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1-주후(계3:1-3)
하나님의 의2014-05-11조회 408추천 26
본문: 계3:1-3
제목: 하나님의 의
요점:
1. 사데교회
-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 살았다는 이름은 하나님의 의를 입은 자라는 말
- 살았다는 이름의 3단계, 산 자가 죽었다가 다시 산 것
2. 하나님의 의
- 하나님이 가장 근심 걱정 고통하시는 문제를 해결
-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성취
- 이것이 하나님의 의
-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겨(마28:18)
3. 하나님의 의에 들이신 자본
- 신인양성일위, 도성인신의 희생
-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희생
- 하나님의 전부를 다 들이신 수고
4. 하나님의 의의 가치
- 가치를 아는 만큼 소중히 여겨 강직
- 가치를 바로 가질 때 대하는 태도는 전혀 다르게
-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전부이며 우리의 전부
5. 의인 생활이 내 생활, 의인으로 살자
- 우리는 산 자, 우리는 의인
- 의인 생활이 내 생활, 의인으로 살자
- 의인 생활은 성경 법칙대로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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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설교
20140511 주후
요한계시록 3:1-3
사데교회에 주님이 찾아가 보셨을때 사데교회는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행위를 하고 있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는데 죽은 자다. 그러면 살았다는 이름, 살았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오전에 3단계라 말씀드렸습니다. 원래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지음을 받았고 지음 받았을때 생명을 함께 받아 다 산 자였습니다. 이때는 택자 불택자 구별없이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산 자였었고 살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살아있던 사람, 산 자였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어김으로 영원한 죽음 사망을 당했습니다. 2단계로 모든 사람은 다 죽었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모든 사람이 다 꼭 같았고 같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이제 모든 사람이 다 죽어있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를 입은 특수인된 택자들은 때가 되면 중생되어서 산 자가 되게 되었고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은 만인대속이 아니고 제한적 대속이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이 의는 입혀지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죽은 가운데 그냥 있고 산 자들이 따로 있어서 이 대속을 입은 사람들만 산 자가 되게 되었습니다.
사데교회는 바로 이 하나님의 의를 입어서 산 자가 되었다 그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데교회는 중생이 되었다는 말이고 중생됐으니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런 교회고 교인들이였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사데교회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하나님의 의를 입은 자가 되고 의인이 되었으나 죽은 가운데서 이 의를 입혀서 산 자가 되었으나 실제 현실에서 살아가기는 의를 다 벗어버리고 입은 자가 의를 다시 입었고 산 자가 산 자로 살지 아니하고 죽은 자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살아서 영은 천국가고 심신의 형체는 가지만은 기능적으로는 완전히 다 죽은 자가 되어지는 이런 상태로 계속 왔고 그 상태로 계속 진행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주님이 찾아가셔서 남은 바도 그대로 계속 가면 다 죽게 될 것이니까 어서 깨어서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죽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을 하신 것이고 그 방편으로는 받은 것을 생각하고 들은 말씀은 지키고 잘못된 것은 회개하고 그 3가지 하면 된다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러면 이번 집회 말씀 이번에는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는, 말하자면 3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배경을 설명하신 것이 이번 집회 말씀이라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또 지킬 수 있도록 회개할 수 있도록 그 배경을 말씀하셨다 그리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사데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입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의, 가장 하나님께서 가장 근심하시고 걱정하시고 고통하시고 고민하시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다.
왜 하나님께서 전지전능자가 완전자가 무엇 때문에 근심이 있고 걱정이 있게 되는가. 하나님이 완전잔데, 전능잔데 걱정이 있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전능자라 그러면 능치 못하심이 없는게 전능자입니다. 전지자는 알지 못하심이 없는 것이고, 그런데 전지전능이 되어야 완전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완전하신 하나님이 못하는게 있었다 그말이지요. 할 수 없는게 있었다. 그 할 수 없는 것이 뭔가? 그것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시데 기계가 아닌 말하자면은 하나님께 지음받은 피조물은 피조물이로되 그것만 변할 수 없는 그것 아니면 아예 안되는 거니까, 지음 받은 피조물이지만은 지음 받은 피조물로써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이라는 그것만 다르고 또 자존자가 아닌 말하자면은 피조물이라는 그것 하나만 다르지 나머지는 하나님과 꼭 같은 그런 자를 만드시는게 하나님의 소원인데 그것이 하나님으로써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없다기 보다는 강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거는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전능자지만은 전능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고 전지자지만은 그걸로 되는게 아닌 그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히 고민하고 고통하고 근심걱정을 하셨다.
그런데 이것도 인간차원의 고민 고통 근심 걱정과는 달리 또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하나님께 지음받은 피조물이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죽어버렸습니다. 영원한 사망 가운데 있으니까 그 사망 가운데 있는 그 사람을 그중에서 하나님의 목적의 대상되는 특수인은 살려내야 되는데, 살려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말이죠 달리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 큰 걱정거리 근심거리가 되어있는데 이걸 이제 해결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고,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이 일을 역사를 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신 것이고 근심 걱정 문제를 다 해결하신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원하시는게 하나님의 의다. 그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의를 설정하신 주님에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전부다 맡기셨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이 하나님의 의를 설정할 때 이것 역시 하나님이 강제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고 그러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운 것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도성인신하신 이 무한한 희생을 우리가 좀 늘 생각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말로 이거는 좀 설명할 수 있는 그런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그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낮아짐의 희생이라는 것은 그 정도가 인간의 그 언어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니까 너무나도 높으신 분이 낮고 천한 피조물 사람의 몸을 입고 도성인신하신 이 희생의 그 역사가 어떻게 큰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고 측량할 수 없는 희생이었다. 하나님으로써 하실 수 있는 전부를 다 드렸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할 수 없도록. 그래서 무한한 낮아짐의 희생, 그리고 하나님의 전부를 다 드려서 대속역사를 이루신 겁니다.
십자가 대속의 그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큰 희생이 도성인신의 희생이라 그렇게 우리가 배웠습니다. 찬송할때도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십자가 고난을 말하지만은 그 십자가 고난보다 무한히 비교할 수 없는 그게 도성인신의 희생이다.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송하겠네.’ 그래서 이거는 하나님이라는 그분의 그 존재의 어떠함을 아는데서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말씀드리지만은 신앙생활 기독교라는 것은 입문 들어가는 것은 성경 읽고 예수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고 또 믿음으로 살고 계명지키는 생활하고 여러 가지 이런 생활을 하지만은 그 속에 들어가서 기본적으로 입문해서 신앙세계 들어가 본궤도에 들어가고나면 그때부터 신앙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얼마만큼 아느냐가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시며 얼마나 높으시며 그분이 얼마나 영화로우시며 두려우신 분인가. 하나님을 아는만큼 그러기 때문에 그분의 그 높이와 그분의 권위와 두려우심과 위엄과 영광을 아는만큼 하나님을 아는만큼 그분이 사람이 되셨다는 여기에 대해서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아무리 한껏 넓어봐야 우물 안에서 보이는 하늘 그게 전부입니다. 우물 속에서 하늘 봐바야 얼마나 보이겠습니까? 자기가 본 세계 그게 전부고 그 이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63빌딩이 가장 높을 때는 서울에 63층, 한국 사람은 63빌딩만 봤겠지만은 외국에 나가본 사람들은 100층 넘는 그런 것도 봤을 것이고, 넓은 그런 땅을 봐도 우리나라 안에서만 본 사람들은 넓은 그런 평원같은 것을 가서 보지 못하면 그만큼 느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냥 상상으로, 지금은 텔레비전나 이런 것 가지고 계산하고 상상하지만은 막상 봐보면 완전히 다른 그런 차원이 될 것이다 그말이지요. 뭐든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고 그분을 육으로 상대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생각하고 명상을 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 그래서 그분이 지으신 우주라는 이 우주의 광대함, 엿새동안에 지으신 이 우주가 얼마나 넓고 크냐 광대하냐 가히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 우주라는건데, 그 우주를 엿새동안에 다 지으신 분이 하나님인데 그 엿새동안이라는 것도 능력이 모자라서 엿새동안에 지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구원에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순서를 거쳐서 6일이라는 그런 기간을 두신 것이지, 한순간이라도 다 만드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고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내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이런 것이 다 깨달음이라는 겁니다. 깨달음이라 말은 단순히 논리지식으로 아는 것은 껍데기고, 깨달음의 껍데기고 깨달음이라는 말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깨달음이란 말은 껍데기는 성경이 말씀하신 그 이치를 아는 겁니다. 논리 이치를 아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깊은 깨달음은 성경이 말씀하시되 그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이 그 성경 기록 속에 담아놓으신 그 정도를 다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성경에 기록했는데 그것을 그만큼 성경에 기록한 그대로 느끼는 것, 인간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함으로 영원히 사망한 사망의 고통의 정도가 어느정도인지 우리는 모르는데, 성경이 기록한 그 사실 그대로를 느끼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말이지요. 이것이 깨달음의 은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특수인이기 때문에 특수은혜, 말씀 깨달음, 말씀 속에 그 말씀을 기록하신 성령의 역사를 함께 받는 이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중에 하나가 도성인신의 희생 드리신 그 자본의 정도라는 것은 우리가 짐작하기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장 고민 고통 근심 걱정하셨다, 집회 교재 첫페이지를 딱 읽어보니까 첫문장에서부터 의문이 딱 딱 생겨나갑니다. 그러고나니까 진행이 잘 안되던데. 우리는 ‘왜?’자라는 그 의문부호, ‘왜’ 그걸 좀 많이 가지는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근심 걱정 가장 걱정하시고 근심하시고 고통하신 문제가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 그것이 택자들의 사망이고 죄 문제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기 때문에 의문을 가지고 그것을 답을 찾아 들어가는데서 깨달음은 생겨지고 하나씩 깨달을때 우리에게 그만큼 느끼는 그 느낌이 점점 더해지게 되는 겁니다.
사데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 살고 있었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는데 죽었다. 하나님의 의를 입었는데 받았는데 의를 벗어버렸다. 산 자가 되었는데 죽은 자로 살고 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그 의의 가치를, 그 의를 만들기 위해서 이룩하시기 위해서 드리신 그 자본을 그게 희생이 자본이 어느정도인지를 이걸 알면 쉽게 버릴 수가 없는 것인데, 벗어버릴 수가 없는 것인데 사데교회도 그렇고 오늘 우리도 그렇고 우리들이 받아가진 입은 하나님의 의가 얼마나 큰 것이며 중한 것이며 이게 귀한 것인지, 이 의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드리신 자본이 얼마만큼 큰 것인지를 우리가 알지 못하니까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도 사데교회처럼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의를 벗어버리고 사는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중국 상해에 가보면 발 마사지 하는 그런 업소가 큰 곳이 두군데가 있다고 합니다. 비슷한 위치에서. 사람들의 발 안마해주는 발 마사지 해주는 그런 업소가 두군데가 있는데 두 업소중에 한군데는 보니까 아주 줄을 서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고 한군데는 개점휴업 상태로 파리만 날리고 있고, 완전히 극과 극이더랍니다. 그래서 찾아가서 물어보니까, 줄을 서서 손님들이 기다리는 그곳에는 종업원들한테 사장이 가끔 한번씩 질문한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물으면 ‘나는 발마사지 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러면 사장이 말하기를 ‘아니오. 발마사지하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는 사람들의 피로를 풀어주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피로를 풀어주고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아주 막중하고 소중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말을 수시로 해준답니다. 그러니까 그 종업원들이 그말들으니까 ‘내가 이거 발만 주무르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피로를 풀어주고’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사람들 피로를 풀어주고 활력을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활력소를 심어주는 그런 일을 하니까 자부심이 생긴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자기 하는 그 일에 가치를 깨달으니까 일하는 자세, 손님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틀리는 겁니다. 자기 하는 그 일에 가치를 아니까 그 일을 하는데 대해서 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더라 말이지요. 그러니까 오는 손님들이 태도가 다르니까 얼마나 정성껏 성의껏 정말 사람들의 피로를 풀어주고 에너지를 불어넣어 심어주고 활력있게 만드는 그런 정신 마음가짐을 가지고 일하니까 손님들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줄을 서고, 한쪽에는 그런 것이 없으니까 종업원들이 신세한탄 하는 겁니다. ‘나는 남의 발이나 주무르는 아주 하천 이런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 그러니까 그 일에 무슨 재미가 있으며 힘이 들어가겠습니까? 같은 일인데도 어떻게 가치관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판이하게 완전히 달라지더라 그래 말을 하지요. 뭐든지 그렇습니다. 보배라는 것은 가치를 아는 사람을 찾아간다고 수없이 많이 말씀을 드렸는데 우리가 사데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의를 입은 사람들 그들은 산 자였고 의인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살아난 그 산 자라는 그 산 자의 그 이름, 산 자 되어진 그 위치 입장 그들이 받아가졌던 하나님의 의, 그 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귀중한 것이며 가치가 있는 것이며 그 의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룩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거기 들이신 자본이 얼마나 막대하게 무한하게 들어갔다는 그 사실을 알았다면 쉽게 의를 벗어버리고 죽은 자로 살지 못할 건데, 살 수 없을 것인데 이런 것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들은 다시 말하면 무엇이 없던 겁니까? 사데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받았고 산 자인데, 그 받은 것에 대한 가치관이 없고 그걸 모르니까 너무도 쉽게 그 의를 던져버리고 의 없이 의인 아닌 자로 죽은 자로 산 생활이 많았습니다. 왜 그리 되어진 겁니까? 그들이 왜 그리 되어진 겁니까? 왜 그들은 그 의를 그렇게 쉽게 져버리게 된 겁니까?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그들에게 권면하신 겁니다. 뭐라 그랬습니까?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뭘 받았는가? 지난주에 증거라 그랬는데, 이거는 말하자면은 하나님의 의를 그들이 받아서 하나님이 사람되셔 가지고 당신의 전부를 다 쏟아부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가능치 아니한 그런 사랑과 희생 그 무한의 자본은 드려가지고 이룩하신 하나님의 그 의를 입은 자기 자신들인데 그래가지고 자기에게 왔는데 그것이 어떻게 그 의가 완성되어졌으며 의를 어떻게 입게 되어졌는가를 그들이 생각지 않으니까 받은 의에 대해서 의의 그 근본 과정 자본 희생 사랑 이런걸 생각지 않으니까 기억이 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리고 그러니까 쉽게 벗어버리게 되어진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어떻게 받았는지 생각을 해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받아가져 의인이 되었지만은 산 자가 되었지만은 우리는 과연 산 자로 살고 있는가, 의인으로 살고 있는가? 그리 사는 것은 드물고 의를 잊어버리고 벗어버리고 사는 생활은 너무도 많은 것이 우리들이 아니겠는가? 그 원인은 어떻게 받았는지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말세에 되어진 일 중에 하나가 이 세상이 어떻게 성립되어졌는지, 노아 홍수때 세상이 어떻게 멸망되었는지 그것을 사람들이 부러 잊어버린다 그랬습니다. 일부러 잊어버린다. 주님 재림과 인간의 종말, 개인의 종말과 주님 재림 우주 종말을 사람들이 생각을 하고 염두에 두고 기억을 하고 살면 모든 생활이 조심이 되어지는데 사람들은 부러 잊어버립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들은 일부러 우리가 잊어버립니다. 기억하고 있으면 괴로우니까 부러 잊으려 한다. 부러 잊어버려야 하는 그런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잊으면 안되는 일이 있는데 그게 바로 많은 것 중에서 개인의 죽음도 한번은 죽는다는 것, 주님 재림은 반드시 있다는 것, 죽음 너머 세계 일어날 일들 이런 것은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을 해야되는데, 이런 것을 기억을 하면 괴롭다 그말이지요. 이런 것을 기억하면 현상세계에서 살아갈 때 마음 편하게 살지를 못하잖습니까? 아이들이 좀 빗나가는 비행청소년 그들이 부모님들이 주시는 그런 학비나 이런 걸 들고 가출해서 엉뚱한 짓 나갈 때 부모님을 생각하고 형제를 생각하고 집안을 생각하면 괴롭습니다. 마음 편하게 놀고싶은대로 못 노니까 일부러 잊어버립니다. 나쁜 사람들은 술을 먹고 일부러 잊어버리고, 그래야만이 현실에 노는 거기에 집중하고 재밌게 놀 수 있으니까. 믿는 사람들이 정도는 다를지라도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개인의 종말 시간 죽음을 잊어버리며 주님 재림을 왜 잊어버리며 죽음 너머 사후세계 부활과 심판과 무궁세계를 왜 기억하지 못하는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이유가 뭡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논리를 많이 설명을 드렸지요.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자기가 이길 수 없는 죄가 있는 것은 이길 수 있을때 이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못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기억을 못하는 것은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평소 기억을 하면 되는데 기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기억하려고 해도 잘 나지를 않는 겁니다. 왜 기억하지 않았는가? 시간을 드리고 마음을 드려서 노력을 하면 되는데, 핑계는 바쁜데, 그러니까 그것 기억을 하면은 좀 건설적이라기보다는 세상 차원에 좀 긍정적으로 말하면 신앙세계 관련된 개인의 종말 우주 종말 사후 세계 이런 걸 기억을 하고 머릿속에 담아두면은 공부에 집중하는데 방해가 되거든요. 공부에만 집중하지 못하게 되거든요. 돈벌이만 해야되는데 돈벌이만 하는 거기에 방해가 되거든요? 세상 생활에 그런 것이 들어오면 세상생활에 가책이 되고 찔리는게 있고 마음 놓고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기억을 안 합니다. 일부러 안 합니다. 안하는 것이 전혀 안하는 것은 아닌데 적당 적당히 하고 마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나중에는 점점 잊어버려져서 심하게 되면은 하려고 그래도 나중에는 기억이 안 난다 그말입니다. 주님 대속, 하나님의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데교회가, 오늘 우리들이 왜 하나님의 의를 받은 것을 생각지를 못하는가? 생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면 됩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기울여서 학생들이 공부에 좀 손해를 봐도, 또 자기 경제활동 생활에 좀 손해 봐도,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대우받는 것 약간 손해 봐도,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집중을 하고 노력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손해보지 않고 그런 것에 손해 보지 않으려하고 그 생활을 마음 편하게 하려하니까 주님의 대속 생각하는 것은 자꾸 꺼려지고 걸려지게 된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잊어버리게 되고 잊어버리니까 나중에는 기억하려그래도 되지를 않게 되는 겁니다. 이거는 일률적으로 다 적용할 수 없고 또 우리가 신앙이란 것은 멀리까지 봐야되고 전체를 봐야되니까 이걸로 전부라 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 단적인 예를 들어서 해당되는 분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이번 집회를 두고 집회를 가는 것도 그렇고 또 갔다가 이번에 공휴일이 이틀 끼였습니다. 월,화 공휴일 이였지요? 월,화 공휴일 맞지요? 그랬었습니다. 그러니까 5월 집회는 원래부터 직장 가진 분들, 학생들 때문에 참석 숫자가 많지 못하고 많이 못가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휴일이 끼지 않았을때는 하루정도 휴가를 내던지 하루정도 결석을 하던지 또 학교나 이런데 말을 하고 적어도 하루 정도는 참석을 했습니다, 보통. 좀 노력하는 분들은. 그래서 월요일날 퇴근하고 밤에 왔다가 화요일날 오후에 마치고 내려오던지 그러면 화요일은 하루 휴가를 땡기든지 결근하던지 그렇게 되거든요. 그렇게 하는 분들이 더러 제법 많았었습니다. 학생들도 그렇게 했었고. 그러면 이번 집회 같은 경우에, 이틀이 공휴일이니까 예년처럼 하루만 더 보태면, 똑같이 한다면 집회를 거의 다 마치고 수요일 오후에 내려와도 되거든요? 예년처럼 그렇게 하면. 그러면 이틀은 그냥 먹는 것이고 하루 예년만큼 힘을 쓰고 노력한다면 하루 더 보태면 집회에 백퍼센트는 아닐지라도 마지막 남은 2시간 빼고는 다 참석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되어지는데, 그런데 보니까 이번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분들이 더러 있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분들이 거의 다 보면은 화요일 오후에 다 내려오셨거든요? 안 그런 분도 계시겠지만은. 그걸 두고 느끼는 느낌이 이틀은 공먹은 건데 말하자면, 그냥 먹은 건데 공짠데, 예년에는 힘을 써서 하루를 보탰는데, 그래서 하루만 참석했지만은 이번에는 하루 더 보태면 예년과 같이 힘을 쓰면 3일을 참석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노력을 하는 분들이 많이 보이지를 않았다,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아쉬움을 진하게 가지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말하자면은 예를 들면 그런 것도 하나 예를 들어서 적용시켜 볼 수 있습니다. 이거는 계명이 아니니까 꼭 그래야 된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은 또 무리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은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마찬가지로 우리 모든 신앙생활에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은 것을 생각지를 못 하는가? 생각지 못하는 것은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고, 생각지 않는 것은 그 하나님의 의에 가치를 생각하면 아는데 생각안하는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의보다 더 급한 것, 눈 앞에 있는 것, 당장 현상 세계 필요하고 중요하게 느껴지는 이런 것들이 있으니까 거기에 붙들려가지고 그런 것 손해보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는 것을 양보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양보할 수 없는 그런 단계에 가서도 양보를 안 할 수 없는 빼앗기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 되고 만다 그말이지요. 사데교회는 그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찾아가셔서 한번 더 강조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받았으며 그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뭐라고 하면 됩니까? 어떻게 받았으며 그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요? 네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산 자가 되었으며.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영원히 사망된 그 영원한 사망 지옥의 형벌 속에서 거기 그대로 빠져있는데 거기서 건져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낮아짐에 가난해짐에 고난에 희생을 수고를 하셨으며 드리신 자본이 어떠한지 그 정도를 과정을 그래서 동기도 과정도 그 정도도 이런 걸 자꾸 좀 생각을 해서 그러기 때문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참된 양식이고 참된 음료다. 그게 바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생각하면은 거기서 양식이 나오게 되는데.
아이들이 친구들하고 놀때, 또 혼자서 게임을 하고 오락하고 놀 때 머릿속에 숙제를 해야 되는데, 공부해야 되는데, 그 생각을 하면은 게임하는데 재미가 없습니다. 괴롭습니다. 노는게 힘들고. 그러니까 일부러 잊어버립니다. 숙제도 잊어버리고 공부도 잊어버리고 오로지 눈 앞에 있는 그 재미 거기 집중하고. 그러니까 생각을 안 하지요. 이치가 그와 거의 비슷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나 주님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는 것이나 모든 게 다 그 이치가 그와 비슷하다 그말이지요. 사데교회는 그래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 살았습니다. 사데교회는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역시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습니다. 산 자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받아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활은 현상 생활은 우리는 죽은 자로, 의를 벗어버린 자로 사는 것이 너무도 알게 모르게 많은 우리들입니다. 생각해봐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이 의의 가치를 알 때, 의의 가치라는 것은 그 의에 들어간 자본을 알 때 의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희생하신 그 하나님의 희생을 수고를 들이신 자본을 생각할 때, 이걸 알 때 그 의의 가치를 깨달아 알게 되고 누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귀중한 보배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 유품을 하나 부모님 유품을 꼭 안고 있습니다. 보니까 다른 사람이 볼때, ‘그거 뭐 낡아서 쓰도 못할 거 돈 주고 사면 그것보다 수십배 더 좋은 것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그만 떼묻고 한 거 버리지 그게 뭐라고 그렇게 보물처럼 간직을 하는가?’ ‘이거 우리집에 가보입니다. 이게 우리 아버지 어머니 유품입니다.’ ‘유품이 뭔데? 그것보다 좋은 것 많은데.’ ‘이 유품 속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평생이 들어있고 피땀이 들어있고 일생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그사람에게 그것은 가보고 보배가 되는 겁니다. 얼마나 귀중한 보물인지, 보배인지.
하나님의 그 의, 3가지지요. 사죄, 칭의, 화친. 단순히 우리가 수도없이 많이 들은 사죄 칭의 화친입니다. 대형의 사죄, 대행의 칭의, 대화친의 화친인데 이 세가지가 하나님의 의인데, 이 하나님의 의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문제를 근심 걱정을 다 해결하시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을 이룬 것이기 때문에 이름을 하나님의 의라 그렇게 붙인건데, 하나님의 의인데,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의가 바로 하나님의 전부고 동시에 우리에게 전부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목적이 다 무효가 되어지는 성립될 수 없는 이게 하나님의 의고,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구원 자체가 없는 기독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이게 하나님의 의기 때문에 이 의의 가치를 깨닫고 우리는 의를 받았으니까 의를 받은 자 입은 자가 됐으니까 의인으로 살아야 되겠다. 의를 강직하고 의인으로 사는 우리가 되어야 되겠다. 의인으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성경법칙대로 사는게 의인으로 사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의 판이성 시종성 수호성 계약성이 다시 돌아가서 이 말씀 하나님의 의를 담아주신 이 말씀이 이런 말씀이고 그 의를 입은 자로 사는 것이 바로 이런 말씀으로 사는 것이 의인으로 사는 것이니까 의인으로 사는 법칙이 되는 그 말씀은 바로 또한 이런 말씀이다. 그래서 뚜껑을 서론을 하나님의 말씀에 판이성 시종성 수호성 계약성 충성성으로 시작을 했다. 마지막에 끝에 가서 보니까 결론은 또 역시 여전히 하나님 말씀의 이것으로도 나올 수 밖에 없겠다. 그래서 성경 법칙대로 사는 것이 의인으로 사는 것. 그 성경은 바로 이 세상에 가득찬 인간의 말과 판이하게 다른, 모시고 복종 할, 그리할 때 지키고 보호하시는 변하지 않는 계약의 말씀 이 말씀이 바로 우리들이 의인으로 사는 법칙이 되는 성경 법칙이다 하는 겁니다.
오늘 오전에 말씀을 잠깐 정리하면, 첫째, 사데교회와 사데교회 모습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어떠했습니까?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다. 의를 받은 의인인데 의를 벗어버리고 살았다. 두 번째, 하나님의 의의 가치.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가장 근심 걱정 고민 고통하시던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시고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이루신 것이 하나님의 의다. 세 번째, 이 의에 들이신 자본을 생각해봤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희생, 사랑이 다 들어갔고 하나님의 모든 수고가 더할 수 없도록 들어간 것이 의에 들이신 자본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의 우리는 가치를 소중히 여겨서 이 의를 가치를 깨닫고 의를 입은 자로 살아야 되겠다, 의인으로 살아야 되겠다. 의인으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성경 법칙대로 사는 것이 의인으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기억을 하고 현재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말씀을 줄기로 삼아서 그 말씀에서 이면 저면 다 생각하면서 의문도 가져보고 또 답도 찾아보고 또 궁금하면 또 찾아보고 문제점도 생각해보고, 자꾸 생각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을 하고 지키고 회개하라, 우리 할 일입니다.
제목: 하나님의 의
요점:
1. 사데교회
-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 살았다는 이름은 하나님의 의를 입은 자라는 말
- 살았다는 이름의 3단계, 산 자가 죽었다가 다시 산 것
2. 하나님의 의
- 하나님이 가장 근심 걱정 고통하시는 문제를 해결
-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성취
- 이것이 하나님의 의
-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겨(마28:18)
3. 하나님의 의에 들이신 자본
- 신인양성일위, 도성인신의 희생
-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희생
- 하나님의 전부를 다 들이신 수고
4. 하나님의 의의 가치
- 가치를 아는 만큼 소중히 여겨 강직
- 가치를 바로 가질 때 대하는 태도는 전혀 다르게
-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전부이며 우리의 전부
5. 의인 생활이 내 생활, 의인으로 살자
- 우리는 산 자, 우리는 의인
- 의인 생활이 내 생활, 의인으로 살자
- 의인 생활은 성경 법칙대로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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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설교
20140511 주후
요한계시록 3:1-3
사데교회에 주님이 찾아가 보셨을때 사데교회는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행위를 하고 있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는데 죽은 자다. 그러면 살았다는 이름, 살았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오전에 3단계라 말씀드렸습니다. 원래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지음을 받았고 지음 받았을때 생명을 함께 받아 다 산 자였습니다. 이때는 택자 불택자 구별없이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산 자였었고 살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살아있던 사람, 산 자였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어김으로 영원한 죽음 사망을 당했습니다. 2단계로 모든 사람은 다 죽었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모든 사람이 다 꼭 같았고 같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이제 모든 사람이 다 죽어있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를 입은 특수인된 택자들은 때가 되면 중생되어서 산 자가 되게 되었고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은 만인대속이 아니고 제한적 대속이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이 의는 입혀지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죽은 가운데 그냥 있고 산 자들이 따로 있어서 이 대속을 입은 사람들만 산 자가 되게 되었습니다.
사데교회는 바로 이 하나님의 의를 입어서 산 자가 되었다 그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데교회는 중생이 되었다는 말이고 중생됐으니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런 교회고 교인들이였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사데교회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하나님의 의를 입은 자가 되고 의인이 되었으나 죽은 가운데서 이 의를 입혀서 산 자가 되었으나 실제 현실에서 살아가기는 의를 다 벗어버리고 입은 자가 의를 다시 입었고 산 자가 산 자로 살지 아니하고 죽은 자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살아서 영은 천국가고 심신의 형체는 가지만은 기능적으로는 완전히 다 죽은 자가 되어지는 이런 상태로 계속 왔고 그 상태로 계속 진행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주님이 찾아가셔서 남은 바도 그대로 계속 가면 다 죽게 될 것이니까 어서 깨어서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죽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을 하신 것이고 그 방편으로는 받은 것을 생각하고 들은 말씀은 지키고 잘못된 것은 회개하고 그 3가지 하면 된다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러면 이번 집회 말씀 이번에는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는, 말하자면 3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배경을 설명하신 것이 이번 집회 말씀이라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또 지킬 수 있도록 회개할 수 있도록 그 배경을 말씀하셨다 그리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사데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입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의, 가장 하나님께서 가장 근심하시고 걱정하시고 고통하시고 고민하시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다.
왜 하나님께서 전지전능자가 완전자가 무엇 때문에 근심이 있고 걱정이 있게 되는가. 하나님이 완전잔데, 전능잔데 걱정이 있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전능자라 그러면 능치 못하심이 없는게 전능자입니다. 전지자는 알지 못하심이 없는 것이고, 그런데 전지전능이 되어야 완전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완전하신 하나님이 못하는게 있었다 그말이지요. 할 수 없는게 있었다. 그 할 수 없는 것이 뭔가? 그것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시데 기계가 아닌 말하자면은 하나님께 지음받은 피조물은 피조물이로되 그것만 변할 수 없는 그것 아니면 아예 안되는 거니까, 지음 받은 피조물이지만은 지음 받은 피조물로써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이라는 그것만 다르고 또 자존자가 아닌 말하자면은 피조물이라는 그것 하나만 다르지 나머지는 하나님과 꼭 같은 그런 자를 만드시는게 하나님의 소원인데 그것이 하나님으로써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없다기 보다는 강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거는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전능자지만은 전능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고 전지자지만은 그걸로 되는게 아닌 그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히 고민하고 고통하고 근심걱정을 하셨다.
그런데 이것도 인간차원의 고민 고통 근심 걱정과는 달리 또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하나님께 지음받은 피조물이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죽어버렸습니다. 영원한 사망 가운데 있으니까 그 사망 가운데 있는 그 사람을 그중에서 하나님의 목적의 대상되는 특수인은 살려내야 되는데, 살려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말이죠 달리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 큰 걱정거리 근심거리가 되어있는데 이걸 이제 해결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고,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이 일을 역사를 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신 것이고 근심 걱정 문제를 다 해결하신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원하시는게 하나님의 의다. 그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의를 설정하신 주님에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전부다 맡기셨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이 하나님의 의를 설정할 때 이것 역시 하나님이 강제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고 그러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운 것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도성인신하신 이 무한한 희생을 우리가 좀 늘 생각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말로 이거는 좀 설명할 수 있는 그런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그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낮아짐의 희생이라는 것은 그 정도가 인간의 그 언어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니까 너무나도 높으신 분이 낮고 천한 피조물 사람의 몸을 입고 도성인신하신 이 희생의 그 역사가 어떻게 큰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고 측량할 수 없는 희생이었다. 하나님으로써 하실 수 있는 전부를 다 드렸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할 수 없도록. 그래서 무한한 낮아짐의 희생, 그리고 하나님의 전부를 다 드려서 대속역사를 이루신 겁니다.
십자가 대속의 그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큰 희생이 도성인신의 희생이라 그렇게 우리가 배웠습니다. 찬송할때도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십자가 고난을 말하지만은 그 십자가 고난보다 무한히 비교할 수 없는 그게 도성인신의 희생이다.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송하겠네.’ 그래서 이거는 하나님이라는 그분의 그 존재의 어떠함을 아는데서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말씀드리지만은 신앙생활 기독교라는 것은 입문 들어가는 것은 성경 읽고 예수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고 또 믿음으로 살고 계명지키는 생활하고 여러 가지 이런 생활을 하지만은 그 속에 들어가서 기본적으로 입문해서 신앙세계 들어가 본궤도에 들어가고나면 그때부터 신앙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얼마만큼 아느냐가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시며 얼마나 높으시며 그분이 얼마나 영화로우시며 두려우신 분인가. 하나님을 아는만큼 그러기 때문에 그분의 그 높이와 그분의 권위와 두려우심과 위엄과 영광을 아는만큼 하나님을 아는만큼 그분이 사람이 되셨다는 여기에 대해서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아무리 한껏 넓어봐야 우물 안에서 보이는 하늘 그게 전부입니다. 우물 속에서 하늘 봐바야 얼마나 보이겠습니까? 자기가 본 세계 그게 전부고 그 이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63빌딩이 가장 높을 때는 서울에 63층, 한국 사람은 63빌딩만 봤겠지만은 외국에 나가본 사람들은 100층 넘는 그런 것도 봤을 것이고, 넓은 그런 땅을 봐도 우리나라 안에서만 본 사람들은 넓은 그런 평원같은 것을 가서 보지 못하면 그만큼 느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냥 상상으로, 지금은 텔레비전나 이런 것 가지고 계산하고 상상하지만은 막상 봐보면 완전히 다른 그런 차원이 될 것이다 그말이지요. 뭐든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고 그분을 육으로 상대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생각하고 명상을 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 그래서 그분이 지으신 우주라는 이 우주의 광대함, 엿새동안에 지으신 이 우주가 얼마나 넓고 크냐 광대하냐 가히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 우주라는건데, 그 우주를 엿새동안에 다 지으신 분이 하나님인데 그 엿새동안이라는 것도 능력이 모자라서 엿새동안에 지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구원에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순서를 거쳐서 6일이라는 그런 기간을 두신 것이지, 한순간이라도 다 만드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고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내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이런 것이 다 깨달음이라는 겁니다. 깨달음이라 말은 단순히 논리지식으로 아는 것은 껍데기고, 깨달음의 껍데기고 깨달음이라는 말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깨달음이란 말은 껍데기는 성경이 말씀하신 그 이치를 아는 겁니다. 논리 이치를 아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깊은 깨달음은 성경이 말씀하시되 그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이 그 성경 기록 속에 담아놓으신 그 정도를 다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성경에 기록했는데 그것을 그만큼 성경에 기록한 그대로 느끼는 것, 인간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함으로 영원히 사망한 사망의 고통의 정도가 어느정도인지 우리는 모르는데, 성경이 기록한 그 사실 그대로를 느끼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말이지요. 이것이 깨달음의 은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특수인이기 때문에 특수은혜, 말씀 깨달음, 말씀 속에 그 말씀을 기록하신 성령의 역사를 함께 받는 이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중에 하나가 도성인신의 희생 드리신 그 자본의 정도라는 것은 우리가 짐작하기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장 고민 고통 근심 걱정하셨다, 집회 교재 첫페이지를 딱 읽어보니까 첫문장에서부터 의문이 딱 딱 생겨나갑니다. 그러고나니까 진행이 잘 안되던데. 우리는 ‘왜?’자라는 그 의문부호, ‘왜’ 그걸 좀 많이 가지는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근심 걱정 가장 걱정하시고 근심하시고 고통하신 문제가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 그것이 택자들의 사망이고 죄 문제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기 때문에 의문을 가지고 그것을 답을 찾아 들어가는데서 깨달음은 생겨지고 하나씩 깨달을때 우리에게 그만큼 느끼는 그 느낌이 점점 더해지게 되는 겁니다.
사데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 살고 있었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는데 죽었다. 하나님의 의를 입었는데 받았는데 의를 벗어버렸다. 산 자가 되었는데 죽은 자로 살고 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그 의의 가치를, 그 의를 만들기 위해서 이룩하시기 위해서 드리신 그 자본을 그게 희생이 자본이 어느정도인지를 이걸 알면 쉽게 버릴 수가 없는 것인데, 벗어버릴 수가 없는 것인데 사데교회도 그렇고 오늘 우리도 그렇고 우리들이 받아가진 입은 하나님의 의가 얼마나 큰 것이며 중한 것이며 이게 귀한 것인지, 이 의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드리신 자본이 얼마만큼 큰 것인지를 우리가 알지 못하니까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도 사데교회처럼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의를 벗어버리고 사는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중국 상해에 가보면 발 마사지 하는 그런 업소가 큰 곳이 두군데가 있다고 합니다. 비슷한 위치에서. 사람들의 발 안마해주는 발 마사지 해주는 그런 업소가 두군데가 있는데 두 업소중에 한군데는 보니까 아주 줄을 서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고 한군데는 개점휴업 상태로 파리만 날리고 있고, 완전히 극과 극이더랍니다. 그래서 찾아가서 물어보니까, 줄을 서서 손님들이 기다리는 그곳에는 종업원들한테 사장이 가끔 한번씩 질문한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물으면 ‘나는 발마사지 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러면 사장이 말하기를 ‘아니오. 발마사지하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는 사람들의 피로를 풀어주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피로를 풀어주고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아주 막중하고 소중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말을 수시로 해준답니다. 그러니까 그 종업원들이 그말들으니까 ‘내가 이거 발만 주무르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피로를 풀어주고’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사람들 피로를 풀어주고 활력을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활력소를 심어주는 그런 일을 하니까 자부심이 생긴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자기 하는 그 일에 가치를 깨달으니까 일하는 자세, 손님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틀리는 겁니다. 자기 하는 그 일에 가치를 아니까 그 일을 하는데 대해서 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더라 말이지요. 그러니까 오는 손님들이 태도가 다르니까 얼마나 정성껏 성의껏 정말 사람들의 피로를 풀어주고 에너지를 불어넣어 심어주고 활력있게 만드는 그런 정신 마음가짐을 가지고 일하니까 손님들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줄을 서고, 한쪽에는 그런 것이 없으니까 종업원들이 신세한탄 하는 겁니다. ‘나는 남의 발이나 주무르는 아주 하천 이런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 그러니까 그 일에 무슨 재미가 있으며 힘이 들어가겠습니까? 같은 일인데도 어떻게 가치관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판이하게 완전히 달라지더라 그래 말을 하지요. 뭐든지 그렇습니다. 보배라는 것은 가치를 아는 사람을 찾아간다고 수없이 많이 말씀을 드렸는데 우리가 사데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의를 입은 사람들 그들은 산 자였고 의인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살아난 그 산 자라는 그 산 자의 그 이름, 산 자 되어진 그 위치 입장 그들이 받아가졌던 하나님의 의, 그 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귀중한 것이며 가치가 있는 것이며 그 의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룩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거기 들이신 자본이 얼마나 막대하게 무한하게 들어갔다는 그 사실을 알았다면 쉽게 의를 벗어버리고 죽은 자로 살지 못할 건데, 살 수 없을 것인데 이런 것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들은 다시 말하면 무엇이 없던 겁니까? 사데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받았고 산 자인데, 그 받은 것에 대한 가치관이 없고 그걸 모르니까 너무도 쉽게 그 의를 던져버리고 의 없이 의인 아닌 자로 죽은 자로 산 생활이 많았습니다. 왜 그리 되어진 겁니까? 그들이 왜 그리 되어진 겁니까? 왜 그들은 그 의를 그렇게 쉽게 져버리게 된 겁니까?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그들에게 권면하신 겁니다. 뭐라 그랬습니까?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뭘 받았는가? 지난주에 증거라 그랬는데, 이거는 말하자면은 하나님의 의를 그들이 받아서 하나님이 사람되셔 가지고 당신의 전부를 다 쏟아부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가능치 아니한 그런 사랑과 희생 그 무한의 자본은 드려가지고 이룩하신 하나님의 그 의를 입은 자기 자신들인데 그래가지고 자기에게 왔는데 그것이 어떻게 그 의가 완성되어졌으며 의를 어떻게 입게 되어졌는가를 그들이 생각지 않으니까 받은 의에 대해서 의의 그 근본 과정 자본 희생 사랑 이런걸 생각지 않으니까 기억이 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리고 그러니까 쉽게 벗어버리게 되어진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어떻게 받았는지 생각을 해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받아가져 의인이 되었지만은 산 자가 되었지만은 우리는 과연 산 자로 살고 있는가, 의인으로 살고 있는가? 그리 사는 것은 드물고 의를 잊어버리고 벗어버리고 사는 생활은 너무도 많은 것이 우리들이 아니겠는가? 그 원인은 어떻게 받았는지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말세에 되어진 일 중에 하나가 이 세상이 어떻게 성립되어졌는지, 노아 홍수때 세상이 어떻게 멸망되었는지 그것을 사람들이 부러 잊어버린다 그랬습니다. 일부러 잊어버린다. 주님 재림과 인간의 종말, 개인의 종말과 주님 재림 우주 종말을 사람들이 생각을 하고 염두에 두고 기억을 하고 살면 모든 생활이 조심이 되어지는데 사람들은 부러 잊어버립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들은 일부러 우리가 잊어버립니다. 기억하고 있으면 괴로우니까 부러 잊으려 한다. 부러 잊어버려야 하는 그런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잊으면 안되는 일이 있는데 그게 바로 많은 것 중에서 개인의 죽음도 한번은 죽는다는 것, 주님 재림은 반드시 있다는 것, 죽음 너머 세계 일어날 일들 이런 것은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을 해야되는데, 이런 것을 기억을 하면 괴롭다 그말이지요. 이런 것을 기억하면 현상세계에서 살아갈 때 마음 편하게 살지를 못하잖습니까? 아이들이 좀 빗나가는 비행청소년 그들이 부모님들이 주시는 그런 학비나 이런 걸 들고 가출해서 엉뚱한 짓 나갈 때 부모님을 생각하고 형제를 생각하고 집안을 생각하면 괴롭습니다. 마음 편하게 놀고싶은대로 못 노니까 일부러 잊어버립니다. 나쁜 사람들은 술을 먹고 일부러 잊어버리고, 그래야만이 현실에 노는 거기에 집중하고 재밌게 놀 수 있으니까. 믿는 사람들이 정도는 다를지라도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개인의 종말 시간 죽음을 잊어버리며 주님 재림을 왜 잊어버리며 죽음 너머 사후세계 부활과 심판과 무궁세계를 왜 기억하지 못하는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이유가 뭡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논리를 많이 설명을 드렸지요.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자기가 이길 수 없는 죄가 있는 것은 이길 수 있을때 이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못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기억을 못하는 것은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평소 기억을 하면 되는데 기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기억하려고 해도 잘 나지를 않는 겁니다. 왜 기억하지 않았는가? 시간을 드리고 마음을 드려서 노력을 하면 되는데, 핑계는 바쁜데, 그러니까 그것 기억을 하면은 좀 건설적이라기보다는 세상 차원에 좀 긍정적으로 말하면 신앙세계 관련된 개인의 종말 우주 종말 사후 세계 이런 걸 기억을 하고 머릿속에 담아두면은 공부에 집중하는데 방해가 되거든요. 공부에만 집중하지 못하게 되거든요. 돈벌이만 해야되는데 돈벌이만 하는 거기에 방해가 되거든요? 세상 생활에 그런 것이 들어오면 세상생활에 가책이 되고 찔리는게 있고 마음 놓고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기억을 안 합니다. 일부러 안 합니다. 안하는 것이 전혀 안하는 것은 아닌데 적당 적당히 하고 마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나중에는 점점 잊어버려져서 심하게 되면은 하려고 그래도 나중에는 기억이 안 난다 그말입니다. 주님 대속, 하나님의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데교회가, 오늘 우리들이 왜 하나님의 의를 받은 것을 생각지를 못하는가? 생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하면 됩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기울여서 학생들이 공부에 좀 손해를 봐도, 또 자기 경제활동 생활에 좀 손해 봐도,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대우받는 것 약간 손해 봐도,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집중을 하고 노력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손해보지 않고 그런 것에 손해 보지 않으려하고 그 생활을 마음 편하게 하려하니까 주님의 대속 생각하는 것은 자꾸 꺼려지고 걸려지게 된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잊어버리게 되고 잊어버리니까 나중에는 기억하려그래도 되지를 않게 되는 겁니다. 이거는 일률적으로 다 적용할 수 없고 또 우리가 신앙이란 것은 멀리까지 봐야되고 전체를 봐야되니까 이걸로 전부라 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 단적인 예를 들어서 해당되는 분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이번 집회를 두고 집회를 가는 것도 그렇고 또 갔다가 이번에 공휴일이 이틀 끼였습니다. 월,화 공휴일 이였지요? 월,화 공휴일 맞지요? 그랬었습니다. 그러니까 5월 집회는 원래부터 직장 가진 분들, 학생들 때문에 참석 숫자가 많지 못하고 많이 못가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휴일이 끼지 않았을때는 하루정도 휴가를 내던지 하루정도 결석을 하던지 또 학교나 이런데 말을 하고 적어도 하루 정도는 참석을 했습니다, 보통. 좀 노력하는 분들은. 그래서 월요일날 퇴근하고 밤에 왔다가 화요일날 오후에 마치고 내려오던지 그러면 화요일은 하루 휴가를 땡기든지 결근하던지 그렇게 되거든요. 그렇게 하는 분들이 더러 제법 많았었습니다. 학생들도 그렇게 했었고. 그러면 이번 집회 같은 경우에, 이틀이 공휴일이니까 예년처럼 하루만 더 보태면, 똑같이 한다면 집회를 거의 다 마치고 수요일 오후에 내려와도 되거든요? 예년처럼 그렇게 하면. 그러면 이틀은 그냥 먹는 것이고 하루 예년만큼 힘을 쓰고 노력한다면 하루 더 보태면 집회에 백퍼센트는 아닐지라도 마지막 남은 2시간 빼고는 다 참석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되어지는데, 그런데 보니까 이번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분들이 더러 있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분들이 거의 다 보면은 화요일 오후에 다 내려오셨거든요? 안 그런 분도 계시겠지만은. 그걸 두고 느끼는 느낌이 이틀은 공먹은 건데 말하자면, 그냥 먹은 건데 공짠데, 예년에는 힘을 써서 하루를 보탰는데, 그래서 하루만 참석했지만은 이번에는 하루 더 보태면 예년과 같이 힘을 쓰면 3일을 참석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노력을 하는 분들이 많이 보이지를 않았다,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아쉬움을 진하게 가지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말하자면은 예를 들면 그런 것도 하나 예를 들어서 적용시켜 볼 수 있습니다. 이거는 계명이 아니니까 꼭 그래야 된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은 또 무리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은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마찬가지로 우리 모든 신앙생활에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은 것을 생각지를 못 하는가? 생각지 못하는 것은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고, 생각지 않는 것은 그 하나님의 의에 가치를 생각하면 아는데 생각안하는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의보다 더 급한 것, 눈 앞에 있는 것, 당장 현상 세계 필요하고 중요하게 느껴지는 이런 것들이 있으니까 거기에 붙들려가지고 그런 것 손해보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는 것을 양보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양보할 수 없는 그런 단계에 가서도 양보를 안 할 수 없는 빼앗기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 되고 만다 그말이지요. 사데교회는 그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찾아가셔서 한번 더 강조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받았으며 그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뭐라고 하면 됩니까? 어떻게 받았으며 그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요? 네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산 자가 되었으며.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영원히 사망된 그 영원한 사망 지옥의 형벌 속에서 거기 그대로 빠져있는데 거기서 건져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낮아짐에 가난해짐에 고난에 희생을 수고를 하셨으며 드리신 자본이 어떠한지 그 정도를 과정을 그래서 동기도 과정도 그 정도도 이런 걸 자꾸 좀 생각을 해서 그러기 때문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참된 양식이고 참된 음료다. 그게 바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말입니다. 생각하면은 거기서 양식이 나오게 되는데.
아이들이 친구들하고 놀때, 또 혼자서 게임을 하고 오락하고 놀 때 머릿속에 숙제를 해야 되는데, 공부해야 되는데, 그 생각을 하면은 게임하는데 재미가 없습니다. 괴롭습니다. 노는게 힘들고. 그러니까 일부러 잊어버립니다. 숙제도 잊어버리고 공부도 잊어버리고 오로지 눈 앞에 있는 그 재미 거기 집중하고. 그러니까 생각을 안 하지요. 이치가 그와 거의 비슷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나 주님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는 것이나 모든 게 다 그 이치가 그와 비슷하다 그말이지요. 사데교회는 그래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 살았습니다. 사데교회는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역시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습니다. 산 자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받아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활은 현상 생활은 우리는 죽은 자로, 의를 벗어버린 자로 사는 것이 너무도 알게 모르게 많은 우리들입니다. 생각해봐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이 의의 가치를 알 때, 의의 가치라는 것은 그 의에 들어간 자본을 알 때 의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희생하신 그 하나님의 희생을 수고를 들이신 자본을 생각할 때, 이걸 알 때 그 의의 가치를 깨달아 알게 되고 누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귀중한 보배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 유품을 하나 부모님 유품을 꼭 안고 있습니다. 보니까 다른 사람이 볼때, ‘그거 뭐 낡아서 쓰도 못할 거 돈 주고 사면 그것보다 수십배 더 좋은 것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그만 떼묻고 한 거 버리지 그게 뭐라고 그렇게 보물처럼 간직을 하는가?’ ‘이거 우리집에 가보입니다. 이게 우리 아버지 어머니 유품입니다.’ ‘유품이 뭔데? 그것보다 좋은 것 많은데.’ ‘이 유품 속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평생이 들어있고 피땀이 들어있고 일생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그사람에게 그것은 가보고 보배가 되는 겁니다. 얼마나 귀중한 보물인지, 보배인지.
하나님의 그 의, 3가지지요. 사죄, 칭의, 화친. 단순히 우리가 수도없이 많이 들은 사죄 칭의 화친입니다. 대형의 사죄, 대행의 칭의, 대화친의 화친인데 이 세가지가 하나님의 의인데, 이 하나님의 의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문제를 근심 걱정을 다 해결하시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을 이룬 것이기 때문에 이름을 하나님의 의라 그렇게 붙인건데, 하나님의 의인데,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의가 바로 하나님의 전부고 동시에 우리에게 전부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목적이 다 무효가 되어지는 성립될 수 없는 이게 하나님의 의고,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구원 자체가 없는 기독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이게 하나님의 의기 때문에 이 의의 가치를 깨닫고 우리는 의를 받았으니까 의를 받은 자 입은 자가 됐으니까 의인으로 살아야 되겠다. 의를 강직하고 의인으로 사는 우리가 되어야 되겠다. 의인으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성경법칙대로 사는게 의인으로 사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의 판이성 시종성 수호성 계약성이 다시 돌아가서 이 말씀 하나님의 의를 담아주신 이 말씀이 이런 말씀이고 그 의를 입은 자로 사는 것이 바로 이런 말씀으로 사는 것이 의인으로 사는 것이니까 의인으로 사는 법칙이 되는 그 말씀은 바로 또한 이런 말씀이다. 그래서 뚜껑을 서론을 하나님의 말씀에 판이성 시종성 수호성 계약성 충성성으로 시작을 했다. 마지막에 끝에 가서 보니까 결론은 또 역시 여전히 하나님 말씀의 이것으로도 나올 수 밖에 없겠다. 그래서 성경 법칙대로 사는 것이 의인으로 사는 것. 그 성경은 바로 이 세상에 가득찬 인간의 말과 판이하게 다른, 모시고 복종 할, 그리할 때 지키고 보호하시는 변하지 않는 계약의 말씀 이 말씀이 바로 우리들이 의인으로 사는 법칙이 되는 성경 법칙이다 하는 겁니다.
오늘 오전에 말씀을 잠깐 정리하면, 첫째, 사데교회와 사데교회 모습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어떠했습니까?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다. 의를 받은 의인인데 의를 벗어버리고 살았다. 두 번째, 하나님의 의의 가치.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가장 근심 걱정 고민 고통하시던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시고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이루신 것이 하나님의 의다. 세 번째, 이 의에 들이신 자본을 생각해봤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희생, 사랑이 다 들어갔고 하나님의 모든 수고가 더할 수 없도록 들어간 것이 의에 들이신 자본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의 우리는 가치를 소중히 여겨서 이 의를 가치를 깨닫고 의를 입은 자로 살아야 되겠다, 의인으로 살아야 되겠다. 의인으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성경 법칙대로 사는 것이 의인으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기억을 하고 현재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말씀을 줄기로 삼아서 그 말씀에서 이면 저면 다 생각하면서 의문도 가져보고 또 답도 찾아보고 또 궁금하면 또 찾아보고 문제점도 생각해보고, 자꾸 생각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을 하고 지키고 회개하라, 우리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