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주후(창3:17-21)
인생의 생과 사2013-12-02조회 420추천 36
본문: 창3:17-21
제목: 인생의 생과 사
요점:
1. 본문(범죄한 인생의 저주)
- 땅이 인생으로 인해 저주를 받고
-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고
-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 흙에서 취했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2. 죽음에 대한 인식
-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미련자의 마음은 잔칫집에
-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니
-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하기보다
- 죽음을 바로 알고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로 가져
- 죽음이 닥치기 전에 죽음에 대해 대비하는 것이 지혜
- 죽음은 잠시 동안의 이별
- 죽음은 잠시 잠자면서 쉬는 것
- 죽음은 신령한 새옷으로 갈아 입기 위해 낡고 때묻고 더러워진 헌옷을 벗는 일
3. 죽음의 순서-1차 죽음
- 에덴동산은? (죽음)이 없는 곳
- 죽게 된 원인은? (죄)를 지음으로
-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원죄)
- 이 범죄로 죽은 것은? 사람의 (영)
- 이 죽음은? (1차) 죽음
4. 죽음의 순서-2차 죽음
- 인생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
- 영원한 죽음에서 살려 주신 분은? (예수님)
-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택자)들만
-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 받은 것은? (영)과 심신의 (형체)
- 중생된 사람의 구원은? 심신의 (기능)을 살리는 것
- 심신의 기능을 살리는 기회는? (현실)
- 심신의 기능을 살리지 못하면? 영원한 (죽음)
- 이 죽음은? (2차) 죽음
- 이 죽음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불택자)
5. 죽음의 순서-3차 죽음
- 1차 죽음에서 죽은 것은? 사람의 (영)
- 사람에 세상에 살다가 죽는 것은? (심신)이 죽는 것
- 범죄한 사람의 심신이 죽는 것은? (별세)하는 것
- 이 죽음은? (3차) 죽음
- 이 죽음의 대상은? 범죄한 (전 인류)
6. 죽음의 순서-4차 죽음
-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역사 세계는 (종말)
- 예수님이 재림 후에는? (부활)이 있는데
- 택자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
- 불택자의 부활은? (사망)의 부활
- 불택자가 부활하는 이유는? 영원한 (사망)을 당하기 위해
- 이 죽음은? (4차) 죽음
- 이 죽음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택자)
7. 정리
1) 인생의 죽음은? (죄)의 형벌
2) 인생의 1차 죽음은? (영)의 죽음
3) 인생의 2차 죽음은? 택자의 심신 (기능)의 죽음
4) 인생의 3차 죽음은? (심신)이 세상을 떠나는 (별세)
5) 인생의 4차 죽음은? 지옥의 (영원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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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문
20131201 주후
창세기 3:17-21
본문에 말씀은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하고 동산 나무 사이에 도망해서 숨어있을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내리신 범죄한 인생들에게 내리시는 말하자면 저주의 형벌입니다. 본문에 보면 선악과 따먹고 범죄한 죄를 지은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이 기록되있는데 몇가지인지 한번 볼까요? 첫째,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한 나무실과를 먹었은즉’ 요게 이유입니다. 내가 선악과를 따먹지마라 그랬는데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어떻게 되느냐 첫째,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요게 첫째입니다. 땅이 인간 때문에 저주를 받았습니다. 저주를 받고 두 번째,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두 번째입니다. 평생 땀 흘려 일하고 먹고 사는게 범죄한 인생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벌이기 때문에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달게 받으면 벌을 내리는 분이 마음이 좀 아프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는데 죄 지은 죄인이 벌을 받지 않겠다고 빼고 난리치면 더 따라가서 더 큰 벌 내리고 싶은게 사람의 심리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세상에서 꾀를 파고 어쨌든 편하게 수월하게 일확천금을 노려서 그렇게 편안하게 먹고 살고자하는 그 자는 하나님이 내리는 벌을 피해서 꾀를 파고 도망가는자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큰 진노를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먹고사는데 머리로 땀을 흘리든 육체로 땀을 흘리든 힘써 일하고 먹고 사는게 성경적으로 가장 좋은겁니다. 맞는 겁니다. 그다음 세 번째,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땅은 저절로 두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 잡초만 나고 먹을 수 없는 것만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관리해야 되고 열심히 땅을 파고 가꿔야 되는 겁니다. 그다음 네 번째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요게 네 번째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땅이 아담 하와 인간 때문에 저주를 받았고 두 번째는 그래서 종신토록 죽을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수가 있고 세 번째는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고 네 번째는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을 것이고 다섯 번째는 마지막에는 어찌 된다고요? 다섯 번째는요?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네가 거기서 그 속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사람의 재료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만든 재료, 사탕의 재료는 뭔가요? 사탕의 재료는 주로 설탕이겠지요. 빵의 재료는 무엇입니까? 밀가루겠지요. 밥의 재료는 뭡니까? 쌀이지요. 사람의 재료는 뭐라고요? 사람의 재료는 흙입니다. 사람은 흙으로 만든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땅 위에 있는 지구상에 있는 어떤 좋은 흙을 가지고 어떤 예술가의 혼을 담아서 사람을 빚어가지고 사람을 만들면 사람이 나오겠습니까? 그리되면 그게 창조주가 되겠지요. 그때 하나님만 흙으로 사람을 만들지 그 외에 어떤 피조물도 흙으로 사람을 만들수없겠지요. 어쨌든 사람의 재료는 이 사람의 몸 이게 굉장히 탁월해서 금보다 보석보다 다이아몬드보다 어떤 세상의 물질보다 더 탁월한, 어떤 인간의 과학의 산물보다 탁월한 그런 기능을 가진 것이 사람의 구조고 인첸데, 그래서 가전제품이나 심지어 무기까지도 자동차, 세탁기, 또 냉장고, 또 뭐 전화기 이런 전부다 카메라 이런거보면은 전부 사람에게 있는 그런 각 지체들을 뽑아서 거기 적용시켜서 사람 흉내를 내는 겁니다. 사람의 관절 흉내내는 중장비가 있지요. 뭐하는 겁니까? 사람의 관절 손을 흉내내가지고 만든 중장비 포크레인이지요? 그거 사람의 관절하고 꼭 같습니다. 이래 딱 해가지고. 그거 흉내내는거. 또 가전제품에 인공지능이라 이름붙인 그런것들 전부 다 사람의 머리라든지 눈이라든지 귀라든지 손발 이런거 흉내내서 만든게 그런것들인데 그거 다 모아봐야 한 사람의 인체 구조와 성능만도 어림도 없습니다. 이런 탁월한 이런 사람의 몸을 뭘로 만들었느냐? 휴대폰을 순금으로 만들어놓으면 값이 얼마합니까? 휴대폰 하나 순금으로 만들면 아마 몇 천만원 하겠지요? 시계 같은것도 금으로 만들고 이래 만들면 뭐 몇 억짜리 시계도 있지요, 몇억짜리 시계. 우리는 구경도 못하겠지만은. 그런데 그런 몇 억짜리 시계 그것보다 사람의 몸은 더 탁월한데 이 사람의 몸은 금도 아니고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철도 아니고 동도 아니고 뭘로 만들었다고요? 흙으로 만들었답니다. 흔해빠진 흙으로. 하나님께서 흙을 가지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만 흙으로 만든게 아니고 알고보면 물질 피조물 전부는 흙으로 다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물질중에서 흙이 되지 않는 무엇이 있습니까? 000씨? 흙이 되지 않는 뭐가 있는가요? 세월속에서 그것이 썩어지면 흙이 안되는게 있습니까? 없지요. 전부다 흙이 다 됩니다. 성경적으로 맞는 거지요. 사람도 흙에서 만들었으므로, 흙으로 만들었으므로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죽어서 흙이 된다.
그래서 다섯가지 첫째는,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이 세상이 인간 때문에 저주를 받았습니다. 두 번째 종신토록 죽을때까지 수고해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이게 성경적으로 옳은 겁니다. 세 번째 땅은 인간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 인간을 대항해서. 땅이든지 모든 환경은 그냥 두면 인간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원래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인간이 안 가꿔도 먹을게 꽉 찼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후에 세상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때문에 인간이 관리하고 가꿔야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 네 번째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다섯 번째 필경은 흙으로 돌아간다 죽는다 그말입니다. 전도서 7장에 어디에 보니까, 자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전도서 7장, 욥 시편 잠언 전도서입니다. 제가 기도전에 봉독한 말씀인데 좀 길지만 1절부터 4절까지 같이 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시작.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생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므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宴樂)하는 집에 있는지라. 연락(宴樂)이 뭡니까 학생들? 연락(宴樂)이 무슨 뜻? 000? 연락(宴樂)이 무슨 뜻입니까? ‘연’자는 잔치할 때 쓰는 연회할 때 쓰는 그 연(宴)자. ‘잔치 연(宴)’자. ‘락’자는 즐거울 락(樂)자. 그래서 연락이라 그말은 서로 주고받는 연락이 아니고 한글로 하면 연락 같은 글자인데 한문으로는 즐겁게 잔치하는 걸 연락(宴樂)한다 그럽니다. 홍포입은 부자도 날마다 즐겁게 잔치하는 그런 생활을 했었습니다. 여기 또 하나 기억할 것이 3절에 보니까, 전도서 7장 3절에,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 그렇습니까? 슬픔이 웃음보다 낫습니까? 웃음은 기쁨이라 뜻이지요. 기쁨이 낫지 슬픔이 나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슬픔이 기쁨보다 나음은 그 이유가 뭐냐, 근심하므로 얼굴에 근심하므로 마음이 좋게 됨이라. 그러니까 사람이 마음에 근심이 있고 걱정이 있으면 마음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데 그리 되면 사람의 마음이 좋아진다 그뜻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좋은 것도 있지만은 가난이 알고보면 인생 전체를 두고 수입이 더 많고 몸이 건강한 것이 좋은 면이 많은데 때로는 몸에 병이 드는 것이 더 좋을때도 있는 겁니다. 여기보니까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 그랬습니다. 요게 성경이 가르치는 인식입니다. 요 말씀을 우리가 잘 기억을 하고 또 한번 살펴보십시다. 인생의 죽음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 우매자의 마음은 즐겁게 잔치하는 집에 가있다. 왜 그러냐. 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지혜있는 것이냐. 왜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이유가 뭐냐.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은 이유가 무엇이냐? 사람은 이 세상이란 것은 영원하지 아니하고 살아생전 세상은 죽음을 향해 일단 가는 겁니다. 마지막 죽음을 향해서 다 가는데 그리 가지 않는 인생이 아무도 없으니까 죽음을 향해 모두다 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런 말씀들이 다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자기 생각에 머리에다가 죽음을 두고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리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인식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죽음이 뭐냐?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반드시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되는 과정입니다. 000선생님? 죽음을 피할 수 있습니까? 젊었을때는 잘 모르지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란 것은 우리 앞에 반드시 다가오는 과정입니다. 죽음을 피해갈수는 없습니다. 늙음도 피해가지 못하는 것이고 반드시 다가오는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다가올 미래, 반드시 맞이해야 될 과정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도망다니는 것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안 만날 수가 없으니까. 반드시 만나야될 일이라면 그렇다면 도망다니고 피하는 것 보다는 만났을때 그 어떻게 만났을때를 대처하느냐 이걸 미리 알아서 미리 대처할 준비를 미리하는 것이 그게 지혜롭다 그리 말할 수 있겠지요. 참 실감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닐때 요나단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진실로 사망과 나의 사이는 한 걸음이라. 한 발짝 더 나가면 죽을 수 있고 아니면 또 살 수 있고 늘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었던게 사울에게 쫓겨다니던 다윗의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진실로 사망과 나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라. 다윗이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알든지 모르든지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믿든지 안 믿든지 늘 죽음은 우리를 따라다니고 있고 언제든지 우리 앞에 닥칠 수 있는 상황이 죽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한번 맞이하면 그걸로 끝이 나버리니까 내일이 없고 미래가 없고 나중이 없고 뭐든게 다 일단 이 세상에서 끝이 나버리니까 그래서 천하역사에 모든 사람 전부는 이 죽음을 피하려하고 안만나려고 하는 것이 모든 사람입니다. 또 그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니까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안 만날수가 없다 그말이지요. 많은 사람이 세상에 어느 계층이든 그런게 다 있습니다. 어느 회사를 가도, 어느 교육계를 가도, 과학계를 가도 종교계를 가도 또 경제계를 가도 문화계를 가도 정치계를 가도 어느 구석에 들어가도 그곳에 있어서는 안될 그런거, 반드시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될 그런 것들이 구석구석에 정도 차이지 다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관련된 사람들이 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알면서 묵인하고 넘어가는 것들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뒤집어 놓으면 많은 문제가 생기니까 그냥 덮고 조용히 넘어가는 일들이 세상에는 수도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양심이 있는데 양심이 이거는 안된다고 살아가다보면 이거는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양심이 호소하는 그런 일들을 우리는 할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때 그것을 양심을 써서 파헤쳐 가지고 이거는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니까 이거는 고쳐야 된다, 이거는 하면 안된다 회개해야 된다, 그걸 회개하면은 돈이 손해 가는데, 그 사람과 관계가 끊어져 버리는데, 큰 수치를 당하는데, 무슨 낭패 당할지 모르는데 온갖 어려움이 닥치니까 그런 닥쳐올 환난 어려움 때문에 슬그머니 덮어버립니다. 양심을 속이고 덮어버리는, 넘어가버립니다. 그런걸 가리켜서 양심이 양심을 묵피한다 그럽니다, 묵피. 묵인하고 피해서 회피한다 그 뜻입니다. 그러면 양심이 점점 죽어진다 그말이지요. 죽음이란 것은 이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다가오게 되어있는 한 과정입니다. 이 말씀은 틀림이 있습니까? 죽음은 전인류에게 반드시 다가오는 하나의 과정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 틀린 말입니까? 옳은 말씀 아닙니까? 성경 진리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절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이거는 아무도 피하지 못합니다. 여기있는 우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을 피해서 생각하지 말고 죽음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갖지 말고 사는 것만 생각을 하고 죽음은 상관하지 말자. 그래 사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 세계에서는 그게 지혜일지 모르겠고 잘 사는 것일지 모르겠으나 이 사실을 알고 죽음 너머 세계를 알고 보고 있는 우리들로써는 그 참으로 심히 어리석고 미련한 짓입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해야 된다면, 맞이하지 않을수가 없다면 이거는 말하자면은 순순히 받아들일수 있도록 그 죽음을 잘 맞이하고 더 나아가서 그 죽음을 잘 선용할 수 있도록, 우리가 이용할 수 있도록 미리부터 죽음이 오기전에 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좀 덜하지만은 학교 다니는 학생이 대학갈 고등학교 3학년이 수능시험은 피할 수 없지요. 피하면 그 학생은 대학 안 갈 학생이니까.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피할 수 없는 그 시험을 수능시험 머리 아프니까 생각지 말자, 지금만 보고 그만 놀고 싶을때 놀고 즐겁게 살자, 그 학생은 머리 아프고 복잡하고 골치아프니까 생각하지 말자 관심두지 말자 상관하지 말자 그리 사는 학생이 수능 시험을 필수적으로 필연적으로 만났을때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고 좋은 결과 맺을 수는 없는 겁니다. 맞이해야 될 시험같으면 머리 아픈 골치 아픈 복잡한 그 참 힘드는 시험을 피할 수 없다면 미리부터 계획을 세워서 준비하는 그 사람이 지혜롭다 그말이지요. 죽음은 더하겠습니다. 이걸 좀 깊이 생각하십시다. 여기있는 우리는 아무도 죽음은 피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은 생각하지 말자 상관하지 말자 마음에 두지 말자 잊어버리고 살자 할 것이 아니고 이 죽음이란 것이 마지막 인생에 땅위에서의 최종이니까 그때가 오면 이미 모든게 다 끝이 나니까 그때를 오기전에 그 죽음이라는 그놈을 만나기전에 미리부터 그때를 대비하고 생각해서 준비하는 것이 지혜롭다 그말입니다.
또 하나 죽음이란 것은 안 믿는 사람, 인간의 사후세계를 모르는 안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죽음은 영원한 끝입니다. 영원한 이별이고 영원한 중단이고 영원한 끝입니다. 두 번 다시는 없는 것이 불신자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란 것은 하나의 통과의례 중에 하나다. 우리가 실감하기 어렵지만은 성경으로 볼때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이다 그말이지요. 지나가는 과정이고 죽음이란 것은 영원히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새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낡고 지저분한 헌옷을 벗어버리는 한 순서가 죽음이다, 낡고 지저분한 헌옷이 무엇입니까? 낡고 지저분한 헌 옷이 무엇이지요? 우리가 입고 있는 고깃덩어리입니다. 고깃덩어리 몸. 그러면 새옷은 무엇입니까?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는 시공을 초월한 신령한 몸이 우리가 입을 새옷입니다. 부활할 때 입는 옷. 그 몸을 입기 위해서 그 옷을 입기 위해서 죄로 인해서 낡고 병들고 늙고 지저분해진 이 몸을 벗어버리는 것이 죽음이라는 한 과정이다, 그러니까 죽음은 영원한 영생을 위해서 잠시 쉬는 잠자는 과정이 죽음이고 잠시 쉬는 것, 자면서 쉬는 것이 죽음이고 죽음은 영원한 좋은 새옷을 입기 위해서 낡고 지저분한 때묻은 헌옷을 벗어버리는 것이 죽음이라는 한 과정이다. 요것도 우리가 실감을 하고 요 사실을 말씀으로 따져보고 실제 따져서 이게 변할 수 없는 사실이고 진리고 우리 앞에 필연적으로 다가올 한 과정, 다가올 미래라면 깊이 깊이 자꾸 생각을 해서 그때가 다가왔을때, 이렇게 설교하며 큰소리치는 저도 막상 죽음 닥치면 겁이 나서 벌벌떨지 모르겠습니다. 안 그럴 것 같으나 사람이 닥치면 다 당황하니까 그러니까 미리부터 지금부터 늘 죽음이라는 그 두 단어를 염두에 두고 그때를 대비하면서 기도도 하고 마음도 다지고 준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인식을 바로 가집십시다. 불신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영원한 끝이고 영원한 이별입니다. 두 번다시 없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의 성경 진리로 살펴볼때 죽음이란 것은 하나의 통과의례고, 영원한 천국을 향한 하나의 지나가야될 과정중에 하나고 영생을 얻기 위한 잠시 자면서 쉬고 있는 한 과정이고 영생을 위한 영원한 새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낡고 지저분한 때묻은 헌옷을 벗어버리는 한 과정이란 것이 이게 죽음이란 것이다. 요걸 꼭 인식을 하고 그리 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다음 그러면 죽음이란 것의 그래서 요런 인식들을 기억하면서 죽음을 한번 더 또 연구해보십시다. 피할 일이 아니니까,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니까. 도망다닌다고 도망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어디든지 지구끝까지 가도 이 죽음은 따라올 것이고 우주선을 타고 화성에 가있어도 죽음은 따라올 것이고 어떤 깊은 속에 가있어도 죽음은 따라올 것이고 온갖 불로초를 다 먹어도 죽음은 나를 쫓아올 것이니까 도망갈 수 없으니까 이게 죽음이니까 이 죽음은 피하지 말고 도망다니지 말고 겁내지 말고 겁은 나지만은 미리 만나기전에 미리부터 준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호랑이 사냥꾼이 호랑이가 겁나지만은 단단히 준비해서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차린다는 것처럼 무기를 단단히 가지고 약하면 함정을 파놓든지 그래가지고 호랑이를 만났을때 ‘내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지 아니하고 그 놈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 한번 해보자’ 그래 만나기전에 미리 연구하면 할 수 있는 연구하면 그만큼 자기는 설사 호랑이한테 잡혀 죽더라도 좀더 오래 끌 것이고 싸우다 죽을 것이고 그리되지 겁나서 도망가는 것보다 이거는 또 다른 경우지만은 무조건 도망다닐 것이 아니다 그말입니다. 전염병이 오면 전염병 같은 거는 피해서 다닐 수도 있고 하지만은 그래도 대비해서 피할 수 없는 것이면 대비해서 대처하는 것이 낫지 도망다닐 것이 아닌 겁니다. 죽음이란 것은 그게 왜 생겨졌느냐? 죽음의 발생 원인, 죽음이란 놈이, 사망이란 놈이 왜 인간세계에 없었는데 생겨지게 됐느냐? 000? 왜 생겨졌어요? 원래 인간 사는 장소 제일 처음에 인류가 살던 세상이 어디입니까? 에덴동산인데 거기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죽음이란 놈이 없었는데 어느날 이놈이 들어와서 인류를 다 죽여버립니다. 그놈이 갑자기 왜 생겼습니까? 뭐때문에요? 죄 때문에. 죄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죕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지음 받고 하나님이 말씀 순종으로 살라 그랬는데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지음 받은 피조물로 그리 살아가야 될 인생이 하나님을 배격하고 하나님을 쫓아내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가 하나님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 선악과 따 먹은 죄고 이게 인간의 첫 죄고 모든 인류를 다 죽인 죄라. 이 죄 이름이 무엇이라고요? 원죄입니다. 그래서 죽음이란 것은 죄 때문에 온 것이고 그러므로 지금도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습니다. 사람 죽은 시체가 있는 곳에는 뭐가 모인다고요 성경에?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이느니라. 시체 뜯어먹는 독수리들이 모이는 겁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죄의 영향이 반드시 있게되있고 죄인 있는 곳에는 그 죄와 통하는 그런 것들이 모여지게 있습니다. 그걸 뜯어먹기 위해서. 죄라는 것이 있으면 죽음은 실과 바늘이란 말처럼 반드시 따라가는 이거는 절대 법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죽음 없는 곳이 없고 반대로 죄 없는 곳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죄와 죽음은 하나라는 겁니다. 에덴동산에 죽음이 없었는데 범죄함으로 요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요 죄가 원죄였고 이때 원죄로 죽은 인간의 요소가 무엇입니까? 아담 하와의 원죄 때문에 죽은 인간의 요소는 사람의 요소라 말이 맞을지 모르겠지만은 사람의 영이 죽었습니다. 영이 죽었으니까 몸도 마음도 죽은 것인데 그 죽은 죽음은 뒤에가서 나타나니까 그래서 1차 죽음에 사람의 영이 죽었다 요게 1차 죽음입니다. 아담 하와의 원죄로 우리는 죄를 안 지었습니다. 근데 이것도 그리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악과 따 먹었습니까? 안 따먹었지요? 안 따먹었는데 왜 내가 죽어야 됩니까? 아담 하와가 우리를 대표해서 그가 우리를 대표한 우리 조상이고 대표기 때문에 우리를 대표해서 그가 따먹었으므로 우리도 거기 다 연결되서 그 자손으로 났기 때문에 죽습니다. 그런데 또 한면으로 생각해보면 만약에 아담 하와가 아니고 내가 조상되었다면 나도 따먹었을까? 모르기는 모르겠지만은 아담 하와의 자손으로 난 사람 중에서 아담 하와를 대신해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선악과 안 따먹을 인간은 역사에 하나도 없다는 뜻도 됩니다. 아담 하와의 자손으로 난 전인류는 만약에 에녹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에녹이 에덴동산에 있었으면 에녹은 선악과를 안 따먹었을까?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한 거 보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만은 그러나 그도 아담의 자손으로 원죄가 적용되어서 죽은 거 보면은 에녹도 따먹지 않았을까? 엘리야도 따먹지 않았을까? 단정은 못하겠습니다. 아담 하와의 자손으로써 그래서 전인류는 아담 하와의 자손이고 그 자손으로 난 모든 인류는 전부 하나님의 정죄 받아서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이게 단순히 그 자손이므로 정죄받아야 된다는 것도 맞지만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을 가지고 누군가 따져볼때 ‘나는 자손이지만은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안 따먹었을것 같은데요?’ 자기 착각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는 유대인들이 우리들이 그 시대 있었더면 우리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을 안 죽였을건데 그래 말하는 그 인간들은 자기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은 사람인데 저것들이 죽이는 선지자들은 하나님인데도 하나님이 사람되신 분인데도 죽였지않습니까? 그거보면은 아무리 어떤 자손이라도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그 누구라도 에덴동산에 있었으면 선악과를 따먹는 원죄는 짓지 않았을까? 그 뒤에 회개는 했을지 모르겠지만은. 그래서 원죄로 모든 인류는 다 죽었고 그때 즉시 죽은 것은 영이 죽었습니다. 이것이 어떤 죽음이라고요? 순서대로 말하면 인간에게 죽음이 온 첫째 1차 죽음입니다. 이거는 한번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붙여보는 겁니다. 1차 죽음, 죽음이란 것이 제일 먼저 온 것이 요겁니다. 인간 세상에 죽음이라는 놈, 사망이라는 놈이 들어온 첫째가 아담의 원죄로 인간의 영이 죽은 것이 인간에게 첫째로 죽음이란 놈이 찾아온 1차 죽음입니다. 여기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에녹도 엘리야도 다 포함이 됩니다. 그다음 이 죽음에서 다 죽었는데 이때 죽은 죽음은 영이 죽었고 심신은 아직까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 기억하실 거. 영이라는 것은 그때 에덴동산에서 죽은 영은 아담하와의 영만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 영은 언제 죽습니까? 그 뒤에 난 모든 사람의 영은 언제 죽습니까? 영을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언제 만들으셨다고 배웠습니까? 이거는 교리입니다. 교리적으로 사람의 영을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아담 하와 만드실 때 사람의 영도 주님 재림하실때까지 역사에 태어날 모든 사람의 영을 한꺼번에 다 만들어놨다가 창고에 재놨다가 그래서 사람이 태어날때마다 그 사람의 영을 한사람씩 꺼내서 넣어준다 요런 교리가 있답니다. 영의 전제설이라고. 근데 이거는 성경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영은 어떻게 생기는가? 영은 그 사람이 잉태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영도 같이 만들어 창조해서 그 사람에게 주인이 되도록 하신다 요게 성경적이죠. 그래서 영의 창조설이라 그리 말합니다. 요게 성경적으로 맞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영은 내가 태어날 때 영도 같이 지음받는 겁니다. 그리고나서 반드시 태어나자마자 잉태되는 즉시 그 영에게는 아담의 원죄가 적용되서 즉시 사망을 하는 겁니다. 시점으로 말하자면은 잉태는 첫째, 순서적으로 동시인데 논리적 순서로 말하면 잉태되고 정죄되고 사망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중생되는 것은 그다음 순서고. 그러면 죽음이란 것은 무엇이 전제되어있습니까? 죽음은 삶이 전제되어 있는거지요. 생명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없던 가운데 아담 하와가 생겼는데, 생겼는데 만들어놨고 생명을 불어놨으니까 만들어놨는데 만들어놓은 것이 무생명이지 죽음은 아닙니다. 만들어놨는데 생기 불어놓고 생명을 넣었으니까 살았습니다. 죽음보다 생명이 먼저지요. 그리고 난다음에 죽음이 찾아온겁니다.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서 생명을 가졌고 가지자마자 태어나자마자 생명 가지자마자 아담의 원죄가 그에게 정죄가 되고 정죄되니까 즉시 죽고 그리고나서 죽은 상태로 어느정도 있다가 때가 되면 중생이 되어 다시 살아나고 택함 받은 사람들은. 요게 순서입니다.
그러면 아담의 원죄로 1차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다 죽었는데 죽은 거기서 2차 죽음이란 것을 맞이할 수도 있고 맞이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불택자들은 2차 죽음 자체가 없겠습니다. 없고 택자들에게는 2차 죽음이 있게 되는데 2차 죽음은 뭐냐? 무슨 죽음입니까 2차 죽음은? 두 번째 인생에게 찾아온 죽음이란 것은 무엇이 죽는거라고요? 심신의 기능이 죽는 겁니다. 심신의 기능이 죽는 것인데 이 심신의 기능이 죽는 것은 절대적입니까 아니면 표현하자면 선택적입니까? 영이 죽는 것은 절댑니까 선택입니까? 절대적입니다. 강제입니다. 죄를 지었으니까. 심신의 기능이 죽는 것은 절대적입니까 선택적입니까? 이거는 죽을 수도 있고 안 죽을 수도 있는 겁니다. 중생함을 받은 성도가 주님이 십자가 대속 대형 대행 대화친 대생 이걸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신 사활의 대속 공로는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신 겁니다. 다시 주신 새생명인데 그 새생명은 하나는 영의 중생이고 하나는 심신 기능의 기회라는 겁니다. 요 기회를 그래서 현실을 통과할 때 내가 살아가면서 내 심신의 활동작용으로 사는 그 모든 생활이 그 모든 통과를 믿음으로 순간순간 토막토막을 통과해나가면 거기서 죽을 수 있는 심신의 기능이 안 죽고 그대로 통과합니다. 그러면 영생을 합니다. 그 기능은 성화되어집니다. 그러면 성화된 심신의 기능은 2차 죽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화된 심신의 기능은 2차 죽음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없는 겁니다. 그런데 중생된 사람이 현실을 통과할 때 성화되지 못하고 자기주장 자기 욕심 자기 감정 죄로 그 토막토막을 통과하면 그 사람의 죄지어서 통과한 그 모든 과정들은 기능이 다 죽었으니까 그때 죽은 그 기능의 죽음을 가리켜서 2차 죽음이라고 표현을 하는 겁니다. 순서적으로 두 번째 찾아온 죽음입니다. 그거 아닙니까? 순서적으로. 두 번째 인간에게 생사가 갈리는 것이 심신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2차 죽음은 불택자들에게는 2차 죽음이라는 것이 아예 기회조자 없는 것이고 살릴 수 있는게, 살아나야 죽음이 있는데 불택자들은 1차 죽음에서 완전히 영이 죽어있으니까 그들에게는 심신의 기능을 살릴 수 있는 재생의 기회가 아예 없으니까 2차 죽음도 없는 것이고 택자들에게는 주님 대속으로 살려주셨으므로 죽지 않을, 다시는 죽지 않을 기회를 주셨으니까 주신 그 기회를 믿음으로 말씀으로 잘 통과하면 2차 죽음은 없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원죄와 같이 원죄로 그렇게 현실을 통과해 살아나가면 그 사람은 또 다시 죽는 2차 죽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택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2차 죽음입니다. 여기는 불택자는 해당이 되지를 아니합니다. 그다음 인간에게 세 번째 죽음이라 찾아온 그 세 번째 순서는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세 번째 순서는 뭐냐? 그 세 번째 순서는 그다음에 1차 죽음에서 죽은 영이 죽은 그 죽음 원죄 그것이 심신에게도 이미 적용되어서 죽어있는데 그 죽은 모습이 죽는 그 모습이 가시적으로 말하자면은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나타나는 것이 세 번째 3차 죽음이니 요 죽음은 무엇이 죽는거라고요? 심신의 형체가 일단 죽는 겁니다. 심신의 형체가 죽는 성경은 말하기를 죽음을 말하기를 성경에 믿음의 선진들이 죽을때 뭐라고 많이 표현됩니까? 그의 혼이 떠나니라. 혼이 그래서 혼과 몸에 분리되는게 인간의 죽음이라 그리 말하지요. 혼이 떠나니라. 기운이 지나야 열조에게 돌아가니라. 그리 표현되는데 요것이 3차 죽음입니다. 그러면 1차 죽음은 사람들이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그런데 지식적으로는 압니다 우리가. 2차 죽음은 이것도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보이는데 우리가 압니까 모릅니까? 우리는 압니다. 바로 배운 사람은 2차 죽음 압니다. 문제는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인간에게 있는 2차 죽음에 해당되는 심신의 기능에 죽고 사는 생사에 대해서 요 도리를 깨닫지 못하면, 요 심신 기능의 교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여기 관련된 구원은 결단코 이루지 못한다는 겁니다. 구원은 기독교의 구원은 반드시 자의사라야 됩니다, 자의사. 자신의 의사로 깨달음으로 되어지는게 기독자의 구원입니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 우리는 누가복음 17장에 하나님의 종입니다. 종이라는 말은 주인의 것이라는 뜻이고 주인의 것이므로 그 종의 모든 생애는 주인의 의사대로만 살아야 됩니다. 그게 종입니다. 그러면 종의 자의사는 자의사가 있는데 있는 그 자의사를 완전히 죽여야 종이 되는 겁니다. 그럼 그 자의사를 죽이는 것은 타에 의해서 죽입니까 자의에 의해서 죽입니까? 너무 어렵습니까? 무익한 종의 믿음을 가진 성도가 자기 자의사가 있는데 스스로의 인식과 욕심과 감정과 주관과 깨달음이 있는데 자기 생이 있는데 그 자기 뜻이 있는 그 자의사를 꺽었습니다. 주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때 자의사를 꺽은 그 사람의 그 꺽음은 자의로 꺽는겁니까? 타의로 꺽는겁니까? 강제로 꺽으면 구원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는 겁니다. 강제로 십자가를 지고간 구레네 시몬은 그 사람은 구원이 안되는 겁니다. 억지로 흉내만 낸 것이지. 내 자의사가 있고 먹고 싶은데 강제로 꺽는 것이 아니고 내가 먹으면 주님이 섭섭하시니까 안 먹는게 날 구원하신 주인되신 주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다 하고 내 스스로 먹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스스로 먹는 것을 포기하는 겁니다. 이 일을 하고 싶은데 내가 하면 하나님 말씀에 죄가 되는거니까 내가 안하는 겁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안하는 것도 억지로 안하는 것도 자의사는 자의산데, 억지의 자의사로도 안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더 깨달아서 원하고 원하는 단마음으로 그 자의사로 안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신앙의 모습, 신앙의 차원입니다. 여기 가는게 우리 신앙생활의 과정들입니다. 그래서 3차 죽음은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심신의 형체의 죽음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서 이별하는 것. 세상에서 더 이상 다시 볼 수 없는 것 그게 3차 인간에게 세 번째 찾아오는 죽음이다 그말이지요. 요 죽음은 면한 사람이 있었지요 성경에? 에녹과 엘리야는 3차 죽음은 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다만 3차 죽음을 보지 않았을뿐이지 보지 않았다 그말은 죽음이라는 그 형태가 일반 천하 모든 역사 모든 사람과 달랐을뿐이지 그들도 입고 있는 그 몸은 다 벗어버려야되지 그래서 승천하면서 벗었든 어쨌든 죽음같은 그런 과정을 그들도 거쳐야 신령한 몸으로 부활이 되는 것이지 세상에 입고 있던 죄아래 있는 이 육신 입고는 신령한 몸을 못 입기 때문에 우리는 다 일반 사람은 다 어떤 형태로 죽든 죽음이라는 그 세상 이별을 일반적으로 거치는 병사든 사고든 어쨌든 그래 죽는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고 에녹과 엘리야는 승천하므로 세상과 이별하는 그런 과정을 거쳤을뿐이지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보지 않았고 죽음이라는 과정 대신에 승천이라는 모습으로 그들은 3차 죽음을 말하자면은 통과한 겁니다. 그들에게 육신의 죽음이란 것은 필요가 없는 것이었고 계시 인물로 하나님께서 주신 거니까. 그 외 모든 사람은 3차 죽음이라는 심신의 형체를 벗어버리는 세상을 이별하는 별세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겁니다. 요게 3차 죽음 여기는 택자든 불택자든 다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1차 죽음은 누구만 해당된다고요? 1차 죽음은 누구만 해당됩니까? 전인류가 다 해당이 되지요. 2차 죽음은 누구만 해당 됩니까? 택자들만 해당됩니다. 3차 죽음은요? 또 전인류가 다 해당됩니다. 4차 죽음은 뭐냐? 4차 죽음은 언제 있는 겁니까? 마지막 주님 재림하시고 부활후에 있는데 4차 죽음은 부활후인데, 1차 죽음은 성도가 거칩니다. 2차 죽음은 거칠 수 있고 안 거칠 수 있는데 우리는 중복입니다. 거친 것도 있고 안 거친 것도 있고 그래 통과합니다. 3차 죽음은 우리는 다 거쳐왔습니다. 마지막 4차 죽음은 성도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4차 죽음은 어떤 죽음입니까? 부활해서 죽는 지옥의 영원한 죽음인데 그 죽음은 성도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성도에게 4차 죽음은 없는 겁니다. 그러면 3차 죽음의 모습으로 구속받은 성도의 죽음은 끝이 나는데 성도에게 4차 죽음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범죄한 심신의 기능입니다. 그거는 2차 죽음에서 죽은 그것이 마치 말하자면은 1차 죽음에서 죽은 심신의 형체가 3차 죽음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났듯이 2차 죽음에서 죽은 심신의 기능이 4차 죽음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는게 성도의 4차 죽음이고 일반적으로 말하면 4차 죽음은 영원한 죽음을 위해서 다시 살아나는 사망의 부활로 살아나는 불택자들, 그들의 부활은 부활했으니까 부활이 무슨 말이지요? 다시 살아났는데 살아난 목적은요? 영원히 죽기 위해서. 4차 죽음을 위해서 다시 부활하는게 불택자들의 부활이고 그들의 마지막은 4차 죽음으로 영원한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고. 성도에게는 4차 죽음은 원칙적으로 없는데 범죄한 심신의 기능은 그때 2차 죽음에 죽은 그 모습이 그 죽음이 4차 죽음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그말이지요. 논리적으로 맞습니까? 논리적으로 맞습니까? 이해가 좀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벙벙한지. 그래서 인간의 생과 사에서 1차 죽음 원죄로 인한 영의 죽음, 2차 죽음 택자들에게만 주신 심신의 기능을 살릴 기회에 살리지 못하면 죽는 심신 기능의 죽음, 3차 죽음 1차 죽음 원죄로 인한 영이 죽은 그 죽음에 심신의 죽음이 죽었는데 그 죽음이 가시적으로 나타난 그 3차 죽음 전인류에게 다 해당되는 3차 죽음, 4차 죽음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불택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영원한 지옥에 영원한 사망을 당하기 위해서, 사망이 무슨 뜻입니까? 사망이라 말은 죽음이란 뜻 아닙니까? 영원한 죽음을 위해서 부활하는 이 4차 죽음. 그리고 동시에 택자들의 범죄한 심신의 기능이 가시적으로 죽는 그 죽음 이게 네 번째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오는 죽음이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렇게 죽음이란 것을 요 단어를, 요 사실을 잊어버리고 벗어버리고 도망치고 피하는 이것이 잘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반드시 맞이해야될 그런 사실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준비하고 생각하면서 좀 교회오면은 소망의 말씀 밝은 말씀 기쁨이 넘치는 이런 말씀이 되야 되는데 죽음이라는 가장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생각해보니까 마음도 무겁지만은 그러나 이걸 우리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는 반드시 그 누구도 한번 거쳐가야되는 과정이므로 그러므로 제가 어느정도 장담을 하는데 오늘 이 말씀은 영원을 두고 하나님 앞에 잘못됨이 없는 말씀일 겁니다. 틀림이 없는 사실이니까. 요 모든 말씀들이. 그러니까 요 사실을 기억을 하고 항상 그것만 생각할 수 없지만은 모든 일 할때 우리는 요 죽음이라는 반드시 거쳐가야 되는 피할 수 없는 한 과정 요걸 늘 생각하면서 그때가 세상에서 마지막인데 그때가 되면 나는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 그 넘어는 이 세상에 살아생전에 모든 생애의 심판만 있을 것인데 그 죽음이라는 것이 내 앞에 현실로 닥쳐왔을때 병으로 오든지 사고로 오든지 어떤 형태로든지 내앞에 왔을때 그때 나는 그 죽음을 맞이할 때 어떻게 그 죽음을 상대하게 될 것인가 요 사실을 평소에 생각을 하고 기도하고 준비를 하는 사람은 그때 맞이할 때 덜 당황할 것이고 이거 상관없이 살아생전만 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은 살때는 좋았는데 그날이 닥쳤을때는 심히 당황하고 어찌할 줄 모르고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때늦은 후회. 이미 지나가고 나면 후회라는 것은 참 아픈 겁니다. 후회는. 그러기 때문에 회개라는 것은 후회가 동반된 것인데 회개는 아픔입니다. 후회라는 것은 아픔이고 회개는 아픔이 고통이 따라가야 진정한 회개가 되는 것이지 고통없는 회개는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병이 들었는데 그 병 고치기 위해서는 약을 먹든 주사 맞든 수술하든 어쨌든 고통이 따라가야 병은 치료가 되는 것처럼 회개라는 것은 지은 죄를 고치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이 따르지 않고는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그 때가 오기 전에 그날에 후회할 것을 그날에 땅을 치며 통탄할 것을 지금 미리부터 대비하고 준비하며 살자 그말입니다. 우리 김용기 할머니를 보내고 나서 저는 아쉬움이 너무 많았습니다. 참 안타까웠습니다. 평소에 자주 좀 가서 예배도 드려주고 위로도 해드리고 늘 마음에 그래야 된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한번 제대로 가지를 못해서 그래서 어제 장례식 할때 밤사이 가족들이 의논하기를 가면서 가족들이 영정을 들고 어머님댁에 가보자 그러는데 그 둘째 사위되는 장로님은 안된다 그러고 저한테 예배를 좀 빨리 마쳐주십시오. 영정들고 한번 가봐야 됩니다 그래서 영정을 들고 간다 그럼 저는 곤란하겠습니다. 이게 꼭 그대로 관철하시면 저는 이 장례식 참여를 못 하겠습니다. 좀 강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장로님도 ‘그렇지요 영정은 안되지요’ 지나가는 길이니까 가족들이 어머니 생각에 잠시 내려서 집 한번 돌아보는 건 할 수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장의차 가는 길에 가족들이 모여서, 모여서라기보다 각자 어머니 계시던 집에 거기 한번 가는데 저도 내려서 한번 가봤습니다. 생각을 하면서. 보내고나니까 그래서 늘 마음속에 이분 돌아가실때는 내가 반드시 임종때 가서 곡 손 한번 잡고 그래 보내드릴것이다 하고 늘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일입니다. 그래서 연락받고 깜짝 놀라서 얼른 뛰어갔는데 그만 한 10분 늦었을까요. 이미 늦어버렸다 말이죠. 나오는데 하도 아쉬워서 안치실로 내려갈 때 제가 부탁을 해서 얼굴 좀 보도록 해주십시오, 다 덮어놨는데 걷어가지고 좀 보고 제가 얼굴을 좀 만져봤습니다. 이마도 좀 만져보고 뺨도 좀 만져보고 마음이 하도 아쉬워서. 완전히 식지 않는 그 상태로. 근데 그것이 아무리 아쉬움이 진해도 이미 가버렸습니다. 후회가 되지요. 후회된들 어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입관식때 말씀이 그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은 한번 죽습니다. 다 아는 사실이지요. 죽으면 모든게 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살아생전 해야 됩니다. 죽기전에. 모든 건 죽기전에. 죽고나면 다 늦습니다. 죽음이란 것이 내 앞에 닥치면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언제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으니까 안 믿는 사람은 알아도 그들은 모르는 것이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쨌든 세상에서 조금 더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겁니다. 좀 더 오래 살려고. 죽는 걸 그렇게 겁을 내는 겁니다. 우리도 죽음이 두렵지만은 그러나 성경 진리로 알고나서 보니까 죽음이란 것은 하나의 통과하는 의례고 이거는 잠시 영원한 세계 들어가기전에 자면서 쉬는 것이고 떨어지고 헤어지고 때묻은 누더기 헌옷입고 영원한 신령한 새옷을 갈아입는 과정이니까 요래 인식을 바꾸고 그러기 때문에 그때 맞이할 때 우리가 후회되지 않도록 그 죽음을 미리 알고 대비하고 대처할 준비를 지금부터 하는 것이 지혜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주님 재림 말씀하실 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주님 재림은 피할 수 없고 반드시 오게 되는데 그 재림 오는 그 날을 맞이하게 될 때 너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뭐라 그랬습니까? 어떤 사람이 되라고요? 화목하게 삽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 마련 합니까? 돈 많이 법니까? 자녀 잘 기릅니까? 어떤 사람이 되라고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다음에는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라. 주님 재림의 날을 생각하며 현재를 살아라. 인간의 죽음을 생각하며 오늘 현실을 살아라.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요 말씀을 가지고 우리 생활을 좀 더 조심스럽게 근신하고 조심해서 사는, 나그네로 지낼 때를 두려움으로 사는 우리가 되도록 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 기억하십시다.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로 가지고 요 죽음에 대한 내막을 알고 우리는 살아생전 죽음 준비를 잘 하는 우리가 되고 주님 맞이할 때 그날에 기쁨으로 맞이하는 그런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소원하고 힘을 쓰십시다.
제목: 인생의 생과 사
요점:
1. 본문(범죄한 인생의 저주)
- 땅이 인생으로 인해 저주를 받고
-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고
-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 흙에서 취했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2. 죽음에 대한 인식
-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미련자의 마음은 잔칫집에
-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니
-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하기보다
- 죽음을 바로 알고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로 가져
- 죽음이 닥치기 전에 죽음에 대해 대비하는 것이 지혜
- 죽음은 잠시 동안의 이별
- 죽음은 잠시 잠자면서 쉬는 것
- 죽음은 신령한 새옷으로 갈아 입기 위해 낡고 때묻고 더러워진 헌옷을 벗는 일
3. 죽음의 순서-1차 죽음
- 에덴동산은? (죽음)이 없는 곳
- 죽게 된 원인은? (죄)를 지음으로
-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원죄)
- 이 범죄로 죽은 것은? 사람의 (영)
- 이 죽음은? (1차) 죽음
4. 죽음의 순서-2차 죽음
- 인생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
- 영원한 죽음에서 살려 주신 분은? (예수님)
-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택자)들만
-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 받은 것은? (영)과 심신의 (형체)
- 중생된 사람의 구원은? 심신의 (기능)을 살리는 것
- 심신의 기능을 살리는 기회는? (현실)
- 심신의 기능을 살리지 못하면? 영원한 (죽음)
- 이 죽음은? (2차) 죽음
- 이 죽음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불택자)
5. 죽음의 순서-3차 죽음
- 1차 죽음에서 죽은 것은? 사람의 (영)
- 사람에 세상에 살다가 죽는 것은? (심신)이 죽는 것
- 범죄한 사람의 심신이 죽는 것은? (별세)하는 것
- 이 죽음은? (3차) 죽음
- 이 죽음의 대상은? 범죄한 (전 인류)
6. 죽음의 순서-4차 죽음
-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역사 세계는 (종말)
- 예수님이 재림 후에는? (부활)이 있는데
- 택자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
- 불택자의 부활은? (사망)의 부활
- 불택자가 부활하는 이유는? 영원한 (사망)을 당하기 위해
- 이 죽음은? (4차) 죽음
- 이 죽음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택자)
7. 정리
1) 인생의 죽음은? (죄)의 형벌
2) 인생의 1차 죽음은? (영)의 죽음
3) 인생의 2차 죽음은? 택자의 심신 (기능)의 죽음
4) 인생의 3차 죽음은? (심신)이 세상을 떠나는 (별세)
5) 인생의 4차 죽음은? 지옥의 (영원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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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문
20131201 주후
창세기 3:17-21
본문에 말씀은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하고 동산 나무 사이에 도망해서 숨어있을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내리신 범죄한 인생들에게 내리시는 말하자면 저주의 형벌입니다. 본문에 보면 선악과 따먹고 범죄한 죄를 지은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이 기록되있는데 몇가지인지 한번 볼까요? 첫째,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한 나무실과를 먹었은즉’ 요게 이유입니다. 내가 선악과를 따먹지마라 그랬는데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어떻게 되느냐 첫째,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요게 첫째입니다. 땅이 인간 때문에 저주를 받았습니다. 저주를 받고 두 번째,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두 번째입니다. 평생 땀 흘려 일하고 먹고 사는게 범죄한 인생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벌이기 때문에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달게 받으면 벌을 내리는 분이 마음이 좀 아프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는데 죄 지은 죄인이 벌을 받지 않겠다고 빼고 난리치면 더 따라가서 더 큰 벌 내리고 싶은게 사람의 심리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세상에서 꾀를 파고 어쨌든 편하게 수월하게 일확천금을 노려서 그렇게 편안하게 먹고 살고자하는 그 자는 하나님이 내리는 벌을 피해서 꾀를 파고 도망가는자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큰 진노를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먹고사는데 머리로 땀을 흘리든 육체로 땀을 흘리든 힘써 일하고 먹고 사는게 성경적으로 가장 좋은겁니다. 맞는 겁니다. 그다음 세 번째,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땅은 저절로 두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 잡초만 나고 먹을 수 없는 것만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관리해야 되고 열심히 땅을 파고 가꿔야 되는 겁니다. 그다음 네 번째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요게 네 번째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땅이 아담 하와 인간 때문에 저주를 받았고 두 번째는 그래서 종신토록 죽을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수가 있고 세 번째는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고 네 번째는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을 것이고 다섯 번째는 마지막에는 어찌 된다고요? 다섯 번째는요?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네가 거기서 그 속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사람의 재료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만든 재료, 사탕의 재료는 뭔가요? 사탕의 재료는 주로 설탕이겠지요. 빵의 재료는 무엇입니까? 밀가루겠지요. 밥의 재료는 뭡니까? 쌀이지요. 사람의 재료는 뭐라고요? 사람의 재료는 흙입니다. 사람은 흙으로 만든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땅 위에 있는 지구상에 있는 어떤 좋은 흙을 가지고 어떤 예술가의 혼을 담아서 사람을 빚어가지고 사람을 만들면 사람이 나오겠습니까? 그리되면 그게 창조주가 되겠지요. 그때 하나님만 흙으로 사람을 만들지 그 외에 어떤 피조물도 흙으로 사람을 만들수없겠지요. 어쨌든 사람의 재료는 이 사람의 몸 이게 굉장히 탁월해서 금보다 보석보다 다이아몬드보다 어떤 세상의 물질보다 더 탁월한, 어떤 인간의 과학의 산물보다 탁월한 그런 기능을 가진 것이 사람의 구조고 인첸데, 그래서 가전제품이나 심지어 무기까지도 자동차, 세탁기, 또 냉장고, 또 뭐 전화기 이런 전부다 카메라 이런거보면은 전부 사람에게 있는 그런 각 지체들을 뽑아서 거기 적용시켜서 사람 흉내를 내는 겁니다. 사람의 관절 흉내내는 중장비가 있지요. 뭐하는 겁니까? 사람의 관절 손을 흉내내가지고 만든 중장비 포크레인이지요? 그거 사람의 관절하고 꼭 같습니다. 이래 딱 해가지고. 그거 흉내내는거. 또 가전제품에 인공지능이라 이름붙인 그런것들 전부 다 사람의 머리라든지 눈이라든지 귀라든지 손발 이런거 흉내내서 만든게 그런것들인데 그거 다 모아봐야 한 사람의 인체 구조와 성능만도 어림도 없습니다. 이런 탁월한 이런 사람의 몸을 뭘로 만들었느냐? 휴대폰을 순금으로 만들어놓으면 값이 얼마합니까? 휴대폰 하나 순금으로 만들면 아마 몇 천만원 하겠지요? 시계 같은것도 금으로 만들고 이래 만들면 뭐 몇 억짜리 시계도 있지요, 몇억짜리 시계. 우리는 구경도 못하겠지만은. 그런데 그런 몇 억짜리 시계 그것보다 사람의 몸은 더 탁월한데 이 사람의 몸은 금도 아니고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철도 아니고 동도 아니고 뭘로 만들었다고요? 흙으로 만들었답니다. 흔해빠진 흙으로. 하나님께서 흙을 가지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만 흙으로 만든게 아니고 알고보면 물질 피조물 전부는 흙으로 다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물질중에서 흙이 되지 않는 무엇이 있습니까? 000씨? 흙이 되지 않는 뭐가 있는가요? 세월속에서 그것이 썩어지면 흙이 안되는게 있습니까? 없지요. 전부다 흙이 다 됩니다. 성경적으로 맞는 거지요. 사람도 흙에서 만들었으므로, 흙으로 만들었으므로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죽어서 흙이 된다.
그래서 다섯가지 첫째는,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이 세상이 인간 때문에 저주를 받았습니다. 두 번째 종신토록 죽을때까지 수고해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이게 성경적으로 옳은 겁니다. 세 번째 땅은 인간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 인간을 대항해서. 땅이든지 모든 환경은 그냥 두면 인간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원래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인간이 안 가꿔도 먹을게 꽉 찼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후에 세상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때문에 인간이 관리하고 가꿔야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 네 번째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다섯 번째 필경은 흙으로 돌아간다 죽는다 그말입니다. 전도서 7장에 어디에 보니까, 자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전도서 7장, 욥 시편 잠언 전도서입니다. 제가 기도전에 봉독한 말씀인데 좀 길지만 1절부터 4절까지 같이 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시작.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생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므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宴樂)하는 집에 있는지라. 연락(宴樂)이 뭡니까 학생들? 연락(宴樂)이 무슨 뜻? 000? 연락(宴樂)이 무슨 뜻입니까? ‘연’자는 잔치할 때 쓰는 연회할 때 쓰는 그 연(宴)자. ‘잔치 연(宴)’자. ‘락’자는 즐거울 락(樂)자. 그래서 연락이라 그말은 서로 주고받는 연락이 아니고 한글로 하면 연락 같은 글자인데 한문으로는 즐겁게 잔치하는 걸 연락(宴樂)한다 그럽니다. 홍포입은 부자도 날마다 즐겁게 잔치하는 그런 생활을 했었습니다. 여기 또 하나 기억할 것이 3절에 보니까, 전도서 7장 3절에,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 그렇습니까? 슬픔이 웃음보다 낫습니까? 웃음은 기쁨이라 뜻이지요. 기쁨이 낫지 슬픔이 나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슬픔이 기쁨보다 나음은 그 이유가 뭐냐, 근심하므로 얼굴에 근심하므로 마음이 좋게 됨이라. 그러니까 사람이 마음에 근심이 있고 걱정이 있으면 마음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데 그리 되면 사람의 마음이 좋아진다 그뜻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좋은 것도 있지만은 가난이 알고보면 인생 전체를 두고 수입이 더 많고 몸이 건강한 것이 좋은 면이 많은데 때로는 몸에 병이 드는 것이 더 좋을때도 있는 겁니다. 여기보니까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 그랬습니다. 요게 성경이 가르치는 인식입니다. 요 말씀을 우리가 잘 기억을 하고 또 한번 살펴보십시다. 인생의 죽음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 우매자의 마음은 즐겁게 잔치하는 집에 가있다. 왜 그러냐. 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지혜있는 것이냐. 왜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이유가 뭐냐.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은 이유가 무엇이냐? 사람은 이 세상이란 것은 영원하지 아니하고 살아생전 세상은 죽음을 향해 일단 가는 겁니다. 마지막 죽음을 향해서 다 가는데 그리 가지 않는 인생이 아무도 없으니까 죽음을 향해 모두다 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런 말씀들이 다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자기 생각에 머리에다가 죽음을 두고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리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인식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죽음이 뭐냐?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반드시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되는 과정입니다. 000선생님? 죽음을 피할 수 있습니까? 젊었을때는 잘 모르지요.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란 것은 우리 앞에 반드시 다가오는 과정입니다. 죽음을 피해갈수는 없습니다. 늙음도 피해가지 못하는 것이고 반드시 다가오는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다가올 미래, 반드시 맞이해야 될 과정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도망다니는 것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안 만날 수가 없으니까. 반드시 만나야될 일이라면 그렇다면 도망다니고 피하는 것 보다는 만났을때 그 어떻게 만났을때를 대처하느냐 이걸 미리 알아서 미리 대처할 준비를 미리하는 것이 그게 지혜롭다 그리 말할 수 있겠지요. 참 실감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닐때 요나단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진실로 사망과 나의 사이는 한 걸음이라. 한 발짝 더 나가면 죽을 수 있고 아니면 또 살 수 있고 늘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었던게 사울에게 쫓겨다니던 다윗의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진실로 사망과 나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라. 다윗이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알든지 모르든지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믿든지 안 믿든지 늘 죽음은 우리를 따라다니고 있고 언제든지 우리 앞에 닥칠 수 있는 상황이 죽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한번 맞이하면 그걸로 끝이 나버리니까 내일이 없고 미래가 없고 나중이 없고 뭐든게 다 일단 이 세상에서 끝이 나버리니까 그래서 천하역사에 모든 사람 전부는 이 죽음을 피하려하고 안만나려고 하는 것이 모든 사람입니다. 또 그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니까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안 만날수가 없다 그말이지요. 많은 사람이 세상에 어느 계층이든 그런게 다 있습니다. 어느 회사를 가도, 어느 교육계를 가도, 과학계를 가도 종교계를 가도 또 경제계를 가도 문화계를 가도 정치계를 가도 어느 구석에 들어가도 그곳에 있어서는 안될 그런거, 반드시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될 그런 것들이 구석구석에 정도 차이지 다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관련된 사람들이 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알면서 묵인하고 넘어가는 것들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뒤집어 놓으면 많은 문제가 생기니까 그냥 덮고 조용히 넘어가는 일들이 세상에는 수도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양심이 있는데 양심이 이거는 안된다고 살아가다보면 이거는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양심이 호소하는 그런 일들을 우리는 할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때 그것을 양심을 써서 파헤쳐 가지고 이거는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니까 이거는 고쳐야 된다, 이거는 하면 안된다 회개해야 된다, 그걸 회개하면은 돈이 손해 가는데, 그 사람과 관계가 끊어져 버리는데, 큰 수치를 당하는데, 무슨 낭패 당할지 모르는데 온갖 어려움이 닥치니까 그런 닥쳐올 환난 어려움 때문에 슬그머니 덮어버립니다. 양심을 속이고 덮어버리는, 넘어가버립니다. 그런걸 가리켜서 양심이 양심을 묵피한다 그럽니다, 묵피. 묵인하고 피해서 회피한다 그 뜻입니다. 그러면 양심이 점점 죽어진다 그말이지요. 죽음이란 것은 이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다가오게 되어있는 한 과정입니다. 이 말씀은 틀림이 있습니까? 죽음은 전인류에게 반드시 다가오는 하나의 과정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 틀린 말입니까? 옳은 말씀 아닙니까? 성경 진리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절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이거는 아무도 피하지 못합니다. 여기있는 우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을 피해서 생각하지 말고 죽음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갖지 말고 사는 것만 생각을 하고 죽음은 상관하지 말자. 그래 사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 세계에서는 그게 지혜일지 모르겠고 잘 사는 것일지 모르겠으나 이 사실을 알고 죽음 너머 세계를 알고 보고 있는 우리들로써는 그 참으로 심히 어리석고 미련한 짓입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해야 된다면, 맞이하지 않을수가 없다면 이거는 말하자면은 순순히 받아들일수 있도록 그 죽음을 잘 맞이하고 더 나아가서 그 죽음을 잘 선용할 수 있도록, 우리가 이용할 수 있도록 미리부터 죽음이 오기전에 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좀 덜하지만은 학교 다니는 학생이 대학갈 고등학교 3학년이 수능시험은 피할 수 없지요. 피하면 그 학생은 대학 안 갈 학생이니까.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피할 수 없는 그 시험을 수능시험 머리 아프니까 생각지 말자, 지금만 보고 그만 놀고 싶을때 놀고 즐겁게 살자, 그 학생은 머리 아프고 복잡하고 골치아프니까 생각하지 말자 관심두지 말자 상관하지 말자 그리 사는 학생이 수능 시험을 필수적으로 필연적으로 만났을때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고 좋은 결과 맺을 수는 없는 겁니다. 맞이해야 될 시험같으면 머리 아픈 골치 아픈 복잡한 그 참 힘드는 시험을 피할 수 없다면 미리부터 계획을 세워서 준비하는 그 사람이 지혜롭다 그말이지요. 죽음은 더하겠습니다. 이걸 좀 깊이 생각하십시다. 여기있는 우리는 아무도 죽음은 피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은 생각하지 말자 상관하지 말자 마음에 두지 말자 잊어버리고 살자 할 것이 아니고 이 죽음이란 것이 마지막 인생에 땅위에서의 최종이니까 그때가 오면 이미 모든게 다 끝이 나니까 그때를 오기전에 그 죽음이라는 그놈을 만나기전에 미리부터 그때를 대비하고 생각해서 준비하는 것이 지혜롭다 그말입니다.
또 하나 죽음이란 것은 안 믿는 사람, 인간의 사후세계를 모르는 안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죽음은 영원한 끝입니다. 영원한 이별이고 영원한 중단이고 영원한 끝입니다. 두 번 다시는 없는 것이 불신자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란 것은 하나의 통과의례 중에 하나다. 우리가 실감하기 어렵지만은 성경으로 볼때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이다 그말이지요. 지나가는 과정이고 죽음이란 것은 영원히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새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낡고 지저분한 헌옷을 벗어버리는 한 순서가 죽음이다, 낡고 지저분한 헌옷이 무엇입니까? 낡고 지저분한 헌 옷이 무엇이지요? 우리가 입고 있는 고깃덩어리입니다. 고깃덩어리 몸. 그러면 새옷은 무엇입니까?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는 시공을 초월한 신령한 몸이 우리가 입을 새옷입니다. 부활할 때 입는 옷. 그 몸을 입기 위해서 그 옷을 입기 위해서 죄로 인해서 낡고 병들고 늙고 지저분해진 이 몸을 벗어버리는 것이 죽음이라는 한 과정이다, 그러니까 죽음은 영원한 영생을 위해서 잠시 쉬는 잠자는 과정이 죽음이고 잠시 쉬는 것, 자면서 쉬는 것이 죽음이고 죽음은 영원한 좋은 새옷을 입기 위해서 낡고 지저분한 때묻은 헌옷을 벗어버리는 것이 죽음이라는 한 과정이다. 요것도 우리가 실감을 하고 요 사실을 말씀으로 따져보고 실제 따져서 이게 변할 수 없는 사실이고 진리고 우리 앞에 필연적으로 다가올 한 과정, 다가올 미래라면 깊이 깊이 자꾸 생각을 해서 그때가 다가왔을때, 이렇게 설교하며 큰소리치는 저도 막상 죽음 닥치면 겁이 나서 벌벌떨지 모르겠습니다. 안 그럴 것 같으나 사람이 닥치면 다 당황하니까 그러니까 미리부터 지금부터 늘 죽음이라는 그 두 단어를 염두에 두고 그때를 대비하면서 기도도 하고 마음도 다지고 준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인식을 바로 가집십시다. 불신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영원한 끝이고 영원한 이별입니다. 두 번다시 없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의 성경 진리로 살펴볼때 죽음이란 것은 하나의 통과의례고, 영원한 천국을 향한 하나의 지나가야될 과정중에 하나고 영생을 얻기 위한 잠시 자면서 쉬고 있는 한 과정이고 영생을 위한 영원한 새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낡고 지저분한 때묻은 헌옷을 벗어버리는 한 과정이란 것이 이게 죽음이란 것이다. 요걸 꼭 인식을 하고 그리 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다음 그러면 죽음이란 것의 그래서 요런 인식들을 기억하면서 죽음을 한번 더 또 연구해보십시다. 피할 일이 아니니까,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니까. 도망다닌다고 도망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어디든지 지구끝까지 가도 이 죽음은 따라올 것이고 우주선을 타고 화성에 가있어도 죽음은 따라올 것이고 어떤 깊은 속에 가있어도 죽음은 따라올 것이고 온갖 불로초를 다 먹어도 죽음은 나를 쫓아올 것이니까 도망갈 수 없으니까 이게 죽음이니까 이 죽음은 피하지 말고 도망다니지 말고 겁내지 말고 겁은 나지만은 미리 만나기전에 미리부터 준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호랑이 사냥꾼이 호랑이가 겁나지만은 단단히 준비해서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차린다는 것처럼 무기를 단단히 가지고 약하면 함정을 파놓든지 그래가지고 호랑이를 만났을때 ‘내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지 아니하고 그 놈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 한번 해보자’ 그래 만나기전에 미리 연구하면 할 수 있는 연구하면 그만큼 자기는 설사 호랑이한테 잡혀 죽더라도 좀더 오래 끌 것이고 싸우다 죽을 것이고 그리되지 겁나서 도망가는 것보다 이거는 또 다른 경우지만은 무조건 도망다닐 것이 아니다 그말입니다. 전염병이 오면 전염병 같은 거는 피해서 다닐 수도 있고 하지만은 그래도 대비해서 피할 수 없는 것이면 대비해서 대처하는 것이 낫지 도망다닐 것이 아닌 겁니다. 죽음이란 것은 그게 왜 생겨졌느냐? 죽음의 발생 원인, 죽음이란 놈이, 사망이란 놈이 왜 인간세계에 없었는데 생겨지게 됐느냐? 000? 왜 생겨졌어요? 원래 인간 사는 장소 제일 처음에 인류가 살던 세상이 어디입니까? 에덴동산인데 거기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죽음이란 놈이 없었는데 어느날 이놈이 들어와서 인류를 다 죽여버립니다. 그놈이 갑자기 왜 생겼습니까? 뭐때문에요? 죄 때문에. 죄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죕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지음 받고 하나님이 말씀 순종으로 살라 그랬는데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지음 받은 피조물로 그리 살아가야 될 인생이 하나님을 배격하고 하나님을 쫓아내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가 하나님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 선악과 따 먹은 죄고 이게 인간의 첫 죄고 모든 인류를 다 죽인 죄라. 이 죄 이름이 무엇이라고요? 원죄입니다. 그래서 죽음이란 것은 죄 때문에 온 것이고 그러므로 지금도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습니다. 사람 죽은 시체가 있는 곳에는 뭐가 모인다고요 성경에?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이느니라. 시체 뜯어먹는 독수리들이 모이는 겁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죄의 영향이 반드시 있게되있고 죄인 있는 곳에는 그 죄와 통하는 그런 것들이 모여지게 있습니다. 그걸 뜯어먹기 위해서. 죄라는 것이 있으면 죽음은 실과 바늘이란 말처럼 반드시 따라가는 이거는 절대 법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죽음 없는 곳이 없고 반대로 죄 없는 곳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죄와 죽음은 하나라는 겁니다. 에덴동산에 죽음이 없었는데 범죄함으로 요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요 죄가 원죄였고 이때 원죄로 죽은 인간의 요소가 무엇입니까? 아담 하와의 원죄 때문에 죽은 인간의 요소는 사람의 요소라 말이 맞을지 모르겠지만은 사람의 영이 죽었습니다. 영이 죽었으니까 몸도 마음도 죽은 것인데 그 죽은 죽음은 뒤에가서 나타나니까 그래서 1차 죽음에 사람의 영이 죽었다 요게 1차 죽음입니다. 아담 하와의 원죄로 우리는 죄를 안 지었습니다. 근데 이것도 그리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악과 따 먹었습니까? 안 따먹었지요? 안 따먹었는데 왜 내가 죽어야 됩니까? 아담 하와가 우리를 대표해서 그가 우리를 대표한 우리 조상이고 대표기 때문에 우리를 대표해서 그가 따먹었으므로 우리도 거기 다 연결되서 그 자손으로 났기 때문에 죽습니다. 그런데 또 한면으로 생각해보면 만약에 아담 하와가 아니고 내가 조상되었다면 나도 따먹었을까? 모르기는 모르겠지만은 아담 하와의 자손으로 난 사람 중에서 아담 하와를 대신해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선악과 안 따먹을 인간은 역사에 하나도 없다는 뜻도 됩니다. 아담 하와의 자손으로 난 전인류는 만약에 에녹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에녹이 에덴동산에 있었으면 에녹은 선악과를 안 따먹었을까?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한 거 보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만은 그러나 그도 아담의 자손으로 원죄가 적용되어서 죽은 거 보면은 에녹도 따먹지 않았을까? 엘리야도 따먹지 않았을까? 단정은 못하겠습니다. 아담 하와의 자손으로써 그래서 전인류는 아담 하와의 자손이고 그 자손으로 난 모든 인류는 전부 하나님의 정죄 받아서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이게 단순히 그 자손이므로 정죄받아야 된다는 것도 맞지만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을 가지고 누군가 따져볼때 ‘나는 자손이지만은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안 따먹었을것 같은데요?’ 자기 착각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는 유대인들이 우리들이 그 시대 있었더면 우리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을 안 죽였을건데 그래 말하는 그 인간들은 자기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은 사람인데 저것들이 죽이는 선지자들은 하나님인데도 하나님이 사람되신 분인데도 죽였지않습니까? 그거보면은 아무리 어떤 자손이라도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그 누구라도 에덴동산에 있었으면 선악과를 따먹는 원죄는 짓지 않았을까? 그 뒤에 회개는 했을지 모르겠지만은. 그래서 원죄로 모든 인류는 다 죽었고 그때 즉시 죽은 것은 영이 죽었습니다. 이것이 어떤 죽음이라고요? 순서대로 말하면 인간에게 죽음이 온 첫째 1차 죽음입니다. 이거는 한번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붙여보는 겁니다. 1차 죽음, 죽음이란 것이 제일 먼저 온 것이 요겁니다. 인간 세상에 죽음이라는 놈, 사망이라는 놈이 들어온 첫째가 아담의 원죄로 인간의 영이 죽은 것이 인간에게 첫째로 죽음이란 놈이 찾아온 1차 죽음입니다. 여기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에녹도 엘리야도 다 포함이 됩니다. 그다음 이 죽음에서 다 죽었는데 이때 죽은 죽음은 영이 죽었고 심신은 아직까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 기억하실 거. 영이라는 것은 그때 에덴동산에서 죽은 영은 아담하와의 영만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 영은 언제 죽습니까? 그 뒤에 난 모든 사람의 영은 언제 죽습니까? 영을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언제 만들으셨다고 배웠습니까? 이거는 교리입니다. 교리적으로 사람의 영을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아담 하와 만드실 때 사람의 영도 주님 재림하실때까지 역사에 태어날 모든 사람의 영을 한꺼번에 다 만들어놨다가 창고에 재놨다가 그래서 사람이 태어날때마다 그 사람의 영을 한사람씩 꺼내서 넣어준다 요런 교리가 있답니다. 영의 전제설이라고. 근데 이거는 성경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영은 어떻게 생기는가? 영은 그 사람이 잉태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영도 같이 만들어 창조해서 그 사람에게 주인이 되도록 하신다 요게 성경적이죠. 그래서 영의 창조설이라 그리 말합니다. 요게 성경적으로 맞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영은 내가 태어날 때 영도 같이 지음받는 겁니다. 그리고나서 반드시 태어나자마자 잉태되는 즉시 그 영에게는 아담의 원죄가 적용되서 즉시 사망을 하는 겁니다. 시점으로 말하자면은 잉태는 첫째, 순서적으로 동시인데 논리적 순서로 말하면 잉태되고 정죄되고 사망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중생되는 것은 그다음 순서고. 그러면 죽음이란 것은 무엇이 전제되어있습니까? 죽음은 삶이 전제되어 있는거지요. 생명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없던 가운데 아담 하와가 생겼는데, 생겼는데 만들어놨고 생명을 불어놨으니까 만들어놨는데 만들어놓은 것이 무생명이지 죽음은 아닙니다. 만들어놨는데 생기 불어놓고 생명을 넣었으니까 살았습니다. 죽음보다 생명이 먼저지요. 그리고 난다음에 죽음이 찾아온겁니다.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서 생명을 가졌고 가지자마자 태어나자마자 생명 가지자마자 아담의 원죄가 그에게 정죄가 되고 정죄되니까 즉시 죽고 그리고나서 죽은 상태로 어느정도 있다가 때가 되면 중생이 되어 다시 살아나고 택함 받은 사람들은. 요게 순서입니다.
그러면 아담의 원죄로 1차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다 죽었는데 죽은 거기서 2차 죽음이란 것을 맞이할 수도 있고 맞이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불택자들은 2차 죽음 자체가 없겠습니다. 없고 택자들에게는 2차 죽음이 있게 되는데 2차 죽음은 뭐냐? 무슨 죽음입니까 2차 죽음은? 두 번째 인생에게 찾아온 죽음이란 것은 무엇이 죽는거라고요? 심신의 기능이 죽는 겁니다. 심신의 기능이 죽는 것인데 이 심신의 기능이 죽는 것은 절대적입니까 아니면 표현하자면 선택적입니까? 영이 죽는 것은 절댑니까 선택입니까? 절대적입니다. 강제입니다. 죄를 지었으니까. 심신의 기능이 죽는 것은 절대적입니까 선택적입니까? 이거는 죽을 수도 있고 안 죽을 수도 있는 겁니다. 중생함을 받은 성도가 주님이 십자가 대속 대형 대행 대화친 대생 이걸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신 사활의 대속 공로는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신 겁니다. 다시 주신 새생명인데 그 새생명은 하나는 영의 중생이고 하나는 심신 기능의 기회라는 겁니다. 요 기회를 그래서 현실을 통과할 때 내가 살아가면서 내 심신의 활동작용으로 사는 그 모든 생활이 그 모든 통과를 믿음으로 순간순간 토막토막을 통과해나가면 거기서 죽을 수 있는 심신의 기능이 안 죽고 그대로 통과합니다. 그러면 영생을 합니다. 그 기능은 성화되어집니다. 그러면 성화된 심신의 기능은 2차 죽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화된 심신의 기능은 2차 죽음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없는 겁니다. 그런데 중생된 사람이 현실을 통과할 때 성화되지 못하고 자기주장 자기 욕심 자기 감정 죄로 그 토막토막을 통과하면 그 사람의 죄지어서 통과한 그 모든 과정들은 기능이 다 죽었으니까 그때 죽은 그 기능의 죽음을 가리켜서 2차 죽음이라고 표현을 하는 겁니다. 순서적으로 두 번째 찾아온 죽음입니다. 그거 아닙니까? 순서적으로. 두 번째 인간에게 생사가 갈리는 것이 심신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2차 죽음은 불택자들에게는 2차 죽음이라는 것이 아예 기회조자 없는 것이고 살릴 수 있는게, 살아나야 죽음이 있는데 불택자들은 1차 죽음에서 완전히 영이 죽어있으니까 그들에게는 심신의 기능을 살릴 수 있는 재생의 기회가 아예 없으니까 2차 죽음도 없는 것이고 택자들에게는 주님 대속으로 살려주셨으므로 죽지 않을, 다시는 죽지 않을 기회를 주셨으니까 주신 그 기회를 믿음으로 말씀으로 잘 통과하면 2차 죽음은 없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원죄와 같이 원죄로 그렇게 현실을 통과해 살아나가면 그 사람은 또 다시 죽는 2차 죽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택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2차 죽음입니다. 여기는 불택자는 해당이 되지를 아니합니다. 그다음 인간에게 세 번째 죽음이라 찾아온 그 세 번째 순서는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오는 세 번째 순서는 뭐냐? 그 세 번째 순서는 그다음에 1차 죽음에서 죽은 영이 죽은 그 죽음 원죄 그것이 심신에게도 이미 적용되어서 죽어있는데 그 죽은 모습이 죽는 그 모습이 가시적으로 말하자면은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나타나는 것이 세 번째 3차 죽음이니 요 죽음은 무엇이 죽는거라고요? 심신의 형체가 일단 죽는 겁니다. 심신의 형체가 죽는 성경은 말하기를 죽음을 말하기를 성경에 믿음의 선진들이 죽을때 뭐라고 많이 표현됩니까? 그의 혼이 떠나니라. 혼이 그래서 혼과 몸에 분리되는게 인간의 죽음이라 그리 말하지요. 혼이 떠나니라. 기운이 지나야 열조에게 돌아가니라. 그리 표현되는데 요것이 3차 죽음입니다. 그러면 1차 죽음은 사람들이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그런데 지식적으로는 압니다 우리가. 2차 죽음은 이것도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보이는데 우리가 압니까 모릅니까? 우리는 압니다. 바로 배운 사람은 2차 죽음 압니다. 문제는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인간에게 있는 2차 죽음에 해당되는 심신의 기능에 죽고 사는 생사에 대해서 요 도리를 깨닫지 못하면, 요 심신 기능의 교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여기 관련된 구원은 결단코 이루지 못한다는 겁니다. 구원은 기독교의 구원은 반드시 자의사라야 됩니다, 자의사. 자신의 의사로 깨달음으로 되어지는게 기독자의 구원입니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 우리는 누가복음 17장에 하나님의 종입니다. 종이라는 말은 주인의 것이라는 뜻이고 주인의 것이므로 그 종의 모든 생애는 주인의 의사대로만 살아야 됩니다. 그게 종입니다. 그러면 종의 자의사는 자의사가 있는데 있는 그 자의사를 완전히 죽여야 종이 되는 겁니다. 그럼 그 자의사를 죽이는 것은 타에 의해서 죽입니까 자의에 의해서 죽입니까? 너무 어렵습니까? 무익한 종의 믿음을 가진 성도가 자기 자의사가 있는데 스스로의 인식과 욕심과 감정과 주관과 깨달음이 있는데 자기 생이 있는데 그 자기 뜻이 있는 그 자의사를 꺽었습니다. 주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때 자의사를 꺽은 그 사람의 그 꺽음은 자의로 꺽는겁니까? 타의로 꺽는겁니까? 강제로 꺽으면 구원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는 겁니다. 강제로 십자가를 지고간 구레네 시몬은 그 사람은 구원이 안되는 겁니다. 억지로 흉내만 낸 것이지. 내 자의사가 있고 먹고 싶은데 강제로 꺽는 것이 아니고 내가 먹으면 주님이 섭섭하시니까 안 먹는게 날 구원하신 주인되신 주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다 하고 내 스스로 먹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스스로 먹는 것을 포기하는 겁니다. 이 일을 하고 싶은데 내가 하면 하나님 말씀에 죄가 되는거니까 내가 안하는 겁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안하는 것도 억지로 안하는 것도 자의사는 자의산데, 억지의 자의사로도 안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더 깨달아서 원하고 원하는 단마음으로 그 자의사로 안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신앙의 모습, 신앙의 차원입니다. 여기 가는게 우리 신앙생활의 과정들입니다. 그래서 3차 죽음은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심신의 형체의 죽음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서 이별하는 것. 세상에서 더 이상 다시 볼 수 없는 것 그게 3차 인간에게 세 번째 찾아오는 죽음이다 그말이지요. 요 죽음은 면한 사람이 있었지요 성경에? 에녹과 엘리야는 3차 죽음은 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다만 3차 죽음을 보지 않았을뿐이지 보지 않았다 그말은 죽음이라는 그 형태가 일반 천하 모든 역사 모든 사람과 달랐을뿐이지 그들도 입고 있는 그 몸은 다 벗어버려야되지 그래서 승천하면서 벗었든 어쨌든 죽음같은 그런 과정을 그들도 거쳐야 신령한 몸으로 부활이 되는 것이지 세상에 입고 있던 죄아래 있는 이 육신 입고는 신령한 몸을 못 입기 때문에 우리는 다 일반 사람은 다 어떤 형태로 죽든 죽음이라는 그 세상 이별을 일반적으로 거치는 병사든 사고든 어쨌든 그래 죽는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고 에녹과 엘리야는 승천하므로 세상과 이별하는 그런 과정을 거쳤을뿐이지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보지 않았고 죽음이라는 과정 대신에 승천이라는 모습으로 그들은 3차 죽음을 말하자면은 통과한 겁니다. 그들에게 육신의 죽음이란 것은 필요가 없는 것이었고 계시 인물로 하나님께서 주신 거니까. 그 외 모든 사람은 3차 죽음이라는 심신의 형체를 벗어버리는 세상을 이별하는 별세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겁니다. 요게 3차 죽음 여기는 택자든 불택자든 다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1차 죽음은 누구만 해당된다고요? 1차 죽음은 누구만 해당됩니까? 전인류가 다 해당이 되지요. 2차 죽음은 누구만 해당 됩니까? 택자들만 해당됩니다. 3차 죽음은요? 또 전인류가 다 해당됩니다. 4차 죽음은 뭐냐? 4차 죽음은 언제 있는 겁니까? 마지막 주님 재림하시고 부활후에 있는데 4차 죽음은 부활후인데, 1차 죽음은 성도가 거칩니다. 2차 죽음은 거칠 수 있고 안 거칠 수 있는데 우리는 중복입니다. 거친 것도 있고 안 거친 것도 있고 그래 통과합니다. 3차 죽음은 우리는 다 거쳐왔습니다. 마지막 4차 죽음은 성도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4차 죽음은 어떤 죽음입니까? 부활해서 죽는 지옥의 영원한 죽음인데 그 죽음은 성도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성도에게 4차 죽음은 없는 겁니다. 그러면 3차 죽음의 모습으로 구속받은 성도의 죽음은 끝이 나는데 성도에게 4차 죽음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범죄한 심신의 기능입니다. 그거는 2차 죽음에서 죽은 그것이 마치 말하자면은 1차 죽음에서 죽은 심신의 형체가 3차 죽음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났듯이 2차 죽음에서 죽은 심신의 기능이 4차 죽음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는게 성도의 4차 죽음이고 일반적으로 말하면 4차 죽음은 영원한 죽음을 위해서 다시 살아나는 사망의 부활로 살아나는 불택자들, 그들의 부활은 부활했으니까 부활이 무슨 말이지요? 다시 살아났는데 살아난 목적은요? 영원히 죽기 위해서. 4차 죽음을 위해서 다시 부활하는게 불택자들의 부활이고 그들의 마지막은 4차 죽음으로 영원한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고. 성도에게는 4차 죽음은 원칙적으로 없는데 범죄한 심신의 기능은 그때 2차 죽음에 죽은 그 모습이 그 죽음이 4차 죽음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그말이지요. 논리적으로 맞습니까? 논리적으로 맞습니까? 이해가 좀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벙벙한지. 그래서 인간의 생과 사에서 1차 죽음 원죄로 인한 영의 죽음, 2차 죽음 택자들에게만 주신 심신의 기능을 살릴 기회에 살리지 못하면 죽는 심신 기능의 죽음, 3차 죽음 1차 죽음 원죄로 인한 영이 죽은 그 죽음에 심신의 죽음이 죽었는데 그 죽음이 가시적으로 나타난 그 3차 죽음 전인류에게 다 해당되는 3차 죽음, 4차 죽음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불택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영원한 지옥에 영원한 사망을 당하기 위해서, 사망이 무슨 뜻입니까? 사망이라 말은 죽음이란 뜻 아닙니까? 영원한 죽음을 위해서 부활하는 이 4차 죽음. 그리고 동시에 택자들의 범죄한 심신의 기능이 가시적으로 죽는 그 죽음 이게 네 번째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오는 죽음이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렇게 죽음이란 것을 요 단어를, 요 사실을 잊어버리고 벗어버리고 도망치고 피하는 이것이 잘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반드시 맞이해야될 그런 사실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준비하고 생각하면서 좀 교회오면은 소망의 말씀 밝은 말씀 기쁨이 넘치는 이런 말씀이 되야 되는데 죽음이라는 가장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생각해보니까 마음도 무겁지만은 그러나 이걸 우리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는 반드시 그 누구도 한번 거쳐가야되는 과정이므로 그러므로 제가 어느정도 장담을 하는데 오늘 이 말씀은 영원을 두고 하나님 앞에 잘못됨이 없는 말씀일 겁니다. 틀림이 없는 사실이니까. 요 모든 말씀들이. 그러니까 요 사실을 기억을 하고 항상 그것만 생각할 수 없지만은 모든 일 할때 우리는 요 죽음이라는 반드시 거쳐가야 되는 피할 수 없는 한 과정 요걸 늘 생각하면서 그때가 세상에서 마지막인데 그때가 되면 나는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 그 넘어는 이 세상에 살아생전에 모든 생애의 심판만 있을 것인데 그 죽음이라는 것이 내 앞에 현실로 닥쳐왔을때 병으로 오든지 사고로 오든지 어떤 형태로든지 내앞에 왔을때 그때 나는 그 죽음을 맞이할 때 어떻게 그 죽음을 상대하게 될 것인가 요 사실을 평소에 생각을 하고 기도하고 준비를 하는 사람은 그때 맞이할 때 덜 당황할 것이고 이거 상관없이 살아생전만 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은 살때는 좋았는데 그날이 닥쳤을때는 심히 당황하고 어찌할 줄 모르고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때늦은 후회. 이미 지나가고 나면 후회라는 것은 참 아픈 겁니다. 후회는. 그러기 때문에 회개라는 것은 후회가 동반된 것인데 회개는 아픔입니다. 후회라는 것은 아픔이고 회개는 아픔이 고통이 따라가야 진정한 회개가 되는 것이지 고통없는 회개는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병이 들었는데 그 병 고치기 위해서는 약을 먹든 주사 맞든 수술하든 어쨌든 고통이 따라가야 병은 치료가 되는 것처럼 회개라는 것은 지은 죄를 고치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이 따르지 않고는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그 때가 오기 전에 그날에 후회할 것을 그날에 땅을 치며 통탄할 것을 지금 미리부터 대비하고 준비하며 살자 그말입니다. 우리 김용기 할머니를 보내고 나서 저는 아쉬움이 너무 많았습니다. 참 안타까웠습니다. 평소에 자주 좀 가서 예배도 드려주고 위로도 해드리고 늘 마음에 그래야 된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한번 제대로 가지를 못해서 그래서 어제 장례식 할때 밤사이 가족들이 의논하기를 가면서 가족들이 영정을 들고 어머님댁에 가보자 그러는데 그 둘째 사위되는 장로님은 안된다 그러고 저한테 예배를 좀 빨리 마쳐주십시오. 영정들고 한번 가봐야 됩니다 그래서 영정을 들고 간다 그럼 저는 곤란하겠습니다. 이게 꼭 그대로 관철하시면 저는 이 장례식 참여를 못 하겠습니다. 좀 강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장로님도 ‘그렇지요 영정은 안되지요’ 지나가는 길이니까 가족들이 어머니 생각에 잠시 내려서 집 한번 돌아보는 건 할 수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장의차 가는 길에 가족들이 모여서, 모여서라기보다 각자 어머니 계시던 집에 거기 한번 가는데 저도 내려서 한번 가봤습니다. 생각을 하면서. 보내고나니까 그래서 늘 마음속에 이분 돌아가실때는 내가 반드시 임종때 가서 곡 손 한번 잡고 그래 보내드릴것이다 하고 늘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일입니다. 그래서 연락받고 깜짝 놀라서 얼른 뛰어갔는데 그만 한 10분 늦었을까요. 이미 늦어버렸다 말이죠. 나오는데 하도 아쉬워서 안치실로 내려갈 때 제가 부탁을 해서 얼굴 좀 보도록 해주십시오, 다 덮어놨는데 걷어가지고 좀 보고 제가 얼굴을 좀 만져봤습니다. 이마도 좀 만져보고 뺨도 좀 만져보고 마음이 하도 아쉬워서. 완전히 식지 않는 그 상태로. 근데 그것이 아무리 아쉬움이 진해도 이미 가버렸습니다. 후회가 되지요. 후회된들 어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입관식때 말씀이 그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은 한번 죽습니다. 다 아는 사실이지요. 죽으면 모든게 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살아생전 해야 됩니다. 죽기전에. 모든 건 죽기전에. 죽고나면 다 늦습니다. 죽음이란 것이 내 앞에 닥치면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언제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으니까 안 믿는 사람은 알아도 그들은 모르는 것이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쨌든 세상에서 조금 더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겁니다. 좀 더 오래 살려고. 죽는 걸 그렇게 겁을 내는 겁니다. 우리도 죽음이 두렵지만은 그러나 성경 진리로 알고나서 보니까 죽음이란 것은 하나의 통과하는 의례고 이거는 잠시 영원한 세계 들어가기전에 자면서 쉬는 것이고 떨어지고 헤어지고 때묻은 누더기 헌옷입고 영원한 신령한 새옷을 갈아입는 과정이니까 요래 인식을 바꾸고 그러기 때문에 그때 맞이할 때 우리가 후회되지 않도록 그 죽음을 미리 알고 대비하고 대처할 준비를 지금부터 하는 것이 지혜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주님 재림 말씀하실 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주님 재림은 피할 수 없고 반드시 오게 되는데 그 재림 오는 그 날을 맞이하게 될 때 너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뭐라 그랬습니까? 어떤 사람이 되라고요? 화목하게 삽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 마련 합니까? 돈 많이 법니까? 자녀 잘 기릅니까? 어떤 사람이 되라고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다음에는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라. 주님 재림의 날을 생각하며 현재를 살아라. 인간의 죽음을 생각하며 오늘 현실을 살아라.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요 말씀을 가지고 우리 생활을 좀 더 조심스럽게 근신하고 조심해서 사는, 나그네로 지낼 때를 두려움으로 사는 우리가 되도록 하십시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 기억하십시다.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로 가지고 요 죽음에 대한 내막을 알고 우리는 살아생전 죽음 준비를 잘 하는 우리가 되고 주님 맞이할 때 그날에 기쁨으로 맞이하는 그런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소원하고 힘을 쓰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