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3일 주일 오후
김동민2023-07-23조회 341추천 29
2023년 7월 23일 주일 오후
오전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봤습니다. 사람들은 다 대동소이하다. 대개는 같고 약간 다르다는 뜻입니다. 거기서 거기라는 뜻입니다.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은 전부로는 모든 사람 아담을 통해서 전부 다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냥 태어날 때는 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잉태된 순간 죄입니다. 잉태되는 순간 만들어진 순간 영은 죽어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살아나고 그때는 중생이라고 합니다. 영이 살아나면 하나님을 찾게 되고 교회로 발걸음하게 됩니다. 영이 만들어지는 순간 불택자는 죽고 끝나버리는데 택자는 잉태되는 순간 아담의 원죄가 전해져 죽고 나중에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면 영이 살아나면 믿게 되는 게 순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기본적으로 회개 생활을 하는겁니다. 주님 대속으로 하는 것이고 살아가면서 사람은 어릴 때부터 죄를 짓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바로 앉아야하는데 장난치고 그러는 것도 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고 죄를 짓게 되고, 철이 들어도 자꾸 잘못을 하면 잘못된 거라고 가르치고 이렇게해라 타이르고 안되면 계속 그러면서 나쁜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매를 안 들 수 없다. 사람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에 매를 안 때리면 아프지 않으면 사람이 자기가 당하지 않으면 못 느끼는 것이 사람입니다. 구약에 우리가 눈을 뗐느냐 빼버려라. 이를 부러뜨렸느냐 빼버려라 복수가 아니고 죄인의 가해성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자식을 때리지 아니치 말아라. 때려라는 말입니다.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혜있는 부모님은 건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가정에 자녀가 칠남매인데 아들이 모든 면에 모범이라서 아버지가 보니까 다른 자녀는 뚜드려맞았는데 매를 때릴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일부로 트집을 잡았답니다. 그래서 교만하지 않도록, 그게 지혜있는 부모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해야 정신을 차린다고요. 맞아야 정신을 차립니다. 그런 사람들인데 지금은 괴물들이 나타납니다. 왜 그러냐, 듣기 좋은 말로 인기에 영악해가지고 인권 인권 말이 얼마나 좋습니까. 전부 귀신 소리입니다. 그 아름다운 이름가지고 인기는 얻는데 그런 인간들 덕분에 끝장을 내버리고 큰 소리 치면 부모가 죄짓는 것입니다. 심지어 법원 아버지 어머니가 때리냐 경찰에 신고한다고 합니다. 그런 걸 표현하자면 미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맞아야 정신차리는 게 인간입니다. 그게 성경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이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 앞에 되게 맞았습니다. 아브라함도 맞았는데 야곱은 엄청나게 맞았습니다. 야곱이 하나님하고 씨름했는데 이겼습니다 안되니까 야곱이 뭘 때렸다고요 평생 절름받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죽을 걸 살려준 겁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하고 싸워서 이겼다가 맞아 죽을뻔하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라고 불러라.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교만하고 죄를 지었다가 얼마나 두드려맞았습니까. 집안이 콩가루 집안이 되었지요. 죄를 지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매가 따라옵니다. 모든 사람들은 거의 다 매를 맞습니다. 그 다음에 정신을 차리면 됩니다. 그런데 매를 맞아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대책이 없는겁니다. 죽고 또지고서 그때가서 마지막에 정신차려보니까 끝났습니다. 그게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고 약해서 죄를 지을 수 있고, 많은 죄를 지었을 것이고 많이 맞았을 겁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매를 맞았구나, 은혜를 입었구나, 보지를 못했다면 잘못했구나, 살펴보지 못했구나. 문제가 있는 겁니다. 백목사님께서 병고침 받았을 때 병이 나아도 본인들이 모른다고 하지요. 모를 리가 없지요. 무관심, 무관심은 관심을 가져야하는데 무관심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무서운 게 무관심입니다. 권찰회 때 한번 더 물어볼건데, 목사 설교를 바로하는지 잘못됐는지 틀렸다고 하는 건 괜찮습니다. 설교에 관심없는 사람은 여기 앉아있으면 안됩니다. 들어보고 아니면 아닌 것이고 들어본 다음에 잘못 살았구나, 들어는 봐야합니다. 부모라는 단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선배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걸 깊이 은밀하게 옳은 고차원의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과 연애하게 되는겁니다 그걸 기록한게 아가서입니다. 부부는 연애를 해야합니다. 부부 아닌 사람이 연애하니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으로 연애하는게 신앙 생활입니다. 한 눈 파는게 매를 맞지요. 죄인데, 하나님 앞에 매를 맞던지 상을 받던지. 그 신앙생활 자체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말이 신앙생활인데 이름만 신앙생활이고 형식적으로 하는 생활이냐, 이 첫째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맞고도 정신을 차립니다. 매를 맞을 때 일어서서 같이 오는 것은 주저 앉아서 발버둥을 칩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붙들고 꿈속에서 평생사는 것이 어리석은 짓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당장 하는 것부터 해결해야합니다. 룻이라는 사람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갈 때 나 따라오면 고생한다, 여기 있어라 교회 목사라는 사람들이 대부분 와라고 합니다. 내 설교 들으라고. 그게 목사입니다. 기본적인 인식. 그게 교만입니다. 우리 공회는 어렵습니다. 우리 공회는 못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게 말하자면은 나오미의 자세요 엘리야의 자세입니다. 나는 위치가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나오미는 돌아가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난을 피해서 가야합니다. 나는 다시 돌아가야겠다. 그런데 너까지 와야할 것 아닙니다. 그때 보통 듣기 좋은 말이 순종하고 있습니다. 우선 룻이 따라가는 것이 순종입니까 거역입니까. 시어머니가 오라고 했습니까 오지말라고 했습니까. 그런데 갔으니까 거역입니다. 룻은 제가 어머니 따라가는 것은 누구 결정이라고요 제 결정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따라가는 건데 제 인생을 제가 책임지는 건데 그 말은 어떤 경우도 각오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머니를 따라가는 게 가치있고 좋은 줄 알기 때문에 따라가는 겁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대할 때 그렇게 대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어디서 출발했다고요, 길갈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장소는 그때 역사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처음에 도착한 장소가 길갈입니다. 거기서 지명을 받아서 하나님은 그때 엘리야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길갈에서 부르시기를 발전된 겁니다. 지리적인 위치로는 순서적으로 맞지를 아니합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부르실 때 거기로 갔는데 나는 가야하는데 너는 여기 있어라.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다시 갑니다. 능력이 있는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여리고로 돌려놨습니다. 어디가야합니까. 베델로 가야합니다. 베델에서는 여리고로 가야겠습니다. 저 예루살렘에 그런 것이 아니고 여리고 신앙으로 나아가고 여리고 신앙까지 나아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따져보면 들어갈 수 없겠지만. 그때마다 엘리야는 말렸고 엘리사는 따라갔습니다. 엘리야, 앞서가는 엘리야의 엘리사에게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조금의 강요도 없었습니다. 하지 말라고. 엘리사는 자기가 깨닫고 원하고 원하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원하고 원함으로 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성에 된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자유 의지. 어릴 때 모를 때는 구역장에 의해서 갈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자유 의지로 가는 신앙이 되어야합니다. 전제 조건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뭐가 필요하다고요.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의지. 어떤 말인지 아시죠. 다른 사람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친구 따라 어디 간다고요. 강남에 간다 그러는데 어느 강남이라고요, 서울 강남 아닙니다. 친구들 따라 움직이면 못난 사람입니다. 친구들이 다 가니까 가는 건 못난 사람입니다. 친구들이 가거나 말거나 내가 가야하는 곳에는 모든 사람이 다 가고 내가 가고 싶어도 내가 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제주도를 가면 좋겠지요. 그런데 제주도를 굳이 가야합니까. 유럽 여행, 해외 여행을 꼭 가야합니까. 모든 사람이 다 가니까 가야합니까. 내가 보고 듣고 판단해서 결정해서 주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주인입니다. 왜 남을 따라갑니까. 친구를 따라갑니까. 내가 친구를 데려가야지. 친구들 술집에 간다고 따라가고 따라가지 않습니다. 나는 교회 간다. 예배 드리러 가야한다. 다 가는데. 나는 믿는 사람의 교회입니다. 그 사람의 생명입니다. 남의 이목이라는 것은 봐야합니까 생각해야합니까. 내가 할 일을 못하고 할 길을 못하는 것이 못난 것입니다. 내가 가는 겁니다. 신앙 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마귀를 만드시는 것이니까 6천년 세월에 이렇게 역사하시는 이유가 이겁니다.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자유성입니다. 자유성이 죽으면 하나님 형상에 죽는 것입니다. 열심 충성 다 있어도 동기가 뭐냐 하나님을 알고 자의사에 의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 생활들이 말하자면 자기가 보고 듣고 내 신앙 생활대로 유익이 되더라.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를 위해 살지만 갈수록 힘듭니다. 자의사라는 것은 자기가 깨달아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환경을 끌고 나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장 전제적인 게 지식입니다. 지식없으면 자의사 못됩니다. 지식이 있는만큼 움직입니다. 말씀을 주일마다 밤예배 새벽마다 듣는 것입니다. 지식이 중요합니다. 옳은 지식이 중요한 것이죠. 비교 분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 많은 것들이 있었고 룻은 지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 관계로 간 게 아닙니다. 어떤 것을 보다가도 시어머니 따라서 하나님 구원을 따라간다 해서 따라간 겁니다. 신앙은 이게 신앙입니다. 자의사, 그게 지식으로 움직입니다. 지식은 필연적으로 평가를 하게 됩니다. 선택을 하는 거지요. 사람에 따라서 평가하고도 선택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발락이 이스라엘에게 사자를 보냈습니다. 보나마나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보내겠는데 이걸 계산하나마나 다 아는 겁니다. 알았으면은 지식입니다. 오면은 돌아가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속에는 가고 싶어서 환장하겠는데 하나님 생각하니까 안되겠다고 하는겁니다. 그러면 더 높은데로 가는겁니다. 결국은 그렇게 가고 싶으면 가야지. 가란 말입니까 가지 말란 말입니까. 나오미가 오지말라는 말을 하지만 속에 데려가고 싶겠지요.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락은 겉으로 받아들여서 순종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순종입니까. 그러다가 누가 살려줬습니까. 나귀가 살려주죠. 그게 연약한 인간입니다. 자유 의사가 있는데 자유의사는 누가 움직인다고요, 지식이 움직입니다. 바른 선택을 하는 겁니다. 그런 과정이 살아있으면 지식으로 가지는 겁니다.
유월절은 마지막 죽음입니다. 죽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주님은 죽으시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속의 마무리로 죽으심입니다. 주님의 대속이고 그 대속의 절정이 죽음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속은 사활의 대속입니다. 사는 죽음이고 활은 사는 건데 사는 주님이 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니께서 하신 것입니다. 애초부터 주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과정 과정 그 위에는 도성인신부터 사생활 공생활 십자가 죽으심 그 속에는 원하고 원함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심은 구원 역사로부터 원하고 원함으로 하시는 겁니다. 목적도 전부다 원하고 원함으로 하시는 겁니다. 사랑에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때도 룻과 같이 엘리사와 같이 원하고 원함으로 따라가야합니다. 깨닫고 난 다음에는 원하고 원함으로 합니다. 도마라는 사람은 기쁨으로 순교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노년에 의미를 몰랐습니다. 노년이라는 말은 그때 가봐야압니다. 겪어봐야 당해봐야 느끼는 게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귀양살이까지 갔습니다. 사도바울은 평생을 따라갔습니다. 수도 없이 맞고 죽을 뻔하고 기쁘고 그랬습니다. 홍포입은 부자 집 앞에 있던 나사로는 거지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원하고 원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억지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 십자가 지고 가는데 안 질수가 없습니다. 이왕 진거 기쁨으로 메고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름이 뭐였죠 시몬이라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 십자가를 억지고 지고 왔습니다. 신앙 생활은 그리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 걸어갈 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생활이 원하고 원함으로 해야합니다. 그게 바로 잘못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신앙 생활은 원하고 원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오전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봤습니다. 사람들은 다 대동소이하다. 대개는 같고 약간 다르다는 뜻입니다. 거기서 거기라는 뜻입니다.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은 전부로는 모든 사람 아담을 통해서 전부 다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냥 태어날 때는 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잉태된 순간 죄입니다. 잉태되는 순간 만들어진 순간 영은 죽어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살아나고 그때는 중생이라고 합니다. 영이 살아나면 하나님을 찾게 되고 교회로 발걸음하게 됩니다. 영이 만들어지는 순간 불택자는 죽고 끝나버리는데 택자는 잉태되는 순간 아담의 원죄가 전해져 죽고 나중에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면 영이 살아나면 믿게 되는 게 순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기본적으로 회개 생활을 하는겁니다. 주님 대속으로 하는 것이고 살아가면서 사람은 어릴 때부터 죄를 짓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바로 앉아야하는데 장난치고 그러는 것도 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고 죄를 짓게 되고, 철이 들어도 자꾸 잘못을 하면 잘못된 거라고 가르치고 이렇게해라 타이르고 안되면 계속 그러면서 나쁜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매를 안 들 수 없다. 사람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에 매를 안 때리면 아프지 않으면 사람이 자기가 당하지 않으면 못 느끼는 것이 사람입니다. 구약에 우리가 눈을 뗐느냐 빼버려라. 이를 부러뜨렸느냐 빼버려라 복수가 아니고 죄인의 가해성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자식을 때리지 아니치 말아라. 때려라는 말입니다.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혜있는 부모님은 건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가정에 자녀가 칠남매인데 아들이 모든 면에 모범이라서 아버지가 보니까 다른 자녀는 뚜드려맞았는데 매를 때릴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일부로 트집을 잡았답니다. 그래서 교만하지 않도록, 그게 지혜있는 부모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해야 정신을 차린다고요. 맞아야 정신을 차립니다. 그런 사람들인데 지금은 괴물들이 나타납니다. 왜 그러냐, 듣기 좋은 말로 인기에 영악해가지고 인권 인권 말이 얼마나 좋습니까. 전부 귀신 소리입니다. 그 아름다운 이름가지고 인기는 얻는데 그런 인간들 덕분에 끝장을 내버리고 큰 소리 치면 부모가 죄짓는 것입니다. 심지어 법원 아버지 어머니가 때리냐 경찰에 신고한다고 합니다. 그런 걸 표현하자면 미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맞아야 정신차리는 게 인간입니다. 그게 성경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이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 앞에 되게 맞았습니다. 아브라함도 맞았는데 야곱은 엄청나게 맞았습니다. 야곱이 하나님하고 씨름했는데 이겼습니다 안되니까 야곱이 뭘 때렸다고요 평생 절름받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죽을 걸 살려준 겁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하고 싸워서 이겼다가 맞아 죽을뻔하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라고 불러라.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교만하고 죄를 지었다가 얼마나 두드려맞았습니까. 집안이 콩가루 집안이 되었지요. 죄를 지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매가 따라옵니다. 모든 사람들은 거의 다 매를 맞습니다. 그 다음에 정신을 차리면 됩니다. 그런데 매를 맞아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대책이 없는겁니다. 죽고 또지고서 그때가서 마지막에 정신차려보니까 끝났습니다. 그게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고 약해서 죄를 지을 수 있고, 많은 죄를 지었을 것이고 많이 맞았을 겁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매를 맞았구나, 은혜를 입었구나, 보지를 못했다면 잘못했구나, 살펴보지 못했구나. 문제가 있는 겁니다. 백목사님께서 병고침 받았을 때 병이 나아도 본인들이 모른다고 하지요. 모를 리가 없지요. 무관심, 무관심은 관심을 가져야하는데 무관심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무서운 게 무관심입니다. 권찰회 때 한번 더 물어볼건데, 목사 설교를 바로하는지 잘못됐는지 틀렸다고 하는 건 괜찮습니다. 설교에 관심없는 사람은 여기 앉아있으면 안됩니다. 들어보고 아니면 아닌 것이고 들어본 다음에 잘못 살았구나, 들어는 봐야합니다. 부모라는 단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선배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걸 깊이 은밀하게 옳은 고차원의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과 연애하게 되는겁니다 그걸 기록한게 아가서입니다. 부부는 연애를 해야합니다. 부부 아닌 사람이 연애하니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으로 연애하는게 신앙 생활입니다. 한 눈 파는게 매를 맞지요. 죄인데, 하나님 앞에 매를 맞던지 상을 받던지. 그 신앙생활 자체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말이 신앙생활인데 이름만 신앙생활이고 형식적으로 하는 생활이냐, 이 첫째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맞고도 정신을 차립니다. 매를 맞을 때 일어서서 같이 오는 것은 주저 앉아서 발버둥을 칩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붙들고 꿈속에서 평생사는 것이 어리석은 짓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당장 하는 것부터 해결해야합니다. 룻이라는 사람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갈 때 나 따라오면 고생한다, 여기 있어라 교회 목사라는 사람들이 대부분 와라고 합니다. 내 설교 들으라고. 그게 목사입니다. 기본적인 인식. 그게 교만입니다. 우리 공회는 어렵습니다. 우리 공회는 못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게 말하자면은 나오미의 자세요 엘리야의 자세입니다. 나는 위치가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나오미는 돌아가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난을 피해서 가야합니다. 나는 다시 돌아가야겠다. 그런데 너까지 와야할 것 아닙니다. 그때 보통 듣기 좋은 말이 순종하고 있습니다. 우선 룻이 따라가는 것이 순종입니까 거역입니까. 시어머니가 오라고 했습니까 오지말라고 했습니까. 그런데 갔으니까 거역입니다. 룻은 제가 어머니 따라가는 것은 누구 결정이라고요 제 결정입니다. 제가 어머니를 따라가는 건데 제 인생을 제가 책임지는 건데 그 말은 어떤 경우도 각오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머니를 따라가는 게 가치있고 좋은 줄 알기 때문에 따라가는 겁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대할 때 그렇게 대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어디서 출발했다고요, 길갈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장소는 그때 역사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처음에 도착한 장소가 길갈입니다. 거기서 지명을 받아서 하나님은 그때 엘리야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길갈에서 부르시기를 발전된 겁니다. 지리적인 위치로는 순서적으로 맞지를 아니합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부르실 때 거기로 갔는데 나는 가야하는데 너는 여기 있어라.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다시 갑니다. 능력이 있는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여리고로 돌려놨습니다. 어디가야합니까. 베델로 가야합니다. 베델에서는 여리고로 가야겠습니다. 저 예루살렘에 그런 것이 아니고 여리고 신앙으로 나아가고 여리고 신앙까지 나아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따져보면 들어갈 수 없겠지만. 그때마다 엘리야는 말렸고 엘리사는 따라갔습니다. 엘리야, 앞서가는 엘리야의 엘리사에게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조금의 강요도 없었습니다. 하지 말라고. 엘리사는 자기가 깨닫고 원하고 원하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원하고 원함으로 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성에 된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자유 의지. 어릴 때 모를 때는 구역장에 의해서 갈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자유 의지로 가는 신앙이 되어야합니다. 전제 조건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뭐가 필요하다고요.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 의지. 어떤 말인지 아시죠. 다른 사람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친구 따라 어디 간다고요. 강남에 간다 그러는데 어느 강남이라고요, 서울 강남 아닙니다. 친구들 따라 움직이면 못난 사람입니다. 친구들이 다 가니까 가는 건 못난 사람입니다. 친구들이 가거나 말거나 내가 가야하는 곳에는 모든 사람이 다 가고 내가 가고 싶어도 내가 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제주도를 가면 좋겠지요. 그런데 제주도를 굳이 가야합니까. 유럽 여행, 해외 여행을 꼭 가야합니까. 모든 사람이 다 가니까 가야합니까. 내가 보고 듣고 판단해서 결정해서 주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주인입니다. 왜 남을 따라갑니까. 친구를 따라갑니까. 내가 친구를 데려가야지. 친구들 술집에 간다고 따라가고 따라가지 않습니다. 나는 교회 간다. 예배 드리러 가야한다. 다 가는데. 나는 믿는 사람의 교회입니다. 그 사람의 생명입니다. 남의 이목이라는 것은 봐야합니까 생각해야합니까. 내가 할 일을 못하고 할 길을 못하는 것이 못난 것입니다. 내가 가는 겁니다. 신앙 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마귀를 만드시는 것이니까 6천년 세월에 이렇게 역사하시는 이유가 이겁니다.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자유성입니다. 자유성이 죽으면 하나님 형상에 죽는 것입니다. 열심 충성 다 있어도 동기가 뭐냐 하나님을 알고 자의사에 의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 생활들이 말하자면 자기가 보고 듣고 내 신앙 생활대로 유익이 되더라.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를 위해 살지만 갈수록 힘듭니다. 자의사라는 것은 자기가 깨달아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환경을 끌고 나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장 전제적인 게 지식입니다. 지식없으면 자의사 못됩니다. 지식이 있는만큼 움직입니다. 말씀을 주일마다 밤예배 새벽마다 듣는 것입니다. 지식이 중요합니다. 옳은 지식이 중요한 것이죠. 비교 분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 많은 것들이 있었고 룻은 지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 관계로 간 게 아닙니다. 어떤 것을 보다가도 시어머니 따라서 하나님 구원을 따라간다 해서 따라간 겁니다. 신앙은 이게 신앙입니다. 자의사, 그게 지식으로 움직입니다. 지식은 필연적으로 평가를 하게 됩니다. 선택을 하는 거지요. 사람에 따라서 평가하고도 선택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발락이 이스라엘에게 사자를 보냈습니다. 보나마나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보내겠는데 이걸 계산하나마나 다 아는 겁니다. 알았으면은 지식입니다. 오면은 돌아가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속에는 가고 싶어서 환장하겠는데 하나님 생각하니까 안되겠다고 하는겁니다. 그러면 더 높은데로 가는겁니다. 결국은 그렇게 가고 싶으면 가야지. 가란 말입니까 가지 말란 말입니까. 나오미가 오지말라는 말을 하지만 속에 데려가고 싶겠지요.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락은 겉으로 받아들여서 순종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순종입니까. 그러다가 누가 살려줬습니까. 나귀가 살려주죠. 그게 연약한 인간입니다. 자유 의사가 있는데 자유의사는 누가 움직인다고요, 지식이 움직입니다. 바른 선택을 하는 겁니다. 그런 과정이 살아있으면 지식으로 가지는 겁니다.
유월절은 마지막 죽음입니다. 죽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주님은 죽으시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속의 마무리로 죽으심입니다. 주님의 대속이고 그 대속의 절정이 죽음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속은 사활의 대속입니다. 사는 죽음이고 활은 사는 건데 사는 주님이 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니께서 하신 것입니다. 애초부터 주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과정 과정 그 위에는 도성인신부터 사생활 공생활 십자가 죽으심 그 속에는 원하고 원함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심은 구원 역사로부터 원하고 원함으로 하시는 겁니다. 목적도 전부다 원하고 원함으로 하시는 겁니다. 사랑에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때도 룻과 같이 엘리사와 같이 원하고 원함으로 따라가야합니다. 깨닫고 난 다음에는 원하고 원함으로 합니다. 도마라는 사람은 기쁨으로 순교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노년에 의미를 몰랐습니다. 노년이라는 말은 그때 가봐야압니다. 겪어봐야 당해봐야 느끼는 게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귀양살이까지 갔습니다. 사도바울은 평생을 따라갔습니다. 수도 없이 맞고 죽을 뻔하고 기쁘고 그랬습니다. 홍포입은 부자 집 앞에 있던 나사로는 거지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원하고 원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억지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 십자가 지고 가는데 안 질수가 없습니다. 이왕 진거 기쁨으로 메고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름이 뭐였죠 시몬이라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 십자가를 억지고 지고 왔습니다. 신앙 생활은 그리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 걸어갈 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생활이 원하고 원함으로 해야합니다. 그게 바로 잘못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신앙 생활은 원하고 원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