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0-주후(마5:13-16)
작성중2014-07-21조회 308추천 26
20140720 주후
마태복음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하는 그런 면도 있고, 또 세상에 빛으로 사는 그런 면도 있는 이런 면들이 다 있다 그리 볼 수 있겠고, 연결시키면 빛으로 살려면 소금이 필연적으로 되야 되는 그런 면이 있는 것도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소금이란 것은 오전에 잠깐 말씀을 드린대로 자신이 녹아져서 점점 줄어지고 없어지므로 말하자면 자신이 희생됨으로, 다른 음식을 맛을 내고 상하지 않게 하는 그런 역할 하는 것이 소금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의 비유인데, 우리 믿는 사람이 세상의 소금이라 그말은 이 세상에서 자기 사는 자기 세상에서 자기가 녹아져 희생이 되어지므로 자신이 손해보므로 내가 손해보고 내가 참고 내가 억울함을 당하고 내가 견디고 내가 애매한 소리 듣고 들은 그대로 다 내놓고 풀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과 그의 구원의 유익을 위해서 나의 억울함을 참고 삭이고 고통을 참고 삭이고 견디고 애매함도 견디고 또 손해도 보고 또 가질 것도 못 가지고 여러 가지 그런 희생을 당하는 이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과 더 멀어지지 않게 만들고, 또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참사람의 모습인가를 보여주는 인간의 말하자면은 가치 맛입니다, 인간미. 이걸 보여주는 것이 소금의 역할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가 겉보기에는, 또 실제 그럴수도 있겠지만은 사람이란 것이 다 보면은 다 누구나 자기 유익을 다 차리고 손익계산을 다 따져서 영악하게 그렇게 처세하고 그리 살아가지만은 사람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있는, 전부다는 아니지만은 사람에게 있는 모든 요소가 성품이 하나님에게부터 하나님의 것을 닮은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두셨다 그말이고 좋은 면 긍정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을 안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안다’ 그말이 무슨 말인고 하면 사람이 소금이 아니고 차돌같은 그런 사람이 돼서 어떤 경우도 억울한 소리는 절대 듣고 있지 못하고 애매한 말 들으면 넘어갈 수 없고 또 일원짜리 하나도 손해는 보지 아니하고 그렇게 세상을 실력있게 강하게 그리 사는 그런 사람도 사람들이 살아가다보면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란 것을 알게되고, 또 겉으로 어리석고 못나고 그래서 속임을 당하고 또 쥐어박아도 참고 견디고 그래도 저 사람이 바보같으나 바보가 아니고 저 사람은 뭔가 뜻이 있고 의지가 있고 뭐가 있어서 참고 견디고 손해본다는 그런 사실도 사람들은 접촉해보면 아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의 말과 대하는 태도만 보고 사람을 상대하면 크게 오판하기 쉽고 속기가 쉬운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금으로 살면 안 믿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압니다. 저 사람은 지금 어떤 이유나 목적, 근본적인 것 세밀한 거는 모르겠지만은 사람이 보니까 못난 바보 같은 그런 사람은 분명 아닌데 자기대로 계산도 있고 손익도 따질 줄 알고 다 할 줄 아는데 보니까 ‘지금은 참는다’ ‘손해를 보고 있다’ ‘견딘다’ ‘자기를 희생을 한다’ 이걸 사람들이 보면은 안다 그말이지요. 저만 그리 생각합니까? 우리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안 그렇습니까? 사람보면 다 안보여지는가요? 눈에 보면 압니다. 그러니까 존경할 만한 사람, 고만고만한 사람, 마음 속으로 겉으로 내색은 안해도 속으로는 별 볼 일 없는 사람 이렇게 판단되는 사람, 사람이 조금 접해보면 다 알게 됩니다. 그런데 얼른 보면 몰라도 시간을 두고 좀 접해보면은 어지간하면 속에 다 나오기 때문에 알게 된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속이지 말라 그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을 속이는게 스스로 속이는 것이고 자기를 속이는게 다른 사람을 속이는게 스스로 속이는 겁니다. 내가 남을 속였는데, 속였는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속지 않는 분이고 지금 속였는 줄 알았는데 그 속인 것이 멀리가보면 오히려 자기가 속은 것이지 남을 속이므로 자기가 손해보지, 속임을 어리석게 속임받는 그런게 세상에 있는 것 같으나 좀 멀리 보면은 우리가 어리석게 속는 그런 속음으로 남을 속이는 죄 짓도록 그런 거는 피해야 되겠지만은, 그러나 만약에 복음 위해서 필요하고 그렇다면 속임을 당하는 것 같으나 속는 것이 아니고 남을 속여 얻는 것이 있는 것 같으나 결국 좀 지나고보면은 자기만 손해보지 얻는 유익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말에 못난 부모에게 그 자녀는 끝이 있어도 잘난 부모의 자녀는 끝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리 말합니다. 부모가 너무 잘나고 실력있고 똑똑해서 자녀 뒷바라지 다 처리하면 그게 좋은 것 같으나 멀리 전체로 가서 보면은 오히려 그게 해독되는 그런 경우가 많고, 아주 못나고 바보천치같은 그런 부모인데 그래도 뒤에 알고보면 그 자식들이 잘되는 그런 경우도 많이 있다 그래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지혜롭고 인간이 명철하다는 것은 성경에 인간의 지혜는 다 무지고 인간의 명철 그거는 다 손해보는 것이지 하나님의 지혜라야 참된 지혜고 그런 것이지 인간의 것은 별 가치로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소금으로 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왜 소금으로 살면 이거는 신앙세계고 하나님의 역사고 진리 역사기 때문에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것 같으나 그러나 안 믿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 그말입니다. 믿는 사람이면 더 알겠지요. 모르는 사람은 이단이 될 사람들은 모릅니다. 딱 주관에 붙들리고 이단이 될 사람들은 모르지만은 좀 정상적인 사람이면 다 압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 덮어쓰고 감옥갔는데 요셉은 참았고 견뎠고 손해봤고 그 여인이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모조리 다 뒤짚어쓰고 자기 일생을 망칠 수 있는 일입니다. 작은 사건이 아니고 자기 앞날에 평생을 완전히 절단내고 끝날 수 있을만한 그만한 사건이지만은 다 덮어썼습니다. 말씀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생각을 했겠지요. 그 여인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다 뒤집어 썼는데 마지막 끝에 가서 보니까 손해 본 것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그걸 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손해보고 희생을 당했기 때문에 요셉이 총리가 된 겁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요셉은 총리가 못됐을 겁니다. 다니엘이 정적들이 자기를 제거하려는 그런 계략을 다니엘이 몰랐겠습니까? 모르면 바로 당하는게 아니지요. 다니엘은 안봐도 알았을 겁니다. 어인이 찍힌 것을 알았다 하는 것 보면 그거야 소식 듣고 알 수 있겠지만은 사람이 그정도 위치가 되면 정적이 누구며, 우리가 우리 정도 보통 사람들도 사회 생활해보면 회사에 가보면 ‘저 사람은 나하고 어떤 면에 대립이 된다, 나하고 어떤 것은 같은데 어떤 것은 다르다, 누구는 나하고 친분이 좋고 누구는 나하고 적대감 있다’ 이런 걸 알잖습니까? 000씨 알지요? 친구들관계도 알지요? 사람보면. 다 압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는데, 다니엘은 우리보다 10배나 뛰어난 그런 지능가진 사람이니까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알고 왕에게 그 사실을 가서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해명하지 않았습니다. ‘임금님, 지금 저 사람들이 저를 모해하려고 저렇게 계략을 꾸미는데 넘어가면 안됩니다. 어인 찍지 마십시오.’ 그런 일을 다니엘이 안했다 그겁니다. 알고도 다니엘은 당한 겁니다. 자기 할 일이 아닌 줄 알았기 때문에. 그런데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고, 들어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났고, 드러나므로 다니엘은 그 정적들을 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알았지만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안봐도 그들 위해서 기도했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 그들의 그 모략을 안되는거니까 그게 성사 안되야 되겠고,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 했겠지요. 그랬는데 알면서 다 당했지만은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는데 살아나왔고 그 정적들은 다 제거된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니엘의 정적들이 가족들하고 함께 사자굴에 던져져서 뼈까지도 다 움켜서 부숴뜨렸더라 그리 됐는데 거기 대해서 다니엘은 털끝만큼도 하나님 앞에 책임이 없고 심판이 없습니다. 그들을 다니엘로써는 아꼈고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아낀다는 것이 어떤 면인가를 깊이 깊이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사람을 아끼지 않는 거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결단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나와있습니다. 사람을 아끼지 않는 거기는 어떤 위대한 사람도 하나님의 권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아끼는 그게 있어야 나타날 수 있는 그게 가장 필수고 전제조건이라. 하나님의 권능은 인간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소금으로 살면 다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우리가 소금으로 살면 내가 녹아지는 겁니다. 녹아진다 말은 희생이라 말이죠. 희생하는데 자기가 희생하는 것, 내가 희생하는 것을 내 주변 사람들이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전파되어 가는 겁니다. 또 사람의 참된 인격을 그들이 보고 알게 되는 겁니다. ‘아 사람은 저렇게 사는 것이구나’. 현실에 마찰을 피하는 그런 어려움을 피하는 안일주의 복지부동 이런 것이 아니고 알지만은 또 하면 할 수 있지만은 소금이 되기 위해서 소금 노릇 때문에 안 하는 것이고 못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믿는 사람의 일이고 이런것이 있어야 그다음 14절에 말씀하신, 빛노릇을 할 수가 있는 것이라 이걸 참고로 기억을 하시고, 그다음에 16절에 보면 중간에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이것도 구별해야 되는데, 착한 행실이 어떤 행실이냐? 착한 행실은 우리가 배우기를, 착하다는 말을 한문 글자로 바꾸면? 선이지요, 착할 선(善)자. 선한 행실이고, 선이 뭡니까? 하나님 중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중심의 행실이란 그것이 어떤 것인가? 저희로 하나님을 중심하는 너희들의 생활을 보고, 행실을 보고 하늘에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마리씀을 하셨는데, 하나님 중심의 행실이 어떤 행실인가? 이거는 말하자면은 요셉같은, 말하자면 다니엘 같은 그런 경우입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들어가기전에, 기도를 계속 하는데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 했는데 그거는 다니엘 자기 개인의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에 내면적인 하나님 모신 생활입니다. 그 생활이 착한 행실입니다. 그 생활이 외부로 나타나기를 진리대로의 모든 행위로 나타나서 임금님에게는 충성으로 나타났고 동료와 모든 사람들에게는 심의로 나타났고 자기 맡은 책임과 의무에 또한 충성으로 나타났고 정직으로 나타났고 이렇게 나타나니까 이거는 안 믿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도덕적인 인간관계적인 면이고 그들이 다 좋아하는 겁니다. 그런데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도덕적인 이런 인간관계적인 이런 어리고 안 믿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좋은 면들, 이 면들 속에 그것을 그리 나타나게 만든 원동이 무엇이냐? 원동이 뭡니까? 그 원동이 바로 외부로 애굽나라에 바로 왕이, 또 바벨론 나라의 다리오 왕이 요셉과 다니엘을 그에 모든 걸 인정하게 된 것은 다니엘의 기도때문이 아닙니다, 요셉의 믿음 때문에 그들이 인정한게 아닙니다. 요셉을 인정한 것은 외부로 나타난 요셉의 진실과 열심과 왕에 대한 충성과 흠없는 이런 지혜, 이런 것 때문에 다리오가 인정했고, 또 바로가 인정을 한 것이지,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 믿음 기도 때문에 인정한게 아닙니다. 맞습니까? 논리적으로 생각해볼때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아닌데, 외부로 나타나는 그것이 그리 되어졌는데 그걸 보고 인정을 했는데, 그런데 요셉과 다니엘은 외부로 나타난 진실과 정직과 충성과 진실, 이런 모든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그 생활이 그들이 알기에는 그게 전부고 하나님은 막연하게 알지만은 요셉과 다니엘은 외부로 나타나는 그 모든 생활의 원동이 뭐냐? 원동이 바로 착한 행실, 하나님을 모신 거기서 뿌리되어 나온 그겁니다. 그게 착한 행실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다니엘의 외부에 나타난 그 모든 행동은 착한 행실입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어떤 안 믿는 사람이 요셉과 꼭같은 진실과 또 지혜와 충성과 이런 걸 가지고 그렇게 요셉처럼 살았는데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겉으로 볼때는 착한 행실이 될지 몰라도 그거는 착한 행실이 아닌겁니다.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모신 그게 원동이 되고 능동이 돼서 근거가 돼서 거기서 나온 외부적으로 덕을 끼치는 그 생활이 바로 착한 행실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십니까? 이걸 모르면 이것도 신앙세계를 모르는 겁니다. 누가 뭐라그래도 하나님을 노래 부르는데 신앙은 이 말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서 영원을 두고 제가 담대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을 두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데 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는 하나님 한분이 전부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자기 관계가 신앙이고 그분을 알아야 신앙이 되는 것이지 하나님을 모르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신앙, 이런면으로 따져보면 오늘날 이 세계에 우리나라 기독교에 신앙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신앙은 그리 많지를 않습니다. 다 그냥 윤곽적이고 희미한 그런 것이지, 지금 우리나라 세계 교회에 하나님 모신 그런 사람이 없지 않으나 그렇게 많지 않고 아마 귀할 겁니다. 이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고 성경이 그래놨습니다. 뭐라 그랬습니까, 성경이? 지금 시대에 하나님 오신 신앙이 귀하다는 말 성경에 뭐라 그랬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올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믿는 자를 보겠느냐’ 성경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그런 사람이 그만큼 희귀하다 그말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신앙이고 모시는게 신앙이고 그분과 자기 관계가 맺어진 만큼이 신앙이고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란 것은, 이번 집회 내용인가 그런 말씀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모든 존재 움직임의 능동자입니다. 모든 존재는 그분에게 피동이고 그런데, 어느 일정 범위안에서는 우리가 능동이고 하나님이 피동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거 이해가 되십니까?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는 우리들이 능동이고 하나님이 피동입니다, 그리 말씀 하십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대응이다 그말이지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내가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겠고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능동입니까 피동입니까?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능동입니까, 피동입니까? 우리들이 내가 복 받을 행동을 하면 복을 주시겠고 내가 능동이고, 하나님이 내 행동에 따라서 복을 주시니까 피동이지요? 내가 죄를 지으면 징계를 내리겠고, 하나님의 피동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것도 다 하나님의 예정이지만은. 그래서 너희 착한 행실이란 이 말씀도 하나 짚고 넘어가야 되겠다 싶어서 별도로 떼서 설명을 드리는데 이걸 또 기억을 하시고.
본문에서 크게 구별하면, 본문에서 네가지를 말씀할 수 있고 그다음 전체 묶어 하난데, 첫째는, 제목을 붙여봤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 말씀의 제목은 빛의 사명이라 그리 생각해봤습니다. 빛의 사명.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빛의 사명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누구냐? 너희라는 것은, 이 너희는 성경대로 말하면 이 너희는 누굴 말하는 겁니까? 성경대로 말하면 너희라고 하는 이 대상은 누구입니까? 산상보훈의 예수님을 따라나온 그 무리들 그들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런데 그들이 주님을 따라온 사람들, 주님에게 배우겠다고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이니까 오늘로 말하면 택자들이겠고 믿는 사람들이겠고 이 성경을 읽고 보고 듣는 오늘 우리들이 바로 너희라 그리 말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이 뭐냐? 세상은 무엇이 세상인가? 세상은 여러각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천국 아닌 곳이 세상입니다. 천국의 반대가 세상이다. 그런데 세상을 말할때는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세계가 전부 세상, 영계는 빼놓고, 하나님이 지으신 물질 세계 그게 이 세상입니다. 넓은 범위겠고, 그리고 좁히면 우리들의 생활환경이 세상입니다. 내 생활환경이 성경에 말씀하신 세상입니다. 그러면 내 생활환경은 한 곳에 고정되있습니까? 여러곳에 있을 수 있습니까? 자기의 생활환경, 생활이라 말은 살아가면서 활동하는 곳인데 자기 생활 환경이 세상인데, 그 생활 환경은 한 곳에만 고정이 되있습니까, 여러곳에 나누어집니까? 생활환경은 집에 있으면 집이 내 생활환경이고, 직장에 출근하면 사무실이 내 생활 환경이고 학교가면 학교가 생활환경이고 거래처가면 거래처가 생활환경이고, 그 속에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있고, 그러면 생활환경이라 말은 여러곳에 나누어져 있을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입니다. 거기가 내 세상입니다. 그런데 전체로 앞에 오전에 말씀드릴때, 세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세계 물질 세상인데 그 세상이 원래는 어둡지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 타락전 에덴동산은 빛의 세상이었습니다. 낙원입니다, 지상 낙원. 거기는 어두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진리를 거역해서, 하나님 배반하고 진리 거역해 범죄하므로 하나님과 끊어져서 사망이 되니까 생명에서 끊어졌으니 반대로 어두움이 되었고, 진리에서 끊어졌으니 죄가 되었으니까 어두움이 되어진 것이 이 세상이다. 인간이 어두워지니까 인간 사는 세상 전부다는 어두워지는 겁니다. 이거는 자연계시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살고 있는 환경이 달라집니다. 저는 자동차를 다른 사람 차를 자주 못타봐도 한번씩 이래 보면은, 자동차를 타보면, 또 보면은 그 어떤 사람의 차는 안에 들어가보면 차 안이 정리가 딱 되있고 굉장히 깨끗합니다. 그러면 안봐도 이 분의 성격이 참 깨끗하고 깔끔하고 정리 잘하는 분이구나 그렇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안봐도 그 사람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보면, 내부를 보고 외부를 보면은 그 사람은 성격이 깔끔한 사람이구나. 또 자동차가 보면은 겉도 사람이 실수할 수 있겠지만은 별로 박힌 곳 없이 깨끗하면은 ‘이 사람은, 이 자동차의 주인은 차분한 성격이구나, 신중하구나.’ 어느정도 짐작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자동차는 여기 박히고 저기 박히고 긁힌 거 보면은 ‘이 사람은, 안봐도 이 자동차 차주는 아마도 성격이 급하고 덤벙댈 가능성이 많겠다.’ 그리 볼 수가 있습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이 판단이 별로 틀리지를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이면, 그러면 자동차가 그리 된 것은, 자동차가 그리 된 것이 아니고 누가 그리 만든겁니까? 그 사람이 그리 만든 겁니다. 예배당을 보면 그렇습니다. 예배당에 그 교회 교역자와 사모님과 그 교회 중심되는 교인들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그 교회 들어가보면, 그런데 작은 교회는 대개 교역자와 사모님 두사람 문제인데, 가보면 예배당 안에 딱 들어가보면 작은 교회는 대반에 표가 납니다. 몇군데 저도 가봤는데 예배당인데 예배당이라 하기 민망할만큼 예배당안이 엉망이 되있는 그런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민망할 정도로 그런 예배당들이 있습니다. 안봐도 이 교회 교역자님은 보니까 이런 면에 잘 모르는 구나. 그렇게 짐작을, 그걸로 전부는 아닌데 대개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배당을 보고 누굴 안다고요? 그 자동차를 보고 뭘 안다고요? 자동차 주인 사람을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집안에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면 그 사람을 안봐도 이 집의 가정주부는 게으르든지 깔끔하게 정리를 못하는 주부로구나 하고 진단을 내리면 별로 틀리지를 않는다 그말입니다. 사람이 환경을 만든다 그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하고 연결됐던 인간이 하나님과 끊어져서 범죄하고 나니깐 세상이 어두워졌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나니까 세상이 어두운 세상이 되었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이게 좀 앞에 말씀대로,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젊은 사람들에게 늘 염려가 그겁니다. 늘 염려가 보면은 젊은 사람들이 나이가 그래도 보통 10대 후반인데 이것도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성격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여러 가지 그런 면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다는 아닌데, 그래도 뭐든 차분하게 세밀하게 깔끔하게 정리정돈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창세기 1장에 뭐라 되있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 그전에는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땅이 어떻다고요? 혼돈이 무슨 말입니까? 막 뒤섞여 있다는 뜻입니다. 뒤섞여 있으니까 거기는 하나님이 아직까지 마무리 짓기 전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기전 땅은 막 뒤섞여있는 겁니다, 모든게 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그 모든 것을 정리정돈 다 시킨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리의 하나님. 같이 해보시겠습니다. ‘정리의 하나님’ ‘정돈의 하나님’. 자기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정돈하는데서 무엇이 만들어진다고요? 자기의 인격이 만들어집니다. 자기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된다 그말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란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물질계, 인간 세상인데, 그 세상이 원래는 빛된 빛이 있는 세상이였는데 인간이 하나님하고 끊어져서 사망의 어두움 되고, 인간의 모든 행위가 진리적이지 못하고 진리에서 떨어져 어긋나서 진리를 거역하므로 범죄한 그런 행위가 되어지니까 죄의 어두움이 되어지고, 인간이 어두워지니까 인간의 사는 모든 세상이 다 어두운 세상이 되어졌다 이거는 필연적으로 그리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위에 올라가면 하나님의 예정이고, 이렇게 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그 세상에다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내야 되고 보내가지고 거기서 하나님 백성들을 가르치며 연습시키며 연단을 시켜서 영원한 천국의 백성을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그리 되는데는 그 세상 어두운 세상 암흑의 세상에서 인도자가 있어야 되겠고 빛이 있어야, 등대가 있어야 되지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지면 안되니까, 그래서 빛을 이 어두운 세상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두운 세상에 빛이 오신 것이 구주 메시야가 오신 것이고, 그래서 주님이 오셔가지고 대속 역사를 베푸시므로 비로소 인간세계에 일반 믿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과 연결되는 빛을 가지게 되었다 그말인데, 이 말씀이 이번 공과에 나오지요? 첫 번째 대지에. 이게 빛이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죄 칭의 새생명 그로 인한 진리 영감을 우리에게 빛으로 주셨다 그말입니다. 이렇게 가지고 그래서 시대시대 마다 이 빛을 주님 대속 있기 전 미래적으로 예표적으로 받은 그런 앞선 구약시대 선지자들은 대속의 그 예표 대속을 예표해서 짐승의 재물을 통해서 미리 이 빛을 받아가지고 빛노릇을 한 것이고, 그 뒤에 시대시대마다 먼저 복음을 받은, 깨달은 그런 성도들이 이 도리를 깨달아 하나님과 자기 관계를 바로 맺고 진리적인 그런 행위를 바로 하므로, 빛노릇을 하므로 그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나와있는 어둠 속에 묻혀있던, 어둠속에 갇혀있던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빛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말을 듣고 가르침을 듣고 그들의 모든 생활 행동을 보고 빛으로 나와서 수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어진 겁니다. 그래서 이런 역할이, 오늘 우리도 꼭 같이 주어졌다 그말이고, 그러기 때문에 백목사님 한분이 우리보다 먼저 나시고 이 복음 깨달아서 빛으로 사니까, 그 한분의 밝은 빛노릇을 통해서 수십만명 수백만명이 지금 얼마나 밝은 빛으로 돌아오고 있는지 상상하기 어렵겠지요. 그런분은 굉장히 밝은 그런 빛이겠고,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만큼 안되도 각자 자기 위치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빛을 받아서 빛노릇을 하므로 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을 빛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이것이 우리들이 맡은 사명이고 책임이며 의무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빛이란 것은, 오전에 크게 두가지 각도로 설명드렸는데, 이것도 하나는 알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첫째, 빛이 뭐냐? 빛이라는 것은 비쳐서 밝게 보여서 밝혀보게 해서 알게 하는게 빛이다. 이것 맞지요? 000씨 맞지요? 00씨가 오늘 예배를 너무 잘봐서. 요즘 계속 잘 보는 것 같애요 보니까. 빛이란 것은 환하게 비춥니다. 비추면 또렷하게 보입니다. 보이면 아는 겁니다. 바로 알게 되고 아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아는 겁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아는 겁니다. 알 지(知자), 알 식(識)자. 아는 건데, 아는 목적은 알려고 하는 목적은 뭐냐? 그것을 바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모든 존재나 모든 사람을 바로 상대하고 바로 그런 것을 활용하기 위해서 아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란 것은, 이걸 세상으로 말하면 써먹지 않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지요. 아무리 배워서 알아도 써먹지 않는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잖습니까? 행동하는 양심이니 그런 말이 있던데. 지성인들이 아니까 움직여야 된다 그런 말을 하지요. 그거야 뭐 그 사람들 하는 좋은 말이겠지만은, 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지라도. 그런데 어쨌든 빛이라는 것은 바로 비추면 보게 되고, 보면은 바로 알게 됩니다.
두 번째, 알면은 그것을 바로 사용을 하게 되는 겁니다. 자고 일어났는데, 자고 일어났으니까 머리 헝클어졌을것이고 머리 빗어야 되겠는데 더듬더듬 하는데 뭐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아무거나 잡혀서 이게 빗인가 싶어서 빗었는데 안 빗어집니다. 불을 확 켜보니까, 빛이 아니고 빛처럼 생긴 뭐 다른거다 그말이지요. 쓰레받기던지 뭐 그런거. 빛이 있으면 그걸 가지고 바로 쓸 수 있는 겁니다. 바로 알면 바로 쓰게 되는 겁니다. 자동차를 타고 주유소에 기름 넣으러 갔습니다. 기름 넣는데 주유기가 두 개 있습니다. 뭐뭐 두 개있지요? 휘발유하고 경유하고. 그런데 내가 타는 차가 휘발유 찬가, 경유 차인가 모르고 아무거나 기름 넣어버렸습니다. 경유차에다가 휘발유를 넣으면 그 차 그래가지고 시동 걸고 다니면 차를 못 쓰게 되버립니다. 아무리 비싼 차라도. 모르면 활용을 잘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힘이고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를 쓰고 배워서 알려고 하는 것이고, 그거는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백목사님의 설교는 반지식주의라 할만큼 공부하는 것을 배척하는 것처럼 그래 말씀하셨으나, 그러나 백목사님께서 당신 밑에 기르는 후배들 제자들한테 신앙에 손해보지 않는 사람은 어디까지든지 공부를 시킨 분입니다. 예수 안 믿을때도 그분은 술도가 할때 직원을 데리면, 그때는 우리나라 문맹국가였거든요. 문맹이 많았거든요. 그럴때 사람을 데리면 어떻게 해서든지 한글을 깨쳐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당신이 직접 돈을 내서라도. 그러니까 지식 때문에 신앙에 손해 보는 것은 안하는 것이 낫고, 신앙에 손해 보지 않는 지식이면 많이 알수록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그것은 또 당연한 것이지요.
그래서 첫째 빛은, 바로 보고 바로 알게 하는 것. 두 번째는 알고난 다음에는 그것을 바로 활용을 하게 하는 것. 말하자면은 바로 인도하게 하는 겁니다. 등대 역할입니다, 등대 역할. 이게 두 번째고. 세 번째는 빛이라는 것은 의미가, 빛이라 그러면 의미가 희망을 주는 겁니다. 한 줄기 빛 하는 그런 희망.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겁니다. 이게 빛의 의미다 그리 볼 수 있고, 이거는 설명하면 일반 사람들 누구나 다 알아 듣습니다. 이거는 어렵지 않지요. 다 아시지요. 그런데 두 번째 각도로 빛이 뭐냐? 그럴때 빛은, 이거는 실제며 실상이다. 말하자면은 궁극이며 근본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봤는데 과연 그러한가? 그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은, 빛이란 것은 실제며 실상이며 궁금이며 근본이다 그말은 빛을 비추면 환하게 드러납니다. 있는게 드러나지요, 환하게. 좋든 나쁘든 드러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 행동이나 마음 속에 죄가 있으면 밝은 곳에 갑니까, 어두운 곳에 갑니까? 죄가 있는 사람은 어디로 갑니까? 어두운 곳으로 숨습니다. 구석으로. 죄가 있으면 숨습니다. 드러나니까, 빛이 있으면. 그래서 뭐든지 사람이 구석을 좋아하는 것은 좋은 게 아닙니다. 구석자리, 구석진 곳, 어두운 곳, 음침한 곳을 좋아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좋은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빛을 비추면 그런 것들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좋은 것도 드러나고 나쁜 것도 실상이 환하게 드러나는데, 빛이 드러나는데, 이 세상에서 드러나는 그 모든 것들은 다 그거는 그 자체가 드러나는 그 자체가 그것이 궁극이 아니고 근본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빛으로 드러나는, 물질의 빛으로 드러나는 것이든지 지식으로 드러나는 것이든지 세상에서 드러나는 그 모든 것들은 드러나는 그 모습이 실제며 실상인데, 실제 실상 그것이 근본이나 궁극이 아니고 그 배후에 파고 들어가면 더 근본이 따지고 들어가면 나오고 나오고 나오는 것인데, 가장 깊은 곳 최후에 근본과 궁극을 빛을 비춰서 찾아 들어가면 뭐가 나옵니까? 빛을 가지고 따지고 따지고 들어가서 환하게 비쳐서 나오던 것을 따지고 마지막 궁극의 끝을 찾아들어가면 뭐가 나옵니까? 하나님이 나오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빛이라는 것은, 빛은 궁극이다 근본이라는 이런 의미로 생각을 하는 겁니다. 무리가 되는지, 틀렸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고, 그래서 빛이란 것은 바로 하나님을 가리켜 빛이라 말씀하셨는데 성경에 하나님이 빛이라는 말은 당신이 모든 것에 궁극이며 근본이라 그뜻입니다. 그분에게서 모든 게 나오고. 그러니까 빛을 비춰서 들어가고 들어가고 들어가고 마지막에 나오면 실제가 있고 실상이 있는데, 생명의 실제, 영광의 실제 실상, 모든 존영, 행복, 평강, 온갖 좋은 것의 실상이 들어가보니까 하나님이 있고, 모든 사망의 모든 것도 들어가보면 그분에게 다 있습니다. 그분이 다 내놓은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그분은 빛이고, 그래서 빛이라는 것은 따지고 들어가보면 결국 이거는 실제며 실상이며 궁극이며 근본이다 그리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를 가리켜 빛이라는 것은,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빛이라는 것하고 우리가 빛이란 것은 차원이 틀립니다. 완전히 다르고. 하나님은 당신 자체가 빛 자체고, 당신이 궁극이고 근본인데, 우리는 빛이란 것은 하나님에게 비치는 그 빛을 받아서 그 빛으로 인도하는 역할하는 것이 우리들이 가진 빛이고, 우리의 빛이고, 또 하나 동시에 이런 빛의 역할을 하면은 우리가 뭐가 됩니까? 우리가 빛노릇을 하고 빛의 역할 하면은 우리가 뭐가 됩니까? 우리가 빛이 되는 겁니다. 우리들이 빛이 되는 겁니다. 그 빛이 점점 커지고 밝아지고, 이거 이해가 되십니까? 소망이 우리 소망이 무엇인가요? 우리 구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하나님 같은 자가 되는 겁니다. 제2의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그게 우리가 빛이 되는 겁니다. 자존은 안될지라도, 자존은 안될지라도, 완전 영원불변 단일에 하나님 같은 이런 우리들이 점점 되어져 가는데 그리 되어져 가는 방편이 뭐냐? 그게 바로 내가 빛노릇을 하므로 내가 빛이 되는 겁니다. 내가 빛으로 살고 빛노릇 하면 내가 다른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면서 나는 점점 빛이 되어지고, 다른 사람을 빛으로 인도한다 그말은 또 다시 말하면 내가 빛이 되면서 다른 사람을 빛을 만들어가는 역사다 그말입니다. 그리스도 역사하고 같은 겁니다. 그 안에 내용이나 의미나 성격은 다를지라도 전체적으로 같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이 말씀에서 이런 여러 가지 성경 해석적인 면을 생각해보시고 사명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내면을 가진 이런 막중한 사명을 오늘 우리들에게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맡겨 주셨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 타락하여 범죄하므로 사망하고 범죄가 가득한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신 하나님을 내가 말을 통해서 행동 내 생활을 통해서 어두운 세상 내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 것을 알게 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들의 역할이라. 그런 일을 하는 가운데서 나는 점점 하나님이 되어져가고 많은 사람들을 또 하나님으로 만들어가는 이런 역사가 있다 그말입니다. 이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을 하신 것이고.
그다음 두 번째는 시간이 많이 가서, 두 번째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한다 이 말씀은, 이거는 우리들이 빛된 그 입장을 우리가 임의로 능동으로 변동할 수 없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우리들이 우리는 빛된 그 입장을 변동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럴만한 권한이 없고 능동성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무슨 문젠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빛으로 세워주셨는데 그 빛된 거기서 내가 벗어날 수 없는고로, 없기 때문에 거기서 발생되는 어려운 문제가, 힘든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소금과 연결시켜보시지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소금으로 세워두셨으니까 변동을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금이 소금 역할을 바로하면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요즘 소금도 오만 종류가 다 나오는데 소금을 너무 많이 먹으면 해롭다 그래도 소금을 안먹으면 사람이 못살지 않습니까. 소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절대 필수조건입니다. 없어선 안되는 겁니다. 소금없으면 사람은 못 삽니다. 그러니까 소금은, 믿는 사람이 소금으로 바로만 살면 그 사람은 자기 사는 세상에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사람이 됩니다. 되지요? 그런데 만약에 그 소금이 소금 역할을 못하면 어찌 된 겁니까? 소금이 맛을 잃으니까 이거는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힌 뿐이라. 소금 안해버리면 되는데, 내가 소금인데, 소금 그 위치를 벗어나버리면 되겠는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소금 노릇을 못하는 것은 소금이 맛을 잃는 것이고, 그리되면 멸시 천대만 받게 되는 겁니다. 그리 안하려면 소금 노릇을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참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이런 면을 두고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세워놨기 때문에.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한다 그렇게 박아놨기 때문에 내가 빛노릇을 하면, 많은 사람에게 등대가 되고 빛이 되고 인도자가 되고, 내가 빛노릇을 못하면 그 빛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빛이 빛을 잃으면 뭐가 됩니까? 빛이 빛을 잃으면 뭐가 되는가요? 어렵지 않지요 이거는. 빛이 빛을 잃으면 뭐가 됩니까? 어두움이 되는 거지요. 어두움이 뭡니까? 세상이고 사망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의 빛을 잃으면 속화되고 타락하고 세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빛 노릇을 하는 것만이 사는 거고, 그래서 신앙이란 것은 앞으로 나가는 전진만이 사는 길이지 후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고, 후퇴는 바로 사망이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지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몰아부쳐서 길러가시는 겁니다. 그대신에 우리에게 평생의 기간을 주셔서 오래토록 참고 기다리고 계시는 그런 역사는 있고, 또 회개의 은혜도 주셔서 잘못됐으면 회개하는 그런 길도 열어놨습니다.
세 번째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아니한다. 이거는 우리들이 빛이 되는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고 주인의 필요에 따라서 하시는 겁니다. 주인이 필요하면 등불을 켜는 겁니다. 또 빛이 되는 그 모양도 주인이 필요하면, 책상 앞에 앉아서 혼자 공부하면 되는 거기에서 온 집안에 불을 다 켤 필요는 없습니다. 예배당에 와서, 누군가 혼자 와서 조용히 성경 읽는다면 창가에 앉아서 여기는 한줄이니까 한줄만 딱 켜고 읽으면 됩니다. 그런데 혼자 와서 성경 읽으면서 예배당 불 다 켤 필요는 없겠지요. 이것도 보면은, 이런 것도 생각없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단 들어오면 무조건 불 다 켜놔놓고. 어린 아이들, 철 없는 아이들은 그러지만은 어느정도 지각 있으면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내가 예배당에 오는데 들어와서 불을 켤 필요가 있나 없나, 또 불을 켜면 몇 개나 켜야 되겠나. 늘 머릿속에 그런것은 깔려 있어야 됩니다. 상식으로. 주인의 필요에 따라서 우리를 쓰시는 겁니다. 주인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 당신이 필요하니까 불을 켜서 올려 놓는 겁니다. 필요에 따라서.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빛노릇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또 그 빛의 역할하는 것은 그 자기 세상을 자기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서 내 현실을 만들어서 거기서 빛노릇 하라고 만들어주신 겁니다. 세 번째.
그다음 네 번째는, 이렇게 해가지고 우리들로 하여금 이렇게 빛노릇을 하게 하시는 그 궁극의 최종의 목적은 무엇이냐? 이런 걸 통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빛이란 것은 마지막 최종에 가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그게 되어야 비로소 빛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아가지 않는 빛은 빛이 아닙니다. 요셉의 결과도 다니엘의 결과도 또 다윗도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이 세상 생활은 마지막이 전부 결론은 하나님께 영광되는 거기서로 다 결론이 되어졌습니다. 그래서 빛의 역할, 빛 역사의 마지막 결론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것이 결론이다. 이렇게 네가지.
그래서 첫째, 빛의 사명. 여기서 많은 걸 말씀 드렸습니다. 두 번째는 변동할 수 없는 입장이다, 두 번째. 세 번째는 주인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 우리를 빛으로 어디든 어떤 형태로든 쓰신다. 네 번째, 빛의 결과는 하나님께 아버지께 영광이 되어야 된다. 이렇게 네가지를 기억하고 마무리 정리하면 이런 빛노릇을 하려면 그 과정이 3단계 과정이라기보다, 갖추어야될 그런 순서, 조건, 이게 3단계니, 가장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자기 관계입니다. 이게 가장 중요하고 이게 바로 생명 역사입니다. 이게 또 궁극의 목적이고. 하나님을 모시고, 두 번째는 하나님 모신 그 생활이 외부로 나타날때는 반드시 진리적인 행위가 되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믿음 행위가 되야 되고 이 믿음 행위가 더 외부로 나와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수긍할 수 있는 도덕적인, 모든 세상 관계적인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야 되는데, 그런데 이 마지막 세 번째는 다니엘에게서 보듯이 이런 외부적인 세 번째 도덕적인 면이 나타났는데, 다 이렇게 나타났는데, 기도문제가 딱 걸리니까 다니엘이 브레이크를 딱 잡았습니다. 왕이 시키는 명령이면 뭐든지 다했는데, 뭐든지 달려갔는데 기도 하지 말라 그러니까 다니엘이 브레이크를 딱 잡아버렸습니다. 이거는 못합니다. 왜 못하느냐? 알고보니까 다니엘이 그때까지 왕에게 충성하고 흠이 없이 그렇게 잘한 것은 다니엘이 껍데기가 아니고 그렇게 만든 다니엘 속에 능동적인 이치가 있었고 능동자가 있었으니 그 모든 외부 생활에 근본은 하나님이란 분이 다니엘을 붙드시고 이렇게 하셨고, 하나님의 법칙 진리적인 진리가 다니엘을 이렇게 만들었구나. 그런데 왕의 명령이 진리를 어기고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드니까 다니엘을 목숨을 내놔도 순종을 못하는구나. 이걸 다리오 왕이 알았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것이 정상적인 바른 빛이고 이게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말하면, 두가지는 반드시 절대적인 것이고 세 번째 나타나는 도덕적인 외부적인 그런 모습은 이거는 일반적으로 항상 계속이 되야 됩니다. 이게 없으면, 껍데기가 없으면 알맹이가 보호 안되는 것처럼 없으면 안되니까 이게 되야 되는데 이거는 방편이고 하나의 외부적인 껍데기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거는 주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껍데기가 없으면 방편이 없으면 알맹이가 전파되지 않으므로 그래서 가지는 것인데 그렇다고 이걸 쉽게 얕보면은 속에 있는게 안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을 모시고 진리적인 그런 생활을 하되,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외부로 드러나기에는 일반 세상 사람들이 알고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생활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바로 되면 어디가든지 그 사람은 인정을 안 받을 수가 없는 것이고, 만약에 자기 위치에서 오늘 이거는 말씀을 안드리는데, 빛이란 것은 한군데만 빛이면 빛이 아닙니다. 빛이란 것은 집에서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한테는 참 잘해서 ‘우리 남편 같은 사람 세상에 없다’고 그렇게 하는데 그 남편이 친구한테 가니까 ‘의리도 없고 우정도 없고 저만 아는, 마누라 밖에 모르는 사람’ 그러면 그건 빛이 아닙니다. 직장에 출근하면은 가정밖에 모르는 사람 직장은 아무것도 없고 그러면 그것은 빛이 아닙니다. 목사가 교인들한테는 잘하는데 가정이 엉망이 되면 그것도 빛이 아닙니다. 가정은 가정대로 남편의 위치 아버지 위치 어머니 위치 아내 위치 직장 위치 교인 위치 그 위치 전면 거기서 그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해놓으셨기 때문에 그 모든 말씀 전부다 맞춰서 다 되야 비로소 그게 원만한 빛이 되어진다 그말인데, 그 외부적인 것은 해야 되는데 그런 것은 안에 두가지는 절대적이고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그 생활은 이거는 방편적이고 이거는 하나의 선택적이지 절대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000씨 이건 이해가 되요? 좀 어렵지요 이거는? 이거는 절대조건이 아닙니다. 앞에 두가지는 절대 조건이고. 그래야 비로소 빛이 되는 겁니다. 이 두가지가 목적이고 이 두가지를 위해서 방편적으로 도덕적인 윤리적인 그런 모든 생활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눈 가리고 뭐 한다는 식으로 그렇게 눈가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진실되게 합니다. 하는데 하다가 외부적으로 그 방편적인 생활하다가 진리에 어긋날때는 그거는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어긋날때는 못하는 것이고. 요셉과 다니엘 모든 사람이 다 그래서 거기서 빛이. 그래서 빛이 크게 나타날때는 대개 속에 두가지를 가지고 외부로 나타난 생활을 굉장히 잘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털컥 걸리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그랬지요. 깜짝 놀라는데, 이거는 지금까지도 아닌데 왜 못하느냐? 이거는 제가 섬기는 하나님에, 신앙양심에, 말씀에 어긋나서 이거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쌓아놨던 모든게 무너질 수도 있고 그때까지 다 좋게 보다가도, 정말 좋게 봤으면 이해를 못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그 순간은 그리해도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면 그땐 더 큰 빛이 나타나고. 제가 그런 말을 어떤 청년한테 전화하면서 그런 말을 했는데, 있는 거기서 내면적인 하나님과 신앙생활하고 말씀대로 사는 생활하면서 분명히 하나 살펴봐라. 살펴볼 것은, 내가 이렇게 살면 우리가 그것을 주로 목적으로 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은 내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이렇게 되어지고 이렇게 믿음 생활하니까 하나님께서 여기대해서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내 주관으로 역사하시고 내 객관에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나타난다는 것을 살펴볼 필요는 있다고 제가 몇 번 말을 했는데,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그게 필요한 겁니다. 그게 전부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것은 능동이 있고 피동이 있고 대응이 있고, 희로애락의 역사가 있고 이런 것이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냥 공중에 붕 뜨듯이 하나님은 구름 잡는 것처럼 그렇게 부르고, 실제 그분의 역사가 내 마음에 내 생활에 내 모든 언행에 판단 처리에 있는 지 없는지 보지도 못하고 말하라 그러면 설명도 못하고 막연하게 구름잡는 그런 신앙은 그거는 꿈속에 신앙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그거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분이고, 그 살아계시는 분은 오늘 이 자리 우리들, 저와 여기 계신 여러분들 우리들에게 내 주관의 은혜가 뚜렷하게 알도록, 내 생활 환경 객관에서 그분의 역사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말입니다. 그게 있어야 비로소 참 신앙이지, 그래서 그것이 겁이나서 울고 웃으면서 벗어날 수도 없고, 그렇게 힘들게 어렵게 사는 것이 일반적으로 믿는 사람들, 좀 그래도 믿으려 하는 사람들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너희는 빛이라, 본문에서 네가지를 기억을 하시고 묶어서 빛으로 사는 것은 세가지 생활, 하나님을 모시고, 진리대로의 행위로, 외부로는 도덕적인 인간관계 모든 세상 관계적인 이런 생활이 갖추어져야 된다. 그런데 안에 두가지는 절대고, 필수고, 앞에 제일 밖에 것은 선택이다. 다만 선택이라고 하여 이것을 소월히 하고 눈가림만 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하게 하되 가다가 막히면 이거는 버릴 수 있고 두가지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이게 하나님 말씀하신 착한 행실이고 참된 빛이다 그말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이 이치를, 이 말씀을 생각해서 이게 어떤 방향인지 무슨 말씀인지를 알아야 신앙세계를 아는 것인데, 좀 많이 깊이 좀 생각해보십시다.
마태복음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하는 그런 면도 있고, 또 세상에 빛으로 사는 그런 면도 있는 이런 면들이 다 있다 그리 볼 수 있겠고, 연결시키면 빛으로 살려면 소금이 필연적으로 되야 되는 그런 면이 있는 것도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소금이란 것은 오전에 잠깐 말씀을 드린대로 자신이 녹아져서 점점 줄어지고 없어지므로 말하자면 자신이 희생됨으로, 다른 음식을 맛을 내고 상하지 않게 하는 그런 역할 하는 것이 소금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의 비유인데, 우리 믿는 사람이 세상의 소금이라 그말은 이 세상에서 자기 사는 자기 세상에서 자기가 녹아져 희생이 되어지므로 자신이 손해보므로 내가 손해보고 내가 참고 내가 억울함을 당하고 내가 견디고 내가 애매한 소리 듣고 들은 그대로 다 내놓고 풀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과 그의 구원의 유익을 위해서 나의 억울함을 참고 삭이고 고통을 참고 삭이고 견디고 애매함도 견디고 또 손해도 보고 또 가질 것도 못 가지고 여러 가지 그런 희생을 당하는 이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과 더 멀어지지 않게 만들고, 또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참사람의 모습인가를 보여주는 인간의 말하자면은 가치 맛입니다, 인간미. 이걸 보여주는 것이 소금의 역할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가 겉보기에는, 또 실제 그럴수도 있겠지만은 사람이란 것이 다 보면은 다 누구나 자기 유익을 다 차리고 손익계산을 다 따져서 영악하게 그렇게 처세하고 그리 살아가지만은 사람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있는, 전부다는 아니지만은 사람에게 있는 모든 요소가 성품이 하나님에게부터 하나님의 것을 닮은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두셨다 그말이고 좋은 면 긍정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을 안다 그리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안다’ 그말이 무슨 말인고 하면 사람이 소금이 아니고 차돌같은 그런 사람이 돼서 어떤 경우도 억울한 소리는 절대 듣고 있지 못하고 애매한 말 들으면 넘어갈 수 없고 또 일원짜리 하나도 손해는 보지 아니하고 그렇게 세상을 실력있게 강하게 그리 사는 그런 사람도 사람들이 살아가다보면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란 것을 알게되고, 또 겉으로 어리석고 못나고 그래서 속임을 당하고 또 쥐어박아도 참고 견디고 그래도 저 사람이 바보같으나 바보가 아니고 저 사람은 뭔가 뜻이 있고 의지가 있고 뭐가 있어서 참고 견디고 손해본다는 그런 사실도 사람들은 접촉해보면 아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의 말과 대하는 태도만 보고 사람을 상대하면 크게 오판하기 쉽고 속기가 쉬운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금으로 살면 안 믿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압니다. 저 사람은 지금 어떤 이유나 목적, 근본적인 것 세밀한 거는 모르겠지만은 사람이 보니까 못난 바보 같은 그런 사람은 분명 아닌데 자기대로 계산도 있고 손익도 따질 줄 알고 다 할 줄 아는데 보니까 ‘지금은 참는다’ ‘손해를 보고 있다’ ‘견딘다’ ‘자기를 희생을 한다’ 이걸 사람들이 보면은 안다 그말이지요. 저만 그리 생각합니까? 우리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안 그렇습니까? 사람보면 다 안보여지는가요? 눈에 보면 압니다. 그러니까 존경할 만한 사람, 고만고만한 사람, 마음 속으로 겉으로 내색은 안해도 속으로는 별 볼 일 없는 사람 이렇게 판단되는 사람, 사람이 조금 접해보면 다 알게 됩니다. 그런데 얼른 보면 몰라도 시간을 두고 좀 접해보면은 어지간하면 속에 다 나오기 때문에 알게 된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스스로 속이지 말라 그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을 속이는게 스스로 속이는 것이고 자기를 속이는게 다른 사람을 속이는게 스스로 속이는 겁니다. 내가 남을 속였는데, 속였는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속지 않는 분이고 지금 속였는 줄 알았는데 그 속인 것이 멀리가보면 오히려 자기가 속은 것이지 남을 속이므로 자기가 손해보지, 속임을 어리석게 속임받는 그런게 세상에 있는 것 같으나 좀 멀리 보면은 우리가 어리석게 속는 그런 속음으로 남을 속이는 죄 짓도록 그런 거는 피해야 되겠지만은, 그러나 만약에 복음 위해서 필요하고 그렇다면 속임을 당하는 것 같으나 속는 것이 아니고 남을 속여 얻는 것이 있는 것 같으나 결국 좀 지나고보면은 자기만 손해보지 얻는 유익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말에 못난 부모에게 그 자녀는 끝이 있어도 잘난 부모의 자녀는 끝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리 말합니다. 부모가 너무 잘나고 실력있고 똑똑해서 자녀 뒷바라지 다 처리하면 그게 좋은 것 같으나 멀리 전체로 가서 보면은 오히려 그게 해독되는 그런 경우가 많고, 아주 못나고 바보천치같은 그런 부모인데 그래도 뒤에 알고보면 그 자식들이 잘되는 그런 경우도 많이 있다 그래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지혜롭고 인간이 명철하다는 것은 성경에 인간의 지혜는 다 무지고 인간의 명철 그거는 다 손해보는 것이지 하나님의 지혜라야 참된 지혜고 그런 것이지 인간의 것은 별 가치로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소금으로 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왜 소금으로 살면 이거는 신앙세계고 하나님의 역사고 진리 역사기 때문에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것 같으나 그러나 안 믿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 그말입니다. 믿는 사람이면 더 알겠지요. 모르는 사람은 이단이 될 사람들은 모릅니다. 딱 주관에 붙들리고 이단이 될 사람들은 모르지만은 좀 정상적인 사람이면 다 압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 덮어쓰고 감옥갔는데 요셉은 참았고 견뎠고 손해봤고 그 여인이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모조리 다 뒤짚어쓰고 자기 일생을 망칠 수 있는 일입니다. 작은 사건이 아니고 자기 앞날에 평생을 완전히 절단내고 끝날 수 있을만한 그만한 사건이지만은 다 덮어썼습니다. 말씀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생각을 했겠지요. 그 여인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다 뒤집어 썼는데 마지막 끝에 가서 보니까 손해 본 것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그걸 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손해보고 희생을 당했기 때문에 요셉이 총리가 된 겁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요셉은 총리가 못됐을 겁니다. 다니엘이 정적들이 자기를 제거하려는 그런 계략을 다니엘이 몰랐겠습니까? 모르면 바로 당하는게 아니지요. 다니엘은 안봐도 알았을 겁니다. 어인이 찍힌 것을 알았다 하는 것 보면 그거야 소식 듣고 알 수 있겠지만은 사람이 그정도 위치가 되면 정적이 누구며, 우리가 우리 정도 보통 사람들도 사회 생활해보면 회사에 가보면 ‘저 사람은 나하고 어떤 면에 대립이 된다, 나하고 어떤 것은 같은데 어떤 것은 다르다, 누구는 나하고 친분이 좋고 누구는 나하고 적대감 있다’ 이런 걸 알잖습니까? 000씨 알지요? 친구들관계도 알지요? 사람보면. 다 압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는데, 다니엘은 우리보다 10배나 뛰어난 그런 지능가진 사람이니까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알고 왕에게 그 사실을 가서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해명하지 않았습니다. ‘임금님, 지금 저 사람들이 저를 모해하려고 저렇게 계략을 꾸미는데 넘어가면 안됩니다. 어인 찍지 마십시오.’ 그런 일을 다니엘이 안했다 그겁니다. 알고도 다니엘은 당한 겁니다. 자기 할 일이 아닌 줄 알았기 때문에. 그런데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고, 들어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났고, 드러나므로 다니엘은 그 정적들을 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알았지만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안봐도 그들 위해서 기도했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 그들의 그 모략을 안되는거니까 그게 성사 안되야 되겠고,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 했겠지요. 그랬는데 알면서 다 당했지만은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는데 살아나왔고 그 정적들은 다 제거된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니엘의 정적들이 가족들하고 함께 사자굴에 던져져서 뼈까지도 다 움켜서 부숴뜨렸더라 그리 됐는데 거기 대해서 다니엘은 털끝만큼도 하나님 앞에 책임이 없고 심판이 없습니다. 그들을 다니엘로써는 아꼈고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아낀다는 것이 어떤 면인가를 깊이 깊이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사람을 아끼지 않는 거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결단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나와있습니다. 사람을 아끼지 않는 거기는 어떤 위대한 사람도 하나님의 권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아끼는 그게 있어야 나타날 수 있는 그게 가장 필수고 전제조건이라. 하나님의 권능은 인간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소금으로 살면 다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우리가 소금으로 살면 내가 녹아지는 겁니다. 녹아진다 말은 희생이라 말이죠. 희생하는데 자기가 희생하는 것, 내가 희생하는 것을 내 주변 사람들이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전파되어 가는 겁니다. 또 사람의 참된 인격을 그들이 보고 알게 되는 겁니다. ‘아 사람은 저렇게 사는 것이구나’. 현실에 마찰을 피하는 그런 어려움을 피하는 안일주의 복지부동 이런 것이 아니고 알지만은 또 하면 할 수 있지만은 소금이 되기 위해서 소금 노릇 때문에 안 하는 것이고 못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믿는 사람의 일이고 이런것이 있어야 그다음 14절에 말씀하신, 빛노릇을 할 수가 있는 것이라 이걸 참고로 기억을 하시고, 그다음에 16절에 보면 중간에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이것도 구별해야 되는데, 착한 행실이 어떤 행실이냐? 착한 행실은 우리가 배우기를, 착하다는 말을 한문 글자로 바꾸면? 선이지요, 착할 선(善)자. 선한 행실이고, 선이 뭡니까? 하나님 중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중심의 행실이란 그것이 어떤 것인가? 저희로 하나님을 중심하는 너희들의 생활을 보고, 행실을 보고 하늘에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마리씀을 하셨는데, 하나님 중심의 행실이 어떤 행실인가? 이거는 말하자면은 요셉같은, 말하자면 다니엘 같은 그런 경우입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들어가기전에, 기도를 계속 하는데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 했는데 그거는 다니엘 자기 개인의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에 내면적인 하나님 모신 생활입니다. 그 생활이 착한 행실입니다. 그 생활이 외부로 나타나기를 진리대로의 모든 행위로 나타나서 임금님에게는 충성으로 나타났고 동료와 모든 사람들에게는 심의로 나타났고 자기 맡은 책임과 의무에 또한 충성으로 나타났고 정직으로 나타났고 이렇게 나타나니까 이거는 안 믿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도덕적인 인간관계적인 면이고 그들이 다 좋아하는 겁니다. 그런데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도덕적인 이런 인간관계적인 이런 어리고 안 믿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좋은 면들, 이 면들 속에 그것을 그리 나타나게 만든 원동이 무엇이냐? 원동이 뭡니까? 그 원동이 바로 외부로 애굽나라에 바로 왕이, 또 바벨론 나라의 다리오 왕이 요셉과 다니엘을 그에 모든 걸 인정하게 된 것은 다니엘의 기도때문이 아닙니다, 요셉의 믿음 때문에 그들이 인정한게 아닙니다. 요셉을 인정한 것은 외부로 나타난 요셉의 진실과 열심과 왕에 대한 충성과 흠없는 이런 지혜, 이런 것 때문에 다리오가 인정했고, 또 바로가 인정을 한 것이지,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 믿음 기도 때문에 인정한게 아닙니다. 맞습니까? 논리적으로 생각해볼때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아닌데, 외부로 나타나는 그것이 그리 되어졌는데 그걸 보고 인정을 했는데, 그런데 요셉과 다니엘은 외부로 나타난 진실과 정직과 충성과 진실, 이런 모든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그 생활이 그들이 알기에는 그게 전부고 하나님은 막연하게 알지만은 요셉과 다니엘은 외부로 나타나는 그 모든 생활의 원동이 뭐냐? 원동이 바로 착한 행실, 하나님을 모신 거기서 뿌리되어 나온 그겁니다. 그게 착한 행실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다니엘의 외부에 나타난 그 모든 행동은 착한 행실입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어떤 안 믿는 사람이 요셉과 꼭같은 진실과 또 지혜와 충성과 이런 걸 가지고 그렇게 요셉처럼 살았는데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겉으로 볼때는 착한 행실이 될지 몰라도 그거는 착한 행실이 아닌겁니다.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모신 그게 원동이 되고 능동이 돼서 근거가 돼서 거기서 나온 외부적으로 덕을 끼치는 그 생활이 바로 착한 행실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십니까? 이걸 모르면 이것도 신앙세계를 모르는 겁니다. 누가 뭐라그래도 하나님을 노래 부르는데 신앙은 이 말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서 영원을 두고 제가 담대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을 두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데 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는 하나님 한분이 전부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자기 관계가 신앙이고 그분을 알아야 신앙이 되는 것이지 하나님을 모르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신앙, 이런면으로 따져보면 오늘날 이 세계에 우리나라 기독교에 신앙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신앙은 그리 많지를 않습니다. 다 그냥 윤곽적이고 희미한 그런 것이지, 지금 우리나라 세계 교회에 하나님 모신 그런 사람이 없지 않으나 그렇게 많지 않고 아마 귀할 겁니다. 이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고 성경이 그래놨습니다. 뭐라 그랬습니까, 성경이? 지금 시대에 하나님 오신 신앙이 귀하다는 말 성경에 뭐라 그랬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올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믿는 자를 보겠느냐’ 성경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그런 사람이 그만큼 희귀하다 그말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신앙이고 모시는게 신앙이고 그분과 자기 관계가 맺어진 만큼이 신앙이고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란 것은, 이번 집회 내용인가 그런 말씀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모든 존재 움직임의 능동자입니다. 모든 존재는 그분에게 피동이고 그런데, 어느 일정 범위안에서는 우리가 능동이고 하나님이 피동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거 이해가 되십니까?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는 우리들이 능동이고 하나님이 피동입니다, 그리 말씀 하십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대응이다 그말이지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내가 너를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겠고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능동입니까 피동입니까?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능동입니까, 피동입니까? 우리들이 내가 복 받을 행동을 하면 복을 주시겠고 내가 능동이고, 하나님이 내 행동에 따라서 복을 주시니까 피동이지요? 내가 죄를 지으면 징계를 내리겠고, 하나님의 피동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것도 다 하나님의 예정이지만은. 그래서 너희 착한 행실이란 이 말씀도 하나 짚고 넘어가야 되겠다 싶어서 별도로 떼서 설명을 드리는데 이걸 또 기억을 하시고.
본문에서 크게 구별하면, 본문에서 네가지를 말씀할 수 있고 그다음 전체 묶어 하난데, 첫째는, 제목을 붙여봤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 말씀의 제목은 빛의 사명이라 그리 생각해봤습니다. 빛의 사명.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빛의 사명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누구냐? 너희라는 것은, 이 너희는 성경대로 말하면 이 너희는 누굴 말하는 겁니까? 성경대로 말하면 너희라고 하는 이 대상은 누구입니까? 산상보훈의 예수님을 따라나온 그 무리들 그들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런데 그들이 주님을 따라온 사람들, 주님에게 배우겠다고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이니까 오늘로 말하면 택자들이겠고 믿는 사람들이겠고 이 성경을 읽고 보고 듣는 오늘 우리들이 바로 너희라 그리 말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이 뭐냐? 세상은 무엇이 세상인가? 세상은 여러각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천국 아닌 곳이 세상입니다. 천국의 반대가 세상이다. 그런데 세상을 말할때는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세계가 전부 세상, 영계는 빼놓고, 하나님이 지으신 물질 세계 그게 이 세상입니다. 넓은 범위겠고, 그리고 좁히면 우리들의 생활환경이 세상입니다. 내 생활환경이 성경에 말씀하신 세상입니다. 그러면 내 생활환경은 한 곳에 고정되있습니까? 여러곳에 있을 수 있습니까? 자기의 생활환경, 생활이라 말은 살아가면서 활동하는 곳인데 자기 생활 환경이 세상인데, 그 생활 환경은 한 곳에만 고정이 되있습니까, 여러곳에 나누어집니까? 생활환경은 집에 있으면 집이 내 생활환경이고, 직장에 출근하면 사무실이 내 생활 환경이고 학교가면 학교가 생활환경이고 거래처가면 거래처가 생활환경이고, 그 속에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있고, 그러면 생활환경이라 말은 여러곳에 나누어져 있을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입니다. 거기가 내 세상입니다. 그런데 전체로 앞에 오전에 말씀드릴때, 세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세계 물질 세상인데 그 세상이 원래는 어둡지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 타락전 에덴동산은 빛의 세상이었습니다. 낙원입니다, 지상 낙원. 거기는 어두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진리를 거역해서, 하나님 배반하고 진리 거역해 범죄하므로 하나님과 끊어져서 사망이 되니까 생명에서 끊어졌으니 반대로 어두움이 되었고, 진리에서 끊어졌으니 죄가 되었으니까 어두움이 되어진 것이 이 세상이다. 인간이 어두워지니까 인간 사는 세상 전부다는 어두워지는 겁니다. 이거는 자연계시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살고 있는 환경이 달라집니다. 저는 자동차를 다른 사람 차를 자주 못타봐도 한번씩 이래 보면은, 자동차를 타보면, 또 보면은 그 어떤 사람의 차는 안에 들어가보면 차 안이 정리가 딱 되있고 굉장히 깨끗합니다. 그러면 안봐도 이 분의 성격이 참 깨끗하고 깔끔하고 정리 잘하는 분이구나 그렇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안봐도 그 사람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보면, 내부를 보고 외부를 보면은 그 사람은 성격이 깔끔한 사람이구나. 또 자동차가 보면은 겉도 사람이 실수할 수 있겠지만은 별로 박힌 곳 없이 깨끗하면은 ‘이 사람은, 이 자동차의 주인은 차분한 성격이구나, 신중하구나.’ 어느정도 짐작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자동차는 여기 박히고 저기 박히고 긁힌 거 보면은 ‘이 사람은, 안봐도 이 자동차 차주는 아마도 성격이 급하고 덤벙댈 가능성이 많겠다.’ 그리 볼 수가 있습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이 판단이 별로 틀리지를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이면, 그러면 자동차가 그리 된 것은, 자동차가 그리 된 것이 아니고 누가 그리 만든겁니까? 그 사람이 그리 만든 겁니다. 예배당을 보면 그렇습니다. 예배당에 그 교회 교역자와 사모님과 그 교회 중심되는 교인들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그 교회 들어가보면, 그런데 작은 교회는 대개 교역자와 사모님 두사람 문제인데, 가보면 예배당 안에 딱 들어가보면 작은 교회는 대반에 표가 납니다. 몇군데 저도 가봤는데 예배당인데 예배당이라 하기 민망할만큼 예배당안이 엉망이 되있는 그런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민망할 정도로 그런 예배당들이 있습니다. 안봐도 이 교회 교역자님은 보니까 이런 면에 잘 모르는 구나. 그렇게 짐작을, 그걸로 전부는 아닌데 대개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배당을 보고 누굴 안다고요? 그 자동차를 보고 뭘 안다고요? 자동차 주인 사람을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집안에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면 그 사람을 안봐도 이 집의 가정주부는 게으르든지 깔끔하게 정리를 못하는 주부로구나 하고 진단을 내리면 별로 틀리지를 않는다 그말입니다. 사람이 환경을 만든다 그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하고 연결됐던 인간이 하나님과 끊어져서 범죄하고 나니깐 세상이 어두워졌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나니까 세상이 어두운 세상이 되었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이게 좀 앞에 말씀대로,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젊은 사람들에게 늘 염려가 그겁니다. 늘 염려가 보면은 젊은 사람들이 나이가 그래도 보통 10대 후반인데 이것도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성격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여러 가지 그런 면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다는 아닌데, 그래도 뭐든 차분하게 세밀하게 깔끔하게 정리정돈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창세기 1장에 뭐라 되있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 그전에는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땅이 어떻다고요? 혼돈이 무슨 말입니까? 막 뒤섞여 있다는 뜻입니다. 뒤섞여 있으니까 거기는 하나님이 아직까지 마무리 짓기 전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기전 땅은 막 뒤섞여있는 겁니다, 모든게 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그 모든 것을 정리정돈 다 시킨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리의 하나님. 같이 해보시겠습니다. ‘정리의 하나님’ ‘정돈의 하나님’. 자기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정돈하는데서 무엇이 만들어진다고요? 자기의 인격이 만들어집니다. 자기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된다 그말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란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물질계, 인간 세상인데, 그 세상이 원래는 빛된 빛이 있는 세상이였는데 인간이 하나님하고 끊어져서 사망의 어두움 되고, 인간의 모든 행위가 진리적이지 못하고 진리에서 떨어져 어긋나서 진리를 거역하므로 범죄한 그런 행위가 되어지니까 죄의 어두움이 되어지고, 인간이 어두워지니까 인간의 사는 모든 세상이 다 어두운 세상이 되어졌다 이거는 필연적으로 그리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위에 올라가면 하나님의 예정이고, 이렇게 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그 세상에다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내야 되고 보내가지고 거기서 하나님 백성들을 가르치며 연습시키며 연단을 시켜서 영원한 천국의 백성을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그리 되는데는 그 세상 어두운 세상 암흑의 세상에서 인도자가 있어야 되겠고 빛이 있어야, 등대가 있어야 되지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지면 안되니까, 그래서 빛을 이 어두운 세상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두운 세상에 빛이 오신 것이 구주 메시야가 오신 것이고, 그래서 주님이 오셔가지고 대속 역사를 베푸시므로 비로소 인간세계에 일반 믿는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과 연결되는 빛을 가지게 되었다 그말인데, 이 말씀이 이번 공과에 나오지요? 첫 번째 대지에. 이게 빛이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죄 칭의 새생명 그로 인한 진리 영감을 우리에게 빛으로 주셨다 그말입니다. 이렇게 가지고 그래서 시대시대 마다 이 빛을 주님 대속 있기 전 미래적으로 예표적으로 받은 그런 앞선 구약시대 선지자들은 대속의 그 예표 대속을 예표해서 짐승의 재물을 통해서 미리 이 빛을 받아가지고 빛노릇을 한 것이고, 그 뒤에 시대시대마다 먼저 복음을 받은, 깨달은 그런 성도들이 이 도리를 깨달아 하나님과 자기 관계를 바로 맺고 진리적인 그런 행위를 바로 하므로, 빛노릇을 하므로 그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나와있는 어둠 속에 묻혀있던, 어둠속에 갇혀있던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빛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말을 듣고 가르침을 듣고 그들의 모든 생활 행동을 보고 빛으로 나와서 수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어진 겁니다. 그래서 이런 역할이, 오늘 우리도 꼭 같이 주어졌다 그말이고, 그러기 때문에 백목사님 한분이 우리보다 먼저 나시고 이 복음 깨달아서 빛으로 사니까, 그 한분의 밝은 빛노릇을 통해서 수십만명 수백만명이 지금 얼마나 밝은 빛으로 돌아오고 있는지 상상하기 어렵겠지요. 그런분은 굉장히 밝은 그런 빛이겠고,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만큼 안되도 각자 자기 위치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빛을 받아서 빛노릇을 하므로 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을 빛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이것이 우리들이 맡은 사명이고 책임이며 의무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빛이란 것은, 오전에 크게 두가지 각도로 설명드렸는데, 이것도 하나는 알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첫째, 빛이 뭐냐? 빛이라는 것은 비쳐서 밝게 보여서 밝혀보게 해서 알게 하는게 빛이다. 이것 맞지요? 000씨 맞지요? 00씨가 오늘 예배를 너무 잘봐서. 요즘 계속 잘 보는 것 같애요 보니까. 빛이란 것은 환하게 비춥니다. 비추면 또렷하게 보입니다. 보이면 아는 겁니다. 바로 알게 되고 아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아는 겁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아는 겁니다. 알 지(知자), 알 식(識)자. 아는 건데, 아는 목적은 알려고 하는 목적은 뭐냐? 그것을 바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모든 존재나 모든 사람을 바로 상대하고 바로 그런 것을 활용하기 위해서 아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란 것은, 이걸 세상으로 말하면 써먹지 않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지요. 아무리 배워서 알아도 써먹지 않는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잖습니까? 행동하는 양심이니 그런 말이 있던데. 지성인들이 아니까 움직여야 된다 그런 말을 하지요. 그거야 뭐 그 사람들 하는 좋은 말이겠지만은, 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지라도. 그런데 어쨌든 빛이라는 것은 바로 비추면 보게 되고, 보면은 바로 알게 됩니다.
두 번째, 알면은 그것을 바로 사용을 하게 되는 겁니다. 자고 일어났는데, 자고 일어났으니까 머리 헝클어졌을것이고 머리 빗어야 되겠는데 더듬더듬 하는데 뭐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아무거나 잡혀서 이게 빗인가 싶어서 빗었는데 안 빗어집니다. 불을 확 켜보니까, 빛이 아니고 빛처럼 생긴 뭐 다른거다 그말이지요. 쓰레받기던지 뭐 그런거. 빛이 있으면 그걸 가지고 바로 쓸 수 있는 겁니다. 바로 알면 바로 쓰게 되는 겁니다. 자동차를 타고 주유소에 기름 넣으러 갔습니다. 기름 넣는데 주유기가 두 개 있습니다. 뭐뭐 두 개있지요? 휘발유하고 경유하고. 그런데 내가 타는 차가 휘발유 찬가, 경유 차인가 모르고 아무거나 기름 넣어버렸습니다. 경유차에다가 휘발유를 넣으면 그 차 그래가지고 시동 걸고 다니면 차를 못 쓰게 되버립니다. 아무리 비싼 차라도. 모르면 활용을 잘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힘이고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를 쓰고 배워서 알려고 하는 것이고, 그거는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백목사님의 설교는 반지식주의라 할만큼 공부하는 것을 배척하는 것처럼 그래 말씀하셨으나, 그러나 백목사님께서 당신 밑에 기르는 후배들 제자들한테 신앙에 손해보지 않는 사람은 어디까지든지 공부를 시킨 분입니다. 예수 안 믿을때도 그분은 술도가 할때 직원을 데리면, 그때는 우리나라 문맹국가였거든요. 문맹이 많았거든요. 그럴때 사람을 데리면 어떻게 해서든지 한글을 깨쳐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당신이 직접 돈을 내서라도. 그러니까 지식 때문에 신앙에 손해 보는 것은 안하는 것이 낫고, 신앙에 손해 보지 않는 지식이면 많이 알수록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그것은 또 당연한 것이지요.
그래서 첫째 빛은, 바로 보고 바로 알게 하는 것. 두 번째는 알고난 다음에는 그것을 바로 활용을 하게 하는 것. 말하자면은 바로 인도하게 하는 겁니다. 등대 역할입니다, 등대 역할. 이게 두 번째고. 세 번째는 빛이라는 것은 의미가, 빛이라 그러면 의미가 희망을 주는 겁니다. 한 줄기 빛 하는 그런 희망.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겁니다. 이게 빛의 의미다 그리 볼 수 있고, 이거는 설명하면 일반 사람들 누구나 다 알아 듣습니다. 이거는 어렵지 않지요. 다 아시지요. 그런데 두 번째 각도로 빛이 뭐냐? 그럴때 빛은, 이거는 실제며 실상이다. 말하자면은 궁극이며 근본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봤는데 과연 그러한가? 그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은, 빛이란 것은 실제며 실상이며 궁금이며 근본이다 그말은 빛을 비추면 환하게 드러납니다. 있는게 드러나지요, 환하게. 좋든 나쁘든 드러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 행동이나 마음 속에 죄가 있으면 밝은 곳에 갑니까, 어두운 곳에 갑니까? 죄가 있는 사람은 어디로 갑니까? 어두운 곳으로 숨습니다. 구석으로. 죄가 있으면 숨습니다. 드러나니까, 빛이 있으면. 그래서 뭐든지 사람이 구석을 좋아하는 것은 좋은 게 아닙니다. 구석자리, 구석진 곳, 어두운 곳, 음침한 곳을 좋아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좋은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빛을 비추면 그런 것들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좋은 것도 드러나고 나쁜 것도 실상이 환하게 드러나는데, 빛이 드러나는데, 이 세상에서 드러나는 그 모든 것들은 다 그거는 그 자체가 드러나는 그 자체가 그것이 궁극이 아니고 근본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빛으로 드러나는, 물질의 빛으로 드러나는 것이든지 지식으로 드러나는 것이든지 세상에서 드러나는 그 모든 것들은 드러나는 그 모습이 실제며 실상인데, 실제 실상 그것이 근본이나 궁극이 아니고 그 배후에 파고 들어가면 더 근본이 따지고 들어가면 나오고 나오고 나오는 것인데, 가장 깊은 곳 최후에 근본과 궁극을 빛을 비춰서 찾아 들어가면 뭐가 나옵니까? 빛을 가지고 따지고 따지고 들어가서 환하게 비쳐서 나오던 것을 따지고 마지막 궁극의 끝을 찾아들어가면 뭐가 나옵니까? 하나님이 나오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빛이라는 것은, 빛은 궁극이다 근본이라는 이런 의미로 생각을 하는 겁니다. 무리가 되는지, 틀렸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고, 그래서 빛이란 것은 바로 하나님을 가리켜 빛이라 말씀하셨는데 성경에 하나님이 빛이라는 말은 당신이 모든 것에 궁극이며 근본이라 그뜻입니다. 그분에게서 모든 게 나오고. 그러니까 빛을 비춰서 들어가고 들어가고 들어가고 마지막에 나오면 실제가 있고 실상이 있는데, 생명의 실제, 영광의 실제 실상, 모든 존영, 행복, 평강, 온갖 좋은 것의 실상이 들어가보니까 하나님이 있고, 모든 사망의 모든 것도 들어가보면 그분에게 다 있습니다. 그분이 다 내놓은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그분은 빛이고, 그래서 빛이라는 것은 따지고 들어가보면 결국 이거는 실제며 실상이며 궁극이며 근본이다 그리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를 가리켜 빛이라는 것은,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빛이라는 것하고 우리가 빛이란 것은 차원이 틀립니다. 완전히 다르고. 하나님은 당신 자체가 빛 자체고, 당신이 궁극이고 근본인데, 우리는 빛이란 것은 하나님에게 비치는 그 빛을 받아서 그 빛으로 인도하는 역할하는 것이 우리들이 가진 빛이고, 우리의 빛이고, 또 하나 동시에 이런 빛의 역할을 하면은 우리가 뭐가 됩니까? 우리가 빛노릇을 하고 빛의 역할 하면은 우리가 뭐가 됩니까? 우리가 빛이 되는 겁니다. 우리들이 빛이 되는 겁니다. 그 빛이 점점 커지고 밝아지고, 이거 이해가 되십니까? 소망이 우리 소망이 무엇인가요? 우리 구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하나님 같은 자가 되는 겁니다. 제2의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그게 우리가 빛이 되는 겁니다. 자존은 안될지라도, 자존은 안될지라도, 완전 영원불변 단일에 하나님 같은 이런 우리들이 점점 되어져 가는데 그리 되어져 가는 방편이 뭐냐? 그게 바로 내가 빛노릇을 하므로 내가 빛이 되는 겁니다. 내가 빛으로 살고 빛노릇 하면 내가 다른 사람을 빛으로 인도하면서 나는 점점 빛이 되어지고, 다른 사람을 빛으로 인도한다 그말은 또 다시 말하면 내가 빛이 되면서 다른 사람을 빛을 만들어가는 역사다 그말입니다. 그리스도 역사하고 같은 겁니다. 그 안에 내용이나 의미나 성격은 다를지라도 전체적으로 같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이 말씀에서 이런 여러 가지 성경 해석적인 면을 생각해보시고 사명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내면을 가진 이런 막중한 사명을 오늘 우리들에게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맡겨 주셨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 타락하여 범죄하므로 사망하고 범죄가 가득한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신 하나님을 내가 말을 통해서 행동 내 생활을 통해서 어두운 세상 내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 것을 알게 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들의 역할이라. 그런 일을 하는 가운데서 나는 점점 하나님이 되어져가고 많은 사람들을 또 하나님으로 만들어가는 이런 역사가 있다 그말입니다. 이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을 하신 것이고.
그다음 두 번째는 시간이 많이 가서, 두 번째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한다 이 말씀은, 이거는 우리들이 빛된 그 입장을 우리가 임의로 능동으로 변동할 수 없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우리들이 우리는 빛된 그 입장을 변동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럴만한 권한이 없고 능동성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무슨 문젠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빛으로 세워주셨는데 그 빛된 거기서 내가 벗어날 수 없는고로, 없기 때문에 거기서 발생되는 어려운 문제가, 힘든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소금과 연결시켜보시지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소금으로 세워두셨으니까 변동을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금이 소금 역할을 바로하면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요즘 소금도 오만 종류가 다 나오는데 소금을 너무 많이 먹으면 해롭다 그래도 소금을 안먹으면 사람이 못살지 않습니까. 소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절대 필수조건입니다. 없어선 안되는 겁니다. 소금없으면 사람은 못 삽니다. 그러니까 소금은, 믿는 사람이 소금으로 바로만 살면 그 사람은 자기 사는 세상에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사람이 됩니다. 되지요? 그런데 만약에 그 소금이 소금 역할을 못하면 어찌 된 겁니까? 소금이 맛을 잃으니까 이거는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힌 뿐이라. 소금 안해버리면 되는데, 내가 소금인데, 소금 그 위치를 벗어나버리면 되겠는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소금 노릇을 못하는 것은 소금이 맛을 잃는 것이고, 그리되면 멸시 천대만 받게 되는 겁니다. 그리 안하려면 소금 노릇을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참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이런 면을 두고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세워놨기 때문에.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한다 그렇게 박아놨기 때문에 내가 빛노릇을 하면, 많은 사람에게 등대가 되고 빛이 되고 인도자가 되고, 내가 빛노릇을 못하면 그 빛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빛이 빛을 잃으면 뭐가 됩니까? 빛이 빛을 잃으면 뭐가 되는가요? 어렵지 않지요 이거는. 빛이 빛을 잃으면 뭐가 됩니까? 어두움이 되는 거지요. 어두움이 뭡니까? 세상이고 사망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의 빛을 잃으면 속화되고 타락하고 세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빛 노릇을 하는 것만이 사는 거고, 그래서 신앙이란 것은 앞으로 나가는 전진만이 사는 길이지 후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고, 후퇴는 바로 사망이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지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몰아부쳐서 길러가시는 겁니다. 그대신에 우리에게 평생의 기간을 주셔서 오래토록 참고 기다리고 계시는 그런 역사는 있고, 또 회개의 은혜도 주셔서 잘못됐으면 회개하는 그런 길도 열어놨습니다.
세 번째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아니한다. 이거는 우리들이 빛이 되는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고 주인의 필요에 따라서 하시는 겁니다. 주인이 필요하면 등불을 켜는 겁니다. 또 빛이 되는 그 모양도 주인이 필요하면, 책상 앞에 앉아서 혼자 공부하면 되는 거기에서 온 집안에 불을 다 켤 필요는 없습니다. 예배당에 와서, 누군가 혼자 와서 조용히 성경 읽는다면 창가에 앉아서 여기는 한줄이니까 한줄만 딱 켜고 읽으면 됩니다. 그런데 혼자 와서 성경 읽으면서 예배당 불 다 켤 필요는 없겠지요. 이것도 보면은, 이런 것도 생각없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단 들어오면 무조건 불 다 켜놔놓고. 어린 아이들, 철 없는 아이들은 그러지만은 어느정도 지각 있으면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내가 예배당에 오는데 들어와서 불을 켤 필요가 있나 없나, 또 불을 켜면 몇 개나 켜야 되겠나. 늘 머릿속에 그런것은 깔려 있어야 됩니다. 상식으로. 주인의 필요에 따라서 우리를 쓰시는 겁니다. 주인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 당신이 필요하니까 불을 켜서 올려 놓는 겁니다. 필요에 따라서.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빛노릇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또 그 빛의 역할하는 것은 그 자기 세상을 자기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서 내 현실을 만들어서 거기서 빛노릇 하라고 만들어주신 겁니다. 세 번째.
그다음 네 번째는, 이렇게 해가지고 우리들로 하여금 이렇게 빛노릇을 하게 하시는 그 궁극의 최종의 목적은 무엇이냐? 이런 걸 통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빛이란 것은 마지막 최종에 가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그게 되어야 비로소 빛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아가지 않는 빛은 빛이 아닙니다. 요셉의 결과도 다니엘의 결과도 또 다윗도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이 세상 생활은 마지막이 전부 결론은 하나님께 영광되는 거기서로 다 결론이 되어졌습니다. 그래서 빛의 역할, 빛 역사의 마지막 결론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것이 결론이다. 이렇게 네가지.
그래서 첫째, 빛의 사명. 여기서 많은 걸 말씀 드렸습니다. 두 번째는 변동할 수 없는 입장이다, 두 번째. 세 번째는 주인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서 우리를 빛으로 어디든 어떤 형태로든 쓰신다. 네 번째, 빛의 결과는 하나님께 아버지께 영광이 되어야 된다. 이렇게 네가지를 기억하고 마무리 정리하면 이런 빛노릇을 하려면 그 과정이 3단계 과정이라기보다, 갖추어야될 그런 순서, 조건, 이게 3단계니, 가장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자기 관계입니다. 이게 가장 중요하고 이게 바로 생명 역사입니다. 이게 또 궁극의 목적이고. 하나님을 모시고, 두 번째는 하나님 모신 그 생활이 외부로 나타날때는 반드시 진리적인 행위가 되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믿음 행위가 되야 되고 이 믿음 행위가 더 외부로 나와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수긍할 수 있는 도덕적인, 모든 세상 관계적인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야 되는데, 그런데 이 마지막 세 번째는 다니엘에게서 보듯이 이런 외부적인 세 번째 도덕적인 면이 나타났는데, 다 이렇게 나타났는데, 기도문제가 딱 걸리니까 다니엘이 브레이크를 딱 잡았습니다. 왕이 시키는 명령이면 뭐든지 다했는데, 뭐든지 달려갔는데 기도 하지 말라 그러니까 다니엘이 브레이크를 딱 잡아버렸습니다. 이거는 못합니다. 왜 못하느냐? 알고보니까 다니엘이 그때까지 왕에게 충성하고 흠이 없이 그렇게 잘한 것은 다니엘이 껍데기가 아니고 그렇게 만든 다니엘 속에 능동적인 이치가 있었고 능동자가 있었으니 그 모든 외부 생활에 근본은 하나님이란 분이 다니엘을 붙드시고 이렇게 하셨고, 하나님의 법칙 진리적인 진리가 다니엘을 이렇게 만들었구나. 그런데 왕의 명령이 진리를 어기고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드니까 다니엘을 목숨을 내놔도 순종을 못하는구나. 이걸 다리오 왕이 알았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것이 정상적인 바른 빛이고 이게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말하면, 두가지는 반드시 절대적인 것이고 세 번째 나타나는 도덕적인 외부적인 그런 모습은 이거는 일반적으로 항상 계속이 되야 됩니다. 이게 없으면, 껍데기가 없으면 알맹이가 보호 안되는 것처럼 없으면 안되니까 이게 되야 되는데 이거는 방편이고 하나의 외부적인 껍데기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거는 주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껍데기가 없으면 방편이 없으면 알맹이가 전파되지 않으므로 그래서 가지는 것인데 그렇다고 이걸 쉽게 얕보면은 속에 있는게 안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을 모시고 진리적인 그런 생활을 하되,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외부로 드러나기에는 일반 세상 사람들이 알고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생활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바로 되면 어디가든지 그 사람은 인정을 안 받을 수가 없는 것이고, 만약에 자기 위치에서 오늘 이거는 말씀을 안드리는데, 빛이란 것은 한군데만 빛이면 빛이 아닙니다. 빛이란 것은 집에서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한테는 참 잘해서 ‘우리 남편 같은 사람 세상에 없다’고 그렇게 하는데 그 남편이 친구한테 가니까 ‘의리도 없고 우정도 없고 저만 아는, 마누라 밖에 모르는 사람’ 그러면 그건 빛이 아닙니다. 직장에 출근하면은 가정밖에 모르는 사람 직장은 아무것도 없고 그러면 그것은 빛이 아닙니다. 목사가 교인들한테는 잘하는데 가정이 엉망이 되면 그것도 빛이 아닙니다. 가정은 가정대로 남편의 위치 아버지 위치 어머니 위치 아내 위치 직장 위치 교인 위치 그 위치 전면 거기서 그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해놓으셨기 때문에 그 모든 말씀 전부다 맞춰서 다 되야 비로소 그게 원만한 빛이 되어진다 그말인데, 그 외부적인 것은 해야 되는데 그런 것은 안에 두가지는 절대적이고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그 생활은 이거는 방편적이고 이거는 하나의 선택적이지 절대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000씨 이건 이해가 되요? 좀 어렵지요 이거는? 이거는 절대조건이 아닙니다. 앞에 두가지는 절대 조건이고. 그래야 비로소 빛이 되는 겁니다. 이 두가지가 목적이고 이 두가지를 위해서 방편적으로 도덕적인 윤리적인 그런 모든 생활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눈 가리고 뭐 한다는 식으로 그렇게 눈가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진실되게 합니다. 하는데 하다가 외부적으로 그 방편적인 생활하다가 진리에 어긋날때는 그거는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어긋날때는 못하는 것이고. 요셉과 다니엘 모든 사람이 다 그래서 거기서 빛이. 그래서 빛이 크게 나타날때는 대개 속에 두가지를 가지고 외부로 나타난 생활을 굉장히 잘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털컥 걸리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그랬지요. 깜짝 놀라는데, 이거는 지금까지도 아닌데 왜 못하느냐? 이거는 제가 섬기는 하나님에, 신앙양심에, 말씀에 어긋나서 이거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쌓아놨던 모든게 무너질 수도 있고 그때까지 다 좋게 보다가도, 정말 좋게 봤으면 이해를 못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그 순간은 그리해도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면 그땐 더 큰 빛이 나타나고. 제가 그런 말을 어떤 청년한테 전화하면서 그런 말을 했는데, 있는 거기서 내면적인 하나님과 신앙생활하고 말씀대로 사는 생활하면서 분명히 하나 살펴봐라. 살펴볼 것은, 내가 이렇게 살면 우리가 그것을 주로 목적으로 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은 내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이렇게 되어지고 이렇게 믿음 생활하니까 하나님께서 여기대해서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내 주관으로 역사하시고 내 객관에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나타난다는 것을 살펴볼 필요는 있다고 제가 몇 번 말을 했는데,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그게 필요한 겁니다. 그게 전부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것은 능동이 있고 피동이 있고 대응이 있고, 희로애락의 역사가 있고 이런 것이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냥 공중에 붕 뜨듯이 하나님은 구름 잡는 것처럼 그렇게 부르고, 실제 그분의 역사가 내 마음에 내 생활에 내 모든 언행에 판단 처리에 있는 지 없는지 보지도 못하고 말하라 그러면 설명도 못하고 막연하게 구름잡는 그런 신앙은 그거는 꿈속에 신앙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그거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분이고, 그 살아계시는 분은 오늘 이 자리 우리들, 저와 여기 계신 여러분들 우리들에게 내 주관의 은혜가 뚜렷하게 알도록, 내 생활 환경 객관에서 그분의 역사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말입니다. 그게 있어야 비로소 참 신앙이지, 그래서 그것이 겁이나서 울고 웃으면서 벗어날 수도 없고, 그렇게 힘들게 어렵게 사는 것이 일반적으로 믿는 사람들, 좀 그래도 믿으려 하는 사람들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너희는 빛이라, 본문에서 네가지를 기억을 하시고 묶어서 빛으로 사는 것은 세가지 생활, 하나님을 모시고, 진리대로의 행위로, 외부로는 도덕적인 인간관계 모든 세상 관계적인 이런 생활이 갖추어져야 된다. 그런데 안에 두가지는 절대고, 필수고, 앞에 제일 밖에 것은 선택이다. 다만 선택이라고 하여 이것을 소월히 하고 눈가림만 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하게 하되 가다가 막히면 이거는 버릴 수 있고 두가지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이게 하나님 말씀하신 착한 행실이고 참된 빛이다 그말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이 이치를, 이 말씀을 생각해서 이게 어떤 방향인지 무슨 말씀인지를 알아야 신앙세계를 아는 것인데, 좀 많이 깊이 좀 생각해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