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0-주후(요11:25-27)
부활2014-04-21조회 469추천 33
본문: 요11:25-27
제목: 부활
1.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
-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
-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
- 하나님이 원동된 생활은 근본 중심과 방향이 하나님 관계로
- 예배와 성경, 기도 생활은 기본적으로 충실할 수밖에 없는 것
2. 도성인신의 은혜
-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은 가견적인 절정
- 죽으심과 부활에 못지 않은 큰 희생
- 도성인신의 이유는 사람이라야 사람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
- 하나님이 함께하셔야 모든 택자의 모든 죄를 대형할 수 있기 때문
3. 죽으심의 대속
- 죄 불의 불목의 대형의 사죄
- 대신 행하신 대행의 칭의
- 죽기까지 화친하신 대화친의 생명
- 죽으심의 공로로 우리에게 주신 생명줄
4. 부활의 공로
- 죽으심만 있고 부활이 없었다면
- 갓난아기가 태어난 갓태어난 상태로 있는 것으로 비유
- 부활의 공로는 죽으심의 공로를 바탕으로 실제를 만들어 가게 하신 것
- 죽으심의 공로와 부활의 공로는 비중이 같다고 보는 것
- 부활의 공로로 주신 실제는 부활, 능력, 승리의 실제
5. 부활과 주일
-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 주일은 우리가 부활하는 날
- 생명과 능력과 승리의 실제를 받는 날
- 부활은 믿음으로 받는 것, 믿음은 순종
-------------------------------------------------------
(설교원문)
요한복음 11:25-27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우리 성도의 관계라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다. 또 신앙생활은 천국을 준비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의 방편, 구원을 이루어가는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 순종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성도와의 관계, 이 관계를 원래 본지위를 회복시키는 것이고 이 관계를 바로 정립해나가는 회복해나가는 이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힘쓸 신앙생활에 가장 많이 힘쓸 것은 하나님을 아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누군지, 하나님을 하나님이 스스로 당신을 소개해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 속에 기록된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끊임없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는 배우고 공부하고 또 하나님을 연구하고 하나님과 자기 관계를 늘 살피면서 하나님과 나 자신의 관계를 바로 정립해나가는 이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생활입니다. 그다음으로는 하늘나라가 신앙생활 해나가는 방향이고 소망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하늘에 두고 이땅에 사는 우리들의 모든 생활이 되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 모든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외형으로 나타나는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생활이고, 예배중에는 주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고 또 여러 정해놓은 예배시간을 바로 지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예배시간을 바로 지키는 것은 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 또 예배시간을 엄수하는 것, 예배시간에 말씀과 성화를 받는 것, 그런데 그 모든 외형의 예배생활을 해나가는 그 속에 깊은 중심에 모든 원동은 하나님과 자기 관계로 인해서 되어져야 되는 겁니다. 비유가 같을 순 없지만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제대로된, 말하자면은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그리 인식하는 대기업이나 좋은 회사나 또 공기업이나 공무원이나 이런 곳에 취직을 하려면 대학을 졸업을 해야되고 대학도 괜찮은 명문대학을 졸업을 해서 거기서 잘 배워야 되는 것으로 그리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좋은 회사에 취직할 수 있는 명문대학에 들어가기위해서 고등학교 들어가면 그 사실을 알고 거기 가치두는 부모와 가정과 그 학생은 그 집에 들어가면 모든 분위기가 모든 가정에 가사에 모든 일정이, 가족들의 모든 생활의 중심과 방향이 그 원동이 그 아들이나 딸 그 학생에 대학교 입학 시험에 맞춰져 있습니다. 거기 따라서 식단도 그리 정하고 가정 분위기도 그리 정하고 가족의 행사 일정도 거기 맞춰서 하고, 또 모든 생각이나 인식들도 거기서 다 나오는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게 그 가정을, 가족들을 끌고 가는 원동의 힘이 되는 그런 경우가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특히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있는 집에는 더 그러합니다. 집안에 가장이 중병이 들어서 치료중이면 그 치료기간이 오래 걸린다던지 하면 모든 가족들의 생활에 원동과 방향은 그 가장의 병을 치료하는 거기로 다 맞추어집니다. 경제계산도, 또 일하는 것도 시간도 식단도 그리 다 맞춰서 거기서 나와가지고 그리로 가는 것이 생활이 되어지는 겁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고 그 인식이란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 가치관 그런 것이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생활이 신앙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믿는 사람의 생활은 신앙생활이고, 그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자기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바로 되어야 되겠고,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야 되겠고 하나님 앞에 잘 보여야 되겠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겠고, 이것이 자기 생활이 되어있으면 바로 되어있으면 그 사람에 그 가정에 모든 생활의 초점은 1차적으로 예배에 맞춰지게 되어있습니다. 예배시간에, 예배 참석에, 예배에 모든 초점이 다 기울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생활 중심, 교회 중심으로 그리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배 시간을 빠질 수가 없고 예배 시간에 지각을 하는 것이 이상하고 안 하는 것이 정상이고 안하려고 굉장히 애를 쓰고 예배 시간에 지각하면 큰 죄를 지은 것 같고 예배 빠지고 나면 더 큰 죄를 지은 것처럼 그런 마음이 들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하나님과 자기 관계에서 그리 되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 읽는 생활이 자기 중요한 생활중에 하나, 일과중에 하나가 되게 됩니다. 성경을 안 읽을 수가 없게 되고 기도를 안할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아이들 말인데, 필수가 있고 선택이 있고 그런 말이 있지요. 주로 입학시험 같을때 필수과목 선택과목 이런게 있습니다. 필수라는 것은 반드시 해야되는 것이고 선택이라 말은 자기가 고른다 그 뜻입니다. 신앙생활을 바로 하면 하나님과 자기 관계가 신앙생활이고 이게 모든 생활의 전부기 때문에 이 생활이 자기 속에 인식으로 들어있으면 그에 모든 생활은 예배가 전부고 성경이 전부고 기도가 전부고 신앙생활이 전부가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거기 맞춰서 다른 모든 생활은 조력으로 보조적으로 그리 따라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인식이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일은 말할 것 없고 일반예배시간에 사람이 직장을 가지고 사업을 하고, 하다보면은 실수도 하게 되어있고 지각도 하게 되어있고 또 원치 않게 빠질때도 있고 그리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속에 중심은 불이 타는 겁니다. 견디지 못합니다, 그럴때. 그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믿는 사람이 예배생활, 성경 읽는 생활, 기도하는 생활이 자기 모든 생활의 중심이 되어있지 않으면 자기를 한번 신중하게 돌아봐야 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자기 관계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생활이 예배생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옛날에, 요즘도 그렇지요. 지금 이번에 배 사고 났을때, 정부에서 대처하는 걸 두고 말들이 많지요. 우리나라는 대통령 혼자 뿐이냐. 유족들이 그렇게 애타는 심정으로 뭐 하나 설치해달라고 노래를 불러도 공무원들이 꼼짝도 안하다가 대통령이 와서 말한마디 하니까 10분만에 갖다놓더라던가요? 그게 모두 다 대통령 눈치만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공무원들. 그래서 세상말에 공무원은 뭐가 없다 그럽니까?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 그럽니다. 다 그런건 아니겠지요. 그런 말을 씁니다. 자기 주관이 없고 판단이 없고 복지부동입니다. 벌로 나섰다가 괜히 밑보이면 자기만 손해니까. 수백명이 목숨이 왔다갔다하는데 구조하러 갑시다 하면 거기 가서, 가는 거야 가지만은 가서 구조하는데 위험도 하고 장비도 들고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가는데 그 비용 누가 줄건데? 안 따질수가 없지요 현실로. 그러니까 우리나라 인식이나 체제가 바로 되었으면 그런 인식이 생겨질 수가 없지요. 사람 목숨이 우선인데 일단 살려놓고 보자 그리 되어야 되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인식이나 구조적으로 아직까지 그렇게 되어있지 않으니까 그런 문제가 생겨지는 겁니다. 그게 과거에 수없이 겪어봤거든요? 죽어가는 목숨 살리기 위해서 목숨 받쳐서 자기 전부 다 받쳐서 해결해놓고 나면, 뒤에가면 자기만 손해 보는 겁니다. 아무도 보상을 안해주거든요. 정부에서도 나몰라라 하는게 흔한거리고. 그러니까 그런것이 오래토록 와놓으니까 막상 그런일 닥치면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아직까지 후진국이라는 말이 안나올 수가 없는 거지요. 세상 말이지만은. 사람들의 인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 생활이, 신앙생활 인식이 바로 되어져있으면 그 사람의 생활의 모든 중심은 어디 간다고요? 예배가 생활중심에 전부입니다. 신앙생활에 전부고 교회 생활에 전부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은 밥을 굶어도 성경 읽어야 되고 또 잠을 못자도 기도는 하게 되어있습니다. 육신이 약해서 못하면 양심이 고통 받고 괴로워서 못 견디게 되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빠져도 아무런 감각이 없고 지각해도 아무 느낌이 없고, 이런일이 되면은 그 속에 자기 신앙생활에 근본적인 면을 돌아봐야 됩니다. 내 신앙이 지금 과연 바로 되어있느냐. 이름만 신앙이지 껍데기 아니냐. 심각하게 돌아봐야 됩니다. 주어진 형편이 그리 되는 것 하고 자기 자신의 기본 인식이 되는 것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람 되셨고,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시기 위함이고, 우리를 대신하신 것은 우리들의 모든 연약함을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알고계시기 때문에 사람이 어떨때 힘들고 어떨때 괴롭고 고통스럽고 연약하고 아프고 넘어지는 것을 하나님은 너무 너무 잘 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약해서 넘어지는 것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지 않습니다. 하려고 하는데 안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인식이 안되었으면 그거는 하나님 앞에 진노거리가 되는 겁니다. 심각하게 한번 돌아봐야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면, 바로 믿는다면 예배 태도도 달라지고 모든 생각이나 인식이 기본적으로 틀려지게 되어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하고 동시에 부활에 대해서, 부활이라 말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고 죽었다는 말은 산 자였다는 말이고, 그러면 주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살아계셨고, 그 사시는 생애 되기 전에 하나님인데 사람이 되어오신 도성인신이 있었다는 말인데, 이 도성인신에 대해서 이것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 된다는 겁니다.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다, 그러면 하나님을 연구해서 아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냐 이걸 알면 아는만큼 하나님이 사람을 입고 오셨다는 이 사실은 우리가 믿기 어려운 일이고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고 이거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은혜라 그리 안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에,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공로는 가견적인 눈에 보이는 고난이고 죽으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가 아파본 사람은 이 아픈 사람의 심정을 알고 또 뼈가 아파본 사람은 뼈가 얼마나 아픈지 그 심정을 안다, 동병상련 그래서 말하지 않습니까? 겪어본 사람이 아는 겁니다. 사람이 영의 세계는 몰라도 마음과 몸의 고통은 모든 사람이 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까 예수님이 당하신 눈에 보이는 생애와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혔다, 손에 발에 못을 박았으니까 물과 피를 흘렸으니까 얼마나 아팠을까. 살을 뚫고 또 신경을 뚫고 뼈를 부수면서 그리 못이 박혔으니까 얼마나 아팠을까. 가시 면류관을 썼으니까, 온 머리에 가시를 썼으니까 얼마나 아팠을까. 침을 뱉으니까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이거는 사람들이 느껴서 아는데, 이거는 외부로 드러나는 것은 알고보면은 별 것 아닙니다. 대단히 좀 조심스런 말이지만은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보다 몇 배 몇십배 더 고통스럽게 순교한 그런 성도들 역사에 꽉 찼습니다. 안 믿는 사람도 불로 지지고 껍데기를 벗겨내고 눈알을 뽑는 그런게 예사입니다. 자기 정치 야망을 위해서 성공 위해서 그리 흔하게 많이 당합니다. 우리는 못해봤지만은 그렇게 당하는 사람 많습니다. 예수님의 외부적인 고난 이거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닙니다. 그속에 내면으로 들어가면 오전에 말씀을 드린대로, 그 고난 외부적인 고난속에 거기에 모든 택자 전부의 죄를 다 짊어지고 있는 그 중량, 그중에서 당신이 말한마디만 실수하면 ‘아야’ 하는 비명만 한번 지르면 그 모든게 다 끝나버리는, 하나님의 모든 구원역사가 절단이 나버리고 뜻이 다 깨지고 모든 인간 구원이 다 절단 나버리니까 그 무게라는 것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그런 무게입니다. 그것이 더 큰 것이고 그 안에 들어가면 그런 모든 걸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이거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이 희생은 알 수 있고 느낄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도성인신의 희생이란 것은 형언하기 어려운 그런 희생이라.
이걸 우리가 자꾸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기도라는 것은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고 신앙생활은 주일을 지키고 성경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연보하는 것도 신앙생활인데 이거는 껍데기 외부모습이고 진짜 신앙은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고 연구해서 알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높으신 분인지 존귀하신 분인지 그분을 점점 성경 통해서 배워서 알아가고 실감해가고 그래서 그 분 앞에 고개 들 수 없는 설 수 없는 자신이 되어져가는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이게 되고나면 외부적인 모습은 저절로 되는 겁니다, 저절로. 하지마라고 그래도 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무서운 것을 보고나면은 그 무서운 것이 잔상이 머릿속에 오래토록 남아서 그 영향이 계속 가게 되어있습니다. 필연적인거지 않습니까? 불을 떼면 연기는 나는 겁니다. 이것처럼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과 자기 관계가 바로 되고 나면 외부적인 신앙생활은 필연적으로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힘쓸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겁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제가 우리 교회 15년 동안 설교하면서 가장 많이 설교한 것 중에 하나는 ‘신앙은 자기를 고치는 것이다, 남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나를 고치는게 신앙이다’ 거기에 모든 것이 다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섭리역사의 방향은 전부 나한테 다 기울어져 있습니다. 내 주변에 모든 환경은 내 현실이고 그 현실을 다스리고 지키라는 것은 그 현실, 내 주변에 둘러싼 현실, 그들을 내가 간섭하고 그들 어떻게 하라는 말 아닙니다. 그들과 관계된 나 자신이 그들에게 피동되거나 영향받지 않는 자기를 만들어가라는 뜻입니다. 이걸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섭리를 다 역사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걸 가장 많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한테 모든 원인이 다있다. 그러니까 자기만 고치면 거기따라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환경은 다 바꿔 주시는 겁니다. 부모 자녀관계에서 자녀 문제는 전부 부모한테 매여있는데, 신앙이 있는 부모라면 신앙있는 부모에 따라서 자녀는 필연적으로 따라갑니다. 되게 되어있고. 신앙없는 부모가 신앙있는 자녀라면, 신앙없는 부모는 신앙있는 자녀의 어떠함에 따라서 그 부모님은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부부는 더 합니다. 한 몸입니다. 아내의 모든 문제는 신앙있는 남편에게 매였고, 남편의 모든 문제는 신앙있는 아내에게 다 달렸습니다.
이게 성경인데, 가르치는 전분데,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가 남을 대접해라. 이것이 율법이고 선지자다. 이제 말씀드린 대로 모든 것은 다 자기한테 달렸다 그 뜻입니다. 이게 성경이 가르치는 전부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 전부고 온 세계를 만들고 크고 작은 모든 걸 섭리하시는 하나님 섭리역사에 방향입니다. 이걸 성경대로 바로 알고 여기에 착안을 해서 주력을 해나가고 여기 힘을 쓰면 그게 되어진만큼 나와 직접 간접 관련된 객관 역사는 하나님이 다 변화시켜 주시는데, 문제는 그렇게 하려하니까 내 생각에 내 판단에 내가 보기에 내 주관에 도무지 아니거든요. 안 맞거든요. 그런걸 가리켜 주관이라 그럽니다. 내 생각에, 내가 보기에, 내가 판단할 때, 모든 사람들이 볼때 아니다 그렇게 보여집니다. 그 아닌것이 성경이 아니라면 아닌 것인데 자기 볼때 아닌 것이 성경과 다르면 자기를 고치는게 신앙입니다. 바꿔나가는게. 내가 보기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 비유가 그걸 가르치지 않습니까? 배가 고파서 주님이 갔을때 무화과 열매가 없다고 저주헀습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다. 무화과 열매는 여름 되야 열것이고 가을 가까이 되어야 익습니다. 그런데 5월달 이때가서, 지금 좀 있으면 무화과 나무 이파리 새파랗게 돋아오겠지요. 그때가서 보니까 잎사귀는 넓고 큰데 열매가 없다. 저주 받아라. 주님이 잘못이지 무화과 나무 잘못입니까? 하나님의 창조가 그렇게 되어있는 건데. 그런데 주님이 저주 했는데 그 저주가 잘못됐으면 주님은 우리 구주가 안되지요. 무화과의 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게 비유입니다. 무화과는 뭘 비유한다고요? 우리 믿는 사람을 나타내는 겁니다. 무화과의 때, 형편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아직 준비가 안됐습니다. 니 준비는 상관이 없다. 내 형편이 이러합니다. 그 형편은 해당이 없다, 상관이 없다. 구주가 찾아오셨으면 그분의 뜻에 무조건 맞추는 겁니다. 그게 신앙이고 성경입니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볼때 아닌데, 너가 전능자냐? 전지자냐? 니가 완전자 하나님이냐? 세상 인간관계는 자기 주장을 다 내세울 수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이 그렇습니까? 내 생각은 아닙니다. 천명 생각이 그렇습니까? 나는 안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공회 진리 전원일치라는 법이 거기 다 적용이 되는 건데, 그러니까 교인 999명이 다 찬성하는데 한사람이 나는 반대입니다.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면 강제로 다수결 하는 것이 아니고 그 한사람을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하고 이해를 시켜서 기다리는 겁니다. 그 자유성을 꺽는게 아니다 그말입니다. 진리전원일치라는 거기에 핵심은 인간의 자유성입니다. 그 자유의지를 꺽지말고 그것을 권면하고 설명하고 설득해서 기다려서 감동시켜서 돌아오게 하라는 겁니다. 그거를 꺽어서 하지 않는다는게 진리전원 일치라는 그 제도에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인간관계는 그렇습니다. 사람끼리 모인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천명 만명 억만명 전인류라도 해당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안 맞으면 전인류도 홍수로 다 멸해버리는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맞느냐 아니냐 그걸 봐야되지, 내 생각에 내 경험에 내 판단에 내가 볼때 내 현실에 그거는 자기 주관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동감이 되십니까? 이것이 설교로는 논리로 들으면 성경 논리가 그러니까 그렇지만은 막상 이런 현실이 딱 닥치면 이렇게 맞추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백에 구십구, 천에 구백구십구는 다 이런저런, 그 이론은 그렇지만은 실제가 그렇습니까?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맞춰나가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이고 그렇게 해나가면 내 환경은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백목사님 시 많이 인용했지요. ‘폭우야 부어라 대해는 굶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쏟아져도 태평양 바다는 표시가 안납니다. ‘폭풍아 불어라 노암은 웃는다’. 끄떡도 안합니다. 아무리 태풍이 불어도 그냥 가벼운 것 어지간한게 날아가지 집채만한 바위는 꼼짝도 안합니다. 끄떡도 안합니다. ‘흑암아 외쳐라 반딧불은 춤춘다’. 온 세상이 어두워도 반딧불은 어두움을 헤쳐나가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말하는 겁니다. 나 자신이 그렇게 변화되어있으면 환경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되어있으면 세상이 그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을 만드시는게 하나님의 뜻이다. 제가 15년동안 설교하면서 가장 많이 설교한 것이 이걸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다 자기 안고치고 남한테 다 돌립니다. 그게 가장 큰 원인입니다. 대개 다 그렇습니다. 나를 고치는 것. 같은 비율로 많이 말씀드린 것이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도 수백번 수천번 말씀을 드렸을 겁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호랑이를 알고나면, 하룻강아지는 범을 모르니까 벌로 설칩니다. 알고나면 호랑이 말 들으면 머리가 쭈뼛하고 호랑이 나타났다 그러면 몸이 사려지고 조심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젊을때는 경험이 부족하니까 뭐든지 적극적이고 활동성이고 쉽게 움직입니다.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사십이 되고 오십이 되고 육십이 점점 되어가면 인생 경험이 많습니다. 마구 움직이다가 여기 깨져보고 저기 부딪혀보고 이것도 부러져보고 저것도 다쳐보고 온갖 경험이 있으니까 모든 면이 다 조심스럽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안될 수가 없습니다. 나이가 오십 육십이 되도 마구 벌로 설치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철이 덜 든 사람이라 그리 보지요. 일반적으로 보면. 그러기 때문에 나이가 점점 들어가고 세상 경험이 많아지면 그 사람의 사람 자체가 무거워집니다. 신중해집니다. 중량이 무거워져서 말도 함부로 안합니다. 조심하고 모든 행동을 신중히 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나면 사람이, 그 하나님 아는 사람의 인식과 생활은 틀린다 그말이지요 안믿는 사람하고. 그러니까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과 자기 관계가 바로 정립되 나가는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걸 바로 알고나면 예배시간은 하나님 섬기는 생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겁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자기 관계를 점점 돈독히 만들어가는 겁니다. 이 생활에 주력 안할 수가 없고 이런 것이 자기 생활에 중심이 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동시에 이런 교리적인 말씀, 도성인신 이 말씀을 들을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그럴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란 것을 아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넓게 전체 세밀히 알수록 이런 말씀을 들을때 눌릴수밖에 없고 감격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큰분이, 그 높은 분이, 나라 국민이 3백명이나 바다에 빠져 실종된 상태인데, 대통령이 거기 가서 유족들 위로하는 건 당연하지요. 그런데 갔다고 해서 그게 마치 큰 일처럼 잘했다, (못했다는 사람도 있지만은) 그거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안가는 것이 비정상일 것이고 안 돌아보는 것이 비정상, 물론 여러 가지 생각할수 있겠지만은. 그런데 나라의 대통령이, 그래도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합디다. 나라의 대통령은 최고 통치자인데 그 통치자가 일일이 그런데 다니면 말하자면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쓰면 밑에 사람 일을 못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 대통령이란 것은 무거워야 된다 그말이지요. 쉽게 움직이면 안된다 그말이지요. 전체를 다 봐야 되는거니까. 대통령이라는 한 나라, 우리 나라가 경제대국이라 그래도 영토로 말하면 지구에 손톱만한 작은 나라인데 그 나라 대통령 그래봐야 5년인데, 그 대통령도 권세라고 거동도 함부로 못한다 그럽니다. 말을 ‘친림’이라던가요, 친림? 몸소 임하셨다. 친림이라 한답니다. 대통령 어른께서 직접 오셨다. 참 높지요. 그런데 5년짜리 한나라 작은나라 대통령이 그런데 간 것도 그렇게 뉴스거리가 되고 말거리가 되는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건 이거는 우리가 바로 알고 나면 기절초풍을 할 일이고, 있을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거는 도무지.
이게 주님의 도성인신에, 그래서 이것이 바로 대속역사에 우리들이 사람이 알 수 있는 가시적인 출발 그전에 내면적으로 있지만은 직접적인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대속역사에 출발이 바로 도성인신입니다. 이 희생은 말할 수 없는 무한한 희생입니다. 그 이유가 몇가지라 그랬습니까, 오전에? 하나님이 사람되신 그 이유가 첫째가 뭐였습니까? 왜 그렇게 큰 희생역사를 했어야 되는가? 첫째 이유가 뭡니까? 사람이라야 사람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되어야만 사람을 구원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사람으로 낮아지신 겁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신인양성일위가 되신 것은 하나님이 동참을 해야 택자 전부의 죄를 전부다 대속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두가지 이유 때문에 신인양성일위로 도성인신 하셨다 이것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아는데서 연구해보고 좀 깊이 생각해봐야 됩니다. 이분이 사람되셔 가지고 33년 4개월 사시고 마지막에 절정으로 죽으심의 대속이 있었습니다. 죽으심의 대속은 도성인신도 대속이고 어떤 면에서 준비지만은 여전히 대속이고, 직접적인 것은 오신 그분이 사신 33년 4개월 이 생애가 대속의 생애고, 마지막 십자가 못박혀 죽으심이 마무리 절정이고 죽으심까지에. 나타난 마무리 절정입니다.
대속의 생애와 죽으심까지의 그 역사가 세가지 역사였다 그랬지요. 하나는 죽으심이란 것은 세가지 때문에 죽으셨다. 대형입니다. 대신 형벌 받아 죽으셨는데 형벌받아 죽으신 그 죗값이 세가지라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 때문에, 그 죄가 과거도 많았고 지금도 많고 앞으로도 없으면 좋겠지만은 많을 겁니다. 그 죄의 형벌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한 지옥이 면해진 동시에 주님이 그 죄 형벌을 받아서 지옥의 죗값을 다 대신 대형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게 된 것이 또 무엇입니까? 주님의 대형의 공로 때문에 우리에게 오게 된 것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면했고, 또 하나는 뭡니까? 대형의 공로 때문에 우리가 받은 특권이 회개라는 겁니다, 회개. 안믿는 사람에게는 회개라는 것이 없습니다. 대속을 입은 사람은, 대속을 입지 못한 사람은 원죄로 인해서 영원한 지옥입니다. 그들은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회개라는 게. 이 대형의 사죄 공로를 입은 우리는 죄를 하루에 일흔번씩 일곱 번 사백구십번, 그말은 수를 헬 수 없습니다. 살아생전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주님 대형으로 형벌을 다 멸했기 때문에 또다시 그 자리에서 회개할 수 있고 의인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 주님 대형의 공로입니다. 그 대형의 공로 때문에 우리는 회개의 특권을 받은 겁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생전 수도없이 많은 기회를 받은 것이 대형의 공로다 그말입니다. 이 공로 받지 못한 사람들은 한번으로 끝났습니다. 두 번 기회가 없습니다. 사람이 대학 입시도 그렇고 고시 공부도 그렇고, 한번 딱 끝나버리면 그걸로 끝인데, 시험의 기회가 10번 있으면 한번 못했으면 아직 남아있다, 내년에 또 하지, 못 했으면 또하지 또 하지, 그래가지고 할 수있는 기회 다 지나가서 못하지 기회가 없어 못하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기회가 주어지는 것처럼 말하자면 주님 대형의 공로는 우리에게 무한은 아니지만은 수를 헬 수 없을만큼 많은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 대형의 은혜고 공로입니다. 이거 굉장히 크게 따져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회개할 수 있고 어디까지 깊은 속에 빠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것이 주님의 회개, 생명줄입니다. 생명줄에 매여있어서 한번 떨어지면 돌아올 수 없는 억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불구덩이로 떨어지는데 이게 불택자들이고 대형의 공로 입지 못한 사람들인데 우리는 생명줄에 딱 매여있으니까 떨어지면 그 줄이 땡겨올리고 또 세워놓고, 또 떨어지면 또 그 줄이 땡겨올라서 또 세워놓고. 그래서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생명줄에 세워놓고 생명길을 걸어가도록 만들어주신것이 주님의 대형의 공로. 내 모든 죄를 다 대신 짊어지고 그분이 죽으셨다. 이 공로입니다, 죽으심.
그리고 나에게 없는, 행치 못한 대행의 칭의입니다. 나는 행하지 못했는데, 의인이 아닌데. 주님이 내 대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심으로 우리를 의인 만들어주셔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입은 의인이 됐습니다. 이번 집회말씀 중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미리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바로 이 대형 대행 대화친으로 만들어주신 대속을 말합니다. 입혀주신. 하나님의 의. 우리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의인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겁니다. 의에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다 가게 되어있습니다. 뿌리쳐서 못 받지, 이걸 받을 수 있는 자격은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죽으심으로 만드신 의.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되어서 영원한 사망인데, 대화친으로, 십자가로 이 둘을 한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친시켜 주셨고, 하나님과 화친이란 것은 기본으로 연결이고 생명입니다. 그래서 대화친의 생명을 주신 이 세가지 역사가 주님의 죽으심의 대속입니다. 죽으심으로 대형 대행 대화친 이게 죽으심의 공로입니다. 도성인신의 대속의 공로 은혜, 죽으심의 공로 은혜 깊이 생각해봐야 됩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아무리 커도 여기까지만 되고 끝났으면, 이게 설교록에도 이와 비슷한 비유가 나오는데 꼭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낳았으니까, 임금님이 아이를 낳았음은 임금님이 왕자를 낳았으니까 그 아이의 신분은 왕자입니다. 정상으로 났으니까 사람이 돼서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코도 있고 다 반듯하게 다 붙어있습니다. 내장도 다 있고 마음도 다있고 다 있습니다. 생명도 살아있어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대로 있으면 막 태어난 그 아이, 생명도 있고 모든게 다 가지고 있고 왕자로 있고 신분도 있고 고귀한 그런 신분인데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냥 그대로 계속 가면은 그 아이는 아무데도 쓸데가 없습니다. 생명이 분명히 있습니다. 생명 가진 아이입니다. 임금님의 아들 왕자입니다.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임금노릇하고 쓸모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아이가 자라가야 됩니다. 자라는 것은 무엇이 자라는 겁니다. 그의 심신의 기능이, 보고 눈도 떠야 되고 귀도 열려야 되고 말도 할 줄 알아야 되고 이게 되었으면 그다음에는 보고 듣고 배워서 아는 지식이 자꾸 많아져야 되고 손으로 익힐 기능은 손으로 익히고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또 물건을 쓸 줄도 알고 생각도 할 줄 알고, 이런 사람으로 점점 자라가야 됩니다. 자라가지 아니하고 난 그대로 있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말입니다. 짐덩어리만 되지. 주님의 죽으심의 대속이 말하자면은 여기까지가 아니겠는가? 막 태어나서 생명도 가졌고 관계도 다되어있고 고귀한 신분으로 다 되어있는데, 죽으심의 대속까지만 되어있으면 거기까지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런데 거기까지로서는 미완성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산소망을 주셨으니 그 산소망이 바로 그래 태어난 아기가, 생명 가진 아기가 보고 듣고 먹고 입고 마시고 배우고 점점 자라서 기능마련해서 얼마든지 탁월한 실력가진 사람으로 자라갈 수 있는 모든 기반을 다 닦아놓은 것이 주님의 부활이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낡아지지 아니하는 기업을 입게 하셨다, 이게 부활의 공로라.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공로는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를 부활시키는 우리를 살리는 우리의 심신과 그 심신에 속한 모든 기능과 필요한 모든 소유와 자기 활동무대를 영원한 자기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이것을 실제 주신, 부활의 실제를 주신 것이 주님의 부활이고 두 번째는, 이 부활의 실제를 위해서 수많은 전투 투쟁 이것이 있는데, 그 전투 투쟁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 주님의 부활이고, 능력 주신 것, 능력의 실제를 주신게 부활이고, 세 번째는 승리를 주신 것이 부활이다. 실제 승리할 수 있는 승리의 실제를 주신 것이 부활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죽으심의 대속은 기본구원에 속한 것이고 부활의 대속은 기본구원에 속한 것 하고 건설구원에 속한 것이 같이 있지 않는가? 그러기 때문에 부활에 속한것은 말하자면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그 부활의 공로를 근거 삼고 바탕 삼고 힘 입어서 내가 부활시켜 나가야 되는 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부활을 하셨으니까 힘 안써도 그냥 된다는게 아닙니다. 부활의 공로가 없으면 주님의 죽으심의 공로가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은 한번 범죄하므로 원죄로 영원한 지옥이고, 주님의 죽으심의 대속의 공로를 받은 사람은 그 공로를 힘입어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수많은 회개의 기회, 구원의 기회를 받은 자격을 받은 것이고, 그러나 부활이 없다면 그 자격까지만 받아놓지 실제는 할 수 없는 것인데, 부활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실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구비시켜 주셨다 그말입니다. 이게 부활의 공로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으심의 공로, 도성인신이 아무리 크고 죽으심의 공로가 아무리 커도 주님 부활이 없었다면 이 대속은 반토막이고 미완성이고 그거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전체를 두고 보면. 무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죽으심의 공로까지가 반이고 부활의 공로가 반이고 비중이 같고, 동시 희생도 같다 그렇게 우리가 배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지키는 주일이라는 이 날은 첫째,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고, 두 번째는 그 부활을 힘입어서 우리들이 부활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부활한다 그 말은 심신은 죽었다가 주님 재림후에 그때 부활하지만은 지금 우리 부활은 심신이 아니고 심신의 모든 기능들, 우리 모든 소유들, 천국에 쓰여질 우리 모든 활동 무대들, 이런 것을 지금 살리지 않으면 기회 지나가면 못 살리는 겁니다. 어제 이말씀 준비위해서 백목사님 설교를 재독을 하면서, 이게 무슨 뜻인가? 한시간짜리 설교를 귀에 꽂고 재독을 하는데, 지금 부활을 해야 된다는 말씀을 계속하는데 무슨 뜻인지 못알아들었는데, 마지막 끝에 가서 그 ‘부활이 바로 성화다.’ 그 말씀을 딱 들을때 해결이 되어졌습니다. 그렇구나. 표현을 부활로 해도 그게 바로 살아 부활하는건데 우리의 성화되는 그것이 막바로 부활하는 것이고 말하자면 다 죽은 것인데 다시 살려내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그 살리는 기회는 한번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살았는데 살릴 기회를 얼마나 놓쳤고, 살린 것이 얼마나 되는지. 우리 생활에서 오늘까지 십년 이십년, 좀 생각있는 분들은 아마 이십대까지도 아직까지, 나름대로는 있지만은 아직까지 좀 철이 덜 들었을 것이고, 삼십대라면 조금 나을 것이고, 사십대가 되면 제법 생각이 많을 것이고, 오십대가 되면 생각이 더 넓어질 것이고, 그런데 사십 오십이 됐으면, 오십이 됐으면 살아온 날이 살 날보다 많으니까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지나간 세월 돌이켜보고 부활시켜 살릴 수 있는 내 심신의 기능과 그 나라에 가서 쓸 것이 영원토록 쓸 것이 많을 것인데 살린 것은 얼마나 되며 그냥 다 불태워 버린 것은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참 잘 사신 분들은 참 감사하고 가면 갈수록 더 기쁘고 그날이 기다려질 것이고 부활의 날이, 이게 없는 사람은 가면 갈수록 탄식이 되고 두려워질 것이고 그리 되지 않겠습니까? 살리는 겁니다. 지금 살려야 됩니다. 우리의 모든 심신의 기능을, 거기 쓰여지는 모든 환경 전부를 다 살려내야 됩니다. 이게 부활시키는 기회고, 가장 근본적이고 많은 것을 부활시키는 그날이 바로 주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종종 말씀드리지만은 꼭 같은 날이지만은 주일은 날 자체가 다른 날하고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어제 떴던 해가 오늘 뜨고, 어제 살던 그 나라 그 지방 그 집에서 거기서 살지만은 어제 우리가 만나는 그, 평일에 만나는 해와 공기와 모든 환경과 주일 만나는 것은 다릅니다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여 그날을 복되게 하여 거룩하게 하셨느니라. 주일은 다른 날입니다. 주일은 다른 날로 대치할 수 없는 날입니다. 역사가 천번 만번 바뀌어도 이거는 변할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이 다 뒤집어져도 이거는 변할 수 없습니다. 주일을 다른 날로 바꿀 수는 없는 겁니다, 절대입니다 이거는. 이날이 가장 많은 것을 부활시키고 성화받는 날이고, 이날 받은 것을 가지고 엿새 동안에 자꾸 길러나가는 이것이 주일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부활 소망의 도고, 부활의 차이는 무한한 차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세상에 사는 것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모든 것을 많이 제대로 부활시켜서 그 나라에 가서 하나님 앞에 모든 피조물에게 모든 존재에게 쓸모있는 가치있는, 우리가 세상에서 이 세상 지식과 학벌과 그런 것을 신앙중심으로 하니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만약에 신앙이 없다면, 부활이 없고 내세가 없고 이 세상만 보고 산다면 이 세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쨌든 실력을 많이 쌓아야 됩니다. 많이 배워야 되고 알아야 되고 많이 잡아야 되고 올라가야 됩니다. 많은 사람에게 실력있는 쓸모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 사람이 인간으로써는 가치있는 사람이고 쓸모있는 사람이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다 신앙과 연결시켜 볼때 그거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내세라는 영원한 세계가 있고 이 세계는 그 나라 준비의 기간이고 공간이고 그런 때기 때문에 그런 환경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을 가치로 두지 않지, 이걸 천국과 연결시켜서 예를 들자면 그러기 때문에 비유를 하는 겁니다. 이 세상의 차이가 무한은 아니지만은 한없이 차이가 있듯이.
그런데 어제 누구를 만나서 좀 이야기를 했는데, 설교록에 보니까 그런 이야기 나옵니다. 남편과 아내 차이는 사람들이 볼때, 자기 생각에 남편된 나는 한없이 높고 아내는 보잘 것 없고, 반대로 아내는 잘나고 똑똑하고 남편은 보잘 것 없이 그렇게 보이는데 그 차이가 각각 자기가 볼때는 굉장히 많은 차이로, 나는 대학도 졸업했고 나는 인물도 이렇고 집안도 이렇고 또 실력도 이렇고 다 좋은데 내 배우자는 자기 보기에 참 시쁘게 보이는 그런 경우가 모르기는 몰라도 그런 생각 안해본 분들이, 안해본 남편, 안해본 아내가 별로 없을걸요? 제가 착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설교록에 보니까 아무리 많이 차이 나는 것 같아도 그 차이는 서숙알 하나, 서숙알 아십니까? 000선생님 서숙알 알아요? 게알은 알죠, 게? 게알만합니다, 서숙알이. 그만큼 차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잘난 남편 잘난 아내, 못난 남편 못난 아내 차이가 크게 보여도 그 차이는 서숙알 한 개 차이다, 그리 말합니다. 그러면 그것 때문에 상대방을 서로 무시하고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부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실력있는 사람 없는 사람 차이는 현실적으로 굉장히 많이 차이가 나지요. 하늘나라는 무한히 그보다 더하다는게 성경입니다. 이 세상 차이는 나봐야 한평생이고 이 세상으로 전부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차이는 끝이 없이 영원하고 그 세계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끝없는 세계. 아무도 뒤집어 엎지를 못하는 세계입니다. 없어지지 않는 나라. 그래서 성경을 바로 알고 이런 걸 바로 알고 나면 사람이 여기 빠질 수 밖에 없고, 은혜 받아서 이 도리가 순간적으로 깨달아서 여기 빠지고 나면 다른거는 눈에 안 들어옵니다. 여기 미쳐버립니다. 그런데 사람이 육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렇게 평생 달려가면 귀한 사람이 되는데, 가다보면 베드로가 바닷물 위에서 바람 보듯이, 세상이 보이고 보이니까 하나둘 양보하니까 그만 식어져서 천국이 멀어지고 세상이 가까워지고 이렇게 되어서 그렇지,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 사람들 한번씩, 여기 한번씩 안 미쳐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게 정상인데, 미친게 아니고. 알고나면. 부활에 대한 말씀을 가지고 이 부활은 바로 지금은 바로 부활의 때입니다. 우리 모든 걸 살려야 되는 때고, 이걸 살리지 못하면 영원토록 수치, 영원토록 무능, 영원한 부끄러움, 영원한 가련함, 비참함. 회복할 수 없는 그 나라의 그것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겁니다. 참 깊이 탄식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한번 돌아봐야 됩니다. 부활시키는 것은 믿음으로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부활시킵니다. 그러니까 말씀만 바로 깨닫고 말씀대로만 해나가면 거기 전부 다 있는데, 믿음 안에 모든게 다 있는데 이걸 모르니까 문제가 다 생기는 거지요. 부활의 은혜, 좀 생각해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소망의 도, 얼마전에 많이 공부했습니다. 부활소망의 도고, 그 부활의 차이는 무한한 차이입니다. 그 차이를 지금 우리는 쓸모있는 사람으로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가서 가치있는 사람이 되야 되지, 가치 없는 사람으로 벌어지는 그런 참 허무하고 가련한 우리가 되지 않도록 깊이 깊이 좀 생각해보십시다.
제목: 부활
1.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
-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
-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
- 하나님이 원동된 생활은 근본 중심과 방향이 하나님 관계로
- 예배와 성경, 기도 생활은 기본적으로 충실할 수밖에 없는 것
2. 도성인신의 은혜
-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은 가견적인 절정
- 죽으심과 부활에 못지 않은 큰 희생
- 도성인신의 이유는 사람이라야 사람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
- 하나님이 함께하셔야 모든 택자의 모든 죄를 대형할 수 있기 때문
3. 죽으심의 대속
- 죄 불의 불목의 대형의 사죄
- 대신 행하신 대행의 칭의
- 죽기까지 화친하신 대화친의 생명
- 죽으심의 공로로 우리에게 주신 생명줄
4. 부활의 공로
- 죽으심만 있고 부활이 없었다면
- 갓난아기가 태어난 갓태어난 상태로 있는 것으로 비유
- 부활의 공로는 죽으심의 공로를 바탕으로 실제를 만들어 가게 하신 것
- 죽으심의 공로와 부활의 공로는 비중이 같다고 보는 것
- 부활의 공로로 주신 실제는 부활, 능력, 승리의 실제
5. 부활과 주일
-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 주일은 우리가 부활하는 날
- 생명과 능력과 승리의 실제를 받는 날
- 부활은 믿음으로 받는 것, 믿음은 순종
-------------------------------------------------------
(설교원문)
요한복음 11:25-27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우리 성도의 관계라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다. 또 신앙생활은 천국을 준비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의 방편, 구원을 이루어가는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 순종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성도와의 관계, 이 관계를 원래 본지위를 회복시키는 것이고 이 관계를 바로 정립해나가는 회복해나가는 이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힘쓸 신앙생활에 가장 많이 힘쓸 것은 하나님을 아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누군지, 하나님을 하나님이 스스로 당신을 소개해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 속에 기록된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끊임없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는 배우고 공부하고 또 하나님을 연구하고 하나님과 자기 관계를 늘 살피면서 하나님과 나 자신의 관계를 바로 정립해나가는 이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생활입니다. 그다음으로는 하늘나라가 신앙생활 해나가는 방향이고 소망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소망을 하늘에 두고 이땅에 사는 우리들의 모든 생활이 되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 모든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외형으로 나타나는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생활이고, 예배중에는 주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고 또 여러 정해놓은 예배시간을 바로 지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예배시간을 바로 지키는 것은 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 또 예배시간을 엄수하는 것, 예배시간에 말씀과 성화를 받는 것, 그런데 그 모든 외형의 예배생활을 해나가는 그 속에 깊은 중심에 모든 원동은 하나님과 자기 관계로 인해서 되어져야 되는 겁니다. 비유가 같을 순 없지만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제대로된, 말하자면은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그리 인식하는 대기업이나 좋은 회사나 또 공기업이나 공무원이나 이런 곳에 취직을 하려면 대학을 졸업을 해야되고 대학도 괜찮은 명문대학을 졸업을 해서 거기서 잘 배워야 되는 것으로 그리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좋은 회사에 취직할 수 있는 명문대학에 들어가기위해서 고등학교 들어가면 그 사실을 알고 거기 가치두는 부모와 가정과 그 학생은 그 집에 들어가면 모든 분위기가 모든 가정에 가사에 모든 일정이, 가족들의 모든 생활의 중심과 방향이 그 원동이 그 아들이나 딸 그 학생에 대학교 입학 시험에 맞춰져 있습니다. 거기 따라서 식단도 그리 정하고 가정 분위기도 그리 정하고 가족의 행사 일정도 거기 맞춰서 하고, 또 모든 생각이나 인식들도 거기서 다 나오는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게 그 가정을, 가족들을 끌고 가는 원동의 힘이 되는 그런 경우가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특히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있는 집에는 더 그러합니다. 집안에 가장이 중병이 들어서 치료중이면 그 치료기간이 오래 걸린다던지 하면 모든 가족들의 생활에 원동과 방향은 그 가장의 병을 치료하는 거기로 다 맞추어집니다. 경제계산도, 또 일하는 것도 시간도 식단도 그리 다 맞춰서 거기서 나와가지고 그리로 가는 것이 생활이 되어지는 겁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고 그 인식이란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 가치관 그런 것이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생활이 신앙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믿는 사람의 생활은 신앙생활이고, 그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자기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바로 되어야 되겠고,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야 되겠고 하나님 앞에 잘 보여야 되겠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겠고, 이것이 자기 생활이 되어있으면 바로 되어있으면 그 사람에 그 가정에 모든 생활의 초점은 1차적으로 예배에 맞춰지게 되어있습니다. 예배시간에, 예배 참석에, 예배에 모든 초점이 다 기울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생활 중심, 교회 중심으로 그리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배 시간을 빠질 수가 없고 예배 시간에 지각을 하는 것이 이상하고 안 하는 것이 정상이고 안하려고 굉장히 애를 쓰고 예배 시간에 지각하면 큰 죄를 지은 것 같고 예배 빠지고 나면 더 큰 죄를 지은 것처럼 그런 마음이 들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하나님과 자기 관계에서 그리 되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 읽는 생활이 자기 중요한 생활중에 하나, 일과중에 하나가 되게 됩니다. 성경을 안 읽을 수가 없게 되고 기도를 안할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아이들 말인데, 필수가 있고 선택이 있고 그런 말이 있지요. 주로 입학시험 같을때 필수과목 선택과목 이런게 있습니다. 필수라는 것은 반드시 해야되는 것이고 선택이라 말은 자기가 고른다 그 뜻입니다. 신앙생활을 바로 하면 하나님과 자기 관계가 신앙생활이고 이게 모든 생활의 전부기 때문에 이 생활이 자기 속에 인식으로 들어있으면 그에 모든 생활은 예배가 전부고 성경이 전부고 기도가 전부고 신앙생활이 전부가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거기 맞춰서 다른 모든 생활은 조력으로 보조적으로 그리 따라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인식이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일은 말할 것 없고 일반예배시간에 사람이 직장을 가지고 사업을 하고, 하다보면은 실수도 하게 되어있고 지각도 하게 되어있고 또 원치 않게 빠질때도 있고 그리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속에 중심은 불이 타는 겁니다. 견디지 못합니다, 그럴때. 그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믿는 사람이 예배생활, 성경 읽는 생활, 기도하는 생활이 자기 모든 생활의 중심이 되어있지 않으면 자기를 한번 신중하게 돌아봐야 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자기 관계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생활이 예배생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옛날에, 요즘도 그렇지요. 지금 이번에 배 사고 났을때, 정부에서 대처하는 걸 두고 말들이 많지요. 우리나라는 대통령 혼자 뿐이냐. 유족들이 그렇게 애타는 심정으로 뭐 하나 설치해달라고 노래를 불러도 공무원들이 꼼짝도 안하다가 대통령이 와서 말한마디 하니까 10분만에 갖다놓더라던가요? 그게 모두 다 대통령 눈치만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공무원들. 그래서 세상말에 공무원은 뭐가 없다 그럽니까?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 그럽니다. 다 그런건 아니겠지요. 그런 말을 씁니다. 자기 주관이 없고 판단이 없고 복지부동입니다. 벌로 나섰다가 괜히 밑보이면 자기만 손해니까. 수백명이 목숨이 왔다갔다하는데 구조하러 갑시다 하면 거기 가서, 가는 거야 가지만은 가서 구조하는데 위험도 하고 장비도 들고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가는데 그 비용 누가 줄건데? 안 따질수가 없지요 현실로. 그러니까 우리나라 인식이나 체제가 바로 되었으면 그런 인식이 생겨질 수가 없지요. 사람 목숨이 우선인데 일단 살려놓고 보자 그리 되어야 되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인식이나 구조적으로 아직까지 그렇게 되어있지 않으니까 그런 문제가 생겨지는 겁니다. 그게 과거에 수없이 겪어봤거든요? 죽어가는 목숨 살리기 위해서 목숨 받쳐서 자기 전부 다 받쳐서 해결해놓고 나면, 뒤에가면 자기만 손해 보는 겁니다. 아무도 보상을 안해주거든요. 정부에서도 나몰라라 하는게 흔한거리고. 그러니까 그런것이 오래토록 와놓으니까 막상 그런일 닥치면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아직까지 후진국이라는 말이 안나올 수가 없는 거지요. 세상 말이지만은. 사람들의 인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 생활이, 신앙생활 인식이 바로 되어져있으면 그 사람의 생활의 모든 중심은 어디 간다고요? 예배가 생활중심에 전부입니다. 신앙생활에 전부고 교회 생활에 전부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은 밥을 굶어도 성경 읽어야 되고 또 잠을 못자도 기도는 하게 되어있습니다. 육신이 약해서 못하면 양심이 고통 받고 괴로워서 못 견디게 되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빠져도 아무런 감각이 없고 지각해도 아무 느낌이 없고, 이런일이 되면은 그 속에 자기 신앙생활에 근본적인 면을 돌아봐야 됩니다. 내 신앙이 지금 과연 바로 되어있느냐. 이름만 신앙이지 껍데기 아니냐. 심각하게 돌아봐야 됩니다. 주어진 형편이 그리 되는 것 하고 자기 자신의 기본 인식이 되는 것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람 되셨고,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시기 위함이고, 우리를 대신하신 것은 우리들의 모든 연약함을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알고계시기 때문에 사람이 어떨때 힘들고 어떨때 괴롭고 고통스럽고 연약하고 아프고 넘어지는 것을 하나님은 너무 너무 잘 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약해서 넘어지는 것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지 않습니다. 하려고 하는데 안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인식이 안되었으면 그거는 하나님 앞에 진노거리가 되는 겁니다. 심각하게 한번 돌아봐야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면, 바로 믿는다면 예배 태도도 달라지고 모든 생각이나 인식이 기본적으로 틀려지게 되어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하고 동시에 부활에 대해서, 부활이라 말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고 죽었다는 말은 산 자였다는 말이고, 그러면 주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살아계셨고, 그 사시는 생애 되기 전에 하나님인데 사람이 되어오신 도성인신이 있었다는 말인데, 이 도성인신에 대해서 이것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 된다는 겁니다.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다, 그러면 하나님을 연구해서 아는 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냐 이걸 알면 아는만큼 하나님이 사람을 입고 오셨다는 이 사실은 우리가 믿기 어려운 일이고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고 이거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은혜라 그리 안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에,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공로는 가견적인 눈에 보이는 고난이고 죽으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가 아파본 사람은 이 아픈 사람의 심정을 알고 또 뼈가 아파본 사람은 뼈가 얼마나 아픈지 그 심정을 안다, 동병상련 그래서 말하지 않습니까? 겪어본 사람이 아는 겁니다. 사람이 영의 세계는 몰라도 마음과 몸의 고통은 모든 사람이 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까 예수님이 당하신 눈에 보이는 생애와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혔다, 손에 발에 못을 박았으니까 물과 피를 흘렸으니까 얼마나 아팠을까. 살을 뚫고 또 신경을 뚫고 뼈를 부수면서 그리 못이 박혔으니까 얼마나 아팠을까. 가시 면류관을 썼으니까, 온 머리에 가시를 썼으니까 얼마나 아팠을까. 침을 뱉으니까 얼마나 수치스러울까. 이거는 사람들이 느껴서 아는데, 이거는 외부로 드러나는 것은 알고보면은 별 것 아닙니다. 대단히 좀 조심스런 말이지만은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보다 몇 배 몇십배 더 고통스럽게 순교한 그런 성도들 역사에 꽉 찼습니다. 안 믿는 사람도 불로 지지고 껍데기를 벗겨내고 눈알을 뽑는 그런게 예사입니다. 자기 정치 야망을 위해서 성공 위해서 그리 흔하게 많이 당합니다. 우리는 못해봤지만은 그렇게 당하는 사람 많습니다. 예수님의 외부적인 고난 이거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닙니다. 그속에 내면으로 들어가면 오전에 말씀을 드린대로, 그 고난 외부적인 고난속에 거기에 모든 택자 전부의 죄를 다 짊어지고 있는 그 중량, 그중에서 당신이 말한마디만 실수하면 ‘아야’ 하는 비명만 한번 지르면 그 모든게 다 끝나버리는, 하나님의 모든 구원역사가 절단이 나버리고 뜻이 다 깨지고 모든 인간 구원이 다 절단 나버리니까 그 무게라는 것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그런 무게입니다. 그것이 더 큰 것이고 그 안에 들어가면 그런 모든 걸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이거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이 희생은 알 수 있고 느낄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도성인신의 희생이란 것은 형언하기 어려운 그런 희생이라.
이걸 우리가 자꾸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기도라는 것은 이런 것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고 신앙생활은 주일을 지키고 성경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연보하는 것도 신앙생활인데 이거는 껍데기 외부모습이고 진짜 신앙은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고 연구해서 알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높으신 분인지 존귀하신 분인지 그분을 점점 성경 통해서 배워서 알아가고 실감해가고 그래서 그 분 앞에 고개 들 수 없는 설 수 없는 자신이 되어져가는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이게 되고나면 외부적인 모습은 저절로 되는 겁니다, 저절로. 하지마라고 그래도 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무서운 것을 보고나면은 그 무서운 것이 잔상이 머릿속에 오래토록 남아서 그 영향이 계속 가게 되어있습니다. 필연적인거지 않습니까? 불을 떼면 연기는 나는 겁니다. 이것처럼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과 자기 관계가 바로 되고 나면 외부적인 신앙생활은 필연적으로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힘쓸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겁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제가 우리 교회 15년 동안 설교하면서 가장 많이 설교한 것 중에 하나는 ‘신앙은 자기를 고치는 것이다, 남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나를 고치는게 신앙이다’ 거기에 모든 것이 다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섭리역사의 방향은 전부 나한테 다 기울어져 있습니다. 내 주변에 모든 환경은 내 현실이고 그 현실을 다스리고 지키라는 것은 그 현실, 내 주변에 둘러싼 현실, 그들을 내가 간섭하고 그들 어떻게 하라는 말 아닙니다. 그들과 관계된 나 자신이 그들에게 피동되거나 영향받지 않는 자기를 만들어가라는 뜻입니다. 이걸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섭리를 다 역사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걸 가장 많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한테 모든 원인이 다있다. 그러니까 자기만 고치면 거기따라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환경은 다 바꿔 주시는 겁니다. 부모 자녀관계에서 자녀 문제는 전부 부모한테 매여있는데, 신앙이 있는 부모라면 신앙있는 부모에 따라서 자녀는 필연적으로 따라갑니다. 되게 되어있고. 신앙없는 부모가 신앙있는 자녀라면, 신앙없는 부모는 신앙있는 자녀의 어떠함에 따라서 그 부모님은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부부는 더 합니다. 한 몸입니다. 아내의 모든 문제는 신앙있는 남편에게 매였고, 남편의 모든 문제는 신앙있는 아내에게 다 달렸습니다.
이게 성경인데, 가르치는 전분데,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가 남을 대접해라. 이것이 율법이고 선지자다. 이제 말씀드린 대로 모든 것은 다 자기한테 달렸다 그 뜻입니다. 이게 성경이 가르치는 전부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 전부고 온 세계를 만들고 크고 작은 모든 걸 섭리하시는 하나님 섭리역사에 방향입니다. 이걸 성경대로 바로 알고 여기에 착안을 해서 주력을 해나가고 여기 힘을 쓰면 그게 되어진만큼 나와 직접 간접 관련된 객관 역사는 하나님이 다 변화시켜 주시는데, 문제는 그렇게 하려하니까 내 생각에 내 판단에 내가 보기에 내 주관에 도무지 아니거든요. 안 맞거든요. 그런걸 가리켜 주관이라 그럽니다. 내 생각에, 내가 보기에, 내가 판단할 때, 모든 사람들이 볼때 아니다 그렇게 보여집니다. 그 아닌것이 성경이 아니라면 아닌 것인데 자기 볼때 아닌 것이 성경과 다르면 자기를 고치는게 신앙입니다. 바꿔나가는게. 내가 보기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 비유가 그걸 가르치지 않습니까? 배가 고파서 주님이 갔을때 무화과 열매가 없다고 저주헀습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다. 무화과 열매는 여름 되야 열것이고 가을 가까이 되어야 익습니다. 그런데 5월달 이때가서, 지금 좀 있으면 무화과 나무 이파리 새파랗게 돋아오겠지요. 그때가서 보니까 잎사귀는 넓고 큰데 열매가 없다. 저주 받아라. 주님이 잘못이지 무화과 나무 잘못입니까? 하나님의 창조가 그렇게 되어있는 건데. 그런데 주님이 저주 했는데 그 저주가 잘못됐으면 주님은 우리 구주가 안되지요. 무화과의 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게 비유입니다. 무화과는 뭘 비유한다고요? 우리 믿는 사람을 나타내는 겁니다. 무화과의 때, 형편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아직 준비가 안됐습니다. 니 준비는 상관이 없다. 내 형편이 이러합니다. 그 형편은 해당이 없다, 상관이 없다. 구주가 찾아오셨으면 그분의 뜻에 무조건 맞추는 겁니다. 그게 신앙이고 성경입니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볼때 아닌데, 너가 전능자냐? 전지자냐? 니가 완전자 하나님이냐? 세상 인간관계는 자기 주장을 다 내세울 수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이 그렇습니까? 내 생각은 아닙니다. 천명 생각이 그렇습니까? 나는 안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공회 진리 전원일치라는 법이 거기 다 적용이 되는 건데, 그러니까 교인 999명이 다 찬성하는데 한사람이 나는 반대입니다.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면 강제로 다수결 하는 것이 아니고 그 한사람을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하고 이해를 시켜서 기다리는 겁니다. 그 자유성을 꺽는게 아니다 그말입니다. 진리전원일치라는 거기에 핵심은 인간의 자유성입니다. 그 자유의지를 꺽지말고 그것을 권면하고 설명하고 설득해서 기다려서 감동시켜서 돌아오게 하라는 겁니다. 그거를 꺽어서 하지 않는다는게 진리전원 일치라는 그 제도에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인간관계는 그렇습니다. 사람끼리 모인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천명 만명 억만명 전인류라도 해당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안 맞으면 전인류도 홍수로 다 멸해버리는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맞느냐 아니냐 그걸 봐야되지, 내 생각에 내 경험에 내 판단에 내가 볼때 내 현실에 그거는 자기 주관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동감이 되십니까? 이것이 설교로는 논리로 들으면 성경 논리가 그러니까 그렇지만은 막상 이런 현실이 딱 닥치면 이렇게 맞추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백에 구십구, 천에 구백구십구는 다 이런저런, 그 이론은 그렇지만은 실제가 그렇습니까?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맞춰나가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이고 그렇게 해나가면 내 환경은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백목사님 시 많이 인용했지요. ‘폭우야 부어라 대해는 굶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쏟아져도 태평양 바다는 표시가 안납니다. ‘폭풍아 불어라 노암은 웃는다’. 끄떡도 안합니다. 아무리 태풍이 불어도 그냥 가벼운 것 어지간한게 날아가지 집채만한 바위는 꼼짝도 안합니다. 끄떡도 안합니다. ‘흑암아 외쳐라 반딧불은 춤춘다’. 온 세상이 어두워도 반딧불은 어두움을 헤쳐나가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말하는 겁니다. 나 자신이 그렇게 변화되어있으면 환경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되어있으면 세상이 그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을 만드시는게 하나님의 뜻이다. 제가 15년동안 설교하면서 가장 많이 설교한 것이 이걸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다 자기 안고치고 남한테 다 돌립니다. 그게 가장 큰 원인입니다. 대개 다 그렇습니다. 나를 고치는 것. 같은 비율로 많이 말씀드린 것이 신앙이란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도 수백번 수천번 말씀을 드렸을 겁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호랑이를 알고나면, 하룻강아지는 범을 모르니까 벌로 설칩니다. 알고나면 호랑이 말 들으면 머리가 쭈뼛하고 호랑이 나타났다 그러면 몸이 사려지고 조심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젊을때는 경험이 부족하니까 뭐든지 적극적이고 활동성이고 쉽게 움직입니다.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사십이 되고 오십이 되고 육십이 점점 되어가면 인생 경험이 많습니다. 마구 움직이다가 여기 깨져보고 저기 부딪혀보고 이것도 부러져보고 저것도 다쳐보고 온갖 경험이 있으니까 모든 면이 다 조심스럽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안될 수가 없습니다. 나이가 오십 육십이 되도 마구 벌로 설치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철이 덜 든 사람이라 그리 보지요. 일반적으로 보면. 그러기 때문에 나이가 점점 들어가고 세상 경험이 많아지면 그 사람의 사람 자체가 무거워집니다. 신중해집니다. 중량이 무거워져서 말도 함부로 안합니다. 조심하고 모든 행동을 신중히 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나면 사람이, 그 하나님 아는 사람의 인식과 생활은 틀린다 그말이지요 안믿는 사람하고. 그러니까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과 자기 관계가 바로 정립되 나가는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걸 바로 알고나면 예배시간은 하나님 섬기는 생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겁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자기 관계를 점점 돈독히 만들어가는 겁니다. 이 생활에 주력 안할 수가 없고 이런 것이 자기 생활에 중심이 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동시에 이런 교리적인 말씀, 도성인신 이 말씀을 들을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그럴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란 것을 아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넓게 전체 세밀히 알수록 이런 말씀을 들을때 눌릴수밖에 없고 감격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큰분이, 그 높은 분이, 나라 국민이 3백명이나 바다에 빠져 실종된 상태인데, 대통령이 거기 가서 유족들 위로하는 건 당연하지요. 그런데 갔다고 해서 그게 마치 큰 일처럼 잘했다, (못했다는 사람도 있지만은) 그거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안가는 것이 비정상일 것이고 안 돌아보는 것이 비정상, 물론 여러 가지 생각할수 있겠지만은. 그런데 나라의 대통령이, 그래도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합디다. 나라의 대통령은 최고 통치자인데 그 통치자가 일일이 그런데 다니면 말하자면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쓰면 밑에 사람 일을 못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 대통령이란 것은 무거워야 된다 그말이지요. 쉽게 움직이면 안된다 그말이지요. 전체를 다 봐야 되는거니까. 대통령이라는 한 나라, 우리 나라가 경제대국이라 그래도 영토로 말하면 지구에 손톱만한 작은 나라인데 그 나라 대통령 그래봐야 5년인데, 그 대통령도 권세라고 거동도 함부로 못한다 그럽니다. 말을 ‘친림’이라던가요, 친림? 몸소 임하셨다. 친림이라 한답니다. 대통령 어른께서 직접 오셨다. 참 높지요. 그런데 5년짜리 한나라 작은나라 대통령이 그런데 간 것도 그렇게 뉴스거리가 되고 말거리가 되는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건 이거는 우리가 바로 알고 나면 기절초풍을 할 일이고, 있을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거는 도무지.
이게 주님의 도성인신에, 그래서 이것이 바로 대속역사에 우리들이 사람이 알 수 있는 가시적인 출발 그전에 내면적으로 있지만은 직접적인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대속역사에 출발이 바로 도성인신입니다. 이 희생은 말할 수 없는 무한한 희생입니다. 그 이유가 몇가지라 그랬습니까, 오전에? 하나님이 사람되신 그 이유가 첫째가 뭐였습니까? 왜 그렇게 큰 희생역사를 했어야 되는가? 첫째 이유가 뭡니까? 사람이라야 사람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되어야만 사람을 구원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사람으로 낮아지신 겁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신인양성일위가 되신 것은 하나님이 동참을 해야 택자 전부의 죄를 전부다 대속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두가지 이유 때문에 신인양성일위로 도성인신 하셨다 이것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아는데서 연구해보고 좀 깊이 생각해봐야 됩니다. 이분이 사람되셔 가지고 33년 4개월 사시고 마지막에 절정으로 죽으심의 대속이 있었습니다. 죽으심의 대속은 도성인신도 대속이고 어떤 면에서 준비지만은 여전히 대속이고, 직접적인 것은 오신 그분이 사신 33년 4개월 이 생애가 대속의 생애고, 마지막 십자가 못박혀 죽으심이 마무리 절정이고 죽으심까지에. 나타난 마무리 절정입니다.
대속의 생애와 죽으심까지의 그 역사가 세가지 역사였다 그랬지요. 하나는 죽으심이란 것은 세가지 때문에 죽으셨다. 대형입니다. 대신 형벌 받아 죽으셨는데 형벌받아 죽으신 그 죗값이 세가지라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 때문에, 그 죄가 과거도 많았고 지금도 많고 앞으로도 없으면 좋겠지만은 많을 겁니다. 그 죄의 형벌 때문에 우리에게 영원한 지옥이 면해진 동시에 주님이 그 죄 형벌을 받아서 지옥의 죗값을 다 대신 대형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게 된 것이 또 무엇입니까? 주님의 대형의 공로 때문에 우리에게 오게 된 것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면했고, 또 하나는 뭡니까? 대형의 공로 때문에 우리가 받은 특권이 회개라는 겁니다, 회개. 안믿는 사람에게는 회개라는 것이 없습니다. 대속을 입은 사람은, 대속을 입지 못한 사람은 원죄로 인해서 영원한 지옥입니다. 그들은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회개라는 게. 이 대형의 사죄 공로를 입은 우리는 죄를 하루에 일흔번씩 일곱 번 사백구십번, 그말은 수를 헬 수 없습니다. 살아생전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주님 대형으로 형벌을 다 멸했기 때문에 또다시 그 자리에서 회개할 수 있고 의인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 주님 대형의 공로입니다. 그 대형의 공로 때문에 우리는 회개의 특권을 받은 겁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생전 수도없이 많은 기회를 받은 것이 대형의 공로다 그말입니다. 이 공로 받지 못한 사람들은 한번으로 끝났습니다. 두 번 기회가 없습니다. 사람이 대학 입시도 그렇고 고시 공부도 그렇고, 한번 딱 끝나버리면 그걸로 끝인데, 시험의 기회가 10번 있으면 한번 못했으면 아직 남아있다, 내년에 또 하지, 못 했으면 또하지 또 하지, 그래가지고 할 수있는 기회 다 지나가서 못하지 기회가 없어 못하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기회가 주어지는 것처럼 말하자면 주님 대형의 공로는 우리에게 무한은 아니지만은 수를 헬 수 없을만큼 많은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 대형의 은혜고 공로입니다. 이거 굉장히 크게 따져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회개할 수 있고 어디까지 깊은 속에 빠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것이 주님의 회개, 생명줄입니다. 생명줄에 매여있어서 한번 떨어지면 돌아올 수 없는 억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불구덩이로 떨어지는데 이게 불택자들이고 대형의 공로 입지 못한 사람들인데 우리는 생명줄에 딱 매여있으니까 떨어지면 그 줄이 땡겨올리고 또 세워놓고, 또 떨어지면 또 그 줄이 땡겨올라서 또 세워놓고. 그래서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생명줄에 세워놓고 생명길을 걸어가도록 만들어주신것이 주님의 대형의 공로. 내 모든 죄를 다 대신 짊어지고 그분이 죽으셨다. 이 공로입니다, 죽으심.
그리고 나에게 없는, 행치 못한 대행의 칭의입니다. 나는 행하지 못했는데, 의인이 아닌데. 주님이 내 대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심으로 우리를 의인 만들어주셔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입은 의인이 됐습니다. 이번 집회말씀 중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미리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바로 이 대형 대행 대화친으로 만들어주신 대속을 말합니다. 입혀주신. 하나님의 의. 우리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의인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겁니다. 의에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다 가게 되어있습니다. 뿌리쳐서 못 받지, 이걸 받을 수 있는 자격은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죽으심으로 만드신 의.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되어서 영원한 사망인데, 대화친으로, 십자가로 이 둘을 한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친시켜 주셨고, 하나님과 화친이란 것은 기본으로 연결이고 생명입니다. 그래서 대화친의 생명을 주신 이 세가지 역사가 주님의 죽으심의 대속입니다. 죽으심으로 대형 대행 대화친 이게 죽으심의 공로입니다. 도성인신의 대속의 공로 은혜, 죽으심의 공로 은혜 깊이 생각해봐야 됩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아무리 커도 여기까지만 되고 끝났으면, 이게 설교록에도 이와 비슷한 비유가 나오는데 꼭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낳았으니까, 임금님이 아이를 낳았음은 임금님이 왕자를 낳았으니까 그 아이의 신분은 왕자입니다. 정상으로 났으니까 사람이 돼서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코도 있고 다 반듯하게 다 붙어있습니다. 내장도 다 있고 마음도 다있고 다 있습니다. 생명도 살아있어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대로 있으면 막 태어난 그 아이, 생명도 있고 모든게 다 가지고 있고 왕자로 있고 신분도 있고 고귀한 그런 신분인데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냥 그대로 계속 가면은 그 아이는 아무데도 쓸데가 없습니다. 생명이 분명히 있습니다. 생명 가진 아이입니다. 임금님의 아들 왕자입니다.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임금노릇하고 쓸모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아이가 자라가야 됩니다. 자라는 것은 무엇이 자라는 겁니다. 그의 심신의 기능이, 보고 눈도 떠야 되고 귀도 열려야 되고 말도 할 줄 알아야 되고 이게 되었으면 그다음에는 보고 듣고 배워서 아는 지식이 자꾸 많아져야 되고 손으로 익힐 기능은 손으로 익히고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또 물건을 쓸 줄도 알고 생각도 할 줄 알고, 이런 사람으로 점점 자라가야 됩니다. 자라가지 아니하고 난 그대로 있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말입니다. 짐덩어리만 되지. 주님의 죽으심의 대속이 말하자면은 여기까지가 아니겠는가? 막 태어나서 생명도 가졌고 관계도 다되어있고 고귀한 신분으로 다 되어있는데, 죽으심의 대속까지만 되어있으면 거기까지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런데 거기까지로서는 미완성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산소망을 주셨으니 그 산소망이 바로 그래 태어난 아기가, 생명 가진 아기가 보고 듣고 먹고 입고 마시고 배우고 점점 자라서 기능마련해서 얼마든지 탁월한 실력가진 사람으로 자라갈 수 있는 모든 기반을 다 닦아놓은 것이 주님의 부활이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낡아지지 아니하는 기업을 입게 하셨다, 이게 부활의 공로라.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공로는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를 부활시키는 우리를 살리는 우리의 심신과 그 심신에 속한 모든 기능과 필요한 모든 소유와 자기 활동무대를 영원한 자기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이것을 실제 주신, 부활의 실제를 주신 것이 주님의 부활이고 두 번째는, 이 부활의 실제를 위해서 수많은 전투 투쟁 이것이 있는데, 그 전투 투쟁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 주님의 부활이고, 능력 주신 것, 능력의 실제를 주신게 부활이고, 세 번째는 승리를 주신 것이 부활이다. 실제 승리할 수 있는 승리의 실제를 주신 것이 부활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죽으심의 대속은 기본구원에 속한 것이고 부활의 대속은 기본구원에 속한 것 하고 건설구원에 속한 것이 같이 있지 않는가? 그러기 때문에 부활에 속한것은 말하자면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그 부활의 공로를 근거 삼고 바탕 삼고 힘 입어서 내가 부활시켜 나가야 되는 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부활을 하셨으니까 힘 안써도 그냥 된다는게 아닙니다. 부활의 공로가 없으면 주님의 죽으심의 공로가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은 한번 범죄하므로 원죄로 영원한 지옥이고, 주님의 죽으심의 대속의 공로를 받은 사람은 그 공로를 힘입어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수많은 회개의 기회, 구원의 기회를 받은 자격을 받은 것이고, 그러나 부활이 없다면 그 자격까지만 받아놓지 실제는 할 수 없는 것인데, 부활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실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구비시켜 주셨다 그말입니다. 이게 부활의 공로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으심의 공로, 도성인신이 아무리 크고 죽으심의 공로가 아무리 커도 주님 부활이 없었다면 이 대속은 반토막이고 미완성이고 그거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전체를 두고 보면. 무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죽으심의 공로까지가 반이고 부활의 공로가 반이고 비중이 같고, 동시 희생도 같다 그렇게 우리가 배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지키는 주일이라는 이 날은 첫째,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고, 두 번째는 그 부활을 힘입어서 우리들이 부활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부활한다 그 말은 심신은 죽었다가 주님 재림후에 그때 부활하지만은 지금 우리 부활은 심신이 아니고 심신의 모든 기능들, 우리 모든 소유들, 천국에 쓰여질 우리 모든 활동 무대들, 이런 것을 지금 살리지 않으면 기회 지나가면 못 살리는 겁니다. 어제 이말씀 준비위해서 백목사님 설교를 재독을 하면서, 이게 무슨 뜻인가? 한시간짜리 설교를 귀에 꽂고 재독을 하는데, 지금 부활을 해야 된다는 말씀을 계속하는데 무슨 뜻인지 못알아들었는데, 마지막 끝에 가서 그 ‘부활이 바로 성화다.’ 그 말씀을 딱 들을때 해결이 되어졌습니다. 그렇구나. 표현을 부활로 해도 그게 바로 살아 부활하는건데 우리의 성화되는 그것이 막바로 부활하는 것이고 말하자면 다 죽은 것인데 다시 살려내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그 살리는 기회는 한번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살았는데 살릴 기회를 얼마나 놓쳤고, 살린 것이 얼마나 되는지. 우리 생활에서 오늘까지 십년 이십년, 좀 생각있는 분들은 아마 이십대까지도 아직까지, 나름대로는 있지만은 아직까지 좀 철이 덜 들었을 것이고, 삼십대라면 조금 나을 것이고, 사십대가 되면 제법 생각이 많을 것이고, 오십대가 되면 생각이 더 넓어질 것이고, 그런데 사십 오십이 됐으면, 오십이 됐으면 살아온 날이 살 날보다 많으니까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지나간 세월 돌이켜보고 부활시켜 살릴 수 있는 내 심신의 기능과 그 나라에 가서 쓸 것이 영원토록 쓸 것이 많을 것인데 살린 것은 얼마나 되며 그냥 다 불태워 버린 것은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참 잘 사신 분들은 참 감사하고 가면 갈수록 더 기쁘고 그날이 기다려질 것이고 부활의 날이, 이게 없는 사람은 가면 갈수록 탄식이 되고 두려워질 것이고 그리 되지 않겠습니까? 살리는 겁니다. 지금 살려야 됩니다. 우리의 모든 심신의 기능을, 거기 쓰여지는 모든 환경 전부를 다 살려내야 됩니다. 이게 부활시키는 기회고, 가장 근본적이고 많은 것을 부활시키는 그날이 바로 주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종종 말씀드리지만은 꼭 같은 날이지만은 주일은 날 자체가 다른 날하고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어제 떴던 해가 오늘 뜨고, 어제 살던 그 나라 그 지방 그 집에서 거기서 살지만은 어제 우리가 만나는 그, 평일에 만나는 해와 공기와 모든 환경과 주일 만나는 것은 다릅니다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여 그날을 복되게 하여 거룩하게 하셨느니라. 주일은 다른 날입니다. 주일은 다른 날로 대치할 수 없는 날입니다. 역사가 천번 만번 바뀌어도 이거는 변할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이 다 뒤집어져도 이거는 변할 수 없습니다. 주일을 다른 날로 바꿀 수는 없는 겁니다, 절대입니다 이거는. 이날이 가장 많은 것을 부활시키고 성화받는 날이고, 이날 받은 것을 가지고 엿새 동안에 자꾸 길러나가는 이것이 주일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부활 소망의 도고, 부활의 차이는 무한한 차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세상에 사는 것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모든 것을 많이 제대로 부활시켜서 그 나라에 가서 하나님 앞에 모든 피조물에게 모든 존재에게 쓸모있는 가치있는, 우리가 세상에서 이 세상 지식과 학벌과 그런 것을 신앙중심으로 하니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만약에 신앙이 없다면, 부활이 없고 내세가 없고 이 세상만 보고 산다면 이 세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쨌든 실력을 많이 쌓아야 됩니다. 많이 배워야 되고 알아야 되고 많이 잡아야 되고 올라가야 됩니다. 많은 사람에게 실력있는 쓸모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 사람이 인간으로써는 가치있는 사람이고 쓸모있는 사람이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다 신앙과 연결시켜 볼때 그거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내세라는 영원한 세계가 있고 이 세계는 그 나라 준비의 기간이고 공간이고 그런 때기 때문에 그런 환경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을 가치로 두지 않지, 이걸 천국과 연결시켜서 예를 들자면 그러기 때문에 비유를 하는 겁니다. 이 세상의 차이가 무한은 아니지만은 한없이 차이가 있듯이.
그런데 어제 누구를 만나서 좀 이야기를 했는데, 설교록에 보니까 그런 이야기 나옵니다. 남편과 아내 차이는 사람들이 볼때, 자기 생각에 남편된 나는 한없이 높고 아내는 보잘 것 없고, 반대로 아내는 잘나고 똑똑하고 남편은 보잘 것 없이 그렇게 보이는데 그 차이가 각각 자기가 볼때는 굉장히 많은 차이로, 나는 대학도 졸업했고 나는 인물도 이렇고 집안도 이렇고 또 실력도 이렇고 다 좋은데 내 배우자는 자기 보기에 참 시쁘게 보이는 그런 경우가 모르기는 몰라도 그런 생각 안해본 분들이, 안해본 남편, 안해본 아내가 별로 없을걸요? 제가 착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설교록에 보니까 아무리 많이 차이 나는 것 같아도 그 차이는 서숙알 하나, 서숙알 아십니까? 000선생님 서숙알 알아요? 게알은 알죠, 게? 게알만합니다, 서숙알이. 그만큼 차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잘난 남편 잘난 아내, 못난 남편 못난 아내 차이가 크게 보여도 그 차이는 서숙알 한 개 차이다, 그리 말합니다. 그러면 그것 때문에 상대방을 서로 무시하고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부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실력있는 사람 없는 사람 차이는 현실적으로 굉장히 많이 차이가 나지요. 하늘나라는 무한히 그보다 더하다는게 성경입니다. 이 세상 차이는 나봐야 한평생이고 이 세상으로 전부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차이는 끝이 없이 영원하고 그 세계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끝없는 세계. 아무도 뒤집어 엎지를 못하는 세계입니다. 없어지지 않는 나라. 그래서 성경을 바로 알고 이런 걸 바로 알고 나면 사람이 여기 빠질 수 밖에 없고, 은혜 받아서 이 도리가 순간적으로 깨달아서 여기 빠지고 나면 다른거는 눈에 안 들어옵니다. 여기 미쳐버립니다. 그런데 사람이 육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렇게 평생 달려가면 귀한 사람이 되는데, 가다보면 베드로가 바닷물 위에서 바람 보듯이, 세상이 보이고 보이니까 하나둘 양보하니까 그만 식어져서 천국이 멀어지고 세상이 가까워지고 이렇게 되어서 그렇지,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 사람들 한번씩, 여기 한번씩 안 미쳐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게 정상인데, 미친게 아니고. 알고나면. 부활에 대한 말씀을 가지고 이 부활은 바로 지금은 바로 부활의 때입니다. 우리 모든 걸 살려야 되는 때고, 이걸 살리지 못하면 영원토록 수치, 영원토록 무능, 영원한 부끄러움, 영원한 가련함, 비참함. 회복할 수 없는 그 나라의 그것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겁니다. 참 깊이 탄식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한번 돌아봐야 됩니다. 부활시키는 것은 믿음으로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부활시킵니다. 그러니까 말씀만 바로 깨닫고 말씀대로만 해나가면 거기 전부 다 있는데, 믿음 안에 모든게 다 있는데 이걸 모르니까 문제가 다 생기는 거지요. 부활의 은혜, 좀 생각해보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소망의 도, 얼마전에 많이 공부했습니다. 부활소망의 도고, 그 부활의 차이는 무한한 차이입니다. 그 차이를 지금 우리는 쓸모있는 사람으로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가서 가치있는 사람이 되야 되지, 가치 없는 사람으로 벌어지는 그런 참 허무하고 가련한 우리가 되지 않도록 깊이 깊이 좀 생각해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