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7-주후
작성중2014-07-28조회 327추천 31
본문:
제목:
요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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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원문
20140727 주후
마태복음 5:17-20
찬송가와 우리 신앙생활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오전에 사회하는 집사님께서 지난주간 말씀을 연결해서 두곡을 불렀는데 아주 참 좋은 곡을 아주 정확하게 골랐다 그리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작은 불을 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하나님의 진리 등대 우리 각자가 다 자기에게 주어진 작은 등불을 켜서 험한 바다 험한 세상을 비추는 그런 우리들이 되라는 말씀이었고, 또 192장 찬송 후렴에도 보니까 이걸 수십년동안 수천번을 불렀을텐데, 수백번은 넘을 것이고 그렇게 불렀을건데 저는 오늘 오전에 그 찬송할 때 또 그 가사에서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번 펴 보시겠습니까? 192장. 후렴에 보면 ‘어둔 밤 환하게 밝았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제가 질문을 드려봅니다. 이 빛이 어디 있습니까? 어둔 밤이 환하게 밝았답니다. 빛이 있으니까 밝았겠지요, 밤이. 어두운 밤 어두운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빛이 있으니까. 그래서 환한 빛 보아라, 저 빛을 보랍니다. 환한 빛이 있으니까. 빛을 보라 그러는데, 이 빛이 어디 있습니까? 보여야 보지요.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이 빛이 어디 있습니까? 빛은 무엇이 빛입니까? 지난 주일 지난 주간 내내 공부한 말씀인데, 빛은 무엇이 빛입니까? 하나님이 빛이고 진리가 빛입니다. 그러면 빛을 보라 그말은 하나님을 보라 그말이고, 또 빛을 보라 그말은 진리를 보라 그말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어디 있습니까? 환하게 비치는 진리, 환하게 비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라 그말인데, 어디 있습니까? 어둔 밤 환하게 밝았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저는 이 찬송을 수십년동안 부르면서 이 가사가 ‘보아라’ 하는 이 가사의 ‘보라’고 말씀하신 그걸 보라고 그렇게 말한 그걸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냥 불렀지. ‘환한 빛 보아라’. 이 가사를 지은 작사자는 자기 눈에 빛이 보인 겁니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그러면 이 빛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진리 속에 있겠고, 이 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환한 진리의 빛이 어디에 있는가요? 진리는 무엇을 통해서 나타납니까? 성경에 있습니까? 성경에 있으면 누구나 다 볼 수 있습니까? 환한 빛을 나타내는 그 환한 빛은 바로 사람이라 그리 볼 수 있겠지요. 사람이 믿음의 사람 다니엘이 환하게 비치니까 다니엘 통해서 보여지는 환한 빛을 보아라. 사도바울이 비추는 환한 빛을 보아라.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빛.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모든 생활, 그의 모든 활동 움직임을 통해서 빛이 나타나고 또 이 작사자가 지은 걸 짐작해 볼 수 있건데, 이 빛은 어디에 또 보였겠습니까? 이 작사자는 빛을 어디서 봤겠습니까? 자기의 심령 속에서 봤겠지요, 환하게. 하나님께서 열어보여주시는 환한 빛을 이 작사자는 봤다 그말이지요. 이런 찬송하면서 우리가 공부하는 말씀들을 연결시켜서, 그래서 오늘처럼 찬송 가사가 은혜롭게 들리는 그런 적도, 다 은혜롭지만은 특별한 그런 경우를 느꼈습니다. ‘어둔 밤 환하게 밝았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있는 환한 빛이 되어있는지. 어둠 속에 삼켜져, 어두움에 묻혀져 있는지 우리 자신들을 돌아봐야 되겠습니다.
본문에 말씀, 오전 말씀을 그대로 한번 더 복습을 하겠습니다. 17절 이거 전체적으로 말하면 지금 오늘 봉독한 이 본문의 말씀 마태복음 5장 17절로 20절까지의 말씀에 중심내용은 무엇에 대해서 하신 말씀입니까? 중심 내용을, 중심되는 그 주체되는 단어를 뽑는다면 무엇인가요? 중심 주체되는 그 단어를 뽑는다면 무엇입니까? 율법이지요. 하나님 말씀 율법. 율법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그 율법을 어찌 하라는 말입니까? 율법을 버리지 말고 지켜 행하라 그말이지요. 버리지 말고, 하나도 버리지 말고 지켜 행하라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17절에 보니까, ‘내가’ 누굽니까, ‘내가’가? 예수님이지요. 이 말씀도 산상보훈에 계속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율법은 이때로 말하면 구약성경입니다. 모세 율법이고 전체로 말하면 구약 성경이고, 오늘 우리들로 말하면 신구약 성경 전부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또 선지자는 이 율법을 가르친 하나님의 종들인데 율법을 폐한다, 선지자를 폐한다 그 말은 하나님의 율법 말씀을 폐하러 혹은 그 말씀을 가르친 종들의 가르침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율법이란 것은 양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전에 이걸 많이 말씀드렸지요. 율법은 양면을 가지고 있어서, 한면은 율법을 어기면 정죄해서 심판을 하고 영원한 사망의 형벌을 내리는 것이 율법입니다. 이게 반토막입니다, 한면이고. 또 하나 율법은, 지키는 자에게 영생의 구원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주님 오시기 전, 주님의 대속의 예표나 오시기 전에는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율법을 어겨서 영원한 사망을 당하게 되어서 사망속에 빠져있습니다. 율법에 반쪽이 적용이 되었습니다. 율법의 반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반은 무엇입니까? 귀를 기울이고 들으셔야 되지 안 들으면 아무리 머리 좋아도 모릅니다. 율법은 뭐가 있다고요? 같이 해보시겠습니다. ‘양면성’. 양면이 무슨 뜻인가요? 양면을 글자 그대로 말하면 무슨 말입니까? 얼굴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그 뜻이지요. 양쪽에 다 얼굴이 있다 그뜻입니다. 그러면 양면성이라 말은 두 면을 가지고 있다 그말이겠습니다. 그 두 면이 일반적으로 말하면 양면이라 그럴때는 그냥 두 면이 아니고 상반되는 그런 면을 양면이라 그리 말합니다. 정반대되는 그런 면. 그렇지요? 동쪽에 반대는 서쪽이고, 남쪽의 반대는 북쪽입니다. 한서라 그럴때, 양면이지요? 추위와 더위입니다. 율법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기면 정죄해서 심판하고 영원한 사망의 형을 내리는 것이 율법의 한 면입니다. 또 반대쪽으로 율법을 지키면 영원한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율법의 한 면입니다. 양면성입니다.
그런데 인생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겨서 영원한 사망의 형벌을 받아서 사망의 어두움 속에 다 빠져 죽어있습니다. 율법의 반이 적용된거지요. 완성이 되었습니다, 적용되었고. 나머지 반은, 이제는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나머지 반인데, 구약시대에는 이것이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므로 제사를 드리므로 이것을 미리 표시하는 예표, 그림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그런 일을 해왔고,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실제 그 짐승의 실제가 와서 실제로 자기 어린양이 바쳐지지 않으면 마지막에 끝에 그게 없으면 실패가 되어지고 말하자면은 미결된 상태인데, 주님, 어린양의 실제이신 하나님의 어린양 주님이 오셔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드리므로 율법을 당신이, 율법 어긴 죄를 다 대형하시고 율법을 행치 못한 그 불의를 대행을 다 완수하시므로 이제는 율법을 어겨 사망한 자 중에 구원 받을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서 영생 얻을 수 있는 근거 바탕을 마련하셨기 때문에 이걸 가리켜서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므로 하나님의 율법은 반토막이 적용되서 모두 다 어겨서 영원히 정죄받고 영원한 사망 속에 빠져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이 오시므로 율법을 완전케 완성을 하시므로 남은 반토막 율법을 지켜서 영생의 구원을 얻는 이 완성이 이루어지게 되어졌다 그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을 주님이 오셔서 이렇게 완성시켰다, 우리들이 율법을 다 지켜서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셨고 귀를 열어주셨다 이걸 가리켜서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러 왔다’, 그러면 여전히 17절에서 중심되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율법’입니다. 율법에 대해서 말씀하신 겁니다.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말입니다, 율법을 완성하셨다. 대속을 이루셨는데 여기 본문에서는 율법을 두고 말씀하신 겁니다. 은혜를 주러 오셨다, 사랑하셨다가 아니고 오늘 본문은 ‘내가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다’.
그다음 18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면 18절에 중심되는 단어는 또 무엇입니까? 18절에 중심되는 단어는 무엇인가요? 여전히 ‘율법’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라는 말, 없어진다는 말 이런 거는 다 보조적인 표현입니다. 율법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율법의 성취성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그와 관련된 것들을 지금 설명을 하고 계신 겁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 오전에 말씀드린 것이, 율법이 이루는데, 율법의 일점 일획도, 하나님의 말씀에 점 하나 획 하나 글자 하나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는데, 성취되어지는데, 그런데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천지라는 말은 하늘과 땅 그 가운데 있는 전부다가 천지입니다. 이 천지는 물질계 우주 전부입니다. 물질계 우주 천지 전부는 말씀 하나님의 율법, 말씀이 지으신 1차 창조에 속한 것들입니다, 천지는. 우리들이 가진 우리의 육신은 1차 창조입니까, 2차 창조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 마음과 몸은 1차 창조입니까, 2차 창조입니까? 1차 창조입니다. 또, 중생되기 전에 가지고 있던, 그보다는 아담 하와가 가지고 있던, 아담 하와 속에 있던, 타락전에 아담 하와의 영은 1차 창조입니까, 2차 창조입니까? 범죄하고 타락하기 전에 아담 하와의 영은 1차 창조입니까, 2차 창조입니까? 복잡합니까? 범죄하기전 아담 하와의 마음과 몸은 1차 창조입니까, 2차 창조입니까? 1차 창조입니다. 그 영도 여전히 1차 창조입니다. 그러면 타락전이든 타락후든, 하나님이 말씀으로 1차로 지으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전부, 사람과 사람의 영까지 포함해서 전부는 다 말씀이 지으신 1차 창조의 것들입니다. 이걸 본문에 말씀하시기를 뭐라고 했다고요? 이걸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아니, 이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이게 대학교 강의도 아니고 그렇게 어려운 표현이 아닌데. 말씀이 지으신 1차 창조로 지으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가리켜 본문에서 한 말로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천지’ 라 그랬지요, ‘천지’. 그러면 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말씀하셨으니까 우리들이 살고있는 말씀이 지으신 6천년 역사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전부는 다 어찌 된다는 말입니까? 반드시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어지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 이것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그러면 강조는 좀 실제인데 좀 두고 율법이 다 이루어진다 그말인데, 그러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율법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뜻이고 법칙인데, 율법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이 되는 것이라 그랬던가요? 율법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 가지 의미로 깊이 깊이 좀 생각해보면 그 속에 많은 교리적 연결이 될 수가 있겠습니다. 율법이 이루어진다 그말은, 율법이란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법칙입니다, 진리고. 그 진리가 이루어지는 것은, 그 진리는 진리 자체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진리가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 그 하나님의 뜻이 진리 속에 나타나있는데, 이게 좀, 왕의 명령이 신하들에게 하달이 되어졌는데 그 왕의 명령이 이루어질수도 있고 안 이루어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왕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우니까 세금을 좀 감면을 하자’고 왕이 명령을 내렸는데, 신하들이, 그걸 무슨 관리라 그럽니까? 탐관오리들이 많아가지고 백성들의 세금을 많이 매겨서 빼먹어야되는데 세금 감면을 법적으로 하고나면은 빼먹을 돈이 없으니까 왕에게는 ‘예’ 해놓고 자기들끼리 꾸며서 왕의 명령을 하달하지를 않고 세금감면을 안하고 그냥 둡니다. 그러면 그 왕의 명령이 이루어진겁니까, 안 이루어진겁니까? 안 이루어진거지요. 왕이 말을 했는데, 그 말대로 안된 겁니다. 그러면 그 말은 그냥 공중에 붕 뜬 그런 말이 되는 거지요. 그러면 그 말대로 이루어지려면 어째야 됩니까? 법에 법령이 서고, 백성들에게 거두어지던 세금이 줄어들어야 왕의 명령이 이루어진 것이고, 성취가 되어진 겁니다. 그러면 왕의 그 명령은 말인데, 그 말 속에는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들었고, 백성의 생활이 그 속에 들어있고, 그런게 들어있죠, 그러면 그것이 이루어지는데는 그 책임을 맡은 신하들이 나가서 법을 개정을 하고 개정한대로 관리들에게 전달해서 실제 백성들이 내는 세금이 줄어들므로 백성들이 세금 감면이 되어져서 생활이 좀 나아지고 왕에게 또 감사하는 소리가 들려지고, 이런 것이 나타나야 왕의 명령이 이루어진 것이고, 그러면 왕은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실제 그 백성들 생활속에 들어갔다 그말이지요. 이루어진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법칙인데, 하나님의 뜻입니다. 율법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뜻이라 말은 하나님의 생각이고 소원이고 목적인데, 그게 율법 속에 들어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하겠다, 그걸 위해서 이렇게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고 정해진 그 말씀이 있는데, 그 율법이 성취가 된다는 그 말은 율법에 명시된 하나님의 뜻대로 그대로 모든 것이 하나하나 차근차근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이루어지는 것이 말하자면은 그게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천국 건설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리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율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하나님의 목적 천국 건설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뭐가 이루어지는 거라고요? 율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율법이 성취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맞습니까? 000 선생님, 이해가 됩니까?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이해가 됩니까? 듣는 것 보니까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보니까.
그러면, 그런데 율법이 성취되는데, 그 성취되는 것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언제 된다고요? 율법이 성취되는 것이, 율법의 일점 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는데, 그게 언제 이루어진다고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이루어진답니다. 천지가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살고 있는 물질계 우주, 1차 창조에 속한 전부. 그러면 이것이 없어지기 전에 이루어진다는 말은, 이 물질계 우주 1차 창조 세계 안에서 이 기간 안에, 이 안에서 율법이 이루어진다는 그 말이고, 그 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뜻, 구원의 모든 역사 2차 창조는 1차 창조 기간동안에 1차 창조의 공간안에서, 1차 창조에 속한 모든 존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다 이루어진다 그말입니다. 이걸 가리켜서 2차 창조라 그리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1차 창조는 변동될 것들이고 진동될 것들이고 없어질 것들이고 이거는 하나에 이용되는 이용물이고 활용되는 활용도고, 그런 공간들이고 이것을 통하여 이 기간 동안에 이 공간 안에서 그것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가지고 2차 창조를 이루니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구원이고 하나님의 목적이고 뜻이며 천국 건설이고 그렇게 이루어진 것은 영원히 진동 변동되지 아니할 영원한 것으로 이루어지는 이것이기 때문에, 이걸 가리켜서, 그런데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이것이 무엇이 이루어지느냐? 율법이 이루어진다 그랬습니다, 율법이. 율법이 이루어지는 거니까, 율법대로 되는 것이니 2차 창조에 속한 모든 것들은 이루는 그 주체가 전부다 말하자면은 율법이다 그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말씀, 이 말씀이 1차 창조에 속한 모든 걸 창조했고, 동시에 이 말씀이 창조한 1차 창조에 소속한 그 기간 안에서 그 공간 안에서 그 모든 속한 것들을 가지고 2차 창조를 가지고 율법대로 다 이루는데 그 이루는 것이 다 율법이 이룬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의 구원, 하나님의 목적 기독자의 건설구원이란 것은 한말로 말하면 무엇을 말하는고 하니, 건설구원은 바로 하나님의 법칙 율법을 지켜서 율법대로 행하고 율법대로의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 건설구원이고, 이게 율법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것이 천국 건설이며 2차 창조며 성화구원이다 그말입니다. 집사님 논리가 맞습니까? 000 집사님 논리가 맞습니까? 이게 2차 창조에 속한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이걸 처음에 읽어보면 저도 몰랐습니다, 무슨 말인지. 그런데 설교록을 찾아보고 이래저래 연결시켜보니까 기가 막히게 연결이 된다 그말이지요. 말씀 전부가.
17절은 주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고, 그래서 이 율법을 완성시키셨고, 완성시키신 그 율법이 알고보니까 어떤 율법인고하니,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모든 걸 다 지으신 율법이고 동시에 이 율법이 그 지으신 1차 창조에 속한 물질계 기간동안 물질계 공간안에서 1차 창조에 속한 모든 것들을 이용해서 거기서 2차 창조 영원한 것들을 다시 하나님 율법 말씀이 이루는 것이니,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며, 하나님의 목적 성취며 천국의 건설이다. 이것을 바로 이 율법이 말씀이 하고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19절에, ‘그러므로’, ‘그러므로’는 앞에 두 말씀 17절, 18절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므로’. 율법을 완성했으므로 이 율법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다 이루어지는 그런 율법이므로, 그 안에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러므로, 그러기 때문에 필연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이제는 율법을 계명이라 그랬습니다. 지킬 하나님의 명령을 말합니다. 지킬 하나님의 명령을 말합니다. 율법입니다, 말씀이고.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그러면 이 계명 이 말씀 이 율법이 1차 창조도 했고, 율법이 2차 창조를 다 건설해 나가는 것이 율법인데, 이것이 말씀인데, 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이 모든 걸 다 하는건데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하나라도 버리면, 문제는 이제 하나라도 버리면인데, 말씀은 굉장히 많습니다. 깊이 들어가면 무한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 많은 말씀 중에서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라.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 말씀을 버린다 그랬는데, 말씀은 1계명을 버리든 2계명을 버리든 10계명을 버리든 또 다른 말씀을 버리든 어쨌든 한 말씀이라도 말씀을 버리면, 버린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오일밤 예배때 말씀 드렸는데, 버린다는 것은, 버리는 그것은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버리는 행위지요, 사람의 행위입니다. 버리고, 인격 가진 혹은 지정리를 가진 그런 행위의 주체가 되는 그 주체자 사람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행위 중에 하나가 버리는 것인데, 버리는 것은 그 버리는 행위를 하는 그 인격자의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버리는 것. 그러면 안 버려도 되고, 안 버리면 되는데 버린다 그말이죠. 버리는 것이니까 버리는데는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고 까닭이 있겠습니다. 버리는 것은 주로 어떤걸 버립니까? 버린다 그러면 뭘 버립니까? 우리가 집안에, 요즘은 또 버리는 법을 배워야 된다 그러데요, 버리는 법을 배워야 된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어릴때 너무 가난하게 자라가지고 버리지를 못합니다. 좀체 잘 못버려서 어쨌든 막 꿍쳐놓고 재놓고 모아놓습니다. 다음에 또 쓸란가 싶어서. 그런데 그러다보면 10년 지나도 못 쓰고, 그래서 20년만에 버리기도 하고 그러는데. 어쨌든 버리는 것은 왜 버리며, 어떤 걸 버립니까? 버리는 건 쉽게 말하면, 가장 쉽게 뭐 버립니까? 쓰레기 버리지 않습니까, 쓰레기? 쓰레기 버리고, 쓰레기는 아닐지라도 어떤 것 또 버립니까? 쓸모가 없는 걸 버리는 거지요. 쓸모가 없는 것. 그런데, 쓸모는 있어도 선택의 기로에 딱 부딪혔을때, 그럴때는 어떤 걸 버립니까? 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은 꼭 잡고, 둘 중에 하나를 취사선택해라 그러면 보다 더 비싸고 요긴하다 싶은, 자기에게 필요하다 싶은 그것을 취하고 그것보다 못한 것은 눈물을 머금고 버리노라, 버리는 겁니다. 버리고 싶지 않은데, 롯이 아브람을 떠나고 싶었겠습니까? 눈물을 머금고 롯은 삼촌도 버렸고 도리도 버렸고 하나님도 버렸는데, 그 버릴때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눈물을 머금고 롯은 인간의 도리도 버렸고 사람도 버렸고 진리도 버렸고 하나님도 버렸습니다. 버린것에 대한 책임이 남한테 있지 않습니다. 롯 자기한테 있는 겁니다. 너가 선택해서 네가 재물을 취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버렸고, 네가 하나님의 진리보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 진리를 너는 버렸고, 너 자신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버렸지 않느냐. 네가 버렸지, 버리라고 강요를 했나. 누가 꼬았나. 너 스스로 선택해서, 너 스스로 판단해서 네가 버렸지 아니하냐. 핑계대지 못합니다. 여기 버린다는 말은, 그런걸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법. 누구든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으니까, 버릴때는 자기가 버렸습니다. 자기가 버렸으니 그 계명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던지, 아니면 그 계명보다 자기가 더 나은 것이 있으니깐 버렸든 어쨌든 자기에게 이 계명은 필요가 없어서 버렸던지 쓸모가 없어 버렸던지 가치가 낮고 적어서 버렸던지 아니면 비교해서 선택할 때 좀 더 못하니까 버렸든, 어쨌든 계명을 버린 것은 이 계명을 가지고 있는 네가 버렸다 그말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 자신 주체가 버린 겁니다. 그러면 이 계명은 작은 계명 하나라도 이 율법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지는, 그러면 온 천지보다 율법의 점 하나 글자 하나 획 하나가 더 중량이 무거운 이것이 율법인데, 온 천하를 다 버려도 율법은 버릴 수가 없는 것인데, 그 천하 속에는 인간도 들어있는데. 이런 율법인데, 그러므로 이런 율법이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이 이 율법 중에서 만약에 한 계명이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자기가 버렸으니까 그 사람은 율법을 버리고 있는 사람이고, 버린 사람은, 사람이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사참배를 하고 패전한 분들이 해방되고나니까 실패한 걸 알고, 그다음에 진실한 사람들은 설교할 때 목사님들이니까 눈물을 머금고 외쳤답니다. ‘여러분들, 신사참배는 죄입니다. 나는 약해서 신사참배를 했는데 여러분들은 하지 마십시오. 신사참배는 죄입니다.’ 하고 그렇게 외쳤다 그러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뜨겁게 회개한 사람들은 그래도 좀 일을 많이 하고 그래도 능력있는 유력한 종들이 되었답니다, 대부분은 다 이 핑계 저 핑계대서 합리화 시켜서 덮어 가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는데. 그런데 그분이 만약에 그다음에 회개해서, 회개란 것은 과거 실패가 다시 당면이 되어지고 부딪혀서 그때 넘어지지 않아야 비로소 회개가 되는 것인데, 그렇게 신사참배를 패전하고 아무리 말하고 외쳐도 그 사람이 신사참배를 하면은 안된다고 죄라고 외치는데, 그 외침 속에서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뭡니까? 당신은, 자기 자신은 했기 때문에, 이미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한 사람이 신사참배를 할때는 안한 사람이 가르치는 것 하고 한 사람이 가르치는 것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신사참배를 한 사람이 하지 말라 그러면 아무리 하지 말라 그래도 자기는 했기 때문에 그 한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도 다음에 회개하고 다음을 기약하면 낫지만은. 그런데 안 한 사람은 담대하게 말하는 겁니다. ‘나는, 신사참배는 죄기 때문에 나는 안했다. 이거는 하는게 아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신사참배는 죈데, 나는 연약해서 했다.’ 그러면 듣는 사람이 ‘약하면 할 수 있는 것인가? 해야되는 것인가?’ 거기는 힘이 그만큼 빠져 나가는 겁니다. 말씀을, 계명을 버리면, 버리는 사람은, 버린 사람은 그 계명에 대한 가치관, 선택에 비교 선택에서 취사선택에서 뭐 때문에 버렸던지, 돈 때문에 버렸든 사람의 앞면 때문에 버렸든, 자기 습성 때문에 버렸든 목숨 때문에 버렸든, 어쨌든 계명을 버렸으면 버린 그 사람 속에는 버린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아무리 말씀을 바로 가르친다 해도 그 사람은 계명을 버리는 그것을 가지고 가르치는 거니까 그 밑에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계명을 버릴 수 있는 그런 확률이 많게 되는 겁니다. 이걸 언제 집회때, 호세아서입니까? 애미가 먹이는 젖, 그 어미의 젖통도 음란하다 그래 놨지요. 참, 그 말씀 해석이 얼마나 깊은 것인데.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그러면 그 사람은 그때는 하나 버렸지만은 다른 것보다 또 더한 것이 오면 또 다른 것 또 버릴 수 있는 사람이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를 버리면 결국 그 사람은 전부를 다 버린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 버리는 것은 자기가 안 버릴 수 있는데 버리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어렵습니다. 알 수 있는데, 알지 아니한 것. 버리지 않을 수 있는데, 버린 것, 이걸 말하는 겁니다. 사람이 다 천차만별인데 그래서 주신 분량이 다 각각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만가지를 다 지켜도 어떤 사람은 열가지 밖에 못 지키는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성경에 다 나오지 않습니까? 만가지를 깨닫고 만가지를 지킬 수 있도록 분량을 주신 그 사람은 만가지를 깨달아 알아야 되고 만가지를 다 지켜야 비로소 율법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열가지만 깨달아 알고 열가지밖에 지키지 못할 그 사람은 열가지 깨닫고 열가지 지키면 율법을 다 지킨 붙든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열가지 깨닫고 붙든 사람하고 만가지 중에 구천구백구가지 붙들고 지킨 사람은 굉장히 차이가 나지만은 하나님 앞에서는 ‘너는 다 못 지킨 사람이고 이 사람은 다 지킨 사람이다.’ 그렇게 판단한다고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계산을 가지고 따지면 이 세상 조건이 머리 좋은 사람과 많이 배운 사람과 많이 가진 사람하고 머리 나쁘고 못 배우고 못 가진 사람하고 누가 더 유리합니까, 신앙생활에? 누가 더 유리합니까? 참 인정하기 어렵지요. 그런데 실제보면 그렇습니다. 실제 믿는 사람들보면은 형제들아 믿는 사람들을 봐라. 그리스도 안에서 학벌 좋은 자, 문벌 좋은 자가 많지를 못한 것이 실제 현상세계 지상 교회에 현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정말 머리 좋은 사람, 잘난 사람, 실력 있는 사람은 전부 세상으로 나가고 눈에 보이는 가견적인 그것 붙들고 나가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하나님 이걸 붙들고 나가는 사람이 참으로 참으로 희귀합니다. 사도바울 같은 경우 특별한 경우입니다. 아주 희귀합니다. 그런 경우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전부다 사도바울을 제외하고는 전부다 고기 잡는 어부들 다 고만고만한 서민들입니다. 별 볼 일 없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다 사도가 되었고,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특별히 공부 많이 한 사람을 특별하게 뽑은 것이고, 그 외에는 거의 다 대개 그렇습니다. 교회도 보면 목회도 그렇고 신앙도 보면 대개 다 정말 진짜 신앙 있는 그런 사람들 보면은 공부도 많이 하고 한 사람들이 있는데, 대개 보통 보편적으로 보면은 다 그만 무식하고 못나고 가난하고 일반 서민들 대부분이 잘 믿는 사람들이 많지, 참 유력한 사람들 중에 잘 믿는 사람들은 희귀합니다. 그리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인물이 못나서, 부모가 못나서 나도 못났고, 가난하고 배운 것 없고 형편이 어렵고 거기 대해서 불평 불만할 조건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너한테 많이 달라 그러더냐. 너의 머리 안 좋은 고만고만한것도, 경제 어려운 것도, 실력 부족한 것도, 내가 너에게 그만큼밖에 안 줬으니까 그런 것이고. 내가 너에게 그만큼만 줬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것도 그만큼밖에 요구하지 않겠다.’ 그런데 그 작게 요구한 것에 대한 대우는 엄청나게 많이 주고 많이 요구한 내놓은 그사람하고 작게 주고 작게 받은 사람하고 대우는 꼭 같습니다. 그러면 불만할 게 없고 오히려 적게 받은 사람은 감사할 일이지요. ‘나는 이만큼밖에 못했는데 이런 나를 이만큼 큰 대우해주시니까 황송해서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감사할 일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여기서 그 말씀 합니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 버린다는 것은, 자기가 버리는 것입니다. 임의로 버리는 것이고 고의로 버리는 것이고 능동적으로 자기가 버리는 걸 말하는 겁니다. 이 계명보다 더 귀한 것 더 큰 것 더 아끼는 것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이 계명을 버리지, 이유없이 버리지 않습니다. ‘목숨을 지켜야 되지 목숨 버리고 계명을 취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너는 목숨이 계명보다 귀하니까, 그 목숨 취하고 계명을 버렸으니까 너는 여전히 계명을 버린 사람이다’. 사람이 목숨 내놓고 계명 취하기가 쉽겠습니까? 000, 쉬워요? 대단히 어렵겠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것도 참 많이 생각해야 될건데, 한편으론 쉽고 한편으론 너무 어렵기 때문에 주신 방법이 또 몇가지라고요? 하나는 회개의 기회를 주셨고, 사람이 약한 줄 아시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넘어졌느냐. 또 일어서라.’ ‘또 넘어졌느냐. 또 일어서라’. 하루에 일흔번씩 일곱 번 넘어져도 또 일어서라. 고범적으로 그래서는 안되겠지만은 일어서고, 네가 부족하냐? 네 힘이 부족하니, 가사가 그 다음 뭐지요? ‘네 힘이 부족하니 주 권능만 믿게’, 그 앞에 또 뭐가 있는데. 무엇으로 지켜서요? ‘기도로 지켜서’. 기도로 도우심을 받아서. 그래서 주님이 대속의 공로 베풀어서 중보가 되시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연결시켜놨기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겠다 해주셨으니까 하나님을 내가 모시고 계명을 붙들기 위해서 기도하는 걸, 그 기도를 안 들어 주시겠습니까? 진실하지 못하고 자기를 다 드리지 아니하니까 안되는 것이지. 자기만 다 드리고 진실하게 구하면 얼마든지 들어주시는 것이 성경역사고 교회 역사고 오늘날 우리가 실제 자기 생활에 들어가보면 얼마든지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란 것은 진실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자기가 자기를 속여서 덮어 가리고, 그러고 하나님을 속인다는 것은 속지 않는데, 그러기 때문에 구별이란 것은, 진실과 구별은 연결이 되지요. 구별은 거룩이고, 거룩이, 거룩의 완성이 진실이지요. 맞습니까? 0선생님, 맞습니까? 거룩의 완성이 진실이지요. 그러니까 진실은 구별하고 구별하고 파고 들어가는 겁니다. 자기를 파고 따지고 따지고 따지고 파고 들어가서 자기를 아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이 말씀을, 이 계명을 버릴 수 밖에 없었느냐? 파고 들어가보면 자기 스스로 압니다. 그래서 버리고 그 가치의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이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 하면은, 지극히 작은 하나를 버렸는데 어떻게 된다고요? 계명을 전부다 버리는 게 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는 것이고,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면서 가르치면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행한만큼 커지게 되겠습니다. 그리고 서기관 바리새인보다 낫지 않으면 안된다 말씀하신 것이고.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목적은,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신앙인데, 그 하나님을 향해 가는,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내가 모시고 섬기고 그분을 닮아가는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기독교고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이 천국 건설이고 이게 신앙생활의 전부고, 이게 중심 중추입니다. 나머지는 전부다 연결된 보조적인 것이고, 그런 것들이고.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모시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것,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처럼 되어지는 이 모든 것의 유일한 방편 법칙 길은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 율법 말씀이다 그말입니다, 말씀.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이 법칙이 우리 속에 있어야 되고, 이 말씀을 모르고는 결코 신앙생활 할 수가 없는 것이고, 이 말씀을 어기면 신앙이 아닌 것이고, 이 말씀에 틀리면 잘못된 신앙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말씀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말씀이 전부라 할만큼. 이 말씀 통해서 하나님도 나타나고 이 말씀 통해서 하나님을 모시기도 하고 섬기기도 하고 그분을 닮기도 하고, 그분의 뜻도 소원도 생각도 전부다가 말씀 속에 다 들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전부라.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란 것은 한말로 말하면, 믿음이 무엇이냐? 믿음은 한말로 말하면 말씀 지키는 생활이다. 신앙 생활은 한말로 말하면, 실제로 말하면 신앙생활은 전체로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향한 생활인데, 실제적으로 말하면 신앙생활은 말씀을 지키는 생활이 신앙생활이다. 예배당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신앙생활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도 신앙생활이 될 수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은 말씀을 지키는게 신앙생활이고 그 말씀을 지켜야 되니까 지키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알아야 되고, 알아야 되니까 말씀을 부지런히 읽어야 되고 들어야 되고 생각해야 되고 연구해야 되고 물어봐야 되고, 이게 말씀 공부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신앙생활이라. 이와 관련된게 전부다 신앙생활이다 그말입니다.
그다음에, 이번 집회 말씀 중에서 이것하고 연결시키는 것이 있는데, 참 중요한데, 간단하게 말하면, 에덴동산에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왜 먹었습니까? 하와가 선악과를 왜 따먹었습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해서. 저것만 먹으면 모든 만사 해결 될 것 같고, 말하자면은 전부다 전지전능이 될만큼 그렇게 그 선악과가 좋게 아름답게 능력있게 영광스럽게 귀하게 그렇게 보였습니다. 온 천하에 하와 눈에는 선악과가 가장 좋게 보였습니다, 표현된 것 보면은. 그런데 그 선악과가, 하나님의 말씀은 그 선악과에 대해서 뭐라 그랬습니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랬으니까, 그 선악과는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니까 저 선악과는 먹으면 죽는 것이고 멸망하는 것이 선악과인데. 하와가 또 다른 눈으로 보니까 보음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로울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정반대로 보였습니다. 그렇게 정반대로 보인 이유가 무엇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선악과를 보니까, 먹으면 죽는 독인데, 언제부터 그 선악과가 정반대로 보였습니까? 배암의 미혹을 받고나서부터. 배암의 미혹은 배암의 말이고, 배암의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뭐라 그럽니까? 배암의 지식이고. 배암의 지식을 가지고 나서 선악과를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모든 것 할때 아무리 조심을 하고 조심하고 따지고 구별해도 모든 일에 사리판단 취사선택에 어떤 일을 할때 조심하고 조심하고 따지고 따지고 살피고 신중히 하고 아무리 해도 그러면 성공이 되느냐? 봐야 됩니다. 모르는 겁니다. 양심을 쓰면 일이 성공되고 구원이 되어지느냐? 모릅니다. 봐야 됩니다. 가장 궁극의 무엇이 중요하냐. 가장 인간에게 있어서 사람의 영생을 두고 영멸을 두고 승패의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심도 아니고 신중도 아니고 조심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니고 바로 지식을 어느 지식을 자기 주체지식으로 가지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능동 주체 지식으로 가지면, 그다음에 그 지식에 맞춰 양심을 쓰고 조심하면 모든게 다 바로되고 구원이 되어지는 것이고 생명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 아니고 인간 지식을 가지고 자기를 끌고 가는 주관적인 지식으로 가지고 그다음에 하면은, 조심하면 조심할수록 양심 쓰면 쓸수록 그 사람은 멸망으로 더 깊이 들어가지 구원과는 천리만리 거리가 먼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식이 내 속에 먼저 바로 자리잡고 있어야 그다음에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지, 세월호 사건 났을때 그 교파가 그게 전체적으로는 복음침례? 0선생님, 맞습니까? 기독교 복음침례지요. 그중에 한 파지요. 전체다는 아닐테고 그 사람들이. 제가 잘을 모르겠습니다만은.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래가지고 그렇게 된 건데, 성경을 잘못 알고 잘못된 길을 가니까 저런 오만 문제가 다 생겨지고, 그냥 묶어서 기독교도 다 같이 욕을 얻어먹게 되는 겁니다. 사이비 집단이다 그래가지고.
하나님 말씀, 옳고 바른 하나님 말씀을 내가 먼저 가지는 것이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지런히 성경 읽고, 또 설교록 읽고 예배시간 참석을 하고 생각을 하고 명상하고 연구하고 말씀으로 양심을 쓰고 살펴서 옳은 진리지식 하나님 말씀을 바로 가지는 것이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하고, 그리고 그 말씀대로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러고나면 나머지 결과는 우리가 전혀 상관할바가 아닙니다. 내가 말씀대로만 바로 하고 나면, 되어진 결과는 나사로처럼 되든지 누구처럼 되든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감옥에 가든 풀무불에 들어가든, 사자굴에 들어가든 전혀 상관할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책임을 지니까. 문제는 내가 말씀대로 됐느냐, 바로 됐느냐 잘못 됐느냐 그게 문제지, 바로만 됐다면. 그래서 다니엘이 담대했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담대했습니다. ‘왕이여, 우리를 풀무불에 집어던지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기서 건져내실 것이고, 건져내지 않아도 우리는 거기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시옵소서.’ ‘왜 안합니까?’ ‘거기 절하는 것은 명백히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2계명 어기는 죄가 되기 때문에 결코 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계명 지키다가 풀무불 속에 던져지면 하나님이 필요하면 건져내실 것이고, 안 건져내도 우리는 계명 지키다가 죽는 거니까 하등에 상관이 없으니까 아예 절 안 할 줄을 아십시오’. 다니엘은요? 사자굴 속에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뭐라 그랬습니까? ‘ 나의 무죄함이’ 무죄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없다는 겁니다. ‘나는 말씀에 틀린 것이 없고 말씀 어긴 것이 없기 때문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하다가 내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담대함이 생겨집니다. 말씀에 거리낌이 없으면 양심에서부터 용기가 생겨지고 담대함이 나옵니다. 힘이 나고. 그런데 자기 속에 구석진 곳이라도 말씀 어긴 죄가 있으면 뭘 해도 그것 때문에 괴롭고 힘이 빠져나가는 그런 것이 된다 그말이지요.
신앙생활은 말씀 지키는 생활이라, 이 말씀 오늘 기억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허영과 허욕을 다 버려야 되고 우리 주관을 다 부인을 해야 됩니다. 어쨌든 말씀이 신앙의 길이고 법칙이고 그 속에 전부다 들었습니다. 완전케 하신 율법. 천지는 없어져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다 이루어지는 율법.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버리고 행하면 지극히 작다 일컬음 받는 이 말씀 기억을 하고, 우리는 말씀 그대로 믿고 행하는 그런 우리 신앙이 되어야겠습니다.
제목:
요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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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원문
20140727 주후
마태복음 5:17-20
찬송가와 우리 신앙생활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오전에 사회하는 집사님께서 지난주간 말씀을 연결해서 두곡을 불렀는데 아주 참 좋은 곡을 아주 정확하게 골랐다 그리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작은 불을 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하나님의 진리 등대 우리 각자가 다 자기에게 주어진 작은 등불을 켜서 험한 바다 험한 세상을 비추는 그런 우리들이 되라는 말씀이었고, 또 192장 찬송 후렴에도 보니까 이걸 수십년동안 수천번을 불렀을텐데, 수백번은 넘을 것이고 그렇게 불렀을건데 저는 오늘 오전에 그 찬송할 때 또 그 가사에서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번 펴 보시겠습니까? 192장. 후렴에 보면 ‘어둔 밤 환하게 밝았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제가 질문을 드려봅니다. 이 빛이 어디 있습니까? 어둔 밤이 환하게 밝았답니다. 빛이 있으니까 밝았겠지요, 밤이. 어두운 밤 어두운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빛이 있으니까. 그래서 환한 빛 보아라, 저 빛을 보랍니다. 환한 빛이 있으니까. 빛을 보라 그러는데, 이 빛이 어디 있습니까? 보여야 보지요.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이 빛이 어디 있습니까? 빛은 무엇이 빛입니까? 지난 주일 지난 주간 내내 공부한 말씀인데, 빛은 무엇이 빛입니까? 하나님이 빛이고 진리가 빛입니다. 그러면 빛을 보라 그말은 하나님을 보라 그말이고, 또 빛을 보라 그말은 진리를 보라 그말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어디 있습니까? 환하게 비치는 진리, 환하게 비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라 그말인데, 어디 있습니까? 어둔 밤 환하게 밝았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저는 이 찬송을 수십년동안 부르면서 이 가사가 ‘보아라’ 하는 이 가사의 ‘보라’고 말씀하신 그걸 보라고 그렇게 말한 그걸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냥 불렀지. ‘환한 빛 보아라’. 이 가사를 지은 작사자는 자기 눈에 빛이 보인 겁니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그러면 이 빛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진리 속에 있겠고, 이 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환한 진리의 빛이 어디에 있는가요? 진리는 무엇을 통해서 나타납니까? 성경에 있습니까? 성경에 있으면 누구나 다 볼 수 있습니까? 환한 빛을 나타내는 그 환한 빛은 바로 사람이라 그리 볼 수 있겠지요. 사람이 믿음의 사람 다니엘이 환하게 비치니까 다니엘 통해서 보여지는 환한 빛을 보아라. 사도바울이 비추는 환한 빛을 보아라.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빛.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모든 생활, 그의 모든 활동 움직임을 통해서 빛이 나타나고 또 이 작사자가 지은 걸 짐작해 볼 수 있건데, 이 빛은 어디에 또 보였겠습니까? 이 작사자는 빛을 어디서 봤겠습니까? 자기의 심령 속에서 봤겠지요, 환하게. 하나님께서 열어보여주시는 환한 빛을 이 작사자는 봤다 그말이지요. 이런 찬송하면서 우리가 공부하는 말씀들을 연결시켜서, 그래서 오늘처럼 찬송 가사가 은혜롭게 들리는 그런 적도, 다 은혜롭지만은 특별한 그런 경우를 느꼈습니다. ‘어둔 밤 환하게 밝았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있는 환한 빛이 되어있는지. 어둠 속에 삼켜져, 어두움에 묻혀져 있는지 우리 자신들을 돌아봐야 되겠습니다.
본문에 말씀, 오전 말씀을 그대로 한번 더 복습을 하겠습니다. 17절 이거 전체적으로 말하면 지금 오늘 봉독한 이 본문의 말씀 마태복음 5장 17절로 20절까지의 말씀에 중심내용은 무엇에 대해서 하신 말씀입니까? 중심 내용을, 중심되는 그 주체되는 단어를 뽑는다면 무엇인가요? 중심 주체되는 그 단어를 뽑는다면 무엇입니까? 율법이지요. 하나님 말씀 율법. 율법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그 율법을 어찌 하라는 말입니까? 율법을 버리지 말고 지켜 행하라 그말이지요. 버리지 말고, 하나도 버리지 말고 지켜 행하라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17절에 보니까, ‘내가’ 누굽니까, ‘내가’가? 예수님이지요. 이 말씀도 산상보훈에 계속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율법은 이때로 말하면 구약성경입니다. 모세 율법이고 전체로 말하면 구약 성경이고, 오늘 우리들로 말하면 신구약 성경 전부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또 선지자는 이 율법을 가르친 하나님의 종들인데 율법을 폐한다, 선지자를 폐한다 그 말은 하나님의 율법 말씀을 폐하러 혹은 그 말씀을 가르친 종들의 가르침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율법이란 것은 양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전에 이걸 많이 말씀드렸지요. 율법은 양면을 가지고 있어서, 한면은 율법을 어기면 정죄해서 심판을 하고 영원한 사망의 형벌을 내리는 것이 율법입니다. 이게 반토막입니다, 한면이고. 또 하나 율법은, 지키는 자에게 영생의 구원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주님 오시기 전, 주님의 대속의 예표나 오시기 전에는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율법을 어겨서 영원한 사망을 당하게 되어서 사망속에 빠져있습니다. 율법에 반쪽이 적용이 되었습니다. 율법의 반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반은 무엇입니까? 귀를 기울이고 들으셔야 되지 안 들으면 아무리 머리 좋아도 모릅니다. 율법은 뭐가 있다고요? 같이 해보시겠습니다. ‘양면성’. 양면이 무슨 뜻인가요? 양면을 글자 그대로 말하면 무슨 말입니까? 얼굴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그 뜻이지요. 양쪽에 다 얼굴이 있다 그뜻입니다. 그러면 양면성이라 말은 두 면을 가지고 있다 그말이겠습니다. 그 두 면이 일반적으로 말하면 양면이라 그럴때는 그냥 두 면이 아니고 상반되는 그런 면을 양면이라 그리 말합니다. 정반대되는 그런 면. 그렇지요? 동쪽에 반대는 서쪽이고, 남쪽의 반대는 북쪽입니다. 한서라 그럴때, 양면이지요? 추위와 더위입니다. 율법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기면 정죄해서 심판하고 영원한 사망의 형을 내리는 것이 율법의 한 면입니다. 또 반대쪽으로 율법을 지키면 영원한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율법의 한 면입니다. 양면성입니다.
그런데 인생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겨서 영원한 사망의 형벌을 받아서 사망의 어두움 속에 다 빠져 죽어있습니다. 율법의 반이 적용된거지요. 완성이 되었습니다, 적용되었고. 나머지 반은, 이제는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나머지 반인데, 구약시대에는 이것이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므로 제사를 드리므로 이것을 미리 표시하는 예표, 그림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그런 일을 해왔고,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실제 그 짐승의 실제가 와서 실제로 자기 어린양이 바쳐지지 않으면 마지막에 끝에 그게 없으면 실패가 되어지고 말하자면은 미결된 상태인데, 주님, 어린양의 실제이신 하나님의 어린양 주님이 오셔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드리므로 율법을 당신이, 율법 어긴 죄를 다 대형하시고 율법을 행치 못한 그 불의를 대행을 다 완수하시므로 이제는 율법을 어겨 사망한 자 중에 구원 받을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서 영생 얻을 수 있는 근거 바탕을 마련하셨기 때문에 이걸 가리켜서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므로 하나님의 율법은 반토막이 적용되서 모두 다 어겨서 영원히 정죄받고 영원한 사망 속에 빠져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이 오시므로 율법을 완전케 완성을 하시므로 남은 반토막 율법을 지켜서 영생의 구원을 얻는 이 완성이 이루어지게 되어졌다 그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을 주님이 오셔서 이렇게 완성시켰다, 우리들이 율법을 다 지켜서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셨고 귀를 열어주셨다 이걸 가리켜서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러 왔다’, 그러면 여전히 17절에서 중심되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율법’입니다. 율법에 대해서 말씀하신 겁니다.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말입니다, 율법을 완성하셨다. 대속을 이루셨는데 여기 본문에서는 율법을 두고 말씀하신 겁니다. 은혜를 주러 오셨다, 사랑하셨다가 아니고 오늘 본문은 ‘내가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다’.
그다음 18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면 18절에 중심되는 단어는 또 무엇입니까? 18절에 중심되는 단어는 무엇인가요? 여전히 ‘율법’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라는 말, 없어진다는 말 이런 거는 다 보조적인 표현입니다. 율법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율법의 성취성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그와 관련된 것들을 지금 설명을 하고 계신 겁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 오전에 말씀드린 것이, 율법이 이루는데, 율법의 일점 일획도, 하나님의 말씀에 점 하나 획 하나 글자 하나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는데, 성취되어지는데, 그런데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천지라는 말은 하늘과 땅 그 가운데 있는 전부다가 천지입니다. 이 천지는 물질계 우주 전부입니다. 물질계 우주 천지 전부는 말씀 하나님의 율법, 말씀이 지으신 1차 창조에 속한 것들입니다, 천지는. 우리들이 가진 우리의 육신은 1차 창조입니까, 2차 창조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 마음과 몸은 1차 창조입니까, 2차 창조입니까? 1차 창조입니다. 또, 중생되기 전에 가지고 있던, 그보다는 아담 하와가 가지고 있던, 아담 하와 속에 있던, 타락전에 아담 하와의 영은 1차 창조입니까, 2차 창조입니까? 범죄하고 타락하기 전에 아담 하와의 영은 1차 창조입니까, 2차 창조입니까? 복잡합니까? 범죄하기전 아담 하와의 마음과 몸은 1차 창조입니까, 2차 창조입니까? 1차 창조입니다. 그 영도 여전히 1차 창조입니다. 그러면 타락전이든 타락후든, 하나님이 말씀으로 1차로 지으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전부, 사람과 사람의 영까지 포함해서 전부는 다 말씀이 지으신 1차 창조의 것들입니다. 이걸 본문에 말씀하시기를 뭐라고 했다고요? 이걸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아니, 이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이게 대학교 강의도 아니고 그렇게 어려운 표현이 아닌데. 말씀이 지으신 1차 창조로 지으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가리켜 본문에서 한 말로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천지’ 라 그랬지요, ‘천지’. 그러면 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말씀하셨으니까 우리들이 살고있는 말씀이 지으신 6천년 역사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전부는 다 어찌 된다는 말입니까? 반드시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어지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 이것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그러면 강조는 좀 실제인데 좀 두고 율법이 다 이루어진다 그말인데, 그러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율법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뜻이고 법칙인데, 율법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이 되는 것이라 그랬던가요? 율법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 가지 의미로 깊이 깊이 좀 생각해보면 그 속에 많은 교리적 연결이 될 수가 있겠습니다. 율법이 이루어진다 그말은, 율법이란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법칙입니다, 진리고. 그 진리가 이루어지는 것은, 그 진리는 진리 자체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진리가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 그 하나님의 뜻이 진리 속에 나타나있는데, 이게 좀, 왕의 명령이 신하들에게 하달이 되어졌는데 그 왕의 명령이 이루어질수도 있고 안 이루어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왕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우니까 세금을 좀 감면을 하자’고 왕이 명령을 내렸는데, 신하들이, 그걸 무슨 관리라 그럽니까? 탐관오리들이 많아가지고 백성들의 세금을 많이 매겨서 빼먹어야되는데 세금 감면을 법적으로 하고나면은 빼먹을 돈이 없으니까 왕에게는 ‘예’ 해놓고 자기들끼리 꾸며서 왕의 명령을 하달하지를 않고 세금감면을 안하고 그냥 둡니다. 그러면 그 왕의 명령이 이루어진겁니까, 안 이루어진겁니까? 안 이루어진거지요. 왕이 말을 했는데, 그 말대로 안된 겁니다. 그러면 그 말은 그냥 공중에 붕 뜬 그런 말이 되는 거지요. 그러면 그 말대로 이루어지려면 어째야 됩니까? 법에 법령이 서고, 백성들에게 거두어지던 세금이 줄어들어야 왕의 명령이 이루어진 것이고, 성취가 되어진 겁니다. 그러면 왕의 그 명령은 말인데, 그 말 속에는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들었고, 백성의 생활이 그 속에 들어있고, 그런게 들어있죠, 그러면 그것이 이루어지는데는 그 책임을 맡은 신하들이 나가서 법을 개정을 하고 개정한대로 관리들에게 전달해서 실제 백성들이 내는 세금이 줄어들므로 백성들이 세금 감면이 되어져서 생활이 좀 나아지고 왕에게 또 감사하는 소리가 들려지고, 이런 것이 나타나야 왕의 명령이 이루어진 것이고, 그러면 왕은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실제 그 백성들 생활속에 들어갔다 그말이지요. 이루어진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법칙인데, 하나님의 뜻입니다. 율법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뜻이라 말은 하나님의 생각이고 소원이고 목적인데, 그게 율법 속에 들어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하겠다, 그걸 위해서 이렇게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고 정해진 그 말씀이 있는데, 그 율법이 성취가 된다는 그 말은 율법에 명시된 하나님의 뜻대로 그대로 모든 것이 하나하나 차근차근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이루어지는 것이 말하자면은 그게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천국 건설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리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율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하나님의 목적 천국 건설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뭐가 이루어지는 거라고요? 율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율법이 성취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맞습니까? 000 선생님, 이해가 됩니까?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이해가 됩니까? 듣는 것 보니까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보니까.
그러면, 그런데 율법이 성취되는데, 그 성취되는 것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언제 된다고요? 율법이 성취되는 것이, 율법의 일점 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는데, 그게 언제 이루어진다고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이루어진답니다. 천지가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살고 있는 물질계 우주, 1차 창조에 속한 전부. 그러면 이것이 없어지기 전에 이루어진다는 말은, 이 물질계 우주 1차 창조 세계 안에서 이 기간 안에, 이 안에서 율법이 이루어진다는 그 말이고, 그 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뜻, 구원의 모든 역사 2차 창조는 1차 창조 기간동안에 1차 창조의 공간안에서, 1차 창조에 속한 모든 존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다 이루어진다 그말입니다. 이걸 가리켜서 2차 창조라 그리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1차 창조는 변동될 것들이고 진동될 것들이고 없어질 것들이고 이거는 하나에 이용되는 이용물이고 활용되는 활용도고, 그런 공간들이고 이것을 통하여 이 기간 동안에 이 공간 안에서 그것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가지고 2차 창조를 이루니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구원이고 하나님의 목적이고 뜻이며 천국 건설이고 그렇게 이루어진 것은 영원히 진동 변동되지 아니할 영원한 것으로 이루어지는 이것이기 때문에, 이걸 가리켜서, 그런데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이것이 무엇이 이루어지느냐? 율법이 이루어진다 그랬습니다, 율법이. 율법이 이루어지는 거니까, 율법대로 되는 것이니 2차 창조에 속한 모든 것들은 이루는 그 주체가 전부다 말하자면은 율법이다 그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말씀, 이 말씀이 1차 창조에 속한 모든 걸 창조했고, 동시에 이 말씀이 창조한 1차 창조에 소속한 그 기간 안에서 그 공간 안에서 그 모든 속한 것들을 가지고 2차 창조를 가지고 율법대로 다 이루는데 그 이루는 것이 다 율법이 이룬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의 구원, 하나님의 목적 기독자의 건설구원이란 것은 한말로 말하면 무엇을 말하는고 하니, 건설구원은 바로 하나님의 법칙 율법을 지켜서 율법대로 행하고 율법대로의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 건설구원이고, 이게 율법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것이 천국 건설이며 2차 창조며 성화구원이다 그말입니다. 집사님 논리가 맞습니까? 000 집사님 논리가 맞습니까? 이게 2차 창조에 속한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이걸 처음에 읽어보면 저도 몰랐습니다, 무슨 말인지. 그런데 설교록을 찾아보고 이래저래 연결시켜보니까 기가 막히게 연결이 된다 그말이지요. 말씀 전부가.
17절은 주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고, 그래서 이 율법을 완성시키셨고, 완성시키신 그 율법이 알고보니까 어떤 율법인고하니,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모든 걸 다 지으신 율법이고 동시에 이 율법이 그 지으신 1차 창조에 속한 물질계 기간동안 물질계 공간안에서 1차 창조에 속한 모든 것들을 이용해서 거기서 2차 창조 영원한 것들을 다시 하나님 율법 말씀이 이루는 것이니,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며, 하나님의 목적 성취며 천국의 건설이다. 이것을 바로 이 율법이 말씀이 하고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19절에, ‘그러므로’, ‘그러므로’는 앞에 두 말씀 17절, 18절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므로’. 율법을 완성했으므로 이 율법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다 이루어지는 그런 율법이므로, 그 안에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러므로, 그러기 때문에 필연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이제는 율법을 계명이라 그랬습니다. 지킬 하나님의 명령을 말합니다. 지킬 하나님의 명령을 말합니다. 율법입니다, 말씀이고.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그러면 이 계명 이 말씀 이 율법이 1차 창조도 했고, 율법이 2차 창조를 다 건설해 나가는 것이 율법인데, 이것이 말씀인데, 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말씀이 모든 걸 다 하는건데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하나라도 버리면, 문제는 이제 하나라도 버리면인데, 말씀은 굉장히 많습니다. 깊이 들어가면 무한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 많은 말씀 중에서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라.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 말씀을 버린다 그랬는데, 말씀은 1계명을 버리든 2계명을 버리든 10계명을 버리든 또 다른 말씀을 버리든 어쨌든 한 말씀이라도 말씀을 버리면, 버린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오일밤 예배때 말씀 드렸는데, 버린다는 것은, 버리는 그것은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버리는 행위지요, 사람의 행위입니다. 버리고, 인격 가진 혹은 지정리를 가진 그런 행위의 주체가 되는 그 주체자 사람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행위 중에 하나가 버리는 것인데, 버리는 것은 그 버리는 행위를 하는 그 인격자의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버리는 것. 그러면 안 버려도 되고, 안 버리면 되는데 버린다 그말이죠. 버리는 것이니까 버리는데는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고 까닭이 있겠습니다. 버리는 것은 주로 어떤걸 버립니까? 버린다 그러면 뭘 버립니까? 우리가 집안에, 요즘은 또 버리는 법을 배워야 된다 그러데요, 버리는 법을 배워야 된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어릴때 너무 가난하게 자라가지고 버리지를 못합니다. 좀체 잘 못버려서 어쨌든 막 꿍쳐놓고 재놓고 모아놓습니다. 다음에 또 쓸란가 싶어서. 그런데 그러다보면 10년 지나도 못 쓰고, 그래서 20년만에 버리기도 하고 그러는데. 어쨌든 버리는 것은 왜 버리며, 어떤 걸 버립니까? 버리는 건 쉽게 말하면, 가장 쉽게 뭐 버립니까? 쓰레기 버리지 않습니까, 쓰레기? 쓰레기 버리고, 쓰레기는 아닐지라도 어떤 것 또 버립니까? 쓸모가 없는 걸 버리는 거지요. 쓸모가 없는 것. 그런데, 쓸모는 있어도 선택의 기로에 딱 부딪혔을때, 그럴때는 어떤 걸 버립니까? 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은 꼭 잡고, 둘 중에 하나를 취사선택해라 그러면 보다 더 비싸고 요긴하다 싶은, 자기에게 필요하다 싶은 그것을 취하고 그것보다 못한 것은 눈물을 머금고 버리노라, 버리는 겁니다. 버리고 싶지 않은데, 롯이 아브람을 떠나고 싶었겠습니까? 눈물을 머금고 롯은 삼촌도 버렸고 도리도 버렸고 하나님도 버렸는데, 그 버릴때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눈물을 머금고 롯은 인간의 도리도 버렸고 사람도 버렸고 진리도 버렸고 하나님도 버렸습니다. 버린것에 대한 책임이 남한테 있지 않습니다. 롯 자기한테 있는 겁니다. 너가 선택해서 네가 재물을 취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버렸고, 네가 하나님의 진리보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 진리를 너는 버렸고, 너 자신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버렸지 않느냐. 네가 버렸지, 버리라고 강요를 했나. 누가 꼬았나. 너 스스로 선택해서, 너 스스로 판단해서 네가 버렸지 아니하냐. 핑계대지 못합니다. 여기 버린다는 말은, 그런걸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법. 누구든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으니까, 버릴때는 자기가 버렸습니다. 자기가 버렸으니 그 계명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던지, 아니면 그 계명보다 자기가 더 나은 것이 있으니깐 버렸든 어쨌든 자기에게 이 계명은 필요가 없어서 버렸던지 쓸모가 없어 버렸던지 가치가 낮고 적어서 버렸던지 아니면 비교해서 선택할 때 좀 더 못하니까 버렸든, 어쨌든 계명을 버린 것은 이 계명을 가지고 있는 네가 버렸다 그말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 자신 주체가 버린 겁니다. 그러면 이 계명은 작은 계명 하나라도 이 율법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지는, 그러면 온 천지보다 율법의 점 하나 글자 하나 획 하나가 더 중량이 무거운 이것이 율법인데, 온 천하를 다 버려도 율법은 버릴 수가 없는 것인데, 그 천하 속에는 인간도 들어있는데. 이런 율법인데, 그러므로 이런 율법이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이 이 율법 중에서 만약에 한 계명이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자기가 버렸으니까 그 사람은 율법을 버리고 있는 사람이고, 버린 사람은, 사람이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사참배를 하고 패전한 분들이 해방되고나니까 실패한 걸 알고, 그다음에 진실한 사람들은 설교할 때 목사님들이니까 눈물을 머금고 외쳤답니다. ‘여러분들, 신사참배는 죄입니다. 나는 약해서 신사참배를 했는데 여러분들은 하지 마십시오. 신사참배는 죄입니다.’ 하고 그렇게 외쳤다 그러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뜨겁게 회개한 사람들은 그래도 좀 일을 많이 하고 그래도 능력있는 유력한 종들이 되었답니다, 대부분은 다 이 핑계 저 핑계대서 합리화 시켜서 덮어 가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는데. 그런데 그분이 만약에 그다음에 회개해서, 회개란 것은 과거 실패가 다시 당면이 되어지고 부딪혀서 그때 넘어지지 않아야 비로소 회개가 되는 것인데, 그렇게 신사참배를 패전하고 아무리 말하고 외쳐도 그 사람이 신사참배를 하면은 안된다고 죄라고 외치는데, 그 외침 속에서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뭡니까? 당신은, 자기 자신은 했기 때문에, 이미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한 사람이 신사참배를 할때는 안한 사람이 가르치는 것 하고 한 사람이 가르치는 것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신사참배를 한 사람이 하지 말라 그러면 아무리 하지 말라 그래도 자기는 했기 때문에 그 한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도 다음에 회개하고 다음을 기약하면 낫지만은. 그런데 안 한 사람은 담대하게 말하는 겁니다. ‘나는, 신사참배는 죄기 때문에 나는 안했다. 이거는 하는게 아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신사참배는 죈데, 나는 연약해서 했다.’ 그러면 듣는 사람이 ‘약하면 할 수 있는 것인가? 해야되는 것인가?’ 거기는 힘이 그만큼 빠져 나가는 겁니다. 말씀을, 계명을 버리면, 버리는 사람은, 버린 사람은 그 계명에 대한 가치관, 선택에 비교 선택에서 취사선택에서 뭐 때문에 버렸던지, 돈 때문에 버렸든 사람의 앞면 때문에 버렸든, 자기 습성 때문에 버렸든 목숨 때문에 버렸든, 어쨌든 계명을 버렸으면 버린 그 사람 속에는 버린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아무리 말씀을 바로 가르친다 해도 그 사람은 계명을 버리는 그것을 가지고 가르치는 거니까 그 밑에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계명을 버릴 수 있는 그런 확률이 많게 되는 겁니다. 이걸 언제 집회때, 호세아서입니까? 애미가 먹이는 젖, 그 어미의 젖통도 음란하다 그래 놨지요. 참, 그 말씀 해석이 얼마나 깊은 것인데.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그러면 그 사람은 그때는 하나 버렸지만은 다른 것보다 또 더한 것이 오면 또 다른 것 또 버릴 수 있는 사람이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를 버리면 결국 그 사람은 전부를 다 버린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 버리는 것은 자기가 안 버릴 수 있는데 버리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어렵습니다. 알 수 있는데, 알지 아니한 것. 버리지 않을 수 있는데, 버린 것, 이걸 말하는 겁니다. 사람이 다 천차만별인데 그래서 주신 분량이 다 각각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만가지를 다 지켜도 어떤 사람은 열가지 밖에 못 지키는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성경에 다 나오지 않습니까? 만가지를 깨닫고 만가지를 지킬 수 있도록 분량을 주신 그 사람은 만가지를 깨달아 알아야 되고 만가지를 다 지켜야 비로소 율법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열가지만 깨달아 알고 열가지밖에 지키지 못할 그 사람은 열가지 깨닫고 열가지 지키면 율법을 다 지킨 붙든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열가지 깨닫고 붙든 사람하고 만가지 중에 구천구백구가지 붙들고 지킨 사람은 굉장히 차이가 나지만은 하나님 앞에서는 ‘너는 다 못 지킨 사람이고 이 사람은 다 지킨 사람이다.’ 그렇게 판단한다고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계산을 가지고 따지면 이 세상 조건이 머리 좋은 사람과 많이 배운 사람과 많이 가진 사람하고 머리 나쁘고 못 배우고 못 가진 사람하고 누가 더 유리합니까, 신앙생활에? 누가 더 유리합니까? 참 인정하기 어렵지요. 그런데 실제보면 그렇습니다. 실제 믿는 사람들보면은 형제들아 믿는 사람들을 봐라. 그리스도 안에서 학벌 좋은 자, 문벌 좋은 자가 많지를 못한 것이 실제 현상세계 지상 교회에 현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정말 머리 좋은 사람, 잘난 사람, 실력 있는 사람은 전부 세상으로 나가고 눈에 보이는 가견적인 그것 붙들고 나가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하나님 이걸 붙들고 나가는 사람이 참으로 참으로 희귀합니다. 사도바울 같은 경우 특별한 경우입니다. 아주 희귀합니다. 그런 경우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전부다 사도바울을 제외하고는 전부다 고기 잡는 어부들 다 고만고만한 서민들입니다. 별 볼 일 없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다 사도가 되었고,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특별히 공부 많이 한 사람을 특별하게 뽑은 것이고, 그 외에는 거의 다 대개 그렇습니다. 교회도 보면 목회도 그렇고 신앙도 보면 대개 다 정말 진짜 신앙 있는 그런 사람들 보면은 공부도 많이 하고 한 사람들이 있는데, 대개 보통 보편적으로 보면은 다 그만 무식하고 못나고 가난하고 일반 서민들 대부분이 잘 믿는 사람들이 많지, 참 유력한 사람들 중에 잘 믿는 사람들은 희귀합니다. 그리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인물이 못나서, 부모가 못나서 나도 못났고, 가난하고 배운 것 없고 형편이 어렵고 거기 대해서 불평 불만할 조건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너한테 많이 달라 그러더냐. 너의 머리 안 좋은 고만고만한것도, 경제 어려운 것도, 실력 부족한 것도, 내가 너에게 그만큼밖에 안 줬으니까 그런 것이고. 내가 너에게 그만큼만 줬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요구하는 것도 그만큼밖에 요구하지 않겠다.’ 그런데 그 작게 요구한 것에 대한 대우는 엄청나게 많이 주고 많이 요구한 내놓은 그사람하고 작게 주고 작게 받은 사람하고 대우는 꼭 같습니다. 그러면 불만할 게 없고 오히려 적게 받은 사람은 감사할 일이지요. ‘나는 이만큼밖에 못했는데 이런 나를 이만큼 큰 대우해주시니까 황송해서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감사할 일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여기서 그 말씀 합니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 버린다는 것은, 자기가 버리는 것입니다. 임의로 버리는 것이고 고의로 버리는 것이고 능동적으로 자기가 버리는 걸 말하는 겁니다. 이 계명보다 더 귀한 것 더 큰 것 더 아끼는 것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이 계명을 버리지, 이유없이 버리지 않습니다. ‘목숨을 지켜야 되지 목숨 버리고 계명을 취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너는 목숨이 계명보다 귀하니까, 그 목숨 취하고 계명을 버렸으니까 너는 여전히 계명을 버린 사람이다’. 사람이 목숨 내놓고 계명 취하기가 쉽겠습니까? 000, 쉬워요? 대단히 어렵겠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것도 참 많이 생각해야 될건데, 한편으론 쉽고 한편으론 너무 어렵기 때문에 주신 방법이 또 몇가지라고요? 하나는 회개의 기회를 주셨고, 사람이 약한 줄 아시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넘어졌느냐. 또 일어서라.’ ‘또 넘어졌느냐. 또 일어서라’. 하루에 일흔번씩 일곱 번 넘어져도 또 일어서라. 고범적으로 그래서는 안되겠지만은 일어서고, 네가 부족하냐? 네 힘이 부족하니, 가사가 그 다음 뭐지요? ‘네 힘이 부족하니 주 권능만 믿게’, 그 앞에 또 뭐가 있는데. 무엇으로 지켜서요? ‘기도로 지켜서’. 기도로 도우심을 받아서. 그래서 주님이 대속의 공로 베풀어서 중보가 되시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연결시켜놨기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겠다 해주셨으니까 하나님을 내가 모시고 계명을 붙들기 위해서 기도하는 걸, 그 기도를 안 들어 주시겠습니까? 진실하지 못하고 자기를 다 드리지 아니하니까 안되는 것이지. 자기만 다 드리고 진실하게 구하면 얼마든지 들어주시는 것이 성경역사고 교회 역사고 오늘날 우리가 실제 자기 생활에 들어가보면 얼마든지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란 것은 진실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자기가 자기를 속여서 덮어 가리고, 그러고 하나님을 속인다는 것은 속지 않는데, 그러기 때문에 구별이란 것은, 진실과 구별은 연결이 되지요. 구별은 거룩이고, 거룩이, 거룩의 완성이 진실이지요. 맞습니까? 0선생님, 맞습니까? 거룩의 완성이 진실이지요. 그러니까 진실은 구별하고 구별하고 파고 들어가는 겁니다. 자기를 파고 따지고 따지고 따지고 파고 들어가서 자기를 아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이 말씀을, 이 계명을 버릴 수 밖에 없었느냐? 파고 들어가보면 자기 스스로 압니다. 그래서 버리고 그 가치의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이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 하면은, 지극히 작은 하나를 버렸는데 어떻게 된다고요? 계명을 전부다 버리는 게 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는 것이고,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면서 가르치면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행한만큼 커지게 되겠습니다. 그리고 서기관 바리새인보다 낫지 않으면 안된다 말씀하신 것이고.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목적은,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신앙인데, 그 하나님을 향해 가는,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내가 모시고 섬기고 그분을 닮아가는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기독교고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이 천국 건설이고 이게 신앙생활의 전부고, 이게 중심 중추입니다. 나머지는 전부다 연결된 보조적인 것이고, 그런 것들이고.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모시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것,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처럼 되어지는 이 모든 것의 유일한 방편 법칙 길은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 율법 말씀이다 그말입니다, 말씀.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이 법칙이 우리 속에 있어야 되고, 이 말씀을 모르고는 결코 신앙생활 할 수가 없는 것이고, 이 말씀을 어기면 신앙이 아닌 것이고, 이 말씀에 틀리면 잘못된 신앙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말씀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말씀이 전부라 할만큼. 이 말씀 통해서 하나님도 나타나고 이 말씀 통해서 하나님을 모시기도 하고 섬기기도 하고 그분을 닮기도 하고, 그분의 뜻도 소원도 생각도 전부다가 말씀 속에 다 들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전부라.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란 것은 한말로 말하면, 믿음이 무엇이냐? 믿음은 한말로 말하면 말씀 지키는 생활이다. 신앙 생활은 한말로 말하면, 실제로 말하면 신앙생활은 전체로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향한 생활인데, 실제적으로 말하면 신앙생활은 말씀을 지키는 생활이 신앙생활이다. 예배당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신앙생활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도 신앙생활이 될 수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은 말씀을 지키는게 신앙생활이고 그 말씀을 지켜야 되니까 지키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알아야 되고, 알아야 되니까 말씀을 부지런히 읽어야 되고 들어야 되고 생각해야 되고 연구해야 되고 물어봐야 되고, 이게 말씀 공부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신앙생활이라. 이와 관련된게 전부다 신앙생활이다 그말입니다.
그다음에, 이번 집회 말씀 중에서 이것하고 연결시키는 것이 있는데, 참 중요한데, 간단하게 말하면, 에덴동산에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왜 먹었습니까? 하와가 선악과를 왜 따먹었습니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해서. 저것만 먹으면 모든 만사 해결 될 것 같고, 말하자면은 전부다 전지전능이 될만큼 그렇게 그 선악과가 좋게 아름답게 능력있게 영광스럽게 귀하게 그렇게 보였습니다. 온 천하에 하와 눈에는 선악과가 가장 좋게 보였습니다, 표현된 것 보면은. 그런데 그 선악과가, 하나님의 말씀은 그 선악과에 대해서 뭐라 그랬습니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랬으니까, 그 선악과는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니까 저 선악과는 먹으면 죽는 것이고 멸망하는 것이 선악과인데. 하와가 또 다른 눈으로 보니까 보음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로울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정반대로 보였습니다. 그렇게 정반대로 보인 이유가 무엇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선악과를 보니까, 먹으면 죽는 독인데, 언제부터 그 선악과가 정반대로 보였습니까? 배암의 미혹을 받고나서부터. 배암의 미혹은 배암의 말이고, 배암의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뭐라 그럽니까? 배암의 지식이고. 배암의 지식을 가지고 나서 선악과를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모든 것 할때 아무리 조심을 하고 조심하고 따지고 구별해도 모든 일에 사리판단 취사선택에 어떤 일을 할때 조심하고 조심하고 따지고 따지고 살피고 신중히 하고 아무리 해도 그러면 성공이 되느냐? 봐야 됩니다. 모르는 겁니다. 양심을 쓰면 일이 성공되고 구원이 되어지느냐? 모릅니다. 봐야 됩니다. 가장 궁극의 무엇이 중요하냐. 가장 인간에게 있어서 사람의 영생을 두고 영멸을 두고 승패의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심도 아니고 신중도 아니고 조심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니고 바로 지식을 어느 지식을 자기 주체지식으로 가지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능동 주체 지식으로 가지면, 그다음에 그 지식에 맞춰 양심을 쓰고 조심하면 모든게 다 바로되고 구원이 되어지는 것이고 생명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 아니고 인간 지식을 가지고 자기를 끌고 가는 주관적인 지식으로 가지고 그다음에 하면은, 조심하면 조심할수록 양심 쓰면 쓸수록 그 사람은 멸망으로 더 깊이 들어가지 구원과는 천리만리 거리가 먼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식이 내 속에 먼저 바로 자리잡고 있어야 그다음에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지, 세월호 사건 났을때 그 교파가 그게 전체적으로는 복음침례? 0선생님, 맞습니까? 기독교 복음침례지요. 그중에 한 파지요. 전체다는 아닐테고 그 사람들이. 제가 잘을 모르겠습니다만은.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래가지고 그렇게 된 건데, 성경을 잘못 알고 잘못된 길을 가니까 저런 오만 문제가 다 생겨지고, 그냥 묶어서 기독교도 다 같이 욕을 얻어먹게 되는 겁니다. 사이비 집단이다 그래가지고.
하나님 말씀, 옳고 바른 하나님 말씀을 내가 먼저 가지는 것이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지런히 성경 읽고, 또 설교록 읽고 예배시간 참석을 하고 생각을 하고 명상하고 연구하고 말씀으로 양심을 쓰고 살펴서 옳은 진리지식 하나님 말씀을 바로 가지는 것이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하고, 그리고 그 말씀대로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러고나면 나머지 결과는 우리가 전혀 상관할바가 아닙니다. 내가 말씀대로만 바로 하고 나면, 되어진 결과는 나사로처럼 되든지 누구처럼 되든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감옥에 가든 풀무불에 들어가든, 사자굴에 들어가든 전혀 상관할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책임을 지니까. 문제는 내가 말씀대로 됐느냐, 바로 됐느냐 잘못 됐느냐 그게 문제지, 바로만 됐다면. 그래서 다니엘이 담대했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담대했습니다. ‘왕이여, 우리를 풀무불에 집어던지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기서 건져내실 것이고, 건져내지 않아도 우리는 거기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시옵소서.’ ‘왜 안합니까?’ ‘거기 절하는 것은 명백히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2계명 어기는 죄가 되기 때문에 결코 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계명 지키다가 풀무불 속에 던져지면 하나님이 필요하면 건져내실 것이고, 안 건져내도 우리는 계명 지키다가 죽는 거니까 하등에 상관이 없으니까 아예 절 안 할 줄을 아십시오’. 다니엘은요? 사자굴 속에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뭐라 그랬습니까? ‘ 나의 무죄함이’ 무죄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없다는 겁니다. ‘나는 말씀에 틀린 것이 없고 말씀 어긴 것이 없기 때문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하다가 내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담대함이 생겨집니다. 말씀에 거리낌이 없으면 양심에서부터 용기가 생겨지고 담대함이 나옵니다. 힘이 나고. 그런데 자기 속에 구석진 곳이라도 말씀 어긴 죄가 있으면 뭘 해도 그것 때문에 괴롭고 힘이 빠져나가는 그런 것이 된다 그말이지요.
신앙생활은 말씀 지키는 생활이라, 이 말씀 오늘 기억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허영과 허욕을 다 버려야 되고 우리 주관을 다 부인을 해야 됩니다. 어쨌든 말씀이 신앙의 길이고 법칙이고 그 속에 전부다 들었습니다. 완전케 하신 율법. 천지는 없어져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다 이루어지는 율법.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버리고 행하면 지극히 작다 일컬음 받는 이 말씀 기억을 하고, 우리는 말씀 그대로 믿고 행하는 그런 우리 신앙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