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1-주후(계2:8-11)
서머나교회의 5대관2014-09-01조회 293추천 25
본문: 요한계시록 2장 8절-11절(요약/2014.08.31.주일)
제목: 서머나교회의 5대관
1. 오전 복습
2.. 서머나교회 5대관
1)시간관(시간을 어떻게 보느냐?)
- 시간은 세월, 생애를 말하는 것
- 인생의 생애는 전부 시간, 세월 속에서(먹고 입고 자고 일하고 공부하고...)
- 시간은 현재와 영원이 있으니
- 현재는 잠깐, 지나가는 시간, 영원한 시간은 영원무궁
- 이것이 주님의 시간관, 시간관에 따라 달라지는 생애, 그에 따른 영원한 결과
2)생사관(삶과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
- 모든 사람은 사나 죽을 것이요, 죽으나 살 것이니
- 일시적인 삶과 영원한 삶, 일시적인 죽음과 영원한 죽음이 있으니
- 일시적인 생으로 영원한 사를 마련하며
- 어차피 죽을 죽음으로 영원한 생을 마련할 수 있으니
- 세상 말(필사즉생, 필생즉사-죽기를 각오하면 반드시 살고...)
- 살기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버리고 영원한 사망을 취할 것인가?
- 영원한 사망을 피하고 영생을 위하여 어차피 죽을 죽음을 취할 것인가?
3)고락관(고와 낙을 어떻게 보느냐?)
- 무엇이 고며 무엇이 낙인가?
- 이제 받는 고난과 장차 얻을 영광을 족히 비교할 수 없다
-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니
- 웃음을 울음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약4:)
- 세상 낙이 낙인가? 영원한 고인가? 지금의 고가 영원한 낙이 된다면?
4)빈부관(가난과 부요를 어떻게 보느냐?)
- 세상 빈부와 영원한 빈부, 일시적인 빈부와 영원한 빈부
- 라오디게아교회(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 홍포 입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볼 때
- 믿음으로, 말씀 순종으로 가난함이 가난함인가?
- 믿음 떠나, 말씀 떠나 부요함이 부요함인가?
5)교회관(교회를 어떻게 보느냐?)
- 자칭 유대인: 구원받은 백성,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가 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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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설교)
오전에 지식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람의 양심은 인적 요소 중에서 가장 밝은 것이고 또 힘 있는 것이 양심이라서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과 자기 모든 전생활과 최종에는 생명까지도 끌고 갈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사람의 양심입니다. 우리가 평소 생활을 깊이 생각지 아니하고 그냥 사니까 그런 걸 잘 못 느껴 그러하지 가만히 배운 말씀을 가지고 이치를 따져 생각해보면 그러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은 양심대로 살게 되어있고 양심에 어긋나면 사람은 뭘 해도 자신감이 없어지고 힘이 없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도둑질을 하고 나면 사람이 모든 생활에 언행심사에 자신감이 없고 더듬거리게 되고 주저하게 되고 어두움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다 이유가 있는 말들입니다. 도둑질하고 나면 나쁜 짓을 하고 나면 꼭 도둑질이 아니더라도 도덕적으로 인간관계적으로 공연히 다른 사람 함께 관계를 가지며 지내는 그 사람을 하나 두고 표나지 않게 자기 마음속으로만 그 사람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을 한번 해도 그 사람을 만나면 뭔가 좀 주저되게 되고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미안한 그런 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에게 양심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양심이 있으면 또 양심이 밝으면 그만큼 그 사람의 지식의 범위안에서는 옳은 걸 찾고 바른 걸 찾고 밝은 것을 찾아 갈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양심을 늘 매장하지 말고 또 두 번째 뭡니까? 양심을 매장하지 말고 제일 처음에 양심을 매장하는 거지요. 매장하지 말고, 두 번째는? 양심을, 아니지요. 제일 처음에 양심에 주인을 만들지 말고, 두 번째는 양심을 죽이지 말고 세 번째가 양심을 매장하지 말고 네 번째는 양심을 북돋우고 다섯 번째 기르고. 그래서 이렇게 다섯가지 면으로 힘을 써서 우리 양심을 강하고 장성한 양심을 만들어서 그 양심이 자기 모든 말과 생각과 행동과 모든 생활을 주장하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그런데 거기까지만 알고나면 대단히 위험하게 되는 것이 그동안에 여러번 우리가 배웠고 말씀드린대로 양심이란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좋은 것이지만은 이게 독립적인 또 자립적인 그런 요소가 되지 못하고 반드시 그 위에 머리를 둬야 되고 그 머리를 인도자를 따라가야 되는 피동적인 이런 존재가 되다 보니까 머리를 잘못 두고, 능동체를 잘못 두면 큰 문제가 되어져서 그래서 양심은 지식의 인도를 지배를 받고 따라가는 것이 되니까 지식은 양심의 인도자며 머리다 그말이지요. 자동차로 말하면, 양심이 자동차면 지식은 뭐가 됩니까, 비유로 하자면? 핸들이 됩니까? 운전대 돌리는대로 양심이 가게 되니까. 그래서 지식이 양심을 선택하는 것보다 양심을 가꾸고 기른든 것보다 더 먼저 선행되어야 될 일이 지식 선택이고 지식을 바로 배워서 가지는 일이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오전에 지식에 대해서 몇가지 생각해봤는데, 그러면 지식이란 무엇인가? 지식은 쉽게 간단하게 말하면 안다는 말입니다. 안다. 같이 한번 해보시겠습니다. 지식은 안다는 말. 안다는 그말은 이미 나와있는 것을 안다 그말입니다. 이거는 콩이다 이거는 팥이다, 이거는 무화가다 이거는 감이다, 이거는 청포도다 이거는 머루포도다, 이거는 무슨 포도다 이거는 사과다 머릿속에 교육관에 있는 과일이 얼른 생각나서 몇가지 짚어봤습니다. 이거는 풀이다 이거는 곡식이다, 잔디를 처음에 심어보면 잔디하고 잡초가 있는데 아는 사람 눈에는 잔디와 잡초가 대반에 눈에 딱 들어옵니다. 그런데 처음에 잔디를 딱 심어서 잡초를 뽑아내려 그러니까 어느 것이 잡초인지, 어느 것이 잔디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됩니다. 모르니까. 그런데 몇 번 해보면, 가만히 살펴보면은 ‘아 이거는 잡초고 이거는 잔디다.’ 알게 되어집니다. 그런게 전부다 아는 겁니다. 그래서 지식이라 그러면 크게 말하면 지식은 하나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 존재라 말 다 아시지요? 존재의 뜻이 뭡니까? 존재는 뭔가가 있다 그말입니다. 존재를 또 크게 나누면 가견적인 형체를 가진 가견적인 존재가 있고 형체가 없는 불가견적인 존재가 있고 그리 볼 수 있겠지요. 그러면 존재란 것은 있다는 뜻이고 그 나와있는 하나님이 만들어내신 것, 또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두신 존재를 통하여 재생산을 통해서 만들어내신 것, 가공 통해서 만들어내시는 것, 또 서로 서로 연결시켜 합해서 썩어서 만들어내시는 것, 자연적인 것 인공적인 것, 별에 별 종류의 존재가 나와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존재 숫자를 헤아리려 그러면 헬 수 없을만큼 종류도 많고 수도 많아서 물질계기 때문에 무한이라 말까지는 못해도 무한에 가까울만큼 수많은 종류가 있고 그 수많은 종류를 전부 하나하나 아는 것을 가리켜 지식이라 그리 말을 합니다. 자 우리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생까지 물어볼까요? 제비가 뭔지 아는 사람, 제비? 저 000 제비 알아요? 봤어, 봤어요? 00이 제비 압니까? 봤어요? 요즘 제비가 잘 없지요. 제비정도는 그래도 아는구나. 안보면 모르지요. 새종류 중에서도 저거는 비둘기다 저거는 꿩이다, 저거는 제비다 저거는 참새다, 무슨 새다, 새 종류만 해도 수도 없이 많고 동물 종류만 해도 수도 없이 많고 곤충의 종류는 더 많을 것이고 바닷속에 어류들의 종류는 우리가 들어가보지 못하니까 더 많을 것이고, 생물과 무생물과 또 미생물과 온갖 종류의 그런 것들 종류가 수도없이 많은데 그거 하나하나 전부다가 지식입니다. 아는 것이. 그것에 대한 뭔가가 있다는 그말입니다. 돌맹이는 뭐냐? 이거는 돌이다. 돌이란 것은 단단하다. 돌은 단단하니까 깨진다. 돌은 철하고 돌이 부딪히면 철은 강하면서도 질기니까 철은 돌을 이기고, 돌은 철을 만나면 강하게 부딪히면 깨진다, 깨지면 가루가 되어진다. 이게 전부 뭡니까? 돌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런 걸 다 알아가지고 모래는 많은데 모래는 자잔한 돌맹이들이 다 부서진, 예를 들면 알갱이가 좀 다를 수 있겠지만은 어쨌든 모래다. 그 모래는 전부 하나하나가 자기들ㄲ리 뭉쳐지지 않아서 따로 논다. 그러기 때문에 모래와 진흙은 용도가 다르다. 진흙은 입자가루가 더 미세하니까 이거는 뭉치면 단단해진다. 그런데 모래는 뭉쳐지지를 않는다. 그런데 시멘트에다가 진흙을 섞으면 안되지요. 시멘트에 진흙 섞으면 시멘트가 무슨 화학작용 이런 것 때문에 안되는데 시멘트에 모래를 섞으면 모래가 시멘트 작용 때문에 단단하게 되어, 적당히 섞으면 단단해지게 된다. 모래 안 섞으면 시멘트만 섞으면 갈라지기 쉬운데 적당한 비율로 섞으면 모래가 단단하게 되어진다. 이런게 전부다 모래 하나하나 그래서 하나님이 만들어내놓으신 자연적인 존재와 그 자연적인 존재를 사람들이 그 존재에 본성본질 이런걸 알아가지고 사람들이 응용을 해서 만들어낸다 그말이지요. 사람들이 먹는, 몸 아플때 먹는 약에 거의 대부분이 어디서 나옵니까? 이거는 의학전문의가 아니라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그냥 보통 일반 아는 상식으로 우리들이 먹는 약의 거의 대부분은 어디서 나옵니까? 거의 다 나무뿌리, 풀뿌리, 나무 열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거기서 다 뽑아가지고 또 화학 약품 같은 것 섞어서 전부다 만들어내는 것이 거의 대개 약들이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나와있는 것을 사람들이 연구해서 알아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응용을 하고 적용을 하고 써먹는 그게 전부 지식의 결과다 그리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지식이라 말은 간단하게 말하면 만사물에 대한 것을 아는 것이 지식입니다. 나와있는 존재, 그 존재들의 작용, 이런걸 아는게 지식이고 그 지식이 오늘까지 이 세상을 발전 발달시켜서 오늘 21세기 세계를 만들어내게 된 겁니다. 그래서 지식이란 것은 과거와 현재까지 이미 나와있는 만사물에 존재와 그 모든 존재들의 작용을 아는 것이 지식이다. 그러니까 지식이 많다 말은 많이 안다는 말이고 많이 안다는 말은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세상에 있는 만사물에 대한 것을 많이 안다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몸을 잘 모르지요. 그런데 사람의 몸을 옛날에는 사람의 몸에다가 칼을 대면 난리가 났습니다. 맞아 죽을 죕니다. 그런데 몸에 병이 났는데, 속에 병이 났는데 사람 몸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봐야 알겠는데 유교, 도덕 이런 문제 때문에 사람 죽은 몸도 손을 못 데게 하니까, 난리가 나니까 안데는데 그래도 의술에 욕심이 많고 사람을 육적으로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이 기어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산 사람은 못하지만은 죽은 사람 속을 갈라봐야 되겠다 그래가지고 한번 갈라보니까 사람 속에 내장이 어떻게 생겼고 혈관은 어떻게 생겼고 뼈는 몇 개고 어떻게 생겼고 이런 걸 다 알게 되잖습니까. 그러데 지금은 뭐 앞전 사람들이 해부를 다 해가지고 다 알려놓으니까 굳이 안 열어봐도 아는데, 그래도 실제 자기가 알려면 열어봐야 되니까 의대생들에게 이제 막 죽은 사람의 시신은 굉장한 보물이라 그러지요. 쉽게 만져볼 수 없는. 어쨌든 의대를 졸업한 사람 의사 되려면 적어도 사람의 시신 몇 번은 해부를 해봐야 의사가 되지 안그러면 아마 안 될 겁니다. 그래가지고 사람의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자세하게 알고 그다음 그 몸에 각각의 지체의 그 기능 작용들이 어떤 기능을 하며 어떻게 해서 부작용이 생겨지고 병이 생겨지는 것을 알고, 거기 있는 어떤 물질을 거기 들어가면 그 균이 퇴치가 되어지고 치료 된다는 것을 알고. 이런 것 다 알고나면 그다음에는 의사가 되고 박사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사람 몸을 알고 약초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길거리 약초가들 산에 가면 약초가 지천에 열려 있다고 그러지요. 우리는 가면은 나무 밖에 없고 풀 밖에 없는 잡초 밖에 안 보이는데 그 약초에 밝은 약초꾼들은 아무 산에만 가도 거기 약초가 꽉 찼답니다, 온 전신에. 그러니까 그런게 전부다 하나의 지식이다 그말입니다.
지식이란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이미 나와있는 과거부터 오늘까지 나와있는 만 사물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것이 지식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에, 거기 또 설명하면 많겠지만은 그 지식의 근본을 파고 들어가보면 지식이란 것은 어디서 생겨졌는가? 지식은 안 믿는 사람들 성경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진화론적인 말에 의하면 지식은 어디서 생겨진 겁니까? 지식이란 것은, 지식이라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지식은 곧 이치라는 것이고 원리라는 거지요, 지식은. 맞습니까? 지식은 이치고 원리다. 우리 저, 000씨 맞아요? 지식은 원리고 이치다. 그냥 고개 끄덕이지 말고 생각 한번 해보면? 지식은 원리고 이치다. 우리 000 샘 어떻습니까? 지식은 곧 원리며 이치다. 안다는 것은 그 존재 자체를 아는 것도 있지만은 그 존재에 대한 내면을 아는 것이니까 그 내면은 들어가보면 전부다 원리고 이치다 그말이지요. 그런데 진화론적인 그런 주장으로 말하면 지식은 어떻게 생겨진 겁니까? 모든 지식은 다 저절로 생겨졌다. 모든 이치와 원리는 저절로 생겨졌다. 그리고 저절로 생겨진 그 모든 우주 안에 그 중에서 사람이 중심된 지구 안에서, 지구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 그 모든 존재들의 작용들을 그것들이 어찌 하다 보니까 그리 되어졌는데 오랜 세월속에 그런 것들 중에 하나가 어떻게 어떻게 변해갖고 인간이 되가지고 사람이 되가지고 그다음 사람이 이 세상을 살펴보니까 여러 가지가 다 들어있어서 하나씩 둘씩 발견하고 찾아내서 이제 구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적립 시켜놓은게 지식이다. 그러면 저절로 생겨진 그런 것들을 사람이 찾아낸거니까 그리 되면은 사람의 지식보다 더 늦게 나온, 결론을 그렇습니다만은 그런게 되겠네요. 그렇게 되어지겠고. 그래도 인간 없는 이 세상의 지식은 아무 의미가 없고 쓸모가 없는거니까, 이렇게 논리로 따져 들어가보면, 논리로 따져 들어가보면 진화론이라는 그 내막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은 대략 들어본 데 의하면 진화론이란 것은 하나하나 실제 논리로 따져 들어가보면 말이 안될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못 믿으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니까 창조라는 것을 말은 들었지만은 그럴 리가 있나, 그럴 수가 있나 그런 존재가 있을 리가 있겠나라는 그런 인간의 상식과 인간의 기존 지식이 창조주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해서 부정을 하다보니까 실제 근본 실상에 주인을 부정하니까 다른데서 궁극을 해결해보려하니까 아무리 찾아도 답을 두고 답이 없는데서 답을 찾으니까 답이 안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말입니다. 답이 안나오지요 암만 찾아도. 답은 여기 있는데, 정답을 제껴놓고 오답 가운데서 정답을 찾으려니까 답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나 안보나 그 사람들의 주장에는 자기 모순을 다 안고 있을 것이고 제가 그걸 안 파고 들어가봐도 틀린 것 속에는 자기 모순이 다 들어있고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말이지요. 그렇게 파고들어가면 한도 없으니까 우리가 아는대로 지식의 근본을 파고 들어가면 지식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실때부터 이 세상 속에다가 다 담아놨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 모든 지식은 다 담아놨고 담아놓은 그 지식을 인간들이 하나씩 둘씩 찾아가지고 발견하고 발명해낸것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알려진 많은 지식들이고 모든 지식들이다 그리 말할 수 있겠고, 그런데 지식의 종류를 둘로 나눠서 하나는 하나님 지식이고 하나는 인간 지식인데 인간 지식이란 것은 언제부터 생겨졌는가를 성경에서 찾아보니까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뱀을 만나기전까지는 다른 지식이 없고 단일 지식 하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식밖에 없던 인간 세상에 만약에 가정으로 인간이 타락하지 아니하고 그대로만 내려왔다면 세상에는 하나님의 지식으로만 가득 찼을건데, 물론 자유의지속에 의문은 가지고 있겠고, 그랬을건데 뱀을 만나고나서 하나님의 지식과 반대되는 배치되는 지식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그 지식을 경험을 하고나서 보니까, 그러니까 뱀이 들어와서 하와에게 말하니까 하나님 지식 아닌 다른 지식이 들어왔고 들어왔을때 그 지식을 배격하면 그 지식이 자리 잡지 못하고 좇겨 나갈건데 그 지식이 들어왔을때 하와가 받아드렸고 그 지식을 받아드릴뿐아니고 그 지식대로 실제 행하고 나니까 그 지식이 완전히 자리 잡아서 하와 속에 주격 지식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때부터 인간 속에 지식은 두 지식이 되어서 하나는 하나님의 지식이 있고 하나는 뱀을 통해 들어온 악령의 지식이 있고. 그런데 그 악령의 지식을 가리켜서 그 악령의 지식이 인간들을 잡아 삼키고 인간이 주장되는 그런 악령에 주장하는 인간 지식이 되니까 하나님의 지식과 배치되는 반대되는 지식이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뱀의 지식이고 마귀 악령의 지식인데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상식으로 일반 상식으로 다 가지고 보니까 인간 지식이라고 좀 완화시켜서 표현을 순화해서 표현하니까 인간 지식이지 엄밀하게 따지면 인간 모든 지식은 전부 뱀의 지식이고 악령의 지식이라는 표현이 성경적으로 정확하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지금까지 몰랐는데 요즘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백목사님께서 뱀의 지식 마귀 지식 그래 말씀하실때는 이런 의미까진 몰랐는데 요즘들어 가만 생각해보니까 인간지식이라 말은 이거는 순화시킨 겁니다. 표현을 순화시켜서 반발심을 좀 줄이기 위해서 순화시킨 것이고 좋게 말한 것이지 인간지식을 파고 들어가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거는 뱀의 지식이고 마귀 지식이 정확한 정답입니다. 맞습니까? 정확하게 그거는 뱀의 지식이고 마귀 지식입니다. 거기서부터 나온 모든 세상에 가득찬 하나님의 지식을 반대하는 그런 모든 지식들이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보면은 인간 지식은 둘이 있어서 물리가 있고 인문 지식이 있는데 이거는 세상 국어 공부나 세상 공부 아닙니다. 인간 지식은 물리가 있고 인문적인 지식이 있는데 물리적인 지식은 원래 하나님께서 만들어내놓으신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모든 것은 물리로 다 만든 것이고, 그래서 물리적으로 되어있으니까 이거는 정확한 것이고, 그러나 인문적인 지식은 그 자체가 바로 뱀이 바로 넣어준, 그래서 처음에 뱀이 하와에게 집어넣어준 그 지식은 물리입니까, 인문지식입니까? 000 선생님? 뱀이 하와에게 넣어준 지식은 물리입니까, 인문입니까? 뱀이 하와에게 넣어준 지식은 인문적인 지식입니다. 물리가 아니고, 인문적인 지식.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거기 대한 지식, 사람에 관련된 그런 지식 인문지식인데 뱀이 하와에게 넣어준 그 지식은 물리가 아니고 인문적인 그런 지식을 넣어줬고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뱀으로부터 받은 인간의 근본 인간의 내세 인간의 생사 인간의 행불행 인간의 기쁨과 슬픔 이런걸 아는 판단하는 그런 기준이 되는 그 모든 지식들은 전부다 뱀에게서 나온 것이고 그래서 이종교라던지 무슨 사상이던지 주의던지 철학이던지 인간의 근본과 결과와 생사와 행불행과 또 희로애락과 관련된 모든 사리판단 비판 평가 취사선택 관련된 이런 모든 지식은 전부 그 근본을 따지고 들어가보면 뱀에게서 받은 인문지식이고 그 지식은 전부다 완전한 백퍼센트 거짓말이라. 정반대의 거짓말이었고, 그러면 물리라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정확한 이치의 지식으로 이 세상에 내놨는데 그러기 때문에 물리는 틀림이 없는 것인데, 그 물리의 지식을 반거짓말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옳고 바른 물질의 모든 이치를 깨닫고 발견해서 써먹되 그 모든 물리를 써먹기를 하나님을 반대하고 배반하는 거기에 써먹었기 때문에, 용도가 완전히 틀렸기 때문에 물리 자체는 옳고 바른 지식인데 이걸 써먹기를 하나님을 반대하는 거기 써먹었기 때문에 물리는 반거짓말의 지식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식은 첫째 지식이란 것은 과거 현재까지 나와있는 만 사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지식이고, 두 번째 지식의 근본은 조물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다가 넣어놓은 것이 지식이고, 그래서 인간의 인문적인 지식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지식과 반대되는 뱀에게서 들어온 것이고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말씀이고 물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넣어논 창조하신 그대로 이 세상에 있는 것이고, 그런데 인간들이 써먹기를 잘못 써먹어서 반거짓말이 되어진 것이고, 그 지식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지식은 무슨 일을 하느냐? 지식은 사람의 모든 걸 전부 다 합니다. 그래서 음행의 포도주, 음행의 포도주가, 음행의 포도주가 뭡니까? 음행의 포도주가, 음녀는 이 세상 문화고 음행의 포도주도 이 세상 문화도 되겠지요. 그런데 음행의 포도주를 담아놓은 그 포도주 잔, 금잔, 그 금잔이 바로 지식이다 그말입니다. 그말은 거기서 모든게 다 나왔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것은 전부 지식에서 다 나왔기 때문에 그래서 알고보면 지식이란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아주 중요한 것. 그래서 미개국에서는 그런 걸 모르다가 문맹국이 되고나면 그 다른 나라 이웃나라 도울때, 정말 도울때는 지식을 넣어서 개명운동하고, 우리나라도 보면은 개화가 먼저 되고 선진국물을 먼저 받은 사람들이 일제 시대때 힘을 쓴 것은 무장 군인들은 무력 투쟁으로 독립 투쟁을 하고 또 내면에 진짜로 멀리 보는 사람들은 교육에 투자해서 개몽적인 그런 운동을 많이 해서 국민들의 문맹을 다 깨우쳐서 글을 가르치고 이런 지식을 넣어준 이것이 나라의 발전 앞날에 대단히 중요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지식, 전쟁을 해서 적국을 치러 갈때는 6.25때도 남침을 해서 북한 사람들이 후퇴할 때 우리 나라 남한에 있는 지식층들을 전부다 죽이거나 끌고 가버렸거든요. 그리고 일제시대때도 똑똑한 사람들 잘난 사람들은 다 잡아죽이거나 다 없애 버립니다. 그러고나면 성경에도 그런게 나오지요? 바벨론 앗수르에서 유대나라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때, 쳐들어와가지고 똑똑한 사람 잘난 사람들은 다 바벨론으로 잡아가버리고 그 땅에는 농사 짓는 사람, 포도원 가꾸는 사람들만 남겨놨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오랜 세월동안 후진국이 되고 발전이 안되는 거지요. 그리 만드는 겁니다. 지식이란 것은 모든 걸 발전시키는 바탕이 되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하고 연구를 하게 하고 따져보게 하고 계산을 대게 하고 가치를 살펴보게 하고 평가를 하게 하고 그래서 뭔가 비판하고 판단하고 그래 만들고, 그러고 난 다음에 모든 것 결정해서 처리하게 만드는. 그래서 사람의 모든 생활을 끌고 나가는 게 지식이다. 이게 지식의 역할이고 지식의 종류는 인간 지식 하나님 지식 있는 것이고, 그 결과는 지식의 결과를 살펴보면 인간 지식은 범위가 인간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리 넓어봐야 깊어봐야 길어봐야 높아봐야 인간 범위 안에 있는 것이고 유한한 것이고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의 모든 걸 다 아득히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무한한 그런 영원한 지식이 되어있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가서 수수께끼 낼때, 뭘 냈습니까? ‘먹는 것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 이게 뭐냐? 어떤게 이런게 있느냐?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먹는 자가 그게 뭡니까?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왔다 그말은, 먹는 자가 뭐지요? 사자에게서 먹는 것 뭐 나왔습니까? 꿀이 나왔지요. 강한 자에게서, 강한 사자에게서 달콤한 것이 나왔다. 이게 뭔지 알아봐라. 그러니까 블레셋의 최고의 인재들 모인 그 자리에서 일주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못 풀었습니다. 그 못 푼 이유가 뭐지요? 그거는 이 세상에는 없는 겁니다. 이 세상보다 그들은 그것을 겪어보지 못한 겁니다. 그들로써는 한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밖에서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하늘에서 주신 그 말씀 그 경험 체험으로, 삼손이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므로 경험하고 체험해서 받은 하늘의 것이기 때문에 땅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 막말로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삼손이 아내될 사람, 아내에게 하도 긁어재끼니까 마지막에 못 견뎌서 알려주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알았지요. 반칙을 해서. 그래서 내 품 속에 아내에게도 입을 조심할때는 조심하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삼손은 결국 그 위대한 인물이 뭐 때문에 실패 했습니까? 아내 때문에 두 번 다 실패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아내, 두 번째는 들릴라라는 기생 때문에 실패했고. 우리가 어느 구석에 가서 우리가 실패할지 모릅니다. 신앙있는 아내들은 남편 때문에 실패할지 모르고. 자녀 때문에 실패할 지 모르고 온갖 종류로, 그게 전부 마태복음 4장에 뭡니까? 그게 바로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 시험한 주리신지라. 그 주린겁니다. 그래서 사로 잡는 자는 사로 잡힐 것이라. 뭐든지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은 끝까지 주님을 따라갈 수 없고 전부다 내놔야 갈 수 있다는게 이 걸음입니다. 그래서 지식이란 것은 인간지식의 한계 결과를 논리적으로 따져 생각해봐야 됩니다. 불교를 따져 그 불교 중들에게 물어보고, 불교를 누가 만든 겁니까? 석가모니 이전에 불교라는 종교가 있었습니까? 없었지요. 사실 아닙니까? 역사적인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석가라는 사람이 탄생하기 전에 세상에 불교라는 종교는 없었습니다. 불교라는 종교는 석가라는 그 사람으로 인해서 생겨진 것이고 따라서 그 불경이 아무리 깊고 오묘하고 심오하고 어디까지 인간의 수식어를 다 동원해서 깊게 오묘하게 만들어놔도 결국 그 모든 것은 전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인간 이상을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 불교다. 그래서 그거는 인간 종교지 참 종교가 아니고 유교는 그보다 더 못한 것이고. 이슬람교 같은 거는 다를 수 있습니다. 저거는 성경이 빗나가서 저리 된 것이니까 저거는 좀 다를 수 있고. 그러니까 더 저 사람들은 더 막가파가 되는 겁니다.
어쨌든 지식의 결과도 좀 생각하고. 그래서 지식의 정의, 지식의 근본, 역할 종류 결과 이런 여러 가지면으로 지식을 좀 생각해보시고. 이런 지식에 따라서 오늘 말씀에서 서머나 교회의 5대관을 말씀하셨는데, 관이라 말은 볼 관자입니다. 볼 관자. 본다는 말은 눈으로 보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식으로 보는 걸 말하는 겁니다. 어떻게 보느냐 그말은 어떻게 인식하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떻게 판단하느냐. 어떤 각도로 보느냐 그게 관입니다, 관. 첫째는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이 있지요. 1장 8절입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알파와 오메가라 말은, 헬라어지요 아마? 헬라어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가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헬라어 알파벳에. 맞습니까? 그래서 이거는 시작과 끝, 처음과 나중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으로 말하면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 시작과 끝이라. 알파와 오메가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시간을 말씀하신 것인데 그러면 시간이란 것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그 가운데는 다 들어있고, 그러면 주님의 시간관은 어떤 시간관이냐? 서머나 교회의 시간관은 주님과 그 시간에 대한 관이, 시간을 보는 인식이, 시간을 보는 각도가 주님과 서머나 교회가 같았다 그말인데, 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시고 책망을 안 하셨으니까,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시간의 관은, 시간이란 것은 처음이 있고 나중이 있고 그 나중이란 것은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시간은 끝이 있되, 나중 시간은 영원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러면 시간은 처음이 있고 과정이 있고 지금 시간은 유한한 시간은 끝이 있고 그 끝 너머에 나중은 끝 없는 영원한 시간이 있고, 이게 시간이란 것의 개념이고, 그 시간이란 것은 단순히 시간은 세월인데 세월이란 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세월은 뭐냐? 세월은 우리 사람에게 주어진 세월, 인격 존재나 동물이나 생명 가진 존재에게 주어진 시간 세월은 그 존재의 생애라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란 것은 세월이고 생애라 그리 말할 수 있고 다시 말하면 이거는 그에게 주어진 기회다 그렇게도 말할 수가 있는 거지요. 시간은 생애고 그 생애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다. 그래서 시간은 세월을 말하고 또 다시 말하면 기회로 말할 수도 있는 이게 시간인데, 그 시간 생애라는 것은 그 속에 들어가보면 사람의 생애 사람의 시간이란 것은 그 속에 사람의 생애라는 말은 사람 인생의 전부가 다 들었으니까 사람은 세월속에서 시간속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공부하고 생각하고 예배 보고 말하고 돈 벌고 연구하고 계획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건설하고 파괴하고 사람의 모든 생활 활동 전부는 시간이라는 흐름을 타고 계속 되어지는 것이고 시간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 주어진 생애는 없는 것이고 끝나는 것이고, 그 시간 속에 세월 속에 인생의 생애는 그 속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시간이란 것은 단순히 몇시간 몇시간 이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세월이며 생애며 기회다. 그 시간의 흐름을 타고 사람은 그 시간 흘러가는 세월속에 모든 만가지 생애를 다 하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맞습니까? 000씨 맞아요? 생각을 하면서 들어야 되요, 생각을 하면서. 시간이란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하루는 24시간, 또 한달은 몇시간, 1년은 몇 시간, 세월입니다. 세월이고, 그다음 그 세월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생애고, 그 생애는 여러 가지 수많은 형태의 기회가 되어지는 것이고 그 속에서 사람은 먹기도 하고, 시간이 없는 사람은 시간이 중단된 사람은 생애가 다 끝나는 거지요. 이게 인생의 생앤데, 그런데 그 주어진 시간은, 그 시간은 현재라는 시간이 있고 현재 당면한 내가 살고 있는 시간도 있고 그 시간이, 시간이란 것은 내 생앤데 내게 현재 주어진 지금 살고 있는 시간도 있고, 이 시간이 유한한 시간이라 이 시간은 끝이 있고 이 시간이 끝나고 나면 다음 시간이 있으니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는 나중 시간이 있으니 그 나중 시간은 끝이 없는 영원한 시간이 우리 앞에는 있다. 시간이란 것은 세월이고 생애고 기횐데 이 시간은 일시적인 현재적인 일시적인 그런 시간도 있고, 나중 시간도 있으니 일시적인 시간은 말 그대로 일시고 이거는 끝이 있는 시간이고 끝이 있으면 이 시간이 끝이 아니고 그다음 나중 시간이 있어서 그 나중 시간은 영원히 끝없는 시간으로 계속 되어지는게 시간이다 이게 인생에 주어진 세월이라 하는 것이고, 그런데 내게 주어진 잠깐 지나가는 이 시간 세월속에 살아가는 내 모든 것은 전부 말하자면은 내게 주어진 시간과 세월이라는 것은 생애고 기횐데 이 모든 것은 일시적인데 일시적인 걸로 끝나지 아니하고 일시적인 것이 끝나면 영원히 이어지는데 일시적인 그 생애는 곧 영원의 종자가 되어지며 흔적이 되어지는 것이 일시적인 시간 세월에, 뭐라 그럴까요 이게. 모습이다 그럴까요, 그런거다.
그래서 시간은 크게 말하면 둘이 있다는 겁니다. 세상 시간,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다. 시작과 끝이다. 알파와 오메가다. 시작이 되어졌으니까 끝까지 가는 흐름이 있는데 나중이라는 말은, 끝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알기 쉽게 끝이라는 말이지, 하나님이 그 끝이라 그말이지 하나님은 끝이 없는 분이고 우리에게는 인생도 끝없는 끝이 없는 영원한 시간으로 계속 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주어진 일시적인 세상 시간은 끝나는 때가 있고, 이게 끝나면 끝 없는 영원한 세계가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시간이고 그리고 이 끝이 나는 시간 그 속에 되어지는 그 모든 인생의 생애는 끝없는 영원한 세계에 종자가 되어지며 흔적이 되어지는 것이 마련되어지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런 의미와 이런 내면을 담고 있는 시간이요 세월이요 기회며 생애기 때문에 우리들이 주어진 시간을 보낼때 어떻게 그 시간을 사용하며 그 흘러가는 시간 세월 속에 무엇을 마련하며 장만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를 시간관을 가지고 바로 알고 살아야 되겠다. 주님의 시간관은 그러했고 서머나 교회는 그 교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주어진 시간들을 이렇게 깨닫고 살아갔다 이게 시간관이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활용을 하며 어떻게 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됩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은, 이거는 언제까지 계속되는 시간이 아닙니다. 이거는 끝이 있는 시간입니다. 동시에 이 주어진 시간이 끝나고나면 다음 시간은 영원히 끝이 없는 시간이 오게 되는 겁니다. 이 시간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주어진 내 시간은 내가 살아가는 생앤데, 그 살아가는 그 생애는 어떤 형태로 살았던지 그 산 그 생애 그 시간 속에 살아간 자기 살아온 자기의 생애는 그게 끝나고나면 끝없는 생애에 영원한 세계에 종자가 되며 흔적으로 남고 마련되는 것이 오늘 유한한 시간 속에서 마련되어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봐야 되는 겁니다.
두 번째는 생사관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 사생이고 생사인데 모든 사람은 다 살고 있습니다. 태어났으니까, 생명 가지고 났으니까 사는 겁니다. 사는데 마지막에 현재 사는 우리의 생활은 삶은 한번은 다 죽을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사나 다 죽을 겁니다. 우리는 사나 죽을 것이고 그러나 죽으면 성경을 안 믿는 사람들은 끝으로 알고 있는데, 사나 죽을 것이고 죽으나 다시 살 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사나 죽을, 살고 있지마는 죽을 우리들이고 죽지마는 다시 영원한 죽음 없는 세계로 살아날 것이 우리들이다. 이것이 우리의 생사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살아있는, 현재 우리의 삶은 죽을 삶을 살고 있는 것이고 이거는 일시적인 우리에게 주어진 생애, 사는 것이고, 일시적인 생애가 끝나고 나면 영원한 삶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일시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영원한 영생을 포기하고 영원한 죽음을, 죽음이란 것은 표현이지 없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원한 죽음을 선택을 할 것인가. 일시적인 삶을 주시는대로 살면서 영원한 영생의 삶을 위해서 일시적인 삶을 죽을 각오로 살 것인가. 요즘 안 믿는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의 말이 유행하고 있지요. 그러던가요? 제가 적어왔는데, ‘필사적생’, ‘필생적사’라 하던가요. 죽기를 각오하면 반드시 살 것이고, 꼭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는다 그런 뜻이랍니다. 그런 각오로 싸웠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기독자들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사람의 생애란 것은 사나 죽을 것이고 죽으나 살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생과 산데, 살고있는 우리의 삶은 한번은 죽을 겁니다. 시기 문제지 한번은 죽을 겁니다. 그런데 그 죽고 난다음, 죽음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다시 살 겁니다. 사는 그 모습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나느냐, 영원한 죽음의 고통으로 살아나느냐가 문젠데, 그러기 때문에 일시적인 이 세상에 끝날 없어질 그 삶을 생을 편안하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영원한 죽음의 고통을 마련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영생을 마련하기 위해서 일시적인 삶을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당면된 과제고 문제다. 주님은 영원을 바라보고 영원한 영생의 삶을 위해서 한시적인 짧은 인생을 죽음으로 사신 분이 주님입니다. 이게 주님의 생사관이고 우리들이 가질 생사관입니다.
세 번째는,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부영은 말씀 했지만은 환난에 대한 것도 같이 들어 있다 봅니다. 그래서 세 번째는 고락관이라. 고와 낙입니다. 고라는 말은 고생이고 낙이라 말은 즐거움 이겠습니다. 무엇이 고며 무엇이 낙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고통이 무엇이며 고생이 무엇인가. 낙은 무엇이며 즐거움이 무엇인가. 야고보서 4장 9절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웃음을 울음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꿔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주님을 떠나서 믿음을 떠나서 말씀을 떠나서 주님 없는 세계에서 믿음 밖에서 말씀 어기는 생활하면서 아무리 좋아도 기뻐도 즐거워도 그 모든 것은 결과가 마지막에 다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세상 말에 인간 만사 뭐라고요? 새옹지마라 그런답니다. 순간 순간에 희로애락이 다 바꾸어진다. 인간의 희비라는 것이 언제 어떻게 바꾸어질지 모르는 것이 인간만사라. 그러기 때문에 당면한 웃음을 보고 이게 전부인냥 마냥 좋아할 수 없는 것이고, 당면된 슬픔과 고통을 두고 이것이 온 우주를 다 잃은 것이고 인생을 다 잃은 것인냥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오늘의 웃음도 내일의 울음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오늘의 고통과 슬픔이 내일의 희락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인간 만사니까, 하나님이 없는 안 믿는 사람들도 겪어보니까 인생은 그렇게 많은 굴곡이 있는 것이 인생이라. 그러니까 오래 세상을 살다보면은 다 그리되고 세상을 많이 겪어보면은 인생살이 다 그런 것이기 때문에 좋아도 좋은 표 많이 내지 말고 괴로워도 괴로운 표 많이 내지 말고, 남 괴롭게 하지말고 어쨌든 알맞게 적당하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안 믿는 사람들이지만은 우리는 영원을 향하고 있으니까 우리의 고는 무엇이 고인가? 우리의 고는 하나님이 없는 게 고통입니다. 하나님 떠난게 고통이고 믿음 떠난게 고통이고 말씀 떠난 것이 고통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의 낙은 주님 오신 낙이고 믿음 안에 사는 낙이고 말씀 순종하는 낙이 우리의 낙입니다. 이제 받는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은 좋게 비교할 수가 없다. 이제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 그러니까 기독자들의 고락관, 이 고락관을 우리는 바로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 볼때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떠나고 믿음생활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등 따시고 배 부르게 그렇게 행복한 가정생활, 좋은 직장 그렇게 잘 사는데 믿음 생활 잘 하면서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면 안심이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다, 기쁘고 안심이 되는데, 믿음을 떠나서 그렇게 사는 걸 보면은 근심 걱정이 심히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간섭이 없으면 방림해두었으면 더 큰 불행이 되어지는 것이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현재 사는 그 모습이 잘 살든 못 살든, 슬프든 기쁘든 괴롭든 즐겁든 걱정이 되지 않는데 믿음을 떠난 사람들은 잘 살면 잘 사는대로 걱정, 못 살면 못 사는대로 걱정, 걱정이 그칠 날이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자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이런 찬송이 있지요. 고락관 세 번째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낙은, 기독자들의 낙은 무엇이 낙인가? 돈 많이 벌면 낙입니까? 건강하면 낙입니까? 좋은 취직을 하는 그게 낙입니까? 사업을 성공하면 낙입니까? 좋은 사람을 만나면 참 중요한 일이지만은 그것도 궁극의 낙은 아닐 겁니다. 기독자의 낙은 주님을 찾아야 됩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라, 하늘나라. 주님을 모신 거기 낙이 있고 거기서 낙을 찾아야 됩니다. 술도 없고 기생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재미가 있어? 뭐가 그리 재밌던가? 우리가 잔뜩 도시락을 싸고 맛있는 걸 많이 가져갔는데, 가난해서 어려워서 먹을 것 가져오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우리 싸간 도시락을 다 주고 우리는 쫄쫄 굶었습니다. 그러고나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고 기쁘던지요. 믿기 전에 백영희씨가 참 희안한 기쁨도 다 있다. 술 없는 기쁨이 있어? 낙이 있어? 기생이 없는데도 낙이 있어? 자기 먹을 걸 다 주고 쫄쫄 굶었는데도 기뻐? 무슨 그런 기쁨이 있어?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도 안 믿는 사람들도 남을 도울때는, 그래서 이기주의라는 것은, 이타주의가 있는데, 이타라는 것은 대개 보면은 이기적인 이타라 그리 말하지요. 남을 돕는데서 자기 만족이 있기 때문에 남을 돕는다는 겁니다. 자기 만족이 없으면 남을 돕지 않는답니다. 짐승들도 곤충들도 그렇답니다. 내가 희생되는 것이 결국 가서는 나에게 유익되니까 자기가 희생을 한다는 겁니다. 기독교도 그렇게 따지고보면 결국 이타주의 같으나 세상이 알지 못하는 이기주의적인 그런 면이 있는 겁니다. 남에게 내것을 주니까 기쁨이 오니까 주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자기가 전부 내놓고 희생하고 죽어지는게 십자간데, 그 십자가는 내 육신이 고통 당하고 죽어지는 그 넘어가는 그런 영원한 신비스러운 그런 쾌락 영원한 쾌락이 기쁨이 있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겁니다. 기독교는 필연의 도지, 억지의 도가 아닙니다. 원하고 원해서 좋아서 가는 것. 안 갈 수 없어서 가는 것. 마지 못해서가 아니고 가고 싶어 견딜수 없어 가는 그게 기독교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혀참 우주적인 고난 당하면서도 찬송을 한 것은 그게 고통의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송의 외침이다. 그 신앙걸음을 걸어가보고 깨달은 분의 깨달음이기 때문에 알지 우리 차원에서는 깨닫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고락관, 세 번째. 고는 무엇이며 낙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 우리들이 이런 지식을 배워서 아는데서 이게 생겨지는 것이지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하면, 하늘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면 이런 시간관 생사관 고락관 빈부관, 빈부관도 그렇지요. 무엇이 부며 무엇이 가난이냐. 무엇이 빈이며 무엇이 부냐.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큰소리 탕탕 쳤습니다. 부자니까 재물이 많고 부동산도 많고 가진 게 많았습니다. 주식도 많았을런지. 부유해서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니까, 내가 너를 보니까 너는 눈이 멀었다. 또 가련하다. 가난하다. 네 늙는 것과 가난한 것과 가련한 것을 네가 깨닫지를 못하는구나. 멀쩡한데 왜 눈이 멀었습니까? 육안은 멀쩡한데 하나님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천국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까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선생님이여’ 뭘 원했습니까? ‘보기를 원하나이다’ 어떤 것보다 바로 봐야 됩니다. 하나님을 봐야 되고 천국 봐야 되고, 구원 세계를 봐야 됩니다. 이걸 보고 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눈 먼 것, 가난한 것, 많은 재물 부동산을 수백억을 가졌는데 그래도 가난합니까? 그거는 다, ‘너 죽을때’, 유벙언씨가 재산이 수천억이 된다던가요? 그런데 어떻게 죽었답니까? 노숙자처럼, 옷에 명품을 걸쳤는데도 산 속에서 혼자서 외롭게 아무것도 없이 아마 배가 고파 굶어 죽은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죽고 나면은 참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서, 그 사람들은 종교인인데도 진리를 잘못 배워서 엉뚱하게 나가니까 그리 나가는 겁니다. 참 바로 배우고 바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보배인지. 빈부관을 바로 기억을 하십시다. 믿음 떠난 부요는 부요가 아닙니다. 말씀 떠난 부요는 부요가 아닙니다. 믿음만 가지면 그보다 더한 것이 없고 가장 큰 부요는 하나님을 모시면 그게 전부 다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전부고 말씀이 전부고 우주와 영계를 만든게 말씀입니다. 그 안에 다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교회관입니다. 교회는 무엇이 교회냐? 건물이 크면 좋은 교횐가. 사람이 많이 모이면 좋은 교횐가? 사람이 적게 모이면 좋은 교횐가? 말 잘하면 좋은 교횐가? 교회라는 곳은 하나님을 모신 곳이고 하나님의 옳고 바른 진리가 주장하는 거기가 교회고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 향하고 진리의 법칙을 따라서 인간을 구원하는 그 목적을 가진 것이 참 교회입니다. 이게 교회이지요. 교회는 사교단체 아닙니다. 교회는 정치 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사업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향하여 진리대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교회다. 교회관도 바로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다섯가지 관을 우리가 바로 아는데서 바른 관이 생겨지는 것이지 바로 알지 못하면 이런 바른 관은 결코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오전에 지식에 대해서 많이 말씀을 드린 겁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오후에는 지식을 좀 복습했고, 서머나 교회의 5대관을 좀 생각해 봤습니다. 볼 관자.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인식하느냐, 어떻게 지식하느냐,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판단하느냐. 시간관 생사 고락 빈부 교회 다섯가지 관을 좀 깊이 생각해보시고 우리 보는 눈을 바로 가져야 되겠습니다.
제목: 서머나교회의 5대관
1. 오전 복습
2.. 서머나교회 5대관
1)시간관(시간을 어떻게 보느냐?)
- 시간은 세월, 생애를 말하는 것
- 인생의 생애는 전부 시간, 세월 속에서(먹고 입고 자고 일하고 공부하고...)
- 시간은 현재와 영원이 있으니
- 현재는 잠깐, 지나가는 시간, 영원한 시간은 영원무궁
- 이것이 주님의 시간관, 시간관에 따라 달라지는 생애, 그에 따른 영원한 결과
2)생사관(삶과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
- 모든 사람은 사나 죽을 것이요, 죽으나 살 것이니
- 일시적인 삶과 영원한 삶, 일시적인 죽음과 영원한 죽음이 있으니
- 일시적인 생으로 영원한 사를 마련하며
- 어차피 죽을 죽음으로 영원한 생을 마련할 수 있으니
- 세상 말(필사즉생, 필생즉사-죽기를 각오하면 반드시 살고...)
- 살기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버리고 영원한 사망을 취할 것인가?
- 영원한 사망을 피하고 영생을 위하여 어차피 죽을 죽음을 취할 것인가?
3)고락관(고와 낙을 어떻게 보느냐?)
- 무엇이 고며 무엇이 낙인가?
- 이제 받는 고난과 장차 얻을 영광을 족히 비교할 수 없다
-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니
- 웃음을 울음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약4:)
- 세상 낙이 낙인가? 영원한 고인가? 지금의 고가 영원한 낙이 된다면?
4)빈부관(가난과 부요를 어떻게 보느냐?)
- 세상 빈부와 영원한 빈부, 일시적인 빈부와 영원한 빈부
- 라오디게아교회(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 홍포 입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볼 때
- 믿음으로, 말씀 순종으로 가난함이 가난함인가?
- 믿음 떠나, 말씀 떠나 부요함이 부요함인가?
5)교회관(교회를 어떻게 보느냐?)
- 자칭 유대인: 구원받은 백성,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가 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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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설교)
오전에 지식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람의 양심은 인적 요소 중에서 가장 밝은 것이고 또 힘 있는 것이 양심이라서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과 자기 모든 전생활과 최종에는 생명까지도 끌고 갈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사람의 양심입니다. 우리가 평소 생활을 깊이 생각지 아니하고 그냥 사니까 그런 걸 잘 못 느껴 그러하지 가만히 배운 말씀을 가지고 이치를 따져 생각해보면 그러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은 양심대로 살게 되어있고 양심에 어긋나면 사람은 뭘 해도 자신감이 없어지고 힘이 없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도둑질을 하고 나면 사람이 모든 생활에 언행심사에 자신감이 없고 더듬거리게 되고 주저하게 되고 어두움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다 이유가 있는 말들입니다. 도둑질하고 나면 나쁜 짓을 하고 나면 꼭 도둑질이 아니더라도 도덕적으로 인간관계적으로 공연히 다른 사람 함께 관계를 가지며 지내는 그 사람을 하나 두고 표나지 않게 자기 마음속으로만 그 사람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을 한번 해도 그 사람을 만나면 뭔가 좀 주저되게 되고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미안한 그런 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에게 양심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양심이 있으면 또 양심이 밝으면 그만큼 그 사람의 지식의 범위안에서는 옳은 걸 찾고 바른 걸 찾고 밝은 것을 찾아 갈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양심을 늘 매장하지 말고 또 두 번째 뭡니까? 양심을 매장하지 말고 제일 처음에 양심을 매장하는 거지요. 매장하지 말고, 두 번째는? 양심을, 아니지요. 제일 처음에 양심에 주인을 만들지 말고, 두 번째는 양심을 죽이지 말고 세 번째가 양심을 매장하지 말고 네 번째는 양심을 북돋우고 다섯 번째 기르고. 그래서 이렇게 다섯가지 면으로 힘을 써서 우리 양심을 강하고 장성한 양심을 만들어서 그 양심이 자기 모든 말과 생각과 행동과 모든 생활을 주장하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그런데 거기까지만 알고나면 대단히 위험하게 되는 것이 그동안에 여러번 우리가 배웠고 말씀드린대로 양심이란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좋은 것이지만은 이게 독립적인 또 자립적인 그런 요소가 되지 못하고 반드시 그 위에 머리를 둬야 되고 그 머리를 인도자를 따라가야 되는 피동적인 이런 존재가 되다 보니까 머리를 잘못 두고, 능동체를 잘못 두면 큰 문제가 되어져서 그래서 양심은 지식의 인도를 지배를 받고 따라가는 것이 되니까 지식은 양심의 인도자며 머리다 그말이지요. 자동차로 말하면, 양심이 자동차면 지식은 뭐가 됩니까, 비유로 하자면? 핸들이 됩니까? 운전대 돌리는대로 양심이 가게 되니까. 그래서 지식이 양심을 선택하는 것보다 양심을 가꾸고 기른든 것보다 더 먼저 선행되어야 될 일이 지식 선택이고 지식을 바로 배워서 가지는 일이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오전에 지식에 대해서 몇가지 생각해봤는데, 그러면 지식이란 무엇인가? 지식은 쉽게 간단하게 말하면 안다는 말입니다. 안다. 같이 한번 해보시겠습니다. 지식은 안다는 말. 안다는 그말은 이미 나와있는 것을 안다 그말입니다. 이거는 콩이다 이거는 팥이다, 이거는 무화가다 이거는 감이다, 이거는 청포도다 이거는 머루포도다, 이거는 무슨 포도다 이거는 사과다 머릿속에 교육관에 있는 과일이 얼른 생각나서 몇가지 짚어봤습니다. 이거는 풀이다 이거는 곡식이다, 잔디를 처음에 심어보면 잔디하고 잡초가 있는데 아는 사람 눈에는 잔디와 잡초가 대반에 눈에 딱 들어옵니다. 그런데 처음에 잔디를 딱 심어서 잡초를 뽑아내려 그러니까 어느 것이 잡초인지, 어느 것이 잔디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됩니다. 모르니까. 그런데 몇 번 해보면, 가만히 살펴보면은 ‘아 이거는 잡초고 이거는 잔디다.’ 알게 되어집니다. 그런게 전부다 아는 겁니다. 그래서 지식이라 그러면 크게 말하면 지식은 하나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 존재라 말 다 아시지요? 존재의 뜻이 뭡니까? 존재는 뭔가가 있다 그말입니다. 존재를 또 크게 나누면 가견적인 형체를 가진 가견적인 존재가 있고 형체가 없는 불가견적인 존재가 있고 그리 볼 수 있겠지요. 그러면 존재란 것은 있다는 뜻이고 그 나와있는 하나님이 만들어내신 것, 또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두신 존재를 통하여 재생산을 통해서 만들어내신 것, 가공 통해서 만들어내시는 것, 또 서로 서로 연결시켜 합해서 썩어서 만들어내시는 것, 자연적인 것 인공적인 것, 별에 별 종류의 존재가 나와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존재 숫자를 헤아리려 그러면 헬 수 없을만큼 종류도 많고 수도 많아서 물질계기 때문에 무한이라 말까지는 못해도 무한에 가까울만큼 수많은 종류가 있고 그 수많은 종류를 전부 하나하나 아는 것을 가리켜 지식이라 그리 말을 합니다. 자 우리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생까지 물어볼까요? 제비가 뭔지 아는 사람, 제비? 저 000 제비 알아요? 봤어, 봤어요? 00이 제비 압니까? 봤어요? 요즘 제비가 잘 없지요. 제비정도는 그래도 아는구나. 안보면 모르지요. 새종류 중에서도 저거는 비둘기다 저거는 꿩이다, 저거는 제비다 저거는 참새다, 무슨 새다, 새 종류만 해도 수도 없이 많고 동물 종류만 해도 수도 없이 많고 곤충의 종류는 더 많을 것이고 바닷속에 어류들의 종류는 우리가 들어가보지 못하니까 더 많을 것이고, 생물과 무생물과 또 미생물과 온갖 종류의 그런 것들 종류가 수도없이 많은데 그거 하나하나 전부다가 지식입니다. 아는 것이. 그것에 대한 뭔가가 있다는 그말입니다. 돌맹이는 뭐냐? 이거는 돌이다. 돌이란 것은 단단하다. 돌은 단단하니까 깨진다. 돌은 철하고 돌이 부딪히면 철은 강하면서도 질기니까 철은 돌을 이기고, 돌은 철을 만나면 강하게 부딪히면 깨진다, 깨지면 가루가 되어진다. 이게 전부 뭡니까? 돌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런 걸 다 알아가지고 모래는 많은데 모래는 자잔한 돌맹이들이 다 부서진, 예를 들면 알갱이가 좀 다를 수 있겠지만은 어쨌든 모래다. 그 모래는 전부 하나하나가 자기들ㄲ리 뭉쳐지지 않아서 따로 논다. 그러기 때문에 모래와 진흙은 용도가 다르다. 진흙은 입자가루가 더 미세하니까 이거는 뭉치면 단단해진다. 그런데 모래는 뭉쳐지지를 않는다. 그런데 시멘트에다가 진흙을 섞으면 안되지요. 시멘트에 진흙 섞으면 시멘트가 무슨 화학작용 이런 것 때문에 안되는데 시멘트에 모래를 섞으면 모래가 시멘트 작용 때문에 단단하게 되어, 적당히 섞으면 단단해지게 된다. 모래 안 섞으면 시멘트만 섞으면 갈라지기 쉬운데 적당한 비율로 섞으면 모래가 단단하게 되어진다. 이런게 전부다 모래 하나하나 그래서 하나님이 만들어내놓으신 자연적인 존재와 그 자연적인 존재를 사람들이 그 존재에 본성본질 이런걸 알아가지고 사람들이 응용을 해서 만들어낸다 그말이지요. 사람들이 먹는, 몸 아플때 먹는 약에 거의 대부분이 어디서 나옵니까? 이거는 의학전문의가 아니라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그냥 보통 일반 아는 상식으로 우리들이 먹는 약의 거의 대부분은 어디서 나옵니까? 거의 다 나무뿌리, 풀뿌리, 나무 열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거기서 다 뽑아가지고 또 화학 약품 같은 것 섞어서 전부다 만들어내는 것이 거의 대개 약들이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나와있는 것을 사람들이 연구해서 알아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응용을 하고 적용을 하고 써먹는 그게 전부 지식의 결과다 그리 말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지식이라 말은 간단하게 말하면 만사물에 대한 것을 아는 것이 지식입니다. 나와있는 존재, 그 존재들의 작용, 이런걸 아는게 지식이고 그 지식이 오늘까지 이 세상을 발전 발달시켜서 오늘 21세기 세계를 만들어내게 된 겁니다. 그래서 지식이란 것은 과거와 현재까지 이미 나와있는 만사물에 존재와 그 모든 존재들의 작용을 아는 것이 지식이다. 그러니까 지식이 많다 말은 많이 안다는 말이고 많이 안다는 말은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세상에 있는 만사물에 대한 것을 많이 안다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몸을 잘 모르지요. 그런데 사람의 몸을 옛날에는 사람의 몸에다가 칼을 대면 난리가 났습니다. 맞아 죽을 죕니다. 그런데 몸에 병이 났는데, 속에 병이 났는데 사람 몸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봐야 알겠는데 유교, 도덕 이런 문제 때문에 사람 죽은 몸도 손을 못 데게 하니까, 난리가 나니까 안데는데 그래도 의술에 욕심이 많고 사람을 육적으로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이 기어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산 사람은 못하지만은 죽은 사람 속을 갈라봐야 되겠다 그래가지고 한번 갈라보니까 사람 속에 내장이 어떻게 생겼고 혈관은 어떻게 생겼고 뼈는 몇 개고 어떻게 생겼고 이런 걸 다 알게 되잖습니까. 그러데 지금은 뭐 앞전 사람들이 해부를 다 해가지고 다 알려놓으니까 굳이 안 열어봐도 아는데, 그래도 실제 자기가 알려면 열어봐야 되니까 의대생들에게 이제 막 죽은 사람의 시신은 굉장한 보물이라 그러지요. 쉽게 만져볼 수 없는. 어쨌든 의대를 졸업한 사람 의사 되려면 적어도 사람의 시신 몇 번은 해부를 해봐야 의사가 되지 안그러면 아마 안 될 겁니다. 그래가지고 사람의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자세하게 알고 그다음 그 몸에 각각의 지체의 그 기능 작용들이 어떤 기능을 하며 어떻게 해서 부작용이 생겨지고 병이 생겨지는 것을 알고, 거기 있는 어떤 물질을 거기 들어가면 그 균이 퇴치가 되어지고 치료 된다는 것을 알고. 이런 것 다 알고나면 그다음에는 의사가 되고 박사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사람 몸을 알고 약초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길거리 약초가들 산에 가면 약초가 지천에 열려 있다고 그러지요. 우리는 가면은 나무 밖에 없고 풀 밖에 없는 잡초 밖에 안 보이는데 그 약초에 밝은 약초꾼들은 아무 산에만 가도 거기 약초가 꽉 찼답니다, 온 전신에. 그러니까 그런게 전부다 하나의 지식이다 그말입니다.
지식이란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이미 나와있는 과거부터 오늘까지 나와있는 만 사물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것이 지식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에, 거기 또 설명하면 많겠지만은 그 지식의 근본을 파고 들어가보면 지식이란 것은 어디서 생겨졌는가? 지식은 안 믿는 사람들 성경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진화론적인 말에 의하면 지식은 어디서 생겨진 겁니까? 지식이란 것은, 지식이라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지식은 곧 이치라는 것이고 원리라는 거지요, 지식은. 맞습니까? 지식은 이치고 원리다. 우리 저, 000씨 맞아요? 지식은 원리고 이치다. 그냥 고개 끄덕이지 말고 생각 한번 해보면? 지식은 원리고 이치다. 우리 000 샘 어떻습니까? 지식은 곧 원리며 이치다. 안다는 것은 그 존재 자체를 아는 것도 있지만은 그 존재에 대한 내면을 아는 것이니까 그 내면은 들어가보면 전부다 원리고 이치다 그말이지요. 그런데 진화론적인 그런 주장으로 말하면 지식은 어떻게 생겨진 겁니까? 모든 지식은 다 저절로 생겨졌다. 모든 이치와 원리는 저절로 생겨졌다. 그리고 저절로 생겨진 그 모든 우주 안에 그 중에서 사람이 중심된 지구 안에서, 지구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 그 모든 존재들의 작용들을 그것들이 어찌 하다 보니까 그리 되어졌는데 오랜 세월속에 그런 것들 중에 하나가 어떻게 어떻게 변해갖고 인간이 되가지고 사람이 되가지고 그다음 사람이 이 세상을 살펴보니까 여러 가지가 다 들어있어서 하나씩 둘씩 발견하고 찾아내서 이제 구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적립 시켜놓은게 지식이다. 그러면 저절로 생겨진 그런 것들을 사람이 찾아낸거니까 그리 되면은 사람의 지식보다 더 늦게 나온, 결론을 그렇습니다만은 그런게 되겠네요. 그렇게 되어지겠고. 그래도 인간 없는 이 세상의 지식은 아무 의미가 없고 쓸모가 없는거니까, 이렇게 논리로 따져 들어가보면, 논리로 따져 들어가보면 진화론이라는 그 내막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은 대략 들어본 데 의하면 진화론이란 것은 하나하나 실제 논리로 따져 들어가보면 말이 안될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못 믿으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니까 창조라는 것을 말은 들었지만은 그럴 리가 있나, 그럴 수가 있나 그런 존재가 있을 리가 있겠나라는 그런 인간의 상식과 인간의 기존 지식이 창조주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해서 부정을 하다보니까 실제 근본 실상에 주인을 부정하니까 다른데서 궁극을 해결해보려하니까 아무리 찾아도 답을 두고 답이 없는데서 답을 찾으니까 답이 안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말입니다. 답이 안나오지요 암만 찾아도. 답은 여기 있는데, 정답을 제껴놓고 오답 가운데서 정답을 찾으려니까 답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나 안보나 그 사람들의 주장에는 자기 모순을 다 안고 있을 것이고 제가 그걸 안 파고 들어가봐도 틀린 것 속에는 자기 모순이 다 들어있고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말이지요. 그렇게 파고들어가면 한도 없으니까 우리가 아는대로 지식의 근본을 파고 들어가면 지식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실때부터 이 세상 속에다가 다 담아놨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 모든 지식은 다 담아놨고 담아놓은 그 지식을 인간들이 하나씩 둘씩 찾아가지고 발견하고 발명해낸것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알려진 많은 지식들이고 모든 지식들이다 그리 말할 수 있겠고, 그런데 지식의 종류를 둘로 나눠서 하나는 하나님 지식이고 하나는 인간 지식인데 인간 지식이란 것은 언제부터 생겨졌는가를 성경에서 찾아보니까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뱀을 만나기전까지는 다른 지식이 없고 단일 지식 하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식밖에 없던 인간 세상에 만약에 가정으로 인간이 타락하지 아니하고 그대로만 내려왔다면 세상에는 하나님의 지식으로만 가득 찼을건데, 물론 자유의지속에 의문은 가지고 있겠고, 그랬을건데 뱀을 만나고나서 하나님의 지식과 반대되는 배치되는 지식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그 지식을 경험을 하고나서 보니까, 그러니까 뱀이 들어와서 하와에게 말하니까 하나님 지식 아닌 다른 지식이 들어왔고 들어왔을때 그 지식을 배격하면 그 지식이 자리 잡지 못하고 좇겨 나갈건데 그 지식이 들어왔을때 하와가 받아드렸고 그 지식을 받아드릴뿐아니고 그 지식대로 실제 행하고 나니까 그 지식이 완전히 자리 잡아서 하와 속에 주격 지식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때부터 인간 속에 지식은 두 지식이 되어서 하나는 하나님의 지식이 있고 하나는 뱀을 통해 들어온 악령의 지식이 있고. 그런데 그 악령의 지식을 가리켜서 그 악령의 지식이 인간들을 잡아 삼키고 인간이 주장되는 그런 악령에 주장하는 인간 지식이 되니까 하나님의 지식과 배치되는 반대되는 지식이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뱀의 지식이고 마귀 악령의 지식인데 그것을 세상 사람들이 상식으로 일반 상식으로 다 가지고 보니까 인간 지식이라고 좀 완화시켜서 표현을 순화해서 표현하니까 인간 지식이지 엄밀하게 따지면 인간 모든 지식은 전부 뱀의 지식이고 악령의 지식이라는 표현이 성경적으로 정확하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지금까지 몰랐는데 요즘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백목사님께서 뱀의 지식 마귀 지식 그래 말씀하실때는 이런 의미까진 몰랐는데 요즘들어 가만 생각해보니까 인간지식이라 말은 이거는 순화시킨 겁니다. 표현을 순화시켜서 반발심을 좀 줄이기 위해서 순화시킨 것이고 좋게 말한 것이지 인간지식을 파고 들어가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거는 뱀의 지식이고 마귀 지식이 정확한 정답입니다. 맞습니까? 정확하게 그거는 뱀의 지식이고 마귀 지식입니다. 거기서부터 나온 모든 세상에 가득찬 하나님의 지식을 반대하는 그런 모든 지식들이다 그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보면은 인간 지식은 둘이 있어서 물리가 있고 인문 지식이 있는데 이거는 세상 국어 공부나 세상 공부 아닙니다. 인간 지식은 물리가 있고 인문적인 지식이 있는데 물리적인 지식은 원래 하나님께서 만들어내놓으신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모든 것은 물리로 다 만든 것이고, 그래서 물리적으로 되어있으니까 이거는 정확한 것이고, 그러나 인문적인 지식은 그 자체가 바로 뱀이 바로 넣어준, 그래서 처음에 뱀이 하와에게 집어넣어준 그 지식은 물리입니까, 인문지식입니까? 000 선생님? 뱀이 하와에게 넣어준 지식은 물리입니까, 인문입니까? 뱀이 하와에게 넣어준 지식은 인문적인 지식입니다. 물리가 아니고, 인문적인 지식.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거기 대한 지식, 사람에 관련된 그런 지식 인문지식인데 뱀이 하와에게 넣어준 그 지식은 물리가 아니고 인문적인 그런 지식을 넣어줬고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뱀으로부터 받은 인간의 근본 인간의 내세 인간의 생사 인간의 행불행 인간의 기쁨과 슬픔 이런걸 아는 판단하는 그런 기준이 되는 그 모든 지식들은 전부다 뱀에게서 나온 것이고 그래서 이종교라던지 무슨 사상이던지 주의던지 철학이던지 인간의 근본과 결과와 생사와 행불행과 또 희로애락과 관련된 모든 사리판단 비판 평가 취사선택 관련된 이런 모든 지식은 전부 그 근본을 따지고 들어가보면 뱀에게서 받은 인문지식이고 그 지식은 전부다 완전한 백퍼센트 거짓말이라. 정반대의 거짓말이었고, 그러면 물리라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정확한 이치의 지식으로 이 세상에 내놨는데 그러기 때문에 물리는 틀림이 없는 것인데, 그 물리의 지식을 반거짓말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옳고 바른 물질의 모든 이치를 깨닫고 발견해서 써먹되 그 모든 물리를 써먹기를 하나님을 반대하고 배반하는 거기에 써먹었기 때문에, 용도가 완전히 틀렸기 때문에 물리 자체는 옳고 바른 지식인데 이걸 써먹기를 하나님을 반대하는 거기 써먹었기 때문에 물리는 반거짓말의 지식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식은 첫째 지식이란 것은 과거 현재까지 나와있는 만 사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지식이고, 두 번째 지식의 근본은 조물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다가 넣어놓은 것이 지식이고, 그래서 인간의 인문적인 지식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지식과 반대되는 뱀에게서 들어온 것이고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말씀이고 물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넣어논 창조하신 그대로 이 세상에 있는 것이고, 그런데 인간들이 써먹기를 잘못 써먹어서 반거짓말이 되어진 것이고, 그 지식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지식은 무슨 일을 하느냐? 지식은 사람의 모든 걸 전부 다 합니다. 그래서 음행의 포도주, 음행의 포도주가, 음행의 포도주가 뭡니까? 음행의 포도주가, 음녀는 이 세상 문화고 음행의 포도주도 이 세상 문화도 되겠지요. 그런데 음행의 포도주를 담아놓은 그 포도주 잔, 금잔, 그 금잔이 바로 지식이다 그말입니다. 그말은 거기서 모든게 다 나왔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것은 전부 지식에서 다 나왔기 때문에 그래서 알고보면 지식이란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아주 중요한 것. 그래서 미개국에서는 그런 걸 모르다가 문맹국이 되고나면 그 다른 나라 이웃나라 도울때, 정말 도울때는 지식을 넣어서 개명운동하고, 우리나라도 보면은 개화가 먼저 되고 선진국물을 먼저 받은 사람들이 일제 시대때 힘을 쓴 것은 무장 군인들은 무력 투쟁으로 독립 투쟁을 하고 또 내면에 진짜로 멀리 보는 사람들은 교육에 투자해서 개몽적인 그런 운동을 많이 해서 국민들의 문맹을 다 깨우쳐서 글을 가르치고 이런 지식을 넣어준 이것이 나라의 발전 앞날에 대단히 중요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지식, 전쟁을 해서 적국을 치러 갈때는 6.25때도 남침을 해서 북한 사람들이 후퇴할 때 우리 나라 남한에 있는 지식층들을 전부다 죽이거나 끌고 가버렸거든요. 그리고 일제시대때도 똑똑한 사람들 잘난 사람들은 다 잡아죽이거나 다 없애 버립니다. 그러고나면 성경에도 그런게 나오지요? 바벨론 앗수르에서 유대나라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때, 쳐들어와가지고 똑똑한 사람 잘난 사람들은 다 바벨론으로 잡아가버리고 그 땅에는 농사 짓는 사람, 포도원 가꾸는 사람들만 남겨놨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오랜 세월동안 후진국이 되고 발전이 안되는 거지요. 그리 만드는 겁니다. 지식이란 것은 모든 걸 발전시키는 바탕이 되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하고 연구를 하게 하고 따져보게 하고 계산을 대게 하고 가치를 살펴보게 하고 평가를 하게 하고 그래서 뭔가 비판하고 판단하고 그래 만들고, 그러고 난 다음에 모든 것 결정해서 처리하게 만드는. 그래서 사람의 모든 생활을 끌고 나가는 게 지식이다. 이게 지식의 역할이고 지식의 종류는 인간 지식 하나님 지식 있는 것이고, 그 결과는 지식의 결과를 살펴보면 인간 지식은 범위가 인간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리 넓어봐야 깊어봐야 길어봐야 높아봐야 인간 범위 안에 있는 것이고 유한한 것이고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의 모든 걸 다 아득히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무한한 그런 영원한 지식이 되어있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가서 수수께끼 낼때, 뭘 냈습니까? ‘먹는 것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 이게 뭐냐? 어떤게 이런게 있느냐?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먹는 자가 그게 뭡니까?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왔다 그말은, 먹는 자가 뭐지요? 사자에게서 먹는 것 뭐 나왔습니까? 꿀이 나왔지요. 강한 자에게서, 강한 사자에게서 달콤한 것이 나왔다. 이게 뭔지 알아봐라. 그러니까 블레셋의 최고의 인재들 모인 그 자리에서 일주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못 풀었습니다. 그 못 푼 이유가 뭐지요? 그거는 이 세상에는 없는 겁니다. 이 세상보다 그들은 그것을 겪어보지 못한 겁니다. 그들로써는 한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밖에서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하늘에서 주신 그 말씀 그 경험 체험으로, 삼손이 하나님의 말씀 순종하므로 경험하고 체험해서 받은 하늘의 것이기 때문에 땅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 막말로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삼손이 아내될 사람, 아내에게 하도 긁어재끼니까 마지막에 못 견뎌서 알려주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알았지요. 반칙을 해서. 그래서 내 품 속에 아내에게도 입을 조심할때는 조심하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삼손은 결국 그 위대한 인물이 뭐 때문에 실패 했습니까? 아내 때문에 두 번 다 실패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아내, 두 번째는 들릴라라는 기생 때문에 실패했고. 우리가 어느 구석에 가서 우리가 실패할지 모릅니다. 신앙있는 아내들은 남편 때문에 실패할지 모르고. 자녀 때문에 실패할 지 모르고 온갖 종류로, 그게 전부 마태복음 4장에 뭡니까? 그게 바로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 시험한 주리신지라. 그 주린겁니다. 그래서 사로 잡는 자는 사로 잡힐 것이라. 뭐든지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은 끝까지 주님을 따라갈 수 없고 전부다 내놔야 갈 수 있다는게 이 걸음입니다. 그래서 지식이란 것은 인간지식의 한계 결과를 논리적으로 따져 생각해봐야 됩니다. 불교를 따져 그 불교 중들에게 물어보고, 불교를 누가 만든 겁니까? 석가모니 이전에 불교라는 종교가 있었습니까? 없었지요. 사실 아닙니까? 역사적인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석가라는 사람이 탄생하기 전에 세상에 불교라는 종교는 없었습니다. 불교라는 종교는 석가라는 그 사람으로 인해서 생겨진 것이고 따라서 그 불경이 아무리 깊고 오묘하고 심오하고 어디까지 인간의 수식어를 다 동원해서 깊게 오묘하게 만들어놔도 결국 그 모든 것은 전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인간 이상을 넘어가지 못하는 것이 불교다. 그래서 그거는 인간 종교지 참 종교가 아니고 유교는 그보다 더 못한 것이고. 이슬람교 같은 거는 다를 수 있습니다. 저거는 성경이 빗나가서 저리 된 것이니까 저거는 좀 다를 수 있고. 그러니까 더 저 사람들은 더 막가파가 되는 겁니다.
어쨌든 지식의 결과도 좀 생각하고. 그래서 지식의 정의, 지식의 근본, 역할 종류 결과 이런 여러 가지면으로 지식을 좀 생각해보시고. 이런 지식에 따라서 오늘 말씀에서 서머나 교회의 5대관을 말씀하셨는데, 관이라 말은 볼 관자입니다. 볼 관자. 본다는 말은 눈으로 보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식으로 보는 걸 말하는 겁니다. 어떻게 보느냐 그말은 어떻게 인식하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떻게 판단하느냐. 어떤 각도로 보느냐 그게 관입니다, 관. 첫째는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이 있지요. 1장 8절입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알파와 오메가라 말은, 헬라어지요 아마? 헬라어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가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헬라어 알파벳에. 맞습니까? 그래서 이거는 시작과 끝, 처음과 나중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으로 말하면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 시작과 끝이라. 알파와 오메가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시간을 말씀하신 것인데 그러면 시간이란 것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그 가운데는 다 들어있고, 그러면 주님의 시간관은 어떤 시간관이냐? 서머나 교회의 시간관은 주님과 그 시간에 대한 관이, 시간을 보는 인식이, 시간을 보는 각도가 주님과 서머나 교회가 같았다 그말인데, 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시고 책망을 안 하셨으니까,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시간의 관은, 시간이란 것은 처음이 있고 나중이 있고 그 나중이란 것은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시간은 끝이 있되, 나중 시간은 영원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러면 시간은 처음이 있고 과정이 있고 지금 시간은 유한한 시간은 끝이 있고 그 끝 너머에 나중은 끝 없는 영원한 시간이 있고, 이게 시간이란 것의 개념이고, 그 시간이란 것은 단순히 시간은 세월인데 세월이란 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세월은 뭐냐? 세월은 우리 사람에게 주어진 세월, 인격 존재나 동물이나 생명 가진 존재에게 주어진 시간 세월은 그 존재의 생애라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란 것은 세월이고 생애라 그리 말할 수 있고 다시 말하면 이거는 그에게 주어진 기회다 그렇게도 말할 수가 있는 거지요. 시간은 생애고 그 생애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다. 그래서 시간은 세월을 말하고 또 다시 말하면 기회로 말할 수도 있는 이게 시간인데, 그 시간 생애라는 것은 그 속에 들어가보면 사람의 생애 사람의 시간이란 것은 그 속에 사람의 생애라는 말은 사람 인생의 전부가 다 들었으니까 사람은 세월속에서 시간속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공부하고 생각하고 예배 보고 말하고 돈 벌고 연구하고 계획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건설하고 파괴하고 사람의 모든 생활 활동 전부는 시간이라는 흐름을 타고 계속 되어지는 것이고 시간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 주어진 생애는 없는 것이고 끝나는 것이고, 그 시간 속에 세월 속에 인생의 생애는 그 속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시간이란 것은 단순히 몇시간 몇시간 이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세월이며 생애며 기회다. 그 시간의 흐름을 타고 사람은 그 시간 흘러가는 세월속에 모든 만가지 생애를 다 하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맞습니까? 000씨 맞아요? 생각을 하면서 들어야 되요, 생각을 하면서. 시간이란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하루는 24시간, 또 한달은 몇시간, 1년은 몇 시간, 세월입니다. 세월이고, 그다음 그 세월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생애고, 그 생애는 여러 가지 수많은 형태의 기회가 되어지는 것이고 그 속에서 사람은 먹기도 하고, 시간이 없는 사람은 시간이 중단된 사람은 생애가 다 끝나는 거지요. 이게 인생의 생앤데, 그런데 그 주어진 시간은, 그 시간은 현재라는 시간이 있고 현재 당면한 내가 살고 있는 시간도 있고 그 시간이, 시간이란 것은 내 생앤데 내게 현재 주어진 지금 살고 있는 시간도 있고, 이 시간이 유한한 시간이라 이 시간은 끝이 있고 이 시간이 끝나고 나면 다음 시간이 있으니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는 나중 시간이 있으니 그 나중 시간은 끝이 없는 영원한 시간이 우리 앞에는 있다. 시간이란 것은 세월이고 생애고 기횐데 이 시간은 일시적인 현재적인 일시적인 그런 시간도 있고, 나중 시간도 있으니 일시적인 시간은 말 그대로 일시고 이거는 끝이 있는 시간이고 끝이 있으면 이 시간이 끝이 아니고 그다음 나중 시간이 있어서 그 나중 시간은 영원히 끝없는 시간으로 계속 되어지는게 시간이다 이게 인생에 주어진 세월이라 하는 것이고, 그런데 내게 주어진 잠깐 지나가는 이 시간 세월속에 살아가는 내 모든 것은 전부 말하자면은 내게 주어진 시간과 세월이라는 것은 생애고 기횐데 이 모든 것은 일시적인데 일시적인 걸로 끝나지 아니하고 일시적인 것이 끝나면 영원히 이어지는데 일시적인 그 생애는 곧 영원의 종자가 되어지며 흔적이 되어지는 것이 일시적인 시간 세월에, 뭐라 그럴까요 이게. 모습이다 그럴까요, 그런거다.
그래서 시간은 크게 말하면 둘이 있다는 겁니다. 세상 시간,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다. 시작과 끝이다. 알파와 오메가다. 시작이 되어졌으니까 끝까지 가는 흐름이 있는데 나중이라는 말은, 끝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알기 쉽게 끝이라는 말이지, 하나님이 그 끝이라 그말이지 하나님은 끝이 없는 분이고 우리에게는 인생도 끝없는 끝이 없는 영원한 시간으로 계속 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주어진 일시적인 세상 시간은 끝나는 때가 있고, 이게 끝나면 끝 없는 영원한 세계가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시간이고 그리고 이 끝이 나는 시간 그 속에 되어지는 그 모든 인생의 생애는 끝없는 영원한 세계에 종자가 되어지며 흔적이 되어지는 것이 마련되어지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런 의미와 이런 내면을 담고 있는 시간이요 세월이요 기회며 생애기 때문에 우리들이 주어진 시간을 보낼때 어떻게 그 시간을 사용하며 그 흘러가는 시간 세월 속에 무엇을 마련하며 장만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를 시간관을 가지고 바로 알고 살아야 되겠다. 주님의 시간관은 그러했고 서머나 교회는 그 교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주어진 시간들을 이렇게 깨닫고 살아갔다 이게 시간관이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활용을 하며 어떻게 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됩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은, 이거는 언제까지 계속되는 시간이 아닙니다. 이거는 끝이 있는 시간입니다. 동시에 이 주어진 시간이 끝나고나면 다음 시간은 영원히 끝이 없는 시간이 오게 되는 겁니다. 이 시간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주어진 내 시간은 내가 살아가는 생앤데, 그 살아가는 그 생애는 어떤 형태로 살았던지 그 산 그 생애 그 시간 속에 살아간 자기 살아온 자기의 생애는 그게 끝나고나면 끝없는 생애에 영원한 세계에 종자가 되며 흔적으로 남고 마련되는 것이 오늘 유한한 시간 속에서 마련되어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봐야 되는 겁니다.
두 번째는 생사관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 사생이고 생사인데 모든 사람은 다 살고 있습니다. 태어났으니까, 생명 가지고 났으니까 사는 겁니다. 사는데 마지막에 현재 사는 우리의 생활은 삶은 한번은 다 죽을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사나 다 죽을 겁니다. 우리는 사나 죽을 것이고 그러나 죽으면 성경을 안 믿는 사람들은 끝으로 알고 있는데, 사나 죽을 것이고 죽으나 다시 살 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사나 죽을, 살고 있지마는 죽을 우리들이고 죽지마는 다시 영원한 죽음 없는 세계로 살아날 것이 우리들이다. 이것이 우리의 생사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살아있는, 현재 우리의 삶은 죽을 삶을 살고 있는 것이고 이거는 일시적인 우리에게 주어진 생애, 사는 것이고, 일시적인 생애가 끝나고 나면 영원한 삶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일시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영원한 영생을 포기하고 영원한 죽음을, 죽음이란 것은 표현이지 없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원한 죽음을 선택을 할 것인가. 일시적인 삶을 주시는대로 살면서 영원한 영생의 삶을 위해서 일시적인 삶을 죽을 각오로 살 것인가. 요즘 안 믿는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의 말이 유행하고 있지요. 그러던가요? 제가 적어왔는데, ‘필사적생’, ‘필생적사’라 하던가요. 죽기를 각오하면 반드시 살 것이고, 꼭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는다 그런 뜻이랍니다. 그런 각오로 싸웠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기독자들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사람의 생애란 것은 사나 죽을 것이고 죽으나 살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생과 산데, 살고있는 우리의 삶은 한번은 죽을 겁니다. 시기 문제지 한번은 죽을 겁니다. 그런데 그 죽고 난다음, 죽음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다시 살 겁니다. 사는 그 모습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나느냐, 영원한 죽음의 고통으로 살아나느냐가 문젠데, 그러기 때문에 일시적인 이 세상에 끝날 없어질 그 삶을 생을 편안하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영원한 죽음의 고통을 마련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영생을 마련하기 위해서 일시적인 삶을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당면된 과제고 문제다. 주님은 영원을 바라보고 영원한 영생의 삶을 위해서 한시적인 짧은 인생을 죽음으로 사신 분이 주님입니다. 이게 주님의 생사관이고 우리들이 가질 생사관입니다.
세 번째는,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부영은 말씀 했지만은 환난에 대한 것도 같이 들어 있다 봅니다. 그래서 세 번째는 고락관이라. 고와 낙입니다. 고라는 말은 고생이고 낙이라 말은 즐거움 이겠습니다. 무엇이 고며 무엇이 낙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고통이 무엇이며 고생이 무엇인가. 낙은 무엇이며 즐거움이 무엇인가. 야고보서 4장 9절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웃음을 울음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꿔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주님을 떠나서 믿음을 떠나서 말씀을 떠나서 주님 없는 세계에서 믿음 밖에서 말씀 어기는 생활하면서 아무리 좋아도 기뻐도 즐거워도 그 모든 것은 결과가 마지막에 다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세상 말에 인간 만사 뭐라고요? 새옹지마라 그런답니다. 순간 순간에 희로애락이 다 바꾸어진다. 인간의 희비라는 것이 언제 어떻게 바꾸어질지 모르는 것이 인간만사라. 그러기 때문에 당면한 웃음을 보고 이게 전부인냥 마냥 좋아할 수 없는 것이고, 당면된 슬픔과 고통을 두고 이것이 온 우주를 다 잃은 것이고 인생을 다 잃은 것인냥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오늘의 웃음도 내일의 울음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오늘의 고통과 슬픔이 내일의 희락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인간 만사니까, 하나님이 없는 안 믿는 사람들도 겪어보니까 인생은 그렇게 많은 굴곡이 있는 것이 인생이라. 그러니까 오래 세상을 살다보면은 다 그리되고 세상을 많이 겪어보면은 인생살이 다 그런 것이기 때문에 좋아도 좋은 표 많이 내지 말고 괴로워도 괴로운 표 많이 내지 말고, 남 괴롭게 하지말고 어쨌든 알맞게 적당하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안 믿는 사람들이지만은 우리는 영원을 향하고 있으니까 우리의 고는 무엇이 고인가? 우리의 고는 하나님이 없는 게 고통입니다. 하나님 떠난게 고통이고 믿음 떠난게 고통이고 말씀 떠난 것이 고통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의 낙은 주님 오신 낙이고 믿음 안에 사는 낙이고 말씀 순종하는 낙이 우리의 낙입니다. 이제 받는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은 좋게 비교할 수가 없다. 이제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 그러니까 기독자들의 고락관, 이 고락관을 우리는 바로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 볼때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떠나고 믿음생활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등 따시고 배 부르게 그렇게 행복한 가정생활, 좋은 직장 그렇게 잘 사는데 믿음 생활 잘 하면서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면 안심이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다, 기쁘고 안심이 되는데, 믿음을 떠나서 그렇게 사는 걸 보면은 근심 걱정이 심히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간섭이 없으면 방림해두었으면 더 큰 불행이 되어지는 것이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현재 사는 그 모습이 잘 살든 못 살든, 슬프든 기쁘든 괴롭든 즐겁든 걱정이 되지 않는데 믿음을 떠난 사람들은 잘 살면 잘 사는대로 걱정, 못 살면 못 사는대로 걱정, 걱정이 그칠 날이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자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이런 찬송이 있지요. 고락관 세 번째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낙은, 기독자들의 낙은 무엇이 낙인가? 돈 많이 벌면 낙입니까? 건강하면 낙입니까? 좋은 취직을 하는 그게 낙입니까? 사업을 성공하면 낙입니까? 좋은 사람을 만나면 참 중요한 일이지만은 그것도 궁극의 낙은 아닐 겁니다. 기독자의 낙은 주님을 찾아야 됩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라, 하늘나라. 주님을 모신 거기 낙이 있고 거기서 낙을 찾아야 됩니다. 술도 없고 기생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재미가 있어? 뭐가 그리 재밌던가? 우리가 잔뜩 도시락을 싸고 맛있는 걸 많이 가져갔는데, 가난해서 어려워서 먹을 것 가져오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우리 싸간 도시락을 다 주고 우리는 쫄쫄 굶었습니다. 그러고나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고 기쁘던지요. 믿기 전에 백영희씨가 참 희안한 기쁨도 다 있다. 술 없는 기쁨이 있어? 낙이 있어? 기생이 없는데도 낙이 있어? 자기 먹을 걸 다 주고 쫄쫄 굶었는데도 기뻐? 무슨 그런 기쁨이 있어?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도 안 믿는 사람들도 남을 도울때는, 그래서 이기주의라는 것은, 이타주의가 있는데, 이타라는 것은 대개 보면은 이기적인 이타라 그리 말하지요. 남을 돕는데서 자기 만족이 있기 때문에 남을 돕는다는 겁니다. 자기 만족이 없으면 남을 돕지 않는답니다. 짐승들도 곤충들도 그렇답니다. 내가 희생되는 것이 결국 가서는 나에게 유익되니까 자기가 희생을 한다는 겁니다. 기독교도 그렇게 따지고보면 결국 이타주의 같으나 세상이 알지 못하는 이기주의적인 그런 면이 있는 겁니다. 남에게 내것을 주니까 기쁨이 오니까 주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자기가 전부 내놓고 희생하고 죽어지는게 십자간데, 그 십자가는 내 육신이 고통 당하고 죽어지는 그 넘어가는 그런 영원한 신비스러운 그런 쾌락 영원한 쾌락이 기쁨이 있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겁니다. 기독교는 필연의 도지, 억지의 도가 아닙니다. 원하고 원해서 좋아서 가는 것. 안 갈 수 없어서 가는 것. 마지 못해서가 아니고 가고 싶어 견딜수 없어 가는 그게 기독교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혀참 우주적인 고난 당하면서도 찬송을 한 것은 그게 고통의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송의 외침이다. 그 신앙걸음을 걸어가보고 깨달은 분의 깨달음이기 때문에 알지 우리 차원에서는 깨닫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고락관, 세 번째. 고는 무엇이며 낙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 우리들이 이런 지식을 배워서 아는데서 이게 생겨지는 것이지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하면, 하늘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면 이런 시간관 생사관 고락관 빈부관, 빈부관도 그렇지요. 무엇이 부며 무엇이 가난이냐. 무엇이 빈이며 무엇이 부냐.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큰소리 탕탕 쳤습니다. 부자니까 재물이 많고 부동산도 많고 가진 게 많았습니다. 주식도 많았을런지. 부유해서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니까, 내가 너를 보니까 너는 눈이 멀었다. 또 가련하다. 가난하다. 네 늙는 것과 가난한 것과 가련한 것을 네가 깨닫지를 못하는구나. 멀쩡한데 왜 눈이 멀었습니까? 육안은 멀쩡한데 하나님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천국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까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선생님이여’ 뭘 원했습니까? ‘보기를 원하나이다’ 어떤 것보다 바로 봐야 됩니다. 하나님을 봐야 되고 천국 봐야 되고, 구원 세계를 봐야 됩니다. 이걸 보고 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눈 먼 것, 가난한 것, 많은 재물 부동산을 수백억을 가졌는데 그래도 가난합니까? 그거는 다, ‘너 죽을때’, 유벙언씨가 재산이 수천억이 된다던가요? 그런데 어떻게 죽었답니까? 노숙자처럼, 옷에 명품을 걸쳤는데도 산 속에서 혼자서 외롭게 아무것도 없이 아마 배가 고파 굶어 죽은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죽고 나면은 참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서, 그 사람들은 종교인인데도 진리를 잘못 배워서 엉뚱하게 나가니까 그리 나가는 겁니다. 참 바로 배우고 바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보배인지. 빈부관을 바로 기억을 하십시다. 믿음 떠난 부요는 부요가 아닙니다. 말씀 떠난 부요는 부요가 아닙니다. 믿음만 가지면 그보다 더한 것이 없고 가장 큰 부요는 하나님을 모시면 그게 전부 다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전부고 말씀이 전부고 우주와 영계를 만든게 말씀입니다. 그 안에 다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교회관입니다. 교회는 무엇이 교회냐? 건물이 크면 좋은 교횐가. 사람이 많이 모이면 좋은 교횐가? 사람이 적게 모이면 좋은 교횐가? 말 잘하면 좋은 교횐가? 교회라는 곳은 하나님을 모신 곳이고 하나님의 옳고 바른 진리가 주장하는 거기가 교회고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 향하고 진리의 법칙을 따라서 인간을 구원하는 그 목적을 가진 것이 참 교회입니다. 이게 교회이지요. 교회는 사교단체 아닙니다. 교회는 정치 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사업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향하여 진리대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교회다. 교회관도 바로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다섯가지 관을 우리가 바로 아는데서 바른 관이 생겨지는 것이지 바로 알지 못하면 이런 바른 관은 결코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오전에 지식에 대해서 많이 말씀을 드린 겁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오후에는 지식을 좀 복습했고, 서머나 교회의 5대관을 좀 생각해 봤습니다. 볼 관자.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인식하느냐, 어떻게 지식하느냐,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판단하느냐. 시간관 생사 고락 빈부 교회 다섯가지 관을 좀 깊이 생각해보시고 우리 보는 눈을 바로 가져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