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28일 주일 오전
김동민2024-01-28조회 318추천 42
2024년 1월 28일 주일 오전
찬송: 136장, 115장
본문: 요한복음 11장 32절 ~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의 눈물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눈물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종류도 있고 깊이도 있고 여러 면이 있는데 어떤 눈물일까 생각을 해봅니다. 사무엘상 6절 말씀을 해서 벧스메스로 가는 암소를 통해서 구원 도리를 살펴봤습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을 살펴봤습니다. 한 사람 사람마다 역사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단일성, 단일성라는 말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좀 다른 면으로 총류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 재산을 일반적으로 총류라고 합니다. 절같은 곳에서 총유라 그러는데 의미를 들어보니까 아버지가 아들이 예를 들어서 5남매가 있는데 값이 나가는 도자기가 있습니다. 그 도자기를 다녀들에게 줄 때 이 도자기는 너희 다섯 명의 것이라고 상속시켜줬습니다. 그러면 그 도자기는 다섯 명 모두의 재산입니다. 이걸 총유라고 합니다. 이건 나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누어질 수 없는 분이고 단일성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있고 진노가 있습니다. 질투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진노가 하나님은 나눠지지를 않습니다. 사랑이 진노고 진노가 사랑입니다. 모여서 쏟아진다는 뜻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나눠지지 않고 쏟아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리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단일성이기 때문에 완전과 전지전능과 그런 완전 전지전능을 다 담을 기대와 소망을 따라서 역사가 다 똑같이 쏟아지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는 더 사랑하고 누구는 덜 사랑하고 누구는 소망을 더 가지고 덜 가지고 기대가 크고 적고 이러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같이 하시는데 문제는 단일성으로 모두를 사랑하시고 기대를 거시고 소망을 하시고 쏟아부으시는데 왜 사람마다 차이가 나게 되어 있는가. 왜 우리는 아브라함, 다윗, 사도 바울이 되지 못하는가. 하나님은 쏟아부으시는데 안되는걸까. 장마철에 폭포같이 쏟아져도 무엇에 따라 물이 남아있는 차이가 있습니까. 그릇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처럼 댐을 만들어서 저장을 해놓습니다. 비는 항상 오는 게 아니니까 우리나라는 물이 부족한 나라는 물을 저장해놨다가 갈수기가 되면 물을 땡겨쓰는 겁니다. 그릇이 크면 그리 되는 거고 작은 사람은 세수대야 가져다 놓고 또 오겠지 이러는 겁니다. 모든 사람에게 고루고루 가는데 하나님을 상대하는 우리들이 은혜를 받으면 우리 것이 되는 것이고 안 가면 상관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은 지대하게 미치는 겁니다. 그 한 사람이 저도 한 분 한 분이 그런 분들이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소망을 가지는 겁니다. 내가 비록 죄 많은 죄인일찌라도 일어서면 될 것이고 어릴찌라도 어린 사무엘 어린 다윗을 통해 역사하셨으니까 큰 사람이 될 수 있고 늙어서 마지막 임종이 얼마 안 남았어도 전부 다 쏟으면 되는 겁니다. 믿는 사람은 소망없는 사람이 없고 기대 없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 역사가 오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큰 죄가 나는 안된다고 하는 죄입니다.
두 번째, 세상이 교회를 이기면, 믿는 사람은 천하의 무적입니다. 믿음은 폭발 능력이고 전능의 솜씨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약할 때는 이스라엘이 야금 야금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정복해서 먹고 들어가니까 모압의 발락이라는 왕이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불러서 저주하게 했는데 저주는커녕 축복을 하고 왔지요. 마지막에 부귀영화가 탐이 나서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이름 가진 인간이 발락에게 술수를 가르쳐줬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천하무적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죄만 지으면 하나님이 때려버립니다. 죄를 짓게 만들면 됩니다. 참 나쁜 놈이지요. 그래서 칼로 죽였다고 합니다.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그걸 들어서 예쁜 여자들 앞세우고 맛있는 음식을 풍겨서 쳐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23000명이 죽어버렸습니다. 믿는 사람은 적이 없습니다. 이기지 못하는 지게 되는 원인은 자기 속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은 죄만 안 지으면 어떤 누구도 무서울 게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죄를 짓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말아야합니다. 자존심이 절단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는 짓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면 천하무적이 됩니다. 불신 블레셋에게 붙여버렸습니다. 법궤를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신 정도를 넘어서서 법궤까지 빼앗아 버리니까 블레셋에 재앙이 일어나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긴 것도 법궤를 빼앗은 것도 그것도 전부 엘리에게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무서운 것이고, 그렇다할찌라도 불신 세력이 의를 해버리면 안되는 겁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이 악성과 악습이 의의 세력을 이겨버리면 나는 절단나게 되는 겁니다. 고깃덩어리 멀쩡해도 다 절단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의 머리된 사람은 눈 밝은 사람의 머리입니다. 아들이 머리될 수 있고 딸이 머리될 수 있습니다. 현재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불의의 세력을 눈감아주고 의의 세력을 꺾어버리면 암덩어리를 키우는 게 되고 큰일나게 되는 겁니다. 이 블레셋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난 다음에 뉘우쳐 깨달았습니다. 법궤는 빼앗아오는 게 아니었다. 하고 최선을 다해서 돌려보내니까 재앙을 멈춰주셨습니다. 그때 얼른 뉘우치고 돌이키는 사람은 되는 것이고 자존심세우고 그러면 절단이 나버리게 되는 겁니다. 불신 세상도 하나님께서 다스린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리고 벧스메스로 가는 암소가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수레를 새걸 만들고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암소 두 마리를 법궤를 실어서 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암소가 젖이 나는 소입니다. 새끼를 먹이는 소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암소를 골라서 보내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송아진 가둬놓고 어미 소를 그냥 보냅니다. 어미 소가 그러니까 끌고 가면서 송아지를 데려가지 못하니까 울면서 갑니다. 이 울음을 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어미 소가 송아지를 두면서 가는데 갈 수 가 있을까. 송아지를 떼놓고 다른 데 갈 수 있을까 없습니까. 일반적으로 자연적으로 송아지를 데리고 젖을 먹여야하는 어미소가 쫓아보내면 갑니까 안 갑니까. 안 가는 겁니다. 그런데 사무엘상에는 갔습니다. 왜 갔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쓰셨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짐승도 물고기까지도 제 새끼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새끼를 버리고 가진 없습니다.
짐승도 어떤 종류도 본문입니다. 새끼를 떼놓고 가지 않습니다. 버티고 죽지. 그런데 암소가 끌면서 갔습니다. 자연 계시로 쓰신겁니다. 울면서 갑니다. 새끼를 젖을 먹여야하는데 없으면 죽지요 별 수 없습니다. 농부들이 관리하겠지만 자연상태면 죽는 거겠지요. 정상적으로 갈 수 있을까. 가기는 가는데 어미의 마음이 심정이 어떨까 그 말이지요. 그 울음이 어떤 울음이었을까. 처절한 울음이었겠다. 너무 슬픈 고통스러운 울음이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새끼를 두고 타지로 가야하는 사지로 끌려가는 어머니라면 아마 죽어버릴겁니다.
그 눈물이 어떤 눈물이었을까. 이걸 좀 생각해보는겁니다. 그런데 법궤를 실고 가야하기 때문에 새끼를 두고가는 어미 소가 울면서 가는데 멈추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갑니다. 마지막에 벧세메스까지 가서 멈춰섰습니다. 거기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의 생활이 이런 걸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님가신 그 걸음을 참된 종들이 걸어갔고 그 사람들만 걸어가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천국입니까 다윗의 천국입니까. 그러면 우리도 가는 겁니다. 그 천국이 내 천국이면 가는 겁니다. 그게 걸음이었고 새끼를 두고 간 어미 소의 울음이었습니다. 비통했겠다. 안 갈수가 없으니까. 차라리 죽을 수도 없는거죠. 가야하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겁니다. 눈물이라는 것은 눈물샘이 있다고 합니다. 눈물샘을 자극하면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눈물이라는 것은 슬프면 눈물이 나는 겁니다. 억울하면 눈물이 나는 겁니다. 감격스러우면 눈물이 납니다. 여러 가지 원인과 작용에 의해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피상적인 눈물이 있습니다. 외부 자극에 의한 그런 것. 슬픈 장면을 보니까 슬픈 이야기를 귀로 들으니까 눈물이 납니다. 이런 눈물을 사람들이 자극시켜서 눈물을 빼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전부 영화 배우들이고 드라마 작가들이고 소설가들입니다. 많이 울어줄수록 그사람들 돈벌이 시켜주게 되는 겁니다. 그런 눈물은 참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쓸모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 눈물은 볼 때 울었다가 웃긴 장면을 보면 웃음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성을 넣어놨기 때문에 울게 되는데 울음이라는 것이 피상적인 울음, 시청각적인 순간적인 울음은 별로 의미가 크지 않고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작가들이 쓰면 눈물바다로 갈 수 있습니다. 아무 의미없습니다. 광우병 사태일 때 미국산 소고기 먹으면 죽어서 그거 한 마디에 온 나라 사람들이 나와서 정권까지 바뀌어버렸습니다. 언제든지 이성이 감성을 다스려야하지 감정이 이성을 다스리면 안됩니다. 정치판 테러 때문에 난리지요. 그게 전부 그런 겁니다. 그래서 감정에서 나오는 피상적인 눈물은 쓸모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 것도 필요할 때가 있겠지만 대개 그런 겁니다.
젖먹이 아기들은 엄마만 안 보여도 웁니다. 그게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살펴는 봐야하겠지만 가지고 놀던 장난감 뺏겠다고 하는 울음.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겁니다.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면 문제가 되는 겁니다. 몰라서 우는 겁니다. 우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표현을 합니다. 말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초등학생들도 싸우다가 맞으면 울고 그럽니다. 중고등학생 아이들이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생각해봐야합니다. 이건 심각하게 생각해봐야하는 겁니다. 중고등학생이 눈물 흘린다 통곡을 한다하면 보통 문제가 아닌 거지요. 거기다가 어른이 운다. 그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사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눈물이라는 것은 깊이가 다른 차원이 됩니다. 운다고 해서 다른 울음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아는 사람들의 눈물은 사람의 울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슬퍼야 울게 되아질까 얼마나 억울하면 울음이 나올까 얼마나 분하면 울음이 나올까. 울게 되어질까. 일반적으로 다 큰 성인들 다 자란 성인들 저는 요즘 조금 느꼈는데 백목사님께서 집회하실 때 눈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건 다른 느낌입니다. 일반적으로 눈물은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날 만큼 슬프다면 괴롭다면 심각한 겁니다. 살펴봐야하는 겁니다.
다윗의 눈물은 특별한 게 있습니다. 목동 시절부터 다윗은 요즘 말로하면 모범생이 아니었습니다. 들판에서 양을 먹이면서 사자와 곰을 찢어죽일 정도면 못됐다 정도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주면서 형들이 잘 있는지 가서 보고와라. 선물을 주고 증표를 가져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말하자면 그런 면이 있는 사람인데 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자하고 싸우지요. 양 때문에 목숨 걸 목자가 있습니까. 죄를 지었을 때 울었습니다. 7일을 아무것도 안 먹고 울었습니다. 그게 출발입니다. 솔로몬을 주셨지만 다윗이기 때문에 너무도 귀한 다윗이라 그걸로 그치지 않습니다. 형이란 놈이 못된 짓해서 건들여서 싸움이 납니다. 그때 다윗 아들 다 죽어서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때 다 울었는데 다른 사람의 울음과는 무게가 다릅니다. 그 안에 많은 것들이 담겨있습니다.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대는 패륜이 됩니다. 도망을 칩니다. 그래서 부탁을 합니다. 나를 위해서 소년 압살롬, 칼을 들일말큼 얼마나 똑똑하고 잘난 놈입니까. 제일 똑똑하고 실력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밑에 꾀를 써서 다윗보다 먼저 다 사로잡은 사람이 압살롬입니다. 실력있는. 그런데 그걸 소년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심정이 들어있습니다. 저것이 저러는 이유는 내 탓이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했는데 나쁜 요압이 무참하게 압살롬을 죽여버립니다. 그래서 비통하게 웁니다. 슬피웁니다. 그게 다윗의 울음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지요.
울음에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울음을 아버지들이 어머니들이 울어야, 우리 2세 3세 자식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 눈물이 있습니까. 그런 건 못난 사람이 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철저하게 치는 것입니다. 그 눈물이 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다윗의 비통한 울음이 있어야 앞날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여러 사람의 울음이 있습니다. 에서는 축복을 빼앗기고 통곡을 하지만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때 뿐이어서 가치가 별로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2장, 예레미야의 눈물이 나옵니다. 밤낮으로 울었습니다. 회개를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이 성구를 가지고 번역해서 밤낮으로 회개의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의역을 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이게 예레미야의 눈물입니다. 그 덕분에 앞날이 희망이 있던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킬 수 없고 매를 돌이킬 수 없는데 그 다음을 알려면 이런 희망이 있어야합니다. 덕분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겁니다.
자기 죄를 돌아보면서 이 분이 오셨구나 이분이 구주구나 이분 덕분에 내가 살았구나 쏟아지겠죠. 감사의 감격의 눈물입니다. 그 눈물 보시고 많은 죄가 사함 받았다고 합니다. 저 여자가 죄인인데 죄인이 거룩하다는 선생님 발을 만지니 전염이 되겠네 그랬습니다. 마리아의 눈물입니다.
베드로의 눈물도 있습니다.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러니까 닭이 두 번째 울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닭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하고 통곡을 합니다. 그래서 전해지는 말을 하면 닭 울음소리만 들으면 울었고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그게 순교하게 된 양분이 된 것입니다.
다윗의 눈물, 에서의 눈물은 가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 마리아의 눈물 베드로의 눈물. 깊이가 무겁습니다. 보통 눈물이 아닌겁니다. 우리가 이런 걸 가지고 눈물을 찾아봐야합니다. 주님은 성경에 찾아보면 더 있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알기로 세 번 웁니다. 첫 울음이 마귀에 대한 통분의 눈물이고 미혹받아서 멸망에 대한 민망의 눈물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세 번 해서 인간을 지옥에 던져버렸구나. 마귀가 지금까지 그 앞에서 붙들고 미혹시킵니다. 미귀에 대한 통분의 눈물이고 그에 의해 영원한 사망을 받았는데 그걸 구하러 왔는데 찾지 못하고 애가 타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성전을 보고 우십니다. 앞으로 이 성전이 어떻게 무너질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로 성전이 무너지는 것이고 미리 보시는 주님이 우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눈물은 동산에서 통곡하는 겁니다. 눈물이 흘러서 핏방울이 되기까지 우리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 게 주님의 눈물입니다.
아이들 다 울고 자랍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부터는 살펴봐야합니다. 울면 안되는 어른들이 울면 다 다릅니다. 그런데 다윗의 눈물은 그런 눈물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본문에서 주님의 눈물을 생각해보고 그분이 눈물을 흘리셨다 보통 눈물이 아닌 겁니다.
벧스메스로 가는 암소의 새끼를 위한 울음을 생각해보십시다. 말씀을 붙드는 우리를 보는 것입니다. 기쁨을 만들고 영광을 만드는 눈물이라면 얼마든지 우는 것이지요. 다윗은 울어서 만왕의 왕이 됐습니다. 예레미야가 울어서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됩니다. 마리아가 울어서 그렇게 주님의 사함을 받았습니다. 가치없는 눈물은 없애야하고 회개에 대한 눈물, 감사와 감격의 눈물 구원받은 기쁨의 눈물은 얼마든지 가져야합니다. 눈물은 천국가는 노잣돈입니다. 눈물이 없으면 천국 못갑니다. 눈물이 있는가. 주님 앞에 우리 눈물을 가져보시고 우는 우리가 되어봅시다. 아무렇게나 울지말고, 그런 눈물을 가져봐야합니다.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찬송: 136장, 115장
본문: 요한복음 11장 32절 ~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의 눈물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눈물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종류도 있고 깊이도 있고 여러 면이 있는데 어떤 눈물일까 생각을 해봅니다. 사무엘상 6절 말씀을 해서 벧스메스로 가는 암소를 통해서 구원 도리를 살펴봤습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을 살펴봤습니다. 한 사람 사람마다 역사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단일성, 단일성라는 말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좀 다른 면으로 총류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 재산을 일반적으로 총류라고 합니다. 절같은 곳에서 총유라 그러는데 의미를 들어보니까 아버지가 아들이 예를 들어서 5남매가 있는데 값이 나가는 도자기가 있습니다. 그 도자기를 다녀들에게 줄 때 이 도자기는 너희 다섯 명의 것이라고 상속시켜줬습니다. 그러면 그 도자기는 다섯 명 모두의 재산입니다. 이걸 총유라고 합니다. 이건 나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누어질 수 없는 분이고 단일성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있고 진노가 있습니다. 질투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진노가 하나님은 나눠지지를 않습니다. 사랑이 진노고 진노가 사랑입니다. 모여서 쏟아진다는 뜻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나눠지지 않고 쏟아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리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단일성이기 때문에 완전과 전지전능과 그런 완전 전지전능을 다 담을 기대와 소망을 따라서 역사가 다 똑같이 쏟아지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는 더 사랑하고 누구는 덜 사랑하고 누구는 소망을 더 가지고 덜 가지고 기대가 크고 적고 이러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같이 하시는데 문제는 단일성으로 모두를 사랑하시고 기대를 거시고 소망을 하시고 쏟아부으시는데 왜 사람마다 차이가 나게 되어 있는가. 왜 우리는 아브라함, 다윗, 사도 바울이 되지 못하는가. 하나님은 쏟아부으시는데 안되는걸까. 장마철에 폭포같이 쏟아져도 무엇에 따라 물이 남아있는 차이가 있습니까. 그릇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처럼 댐을 만들어서 저장을 해놓습니다. 비는 항상 오는 게 아니니까 우리나라는 물이 부족한 나라는 물을 저장해놨다가 갈수기가 되면 물을 땡겨쓰는 겁니다. 그릇이 크면 그리 되는 거고 작은 사람은 세수대야 가져다 놓고 또 오겠지 이러는 겁니다. 모든 사람에게 고루고루 가는데 하나님을 상대하는 우리들이 은혜를 받으면 우리 것이 되는 것이고 안 가면 상관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은 지대하게 미치는 겁니다. 그 한 사람이 저도 한 분 한 분이 그런 분들이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소망을 가지는 겁니다. 내가 비록 죄 많은 죄인일찌라도 일어서면 될 것이고 어릴찌라도 어린 사무엘 어린 다윗을 통해 역사하셨으니까 큰 사람이 될 수 있고 늙어서 마지막 임종이 얼마 안 남았어도 전부 다 쏟으면 되는 겁니다. 믿는 사람은 소망없는 사람이 없고 기대 없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 역사가 오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큰 죄가 나는 안된다고 하는 죄입니다.
두 번째, 세상이 교회를 이기면, 믿는 사람은 천하의 무적입니다. 믿음은 폭발 능력이고 전능의 솜씨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약할 때는 이스라엘이 야금 야금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정복해서 먹고 들어가니까 모압의 발락이라는 왕이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불러서 저주하게 했는데 저주는커녕 축복을 하고 왔지요. 마지막에 부귀영화가 탐이 나서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이름 가진 인간이 발락에게 술수를 가르쳐줬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천하무적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죄만 지으면 하나님이 때려버립니다. 죄를 짓게 만들면 됩니다. 참 나쁜 놈이지요. 그래서 칼로 죽였다고 합니다.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그걸 들어서 예쁜 여자들 앞세우고 맛있는 음식을 풍겨서 쳐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23000명이 죽어버렸습니다. 믿는 사람은 적이 없습니다. 이기지 못하는 지게 되는 원인은 자기 속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은 죄만 안 지으면 어떤 누구도 무서울 게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죄를 짓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말아야합니다. 자존심이 절단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는 짓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면 천하무적이 됩니다. 불신 블레셋에게 붙여버렸습니다. 법궤를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신 정도를 넘어서서 법궤까지 빼앗아 버리니까 블레셋에 재앙이 일어나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긴 것도 법궤를 빼앗은 것도 그것도 전부 엘리에게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무서운 것이고, 그렇다할찌라도 불신 세력이 의를 해버리면 안되는 겁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이 악성과 악습이 의의 세력을 이겨버리면 나는 절단나게 되는 겁니다. 고깃덩어리 멀쩡해도 다 절단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의 머리된 사람은 눈 밝은 사람의 머리입니다. 아들이 머리될 수 있고 딸이 머리될 수 있습니다. 현재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불의의 세력을 눈감아주고 의의 세력을 꺾어버리면 암덩어리를 키우는 게 되고 큰일나게 되는 겁니다. 이 블레셋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난 다음에 뉘우쳐 깨달았습니다. 법궤는 빼앗아오는 게 아니었다. 하고 최선을 다해서 돌려보내니까 재앙을 멈춰주셨습니다. 그때 얼른 뉘우치고 돌이키는 사람은 되는 것이고 자존심세우고 그러면 절단이 나버리게 되는 겁니다. 불신 세상도 하나님께서 다스린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리고 벧스메스로 가는 암소가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수레를 새걸 만들고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암소 두 마리를 법궤를 실어서 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암소가 젖이 나는 소입니다. 새끼를 먹이는 소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암소를 골라서 보내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송아진 가둬놓고 어미 소를 그냥 보냅니다. 어미 소가 그러니까 끌고 가면서 송아지를 데려가지 못하니까 울면서 갑니다. 이 울음을 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어미 소가 송아지를 두면서 가는데 갈 수 가 있을까. 송아지를 떼놓고 다른 데 갈 수 있을까 없습니까. 일반적으로 자연적으로 송아지를 데리고 젖을 먹여야하는 어미소가 쫓아보내면 갑니까 안 갑니까. 안 가는 겁니다. 그런데 사무엘상에는 갔습니다. 왜 갔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쓰셨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짐승도 물고기까지도 제 새끼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새끼를 버리고 가진 없습니다.
짐승도 어떤 종류도 본문입니다. 새끼를 떼놓고 가지 않습니다. 버티고 죽지. 그런데 암소가 끌면서 갔습니다. 자연 계시로 쓰신겁니다. 울면서 갑니다. 새끼를 젖을 먹여야하는데 없으면 죽지요 별 수 없습니다. 농부들이 관리하겠지만 자연상태면 죽는 거겠지요. 정상적으로 갈 수 있을까. 가기는 가는데 어미의 마음이 심정이 어떨까 그 말이지요. 그 울음이 어떤 울음이었을까. 처절한 울음이었겠다. 너무 슬픈 고통스러운 울음이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새끼를 두고 타지로 가야하는 사지로 끌려가는 어머니라면 아마 죽어버릴겁니다.
그 눈물이 어떤 눈물이었을까. 이걸 좀 생각해보는겁니다. 그런데 법궤를 실고 가야하기 때문에 새끼를 두고가는 어미 소가 울면서 가는데 멈추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갑니다. 마지막에 벧세메스까지 가서 멈춰섰습니다. 거기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의 생활이 이런 걸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님가신 그 걸음을 참된 종들이 걸어갔고 그 사람들만 걸어가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천국입니까 다윗의 천국입니까. 그러면 우리도 가는 겁니다. 그 천국이 내 천국이면 가는 겁니다. 그게 걸음이었고 새끼를 두고 간 어미 소의 울음이었습니다. 비통했겠다. 안 갈수가 없으니까. 차라리 죽을 수도 없는거죠. 가야하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겁니다. 눈물이라는 것은 눈물샘이 있다고 합니다. 눈물샘을 자극하면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눈물이라는 것은 슬프면 눈물이 나는 겁니다. 억울하면 눈물이 나는 겁니다. 감격스러우면 눈물이 납니다. 여러 가지 원인과 작용에 의해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피상적인 눈물이 있습니다. 외부 자극에 의한 그런 것. 슬픈 장면을 보니까 슬픈 이야기를 귀로 들으니까 눈물이 납니다. 이런 눈물을 사람들이 자극시켜서 눈물을 빼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전부 영화 배우들이고 드라마 작가들이고 소설가들입니다. 많이 울어줄수록 그사람들 돈벌이 시켜주게 되는 겁니다. 그런 눈물은 참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쓸모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 눈물은 볼 때 울었다가 웃긴 장면을 보면 웃음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성을 넣어놨기 때문에 울게 되는데 울음이라는 것이 피상적인 울음, 시청각적인 순간적인 울음은 별로 의미가 크지 않고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작가들이 쓰면 눈물바다로 갈 수 있습니다. 아무 의미없습니다. 광우병 사태일 때 미국산 소고기 먹으면 죽어서 그거 한 마디에 온 나라 사람들이 나와서 정권까지 바뀌어버렸습니다. 언제든지 이성이 감성을 다스려야하지 감정이 이성을 다스리면 안됩니다. 정치판 테러 때문에 난리지요. 그게 전부 그런 겁니다. 그래서 감정에서 나오는 피상적인 눈물은 쓸모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 것도 필요할 때가 있겠지만 대개 그런 겁니다.
젖먹이 아기들은 엄마만 안 보여도 웁니다. 그게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살펴는 봐야하겠지만 가지고 놀던 장난감 뺏겠다고 하는 울음.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겁니다.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면 문제가 되는 겁니다. 몰라서 우는 겁니다. 우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표현을 합니다. 말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초등학생들도 싸우다가 맞으면 울고 그럽니다. 중고등학생 아이들이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생각해봐야합니다. 이건 심각하게 생각해봐야하는 겁니다. 중고등학생이 눈물 흘린다 통곡을 한다하면 보통 문제가 아닌 거지요. 거기다가 어른이 운다. 그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사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눈물이라는 것은 깊이가 다른 차원이 됩니다. 운다고 해서 다른 울음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아는 사람들의 눈물은 사람의 울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슬퍼야 울게 되아질까 얼마나 억울하면 울음이 나올까 얼마나 분하면 울음이 나올까. 울게 되어질까. 일반적으로 다 큰 성인들 다 자란 성인들 저는 요즘 조금 느꼈는데 백목사님께서 집회하실 때 눈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건 다른 느낌입니다. 일반적으로 눈물은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날 만큼 슬프다면 괴롭다면 심각한 겁니다. 살펴봐야하는 겁니다.
다윗의 눈물은 특별한 게 있습니다. 목동 시절부터 다윗은 요즘 말로하면 모범생이 아니었습니다. 들판에서 양을 먹이면서 사자와 곰을 찢어죽일 정도면 못됐다 정도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주면서 형들이 잘 있는지 가서 보고와라. 선물을 주고 증표를 가져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말하자면 그런 면이 있는 사람인데 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자하고 싸우지요. 양 때문에 목숨 걸 목자가 있습니까. 죄를 지었을 때 울었습니다. 7일을 아무것도 안 먹고 울었습니다. 그게 출발입니다. 솔로몬을 주셨지만 다윗이기 때문에 너무도 귀한 다윗이라 그걸로 그치지 않습니다. 형이란 놈이 못된 짓해서 건들여서 싸움이 납니다. 그때 다윗 아들 다 죽어서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때 다 울었는데 다른 사람의 울음과는 무게가 다릅니다. 그 안에 많은 것들이 담겨있습니다.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대는 패륜이 됩니다. 도망을 칩니다. 그래서 부탁을 합니다. 나를 위해서 소년 압살롬, 칼을 들일말큼 얼마나 똑똑하고 잘난 놈입니까. 제일 똑똑하고 실력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밑에 꾀를 써서 다윗보다 먼저 다 사로잡은 사람이 압살롬입니다. 실력있는. 그런데 그걸 소년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심정이 들어있습니다. 저것이 저러는 이유는 내 탓이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했는데 나쁜 요압이 무참하게 압살롬을 죽여버립니다. 그래서 비통하게 웁니다. 슬피웁니다. 그게 다윗의 울음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지요.
울음에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울음을 아버지들이 어머니들이 울어야, 우리 2세 3세 자식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 눈물이 있습니까. 그런 건 못난 사람이 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철저하게 치는 것입니다. 그 눈물이 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다윗의 비통한 울음이 있어야 앞날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여러 사람의 울음이 있습니다. 에서는 축복을 빼앗기고 통곡을 하지만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때 뿐이어서 가치가 별로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2장, 예레미야의 눈물이 나옵니다. 밤낮으로 울었습니다. 회개를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이 성구를 가지고 번역해서 밤낮으로 회개의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의역을 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이게 예레미야의 눈물입니다. 그 덕분에 앞날이 희망이 있던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킬 수 없고 매를 돌이킬 수 없는데 그 다음을 알려면 이런 희망이 있어야합니다. 덕분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겁니다.
자기 죄를 돌아보면서 이 분이 오셨구나 이분이 구주구나 이분 덕분에 내가 살았구나 쏟아지겠죠. 감사의 감격의 눈물입니다. 그 눈물 보시고 많은 죄가 사함 받았다고 합니다. 저 여자가 죄인인데 죄인이 거룩하다는 선생님 발을 만지니 전염이 되겠네 그랬습니다. 마리아의 눈물입니다.
베드로의 눈물도 있습니다.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러니까 닭이 두 번째 울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닭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하고 통곡을 합니다. 그래서 전해지는 말을 하면 닭 울음소리만 들으면 울었고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그게 순교하게 된 양분이 된 것입니다.
다윗의 눈물, 에서의 눈물은 가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 마리아의 눈물 베드로의 눈물. 깊이가 무겁습니다. 보통 눈물이 아닌겁니다. 우리가 이런 걸 가지고 눈물을 찾아봐야합니다. 주님은 성경에 찾아보면 더 있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알기로 세 번 웁니다. 첫 울음이 마귀에 대한 통분의 눈물이고 미혹받아서 멸망에 대한 민망의 눈물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세 번 해서 인간을 지옥에 던져버렸구나. 마귀가 지금까지 그 앞에서 붙들고 미혹시킵니다. 미귀에 대한 통분의 눈물이고 그에 의해 영원한 사망을 받았는데 그걸 구하러 왔는데 찾지 못하고 애가 타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성전을 보고 우십니다. 앞으로 이 성전이 어떻게 무너질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로 성전이 무너지는 것이고 미리 보시는 주님이 우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눈물은 동산에서 통곡하는 겁니다. 눈물이 흘러서 핏방울이 되기까지 우리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 게 주님의 눈물입니다.
아이들 다 울고 자랍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부터는 살펴봐야합니다. 울면 안되는 어른들이 울면 다 다릅니다. 그런데 다윗의 눈물은 그런 눈물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본문에서 주님의 눈물을 생각해보고 그분이 눈물을 흘리셨다 보통 눈물이 아닌 겁니다.
벧스메스로 가는 암소의 새끼를 위한 울음을 생각해보십시다. 말씀을 붙드는 우리를 보는 것입니다. 기쁨을 만들고 영광을 만드는 눈물이라면 얼마든지 우는 것이지요. 다윗은 울어서 만왕의 왕이 됐습니다. 예레미야가 울어서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됩니다. 마리아가 울어서 그렇게 주님의 사함을 받았습니다. 가치없는 눈물은 없애야하고 회개에 대한 눈물, 감사와 감격의 눈물 구원받은 기쁨의 눈물은 얼마든지 가져야합니다. 눈물은 천국가는 노잣돈입니다. 눈물이 없으면 천국 못갑니다. 눈물이 있는가. 주님 앞에 우리 눈물을 가져보시고 우는 우리가 되어봅시다. 아무렇게나 울지말고, 그런 눈물을 가져봐야합니다.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