놓는 것이다 그말이지요. 그래서 이것이 결론적으로 말하면,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그 답이고, 궁극의 답이고,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답인데 이걸 해결하는 거기 대해서 필연적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그 방법이면 방법이고 자본이면 자본인 그게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말하자면은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이기때문에 손을 쓸 수 없고 인간구원에 손해 끼치지 않아야 되기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자본이면 그게 무엇인가? 그 자본은 바로 방법은 방법인데, 그거는 자기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자기 손해, 자기 희생.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는 최종의 길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기 욕심이라는게 들어가면, 그래서 지난 주 말씀이 모든 시험에 원인은 욕심인데 자기라는 것이 들어가고 자기 속에서 발동된 욕심이란 것이 들어가는 순간 십자가는 질 수 없고 십자가를 져도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이고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사욕을 다 부인한 상태에서 개닫고 십자가를 지면 그 십자가는 주님의 십자가로 원하는 마음으로 단마음으로 지고 가는 기쁘고 즐거운 그런 십자가가 되게 되는 것이고 거기는 고통이라는 것은 없는 겁니다. 몸의 고통까지 마음이 다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주님 십자가가 될 수가 있다 그말이지요.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들이 모든 인인관계 이것이 비단 왕과 신하의 관계에만 해당되는게 아닙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이치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이 정도의 차이만 있고 관계 모습만 다르지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의, 나와 관계된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에 있어 나와 윗사람 관계도 있고 그 윗사람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나와 수평의 관계도 있고, 내 아랫사람 관계도 있고,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 또 세상 위치적으로 아래 있는 사람, 모든 면으로 아래 있는 그 사람이 나한테 대해서 그렇게 하는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때도 그럴수밖에 없는 면이 있습니다. 백목사님께서 서부교회에서 목회하는 중에서 다 지도자로 스승으로 따르는 그분의 교회에서도 한때는 핵심되는 그런 교인들이 백목사님을 배척을 하고 반대해서 사례도 끊어버린 그런 경우도 있다 그럽니다. 그럴 때 목사님께서 할 수 있는게 무엇이었겠는가? 신앙이란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고 만들어가는, 하나님같은 우리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깊은 그런 깊이가 있고 넓이가 있고 세밀하기가 말로 할 수 없는 그런게 얼마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할 수 있는대로 자꾸 연구하고 그래서 말하기 전에, 행동하기 전에, 얼마나 많이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게 전부 기도고 명상이고 참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이다, 우리 걸음이다. 이게 성도의 걸음. 그래서 성도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아무렇게나 살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까 그 법을 따라서 세밀하고 정확한 지성과 지공의 그 법, 하나님과 모든 만물 전부가 다 찬성하고 영광 돌릴 수 있는 그 법을 따라가려니까 얼마나 세밀한지 모르겠고, 거기 마지막에 들어가는 것은 결국 자기 십자가가 들어가지 않고는 안되는 것이 이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 되셔서 십자가를 지고 마지막에 걸어가신 것이 이 걸음입니다. 우리들이 걸어갈 걸음이고,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좀 깊이 넓게 생각해보십시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사욕에 들어가면 이 걸음은 결코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자기를 부인하고 특히 욕심을 다 버려야 되는,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걸어갈 수 있는 걸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