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9일
김동민2023-04-09조회 380추천 51
2023년 4월 9일 주일 오후
찬송: 30장, 184장
본문: 요한복음 11장 25절 ~ 26절
감정을 이성으로 다스려야 감성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지 감정과 감성을 주신 것은 이성으로 살아가는데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이 피흘려 죽을 때까지 고난을 받았구나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두 번 다시 죄를 짓지 말아야겠구나 한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피가 무엇인데 생각해보면 꿈을 꾸니까 주님이 나타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피를 뚝뚝 흘리고 계신답니다. 그 피를 입으로 받아 마셨답니다. 피를 마셨지만 흡혈귀는 아니지만 끔찍하지 않습니까. 천주교는 성찬식 때 믿는 잔이 피가 되고 그것을 마시면 예수님 피같이 되고 살을 먹으면 예수님같이 된다고 합니다. 몸이 그렇게 되면 뭐 합니까. 그래도 죽을 것인데, 우리 몸은 예수님의 몸도 죽으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이치입니다. 구원의 도리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방도라고 합니다. 성경은 지도입니다. 천국 가는 지도. 약도라고 그럽니다. 그 약도는 세밀하게 살펴서 길을 찾는 것이지 길을 찾아서 가는 것이지요. 말씀 속에서 귀를 찾는 것이 목적입니다. 찬송가도 다 그런 것일테고, 가사 읽을 때마다 또 하나 말씀을 드려야하겠는데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이건 가사부터 감성이 들어있습니다. 그런 찬송은 하는 것을 조심해야합니다. 특히 한국 사람은 감성이 심하기 때문에 조심해야합니다. 이런 말을 만들어봤습니다. 무관하면 무관심하고 유관하면 유관심한다. 백 목사님은 만드신 단어를 찾아보면 사전에 보면 안 나오는 단어가 종종 있습니다. 무관심하면 무관심하고 유관심하면 유관심하다고 합니다. 나하고 상관없는 일은 관심도 없다는 것이고 나하고 관련된 일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파트를 재정비해야겠는데 머리에 아파트를 그리고 어디에 해야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길을 가는데 몇 사람이 지나가니 그 사람이 아파트랑 관련된 말을 하면 귀에 그 이야기가 들어갑니다. 학부모가 되면은 아이가 학부모에 대해서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반드시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진리죠. 죽으면 끝나지 아니하고 부활이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알아도 모르고 몰라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이 중요한 걸 압니다. 그런데 부활이라는 단어를 압니다. 안 믿는 사람의 사전에 부활을 치면 기독교에서 다시 되살아나는 거라고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이 뭐라고 되어있는지, 이 세상에 부활이라는 말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컴퓨터가 한글 타자를 치면 문법에 틀리고 문장에 틀리면 빨간 줄이 끄입니다. 세상 밖으로 라고 하면 빨간 줄이 끄입니다. 세상 밖이라는 것은 세상에는 없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가요? 믿는 사람은 세상이 전부 아닙니다. 이 세상 밖이 있습니다. 어떤 곳을 세상이라고 그럽니까. 지난 주 공부했습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을 세상이라고 합니다.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은 부활을 모르기 때문에 알아도 모르는 것이고 우리는 죽음을 압니다. 죽음 넘어 부활도 압니다. 부활을 믿고 있는데 모든 게 다 끝입니다. 종말. 끝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마지막이라는 뜻이고 마지막으로 하면 이 이상의 출발과 돌이킴과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말입니다. 개인의 종말, 우주의 종말. 믿는 사람이 그걸로 끝입니다. 데려가시니까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고모라를 위해 기도할 때 50명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10명까지 내려옵니다. 5명까지 내려오면 안되는가요. 그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아는 것이고 억지 쓰지 않고 떼쓰지 않는 것입니다. 열 명 까지는 하나님 앞에 기도드려도 되겠고 몇 명 전도 했으면 10명이 없겠나 아브라함 주변에는 일꾼만 해도 318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브라함 위해서 목숨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순복음교회 50만명이 조용기 목사님 계실 때 목숨 바칠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서부교회는 백 목사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은 318명, 적은 숫자 아니지요. 아브라함이 그랬기 때문에 복을 같이 받았는데 10명이 없겠나 하고 기도했는데 소돔 고모라에서는 롯은 의로웠습니다. 아마 9명만 됐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윗이 하나님 앞에 가서 살려달라고 기도하면 안됩니까. 성경에 죽은 사람 살린 게 많으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릴 수 있는데 그런 기도 하면 안되나요. 신하들이 이상해서 물었죠 살아있을 때는 그렇게 매달리고 죽었으면 더 슬퍼해야하고 아파해야하고 반 죽어버려야하는데 깨끗하게 씻고 음식 차려 먹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부활에 필연적으로 오는 것이고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이 있는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할 거 아닙니까. 그러면 부활에 대해서 마음이 길어지고 오전에 보니까 설교자는 무대 위에서는 배우 같은 면이 있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은 굉장히 수월합니다. 양성원에서 강의를 합니다. 굉장히 좋습니다. 주일 오전에 설교가 가장 어렵습니다. 어린 신앙이 많고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준비도 부족하고 듣는 귀도 없고 하니까 집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강단에서도 힘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의 자세가 부족해서 성령이 역사해서 은혜가 되게 만들어버립니다. 듣는 분들의 자세가 하나님께서 있게 하시는 것이고 다 모두 합해가지고 집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는 사이가 어두워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공부 때문에 게임이고 오락이고 이런 약 때문에 직장을 다니는 것 때문에 사업이 가리고 개인의 부활도 다 잊어버립니다. 현실에 피동되는 겁니다. 필연적인 일이기 때문에 생각하면서 말씀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 12장 3절입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나사로는 예수살렘에 있었고 예수님은 갈릴리에 계신 것이 아닌가 싶은데 예루살렘에서 5리 밖에 안 됐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시기를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을 위한 일이니까 있다가 가셨는데 4일이 지났습니다. 선생님이 계셨으면 오라비가 안 죽었을 겁니다. 라고 했는데 살겠다고 합니다. 마지막 부활 할 때 살겠다고 하니까 살아났습니다. 날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라고 그럴 때는 도성인신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도성인신이 무엇입니까. 말씀이 사람되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지요. 몇 년 사셨는가요, 33년 4개월 사셨는데 그렇게 사시면서 뭐했습니까. 예수님이 30년 동안 뭐 하셨는지 알아요? 직업이 뭘까요. 목수입니다. 30년 된 것이 목수였습니다. 강당 만든 집사님 1등 목수였는데 작년에 가셨습니다. 참 실력 있는 분인데, 예수님 직업이 목수입니다. 3년 4개월 공생활 하신 것입니다. 33년 4개월 사셨으니까 제가 산 생애의 반을 조금 더 사셨습니다. 여기 연세 많은 분 많이 계시는데 절반도 못사신거죠. 33년 4개월을 통해서 30년을 목수를 했습니다. 3년 4개월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생애에 사람이 오신 것과 대속의 생애와 부활까지 해서 모두 다 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오 할 때 합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라고 그럴 때는 도성인신, 사활의 대속 역사 다 포함해서 예수라고 그럽니다. 도성인신만 가지고는 부활이 안됩니다. 부활이 되셔야하고 예수님의 도성인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신데 우리를 대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이 그 부활도 내 부활이라고 합니다. 주님 부활은 우리 생명이고 출발입니다. 그래서 중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따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주님 부활하심으로 인해 나는 부활이오 하신 것입니다. 주님 부활이 근거돼고 해서 우리 중생이 있으므로 심신의 기능이 살아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영육이 다 살게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영육이 다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주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고 하셨고 독을 먹어도 상하지 않고 그런 말씀이 있는데 그렇다고 믿는 사람이 뱀에도 물려보고 독사에도 물려보면 죽어버립니다. 구약은 어릴 때라 그렇고 형식적인 시대입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모든 율법이 다 형식입니다. 껍데기라는 뜻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고급이고 그 껍데기 속에서 이치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독을 먹어도 해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 마귀의 독같은 것을 당해도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나사로도 살겠으니까 죽은 사람 살아나겠다 하면 다른 사람도 다 살아나야지, 나사로는 왜 죽었습니까 안 죽어야지. 죽어도 산다는 그 말이 고깃덩어리라는 것으로 죽었습니다. 그 아니면 무슨 뜻입니까. 우리 죽으면 삽니까 못 살아나지요. 그런데 주님은 살아난다고 합니다. 왜 나사로만 삽니까. 다른 사람 왜 못 삽니까. 그러면 주님이 죽는 게 있고 사는 게 있습니다. 죽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죽는 게 있을 거 아닙니까. 바울에게 죽는 게 있습니다. 내 제자가 되기 위해서 주님을 따라오려면 또 세상에서 유명한 말, 쉽게 말해서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라 성경에 있는 말이지요. 나에게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는 살 것이다.
부부 사이에 믿기 때문에 다 맡기는 겁니다. 결혼한 부부가 휴대폰 비밀번호 시작해서 모든 통장 비밀번호하고 열쇠를 모두 다 100퍼센트 부부가 하나로 통하는 부부가 우리 교회에도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차이가 나면 그럴 수 있습니다. 남편의 신앙을 하면 공유를 못합니다. 비밀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무조건 통하면 난리 날 수도 있습니다. 맞춰서 공유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맡기고 믿음은 의지합니다. 믿음은 바라봅니다.
믿는 것이 주일입니다. 믿기 때문에 믿지 않으면 주님이 따라갑니다. 몸에 병이 걸렸는데 환자가 당뇨에 걸렸습니다. 인슐린 먹어야하는데 귀찮아서 안 먹었습니다. 그러면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의사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환자에게 꼭 필요한 약은 먹이는 게 맞습니다. 내가 판단하는 것보다는 옛날 사람들은 내 병은 내가 잘 알아 하는데 아픕니다.
사람의 목숨은 몇 개입니까? 하나지요. 그 한 목숨이 몇 개가 만들어져있습니까. 목숨은 생명입니다. 그 하나 뿐인 생명이 몇 개의 생명으로 만들어져 있습니까. 평소에 말씀 많이 드렸지요. 사람 몸에 세포가 몇 개라고요, 많은 사람은 500조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 세포 하나 하나가 생명입니다. 그 세포가 살고 나고 죽고 합니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자는 마지막에 죽는 것이 좋고 현실을 살아가며 사람이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그 생명이 작은 생명들이 모여서 현실에 만날 때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그랬는데 그게 고깃덩어리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오늘도 같은 원리입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살아있는 사람에게 크게 역사해서 살아가지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심신의 기능이 죽지 않고 부활할 때 고스란히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부활이 됩니다. 주님을 믿는 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기 때문에 맡기고 순전하고 건설구원입니다. 겉이 죽어도 믿고 맡기면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주님 이름으로 믿는 요소는 믿음으로 하는 생활도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 분들은 붙들면 좋겠고 안 되는 분들은 생각해보시고 관심이 없으면 됩니다. 무관하면 무관심하고 유관하면 유관심하게 되어있습니다. 곧 닥칠 일입니다. 부활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찬송: 30장, 184장
본문: 요한복음 11장 25절 ~ 26절
감정을 이성으로 다스려야 감성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지 감정과 감성을 주신 것은 이성으로 살아가는데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이 피흘려 죽을 때까지 고난을 받았구나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두 번 다시 죄를 짓지 말아야겠구나 한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피가 무엇인데 생각해보면 꿈을 꾸니까 주님이 나타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피를 뚝뚝 흘리고 계신답니다. 그 피를 입으로 받아 마셨답니다. 피를 마셨지만 흡혈귀는 아니지만 끔찍하지 않습니까. 천주교는 성찬식 때 믿는 잔이 피가 되고 그것을 마시면 예수님 피같이 되고 살을 먹으면 예수님같이 된다고 합니다. 몸이 그렇게 되면 뭐 합니까. 그래도 죽을 것인데, 우리 몸은 예수님의 몸도 죽으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이치입니다. 구원의 도리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방도라고 합니다. 성경은 지도입니다. 천국 가는 지도. 약도라고 그럽니다. 그 약도는 세밀하게 살펴서 길을 찾는 것이지 길을 찾아서 가는 것이지요. 말씀 속에서 귀를 찾는 것이 목적입니다. 찬송가도 다 그런 것일테고, 가사 읽을 때마다 또 하나 말씀을 드려야하겠는데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이건 가사부터 감성이 들어있습니다. 그런 찬송은 하는 것을 조심해야합니다. 특히 한국 사람은 감성이 심하기 때문에 조심해야합니다. 이런 말을 만들어봤습니다. 무관하면 무관심하고 유관하면 유관심한다. 백 목사님은 만드신 단어를 찾아보면 사전에 보면 안 나오는 단어가 종종 있습니다. 무관심하면 무관심하고 유관심하면 유관심하다고 합니다. 나하고 상관없는 일은 관심도 없다는 것이고 나하고 관련된 일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파트를 재정비해야겠는데 머리에 아파트를 그리고 어디에 해야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길을 가는데 몇 사람이 지나가니 그 사람이 아파트랑 관련된 말을 하면 귀에 그 이야기가 들어갑니다. 학부모가 되면은 아이가 학부모에 대해서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반드시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진리죠. 죽으면 끝나지 아니하고 부활이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알아도 모르고 몰라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이 중요한 걸 압니다. 그런데 부활이라는 단어를 압니다. 안 믿는 사람의 사전에 부활을 치면 기독교에서 다시 되살아나는 거라고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이 뭐라고 되어있는지, 이 세상에 부활이라는 말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컴퓨터가 한글 타자를 치면 문법에 틀리고 문장에 틀리면 빨간 줄이 끄입니다. 세상 밖으로 라고 하면 빨간 줄이 끄입니다. 세상 밖이라는 것은 세상에는 없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가요? 믿는 사람은 세상이 전부 아닙니다. 이 세상 밖이 있습니다. 어떤 곳을 세상이라고 그럽니까. 지난 주 공부했습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을 세상이라고 합니다.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은 부활을 모르기 때문에 알아도 모르는 것이고 우리는 죽음을 압니다. 죽음 넘어 부활도 압니다. 부활을 믿고 있는데 모든 게 다 끝입니다. 종말. 끝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마지막이라는 뜻이고 마지막으로 하면 이 이상의 출발과 돌이킴과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말입니다. 개인의 종말, 우주의 종말. 믿는 사람이 그걸로 끝입니다. 데려가시니까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고모라를 위해 기도할 때 50명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10명까지 내려옵니다. 5명까지 내려오면 안되는가요. 그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아는 것이고 억지 쓰지 않고 떼쓰지 않는 것입니다. 열 명 까지는 하나님 앞에 기도드려도 되겠고 몇 명 전도 했으면 10명이 없겠나 아브라함 주변에는 일꾼만 해도 318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브라함 위해서 목숨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순복음교회 50만명이 조용기 목사님 계실 때 목숨 바칠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서부교회는 백 목사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은 318명, 적은 숫자 아니지요. 아브라함이 그랬기 때문에 복을 같이 받았는데 10명이 없겠나 하고 기도했는데 소돔 고모라에서는 롯은 의로웠습니다. 아마 9명만 됐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윗이 하나님 앞에 가서 살려달라고 기도하면 안됩니까. 성경에 죽은 사람 살린 게 많으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릴 수 있는데 그런 기도 하면 안되나요. 신하들이 이상해서 물었죠 살아있을 때는 그렇게 매달리고 죽었으면 더 슬퍼해야하고 아파해야하고 반 죽어버려야하는데 깨끗하게 씻고 음식 차려 먹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부활에 필연적으로 오는 것이고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이 있는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할 거 아닙니까. 그러면 부활에 대해서 마음이 길어지고 오전에 보니까 설교자는 무대 위에서는 배우 같은 면이 있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은 굉장히 수월합니다. 양성원에서 강의를 합니다. 굉장히 좋습니다. 주일 오전에 설교가 가장 어렵습니다. 어린 신앙이 많고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준비도 부족하고 듣는 귀도 없고 하니까 집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강단에서도 힘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의 자세가 부족해서 성령이 역사해서 은혜가 되게 만들어버립니다. 듣는 분들의 자세가 하나님께서 있게 하시는 것이고 다 모두 합해가지고 집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는 사이가 어두워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공부 때문에 게임이고 오락이고 이런 약 때문에 직장을 다니는 것 때문에 사업이 가리고 개인의 부활도 다 잊어버립니다. 현실에 피동되는 겁니다. 필연적인 일이기 때문에 생각하면서 말씀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니, 12장 3절입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나사로는 예수살렘에 있었고 예수님은 갈릴리에 계신 것이 아닌가 싶은데 예루살렘에서 5리 밖에 안 됐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시기를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을 위한 일이니까 있다가 가셨는데 4일이 지났습니다. 선생님이 계셨으면 오라비가 안 죽었을 겁니다. 라고 했는데 살겠다고 합니다. 마지막 부활 할 때 살겠다고 하니까 살아났습니다. 날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라고 그럴 때는 도성인신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도성인신이 무엇입니까. 말씀이 사람되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지요. 몇 년 사셨는가요, 33년 4개월 사셨는데 그렇게 사시면서 뭐했습니까. 예수님이 30년 동안 뭐 하셨는지 알아요? 직업이 뭘까요. 목수입니다. 30년 된 것이 목수였습니다. 강당 만든 집사님 1등 목수였는데 작년에 가셨습니다. 참 실력 있는 분인데, 예수님 직업이 목수입니다. 3년 4개월 공생활 하신 것입니다. 33년 4개월 사셨으니까 제가 산 생애의 반을 조금 더 사셨습니다. 여기 연세 많은 분 많이 계시는데 절반도 못사신거죠. 33년 4개월을 통해서 30년을 목수를 했습니다. 3년 4개월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생애에 사람이 오신 것과 대속의 생애와 부활까지 해서 모두 다 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오 할 때 합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라고 그럴 때는 도성인신, 사활의 대속 역사 다 포함해서 예수라고 그럽니다. 도성인신만 가지고는 부활이 안됩니다. 부활이 되셔야하고 예수님의 도성인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신데 우리를 대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이 그 부활도 내 부활이라고 합니다. 주님 부활은 우리 생명이고 출발입니다. 그래서 중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따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주님 부활하심으로 인해 나는 부활이오 하신 것입니다. 주님 부활이 근거돼고 해서 우리 중생이 있으므로 심신의 기능이 살아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영육이 다 살게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영육이 다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주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고 하셨고 독을 먹어도 상하지 않고 그런 말씀이 있는데 그렇다고 믿는 사람이 뱀에도 물려보고 독사에도 물려보면 죽어버립니다. 구약은 어릴 때라 그렇고 형식적인 시대입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모든 율법이 다 형식입니다. 껍데기라는 뜻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고급이고 그 껍데기 속에서 이치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독을 먹어도 해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 마귀의 독같은 것을 당해도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나사로도 살겠으니까 죽은 사람 살아나겠다 하면 다른 사람도 다 살아나야지, 나사로는 왜 죽었습니까 안 죽어야지. 죽어도 산다는 그 말이 고깃덩어리라는 것으로 죽었습니다. 그 아니면 무슨 뜻입니까. 우리 죽으면 삽니까 못 살아나지요. 그런데 주님은 살아난다고 합니다. 왜 나사로만 삽니까. 다른 사람 왜 못 삽니까. 그러면 주님이 죽는 게 있고 사는 게 있습니다. 죽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죽는 게 있을 거 아닙니까. 바울에게 죽는 게 있습니다. 내 제자가 되기 위해서 주님을 따라오려면 또 세상에서 유명한 말, 쉽게 말해서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라 성경에 있는 말이지요. 나에게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는 살 것이다.
부부 사이에 믿기 때문에 다 맡기는 겁니다. 결혼한 부부가 휴대폰 비밀번호 시작해서 모든 통장 비밀번호하고 열쇠를 모두 다 100퍼센트 부부가 하나로 통하는 부부가 우리 교회에도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차이가 나면 그럴 수 있습니다. 남편의 신앙을 하면 공유를 못합니다. 비밀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무조건 통하면 난리 날 수도 있습니다. 맞춰서 공유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맡기고 믿음은 의지합니다. 믿음은 바라봅니다.
믿는 것이 주일입니다. 믿기 때문에 믿지 않으면 주님이 따라갑니다. 몸에 병이 걸렸는데 환자가 당뇨에 걸렸습니다. 인슐린 먹어야하는데 귀찮아서 안 먹었습니다. 그러면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의사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환자에게 꼭 필요한 약은 먹이는 게 맞습니다. 내가 판단하는 것보다는 옛날 사람들은 내 병은 내가 잘 알아 하는데 아픕니다.
사람의 목숨은 몇 개입니까? 하나지요. 그 한 목숨이 몇 개가 만들어져있습니까. 목숨은 생명입니다. 그 하나 뿐인 생명이 몇 개의 생명으로 만들어져 있습니까. 평소에 말씀 많이 드렸지요. 사람 몸에 세포가 몇 개라고요, 많은 사람은 500조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 세포 하나 하나가 생명입니다. 그 세포가 살고 나고 죽고 합니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자는 마지막에 죽는 것이 좋고 현실을 살아가며 사람이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그 생명이 작은 생명들이 모여서 현실에 만날 때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그랬는데 그게 고깃덩어리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오늘도 같은 원리입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살아있는 사람에게 크게 역사해서 살아가지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심신의 기능이 죽지 않고 부활할 때 고스란히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부활이 됩니다. 주님을 믿는 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기 때문에 맡기고 순전하고 건설구원입니다. 겉이 죽어도 믿고 맡기면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주님 이름으로 믿는 요소는 믿음으로 하는 생활도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 분들은 붙들면 좋겠고 안 되는 분들은 생각해보시고 관심이 없으면 됩니다. 무관하면 무관심하고 유관하면 유관심하게 되어있습니다. 곧 닥칠 일입니다. 부활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