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주후(누10:25-37)
사마리아인 같은 이웃이 되자2014-10-13조회 308추천 25
20141012 주후
누가복음 10:25-37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할때 그 질문의 의도가 순수하고 좋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되 순수하게 구원에 소망을 가지고 믿고 따라다닌 그런 사람도 많았지만은 또 다른 의도로 따라다닌 그런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 율법사는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고 교법사라고 이름해서 하나님의 법을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니까 예수님께서 워낙 바르게 잘 가르치시니까 아마 겨루어보고 싶은 그런 마음도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어떤 의도로 예수님을 시험했든 이 사람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이렇게 물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된 내용들이 이것처럼 본인의 그 의도가 불순한 그 의도도 기록되있고 또 사람을 미혹시키는 말도 성경에는 많이 있고 해치는 그런 일도 있고 속이는 말도 있고 별별 말들이 성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와 목적과 또 동기와 그런 요인들에 의해서 기록이 되어있는 그런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도로 어떤 목적으로 어떤 원인에 의해서 기록되었든 일단 성경에 기록된 것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거는 성경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됩니다. 성경에 마귀 말이 있습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뱀이 한 말. 그 말은 뱀이 한 말이지만은 하나님께서 기록해놓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그게 분명히 뱀의 말이고 마귀 말이지만은 하나님 말씀이라 그말은 그 뱀의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주신다 그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합니다.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는 말인데, 성경에 그런 것이 있는데 그 내용 역시 그 거짓말한 불순한 의도와 거짓말의 그 내용과 그런 것들이 일단 성경에 기록된 이상 이거는 하나님 말씀이고 성경이고 거기서 우리는 구원의 도리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말입니다. 이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시험하여 물었지만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율법사의 예수님에게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영생 얻는 도리를 여기서 배울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시험해서 묻기를 ‘어떻게 하여야,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면 율법사가 물은 것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었고 예쑤님의 대답은 영생 얻는 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요절이 어딥니까? 신구약 성경의 요절을 말할 때 요한복음 3장 16절, 거기 보면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면 성경에 요절은 영생 얻는 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도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22장에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여전히 역시 율법사가 물을때 예수님께서 여기 말씀하신 그대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전부 다해서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라 이 두가지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말하자면 신구약 성경의 핵심은 사랑이라 그말인데, 그 사랑은 다시 말하면 영생 얻는 법이라 그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 더 캐낼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 얻는 법을 물었고 예수님께서 율법에 기록되어있는데 뭐라고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읽느냐 이거 오전에 말씀드렸지요. 성경에 많은 말씀이 기록되있는데 성경은 절대불변 절대정확무오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진리의 말씀을 자기가 잘못 읽으면 진리 말씀이 자기에게 이단이 되는 그런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여호와의 증인은 불경을 보지 않습니다. 전도관 박태선씨도 불경이라던지 다른 것 보지 않습니다. 성경 봅니다. 성경을 보고 어떤 사람은 천주교로 어떤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어떤 사람은 안식교로 어떤 사람은 또 전도관으로 또 어떤 사람은 무엇으로 그렇게 비끄러져 나가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을 잘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기록된 그대로 바로 읽어야 바른 진리를 찾을 수가 있지 진리는 바로 기록되있는데 자기가 잘못 읽으면 그 말씀은 진리가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진린데,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 진리가 되는거지 아무리 많은 진리가 있어도 찾지 못하면 진리는 되지 못합니다. 잘못 읽으면 구원 도리는 되지 못합니다.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읽느냐’ 할때 이 율법사는 바로 대답을 했습니다. ‘마음, 목숨, 힘, 뜻 다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하라고 하였나이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그러면 바로 기록된 것을 네가 바로 읽고 깨달았다 그말입니다. 율법사는 복있는 사람입니다 여기까지 바로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은 영생하는 법을 가르쳐주신 겁니다. 율법사는 그걸 물었고.
영생 얻는 법을 한말로 말하면 뭐라 그랬습니까? 영생 얻는 법은 한말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게 영생하는 법이다 여기서 하나 우리가 캐낼 수 있는게 영생이 무엇인가? 영생이 뭡니까? 영생이라는 말의 뜻이 글자 그대로 풀면 영원토록 산다 그말이지요. 영원히 산다. 그러면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겁니다. 영원히 사는데 그러면 영원히 산다 그러면 영원토록 숨쉰다, 영원토록 본다, 영원히 듣는다, 영원히 생각한다, 영원히 움직인다 그말이지요. 영원토록 활동한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에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해서 영생하는데 영생하는 그 나라에서 영생하면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영생하는 그 나라에서 영생하는 일은 한말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사랑이다 그말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러면 사랑이란 구원인데, 구원이란 것은 죄 많은 세상 타락한 세상 죄악 세상에서 인간을 구원하는게 구원이지 천국에는 죄도 없고 사망도 없고 타락이 없는데 거기서 무슨 구원인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다. 소망이라 말은 바라보고 나아간다는 것이고, 사랑은 그 소망을 이루는 실제인데 그래서 영원토록 사랑하여 영원히 자라가는 것, 하나님을 영원히 믿고 영원히 하나님 사랑하므로 이웃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히 자라가는게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게 사랑이고 이게 구원이고 천국에서 하는 일이다 그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마음과 이 정신과 이 사상과 이런 노력을 해보지 않아서 그 심신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런 기능 요소가 없는 사람은 천국가서 아무런 실력도 기술도 기능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표현하자면 밥만 축내는, 밥만 축내는 사람을 이름을 뭐라 그럽니까? 식충이라 그럽니다, 식충. 식충이 돼서 영원토록 그 사람은 천국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할 일이 없는 아무 쓸모없는 그런 사람으로 영원토록 계속되는 겁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참 세상에서도 밥만 축내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면은, 그래서 나이가 많아서 몸이 말을 듣지 않아도 마음으로 일을 하고 영능이 있어서 일을 하면 나이가 많아질수록 귀한 그런 어른이 되어지는데, 젊을때 자기 중심으로 독하게 악하게 자기 고집 자기 주관대로만 살아가지고 그렇게 해놓지 않으면 나이 들면은 주관도 고집도 피울수록 점점 사람은 다 떨어지니까 쓸모없는 사람이 되니 그때는 참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몸에도 냄새 나고, 몸에서 냄새나는 건 씻으면 된다 치는데 그 사람의 인격에서 그의 인격에서 냄새가 나면 사람들 다 도망가고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 생각해볼 수 있는 것,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나님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그게 영생이다’ 그러면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는 일은 사랑이다. 그 사랑이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가는게 사랑이다 그말이지요. 이게 영원한 우리의 할 일인 것을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께서 율법사가 ‘그러면 내가 사랑할 내 이웃이 누굽니까?’ 그럴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해주신 겁니다. 비유에서 첫째, ‘어떤 사람이’ 하고 말씀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이’, 그러면 어떤 사람이라 여기는 어떤 사람이라 그러면,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33절에 보니까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렇게 해놨는데 둘 다 글자는 ‘어떤’이라고 같고 의미가 같은 것 같아도 앞에 어떤 사람이 이거는 특정인을 지칭한 어느 한 사람을 지칭해서 말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중에 한 사람, 그러니까 누구든지 해당될 수 있는 그말이 되는 것이고 어떤 사마리아인 이거는 특정된 한 사람을 가리켜 말한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러면 어느 계층이나 어느 자격의 기준을 두고 말하지 아니하고 그냥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그랬으니까 이 사람은 알 수 있는 것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은 이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 딱 하나 뭘 알 수 있습니까? 이 사람이 남잔지 여잔지 젊은인지 늙은인지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 부잔지 가난한 사람인지 모르겠는데,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할때 이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한가지 뭡니까? 그 사람의 신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한가지를 말한다면요? 이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유대인이다 그말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거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으니까 여기서 이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중에서 어떤 사람을 말했으니까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은 그 사람 나 자신이 어떤 입장 위치 어떻게 되있든지 우리는 전부 한 사람 한사람이 이 사람같이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부다 누구든지 이 사람처럼 이리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 본문에 보면 몇 사람이 나오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나오고 그다음 제사장이 나오고, 레위인이 나오고 사마리아인이 나옵니다. 일단 사마리아인이라 그랬으니까 사람입니다, 여기는. 그럼 네종류의 사람이 나오지요. 어떤 사람,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이렇게 네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나오면 누가 더 나옵니까? 한사람 더 찾아보면 누가 나옵니까? 주막 주인이 나오지요. 주막 주인까지 치고 다섯 사람인데 일단 주막 주인은 뒤로 빼놓고, 네 사람이 나오는데 이 네 사람이 우리 모두가 다 이 네 사람이 다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도 될 수 있고 내가 여기 제사장 위치도 될 수 있고 레위인처럼 될수도 있고 사마리아인처럼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전부 이 네 종류의 사람이 우리는 다 해당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거는 이치기 때문에. 그러면 어떤 사람, 나도 강도 만난 사람처럼 이런 형편이 될 수 있다는 것.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만난 것처럼 나도 이리 될 수 있다는 걸 첫째 기억을 하시고, 두 번째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은 오전에 세가지로 말씀드렸는데, 첫째 예루살렘은 무슨 생활입니까? 하나님을 모시고, 두 번째는 말씀 순종으로, 이 두 가지 합한걸 하나님 모시고 말씀 순종으로 사는 생활을 ‘믿음’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모시고 말씀 순종하는 믿음 생활. 이 세가지 생활이 자기 생활에 전부가 되어지는게 예루살렘 생활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성경에 지명으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백성 나라에 수도 중심지를 말하는 것이고 그 예루살렘에 중심은 성전이고 그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고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 섬기는 그 생활이 성전 생활이고 그 성전 생활이 바로 예루살렘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생활은 성전 생활이고 성전 생활은 신앙생활인데 이 신앙생활이 자기 생활에 전부가 되어있는 여기에 모든 가치와 중점 전노력이 여기 기울여진 이 생활을 가리켜서 예루살렘 생활이라 그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믿는 사람이 이 생활에 힘을 쓰는 우리가 되어야 되는데, 그런데 이 예루살렘 생활 안에 모든 게 다 들어있다는 이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이걸 잡지 못하면 그때 그 사람은 여리고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나아만의 여종이 그러한 신분과 그런 형편 속에서도 그 나아만의 여종은 안봐도,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고 우리가 안봐도 성경 전체를 보고 신앙 경험으로 깨달아가지고 생각해보면 나아만의 여종에게는 마음속의 두려움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낙망 낙심이 별로 없었을 것이고 그 속에는 괴로움이나 근심 걱정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은 그 모든 걸 능히 이길 수 있는 그런게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 속에 평안함이 있었고 담대가 있었고 온유가 있었고 감사와 기쁨이 그 속에 충만했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많은 사람과 역사를 해가지고 그 말대로 이루어지게 만들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 여종과 동행을 했다는 뜻이고, 하나님 동행은 하나님 모시고 말씀 순종 믿음으로 거기서 살았다는 말이고 하나님 모시고 말씀 순종하면 믿음으로 사는 거기는 그곳이 적국이던지 감옥이던지 또 어디 잡혀간 깊은 산속 동굴이든지 시골이든지 어디든 상관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니까. 그분 모시고 그분 말씀,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고, 말씀은요? 말씀은 시공에 제한 받습니까? 말씀도 시공을 초월합니다. 믿음은요? 믿음은 시공의 제한을 받습니까? 믿음도 시공을 초월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장소, 어느 형편, 어떤 상황에서도 이 셋은 하나님 모시고 말씀 순종하는 믿음 생활은 어디든지 제재받지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적국이든지 감옥 속이든지 사자굴 속이든지 풀무불 속이든지 감옥 속이든지 전혀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여종은 거기서 그렇게 사니까 마음 속에 근심 걱정 염려 불안 초조 대신에 감사 기쁨 또 소망 이런 걸로 충만하고 자기 맡은 그 일에서 내면으로 하나님과 관계에서 이게 충만하고 그 충만한 그것으로 외부적으로 나타난 자기 책임과 의무 생활을 감당하기에 바쁜 그 생활이 되다 보니까 그는 울 틈도 없고 낙망할 시간도 없고 슬퍼할 시간도 없고 하루 하루 보나 안보나 찬송가를 흥얼 거리면서 그렇게 감사 기쁨으로 그렇게 살아서, 주변 사람들이 보면 ‘뭐가 그리 좋아서 저렇게 흥얼거릴까? 저 여자 아이는 뭐가 저리 좋아서 얼굴에 늘 웃음이 돌까? 온화할까? 늘 여유가 있을까?’ 안봐도 그랬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그 말을 다 들었지요. 이게 믿음으로 사는 생활의 모습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생활의 모습. 그래서 하나님 모시고 말씀 순종하는 믿음 생활, 이 생활은 예루살렘 생활인데 그 안에 예루살렘 그 생활 안에 성공도 또 부요도 존귀도 영광도 승리도 행복도 모든게 그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뜨리고 그것을 벗어나는 그런 것이 둘이 있으니, 예루살렘 생활을 떠나게 되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게 되는 이유 원인이 두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무엇인가? 하나는 아브람이 벧엘에서 점점 남방으로 내려갔다가 애굽까지 내려갔는데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되겠습니까? 아브람이 벧엘에서 점점 남방으로 내려간 것이 바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거는 아브람의 뭐 때문에 그리 됐을까? 또 탕자가 자기 집에서 먼 나라로 간 것도 이 이유입니다. 이거는 뭘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래서 생각해보면 하나는 인간의 연약성. 인간의 연약성. 자기 믿음으로 살면 모든게 다 해결되어지는데 그것을 감당치 못하는 인간의 연약성이라. 연약성도 믿음 부족에서 나오는 거라 볼 수 있겠지요. 그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그 속에 자기 욕심입니다. 허영과 허욕, 호기심, 욕심. 그 두가지가 들어서 믿는 사람의 천국 사람이 되는 예루살렘 생활을 떠나서 여리고로 가게 만든다 그말입니다. 여리고는 하나님이 없는 곳과 마찬가지인, 이미 하나님과 멀어지고 말씀을 떠나고 믿음을 떠나는 그런 생활로 후퇴해서 내려가는 것이 여리고입니다. 여리고로 내려간 생활. 그래서 첫째 ‘어떤 사람이’, 두 번째 ‘예루살렘에서’, 세 번째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순서를 기억하십시다. 그러다가 그다음 네 번째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뭔가? 강도는 구약성경에 불한당이고 이 불한당은 마귀를 나타냈고 이 마귀는 불한당인데, 그러면 이때 강도는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 만났는데 이 강도는 불한당 마귀고, 믿는 사람이 예루살렘 생활하다가 믿음 생활하다가 믿음에서 떠나서 세상으로 점점 들어가면 강도를 만나는데, 마귀 만나는데 이 마귀 만나는 것을 오전에 뭐라고 표현했던가요? 무엇을 만나는 것이라 그랬습니까? 마귀 만나는 것은 미혹을 만나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미혹을. 마귀 만나는 것은 바로 미혹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미혹이라는 것은, 원래 미혹은 다 나쁜 것이고 그거는 손해되는 것이고 자기 절단 내는게 미혹인데, 그 미혹의 외부 껍데기는 미혹하려고 하니까, 잉어를 낚으려면 잉어가 좋아하는 낚싯밥을 걸어놔야 됩니다. 그래야 탁 낚아채지요. 짐승을 잡으려고 덫을 놓을때는, 쥐덫이던지 무슨 덫을 놓으면 그 덫에다가 그것들이 좋아하는, 쥐가 좋아하는거라든지 짐승이 좋아하는 그것을 놔놓고 그러면 그것 먹으려 달려들다가 탈칵 걸려서 발이 절단나든지 목숨이 끊어지는 그게 전부다 미혹인것과 같은 겁니다. 마귀가 우리를 미혹할때는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 내게 꼭 필요한 것 이런 것들을 앞에 걸어놓고 꼬운다 그말이지요.
그러면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으니까, 예루살렘 생활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생활인데 그 속에는 그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그것이 외부적으로 말하면 때로는 환난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들어갔는데 쇠사슬로 손과 발이 다 묶인채로 착고에 채여서 깊은 지하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좋은 겁니까? 좋은 건가요? 감사와 기쁨이 넘칠 일입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 몸이 구속된 상태로 쇠사슬에 손발이 묶여서 자유가 억압된 상태로 깊은 지하 감옥에 묶여 있었는데 사도 바울이 그 속에 뭘 했습니까? 생각을 했지요. 말씀 생각하니까 그 속에서 감사가 넘쳤고 기쁨이 넘쳐서 그게 자기 마음속에 있던 말씀을 생각하므로 인한 감사와 기쁨이 자기 마음에서 차고 넘치고 생각이 차고 넘쳐서 입으로 터져 나온게 찬송이 됐습니다. 찬송이 되니까 그 찬송이 능력이 나와가지고 쇠사슬이 다 풀려버렸지요. 사도바울이 그 깊은 감옥속에 손과 발이 쇠사슬에 묶인 상태로 있는 그게 고통이겠고 아픔이겠고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묶였으니까. 쇠사슬로 묶어놨는데 무겁고 힘들고. 그런데 사도바울은 거기서 조금도 괴롭다 힘들다 아프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고, 괴롭고 힘들고 아프면 찬송이 나옵니까? 그냥 아고 죽겠다 힘든게 나오지요. 그런데 그게 전혀 없고 말씀을 생각하니까 그 말씀 생각이 깊이 들어가니까 그 말씀에서 나오는 감사와 기쁨이 자기 마음을 다 채우고 정신을 다 채우고 몸에까지 채우고 신경세포 다 채우고 입으로 터져나오니까 찬송이 됐고, 그러니 능력이 돼서 그만큼 그 속에 기쁨이 감사가 넘쳤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어서,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들어갔지만은 다니엘은 고통스럽지 않았고, 풀무불 속에 들어가도 고통스럽지 않았고, 그거는 너무 우리와 거리 멀다 쳐도 아마 감옥가는 것 정도는 우리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요즘 감옥은 옛날 감옥보다 달라서 바깥에 험하게 사는 사람보다 감옥 안에 들어있으면 더 좋을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감옥은 감옥인데, 사자굴이니 풀무불은 우리가 너무 거리가 먼 것 같아도 요셉도 따라가기 어렵지만은 감옥 가는 생활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감옥 가는 것이 좋은게 아니잖습니까. 자유가 억압되는 건데, 자유가 없는 생활이 되는데. 그런데 그 요셉이 그 감옥에서 원망했을까, 힘들었을까, 불평했을까, 괴로웠을까, 낙망이 됐을까? 그러면 하나님은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요셉의 감옥 생활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생활이었습니다. 할 말은 하고 했지만은. 그러니까 예루살렘 생활이 천국 생활이라. 그 속에 모든게 다 있다는 것은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의 물질적인 기준으로 봐서는 안된다 그말입니다. 믿는 사람의 성공과 행복은 다른 차원입니다. 어쨌든 그 속에 다 있는데, 그런데 사람이 연약해서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니면 외부적인 그런게 너무 힘들어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로 내려갈 수 있고, 또 사람이 가다보면은 욕심이 들어와서 또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리갈 때 가다보면은 이거는 거의 절대 반드시, 강도 만난 이거는, 이 사람 여기 비유는 우연인 것처럼 되어있으나 우연이 아니고 이거는 필연이고 절대라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로 내려가면 강도 마귀 만나는 것은 반드시고 필연입니다. 그리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강도 마귀는 그 사람이 떠나서 내려간 이유가 있지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간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과 이유에 딱 맞는 것을 그앞에 나타내 보여준다 그말입니다. 네가 돈 때문에 떠났지? 돈 여기 있다. 직장 때문에 떠났지? 직장 여기 있다. 사람 때문에 떠났지? 사람 여기 있다. 그 사람이 원하는 예루살렘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그 원인과 이유, 목적을 딱 들고 내놓으니까 백퍼센트 다 넘어가는데 그 넘어가는 것이 뭐냐? 강도들이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옷이란 것은 그 사람이 입고 있는 건데, 옷이란 것은 두 가지 역할 하지요. 하나는 그 사람을 꾸며주는 것이고 하나는 그 사람을 보호하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 사람 입고 있는 옷, 예루살렘에 살았으니까 믿음 생활 했으니까 믿음도 있겠고 진실도 있겠고 거룩도 있겠고 성결도 있겠고 사죄도 칭의도 화친도 있겠고 소망도 있겠고 이런 것이 있었는데, 거기를 떠나서 여리고로 가다 강도 만나니까 이 강도 마귀한테 미혹되고 보니까 그만 사죄도 빼앗겨 버리고 의도 빼앗겨 버리고 하나님과 화친도 빼앗겨 버리고 소망도 뺏겨 버리고 진실도 뺏겨 버리고 성결도 뺏겨 버리고 입고 있던 좋은 천국에 속한 옷을 다 빼앗겨 버립니다. 마귀가 다 벗겨 버리고 그리고 두드려패서, 패는 것은 마태복음 24장에 보면은, 악한 종이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그 동무들을 어떻게 한다고요? 동무들을 때리며 술 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때린다 말은 주먹으로 그 사람의 몸을 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신앙을 친다 그말입니다. 그 사람의 새사람을 때리는 겁니다. 영적으로, 신령적으로. 그러니까 마귀가 믿는 사람을 때리는 것은 눈으로 자꾸 보여지면, 뱀이 하와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결코 죽지 않으리라 그런 하와의 지식을 자꾸 때리는 겁니다. 두드려 맞으니까 자꾸 정신이 혼미해지니까 나중에 제정신을 못 차리니까 갈피를 못잡고 넘어갈 수 밖에 없는 거지요. 그 사람의 정신을, 생각을, 신앙 사상을, 양심을, 그의 모든 옳은 행동이 하는 몸의 모든 힘을 자꾸 말로 때리고 눈에 보여줌으로 때리고 또 만나게 해서 때리고 그렇게 때리니까 그렇게 맞으면 나중에 많이 맞으면 이 사람은 많이 맞아가지고 거반, 거반 죽게 되었다 그말은 거의 그만 죽게 되어서 맞아가지고 자력으로는 일어설 수 없는, 살아날 수 없는 자력회생이 불가능한 상태까지 만들어놓고야 마귀가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드려맞은 이 사람은 뭐가 이렇게 죽을 지경이 됐다고요? 이 사람의 새사람이. 새사람이 두드려맞아서 죽을 지경이 되어서 믿는 사람이 예루살렘 떠나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마귀 만나서 옷 빼앗기고 맞으면 이런 지경이 되어서 거반 죽을 지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눈도 뜨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새사람은 완전히 숨만 겨우 붙어있는, 꼴막꼴막한 그런 상태가 되니까 마귀가 버려두고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될 때, 많은 믿는 사람들이, 우리도 그리 될 수 있는데 그래도 좀 정상적으로 믿는 사람들 같으면 그렇게까지 안되는데 좀 많이 나가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도 자기가 맞아가지고 ‘내가 지금 옷을 다 빼앗겼다’ ‘두드려 맞았다’ ‘내가 숨도 못 쉴 지경이 되었다’고 그렇게 느끼지도 못하고 그 상황이 되어서도 좋다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그런 성도들이 세상에는 너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다 그말이지요. 그 사람은 그렇게 되면은 희망이 없지요. 어렵습니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강도 만난 자와 같이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늘 기억을 하고 살아야 됩니다. 이렇게 되었는데, 이제 그때 또 다시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피해서 도망간 거지요. 그러면 제사장이 피해서 지나간 겁니다. 이때 제사장은 종교와 정치를 겸한 정교일치의 지도자입니다. 맞습니까, 이때? 이때는 로마 식민지였고, 지금 유대 이스라엘 나라는 그뒤에 분리가 됐지만은 지금도 아랍 국가들은 종교가 바로 정치고 다 하나가 되어있지요. 그래서 그 종교 전쟁 다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런데 이때 유대 나라는 정치하고 종교가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때 헤롯이 있었지만은 실질적으로 보면은 그 헤롯이란 사람 그런 사람들은 그 총독들은 로마의 앞잡이고 유대인들을 다스린 사람들은 그 제사장 이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같이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그런 때이기 때문에 제사장이 있고 대제사장이 있고 그리 있지만은 어쨌든 제사장이라 그러면 상당히 높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높은 사람이고, 높다는 그말은 그 사람이 높다는 그말은, 사람이 직책을 가질때는, 검사라 그러면 내가 검사인데 그러면 검사를 함부로 사람이 건드릴 수 없는 것은, 검사라는 사람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은 그 검사라는 사람때문이 아니고 그 검사뒤에는 검사라는 그 정부조직이 있고 그 검사를 보호하는 법이 있고 조직이 있고 체계 그게 다 짜여져있기 때문에 그 사람 나라에 법 조직하고 다 연결된 것이 바로 그 직책이란 겁니다. 그 사람이 검사였다가 검사에서 똑 떨어져 나오면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그 사람은. 전직 검사라하면 과거 영향이나 인맥이 있으니까 좀 영향을 미쳐도 일단 떨어져나오면 검사는 아니기 때문에 정부 조직이나 행정, 그런 권력과는 상관 없는 사람이 되는데 현직 검사라 그러면 검사를 보호하는 그 검사에 받은 법적인 권한이 있기 때문에 막강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국회의원이 되면은 나라의 국회 의원을 준 그런 특권이 있으니까 굉장한 사람이 되는데 그 사람이 국회의원 낙선하면 별 볼일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사람이 제사장인데, 종교와 정치가 하나된 그런 나라에서 제사장이면 상당히 높은 사람이고, 이 사람 뒤에는 유대나라의 법과 행정체계와 조직이 다 연결되어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당히 실력도 있고 덕망도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죽어가는 사람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말이지요. 길거리에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마음 먹으면 치료하고 살려낼 수 있는 위치도 있고 실력도 있고 힘도 있고 다 있는 사람인데 지나갔습니다. 두 번째 레위인은 제사장만큼 아니더라도 그래도 하나님의 법을 많이 아는 사람이고 봉사, 원래 레위지파는 성전을 주로 섬기는 그 일이 레위지파의 본직무이기때문에 봉사 희생이 그들의 주업무입니다. 그러니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게 그들의 주임무나 마찬가지인데 이 사람도 보고 지나가버렸다 그말이지요. 그러면 제사장도 레위인도 강도 만나 상해서 죽어가는 그 사람을 구원해야될 그런 책임도 있고 의무도 있고 위치도 있고 할수도 있는데 못한 것이 아니고 안 한 겁니다. 구원하지 않은 겁니다. 이유는 뭘까? 자기도 강도 만날까싶어서. 얼른 피해서 도망 갔습니다. 두 사람 다 그리 갔습니다. 그다음 세 번재, 사마리아인은 이 쓰러져 있는 사람과 전혀 상관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거리가 더 먼 원수같은 관계에 있는 사람이 사마리아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구주였지만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기를 나사렛 괴수라 그래서 못 박아 죽였고, 결국 못을 박아서 원수처럼 못박아 죽였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 배타고 풍랑만나서 죽을 지경이 됐을때 예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을 구원하러 오시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불렀습니까? 놀라서 물귀신이라고, 유령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원하러 오시는 구주를 유령으로 봤습니다. 이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사마리아인은 자기 남은 명줄을 끊으러 오는 원수처럼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그런 관계다 그말입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루살렘 생활하던 사람이 연약해서, 욕심 때문에, 타락해서 탈선해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마귀 미혹받아가지고 새사람이 완전히 죽을 지경이 된 그 상태에서 주님이 그를 구원하러 갈때는 누구를 보내느냐? 하나님께서 그 사람 구원하러갈때는 외부적으로 하나님의 종을, 목사님 보내든 조사님 보내든 장로님이든 집사님이든 선생님이든 보내고 그 보낼때는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보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강도 만나서 새사람이 다 죽어진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면 그 말씀은 자기 명줄을 끊는 것 같은 그런 말씀으로 그에게 들려진다 그말이지요. 정반대로 그렇게 느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 사람이 새사람이 강건하면 안그런데, 새사람은 다 죽어가고 옛사람으로 강하니까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어쨌든 이 사람은 자기 힘이 없으니까 어찌 할 수 없고, 그래서 자기 힘으로 살아나지 못하니까 이 사마리아인이 가서 구원했습니다. 가서 그를 보고,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갔습니다’. 여기서 하나 기록안되있어도 뒤에 가서 보니까 이 사마리아인이 자기 짐승에 태웠으니까 이 사마리아인은 길 갈 때 짐승을 타고 가습니다. 말이든 나귀든 타고 가다가 나귀에서 내렸습니다. 나귀에서 내려서 가까이 갔습니다.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보좌에서 내려왔습니다. 낮아졌고 가난해졌고 멸시천대 받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으로 낮아지신 겁니다. 내려와서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가까이 오셔서. 첫째, 내려와서 가까이 가서. 두 번째,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부었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는데 기름은 성령을 말하고, 성령의 감화 감동의 역사. 포도주는 보혈을 말하는데 이 기름도 포도주도 이거는 이 사마리아인 자기에게 있는, 자기 위한 자기 것입니다. 기름도 사마리아인 자기 위해 쓸 것이고 포도주도 자기 위해 쓸 것인데 자기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부었습니다. 그러면 마귀 만나가지고 마귀한테 옷 빼앗기고 두드려맞아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원죄와 본죄로 죽어있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놓고 낮아지셔서, 나귀에서 내려서 가까이 오셔서, 두 번째 기름과 포도주인데 순서를 바꾸면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포도주는 주님의 보혈입니다. 대속의 피로 그 모든 죄를 다 씻어서 사죄, 칭의, 화친, 소망 입혀주시고 그다음 기름을 또 거기 부어서, 기름이란 것은 상처에 기름 붓는 것은, 포도주는 소독하는 그런 역할하는 것일 것이고, 기름은 그 상처를 부드럽게하는 그런 것이라 그럽니다. 그러면 기름은 성령의 역사니까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서 보혈의 공로를 입히시고 그다음 성령의 역사로 그 사람을 감화 감동을 시켜서, 그러면 피와 성령과 진리는 다 하나니까 여기 다 기록되어있지않아도 진리와 성령으로 그 사람을 감화 감동을 시켜서 그리고 상처에 붓고 싸매고, 싸매는 것은 말하자면 붕대로 싸매었겠지요. 병균이 들어가지 못하게, 감염되지 않도록, 소독해놓고 부드럽게 만들어놓고 감염되지 않도록 싸맸으니까 이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는, 그 사람을 지킨다 그말이지요. 여기까지는 그 사람이 할 수 없는 겁니다. 할 수 없는 걸 지금 사마리아인이 해준 겁니다. 그를 불쌍히 여겨 나귀에서 내려서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서 소독하고 부드럽게 만들고, 대속의 핏공로 입혀서 그사람 죄를 다 씻어내고 성령으로 감화감동 시켜서 그 사람을 부드럽게 감화시키고, 그리고 네 번째 붕대로 싸서 그 사람을 이제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에게, 이 능력은 약속입니다 아직까지. 그 사람에게 그 사람 지켜 보호하시겠다는 능력의 약속을 주시고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웠습니다. 사마리아 자기가 탔던,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앉았던 그 자리에 당신이 내려오시니까 우리를 그 자리에 앉힙니다. 그래서 주님이 낮아지시므로 우리가 높아지게 됐고, 주님이 가난해지시므로 우리가 부유하게 됐고, 주님이 고난 받으시므로 우리가 평안하게 되어진 이 인간의 본지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게 소망이지요 전부. 본지위 회복시켜주신 이 소망을 주시고, 그러면 몇 가지 입니까? 첫째, 나귀에서 내려서 가까이 갔습니다. 도성인신 하셔서 오셨습니다. 두 번째, 포도주를 씻었습니다. 대속의 피로 모든 죄를 씻어냈습니다. 세 번째, 기름을 부었습니다. 성령으로 감화감동시켜 그 사람을 감화감동 시켰습니다. 네 번째, 상처를 싸맸습니다. 균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로 그 사람을 지킨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다섯 번째, 그리고 그 사람을 짐승에 태웠는데 자기 탔던 짐승, 본지위입니다. 타락전에 하나님의 아들의 본지위에 앉히고, 소망입니다. 본지위의 소망을 주시고 그리고 여섯 번째로 주막으로 데려갔습니다. 주막은 지상교회를 말하는 것이고 이 지상교회 주막에 데려가서 거기서 돌보아주고 이땅에 있는 교회에서 돌보아주고, 그러면 교회라는 곳은 뭐하는 곳인가? 교회라는 곳은 이런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이렇게 마귀의 미혹을 받아서 옷 뺏기고 두드려맞고 죽어가는 이런 사람들을 살려서 구원하는 주막같은 곳이 교회다 그말이지요. 주막이 뭐하는 곳입니까?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주막은 뭐하는 곳입니까? 성경에 주막이 나오고 교회에서 주막을 말하니까 어쩐지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주막이란 곳은 술 파는 곳이 주막입니다, 술. 술이란 것은, 여기 술은 주막은 포도주를 말하는 것이고 이 포도주는, 성경에 포도주는 뭘 말합니까? 포도주는 예수님의 대속도 말하고 앞에 사마리아인이 가진 포도주로 씻은 것은 예수님의 보혈이고, 주막에서 파는 포도주는 교훈을 말합니다, 교훈. 하나님 말씀. 교훈을 가지고 말씀을 가르쳐 사람을 기른다 그말이지요. 씻어가지고 능력의 보호를 입고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교회가 길러준다, 교회에 부탁을 하고 갔고. 하면서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데나리온 둘은 이천년의 세월을 말한다 그리 해석합니다. 이천년. 신약시대 이천년, 이천년 동안에 신약 교회. 그래서 신약시대 모든 죄로 인해서 멸망 가운데 있는 모든 하나님 백성들을 신약교회 모든 교회들이 이천년 동안에 구원하는 이런 역사를 두고 말하는 겁니다. 이천년을 주고, 주인에게 주며 말하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들어간 비용, 이 부비라는 것은 투자라기 보다는 그냥 들어가는 돈입니다. 들어가서 없어지는 돈을 말하는데 비용이 더 들면 내가 올때 주겠다 그말은, 예수님 재림이 이천년으로 한정이 될지 아닐지 명확하지 않다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근거해서 주님 재림은 대략 이천년이지만은 이천년이 넘어갈수도 있다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겁니다. 부비가 더 들면 내가 올때에 갚으리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게 강도 만난 자에게 사마리아인이 한 것이고, 원죄와 본죄로 죽은 우리들에게 주님이 베푸신 은혜입니다. 그러고나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러면 이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굽니까? 물을때 강도 만난 자를 말씀하시고, 강도 만난 자를 피해서 도망간 제사장, 레위인은 이웃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이 되지 않고 도망을 쳐버렸으니까 이거는 이웃이 아닐뿐더러, 설교록에 보면은 어떤 의미로 두고 말씀하신 건지 아직 생각을 못했는데 이웃이 아니라는 그 말은 깊은 의미로 들어가면 사람이 아니라는 그런 뜻이라 그럽니다. 이웃이 아니라는 말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까지 들어있다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에 대해서 이웃이 아니고, 이 강도 만난 자가 이웃을 만나서 구원 받았으니까, 그뒤에 이 제사장 레위인을 만났을때에 제사장 레위인은 이 강도 만났다가 구원 받은 이 사람을 얼굴 대할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면 앞에 그냥 넘어간 이 두사람 제사장과 레위인이 얼마든지 강도 만난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 사람들은 안 했습니까? 왜 이 사람들은 강도 만난 자를 구원하지 않고 도망 쳤습니까? 이 사람 구원하는데 사마리아인 보니까 나귀에서 내려야 되고 자기 포도주 기름 발라야 되고 붕대 싸매야 되고 자기 짐승에 태워야 되고 자기 비용 드려야 되니까, 자기 것을 다 내놔야 됩니다. 자기 위해서 쓰려고 마련해둔 자기 것을 내놔야 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평소에는, 저도 말 많이 하지요. 이런 일 만나면 어쩔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는 말 많이 하고 하는데 막상 닥치니까 제 것을 내놓기 싫으니까 도망을 쳐버렸다 그말이지요. 사마리아인은 전부 다 내어놓고 구원하셨고. 그러기 때문에 이 사마리아인으로 비유하신 주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이웃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할 것은 누가 우리 이웃이 되겠느냐 그럴때, 우리는 주님으로 주님만으로 내 이웃을 삼고 주님을 내 이웃 삼고 주님같은 이웃이 되어야 되는데 그런데 주님 같은 이웃이 될 때 만약에 가정으로 말해서 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이 강도만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데, 구원했다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해서 도망치지 아니하고 강도 만난 사람을 구원했다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누구와 같은 사람입니까? 사마리아인 주님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주님 같은 사람이 되면 이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이런 이웃이 된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그런 입장에 당했을때 내가 주님을, 그래서 평소에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없어질때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그럴때 그 불의의 재물로 사귀는 친구는 표면적으로는 죄인들 말하는데 그 내면에 들어가면 주님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 사귀는 것은 주님을 사귀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조롱할 때 뭐라 그랬습니까?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귀실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니까 먹고 마시니까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좋아하는 새리와 죄인들의 친구라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라 그말이지요. 불의의 재물로 친구 사귀는 것은 주님을 사귀는 것이고 이웃을 사귀는 것은 바로 주님을 사귀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내 이웃으로 사귀는 그런 내가 되어야 되고 그리고 내가 주님같은 이웃이 되어야 되겠다 그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 얻는 방법. 그래서 내가 주님을 사귀고 주님 사귀는 방법은 주와 같이 되는 것이고 제사장 레위인처럼 되지 않고 주님처럼 이렇게 이웃이 되는 것이고 그게 주님 사귀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주님 같은 이웃이 되는 것이고 그리 되는 거지요. 이것이 바로 영생 얻는 법이고 이 영생 얻는 법은 성경이 가르치는 전부고 가장 큰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하는 일에 가장 큰 것은 영생인데 인간구원이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구원보다 더 큰 것은 이 지상교회에는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지상교회의 존재 목적은 인간구원이다. 우리들의 목적은 나의 구원과 내게 맡기신 사람의 구원이 내가 이 세상에 사는 유일한 목적이다 그말이지요. 모든 것은 이것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여기서 몇가지 기억을 하고, 사마리아인같은 이런 이웃을, 주님을 이웃으로 사귀고 주님같은 이웃이 되는 이런 우리가 되도록 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순서적으로 내용적으로 기억을 하면서 그 하나하나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의미를, 이치를 하나하나 생각해보십시다.
누가복음 10:25-37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할때 그 질문의 의도가 순수하고 좋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되 순수하게 구원에 소망을 가지고 믿고 따라다닌 그런 사람도 많았지만은 또 다른 의도로 따라다닌 그런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 율법사는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고 교법사라고 이름해서 하나님의 법을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니까 예수님께서 워낙 바르게 잘 가르치시니까 아마 겨루어보고 싶은 그런 마음도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어떤 의도로 예수님을 시험했든 이 사람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이렇게 물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된 내용들이 이것처럼 본인의 그 의도가 불순한 그 의도도 기록되있고 또 사람을 미혹시키는 말도 성경에는 많이 있고 해치는 그런 일도 있고 속이는 말도 있고 별별 말들이 성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와 목적과 또 동기와 그런 요인들에 의해서 기록이 되어있는 그런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도로 어떤 목적으로 어떤 원인에 의해서 기록되었든 일단 성경에 기록된 것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거는 성경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을 해야 됩니다. 성경에 마귀 말이 있습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뱀이 한 말. 그 말은 뱀이 한 말이지만은 하나님께서 기록해놓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그게 분명히 뱀의 말이고 마귀 말이지만은 하나님 말씀이라 그말은 그 뱀의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주신다 그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합니다.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는 말인데, 성경에 그런 것이 있는데 그 내용 역시 그 거짓말한 불순한 의도와 거짓말의 그 내용과 그런 것들이 일단 성경에 기록된 이상 이거는 하나님 말씀이고 성경이고 거기서 우리는 구원의 도리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말입니다. 이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시험하여 물었지만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율법사의 예수님에게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영생 얻는 도리를 여기서 배울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시험해서 묻기를 ‘어떻게 하여야,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면 율법사가 물은 것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었고 예쑤님의 대답은 영생 얻는 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요절이 어딥니까? 신구약 성경의 요절을 말할 때 요한복음 3장 16절, 거기 보면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면 성경에 요절은 영생 얻는 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도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22장에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여전히 역시 율법사가 물을때 예수님께서 여기 말씀하신 그대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전부 다해서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라 이 두가지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말하자면 신구약 성경의 핵심은 사랑이라 그말인데, 그 사랑은 다시 말하면 영생 얻는 법이라 그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 더 캐낼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 얻는 법을 물었고 예수님께서 율법에 기록되어있는데 뭐라고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읽느냐 이거 오전에 말씀드렸지요. 성경에 많은 말씀이 기록되있는데 성경은 절대불변 절대정확무오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진리의 말씀을 자기가 잘못 읽으면 진리 말씀이 자기에게 이단이 되는 그런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여호와의 증인은 불경을 보지 않습니다. 전도관 박태선씨도 불경이라던지 다른 것 보지 않습니다. 성경 봅니다. 성경을 보고 어떤 사람은 천주교로 어떤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어떤 사람은 안식교로 어떤 사람은 또 전도관으로 또 어떤 사람은 무엇으로 그렇게 비끄러져 나가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을 잘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기록된 그대로 바로 읽어야 바른 진리를 찾을 수가 있지 진리는 바로 기록되있는데 자기가 잘못 읽으면 그 말씀은 진리가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진린데,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 진리가 되는거지 아무리 많은 진리가 있어도 찾지 못하면 진리는 되지 못합니다. 잘못 읽으면 구원 도리는 되지 못합니다.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읽느냐’ 할때 이 율법사는 바로 대답을 했습니다. ‘마음, 목숨, 힘, 뜻 다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하라고 하였나이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그러면 바로 기록된 것을 네가 바로 읽고 깨달았다 그말입니다. 율법사는 복있는 사람입니다 여기까지 바로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은 영생하는 법을 가르쳐주신 겁니다. 율법사는 그걸 물었고.
영생 얻는 법을 한말로 말하면 뭐라 그랬습니까? 영생 얻는 법은 한말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게 영생하는 법이다 여기서 하나 우리가 캐낼 수 있는게 영생이 무엇인가? 영생이 뭡니까? 영생이라는 말의 뜻이 글자 그대로 풀면 영원토록 산다 그말이지요. 영원히 산다. 그러면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겁니다. 영원히 사는데 그러면 영원히 산다 그러면 영원토록 숨쉰다, 영원토록 본다, 영원히 듣는다, 영원히 생각한다, 영원히 움직인다 그말이지요. 영원토록 활동한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에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해서 영생하는데 영생하는 그 나라에서 영생하면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영생하는 그 나라에서 영생하는 일은 한말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사랑이다 그말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러면 사랑이란 구원인데, 구원이란 것은 죄 많은 세상 타락한 세상 죄악 세상에서 인간을 구원하는게 구원이지 천국에는 죄도 없고 사망도 없고 타락이 없는데 거기서 무슨 구원인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다. 소망이라 말은 바라보고 나아간다는 것이고, 사랑은 그 소망을 이루는 실제인데 그래서 영원토록 사랑하여 영원히 자라가는 것, 하나님을 영원히 믿고 영원히 하나님 사랑하므로 이웃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히 자라가는게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게 사랑이고 이게 구원이고 천국에서 하는 일이다 그말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마음과 이 정신과 이 사상과 이런 노력을 해보지 않아서 그 심신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런 기능 요소가 없는 사람은 천국가서 아무런 실력도 기술도 기능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표현하자면 밥만 축내는, 밥만 축내는 사람을 이름을 뭐라 그럽니까? 식충이라 그럽니다, 식충. 식충이 돼서 영원토록 그 사람은 천국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할 일이 없는 아무 쓸모없는 그런 사람으로 영원토록 계속되는 겁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참 세상에서도 밥만 축내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면은, 그래서 나이가 많아서 몸이 말을 듣지 않아도 마음으로 일을 하고 영능이 있어서 일을 하면 나이가 많아질수록 귀한 그런 어른이 되어지는데, 젊을때 자기 중심으로 독하게 악하게 자기 고집 자기 주관대로만 살아가지고 그렇게 해놓지 않으면 나이 들면은 주관도 고집도 피울수록 점점 사람은 다 떨어지니까 쓸모없는 사람이 되니 그때는 참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몸에도 냄새 나고, 몸에서 냄새나는 건 씻으면 된다 치는데 그 사람의 인격에서 그의 인격에서 냄새가 나면 사람들 다 도망가고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 생각해볼 수 있는 것,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나님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그게 영생이다’ 그러면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는 일은 사랑이다. 그 사랑이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가는게 사랑이다 그말이지요. 이게 영원한 우리의 할 일인 것을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께서 율법사가 ‘그러면 내가 사랑할 내 이웃이 누굽니까?’ 그럴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해주신 겁니다. 비유에서 첫째, ‘어떤 사람이’ 하고 말씀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이’, 그러면 어떤 사람이라 여기는 어떤 사람이라 그러면,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33절에 보니까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렇게 해놨는데 둘 다 글자는 ‘어떤’이라고 같고 의미가 같은 것 같아도 앞에 어떤 사람이 이거는 특정인을 지칭한 어느 한 사람을 지칭해서 말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중에 한 사람, 그러니까 누구든지 해당될 수 있는 그말이 되는 것이고 어떤 사마리아인 이거는 특정된 한 사람을 가리켜 말한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러면 어느 계층이나 어느 자격의 기준을 두고 말하지 아니하고 그냥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그랬으니까 이 사람은 알 수 있는 것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은 이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 딱 하나 뭘 알 수 있습니까? 이 사람이 남잔지 여잔지 젊은인지 늙은인지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 부잔지 가난한 사람인지 모르겠는데,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할때 이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한가지 뭡니까? 그 사람의 신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한가지를 말한다면요? 이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유대인이다 그말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거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으니까 여기서 이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중에서 어떤 사람을 말했으니까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은 그 사람 나 자신이 어떤 입장 위치 어떻게 되있든지 우리는 전부 한 사람 한사람이 이 사람같이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부다 누구든지 이 사람처럼 이리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 본문에 보면 몇 사람이 나오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나오고 그다음 제사장이 나오고, 레위인이 나오고 사마리아인이 나옵니다. 일단 사마리아인이라 그랬으니까 사람입니다, 여기는. 그럼 네종류의 사람이 나오지요. 어떤 사람,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이렇게 네 사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나오면 누가 더 나옵니까? 한사람 더 찾아보면 누가 나옵니까? 주막 주인이 나오지요. 주막 주인까지 치고 다섯 사람인데 일단 주막 주인은 뒤로 빼놓고, 네 사람이 나오는데 이 네 사람이 우리 모두가 다 이 네 사람이 다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도 될 수 있고 내가 여기 제사장 위치도 될 수 있고 레위인처럼 될수도 있고 사마리아인처럼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전부 이 네 종류의 사람이 우리는 다 해당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거는 이치기 때문에. 그러면 어떤 사람, 나도 강도 만난 사람처럼 이런 형편이 될 수 있다는 것.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만난 것처럼 나도 이리 될 수 있다는 걸 첫째 기억을 하시고, 두 번째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은 오전에 세가지로 말씀드렸는데, 첫째 예루살렘은 무슨 생활입니까? 하나님을 모시고, 두 번째는 말씀 순종으로, 이 두 가지 합한걸 하나님 모시고 말씀 순종으로 사는 생활을 ‘믿음’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모시고 말씀 순종하는 믿음 생활. 이 세가지 생활이 자기 생활에 전부가 되어지는게 예루살렘 생활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성경에 지명으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백성 나라에 수도 중심지를 말하는 것이고 그 예루살렘에 중심은 성전이고 그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고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 섬기는 그 생활이 성전 생활이고 그 성전 생활이 바로 예루살렘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생활은 성전 생활이고 성전 생활은 신앙생활인데 이 신앙생활이 자기 생활에 전부가 되어있는 여기에 모든 가치와 중점 전노력이 여기 기울여진 이 생활을 가리켜서 예루살렘 생활이라 그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믿는 사람이 이 생활에 힘을 쓰는 우리가 되어야 되는데, 그런데 이 예루살렘 생활 안에 모든 게 다 들어있다는 이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이걸 잡지 못하면 그때 그 사람은 여리고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나아만의 여종이 그러한 신분과 그런 형편 속에서도 그 나아만의 여종은 안봐도,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고 우리가 안봐도 성경 전체를 보고 신앙 경험으로 깨달아가지고 생각해보면 나아만의 여종에게는 마음속의 두려움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낙망 낙심이 별로 없었을 것이고 그 속에는 괴로움이나 근심 걱정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은 그 모든 걸 능히 이길 수 있는 그런게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 속에 평안함이 있었고 담대가 있었고 온유가 있었고 감사와 기쁨이 그 속에 충만했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많은 사람과 역사를 해가지고 그 말대로 이루어지게 만들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 여종과 동행을 했다는 뜻이고, 하나님 동행은 하나님 모시고 말씀 순종 믿음으로 거기서 살았다는 말이고 하나님 모시고 말씀 순종하면 믿음으로 사는 거기는 그곳이 적국이던지 감옥이던지 또 어디 잡혀간 깊은 산속 동굴이든지 시골이든지 어디든 상관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니까. 그분 모시고 그분 말씀,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고, 말씀은요? 말씀은 시공에 제한 받습니까? 말씀도 시공을 초월합니다. 믿음은요? 믿음은 시공의 제한을 받습니까? 믿음도 시공을 초월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장소, 어느 형편, 어떤 상황에서도 이 셋은 하나님 모시고 말씀 순종하는 믿음 생활은 어디든지 제재받지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적국이든지 감옥 속이든지 사자굴 속이든지 풀무불 속이든지 감옥 속이든지 전혀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여종은 거기서 그렇게 사니까 마음 속에 근심 걱정 염려 불안 초조 대신에 감사 기쁨 또 소망 이런 걸로 충만하고 자기 맡은 그 일에서 내면으로 하나님과 관계에서 이게 충만하고 그 충만한 그것으로 외부적으로 나타난 자기 책임과 의무 생활을 감당하기에 바쁜 그 생활이 되다 보니까 그는 울 틈도 없고 낙망할 시간도 없고 슬퍼할 시간도 없고 하루 하루 보나 안보나 찬송가를 흥얼 거리면서 그렇게 감사 기쁨으로 그렇게 살아서, 주변 사람들이 보면 ‘뭐가 그리 좋아서 저렇게 흥얼거릴까? 저 여자 아이는 뭐가 저리 좋아서 얼굴에 늘 웃음이 돌까? 온화할까? 늘 여유가 있을까?’ 안봐도 그랬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그 말을 다 들었지요. 이게 믿음으로 사는 생활의 모습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생활의 모습. 그래서 하나님 모시고 말씀 순종하는 믿음 생활, 이 생활은 예루살렘 생활인데 그 안에 예루살렘 그 생활 안에 성공도 또 부요도 존귀도 영광도 승리도 행복도 모든게 그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뜨리고 그것을 벗어나는 그런 것이 둘이 있으니, 예루살렘 생활을 떠나게 되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게 되는 이유 원인이 두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무엇인가? 하나는 아브람이 벧엘에서 점점 남방으로 내려갔다가 애굽까지 내려갔는데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되겠습니까? 아브람이 벧엘에서 점점 남방으로 내려간 것이 바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거는 아브람의 뭐 때문에 그리 됐을까? 또 탕자가 자기 집에서 먼 나라로 간 것도 이 이유입니다. 이거는 뭘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래서 생각해보면 하나는 인간의 연약성. 인간의 연약성. 자기 믿음으로 살면 모든게 다 해결되어지는데 그것을 감당치 못하는 인간의 연약성이라. 연약성도 믿음 부족에서 나오는 거라 볼 수 있겠지요. 그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그 속에 자기 욕심입니다. 허영과 허욕, 호기심, 욕심. 그 두가지가 들어서 믿는 사람의 천국 사람이 되는 예루살렘 생활을 떠나서 여리고로 가게 만든다 그말입니다. 여리고는 하나님이 없는 곳과 마찬가지인, 이미 하나님과 멀어지고 말씀을 떠나고 믿음을 떠나는 그런 생활로 후퇴해서 내려가는 것이 여리고입니다. 여리고로 내려간 생활. 그래서 첫째 ‘어떤 사람이’, 두 번째 ‘예루살렘에서’, 세 번째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순서를 기억하십시다. 그러다가 그다음 네 번째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뭔가? 강도는 구약성경에 불한당이고 이 불한당은 마귀를 나타냈고 이 마귀는 불한당인데, 그러면 이때 강도는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 만났는데 이 강도는 불한당 마귀고, 믿는 사람이 예루살렘 생활하다가 믿음 생활하다가 믿음에서 떠나서 세상으로 점점 들어가면 강도를 만나는데, 마귀 만나는데 이 마귀 만나는 것을 오전에 뭐라고 표현했던가요? 무엇을 만나는 것이라 그랬습니까? 마귀 만나는 것은 미혹을 만나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미혹을. 마귀 만나는 것은 바로 미혹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미혹이라는 것은, 원래 미혹은 다 나쁜 것이고 그거는 손해되는 것이고 자기 절단 내는게 미혹인데, 그 미혹의 외부 껍데기는 미혹하려고 하니까, 잉어를 낚으려면 잉어가 좋아하는 낚싯밥을 걸어놔야 됩니다. 그래야 탁 낚아채지요. 짐승을 잡으려고 덫을 놓을때는, 쥐덫이던지 무슨 덫을 놓으면 그 덫에다가 그것들이 좋아하는, 쥐가 좋아하는거라든지 짐승이 좋아하는 그것을 놔놓고 그러면 그것 먹으려 달려들다가 탈칵 걸려서 발이 절단나든지 목숨이 끊어지는 그게 전부다 미혹인것과 같은 겁니다. 마귀가 우리를 미혹할때는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 내게 꼭 필요한 것 이런 것들을 앞에 걸어놓고 꼬운다 그말이지요.
그러면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으니까, 예루살렘 생활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생활인데 그 속에는 그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그것이 외부적으로 말하면 때로는 환난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들어갔는데 쇠사슬로 손과 발이 다 묶인채로 착고에 채여서 깊은 지하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좋은 겁니까? 좋은 건가요? 감사와 기쁨이 넘칠 일입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 몸이 구속된 상태로 쇠사슬에 손발이 묶여서 자유가 억압된 상태로 깊은 지하 감옥에 묶여 있었는데 사도 바울이 그 속에 뭘 했습니까? 생각을 했지요. 말씀 생각하니까 그 속에서 감사가 넘쳤고 기쁨이 넘쳐서 그게 자기 마음속에 있던 말씀을 생각하므로 인한 감사와 기쁨이 자기 마음에서 차고 넘치고 생각이 차고 넘쳐서 입으로 터져 나온게 찬송이 됐습니다. 찬송이 되니까 그 찬송이 능력이 나와가지고 쇠사슬이 다 풀려버렸지요. 사도바울이 그 깊은 감옥속에 손과 발이 쇠사슬에 묶인 상태로 있는 그게 고통이겠고 아픔이겠고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묶였으니까. 쇠사슬로 묶어놨는데 무겁고 힘들고. 그런데 사도바울은 거기서 조금도 괴롭다 힘들다 아프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고, 괴롭고 힘들고 아프면 찬송이 나옵니까? 그냥 아고 죽겠다 힘든게 나오지요. 그런데 그게 전혀 없고 말씀을 생각하니까 그 말씀 생각이 깊이 들어가니까 그 말씀에서 나오는 감사와 기쁨이 자기 마음을 다 채우고 정신을 다 채우고 몸에까지 채우고 신경세포 다 채우고 입으로 터져나오니까 찬송이 됐고, 그러니 능력이 돼서 그만큼 그 속에 기쁨이 감사가 넘쳤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어서,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들어갔지만은 다니엘은 고통스럽지 않았고, 풀무불 속에 들어가도 고통스럽지 않았고, 그거는 너무 우리와 거리 멀다 쳐도 아마 감옥가는 것 정도는 우리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요즘 감옥은 옛날 감옥보다 달라서 바깥에 험하게 사는 사람보다 감옥 안에 들어있으면 더 좋을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감옥은 감옥인데, 사자굴이니 풀무불은 우리가 너무 거리가 먼 것 같아도 요셉도 따라가기 어렵지만은 감옥 가는 생활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감옥 가는 것이 좋은게 아니잖습니까. 자유가 억압되는 건데, 자유가 없는 생활이 되는데. 그런데 그 요셉이 그 감옥에서 원망했을까, 힘들었을까, 불평했을까, 괴로웠을까, 낙망이 됐을까? 그러면 하나님은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요셉의 감옥 생활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생활이었습니다. 할 말은 하고 했지만은. 그러니까 예루살렘 생활이 천국 생활이라. 그 속에 모든게 다 있다는 것은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의 물질적인 기준으로 봐서는 안된다 그말입니다. 믿는 사람의 성공과 행복은 다른 차원입니다. 어쨌든 그 속에 다 있는데, 그런데 사람이 연약해서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니면 외부적인 그런게 너무 힘들어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로 내려갈 수 있고, 또 사람이 가다보면은 욕심이 들어와서 또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리갈 때 가다보면은 이거는 거의 절대 반드시, 강도 만난 이거는, 이 사람 여기 비유는 우연인 것처럼 되어있으나 우연이 아니고 이거는 필연이고 절대라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로 내려가면 강도 마귀 만나는 것은 반드시고 필연입니다. 그리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강도 마귀는 그 사람이 떠나서 내려간 이유가 있지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간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과 이유에 딱 맞는 것을 그앞에 나타내 보여준다 그말입니다. 네가 돈 때문에 떠났지? 돈 여기 있다. 직장 때문에 떠났지? 직장 여기 있다. 사람 때문에 떠났지? 사람 여기 있다. 그 사람이 원하는 예루살렘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그 원인과 이유, 목적을 딱 들고 내놓으니까 백퍼센트 다 넘어가는데 그 넘어가는 것이 뭐냐? 강도들이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옷이란 것은 그 사람이 입고 있는 건데, 옷이란 것은 두 가지 역할 하지요. 하나는 그 사람을 꾸며주는 것이고 하나는 그 사람을 보호하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 사람 입고 있는 옷, 예루살렘에 살았으니까 믿음 생활 했으니까 믿음도 있겠고 진실도 있겠고 거룩도 있겠고 성결도 있겠고 사죄도 칭의도 화친도 있겠고 소망도 있겠고 이런 것이 있었는데, 거기를 떠나서 여리고로 가다 강도 만나니까 이 강도 마귀한테 미혹되고 보니까 그만 사죄도 빼앗겨 버리고 의도 빼앗겨 버리고 하나님과 화친도 빼앗겨 버리고 소망도 뺏겨 버리고 진실도 뺏겨 버리고 성결도 뺏겨 버리고 입고 있던 좋은 천국에 속한 옷을 다 빼앗겨 버립니다. 마귀가 다 벗겨 버리고 그리고 두드려패서, 패는 것은 마태복음 24장에 보면은, 악한 종이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그 동무들을 어떻게 한다고요? 동무들을 때리며 술 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때린다 말은 주먹으로 그 사람의 몸을 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신앙을 친다 그말입니다. 그 사람의 새사람을 때리는 겁니다. 영적으로, 신령적으로. 그러니까 마귀가 믿는 사람을 때리는 것은 눈으로 자꾸 보여지면, 뱀이 하와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결코 죽지 않으리라 그런 하와의 지식을 자꾸 때리는 겁니다. 두드려 맞으니까 자꾸 정신이 혼미해지니까 나중에 제정신을 못 차리니까 갈피를 못잡고 넘어갈 수 밖에 없는 거지요. 그 사람의 정신을, 생각을, 신앙 사상을, 양심을, 그의 모든 옳은 행동이 하는 몸의 모든 힘을 자꾸 말로 때리고 눈에 보여줌으로 때리고 또 만나게 해서 때리고 그렇게 때리니까 그렇게 맞으면 나중에 많이 맞으면 이 사람은 많이 맞아가지고 거반, 거반 죽게 되었다 그말은 거의 그만 죽게 되어서 맞아가지고 자력으로는 일어설 수 없는, 살아날 수 없는 자력회생이 불가능한 상태까지 만들어놓고야 마귀가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드려맞은 이 사람은 뭐가 이렇게 죽을 지경이 됐다고요? 이 사람의 새사람이. 새사람이 두드려맞아서 죽을 지경이 되어서 믿는 사람이 예루살렘 떠나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마귀 만나서 옷 빼앗기고 맞으면 이런 지경이 되어서 거반 죽을 지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눈도 뜨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새사람은 완전히 숨만 겨우 붙어있는, 꼴막꼴막한 그런 상태가 되니까 마귀가 버려두고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될 때, 많은 믿는 사람들이, 우리도 그리 될 수 있는데 그래도 좀 정상적으로 믿는 사람들 같으면 그렇게까지 안되는데 좀 많이 나가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도 자기가 맞아가지고 ‘내가 지금 옷을 다 빼앗겼다’ ‘두드려 맞았다’ ‘내가 숨도 못 쉴 지경이 되었다’고 그렇게 느끼지도 못하고 그 상황이 되어서도 좋다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그런 성도들이 세상에는 너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다 그말이지요. 그 사람은 그렇게 되면은 희망이 없지요. 어렵습니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강도 만난 자와 같이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늘 기억을 하고 살아야 됩니다. 이렇게 되었는데, 이제 그때 또 다시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피해서 도망간 거지요. 그러면 제사장이 피해서 지나간 겁니다. 이때 제사장은 종교와 정치를 겸한 정교일치의 지도자입니다. 맞습니까, 이때? 이때는 로마 식민지였고, 지금 유대 이스라엘 나라는 그뒤에 분리가 됐지만은 지금도 아랍 국가들은 종교가 바로 정치고 다 하나가 되어있지요. 그래서 그 종교 전쟁 다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런데 이때 유대 나라는 정치하고 종교가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이때 헤롯이 있었지만은 실질적으로 보면은 그 헤롯이란 사람 그런 사람들은 그 총독들은 로마의 앞잡이고 유대인들을 다스린 사람들은 그 제사장 이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같이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그런 때이기 때문에 제사장이 있고 대제사장이 있고 그리 있지만은 어쨌든 제사장이라 그러면 상당히 높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높은 사람이고, 높다는 그말은 그 사람이 높다는 그말은, 사람이 직책을 가질때는, 검사라 그러면 내가 검사인데 그러면 검사를 함부로 사람이 건드릴 수 없는 것은, 검사라는 사람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은 그 검사라는 사람때문이 아니고 그 검사뒤에는 검사라는 그 정부조직이 있고 그 검사를 보호하는 법이 있고 조직이 있고 체계 그게 다 짜여져있기 때문에 그 사람 나라에 법 조직하고 다 연결된 것이 바로 그 직책이란 겁니다. 그 사람이 검사였다가 검사에서 똑 떨어져 나오면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그 사람은. 전직 검사라하면 과거 영향이나 인맥이 있으니까 좀 영향을 미쳐도 일단 떨어져나오면 검사는 아니기 때문에 정부 조직이나 행정, 그런 권력과는 상관 없는 사람이 되는데 현직 검사라 그러면 검사를 보호하는 그 검사에 받은 법적인 권한이 있기 때문에 막강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국회의원이 되면은 나라의 국회 의원을 준 그런 특권이 있으니까 굉장한 사람이 되는데 그 사람이 국회의원 낙선하면 별 볼일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사람이 제사장인데, 종교와 정치가 하나된 그런 나라에서 제사장이면 상당히 높은 사람이고, 이 사람 뒤에는 유대나라의 법과 행정체계와 조직이 다 연결되어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당히 실력도 있고 덕망도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죽어가는 사람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말이지요. 길거리에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마음 먹으면 치료하고 살려낼 수 있는 위치도 있고 실력도 있고 힘도 있고 다 있는 사람인데 지나갔습니다. 두 번째 레위인은 제사장만큼 아니더라도 그래도 하나님의 법을 많이 아는 사람이고 봉사, 원래 레위지파는 성전을 주로 섬기는 그 일이 레위지파의 본직무이기때문에 봉사 희생이 그들의 주업무입니다. 그러니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게 그들의 주임무나 마찬가지인데 이 사람도 보고 지나가버렸다 그말이지요. 그러면 제사장도 레위인도 강도 만나 상해서 죽어가는 그 사람을 구원해야될 그런 책임도 있고 의무도 있고 위치도 있고 할수도 있는데 못한 것이 아니고 안 한 겁니다. 구원하지 않은 겁니다. 이유는 뭘까? 자기도 강도 만날까싶어서. 얼른 피해서 도망 갔습니다. 두 사람 다 그리 갔습니다. 그다음 세 번재, 사마리아인은 이 쓰러져 있는 사람과 전혀 상관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거리가 더 먼 원수같은 관계에 있는 사람이 사마리아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구주였지만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기를 나사렛 괴수라 그래서 못 박아 죽였고, 결국 못을 박아서 원수처럼 못박아 죽였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 배타고 풍랑만나서 죽을 지경이 됐을때 예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을 구원하러 오시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불렀습니까? 놀라서 물귀신이라고, 유령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원하러 오시는 구주를 유령으로 봤습니다. 이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사마리아인은 자기 남은 명줄을 끊으러 오는 원수처럼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그런 관계다 그말입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루살렘 생활하던 사람이 연약해서, 욕심 때문에, 타락해서 탈선해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마귀 미혹받아가지고 새사람이 완전히 죽을 지경이 된 그 상태에서 주님이 그를 구원하러 갈때는 누구를 보내느냐? 하나님께서 그 사람 구원하러갈때는 외부적으로 하나님의 종을, 목사님 보내든 조사님 보내든 장로님이든 집사님이든 선생님이든 보내고 그 보낼때는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보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강도 만나서 새사람이 다 죽어진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면 그 말씀은 자기 명줄을 끊는 것 같은 그런 말씀으로 그에게 들려진다 그말이지요. 정반대로 그렇게 느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 사람이 새사람이 강건하면 안그런데, 새사람은 다 죽어가고 옛사람으로 강하니까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어쨌든 이 사람은 자기 힘이 없으니까 어찌 할 수 없고, 그래서 자기 힘으로 살아나지 못하니까 이 사마리아인이 가서 구원했습니다. 가서 그를 보고,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갔습니다’. 여기서 하나 기록안되있어도 뒤에 가서 보니까 이 사마리아인이 자기 짐승에 태웠으니까 이 사마리아인은 길 갈 때 짐승을 타고 가습니다. 말이든 나귀든 타고 가다가 나귀에서 내렸습니다. 나귀에서 내려서 가까이 갔습니다.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보좌에서 내려왔습니다. 낮아졌고 가난해졌고 멸시천대 받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으로 낮아지신 겁니다. 내려와서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가까이 오셔서. 첫째, 내려와서 가까이 가서. 두 번째,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부었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는데 기름은 성령을 말하고, 성령의 감화 감동의 역사. 포도주는 보혈을 말하는데 이 기름도 포도주도 이거는 이 사마리아인 자기에게 있는, 자기 위한 자기 것입니다. 기름도 사마리아인 자기 위해 쓸 것이고 포도주도 자기 위해 쓸 것인데 자기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부었습니다. 그러면 마귀 만나가지고 마귀한테 옷 빼앗기고 두드려맞아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원죄와 본죄로 죽어있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놓고 낮아지셔서, 나귀에서 내려서 가까이 오셔서, 두 번째 기름과 포도주인데 순서를 바꾸면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포도주는 주님의 보혈입니다. 대속의 피로 그 모든 죄를 다 씻어서 사죄, 칭의, 화친, 소망 입혀주시고 그다음 기름을 또 거기 부어서, 기름이란 것은 상처에 기름 붓는 것은, 포도주는 소독하는 그런 역할하는 것일 것이고, 기름은 그 상처를 부드럽게하는 그런 것이라 그럽니다. 그러면 기름은 성령의 역사니까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서 보혈의 공로를 입히시고 그다음 성령의 역사로 그 사람을 감화 감동을 시켜서, 그러면 피와 성령과 진리는 다 하나니까 여기 다 기록되어있지않아도 진리와 성령으로 그 사람을 감화 감동을 시켜서 그리고 상처에 붓고 싸매고, 싸매는 것은 말하자면 붕대로 싸매었겠지요. 병균이 들어가지 못하게, 감염되지 않도록, 소독해놓고 부드럽게 만들어놓고 감염되지 않도록 싸맸으니까 이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는, 그 사람을 지킨다 그말이지요. 여기까지는 그 사람이 할 수 없는 겁니다. 할 수 없는 걸 지금 사마리아인이 해준 겁니다. 그를 불쌍히 여겨 나귀에서 내려서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서 소독하고 부드럽게 만들고, 대속의 핏공로 입혀서 그사람 죄를 다 씻어내고 성령으로 감화감동 시켜서 그 사람을 부드럽게 감화시키고, 그리고 네 번째 붕대로 싸서 그 사람을 이제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에게, 이 능력은 약속입니다 아직까지. 그 사람에게 그 사람 지켜 보호하시겠다는 능력의 약속을 주시고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웠습니다. 사마리아 자기가 탔던,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앉았던 그 자리에 당신이 내려오시니까 우리를 그 자리에 앉힙니다. 그래서 주님이 낮아지시므로 우리가 높아지게 됐고, 주님이 가난해지시므로 우리가 부유하게 됐고, 주님이 고난 받으시므로 우리가 평안하게 되어진 이 인간의 본지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게 소망이지요 전부. 본지위 회복시켜주신 이 소망을 주시고, 그러면 몇 가지 입니까? 첫째, 나귀에서 내려서 가까이 갔습니다. 도성인신 하셔서 오셨습니다. 두 번째, 포도주를 씻었습니다. 대속의 피로 모든 죄를 씻어냈습니다. 세 번째, 기름을 부었습니다. 성령으로 감화감동시켜 그 사람을 감화감동 시켰습니다. 네 번째, 상처를 싸맸습니다. 균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로 그 사람을 지킨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다섯 번째, 그리고 그 사람을 짐승에 태웠는데 자기 탔던 짐승, 본지위입니다. 타락전에 하나님의 아들의 본지위에 앉히고, 소망입니다. 본지위의 소망을 주시고 그리고 여섯 번째로 주막으로 데려갔습니다. 주막은 지상교회를 말하는 것이고 이 지상교회 주막에 데려가서 거기서 돌보아주고 이땅에 있는 교회에서 돌보아주고, 그러면 교회라는 곳은 뭐하는 곳인가? 교회라는 곳은 이런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이렇게 마귀의 미혹을 받아서 옷 뺏기고 두드려맞고 죽어가는 이런 사람들을 살려서 구원하는 주막같은 곳이 교회다 그말이지요. 주막이 뭐하는 곳입니까?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주막은 뭐하는 곳입니까? 성경에 주막이 나오고 교회에서 주막을 말하니까 어쩐지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주막이란 곳은 술 파는 곳이 주막입니다, 술. 술이란 것은, 여기 술은 주막은 포도주를 말하는 것이고 이 포도주는, 성경에 포도주는 뭘 말합니까? 포도주는 예수님의 대속도 말하고 앞에 사마리아인이 가진 포도주로 씻은 것은 예수님의 보혈이고, 주막에서 파는 포도주는 교훈을 말합니다, 교훈. 하나님 말씀. 교훈을 가지고 말씀을 가르쳐 사람을 기른다 그말이지요. 씻어가지고 능력의 보호를 입고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교회가 길러준다, 교회에 부탁을 하고 갔고. 하면서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데나리온 둘은 이천년의 세월을 말한다 그리 해석합니다. 이천년. 신약시대 이천년, 이천년 동안에 신약 교회. 그래서 신약시대 모든 죄로 인해서 멸망 가운데 있는 모든 하나님 백성들을 신약교회 모든 교회들이 이천년 동안에 구원하는 이런 역사를 두고 말하는 겁니다. 이천년을 주고, 주인에게 주며 말하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들어간 비용, 이 부비라는 것은 투자라기 보다는 그냥 들어가는 돈입니다. 들어가서 없어지는 돈을 말하는데 비용이 더 들면 내가 올때 주겠다 그말은, 예수님 재림이 이천년으로 한정이 될지 아닐지 명확하지 않다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근거해서 주님 재림은 대략 이천년이지만은 이천년이 넘어갈수도 있다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겁니다. 부비가 더 들면 내가 올때에 갚으리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게 강도 만난 자에게 사마리아인이 한 것이고, 원죄와 본죄로 죽은 우리들에게 주님이 베푸신 은혜입니다. 그러고나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러면 이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굽니까? 물을때 강도 만난 자를 말씀하시고, 강도 만난 자를 피해서 도망간 제사장, 레위인은 이웃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이 되지 않고 도망을 쳐버렸으니까 이거는 이웃이 아닐뿐더러, 설교록에 보면은 어떤 의미로 두고 말씀하신 건지 아직 생각을 못했는데 이웃이 아니라는 그 말은 깊은 의미로 들어가면 사람이 아니라는 그런 뜻이라 그럽니다. 이웃이 아니라는 말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까지 들어있다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에 대해서 이웃이 아니고, 이 강도 만난 자가 이웃을 만나서 구원 받았으니까, 그뒤에 이 제사장 레위인을 만났을때에 제사장 레위인은 이 강도 만났다가 구원 받은 이 사람을 얼굴 대할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면 앞에 그냥 넘어간 이 두사람 제사장과 레위인이 얼마든지 강도 만난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 사람들은 안 했습니까? 왜 이 사람들은 강도 만난 자를 구원하지 않고 도망 쳤습니까? 이 사람 구원하는데 사마리아인 보니까 나귀에서 내려야 되고 자기 포도주 기름 발라야 되고 붕대 싸매야 되고 자기 짐승에 태워야 되고 자기 비용 드려야 되니까, 자기 것을 다 내놔야 됩니다. 자기 위해서 쓰려고 마련해둔 자기 것을 내놔야 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평소에는, 저도 말 많이 하지요. 이런 일 만나면 어쩔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는 말 많이 하고 하는데 막상 닥치니까 제 것을 내놓기 싫으니까 도망을 쳐버렸다 그말이지요. 사마리아인은 전부 다 내어놓고 구원하셨고. 그러기 때문에 이 사마리아인으로 비유하신 주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이웃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할 것은 누가 우리 이웃이 되겠느냐 그럴때, 우리는 주님으로 주님만으로 내 이웃을 삼고 주님을 내 이웃 삼고 주님같은 이웃이 되어야 되는데 그런데 주님 같은 이웃이 될 때 만약에 가정으로 말해서 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이 강도만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데, 구원했다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해서 도망치지 아니하고 강도 만난 사람을 구원했다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누구와 같은 사람입니까? 사마리아인 주님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주님 같은 사람이 되면 이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이런 이웃이 된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그런 입장에 당했을때 내가 주님을, 그래서 평소에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없어질때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그럴때 그 불의의 재물로 사귀는 친구는 표면적으로는 죄인들 말하는데 그 내면에 들어가면 주님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 사귀는 것은 주님을 사귀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조롱할 때 뭐라 그랬습니까?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귀실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니까 먹고 마시니까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좋아하는 새리와 죄인들의 친구라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라 그말이지요. 불의의 재물로 친구 사귀는 것은 주님을 사귀는 것이고 이웃을 사귀는 것은 바로 주님을 사귀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내 이웃으로 사귀는 그런 내가 되어야 되고 그리고 내가 주님같은 이웃이 되어야 되겠다 그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 얻는 방법. 그래서 내가 주님을 사귀고 주님 사귀는 방법은 주와 같이 되는 것이고 제사장 레위인처럼 되지 않고 주님처럼 이렇게 이웃이 되는 것이고 그게 주님 사귀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주님 같은 이웃이 되는 것이고 그리 되는 거지요. 이것이 바로 영생 얻는 법이고 이 영생 얻는 법은 성경이 가르치는 전부고 가장 큰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하는 일에 가장 큰 것은 영생인데 인간구원이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구원보다 더 큰 것은 이 지상교회에는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지상교회의 존재 목적은 인간구원이다. 우리들의 목적은 나의 구원과 내게 맡기신 사람의 구원이 내가 이 세상에 사는 유일한 목적이다 그말이지요. 모든 것은 이것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여기서 몇가지 기억을 하고, 사마리아인같은 이런 이웃을, 주님을 이웃으로 사귀고 주님같은 이웃이 되는 이런 우리가 되도록 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순서적으로 내용적으로 기억을 하면서 그 하나하나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의미를, 이치를 하나하나 생각해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