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6-주후(단6:25-27)
다니엘의 신앙에서 배울 것2014-04-06조회 309추천 24
본문: 단6:25-27
제목: 다니엘의 신앙에서 배울 것
요점:
1. 모든 현실은 동방의 에덴동산
- 다니엘의 포로된 현실
- 요셉의 종으로 팔려간 현실
- 아람 나라 나아만 집에 종으로 끌려간 계집종의 현실
- 각각 최악의 현실이었으나 그곳에서 하나님 영광 크게 드러낸 역사
- 현실을 핑계 댈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 이 복음을 받은 우리들
2. 다니엘의 신앙과 승리
1)신앙-환난을 감사와 기쁨으로
-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지는 조서가 반포되었으나
- 다니엘은 그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기도하며 감사
- 책임은 남에게 돌리고, 공은 제가 가로채는 것이 사람들
- 우리는 책임을 자기가 지는 인격을 기를 것
- 하나님, 복음, 형제 구원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은 감사로
2)승리-하나님 영광, 복음을 존귀케
- 신앙의 결과가 승리로 나타났으니
- 바벨론 나라에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은 천대받고 있었으나
- 다니엘을 통하여 하나님 영광이 크게 드러나고
-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백성은 크게 존귀하게 된 것
- 우리는 각자 자기 위치에서 이렇게 하고 있는지?
3. 다니엘의 신앙생활
1)하나님께 대한 신앙
①하나님만 소망, 하나님으로 전부 삼아
②하나님 영광 위해, 하나님 영광 위해 모든 노력, 충성, 절제, 인내, 조시
③하나님께만 순종- 왕에게 순종도 하나님 때문, 최종은 하나님께만 순종
2)사람에게 대한 생활
①책임 의무에 무흠- 국사(國事)에 대하여 허물이 없음
②인간 관계에 무흠- 왕에 대해서도 죄를 범치 아니함
③개인 생활에 깨끗- 보이지 않는 생활, 취미도 여가도 모든 생활에서도
4. 다니엘의 신앙에서 배울 것
1)신앙- 환난을 감사와 기쁨으로
2)승리- 하나님 영광과 복음을 존귀케
3)생활- 두 가지 승리의 결과는
①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②사람에게 대한 바른 생활 3가지
③이 신앙생활이 평소 생활에서 계속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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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6 주후
다니엘 6:25-27
우리 신앙의 최종 표준은 주님이 우리 신앙의 표준입니다. 그 주님을 알고 닮아서 주님같이 되는 것이 우리 목표인데, 주님 닮아가기까지 주님을 우리보다 먼저 알고 닮아간 신앙의 선진들이 많이 있으니 그들 한사람 한사람들이 다 우리에게 신앙의 표준적인 그런 인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을 닮아갈수록 주님을 점점 닮아가는 그런 면이 많아진다 그리 볼 수 있겠고, 물론 그 개인 개인이 다 여러 가지로 주님을 온전하게 닮았겠지만은 특징들을 주셔서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의 조상으로, 또 요셉같은 그런 분들에게는 하나님의 현실 인도에 변함없는 믿음으로, 또 다니엘 같은 이런 분들은 역경에 용감한 신앙의 용사적인 그런 면으로, 또 사도바울 같은 분들은 성령의 사람으로 각각 특징을 주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런 분들의 걸음을 알아서 우리도 그리 살아서 그런 신앙의 선진들처럼 되면서 동시에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 성경에 그런 인물들을 기록해주신 목적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성경은 위인전이 아니고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다 그러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신앙에서 오늘 우리가 배울 것, 몇가지 한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그전에 첫째로 다니엘이란 사람은, 바벨론 나라에 포로되어간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포로라는 그 입장, 그 상황, 그 형편, 그 환경, 그 처지, 그 현실, 거기서 그 나라에 총리대신, 단일 총리가 되기까지, 왕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얻고 단일 총리가 되기까지 그 다니엘의 신앙이 어떠했던가 이게 오늘 말씀에 말하자면은 중심내용이 되겠는데, 그러면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다니엘의 그 현실은 포로라는 그 입장, 결과라기보다 그 입장 상황인데 포로라는 그 현실, 그 입장, 그 상황 그 처지 그 환경 그 형편 거기서 총리가 되기까지 굉장히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요셉이 애굽나라에 종으로 팔려간 그 현실, 또 나아만의 집에 계집종으로 끌려간 그 여종, 그 형편. 그러면 시대는 다르고 또 장소는 다르고 구체적인 그런 환경은 다를지라도 전체적으로 볼때 세 사람 다 비슷한 그런 입장입니다. 다윗으로 말한다면 다윗의 형편은 또 여덞 아들중에 막내로써 목동으로, 양치는 목자, 목동으로 그렇게 살았고, 사울에게 죽음과 자신의 거리가 한발짝 뿐이라 할만큼 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쫓겨다니던 그런 생활을 계속해서 했던 그런 다윗.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바로 40년, 바로의 궁전 거기서 바로 원수나라의 핵심 중앙본부 그 속에서 40년, 참 각각 주시는 그런 현실이 달라고 거기서 그렇게 되기까지 그 마지막 결과가 되기까지 어떠했던가. 그래서 이런면을 두고 생각해볼때 다니엘의 포로된 현실에서 총리되기까지의 성공이 되기까지,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서 총리되기까지, 또 나아만의 계집종이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기까지, 다윗이 위대한 그런 인물이 되기까지, 그러면 그 모든 현실이 각각 다르지만은 하나 공통점이 있는 것은 각자 자기의 현실 거기서 신앙생활을 잘 했고 결과적으로 성공과 승리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여러 가지를, 여러 사람의 현실 상황과 결과적인 그 신앙의 승리를 보고 하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현실 환경이란 것은 장소에 상관없이, 또 때에 상관없이, 환경 형편에 상관없이 전부가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에게 만들어주실 때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신 그 말씀 그대로 우리의 모든 현실 상황은 언제든 어디서든 어떤 환경이든 전부 동방의 에덴동산이다, 다시 말하면 어디서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모실 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동방이라는 그 의미를 좀 생각을 많이 해봐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 아닌 사람은 해당될 수 없고, 또 해당되지만은 이 복음을 받지 못해서 모르는 사람들은 몰라서 그럴 수 있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고 더하여 이 복음을 받아서 아는 우리들입니다. 부러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아도 안 들을 수 없을 만큼 수도없이 많은 말씀을 들어서 모를래야 모를 수 없고, 핑계할 수 없을만큼 많이 들어서 아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현실은 전부다 동방의 에덴동산이다. 포로로 잡혀갔든지, 종으로 팔려갔든지, 끌려갔든지, 감옥에 들어있던지, 폭삭 망해서 부도가 나서 길거리에 나앉았던지, 나사로처럼 외롭고 온 몸에 병이 들어서 그런 처지가 되어졌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는 바로 거기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 입을 수 있는 바로 동방의 에덴동산이라는 것을 첫째 여기서 꼭 기억을 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서 광야로 인도하실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를 하셨습니다. 구름과 불기둥은 공중에 떠 있습니다. 그래서 공중에 떠 있으니까 땅에서 걸어서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가면 그 사람은, 그 백성들에게는 막히는 것도 있고 함정도 있고 빠지는 것도 있고 가지 못하는 것도 있고 그리 됩니다. 그런데 공중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은 산이든 바다든 골짜기든 사막이든 상관없이 그냥 인도를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인도를 따라만 가면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거기 제재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은 시간에, 환경에, 형편처지에, 그 모든 주변에 영향을 받고 피동을 받지만은 하나님의 인도는 그런것에 지장받거나 영향받거나 피동되지를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는 것이고, 우리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인도를 믿음으로 따라만 가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따라만 가면 되는데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의 주관 때문입니다. 주관은 의심이고 의심은 바로 불신이 되는 겁니다. 믿음으로 가니까 바다 위에 뛰어내렸지만은, 바다 위에 내려서 바다 위를 걸어갔으나 의심이 들어가고 주관이 들어가니까 바다속에 빠져버렸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저도 설교하면서 말은 쉽게 합니다. 그러나 현실생활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어려워서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하지 못할 일입니다. 사람이 절대 할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방법을 두가지로 주셨으니,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인데,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을 수 있는 방법을 두가지를 주셨으니 첫째는 뭡니까? 첫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그런즉 놀라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나이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이 해주시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배웠습니다. 첫째는 뭡니까? 가장 알기 쉽게 첫째는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엇일까요? 하나는 진합태산입니다. 평소 이 생활을 계속해나가는 것.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는 것. 중단되었으면 또다시 이어서 계속하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된 현실이든지 종으로 팔려간 현실이든지, 끌려간 현실이든지 목동의 처지든지, 나사로 같은 그런 입장이든지 어쨌든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기 현실이 어떠해서 내 주변에 사람이 어떻게 해서, 좀 돌아보면 그런 원망 아쉬운 그런 걸 많이 하지요. ‘내가 부모를 잘 만나서 조금만 도움을 받았더라면’, ‘내가 공부를 조금만 더 했더라면’, 뭐 어떻게만 했더라면, 그랬으면 내가 힘을 썼는데 앞에서 조금만 끌어줬더라면, 뒤에서 한발짝만 밀어줬더라면, 조금만 더 도움을 줬더라면, 어떻게 됐더라면 내가 어떻게 됐을건데. 그게 전부다 핑계입니다. 우리 기독자들에게는 그런 핑계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서 그런 것이고 또 현실이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는 시공을 초월하는데 그러므로 평안함 가운데 가면 되는데 모든 현실고통은 전부 자기가 만드는 것이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두 번째로는, 이 다니엘의 신앙에 대해서, 환난에 대해서 감사했다는 겁니다. 사자굴이 앞에 닥쳤을때 다니엘은 거기에 피동되거나 영향받지 아니하고 사자굴을 앞에 두고 다니엘은 여전히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을 두고 기도하면서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전에 하던대로. 그러면 다니엘이 사자굴을 만나게 된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 때문입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이고 그 간구속에는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는 것과 이제 그 민족을 긍휼히 여겨주시라는 그런 간구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을 진노케하는 그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회개. 그리고 이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고 본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옵소서. 하나님의 노를 풀고 긍휼을 구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였을까. 그런 기도를 매일 하루 세 번씩 꼬박꼬박 그렇게 진심을 담아서 그런 기도를 다니엘이 했습니다. 다니엘은 해야되는 일이고 또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나라에 허락된 일인데 그런데 정적들이 다니엘을 제거하려고 모략을 꾸미니까 거기 딱 안 걸릴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역사니까. 그러면 이런 현실 만났을때 다니엘은 그 상황에서 당황을 하거나 마음속에 불안하거나 또 기도를 중단하거나 이렇게 하지 아니하고 조금도 거기 대해서 흔들림 없이 마치 당연한 순서를 만났다는듯이, 의례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듯이 그 기도를 계속하고 하나님 앞에는 여전히 감사하였더라 그리 했습니다. 이것이 대단히 어려운 신앙이다 그말이지요.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사람이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그 책임을 남에게 덮어씌우는 이런 일은 우리가 비일비재하게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도 급하면 그리 하려고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잘못해놓고 순간적으로 동생에게 형에게 주변 사람에게 덮어씌우고 빠져나가려는, 그 위기를 모면하려는, 그 순간을 모면하려는 그래서 임기응변이란 것이 능한 사람들, 순간적인 그런 순간대처능력이 탁월한 사람들 굉장히 좋은 인간조건이고 그런 부분인데, 자칫 잘못하면 거기서 속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세상적으로 잘난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하나님 앞에 등용되고 쓰임받는 사람은 대개보면은 세상적으로 둔하고 못나고 어리석고 그런 사람들이 대개 하나님 앞에 붙들려 쓰임을 받고, 그런데 진실하고 순수하고 깨끗한 그런 신앙들, 성경에 보면은 위대한 신앙인물들은 거의 대개 다 그러합니다. 사도바울은 좀 예외고, 그 외에는 거의 대개 다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현실을 만나서, 자기가 잘못해놓고 어떤 일에 대해서 자기 잘못을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것, 공은 자기가 가로채고 책임은 남에게 돌리는 것이 보통 사람인데, 아니면 그 책임을 감당을 해도 자기가 잘못했지만은 할 수 있지만 그 책임을 나눠서 지려고, 나도 잘못했지만 한사람 더 끌어들여서 나 혼자 잘못의 짐을 지면 무거우니까 옆에 사람 끌어들여서 같이 지려고. 아니면 환경을 원망하던지, 시기를 원망하던지, 여러 주변을 끌어들여서 원망하는 그런 핑계대기가 쉬운 것인데, 이런 사람이 아주 낮은 사람이겠고 그보다는 말없이 그 책임을 묵묵히 감당하는 그런 사람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인데, 그보다는 이 다니엘은 그런걸 다 초월해서 자기 잘못이 아니고 다니엘 잘못이 아니고, 다니엘의 실수라든지 욕심이라든지 허물이든지 그런 것으로 인해서 생겨진 문제가 아니고, 사자굴 사건은 그게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 앞에 조상들의 잘못을 짊어지고 기도하는 그 기도,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그 기도하는것 때문에 사자굴을 만났으니까 다니엘로써는 자기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이런 입장에 닥쳤으니까 참 어려운 일인데, 이런 상황에서 다니엘은 감사하였더라. 하나님을 원망하든지 중단하기는 커녕 그 상황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였더라.
그런데 사람이 그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잘못했던지 자기 실수던지 이런 것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사람이 불안하지요. 불안하고 좀 힘이 빠지고 겁도 나고 그리 됩니다. 그런데 어느면을 봐도 자기 잘못이 없는데 어려운 일을 만나면 뜻밖에 담대한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경험해 보셨습니까? 신앙생활 해나가다가 개인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인간관계나 가정적으로나 여러 가지면으로 어려움을 만날 때 그 어려움에 대해서, 그 어려움과 관련하여 자신이 하나님앞에 잘못한 것이 있으면 겁이 납니다. 징계로구나, 회개해야되겠구나 이렇게 되는데 자기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으면, 아무리 따져봐도 내 잘못이 없는데 그런 어려운 상황을 만났으면 그때는 속에서 기쁨이 나오고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다. 담대함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거는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다, 그리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아마 그랬을 겁니다. 순전한 하나님의 역사로 이렇게 되어졌기 때문에 감사하였더라.
우리가 이 신앙을 가지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거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말할 것 없고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한 겁니다. 나와 상관없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때 남의 책임을 내가 찾아가서 지거나, 내가 지지 않아도 되는 질 필요가 없는 그런 책임짐까지 내가 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나와 상관이 있다면, 나와 관계있는 그런 일이라면 내가 직접적인 그런 잘못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도의적인 책임이라도 있고 연관된 그런 책임이 있으니까 그런 책임을 같이 져야되지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자기는 빠져나가는 이런 아주, 그런 사람을 뭐같다 그럽니까? 남에게 책임지우고 자기는 쏙 빠져나가는 그런 사람. 잘 빠져나가는 사람을 뭐라 그럽니까? 저 빗물 담아놓은 통에다가 많이 사다 넣었습니다. 미꾸라지처럼. 얼마나 미끄럽던지 미꾸라지가 쏙쏙 빠져나갑니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그것 참 안 좋은 겁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것이 아주 요긴하게 쓰일 수 있지만은 그거 좋지 않은 겁니다.
우리는 진실하게 어떤 면에서는 미련하게 내가 일부러 남의 짐을 지는 것은 월권이니까 그럴건 아니지만은, 나와 상관된 것이면 공동 책임을 젿 지고 내가 책임을 지는 이런 자세가 대단히 중요하고, 그리될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니엘처럼 감사하는 감사와 기쁨으로 더욱이 하나님 때문에, 계명 때문에, 형제 구원 때문에 어려움을 만났으면 거기서는 더욱 더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되겠다. 이런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다니엘은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나라는, 바벨론 나라 왕은 다니엘을 아니까 그래도 하나님을 함부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러나 일방 방백들이라든지 그 백성들은 하나님 없는 그들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을 잡아 먹었으니까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이 있다면 너희가 우리한테 잡아먹힐 리가 없지 않느냐. 우리들이 너희를 이겼으니까 너희 하나님은 우리한테 진 것이 아니냐’ 이런 인식이 무의식중에 그들에게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그말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세계를 점령하려고 할때, 그 사람들 국기, 욱일승천기. 태양을 향해서 뻗어나가는 그 모습이 일본 국기입니다. 얼마나 참 거만하고 교만하고 건방진 국기인지 모릅니다 그거. 다른 나라 민족들이 알고나면 일본나라 두고, 그러니까 저 민족들이 특이해서 요즘도 난리가 나지요, 주변국들하고 마찰이 되고. 자기들이 똘똘 뭉치고 과학이 발달되고 경제가 넉넉하니까 자신이 있는 겁니다. 우리가 과거에 그랬지만은.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의 인식은 우리가 죄는 무슨 죄냐? 다른, 독일같은 나라는 속은 모르겠지만은 드러나기는 ‘우리는 죄인이다’ 왜? ‘전쟁을 일으켜서 세계에 수많은 피해를 끼쳤으니 전쟁이다, 그래서 죄인이다’ 그러는데 일본 사람들은 ‘우리는 죄인이다’ 왜 죄인이겠습니까? 그 사람들의 인식의 죄는, 우리는, 죄는 전쟁에서 진 것이 죄다. 그렇게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겼으면 되는데 졌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이다. 그래가지고 또 다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지요. 모르는 겁니다. 그 속에는 자기 민족에 대한 우월감이 그 속에 자리 잡고 있을 겁니다.
바벨론 나라는 유다 민족에 대해서 그런 우월 의식이 알게 모르게 있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필연입니다 그거는. 이겼으면 진자에 대해서 ‘니가 잘나봐야 나한테 졌는데. 내가 너를 이겼는데’ 진자는 말이 없지요. 그러니까 바벨론 나라에 모든, 그런데 그중에서 지성인들, 진짜를 아는 사람들은 조심을 합니다. 그래도 어지간히 아는 사람들은, 깊이 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마음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바벨론 온나라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땅바닥에 쳐박혀있고 하나님 백성은 지근지근 밟히고 있고, 하나님 영광이라는 것은 천대 받아서 없는 겁니다. 그런 상황이 되어있는데 다니엘이 사자굴을 만났고 기도를 계속 했고, 감사하고, 사자굴에 들어갔는데 다니엘로써는 할 수 있는 것 다했습니다. 감사했고 계속했고 자기 목숨 던졌고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제는 하나님이 나서실 필요가 있고 때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사자입을 막아버렸고, 그래서 왕이 건져냈고 뚜렷하게 표가 나니까, 그리고난다음에 정적들을 다 죽여버렸고, 그리고 내 나라 관할아래 있는 모든 백성들 전부는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을 두려워서 떨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라 안그러면, 다른 곳에 보면은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면 그 집을 헐어서 거름터를 만들것이다’ 그런 역사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천대조롱을 받고 바닥에 떨어져있고, 하나님의 백성은 밟히는 그런 상황에서 다니엘 한사람의 신앙이 들어서 그 온 전국에 하나님의 이름을 더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고 하나님의 백성을 존귀하게 만든 것이 다니엘의 신앙의 승리다.
이런일을 우리가 해야되는데 하고 있습니까? 우리 학생들이 자기 다니는 그 학교에서, 자기가 다니는 그 학원에서, 불신 식구들만 있는 그 가정에서, 안 믿는 사람들만 가득찬 회사 사무실에서, 군대라는 그런 떨어져있는 곳에서, 또 자기 있는 집 주변에서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자기 한사람이 다니엘같은 이런 신앙을 가질때 그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크게 영광을 받으시고 이름이 존귀하게 되고, 그때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세상 사람들은 다시 한번 새롭게 보게 되어있습니다. 과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참 다르다. 뭔가 좀 다르다. 벌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것이 되는데 우리는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지.
그래서 첫째는, 오후 말씀에서는 첫째는, 우리의 모든 현실을 전부 동방의 에덴동산입니다. 이거는 핑계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학교때는 그 설교를 하고 보니까, 늘 말씀드린대로, 70억 인구가 있으면 현실이 70억갠데, 계속 바뀌는데 그 중에서 내게 닥친 현실이 70억 인구중에서 나한테는 내가 만난 그 현실이 가장 좋고 유익되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내가 보기에 70억에서 하나빠진 그 수많은 60억개 넘는 그 현실이 있어서, 온갖 좋게 다 보여지는 것이 있어도 그거는 자기 주관이고 욕심이지 전지하신 하나님이 보실때는 내가 만난 그 현실이 내 생각에 어떻게 보여지든 느껴지든 자기에게 그렇게 상황이 됐든, 자기가 만난 그 현실이 자기한테는 가장 좋다는 이 사실이 변하지 않아야 됩니다. 이걸 믿는 믿음을 가질때 우리는 현실을 다 초월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굳게 잡으십시다.
어떤 현실이든 우리 모든 현실은 전부 동방의 에덴동산이다. 거기서 우리는 요셉처럼 될 수도 있고 나아만 종의 그 여종처럼 될 수도 있고, 다니엘처럼 될 수도 있고 사도바울처럼 될 수도 있고, 나는 현실이 어떠해서 못했다 그 핑계댈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분이고 제한받지 않는 분이니까. 문제는 그 현실 맞이하는 우리 자신들이 문제입니다. 나 자신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너는 얼굴이 좀 못나서 네가 싫다.’ ‘너는 키가 좀 작아서 네가 싫다.’ ‘너는 눈이 나빠서 네가 싫다.’ ‘너는 공부를 너무 못해서 무식해서 네가 싫다.’ ‘너는 머리 나빠서 싫다.’ ‘너는 몸이 어떠해서 싫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환경에 영향받지를 않는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 내게 당면한 내 입장, 내 형편, 내 처지 그게 현실이고 거기는 바로 동방의 에덴동산이고 거기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고 그 하나님을 내가 모시고 살면 바로 거기서 하나님 영광은 크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
두 번째 다니엘의 신앙에서 환난을 만났을때 다니엘은 요동치 않고 중단하지 않고 감사했다. 다시 말하면 다니엘이 바로 그 현실을 주인으로 다스렸다는 겁니다. 사자굴이라는 현실을 만났는데 다니엘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했으면 현실에 피동이 된 거지요. 종이 된 거지요. 주인이 안되는 겁니다.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면 현실에게 피동인데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되겠다, 능동적으로 감사했습니다. 그 현실을 주인으로 산 겁니다. 사자굴이라는 죽음이 경각에 있는 그 현실을 주인으로 살았다. 현실에 피동되지 않은 겁니다.
그리고 그 신앙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러면 크게 세 번째로, 다니엘의 신앙의 승리는 어디서 나왔을까? 이거는 다니엘의 신앙생활에서 나온 겁니다. 다니엘의 신앙과 그 승리는 다니엘의 신앙승리에서 나왔는데 그 다니엘 신앙을, 자 오늘 주일학교 학생들 중간반 학생들 요약지에 좀 이상한 거 발견한 사람 한번 손들어 볼까요? 오늘 요약지 내준 오전 설교에서 ‘어 이상하다’ 싶은 거 발견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까? 제가 설교를 잘못했는가요? 못 알아들었는가요? 요약지에. 그러면 봅시다. 다니엘의 신앙 생활. 첫째가 뭐였습니까? 작은 1번에, 중간 1번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다니엘의 신앙생활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서 작은 1번 첫째로 하나님만 전부 삼았다, 하나님만 소망했다, 하나님만 믿었고 의지하고 바라봤다 그래서 다니엘은 하나님 한분만 자기 전부로 삼았지 다른 것을 욕망하지 않았습니다. 특수학교에 들어가도 그 특수학교를 통해서 출세를 욕망하지 않았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내려줄때 그것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머리 좋게 주셔야 되고 건강 주셔야 되지 음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봤고. 다니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과 자기 관계, 하나님 섬기는 그 일에 이용물로 삼았지 재물이든지 권세든지 명예든지 세상 출세를 욕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만 믿었고 의지했고 바라봤다. 하나님만 전부 삼았다. 참 대단히 어렵지만은 우리가 나아갈 신앙입니다.
하나님만 전부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위해서만 살았습니다. 하나님에게 욕 돌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그 하나님을 목석으로 그렇게 알지 않았습니다. 살아계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을 하고 알고 그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에 누가 될까 하여 모든 매사를 조심했고 두려워했고 절제했고 참았고 손해봤고, 그래서 하나님에게 손해갈 것 같으면 내가 손해보고 말았고, 물질 손해든지 위신 손해든지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가 앞에 나서서 모든 하나님 앞에 말하자면은 바람막이가 다 되준 겁니다. 다니엘 자기가 손해보고 매맞고 낮아지고 천대받고 그리 될지라도 하나님에게 욕 돌아갈 일은 결코 하지를 않았습니다, 두 번째.
그다음 세 번째는 하나님 한분에게만 순종했습니다. 왕에게 순종하는 것 같으나 실제는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기도하지말란 것은 다니엘이 왕에게 순종할 수 없었고 하나님 한분에게만 순종을 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첫 번째 뭐라고요? 하나님만 소망, 전부 삼았습니다. 두 번째는요? 하나님의 영광, 생각하십니까? 모두 다 복음에 영광이 가로막혀도 내 위신은 깍이면 안되지, 교회가 욕을 얻어먹어도 내 체면은 깍이면 안되지, 또 믿는 사람이 복음 운동에 손해봐도 자기 위신, 자기 체면 그거는 깍이면 안되지. 이런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중에서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니엘은 자기 위신 체면, 이거는 그냥 일부로 그러지는 않아도 거기 전혀 의미나 가치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는 지켰지만, 그러니까 내가 그래도 예수믿는 사람이고 어느 정도 있는데 옷을 함부로 입고 다니면 내가 옷을 함부로 입고 다니는 것 때문에 하나님에게 복음의 누가 될까 싶어 그래서 옷도 조심해서 입고, 자기 건강도 그렇고, 생활 환경도 그렇고, 그러기 때문에 집을 깨끗하게 치운 사람도 자기 타고는 선천적으로 깨끗하기를 좋아해서 정리를 좋아해서 그리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 하는 것 하고, 내가 집을 어질러 놓으면 혹시 누가 와서, 예수믿는 사람, 집사, 이 교인 집이 이렇게 지저분하면 욕을 얻어먹으니까 그래도 정리해야지, 그래 정리하는 것 하고, 자기 성격이 원래 그래서 정리하는 것 하고는 하늘과 땅 차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한 것이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깨끗한게 좋긴 좋지만, 하나는 생명에 속한 겁니다. 참는 것도 그렇습니다. 원래 사람이 좋아서 잘 참는사람, 선천적으로 잘 참는 사람, 그래 착한 것 하고,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참는 것 하고는 하늘과 땅 차입니다. 하나는 생명이고, 하나는 사망입니다. 이걸 구별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나는 모든 매사에 자기 있는 그 위치에서 인간관계, 책임과 의무, 자기 자신의 생활 전부를 거기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을 하면서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가, 입는것도 먹는것도 생활하는것도 참는것도 견디는 것도 충성하는 것도, 모든 절제 전부다 모든 것 다 그렇습니다. 그런거 아니면, 그거 상관없이 그냥, 자기자신의 위신 때문에, 처지 때문에, 체면 때문에 그리하는가, 깊이 신중히 생각을 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오로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모든걸 다 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보니까 다니엘은 밤낮 너의 밤낮 섬기는 네 하나님이, 왕이 그래 봣습니다. 다니엘 가까이 있으니까. 두 번쨉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 한분에게만 순종했습니다. 다니엘은, 그 누구도 다니엘을 움직일 수 없었고, 오로지 하나님이 원동이 되어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이면 순종하고, 그게 아니면 천하 없어도 요동치 않는 것이 다니엘의 신앙입니다.
세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다음 크게 두 번째는, 사람에게 대한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전부니까 사람은 필요없느냐? 그러면 영광이 안됩니다.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신앙의 첫 번째는, 인간관계에서, 사람사는 모든 관계에서 자기 맡은 책임이 있고 의무가 있으니까, 거기 흠이 없을 만큼 충실했습니다. 이것도 참 대단히 어렵습니다. 말은 쉬워도. 어쨌든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위도 바로봐야 하고 옆도 바로 봐야 하고 앞도 바로 봐야 하고, 자기일에 대해서 충성도 해야 되고 진실도 해야 되고 정직도 해야 되고 원만하기도 해야 되고 참 어렵습니다. 자기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 정적들이 낱낱이 털었지만 먼지가 안날만큼, 이렇게 빈틈없는 책임과 의무를, 그리 감당합니까? 얼마나 깨어 살아야 되는지 모릅니다. 아차하는 순간, 사람이 실수가 없을 순 없는데, 깜빡하면 실수하는거죠. 흠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모든 사람과 인간관계, 왕과 자기 관계, 인간관계를 말할때면, 그럼 왜 정적들이 생겼는가? 이 정적이란 이거는 작심을 하고 다니엘을 잡아먹으려고 나선 사람들이니까 이거는 다니엘로써는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다니엘, 자기가 그 정적들은 다니엘을, 다니엘이 잘못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들의 욕심이고 그 사람들이 다니엘을 적 삼아서 한 것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인데, 그 외에는 다니엘의 모든 인간관계에 흠이 없었습니다. 비굴하지도, 교만하지도, 아부하지도 아첨하지도 않았고, 사람들 듣기 좋도록 아부하는거, 그 참 그러니까 윗사람한테 아부하는거 친구끼리도 아부하는 남 듣기좋은 말 많이하는, 실없는 소리하는거, 그것도 교만한 것 다 문제가 되는데 이 다니엘은 아부하지도 않았고 비굴하지도 않았고 교만하지도 않았고 치우치지도 않았고, 모든 인간관계에 흠이 없는 인간관계를 맺어갔다. 어떻게 그리 살았을까?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개인생활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이거는 가정생활도 뜰어있겠고, 경제생활도 들어있겠고, 취미생활도 들어있겠고, 여가 생활도 들어있겠고, 자기 개인적인 모든 생활에, 거기 대해서, 이거는 엄밀한게 될 수도 있는데, 거기 대해서도 아무런 흠이 없는, 흠 잡을 데 없는 그런 생활했다. 크게 두가지지요.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둘째는 사람에 대한 신앙.
그다음 세 번째는 뭐냐? 세 번째는 뭡니까? 요약지에 3번이 들어있던가요? 중간3번? 서지훈 있습니까? 없지요. 근데 왜 말을 안했어요? 3번째는 뭐냐? 이생활을 평소에 계속한겁니다. 한번한 것이 아니고, 한달하다 말고, 두달하다 말고, 일년하다 만 것이 아니고, 이 생활이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참 가장 어려운 생활입니다. 그래서 요런 생활이 되어졌을 때, 다니엘은 이 생활이 계속될 때, 하나님께 대한 신앙, 하나님만 욕망을 하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자기 책임과 의무를 빈틈없이 감당을 하고, 또 모든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참 잘하고, 개인생활에 흠이 없고, 이 두가지 큰 두가지 생활을 중단하지 않고 평소 계속해나가는 겁니다. 요런 생활을 3개월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요런 생활을 3년만 하면 교계가 그 사람을 아는 사람이 된다. 아마 교계가 아는 사람이 될겁니다. 우리 작은, 교회안에서 1달만 하면, 그 사람은 우리 교인들 눈에 대번에 딱 띕니다. 요 생활을 3개월만하면 공회적으로 눈에 띄는 사람이 될거고, 요 생활을 1년만 하면, 우리공회 지도자급은 될만큼, 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생활 3년만하면 우리나라 교계지도자가 될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대게는 이 생활을 한주하다 말고 한달하다 말고 하다 중단하다 또 쉬었다 계속하고, 끊어지니까 연결이 안되니까 이 생활이 큰 폭발 능력이 나타나지를 못하는 거죠.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다니엘의 신앙에서 배울 것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는 신앙입니다. 다니엘의 신앙. 그 신앙은 뭐냐? 그 신앙은 사자굴을 앞에 놓고도 중단하지 않고 감사한 그 신앙. 이 신앙입니다 다니엘의 신앙. 두 번째는 다니엘의 신앙의 승립니다. 이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결과로 승리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낸, 존귀하게 만든 이 신앙의 승리를 우리가 나도 가져야 되겠다. 그다음 3번째는 요 신앙과 승리를 있게 만든 다니엘의 생활입니다. 3가지, 하나님께 대한 신앙 3가지. 사람에게 대한 3가지. 이 두가지 생활을 계속하는 것, 이것이 다니엘의 신앙생활 이것이 우리가 다니엘에게서 배울 것이다, 이걸 기억하고 우리도 다시한번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나도 다니엘처럼 되야되겠다, 요 신앙 가지기를 소원하고 새롭게 힘을 쓰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제목: 다니엘의 신앙에서 배울 것
요점:
1. 모든 현실은 동방의 에덴동산
- 다니엘의 포로된 현실
- 요셉의 종으로 팔려간 현실
- 아람 나라 나아만 집에 종으로 끌려간 계집종의 현실
- 각각 최악의 현실이었으나 그곳에서 하나님 영광 크게 드러낸 역사
- 현실을 핑계 댈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 이 복음을 받은 우리들
2. 다니엘의 신앙과 승리
1)신앙-환난을 감사와 기쁨으로
-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지는 조서가 반포되었으나
- 다니엘은 그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기도하며 감사
- 책임은 남에게 돌리고, 공은 제가 가로채는 것이 사람들
- 우리는 책임을 자기가 지는 인격을 기를 것
- 하나님, 복음, 형제 구원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은 감사로
2)승리-하나님 영광, 복음을 존귀케
- 신앙의 결과가 승리로 나타났으니
- 바벨론 나라에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은 천대받고 있었으나
- 다니엘을 통하여 하나님 영광이 크게 드러나고
-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 백성은 크게 존귀하게 된 것
- 우리는 각자 자기 위치에서 이렇게 하고 있는지?
3. 다니엘의 신앙생활
1)하나님께 대한 신앙
①하나님만 소망, 하나님으로 전부 삼아
②하나님 영광 위해, 하나님 영광 위해 모든 노력, 충성, 절제, 인내, 조시
③하나님께만 순종- 왕에게 순종도 하나님 때문, 최종은 하나님께만 순종
2)사람에게 대한 생활
①책임 의무에 무흠- 국사(國事)에 대하여 허물이 없음
②인간 관계에 무흠- 왕에 대해서도 죄를 범치 아니함
③개인 생활에 깨끗- 보이지 않는 생활, 취미도 여가도 모든 생활에서도
4. 다니엘의 신앙에서 배울 것
1)신앙- 환난을 감사와 기쁨으로
2)승리- 하나님 영광과 복음을 존귀케
3)생활- 두 가지 승리의 결과는
①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②사람에게 대한 바른 생활 3가지
③이 신앙생활이 평소 생활에서 계속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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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6 주후
다니엘 6:25-27
우리 신앙의 최종 표준은 주님이 우리 신앙의 표준입니다. 그 주님을 알고 닮아서 주님같이 되는 것이 우리 목표인데, 주님 닮아가기까지 주님을 우리보다 먼저 알고 닮아간 신앙의 선진들이 많이 있으니 그들 한사람 한사람들이 다 우리에게 신앙의 표준적인 그런 인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을 닮아갈수록 주님을 점점 닮아가는 그런 면이 많아진다 그리 볼 수 있겠고, 물론 그 개인 개인이 다 여러 가지로 주님을 온전하게 닮았겠지만은 특징들을 주셔서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의 조상으로, 또 요셉같은 그런 분들에게는 하나님의 현실 인도에 변함없는 믿음으로, 또 다니엘 같은 이런 분들은 역경에 용감한 신앙의 용사적인 그런 면으로, 또 사도바울 같은 분들은 성령의 사람으로 각각 특징을 주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런 분들의 걸음을 알아서 우리도 그리 살아서 그런 신앙의 선진들처럼 되면서 동시에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 성경에 그런 인물들을 기록해주신 목적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성경은 위인전이 아니고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다 그러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신앙에서 오늘 우리가 배울 것, 몇가지 한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그전에 첫째로 다니엘이란 사람은, 바벨론 나라에 포로되어간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포로라는 그 입장, 그 상황, 그 형편, 그 환경, 그 처지, 그 현실, 거기서 그 나라에 총리대신, 단일 총리가 되기까지, 왕의 신임을 전폭적으로 얻고 단일 총리가 되기까지 그 다니엘의 신앙이 어떠했던가 이게 오늘 말씀에 말하자면은 중심내용이 되겠는데, 그러면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다니엘의 그 현실은 포로라는 그 입장, 결과라기보다 그 입장 상황인데 포로라는 그 현실, 그 입장, 그 상황 그 처지 그 환경 그 형편 거기서 총리가 되기까지 굉장히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요셉이 애굽나라에 종으로 팔려간 그 현실, 또 나아만의 집에 계집종으로 끌려간 그 여종, 그 형편. 그러면 시대는 다르고 또 장소는 다르고 구체적인 그런 환경은 다를지라도 전체적으로 볼때 세 사람 다 비슷한 그런 입장입니다. 다윗으로 말한다면 다윗의 형편은 또 여덞 아들중에 막내로써 목동으로, 양치는 목자, 목동으로 그렇게 살았고, 사울에게 죽음과 자신의 거리가 한발짝 뿐이라 할만큼 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쫓겨다니던 그런 생활을 계속해서 했던 그런 다윗.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바로 40년, 바로의 궁전 거기서 바로 원수나라의 핵심 중앙본부 그 속에서 40년, 참 각각 주시는 그런 현실이 달라고 거기서 그렇게 되기까지 그 마지막 결과가 되기까지 어떠했던가. 그래서 이런면을 두고 생각해볼때 다니엘의 포로된 현실에서 총리되기까지의 성공이 되기까지,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서 총리되기까지, 또 나아만의 계집종이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기까지, 다윗이 위대한 그런 인물이 되기까지, 그러면 그 모든 현실이 각각 다르지만은 하나 공통점이 있는 것은 각자 자기의 현실 거기서 신앙생활을 잘 했고 결과적으로 성공과 승리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여러 가지를, 여러 사람의 현실 상황과 결과적인 그 신앙의 승리를 보고 하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현실 환경이란 것은 장소에 상관없이, 또 때에 상관없이, 환경 형편에 상관없이 전부가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에게 만들어주실 때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신 그 말씀 그대로 우리의 모든 현실 상황은 언제든 어디서든 어떤 환경이든 전부 동방의 에덴동산이다, 다시 말하면 어디서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모실 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동방이라는 그 의미를 좀 생각을 많이 해봐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 아닌 사람은 해당될 수 없고, 또 해당되지만은 이 복음을 받지 못해서 모르는 사람들은 몰라서 그럴 수 있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고 더하여 이 복음을 받아서 아는 우리들입니다. 부러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아도 안 들을 수 없을 만큼 수도없이 많은 말씀을 들어서 모를래야 모를 수 없고, 핑계할 수 없을만큼 많이 들어서 아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현실은 전부다 동방의 에덴동산이다. 포로로 잡혀갔든지, 종으로 팔려갔든지, 끌려갔든지, 감옥에 들어있던지, 폭삭 망해서 부도가 나서 길거리에 나앉았던지, 나사로처럼 외롭고 온 몸에 병이 들어서 그런 처지가 되어졌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는 바로 거기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 입을 수 있는 바로 동방의 에덴동산이라는 것을 첫째 여기서 꼭 기억을 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서 광야로 인도하실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를 하셨습니다. 구름과 불기둥은 공중에 떠 있습니다. 그래서 공중에 떠 있으니까 땅에서 걸어서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가면 그 사람은, 그 백성들에게는 막히는 것도 있고 함정도 있고 빠지는 것도 있고 가지 못하는 것도 있고 그리 됩니다. 그런데 공중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은 산이든 바다든 골짜기든 사막이든 상관없이 그냥 인도를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인도를 따라만 가면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거기 제재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은 시간에, 환경에, 형편처지에, 그 모든 주변에 영향을 받고 피동을 받지만은 하나님의 인도는 그런것에 지장받거나 영향받거나 피동되지를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는 것이고, 우리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인도를 믿음으로 따라만 가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따라만 가면 되는데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의 주관 때문입니다. 주관은 의심이고 의심은 바로 불신이 되는 겁니다. 믿음으로 가니까 바다 위에 뛰어내렸지만은, 바다 위에 내려서 바다 위를 걸어갔으나 의심이 들어가고 주관이 들어가니까 바다속에 빠져버렸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저도 설교하면서 말은 쉽게 합니다. 그러나 현실생활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어려워서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하지 못할 일입니다. 사람이 절대 할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방법을 두가지로 주셨으니,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인데,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을 수 있는 방법을 두가지를 주셨으니 첫째는 뭡니까? 첫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그런즉 놀라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나이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이 해주시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배웠습니다. 첫째는 뭡니까? 가장 알기 쉽게 첫째는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엇일까요? 하나는 진합태산입니다. 평소 이 생활을 계속해나가는 것.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는 것. 중단되었으면 또다시 이어서 계속하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된 현실이든지 종으로 팔려간 현실이든지, 끌려간 현실이든지 목동의 처지든지, 나사로 같은 그런 입장이든지 어쨌든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기 현실이 어떠해서 내 주변에 사람이 어떻게 해서, 좀 돌아보면 그런 원망 아쉬운 그런 걸 많이 하지요. ‘내가 부모를 잘 만나서 조금만 도움을 받았더라면’, ‘내가 공부를 조금만 더 했더라면’, 뭐 어떻게만 했더라면, 그랬으면 내가 힘을 썼는데 앞에서 조금만 끌어줬더라면, 뒤에서 한발짝만 밀어줬더라면, 조금만 더 도움을 줬더라면, 어떻게 됐더라면 내가 어떻게 됐을건데. 그게 전부다 핑계입니다. 우리 기독자들에게는 그런 핑계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서 그런 것이고 또 현실이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는 시공을 초월하는데 그러므로 평안함 가운데 가면 되는데 모든 현실고통은 전부 자기가 만드는 것이다 그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두 번째로는, 이 다니엘의 신앙에 대해서, 환난에 대해서 감사했다는 겁니다. 사자굴이 앞에 닥쳤을때 다니엘은 거기에 피동되거나 영향받지 아니하고 사자굴을 앞에 두고 다니엘은 여전히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을 두고 기도하면서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전에 하던대로. 그러면 다니엘이 사자굴을 만나게 된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일 때문입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이고 그 간구속에는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는 것과 이제 그 민족을 긍휼히 여겨주시라는 그런 간구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을 진노케하는 그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회개. 그리고 이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고 본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옵소서. 하나님의 노를 풀고 긍휼을 구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였을까. 그런 기도를 매일 하루 세 번씩 꼬박꼬박 그렇게 진심을 담아서 그런 기도를 다니엘이 했습니다. 다니엘은 해야되는 일이고 또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나라에 허락된 일인데 그런데 정적들이 다니엘을 제거하려고 모략을 꾸미니까 거기 딱 안 걸릴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역사니까. 그러면 이런 현실 만났을때 다니엘은 그 상황에서 당황을 하거나 마음속에 불안하거나 또 기도를 중단하거나 이렇게 하지 아니하고 조금도 거기 대해서 흔들림 없이 마치 당연한 순서를 만났다는듯이, 의례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듯이 그 기도를 계속하고 하나님 앞에는 여전히 감사하였더라 그리 했습니다. 이것이 대단히 어려운 신앙이다 그말이지요.
오전에 말씀드린대로 사람이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그 책임을 남에게 덮어씌우는 이런 일은 우리가 비일비재하게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도 급하면 그리 하려고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잘못해놓고 순간적으로 동생에게 형에게 주변 사람에게 덮어씌우고 빠져나가려는, 그 위기를 모면하려는, 그 순간을 모면하려는 그래서 임기응변이란 것이 능한 사람들, 순간적인 그런 순간대처능력이 탁월한 사람들 굉장히 좋은 인간조건이고 그런 부분인데, 자칫 잘못하면 거기서 속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세상적으로 잘난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하나님 앞에 등용되고 쓰임받는 사람은 대개보면은 세상적으로 둔하고 못나고 어리석고 그런 사람들이 대개 하나님 앞에 붙들려 쓰임을 받고, 그런데 진실하고 순수하고 깨끗한 그런 신앙들, 성경에 보면은 위대한 신앙인물들은 거의 대개 다 그러합니다. 사도바울은 좀 예외고, 그 외에는 거의 대개 다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현실을 만나서, 자기가 잘못해놓고 어떤 일에 대해서 자기 잘못을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것, 공은 자기가 가로채고 책임은 남에게 돌리는 것이 보통 사람인데, 아니면 그 책임을 감당을 해도 자기가 잘못했지만은 할 수 있지만 그 책임을 나눠서 지려고, 나도 잘못했지만 한사람 더 끌어들여서 나 혼자 잘못의 짐을 지면 무거우니까 옆에 사람 끌어들여서 같이 지려고. 아니면 환경을 원망하던지, 시기를 원망하던지, 여러 주변을 끌어들여서 원망하는 그런 핑계대기가 쉬운 것인데, 이런 사람이 아주 낮은 사람이겠고 그보다는 말없이 그 책임을 묵묵히 감당하는 그런 사람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인데, 그보다는 이 다니엘은 그런걸 다 초월해서 자기 잘못이 아니고 다니엘 잘못이 아니고, 다니엘의 실수라든지 욕심이라든지 허물이든지 그런 것으로 인해서 생겨진 문제가 아니고, 사자굴 사건은 그게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 앞에 조상들의 잘못을 짊어지고 기도하는 그 기도,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그 기도하는것 때문에 사자굴을 만났으니까 다니엘로써는 자기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이런 입장에 닥쳤으니까 참 어려운 일인데, 이런 상황에서 다니엘은 감사하였더라. 하나님을 원망하든지 중단하기는 커녕 그 상황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였더라.
그런데 사람이 그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잘못했던지 자기 실수던지 이런 것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사람이 불안하지요. 불안하고 좀 힘이 빠지고 겁도 나고 그리 됩니다. 그런데 어느면을 봐도 자기 잘못이 없는데 어려운 일을 만나면 뜻밖에 담대한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경험해 보셨습니까? 신앙생활 해나가다가 개인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인간관계나 가정적으로나 여러 가지면으로 어려움을 만날 때 그 어려움에 대해서, 그 어려움과 관련하여 자신이 하나님앞에 잘못한 것이 있으면 겁이 납니다. 징계로구나, 회개해야되겠구나 이렇게 되는데 자기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으면, 아무리 따져봐도 내 잘못이 없는데 그런 어려운 상황을 만났으면 그때는 속에서 기쁨이 나오고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다. 담대함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거는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다, 그리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아마 그랬을 겁니다. 순전한 하나님의 역사로 이렇게 되어졌기 때문에 감사하였더라.
우리가 이 신앙을 가지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거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말할 것 없고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한 겁니다. 나와 상관없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때 남의 책임을 내가 찾아가서 지거나, 내가 지지 않아도 되는 질 필요가 없는 그런 책임짐까지 내가 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나와 상관이 있다면, 나와 관계있는 그런 일이라면 내가 직접적인 그런 잘못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도의적인 책임이라도 있고 연관된 그런 책임이 있으니까 그런 책임을 같이 져야되지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자기는 빠져나가는 이런 아주, 그런 사람을 뭐같다 그럽니까? 남에게 책임지우고 자기는 쏙 빠져나가는 그런 사람. 잘 빠져나가는 사람을 뭐라 그럽니까? 저 빗물 담아놓은 통에다가 많이 사다 넣었습니다. 미꾸라지처럼. 얼마나 미끄럽던지 미꾸라지가 쏙쏙 빠져나갑니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그것 참 안 좋은 겁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것이 아주 요긴하게 쓰일 수 있지만은 그거 좋지 않은 겁니다.
우리는 진실하게 어떤 면에서는 미련하게 내가 일부러 남의 짐을 지는 것은 월권이니까 그럴건 아니지만은, 나와 상관된 것이면 공동 책임을 젿 지고 내가 책임을 지는 이런 자세가 대단히 중요하고, 그리될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니엘처럼 감사하는 감사와 기쁨으로 더욱이 하나님 때문에, 계명 때문에, 형제 구원 때문에 어려움을 만났으면 거기서는 더욱 더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되겠다. 이런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다니엘은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나라는, 바벨론 나라 왕은 다니엘을 아니까 그래도 하나님을 함부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러나 일방 방백들이라든지 그 백성들은 하나님 없는 그들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을 잡아 먹었으니까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이 있다면 너희가 우리한테 잡아먹힐 리가 없지 않느냐. 우리들이 너희를 이겼으니까 너희 하나님은 우리한테 진 것이 아니냐’ 이런 인식이 무의식중에 그들에게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그말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세계를 점령하려고 할때, 그 사람들 국기, 욱일승천기. 태양을 향해서 뻗어나가는 그 모습이 일본 국기입니다. 얼마나 참 거만하고 교만하고 건방진 국기인지 모릅니다 그거. 다른 나라 민족들이 알고나면 일본나라 두고, 그러니까 저 민족들이 특이해서 요즘도 난리가 나지요, 주변국들하고 마찰이 되고. 자기들이 똘똘 뭉치고 과학이 발달되고 경제가 넉넉하니까 자신이 있는 겁니다. 우리가 과거에 그랬지만은.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의 인식은 우리가 죄는 무슨 죄냐? 다른, 독일같은 나라는 속은 모르겠지만은 드러나기는 ‘우리는 죄인이다’ 왜? ‘전쟁을 일으켜서 세계에 수많은 피해를 끼쳤으니 전쟁이다, 그래서 죄인이다’ 그러는데 일본 사람들은 ‘우리는 죄인이다’ 왜 죄인이겠습니까? 그 사람들의 인식의 죄는, 우리는, 죄는 전쟁에서 진 것이 죄다. 그렇게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겼으면 되는데 졌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이다. 그래가지고 또 다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지요. 모르는 겁니다. 그 속에는 자기 민족에 대한 우월감이 그 속에 자리 잡고 있을 겁니다.
바벨론 나라는 유다 민족에 대해서 그런 우월 의식이 알게 모르게 있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필연입니다 그거는. 이겼으면 진자에 대해서 ‘니가 잘나봐야 나한테 졌는데. 내가 너를 이겼는데’ 진자는 말이 없지요. 그러니까 바벨론 나라에 모든, 그런데 그중에서 지성인들, 진짜를 아는 사람들은 조심을 합니다. 그래도 어지간히 아는 사람들은, 깊이 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마음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바벨론 온나라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땅바닥에 쳐박혀있고 하나님 백성은 지근지근 밟히고 있고, 하나님 영광이라는 것은 천대 받아서 없는 겁니다. 그런 상황이 되어있는데 다니엘이 사자굴을 만났고 기도를 계속 했고, 감사하고, 사자굴에 들어갔는데 다니엘로써는 할 수 있는 것 다했습니다. 감사했고 계속했고 자기 목숨 던졌고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제는 하나님이 나서실 필요가 있고 때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사자입을 막아버렸고, 그래서 왕이 건져냈고 뚜렷하게 표가 나니까, 그리고난다음에 정적들을 다 죽여버렸고, 그리고 내 나라 관할아래 있는 모든 백성들 전부는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을 두려워서 떨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라 안그러면, 다른 곳에 보면은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면 그 집을 헐어서 거름터를 만들것이다’ 그런 역사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천대조롱을 받고 바닥에 떨어져있고, 하나님의 백성은 밟히는 그런 상황에서 다니엘 한사람의 신앙이 들어서 그 온 전국에 하나님의 이름을 더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고 하나님의 백성을 존귀하게 만든 것이 다니엘의 신앙의 승리다.
이런일을 우리가 해야되는데 하고 있습니까? 우리 학생들이 자기 다니는 그 학교에서, 자기가 다니는 그 학원에서, 불신 식구들만 있는 그 가정에서, 안 믿는 사람들만 가득찬 회사 사무실에서, 군대라는 그런 떨어져있는 곳에서, 또 자기 있는 집 주변에서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자기 한사람이 다니엘같은 이런 신앙을 가질때 그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크게 영광을 받으시고 이름이 존귀하게 되고, 그때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세상 사람들은 다시 한번 새롭게 보게 되어있습니다. 과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참 다르다. 뭔가 좀 다르다. 벌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것이 되는데 우리는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지.
그래서 첫째는, 오후 말씀에서는 첫째는, 우리의 모든 현실을 전부 동방의 에덴동산입니다. 이거는 핑계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학교때는 그 설교를 하고 보니까, 늘 말씀드린대로, 70억 인구가 있으면 현실이 70억갠데, 계속 바뀌는데 그 중에서 내게 닥친 현실이 70억 인구중에서 나한테는 내가 만난 그 현실이 가장 좋고 유익되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내가 보기에 70억에서 하나빠진 그 수많은 60억개 넘는 그 현실이 있어서, 온갖 좋게 다 보여지는 것이 있어도 그거는 자기 주관이고 욕심이지 전지하신 하나님이 보실때는 내가 만난 그 현실이 내 생각에 어떻게 보여지든 느껴지든 자기에게 그렇게 상황이 됐든, 자기가 만난 그 현실이 자기한테는 가장 좋다는 이 사실이 변하지 않아야 됩니다. 이걸 믿는 믿음을 가질때 우리는 현실을 다 초월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굳게 잡으십시다.
어떤 현실이든 우리 모든 현실은 전부 동방의 에덴동산이다. 거기서 우리는 요셉처럼 될 수도 있고 나아만 종의 그 여종처럼 될 수도 있고, 다니엘처럼 될 수도 있고 사도바울처럼 될 수도 있고, 나는 현실이 어떠해서 못했다 그 핑계댈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분이고 제한받지 않는 분이니까. 문제는 그 현실 맞이하는 우리 자신들이 문제입니다. 나 자신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너는 얼굴이 좀 못나서 네가 싫다.’ ‘너는 키가 좀 작아서 네가 싫다.’ ‘너는 눈이 나빠서 네가 싫다.’ ‘너는 공부를 너무 못해서 무식해서 네가 싫다.’ ‘너는 머리 나빠서 싫다.’ ‘너는 몸이 어떠해서 싫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환경에 영향받지를 않는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 내게 당면한 내 입장, 내 형편, 내 처지 그게 현실이고 거기는 바로 동방의 에덴동산이고 거기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고 그 하나님을 내가 모시고 살면 바로 거기서 하나님 영광은 크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
두 번째 다니엘의 신앙에서 환난을 만났을때 다니엘은 요동치 않고 중단하지 않고 감사했다. 다시 말하면 다니엘이 바로 그 현실을 주인으로 다스렸다는 겁니다. 사자굴이라는 현실을 만났는데 다니엘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했으면 현실에 피동이 된 거지요. 종이 된 거지요. 주인이 안되는 겁니다.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면 현실에게 피동인데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되겠다, 능동적으로 감사했습니다. 그 현실을 주인으로 산 겁니다. 사자굴이라는 죽음이 경각에 있는 그 현실을 주인으로 살았다. 현실에 피동되지 않은 겁니다.
그리고 그 신앙으로 승리했습니다. 그러면 크게 세 번째로, 다니엘의 신앙의 승리는 어디서 나왔을까? 이거는 다니엘의 신앙생활에서 나온 겁니다. 다니엘의 신앙과 그 승리는 다니엘의 신앙승리에서 나왔는데 그 다니엘 신앙을, 자 오늘 주일학교 학생들 중간반 학생들 요약지에 좀 이상한 거 발견한 사람 한번 손들어 볼까요? 오늘 요약지 내준 오전 설교에서 ‘어 이상하다’ 싶은 거 발견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까? 제가 설교를 잘못했는가요? 못 알아들었는가요? 요약지에. 그러면 봅시다. 다니엘의 신앙 생활. 첫째가 뭐였습니까? 작은 1번에, 중간 1번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다니엘의 신앙생활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서 작은 1번 첫째로 하나님만 전부 삼았다, 하나님만 소망했다, 하나님만 믿었고 의지하고 바라봤다 그래서 다니엘은 하나님 한분만 자기 전부로 삼았지 다른 것을 욕망하지 않았습니다. 특수학교에 들어가도 그 특수학교를 통해서 출세를 욕망하지 않았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내려줄때 그것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머리 좋게 주셔야 되고 건강 주셔야 되지 음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봤고. 다니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과 자기 관계, 하나님 섬기는 그 일에 이용물로 삼았지 재물이든지 권세든지 명예든지 세상 출세를 욕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만 믿었고 의지했고 바라봤다. 하나님만 전부 삼았다. 참 대단히 어렵지만은 우리가 나아갈 신앙입니다.
하나님만 전부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위해서만 살았습니다. 하나님에게 욕 돌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그 하나님을 목석으로 그렇게 알지 않았습니다. 살아계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을 하고 알고 그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에 누가 될까 하여 모든 매사를 조심했고 두려워했고 절제했고 참았고 손해봤고, 그래서 하나님에게 손해갈 것 같으면 내가 손해보고 말았고, 물질 손해든지 위신 손해든지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가 앞에 나서서 모든 하나님 앞에 말하자면은 바람막이가 다 되준 겁니다. 다니엘 자기가 손해보고 매맞고 낮아지고 천대받고 그리 될지라도 하나님에게 욕 돌아갈 일은 결코 하지를 않았습니다, 두 번째.
그다음 세 번째는 하나님 한분에게만 순종했습니다. 왕에게 순종하는 것 같으나 실제는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기도하지말란 것은 다니엘이 왕에게 순종할 수 없었고 하나님 한분에게만 순종을 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첫 번째 뭐라고요? 하나님만 소망, 전부 삼았습니다. 두 번째는요? 하나님의 영광, 생각하십니까? 모두 다 복음에 영광이 가로막혀도 내 위신은 깍이면 안되지, 교회가 욕을 얻어먹어도 내 체면은 깍이면 안되지, 또 믿는 사람이 복음 운동에 손해봐도 자기 위신, 자기 체면 그거는 깍이면 안되지. 이런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중에서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니엘은 자기 위신 체면, 이거는 그냥 일부로 그러지는 않아도 거기 전혀 의미나 가치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는 지켰지만, 그러니까 내가 그래도 예수믿는 사람이고 어느 정도 있는데 옷을 함부로 입고 다니면 내가 옷을 함부로 입고 다니는 것 때문에 하나님에게 복음의 누가 될까 싶어 그래서 옷도 조심해서 입고, 자기 건강도 그렇고, 생활 환경도 그렇고, 그러기 때문에 집을 깨끗하게 치운 사람도 자기 타고는 선천적으로 깨끗하기를 좋아해서 정리를 좋아해서 그리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 하는 것 하고, 내가 집을 어질러 놓으면 혹시 누가 와서, 예수믿는 사람, 집사, 이 교인 집이 이렇게 지저분하면 욕을 얻어먹으니까 그래도 정리해야지, 그래 정리하는 것 하고, 자기 성격이 원래 그래서 정리하는 것 하고는 하늘과 땅 차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한 것이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깨끗한게 좋긴 좋지만, 하나는 생명에 속한 겁니다. 참는 것도 그렇습니다. 원래 사람이 좋아서 잘 참는사람, 선천적으로 잘 참는 사람, 그래 착한 것 하고,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참는 것 하고는 하늘과 땅 차입니다. 하나는 생명이고, 하나는 사망입니다. 이걸 구별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나는 모든 매사에 자기 있는 그 위치에서 인간관계, 책임과 의무, 자기 자신의 생활 전부를 거기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을 하면서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가, 입는것도 먹는것도 생활하는것도 참는것도 견디는 것도 충성하는 것도, 모든 절제 전부다 모든 것 다 그렇습니다. 그런거 아니면, 그거 상관없이 그냥, 자기자신의 위신 때문에, 처지 때문에, 체면 때문에 그리하는가, 깊이 신중히 생각을 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오로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모든걸 다 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보니까 다니엘은 밤낮 너의 밤낮 섬기는 네 하나님이, 왕이 그래 봣습니다. 다니엘 가까이 있으니까. 두 번쨉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 한분에게만 순종했습니다. 다니엘은, 그 누구도 다니엘을 움직일 수 없었고, 오로지 하나님이 원동이 되어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이면 순종하고, 그게 아니면 천하 없어도 요동치 않는 것이 다니엘의 신앙입니다.
세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다음 크게 두 번째는, 사람에게 대한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전부니까 사람은 필요없느냐? 그러면 영광이 안됩니다.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신앙의 첫 번째는, 인간관계에서, 사람사는 모든 관계에서 자기 맡은 책임이 있고 의무가 있으니까, 거기 흠이 없을 만큼 충실했습니다. 이것도 참 대단히 어렵습니다. 말은 쉬워도. 어쨌든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위도 바로봐야 하고 옆도 바로 봐야 하고 앞도 바로 봐야 하고, 자기일에 대해서 충성도 해야 되고 진실도 해야 되고 정직도 해야 되고 원만하기도 해야 되고 참 어렵습니다. 자기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 정적들이 낱낱이 털었지만 먼지가 안날만큼, 이렇게 빈틈없는 책임과 의무를, 그리 감당합니까? 얼마나 깨어 살아야 되는지 모릅니다. 아차하는 순간, 사람이 실수가 없을 순 없는데, 깜빡하면 실수하는거죠. 흠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모든 사람과 인간관계, 왕과 자기 관계, 인간관계를 말할때면, 그럼 왜 정적들이 생겼는가? 이 정적이란 이거는 작심을 하고 다니엘을 잡아먹으려고 나선 사람들이니까 이거는 다니엘로써는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다니엘, 자기가 그 정적들은 다니엘을, 다니엘이 잘못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들의 욕심이고 그 사람들이 다니엘을 적 삼아서 한 것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인데, 그 외에는 다니엘의 모든 인간관계에 흠이 없었습니다. 비굴하지도, 교만하지도, 아부하지도 아첨하지도 않았고, 사람들 듣기 좋도록 아부하는거, 그 참 그러니까 윗사람한테 아부하는거 친구끼리도 아부하는 남 듣기좋은 말 많이하는, 실없는 소리하는거, 그것도 교만한 것 다 문제가 되는데 이 다니엘은 아부하지도 않았고 비굴하지도 않았고 교만하지도 않았고 치우치지도 않았고, 모든 인간관계에 흠이 없는 인간관계를 맺어갔다. 어떻게 그리 살았을까?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개인생활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이거는 가정생활도 뜰어있겠고, 경제생활도 들어있겠고, 취미생활도 들어있겠고, 여가 생활도 들어있겠고, 자기 개인적인 모든 생활에, 거기 대해서, 이거는 엄밀한게 될 수도 있는데, 거기 대해서도 아무런 흠이 없는, 흠 잡을 데 없는 그런 생활했다. 크게 두가지지요.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둘째는 사람에 대한 신앙.
그다음 세 번째는 뭐냐? 세 번째는 뭡니까? 요약지에 3번이 들어있던가요? 중간3번? 서지훈 있습니까? 없지요. 근데 왜 말을 안했어요? 3번째는 뭐냐? 이생활을 평소에 계속한겁니다. 한번한 것이 아니고, 한달하다 말고, 두달하다 말고, 일년하다 만 것이 아니고, 이 생활이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참 가장 어려운 생활입니다. 그래서 요런 생활이 되어졌을 때, 다니엘은 이 생활이 계속될 때, 하나님께 대한 신앙, 하나님만 욕망을 하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하나님께만 순종하고, 자기 책임과 의무를 빈틈없이 감당을 하고, 또 모든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참 잘하고, 개인생활에 흠이 없고, 이 두가지 큰 두가지 생활을 중단하지 않고 평소 계속해나가는 겁니다. 요런 생활을 3개월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요런 생활을 3년만 하면 교계가 그 사람을 아는 사람이 된다. 아마 교계가 아는 사람이 될겁니다. 우리 작은, 교회안에서 1달만 하면, 그 사람은 우리 교인들 눈에 대번에 딱 띕니다. 요 생활을 3개월만하면 공회적으로 눈에 띄는 사람이 될거고, 요 생활을 1년만 하면, 우리공회 지도자급은 될만큼, 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생활 3년만하면 우리나라 교계지도자가 될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대게는 이 생활을 한주하다 말고 한달하다 말고 하다 중단하다 또 쉬었다 계속하고, 끊어지니까 연결이 안되니까 이 생활이 큰 폭발 능력이 나타나지를 못하는 거죠.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다니엘의 신앙에서 배울 것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는 신앙입니다. 다니엘의 신앙. 그 신앙은 뭐냐? 그 신앙은 사자굴을 앞에 놓고도 중단하지 않고 감사한 그 신앙. 이 신앙입니다 다니엘의 신앙. 두 번째는 다니엘의 신앙의 승립니다. 이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결과로 승리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낸, 존귀하게 만든 이 신앙의 승리를 우리가 나도 가져야 되겠다. 그다음 3번째는 요 신앙과 승리를 있게 만든 다니엘의 생활입니다. 3가지, 하나님께 대한 신앙 3가지. 사람에게 대한 3가지. 이 두가지 생활을 계속하는 것, 이것이 다니엘의 신앙생활 이것이 우리가 다니엘에게서 배울 것이다, 이걸 기억하고 우리도 다시한번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나도 다니엘처럼 되야되겠다, 요 신앙 가지기를 소원하고 새롭게 힘을 쓰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