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일 수밤
김동민2023-11-01조회 301추천 56
2023년 11월 1일 수밤
찬송: 186장, 188장
본문: 열왕기상 8장 1절
예배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예배를 생각해보게 된 그 계기가 주일학교 삼일예배 때문이었고 지난 주 삼일예배는 조용하게 잘 지냈고 지금은 보니까 또 풀어져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 버릇 나빠지면 안됩니다. 제 집은 예배당 1층입니다. 교회 가까이 있는 것은 복입니다. 모든 것은 다 양면이 있습니다. 가까이 있으니까 자주 올 수 있습니다. 자주오는 것은 좋은 겁니다. 자주 오다 보면 예배당에 대한 조심성이 떨어집니다. 가끔 예배당에 올때마다 조심합니다. 처음 나오는 어른들 하나님을 안 믿는 아이들도 교회에 처음 들어오면 조심 합니다. 먼저 다닌 예배당에 아이들이 함부로하는 거 보고 모르고 몇 달 다니면 예배당에서 떠들기 시작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어릴 때부터 제사장 성전을 자기 집처럼 지냈습니다. 거기서 다 살았을 겁니다. 집사님들 아들들이 예배를 들었습니다. 연보 흘린 동전도 줍고 그랬었습니다. 많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일찍 떠나서 그런지 예배당에 대한 함부로하는 것에 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가까이 있어서 예배당은 건물이고 껍데기인데 이 예배당을 함부로 왔다갔다 하게 됩니다. 예배당 문 여는 것부터 조심스럽게 열고 닫아야합니다. 엄하게 막아야합니다. 예배당 입구에서부터 아주 조심하게 해놨습니다. 3분 전인데 뛰어놀고 있습니다. 거기 선생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 2주 전에 그랬습니다. 어른들이 인식을 안 바꾸면 아이들을 못 바꿉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됩니다. 제가 주일학생들 직접 상대하면 교육이 안되고 설교도 안됩니다. 앞으로 손 안 댈겁니다. 그래서 선생들이 알아서 챙겨야합니다. 불과 두 주 전에 그게 있었고 다시 또 돌아가려는 조짐이 보입니다. 제가 주일학생들에게 혼내면 되겠습니까. 저는 앞으로 삼일예배에 나오지도 않을 것이고 일절 관여하지 않을겁니다. 관심만 가지고 그럽니다. 우리 예배를 많이봅니다. 새벽기도 여섯 번, 주일학교 오후 예배 일주일에 열 세 번을 보는 겁니까. 평소에도 가까이 있다보니까 예배당이 놀이터가 되는 겁니다. 알맹이 예배를 말합니까 껍데기 예배를 말합니까.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알맹이를 말합니까. 껍데기입니까. 껍데기입니다. 이런 예배 시간을 진정으로 들어라는 겁니다. 예배당 껍데기를 함부로 대하면 소중히 관리 안하면 신앙은 안 들어갑니다. 껍데기 없이 무슨 알맹이가 생깁니까. 예배당은 하나님의 집이다. 조심해야한다. 저도 많이 그러겠지만 저는 목사입니다. 예배당에 들어올 때는 조심해야합니다. 저대로는 함부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이들 인식 바꿔야합니다. 예배당에 대해서. 저 어릴 때는 요절지 하나님의 말씀 성경 기록된 종이는 버리는 게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저는 지금도 성경책 위에 뭘 얹지 않습니다. 성경책을 가장 높은 데 놓습니다. 실수로는 몰라도 지금까지 그래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책 껍데기를 굉장히 예수믿는 사람이 너덜너덜하게 들고다니면 다 달았다는 건 몰라도 어느정도 쇠하면 바꾸는 게 좋습니다. 옆에 되도록 끼고 다녀야합니다. 여기 앉아있는 아이들이 노선을 짊어지고 나갈 아이들입니다. 여기 있는 아이들이 가까이 있는 아이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인식이 바뀌어야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가르쳐야합니다. 본을 보여야합니다. 그런 말은 전에서부터 있었습니다. 예배당은 기도하고 성경 읽고 아이들도 따라합니다. 어른들이 예사로 웅성거리니까 아이들이 조심성이 없는 겁니다. 좀 기억을 하시고 예배당 껍데기부터 찬송가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종이부터 인식을 가르치고 자세를 가르치도록 해야합니다. 예배당을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복이되어집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갑자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장 열심히 있는 아이들이 예배당을 예사로 생각합니다. 예배당 건물은 문도 조심해서 닫고 그러는 게 지혜롭고 좋은 겁니다. 그게 안되면 차라리 뚝 떨어져서 안되니까 가끔 오더라도 인식을 바꿔야합니다. 예배당을 조심하게 되어있습니다. 학교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는 그럴지라도 예배당에서는 그러면 안됩니다. 껍데기부터 조심해야합니다. 평소에 신발도 저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도 없습니다. 평일입니다. 그래도 특별하게 급한 것 아니면 슬리퍼 신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건 안되는 겁니다. 옷차림도 단정하게하고, 그게 자세입니다. 저희들 어릴 때는 다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가정 심방을 안해서 안되겠습니다만 아이들 껍데기부터 조심해야합니다. 오늘 말씀 공과입니다. 그런데 참고하시고 언약궤에 대해서, 성전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성전은 표면적으로 말하면 언약궤를 놔야 성전이 됩니다. 성전 공부할 때 구약의 성전이라는 우리를 가르쳤습니다. 성막과 솔로몬 성전과 건물은 집입니다. 오늘날 성전은 우리가 성전입니다. 기구라든지 원리를 가지고 우리를 만드는 겁니다. 성전은 우리를 가르치는 겁니다. 구약에 성전에 법궤를 모셔놔야 비로소 성전이 되듯이 믿는 사람의 성전인 것은 말씀을 해야합니다. 구약의 법궤가 많은 우여곡절이 있어서 비로소 성전에 안착이 된 거처럼, 믿는 사람들이 온전한 성전이 되어야하는 것은 주인이 돼서 주격이 돼서 완전히 나를 지배하는 붙들려사는 이런 사람이 되어질 때 성전이 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기 까지 많은 우여곡절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있을 자리에 비로소 안착이 되고 충만하게 되는 것처럼 말씀이 오시는데 성전은 성전인데 온전하지 못합니까. 내 말씀 속에 있다가 왔다갔다 하는 것이지요. 어쨌든 내 속에 말씀이 주격으로 자리 잡으면 솔로몬 성전에 법궤가 안착된 거처럼 바른 모습이 되어지게 되는겁니다. 전체흐름은 그렇습니다. 법궤라는 것은 말씀인데 관계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중복되는 건 아닌데 진리란 뭐냐 하나님 말씀인데 그걸 다른 말로 무인격의 이치라고 합니다. 인격없는 이치, 이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운동력이 있습니다. 거듭난 것은 썩어질 것도 되지 않았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어지는 겁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한다. 말씀이 독자적인 구성을 가지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무인격의 이치인데 진리라는 것 크게 나누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건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진리가 이치고 이치는 다른 말로 원리인데 그 이치라는 것은 자연의 이치가 있습니다. 자연의 이치를 우리가 배우기를 자연 계시라고 배웁니다. 일반은 총 만물을 통해 알리시는 것이 자연계시입니다. 이건 모두에게 공통으로 주신겁니다. 성경에 있는 겁니다. 공부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고 특별 계시를 연구하고 있는겁니다. 그런데 특별 계시라는 것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의 궁극은 하나님에게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특별 계시는 언제부터 있었느냐라고 하면 영원 전부터 있었는데 사람에게 나타날 때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나타날 때, 언제 사람에게 왔습니까. 언제부터 왔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전달된 것이 진리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전해주셨습니다. 어디요, 에덴 동산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동산을 다스리고 지켜라, 허락하신 실과는 임의로 먹어라 그게 첫 말씀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 말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 말씀, 타락 전에 에덴 동산에서 말씀을 주신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아담과 하와 있었고 쫓겨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쫓겨난 다음에 아담 하와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가지고 자기 자녀들에게 이 말씀을 전했겠습니까 안 전했겠습니까. 당연히 전했겠죠.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리기 전에 제사를 드립니다. 많은 자손이 난 상태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친겁니다. 제사를 가르쳤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첫 진리는 제가 생각했을 때 아담에게 전달이 되었고 자손에게 전달이 된 것이었습니다. 방주를 만들어라 진리입니다. 말씀입니다. 본토 친적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이삭에게도 요셉에게도 야곱에게도 그러다가 모세 때가 되었을 때 구체적으로 사람도 많아졌고 복잡해져서 더 많이져야하기 때문에 돌판에 적어서 주셨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기록이 돼서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직접 말씀하셨는데 모세 때는 모세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정해주셨습니다. 더 많은 하나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더 세밀하게 기록된 말씀이 있으니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까지를 전부 모세가 기록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성경에 나와있고 사도들이 기도를 했고 오늘까지 성경이 전해져있고 전부 진리다, 그 말이고 인격없는 무인격의 이치라 이 말입니다. 이런 여러 과정을 거쳐서 말씀이 오게 되어졌다. 그 다음 자연계시라는 것은 자연 은총입니다. 일반 은총은 사람이 보면 만물이 하나님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 수가 있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들어가야합니다. 사람의 모든 지식은 객관에서 받아들이는 겁니다. 땅을 땅으로 꽃을 꽃으로 알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스스로 깨친 것은 있습니다. 안 가르쳐줬는데 보고 스스로 알고 깨친 사람이 무엇이냐, 아담은 짐승들 보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사람이 태어난 사람이 태어난 아이를 무인도에 아무곳도 없는 곳에 보내놓으면 뭐를 알련지 물인지 불인지 진화론들처럼 원시시대 종교성은 있을 수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그런데 종교성가지고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는 있는데 찾을 수는 있을지, 하나님의 역사, 또는 인격체를 통하지 않고 일반 계시까지도 진리가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은 있습니다. 그 진리를 자유케하고 어떤 것을 말하는가 모르겠습니다. 말씀과 사람의 관계를 말씀드린 겁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돌판을 기록해서 주셨고 그걸 성막에다 넣은겁니다. 법궤를 모신 성막, 항상 선두에 있었고 중심에 되어있었습니다. 진행할 때는 선두였고 중심이 되어졌습니다. 항상 말씀이 앞서야한다 말씀이 머리가 되어야한다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뭡니까.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하는 전제 조건이 뭡니까. 아무리 오고 싶어도 모르면 삼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야하고 공부를 해야하고 들어야하는 겁니다. 알고나면 그 말씀을 주격으로 삼고 말씀이 되어야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자기나 세상은 부인이 되어야하는 겁니다. 하나라도 있으면 대립이 되어서 안되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은 통로다, 말씀은 활쏘는 과녁이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내가 살아야하는 그 말씀은 영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기록이 많은 겁니다. 그런데 영감은 반드시 성경통해 역사합니다.
개인으로 말하면 자기 속에 자기 전부, 자기의 이런 면 저런 면 요소를 총 동원한 것이고 가정으로 말하면 가장과 어머니와 큰아들과 해서 교회로 말하면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말씀을 모시고, 말씀이 가정에 되고 개인 성전 가정 성전이 되게 되는겁니다. 성소 안에 지성소에게 안착시킵니다. 가장 깊은 곳 아닙니다. 물건도 소중한 것은 안에 있습니다. 가장 안에, 말씀이 가장 깊은 곳에 최고의 가치로 성전 지성소 안에 하나님 은혜 아래 뒀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믿는 사람은 말씀을 모시고 한 번 안착됐다고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도 모셨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늘 모시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그 언약궤 안에는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데 세 가지가 들었습니다. 돌판이 들었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들었고 아론의 지팡이가 들었습니다. 만나는 신령한 양식이니까 기억을 해라. 하나님 앞에 강팍한 거 하나로 족하다 더 이상 하지마라. 이게 다 되어졌을 때 가득찼습니다. 말하자면 믿는 사람이 구약의 솔로몬 성전에 가득 찼듯이 제대로 모실 때 자기 개인 속에 있었고 그 법궤를 모신 게 하나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영감이 역사하게 되었고 말하자면 충분하게 되는 것처럼, 말씀이 부분적으로 또 있다가 없다가 간헐적으로 말하면 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 은혜가 충분하지 못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신앙생활을 제대로하지 못한 사람으로는 그렇게 될 겁니다. 기도하면 은혜되고 찬송하면 은혜되고 말씀이 있어도 성경의 역사가 없으면 바른 말씀이 있고 진리가 있고 살아서 영감을 충만할 때 그렇게 되는 가르켜서 다 끝나고 법궤가 안착될 때 다른 모습에 되어질 때 성전에 가득 찼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런 성전이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가 온전한 성전이 되어야하는 걸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법궤가 있습니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
찬송: 186장, 188장
본문: 열왕기상 8장 1절
예배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예배를 생각해보게 된 그 계기가 주일학교 삼일예배 때문이었고 지난 주 삼일예배는 조용하게 잘 지냈고 지금은 보니까 또 풀어져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 버릇 나빠지면 안됩니다. 제 집은 예배당 1층입니다. 교회 가까이 있는 것은 복입니다. 모든 것은 다 양면이 있습니다. 가까이 있으니까 자주 올 수 있습니다. 자주오는 것은 좋은 겁니다. 자주 오다 보면 예배당에 대한 조심성이 떨어집니다. 가끔 예배당에 올때마다 조심합니다. 처음 나오는 어른들 하나님을 안 믿는 아이들도 교회에 처음 들어오면 조심 합니다. 먼저 다닌 예배당에 아이들이 함부로하는 거 보고 모르고 몇 달 다니면 예배당에서 떠들기 시작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어릴 때부터 제사장 성전을 자기 집처럼 지냈습니다. 거기서 다 살았을 겁니다. 집사님들 아들들이 예배를 들었습니다. 연보 흘린 동전도 줍고 그랬었습니다. 많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일찍 떠나서 그런지 예배당에 대한 함부로하는 것에 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가까이 있어서 예배당은 건물이고 껍데기인데 이 예배당을 함부로 왔다갔다 하게 됩니다. 예배당 문 여는 것부터 조심스럽게 열고 닫아야합니다. 엄하게 막아야합니다. 예배당 입구에서부터 아주 조심하게 해놨습니다. 3분 전인데 뛰어놀고 있습니다. 거기 선생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 2주 전에 그랬습니다. 어른들이 인식을 안 바꾸면 아이들을 못 바꿉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됩니다. 제가 주일학생들 직접 상대하면 교육이 안되고 설교도 안됩니다. 앞으로 손 안 댈겁니다. 그래서 선생들이 알아서 챙겨야합니다. 불과 두 주 전에 그게 있었고 다시 또 돌아가려는 조짐이 보입니다. 제가 주일학생들에게 혼내면 되겠습니까. 저는 앞으로 삼일예배에 나오지도 않을 것이고 일절 관여하지 않을겁니다. 관심만 가지고 그럽니다. 우리 예배를 많이봅니다. 새벽기도 여섯 번, 주일학교 오후 예배 일주일에 열 세 번을 보는 겁니까. 평소에도 가까이 있다보니까 예배당이 놀이터가 되는 겁니다. 알맹이 예배를 말합니까 껍데기 예배를 말합니까.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알맹이를 말합니까. 껍데기입니까. 껍데기입니다. 이런 예배 시간을 진정으로 들어라는 겁니다. 예배당 껍데기를 함부로 대하면 소중히 관리 안하면 신앙은 안 들어갑니다. 껍데기 없이 무슨 알맹이가 생깁니까. 예배당은 하나님의 집이다. 조심해야한다. 저도 많이 그러겠지만 저는 목사입니다. 예배당에 들어올 때는 조심해야합니다. 저대로는 함부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이들 인식 바꿔야합니다. 예배당에 대해서. 저 어릴 때는 요절지 하나님의 말씀 성경 기록된 종이는 버리는 게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저는 지금도 성경책 위에 뭘 얹지 않습니다. 성경책을 가장 높은 데 놓습니다. 실수로는 몰라도 지금까지 그래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책 껍데기를 굉장히 예수믿는 사람이 너덜너덜하게 들고다니면 다 달았다는 건 몰라도 어느정도 쇠하면 바꾸는 게 좋습니다. 옆에 되도록 끼고 다녀야합니다. 여기 앉아있는 아이들이 노선을 짊어지고 나갈 아이들입니다. 여기 있는 아이들이 가까이 있는 아이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인식이 바뀌어야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가르쳐야합니다. 본을 보여야합니다. 그런 말은 전에서부터 있었습니다. 예배당은 기도하고 성경 읽고 아이들도 따라합니다. 어른들이 예사로 웅성거리니까 아이들이 조심성이 없는 겁니다. 좀 기억을 하시고 예배당 껍데기부터 찬송가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종이부터 인식을 가르치고 자세를 가르치도록 해야합니다. 예배당을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복이되어집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갑자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장 열심히 있는 아이들이 예배당을 예사로 생각합니다. 예배당 건물은 문도 조심해서 닫고 그러는 게 지혜롭고 좋은 겁니다. 그게 안되면 차라리 뚝 떨어져서 안되니까 가끔 오더라도 인식을 바꿔야합니다. 예배당을 조심하게 되어있습니다. 학교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는 그럴지라도 예배당에서는 그러면 안됩니다. 껍데기부터 조심해야합니다. 평소에 신발도 저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도 없습니다. 평일입니다. 그래도 특별하게 급한 것 아니면 슬리퍼 신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건 안되는 겁니다. 옷차림도 단정하게하고, 그게 자세입니다. 저희들 어릴 때는 다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가정 심방을 안해서 안되겠습니다만 아이들 껍데기부터 조심해야합니다. 오늘 말씀 공과입니다. 그런데 참고하시고 언약궤에 대해서, 성전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성전은 표면적으로 말하면 언약궤를 놔야 성전이 됩니다. 성전 공부할 때 구약의 성전이라는 우리를 가르쳤습니다. 성막과 솔로몬 성전과 건물은 집입니다. 오늘날 성전은 우리가 성전입니다. 기구라든지 원리를 가지고 우리를 만드는 겁니다. 성전은 우리를 가르치는 겁니다. 구약에 성전에 법궤를 모셔놔야 비로소 성전이 되듯이 믿는 사람의 성전인 것은 말씀을 해야합니다. 구약의 법궤가 많은 우여곡절이 있어서 비로소 성전에 안착이 된 거처럼, 믿는 사람들이 온전한 성전이 되어야하는 것은 주인이 돼서 주격이 돼서 완전히 나를 지배하는 붙들려사는 이런 사람이 되어질 때 성전이 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기 까지 많은 우여곡절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있을 자리에 비로소 안착이 되고 충만하게 되는 것처럼 말씀이 오시는데 성전은 성전인데 온전하지 못합니까. 내 말씀 속에 있다가 왔다갔다 하는 것이지요. 어쨌든 내 속에 말씀이 주격으로 자리 잡으면 솔로몬 성전에 법궤가 안착된 거처럼 바른 모습이 되어지게 되는겁니다. 전체흐름은 그렇습니다. 법궤라는 것은 말씀인데 관계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중복되는 건 아닌데 진리란 뭐냐 하나님 말씀인데 그걸 다른 말로 무인격의 이치라고 합니다. 인격없는 이치, 이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운동력이 있습니다. 거듭난 것은 썩어질 것도 되지 않았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어지는 겁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한다. 말씀이 독자적인 구성을 가지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말씀이라는 것은 무인격의 이치인데 진리라는 것 크게 나누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건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진리가 이치고 이치는 다른 말로 원리인데 그 이치라는 것은 자연의 이치가 있습니다. 자연의 이치를 우리가 배우기를 자연 계시라고 배웁니다. 일반은 총 만물을 통해 알리시는 것이 자연계시입니다. 이건 모두에게 공통으로 주신겁니다. 성경에 있는 겁니다. 공부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고 특별 계시를 연구하고 있는겁니다. 그런데 특별 계시라는 것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의 궁극은 하나님에게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특별 계시는 언제부터 있었느냐라고 하면 영원 전부터 있었는데 사람에게 나타날 때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나타날 때, 언제 사람에게 왔습니까. 언제부터 왔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전달된 것이 진리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전해주셨습니다. 어디요, 에덴 동산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동산을 다스리고 지켜라, 허락하신 실과는 임의로 먹어라 그게 첫 말씀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 말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 말씀, 타락 전에 에덴 동산에서 말씀을 주신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아담과 하와 있었고 쫓겨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쫓겨난 다음에 아담 하와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가지고 자기 자녀들에게 이 말씀을 전했겠습니까 안 전했겠습니까. 당연히 전했겠죠.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리기 전에 제사를 드립니다. 많은 자손이 난 상태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친겁니다. 제사를 가르쳤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첫 진리는 제가 생각했을 때 아담에게 전달이 되었고 자손에게 전달이 된 것이었습니다. 방주를 만들어라 진리입니다. 말씀입니다. 본토 친적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이삭에게도 요셉에게도 야곱에게도 그러다가 모세 때가 되었을 때 구체적으로 사람도 많아졌고 복잡해져서 더 많이져야하기 때문에 돌판에 적어서 주셨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기록이 돼서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직접 말씀하셨는데 모세 때는 모세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정해주셨습니다. 더 많은 하나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더 세밀하게 기록된 말씀이 있으니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까지를 전부 모세가 기록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성경에 나와있고 사도들이 기도를 했고 오늘까지 성경이 전해져있고 전부 진리다, 그 말이고 인격없는 무인격의 이치라 이 말입니다. 이런 여러 과정을 거쳐서 말씀이 오게 되어졌다. 그 다음 자연계시라는 것은 자연 은총입니다. 일반 은총은 사람이 보면 만물이 하나님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 수가 있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들어가야합니다. 사람의 모든 지식은 객관에서 받아들이는 겁니다. 땅을 땅으로 꽃을 꽃으로 알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스스로 깨친 것은 있습니다. 안 가르쳐줬는데 보고 스스로 알고 깨친 사람이 무엇이냐, 아담은 짐승들 보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사람이 태어난 사람이 태어난 아이를 무인도에 아무곳도 없는 곳에 보내놓으면 뭐를 알련지 물인지 불인지 진화론들처럼 원시시대 종교성은 있을 수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그런데 종교성가지고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는 있는데 찾을 수는 있을지, 하나님의 역사, 또는 인격체를 통하지 않고 일반 계시까지도 진리가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은 있습니다. 그 진리를 자유케하고 어떤 것을 말하는가 모르겠습니다. 말씀과 사람의 관계를 말씀드린 겁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돌판을 기록해서 주셨고 그걸 성막에다 넣은겁니다. 법궤를 모신 성막, 항상 선두에 있었고 중심에 되어있었습니다. 진행할 때는 선두였고 중심이 되어졌습니다. 항상 말씀이 앞서야한다 말씀이 머리가 되어야한다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뭡니까.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하는 전제 조건이 뭡니까. 아무리 오고 싶어도 모르면 삼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야하고 공부를 해야하고 들어야하는 겁니다. 알고나면 그 말씀을 주격으로 삼고 말씀이 되어야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자기나 세상은 부인이 되어야하는 겁니다. 하나라도 있으면 대립이 되어서 안되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은 통로다, 말씀은 활쏘는 과녁이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내가 살아야하는 그 말씀은 영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기록이 많은 겁니다. 그런데 영감은 반드시 성경통해 역사합니다.
개인으로 말하면 자기 속에 자기 전부, 자기의 이런 면 저런 면 요소를 총 동원한 것이고 가정으로 말하면 가장과 어머니와 큰아들과 해서 교회로 말하면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말씀을 모시고, 말씀이 가정에 되고 개인 성전 가정 성전이 되게 되는겁니다. 성소 안에 지성소에게 안착시킵니다. 가장 깊은 곳 아닙니다. 물건도 소중한 것은 안에 있습니다. 가장 안에, 말씀이 가장 깊은 곳에 최고의 가치로 성전 지성소 안에 하나님 은혜 아래 뒀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믿는 사람은 말씀을 모시고 한 번 안착됐다고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도 모셨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늘 모시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그 언약궤 안에는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데 세 가지가 들었습니다. 돌판이 들었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들었고 아론의 지팡이가 들었습니다. 만나는 신령한 양식이니까 기억을 해라. 하나님 앞에 강팍한 거 하나로 족하다 더 이상 하지마라. 이게 다 되어졌을 때 가득찼습니다. 말하자면 믿는 사람이 구약의 솔로몬 성전에 가득 찼듯이 제대로 모실 때 자기 개인 속에 있었고 그 법궤를 모신 게 하나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영감이 역사하게 되었고 말하자면 충분하게 되는 것처럼, 말씀이 부분적으로 또 있다가 없다가 간헐적으로 말하면 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 은혜가 충분하지 못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신앙생활을 제대로하지 못한 사람으로는 그렇게 될 겁니다. 기도하면 은혜되고 찬송하면 은혜되고 말씀이 있어도 성경의 역사가 없으면 바른 말씀이 있고 진리가 있고 살아서 영감을 충만할 때 그렇게 되는 가르켜서 다 끝나고 법궤가 안착될 때 다른 모습에 되어질 때 성전에 가득 찼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런 성전이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가 온전한 성전이 되어야하는 걸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법궤가 있습니다. 기도하시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