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3-주후(출13:21-22)
말씀의 인도2014-07-13조회 298추천 27
본문: 출애굽기 13장 21절-22절(요약/2014.07.13.주일)
제목: 말씀의 인도
1. 이스라엘의 노정
-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과정
-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거울이며 모형, 그림자
-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노정으로, 지계(地界)로 인도
- 오늘 우리는 장소가 아닌 성화의 과정으로, 현실(現實)로 인도
- 하나님의 형상 이루기까지 현실 과정으로 인도
2. 하나님의 인도
1)구름기둥 불기둥 인도
- 하나님이 인도하시되 보이기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 구름기둥 불기둥 따라가면 하나님 따라가는 것
2)하나님은
- 하나님은 무형의 완전자
-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으니
- 이방인은 산 근처도 불가, 일반 백성은 산발치, 아론은 중턱, 모세는 대면
3)오늘은
- 구름기둥 불기둥은 진리와 영감
- 오늘 우리는 진리와 영감으로 인도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말씀으로
- 말씀 속에 양심을 통한 영감으로 인도
3. 말씀의 인도
1)말씀은
-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며 진리, 영감은 말씀을 통해
- 말씀은 성도의 신앙 법칙이며 걸어갈 길
2)말씀의 인도
- 구름기둥 불기둥은 그들 앞에, 따라만 가면 되도록
- 말씀은 성경에, 읽으면 되고 들으면 되도록
- 말씀이 적용되는 현실에 말씀대로 순종하도록 인도
4. 말씀 인도 따라가면-책임, 보호
1)이스라엘은
①의식주 책임, 의식주 염려
②한서의 위험에서 보호
③맹수와 대적에게서 안보
④가나안 길로 인도, 따라만 가면 가나안 입성
⑤실력을 연단, 광야 40년 통하여
2)오늘 우리는
①의식주 책임, 의식주 염려
②세상의 고락으로 인한 타락에서 보호
③세상의 수많은 악령의 미혹과 위협에서 안보
④천국의 성화의 길로 인도, 말씀대로만 살면 성화 구원 완성
⑤실력을 연단, 구원에 필요한 실력을 연단, 세상 현실을 통하여
5. 말씀 인도 따라가면-어려움과 기적
1)어려움, 그러나 능력의 기적의 길
- 출애굽 하자마자 홍해바다
- 며칠 후 마라의 쓴 물
- 또 얼마 후 물이 없어 고난, 배고픔, 영양 결핍,
-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 사막의 길, 전갈, 뱀 등 위험천만
- 고비 고비, 과정 과정마다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로 무사통과
- 따라가면 갈수록 믿음은 더해지고 연단 받아 실력은 더해지는 결과
2)오늘도 말씀 따라가면
- 육이 죽고 영이 사는 생활, 세상 재미 낙은 없어지고 천국의 사람으로
- 배고픔도 목마름도, 여러 종류 형태의 어려움도 봉착
- 세상 임금인 악령과 그 신민들의 수많은 미혹과 위협
- 말씀 인도 따라만 가면 모든 것 승리, 믿음은 더해지고 성화의 실력은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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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설교
20140713 주후
출애굽기 13:21-22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을 향해 가는 목적지는 정해져있으나 언제까지 도착해야 된다는 기간은 정해져 있지를 아니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따라가면 되는데, 여기 본문에 보니까 낮에는 구름기둥이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이 인도하셔서 주야로 밤낮으로 진행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그 길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겠고 낮이든 밤이든 언제든지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가면 된다는 말이겠고, 하나님의 인도는 낮에만 인도하고 밤에는 쉬고 혹은 밤에만 인도하고 낮에는 또 달리하고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는 밤낮이 없고 쉬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계속 되어진다는 그런 말씀으로 생각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바빠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를 언제나 인도하시고 그래서 믿는 사람들의 신앙걸음 구원의 길은 쉴때가 없는 겁니다. 주야로 진행했다 그렇지만은 가다가 진을 치고 머문 곳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전체로 두고 본다면 하나님의 인도는 쉬지 않고 계속 되며 또 밤과 낮이 따로 없고 언제든지 다 인도하신다는 그런 말씀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서 가나안까지 가는 그 과정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그 노정, 출애굽에서 가나안 입성까지 그 노정인데 일단 애굽에서 나왔고, 출애굽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홍해 바다를 건넜고, 홍해 바다는, 홍해는 뭘 의미합니까? 홍해 바다는 우리가 무엇으로 해석을 합니까? 세례를 의미하고, 세례라는 말은 죽고 산다는 뜻입니다. 홍해 바다에 빠져서 죽었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았다 그래서 세례는 죽었다가 산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홍해 바다 세례를 거쳐서 그다음 광야 40년 생활은 교회 생활이고 신앙 생활입니다. 광야 40년을 거치고,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부터 가나안 입성까지의 과정이었고, 그러면 이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 생활과 가나안 입성은 오늘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거울이라고 고린도전서 10장에 말씀을 하셨고, 전체적으로 구약시대 모든 생활은 오늘 신약 우리들의 모형이며 그림자고 우리는 원형이고 우리는 실상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받침이고 기초고 터고 우리는 그 위에 건설되어지는 그런 실제라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연결되어지고 이어지는 그런 관계고, 구약 없는 신약도 없고 신약 없는 구약은 미완성이고, 구약이 있으므로 그 위에 신약이 건설되어지는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 그러면서도 구약시대 모든 것은 모형이며 그림자고 거울이고 신약시대 모든 것은 원형이며 실상이고 실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애굽에서 나와가지고 홍해 바다를 건너고 광야 생활을 거쳐서 요단강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간 이 과정, 이것이 구약 이스라엘은 말하자면은 국경을 넘어서고 바다를 건너고 광야 사막을 지나서 요단강을 건너 넘어가서 가나안 국경을 넘어서 입성을 했고, 그래서 이거는 공간적인 개념으로 공간을 넘어서 지계를 넘어가면서 그렇게 해서 계속 인도하신 겁니다. 육체 시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애굽이라는 나라에 국경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고 반드시 애굽이라는 나라에 국경을 넘어서 나와야 되고, 홍해 바다를 건너서 가야 되고 광야를 지나가야 되고 요단강을 건너가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오늘 이것을 모형으로 거울로 삼은 실제가 되어지는 우리들의 가나안 천국 가는 노정은 어떠하냐? 우리의 천국 노정은 여기서 이치를 원리를 가져오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애굽에서 구출 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수 믿게 된 것이 애굽에서 구출을 받은 것이고 그러면 예수 믿고 홍해 바다를 건너는 것은 세례를 받는 것인데 세례라는 것은 믿음이 생겨진다 그말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실제로 믿는 믿음, 그래서 믿음이 생겨지므로 주와 함께 죽고 사는 생활이 돼서 옛사람은 죽어지고 새사람은 살겠다는 이런 각오와 결심이 진짜 생겨지고 믿음이 생겨지므로 받는 그 세례가 진정한 세례고 그것이 바로 뭐하는 겁니까? 구약으로 말하면 홍해바다를 건너가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우리 교회도 세례 받은 분들이 많은데, 세례를 받아도 그의 앞날에 신앙과 여러 가지 조건 때문에 세례를 베풀어도 보면은 세례는 받았으되 홍해바다 건너지 않은 그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말은 다시 말하면 속에 믿음이 빈약하다는 말이고 믿음이 빈약하다 그말은 주님과 함께 죽고 사는 그 마음에 깨달음이 없다 그말입니다. 사람이 초지일관으로 계속 되지 못하고 가다가 보면은 식어지기도 하고 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후퇴도 하고 다시 가기도 하고 사람은 변하는 것이니까 그리될 수가 있겠지만은, 그러나 진정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깨닫고 날 위해 죽으신 그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해서 나의 옛사람은 죽어야 된다, 죽어야 되는 그 옛사람이 있는 걸 알고 그것을 죽이려고 노력을 하고, 그리고 주님과 함께 새사람으로 살겠다는 그 깨달음이 자의적으로 생겨진 그것이 바로 진정한 세례고 그게 있다면 물로 안수받는 세례를 안 받아도 그 깨달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세례를 받은 것이고 홍해바다를 건넌 것이다 그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없으면 그런 깨달음이 속에 있지를 아니하면 물로 안수세례를 받아도 그 사람은 아직까지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이고 홍해 바다를 건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두 번째 믿은 세월이 얼마가 되든 어떤 사람은 믿은지 하루만에도 되고 열흘만에도 될 수 있고 믿기 전에도 교회는 안나와도 깨달은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보이는 것까지 다 포함해서 예수 믿고 그 다음 세례 받고 깨달음을 가지고 죽고 살고, 그리고나서 광야 생활을 하는데 광야 생활은 교회 생활이고 신앙 생활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신앙생활 교회 생활은 다 광야 생활이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40년이였고 우리 광야 생활은 자기 수명에 따라 중생되고 신앙 출발한 그 시점과 맞춰지는 그 기간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20년만에 끝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3일만에 끝날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60년 계속 될 수도 있고 오래토록 계속 될 수가 있습니다.
이거는 다르지만 어쨌든, 이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왜 하나님께서 40년을 정했을까? 그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해서 40년을 했지만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일반적인 수명은 예로부터 일반적으로 70이고 강건하면 80인데, 그런데 그 중에서 스무살 밑으로까지는 사람이 살아도 철이 없어 잘 모를 것이고 60너머 사는 것은 겨우겨우 연명이지 참 특별한 일하기 어려울 것이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스무살부터 60살까지면 40년 세월이 인생에 정말 사람답게 사는 그런 생활은 그 기간이 아닐까. 그러면 60 넘으신 분들은 좀 섭섭하겠지만은 그래도 가만히 따져보면 요즘 수명이 길어서 그리된다 할지라도 평균적으로 따져보면 사람이 사는 것은 적어도 스무살이 넘어서 그때부터 뭔가 좀 물론 사람에 따라 일찍 되는 사람, 과거 서영준 목사님은 중학교 1학년때부터 진리를 깨닫고 벌써 하늘의 소망을 전부 삼고 그래 살았으니까, 세례 요한은 언제부터요? 세례 요한은 언제부터요? 뱃속에서부터 그랬으니까. 그러니까 일찍 되는 사람도 있지만은 보편적으로 말하면 한 스무살쯤. 그리고 60이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인생의 모든게 정리고 마무리고 회고지, 그때뭔가 하는 것은 쉽지를 않다. 그래서 40년이면 인생살이 전부라 할만큼 그리 되어지겠다. 그렇다고해서 어리니까 아직까지 때가 안됐으니까 나는 좀 더 어리광 부려도 되겠다 하는 것도 속이는 일이고 나는 60이 넘었으니까 희망이 없다는 것도 그것도 참 문제고,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그말이지 이게 단정되는 건 아닙니다.
어쨌든 보통 40년. 그러면 교회생활 광야생활 40년인데, 길수도 있고 짧을수도 있고 이런 교회생활 신앙생활이 인생 신앙생활에 있고 이걸 거쳐서 이게 끝나면 그다음 하나님께서 부르실때가 되면 죽음이라는 요단강을 건너면 가나안에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데 우리의 천국은 무엇이라 그랬습니까, 오전에? 우리가 가나안 입성 천국 들어가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요? 우리의 ‘성화’입니다, 성화. 저는 이 말씀을 수없이 들었고 설교록도 읽었는데 이렇게 제 입으로 표현한 것은 저는 처음이고 이렇게 생각해보면 그게 그 길 다 연결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깨달아진 것은 저는 오늘 설교하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고보니까 과연 그렇다. 이게 우리 건설구원의 도리를 생각해보면 당연히 그리 되어지는건데도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기는 그냥 천국 가나안 입성 천국 들어가는 것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설교하면서 생각해보니까 이거는 가나안 입성이라는 것은 천국은 이미 들어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겠고 우리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거치는 모든 과정은 성화의 과정이고 이거는 주님 형상 닮는 그 노력 그 과정이지,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말은 죽어서 천국 간다는 그 의미보다는 우리가 성화되어서 주님의 형상 닮는 그게 마무리되는 시점이라 그리 아는 것이 더 의미가 많다 그리 볼 수가 있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세상에서 땅을 밟아서 바다 건너서 발로 걸어서 경계를 넘어서 그리 갔으나 우리들의 가나안 입성은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과정 과정은 현실이라는 그 과정을 통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그런 노정으로 인도를 하신다, 그러니 그들의 가나안 노정은 정해진 길이 있지만은 우리 신앙 노정은 한말로 말하면 현실이고 그 현실은 사람마다 각각 다른 것이고, 형태도 다 다른.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분량의 구원, 성화구원,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 이루어지기까지 현실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게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다 그말입니다.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습니까? 성경해석적으로 우리가 배운 건설구원에 성화구원에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 없지요. 이게 맞는 겁니다.
그러면 두 번째, 그래서 첫째, 이스라엘의 인도와 우리 인도, 이스라엘의 노정과 우리 노정의 원리를 우리가 기억을 하고, 그래서 우리는 성화구원을 이루어가는 그것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는 그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땅을 밟고 바다 건너 갔으나 우리는 현실을 통과하는 그게 하나님의 인도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현실은 우리를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인도의 과정들이다 그말이지요. 두 번째는 그러면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 본문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행하사 하나님이 신으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그리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직접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행하사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그들 앞에서 행하시면서 인도하시는데 하나님은 완전자라 그들이 볼 수 없는 분이고,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린 신앙들이라 또 보이는 육체적인 그런 시대라 그러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믿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니까 부득이하게 그들 눈에 보이기에 구름으로 보이고 불기둥으로 보여서 그래서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보이기에는 구름기둥이었고 불기둥이었고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이것도 또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름기둥이면은 기둥이니까 둥글겠고 높이가 얼마 되겠고 어떻게 생겼겠고 또 그럴 상상하면 복잡한데 그런 거는 상상하고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다만 구름기둥이니까 뭐 기둥처럼 생겼겠다 구름기둥, 불기둥이니까 기둥처럼 생긴 불덩어리겠다 그리 보면 되겠지요. 그렇게 보이게 인도하셨는데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 겉으로 보기에는 구름이고 불인데 실상은 그 구름속에 불기둥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그들을 직접 인도하셨더라 그말이고 그러기 때문에 그들 눈에 보이기에는 구름이고 불기둥이고 불덩어리 구름덩어리지만은 실제는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모습이다 그리 할 수 있는 겁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볼 수 있도록 알 수 있도록 나타나신 모습이 불기둥이고 구름기둥이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만 따라가면 바로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되어졌더라 그말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대로 보이지 않는 무형의 완전자, 그래서 구름기둥 불기둥 안에 계신다는 것도 공간적인 개념을 넘어서 생각해야 됩니다. 그걸 통해서 역사하셨다 그리 볼 수도 있고 그런데 어쨌든 하나님은 어느 형체 안에 들어 계실 수 없는 분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름기둥 안에 불 기둥 안에 계셨다고 표현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완전잔데, 그분을 우리가 보는 방법이 뭔가? 하나님을 보는 방법은 이스라엘이 거기 시내산 십계명 받을때쯤 아닌가 싶은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고 부르실 때 주의를 주시기를, 이방인들 모든 이민족들 그런 잡다한 그런 사람들은 아예 시내산 근처에 못 오게 하라 오면 죽는다 막았고, 그다음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발치에 머물러 있어라 올라오면 죽는다 말씀하셨고, 산중턱까지는 누가 올라 갑니까? 아론은 산중턱까지 올라와도 된다 말씀하셨고 모세는 시내산 위에 올라와서 주님을 대면해서 만났고, 주님을 잠깐 만나도 모세 얼굴에 광채가 나서 내려올때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광채가 나서. 그러면 그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그만큼 자기 신앙이 자기라는 사람의 성화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 되겠고, 본다 안다는 말은 육안적으로 보는 그런 개념이 아니겠고, 깨닫고 느끼고 아는 그런 것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그런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은 사람이 그 정도에 따라서 보이는 피조물 사람보다 더 확실하게 믿고, 보이는 피조물 사람보다 더 자기에게 더 확실히 보여지고 들려지고 느껴지고 그리 되니까 다니엘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눈앞에 보이는 그 세계 제일의 강대국의 권력을 지고 있는 왕의 어명이 떨어졌어도 그 왕이 바로 앞에서 호령을 치고 있고 시뻘건 풀무불이 훨훨 타고 있지만은, 그 왕의 귀에 들리는 어명보다, 시뻘건 용광로 풀무불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음성이 더 또렷했고 더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왕이여 우리가 절하지 아니할줄을 아시옵소서. 이게 하나님을 봤기 때문에 그래된 것이고, 보이는 사람보다 더 또렷이 보고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분의 음성이 역사가 눈앞에 보이는 그 왕과 풀무불보다 더 강하게 그들속에 역사하고 그들 붙들고 있으니까 그들이 왕의 명을 어기고 풀무불에 들어가도 하나님의 명령은 거역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을 봤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간 것도 그리 되어진 것이고 오늘도 우리 믿음의 정도가 하나님을 만나는 정도에 따라서 말씀을 순종하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이런 차이로 다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했고, 오늘 우리 인도는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인도하시는가. 구름은 물이니까 물은 진리고, 또 불은 성령이니까, 불은 성령이란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에도 성령관때도 나오지요. 성령이 역사하실 때 불에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인다 그런 것도 있지요. 그래서 또 성령 불이라는 말은 뜨겁게 태운다는 뜻이고, 그러면 오늘에 우리를 인도하시는 구름기둥 불기둥은 진리와 영감이다. 그러면 진리와 영감으로 인도하신다는 그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신다는 뜻입니까?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에 직접 행하셨는데,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구름기둥 불기둥을 통해서 그들을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이며, 오늘 진리와 영감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전에 말씀드린 것 생각해보면 바로 아실건데요. 구름기둥 불기둥 인도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그들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내신 겁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보이지 않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내셔서 인도하신 것이다 그말이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실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도하셨는데 보이게 인도하셨다는 뜻이고 오늘날 진리와 영감으로 인도하신다는 그말은 역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인데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알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그말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무인격 존재고 이치니까 눈에 보이지를 아니하나 그 진리 이치라는 것은 말 그대로 이치기 때문에 이치라는 것은 기록된 글을 읽어보던지 말을 들으면 사람 속에 있는 이성이 듣고 이성이 판단해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치는 사람이 아는 겁니다. 안다는 것은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보는 것의 목적은 알기 위해서, 즐기기 위해서 보는 것은 외부적 껍데기 구경하는 것 탐경하는 것 이건 외부적이고 하나의 낙(樂)적인 그런 것이고, 일반적으로 눈으로 보는 것은 아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아는것. 듣는 것도 아는 것이고, 음악 듣는 것 말고는, 음악 들어 아는 것도 그 음악 들어 기쁨을 가지는 것 마음의 평안 느끼는 것 역시 알아야 되겠지요. 감정적인 그런 역사도 있겠지만은. 그러니까 이치를 들으면 사람이 사람 속에 있는 이성이 알 수 있다 그말이고, 그러기 때문에 진리를 인도하신다는 그말은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는 그말이고, 영감으로 인도하신다는 그 영감도 사람이 느낄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와 영감이라 그러면 우리는 막연하게 구름처럼 그냥 이상처럼 먼 것처럼 그리 생각을 하고 느껴졌으나 따지고 생각해보니까 이거는 바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내 마음 속에, 그래서 신명기에 보니까 이 말씀은 네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라 바로 네 마음에 있고 네 입에 있다 그랬습니다. 눈으로 보면 알 수 있고 귀로 들으면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진리를 주셨고, 그 진리를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말입니다. 이것도 참 생각해보면 대단히 쉽지 않은 그런 말이고, 싸지 않은 헐한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는데 그들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어린 그들이 볼 수 있도록 구름의 모습, 불의 모습으로 그들을 보고 따라가도록 인도를 하셨고, 오늘 신령한 우리는 좀 더 장성한 때고 신령한 때기 때문에 육안으로 보는 구름이나 불은 아닐지라도 우리 사람 속에 있는 마음의 이성이 알 수 있도록, 감정이 알 수 있도록, 양심이 알 수 있도록 진리와 영감으로 인도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짐승들은 진리와 영감을 모르겠지요. 그들 속에는 이성이 없으니까, 사람 같은 그런게 없으니까.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진리를 알 수 있고 영감을 알 수 있는 것이고 이 진리와 영감은 우리에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 생각해보면 아는 겁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도 진리입니다. 생각해보면 아는 겁니다. 그 진리 속에 들어가면 그 진리속에 영감 역사하니까 우리가 진리를 내가 이성으로 받아드리고 양심을 써서 그 진리를 생각해보면 그 진리 속에 역사하신 영감이 내 양심을 통해서 나를 감동시키면 성령의 감화감동이 내게서 역사를 한다 그말입니다. 찬송을 할때, 일반적인 그런 감정도 있고, 찬송가 가사를 ‘날 구원하신 예수를’ 그다음요?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이라는 말이 쉽게 쓰이는 말입니까?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송하겠네. 그 가사 한 절 오래토록 불러왔는데, 그 가사가 이치입니다, 진리고. 그걸 생각해보면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송하겠네. 그 이치 속에 그걸 가만히 생각해보면 성령이 역사하여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신 주님 그분을 받은 은혜 생각을 하고 감사하고 구원을 깨닫고 나니까 찬송을 영원히 하고 하고, 영원토록 찬송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말입니다. 이 후에 천국 올라가 더 좋은 곡조로 날 구속하신 은혜를 늘 찬송하겠네. 그런 깨달음 속에서 그 깨달음을 가지고 가만히 명상해서 들어가면 그 이치를 이성을 가지고 생각을 하고 양심으로 생각해보면 그 양심 통해서 성령이 역사해서 내 속에 느낌을 주고 감동을 주고 감사를 주고 기쁨을 주고 힘을 주고 그 감사와 기쁨 그 힘을 가지고 자기도 꺾고 의지도 생기고 결심도 생기고 인내도 생기고 그래서 죄를 이기는 그게 바로 영감의 능력이다 그말이지요. 이런 진리와 영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인도다.
그러면 영감이란 것은 언제나 진리 속에 역사하는 거니까, 우선에 영감을 두고 말씀으로 생각해본다면. 그러면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 이렇게 생각해보면 꼭 같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데 그 하나님의 인도가 그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났고,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우리 인도의 과정은 세상에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시고, 예수 믿는 가운데 진리를 깨닫고 믿음이 생겨지니까 주님의 대속의 은혜 깨닫고 죽으심에 감사해서 나도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사는 세례역사가 있고 홍해바다 역사가 있고, 그리고 광야생활을 통해서 말씀을 자꾸 읽고 듣고 배우고 하니까 알아가는 가운데서 주님을 닮아가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하는 모든 과정들, 그것들이 이스라엘이 그렇게 인도하셨듯이 우리 인도하시는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 그들 앞에 행하사 직접 인도하셨으나 그들 눈에는 구름 기둥 불기둥 이었고,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 예수 믿게 만드신 것도 직접 인도, 우리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세례 역사 있게 하신 것도 직접 인도, 말씀을 듣고 읽고 깨닫게 하는 것도 직접 인도, 직접 인도인데 그 인도의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날때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타나시고 영감으로 나타나셔서 우리 앞에 보여지는, 우리가 읽고 듣고 배워서 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 되고 그게 영감 인도 따라가는 것이 되고 그리 되어진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무엇인가? 말씀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말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무인격 존재기 때문에 지정리 희로애락의 작용 역사 있는 그런 인격 존재는 아니지만은 이치니까 이치로 존재하고 그 이치는 우리들이 읽어보면 알고 들어보면 알고. 2 더하기 2는 5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00이, 맞아요 틀려요? 2 더하기 2는 맞아요, 틀려? 틀렸지. 왜 틀립니까? 수학의 이치에서 틀렸습니다. 000? 잔다, 피곤해서. 들어보니까 2 더하기 2는 4인데 5다? 틀렸다. 들어보니까 알잖습니까? 들어보니까 아는 겁니다. 밥을 하려면, 밥을 하려면 가스렌지가 있어야 되고 또 냄비가 있어야 되고 쌀이 있어야 되고 물이 있어야 되고. 그래가지고 그릇에다가 쌀을 씻어놓고 물을 적당히 붓고 불을 떼면 밥이 된다. 그런데 자동전기밥솥이 아니고 가스렌지 같으면 어느 시간 지나서 어느쯤되면 꺼야되는데, 이걸 모르면 다 탈때까지 그냥 두면 다 타버립니다. 밥을 할때는 그러면 예를 들면은, 일반 몇 사람 밥하는데 그렇게 냄비에 밥 넣고 할때는 한 한시간정도 가스렌지 불을 최고 높이 가장 쎈 화력으로 한시간 정도 켜놓으면 밥이 된다, 누가 그렇게 말합니다. 철 없는 처녀가 몰라가지고 밥을 할때는 냄비에 물을 붓고 쌀을 얹고 가스렌지 얹어 불을 켜는데 가장 쎈 화력으로 한시간 동안 계속 켜놓으면 밥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 밥 할 줄 아는 사람이 들을 때 뭐라합니까? ‘아유 잘 모르네. 밥은 그렇게 하는게 아니고, 보다가 적당히 불도 조절해야 되고 밥이 넘치면 불도 낮춰줘야 되고, 뜸을 들여야 되고 그런게 있는데 이 아이는 모르니까 틀렸다’. 틀린 것은, 그 사람이 알고 있는 밥 아는 이치가 들어보니까 틀렸다는 것을 알잖습니까? 2 더하기 2는 4인데 5라고 대답을 하니까 틀렸구나. 틀린 것을 안다 그말이지요. 사람이 생각이 있고 이성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안 믿는 사람은 모릅니다. 그들은 영이 죽어있고 하나님께서 막아 놨기 때문에. 그러나 중생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양심을 쓰고 들어보면 아는 겁니다. 어느게 옳다 그르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게 말씀의 인도고 영감의 인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코 핑계 대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주신만큼 요구하시고 거두시기 때문에 한 달란트 줘놓고 세 달란트 구하지 않기 때문에 핑계 대지 못합니다. 주신 만큼 구하시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말씀은 무엇인가?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 말씀은 무엇인가? 그 말씀은 좀 분해해보면, 그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라 그렇게, 말씀까지는 그렇게 내려왔으니까 그렇게 볼 수 있겠고, 그다음 그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뜻이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이지만은, 그러나 어렵게, 저도 이거는 고민중인데, 독자적인 그런 권위를 능력을 가진 말씀이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생각이고, 하나님의 소원이고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요구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든 것이 그 말씀속에 다 담겨서 나와있다 그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말씀은 우리에게 적용될때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그 말씀이, 말씀 자체로 있을때는 하나님의 뜻이며 진리며 참된 이치 진리며, 독자적인 권위를 능력을 가진 말씀이며, 하나님의 소원이며 하나님의 생각이며 요구며, 하나님의 모든 것이 들어있는 그게 진리고 하나님 뜻인 말씀이고,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될 때는 우리에게 거울이며 저울이며 잣대며 법칙이며 우리 길의 등불이며 빛이며 우리들의 걸어갈 길이며,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으로 우리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데 인도하시는 그 모습은 그 형태를 보면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실때는 구름기둥 불기둥이 앞에 가고, 구름 기둥 불기둥은 공중에 떠서 갔겠지요, 가고. 소리 없는 비행기처럼 날아갔겠지요, 가고. 이스라엘은 뒤를 따라 가고. 말씀과 영감이 우리를 인도하실때는 말씀은 이거는 말씀 자체는 변하지 않고 이미 선포된 그 말씀은 영원후까지 모든 말씀은 완전히 나와있고, 영원후까지 나와있고. 영원후까지란 말은 제가 좀 생각을 하겠습니다. 어쨌든 말씀은 이미 나와있고, 그다음 나와있는 그 말씀이 이미 나와있습니다. 진리는 있는데, 그 진리를 내가 따라갈 때, 내가 따라간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걸어갔으나 내가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데,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를 인도하실 때 그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여기서 하나 우리가 연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구원, 우리들이 들어가는 가나안은 우리 성화니까, 성화라는 것은 자기 변화고, 자기 변화라는 것은 내 언행심사 활동에서 변화가 되어지는 것이고, 그 언행심사 심신의 모든 활동은 이 세상 현실에서 되어지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두사람이 같이 걸어가고 같은 세월을 보내도 어떤 과정을 거쳤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완전히 차이가 많이 나지요. 공부를 10년 열심히 한 사람하고, 10년 동안 농사를 지은 사람하고 완전히 달라서, 10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공부쪽으로는 10년 했으니까 그만큼 알건데 농사 짓는데서는 까막눈이겠고, 농사 짓는 사람은 10년 농사 지었으니까 농사는 박사고 농부는 됐는데 공부 쪽에는 모르겠고, 완전히 다릅니다. 왜 다르냐? 왜 다릅니까? 000씨 왜 달라요? 살아온 과정이 다르니까. 다를 수밖에, 필연 아니겠습니까? 다를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살아온 과정이 다른 것은 왜 다릅니까? 사람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그리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환경에 적응되도록 만들었고, 안 믿는 사람이 적자생존이라는 그런 말을 쓰는 그것이 이런걸 보고 하는데, 성경을 모르니까 보이는 것만 그리 하는 것이지 사람이란 것은 지음 받을때부터 다른 존재도 그렇고 그리 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놨습니다. 그러니까 환경의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되도록 만드셨는데 사람이 변하지 않게 만들지 않고 변하게 만드신 것은 성화를 위해서 변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많이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주시는 그 현실 과정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그 모습이 되어지는건데, 진리를 모르면 공자한테 배워서 공자의 도덕을 알면 삼강오륜을 배우고 또 뭡니까? 소학이니 대학이니 뭐니하는 이런걸 배워가지고, 그런걸 배워가지고 그대로 공부해서 그대로 연습해서 살면 공자같은 그런 도덕군자는 될 것이고, 석가모니의 불경을 배워가지고 그리 알면 석가모니 닮은 돌부처 같은 그런 사람은 될 것이고, 공산주의 이론을 배워서 그대로 살면 공산주의자 같은 그런 사람이 될 것이고, 그리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가지고 성경 도리를 배워서 하나님의 형상 닮아가는 그 이치 진리를 배워가지고 그대로 살면 하나님 형상 닮은 사람이 된다 그말입니다. 사람이란 것은 별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무엇을, 그래서 오전에 말씀드릴때 우리 구원은 몇가지라 그랬습니까? 들어야 기억을 하지요. 우리 구원은 몇가지라고요? 몇가지 하는게 우리 구원? 000 선생님, 첫째 뭐? 또? 배우는 것 하고 연습하는게 우리 신앙입니다. 하나는 배우는 것, 연습하는 것, 아닌가요 이게? 학생이 자라가는 것도 사람이 어떤 사람 모든 사람 되는 것도 결국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배워 아는 것, 하나는 아는 그대로 연습해서 익숙해지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배우는 것은 알기 위해서, 아는 것은 그대로 행해서 살고 그리 되기 위해서 써먹기 위해서. 신앙이란 것은 그겁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우리가 예배 시간을 일주일에 두 번만 하면 주일 오전 오후예배인데, 일주일에 두 번, 대예배는 밤예배까지하면 네 번, 새벽기도까지 하면 우리는 열 번. 그러면 열 번 예배 참석해서 열 번 듣는 것 하고 네 번 듣는 것 하고 두 번 듣는 것 하고는 차이가 많겠고, 그것도 한번씩 빼먹으며 듣는 것 하고는 많은 차이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이거는 참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사람이, 또 세상 지식은 머리가 탁월하게 좋으면 남 열시간 공부해도 한시간 공부하면 아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도리는 하나님께서 그리 안되도록 만들어놨습니다. 너를 받쳐라.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자기를 바치지 않으면 안되도록 해놨기 때문에 자기를 바친만큼 진실한만큼 구원도리를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리 정해놨고 그래야 그게 공평이 되는 겁니다. 그게 공평이 그래야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은 잘났기 때문에 잘됐고 나는 못났기 때문에 못했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럴때 하나님께서 많이 주신 자에게는 많이 거두고, 적게 주신 자에게는 적게 거두는 거니까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났든 못났든 하나님 앞에는 상관이 없고 핑계 될 수가 없는 겁니다. 배워서 알고, 아는 그대로 연습하는 것. 연습이란 것은, 그 생각도 해봤지요. 스케이트 타는 김연아 선수같은, 그런 아가씨, 그 처녀 같은 그 사람은 스케이트 타는게, 스케이트 타고 춤도 추고 오만거 다하는데 그게 그 사람이 실수도 하지만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느날 갑자기 그래 된건가요? 오랜 십몇년세월을 그리 하니까 된 것인데, 여기 있는 사람들 나이가 들어 뼈가 굳으면 어렵겠지만은, 여기 그 누구도, 남녀 반에 그 누구도 한 4-5살때부터 10년동안 그리 연습하면 세계 제일은 못되도 어지간히 그만큼 흉내는 다 내게 되있습니다.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운동을 못해도 10년동안 운동만 하면 어느 정도 운동하는 사람이 되고, 피아노에 아무리 둔하고 음악에 소질이 없어도 10년동안 피아노치면은 어느정도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은 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래 만들어놨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이 어디에다가 가치를 두고 무엇을 공부해서 배우고 무엇을 연습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판이하게 달라지니까. 많은 사람이 돈벌이에 목적을 두고 돈버는 것을 배워서 돈 버는 그 일을 하고 권세잡는 그 일을, 그 방법 배워서 권세 잡는 거기에 다 기울이고, 명예 쌓는 방법 배워서 명예 쌓는 거기에 다 기울이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은 적당히 먹고 마시는 그런 것 배워가지고 그렇게 사는데 다 쏟아버리고. 그러니까 사람들의 모습들이 자기가 살아온 과정 모습 그대로, 살아온 그 과정대로 오늘의 현재 모습이 되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못났지만은, 세상적으로 내놓을게 없어도. 믿는 것이 참 허무하지만은 그래도 진리를 배워가지고 이만큼 살려고 노력하므로 이정도 우리 신앙은 되어져 있는 것이고, 우리 신앙이 별 보잘 것 없는 참 믿음의 선진들에 비하면 발바닥도 못따라가는 그정도지만은 그래도 이 시대에 믿는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그들 또한 우리 세계를 도무지 이해조차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그렇다면 우리 신앙 걸음이 소망을 두고 목표를 두고는 부족하고, 아직 한참 가야 되겠지만은, 그러나 또 다시 소망 가운데 다른 사람과 비교할 건 아니지만은 참고하기 위해서 본다면 그들보다 우리는 그들은 모르는데 우리는 알고 그들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흉내도 걸음마도 못했는데 우리는 그래도 제법 걸어왔고, 이런 것이 차이인데, 마지막에 결산을 두고 최종적으로 궁극에 가서 어느 것이 성공이냐 승리냐를 판정할때는 그때는 이제는 궁극에 들어가 궁극의 존재 큰 분이신 하나님이 모든 걸 판단하실거니까 그게 문제겠지요. 하나님이 판단하실때는 말씀으로 그대로 판단하실거니까.
그러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를 현실 인도하는데, 말씀 이치는 변하지 않고, 그런데 그 말씀이 적용되는 현실이 쉬지않고 변해나가니까 우리가 만나는 그 현실 현실마다 그때 그때마다 내가 읽어서 들어서 배워서 아는 그 말씀대로 그 현실을 통과 통과 하는 겁니다. 내 눈이 말씀대로, 귀가 말씀대로, 듣는 것을 보는 것을 입는 것을 먹는 것을 말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을 취사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모든 사리판단 결정 처리 전부를 말씀대로 하는 겁니다. 그런것이 말씀대로 따라가는 것이고,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말씀과는 상관 없이 그 현실 되는대로, 등따시고 배부르니까 자고 편안하고 놀때 되니까 놀고 잘 때 되니 자고, 일할 때 되니 일하고 공부할때되니 공부하고, 때 되면 결혼하고 자녀낳고 다른 사람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면 그 사람은 말씀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니까 평생을 살아도 그 사람은 가나안 입성과는 천리만리 거리가 먼, 내나 애굽땅에 그대로 있는 사람. 말씀으로 현실을 통과하는 사람은 가나안을 향해 점점 자꾸 가는 사람 이게 차이가 나는데. 이렇게 따라갈 때, 복습이지만은 말씀의 인도를 이렇게 따라가면, 이 걸음은 한말로 말하면, 이스라엘이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가는 그 길은 도무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홍해바다도 사람이 건너갈 수 없었고, 광야에도 사람이 살 수 없었고, 견딜 수 없었고, 요단강도 마찬가지였고, 사람의 힘으로, 일반 사람의 인식으로 상식으로 인간의 실력과 노력으로 할 수 없고 갈 수 없는 걸음으로만 말씀을 인도했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 인도했습니다. 오늘도 말씀 따라가면 그런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법칙으로 삼아 그 말씀대로 오늘의 현실을 또박또박 살아가는 그런 생활하면은 일반 사람으로 도무지, 그래서 우리 정도는 잘 믿는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어린 아이 신앙도 안되는, 젖먹이 겨우 면할, 걸음마 뗀 그 정도의 우리 신앙인데도, 우리들의 신앙 모습을 안 믿는 사람들은 세계 다르니까 이건 전혀 모르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믿는 사람들도 이해도 못하고 어떻게 그리 사나 하고 말들 하는데, 그런데 우리가 볼때 이거는 믿는 것도 아닌데 더 믿음의 사람들의 걸어간 걸음을 보면은 참 어렵습니다. 백목사님 같은 분도 80 되신 분이, 그때는 의례히 그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80 연세 되는 분이 아침에 식사하시고 9시 되면은 차타고 한시간 거리에 있는 저 양산동 거기 기도산에 가는데 도착해서 집에 있는 것이 아니고 걸어서 산에서, 80 노인이 내려서, 한 시간 차타고 가서 산에서 한 30분 가까이 걸어 올라가서 거기 텐트치고 하루 종일 거기 앉아있습니다. 앉아있다가 밤이 되면 내려오고, 어떨때는 거기서 밤새고, 밤이 되면 내려오고 어떨때는 거기 있다 새벽기도때 거기서 2시나 출발해서 새벽기도 오고. 그 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는데, 그때 그 밑에 있을때는 원래 그래 하는 것이라 나도 나이 많으면 저때는 저리 하리라, 그리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초인간적인 생활이지 그거는 사람이 못하는 일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80은 커녕 지금 나이에도 건강이 허락 안해서도 못하는데, 전부다 초인간적인 걸음이였고, 매주일 주일학생이 8천명이 주일마다 모였는데, 부산 각처에서, 차량이 수십대가 움직이는데, 그 세월이 20년이 넘었지요. 20년 가까이 됐으니까. 10 몇 년, 약 20년, 그리됐는데 제가 아는대론 사고는 딱 하나 나긴 났지요, 그때. 그것도 와서 마치고 집에 동네가서 하나 사고나고, 그 외에는. 그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리 교회 교인 한 백명 집회 가면은 저는 마음이 집회 갈때부터 차량, 아마 이것도 말이 나온김에 말하면, 우리 교인들은 차 타고 갔다올때 그런걸 모르니까, 여기 갈때도 차를 따로 타고가면 어떤 분들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문자라도 보내는 분이 있고, 집에 돌아올때도 ‘도착했습니다.’ 보내주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거기 신경을 안씁니다. 그런데 특별한 말이 없으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그래 연락 안하지만, 초기에는 연락 많이 했지만은. 모든 차가 도착할때까지 저는 마음을 못 놓습니다. 마음을 조린다 말이지요. 우리 교인들이 집회 마치고 다 도착해서 일상생활이 다 될 때까지, 도착할 시간이 되고 저녁까지 아무 문제 없으면 그때는 다 된거니까. 그러면 그때는 안심을 좀 하지요. 그러면 그때는 차가 보통, 서부교회서만 가는 차가 버스만 100대입니다. 시외버스 전세버스만 100대. 수백대가 움직이는 그 전부가 다 백목사님 짐인데, 그것도 세월이 얼맙니까. 전부 보면은 초인간적인 초자연의 능력으로 그런 역사를 했지 그냥 일반적인게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인도따라 가는 그 생활이 일반 생활속에서도 사람이 일반적으로 걸어갈 수 없는 그런 걸음인데, 걸어가보면 의식주 다 책임졌고, 한서의 해를 다 책임졌고 모든 맹수 위험에 대적에 다 책임졌고, 길을 인도하시니까 헤멜 것 없고,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구름 기둥 불기둥 인도 따라가니까 어디로 가면 가나안으로 가는지 염려할 게 없습니다. 내비게이션입니다. 따라가면 되는 거니까. 말씀의 인도만 따라가면 천국 가는 길을 헤멜 일이 없습니다. 말씀의 인도 따라 가는 그게 바로 천국 가는 길이고 성화가 되는 길이니까. 그리고 그 인도따라가는 그 속에서 광야 40년 생활속에 천국 실력을 쌓았고 가나안 실력 쌓았고 연단을 받아서 그리 이루어졌듯이 말씀 인도 따라가면 의식주 염려없고 세상에 고락간에 상관이 없고 모든 악령에 위협과 세상 온갖 위협이 상관이 없고 모든 대적이 상관이 없고 이 세상에서 길을 몰라 헤메는데 말씀 인도 따라가면 천국 가는 길을 헤멜 일이 없고, 말씀의 인도 따라가면 천국의 실력, 연단은 저절로 다 되어지는 것이고, 이게 말씀의 인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길을 걸어가나 그 속에는 전부 하나님의 은혜와 초자연의 능력으로 걸어가는 것이 말씀 따라가는 길이다. 요셉이 그랬지 않습니까? 다니엘이 그랬지 않습니까? 믿음의 사람 다윗이 그랬고, 아브람 이삭 야곱 다 그러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인도 따라가는 믿음의 길이다. 우리가 생각을 하고 오늘 말씀에서,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말씀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껍데기만 신앙이지 참 신앙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지런히 성경 읽어야 됩니다. 성경 안 읽으면 모릅니다. 성경만 읽어서 어려워서 모르겠으니까 말씀을 자꾸 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 읽고 설교록을 부지런히 읽어야 됩니다. 설교록 읽고, 예배 시간에 말씀을 자꾸 듣고 읽고 복습하고 생각해보고 그리하는 가운데 알아지고, 알고나면은 아는 그대로 살아서 연습을 하고, 연습했는데 연약해 넘어지니까 또 해보고 또 해보고, 넘어지면 회개하고 도움받아 또하고, 또 넘어지면 또 회개하고 또 하고, 그래가지고 평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가시는 우리 구원이고 우리의 성화의 과정, 이게 우리의 구원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깊이 좀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알고 말씀의 인도따라 믿음으로 가는 우리가 되야 되겠습니다.
제목: 말씀의 인도
1. 이스라엘의 노정
-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과정
-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거울이며 모형, 그림자
-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노정으로, 지계(地界)로 인도
- 오늘 우리는 장소가 아닌 성화의 과정으로, 현실(現實)로 인도
- 하나님의 형상 이루기까지 현실 과정으로 인도
2. 하나님의 인도
1)구름기둥 불기둥 인도
- 하나님이 인도하시되 보이기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 구름기둥 불기둥 따라가면 하나님 따라가는 것
2)하나님은
- 하나님은 무형의 완전자
-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으니
- 이방인은 산 근처도 불가, 일반 백성은 산발치, 아론은 중턱, 모세는 대면
3)오늘은
- 구름기둥 불기둥은 진리와 영감
- 오늘 우리는 진리와 영감으로 인도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말씀으로
- 말씀 속에 양심을 통한 영감으로 인도
3. 말씀의 인도
1)말씀은
-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며 진리, 영감은 말씀을 통해
- 말씀은 성도의 신앙 법칙이며 걸어갈 길
2)말씀의 인도
- 구름기둥 불기둥은 그들 앞에, 따라만 가면 되도록
- 말씀은 성경에, 읽으면 되고 들으면 되도록
- 말씀이 적용되는 현실에 말씀대로 순종하도록 인도
4. 말씀 인도 따라가면-책임, 보호
1)이스라엘은
①의식주 책임, 의식주 염려
②한서의 위험에서 보호
③맹수와 대적에게서 안보
④가나안 길로 인도, 따라만 가면 가나안 입성
⑤실력을 연단, 광야 40년 통하여
2)오늘 우리는
①의식주 책임, 의식주 염려
②세상의 고락으로 인한 타락에서 보호
③세상의 수많은 악령의 미혹과 위협에서 안보
④천국의 성화의 길로 인도, 말씀대로만 살면 성화 구원 완성
⑤실력을 연단, 구원에 필요한 실력을 연단, 세상 현실을 통하여
5. 말씀 인도 따라가면-어려움과 기적
1)어려움, 그러나 능력의 기적의 길
- 출애굽 하자마자 홍해바다
- 며칠 후 마라의 쓴 물
- 또 얼마 후 물이 없어 고난, 배고픔, 영양 결핍,
-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 사막의 길, 전갈, 뱀 등 위험천만
- 고비 고비, 과정 과정마다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로 무사통과
- 따라가면 갈수록 믿음은 더해지고 연단 받아 실력은 더해지는 결과
2)오늘도 말씀 따라가면
- 육이 죽고 영이 사는 생활, 세상 재미 낙은 없어지고 천국의 사람으로
- 배고픔도 목마름도, 여러 종류 형태의 어려움도 봉착
- 세상 임금인 악령과 그 신민들의 수많은 미혹과 위협
- 말씀 인도 따라만 가면 모든 것 승리, 믿음은 더해지고 성화의 실력은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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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설교
20140713 주후
출애굽기 13:21-22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을 향해 가는 목적지는 정해져있으나 언제까지 도착해야 된다는 기간은 정해져 있지를 아니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따라가면 되는데, 여기 본문에 보니까 낮에는 구름기둥이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이 인도하셔서 주야로 밤낮으로 진행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그 길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겠고 낮이든 밤이든 언제든지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가면 된다는 말이겠고, 하나님의 인도는 낮에만 인도하고 밤에는 쉬고 혹은 밤에만 인도하고 낮에는 또 달리하고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는 밤낮이 없고 쉬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계속 되어진다는 그런 말씀으로 생각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바빠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를 언제나 인도하시고 그래서 믿는 사람들의 신앙걸음 구원의 길은 쉴때가 없는 겁니다. 주야로 진행했다 그렇지만은 가다가 진을 치고 머문 곳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전체로 두고 본다면 하나님의 인도는 쉬지 않고 계속 되며 또 밤과 낮이 따로 없고 언제든지 다 인도하신다는 그런 말씀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서 가나안까지 가는 그 과정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그 노정, 출애굽에서 가나안 입성까지 그 노정인데 일단 애굽에서 나왔고, 출애굽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홍해 바다를 건넜고, 홍해 바다는, 홍해는 뭘 의미합니까? 홍해 바다는 우리가 무엇으로 해석을 합니까? 세례를 의미하고, 세례라는 말은 죽고 산다는 뜻입니다. 홍해 바다에 빠져서 죽었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았다 그래서 세례는 죽었다가 산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홍해 바다 세례를 거쳐서 그다음 광야 40년 생활은 교회 생활이고 신앙 생활입니다. 광야 40년을 거치고,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부터 가나안 입성까지의 과정이었고, 그러면 이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 생활과 가나안 입성은 오늘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거울이라고 고린도전서 10장에 말씀을 하셨고, 전체적으로 구약시대 모든 생활은 오늘 신약 우리들의 모형이며 그림자고 우리는 원형이고 우리는 실상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받침이고 기초고 터고 우리는 그 위에 건설되어지는 그런 실제라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연결되어지고 이어지는 그런 관계고, 구약 없는 신약도 없고 신약 없는 구약은 미완성이고, 구약이 있으므로 그 위에 신약이 건설되어지는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 그러면서도 구약시대 모든 것은 모형이며 그림자고 거울이고 신약시대 모든 것은 원형이며 실상이고 실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애굽에서 나와가지고 홍해 바다를 건너고 광야 생활을 거쳐서 요단강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간 이 과정, 이것이 구약 이스라엘은 말하자면은 국경을 넘어서고 바다를 건너고 광야 사막을 지나서 요단강을 건너 넘어가서 가나안 국경을 넘어서 입성을 했고, 그래서 이거는 공간적인 개념으로 공간을 넘어서 지계를 넘어가면서 그렇게 해서 계속 인도하신 겁니다. 육체 시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애굽이라는 나라에 국경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고 반드시 애굽이라는 나라에 국경을 넘어서 나와야 되고, 홍해 바다를 건너서 가야 되고 광야를 지나가야 되고 요단강을 건너가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오늘 이것을 모형으로 거울로 삼은 실제가 되어지는 우리들의 가나안 천국 가는 노정은 어떠하냐? 우리의 천국 노정은 여기서 이치를 원리를 가져오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애굽에서 구출 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수 믿게 된 것이 애굽에서 구출을 받은 것이고 그러면 예수 믿고 홍해 바다를 건너는 것은 세례를 받는 것인데 세례라는 것은 믿음이 생겨진다 그말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실제로 믿는 믿음, 그래서 믿음이 생겨지므로 주와 함께 죽고 사는 생활이 돼서 옛사람은 죽어지고 새사람은 살겠다는 이런 각오와 결심이 진짜 생겨지고 믿음이 생겨지므로 받는 그 세례가 진정한 세례고 그것이 바로 뭐하는 겁니까? 구약으로 말하면 홍해바다를 건너가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우리 교회도 세례 받은 분들이 많은데, 세례를 받아도 그의 앞날에 신앙과 여러 가지 조건 때문에 세례를 베풀어도 보면은 세례는 받았으되 홍해바다 건너지 않은 그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말은 다시 말하면 속에 믿음이 빈약하다는 말이고 믿음이 빈약하다 그말은 주님과 함께 죽고 사는 그 마음에 깨달음이 없다 그말입니다. 사람이 초지일관으로 계속 되지 못하고 가다가 보면은 식어지기도 하고 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후퇴도 하고 다시 가기도 하고 사람은 변하는 것이니까 그리될 수가 있겠지만은, 그러나 진정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깨닫고 날 위해 죽으신 그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해서 나의 옛사람은 죽어야 된다, 죽어야 되는 그 옛사람이 있는 걸 알고 그것을 죽이려고 노력을 하고, 그리고 주님과 함께 새사람으로 살겠다는 그 깨달음이 자의적으로 생겨진 그것이 바로 진정한 세례고 그게 있다면 물로 안수받는 세례를 안 받아도 그 깨달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세례를 받은 것이고 홍해바다를 건넌 것이다 그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없으면 그런 깨달음이 속에 있지를 아니하면 물로 안수세례를 받아도 그 사람은 아직까지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이고 홍해 바다를 건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두 번째 믿은 세월이 얼마가 되든 어떤 사람은 믿은지 하루만에도 되고 열흘만에도 될 수 있고 믿기 전에도 교회는 안나와도 깨달은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보이는 것까지 다 포함해서 예수 믿고 그 다음 세례 받고 깨달음을 가지고 죽고 살고, 그리고나서 광야 생활을 하는데 광야 생활은 교회 생활이고 신앙 생활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신앙생활 교회 생활은 다 광야 생활이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40년이였고 우리 광야 생활은 자기 수명에 따라 중생되고 신앙 출발한 그 시점과 맞춰지는 그 기간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20년만에 끝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3일만에 끝날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60년 계속 될 수도 있고 오래토록 계속 될 수가 있습니다.
이거는 다르지만 어쨌든, 이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왜 하나님께서 40년을 정했을까? 그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해서 40년을 했지만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일반적인 수명은 예로부터 일반적으로 70이고 강건하면 80인데, 그런데 그 중에서 스무살 밑으로까지는 사람이 살아도 철이 없어 잘 모를 것이고 60너머 사는 것은 겨우겨우 연명이지 참 특별한 일하기 어려울 것이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스무살부터 60살까지면 40년 세월이 인생에 정말 사람답게 사는 그런 생활은 그 기간이 아닐까. 그러면 60 넘으신 분들은 좀 섭섭하겠지만은 그래도 가만히 따져보면 요즘 수명이 길어서 그리된다 할지라도 평균적으로 따져보면 사람이 사는 것은 적어도 스무살이 넘어서 그때부터 뭔가 좀 물론 사람에 따라 일찍 되는 사람, 과거 서영준 목사님은 중학교 1학년때부터 진리를 깨닫고 벌써 하늘의 소망을 전부 삼고 그래 살았으니까, 세례 요한은 언제부터요? 세례 요한은 언제부터요? 뱃속에서부터 그랬으니까. 그러니까 일찍 되는 사람도 있지만은 보편적으로 말하면 한 스무살쯤. 그리고 60이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인생의 모든게 정리고 마무리고 회고지, 그때뭔가 하는 것은 쉽지를 않다. 그래서 40년이면 인생살이 전부라 할만큼 그리 되어지겠다. 그렇다고해서 어리니까 아직까지 때가 안됐으니까 나는 좀 더 어리광 부려도 되겠다 하는 것도 속이는 일이고 나는 60이 넘었으니까 희망이 없다는 것도 그것도 참 문제고,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그말이지 이게 단정되는 건 아닙니다.
어쨌든 보통 40년. 그러면 교회생활 광야생활 40년인데, 길수도 있고 짧을수도 있고 이런 교회생활 신앙생활이 인생 신앙생활에 있고 이걸 거쳐서 이게 끝나면 그다음 하나님께서 부르실때가 되면 죽음이라는 요단강을 건너면 가나안에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데 우리의 천국은 무엇이라 그랬습니까, 오전에? 우리가 가나안 입성 천국 들어가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요? 우리의 ‘성화’입니다, 성화. 저는 이 말씀을 수없이 들었고 설교록도 읽었는데 이렇게 제 입으로 표현한 것은 저는 처음이고 이렇게 생각해보면 그게 그 길 다 연결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깨달아진 것은 저는 오늘 설교하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고보니까 과연 그렇다. 이게 우리 건설구원의 도리를 생각해보면 당연히 그리 되어지는건데도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기는 그냥 천국 가나안 입성 천국 들어가는 것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설교하면서 생각해보니까 이거는 가나안 입성이라는 것은 천국은 이미 들어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겠고 우리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거치는 모든 과정은 성화의 과정이고 이거는 주님 형상 닮는 그 노력 그 과정이지,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말은 죽어서 천국 간다는 그 의미보다는 우리가 성화되어서 주님의 형상 닮는 그게 마무리되는 시점이라 그리 아는 것이 더 의미가 많다 그리 볼 수가 있다 그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세상에서 땅을 밟아서 바다 건너서 발로 걸어서 경계를 넘어서 그리 갔으나 우리들의 가나안 입성은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과정 과정은 현실이라는 그 과정을 통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그런 노정으로 인도를 하신다, 그러니 그들의 가나안 노정은 정해진 길이 있지만은 우리 신앙 노정은 한말로 말하면 현실이고 그 현실은 사람마다 각각 다른 것이고, 형태도 다 다른.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분량의 구원, 성화구원,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 이루어지기까지 현실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게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다 그말입니다.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습니까? 성경해석적으로 우리가 배운 건설구원에 성화구원에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 없지요. 이게 맞는 겁니다.
그러면 두 번째, 그래서 첫째, 이스라엘의 인도와 우리 인도, 이스라엘의 노정과 우리 노정의 원리를 우리가 기억을 하고, 그래서 우리는 성화구원을 이루어가는 그것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는 그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땅을 밟고 바다 건너 갔으나 우리는 현실을 통과하는 그게 하나님의 인도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현실은 우리를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인도의 과정들이다 그말이지요. 두 번째는 그러면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 본문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행하사 하나님이 신으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그리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직접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행하사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그런데 하나님이 직접 그들 앞에서 행하시면서 인도하시는데 하나님은 완전자라 그들이 볼 수 없는 분이고,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린 신앙들이라 또 보이는 육체적인 그런 시대라 그러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믿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니까 부득이하게 그들 눈에 보이기에 구름으로 보이고 불기둥으로 보여서 그래서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보이기에는 구름기둥이었고 불기둥이었고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이것도 또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름기둥이면은 기둥이니까 둥글겠고 높이가 얼마 되겠고 어떻게 생겼겠고 또 그럴 상상하면 복잡한데 그런 거는 상상하고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다만 구름기둥이니까 뭐 기둥처럼 생겼겠다 구름기둥, 불기둥이니까 기둥처럼 생긴 불덩어리겠다 그리 보면 되겠지요. 그렇게 보이게 인도하셨는데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 겉으로 보기에는 구름이고 불인데 실상은 그 구름속에 불기둥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그들을 직접 인도하셨더라 그말이고 그러기 때문에 그들 눈에 보이기에는 구름이고 불기둥이고 불덩어리 구름덩어리지만은 실제는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모습이다 그리 할 수 있는 겁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볼 수 있도록 알 수 있도록 나타나신 모습이 불기둥이고 구름기둥이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만 따라가면 바로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되어졌더라 그말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대로 보이지 않는 무형의 완전자, 그래서 구름기둥 불기둥 안에 계신다는 것도 공간적인 개념을 넘어서 생각해야 됩니다. 그걸 통해서 역사하셨다 그리 볼 수도 있고 그런데 어쨌든 하나님은 어느 형체 안에 들어 계실 수 없는 분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름기둥 안에 불 기둥 안에 계셨다고 표현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완전잔데, 그분을 우리가 보는 방법이 뭔가? 하나님을 보는 방법은 이스라엘이 거기 시내산 십계명 받을때쯤 아닌가 싶은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고 부르실 때 주의를 주시기를, 이방인들 모든 이민족들 그런 잡다한 그런 사람들은 아예 시내산 근처에 못 오게 하라 오면 죽는다 막았고, 그다음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발치에 머물러 있어라 올라오면 죽는다 말씀하셨고, 산중턱까지는 누가 올라 갑니까? 아론은 산중턱까지 올라와도 된다 말씀하셨고 모세는 시내산 위에 올라와서 주님을 대면해서 만났고, 주님을 잠깐 만나도 모세 얼굴에 광채가 나서 내려올때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광채가 나서. 그러면 그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그만큼 자기 신앙이 자기라는 사람의 성화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 되겠고, 본다 안다는 말은 육안적으로 보는 그런 개념이 아니겠고, 깨닫고 느끼고 아는 그런 것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그런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은 사람이 그 정도에 따라서 보이는 피조물 사람보다 더 확실하게 믿고, 보이는 피조물 사람보다 더 자기에게 더 확실히 보여지고 들려지고 느껴지고 그리 되니까 다니엘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눈앞에 보이는 그 세계 제일의 강대국의 권력을 지고 있는 왕의 어명이 떨어졌어도 그 왕이 바로 앞에서 호령을 치고 있고 시뻘건 풀무불이 훨훨 타고 있지만은, 그 왕의 귀에 들리는 어명보다, 시뻘건 용광로 풀무불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음성이 더 또렷했고 더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왕이여 우리가 절하지 아니할줄을 아시옵소서. 이게 하나님을 봤기 때문에 그래된 것이고, 보이는 사람보다 더 또렷이 보고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분의 음성이 역사가 눈앞에 보이는 그 왕과 풀무불보다 더 강하게 그들속에 역사하고 그들 붙들고 있으니까 그들이 왕의 명을 어기고 풀무불에 들어가도 하나님의 명령은 거역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을 봤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간 것도 그리 되어진 것이고 오늘도 우리 믿음의 정도가 하나님을 만나는 정도에 따라서 말씀을 순종하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이런 차이로 다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했고, 오늘 우리 인도는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인도하시는가. 구름은 물이니까 물은 진리고, 또 불은 성령이니까, 불은 성령이란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에도 성령관때도 나오지요. 성령이 역사하실 때 불에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인다 그런 것도 있지요. 그래서 또 성령 불이라는 말은 뜨겁게 태운다는 뜻이고, 그러면 오늘에 우리를 인도하시는 구름기둥 불기둥은 진리와 영감이다. 그러면 진리와 영감으로 인도하신다는 그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신다는 뜻입니까?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에 직접 행하셨는데,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구름기둥 불기둥을 통해서 그들을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이며, 오늘 진리와 영감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전에 말씀드린 것 생각해보면 바로 아실건데요. 구름기둥 불기둥 인도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그들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내신 겁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보이지 않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내셔서 인도하신 것이다 그말이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실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도하셨는데 보이게 인도하셨다는 뜻이고 오늘날 진리와 영감으로 인도하신다는 그말은 역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인데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알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그말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무인격 존재고 이치니까 눈에 보이지를 아니하나 그 진리 이치라는 것은 말 그대로 이치기 때문에 이치라는 것은 기록된 글을 읽어보던지 말을 들으면 사람 속에 있는 이성이 듣고 이성이 판단해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치는 사람이 아는 겁니다. 안다는 것은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보는 것의 목적은 알기 위해서, 즐기기 위해서 보는 것은 외부적 껍데기 구경하는 것 탐경하는 것 이건 외부적이고 하나의 낙(樂)적인 그런 것이고, 일반적으로 눈으로 보는 것은 아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아는것. 듣는 것도 아는 것이고, 음악 듣는 것 말고는, 음악 들어 아는 것도 그 음악 들어 기쁨을 가지는 것 마음의 평안 느끼는 것 역시 알아야 되겠지요. 감정적인 그런 역사도 있겠지만은. 그러니까 이치를 들으면 사람이 사람 속에 있는 이성이 알 수 있다 그말이고, 그러기 때문에 진리를 인도하신다는 그말은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는 그말이고, 영감으로 인도하신다는 그 영감도 사람이 느낄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와 영감이라 그러면 우리는 막연하게 구름처럼 그냥 이상처럼 먼 것처럼 그리 생각을 하고 느껴졌으나 따지고 생각해보니까 이거는 바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내 마음 속에, 그래서 신명기에 보니까 이 말씀은 네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라 바로 네 마음에 있고 네 입에 있다 그랬습니다. 눈으로 보면 알 수 있고 귀로 들으면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진리를 주셨고, 그 진리를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말입니다. 이것도 참 생각해보면 대단히 쉽지 않은 그런 말이고, 싸지 않은 헐한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는데 그들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어린 그들이 볼 수 있도록 구름의 모습, 불의 모습으로 그들을 보고 따라가도록 인도를 하셨고, 오늘 신령한 우리는 좀 더 장성한 때고 신령한 때기 때문에 육안으로 보는 구름이나 불은 아닐지라도 우리 사람 속에 있는 마음의 이성이 알 수 있도록, 감정이 알 수 있도록, 양심이 알 수 있도록 진리와 영감으로 인도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짐승들은 진리와 영감을 모르겠지요. 그들 속에는 이성이 없으니까, 사람 같은 그런게 없으니까.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진리를 알 수 있고 영감을 알 수 있는 것이고 이 진리와 영감은 우리에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 생각해보면 아는 겁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도 진리입니다. 생각해보면 아는 겁니다. 그 진리 속에 들어가면 그 진리속에 영감 역사하니까 우리가 진리를 내가 이성으로 받아드리고 양심을 써서 그 진리를 생각해보면 그 진리 속에 역사하신 영감이 내 양심을 통해서 나를 감동시키면 성령의 감화감동이 내게서 역사를 한다 그말입니다. 찬송을 할때, 일반적인 그런 감정도 있고, 찬송가 가사를 ‘날 구원하신 예수를’ 그다음요?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이라는 말이 쉽게 쓰이는 말입니까?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송하겠네. 그 가사 한 절 오래토록 불러왔는데, 그 가사가 이치입니다, 진리고. 그걸 생각해보면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송하겠네. 그 이치 속에 그걸 가만히 생각해보면 성령이 역사하여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신 주님 그분을 받은 은혜 생각을 하고 감사하고 구원을 깨닫고 나니까 찬송을 영원히 하고 하고, 영원토록 찬송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말입니다. 이 후에 천국 올라가 더 좋은 곡조로 날 구속하신 은혜를 늘 찬송하겠네. 그런 깨달음 속에서 그 깨달음을 가지고 가만히 명상해서 들어가면 그 이치를 이성을 가지고 생각을 하고 양심으로 생각해보면 그 양심 통해서 성령이 역사해서 내 속에 느낌을 주고 감동을 주고 감사를 주고 기쁨을 주고 힘을 주고 그 감사와 기쁨 그 힘을 가지고 자기도 꺾고 의지도 생기고 결심도 생기고 인내도 생기고 그래서 죄를 이기는 그게 바로 영감의 능력이다 그말이지요. 이런 진리와 영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인도다.
그러면 영감이란 것은 언제나 진리 속에 역사하는 거니까, 우선에 영감을 두고 말씀으로 생각해본다면. 그러면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 이렇게 생각해보면 꼭 같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데 그 하나님의 인도가 그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났고,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우리 인도의 과정은 세상에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시고, 예수 믿는 가운데 진리를 깨닫고 믿음이 생겨지니까 주님의 대속의 은혜 깨닫고 죽으심에 감사해서 나도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사는 세례역사가 있고 홍해바다 역사가 있고, 그리고 광야생활을 통해서 말씀을 자꾸 읽고 듣고 배우고 하니까 알아가는 가운데서 주님을 닮아가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하는 모든 과정들, 그것들이 이스라엘이 그렇게 인도하셨듯이 우리 인도하시는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 그들 앞에 행하사 직접 인도하셨으나 그들 눈에는 구름 기둥 불기둥 이었고,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 예수 믿게 만드신 것도 직접 인도, 우리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세례 역사 있게 하신 것도 직접 인도, 말씀을 듣고 읽고 깨닫게 하는 것도 직접 인도, 직접 인도인데 그 인도의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날때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타나시고 영감으로 나타나셔서 우리 앞에 보여지는, 우리가 읽고 듣고 배워서 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 되고 그게 영감 인도 따라가는 것이 되고 그리 되어진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무엇인가? 말씀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말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무인격 존재기 때문에 지정리 희로애락의 작용 역사 있는 그런 인격 존재는 아니지만은 이치니까 이치로 존재하고 그 이치는 우리들이 읽어보면 알고 들어보면 알고. 2 더하기 2는 5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00이, 맞아요 틀려요? 2 더하기 2는 맞아요, 틀려? 틀렸지. 왜 틀립니까? 수학의 이치에서 틀렸습니다. 000? 잔다, 피곤해서. 들어보니까 2 더하기 2는 4인데 5다? 틀렸다. 들어보니까 알잖습니까? 들어보니까 아는 겁니다. 밥을 하려면, 밥을 하려면 가스렌지가 있어야 되고 또 냄비가 있어야 되고 쌀이 있어야 되고 물이 있어야 되고. 그래가지고 그릇에다가 쌀을 씻어놓고 물을 적당히 붓고 불을 떼면 밥이 된다. 그런데 자동전기밥솥이 아니고 가스렌지 같으면 어느 시간 지나서 어느쯤되면 꺼야되는데, 이걸 모르면 다 탈때까지 그냥 두면 다 타버립니다. 밥을 할때는 그러면 예를 들면은, 일반 몇 사람 밥하는데 그렇게 냄비에 밥 넣고 할때는 한 한시간정도 가스렌지 불을 최고 높이 가장 쎈 화력으로 한시간 정도 켜놓으면 밥이 된다, 누가 그렇게 말합니다. 철 없는 처녀가 몰라가지고 밥을 할때는 냄비에 물을 붓고 쌀을 얹고 가스렌지 얹어 불을 켜는데 가장 쎈 화력으로 한시간 동안 계속 켜놓으면 밥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 밥 할 줄 아는 사람이 들을 때 뭐라합니까? ‘아유 잘 모르네. 밥은 그렇게 하는게 아니고, 보다가 적당히 불도 조절해야 되고 밥이 넘치면 불도 낮춰줘야 되고, 뜸을 들여야 되고 그런게 있는데 이 아이는 모르니까 틀렸다’. 틀린 것은, 그 사람이 알고 있는 밥 아는 이치가 들어보니까 틀렸다는 것을 알잖습니까? 2 더하기 2는 4인데 5라고 대답을 하니까 틀렸구나. 틀린 것을 안다 그말이지요. 사람이 생각이 있고 이성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안 믿는 사람은 모릅니다. 그들은 영이 죽어있고 하나님께서 막아 놨기 때문에. 그러나 중생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양심을 쓰고 들어보면 아는 겁니다. 어느게 옳다 그르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게 말씀의 인도고 영감의 인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코 핑계 대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주신만큼 요구하시고 거두시기 때문에 한 달란트 줘놓고 세 달란트 구하지 않기 때문에 핑계 대지 못합니다. 주신 만큼 구하시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말씀은 무엇인가?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 말씀은 무엇인가? 그 말씀은 좀 분해해보면, 그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라 그렇게, 말씀까지는 그렇게 내려왔으니까 그렇게 볼 수 있겠고, 그다음 그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뜻이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이지만은, 그러나 어렵게, 저도 이거는 고민중인데, 독자적인 그런 권위를 능력을 가진 말씀이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생각이고, 하나님의 소원이고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요구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든 것이 그 말씀속에 다 담겨서 나와있다 그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말씀은 우리에게 적용될때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그 말씀이, 말씀 자체로 있을때는 하나님의 뜻이며 진리며 참된 이치 진리며, 독자적인 권위를 능력을 가진 말씀이며, 하나님의 소원이며 하나님의 생각이며 요구며, 하나님의 모든 것이 들어있는 그게 진리고 하나님 뜻인 말씀이고,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될 때는 우리에게 거울이며 저울이며 잣대며 법칙이며 우리 길의 등불이며 빛이며 우리들의 걸어갈 길이며,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으로 우리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데 인도하시는 그 모습은 그 형태를 보면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실때는 구름기둥 불기둥이 앞에 가고, 구름 기둥 불기둥은 공중에 떠서 갔겠지요, 가고. 소리 없는 비행기처럼 날아갔겠지요, 가고. 이스라엘은 뒤를 따라 가고. 말씀과 영감이 우리를 인도하실때는 말씀은 이거는 말씀 자체는 변하지 않고 이미 선포된 그 말씀은 영원후까지 모든 말씀은 완전히 나와있고, 영원후까지 나와있고. 영원후까지란 말은 제가 좀 생각을 하겠습니다. 어쨌든 말씀은 이미 나와있고, 그다음 나와있는 그 말씀이 이미 나와있습니다. 진리는 있는데, 그 진리를 내가 따라갈 때, 내가 따라간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걸어갔으나 내가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데,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를 인도하실 때 그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여기서 하나 우리가 연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구원, 우리들이 들어가는 가나안은 우리 성화니까, 성화라는 것은 자기 변화고, 자기 변화라는 것은 내 언행심사 활동에서 변화가 되어지는 것이고, 그 언행심사 심신의 모든 활동은 이 세상 현실에서 되어지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두사람이 같이 걸어가고 같은 세월을 보내도 어떤 과정을 거쳤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완전히 차이가 많이 나지요. 공부를 10년 열심히 한 사람하고, 10년 동안 농사를 지은 사람하고 완전히 달라서, 10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공부쪽으로는 10년 했으니까 그만큼 알건데 농사 짓는데서는 까막눈이겠고, 농사 짓는 사람은 10년 농사 지었으니까 농사는 박사고 농부는 됐는데 공부 쪽에는 모르겠고, 완전히 다릅니다. 왜 다르냐? 왜 다릅니까? 000씨 왜 달라요? 살아온 과정이 다르니까. 다를 수밖에, 필연 아니겠습니까? 다를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살아온 과정이 다른 것은 왜 다릅니까? 사람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그리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환경에 적응되도록 만들었고, 안 믿는 사람이 적자생존이라는 그런 말을 쓰는 그것이 이런걸 보고 하는데, 성경을 모르니까 보이는 것만 그리 하는 것이지 사람이란 것은 지음 받을때부터 다른 존재도 그렇고 그리 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놨습니다. 그러니까 환경의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되도록 만드셨는데 사람이 변하지 않게 만들지 않고 변하게 만드신 것은 성화를 위해서 변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많이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주시는 그 현실 과정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그 모습이 되어지는건데, 진리를 모르면 공자한테 배워서 공자의 도덕을 알면 삼강오륜을 배우고 또 뭡니까? 소학이니 대학이니 뭐니하는 이런걸 배워가지고, 그런걸 배워가지고 그대로 공부해서 그대로 연습해서 살면 공자같은 그런 도덕군자는 될 것이고, 석가모니의 불경을 배워가지고 그리 알면 석가모니 닮은 돌부처 같은 그런 사람은 될 것이고, 공산주의 이론을 배워서 그대로 살면 공산주의자 같은 그런 사람이 될 것이고, 그리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가지고 성경 도리를 배워서 하나님의 형상 닮아가는 그 이치 진리를 배워가지고 그대로 살면 하나님 형상 닮은 사람이 된다 그말입니다. 사람이란 것은 별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무엇을, 그래서 오전에 말씀드릴때 우리 구원은 몇가지라 그랬습니까? 들어야 기억을 하지요. 우리 구원은 몇가지라고요? 몇가지 하는게 우리 구원? 000 선생님, 첫째 뭐? 또? 배우는 것 하고 연습하는게 우리 신앙입니다. 하나는 배우는 것, 연습하는 것, 아닌가요 이게? 학생이 자라가는 것도 사람이 어떤 사람 모든 사람 되는 것도 결국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배워 아는 것, 하나는 아는 그대로 연습해서 익숙해지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배우는 것은 알기 위해서, 아는 것은 그대로 행해서 살고 그리 되기 위해서 써먹기 위해서. 신앙이란 것은 그겁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우리가 예배 시간을 일주일에 두 번만 하면 주일 오전 오후예배인데, 일주일에 두 번, 대예배는 밤예배까지하면 네 번, 새벽기도까지 하면 우리는 열 번. 그러면 열 번 예배 참석해서 열 번 듣는 것 하고 네 번 듣는 것 하고 두 번 듣는 것 하고는 차이가 많겠고, 그것도 한번씩 빼먹으며 듣는 것 하고는 많은 차이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이거는 참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사람이, 또 세상 지식은 머리가 탁월하게 좋으면 남 열시간 공부해도 한시간 공부하면 아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도리는 하나님께서 그리 안되도록 만들어놨습니다. 너를 받쳐라.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자기를 바치지 않으면 안되도록 해놨기 때문에 자기를 바친만큼 진실한만큼 구원도리를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리 정해놨고 그래야 그게 공평이 되는 겁니다. 그게 공평이 그래야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은 잘났기 때문에 잘됐고 나는 못났기 때문에 못했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럴때 하나님께서 많이 주신 자에게는 많이 거두고, 적게 주신 자에게는 적게 거두는 거니까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났든 못났든 하나님 앞에는 상관이 없고 핑계 될 수가 없는 겁니다. 배워서 알고, 아는 그대로 연습하는 것. 연습이란 것은, 그 생각도 해봤지요. 스케이트 타는 김연아 선수같은, 그런 아가씨, 그 처녀 같은 그 사람은 스케이트 타는게, 스케이트 타고 춤도 추고 오만거 다하는데 그게 그 사람이 실수도 하지만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느날 갑자기 그래 된건가요? 오랜 십몇년세월을 그리 하니까 된 것인데, 여기 있는 사람들 나이가 들어 뼈가 굳으면 어렵겠지만은, 여기 그 누구도, 남녀 반에 그 누구도 한 4-5살때부터 10년동안 그리 연습하면 세계 제일은 못되도 어지간히 그만큼 흉내는 다 내게 되있습니다.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운동을 못해도 10년동안 운동만 하면 어느 정도 운동하는 사람이 되고, 피아노에 아무리 둔하고 음악에 소질이 없어도 10년동안 피아노치면은 어느정도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은 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래 만들어놨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이 어디에다가 가치를 두고 무엇을 공부해서 배우고 무엇을 연습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판이하게 달라지니까. 많은 사람이 돈벌이에 목적을 두고 돈버는 것을 배워서 돈 버는 그 일을 하고 권세잡는 그 일을, 그 방법 배워서 권세 잡는 거기에 다 기울이고, 명예 쌓는 방법 배워서 명예 쌓는 거기에 다 기울이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은 적당히 먹고 마시는 그런 것 배워가지고 그렇게 사는데 다 쏟아버리고. 그러니까 사람들의 모습들이 자기가 살아온 과정 모습 그대로, 살아온 그 과정대로 오늘의 현재 모습이 되어지는 겁니다. 우리는 못났지만은, 세상적으로 내놓을게 없어도. 믿는 것이 참 허무하지만은 그래도 진리를 배워가지고 이만큼 살려고 노력하므로 이정도 우리 신앙은 되어져 있는 것이고, 우리 신앙이 별 보잘 것 없는 참 믿음의 선진들에 비하면 발바닥도 못따라가는 그정도지만은 그래도 이 시대에 믿는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그들 또한 우리 세계를 도무지 이해조차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그렇다면 우리 신앙 걸음이 소망을 두고 목표를 두고는 부족하고, 아직 한참 가야 되겠지만은, 그러나 또 다시 소망 가운데 다른 사람과 비교할 건 아니지만은 참고하기 위해서 본다면 그들보다 우리는 그들은 모르는데 우리는 알고 그들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흉내도 걸음마도 못했는데 우리는 그래도 제법 걸어왔고, 이런 것이 차이인데, 마지막에 결산을 두고 최종적으로 궁극에 가서 어느 것이 성공이냐 승리냐를 판정할때는 그때는 이제는 궁극에 들어가 궁극의 존재 큰 분이신 하나님이 모든 걸 판단하실거니까 그게 문제겠지요. 하나님이 판단하실때는 말씀으로 그대로 판단하실거니까.
그러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를 현실 인도하는데, 말씀 이치는 변하지 않고, 그런데 그 말씀이 적용되는 현실이 쉬지않고 변해나가니까 우리가 만나는 그 현실 현실마다 그때 그때마다 내가 읽어서 들어서 배워서 아는 그 말씀대로 그 현실을 통과 통과 하는 겁니다. 내 눈이 말씀대로, 귀가 말씀대로, 듣는 것을 보는 것을 입는 것을 먹는 것을 말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을 취사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모든 사리판단 결정 처리 전부를 말씀대로 하는 겁니다. 그런것이 말씀대로 따라가는 것이고,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말씀과는 상관 없이 그 현실 되는대로, 등따시고 배부르니까 자고 편안하고 놀때 되니까 놀고 잘 때 되니 자고, 일할 때 되니 일하고 공부할때되니 공부하고, 때 되면 결혼하고 자녀낳고 다른 사람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면 그 사람은 말씀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니까 평생을 살아도 그 사람은 가나안 입성과는 천리만리 거리가 먼, 내나 애굽땅에 그대로 있는 사람. 말씀으로 현실을 통과하는 사람은 가나안을 향해 점점 자꾸 가는 사람 이게 차이가 나는데. 이렇게 따라갈 때, 복습이지만은 말씀의 인도를 이렇게 따라가면, 이 걸음은 한말로 말하면, 이스라엘이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가는 그 길은 도무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홍해바다도 사람이 건너갈 수 없었고, 광야에도 사람이 살 수 없었고, 견딜 수 없었고, 요단강도 마찬가지였고, 사람의 힘으로, 일반 사람의 인식으로 상식으로 인간의 실력과 노력으로 할 수 없고 갈 수 없는 걸음으로만 말씀을 인도했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 인도했습니다. 오늘도 말씀 따라가면 그런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법칙으로 삼아 그 말씀대로 오늘의 현실을 또박또박 살아가는 그런 생활하면은 일반 사람으로 도무지, 그래서 우리 정도는 잘 믿는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어린 아이 신앙도 안되는, 젖먹이 겨우 면할, 걸음마 뗀 그 정도의 우리 신앙인데도, 우리들의 신앙 모습을 안 믿는 사람들은 세계 다르니까 이건 전혀 모르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믿는 사람들도 이해도 못하고 어떻게 그리 사나 하고 말들 하는데, 그런데 우리가 볼때 이거는 믿는 것도 아닌데 더 믿음의 사람들의 걸어간 걸음을 보면은 참 어렵습니다. 백목사님 같은 분도 80 되신 분이, 그때는 의례히 그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80 연세 되는 분이 아침에 식사하시고 9시 되면은 차타고 한시간 거리에 있는 저 양산동 거기 기도산에 가는데 도착해서 집에 있는 것이 아니고 걸어서 산에서, 80 노인이 내려서, 한 시간 차타고 가서 산에서 한 30분 가까이 걸어 올라가서 거기 텐트치고 하루 종일 거기 앉아있습니다. 앉아있다가 밤이 되면 내려오고, 어떨때는 거기서 밤새고, 밤이 되면 내려오고 어떨때는 거기 있다 새벽기도때 거기서 2시나 출발해서 새벽기도 오고. 그 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는데, 그때 그 밑에 있을때는 원래 그래 하는 것이라 나도 나이 많으면 저때는 저리 하리라, 그리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초인간적인 생활이지 그거는 사람이 못하는 일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80은 커녕 지금 나이에도 건강이 허락 안해서도 못하는데, 전부다 초인간적인 걸음이였고, 매주일 주일학생이 8천명이 주일마다 모였는데, 부산 각처에서, 차량이 수십대가 움직이는데, 그 세월이 20년이 넘었지요. 20년 가까이 됐으니까. 10 몇 년, 약 20년, 그리됐는데 제가 아는대론 사고는 딱 하나 나긴 났지요, 그때. 그것도 와서 마치고 집에 동네가서 하나 사고나고, 그 외에는. 그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리 교회 교인 한 백명 집회 가면은 저는 마음이 집회 갈때부터 차량, 아마 이것도 말이 나온김에 말하면, 우리 교인들은 차 타고 갔다올때 그런걸 모르니까, 여기 갈때도 차를 따로 타고가면 어떤 분들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문자라도 보내는 분이 있고, 집에 돌아올때도 ‘도착했습니다.’ 보내주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거기 신경을 안씁니다. 그런데 특별한 말이 없으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그래 연락 안하지만, 초기에는 연락 많이 했지만은. 모든 차가 도착할때까지 저는 마음을 못 놓습니다. 마음을 조린다 말이지요. 우리 교인들이 집회 마치고 다 도착해서 일상생활이 다 될 때까지, 도착할 시간이 되고 저녁까지 아무 문제 없으면 그때는 다 된거니까. 그러면 그때는 안심을 좀 하지요. 그러면 그때는 차가 보통, 서부교회서만 가는 차가 버스만 100대입니다. 시외버스 전세버스만 100대. 수백대가 움직이는 그 전부가 다 백목사님 짐인데, 그것도 세월이 얼맙니까. 전부 보면은 초인간적인 초자연의 능력으로 그런 역사를 했지 그냥 일반적인게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인도따라 가는 그 생활이 일반 생활속에서도 사람이 일반적으로 걸어갈 수 없는 그런 걸음인데, 걸어가보면 의식주 다 책임졌고, 한서의 해를 다 책임졌고 모든 맹수 위험에 대적에 다 책임졌고, 길을 인도하시니까 헤멜 것 없고,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구름 기둥 불기둥 인도 따라가니까 어디로 가면 가나안으로 가는지 염려할 게 없습니다. 내비게이션입니다. 따라가면 되는 거니까. 말씀의 인도만 따라가면 천국 가는 길을 헤멜 일이 없습니다. 말씀의 인도 따라 가는 그게 바로 천국 가는 길이고 성화가 되는 길이니까. 그리고 그 인도따라가는 그 속에서 광야 40년 생활속에 천국 실력을 쌓았고 가나안 실력 쌓았고 연단을 받아서 그리 이루어졌듯이 말씀 인도 따라가면 의식주 염려없고 세상에 고락간에 상관이 없고 모든 악령에 위협과 세상 온갖 위협이 상관이 없고 모든 대적이 상관이 없고 이 세상에서 길을 몰라 헤메는데 말씀 인도 따라가면 천국 가는 길을 헤멜 일이 없고, 말씀의 인도 따라가면 천국의 실력, 연단은 저절로 다 되어지는 것이고, 이게 말씀의 인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길을 걸어가나 그 속에는 전부 하나님의 은혜와 초자연의 능력으로 걸어가는 것이 말씀 따라가는 길이다. 요셉이 그랬지 않습니까? 다니엘이 그랬지 않습니까? 믿음의 사람 다윗이 그랬고, 아브람 이삭 야곱 다 그러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인도 따라가는 믿음의 길이다. 우리가 생각을 하고 오늘 말씀에서,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말씀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껍데기만 신앙이지 참 신앙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지런히 성경 읽어야 됩니다. 성경 안 읽으면 모릅니다. 성경만 읽어서 어려워서 모르겠으니까 말씀을 자꾸 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 읽고 설교록을 부지런히 읽어야 됩니다. 설교록 읽고, 예배 시간에 말씀을 자꾸 듣고 읽고 복습하고 생각해보고 그리하는 가운데 알아지고, 알고나면은 아는 그대로 살아서 연습을 하고, 연습했는데 연약해 넘어지니까 또 해보고 또 해보고, 넘어지면 회개하고 도움받아 또하고, 또 넘어지면 또 회개하고 또 하고, 그래가지고 평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가시는 우리 구원이고 우리의 성화의 과정, 이게 우리의 구원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깊이 좀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알고 말씀의 인도따라 믿음으로 가는 우리가 되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