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4-주후(계3:1-3)
깨달음의 은혜2014-05-11조회 440추천 29
본문: 계3:1-3
제목: 깨달음의 은혜
요점:
1. 계시록 7교회
- 7교회는 신약시대 모든 교회들을 상징
- 사데교회는 오늘 우리 교회, 가정 우리 개인들
- 사데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행위
2. 특수인
- 우리는 특수인
- 사람의 수많은 종류, 겉은 모르나 내면으로
- 일반인과 5가지가 다른
- 목적, 소망, 법칙, 간섭, 들이신 자본이 다른
3. 특수 은혜
- 우리는 은혜로 사는 피조물
- 일반인은 일반 은혜로만 살 수 있으나
- 특수인은 특수 은혜를 받아야
4. 깨달음의 은혜(특수 은혜)
- 은혜의 오해, 감정 주관을 은혜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
- 목적적 궁극적 은혜, 자신의 성화
- 과정적 은혜, 말씀 깨달음
- 깨달음의 은혜
5. 깨달음 5가지
1)말씀의 판이성: 인식, 확정
2)말씀의 시종성: 인식, 확정, 실제 상대(종으로 시종)
3)말씀의 수호성: 인식, 말씀 안에 있을 때
4)말씀의 계약성: 변하지 않는 계약의 말씀
5)전부만 다하면: 자기만 다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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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설교
20140504 주후
요한계시록 3:1-3
요한계시록 2,3장에 일곱 교회가 있습니다. 이런 거는 외워두시면 좋겠습니다. 첫째 무슨 교회입니까? 에베소. 두 번째 서머나, 세 번째 버가모, 네 번째 두아디라, 다섯 번째 사데교회, 여섯 번째 빌라델비아 교회, 일곱 번째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는 신약시대에 있는 모든 교회를 전부 다 상징을 하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는 신약시대에 모든 교회 전부를 상징을 한다. 신약시대 모든 교회라 말은, 예수님 초림 이후로 모든 교회 다 전부인데, 오늘날 우리 시대 우리들이 살고있는 이 시대에 모든 교회 전부를 다 말하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과 진리와 구속 받은 성도의 삼합이 교회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장 적은 단위로 나누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고 구속받은 성도 개개인이 교회고, 두 번째는 그 개인 개인이 가정을 이루면 가정이 교회고 그리고 개인과 가정들이 모여서 단체를 이룬 우리 교회 같은 이런 교회를 사회 교회라 그렇게 말하지요. 이 사회교회를 좀 넓게 말하면 무슨 교회라 그러겠습니까? 교회라기보다 사회교회가 좀 모여서 넓게 말하면 이걸 가리켜서 공회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공회라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들의 모임인데 좀 큰 교회라, 총공회는 가장 큰 교회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를 기록하신 것은 일곱교회 안에 일곱교회에 장단점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 신약시대를 살고있는 모든 개인과 가정과 교회들의 모든 장단점을 이 계시록에 있는 교회들을 기준으로 삼아서 대조해보고 하나님이 칭찬하신 장점과 같은 그런 장점이 있으면 그거는 그대로 유지하고 점점 넓혀나가고 하나님이 이 교회들에게 지적하신 단점이 있으면 그 단점과 같은 단점이 우리 교회들에게 있으면 그거는 찾아서 고치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됩니다. 교회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시고 나는 이런데 너는 왜 그러냐? 그런 의미로 교회마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서머나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또 버가모 교회 이런식으로 주님이 찾아오셨는데 그 교회에 하나님께서 특징적인 말하자면 칭찬만 있는 그런 교회는 주님이 주님도 그런 주님이란 것을 말씀하심으로 ‘내가 이런데 너도 그러니까 너와 나는 같구나. 잘하고 있구나. 그걸 잘 붙들고 계속 유지해나가라.’ 그런 말씀이고, ‘나는 이런데 너는 왜 나와 다르냐?’ 이거는 틀린 것을 각도로 잘못된 것을 고치라는 그런 의미로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이 교회들을 기준으로 삼아서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를 돌아봐야 됩니다. 그중에서 오늘 사데교회는 주님이 일곱 영과 일곱 별 성령과 하나님의 교회 종들을 붙드시고 이 교회에 오셨는데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사데교회의 행위를 말씀하시기를, 너를 보니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산 제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산 제사는, 살았지만은 죽은 자로 살아라 그렇게 말씀했고, 여기 본문에는, 왜 살았는데 죽은 자로 사느냐? 그렇게 말씀하지요. 그러면 말이 반대가 되네요. 산 제사는 너는 살아있으나 너를 죽여서 너는 죽고 주님으로 살아라 그 말씀이고, 여기는 너는 살았는데 왜 죽은 자로 사느냐? 말씀하셨으니까 주님으로 인하여 살면은 산 자가 산 자로 사는 건데, 주님으로 산 자가 주님은 떼놓고 저로 사니까 죽은 자가 사는 것이 되는 겁니다. 사데교회는 그 특징이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는데 죽은 자가 된 것이 사데교회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냐? 원인은 두가지입니다. 무엇입니까? 받은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들은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계속 살면 지금까지 죽어왔던 것처럼 남은 때도 다 죽게 되니까 어서 빨리 지금까지 생활을 멈추고 돌아서서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이제는 죽지 않도록 굳게 하라.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받은 것은 증거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기도의 응답, 신앙의 경험과 체험 말하자면은 이 증거를 다른 말로 바꾸면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 응답이라던지 신앙의 경험 체험 이런 것을 받은 증거라, 이 증거를 다른 말로 한번 바꿔서 써보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역사. 하나님이 보여주신 역사입니다. 기도하니까 응답을 들어주십니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 450명, 400:1 이니까 450:1. 그래가지고 대결했는데, 바알선지는 450명, 400명이였습니까? 450명이였습니까? 엘리야는 혼자. ‘너희는 숫자가 많으니까 너희 먼저 기도해봐라. 너희 신이 바알이라는 그 이름이 너희 신이라며? 신이면 너희들이 기도하면 응답을 하는게 맞지 않냐? 그러니 너희들도 기도하고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나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내기를 하자. 그래가지고 응답을 하는 분이 진짜 신이고 응답 안하면 가짜니까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자’. 목숨을 걸어놓고 엘리야가 내기했습니다. 그런데 450명이 자기들대로의 법이 있고 규례가 있고 있으니까 하루종일 제단 쌓아놓고 바알에게 기도하고 부르짖고 안되니까 칼을 가지고 자기 몸을 상하고 피를 흘리고 하루종일 부르짖었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고 응답도 없고 표시도 없었더라. 죽은 자한테 기도하니까 응답이 있을 리가 없는 거지요.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이제는 내 차례니까 내가 기도하겠다’. 엘리야가 성경 말씀 그대로 제단 다 쌓아놓고 그다음 제단 쌓아놓고 또랑을 파고 또랑 가에 물을 가득 채워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셨다 그랬죠. 불을 내려서 또랑물을 다 태워버리고 응답하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으니까 모든 백성이 눈에 봤으니까 여호와는 참 신이고 바알은 가짜구나. 우매무지한 어두운 백성들이 그때사 알고 바알선지 450명을 모조리 어디서 죽였던가요? 기손 강가에 데려가서 다 사형을 시켜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응답이 있고 하나님 앞에 자기 생활 신앙생활 섬기는 그 신앙생활에 하늘의 역사 반응 일단 1차적으로 자기 주관입니다. 내 마음의 변화 자기 주관적인 마음의 변동역사 느낌 감화 감동 이게 있고 그게 좀 더 쌓이면 객관의 변화가 있어서 그 객관 변화를 다른 사람도 설명하면 볼 수 있고 못 봐도 자기는 뚜렷하게 논리정연하게 알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도록 그런 증거를 보게 되는 겁니다. 죄를 지어도 그렇고 의를 행해도 그렇습니다. 그런 증거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 증거를 다른 말로 뭐라고 하면 됩니까? 힌트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증거 하나님이 보여주신 증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요? 크게? 아니고. 아무도 모르시겠습니까? 그걸 가리켜서 표적이라 그리 말할 수 있겠지요, 표적. 하나님이 알려주신 겁니다. 표적 혹은 이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겁니다. 그런 표적, 이적 그게 받은 증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받은 증거가 없으면 예수 믿는게 심히 피곤하고 힘이 들고 괴롭고 고달프고 어렵습니다. 받은 증거가 없으면. 그런데 증거가 있어도, 있어도 신앙생활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려워도 가야되는 줄을 압니다. 어떻게 가야되는 줄 알고,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신앙걸음은 울면서 웃으면서 또 울면서 웃으면서 그렇게 가는 것이 연약한 신앙가들의 걸어가는 신앙걸음이다. 울면서 웃으면서. 사도바울 같은 분도 ‘내가 두 사이에 끼여서 곤고하다’ 자기 속에 두 사람이 있으니까 하나는 하나님 없는 편으로 세상으로 자기로, 하나는 하나님에 붙들려서 그렇게 살려니까 양쪽에 잡아당기고 두 사이에 끼여있으니까 심히 곤고하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의 생활인데 그 곤고한 생활이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주님쪽으로 기울어져서 신앙생활이 점점 자기 생활이 되어지고 본능이 되어지고 당연한 생활이 되어지고 일상이 되어지고 성화가 되어지면 신앙생활을 자연스럽고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고 그 속에 기쁨이 있게 되는 것이고, 이게 점점 두 사이에 끼어있다가 신앙으로는 점점 식어지고 세상으로 점점 나가면 나중에는 신앙생활을 갈수록 점점 더 힘들어지고 힘을 잃고 마지막 가서는 이름만 가지고 사데교회처럼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는데 죽은 자처럼 그렇게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데교회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구속 받은 성도인데 구속 받은 자로 살지 아니하고 구속을 벗어버리고 세상으로 살았기 때문에 죽은 자로 살았습니다. 이유는 뭐냐? 받은 증거를 생각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은혜 역사를 생각지 않으니까, 또 하나는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을 하고 생각을 하고 말씀을 지켜 행하라 말씀을 하신 겁니다.
사데교회입니다. 그래서 받은 것을 생각하고 들은 것은 지켜라 이걸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두 번째로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다 같지 않다. 그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있다. 젊은이와 늙은이가 있다. 뭐 이런식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은 내면에 들어가면 그냥 알기 쉽게 길거리에 나가보면 혹은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 가보면 서로 모르는 곳에, 수많은 사람이 나와있는데 그들의 얼굴 모습이나 옷차림 봐가지고는 그 내면을 정확하게 깊이는 잘 모르지요. 겉은 다 잘 꾸미고 다니니까. 오전에 그 말씀, 옛날부터 많이 느꼈던 겁니다. 영도 산복도로 하꼬방 집에 기어 들어가고 기어 나오는 그 환경이 그런걸 어쩌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환경에 맞도록 자기 자신이 처신하고 알뜰하게 저축을 하고 돈을 모아가지고 일반적인 것 같으면 얼른 집부터 좀 반듯하게 얻던지 그렇게 할 것 같은데, 그런 곳에 살면서 옷은 요즘 말로 말하면 명품을 입고 다니고 그 집 안에 들어가보면, 한번 갈 일이 있어서 몇 번 들어가봤습니다. 가보면 안에 텔레비전 커다란 거 갖다 놓고 그렇게 삽니다. 얼른 이해가 안되지요. ‘참 희안하다. 사람들의 그 인생관, 생활의 그 취미 가치관은 참 많은 차이가 있구나.’ 그걸 아주 옛날부터 젊었을때부터 그걸 본 때 그때부터 좀 생각을 하고 느꼈었습니다. ‘참 사람 모양은 다양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길거리 나오면, 저 광복동 서면 로타리 저런데 다니면 깨끗하게 차려입고 나오거든요? 그러면 밖에서 보면 아주 뭐 신사고 숙녀고 아주 뭐 그런 사람인데, 그런 집에서 나온다는게 나쁘다기보다는 말하자면 비교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거지요. 그런걸 사람들은 모르지요. 어떤 사람은 미꿈하게 생겼는데 속이 텅 빈 사람도 있고, 아무것도 아니라도 속이 꽉 찬 사람 있고. 겉만 보고는 사람을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은 속에 들어가면 많은 종류가 있고 많은 차이가 있다. 이것처럼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겉으로 보면 표가 안나도 내면에 들어가면 크게 두 종류가 있어서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는 그 백성을 위해서 이용물로 지음받은 불택자들. 그런데 누가 택자인지 불택자인지 모르니까 모든 사람에게 전도하고 모든 사람이 다 택자이기를 소망하고 전도하지만은 분명히 뚜렷하게 둘로 구별되어 있어서 불택자들은 죽는 날까지 예수를 반대하고 안 믿고 그래 살고 맙니다. 대개 보면은 택자들은 어느정도 시점 가면 대개는 다 표가 납니다. 그래서 대개 이것도 다 그런 건 아닌데, 믿는 가정에서 믿는 집안분위기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런 환경이라 그러면 거의 대개는 택자일 가능성이 많고, 절대는 아니고 다는 아닌데 불교 집안에서 우상 집안에서 아주 그런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면 대체적으로 불택자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돌아오는 경우 많으니까 그걸로 장담은 못합니다. 확률적으로 말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두 종류가 있다는 것. 우리는 하나님의 택자인데, 그 택자는 특수인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특수인. 일반인과 다르다는 겁니다. 몇 가지가 다르다고요? 오전에 몇 가지가 달랐습니까? 생각해보셨습니까? 다섯가지, 첫째는 뭐가 다릅니까? 목적이 다르다. 무슨 목적이 다릅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우리 택자하고 똑같이 생긴 불택자하고는 다릅니다. 불택자는 이거는 하나의 참 요즘 시대가 워낙 그런 시대니까 말 조심을 해야 되는데, 누가 불택자인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인권법에 걸릴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성경으로 말하면 불택자는 사람은 사람인데, 그냥 적당히 하고 말지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니까 이용물입니다, 이용물. 아무 가치가 없는 이용물입니다. 이용물 중에서도 그래도 비싼 이용물이라 그렇게 볼 수 있겠지요. 사람은 사람이니까 사람 수준, 사람 차원에서 계산하고 사람을 기준으로 모든 걸 판단하니까 말이 안되고 이해를 못하고 놀라기도 하지만은 내나 절대예정 절대주권가지고 존재 가치를 가지고 설명을 하면은 말을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풀을 오독오독 뜯어서 다 집어 뜯을때 ‘왜 너 그렇게 풀을 집어뜯냐? 풀이 얼마나 아프겠냐?’ 그러면 ‘풀이 뭘 아픕니까?’ ‘풀도 생명인데? 살아있는 풀인데? 풀을 찢으면 그 풀에서 피가 나는데, 흘러나오는 물이 피 아니겠습니까? 진액이 나오는데. 왜 그걸 그렇게 찢냐?’ ‘왜 바다 생선을 잡아서 삶아 먹고 구워 먹고 지져 먹고 볶아 먹고 왜 먹냐? 그 살아있는 생선을, 왜 먹냐?’ ‘그거는 생선이니까’ ‘그래도 생명인데’ ‘나는 사람이고 이거는 생선이니까’ ‘그렇지, 이해를 하지’. 그런데 하나님은 너는 인간이고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노아시대때 수십억을 모조리 홍수에 몰아넣어도 투망을 가지고 바다에서 투망을 그물을 던져놓고 수만마리 수십만마리 잡아다가 기계에다 볶아서 가공을 하고 통조림 만들고 삶아먹고 지져먹고 다 합니다. 닭이 무슨 병? 조류독감 병에 걸리니까 수십만마리를 모조리 살아있는 걸 병 걸렸다고 인간에게 병 옮길까 싶어서 수십만마리 수백만마리 모조리를 땅 속에 그냥 갖다 묻어버립니다. 생매장을 시켜버립니다. 잔인한 인간들. 안 그렇습니까? 소를 몇만마리고 도축해서 죽여버리고. 우리는 사람이니까 한 차원 높은 동물이니까. 같은 동물인데도 하나 높다고 해서. 너희는 너희 수준끼리도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를 지은 창조주인데 너희들을 죽일 권한이 없겠는가 그말이지요. 논리로 따지면 할 말 있습니까? 말을 못하는게 양심이지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니까 그러니까 자기 논리를 갖다대지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그거는 그 논리에는 논리적으로도 반박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내가 목적한 바 내 영광을 위해서 내가 이런 사람을 만들었고 그 사람을 내가 원하는 모습의 사람으로 만드려고 하니까 이 사람들과 똑같은 너희처럼 생긴 그런 것들이 필요하더라. 그래서 내가 너희를 이용물로 많이 만들어놓고 쓰게 했다. 왜 할 말 있냐?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데. 그러기 때문에 불택자들은 차마 조심스러워서 말은 못하겠습니다만은 아니다 그말이지요. 무엇이 아닌가? 생각해보시면 알겠지요. 뭐가 아닙니다. 불택자는 따지고 보면 아니다 그말이지요. 이용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 환장을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딸들입니다. 귀한 천국의 시민들입니다. 목적이 틀립니다. 하나님이 지으실 때부터. 우리는 그런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소망이 다르지요. 우리는 천국이 소망이고 불택자들은 천국을 모르니까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소망이 틀립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소망을 하늘 천국에 두지 못하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로 사는 겁니다. 그게 바로 그런 생활입니다. 소망이 틀립니다.
세 번째는 사는 법이 다릅니다. 당연히 달라야 됩니다. 사는 법칙이 다릅니다. 우리들의 법칙과 그들 법칙이 다릅니다. 그들 법칙은 세상 법이고 그냥 시대 따라 가는 법이고 형편대로 사는 법이고 현상 제일주의 지상 제일주의로 거기 맞춰서 시대 조류를 따라서 사는 것이고 형편 따라 그냥 흘러가는대로 사는 것이고 손익계산 따져서 손해 안보면 되는 것이고 자기 좋도록 살면 되는 겁니다. 그냥 살면 되는데, 믿는 사람은 법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법대로 살아야 되는 겁니다. 사는 법이 다른 겁니다.
네 번째는 뭐가 다른 겁니까? 네 번째는 간섭이 다르지요. 하나님의 간섭이 택자와 불택자는 완전히 틀립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달라서 하나님의 택자는 간섭을 여러 형태로 하신다 그말이지요. 간섭을 하실 때 그 간섭을, 간섭을 다른말로 말하면 징계라 그럴 수 있는데, 그런 간섭이 넓은 범위로는 다른 것도 있지만은 대개 보면 간섭은 잔소리고 징계인데 그 징계를 가볍게 여기면, 참 겁이 나서, 징계를 가볍게 여기면 더 큰 징계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냥 마구잡이로 살도록 하나님께서 버려두지를 아니합니다. 반드시 간섭을 하시지 안 믿는 불택자들과 간섭이 전혀 차원이 틀립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내 아들하고 남의 아들에 대한 간섭이 다르지 않습니까? 남의 자식을 내가 왜 간섭합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서 전도한 식구들을 믿음의 식구 믿음의 자녀를 내 혈육 자녀처럼 그렇게 하는게 성경적으로 맞습니다. 그게 소망이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의 가정에는 하나님이 맺어주신 인간관계가 있기 때문에 혈육이란 것은 하나님이 맺어놓으신 인간관계입니다.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거는 내가 세밀하게 깊이 간섭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 주일학생이고 식구라도 혈육이 아니면 간섭의 선이 있습니다. 어느정도까지 하지 더 이상은 못하는 겁니다. 거기다가 상관없는 사람 같으면 아무 간섭을 못하지요. 길거리 지나가다가 지나가는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에 간섭하는 것은 뭐와 같다고요? 잠언 입니까? 길을 가다가 자기하고 상관없는 다툼에 간섭하는 것은 지나가는 개 귀를 잡아당기는 것하고 같으니라. 잠언에 아마 나올걸요?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에 간섭하는 것은 지나가는 개 귀를 잡아당기는 것과 같으니라. 네가 뭔데? 왜 남의 일에 간섭해? 할 말 있습니까? 남의 자식은 간섭을 못 합니다. 가까울수록 간섭이 심합니다. 세밀하고. 깊게 들어가고. 불택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자녀가 아니고. 이용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간섭하지 않습니다. 무슨 죄를 지어도 그냥 둡니다. 전체에 너무 크게 해약을 끼치면 살짝 손 보지만은 그냥 방림해 두십니다. 그래서 성전 밖마당은 어떻게 하라고요? 요한계시록에 성전과 또 무엇과? 요한계시록 11장입니까, 13장에? ‘성전과’ 이런거는 설교도 많이 했고 머릿속에 외워놔야 됩니다. 성전과 척량하는 것 말입니다. 성전과 두 번째는요? 제단과, 세 번째는요?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척량이라는 말은 잰다는 말입니다. 잰다 말은 간섭이라 그뜻입니다. 너무 길다, 짧다. 너무 무겁다, 가볍다, 간섭하는 겁니다. 성전된 사람, 바쳐 제단된 사람,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사람, 이 3종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데 성전 울타리 안에 있어도 믿는다는 이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성경 들고 다니고 주일 지켜도 성전 밖마당은 이방인에게 뒀으니까 버려둬라. 성전 밖마당은 이방인들이 마음대로 밟고 다니는 마당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도 안 믿는 사람들과 꼭 같은 생활, 성전 밖마당 하나님께서 버려서 방림해두시고 간섭을 안하시는 거기까지 가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 가장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없고 던져버리고 방림해두는 사람.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이 틀립니다. 간섭이 있으면 사랑입니다. 감사해야 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뭐가 다릅니까? 자본이 완전히 틀립니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은 만인 구원설입니까, 제한적 구원입니까? 우리 구원은 전인 구원입니까, 제한적 구원입니까? 제한적 구원입니다. 택자들에 한해서만 피를 흘렸지 불택자들 위해서는 주님 피 한 방울도 안 흘렸습니다. 그들 위해서 대속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시고 십자가 고난 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택자들 때문입니다. 지금도 아버지 우편에 앉아서 기도하시는 것은 택자들 때문입니다. 들어간 자본이 택자 불택자들은 차원이 틀립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목적으로, 천국 소망으로, 하나님의 특수한 법칙으로, 특수한 간섭으로, 무한한 자본으로 이렇게 지음 받고 구속 받고 살고 있는 특수인들 입니다. 이걸 우리가 기억하십시다. 또 같이 한번 해보실까요? ‘우리는 특수인’. 이게 오늘 본문이 이번 집회 말씀에 중심되는 본문이고 오늘 말씀이 집회 말씀 전체에 서론격입니다. 참고로 조금 뚜껑 열어서 미리 어느정도 살짝 알고가면 도움될까 싶어서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특수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이란 것은 그러지 않아도 사람이란 것은 혼자 살 수 없는게 사람이다. 사람만 그런게 아닙니다. 피조물이란 존재는, 피조물이 무엇입니까? 피조물은 지음을 받은 존재, 피조물의 반대는요? 창조주.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은 어떤 존재도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무는 뭐가 필요합니까? 나무가 살아가려면 흙에 묻혀야 됩니다. 흙 속에 흙이 필요합니다. 햇빛이 필요하고 공기가 필요하고 물이 필요하고 온도가 필요합니다. 나무 혼자 못 삽니다. 물이란 것은 뭐가 필요합니까? 물은 고일 수 있는 그릇이나 뭐가 있어야 담겨 있지요? 담길 수 없는 것에 물이 있습니까? 공기, 그런 것도 그 자체로는 또 아무 의미도 없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피조물 전부는 그 존재 하나만 가지고는 있을 수도 없고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반드시 그와 상관된 모든 것하고 얽혀서 연관되어서 상호 협조로 도움으로 그렇게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특히 생명 가진 존재는 더 하고 사람은 더 한 겁니다. 그러니까 택자든 불택자든 모든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의 도움을 받아 살아야 되는데 그 많은 도움 받는 것 중에서 크고 가치가 너무 크고 값을 낼 수 없는 그런 도움 받는 걸 가리켜서 은혜라 그렇게 말하고 그래서 사람은 은혜가 있어야 살 수 있고 은혜 없이는 살 수가 없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믿는 특수인들은 일반 은혜 아니고 특수 은혜를 받아야 살 수 있다. 일반적인 은혜는 택자 불택자 모두에게 주는데 우리는 특수 은혜를 받아야 된다. 그 특수 은혜가 뭐냐? 특수은혜라는 것은 말하자면은 은혜라는 것은 공으로 값없이 받는 그건데, 특수은혜를 말씀하신 그 특수은혜는 구원과 관련된 것인데 오늘 말씀드린 이번 집회때 말씀하신 특수은혜는 무엇이라 그랬습니까? 은혜인데 은혜는 깨달음이 은혜다. 말씀 깨달음이 은혜다. 그런데 그 말씀 깨달음이란 것은, 그 속에 말씀을 깨달아가지고 그대로 실행을 해서 자기 변화가 되는 거기까지 가야 비로소 온전한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적적으로 궁극적인 은혜는 자기 변화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자기 변화 구원이고 여기까지 가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게 말씀 깨달음입니다. 말씀 깨달음 없는 자기 성화는 없는 겁니다. 그거는 구원이 아닙니다. 성화도 아니고. 말씀 깨달음.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깨달아야 말씀 깨달음이 은혜다. 진정한 은혜입니다. 최종의 은혜는 그 깨달음을 가지고 자기를 변화시키는게 진정한 은혜고 그래서 오늘 말씀에 깨달음의, 말씀 깨달음, 다섯가지 깨달음. 제목만 말씀드렸는데 간단하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르다. 무엇과 다른가?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인간말과 다르다. 이것 참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는 말은 곧 지식입니다. 말은 지식이고 지식은 말이고 말 아니면 글입니다. 말은 지식이고 그런데, 이 세상에는 지식의 종류가 둘이 있어서 하나는 하나님의 지식, 하나는요? 인간 지식이 있습니다. 이런 것도 교리처럼 외워 놔야 됩니다. 지식은 두 종류다, 하나는 하나님 지식 하나는 인간 지식이다. 인간 지식으로 들어가면 인간지식은 크게 말하면 또 둘이 있습니다. 인간 지식 둘, 하나는 물리적 지식이고 하나는 인문적인 지식이다. 그런데 물리적 지식은 반 거짓말이고 인문지식은 온 거짓말이다. 물리자체는 과학이니까 맞는데 왜 그게 반 거짓말이 됩니까? 써먹는 적용이 틀렸기 때문에 반거짓말이 되고 인문의 인간에 대한 지식은 근본이 다 틀렸기 때문에 완전한 거짓말이다. 이 세상에는 이 두 지식 반 거짓말 온 거짓말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학교 가서 배우는 지식은 무슨 지식을 배웁니까? 주로 보면은 물리나 인문학도 배우지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전부 인간 지식인데 그 인간 지식은 모조리 전부다 반 거짓말 아니면 온 거짓말이니까 한 말로 말하면 전부 거짓말을 배우는 겁니다. 학교 다니며 배우는 거는 전부다 거짓말 배우는데 문제는 그것을 이제 배워가지고 그다음에 나오겠지만은 어쨌든 이 세상에는 두 지식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지식이다, 성경말씀. 하나는 인간지식이다, 인간지식은 그 뿌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가 하나님이 되려던 타락한 천사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뱀의 지식이고, 이 지식은 죽은 지식 죽이는 지식이고 속고 속이는 지식이고 전부다 반 거짓말 온 거짓말 거짓말뿐인 지식이다. 이렇게 정의를 딱 하고 그리고 나서 공부를 하고 해야되지 이걸 모른 상태로 하면은 전부다 여기 다 삼켜버리고 맙니다. 이거는 인식을 하고 확정을 해야 됩니다. 우리 머릿속에. 세상의 지식은 크게 둘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 지식과 하나는 인간 지식인데, 하나님의 지식은 이거는 어떤 지식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조의 능력 가진 이거는 절대 불변의 정확무오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만이 참 지식이고 산 지식이고 살리는 지식이고 인간을 구원하는 영원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지식. 성경 말씀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지식만이 참이고 완전한 사람을 살리는 유일한 지식이고 이것 외에 모든 지식은 전부 인간을 속고 속이고 죽고 죽이는 그 지식밖에 없다. 최종 끝에 가보면 그렇게 되어지는 겁니다. 이걸 확정을 짓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말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이고, 인간 말의 뿌리는 인간이고 거슬러 올라가면 타락한 천사 마귀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 말과 하나님 말씀은 차원이 다른 겁니다. 인간 말은 이거는 변하지 않는 말이 없습니다. 다 아는 말이 없습니다. 꿩꼬리 철학이라 그럽니다. 완전한 지식이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전부다 이거는 진화적인 지식이고 갖다붙이는 지식이고, 옛날에 보면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돈이 없으니까 집을 넓히는데 전세방에 들어갔다가 그 집을 샀다가 그다음에 옆집 하나 사고 또 하나 사고 그래가지고 점점 틔워서 그래 점점 개축을 하고 증축을 하니까 집을 지어도 집 모양이 온전하지 않고, 다 헐어서 새로 지으면 반듯하게 되는데 지은데다가 또 붙이고 또 붙이고 또 붙이고 하니까 집모양이 얄구지게 그렇게 되는 것처럼, 인간 지식이란 것은 꼬라지가 전부다 그런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1세기에 몰랐던 것을, 1세기까지 깨달았던 걸 몰랐는데 1세기까지 깨달았단 걸 가지고 ‘어? 보니까 이런 것도 있네?’ 한 세기 더 지나가니까 거기다 보태지고. 2세기 몰랐던 것 3세기 가니까 또 보태지고, 4세기 가보니까 3세기 까지 알았던게 틀려 ‘지금까지 알았던게 틀렸네? 또 바뀌고 뒤집어지고’ 그래가지고 점점 갖다 덧붙이고 바꾸어지고 뒤집어지고 이리저리 바꾸어지고 그게 전부 인간지식 아닌가요? 000선생님 아닙니까? 제가 설명을 잘못 드린 겁니까? 지식 많으신 분이 생각해보시면 아시겠지요. 세상의 모든 인간지식은 다 그렇게 되어진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걸 이런 인간지식하고 하나님의 지식은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우리는 다 모릅니다. 저도 성경 이거 아는게 억만분지 일도 모릅니다. 그렇지만은 아는 것은 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완전자니까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다 계산된 그 속에서 나온 지식입니다. 하나님 전지한테서 나온 지식이니까 이건 전지입니다. 전능이고 완전이고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다 몰라도 부분적으로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 ‘왜 천국 갑니까?’ ‘모르겠어. 어쨌든 천국 간데.’ 틀리는 말입니까? 절대 불변의 진리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복 받는다’. 진리입니다. 이거는, 왜 복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성경에 보니까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복 받고 오래 산답니다. 이거는 절대 불변의 진리입니다. 전체를 맞춰야 되는 것도 있지만은 부분적으로 옳은 것은 성경 말씀은 말하면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그 사랑하면은 손해 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씩 갖다 붙여도 절대불변의 진리기 때문에 이거는 안 변합니다, 영원히 가도. 이거는 맞습니다. 그런데 인간 지식은 하나가 이게 옳은 줄 알았는데 다른게 오면은 다 틀려 버립니다. 열 가지 알았는데 스무 가지 나오면 열 가지 다 틀려버립니다. 인간 지식은 다 불완전한 겁니다. 오늘까지 알고 있던 인간 지식이 더 발달해서 어느 날 더 넓은 세계 나오면 어떻게 뒤집어질지 모릅니다. 어지간히 밝혀진 것도 있겠지만은. 그래서 첫째는 하나님 지식과 인간 지식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인식을 하고 확정짓는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제는 상대를, 인간지식은 그 위치가 뭐냐? 인간지식은 지식과 사람 둘을 놓고 보면은 사람은 주인이고 지식은 종입니다, 종. 도구입니다. 지식이란 것은 사람이 주인이 돼서 내가 써먹을 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종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내가 모시고 그 지식에 복종해야 될 것이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이게 두 번째입니다. 첫째는 인식을 가져서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지식은 완전히 다르다, 이걸 확실히 기억을 하고 확정을 하고 두 번째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은 내가 모시고 복종을 하되 인간 지식은 천하 없는 대박사 대대박사의 지식일지라도 그 지식은 내가 듣고 참고하고 써먹을 내가 주격되어 써먹을 하나의 참고할 지식이지 그 지식에 내가 목을 매고 거기 따라가는 종되는 그런게 할 것이 아니라 그말입니다. 그런데 현상세계는 주객이 전도되서 완전히 거꾸로 되어있는게 현상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참고고 인간지식에는 목을 매고 그러기 때문에 밥을 굶어도 집을 팔아서라도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라도 가정이 파탄이 나도 자식 공부는 시켜야지. 그게 세상 아닙니까? 배워야 되니까. 지식이 들어와야 되니까. 사람이란 것이 참 희안하지요. 지식은 사람을 만듭니다. 사람이 지식을 써먹어서, 사람이 주체가 되고 주격이 돼서 지식을 써먹고 이용하고 끌고 다녀야 되는데 그래서 필요 없으면 버리고 너무 무거우면 내려놓고 못쓰겠으면 갖다 내버리고 그렇게 되어야 되는데 거꾸로 되어가지고 거의 대부분에 모든 사람이 지식에게 끌려 다닙니다. 지식을 모시고 삽니다. 지식이란 것은 쉽게 말하면 뭡니까? ‘지’자가 무슨 ‘지’자입니까? ‘알 지(知)’자 ‘알 식(識)’자 안다는 뜻입니다. 몰랐을때는 사람이 모르면 모르는대로 그냥 겸손합니다. 그래서 바르게 무식한 사람은 겸손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잘못 무식한 사람은 교만합니다. 더 교만합니다. 옳게 무식한 사람은 심히 겸손합니다. 유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유식한 사람은 겸손합니다. 덜 된 유식한 사람은 교만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식을 많이 가지고 겸손한 사람은 거의 없다 할만큼 희귀합니다. 그래서 세상 지식 많이 가지고 신앙 좋은 사람을 그렇게 귀하게 보는 겁니다. 별로 없습니다. 거의 대개는 세상 지식이 들어가면 사람이 이상하게 변합니다. 모르면 그냥 하는데 알고 나니까, 하나 알고 둘 알고 셋 알고 알면은 사람이 자꾸 눈에 보이니까, 눈에 보이면 거기 대한 대처와 자기 반응과 태도가 달라질 수 밖에 없는게 사람입니다. 사람은 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걸 가지고 받아들이면서 지식을 받아가지고 이런 사실을 깨달아 그 모든 지식에 내가 주인이 돼서 내가 이용하고 지식에 붙들리지 않으면 좋겠는데 지식만 들어가면 사람이 전부다 변합니다. 다 같을 순 없지만은 그러기 때문에 적당히 공부하고 먹고 살 만큼 마련하고 직장 가지고 그렇게 하면 되고, 여반들은 적당히 공부하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아이 잘 기르고 남편 잘 섬기는 그게 백점입니다. 얼마전에도 이야기 했었는데, 어디 갔다 오면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세상적으로 공부 많이 한 그런것들, 특히 여반들 그거, 요긴하게 쓰면 요긴하게 씁니다. 그런데 대개는 아무리 많이 공부해봐야 그쪽으로 나가면 모르겠습니다만은 그게 아니면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거의 별로 보면은 쓸모가 별로 없습니다. 어느정도까지만 알고나면. 지혜라는 것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지만은 지혜와 지식은 틀리는 겁니다. 지식을 응용하는게 지혜이지요.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글 공부 지식이 없어도 요즘은 신문이나 인터넷 이런 것 통해서 배울 게 워낙 많으니까 그런 걸 바탕으로 지혜가 있으면 대대학을 열 개 나온 것 보다 고등학교만 딱 졸업해도 지혜 있는 사람들은 대학 열 개 졸업한 사람보다 더 지혜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두 번째, 이걸 인식하고 확정을 하고 실제 이렇게 상대를 해야 됩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식은 내가 모시고 복종할 지식입니다. 인간 지식은 내가 써먹어야 됩니다. 그 지식에 사람이 피동이 되고 그 지식 때문에 사람이 변해지고 흔들리면 그거는 지식에 벌써 종이 되어 진 겁니다. 차라리 없는 것이 낫지요. 주인이 종에게 끌려가면 그 종을 없애버려야 되지 종놈이 주인한테 복종을 해야 되지 종놈이 주인을 끌고가면은 그 종을 살려도 되겠습니까? 없애버려야 되지, 팔아버리든지 갖다버려야 되지요. 거의 대부분은 지식에 종이 다 됩니다. 예외가 별로 없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전혀 없지는 않지만은. 그래서 이렇게 주객이 전도된 것이 오늘 현상세계 세상은 전부다고 믿는 세계도 거의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가지고, 그다음 세 번째는 말씀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말씀에 붙들 이 말씀으로 살면은 이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신다. 요셉도 말씀이 지켰고 다니엘도 말씀이 지켰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전부다 말씀이 그들을 붙들고 지켰습니다. 말씀을 떠나면 그때부터 주님 떠납니다. 말씀 없는 주님은 없습니다. 말씀 떠났을때 주님이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말씀을 모시면 주님이 함께 있고 말씀을 떠나면 주님도 같이 떠나니까 혼자입니다. 혼자서 세상을 감당 못하고 위험 천만한 일입니다. 수호성입니다.
네 번째 말씀은 계약입니다. 이 계약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계약의 하나님인데,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변하지 않는 지식이 있을까?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 이야기도 했는데, 변하는 것, 한때는 굳게 서서 이게 전부다. 신앙도 그렇고 이게 전부다 그랬는데 그것이 세월 속에 다 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월을 지나봐야 됩니다. 이십대, 삼십대까지 나는 안 변합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이 복음이 전부입니다. 이 노선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붙들고 있는데, 30대까지 그러는데 우리 공회 교역자님들 교인들 수만명이 수천명 수만명 교역자들 수백명이 지금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했습니다. 목숨 걸고 이 복음 지킵니다. 이 노선이 전부입니다. 그분들 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니까 안 변한 사람은 거의 없다 할 만큼 다 변해버립니다. 변하는 줄 알고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고 싶어 변하지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큰소리 함부로 치면 안되는 겁니다. 세월이 지나가봐야 되고 세상에 안 변하는게 없습니다. 그러나 참 복음은, 참 신앙의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계약은 불변입니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관이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지식도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권력도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 변합니다. 오로지 이 말씀만이 변하지 않습니다. 계약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람 힘으로 못 지키는데, 자기 할 수 있는 것만 다하면 됩니다. 달란트 비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달란트 비유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는 잘난 사람보다 많이 받아 가진 사람보다 적게 가진 사람이 유익입니다. 한달에 백 억 버는 사람이 십일조를 내면 얼마 넣어야 됩니까? 한달에 십 억을 해야 됩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사업하는 분들 십일조 제대로 하는 분들 거의 없을걸요? 못 합니다. 해야 됩니다. 성경적으로. 한달에 백 억 벌면 한 달에 십 억을 하는게 성경입니다. 안하면 그거는 도둑질입니다. 성경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 달에 백만원 받는 사람은 십만원 하면 됩니다. 그거는 쉽습니다. 누구나 하면 됩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많이 거둡니다. 많이 내놔야 됩니다. 자기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조건으로 공부를 못해서 못 나서 부족해서 이거는 하나님 앞에 핑계거리도 안되고 조건적으로 전혀 분리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다 하면 되니까 오히려 쉽습니다. 많이 받아 가지고 잘난 사람은 그만큼 어렵고 많이 해야 되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계산하시는 것은 당신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주신만큼 거둠으로 양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몇퍼센트 분량 그걸로 따지는 것이지. 다 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는 깨달음이 은혜다. 다섯가지 깨달음 기억을 하고 이 말씀을 기초로 닦은 걸로 기억을 하면서 이 말씀을 가지고 집회 가서 또 집에 계시는 분들은 설교록 가지고 혹은 홈페이지 들어가셔서 읽어보고 좀 은혜를 받도록 그렇게 하시면 좋겠습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특수인임을 기억하십시다. 일반사람과 틀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들 천국 백성입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특수은혜를 받아야 삽니다. 특수은혜는 여러 가지 있지만은 말씀 깨달음이 은혜입니다. 다섯가지 깨달음을 생각해봤습니다.
제목: 깨달음의 은혜
요점:
1. 계시록 7교회
- 7교회는 신약시대 모든 교회들을 상징
- 사데교회는 오늘 우리 교회, 가정 우리 개인들
- 사데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행위
2. 특수인
- 우리는 특수인
- 사람의 수많은 종류, 겉은 모르나 내면으로
- 일반인과 5가지가 다른
- 목적, 소망, 법칙, 간섭, 들이신 자본이 다른
3. 특수 은혜
- 우리는 은혜로 사는 피조물
- 일반인은 일반 은혜로만 살 수 있으나
- 특수인은 특수 은혜를 받아야
4. 깨달음의 은혜(특수 은혜)
- 은혜의 오해, 감정 주관을 은혜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
- 목적적 궁극적 은혜, 자신의 성화
- 과정적 은혜, 말씀 깨달음
- 깨달음의 은혜
5. 깨달음 5가지
1)말씀의 판이성: 인식, 확정
2)말씀의 시종성: 인식, 확정, 실제 상대(종으로 시종)
3)말씀의 수호성: 인식, 말씀 안에 있을 때
4)말씀의 계약성: 변하지 않는 계약의 말씀
5)전부만 다하면: 자기만 다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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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설교
20140504 주후
요한계시록 3:1-3
요한계시록 2,3장에 일곱 교회가 있습니다. 이런 거는 외워두시면 좋겠습니다. 첫째 무슨 교회입니까? 에베소. 두 번째 서머나, 세 번째 버가모, 네 번째 두아디라, 다섯 번째 사데교회, 여섯 번째 빌라델비아 교회, 일곱 번째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는 신약시대에 있는 모든 교회를 전부 다 상징을 하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는 신약시대에 모든 교회 전부를 상징을 한다. 신약시대 모든 교회라 말은, 예수님 초림 이후로 모든 교회 다 전부인데, 오늘날 우리 시대 우리들이 살고있는 이 시대에 모든 교회 전부를 다 말하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과 진리와 구속 받은 성도의 삼합이 교회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장 적은 단위로 나누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고 구속받은 성도 개개인이 교회고, 두 번째는 그 개인 개인이 가정을 이루면 가정이 교회고 그리고 개인과 가정들이 모여서 단체를 이룬 우리 교회 같은 이런 교회를 사회 교회라 그렇게 말하지요. 이 사회교회를 좀 넓게 말하면 무슨 교회라 그러겠습니까? 교회라기보다 사회교회가 좀 모여서 넓게 말하면 이걸 가리켜서 공회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공회라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들의 모임인데 좀 큰 교회라, 총공회는 가장 큰 교회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를 기록하신 것은 일곱교회 안에 일곱교회에 장단점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 신약시대를 살고있는 모든 개인과 가정과 교회들의 모든 장단점을 이 계시록에 있는 교회들을 기준으로 삼아서 대조해보고 하나님이 칭찬하신 장점과 같은 그런 장점이 있으면 그거는 그대로 유지하고 점점 넓혀나가고 하나님이 이 교회들에게 지적하신 단점이 있으면 그 단점과 같은 단점이 우리 교회들에게 있으면 그거는 찾아서 고치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됩니다. 교회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시고 나는 이런데 너는 왜 그러냐? 그런 의미로 교회마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서머나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또 버가모 교회 이런식으로 주님이 찾아오셨는데 그 교회에 하나님께서 특징적인 말하자면 칭찬만 있는 그런 교회는 주님이 주님도 그런 주님이란 것을 말씀하심으로 ‘내가 이런데 너도 그러니까 너와 나는 같구나. 잘하고 있구나. 그걸 잘 붙들고 계속 유지해나가라.’ 그런 말씀이고, ‘나는 이런데 너는 왜 나와 다르냐?’ 이거는 틀린 것을 각도로 잘못된 것을 고치라는 그런 의미로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이 교회들을 기준으로 삼아서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를 돌아봐야 됩니다. 그중에서 오늘 사데교회는 주님이 일곱 영과 일곱 별 성령과 하나님의 교회 종들을 붙드시고 이 교회에 오셨는데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사데교회의 행위를 말씀하시기를, 너를 보니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산 제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산 제사는, 살았지만은 죽은 자로 살아라 그렇게 말씀했고, 여기 본문에는, 왜 살았는데 죽은 자로 사느냐? 그렇게 말씀하지요. 그러면 말이 반대가 되네요. 산 제사는 너는 살아있으나 너를 죽여서 너는 죽고 주님으로 살아라 그 말씀이고, 여기는 너는 살았는데 왜 죽은 자로 사느냐? 말씀하셨으니까 주님으로 인하여 살면은 산 자가 산 자로 사는 건데, 주님으로 산 자가 주님은 떼놓고 저로 사니까 죽은 자가 사는 것이 되는 겁니다. 사데교회는 그 특징이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는데 죽은 자가 된 것이 사데교회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냐? 원인은 두가지입니다. 무엇입니까? 받은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들은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계속 살면 지금까지 죽어왔던 것처럼 남은 때도 다 죽게 되니까 어서 빨리 지금까지 생활을 멈추고 돌아서서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이제는 죽지 않도록 굳게 하라.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받은 것은 증거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기도의 응답, 신앙의 경험과 체험 말하자면은 이 증거를 다른 말로 바꾸면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 응답이라던지 신앙의 경험 체험 이런 것을 받은 증거라, 이 증거를 다른 말로 한번 바꿔서 써보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역사. 하나님이 보여주신 역사입니다. 기도하니까 응답을 들어주십니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 450명, 400:1 이니까 450:1. 그래가지고 대결했는데, 바알선지는 450명, 400명이였습니까? 450명이였습니까? 엘리야는 혼자. ‘너희는 숫자가 많으니까 너희 먼저 기도해봐라. 너희 신이 바알이라는 그 이름이 너희 신이라며? 신이면 너희들이 기도하면 응답을 하는게 맞지 않냐? 그러니 너희들도 기도하고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나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내기를 하자. 그래가지고 응답을 하는 분이 진짜 신이고 응답 안하면 가짜니까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자’. 목숨을 걸어놓고 엘리야가 내기했습니다. 그런데 450명이 자기들대로의 법이 있고 규례가 있고 있으니까 하루종일 제단 쌓아놓고 바알에게 기도하고 부르짖고 안되니까 칼을 가지고 자기 몸을 상하고 피를 흘리고 하루종일 부르짖었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고 응답도 없고 표시도 없었더라. 죽은 자한테 기도하니까 응답이 있을 리가 없는 거지요.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이제는 내 차례니까 내가 기도하겠다’. 엘리야가 성경 말씀 그대로 제단 다 쌓아놓고 그다음 제단 쌓아놓고 또랑을 파고 또랑 가에 물을 가득 채워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셨다 그랬죠. 불을 내려서 또랑물을 다 태워버리고 응답하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으니까 모든 백성이 눈에 봤으니까 여호와는 참 신이고 바알은 가짜구나. 우매무지한 어두운 백성들이 그때사 알고 바알선지 450명을 모조리 어디서 죽였던가요? 기손 강가에 데려가서 다 사형을 시켜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응답이 있고 하나님 앞에 자기 생활 신앙생활 섬기는 그 신앙생활에 하늘의 역사 반응 일단 1차적으로 자기 주관입니다. 내 마음의 변화 자기 주관적인 마음의 변동역사 느낌 감화 감동 이게 있고 그게 좀 더 쌓이면 객관의 변화가 있어서 그 객관 변화를 다른 사람도 설명하면 볼 수 있고 못 봐도 자기는 뚜렷하게 논리정연하게 알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도록 그런 증거를 보게 되는 겁니다. 죄를 지어도 그렇고 의를 행해도 그렇습니다. 그런 증거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 증거를 다른 말로 뭐라고 하면 됩니까? 힌트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증거 하나님이 보여주신 증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요? 크게? 아니고. 아무도 모르시겠습니까? 그걸 가리켜서 표적이라 그리 말할 수 있겠지요, 표적. 하나님이 알려주신 겁니다. 표적 혹은 이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겁니다. 그런 표적, 이적 그게 받은 증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받은 증거가 없으면 예수 믿는게 심히 피곤하고 힘이 들고 괴롭고 고달프고 어렵습니다. 받은 증거가 없으면. 그런데 증거가 있어도, 있어도 신앙생활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려워도 가야되는 줄을 압니다. 어떻게 가야되는 줄 알고,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신앙걸음은 울면서 웃으면서 또 울면서 웃으면서 그렇게 가는 것이 연약한 신앙가들의 걸어가는 신앙걸음이다. 울면서 웃으면서. 사도바울 같은 분도 ‘내가 두 사이에 끼여서 곤고하다’ 자기 속에 두 사람이 있으니까 하나는 하나님 없는 편으로 세상으로 자기로, 하나는 하나님에 붙들려서 그렇게 살려니까 양쪽에 잡아당기고 두 사이에 끼여있으니까 심히 곤고하다. 이것이 믿는 사람들의 생활인데 그 곤고한 생활이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주님쪽으로 기울어져서 신앙생활이 점점 자기 생활이 되어지고 본능이 되어지고 당연한 생활이 되어지고 일상이 되어지고 성화가 되어지면 신앙생활을 자연스럽고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고 그 속에 기쁨이 있게 되는 것이고, 이게 점점 두 사이에 끼어있다가 신앙으로는 점점 식어지고 세상으로 점점 나가면 나중에는 신앙생활을 갈수록 점점 더 힘들어지고 힘을 잃고 마지막 가서는 이름만 가지고 사데교회처럼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는데 죽은 자처럼 그렇게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데교회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구속 받은 성도인데 구속 받은 자로 살지 아니하고 구속을 벗어버리고 세상으로 살았기 때문에 죽은 자로 살았습니다. 이유는 뭐냐? 받은 증거를 생각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은혜 역사를 생각지 않으니까, 또 하나는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을 하고 생각을 하고 말씀을 지켜 행하라 말씀을 하신 겁니다.
사데교회입니다. 그래서 받은 것을 생각하고 들은 것은 지켜라 이걸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두 번째로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다 같지 않다. 그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있다. 젊은이와 늙은이가 있다. 뭐 이런식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은 내면에 들어가면 그냥 알기 쉽게 길거리에 나가보면 혹은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 가보면 서로 모르는 곳에, 수많은 사람이 나와있는데 그들의 얼굴 모습이나 옷차림 봐가지고는 그 내면을 정확하게 깊이는 잘 모르지요. 겉은 다 잘 꾸미고 다니니까. 오전에 그 말씀, 옛날부터 많이 느꼈던 겁니다. 영도 산복도로 하꼬방 집에 기어 들어가고 기어 나오는 그 환경이 그런걸 어쩌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환경에 맞도록 자기 자신이 처신하고 알뜰하게 저축을 하고 돈을 모아가지고 일반적인 것 같으면 얼른 집부터 좀 반듯하게 얻던지 그렇게 할 것 같은데, 그런 곳에 살면서 옷은 요즘 말로 말하면 명품을 입고 다니고 그 집 안에 들어가보면, 한번 갈 일이 있어서 몇 번 들어가봤습니다. 가보면 안에 텔레비전 커다란 거 갖다 놓고 그렇게 삽니다. 얼른 이해가 안되지요. ‘참 희안하다. 사람들의 그 인생관, 생활의 그 취미 가치관은 참 많은 차이가 있구나.’ 그걸 아주 옛날부터 젊었을때부터 그걸 본 때 그때부터 좀 생각을 하고 느꼈었습니다. ‘참 사람 모양은 다양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길거리 나오면, 저 광복동 서면 로타리 저런데 다니면 깨끗하게 차려입고 나오거든요? 그러면 밖에서 보면 아주 뭐 신사고 숙녀고 아주 뭐 그런 사람인데, 그런 집에서 나온다는게 나쁘다기보다는 말하자면 비교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거지요. 그런걸 사람들은 모르지요. 어떤 사람은 미꿈하게 생겼는데 속이 텅 빈 사람도 있고, 아무것도 아니라도 속이 꽉 찬 사람 있고. 겉만 보고는 사람을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은 속에 들어가면 많은 종류가 있고 많은 차이가 있다. 이것처럼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겉으로 보면 표가 안나도 내면에 들어가면 크게 두 종류가 있어서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는 그 백성을 위해서 이용물로 지음받은 불택자들. 그런데 누가 택자인지 불택자인지 모르니까 모든 사람에게 전도하고 모든 사람이 다 택자이기를 소망하고 전도하지만은 분명히 뚜렷하게 둘로 구별되어 있어서 불택자들은 죽는 날까지 예수를 반대하고 안 믿고 그래 살고 맙니다. 대개 보면은 택자들은 어느정도 시점 가면 대개는 다 표가 납니다. 그래서 대개 이것도 다 그런 건 아닌데, 믿는 가정에서 믿는 집안분위기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런 환경이라 그러면 거의 대개는 택자일 가능성이 많고, 절대는 아니고 다는 아닌데 불교 집안에서 우상 집안에서 아주 그런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면 대체적으로 불택자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돌아오는 경우 많으니까 그걸로 장담은 못합니다. 확률적으로 말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두 종류가 있다는 것. 우리는 하나님의 택자인데, 그 택자는 특수인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특수인. 일반인과 다르다는 겁니다. 몇 가지가 다르다고요? 오전에 몇 가지가 달랐습니까? 생각해보셨습니까? 다섯가지, 첫째는 뭐가 다릅니까? 목적이 다르다. 무슨 목적이 다릅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우리 택자하고 똑같이 생긴 불택자하고는 다릅니다. 불택자는 이거는 하나의 참 요즘 시대가 워낙 그런 시대니까 말 조심을 해야 되는데, 누가 불택자인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인권법에 걸릴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성경으로 말하면 불택자는 사람은 사람인데, 그냥 적당히 하고 말지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니까 이용물입니다, 이용물. 아무 가치가 없는 이용물입니다. 이용물 중에서도 그래도 비싼 이용물이라 그렇게 볼 수 있겠지요. 사람은 사람이니까 사람 수준, 사람 차원에서 계산하고 사람을 기준으로 모든 걸 판단하니까 말이 안되고 이해를 못하고 놀라기도 하지만은 내나 절대예정 절대주권가지고 존재 가치를 가지고 설명을 하면은 말을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풀을 오독오독 뜯어서 다 집어 뜯을때 ‘왜 너 그렇게 풀을 집어뜯냐? 풀이 얼마나 아프겠냐?’ 그러면 ‘풀이 뭘 아픕니까?’ ‘풀도 생명인데? 살아있는 풀인데? 풀을 찢으면 그 풀에서 피가 나는데, 흘러나오는 물이 피 아니겠습니까? 진액이 나오는데. 왜 그걸 그렇게 찢냐?’ ‘왜 바다 생선을 잡아서 삶아 먹고 구워 먹고 지져 먹고 볶아 먹고 왜 먹냐? 그 살아있는 생선을, 왜 먹냐?’ ‘그거는 생선이니까’ ‘그래도 생명인데’ ‘나는 사람이고 이거는 생선이니까’ ‘그렇지, 이해를 하지’. 그런데 하나님은 너는 인간이고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노아시대때 수십억을 모조리 홍수에 몰아넣어도 투망을 가지고 바다에서 투망을 그물을 던져놓고 수만마리 수십만마리 잡아다가 기계에다 볶아서 가공을 하고 통조림 만들고 삶아먹고 지져먹고 다 합니다. 닭이 무슨 병? 조류독감 병에 걸리니까 수십만마리를 모조리 살아있는 걸 병 걸렸다고 인간에게 병 옮길까 싶어서 수십만마리 수백만마리 모조리를 땅 속에 그냥 갖다 묻어버립니다. 생매장을 시켜버립니다. 잔인한 인간들. 안 그렇습니까? 소를 몇만마리고 도축해서 죽여버리고. 우리는 사람이니까 한 차원 높은 동물이니까. 같은 동물인데도 하나 높다고 해서. 너희는 너희 수준끼리도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를 지은 창조주인데 너희들을 죽일 권한이 없겠는가 그말이지요. 논리로 따지면 할 말 있습니까? 말을 못하는게 양심이지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니까 그러니까 자기 논리를 갖다대지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그거는 그 논리에는 논리적으로도 반박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내가 목적한 바 내 영광을 위해서 내가 이런 사람을 만들었고 그 사람을 내가 원하는 모습의 사람으로 만드려고 하니까 이 사람들과 똑같은 너희처럼 생긴 그런 것들이 필요하더라. 그래서 내가 너희를 이용물로 많이 만들어놓고 쓰게 했다. 왜 할 말 있냐?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데. 그러기 때문에 불택자들은 차마 조심스러워서 말은 못하겠습니다만은 아니다 그말이지요. 무엇이 아닌가? 생각해보시면 알겠지요. 뭐가 아닙니다. 불택자는 따지고 보면 아니다 그말이지요. 이용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 환장을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딸들입니다. 귀한 천국의 시민들입니다. 목적이 틀립니다. 하나님이 지으실 때부터. 우리는 그런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소망이 다르지요. 우리는 천국이 소망이고 불택자들은 천국을 모르니까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소망이 틀립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소망을 하늘 천국에 두지 못하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로 사는 겁니다. 그게 바로 그런 생활입니다. 소망이 틀립니다.
세 번째는 사는 법이 다릅니다. 당연히 달라야 됩니다. 사는 법칙이 다릅니다. 우리들의 법칙과 그들 법칙이 다릅니다. 그들 법칙은 세상 법이고 그냥 시대 따라 가는 법이고 형편대로 사는 법이고 현상 제일주의 지상 제일주의로 거기 맞춰서 시대 조류를 따라서 사는 것이고 형편 따라 그냥 흘러가는대로 사는 것이고 손익계산 따져서 손해 안보면 되는 것이고 자기 좋도록 살면 되는 겁니다. 그냥 살면 되는데, 믿는 사람은 법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법대로 살아야 되는 겁니다. 사는 법이 다른 겁니다.
네 번째는 뭐가 다른 겁니까? 네 번째는 간섭이 다르지요. 하나님의 간섭이 택자와 불택자는 완전히 틀립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달라서 하나님의 택자는 간섭을 여러 형태로 하신다 그말이지요. 간섭을 하실 때 그 간섭을, 간섭을 다른말로 말하면 징계라 그럴 수 있는데, 그런 간섭이 넓은 범위로는 다른 것도 있지만은 대개 보면 간섭은 잔소리고 징계인데 그 징계를 가볍게 여기면, 참 겁이 나서, 징계를 가볍게 여기면 더 큰 징계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냥 마구잡이로 살도록 하나님께서 버려두지를 아니합니다. 반드시 간섭을 하시지 안 믿는 불택자들과 간섭이 전혀 차원이 틀립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내 아들하고 남의 아들에 대한 간섭이 다르지 않습니까? 남의 자식을 내가 왜 간섭합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서 전도한 식구들을 믿음의 식구 믿음의 자녀를 내 혈육 자녀처럼 그렇게 하는게 성경적으로 맞습니다. 그게 소망이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의 가정에는 하나님이 맺어주신 인간관계가 있기 때문에 혈육이란 것은 하나님이 맺어놓으신 인간관계입니다.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거는 내가 세밀하게 깊이 간섭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 주일학생이고 식구라도 혈육이 아니면 간섭의 선이 있습니다. 어느정도까지 하지 더 이상은 못하는 겁니다. 거기다가 상관없는 사람 같으면 아무 간섭을 못하지요. 길거리 지나가다가 지나가는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에 간섭하는 것은 뭐와 같다고요? 잠언 입니까? 길을 가다가 자기하고 상관없는 다툼에 간섭하는 것은 지나가는 개 귀를 잡아당기는 것하고 같으니라. 잠언에 아마 나올걸요?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에 간섭하는 것은 지나가는 개 귀를 잡아당기는 것과 같으니라. 네가 뭔데? 왜 남의 일에 간섭해? 할 말 있습니까? 남의 자식은 간섭을 못 합니다. 가까울수록 간섭이 심합니다. 세밀하고. 깊게 들어가고. 불택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자녀가 아니고. 이용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간섭하지 않습니다. 무슨 죄를 지어도 그냥 둡니다. 전체에 너무 크게 해약을 끼치면 살짝 손 보지만은 그냥 방림해 두십니다. 그래서 성전 밖마당은 어떻게 하라고요? 요한계시록에 성전과 또 무엇과? 요한계시록 11장입니까, 13장에? ‘성전과’ 이런거는 설교도 많이 했고 머릿속에 외워놔야 됩니다. 성전과 척량하는 것 말입니다. 성전과 두 번째는요? 제단과, 세 번째는요?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척량이라는 말은 잰다는 말입니다. 잰다 말은 간섭이라 그뜻입니다. 너무 길다, 짧다. 너무 무겁다, 가볍다, 간섭하는 겁니다. 성전된 사람, 바쳐 제단된 사람,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사람, 이 3종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데 성전 울타리 안에 있어도 믿는다는 이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성경 들고 다니고 주일 지켜도 성전 밖마당은 이방인에게 뒀으니까 버려둬라. 성전 밖마당은 이방인들이 마음대로 밟고 다니는 마당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도 안 믿는 사람들과 꼭 같은 생활, 성전 밖마당 하나님께서 버려서 방림해두시고 간섭을 안하시는 거기까지 가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 가장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없고 던져버리고 방림해두는 사람.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이 틀립니다. 간섭이 있으면 사랑입니다. 감사해야 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뭐가 다릅니까? 자본이 완전히 틀립니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은 만인 구원설입니까, 제한적 구원입니까? 우리 구원은 전인 구원입니까, 제한적 구원입니까? 제한적 구원입니다. 택자들에 한해서만 피를 흘렸지 불택자들 위해서는 주님 피 한 방울도 안 흘렸습니다. 그들 위해서 대속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시고 십자가 고난 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택자들 때문입니다. 지금도 아버지 우편에 앉아서 기도하시는 것은 택자들 때문입니다. 들어간 자본이 택자 불택자들은 차원이 틀립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목적으로, 천국 소망으로, 하나님의 특수한 법칙으로, 특수한 간섭으로, 무한한 자본으로 이렇게 지음 받고 구속 받고 살고 있는 특수인들 입니다. 이걸 우리가 기억하십시다. 또 같이 한번 해보실까요? ‘우리는 특수인’. 이게 오늘 본문이 이번 집회 말씀에 중심되는 본문이고 오늘 말씀이 집회 말씀 전체에 서론격입니다. 참고로 조금 뚜껑 열어서 미리 어느정도 살짝 알고가면 도움될까 싶어서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특수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이란 것은 그러지 않아도 사람이란 것은 혼자 살 수 없는게 사람이다. 사람만 그런게 아닙니다. 피조물이란 존재는, 피조물이 무엇입니까? 피조물은 지음을 받은 존재, 피조물의 반대는요? 창조주.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은 어떤 존재도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무는 뭐가 필요합니까? 나무가 살아가려면 흙에 묻혀야 됩니다. 흙 속에 흙이 필요합니다. 햇빛이 필요하고 공기가 필요하고 물이 필요하고 온도가 필요합니다. 나무 혼자 못 삽니다. 물이란 것은 뭐가 필요합니까? 물은 고일 수 있는 그릇이나 뭐가 있어야 담겨 있지요? 담길 수 없는 것에 물이 있습니까? 공기, 그런 것도 그 자체로는 또 아무 의미도 없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피조물 전부는 그 존재 하나만 가지고는 있을 수도 없고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반드시 그와 상관된 모든 것하고 얽혀서 연관되어서 상호 협조로 도움으로 그렇게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특히 생명 가진 존재는 더 하고 사람은 더 한 겁니다. 그러니까 택자든 불택자든 모든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의 도움을 받아 살아야 되는데 그 많은 도움 받는 것 중에서 크고 가치가 너무 크고 값을 낼 수 없는 그런 도움 받는 걸 가리켜서 은혜라 그렇게 말하고 그래서 사람은 은혜가 있어야 살 수 있고 은혜 없이는 살 수가 없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믿는 특수인들은 일반 은혜 아니고 특수 은혜를 받아야 살 수 있다. 일반적인 은혜는 택자 불택자 모두에게 주는데 우리는 특수 은혜를 받아야 된다. 그 특수 은혜가 뭐냐? 특수은혜라는 것은 말하자면은 은혜라는 것은 공으로 값없이 받는 그건데, 특수은혜를 말씀하신 그 특수은혜는 구원과 관련된 것인데 오늘 말씀드린 이번 집회때 말씀하신 특수은혜는 무엇이라 그랬습니까? 은혜인데 은혜는 깨달음이 은혜다. 말씀 깨달음이 은혜다. 그런데 그 말씀 깨달음이란 것은, 그 속에 말씀을 깨달아가지고 그대로 실행을 해서 자기 변화가 되는 거기까지 가야 비로소 온전한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적적으로 궁극적인 은혜는 자기 변화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자기 변화 구원이고 여기까지 가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게 말씀 깨달음입니다. 말씀 깨달음 없는 자기 성화는 없는 겁니다. 그거는 구원이 아닙니다. 성화도 아니고. 말씀 깨달음.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깨달아야 말씀 깨달음이 은혜다. 진정한 은혜입니다. 최종의 은혜는 그 깨달음을 가지고 자기를 변화시키는게 진정한 은혜고 그래서 오늘 말씀에 깨달음의, 말씀 깨달음, 다섯가지 깨달음. 제목만 말씀드렸는데 간단하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르다. 무엇과 다른가?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인간말과 다르다. 이것 참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는 말은 곧 지식입니다. 말은 지식이고 지식은 말이고 말 아니면 글입니다. 말은 지식이고 그런데, 이 세상에는 지식의 종류가 둘이 있어서 하나는 하나님의 지식, 하나는요? 인간 지식이 있습니다. 이런 것도 교리처럼 외워 놔야 됩니다. 지식은 두 종류다, 하나는 하나님 지식 하나는 인간 지식이다. 인간 지식으로 들어가면 인간지식은 크게 말하면 또 둘이 있습니다. 인간 지식 둘, 하나는 물리적 지식이고 하나는 인문적인 지식이다. 그런데 물리적 지식은 반 거짓말이고 인문지식은 온 거짓말이다. 물리자체는 과학이니까 맞는데 왜 그게 반 거짓말이 됩니까? 써먹는 적용이 틀렸기 때문에 반거짓말이 되고 인문의 인간에 대한 지식은 근본이 다 틀렸기 때문에 완전한 거짓말이다. 이 세상에는 이 두 지식 반 거짓말 온 거짓말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학교 가서 배우는 지식은 무슨 지식을 배웁니까? 주로 보면은 물리나 인문학도 배우지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전부 인간 지식인데 그 인간 지식은 모조리 전부다 반 거짓말 아니면 온 거짓말이니까 한 말로 말하면 전부 거짓말을 배우는 겁니다. 학교 다니며 배우는 거는 전부다 거짓말 배우는데 문제는 그것을 이제 배워가지고 그다음에 나오겠지만은 어쨌든 이 세상에는 두 지식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지식이다, 성경말씀. 하나는 인간지식이다, 인간지식은 그 뿌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가 하나님이 되려던 타락한 천사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뱀의 지식이고, 이 지식은 죽은 지식 죽이는 지식이고 속고 속이는 지식이고 전부다 반 거짓말 온 거짓말 거짓말뿐인 지식이다. 이렇게 정의를 딱 하고 그리고 나서 공부를 하고 해야되지 이걸 모른 상태로 하면은 전부다 여기 다 삼켜버리고 맙니다. 이거는 인식을 하고 확정을 해야 됩니다. 우리 머릿속에. 세상의 지식은 크게 둘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 지식과 하나는 인간 지식인데, 하나님의 지식은 이거는 어떤 지식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조의 능력 가진 이거는 절대 불변의 정확무오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만이 참 지식이고 산 지식이고 살리는 지식이고 인간을 구원하는 영원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지식. 성경 말씀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지식만이 참이고 완전한 사람을 살리는 유일한 지식이고 이것 외에 모든 지식은 전부 인간을 속고 속이고 죽고 죽이는 그 지식밖에 없다. 최종 끝에 가보면 그렇게 되어지는 겁니다. 이걸 확정을 짓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말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 말씀에 뿌리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이고, 인간 말의 뿌리는 인간이고 거슬러 올라가면 타락한 천사 마귀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 말과 하나님 말씀은 차원이 다른 겁니다. 인간 말은 이거는 변하지 않는 말이 없습니다. 다 아는 말이 없습니다. 꿩꼬리 철학이라 그럽니다. 완전한 지식이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전부다 이거는 진화적인 지식이고 갖다붙이는 지식이고, 옛날에 보면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돈이 없으니까 집을 넓히는데 전세방에 들어갔다가 그 집을 샀다가 그다음에 옆집 하나 사고 또 하나 사고 그래가지고 점점 틔워서 그래 점점 개축을 하고 증축을 하니까 집을 지어도 집 모양이 온전하지 않고, 다 헐어서 새로 지으면 반듯하게 되는데 지은데다가 또 붙이고 또 붙이고 또 붙이고 하니까 집모양이 얄구지게 그렇게 되는 것처럼, 인간 지식이란 것은 꼬라지가 전부다 그런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1세기에 몰랐던 것을, 1세기까지 깨달았던 걸 몰랐는데 1세기까지 깨달았단 걸 가지고 ‘어? 보니까 이런 것도 있네?’ 한 세기 더 지나가니까 거기다 보태지고. 2세기 몰랐던 것 3세기 가니까 또 보태지고, 4세기 가보니까 3세기 까지 알았던게 틀려 ‘지금까지 알았던게 틀렸네? 또 바뀌고 뒤집어지고’ 그래가지고 점점 갖다 덧붙이고 바꾸어지고 뒤집어지고 이리저리 바꾸어지고 그게 전부 인간지식 아닌가요? 000선생님 아닙니까? 제가 설명을 잘못 드린 겁니까? 지식 많으신 분이 생각해보시면 아시겠지요. 세상의 모든 인간지식은 다 그렇게 되어진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걸 이런 인간지식하고 하나님의 지식은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우리는 다 모릅니다. 저도 성경 이거 아는게 억만분지 일도 모릅니다. 그렇지만은 아는 것은 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완전자니까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다 계산된 그 속에서 나온 지식입니다. 하나님 전지한테서 나온 지식이니까 이건 전지입니다. 전능이고 완전이고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다 몰라도 부분적으로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 ‘왜 천국 갑니까?’ ‘모르겠어. 어쨌든 천국 간데.’ 틀리는 말입니까? 절대 불변의 진리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복 받는다’. 진리입니다. 이거는, 왜 복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성경에 보니까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복 받고 오래 산답니다. 이거는 절대 불변의 진리입니다. 전체를 맞춰야 되는 것도 있지만은 부분적으로 옳은 것은 성경 말씀은 말하면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그 사랑하면은 손해 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씩 갖다 붙여도 절대불변의 진리기 때문에 이거는 안 변합니다, 영원히 가도. 이거는 맞습니다. 그런데 인간 지식은 하나가 이게 옳은 줄 알았는데 다른게 오면은 다 틀려 버립니다. 열 가지 알았는데 스무 가지 나오면 열 가지 다 틀려버립니다. 인간 지식은 다 불완전한 겁니다. 오늘까지 알고 있던 인간 지식이 더 발달해서 어느 날 더 넓은 세계 나오면 어떻게 뒤집어질지 모릅니다. 어지간히 밝혀진 것도 있겠지만은. 그래서 첫째는 하나님 지식과 인간 지식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인식을 하고 확정짓는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제는 상대를, 인간지식은 그 위치가 뭐냐? 인간지식은 지식과 사람 둘을 놓고 보면은 사람은 주인이고 지식은 종입니다, 종. 도구입니다. 지식이란 것은 사람이 주인이 돼서 내가 써먹을 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종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내가 모시고 그 지식에 복종해야 될 것이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이게 두 번째입니다. 첫째는 인식을 가져서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지식은 완전히 다르다, 이걸 확실히 기억을 하고 확정을 하고 두 번째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은 내가 모시고 복종을 하되 인간 지식은 천하 없는 대박사 대대박사의 지식일지라도 그 지식은 내가 듣고 참고하고 써먹을 내가 주격되어 써먹을 하나의 참고할 지식이지 그 지식에 내가 목을 매고 거기 따라가는 종되는 그런게 할 것이 아니라 그말입니다. 그런데 현상세계는 주객이 전도되서 완전히 거꾸로 되어있는게 현상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참고고 인간지식에는 목을 매고 그러기 때문에 밥을 굶어도 집을 팔아서라도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라도 가정이 파탄이 나도 자식 공부는 시켜야지. 그게 세상 아닙니까? 배워야 되니까. 지식이 들어와야 되니까. 사람이란 것이 참 희안하지요. 지식은 사람을 만듭니다. 사람이 지식을 써먹어서, 사람이 주체가 되고 주격이 돼서 지식을 써먹고 이용하고 끌고 다녀야 되는데 그래서 필요 없으면 버리고 너무 무거우면 내려놓고 못쓰겠으면 갖다 내버리고 그렇게 되어야 되는데 거꾸로 되어가지고 거의 대부분에 모든 사람이 지식에게 끌려 다닙니다. 지식을 모시고 삽니다. 지식이란 것은 쉽게 말하면 뭡니까? ‘지’자가 무슨 ‘지’자입니까? ‘알 지(知)’자 ‘알 식(識)’자 안다는 뜻입니다. 몰랐을때는 사람이 모르면 모르는대로 그냥 겸손합니다. 그래서 바르게 무식한 사람은 겸손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잘못 무식한 사람은 교만합니다. 더 교만합니다. 옳게 무식한 사람은 심히 겸손합니다. 유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유식한 사람은 겸손합니다. 덜 된 유식한 사람은 교만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식을 많이 가지고 겸손한 사람은 거의 없다 할만큼 희귀합니다. 그래서 세상 지식 많이 가지고 신앙 좋은 사람을 그렇게 귀하게 보는 겁니다. 별로 없습니다. 거의 대개는 세상 지식이 들어가면 사람이 이상하게 변합니다. 모르면 그냥 하는데 알고 나니까, 하나 알고 둘 알고 셋 알고 알면은 사람이 자꾸 눈에 보이니까, 눈에 보이면 거기 대한 대처와 자기 반응과 태도가 달라질 수 밖에 없는게 사람입니다. 사람은 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걸 가지고 받아들이면서 지식을 받아가지고 이런 사실을 깨달아 그 모든 지식에 내가 주인이 돼서 내가 이용하고 지식에 붙들리지 않으면 좋겠는데 지식만 들어가면 사람이 전부다 변합니다. 다 같을 순 없지만은 그러기 때문에 적당히 공부하고 먹고 살 만큼 마련하고 직장 가지고 그렇게 하면 되고, 여반들은 적당히 공부하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아이 잘 기르고 남편 잘 섬기는 그게 백점입니다. 얼마전에도 이야기 했었는데, 어디 갔다 오면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세상적으로 공부 많이 한 그런것들, 특히 여반들 그거, 요긴하게 쓰면 요긴하게 씁니다. 그런데 대개는 아무리 많이 공부해봐야 그쪽으로 나가면 모르겠습니다만은 그게 아니면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거의 별로 보면은 쓸모가 별로 없습니다. 어느정도까지만 알고나면. 지혜라는 것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지만은 지혜와 지식은 틀리는 겁니다. 지식을 응용하는게 지혜이지요.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글 공부 지식이 없어도 요즘은 신문이나 인터넷 이런 것 통해서 배울 게 워낙 많으니까 그런 걸 바탕으로 지혜가 있으면 대대학을 열 개 나온 것 보다 고등학교만 딱 졸업해도 지혜 있는 사람들은 대학 열 개 졸업한 사람보다 더 지혜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두 번째, 이걸 인식하고 확정을 하고 실제 이렇게 상대를 해야 됩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식은 내가 모시고 복종할 지식입니다. 인간 지식은 내가 써먹어야 됩니다. 그 지식에 사람이 피동이 되고 그 지식 때문에 사람이 변해지고 흔들리면 그거는 지식에 벌써 종이 되어 진 겁니다. 차라리 없는 것이 낫지요. 주인이 종에게 끌려가면 그 종을 없애버려야 되지 종놈이 주인한테 복종을 해야 되지 종놈이 주인을 끌고가면은 그 종을 살려도 되겠습니까? 없애버려야 되지, 팔아버리든지 갖다버려야 되지요. 거의 대부분은 지식에 종이 다 됩니다. 예외가 별로 없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전혀 없지는 않지만은. 그래서 이렇게 주객이 전도된 것이 오늘 현상세계 세상은 전부다고 믿는 세계도 거의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가지고, 그다음 세 번째는 말씀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말씀에 붙들 이 말씀으로 살면은 이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신다. 요셉도 말씀이 지켰고 다니엘도 말씀이 지켰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전부다 말씀이 그들을 붙들고 지켰습니다. 말씀을 떠나면 그때부터 주님 떠납니다. 말씀 없는 주님은 없습니다. 말씀 떠났을때 주님이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말씀을 모시면 주님이 함께 있고 말씀을 떠나면 주님도 같이 떠나니까 혼자입니다. 혼자서 세상을 감당 못하고 위험 천만한 일입니다. 수호성입니다.
네 번째 말씀은 계약입니다. 이 계약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계약의 하나님인데,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변하지 않는 지식이 있을까?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 이야기도 했는데, 변하는 것, 한때는 굳게 서서 이게 전부다. 신앙도 그렇고 이게 전부다 그랬는데 그것이 세월 속에 다 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월을 지나봐야 됩니다. 이십대, 삼십대까지 나는 안 변합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이 복음이 전부입니다. 이 노선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붙들고 있는데, 30대까지 그러는데 우리 공회 교역자님들 교인들 수만명이 수천명 수만명 교역자들 수백명이 지금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했습니다. 목숨 걸고 이 복음 지킵니다. 이 노선이 전부입니다. 그분들 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니까 안 변한 사람은 거의 없다 할 만큼 다 변해버립니다. 변하는 줄 알고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고 싶어 변하지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큰소리 함부로 치면 안되는 겁니다. 세월이 지나가봐야 되고 세상에 안 변하는게 없습니다. 그러나 참 복음은, 참 신앙의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계약은 불변입니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관이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지식도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권력도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 변합니다. 오로지 이 말씀만이 변하지 않습니다. 계약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람 힘으로 못 지키는데, 자기 할 수 있는 것만 다하면 됩니다. 달란트 비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달란트 비유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는 잘난 사람보다 많이 받아 가진 사람보다 적게 가진 사람이 유익입니다. 한달에 백 억 버는 사람이 십일조를 내면 얼마 넣어야 됩니까? 한달에 십 억을 해야 됩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사업하는 분들 십일조 제대로 하는 분들 거의 없을걸요? 못 합니다. 해야 됩니다. 성경적으로. 한달에 백 억 벌면 한 달에 십 억을 하는게 성경입니다. 안하면 그거는 도둑질입니다. 성경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 달에 백만원 받는 사람은 십만원 하면 됩니다. 그거는 쉽습니다. 누구나 하면 됩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많이 거둡니다. 많이 내놔야 됩니다. 자기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조건으로 공부를 못해서 못 나서 부족해서 이거는 하나님 앞에 핑계거리도 안되고 조건적으로 전혀 분리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다 하면 되니까 오히려 쉽습니다. 많이 받아 가지고 잘난 사람은 그만큼 어렵고 많이 해야 되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계산하시는 것은 당신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주신만큼 거둠으로 양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몇퍼센트 분량 그걸로 따지는 것이지. 다 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는 깨달음이 은혜다. 다섯가지 깨달음 기억을 하고 이 말씀을 기초로 닦은 걸로 기억을 하면서 이 말씀을 가지고 집회 가서 또 집에 계시는 분들은 설교록 가지고 혹은 홈페이지 들어가셔서 읽어보고 좀 은혜를 받도록 그렇게 하시면 좋겠습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특수인임을 기억하십시다. 일반사람과 틀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들 천국 백성입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특수은혜를 받아야 삽니다. 특수은혜는 여러 가지 있지만은 말씀 깨달음이 은혜입니다. 다섯가지 깨달음을 생각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