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15일 금밤
2026년 5월 15일 금밤
찬송: 79장
본문: 잠언 27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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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봅니다 3절 돌은 무겁고 돌은 무겁습니다. 큰 돌은 무겁고 작은 돌은 가볍습니다. 그런데 돌은 무겁다고 했으니까 무거운 돌은 말씀합니다. 드러내기가, 뽑아내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깊이 박혀있다. 그런 뜻이지요. 요즘 텐트를 잘 안치는데 과거 텐트칠 때 텐트 터 닦는다고 많이 고생했는데 큰 돌이 아주 깊이 있으면 참 어렵습니다. 돌이 왜 무겁습니까. 돌이니까 무겁지요. 왜 무겁습니까. 일반적으로 질량이라는 게 있죠. 밀도가 다져져서 많은 게 되어서 압축된 것이 있으니까 그런 겁니다. 돌만한 크기의 나무를 들면 훨씬 가볍습니다. 그런데 나무도 나무 여러 가지 섞어서 만든 그런 잡목들 이런 것들은 가벼운데 나무도 같은 크기라도 참나무 박달나무 이런 것 굉장히 무겁습니다. 안에 밀도가 아주 촘촘히 되어있기 때문에 무겁습니다. 나무보다 같은 크기로, 스티로폼은 더 가볍고 스펀지는 더 가볍습니다. 그 안에 빈 공기 빈 공간이 있고 밀도가 약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자잘한 가루가 아주 단단하게 뭉쳐져 있으니까 무거운 겁니다. 돌보다 철은 더 무겁겠지요.
자연적인 걸로 철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돌은 무겁습니다. 우리를 가르켜 말씀합니다. 우리 중에서 나라는 사람 중에서 나라는 사람이 자기 중심이 된 그 사람을 도리라고 합니다. 내가 내 중심이 되면 돌이 되는 겁니다. 성경에 돌은 주로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주님을 말씀합니다. 성경에 돌은 제일 큰 돌이 반석이 있습니다. 만세반석, 베드로를 가르켜서 너는 반석이다. 너는 교회의 터가 되는 것, 기초가 될 것이다. 너는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 이런 돌인데 그런 게 있고 그보다 더한 돌이 되는 모퉁이 돌이 있습니다. 모퉁이 돌이 있고 성경에 돌은 산돌이 있습니다. 모퉁이돌 주춧돌은 산돌이라고 했습니다. 산돌 예수님의 산돌을 본받아서 삼았던 목사님이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살아있는 돌이다. 말이 맞습니까. 안 맞죠. 예수님이 산돌이고 그걸 호로 삼았습니다. 백 목사님은 포도나무 대목가지가 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흰 돌을 주겠고 새 이름을 준다고 했습니다. 흰 돌은, 흰 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가르켜 흰돌이라고 합니다. 반석돌, 모퉁이 주춧돌, 이런 돌이 있습니다. 이런 돌은 전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반석이신 하나님 주님, 주춧돌 모퉁이돌, 산돌이신 주님
다니엘서 2장을 보면 느부갓네살왕이 꿈을 꾸고 해석해주면서 신상이 있고 머리가 있고 금이 있고 은이 있고 동이있고 섞여있는데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한 그게 깨부셔버립니다. 그 돌을 기독교로 해석합니다. 기독교와 세상, 마지막에 이 세상을 다 깨트려버린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일제 시대 때 일본식 기독교를 믿으라고 하니까 집채만한 바위를 손바닥만한 그릇 위에 올리면 어떻게 되나요. 그게 예수교입니다. 기독교입니다. 일본 나라입니다. 일본 나라에 기독교를 집어넣으면 일본이 깨져버립니다. 그 말 그대로 원자 폭탄 2개에 바싹 깨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고 종들을 아는 그런 분들은 결코 허투루 하지 않습니다. 성인은 성인을 안다고 하지요. 참된 종은 참된 종을 알아본다고 합니다. 돌은 우리 자신이고 우리인데 내가 자기 중심이 될 때 이 돌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반석이시고 주님이 모퉁이돌이고 산돌인 것처럼 버가모 교회에 흰돌을 주시겠다고 한 것처럼 하나님과 연결이 되면 우리가 하나님과 닮아서 교회의 터가 됩니다. 근본 터는 주님인데 베드로를 보고 그랬으니까 주님 힘 입어서 그리 되겠고 말씀이 나를 잡아 먹으면 우리가 교회를 떠바치는 기둥 주춧돌이 되는 것이고
산 돌이라는 것은 돌인데 살아있다. 이 말하고 성경에 비슷한 표현이 뭐가 있습니까. 산돌고 비슷한 표현이 뭐가 있습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산제물입니다. 제물은 죽어야하는데 산재물로 드려라. 죽었는데 살았다. 살았는데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살았고 제물로 바쳤으니까 죽었고 죽은 자는 생각 말 주관이 없습니다. 자기 이해가 없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주격으로 계셔서 움직이니까 자기는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인 되어서 움직이니까 사는 게 전부 하나님을 인해서 사는 겁니다. 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산제사고 그것보다 철저하게 없는가가 산돌입니다. 산돌은 아예 생명이 없는데 살아있습니다. 돌멩이는 주인이 원하는대로 움직입니다. 주님이 때리면 맞고 깨면 깨지고 버리면 버려지고 가루만들면 가루가 되는 게 돌입니다. 주인이 움직이는 그대로 되는 게 산 돌이다. 산돌을 닮은 돌이 바로 흰돌, 하나님 형상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돌이 우리인데 말씀이 나를 다 잡아먹어버리면 내가 반석이 되고 내가 모퉁이 돌이 되고 그래서 이런 내가,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버리면,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버리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끊어지면 자기가 자기 중심이 되는데 자기 중심이라는 말은 자기가 하나님이고 왕이고 주인입니다. 이 셋은 같은 말이라고 말씀 드렸지요. 하나님과 왕과 주인은 같은 말입니다. 이 세 위치, 하나님과 왕과 주인의 공통점이 뭡니까.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왕이 되고 자기 중심이 되는 걸 악이라 그러는데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죽는 거지요. 하와가 선악과 따먹은 것은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뱀은 간교해서 압니다. 이 허영과 허욕많은 여자가, 이 여자가 하나님이 된다 그러면 먹을 거다. 하나님이 된다는 그 말은 선악을 규정짓는 그렇게 말했고 하와는 어떻게 알아들었습니까. 전지전능자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 것을 간교라고 하고. 그렇게 알아듣고 알지 못하고 행동한 것을 보고 미련하다고 합니다. 허영이 들어가면 사람이 미련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되려고 선악과 따먹었고 그게 원죄가 되어서 죽은 겁니다. 선악의 중심이 자기가 되어서 자기 중심이 되니까 주체입니다. 원동이고 능동입니다.
그 하나님과 왕과 주인의 특징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무도 침범을 못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은 왕은 왕이므로, 이 세상의 모든 왕은 하나님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을 가르치는 자연 계시입니다. 진짜 왕이라면 아무도 그 왕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진짜 주인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겁니다. 주인이니까. 모퉁이돌이 되고 산돌이 되고 흰돌이 되는데 이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끊어지고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건설구원적으로도 말씀은 내 속에 못 들어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는 것인데 하나님과 내가 끊어진 상태로 하는 것입니다. 연결이 되어야하지만은, 하나님과 끊어지니까 자기 중심이 되어버립니다. 주인이 됐습니다. 아무도 이 사람은 건드리지를 못합니다. 실력없는 존재가 왕이 되면 왕은 하나인데 그게 하나 더 생기면 반역죄입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역적죄입니다. 자기 중심의 죄는 역적죄가 됩니다.
그런데 실력은 그만큼 안되는데 욕심만 가져서 그렇게 되니까 지옥으로 가는 것이고 그러면서 자기가 왕이 되니까 누가 건드리면 감히 나를 건드려, 말하는데 내 말에 토를 달아, 내 성질을 건드려, 내 욕심대로 못하게 해, 내 위신을 훼손시켜,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기 중심이 된 그 사람은 누구도 터치도 못하는 겁니다. 조금만 자기에게 거슬리면 분노가 나와버립니다. 이게 돌입니다. 그래서 그 돌이 무거운 겁니다. 자기 중심이라는 돌은 자기 중심이라는 악 하나가 그 속에는 오만 것이 다 있습니다. 자기 중심에서 나오기 때문에, 돌 속에 많은 성분이 꽉 짜여져서 단단하게 뭉쳐져서 돌이 된 것처럼, 자기 중심이 되고 오만가지 죄가 다 뻗어나오니까 대책이 없는 겁니다. 바로 되어서 연결되어서 순종을 하면 참 반석도 되고 기초도 되고 뜨인 돌이 되어서 깨트리고 불변의 하나님을 해 나가는 중심이 되고 왕이 되면 아무도 그 사람을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된 사람, 자기 중심의 마음을 가르켜 자기 중심의 마음을 가르켜 악성, 악습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뽑아내기가 어려운 겁니다. 악성, 잘못된 생각, 잘못된 방식, 일반적으로 악성이라는 잘못된 지식을 바꾸기가 잘못된 가치관을 바꾸기가 잘못된 욕심 바꾸기는 참 어렵고 잘못 길들여진 것도 있는데 돌은 무겁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나는 내 속에 내게 있는 돌, 나는 무거운 돌이 아닌가. 돌같은 그런 악성 악습이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깊이 자리잡고 있어서 모래도 가볍지 않습니다. 성분은 돌과 같은 건데. 돌은 큰돌이고 주먹만한 그게 큰 돌입니다. 모래도 가볍지 않다. 그런데 모래가 많으면 뭉치면 이것도 무거운 겁니다. 그래서 모래라는 것은 자잘한 건데, 사소한 건데, 별것도 아닌 것인데 사람이 볼 때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하나 둘 하나 둘 쌓이고 그러면 그만큼 어렵다.
무지의 반대는 슬기, 지혜입니다. 무식의 반대는 유식입니다. 무지를 말합니다. 무지라는 것은 지식에 대한 것보다도 현재 하는 행동에 대해서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겁니다. 모르는 사람이 모르면서 말하고 모르면서 행동하면 그런 사람이 되는데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슬기로운자로 여긴다. 가만히 있으면 표가 안 나는데 모르는데 말은 안하고 행동하면 미련한 자가 되는 겁니다. 미련한 자는 개가 토했던 것을 도로 먹듯이 미련한 그 행동을 거듭합니다. 공부 안하면 성적 떨어진다. 알면서 안하는 걸 반복하는 걸 미련이라고 합니다. 이게 일종의 준비 못하는 자가 미련이지요. 다섯 처녀는 슬기가 있고 다섯 처녀는 미련한 다섯 처녀입니다.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밤 중에 올지 모르니까 미련한 다섯 처녀는 몰라서 준비 안했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될 수 있으니까 준비 안한 것이 미련입니다. 결정적으로 가장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가장 미련한 자입니다. 부활을 모른다 심판을 모른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을 하는 것이 전부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알고나면 그렇게 될 수 없는 거지요.
믿는 사람이 단편적으로 모르면서 안하면 되는데 모르면서 하니까 미련한 것이 되고 그렇게 되는 거지요. 주식투자해서 실패하면 안하면 됩니다. 요즘 우리나라 주식에서 난리가 나는데 이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아슬아슬 합니다. 망하면 안하면 되는데 끝을 보고 하니까 패가망신 하는 겁니다. 준비하면 되는데 준비 안하니까 미련한자, 하나님을 모르는 자, 인생의 내세를 부활을 심판을 모르면 미련한 자 밖에 될 수 없는 거지요. 그 바탕이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 미련하다. 미련의 반대, 미련은 무지입니다. 그런데 무지의 반대는 슬기입니다. 지혜입니다. 여호와라는 것이 지혜의 기반이다. 말씀이 그 속에 자리 잡고 미련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과 끊어지고 자기가 돌이 됩니다. 하나님이 됩니다. 그때부터 그 사람은 어두워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미련한 자의 분노, 분노라는 것은 뒤에 나오지요.
분노라는 것은 감정이라는 것은 슬픈 것도 감정 기쁜 것도 감정 미운 것도 감정 화내는 것도 감정인데 그걸 다스리지 못하면 의를 이루지 못한다. 미련한 자는 자기가 자기 속에 중심이 되어있고 무지하니까 자기가 중심된 사람이니까 무지합니다. 그런 사람은 정상적인 대화가 안됩니다. 말이 안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은 살짝 건드리면 분이 쌓이고 이 사람은 대책이 없습니다. 절구가 뭔지 압니까. 쇠로 만든 아주 단단한 그런 철롬 만든 절구통. 안에 곡물 넣고 찧어서 만드는 건데, 미련은 그래도 벗어지지 않는다. 미련한 사람은 그 근본 자체가 자기 중심이 바꾸어지기 전에는 안되는 겁니다. 자기 중심이 된 거기에 미련이 있으니까 더 무겁다. 방법이 없는 겁니다. 자기 중심에다가 무지에다가 제가 하나님이 된 거기다가 분까지 쌓이니까. 미련한 자하고 지혜로운 자하고 싸우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게 미련한 자의 분노입니다.
무서운 겁니다, 시기보다 질투보다 투기입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되면 시기 질투가 나고 삼각관계에서 그게 시기 질투가 나는 거지요. 전부 다 한 몸 한 형제입니다. 한 형제인데 교회 안에 한 식구고 한 형제인데 다른 사람이 형제가 한 몸인데 다른 사람이 더 잘하고 좋으면 같이 좋아야하는데 깨닫지 못하고 시기하는 것은 자기 몸을 자기가 찧는 그게 시기고 질투고 투기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진노하시는 게 이런 거, 그래서 믿는 우리가 한 눈 팔면 용서치 않습니다. 주의 신부된 우리가 세상을 향하면 신랑되신 주님이 투기를 해서 용서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가지고 고요히 돌아보십시다. 기도하시다가 자유로 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